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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순국선열 지하에서 뿔났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역사왜곡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친일 경력의 인사가 정부의 ‘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는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 배속돼 조선인 항일유격대 소탕 작전에 종사하다 만주군 중위로 광복을 맞았던 백선엽(88) 전 육군 참모총장이 기념사업위 고문이다. 백 고문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사전편찬위원회가 올해 발간 예정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776명에 포함돼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는 것에 대해 백 고문 측은 이의신청을 하지 않았다. 기념사업위 추진기획단 관계자는 “산업화나 민주화 과정에서 기여한 측면을 고려해 각계각층의 추천을 받아 고문으로 위촉했다.”면서 “친일 이력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이야기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때려 잡던 사람이 건국기념사업위원회의 고문으로 위촉됐다는 것은 정부가 역사의식이 없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日 독도영유권 명기 파장] ‘대일 강경외교’땐 MB지지 오를까

    이명박 대통령은 대일(對日) 강경외교를 통해 주저앉은 지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이 14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명기와 관련해 단호한 대응을 지시하면서 외부와의 대립을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외교관계의 일반공식이 성립할 지가 일단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독도 문제와 관련해 강경한 자세를 선보임으로써 지지도를 끌어 올린 적이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한·일 관계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일본 정부가)지난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고 있다. 국수주의자들의 침략적 의도를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며 대일 강경외교를 천명했다.“각박한 외교전쟁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동원하기도 했다. 네오내셔널리즘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으나 이런 자세는 지지도 상승에 도움이 됐다. 대일외교에 대한 90% 가까운 찬성 여론 덕에 넉 달 전 20%대였던 지지도는 50%를 육박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 대통령의 경우 대일 강경자세가 지지도 상승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영남 보수진영의 민심이 가라앉은 데다 경기 침체로 수도권 자영업자들이 급속히 이탈한 상황이어서 당시와 같은 지지도 상승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체육회 88돌 기념식서 창립취지서 낭독

    광복 이후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김성집(89) 대한체육회 원로자문위원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11일 대한체육회 창립 88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 위원은 이날 오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다른 이의 부축을 받지 않고 국민의례를 위해 일어서고 이연택 회장 등과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등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그는 이 회장이 “인생으로 치면 체육회 역사도 미수(米壽·88세)를 넘겼다.”는 내용의 기념사를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들은 뒤 단상에 올라 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를 낭독했다. 체육회는 1920년 7월13일 ‘조선체육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돼 건국 뒤인 1948년 9월3일 체육회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5분간 취지서를 상당히 또렷한 발음으로 들려줘 주위를 놀라게 했다. 기념식에 이어진 오찬에서 그는 인터뷰 요청에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김 위원은 1919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체육회 관계자는 “주민등록이 잘못됐고, 실제론 90세라는 얘기도 있다.”고 전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사설] ‘기존 합의 존중’ 남북교착 타개 전기되길

    이명박 대통령이 어제 북측에 전면적인 당국간 대화 재개를 공식 제의했다. 이 대통령은 특히 “과거 남북간에 합의한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공동선언,6·15공동선언,10·4정상선언을 어떻게 이행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6·15공동선언 등 제반 남북합의서를 다 같은 비중으로 존중하겠다는 뜻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기본합의서’라던 종전의 대북정책 기조에 변화가 있음을 북측에 내비친 셈이다.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보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우위에 둠으로써 북측의 반발을 불렀고, 그 결과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분석에 따른 조치로 여겨진다. 우리는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 대북 정책전환에 주저하지 말라고 누누이 촉구해왔기에 만시지탄이지만 진일보한 제의라고 평가한다. 더욱이 그제 중국 베이징에서 북핵 6자회담이 재개돼 북 핵 물질·시설 등에 대한 검증 및 폐기방안과 이에 상응한 보상방안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정부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서 주도권도, 발언권도 없이 돈만 대는 게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시점임을 감안할 때 이번 제의는 시의적절했다. 문제는 북한의 반응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 대통령은 대화 제의를 한 것이지 북측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힌 게 아니다. 특히 북한의 비핵화를 최우선으로 하며, 북핵 해결이 선결과제라고 못박은 것은 북측으로선 마땅치 않을 것이다. 결국 큰 원을 그리며 선회하기 시작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이 내달 광복절 특별담화 등에서 어떤 식으로 구체화될지 더 지켜볼 일이다. 한편 우리는 어제 금강산에 발생한 남측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북측이 적극 협조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재발 방지책 마련 등을 위해 남북 당국간 책임있는 대화를 갖기를 촉구한다.
  • 열여덟 무엇이 두렵겠는가

    열여덟 무엇이 두렵겠는가

    12일부터 다음달 3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무대에 오르는 신작 연극 ‘청춘,18대1’은 광복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열 여덟살 청춘들의 혈기와 열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게 바로 ‘청춘’이라는 고전적 메시지를 전한다. “대마도와 부산 사이를 떠도는 관부연락선처럼 나는 오늘도 일본과 조선을 맴돌고 있다. 아, 열 여덟 사랑니 같은 불청객. 청춘이여, 표류함이 두려운가. 정착하여 고정됨이 두려운가.” 징용을 피해 일본 도쿄로 건너간 세 명의 ‘청춘’들이 댄스파티를 열어 일본 관리를 암살하려다 목숨을 잃는다는 테마는 간단하지만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신념, 나를 믿어 주고 내가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열정, 다시말해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 형제애라고 할까. 한 무대에 두 시점을 교차시킨 점은 눈길을 끈다. 사건 당시 당사자들의 시점과 사건을 역추적하는 취조관의 시점이다. 특히 취조관은 이질적인 시공간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연기자인 동시에 극의 내용을 바라보는 관찰자 역할을 맡아 관객들을 이끈다. 아코디언, 클래식 기타, 하모니카, 피아노, 클라리넷, 만돌린 등 30여가지의 악기가 동원된 점도 특징. 세 명의 연주자가 악기들을 연주하며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무대에 올려진 이 작품의 연출·대본은 ‘죽도록 달린다’ ‘왕세자 실종사건’ 등으로 주목받은 서재형·한아름 부부가 맡았다.(02)708-5001∼3.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홍사덕 등 친박 중진들 ‘재입성’

    홍사덕 등 친박 중진들 ‘재입성’

