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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은 한반도 특색이 집약된 도시였다

    “역사적으로 평양은 어떤 존재인가.”고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한반도의 주요 도시로 있는 평양의 의미를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한국사연구회(회장 노태돈)의 올해 학술대회를 통해서다.9일 서울대 인문대 교수회의실에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역사도시 평양’을 주제로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평양의 위상을 조명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평양의 위상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5개 시대로 나눠 분석해 흥미를 끌고 있다. 우선 서울교대 임기환 교수는 ‘고구려 평양 도성의 구성과 성격’을 요약했다.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 시절 중앙정치의 구심점이 바뀌고, 문화적 양태도 요동·중원지역적 요소와 고구려적 요소가 결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임 교수의 분석이다. 김창현 성신여대 연구교수는 ‘고려 서경의 행정체계와 도시구조’를 분석한 결과, 서경이 개경에 뒤지지 않았으며 동경(경주)과 남경(한양)을 초월하는 위상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오수창 한림대 교수는 ‘조선후기 평양의 문화적 특성’을 고찰한다. 오 교수는 평양이 서울을 제외하면 청구야담 등 조선 후기의 야담(野談)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도시였다고 제시했다. 평양이 등장하는 이야기 주제는 주로 재물과 치부, 연애·유흥에 집중됐다. ‘근대 평양의 도시 형성과 상공업 발달’을 발표하는 오미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은 “근대기 평양지역 공업은 일본 독점자본과 조선인 중소공업이 주도했다.”고 지적했다. 조선인 공업은 양말·정미·주류 등의 업종에 집중돼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동직조합이나 생산조합 등의 경제단체가 생겨났다는 것. 이어 이신철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사회주의 조선의 심장 평양, 동아시아 도시로의 변화 가능성’을 발표한다.이 교수는 “광복 직후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민주수도’로 계획된 평양이 한국전쟁 뒤 전후 복구 과정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받게 됨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 이념을 실험하는 계획도시로 변모했다.”고 말했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마음을 열어준 세상에 평생모은 재산드려요”

    “지난날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지만 그 대가로 받은 돈만큼은 의미 있는 곳에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평생 모은 재산 40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놨다. 주인공은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홀로 생활하는 황금자(82) 할머니. 1924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3,14세 때 길을 가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함경남도 흥남의 유리공장으로 끌려갔다.3년 뒤 다시 간도지방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한 그는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서도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가정을 꾸릴 생각도 못했다. 외로움을 달래려 길에서 떠도는 아이를 데려와 양녀로 삼았지만 10세 때 죽는 바람에 다시 혼자가 됐다.위안부로 지낸 고통의 세월 때문에 밤마다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저리 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 등 10년 넘게 환청과 망상에 시달려 왔으며 길을 지나는 고등학생을 일본군으로 착각하는 때도 많았다. 인근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며 학교를 찾아가 항의하는 일이 많았고 날마다 동사무소에 들러 “평생 모은 돈을 관 속에 넣어 가겠다.”며 원망과 불만을 토로했다.그런 황 할머니가 안정을 되찾고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증할 결심을 하게 된 데는 2003년 당시 등촌3동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던 김정환 사회복지사의 힘이 컸다. 김씨는 매일 동사무소를 찾아와 소리치는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을 하나도 빠짐 없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들어줬다.올 1월 김씨가 다른 동사무소로 발령난 후 할머니는 건강이 악화돼 자리에 눕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 온 김씨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으면서 할머니는 김씨 뜻에 따르기로 하고 매월 74만원씩 지급되는 일본군 위안부 생활안정지원금과 국민기초수급자 생계비(월 36만원)를 아껴 평생 모은 4000만원을 재단법인 강서구장학회에 기증하기로 했다. 강서구는 황 할머니의 뜻을 기릴 수 있도록 ‘황금자 여사 장학금´(가칭)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장학금 기탁식은 29일 오후 강서구청 대회의실에서 열린다.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길섶에서] 종소리/함혜리 논설위원

    비가 내린다. 점심식사 약속 장소인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빗길을 스치는 자동차의 소음 너머로 종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서울시가 지난 21일부터 매일 낮 12시에 12번씩 보신각종을 친다고 하더니 이 소리가 바로 그 소리인 게다. 문득 파리가 생각났다. 센 강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노트르담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엔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은 영혼을 위로하듯 더욱 포근하게 들렸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는 서울.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맥놀이가 길고 소리가 은은한 보신각종을 새로 만들어 서울시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원광식(중요무형문화재 112호)씨 등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현재의 보신각종은 1985년 광복 40주년을 맞아 국민특별성금으로 만든 것이다. 맥놀이가 짧다고, 여운이 덜하다고 바꿔 버리기엔 그 의미가 너무나 소중하고 값지다. 문화재청장이 선심쓰듯 새로 만들어 교체할 사안은 분명 아니거늘.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변경에서 바라본 근대/모리스-스즈키 지음

    ‘뉴라이트’가 제기한 ‘근대문명론’은 한계가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단적인 예다.‘8억 인민을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낸 덩샤오핑’(10월23일자 동아일보 이영훈 서울대 교수 칼럼)이라는데, 그렇다면 덩샤오핑이 직접 지시했다는 티베트 통합정책 ‘서남공정’과 그에 이은 동북공정은 근대문명화 과정인가.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교수의 ‘변경에서 바라본 근대’(산처럼 펴냄)는 이 근대문명론을 비판하는 탈근대론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의 분석 대상은 사할린·쿠릴 열도 등 환오호츠크해 지역의 아이누족을 비롯한 윌타·니브히·울치·코랴크·이텔멘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던 이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17∼18세기 후발산업화를 통해 근대민족국가를 추구하면서 비극으로 떨어졌다. 1·2장은 일본·러시아가 상업제국주의로 이들을 침탈하는 과정을,3장은 ‘민족지학’이라는 근대학문의 이름으로 이들을 열등하다고 깎아내리는 과정을 담았다.4장은 20세기 우익 일본과 좌익 소련의 동질성을, 그리고 5·6장은 소수민족의 기억이 식민지화되는 과정과 ‘시민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룬다. 특히 ‘만세일계 천황’을 내세운 우익 일본과 ‘사회주의 이념으로 통일된 다민족국가’을 내세운 좌익 소련 모두 소수민족들에게는 정작 별 차이가 없었다고 분석하는 4장 ‘국민, 근대, 선주민족’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형식은 좌·우익으로 다르지만, 내용은 ‘근대에 대한 욕망’으로 동일했다는 탈근대론의 주장이 뚜렷이 드러난다. 서구 ‘지역학’에 맞서 ‘반(反)지역학’을 제안하는 보론은 그 위에 서 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한류’ 때문에 동남아 등을 연구하는 지역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우리에게도 나오고 있어서다. 식민지라는 상처를 안은 우리의 지역학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역학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또 호주에 사는 저자는 환오호츠크해 지역 소수민족 분석을 통해 호주 원주민 에버리진과 요릉우를 떠올린다. 그러면 민족적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던 우리는? 광복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폭력적 배제가 아닐까. 근대 문명과의 성공적인 융합을 자축하는 것보다 이런 야만을 반성하는 게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2만 2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주말탐방] 대전역 어제와 오늘

