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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격투기 진출 추성훈 ‘마케팅의 천재’

    미국 격투기 진출 추성훈 ‘마케팅의 천재’

    최근 미국 격투기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에 진출한 추성훈(33·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이 4일 “힘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있다.”고 각오를 다졌다.  추성훈은 이날 낮 12시 30분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체중 감량으로 인한 근력 상실 우려 및 동서양인의 기본적인 체력 차이를 묻는 질문에 “유도를 하던 시절부터 동양인이라 힘이 약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며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훈련을 한다면 근력에서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현했다. UFC와 6경기를 계약한 후 미들급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는 현재 알려진 몸무게(88㎏)보다 4㎏이상 체중을 감량해야 한다.  이어 추성훈은 다른 UFC 미들급 선수와의 경쟁에 대해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내가 기량이 가장 뒤처진다.”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위를 목표로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추성훈이 활약할 미들급에는 ‘절대 강자’인 앤더슨 실바(34·브라질)를 비롯,반더레이 실바(32·브라질) 네이트 마쿼트(30·미국) 등 뛰어난 선수가 많다.  얼마전 UFC 무대에 데뷔한 데니스 강도 같은 체급이어서 그와의 재대결 가능성도 점쳐진다. 추성훈은 데니스 강과의 재대결에 대해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지난 시합과 결과가 같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추성훈은 2007년 10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K-1 히어로즈 85㎏급 슈퍼파이트에서 1라운드 4분45초 만에 데니스 강을 KO로 제압한 적이 있다.  그는 UFC만의 특별한 경기장인 8각형 모양의 ‘옥타곤 링’ 적응과 관련 “일본 도장 안에 그런 경기장을 만들어서 연습할 계획”이라며 “철창에서 경기를 해본 일본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훈련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기존 활약하던 일본 격투기 단체 K-1과 달리 UFC에서만 허용하고 있는 팔꿈치 공격에 대한 연습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추성훈은 이날 ‘K-1시절 약한 상대만 골라 붙으려했다’는 비난과 관련 “주어진 대전표대로 시합을 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그러고는 “약한 상대만 골라서 시합하기를 원했다면 UFC와 계약을 했겠느냐.”며 “항상 강한 상대와 싸우고 싶었다.도전하는 마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그동안 도복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동시에 달고 출전하던 것에 대해 “도복을 계속 입을 지는 모르겠지만 UFC에서도 2개의 국기를 동시에 사용할 것”이라고 전했다.그러나 일본 국적이기 때문에 ‘추성훈’ 대신 ‘아키야마 요시히로’라는 일본 이름으로 출전을 하게 될 예정이다.추성훈은 7~8월쯤 UFC 데뷔전을 치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함께 이날 기자회견장에서는 추성훈 측의 ‘애국심 마케팅’과 관련한 우려의 소리도 들렸다.한 격투기 평론가는 추성훈의 소속사에 대해 “마케팅의 귀재”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 평론가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회견은 3·1절 전후에,UFC 데뷔전은 8·15 광복절 시점에 (하는 것으로 봤을 때) 추성훈은 정말 마케팅의 귀재인 것 같다.”며 애국심을 자극해 이슈화를 시키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추성훈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 유도 대표팀에서 버림받고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끊임없이 표현해 국내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그에 대한 일본 광고 섭외가 거의 없는 것에 비해,지난해에만 3개 이상의 국내 광고를 찍으며 인기를 증명했다.  한편 이날 추성훈은 한국말로 첫 인사를 건네며 기자회견을 시작했으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기자들의 질의응답을 일본어 통역을 통해 진행했다.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영상 / 나우뉴스팀 김상인VJ bowwow@seoul.co.kr [다른 기사 보러가기] 김태동 통곡 먹혔나 ‘금산분리 완화’ 무산 MB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레드 썬!’ 힘들어진 예비군 훈련장…“실전 感 잡히네” 영어마을 향하는 행안부 행정인턴 ‘부럽네’ 개울가서 먹던 추억의 맛…옥천 ‘생선국수’ 돈 쓸 곳 많은데… “아빠가 울고 있다”
  • 미국 격투기 진출 추성훈 ‘마케팅의 천재’

    최근 미국 격투기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에 진출한 추성훈(33·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이 4일 “힘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있다.”고 각오를 다졌다. 추성훈은 이날 낮 12시 30분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체중 감량으로 인한 근력 상실 우려 및 동서양인의 기본적인 체력 차이를 묻는 질문에 “유도를 하던 시절부터 동양인이라 힘이 약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며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훈련을 한다면 근력에서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현했다. UFC와 6경기를 계약한 후 미들급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는 현재 알려진 몸무게(88㎏)보다 4㎏이상 체중을 감량해야 한다. 이어 추성훈은 다른 UFC 미들급 선수와의 경쟁에 대해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내가 기량이 가장 뒤처진다.”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위를 목표로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추성훈이 활약할 미들급에는 ‘절대 강자’인 앤더슨 실바(34·브라질)를 비롯,반더레이 실바(32·브라질) 네이트 마쿼트(30·미국) 등 뛰어난 선수가 많다. 얼마전 UFC 무대에 데뷔한 데니스 강도 같은 체급이어서 그와의 재대결 가능성도 점쳐진다. 추성훈은 데니스 강과의 재대결에 대해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지난 시합과 결과가 같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추성훈은 2007년 10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K-1 히어로즈 85㎏급 슈퍼파이트에서 1라운드 4분45초 만에 데니스 강을 KO로 제압한 적이 있다. 그는 UFC만의 특별한 경기장인 8각형 모양의 ‘옥타곤 링’ 적응과 관련 “일본 도장 안에 그런 경기장을 만들어서 연습할 계획”이라며 “철창에서 경기를 해본 일본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훈련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기존 활약하던 일본 격투기 단체 K-1과 달리 UFC에서만 허용하고 있는 팔꿈치 공격에 대한 연습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추성훈은 이날 ‘K-1시절 약한 상대만 골라 붙으려했다’는 비난과 관련 “주어진 대전표대로 시합을 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그러고는 “약한 상대만 골라서 시합하기를 원했다면 UFC와 계약을 했겠느냐.”며 “항상 강한 상대와 싸우고 싶었다.도전하는 마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그동안 도복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동시에 달고 출전하던 것에 대해 “도복을 계속 입을 지는 모르겠지만 UFC에서도 2개의 국기를 동시에 사용할 것”이라고 전했다.그러나 일본 국적이기 때문에 ‘추성훈’ 대신 ‘아키야마 요시히로’라는 일본 이름으로 출전을 하게 될 예정이다.추성훈은 7~8월쯤 UFC 데뷔전을 치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함께 이날 기자회견장에서는 추성훈 측의 ‘애국심 마케팅’과 관련한 우려의 소리도 들렸다.한 격투기 평론가는 추성훈의 소속사에 대해 “마케팅의 귀재”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 평론가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회견은 3·1절 전후에,UFC 데뷔전은 8·15 광복절 시점에 (하는 것으로 봤을 때) 추성훈은 정말 마케팅의 귀재인 것 같다.”며 애국심을 자극해 이슈화를 시키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추성훈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 유도 대표팀에서 버림받고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끊임없이 표현해 국내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그에 대한 일본 광고 섭외가 거의 없는 것에 비해,지난해에만 3개 이상의 국내 광고를 찍으며 인기를 증명했다. 한편 이날 추성훈은 한국말로 첫 인사를 건네며 기자회견을 시작했으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기자들의 질의응답을 일본어 통역을 통해 진행했다. 글 /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김상인VJ bowwow@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의병장 허겸선생 손부의 ‘씁쓸한 3·1절’