    초선은 많고 다선은 적은 한나라당의 ‘피라미드형 구조’가 변화를 맞는다. 최고위원회가 10일 전원 복당을 허용한 친박(친박근혜) 의원 그룹에는 재선에서 6선까지 경륜이 깊은 의원들이 포진해 있다. 친박연대의 서청원 대표와 홍사덕 의원은 6선 의원으로 복당하면 당내 최다선이다. 자유선진당 조순형(7선) 의원에 이어 여야 통틀어 4명인 6선은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 된다. 나머지 2명은 정몽준 최고위원과 이상득 의원이다. 서 대표는 이번 4·9총선 때 친박계를 대변해 한나라당 공천에 여러 차례 반발하다가 결국 탈당했다.2002년 당 대표였던 그가 탈당하기 직전까지 맡은 직함은 ‘상임 고문’이다. 그는 ‘2002년 대선자금 수사’ 때 구속돼 2006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됐다. 현재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공천 헌금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다. 서 대표는 이날 한나라당 복당과 관련,“친박연대는 복당 절차를 밟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당에 남아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하겠다.”고 밝혀 재판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2004년 탄핵 역풍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의도를 떠났던 홍 의원의 복당길은 순탄하지 않았다.2005년 10·26 재·보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 경기도 광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력 때문에 한나라당은 그의 복당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전 대표 캠프 선대위원장을 맡았을 때 복당 신청을 했지만, 친이(친이명박)계가 복당을 반대했다. 당시 홍 의원을 지지한 ‘장군의 손녀’ 김을동 의원은 이후로 홍 의원과 정치 행보를 같이해 왔다. 친박연대 초선 양정례·김노식 의원은 서 대표와 함께 공천헌금 비리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다. 서 대표 등이 검찰 수사 때문에 한동안 발이 묶인 상태라면 지난해 경선 이후 한나라당내 친박계 좌장 역할을 해 온 김무성 의원은 ‘4선’이라는 날개를 달고 복귀했다. 민주계 중진으로서 한나라당 낙천 이후 부산·경남(PK) 지역에서 ‘박근혜 바람’을 증폭시키며 ‘스스로와 친박 의원 구하기’에 성공했다. 초선 중에서도 박대해·유재중·이진복 의원 등은 자치단체장 출신으로 지역 기반과 정무 능력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검찰 수사를 받는 친박연대 비례대표 등이 한나라당에 얼마나 용해될지는 미지수이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건국 60주년] 한인2세 전문직서 ‘두각’

    [건국 60주년] 한인2세 전문직서 ‘두각’

    |워싱턴 김균미특파원|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 3명 가운데 1명은 미국에 살고 있을 정도로 미주 한인들의 비중이 높다. 지난해 정부 통계에 따르면 재외동포 678만명 중 202만명이 미국에 산다. 1903년 1월13일 하와이에 103명을 태운 배가 처음 도착한 뒤 1940년대까지 미국 이민자는 8568명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쳐 80년대 이후 급증하면서 200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만 10만명이 넘는다. 어언 100년이 넘는 이민역사를 통해 한인 2세,3세는 미국 정치·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1.5세나 2세는 미 정부와 정치권, 기업, 전문직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민 1세대의 높은 교육열로 의사·변호사·교수 등 전문직에 진출한 2세들이 늘고 있다.2세 가운데 대학졸업 이상 학력자는 54.4%나 된다. ●LA 흑인폭동 계기 정치참여 증가 살아가는 데 바빠 미국 국내정치와 지역사회에 무관심했던 한인들에게 92년 로스앤젤레스(LA) 흑인폭동은 정치 참여의 필요성과 ‘코리안’이 아닌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한미연합회(KAC), 시민연맹(LOKA), 한인유권자센터 등을 중심으로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해 시민권 획득 캠페인과 유권자 등록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7년 현재 시민권자는 82만명 정도로 전체 한인의 41%를 차지한다. 단합된 한인들의 힘은 지난해 미 하원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과 올해 한·미 양국이 체결한 비자면제 프로그램 양해각서 등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어 한인단체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의회 비준동의를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한인들의 유권자 등록비율은 여전히 낮으며, 투표율도 다른 아시아계보다 저조하다. 미 국내정치 참여보다는 한국내 정치상황에 더 관심이 많다. 김동석 한인유권자센터 사무총장은 “등록 유권자 중 50∼60대의 투표율이 가장 높고 30대 투표율이 미미한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부모들이 공부와 성공만 강조해 사회적 의식이나 자기 뿌리의식이 낮은 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민족 정체성 확립 교육 긴요 한국 정부의 재외동포정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동석 사무총장은 “재외동포들을 관리·통제하는 데서 벗어나 국익을 위한 투자 개념으로 재외동포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더 이상 ‘한국 국익=미국 국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아 한국 정부의 외교력만으로는 어려운 상황이 왕왕 생긴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얽힐 때 미국 시민인 한인들의 저력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 FTA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 정부는 미주 한인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교육·문화에 대한 투자를 통해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얼마 전 발표된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미주 한인사회가 한·미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에서 한·미 양국이 미주 한인사회를 양국 관계 증진에 필요한 귀중한 자산으로 인식하고 한국 정부에 한국 관련 대중교육을 확대할 것을 권고한 사실은 귀담아 들을 대목이다. kmkim@seoul.co.kr
  • 올 상반기 관객을 웃고 울린 최고의 조연은?

    올 상반기 관객을 웃고 울린 최고의 조연은?

    대사가 길건 짧건 한두 장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중심인물이 아님에도 마치 주인공처럼 빛나는 이들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조연. 주연 배우들에 비해 실질적인 비중은 적지만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이기도 한 그들은 때로는 이야기의 빈틈을 메워주고 때로는 관객들을 웃고 울게 만든다. 2008년 상반기 관객을 사로잡은 조연을 살펴봤다. 2008년 상반기 관객을 울고 웃긴 최고의 조연배우는 누구? # ‘검은 집’의 강신일 연극 ‘도마와 증언’을 통해 연기자의 길을 들어선 강신일은 오랫동안 대학로를 지키며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연기파 배우다. 1999년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영화판에 첫발을 들여 놓은 강신일은 ‘도마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광복절 특사’, ‘공공의 적’까지 안정감 있고 노련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배우 강신일을 돋보이게 만든 영화는 ‘검은 집’이다. 그는 ‘검은 집’을 통해 다른 배우들을 압도하는 파괴력으로 스크린을 지배했고 분노로 가득 찬 눈빛과 냉정한 모습을 선보여 배우 강신일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 ‘경축! 우리 사랑’의 기주봉 1981년 ‘어둠의 자식들’로 스크린에 데뷔한 기주봉은 연극무대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베테랑 배우다. 아직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얼굴을 보면 그를 알아보는 것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가장 짧은 대사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그는 ‘경축! 우리 사랑’을 통해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다. 밤에 잠자리에서 애인에게 가고 싶은 기주봉과 하숙생에게 가고 싶은 김해숙이 서로 잠들기만을 바라면서 벌어지는 눈치작전은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긴장감이 넘친다. 또한 아내와 딸이 동시에 한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이 밝혀졌을 때 힘없이 쓰러지는 그의 연기는 대사 없이도 모든 걸 설명해 주는 힘을 가졌다. # ‘화려한 휴가’ 박철민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부활의 노래’로 영화에 출연한 박철민은 코미디 연기에 능한 배우다. ‘목포는 항구다’에서 “쉭쉭~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여” 이 대사 한마디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그는 말만 많고 실속은 없는 깡패 ‘가오리’로 불타는 입담을 과시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에서도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영화에 웃음과 활기를 불어놓은 그는 화려한 무늬에 셔츠를 입고 시위대 가장 앞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농담까지 쏟아낸다.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군인조차 무심코 웃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는 주연보다 조연이 더 빛날 수 있음을 입증했다. # ‘리턴’ 유준상 ‘특별 수사반 박쥐’에서 조연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유준상은 ‘텔미썸딩’, ‘가위’, ‘나의 결혼 원정기’ 등을 통해 꾸준히 자신만의 연기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는 배우다. 특히 ‘리턴’에서 선보인 연기는 그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평소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뛰어난 유준상은 미스터리한 인물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내면 연기는 물론이고 수염과 덥수룩한 머리, 날렵한 몸은 완벽한 캐릭터를 완성했다. #‘더 게임’ 손현주 손현주는 카멜레온 같은 배우다. 매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선보이는 그는 ‘더 게임’을 통해 화려한 코믹 연기의 진가를 발휘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떻게 편집이 되든지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는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 그는 신체강탈이라는 소재를 다룬 무거운 영화를 개성 넘치는 연기로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조연을 주연의 경지로 끌어올린 그의 연기는 놀랍다. # ‘강철중’ 유해진 ‘블랙잭’으로 영화계를 데뷔한 유해진은 ‘주유소 습격사건’을 시작으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 후 ‘광복절 특사’, ‘혈의 누’, ‘왕의 남자’, ‘타짜’까지 개성 넘치는 조연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울림을 지닌 배우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임팩트를 주는 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사 한마디 한 마디가 관객의 눈귀를 사로잡을 만큼 감칠맛이 난다. ‘공공의 적’ 1편을 통해 관객들을 웃음 바다로 만들었던 유해진은 ‘강철중:공공의 적 1-1’에서도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며 빛을 발했다. 사진= ‘검은 집’, ‘’경축!우리 사랑’,’화려한 휴가’, ‘리턴’,’ 더 게임’, ‘강철중’ 서울신문NTN 정유진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조오련 “독도사랑 마음 묶는 계기 됐으면…”