    [주말탐방] 대전역 어제와 오늘

    KTX가 104편 운행되고, 역 이용객만 주말 5만명. 역사내 회의실이 생기고, 새달 철도빌딩을 신축하며 철도 메카 위용을 뽐내지만 때론 아이들의 놀이터… 때론 노인들의 휴식처… 때론 학생들이 시위하던 광장, 그 희미한 옛추억의 블루스가 그립다. ‘역’은 ‘이별’을 연상케 한다. 만남과 새로운 출발의 의미도 있지만 대중가요에 실린 기차역은 아쉬움의 상징으로 표현돼 있다. 3남지방의 관문이었던 대전역.1959년 발표된 ‘대전부르스’의 무대이면서 전국에서 가장 넓은 광장(3500평)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전설(?)이 돼 버렸다. 정치와 시위·집회로 들끓었던 광장은 국내 최초의 대중교통 환승시설로 탈바꿈했다. 대전부르스는 기념비만으로 그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고속열차 개통과 전국 곳곳에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서는 시대의 변화속에 교통의 중심지인 대전역을 뒷배경으로 위풍을 자랑하던 중앙시장도 그 위세가 크게 꺾였다.1905년 역사 신축 이후 100년 가까이 모습을 지켜 오던 대전역사는 2004년 지상 4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단장하면서 과거와 완전 단절됐다. ●민족의 아픔 간직한 대전역 대전역과 사라진 광장은 일제시대 수탈 물자의 집산지, 광복 뒤에는 교통의 요충지, 6·25전쟁 당시는 피란민들의 이별 현장이라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만큼 넓은 장소가 없다 보니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당 후보의 옥외연설회가 금지되기 전까지는 각종 정치행사장으로 유명세를 탔다.80년대에는 대학생과 노동계의 시위장소가 됐고 낮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저녁에는 노인들의 휴식처로도 애용됐다. “잘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되는 불멸의 히트곡 ‘대전부르스’의 배경인 대전발 0시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는 호남선도 대전역을 거쳐 서대전역으로 향했지만 회덕 분기점이 생기면서 필요성이 없어졌다.0시 50분 열차는 1960년 03시 05분 열차로 변경됐지만 수명은 오래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오전 6시 20분 대전역을 출발하는 무궁화호가 목포행 완행열차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소재가 된 새벽녘 역에서의 남녀간 이별은 이젠 영화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추억이 됐다. 대전역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앙시장이다.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부상한 대전역 주변 중앙시장은 삼남지역에 생활물자를 공급하는 도매상 역할을 했다. 전국에서 상인과 손님이 몰리면서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과 견줄 만큼 위세를 날렸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오전 6시30분부터 9시까지는 남쪽 택시 진입로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에서 보따리를 이고 모여든 노점상들이 좌판을 벌여 과거 화려했던 상권의 현장을 기억하게 만든다. 광장을 가득 메웠던 비둘기도 대부분 사라졌다. 옛 정취라야 홍합과 어묵, 가락국수 등을 파는 역 광장 입구의 포장마차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역을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 정도다. 대전역의 명물 가락국수의 정취도 많이 달라졌다. 열차 정차시간이 짧아지면서 극적인 ‘국수넘기기’가 불가능해졌고 인스턴트화되고 먹을거리가 다양해지면서 국수를 찾는 이들도 중장년층이 주고객이다. 역 구내에 다양한 편의시설이 생기고 교통시설이 역에 가까워지면서 역 주변 상권도 크게 위축됐다.30여년간 역전에서 가게를 열고 있는 낙원다방 여주인은 “열차를 기다리거나 친구를 만나기 위한 손님이 북적거리던 때가 눈에 선하다.”면서 “요즘은 예약이 활성화되고 역 안에 커피숍 등이 생기면서 역 손님보다는 단골 손님들만 자리를 채우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철도의 허브…현대화의 고통도 대전역은 KTX 104편 등 하루 평균 260여대의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10개의 선로 중 2개만 화물선로이고 나머지 8개는 여객열차가 운행된다. 역 이용객은 평일 3만 5000명, 주말에는 5만명에 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전역 지하 동서관통도로가 개통되고 택시와 자가용 진입로가 들어서면서 대전역 광장은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과거 시내방향인 동쪽에서만 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 양쪽이 모두 오픈됐다. 대전역에서는 다양한 경험이 가능하다. 대전 사람조차 호남선은 서대전역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지만 대전역에서도 하루 2차례 호남선이 시발·종착한다. 오전 6시20분 목포행과 오후 4시40분 광주행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하고 오후 4시5분, 오전 5시45분 각각 도착한다. 바쁜 현대인을 위해 역사내 회의실을 빌려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국토의 중심, 교통의 요충지로서 장점을 한껏 살린 사업으로 회의에 필요한 이동거리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올들어 11월 현재 1억 6600만원의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다. 대전역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될 듯하다.2010년 경부고속철도가 완전 개통돼 열차수 증가가 예상되고 특히 다음달 철도빌딩 신축을 계기로 역세권 개발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철도의 축인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의 동거는 대전을 명실공히 철도의 메카가 되는 것이고 대전역은 그 관문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장흥진(54) 대전역장은 “대전역의 중요성을 감안해 현재 1만 1417㎡인 역사를 2010년까지 1만 4264㎡로 증축할 계획”이라며 “이용객 편의를 위한 편의 확대뿐 아니라 소규모 공원과 공연장 등도 조성될 예정이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대전역의 개발은 현대화의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 시설이 좋아지면서 노숙자가 크게 증가했다.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오전 3∼5시까지만 역을 폐쇄하다 보니 노숙자 관리의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겨울철이 되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대전역이 동서로 오픈되면서 역이 시민들의 이동 통로가 됐다. 당연한 서비스로 생각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대합실이 만남의 장소로, 대화의 장으로 돌변하다 보니 간혹 열차 이용객들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 노점상 문제는 위험수위에 달하고 있다. 도로가에 노점이 펼쳐지다 보니 사고 위험이 상존하는데다 주변 시장 상인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구청에서는 관할권이 철도공사에 있다며 단속을 미루고 있지만 백발이 성성한, 하루 몇천원을 벌겠다며 집을 나선 이들을 대책없이 무작정 쫓아낼 수만도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장 역장은 “아무리 현대화되고 첨단화되더라도 역의 애환과 정취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가락국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열차 정차시간이 대부분 2분이어서 후다닥 내려 가락국수를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요.” 대전역 하행선 매점에서 16년째 국수를 판매하는 박선자(53·여)씨는 운행중인 열차에 탑승한 승객은 대전역에서 가락국수를 먹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야박하게도 경고했다. 대전역과 연상되는 것 중 대표적인 하나가 ‘가락국수’다. 특히 요즘 같이 찬바람이 휘몰아칠 때면 모락모락 따사로운 김이 올라오고, 새빨간 고춧가루가 면발 위에 내려앉은 가락국수는 생각만으로도 군침을 돌게 한다. 그래서 ‘삼순이’마저 가락국수를 먹으러 대전역을 찾았다. 완행열차가 사라지고 최고급 열차가 새마을호에서 KTX로 바뀌었듯 대전역 가락국수의 역사도 변화됐다. 봉지면에 양념, 육수까지 인스턴트화되면서 이론적으론 전국 역내 매점의 국수맛은 동일해졌다. 가락국수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우동으로 통일됐다. 유부·튀김 등 삽입 재료에 따라 이름만 다르다. 대전역에는 상·하행선에 각각 1곳씩 우동집이 영업중이다. “여기 유명한 가락국수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상행선 우동집 주인마저 박씨집을 추천한다. 4평 남짓한 작달막한 박씨의 가게안은 의자가 4개뿐이지만 앉고, 선 사람들이 우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연신 ‘호호’ 불어내느라 밖에서 보면 새벽 안개 낀 들판처럼 희뿌연하다.3000원의 행복가치는 충분하다. 손님도 변했다. 통일호와 무궁화호, 새마을호가 운행될 적엔 열차 탑승객이 주 고객이었다. 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뛰어내리는 손님이 많아 항상 ‘5분’대기조였지만 지금은 열차를 기다리는 손님이 고객이다. 박씨는 “같은 반죽이라도 끊이는 시간이나 불꽃크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면서 “옛날처럼 퉁퉁 부은 면은 없지만 국물맛을 잊지 못해 손님이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을철 주말에는 하루에 700여그릇을 팔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150∼200그릇이 최고지만 그래도 매출은 KTX 개통 이후 나아지고 있다. 가락국수 손님은 뜨내기가 없다고 했다. 먹어본 고객이 잊지 않고 다시 찾는다. 며칠, 몇달, 몇년 만에 방문한 고객이라도 기억나는 얼굴이 수백명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녀만의 영업 노하우. 플랫폼 영업은 초단위로 움직이기에 계산기나 영수증 사용이 불가능하다. 고객이 1만원이나 5000원을 낼 것을 대비해 항상 잔돈을 준비해 놔야 한다. 대전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총무처출신 첫 행자수장