    의병장 허겸선생 손부의 ‘씁쓸한 3·1절’

    “이번에 돌아가게 되면 언제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을까요?” 3·1절 아침 김순옥(60·여)씨는 씁쓸한 기분으로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침을 맞았다.김씨는 의병장인 허겸 선생의 손자며느리다. 허겸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반대 상소를 올리고 400명을 규합해 경기도 연천 등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해 중어학원·부민단 설립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 끝에 1939년 생을 마감했다. 허겸 선생의 동생은 1907년 서울진공작전을 편 뒤 옥사한 왕산 허위 선생이다.(본지 2006년 8월14일자 보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왕산로가 허위 선생의 호에서 유래했다. 중국 국적으로 독립유공자의 후손인 김씨는 특별귀화 신청을 내기 위해 지난해 12월1일 3개월 단기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다.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맞은 첫 국경일인 3·1절은 김씨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다. 바로 발급받은 비자가 만료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입국하자마자 국적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중국공적서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받아줄 수 없다는 정부 당국의 답변만 들었다. “지난해 5월 아들이 국적을 회복했어요. 당시에는 족보에 이름이 오른 걸 보고 중국공적서류가 없어도 특별귀화를 받아 줬는데… 이번에 신청한 저는 안 된다고 하네요.” 평생 나라탓을 해 본 적이 없는 집안의 며느리답게 김씨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지난 3개월 동안 귀화 신청을 위해 한 노력을 설명할 때에는 절박함이 묻어 났다. 법무부가 요구하는 중국공적서류를 받으려면 한국돈으로 1000만원 이상이 들 것으로 추산되고, 그나마 그 돈을 내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다른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우선 한국 국적을 회복한 아들과의 의학적 친자 확인을 통해 자신이 허겸 선생의 손부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정부는 불허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부모의 자녀가 한국 국적을 원할 경우에만 유전자 검사에 의한 증명이 가능할 뿐, 반대의 경우에는 안 된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족보 원부를 어렵게 공수했다. 만주에서 운명한 허겸 선생의 묘를 돌본 게 김씨와 남편 허준도씨였기에 이미 족보에는 이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 있었다. 역시 정부는 불허했다. 김씨의 아들이 국적을 회복하던 지난해까지만 해도 증거로 활용됐던 족보였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2006년부터 매년 광복절을 즈음해 법무부는 중국·러시아·일본 국적으로 살아온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특별귀화 허가증을 줬다. 2006년에는 33명, 2007년에는 32명, 지난해에는 22명이 이렇게 국적을 회복했다. 김씨의 시누이인 허금숙씨를 비롯한 친척들도 이 때 특별귀화 허가증을 받았다. 정부는 이들이 조상의 묘소와 생가를 찾는 사진까지 배포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이들보다 늦게 특별귀화를 신청한 김씨는 시할아버지가 1968년에 받은 대통령표창과 1991년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국장 사본만 만지작거리며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김씨는 지난해 한국에 들어올 때 중국내 한국 영사관에서 받았던 비자에 선명하게 찍힌 ‘유공자 후손’이라는 글귀를 한참 쳐다본 뒤 힘없이 말했다. “한국 영사관도 정부 기관 중 하나일 텐데 여기서 해 준 ‘유공자 후손’ 인정도 한국에서는 효력이 없군요. 다음 번에는 이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보고 듣고 즐기세요]