    조오련 “독도사랑 마음 묶는 계기 됐으면…”

    “국민의 독도사랑 마음을 묶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던 조오련(56)씨가 건국 60주년과 광복 63주년을 맞아 독도가 우리땅임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1일부터 수영으로 ‘독도 33바퀴 돌기’에 나선다. 조씨는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 조국의 바다 독도 주변에서 열심히 수영을 하면서 건국과 광복의 참의미를 되새기고 ‘독도가 대한민국 땅’임을 만천하에 다시금 알리겠다.”고 밝혔다. 그는 1일부터 한 달간 독도 서도 어민 숙소에서 독도 주민 김성도(68)씨 부부 등과 함께 머물면서 수영으로 섬 주변을 33바퀴 돈다. 그가 이번 행사로 33바퀴를 설정한 것은 1919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33명의 민족대표를 기리기 위한 것. 조씨는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말도 안 되는 개 짖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다.”고 격하게 반응한 뒤 “일본은 지금이라도 당장 독도 야욕을 깨끗이 버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도를 한바퀴 도는 거리는 4㎞ 정도이지만 풍랑과 조류 영향 등을 감안하면 실제 수영거리는 6∼7㎞ 된다. 따라서 조씨가 독도 주변 바다 33바퀴를 돌면 수영거리는 무려 190∼230㎞가 넘는다. 그는 이번 행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지난 2월11일부터 최근까지 제주도 서귀포에서 맹훈련을 한 뒤 지난달 28일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입도했다. 하지만 독도의 기상여건이 좋지 않아 성공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조씨는 “모든 환경적 어려움을 독도사랑 정신력으로 극복해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뒤 “국민들도 저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독도 사랑 의지를 더욱 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북도는 조씨의 독도 회영(廻泳)이 끝나는 8월 유명가수들이 출연하는 독도 회영 축하음악회를 독도 현지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서재필 기념관 문연다

    독립운동가인 서재필(1864∼1951) 박사 기념관이 다음달 8일 고향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서 문을 연다.29일 서재필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24억원을 들인 서재필기념관이 7월8일 서재필기념공원에서 기념사업회와 광복회, 지자체, 주민 등이 모인 가운데 문을 연다. 기념관은 2004년 완공된 뒤 운영비 부담과 관리주체 등을 둘러싸고 전남도와 보성군, 기념사업회측이 의견을 달리해 뒤늦게 개관한다. 서재필기념관은 지난해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보훈시설로 지정돼 해마다 2000만원을 지원받는다. 또 전남도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000만원을 운영비로 받는다. 기념사업회가 공원 운영을 맡는다. 기념공원에는 4만 5700㎡에 서 박사 기념관과 독립문 모형, 사당, 조각공원, 동상, 야외공연장 등이 세워졌다. 기념관에는 8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된다.보성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추락하는 ‘MB 노믹스’

    추락하는 ‘MB 노믹스’

    실용정부의 ‘이름표’인 747 공약이 전면 수정될 전망이다.747은 7% 경제성장,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도달, 세계 7대 강국 부상을 일컫는 말이다. 정부는 오는 8월15일 ‘선진한국 종합비전’을 발표하면서 5% 후반대의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제시할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최근 원자재가 상승과 국제 경기 하락 등 대외 여건 악화에다 대운하 건설 포기, 신규 고용 창출의 어려움 등으로 성장동력마저 잃고 있는 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다. ●장기목표 5%대에 머물 듯 25일 현재 실용정부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이후 6개월 동안 올해 경제 목표치를 수정한 것은 무려 4차례.7% 성장에서 슬그머니 6% 안팎으로 내려왔다가 급기야 4% 후반까지 떨어졌다. 여기에 대통령자문기구인 미래기획위원회는 오는 8월15일 광복절에 맞춰 새로운 국가비전과 더불어 747 공약 대신 실현 가능한 전망치를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미래비전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최대한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를 많이 창출했을 때 우리 경제가 장기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성장률은 5.8% 정도”라면서 “물가 역시 하반기에 안정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반기보다 높아질 가능성도 높은 만큼, 성장률 상향보다 경제 체질 개선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미래기획위원회 민간위원도 “정권 초반에 실용정부가 향후 5년 동안 국정을 운영할 비전을 발표하는 것인 만큼, 각종 경제지표를 현실화하고 정치·사회 등 전 분야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에 무릎 꿇은 ‘무늬만 실용’ 7% 성장률에 대한 의문은 대선 전부터 제기됐다.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 등을 봤을 때 5% 이상의 성장은 ‘비경제학적’인 선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기획재정부 등 정부 관계자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평가는 이와 다르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은 올 경제성장률을 4.8%,LG경제연구원은 4.6%, 삼성경제연구소는 4.7% 등으로 각각 제시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전망치는 4.1%에 그치고 있다. 자칫 소비자물가 상승률에도 못미치는 성장률이 나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성장률 수치를 뛰어넘은 것은 환란 이후에는 카드채 문제로 경제난을 겪었던 2003년뿐이다. 당시 소비자물가는 환율 문제까지 겹쳐 전년대비 3.5% 오른 반면 성장률은 3.1%였다. 민간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747 공약이라는 비현실적인 정치 공약을 통해 현 정부가 집권했기 때문에 과도한 성장드라이브 정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는 정부의 환율상승 유도에 따른 물가 상승, 그리고 서민 고통 가중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영표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아름다운 간판 2008] (5)간판이 살아나야 경제가 산다