    중앙과 지방의 행정경험을 두루 쌓은 정통 행정관료. 총무처 출신으론 첫 행자부 장관에 올랐다. 행시 16회 수석을 차지하는 등 두뇌회전이 빠르고 달변이다. 고교시절 소설가를 지망했을 정도로 문필력도 뛰어나고 친화력도 겸비.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북지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보은인사 논란도 제기되지만 행정자치부나 중앙인사위원회 안팎에선 전문성을 고려한 인사라는 평가도 많다. 부인 장광복(51)씨와 2남1녀. ▲경북 영일(59) ▲중동고, 연세대 행정학과 ▲총무처·내무부장관 비서실장 ▲총무처 공보관 ▲청와대 행정비서관 ▲경북도 행정부지사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상임위원 겸 사무처장 ▲행자부 기획관리실장 ▲중앙공무원교육원장
  • 靑 외교안보실장 백종천씨 유력

    송민순 청와대 외교안보실장 후임에 백종천(63) 세종연구소 소장이 유력한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김만복 국정원장 체제가 이날 출범함에 따라 1·2·3차장에는 각각 이수혁 주 독일대사와 한진호 서울경찰청장, 서훈 국정원 실장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안광복 기획조정실장은 유임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다음주 중 이런 외교안보라인 후속 인사 내용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송민순 실장에 대한 국회의 외교통상부 장관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이 늦어지고 있어 후속인사가 다소 늦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백종천 소장은 목포고·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한 보기 드문 군 출신 국방 전문학자다. 안보실장 자리를 학자 출신이 맡게 되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차관급)에는 외교부의 윤병세 차관보가 유력시된다. 서주석 청와대 안보수석은 당초 문민 국방 차관 기용 대상으로 거론됐으나, 군 내부의 반발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서 수석은 세종연구소 소장 자리로 자리를 옮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국방 차관에는 김장수 장관이 군 출신이란 점에서,‘문민 국방차관’을 임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재정경제부 출신의 김영룡 혁신기획본부장이 거론되고 있다. 외교부의 제1·2차관에는 김성환(외시 10기) 오스트리아 대사와 추규호(9기) 대변인이 각각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선진(9기) 주 인도네시아 대사는 차관급인 외교안보연구원장에, 조중표(8기) 외교안보연구원장은 주 러시아 대사에, 석동연(10기) 재외동포영사국장은 기획관리실장에 각각 거론되고 있다. 추 대변인 후임에는 문태영(12기) 주 파나마 대사가 유력시된다.박홍기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애국지사 장주호 선생 별세

    일제 강점기 항일 학생운동을 펼친 애국지사 장주호(張柱虎) 선생이 23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79세. 1927년 경북 의성 태생인 선생은 안동 농림학교 재학시절인 1943년 8월 학우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회복연구단에 가입,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대한독립회복연구단은 1945년 3월10일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하고 거사를 준비하다 계획이 사전에 노출되는 바람에 선생을 비롯한 단원 전원이 일제에 체포됐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15일 광복을 계기로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9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유족은 부인 김태분 여사와 2남2녀. 빈소는 대구 가야기독병원 영안실(053-627-3699 또는 011-827-8643)이며 발인은 25일 오전 7시, 장지는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유리창에 비춰보는 유리역사

    도시의 높은 건물마다 햇살받은 유리창들이 반짝 반짝 빛을 발합니다. 오늘은 ‘유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우리나라에 ‘유리’ 공장이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1902년에 완성된 ‘국립유리제조소’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당시만해도 순수한 우리 기술로는 병유리조차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기술자의 협조를 받아 병유리를 생산했다고 하네요. 그 뒤 흔히 말하는 한일합병이후 우리 서울의 서대문에 ‘경성초자제조소’가 들어섰고, 이 공장에선 병유리와 함께 램프를 생산했습니다.1938년까지 모두 24개의 유리 제조공장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근대적인 시설의 유리공장이 세워진 것은 1939년입니다. 영등포에 세워진 ‘동양 유리 공업 주식회사’였는데, 이 공장에선 주로 맥주병이 생산됐습니다. 그렇다면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유리공장이 세워진 건 언제쯤이었을까요. 약 50년전인 1957년입니다. 당시 인천에서 문을 연 ‘인천 판유리 공장’은 우리나라 판유리 산업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어린 시절, 서울의 변두리에서 시뻘건 용광로에다가 유리물을 펄펄 끓여가면서 긴 대롱 끝으로 끓는 유리 물을 찍어 한쪽 끝 대롱을 입에 물고 힘을 잔뜩 줘가면서 ‘푸우우우∼’ 바람을 불어 넣으면, 저쪽 대롱 끝에서 유리병 모양이 만들어지던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식의 유리공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더라구요. 지난 세월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유리 제조에 관심이 높아지게 된 것은 석유램프를 사용하면서 바람불 때 램프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유리로 만든 등피를 사용했었잖아요. 그때부터 가내 수공업 형태의 석유램프 등피공장이 여기저기 들어섰습니다. 지금은 그 어떤 건물이든 하늘만큼 높은 건물도 그렇고, 나지막한 건물도 그렇고, 전부다 유리창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건물을 지을 때, 지금과 같은 ‘창유리’가 처음 등장한 게 언제쯤부터였는지 아시는지요.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인 1873년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의 종로에 있던 ‘일본 공사관’건물이 유리창을 끼운 최초의 건물이었던 겁니다. 그 뒤로 서울역 뒤쪽에 세워진 ‘약현성당’ 그리고 서울에서 가장 밝은 동네 ‘명동성당’에도 유리창이 선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반짝 반짝 눈부신 유리창은 사람들의 눈을 왕방울만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 [기고] 순국선열들이 있었으매/박유철 국가보훈처장

    “나라를 빼앗겼을 때 그 나라를 찾고자 목숨을 바치고 풍찬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을 잡아 죽이고 곤죽을 만듦으로써 영달과 편안함을 취하고 있었다면 선열들은 무엇 때문에 나라를 찾고자 애썼고 목숨을 바쳤던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이 쓴 ‘거룩한 응달’의 일부다. 오늘은 예순일곱 돌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이다. 소크라테스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일 것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일제에 항거하다 희생된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고자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 모태다.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맞게 되자 조국 광복을 위해 방법은 각기 달랐으나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은 오직 하나로 수많은 선열들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미얀마 인도 등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장기간 지속되었다.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3·1운동 임정활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외교투쟁 등의 항일 독립운동이 광복을 맞기까지 50여년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선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일본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에 맞서 국내외에서 희생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열들의 순국정신은 시대를 초월한 역사 발전의 동인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참다운 시대정신이다.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신 선열들의 살신성인의 정신,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이기심을 버리는 멸사봉공의 정신, 이런 정의의 정신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우리가 반드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삶의 지표다. 100년 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가 이제 차기 유엔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었으니 세계 외교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순국선열들의 값진 희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은 세계 속에 빛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극단적인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정의의 정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더불어 세대와 계층, 지역간의 벽을 넘어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선진한국 건설의 기반을 튼튼히 조성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보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보훈은 만년지대계(萬年之大計)라 했다. 정부는 국민이 공감하는 미래지향적 보훈체계 확립과 수준 높은 의료·복지체계 구축, 국민과 함께하는 나라사랑 정신의 확산 등 한 차원 높은 보훈정책을 펼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 수난과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국선열의 날에 우리는 오늘의 사표가 되는 애국선열들의 순국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한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HAPPY KOREA] 경남·울산 마을 주민활동 탐방