    ■ 연극·뮤지컬 ●경남 창녕군 칠곡면 8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계획에 없는 아이를 임신한 부부.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만 아이 한 명 키우기에 턱없이 모자란 살림살이에 한숨만 나온다. 돈 없으면 아이도 못 낳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김선영 이주원 등 출연. 1만 5000~2만원.(02)518-6687. ●청춘 18대1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1945년 광복 한 달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청춘들의 뜨거운 열정, 혹은 무모한 객기. 극작가 한아름·연출가 서재형 콤비의 독특한 무대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민대식 이진희 등 출연. 2만 5000원.(02)708-5111. ●아이러브유 6일~9월13일 KT&G상상아트홀. 첫 만남에서 연애, 결혼, 육아, 노년의 로맨스 등 사랑에 관한 모든 에피소드를 담았다. 4명의 배우가 60개의 배역을 쉴새없이 소화하는 모습을 지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남경주 난아 등 출연.3만5000~5만원.(02)501-7888. ■ 대중음악 ●여행스케치 대학로 컴백쇼2 15일까지 평일 오후 7시55분, 토 오후 4시33분·7시55분, 일 오후 5시55분(월 쉼) 대학로 스타시티 5만원.(02)745-1575. ●조규찬 소극장 콘서트 15일까지 목·금 오후 7시30분, 토 오후 4시·7시30분, 일요일 오후 6시(월~수 쉼) 대학로 신연아트홀 5만원.(02)745-1575. ●추가열 라이브 콘서트 6~8일 금 오후 7시30분, 토·일 오후 5시 문화일보홀 4만~5만원.(031)871-5044. ■ 전시 ●김구림 개인전 3~21일 김재선갤러리. ‘음양 시리즈’ 중 소개되지 않았던 신작들과 최근 몇 년간의 드로잉 소품이 전시된다. 음양시리즈는 사실과 추상, 자연과 문명, 있음과 없음, 실제와 허상, 실제와 이미지 등 대립되는 요소들이 강하게 마찰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새롭게 통일된 제3의 이미지다. (02)3445-5438. ●독일의 ‘디갤러리’ 한국지점 개관전 4월 3일까지. 디 갤러리는 197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한 독일의 대표적 화랑. 이탈리아,미국,스페인에 이어 한국에 화랑을 열었다. 개관전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게오르그 바젤리츠,베르너 뷔트너,A.R.팽크 등 독일 현대 미술 거장들의 회화 및 조각 작품 30여 점이 전시된다.(02)3447-0049. ■ 국악·클래식 ●명창 김혜란이 걸어온 소리인생 ‘가인(歌人)’ 6~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한국민요연구회 이사장인 김혜란 명창의 소리 인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6일은 제자들과 함께 부르는 ‘우리 비나리’, 제자들이 들려 주는 ‘스승을 위한 노래-가인(歌人)’ 등이 이어진다. 7일에는 민요, 단소 병창, 이생강류 산조합주 등 다양한 국악 공연으로 꾸몄다. 5만~10만원. (02)926-4177. ●마티아스 괴르네 리사이틀 13일 오후 8시, 14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체임버홀. 독일 가곡의 거장, 첼로처럼 노래하는 바리톤으로 평가받는 마티아스 괴르네가 선사하는 독일 연가곡의 진수. 정겨운 슈베르트, 베토벤의 가곡을 느낄 수 있는 기회. 6만~12만원. (02)399-1114~6. ●정명훈과 함께하는 로마 한인교회를 위한 자선음악회 7일 오후 7시 연세중앙교회 문화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이탈리아 로마 한인교회를 거쳐간 성악가가 성가곡과 오페라 ‘토스카’ ‘세비야의 이발사’ 등의 주요 아리아 등을 들려 준다. 특별출연하는 정명훈은 일부 성가곡을 반주한다. 1만~2만원. (02)565-1394.
  • 간도 독립운동가 180명 ‘햇빛’

    간도 독립운동가 180명 ‘햇빛’

    일제강점기 간도 지역 독립운동가 201명 각각의 활동과 추방 당시 이들의 미공개 사진 등이 담긴 재류(체류)금지 처분 문서들이 발굴됐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 힘쓴 양기탁 선생 등 이미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21명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행적을 포함, 역사 뒤편에서 묻혀 있던 무명(無名) 독립운동가 180명의 활동 내역, 직업, 검거 당시 연령 등도 새로 확인됐다. 국가보훈처는 26일 당시 중국에 있던 일본영사관들이 작성한 ‘본방인 재류금지 관계잡건(本邦人在留禁止關係雜件)’ 4000여장을 수집·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광복 이후 60여년만에 발굴된 이번 문건은 일본 교토(京都)대 이승엽 교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지난해 12월 국가보훈처에 전달했다. ‘본방인’은 일본인을 지칭하며 재류 금지는 일제강점기 특정 지역에 거주하지 못하게 추방하는 행정처분이다. 중국에 사는 일본인을 통제하고자 도입됐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중국, 특히 간도(間島), 길림(吉林) 등 동만주 지역에 있던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추방하는 제도로 악용됐다.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직업은 초등학교 교감부터 교사, 농민, 품팔이까지 다양했다. 연령대도 10대부터 60대까지 두루 참여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간도 지역에서 독립기성회로 활동했던 최우화(체포 당시 36세·약종상), 이홍준(29·지나관립여학교 교사), 김하수(60·서당교사) 등은 1919년 4월 민심 소요 우려를 이유로 일본 간도총영사가 재류금지 처분을 내렸다. 또 1921년 11월 만세시위 운동을 계획한 천도교청년동맹회 회원 8명도 체포돼 1922년 1월13일부터 각각 3년동안 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 양기탁 선생이 일제 천진영사관으로부터 1918년 12월11일부터 3년간 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도 새로 알려졌다. 처분 사유로는 양 선생이 만주지역 조선인의 독립운동 기반 조성을 위해 한족생계회 결성을 추진했으며 중국 혁명당원들과 길림, 장춘, 상해 등에서 동지를 규합했다고 제시돼 있다. 1910년대 간도 지역에서의 양 선생의 구체적 활동 내역을 파악할 단초가 된다. 발굴 문서에는 일제 영사경찰이 찍은 인물 사진 174명분이 포함돼 있다. 이승엽 교수는 본지와 국제전화 통화에서 “재판기록이 소실됐거나 판결문은 있지만 조서가 남아 있지 않아 활동 상황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간도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한인들의 활동상도 이 기록을 토대로 보다 소상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옛 서대문 형무소 최초 건축도면 발견