    [아름다운 간판 2008] (5)간판이 살아나야 경제가 산다

    간판이 방문객들의 지갑을 열고 있다. 간판 정비는 단순히 상점의 겉모습만 아름답게 바꾸는 게 아니다. 끊어지던 방문객의 발길을 되돌리고, 등지려던 업주들의 마음을 다잡는다. 이처럼 부산 중구 남포동 광복로는 간판 정비를 통해 침체된 지역경제 회복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광복로의 현재…방문객·매출 ‘쑥쑥’ “간판을 바꾸니 방문객과 매출이 쑥쑥 올라가네요.” 꽃이 만개한 고목처럼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광복로에 ‘희망의 바람’이 불고 있다. 광복로는 1970∼80년대 부산을 대표하는 번화가였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0년대 말 이후 해운대·광안리 등 새로운 상권들이 부상하고, 시청·경찰청 등 주요 공공기관들이 빠져나가면서 상권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하지만 광복로는 간판·거리 정비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간판과 거리의 변화상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방문객 증가로 이어진 것. 부산 중구청에 따르면 실제 광복로를 찾은 방문객 수는 간판 정비 이전인 2006년에 비해 하루 평균 최대 40% 이상 늘어났다.2년 전에는 평균 방문객 수가 평일 8000명, 주말 6만 3000명에 그쳤으나 지난달에는 평일 1만명, 주말 9만명으로 각각 집계됐다. 방문객의 증가는 이곳 상점들의 매출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과점을 운영하는 김정욱 사장은 요즈음 매출전표를 계산하면서 저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고 한다. 최근 3개월 동안 매출이 이전에 비해 10%가량 뛰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과거와 비교하면 대박 수준”이라면서 “손님들이 간판과 거리가 짜임새 있고 예쁘다고 칭찬을 많이 하고,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단골손님들도 다시 찾기 시작했다.”면서 껄껄 웃었다. 매출이 오른 상점은 비단 이곳뿐만 아니다.15년째 피자가게를 운영 중인 김익태 사장도 맞장구를 친다. 그는 광복로 입주업체들의 대표자인 주민지원협의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은 “광복로에 있는 상점 대부분의 매출이 10% 이상 올랐다.”면서 “볼거리가 늘어나니 방문객이 증가하고, 장사가 안 돼 떠나려던 상인들도 다시 짐보따리를 풀고 있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광복로의 1년전…화두는 조화로운 ‘S라인’ 지난 2월 부산 중구청과 광복로 상인들은 장장 3년에 걸친 ‘광복로 시범가로 조성사업’을 마무리했다. 부산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용두산공원 아래 광복로 750m 구간과 올해로 13회째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PIFF) 광장 주변 240m 구간 등이 대상이었다. 우선 광복로에 들어서면 부드럽게 굴곡을 이룬 ‘S라인’ 도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곧게 뻗은 기존 2차선 일방통행로를 S자형 1차선으로 바꾼 것이다. 차도의 폭을 줄이는 대신 보도는 넓혔다. 여유공간 곳곳에는 분수·벤치·화단 등 쉼터가 조성됐다. 보기에도 시원한 야자수, 강아지 모양의 앙증맞은 의자, 나무를 형상화한 가로등 등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사람들이 직접 쓴 ‘추억남기기’ 조형물 위에서는 무언극인 ‘마임’ 등 다양한 문화예술공연이 펼쳐져 발길을 붙잡는다. 차도 역시 시커먼 아스팔트 대신 분홍빛 화강석으로 바뀌었다. 장애인들이 불편을 호소했던 차도나 보도의 높은 턱도 사라졌다. 이와 함께 거리 양 옆으로는 깔끔하게 정비된 상점들의 간판이 눈길을 끈다. 간판에는 산과 바다를 상징하는 녹색과 파란색 형광띠가 새겨져 광복로의 야경을 책임지고 있다. 광복로에 입주한 450개 상점 중 75%인 336곳이 이같은 간판 정비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이를 통해 건물을 도배하다시피했던 1300여개 간판은 900여개로 30% 이상 줄었다. 오세욱 중구청 토목계장은 “S자형 도로로 도시 미관을 살릴 뿐만 아니라, 차의 속력은 줄이는 대신 보행자가 안전하게 걸으며 쇼핑할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담고 있다.”면서 “정비 사업에 국비 30억원을 포함해 모두 85억원이 들었지만, 효과는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광복로의 미래…주민들 자발적 규제로 ‘쾌청’ 광복로는 지난달 관광특구로도 선정됐다. 이처럼 가시적인 성과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데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도 밑바탕됐다. 광복로 일대의 건물·상가·주민 대표들은 ‘시범가로지원협의회’를 만들어 머리를 맞댔다. 정비사업 자체를 꺼리는 이웃들도 직접 설득했다.3년간 130여차례의 회의를 통해 견해 차이를 좁혔다. 사업이 끝난 뒤에는 ‘간판감시위원’을 자체적으로 뽑아 간판이 무질서하게 난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사업 초기에는 호두껍질같이 단단했던 사람들도 이젠 형님, 아우하고 지내며 마음의 문을 열었다.”면서 “간판이 커야 잘 된다는 생각을 바꾸니 건물과 거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방문객과 매출까지 늘어 살맛까지 느끼게 된 민·관이 만든 최고의 합작품”이라고 만족해했다. 오는 2013년 광복로 주변에는 107층짜리 엔터테인먼트단지인 롯데월드가 들어설 예정이다. 과거에는 상권을 위축시킬 ‘악재’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시너지 효과를 불러올 ‘호재’로 간주된다. 오 계장은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타이완의 경우 100층짜리 건물이 위치한 지역의 하루 평균 유동인구가 25만∼30만명에 이른다.”면서 “광복로는 접근성이 뛰어나고 편의시설까지 잘 갖춰져 방문객 증가는 물론, 외국인 관광객 등의 추가 유입 가능성도 높다.”고 기대했다. 부산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대한민국 60돌 미래로 세계로] (3) 경제대국을 향해 뛴다