    [HAPPY KOREA] 경남·울산 마을 주민활동 탐방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격언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지역개발사업에서는 흔히 협력보다는 갈등이 번지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주민들은 행정기관이나 외부단체와 협력을 우려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행정기관과 외부단체는 주민들의 우려를 ‘고집불통’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협력으로 상생의 원리를 배워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경남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 밀양연극촌, 울산 울주군 서생면 화산리 맑은내배꽃마을,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사이버타운 등을 찾아 협력의 중요성을 되짚어봤다. 1. 밀양 연극촌 경쟁력 ‘쑥쑥’ 밀양 연극촌은 연극을 테마로 한 ‘국내 유일’의 마을이다. 월산초교가 폐교된 직후인 1999년 밀양시는 연극단체인 연희단거리패에 5000평의 학교 부지와 건물을 무상임대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여기에 공연장과 연습실 등을 꾸미고,2000년부터 매주 토요일 ‘주말극장’을 열어 연극 마니아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이듬해부터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여는 등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밀양연극촌은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이 이사장을, 이윤택 전 국립극단 예술총감독이 예술감독을, 밀양백중놀이 기능보유자로 중요 무형문화재 제68호인 하용부씨가 촌장을 맡는 등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또 50여명의 연극인이 상주하며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주말극장을 찾는 관람객만 평균 200여명 수준으로, 웬만한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극장이 부럽지 않다. 연간 방문객은 5만∼6만명에 이른다. 하 촌장은 “방문객이 늘었지만, 아직은 적자를 면치 못해 외부공연 등으로 운영비를 충당한다.”면서 “하지만 연극인으로서 마음껏 재능을 뽐내고, 일반인들에게 문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소로는 서서히 자리매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밀양연극촌은 행정기관과 민간단체가 협력으로 일궈낸 성공사례다. 다만 지역주민들과 연계한 프로그램은 빈약하다. 하 촌장은 “지역주민들과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연극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포장을 할 줄 모른다.”면서 “그런 사람이 와서 도와줬으면 좋겠는데….”라며 아쉬워했다. 2. 맑은내배꽃마을 역할분담 행정기관과 민간단체가 손을 잡고, 주민들까지 끌어들여 꿈을 키워나가는 곳도 있다. 70가구 220명의 아담한 시골동네인 울주 맑은내배꽃마을에는 올초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울주군은 이곳을 농촌체험마을로 꾸미기 위해 ㈜코엑스포라는 기획업체와 협약을 맺었다. 코엑스포는 마을 이름을 화산마을에서 현재 이름으로 바꾸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으로 도시민을 상대로 마케팅을 시작했다. 이광복 마을 운영본부장은 “소득 분배의 투명화로 갈등요인을 차단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지난 9월 문을 열자 한달만에 1만2000명이 다녀갔다. 참가비와 생산품 판매로 1억원의 수익도 올렸다. 농산품 판로확보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마을 주산품인 배의 절반 이상을 체험객들이 구입했다. 올해 말까지는 모두 2만명이 예약되어 있다. 체험마을 안내요원 등으로 13명을 채용해 고용 창출효과도 내고 있다. 이같은 초기 성공은 부산·울산지역의 유일한 체험마을이라는 지리적 이점도 한몫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주민들은 생산·판매, 외부단체는 프로그램 마련, 행정기관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역할 분담’이다. 여기에 울주군은 마을과 500m 가량 떨어진 명산초교를 울산지역 유일의 영어학교로 지정하는 한편, 이웃 외고산옹기마을이나 간절곶 등과 연계한 개발계획도 추진한다. 이 본부장은 “지금은 구멍가게, 민박집 하나 없지만 귀농을 유도해 인구가 유입될 것”이라면서 “다만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를 한데 묶어줄 인적·조직적 네트워크는 없는 만큼 정부 차원의 보완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3. 진주 사이버타운 특화 집중 밀양연극촌이나 맑은내배꽃마을처럼 모든 동네가 ‘홀로서기’가 가능할 만큼 자체 경쟁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지닌 것’보다는 여전히 ‘없고 불편한 것’이 많다. 때문에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일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반성면을 비롯, 일반성면, 진성면, 사봉면, 지수면 등 5개 면에서는 1999년부터 정보화 기반 지역개발사업인 ‘사이버타운 프로젝트’가 추진됐다.2001년부터 조성된 정부 주도의 정보화마을에 앞서 행정기관의 도움 없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역단체인 진주농촌정보문화연구회의 주도로 진행된 민간 차원의 농촌정보화운동이다. 이제는 정보화 관련 영농조합까지 운영할 정도로 기반을 다졌다. 황인철 진주농촌정보문화연구회장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냈다고 하기에는 아직 미흡하며, 주민들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각각의 마을이나 동네가 갖고 있는 장점을 한데 묶어 특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중”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사봉면은 지방공업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 일자리 창출에 유리하고, 진성면은 과학고와 체육고 등이 자리잡고 있어 교육을 특화할 필요가 있다. 또 연간 70만명의 방문객이 다녀가는 경남수목원과 정수예인촌이 조성된 이반성면과 오일장이 열리는 일반성면은 외지인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투입요소는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확대재생산돼야 한다.”면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가 자칫 구체적인 성과는 없이 지역간 위화감만 조장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 밀양·울주·진주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남해 가천다랭이마을 성공사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다랭이마을은 농촌체험마을로 ‘대박’을 터뜨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험마을을 시작한 2002년에 방문객은 2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는 벌써 17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 60가구 150명의 주민이 벌어들이는 한해 수입은 모두 합쳐 1억 5000만원이 고작이었으나, 지금은 5억원가량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마을 이웃에 펜션 등을 지으려는 사람들까지 몰리면서 땅값은 50∼100배나 올랐다. 성공 비결은 마을 고유의 다랭이논을 특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다랭이논은 비탈지를 계단 형태로 깎아 만든 논(다랑이논)을 일컫는 사투리로, 다락논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다랑이논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거의 유일한 해안가 마을인데다, 다랭이에 대한 상표권까지 확보해놨다. 또 방문객들이 먹고 자기 위해 쓰는 돈 말고도, 방문객들이 현장에서 사갈 수 있는 마늘 등 맞춤형 농작물을 재배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가천다랭이마을은 이제 살기 좋은 지역이 됐을까. 오히려 주민들 사이에서는 사람냄새 나는 마을이 상혼만 판치는 관광지로 둔갑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싹트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열악한 생활환경에 대한 문제점도 쏟아냈다. 마을을 들어서면 온통 콘크리트로 덕지덕지 바른 길과 시멘트 담장뿐이다.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정취가 느껴지던 돌담길은 온데간데 없다. 마을터가 경사지에 위치하다 보니 가파른 마을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주민의 상당수는 관절염 환자라고 한다. 현행 기준대로라면 주택의 90% 이상이 불법 건축물일 정도로 주거환경도 열악하다. 또 마을 앞 바다는 해삼·전복·미역·갈치 등 어족자원이 풍부하지만, 배를 댈 방파제와 선착장이 없어 생선은 시장에서 사먹어야 한다. 이웃마을의 선착장을 이용하려 해도 만만치가 않다. 주민들은 ‘달빛에도 논이 마른다.’고 말할 정도로 주민들의 주업인 농사가 잘 될 리도 만무하다. 김주성(50) 이장은 “도시민들이 살고 싶다는 문의전화를 많이 하지만, 텃밭만 가꿔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면서 “방문객이 늘기만 기다린다면 마을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공감대는 주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있다. 김학봉(61)씨는 “마을을 가꿔나가려면 상인이 아닌 주민, 그것도 젊은이들이 들어와야 한다.”면서 “주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동 생산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구획정리로 주변환경과 어울리는 주택을 짓는 것은 물론 폐교도 대안학교로 조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대세(70)씨도 “처음에는 소득을 높이는 데만 신경을 썼지만, 이제는 우수한 자연자원이 훼손되지 않도록 상업화를 경계해야 할 시기”라면서 “마을 뒷산인 설흘산과 응봉산 등을 찾는 등산객도 많지만, 등산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심각해지고 있는 환경 훼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남해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보신각 종 날마다 정오 타종 21일부터 서울 역사성 홍보