    옛 서대문 형무소 최초 건축도면 발견

    서대문형무소가 최초 건축도면에 따라 원형대로 복원된다. 이는 지난달 서대문형무소의 건축도면이 발견된데 따른 것이다. 그동안 진행됐던 서대문형무소 보수 공사가 복원으로 방향을 바꿨다. 지난달 15일 발견된 건축도면은 서대문형무소의 1936년도 원형 도면이다. 격벽장(수감자 체육시설), 구치감(미결수 수용소) 등의 모든 시설현황이 나와 있다. 형무소로서의 완전한 형태를 갖춘 도면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대문·서울시·문화재청 747억원 들여 복원 추진 서대문구는 24일 “서울시, 문화재청과 함께 이 도면을 토대로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도면은 구가 형무소역사관 종합발전계획을 수립, 추진하던 중 국가기록원에서 발견됐다. 구는 서대문형무소 보수사업을 위해 지난해 10월 자연환경연구소에 학술용역을 맡겼다. 연구소가 국가기록물을 검토하던 중 이 도면을 찾은 것이다. 문화재청이 523억원, 서울시가 224억원을 투입하고 서대문구가 총괄 공사를 맡아 원형 그대로 되살리기로 했다. 사적 324호인 서대문형무소는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 탄압기관이다. 서대문구 의주로 247(현저동 101번지)에 있다. 지난 한해 57만여명이 이곳을 찾아 독립투사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구는 이달부터 설계에 들어가 2020년까지 복원사업을 마칠 예정이다. 형무소역사관 원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대한제국 관보(국가의 공고 기관지)와 조선 총독부 관보, 국가기록원 총독부 기록물 등 각종 사료와 도면 문헌조사에 역점을 두었다. 또 광복회와 독립운동 관련단체,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고증절차를 진행하는 계획을 세웠다. ●3·1절 맞이 체험행사도 마련 복원사업은 크게 3단계로 나뉘어 추진된다. 1단계 사업은 2011년까지 시행된다. 구는 총 144억원을 들여 청사 외벽 백색타일을 없애고, 벽돌을 이용해 원형대로 재구성한다. 현재 역사관에 소장된 무쇠솥 등을 이용해 취사장을 복원한다. 수용자들의 운동시설인 격벽장을 다시 만들어 체험시설로 활용한다. 또 독립운동가 유족과 유품 기증자 증언을 토대로 영상물도 제작한다. 2015년까지 진행될 2단계 사업에서는 주차장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공장터, 담장, 망루 등을 다시 설치한다. 2020년 마무리될 3단계 사업에서는 전시시설뿐 아니라 교육, 학술세미나 공간을 확대한다. 구는 이와 함께 제90주년 3·1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다음달 1일 오후 1시30분, 오후 3시30분에 독립만세 재현 체험행사가 준비돼 있다. 예약하면 독립운동가 복장으로 독립선언서 낭독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밖에 OX 문제 풀기, 음악회, 얼굴에 태극기 그려넣기, 태극기 그리기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신상영 서대문구 문화체육과 팀장은 “형무소 복원사업이 끝나면 서대문구가 역사·문화 관광 명소로 한층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신경림 누항 나들이] 옷과 밥과 자유 또는 집

    [신경림 누항 나들이] 옷과 밥과 자유 또는 집

    김 소월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에 ‘옷과 밥과 자유’가 있다. 사람의 생존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를 빌되 ‘주’ 자리에 ‘자유’를 넣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 자유는 바로 주의 개념이나 같다. “초산 지나 적유령/ 넘어 선다// 짐실은 저 나귀는 왜 넘니?”의 행간에 일제의 강점으로 집을 빼앗기고 자유를 찾아 험한 재 적유령을 넘어 만주로 가는 피난민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생뚱맞은 말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 나귀에 초라한 이삿짐을 싣고 삼삼오오 적유령을 넘는 피난민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들의 수중에는 남은 돈도 별로 없고 만주로 간다지만 거처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 되었던 곳에서 대책없이 쫓겨나는 철거민들의 처지나 심경 또한 어찌 이들과 같지 않았으랴. 재개발의 필요성을 덮어놓고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그 입장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도 역시 자해 위협으로 시너를 준비하고 점거 농성을 하는 둥 살기 위한 온갖 몸부림을 다했을 것이다. 적유령을 넘자 해도 노자가 필요하고 만주에 가서도 정착할 최소한의 자금은 있어야 하니까. 이 과정에서 귀한 목숨 여섯을 잃었다. 당국은 사건의 내용을 철저히 밝힌다며 뜸을 들였지만 누구의 눈에도 진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철거민들은 제시된 보상금 가지고는 도저히 이주해 살 길을 마련할 수 없으니까 점거 농성을 벌인 것이고, 농성 벌이고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경찰이 이를 성급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과실치사다. 그런데도 검찰은 가해자인 경찰은 내버려 두고 철거민 농성자만 구속자 5명을 포함하여 20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면서 강조한 것이 “공권력은 존중되어야 한다.”였다. 당연히 공권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그 공권력이 정당성을 가졌을 때만 존중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 제 강점기의 공권력은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옛 영국 통치하의 남아공화국에서는 당국의 조정에 따라 광부들이 술을 먹고 춤을 추는 이른바 마인댄스를 피하거나 비판하면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다스렸다. 물론 이 비유는 공권력이 국민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을 때 존중되기 어렵다는 극단적인 예로 우리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연쇄 살인범 강호순 사건이 터졌을 때 당국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마침내 이것을 용산 참사의 여론 무마, 말하자면 국민들의 눈을 딴 데로 돌리는 호재로 삼으려는 어리석은 시도가 있게 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는 이때까지 내세웠던 공권력이 당당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 되고 만다. 과실치사인 용산 참사를 광주학살 못지않은 국민학살로 과장하는 막말이 등장하고 시정잡배의 싸움질 같은 행태가 정치판을 휩쓰는 데는 이런 그릇된 공권력 행사와 남의 말에는 아예 귀를 막는 벽창호식 리더십이 나무와 넝쿨처럼 얽혀 있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계층이나 종교를 넘어 온 겨레가 슬퍼하는 것을 보는 감동은 크다. 194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이후 처음 보는 광경이다. 그분이 평소 우리 사회의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과 생각을 같이하고 삶을 같이하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생각과 처지가 다른 사람과도 소통하고 보듬는 그분의 통합적 리더십은 바로 여기서 생겨난 것이리라. 문득 공권력도 “밭에는 밭 곡식/ 논에는 물베/ 눌하게 익어서 숙으러졌”(‘옷과 밥과 자유’)지만 나귀에 짐을 싣고 “초산 지나 적유령”을 넘어서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듬으면서 그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배려할 때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 것이요, 광복 직후처럼 좌우로 갈갈이 찢어져 서로 물고 뜯는 우리 사회에도 화해와 통합의 훈훈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 신경림
  • 근대문학 거장 명예회복…합법적 출판 길 열려