    [대한민국 60돌 미래로 세계로] (3) 경제대국을 향해 뛴다

    건국 60년의 경제는 한마디로 ‘한강의 기적’으로 요약된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이적인 기록은 한국 경제의 저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한국 경제는 또다른 도전을 요구받고 있다. 도전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다.60년간 우리 경제의 변천과 산업현장의 주역들인 기업의 눈부신 업적 등을 되돌아 보고 글로벌의 파고를 넘는 ‘60년의 미래’를 짚어본다. ■ 소비자물가·경제규모로 본 과거 60년 달걀 1개면 서울시내에서 버스를 5.5번 탈 수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달걀이 아주 귀했던 1948년 건국 시절의 얘기다. 당시 달걀 1개의 가격은 24.8원(圓)으로 서울 시내버스 요금 4.5원(圓)의 5.5배였다. 건국 60년을 맞은 2008년은 어떨까. 2008년에는 거꾸로 달걀을 5.5개를 모아야만 서울서 버스 한번 탈 수 있다. 달걀 한개 가격이 2008년 현재 163원, 서울시내 버스비는 900원으로 역전됐기 때문이다. 달걀은 60년 전에 비해 6572배(두 차례 화폐개혁 반영해 2008년 가격×1000)가 올랐지만, 서울시내 버스비는 달걀 상승분보다 3배 이상 더 올라 20만 배가 됐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신문이 19일 한국은행에 요청해 1948년 건국 이후 60년 간의 생필품 가격변동을 살펴본 결과다. 한은과 통계청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는 60년 동안 1만 1216배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쇠고기 5만 2920배·쌀 1만 7943배 올라 상품별로 쇠고기(500g)는 255.8원(圓)에서 5만 2920배가 오른 1만 3537원이다. 돼지고기는 237.5원(圓)에서 8458원으로 올라 3만 5612배가 뛰었다.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이 오른 것이다. 한은 물가통계국은 “1945년에는 쇠고기는 15.8원인 반면 돼지고기는 21.7원으로 더 비쌌다.”면서 “일하는 소가 먹는 소로 인식이 바뀌면서 1948년부터 가격이 역전됐다.”고 설명했다. 소주는 83원에서 942원으로 1만 1349배, 밀가루는 102.1원에서 1454원으로 1만 4241배,80㎏ 쌀은 8875원에서 15만 9242원으로 1만 7943배 올랐다. 금 1g은 1401.6원에서 3만 1489원으로 2만 2466배 올랐다. 특히 광복부터 건국까지 3년간은 주요 생필품이 약 11배(1000%)가 올라, 살인적인 물가상승으로 고통받았던 서민들의 애환을 짐작할 수 있다. 주식인 쌀은 3년간 286.5원에서 8875원으로 약 31배가 상승했고, 서울시내 버스요금도 0.16원에서 4.5원으로 28배가 상승했다. 소비자물가지수로 살펴보면 1945년부터 ‘광복 60년’간 소비자물가는 약 11만배 상승했지만,1948년부터 ‘건국 60년’은 1만 2000배로 대폭 축소된다. 이 역시 건국 직전 3년간의 인플레이션을 짐작하게 한다. ●1인당 국민소득 1만9053배로 확대 건국이후 60년간 경제규모는 1만 9053배(달러 기준으로는 746배)로 확대됐다.6·25 전쟁이 끝난 해이자 통계작성 시점인 1953년 473억원(13억달러)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07년에 901조 1886억원(9699억달러)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1인당 국민소득도 1953년 67달러에서 1995년 1만달러를 돌파했고,2007년에는 12년 만에 2만달러를 돌파하는 기념비적인 해가 됐다. 경제성장률은 1954년 5.6%였고 2007년에는 5.0%였다. 자동차 총보유대수는 2008년 5월 현재 1667만대로 1945년의 7326대와 비교해 2200배가 증가했다. 자동차 생산 대수는 1955년 7대에서 2007년 408만 6308대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선박 건조량은 1만 8955대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 교수가 보는 미래 60년 지역마다 고부가가치 산업 분산 통해 4만달러 시대로 “우리나라 휴대전화가 세계 ‘넘버 원’인 것은 국내의 소비자들이 가장 깐깐하기 때문입니다. 시민과 업체가 끊임없이 함께 토론하고 대안을 찾은 결과죠. 이는 집중을 통해 ‘2만달러 시대’를 맞이했다면 다양한 목소리들의 분산을 통해 4만달러 시대로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모든 유행어는 시대의 조류를 품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이 유행어로 떠오른 것은 20대 비정규직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는 전직 말지 기자인 박권일씨와 함께 저서 ‘88만원 세대’를 내놓으면서 시대의 화두를 던진 경제학자다. 우 교수는 지난 60년의 한국 경제를 ‘압축성장’이라는 단어로 정리한다‘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궈낼 수 있었지만 경제적인 불균형이란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불균형을 푸는 게 새로운 도약의 시작이라고 우 교수는 지적한다. 이는 유럽의 예와 같이 국가도, 시장도 아닌 ‘시민’이 경제 활동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크게 국가가 운영하는 경제와 시장 중심 경제로 구분한다면 스위스나 덴마크 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협동조합 등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적 기업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4만달러 시대’를 맞았습니다. 자원투입형 경제는 이미 ‘과거의 유산’이라는 뜻이죠.”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 시대에서,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한국 경제의 수준을 감안했을 때 물량을 투입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기존의 구조는 불가능하다는 게 우 교수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우 교수는 기존의 양을 늘리는 ‘집합의 경제’가 아닌 질을 높이기 위한 ‘분산의 경제’ 체제로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좋은 국민경제’의 틀을 갖추는 것은 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분산의 경제는 구나 동 등이 실제로 한 단위가 돼 경제 활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또한 지역 경제가 자생력을 갖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 충분한 사회적 투자가 진행돼야 하죠. 그러나 부동산 투기로 3∼4년 만에 몇 배의 이윤을 챙길 수 있는 상황에서 누가 투자하고 연구하겠습니까. 결국 독점과 투기를 줄이지 않고서는 좋은 국민경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규모를 키워 2만달러 시대를 맞았다면 사회를 더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의사소통을 활발히 진행시켜야 4만달러 시대로 갈 수 있습니다.” 우 교수는 일본의 사례를 조언한다.90년대 초부터 10년 동안의 헤이세이 공황을 겪었지만 교토 등 지역 경제는 중앙과 달리 탄탄하게 유지됐다. 그래서 다시 안정적인 성장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역이 중심이 된 분산의 경제는 자연스레 대규모 공장 대신 경쟁력 있는 소규모 공장 체제로 재편된다. 이때의 자원은 석유가 아닌 지식과 문화다. 우 교수는 “우리는 훌륭한 전통을 물려받은 문화국가인 데다 지난 30년 동안 공업을 발전시켜 본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면서 “스위스의 시계브랜드인 스와치 등과 같이 지역에 맞는 정밀기계나 소재, 정밀화학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일으킨다면 전 국토에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성장 중시<60·70년대>→세계화·IMF체제<90년대 초·중반>→분배<2000년대 전후> 경제 패러다임 변화 ‘성장, 분배, 그리고 세계화.’ 우리나라 경제의 60년을 농축하고 있는 키워드다. 1960년대 경제 개발은 성장을 위한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였다고 볼 수 있다.1·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경제도약의 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1970년대는 중화학공업과 수출 중심의 정책이 추진됐다. 지역간 균형발전을 목표로 새마을운동이 도입된 것도 이 때다. 매달 대통령의 수출확대회의 주재,10대 종합상사 설립 등 전폭적 지지로 10년간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46%였다. 지난 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의 위업을 달성했다. 반면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한 수출지상주의는 대기업이 재벌로 성장하는 토대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성장이 이데올로기화되면서 정치·사회발전은 우선 순위에서 밀렸고,1·2차 석유파동과 만성적인 물가상승 등으로 ‘복부인’이란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10·26사태 직후인 1980년 경제성장률은 -2.1%,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8.7%였다. 자연스레 안정성장에 초점이 맞춰졌고, 연 평균 물가성장률을 5%의 틀로 만든 것도 이때부터였다.80년대에는 북방외교 추진, 과거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 및 교역확대, 해외투자 증가 등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무리한 성장정책과 노동력 착취 등은 노사분규를 태동시키는 요인이 됐다. 1993년 등장한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흐름이 경제정책을 주도했다.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고 우리나라는 다음해인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이에 따른 외환규제 완화는 외환위기를 부르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외환위기는 경제의 전반적인 패러다임을 확 바꿨다. 전면적 구조개혁이 이어졌고 무리한 성장정책은 안정적인 성장으로, 한편으로는 ‘성장의 그늘’로 여겨진 소외계층에 대한 분배정책이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았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분배정책에 치중했던 참여정부는 2003년 경제성장률이 3.1%로 뚝 떨어지면서 저성장 논란에 휩싸였다. 동시에 성장과 분배, 그리고 세계화가 서로 맞물리면서 정책적 우선순위를 놓고 적잖은 논쟁을 불러왔다. 