    서울시는 오는 21일부터 매일 정오에 서울 종로구 종로2가 보신각 종을 타종하고, 남산봉수대 의식을 재현한다. 유적지인 서울의 역사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보신각 타종은 조선시대 태조 5년(1396년)부터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을 일제히 여닫을 때부터 시작됐다. 새벽 종을 파루(罷漏), 저녁 종을 인정(人定)이라 했다.재현 행사에서는 타종군 5명과 타종관 1명이 종루를 지키는 수위의식을 갖고 정오에 종을 12차례 칠 예정이다. 그동안 보신각 종은 3·1절과 광복절, 제야의 종 때만 종소리를 울렸다.21일에는 타종식에 앞서 식전행사로 ‘아우라꼬레아 예술단’의 퓨전 국악공연이 펼쳐진다. 같은 시간 남산에서는 남산봉수대 봉수의식이 재현된다. 오장 2명과 봉수군 4명이 남산봉수대 주변을 수위하며 1거(炬·봉화를 올리는 숫자)를 재현할 계획이다.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북한실상을 잘 알 수 있도록/심재철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북한은 대한민국의 일부인가 아니면 독립된 이웃국가인가? 최근 국가인권위원장에 취임한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에 따르면, 국내법상으로 북한의 정체성은 우리 일부일 수도, 또는 아닐 수도 있다는 양극단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겐 일본보다 더 가깝고도 먼 나라가 북한이다. 광복 이후 우리 삶에 끊임없이 큰 영향을 미쳐왔지만 일반인이 북한 사람을 실제로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필자도 북한사람을 직접 본 적은 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첫번째는 15년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커뮤니케이션학회에서 북한 외교관을 만났었다. 우리 외교관처럼 말쑥했으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두번째는 5년전인가 중국을 거쳐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본 50대 북한 아주머니였다. 북-중 경계선을 넘어온 그녀의 모습은 남루했으며, 영양실조에 걸린 듯 몸이 마르고 파리했다. 분단 이후 우리는 평화공존을 위한 대규모 남북한 정치 이벤트와 일촉즉발 전면전을 연상케 하는 북한 도발행위를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해왔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필자에겐 북한하면 이들 두 사람의 상반된 모습이 떠오른다. 북한이 대한민국 일부인지, 아니면 이웃 독립국가인지 정체성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최근 북한 핵실험 사태를 보면서 이제 북한 체제가 무너질 날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심을 하게 됐다. 핵폭탄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며, 가질 필요도 없는 북한이 기어이 그것을 가졌다니 과연 그 체제가 얼마나 더 존속할 수 있을까. 서울신문을 포함해 우리 언론은 북한을 크게 두가지 뉴스 프레임을 가지고 보도해왔다. 첫번째는 “공산주의를 이긴다.”는 승공식 프레임이다.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북진통일식 보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두번째는 “공산주의를 막아내야 한다.”는 반공식 프레임이다.6·25를 거치면서 북한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이번 핵실험 보도에서 보듯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남아있다. 반공이나 승공식 보도프레임은 북한이 우리 일부라는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독립된 정치체제로 간주하면서 미국처럼 북한을 ‘악의 축’ 혹은 ‘햇볕정책’ 대상으로 보도해 왔다. 최근 ‘일심회’ 사건보도에서 보듯 북한관련 이슈는 여전히 혼란스럽게 보도되며, 독자는 북한 정체가 무엇인지 헷갈린다. 안경환 위원장 주장처럼, 북한은 가난한 이웃인 동시에 위력적인 무기 체제를 갖춘 ‘중간적 존재’로 보는 게 현실적이다.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은 북한체제 붕괴를 연착륙시킨다는 발상에서 나왔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승공 뉴스프레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최근 서울신문에서 보듯, 북한 핵실험 위협에 대해선 지금도 반공 뉴스프레임으로 보도한다. 앞으로는 북한체제가 붕괴됐을 때를 가상해 북한 주민을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에 흡수 통합, 적응시켜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제3의 뉴스보도 프레임을 준비해야겠다. 북한주민이 밑으로부터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고를 하며,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보다 생생한 뉴스를 좀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북한관련 보도에서 심각하게 생략된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서울신문이 야심차게 꾸려나가는 자치행정 지면에 북한지역을 포함하면 어떨까. 기존 북한기사와는 달리 발로 뛰면서 취재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기사를 기대해본다. 또한 정치권력에 의해 북한주민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감시기능을 높여야 하겠다. 국내 보안법 위반사건 보도에서도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원칙을 적용해 피의자 인권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심재철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 ‘夜好~’ 관광어항의 밤 기대하세요

    ‘夜好~’ 관광어항의 밤 기대하세요

    서해안의 관문인 전북 군산시 비응도동에 국내 최초로 워터 프런트 유형의 관광어항(조감도)이 조성된다. 해양수산부와 동양건설산업은 6일 비등도 일대 새만금지구 시작 지점에 15만평 규모의 관광어항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워터 프런트형 관광어항 건설은 바닷가에 접하고 있는 지역을 대단위 해양도시로 개발해 친수공간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비응도 동남측 전면 해상에서 이뤄지는 이 사업은 해양수산부가 시행하고 동양건설산업이 100% 출자한 ㈜피셔리나가 자본을 대는 민간투자사업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 지난 2003년 7월부터 내년 1월까지 국비와 민자 1775억원이 투입되는 대단위 민자사업이다. 현재 방파제와 호안 1775m, 물양장 1200m, 배후부지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 부지 가운데 2만 6000평은 어항시설로, 나머지 12만 4000평은 일반상업지역으로 개발된다. 상업지역에는 판매시설, 식음시설, 업무용지, 호텔, 콘도, 워터파크 등이 들어선다. 내년 1월 말 준공과 함께 어항 관련시설은 국가에 귀속되고, 유람선 터미널과 냉동·냉장창고 등은 동양건설산업이 100% 출자한 ㈜피셔리나가 2030년까지 23년간 운영권을 갖게 된다. 비응 관광복합어항은 기존의 단순한 어항 기능뿐 아니라 해양관광, 수산물가공, 유통, 휴양관광시설, 생활문화공간 등이 갖춰진 다목적·미래지향적 어항개발사업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비응항 개발이 마무리되면 서해안 일대에 친수·위락공간이 조성되고 고부가가치 해상관광산업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보트·스쿠버 등 다양한 해양오락시설이 들어서고 고군산군도 등 서해안 섬과 해안을 관광하는 유람선도 운영된다. 특히 비응항은 새만금지구와 변산반도 국립공원 등 풍부한 관광자원이 인접해 있어 관광어항으로 새롭게 각광받을 전망이다. 또한 서해안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호남고속철도 등 교통망도 좋아 호남·충청권은 물론 서울 등 수도권에서도 접근성이 뛰어난 이점을 가지고 있다. 군산시 관계자는 “비응항 관광어항 개발은 해양수산부가 시행하는 국책사업으로 새만금·고군산군도·변산반도와 연계된 서해안 관광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며 “행정복합도시 배후지역의 대표적인 해양휴식 공간으로서 많은 관광수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11·1 개각] 장관급 내정자 프로필