    근대문학 거장 명예회복…합법적 출판 길 열려

    남북한이 교류가 사실상 단절되어 있는 상황에서 월북작가 10명이 남긴 작품의 저작권을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 일괄 위임받은 것은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남북 문학 연구 교류의 활성화 측면에서, 또 출판 질서의 정상화 측면에서도 모두 고무적인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이번에 저작권 위임을 받은 월북작가들은 한국 근현대문학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작품을 읽는 것도 법적으로 금기시됐다. 그럼에도 문학도 사이에서 이들 근대문학사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인사들은 필수 과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백석과 이용악의 시를 읽지 않고 서정시의 세계로 들어설 수 없었고, 이기영과 한설야의 소설을 읽지 않은 채 소설의 본령과 창작의 리얼리즘을 얘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주성’, ‘여승’, ‘모닥불’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백석은 평안도의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모더니즘 시세계의 지평을 끌어올린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고향’을 쓴 이기영, ‘이녕’을 쓴 한설야 역시 근대문학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최명익은 ‘심문’, ‘장삼이사’ 등으로 심리주의 소설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희곡작가이자 시인인 조영출은 광복 전 ‘요지경 세상(세상은 요지경)’, ‘꿈꾸는 백마강’, ‘알뜰한 당신’, ‘신라의 달밤’ 등 대중가요 작사자로 널리 알려졌다. 또 동시를 썼던 윤복진의 작품들은 지금도 동요로서 애창되고 있다. 김재용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문학사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가진 작가들이 저작권료를 받게 됐다는 것은 이들의 명예회복이자 출판 질서의 상식적 회복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 의미있는 대목은 남북 문학 교류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이다. 이번 저작권 일괄 위임으로 남북의 연구 성과가 교류되며, 나아가 공동 연구도 진행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특히 안회남, 한설야와 올해 중 일괄 위임이 예정된 이태준 등은 북쪽에서도 한동안 금기시됐던 작가였다. 이들까지 저작권 위임 대상에 포함된 것은 북쪽의 남북 민간 교류에 대한 전향적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남북 정부 당국간 대화가 완전히 끊기는 등 관계의 경색 양상은 뚜렷하지만, 문학으로 남북 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믿음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월북 작가의 후손이 수면위로 나타난 것도 부수적인 성과이다. 월북 작가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거취와 행적 자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에 계약을 맺은 주체는 모두 월북작가들의 후손들이다.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남북에서 문학적 공통의 의식을 갖고 우리 근현대 문학을 경계선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련 작가의 자료를 북쪽에서 직접 구할 수도 있고 남쪽의 연구 성과를 북쪽에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그동안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싶어도 협의의 길이 막혀서 본의 아니게 ‘불법 무단 출판’이라는 오명을 받았던 각 출판사 역시 찜찜함을 털어버리고 상식적 수준의 저작권료를 내고 떳떳하게 책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추모] 추기경이 남긴 가르침

    [김수환 추기경 추모] 추기경이 남긴 가르침

    ■ 최종태 조각가 병 중에도 남 배려한 휴머니스트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만난 것이 40년 전인 69년 말입니다. 나는 이화여대 가톨릭학생회의 지도교수였는데, 학생들의 일부 행사가 관행에서 벗어났습니다. 당황해 하는데, 행사장인 이화여대 중강당에 추기경님이 장익 신부님과 함께 행사 5분 전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염려가 물안개처럼 사라지고 행사는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 때 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저 분만 만나면 모든 것을 풀 수 있겠다!’ 이후 열 살 위 큰 형님하고 노는 것처럼 추기경님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 분이 서울교구장직을 놓으시고 혜화동에 계실 때입니다. 동서남북 이야기가 번지다가 문득 마음 비우는 데로 이어졌습니다. 마음 비우는 일이 잘 안되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나도 그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죽어야 돼.” 하시고 또 “(사람이 죽은 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15분이 지나야 돼.” 그래서 모처럼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그 시절의 비서 수녀님이 오라 해서 여의도성모병원에 갔습니다. 추기경님은 옷을 깨끗이 입고 반듯이 앉아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30분 내내 방문객을 즐겁게 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은 며칠 전 아침 미사를 빠뜨렸다고 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인 즉 ‘한국의 추기경께서 늦잠 자다가 아침미사를 빠뜨렸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실이 폭소판이 됐는데 추기경께서 내게 속삭이는 말씀이 “밖에 나가서는 얘기하지 마!” 하십니다. 그래서 “말로가 아니라 내가 만천하에다 글로 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서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저 분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기쁘게 해 주려고 그러셨구나 싶어서 가슴이 울컥하였습니다. 인천 소래의 사르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피정의 집 바깥 산에 14처 조각을 설치할 때입니다. 현장에는 전날 오신 추기경께서 나오셨습니다. ‘예수 사형선고를 받으심’ 제1처의 예수님의 이마에 월계수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추기경님이 돌작품을 꼼꼼히 보고 계시는데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이마에 원래는 가시관을 만들었는데 어쩐지 마음에 안 들어 지우고 월계수 가지를 붙였습니다. 혹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추기경님 말씀이 “아니다. 이 사형수에게는 이미 승리가 예고된 집행이기 때문에 승리의 월계관을 미리 붙인들 무어가 잘못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용기를 얻어서 나는 한국의 교회미술 개척의 탄탄대로를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고치라고 하셨다면 오늘의 최종태는 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누가 있어 세상에다 그 큰 사랑을 또 쏟으실까요. 파도를 잠재운 큰 강물 같은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의 어깨에는 너무도 큰 짐이 실려 있었습니다. 다 벗으시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 추기경 구명운동으로 사형 면한 양동화씨 “억울한 사람들의 든든한 성벽” “엄혹했던 시절, 추기경님은 스스로 고난을 감내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큰 어른의 표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양동화(51)씨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어렸다. 1986년 그가 전두환 정권 최대의 간첩조작사건인 ‘구미(歐美)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그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가톨릭 교회의 7성사 가운데 세례성사 다음에 받는 의식)를 주러 온 것을 계기로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펼침으로써 1988년 무기징역 감형, 1998년에는 광복절 특사로 나올 수 있게 도와 준 이가 김 추기경이었다. 양씨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은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기대는 곳,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가 지친 몸을 의탁하는 곳이었다. 양씨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1989년부터 출소 전까지 김 추기경과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모든 내용이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보고돼 자세한 얘기는 쓰지 못했다. “고생하고 있으니 좋은 일 있을 거다. 고통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다.”가 전부였다. 양씨는 “그 말을 거듭 새기며 수감 생활을 견뎠다.”고 회고했다. 편지를 주고 받다 보니 10년간 양씨의 옥바라지를 해온 연인 민연자씨에 대해서도 김 추기경은 알고 있었다. 1998년 양씨가 출소한 직후 찾아간 자리에서 김 추기경은 다짜고짜 “결혼은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었다. “이제 해야죠.”란 대답에 추기경은 “주례는?” 했다. 조심스레 부탁을 하니 추기경은 기다렸다는 듯 “날짜를 잡아 봐라.”고 말했다. 그렇게 김 추기경은 양씨의 결혼식 주례까지 자청했다. 출소 4개월 뒤 양씨는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 16일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들은 양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은연 중에 추기경님은 오래 사실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생전에 추기경님과 ‘인중이 길어 장수하실 것’이라는 농담도 주고 받았습니다.” 18일 명동성당을 찾아 김 추기경의 시신을 보고서야 양씨는 가슴 속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것을 느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날 빈소를 방문하는 것을 보며 김 추기경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고 그는 말했다. 양씨는 “추기경님은 그동안의 고난을 피할 길이 있으셨는 데도 온몸으로 묵묵히 받아 내셨다. 그분이 오래 앓아 오신 불면증은 그분의 남모를 고통의 방증”이라면서 “그래서 많은 분들이 추기경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부재(不在)를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한 총리 “정무직 봉급 반납 움직임”