분배중심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성장과 글로벌 경제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연평균 7%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7대 경제강국을 의미하는 ‘747공약’도 이런 토대에서 출발하고 있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섬유·가전으로 성장…반도체·車로 글로벌 기업 배출 80년대 이후 수출 효자 ‘선박’ 대표기업 수출품 변천사 1980년대의 일이다. 삼성전자는 한 식당 주인에게서 변상 요구를 받았다. 세탁기가 막혔으니 물어내라는 요구였다. 서비스팀이 출동해 조사해보니 배수관에 감자 껍질이 무수히 쌓여 있었다. 세탁기에 감자를 넣고 돌리면 껍질이 잘 벗겨진다는 경험담이 입소문을 타면서 식당 주인들이 너도나도 감자를 ‘빤’ 것이다. 처음엔 “황당한 요구”라며 실소하던 삼성전자는 그러나 결국 세탁기를 고쳐줘야 했다. 제품 설명서에 ‘빨랫감 외에는 넣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년 뒤 미국에서 애완고양이를 목욕시킨 뒤 털을 말리려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가 고양이를 잃은 할머니에게 이 전자레인지를 수출한 일본 가전업체가 수억달러를 물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역시 ‘음식물 외에는 넣지 말라.’는 경고를 빠뜨린 탓이었다. 일련의 이 사건들은 삼성을 비롯해 앞만 보고 내달리던 국내 기업들에 ‘소비자의 권익’을 의식하게 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기업의 ‘사회 책임’을 고민하게 했다. ●철광석·포목·오징어로 버텼던 ‘기업 태동기’ 한국 기업의 역사는 1896년 서울 배오개 고개에 둥지를 틀고 옷감 등을 내다팔던 박승직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두산그룹 효시다. 구인회상점(1931년,LG 모태), 삼성상회(1938년, 삼성 모태), 현대토건사(1947년, 현대 모태), 선경직물(1953년,SK 모태) 등도 잇따라 태동했다. 하지만 근대 기업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것은 1950년대 중반이라는 게 대체적 견해다. 미국 달러화에 의지한 ‘원조 경제’ 시대였다. 김성수 경희대 교수는 이 시기 경제의 특징을 “돈벌이 자체에 집착한 천민형 자본주의”라고 정의했다. 주된 수출품도 가공하지 않은 원재료였다. 지식경제부 통계에 따르면 1961년 수출 1,2위 상품은 철광석(530만달러)과 중석(510만달러)이었다. 오징어(5위)와 활선어(6위)도 상위권에 포진했다. ●섬유·가발·가전 꽃피운 ‘고도성장기’ 70년대 들어 한국 경제는 질적으로 도약했다. 중공업 비중이 1975년 처음으로 경공업과 같아지더니 이내 역전했다.‘국산 1호’ 타이틀을 건 치약, 라디오, 전화기, 흑백TV, 세탁기, 자동차 등이 줄줄이 쏟아졌다. 중동 특수가 일면서 건설업도 급성장했다.70년대가 LG(당시 금성)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현대의 전성기였다. 그래도 수출 저변은 섬유·의류산업이 떠받쳤다. 1970년 섬유는 단일품목으로 무려 3억달러 이상을 수출하며 1위 품목으로 올라섰다. 그 유명한 가발(3위) 수출도 이 때 이뤄졌다. 정부 주도 ‘계획경제’의 빛과 그림자가 심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반도체·자동차·선박 앞세운 ‘글로벌 성장기’ 80년대 말의 3저(低) 호황과 88서울올림픽 개최에 힘입어 정부와 기업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노사분규도 급증했지만 ‘고도성장’에 묻혔다.1995년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의 평균 매출 증가율(27.7%)과 영업이익률(11.3%)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최고 기록이다. 산업구조에도 또 한차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반도체, 선박, 컴퓨터, 철강 등이 수출 주력상품으로 전면 부상했다. 반도체는 1992년 수출 1위 품목(68억달러)으로 처음 올라선 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동차도 ‘포니 신화’를 연 지 20년 만인 1995년, 연간 100만대 수출을 돌파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듯이’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경제가 크게 휘청댔다. 재계 판도도 바뀌었다.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재계 서열 1위(자산 기준)는 현대(54조원)였다. 삼성은 52조원으로 2위였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올 4월, 삼성(144조원)은 현대차(74조원)와의 격차를 크게 벌리며 부동의 1위 자리를 굳혔다. 롯데가 ‘빅5’로 올라선 것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해서다. 반면, 대우, 한라, 진로, 고합, 해태 등 10개가 넘는 재벌그룹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벤처 버블 붕괴’의 고통도 뒤따랐다. 정구현 삼성경제연구소장은 “해외 현지생산 확대 등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이 본궤도에 오르고 주주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것은 이 시기의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IT 경쟁력으로 中 추격 막아야” 미래 성장모델은 “회사가 10년,20년 후에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이다.”(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5년 전에는 미래를 준비할 시간으로 10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5년간을 여러분(임직원)이 그냥 까먹었다. 이대로 가면 5년 안에 망한다.”(최태원 SK그룹 회장) “해외 진출과 인수합병(M&A)에 대비해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실행역량을 강화하라.”(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미래를 걱정하는 대기업 총수들의 발언에는 한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냉혹한 ‘비즈니스 정글’의 생존명제가 녹아있다. 멈추는 순간 쓰러지고마는 굴렁쇠처럼 진화의 노력을 계속하지 않는 기업은 언제건 과거의 영화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변화·혁신 없인 지속적 성장 어려워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55년 국내 100대 기업에 들었던 곳 가운데 50년이 흐른 2005년에도 순위에 들어있는 곳(상호변경 포함)은 CJ,LG화학, 현대해상, 한진중공업, 대림산업, 한화, 한국전력 등 7개에 불과했다. 기업집단으로 따지면 64년 10대그룹 중 지금도 10대그룹인 곳은 삼성과 LG뿐이다. 변화와 혁신은 기업들이 지속적인 성장을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특히 앞으로는 한국기업 고유의 성장모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따라 배울 수 있는 글로벌 기업들이 많았다. 미국식이나 일본 또는 유럽식 경영모델 중 적합한 것을 선택해 따라가면 됐다. 실제로 많은 국내 기업들이 이런 벤치마킹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다르다. 김신(경희대 교수) 한국기업경영학회장은 국내기업에 특징적으로 부과된 과제를 ▲소유와 경영에서 어떠한 기업행태를 만들어 내느냐 ▲한국기업이 처한 기업지배구조를 어떠한 방식으로 선진화하느냐 ▲초일류 기업으로서 어떠한 글로벌 경영전략을 수립하느냐 ▲이제까지 세계가 보지 못했던 혁신 제품을 어떻게 개발하느냐 ▲선도기업으로서 국제가격과 기술주도권을 어떻게 획득하느냐 ▲한국형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구현하느냐로 요약했다. 김 회장은 “지금까지의 성공적인 발전상을 앞으로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기업의 장점과 단점,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를 철저히 분석하고 여기에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변수들을 집어넣어 우리만의 새로운 기업모형과 경영이론을 창출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활용도에 미래경쟁력 달려 이와 함께 많은 전문가들이 국내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요소로 첫머리에 꼽는 것이 세계의 공장 중국의 활용이다. 거의 모든 산업부문에서 중국의 맹추격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버릴 것과 살릴 것을 명확히 구분해 강점있는 분야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산업기술재단 전망에 따르면 현재 한국이 중국보다 우위에 있는 이동통신장비, 디지털TV, 냉연강판 등은 2010년 중국 우위로 역전될 것으로 보인다.MP3플레이어 등에서는 이미 2004년을 전후로 중국에 역전을 허용한 상태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들에 대한 진출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을 지칭하는 ‘브릭스(BRICs)’ 국가들을 필두로 베트남·인도네시아·터키·멕시코 등이 꼽힌다.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비상하고 있는 중동 등 산유국도 국내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해 쟁취해야 하는 주력시장이다. ●규모 큰 세계시장에 집중 투자 글로벌 성장 가능성이 높고 세계시장 규모가 큰 분야에 대한 집중투자도 중요하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제품·서비스와 정보기술(IT)·생명공학(BT) 등의 결합·융합 부문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특히 우리나라가 강점을 갖고 있는 IT 분야의 경쟁력을 지렛대 삼아 에너지, 헬스케어, 환경 등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태양광·연료전지 등을 핵심으로 하는 에너지산업, 건강과 장수의 꿈을 실현하는 생명산업, 개인과 기업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부티크·투자은행 등이 유망분야로 꼽힌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이 16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85세.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경기공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근무 중이던 1943년 3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무기 공급 책임을 맡았다. 황 선생은 이듬해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무기를 밀반출해 상해 임시정부 연락원에게 인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황인기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미국 LA 자택. 발인은 20일 오전 9시(현지시간).LA 글렌데일 공동묘지.
  • [사설] 독립지사 국적회복 만시지탄이다