    [11·1 개각] 장관급 내정자 프로필

    ■ 이재정 통일장관 내정자 종교인 출신의 정치인으로 성격은 온화하지만 컬러와 추진력이 분명하다는 평이다.1981년부터 20년이 넘는 기간에 보수 진영이 장악해 오던 평통 자문위원을 진보인사로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는 평가를 야당측으로부터 받았다. 지난해 여름 행사장에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으로부터 맥주 세례를 받은 일화도 이런 평가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옛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으며 같은 당 정책위의장도 맡았다.16대 국회에서 초선인데도 당 정책위의장도 맡았고,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 중앙선거대책위 유세본부장으로 활약한 대선 공신이다. 한화로부터 대선자금을 받은 혐의로 옥고를 치렀고 지난해 광복절 특사에서 사면·복권됐다. 17대 총선에 불출마한 뒤에는 외국인노동자 쉼터인 ‘샬롬의 집’ 사목 활동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통일과선교위원회 위원장, 범종교단체 남북교류협력협의회 공동대표의장 등을 맡는 등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에도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다. 부인 박영희(55) 여사와 1녀. ▲충북 진천 ▲고대 독문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대 신학박사 ▲부정방지대책위원장 ▲성공회대 총장 ▲16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고문 ■ 송민순 외교장관 내정자 자신의 자리를 걸고 협상에 임하는 ‘뚝심의 협상꾼’이다. 1990년대 초반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담당하던 미주국 안보과장 시절에 끝까지 밀어붙이는 능력으로 협상상대인 미측으로부터 인정받아 군인보다 더 군인 같다는 뜻에서 ‘커널(colonel·대령) 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 시절인 지난해 북한과 미국을 상대로 절묘한 설득과 때론 ‘압박전술’을 구사해 결국 9·19 공동성명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지난해 6자회담에선 미묘한 협상 내용을 특유의 비유와 암시를 섞어 전달해 ‘비유의 달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9·19 공동성명을 이끈 성과를 바탕으로 차관보에서 일약 장관급인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두 단계 뛰었고, 안보실장이 된 후에는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안보실장의 특수성 때문에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실질적으로 조율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부인 이명숙(53)씨와의 사이에 1남1녀. ▲경남 진양(58) ▲서울대 독문학과 ▲외무고시 합격(9회) ▲외무부 북미1과장 ▲북미국장 ▲주폴란드 대사 ▲경기도 자문대사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김수정 기자 crystal@seoul.co.kr ■ 김장수 국방장관 내정자 외모만 보면 학자나 종교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온화한 이미지다. 목이 길고 몸매가 호리호리해 군복 입은 학,‘녹학(綠鶴)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실제 성품도 모나지 않고 적이 없다는 평가다. 그러면서도 업무에 대해서는 빈틈이 없어 윗사람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주요 직책을 두루 섭력한 ‘정통 육군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작전·전략분야의 핵심보직을 거쳐 군내 대표적인 작전·전략통으로 꼽힌다.1996년 1군사령부 작전처장 시절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50여일간 집에도 못 들어가며 작전을 지휘했던 일은, 그의 체력과 정신력을 확인시켜준 일화로 회자된다. 특히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재직 경력은 ‘한·미동맹 조정’이 최대 국방현안으로 대두한 이때 그의 발탁에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관운이 좋다는 평도 붙는다. 기독교 신자이며, 가족은 부인 박효숙씨와 미혼의 1남1녀가 있다. 아들은 육사를 나와 소위로 복무하고 있고, 딸은 회사원이다. ▲광주(58) ▲광주일고 ▲육사 27기 ▲수방사 작전처장 ▲1군 사령부 작전처장 ▲6사단장 ▲7군단장 ▲합참 작전본부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 김만복 국정원장 내정자 국내와 해외, 북한 정보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정통 국정원맨’.1974년 공채로 중앙정보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국내정보를 거쳐 16년 넘게 해외 분야에서 일했다. 기획과 인사분야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국제감각도 뛰어나다는 평이다. 부지런함과 성실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 뒷산에서 등산을 한 뒤 업무를 시작할 정도라는 것.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 시절인 2003년 11월 이라크 파병안 수립을 위한 제2차 정부합동조사단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2004년 2월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뒤에는 국정원 개혁안인 ‘비전 2005’ 작성을 주도했고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출범과 운영에도 관여했다. 평소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라는 글귀를 수첩 맨 앞장에 적어두고 있다고 한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각별한 사이로 알려진다. ▲부산(60) ▲부산고 ▲서울대 법대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 ▲NSC사무처 정보관리실장 ▲국정원 기조실장 ▲국정원 제1차장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민족문학 이름으로 평화의 시 노래하자”

    |금강산 이순녀기자·공동취재단|분단 60년 만에 처음으로 남과 북의 문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일 문학인 조직이 탄생했다. 남한과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 100여명은 30일 오후 금강산에서 만나 ‘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식을 갖고 남북한 단일작가 모임을 공식 출범시켰다. 남북한 문인들이 단일 협의체 형식의 문학인 조직을 결성한 것은 분단 후 처음이다. 이들은 남북 문인들로 구성된 공동회장단을 선출하고, 남북 문인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6·15통일문학상’을 제정, 협회기관지인 ‘통일문학’ 발행 등을 결의했다. 협회는 ‘6·15공동선언을 지지하고 남북, 해외 문학인을 망라하는 전 민족적 문학단체’이며 향후 민족문화 전통과 민족어의 우수성을 지켜내기 위한 문학활동을 벌여 나가겠다는 내용을 담은 총 4개조 13개항으로 구성된 협회규약을 발표했다. 협회를 이끌어갈 공동회장단은 남북측 문인 각 8명으로 구성됐다. 남측회장단에는 회장 염무웅(평론가)씨를 비롯해 부회장 신세훈(시인), 정희성(시인), 집행위원 도종환(시인), 김재용(평론가), 이문재(시인), 정도상(소설가), 한분순(시인) 등이 선출됐다. 북측 회장단에는 회장 김덕철(소설가)을 비롯, 남대현(소설가), 장혜명(시인), 최길상(평론가), 박철(시인), 황원철(소설가), 허일용(수필가), 주종선(수필가) 등으로 구성됐다. 도종환 시인이 협회 결성까지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시작된 행사는 광복 후 60년 만에 남북 문인들이 첫 공동단체를 결성했다는 역사적 의미 때문에 시종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북측 명예손님으로 참석한 정덕기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부위원장은 축사를 통해 “겨레의 마음 속에 통일의 희망과 신심을 안겨줄 통일문학 창조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역사적 사변”이라면서 “6·15 시대정신이 반영되고 민족자주의식이 맥맥히 흐르는 통일문학을 창작해 나가자.”고 말했다. 남측 명예손님으로 초청된 김상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도 “협회 출범은 6·15공동선언 실천에 있어 또 하나의 큰 발걸음이 됐다.”며 “협회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문학의 다양한 쇄신은 이 땅 주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분단의 폐해를 한층 절실하게 체득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문인들은 30여분간에 걸친 결성식을 마친 뒤 양측 문인들이 번갈아 가며 시와 산문을 낭송하는 ‘금강산 문학의 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연회 등의 행사를 이어 나갔다.2박3일 일정으로 진행된 결성식 행사는 31일 삼일포 산책을 끝으로 모두 마무리된다. 남쪽 문인들로는 도종환, 나희덕, 박범신, 장석남, 황인숙, 윤정모, 은희경, 이문재, 정양, 최인석, 송기숙씨 등 50여명이 참가했으며, 북한에서는 정기종, 김우경, 김철, 리준길 등 30여명이 참가했다. 협회 공동회장을 맡은 평론가 염무웅씨는 연회 연설에서 “이번 남북단일작가모임 출범은 분단문학의 역사에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이제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겨레말의 아름다움을 가다듬어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는 평화의 시를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coral@seoul.co.kr
  • [심상덕의 서울야화] (24) 추억의 신발 검정 고무신