    한승수 국무총리는 13일 최근 경제위기 상황과 관련, “추가적인 고통분담으로 정무직 공무원들 일부에서 봉급 반납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이날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한나라당 김정훈 의원이 “총리가 최소 1년만이라도 봉급의 10%를 기부해 일자리 창출에 동참할 의사가 없느냐.”라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이와 관련, 광복회는 이날 오전 광복회관에서 이사진과 전국 시·도지부장이 참석한 가운데 연석회의를 열고 회원들이 받고 있는 연금의 10%를 헌납키로 하는 등 ‘10% 나눔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한 총리는 이날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경제위기 극복 방안으로 거론되는 10조원 규모 비실명 채권의 한시적 발행 가능성에 대해 “비실명 채권은 편법 증여, 상속 등에 사용돼 사회적 투명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면서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정부와 한나라당이 흉악범의 얼굴과 이름 등을 공개하기로 한 것에 대해 “중대한 살인이고, 공익상 필요가 명확하고, 증거관계가 명확해 오판의 여지가 없는 경우, 수사기관에 중립적 위원회를 둬 심사를 거쳐 공개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구혜영 김지훈기자 koohy@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탁영의 선생 별세

    일본강점기 광복군에 입대해 민족독립운동을 고취했던 애국지사 탁영의 선생이 13일 별세했다. 87세. 1922년 강원 횡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3년 일제에 강제로 징집당해 중국 난징(南京)지구 주둔 일본군 부대에 배속됐다. 1944년 5월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했다. 1945년 4월 충칭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 경호부대인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고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돼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고인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민영순씨와 4남2녀. 빈소는 원주 기독교병원. 발인 15일 오전 7시. (033)744-3969.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그림 가치는 함께 나눌 때 더 빛나죠”

    “그림 한 점에 녹아 있는 소중한 가치는 모두가 함께 공유할 때 그 빛을 더욱 발합니다.” 40여년간 모아온 미술품 수천 점을 아낌없이 기증하는 재일교포 사업가 하정웅(70)씨는 말한다. 하씨는 1993년부터 6000점이 넘는 미술품을 국내에 기증했다. 명예관장으로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을 비롯해 전북도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영·호남 곳곳에서 그가 기증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들 작품을 한데 묶어 ‘남도 벨트’라 부른다. 하씨는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을 맞고서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부모는 일자리를 찾아 공사판을 떠돌았다. 어려운 형편에 명문 아키타 공고에 들어갔지만 졸업 이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시험조차 볼 수 없었다. 그림을 곧잘 그리던 하씨는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끝내 꿈을 접었다. 그는 “한국인이라는 차별도, 시험도 없는 그림이 좋았는데 어머니가 ‘그림으로는 밥 벌이가 힘들다.’면서 물감이며 캔버스를 모두 불태워버렸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후 하씨는 무작정 도쿄로 가 1963년 가전제품 가게를 냈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컬러TV가 불티나게 팔렸다. 살림이 나아지면서 하씨는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화황(全和凰)과 조양규(曺良奎), 손아유(孫雅由) 등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을 주로 수집해 온 하씨의 컬렉션은 ‘기도’와 ‘망향’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연결된다.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차별과 멸시를 이겨내야 했던 그의 삶이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셈이다. 하씨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정신이야말로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불행한 역사 속에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을 그림으로 공감하고 함께 고민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shlim@seoul.co.kr
  • [서울성곽 복원 현장] 서울성곽 복원되면