    국적도 없이 구천을 떠돌던 독립지사들의 국적이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비로소 회복될 것 같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마련 중이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선생 등 200여명의 애국독립지사들이 꿈에서도 그리던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만시지탄이다.‘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은 3대가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우스갯말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환갑을 맞고서야 바로잡히게 될 셈인가. 순국선열들이 왜 무국적자가 됐는지 따져보면 그 말뜻을 알 수 있다. 일제가 호적제를 개편하자 지사들은 당연히 등재를 거부했다. 광복후 이승만정권은 일본호적이 있는 사람에게만 호적을 부여했다. 결과적으로 무국적 독립지사의 후손들을 재산상속은 물론 직업 선택, 교육 혜택도 못 받는 ‘법적 사생아’로 만든 것이다. 지난 17대 국회에서 국적법 개정이 추진됐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미 법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우리 국민으로 여겨왔으며 사망자에게 소급해서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국적법 체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법조계의 주장을 뛰어넘지 못한 탓이다. 조선족, 고려족 등의 국적문제로 비화될 소지에 대한 정부의 우려도 있었다. 다 좋다. 하지만 왜곡된 역사진실을 바로 세우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첫 단추는 순국 독립애국지사에 대한 국적 회복이 되어야 한다.
  • 「핫·팬츠」의 뜨거운 맛 본 노총각

    노총각이 아슬아슬한 아가씨들의 「핫·팬츠」를 보고가다 전봇대를 들이받아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어 입원. 경남 양주군에 사는 노총각 김모씨(31)는 모처럼 부산구경에 나선 것까지는 좋았으나, 광복동을 누비고 다니는 아슬아슬한「핫·팬츠」를 보고는 정신이 혼돈. 입맛을 다시며 한눈을 팔며 걷다가 그만 전주를 들이받았던 것. 김씨는 결국 얼굴 등에 타박상을 입고 시내 모병원으로 실려가는 신세가 되었다는데…. -「핫·팬츠」의 뜨거운 맛 보았군. <부산> [선데이서울 71년 9월 5일호 제4권 35호 통권 제 152호]
  • 신채호 선생 국적 찾는다

    정부가 무(無)국적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 등록부’(옛 호적부)에 등재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 관계자는 15일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가족관계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는 ‘순국선열, 애국지사에 한하여 다른 법령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 등록을 창설할 수 있다.’는 조항(제6조 4항)이 신설됐다. 이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선생 등 무국적 독립운동가 200여명이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돼 대한민국 국적을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이들은 지난 1912년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호적제를 개편하자 일본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거부했고 광복 후 정부는 일제시대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해 사실상 호적도 없는 무국적자가 됐다. 보훈처는 “일제 강점시 일본 호적 등재를 거부하거나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호적을 취득하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이 가족관계 등록부를 창설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며 개정안이 마련된 배경을 설명했다. 보훈처는 이어 “가족관계 등록부는 생존해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작성되므로 옛 호적법에 따라 호적이 없는 독립유공자는 이 등록부를 만들 수 없었다.”며 “현재까지 등록부가 존재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해 명예 선양과 그 후손들의 자긍심 고취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이 개정안은 관련 부처의 의견 수렴을 거쳐 이달 말 또는 다음달 중으로 예고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과 한나라당 임인배 의원 등이 ‘일제시대에 무국적 상태에 있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사망한 사람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국적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해를 넘겨 자동 폐기됐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태조 어진, 전주로 돌아간다