    [심상덕의 서울야화] (24) 추억의 신발 검정 고무신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어린 시절에 신고 다니던 검정고무신이 더없이 좋았습니다. 추적추적 가을비라도 한번 오고 나면 마을 앞 신작로에서부터 질퍽질퍽 진흙탕 길이었거든요. 이렇게 진흙탕길을 걸어다니기에도 그만이었고, 마른 흙길을 걸어다니기에도 그만인 ‘수륙양용’이었던 겁니다. 우리 어린 시절엔 이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새로 사 신게 되면 괜히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자랑하고 싶어했습니다. 지난날 ‘국민의 신발’은 고무신이고, 그것도 검정고무신이었던 거죠. 또 이 검정고무신 한 켤레만 있으면, 흘러가는 시냇물 위에 띄워 놓고 누구의 ‘고무신 배’가 더 빨리 물위에 떠가는가를 겨루는 시합도 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이 검정 고무신이 처음 등장한 게 언제쯤부터였는가 하면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16년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그 당시, 일본 고베 상인들이 우리나라 고무신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1920년 구한말 법무대신을 지내고 미국대리공사를 역임한 이하영이 서울 원효로 일가에 ‘대륙 고무 공업사’를 세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무신이 등장하기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요. 대중용 신발의 주종을 이룬 것은 짚신과 나막신이었습니다. 특히 나막신은 바닥이 쉽게 닳지 않도록 바닥에 얇은 쇠붙이를 붙여 신고 다니기도 했죠.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그 국산 검정고무신을 가장 먼저 신어 본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시나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임금님이 맨 처음 신어 봤을 정도로 검정고무신은, 그때는 아주 귀한 신발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요즘은 운동화 한 켤레에 쌀 한두 가마 값이 나가는 비싼 외제 수입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광복 직후 생활용품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이 검정고무신까지도 배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요. 물건이 워낙 귀하다 보니까 다른 생활 용품들과 함께 신발도 배급을 받았던 거예요. 그 당시 신문에 실렸던 기사 한 줄.‘서울시청에서는 이번에 옷감과 설탕과 신발을 배급하기로 되었다. 신발은 여자용 고무신을 포함해 모두 3만 켤레이다.’ 바로 약 60년 전 광복 직후,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던 겁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상 살기 많이 좋아진 겁니다.
  • [최규하 前대통령 별세] ‘12·12부터 하야까지’ 역사의 비밀 품고 영면하다