    ‘600년 고도(古都) 서울을 지켜온 서울 성곽이 되살아나고 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축성기술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호국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과 함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지은 뒤 재위 4년만인 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도성 둘레에 성곽을 쌓아 이듬해 서울 성곽의 원형을 완성했다. 서울 성곽은 총연장 18㎞에 이르는 대형급 성곽으로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그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뒀다. 서울성의 정문은 남대문으로 지난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화마에 휩싸여 소실된 국보1호 ‘숭례문’이다. 그래서 숭례문의 소실은 국보1호를 잃어버렸다는 아픔 외에도 600년 고도인 서울의 정문을 태워버렸다는 역사적 슬픔까지 담고 있다. 남문인 숭례문과 함께 동쪽엔 흥인지문, 서쪽엔 돈의문, 북쪽엔 숙청문을 둬 4대문으로 하고, 동북쪽에 홍화문, 동남쪽엔 광희문, 서북쪽에 창의문, 서남쪽에 소덕문을 둬 4소문으로 했다.북대문인 숙청문과 동소문인 홍화문은 나중에 숙정문과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성곽의 평지는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산지는 돌로 쌓은 석성으로 만들어졌는다. 세종 때 토성을 허물고 석성으로 고쳐 쌓아 공격 및 방어 시설을 늘렸다. 이어 숙종 30년(1704년)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성벽면이 수직이 되도록 고쳤는데, 이는 축성기술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성곽의 대부분이 허물어졌다. 일제는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찻길을 만들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벽 일부를 헐어버렸다. 이듬해 용산과 종로를 잇는 전찻길을 낸다며 남대문 주변의 성곽까지 허물었다. 이후 서대문과 혜화문마저 헐어내면서 평지의 성곽은 모두 철거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북악산 일대와 종로구 누상·삼청동,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경내 등 극히 일부 지역에만 성벽이 남게 돼 광복 이후 최근까지도 성곽이 어느 지역을 지나갔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서울시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조사로 숭례문과 흥인지문 주변 성곽이 발견되고, 동대문운동장에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동대문의 치성을 발굴해내면서 서울 성곽의 윤곽을 되살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현재는 거의 모든 구간을 찾아내 복원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서울시는 성곽의 복원이 끝나는 대로 경기 수원시의 화성에 이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2·8독립선언 90주년 7일 도쿄서 기념식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재일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을 선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제90주년 기념식이 7일 오전 11시 재일본 한국YMCA(이사장 김용성) 주관으로 도쿄 한국 YMCA에서 열린다. 기념식에는 정부대표로 김양 국가보훈처장을 비롯, 김영일 광복회장, 권철현 주일대사, 허맹도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중앙본부 부단장 등 주요 인사와 광복회원, 교민 등 25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2·8독립선언은 한국 학생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재일 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최팔용, 송계백 선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고 유학생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8일 도쿄 한복판에서 조국 독립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2·8선언은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됐으며, 1920년대 청년·학생의 항일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탑골공원 → 종묘공원 어르신 씁쓸한 대이동

    탑골공원 → 종묘공원 어르신 씁쓸한 대이동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을 가득 메웠던 노인들이 어느새부턴가 사라졌다. 어르신들의 대표적 휴식처였던 탑골공원의 정비 및 단속강화로 노인들이 인근 종묘공원과 노인복지센터로 발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약한 빗방울이 흩날린 5일 오전 드넓은 탑골공원에는 단 4명의 노인들이 대화 상대도 없이 서성거렸다. 박모(73)씨는 “요즘은 노인복지센터에서 점심을 먹고 종묘공원으로 가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라면서 “중간에 있는 탑골공원은 일종의 경유지”라고 말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 약 500m 떨어진 종묘공원에는 궂은 날씨에도 바둑과 장기를 즐기는 노인들로 붐볐다. 그 주위를 빙 둘러싸고 훈수를 두는 노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적게는 하루 2000명에서 많게는 3000명이 찾는다는 종묘공원은 탑골공원을 대신해 노인들의 ‘마지막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시 노인복지센터도 하루 3000여명(현재 등록회원 4만 1000명)의 노인이 찾는다. 무료급식과 동아리 활동을 위해 노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복지센터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종묘공원 경득수 관리소장은 “그쪽(탑골공원)에 있던 어르신들이 지금은 모두 종묘공원으로 온다고 보면 된다.”면서 “이제 ‘탑골공원은 재미없다.’는 인식이 노인들 사이에서 일반화됐다.”고 말했다. 탑골공원 일일 노인 방문객은 공원 추산 최소 30명에서 최대 60명에 불과하다. 탑골공원 손병희 관리소장은 “노인 방문객이 5년 전에 비해 10분의1로 줄어든 셈”이라고 했다. 노인들이 탑골공원을 찾지 않는 이유는 지난 2001년 3·1운동 진원지를 기념하기 위해 성역화 작업이 진행돼 무료배식이 사라지고 일체의 위락행위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성역화 이후 한때 광복회원들이 탑골공원에 1시간 이상 머무는 노인들을 단속하기도 했다. 현재 광복회 회원들의 단속은 중단됐지만 지난해 10월부터 ‘돗자리·신문지 깔고 앉는 행위, 바둑·장기 등 오락행위, 음주·가무 등이 모두 금지된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손 소장은 “보통 탑골, 종묘공원을 만남의 장소로 알고 있지만 외국인 관광객이나 젊은 층들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서 “단속을 안 하면 이 일대가 노인 및 노숙인들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탑골공원을 ‘빼앗긴’ 어르신들은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박수산(78)씨는 “일부러 못 앉게 하려고 예전에 있던 의자를 다 치웠다. 누가 차가운 돌의자에 앉고 싶겠냐.”면서 “탑골공원은 ‘공원’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글 사진 안석기자 ccto@seoul.co.kr
  • 광복회 숭례문 복구 성금 전달

    광복회(회장 김영일)는 5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에서 숭례문 복구 성금 5080만원을 이건무 문화재청장에게 기탁한다. 광복회는 브라질과 일본 등 해외에서 보내온 숭례문 복구 성금을 모았고, 여기에 500명 남짓한 회원들의 모금을 곁들였다.
  • [씨줄날줄] 한은법 개정/조명환 논설위원