    태조 어진, 전주로 돌아간다

    태조의 어진(御眞·임금의 화상·보물 제931호)이 2년10개월 만에 전주로 돌아온다. 문화재청은 최근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를 열고 보수작업이 끝난 태조 어진의 봉안 장소를 전북 전주시 경원동 경기전(사적 제339호)으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전주시는 태조 어진을 안전하게 영구 보존할 수 있는 전시관을 경기전 안에 건립하기로 했다. 태조 어진 전시관은 지하 1층, 지상 1층,560㎡ 규모로 항온, 항습, 도난방지 등 첨단 기능을 두루 갖출 예정이다. 전시관이 완공되기 전에는 국립전주박물관 수장고에 기탁 보관된다. 고종 9년(1872년)에 제작된 태조 어진은 1410년 건축된 경기전에 보관해 오다가 2005년 9월 문화재청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고궁박물관 전시를 위해 잠시 가져갔었다. 그러나 어진 일부가 훼손된 사실을 인지한 문화재청이 경기전의 열악한 보존 환경 등을 이유로 돌려 주지 않아 전주시와 문화채청간에 갈등을 빚어 왔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건국 60주년] 북한을 바라보는 눈

    광복 직후 찬탁·반탁 논쟁으로 촉발된 좌우 대립은 한국전쟁을 유발했다. 남과 북은 서로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키워왔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통일교육은 북한을 ‘적’이 아닌 ‘동무’로 보는 이른바 ‘어깨동무세대’를 낳았다. 전쟁 직후 남한사람들은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동시에 가지게 됐고, 이승만 정부는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이를 활용했다. 각급 학교에선 6월만 되면 반공웅변대회가 열렸고, 누구보다 우렁차게 공산당의 잔인함을 호소하면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가정으로 발송되는 성적표에 반공의식을 평가한 학교도 있었다.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19혁명을 거치면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평화통일론은 5·16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싹이 잘리고 만다.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과 1·21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으로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 정부는 북한의 노농적위대에 대응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병역법 개정을 통해 병역기피자를 본격적으로 색출하기 시작했고, 주민등록법을 개정해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다. 이듬해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교련이 들어갔다. 이 시기 매년 6월 열리는 반공사생대회에서 인민군의 머리에 뿔을 그리지 않은 어린이들은 ‘아차’하며 울상을 짓기도 했다. 전 사회적 동원과 반공 시스템이 정교해지던 1972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을 다녀오고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사회 전반에는 당장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하지만 유신체제로 돌입하면서 이런 기대는 무너졌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북한을 재조명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나아가 1989년에는 문익환 목사에 이어 임수경씨의 방북으로 정부의 공안정국 조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남북의 거리는 가깝게 줄어든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해 ‘민족·민주·인간화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통일교육을 시작했다.2000년 6·15 1차 남북정상회담과 2007년 10·4 2차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무너뜨렸고 본격적인 민간교류와 함께 더 이상 북한을 ‘적’이 아닌 원래부터 ‘동반자’로 생각하는 세대가 탄생했다. 남과 북의 정상이 껴안는 것부터 보기 시작했던 어깨동무세대들은 6월 사생대회에서 증오와 광기가 가득한 적대적인 풍경이 아닌 남과 북이 손잡고 들판을 노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장형우 김정은기자 zangzak@seoul.co.kr
  • [대한민국 60돌-미래로 세계로] 질곡과 희망의 사회상

    [대한민국 60돌-미래로 세계로] 질곡과 희망의 사회상

    1948년 38선 이남에 수립된 대한민국을 유일한 정통성을 가진 정부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2008년을 ‘건국 60주년’이라고 부른다. 반면 남과 북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이들은 ‘정부수립 60주년’이라 칭한다. 이런 시각차 속에 60년을 달려온 우리 사회의 질곡과 역동을 전문가들과 함께 짚어봤다. 도움주신 분들: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박한용 연구실장,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임영인 소장(신부), 성공회대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박승호 교수, 성신여대 사학과 홍석률 교수 대한민국의 경제규모는 광복 후 8년이 지난 1953년에서야 처음 집계됐다. 당시 국내총생산(GDP)은 13억달러,1인당 국민소득(GNI)은 67달러로 그야말로 최빈국이었다. 하지만 60년간 전 국민이 합심해 이뤄낸 성과는 눈부시다.2007년 GDP는 9571억달러로 세계 13위,GNI는 2만 45달러로 53년에 비해 300배 가까이 증가했다. 급격한 경제성장의 요인으로 1962년부터 정부가 전면에 나서 실행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빼놓을 수 없다.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정책은 이후 30년 가까운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강원대 경제학과 이병천 교수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발전과 달리 재벌, 국가의 지원과 보호, 근로대중의 헌신의 결과로 한국의 산업화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경제구조에 적지 않은 악영향도 남겼다. 국가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까지도 강제했다. 대표적인 예가 미니스커트·장발 단속이었다. 문화영역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대중가수였다. 서수남·하청일의 ‘껌 씹는 아가씨’는 껌도 마음대로 씹지 못하는 처지였다.‘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정권의 요구를 거절했던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은 대마초 사건만 나면 이름이 올려지곤 했다. 이른바 ‘가요 대학살’의 해인 1975년 신중현의 ‘미인’은 가사가 저속해서,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시의에 적절치 않다는 등의 이유로 222곡의 금지곡에 포함됐다. ‘산업 역군’의 일원이었던 청년 봉제공 전태일은 법마저도 지키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법전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성공회대 김수행 석좌교수는 당시를 “세계 최저의 임금수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악의 산업재해, 세계 최하위의 사회보장 등 노예 같은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눈부신 경제성장을 대신해 물가폭등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박승호 교수는 “박정희 정권에서 확립돼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진 ‘개발과 독재의 공생 관계’는 서민의 삶을 넉넉하게 한 게 목표가 아니라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 서민들을 희생시켰다.”고 말했다. 관치금융, 정경유착의 고리는 튼튼해졌다. 이는 올해 초 온 국민의 관심사였던 삼성특검에서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냈다. 국내산업의 대외의존도가 작은 외부의 충격에도 크게 흔들릴 만큼 높아진 결과 외환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난 30년 동안의 고도성장은 우리사회에 산업화와 민주화, 사회질서유지와 문화적 다양성의 인정, 그리고 성장과 분배라는 어려운 문제들을 던져 놓았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조희연 교수는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차이를 넘어 객관적인 답을 찾아야 한다.”면서 “독재와 산업화, 미국의 원조, 대중의 강렬한 동의 등 다양한 얼굴을 가진 복합성과 모순성의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졌다.”고 진단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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