    [최규하 前대통령 별세] ‘12·12부터 하야까지’ 역사의 비밀 품고 영면하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80년대 초 일어난 격동의 현대사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22일 영면했다. 끝내 12·12 등에 대한 진상을 가슴 속에 묻고 떠난 것이다.‘재임 중의 행위’라는 이유로 당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던 최 전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의 열쇠’를 내보이지 않았다. 결국 숱한 의혹을 낳은 12·12 등의 실체 역시 역사의 베일 속에 가려지게 됐다. 1. 헌정사상 최단명 대통령 최 전 대통령은 분명 10·26에서부터 12·12와 5·18, 대통령 하야에 이르는 혼돈의 정치상황을 거친 ‘비운의 대통령’이었다. 외교관료로 국무총리와 대통령에 올랐지만 8개월 만에 사임, 가장 짧은 임기의 대통령으로도 기록됐다. 최 전 대통령은 80년대 정치적 격랑,‘서울의 봄’ 중심에 있던 국가통수권자였다. 유신체제인 1975년 말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로 임명됐다.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대통령권한 대행에 올랐다. 그리고 신군부의 12·12 직후인 같은달 21일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제4공화국과 5공화국 사이의 정치적 격변기에 대통령에 오른 셈이다.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12·12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위세’에 눌린 탓이다. 최 전 대통령은 취임 8개월 만인 1980년 8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한 뒤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특별성명에는 “국익 우선의 국가적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최 전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과도 ‘인연 아닌 인연’을 갖고 있다.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하던 당시 최 전 대통령은 아랍을 순방하다 급거 귀국, 이른바 ‘광주사태’의 수습에 나섰다. 광주에 직접 내려간 뒤 광주 시위군 대표와 담판을 지으려다 신군부 측의 만류로 무산된 적이 있다. 최 전 대통령은 사임 때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고도 밝혔다. 2. 신군부 권력장악 음모 묻다 10·26 직후부터 신군부의 권력 장악은 숨가쁘게 전개됐다. 전두환·노태우 등으로 대표되는 신군부는 12·12를 일으켰다. 최 전 대통령은 12·12의 핵심인 신군부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사전 재가 여부의 진실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5·17 비상계엄 확대와 사임 과정 등도 마찬가지다.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가 정 총장의 연행 재가를 요구하자,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이 들고온 서류를 대강 검토한 뒤 이례적으로 사인 옆에 일자와 시간을 기입했다고 한다. 엄연히 불법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함에서다. 최 전 대통령은 검찰의 ‘12·12 및 5·18 사건’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1996년 11월14일 검찰의 수사와 관련, 강제 구인돼 법정에 서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증인 선서와 증언를 거부했다. 법정에서 “재임 중 행위에 대해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을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전례를 만들어 앞으로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부담을 주는 것은 국익에 손상이 된다.”며 증언 거부의 변만 남겼을 뿐이다. 물론 검찰 수사 및 공판 기록에 따르면 12·12 당시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정 총장 연행 요청에 대한 사전 재가를 거부했다. 최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끝난 뒤에도 당시 신군부와의 구체적인 회유 및 협박 등 갈등 관계에 대해 입을 떼지 않았다. 3. 외교관의 길 최 전 대통령은 1919년 7월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경성제1고보,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과와 만주국립대동학원을 졸업했다. 최 전 대통령은 광복되던 해인 1945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이듬해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직에 들어섰다.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단학·뇌호흡 창시자 이승헌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단학·뇌호흡 창시자 이승헌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천부경(天符經)이라고 한다. 출현 시기는 BC 3800년 경 천제환웅 시대에 고대상형 문자인 사슴발자국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됐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많은 백성들에 의해 암송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신라시대 대학자 최치원은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해 묘향산 석벽에 한자(漢字)로 옮겨 새겨 놓았다. 아울러 생전에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래된 유교와 불교·도교 이전에 현묘한 도가 있다.”고 설파했다. 이 경전은 오늘날 전 세계인이 유일하게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숫자의 기원’을 깨우쳐 줄 고대경전으로 전해진다. 모든 철학사상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우주만물의 탄생과 소멸의 과정인 조화와 순환의 법칙, 즉 우주를 비롯해 천(天), 지(地), 인(人)을 근본으로 한 ‘숫자의 생성원리’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천부경은 우리 인간 세상에서 많은 세월만큼 멀어졌다. 그러던 20년전 ‘천부경’은 ‘단학’으로, 민족의 ‘국학’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이자 중심철학으로 새삼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 이후 ‘단학’은 뇌호흡, 뇌교육 등으로 일상과 깊이 접목되면서 널리 퍼졌다. 단학을 수련하는 인구만 하더라도 미국, 일본, 캐나다, 영국, 러시아, 브라질 등 세계 각국에서 500만이 넘었다. 특히 뇌호흡은 오늘날 뜨거운 관심과 열풍을 일으켜 미국 MIT대학, 하버드대학, 노스웨스턴 대학의 초청으로 많은 강연회가 열릴 정도로 현대 과학에 근접했다. 일지(一指) 이승헌(56)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오늘날의 단학과 뇌호흡을 창시했다. 또 평화철학, 뇌철학, 지구인 철학을 주창·정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세계 명상의 요람인 미국 애리조나 주 세도나에 진출, 일지명상센터를 설립하고 한국 선도(仙道)를 전파하는 등 평화운동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200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에서는 매년 9월19일을 ‘일지 이승헌 박사의 날’로 선포할 정도로 이 총장의 업적을 각별하게 예우한다. 국내에서는 사단법인 국학원을 설립하고 홍익정신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대한민국 국민훈장과 서울언론문화상 등을 받았다. ●수련인구 전세계 500만명 넘어 그는 또 ‘한국인에 고함’‘힐링 소사이어티’‘휴먼 태크놀로지’ 등의 책을 저술, 지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려놓아 한국인의 긍지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이런 그가 24일 저녁 ‘국학의 길 20년’ 행사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갖는다. 지난 1987년 ‘민족정신 광복운동본부’를 발족한 이래 국내외에서 국학운동을 전개해온 지난 20년을 돌아보는 감회어린 자리를 마련했다. 이 행사에는 정·재계는 물론, 학·법조·문화예술계 인사 500명이 참석한다. 행사에 앞선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논현동 ‘단월드’ 빌딩 사무실에서 이 총장을 만났다. 소탈한 모습이 퍽 인상깊게 다가왔다. 먼저 단학과 국학은 어떻게 연관되며 그 뿌리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물었다. “핵심은 한민족의 경전인 천부경에서 비롯됩니다. 즉 한민족의 선도이지요. 선도는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이자 중심철학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선도의 대가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단학과 국학을 굳이 구분하자면 ‘단학수련’이라고 하고,‘국학운동’으로 보면 됩니다.” 국학은 지난 2002년 설립된 국학원과 국학운동시민연합을 통해 학술·문화·교육 분야에서 한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한민족의 정신적 중심이자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이 총장은 20년 전에 단학을,10년 전에 뇌호흡을 창시했다. 이에 대해 “지금부터 26년 전 고행을 통해 깨달았다.”고 전제한 뒤,“깨달음은 생명의 실체와 삶의 목적이었다. 생명의 실체가 ‘천지기운 천지마음’이었다.”면서 천부경에 담겨진 진리를 만나면서 큰 깨달음을 접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천부경을 알리고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실현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하게 됐다고 부연했다. 이를 위해 초창기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공원에 나가 중풍환자를 대상으로 건강을 위한 수련법을 꾸준히 지도했다. 그러기를 5년여. 우리 민족의 선도인 ‘단’을 학문화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단학’이라 이름짓고 수련장을 ‘단학선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와 민족, 인류를 위한 일’임을 세상에 천명했다. 뇌호흡과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고행하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체험을 했다.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을 통해 생각과 분별, 감정과 기억이라는 선을 넘어선 순간 기적처럼 무한한 사랑과 평화를 깨달았다. “뇌호흡은 5단계로 정리돼 있습니다. 먼저 뇌의 감각을 깨우고, 뇌를 유연화하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에는 뇌를 통합해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단계를 정해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시도할 수 있습니다.” 문득 역사 드라마 ‘연개소문’의 제작지원이 단월드라는 생각이 떠올랐다.“현재 전 세계에 600개의 단월드 센터가 있다.”면서 93년 이후 단계적으로 제자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여전히 대스승이자 선임자로 있다고 했다. 아울러 단학의 대중화를 위해 제자들 스스로 경영할 수 있도록 분위기 조성을 해주고 있단다. 뇌교육 등 과학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제자들에게 던져주는 일 또한 그의 몫이다. 단학이 미국과 유럽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과학적인 프로그램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21세기 인류에 뇌교육 가장 필요 이 총장은 뇌과학연구원을 운영하면서 국내 굴지의 연구기관과 공동협약을 맺고 있다.“현재 미국 등 저명한 뇌과학자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뇌의 인지기능 가운데 고등감각 인지기능(HSP,Heightened Sensory Perception) 연구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상당히 의미있는 연구결과 또한 곧 발표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21세기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뇌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생산성과 창조성, 평화성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인간성 상실, 전쟁의 위협과 공포, 지구환경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건강, 행복, 평화는 선택하는 순간 창조됩니다. 이것을 HSP법칙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뇌교육을 통해 간단한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지요. 거듭 말하지만 답은 뇌에 있습니다.” 이 총장은 초등학교 시절을 잠시 떠올린다. 집중력에 문제가 있어 학습장애자였다. 공책에 필기가 제대로 안될 정도였다. 당연히 성적이 나빴다. 그럴수록 ‘나는 누구인가’라고 뇌한테 자주 물었다. ●21일간 극한체험뒤 ‘천지기운´ 깨달아 1950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그는 몸이 약한 소심한 아이였다. 열네살때 저수지에 수영갔다가 친구가 물에 빠져 죽은 후 한동안 죽음의 공포에 빠졌다. 그러던 20대말. 고서점에서 ‘태극권’이란 책을 만지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강렬한 기운을 느꼈다. 이때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명상도 하고 몸수련도 했다. 당시 임상병리실을 운영하며 모은 돈을 부인에게 주고 모악산으로 훌쩍 떠났다. 여기서 21일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죽음의 경계까지 가는 극한 체험을 했다. 그러면서 계속된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던졌다. 마침내 ‘나는 천지기운이다’라는 답을 얻고 산에서 내려왔다. “뇌를 속여보십시오. 예를 들어 나이 60에 관속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인생은 60부터야,20세라고 생각 하자’라고 하면 90까지 팔팔하게 살 수 있습니다. 뇌는 입력하는 정보에 따라 반응합니다.” 이 총장은 오는 2007년 코스닥과 나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뇌교육 시장이 미래의 가장 유망분야로 1조달러의 가치를 가진다고 자신했다. 미국의 빌 게이츠는 컴퓨터 운영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됐지만 이 총장은 HT(Human Technology)산업으로 미래비전을 활짝 펼치겠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희망은 인재이고, 또 두뇌강국을 위해 뇌교육 산업과 시장을 선도하는 국가, 즉 세계에서 가장 뇌를 잘 쓰는 나라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km@seoul.co.kr
  • 고 함석헌 선생 유해 대전현충원에 안장

    일제강점기 ‘성서조선’을 발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광복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고 함석헌(1901∼89) 선생의 유해가 19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치됐다. 안장식에는 함 선생의 둘째 아들 우용씨 등 유가족과 친지,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함 선생의 묘는 경기 연천군 전곡면에 있었으나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아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 됨에 따라 이날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함 선생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3·1운동 때 평양에서 시위를 벌였고 1927년 김교신과 함께 민족지 ‘성서조선’을 발간,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해방후 월남, 평생을 반독재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민중신학 개척자로 활동했다.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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