    “한국은행법 개정안과 금융감독기구설치법의 제정안이 통과되면서 종지부를 찍은 한국은행과 재정경제원의 갈등은 누구도 중재하지 않은 카인의 후예들 간의 떼와 오기로 맞선 이전투구였다.” 1997년 6차 한은법 개정을 주도했던 강만수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 한은과의 ‘살벌했던 갈등’을 회고한 대목이다.(‘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이명박 대통령도 언급했을 정도로 통화정책을 둘러싼 한은과 기획재정부의 갈등은 뿌리가 깊다. 초기에는 재무부가 ‘한국은행 세종로 출장소’로 불렸다. 광복 이후 조선은행 사람들이 재무부 핵심간부로 많이 왔기 때문이다. 5·16 이후 김용환 재무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한은을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부르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6차 한은법 개정은 외부 인사로 구성된 금융개혁위원회가 6개월가량 논의를 거쳐 강경식 재경원 장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재, 박성용 금융개혁위원장이 도출한 ‘4자 합의안’조차 뒤집힐 정도로 특히 곡절이 많았다. ‘4자합의안’에 한은 명칭조차 ‘한국중앙은행’으로 바꾸도록 하자 한은 노조는 파업과 함께 이경식 총재 퇴진운동까지 벌였다. 독자적인 한은법 개정안을 만들어 입법청원에 나서기도 했다. 이성태 현 총재가 당시 기획부장을 맡았다. 경제위기와 함께 다시 한은법 개정에 공감대가 형성돼 가고 있다. 금융안정기능을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법안이 계류된 가운데 야당인 민주당도 한은법 개정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정부내에서도 기획재정부와 청와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한은법 개정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강만수 경쟁력강화위원장과 윤증현 재정부장관 내정자, 이성태 총재가 나란히 체급을 올려 다시 무대에서 만나게 된 셈이다. 미묘한 시점에 금융감독원이 최근 중앙은행의 역할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고 한다. “한국은행의 역할은 제한돼야 하며, 특히 금융기관 조사권을 갖는 것은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결론을 담고 있다. 직간접 이해당사자가 될 금감원이 밥그릇 싸움의 사전 정지에 나선 것으로 비칠 소지가 다분하다. 조명환 논설위원 river@seoul.co.kr
  • [부고]애국지사 박종철 선생 별세

    고등학교 재학 중 일본의 식민정책에 반대하며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한 애국지사 박종철 선생이 지난달 31일 오전 2시 별세했다. 84세. 1925년 청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청주제일공립중학교 재학 중 일본의 식민정책에 반대해 신사참배 및 궁성요배 등을 피하기 위해 동지들을 모았다. 또 일본 패전을 뜻하는 노래를 부르다 검거돼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5년 8월15일 광복으로 출옥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엄필수씨와 인수씨 등 4남. 발인은 2일 오전 7시. 빈소는 청주의료원. (043)279-2766.
  • 애국지사 이차영 선생 별세

    광복군으로 중국에서 일본군과 무력투쟁에 참여한 애국지사 이차영 선생이 29일 오후 3시 별세했다. 86세. 1923년 경기 파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중국 푸양(阜陽)에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뒤, 베이징지구로 파견돼 공작활동을 벌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권영주씨와 아들 의근(개인사업)씨 등 1남 4녀. 장지는 국립대전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 발인 31일 오전 8시. 빈소 서울대 병원. (02)2072-2010.
  • “한국 민족주의, 필연적 운명 아니다”

    “한국 민족주의, 필연적 운명 아니다”

    21세기 다문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약화되긴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단일민족 의식은 여전히 뿌리깊은 신화로 남아있다. 개인주의가 지배적인 시대에 민족주의 담론을 낡은 유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일본의 독도 영유권 망언 같은 외세의 부당한 개입이나 월드컵 축구 경기 같은 국가 대항 행사에선 ‘단군의 후손’을 앞세워 민족주의 정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한국 특유의 강력한 민족 개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일반적인 믿음처럼 같은 핏줄을 물려받은 유전자의 동질성으로 인한 필연적인 운명일까. 신기욱 미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19세기말 격동의 한반도에서 역사적 상황에 의해 우연히 태어났고, 이후 100년간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 왜곡된 형태로 확대 재생산됐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창비 펴냄)는 혈통 중심의 종족민족주의가 어떻게 한국인의 집단 정체성으로 자리잡았는지를 사회계보학적 관점에서 파고든 책이다. 2006년 미국에서 영문으로 먼저 발표됐고, 이번에 국내 번역 출간됐다. “미국인에게 한국을 어떻게 잘 설명할까를 고민하다 한국을 움직이는 구성 원리로 단일민족의식을 고민하게 됐다.”는 신 교수의 말처럼 한국 밖에서 한국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신 교수에 따르면 19세기 말 근대화하고, 정체성을 재창조해야 하는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문명개화론, 아시아주의 같은 비민족적·초민족적 정체성들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반식민주의 및 반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종족민족주의의 개념을 강화한 것이다. 이후 민족주의는 광복과 분단, 개발 독재, 민주화 과정 등 역사의 굴곡마다 대중의 지지를 얻는 방편으로 차용됐다. 이 과정에는 보상과 대가가 동시에 따랐다. 공고한 집단 의식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된 반면 인권과 시민권의 침해를 정당화하거나 다른 정체성을 억압하는 역기능을 낳았다. 신 교수는 “진보도 보수도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기보다 민족주의에 기대려는 성향이 강했다. 대북, 대미관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사상적 빈곤함은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현 시점에서 민족주의를 재검토하고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지적했다. 세계화와 동아시아공동체주의, 민족주의의 세가지 가치 사이에서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지를 국가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문화 가정이 급속도로 늘고, 인구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에서 여전히 순혈주의를 내세우는 현실과 인식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 것이냐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란 설명이다. 신 교수는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으로 한·미관계, 북한 문제 전문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난 21일 방한한 그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과 관련, “미국내 현안이 많기 때문에 상반기가 지나야 대북 정책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면서 “한국 정부도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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