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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B를 열다] 침수된 양말산 주민들/손성진 국장

    [DB를 열다] 침수된 양말산 주민들/손성진 국장

    여의도는 조선시대엔 잉화도·나의주·나의도 등으로 불렸던 섬이다.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자리에는 원래 양말산(羊馬山)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었다. 이곳에 양과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양말산 앞 넓은 벌은 양말벌이라고 불렸다. 양말산은 높이가 190m에 지나지 않아 비가 오면 한강이 범람해 산중턱까지 물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홍수에 잠긴 양말산은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사람들이 산을 바라보며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부르던 것이 한자로 바뀌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한다. 양말산 아랫동네에는 한때 500여 가구 20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주로 여의도의 동쪽 끝까지 펼쳐진 땅콩밭을 경작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사진은 1963년 4월 16일 촬영한 것으로, 양말섬 주민들이 침수된 여의도에서 대피하려고 기다리는 모습이다. 일제는 1916년 여의도에 남북으로 활주로가 뻗은 간이비행장을 만들었다. 광복 후에는 미군이 한때 이 비행장을 사용하였고 김포공항 이전에 국제공항으로 이용되었다. 1968년 서울시는 여의도 주변에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윤중제(輪中堤) 공사를 해 여의도는 상업·금융·주거지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비행장 활주로는 5·16광장(현재 여의도공원)이 되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부고] 일신제강 창업주 주창균 이사장

    [부고] 일신제강 창업주 주창균 이사장

    일신제강의 창업주인 주창균 현송교육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 지난 29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91세. 고인은 한국인 최초로 1942년 신일본제철에 입사해 철강 기술자로 활동했고, 광복 뒤엔 평양공대 교수와 황해제철소 소장을 지냈다. 국내 최초로 냉연강판 제조업체인 일신제강을 창업해 1988년까지 경영했다. 대한럭비협회장,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총재,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 아들 종남(서울대 교수)씨, 사위 김영식(서울대 교수), 배길훈(전 한국델파이 대표), 이기승(전 모아댄뱅크 대표), 김도현(KAIST 교수)씨 등이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31일 오전 9시다. (02)2072-2011.
  • [커버스토리-대한민국 대통령의 모든 것] 역대 대통령은 어떤 사람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을 포함한 역대 대통령 11명의 출신지를 보면 영남이 7명(63.6%)으로 가장 많다. 황해·강원·충남·전남 출신이 각각 1명씩이다. 영남 출신 7명의 대통령 중에서는 대구·경북(TK)이 4명이다. 박정희(경북 구미)·노태우(대구) 전 대통령, 이명박(경북 포항) 대통령, 박근혜(대구) 당선인 등이다. 이 대통령은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지만, 광복 직후 포항으로 와서 TK 출신으로 분류된다. 부산·경남(PK) 출신은 전두환(경남 합천)·김영삼(경남 거제)·노무현(경남 김해) 전 대통령 등 3명이다. 이외 지역은 이승만(황해 평산)·윤보선(충남 아산)·최규하(강원 원주)·김대중(전남 신안) 전 대통령 등이다. 역대 대통령의 평균 재임 기간은 6.5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6년(1963~1979)으로 가장 오래 집권했다. 국가재건회의 의장 시절(1961~1963)을 포함하면 집권 기간은 18년으로 늘어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2년간 재임했다. 최단임은 최규하 전 대통령으로 8개월(1979년 12월~1980년 8월)에 불과하다. 10·26 이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있었던 두 달까지 포함해도 10개월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 전 대통령이 물러난 뒤 11~12대 대통령(1980년 9월~1988년 2월)으로 7년 6개월간 철권 통치를 했다. 11명의 취임 시 평균 나이는 61.1세다. 60대가 5명으로 가장 많다. 40대, 50대, 70대가 각각 2명씩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취임 시 만 46세로 가장 젊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49세였다. 50대는 노태우(56)·노무현(57) 전 대통령, 70대는 이승만(73)·김대중(74) 전 대통령이었다. 취임 시 60대 대통령은 이명박(67) 대통령, 윤보선(63)·최규하(60)·김영삼(66) 전 대통령, 박근혜(61) 당선인이다. 출신 대학을 보면 육사(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가 3명이다. 외국 대학도 3명으로, 이승만(조지워싱턴대), 윤보선(영국 에든버러대), 최규하(도쿄 고등사범) 전 대통령이다. 서울대(김영삼), 고려대(이명박), 서강대(박근혜)가 각 1명이다. 고졸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2명이다. 상고 및 공고 출신이 4명이나 되는 것도 특이하다. 전두환(대구공고)·김대중(목포상고)·노무현(부산상고) 전 대통령, 이명박(동지상고) 대통령 등이다. 대학 전공은 정치학(이승만), 고고학(윤보선), 영문학(최규하), 철학(김영삼), 경영학(이명박), 전자공학(박근혜) 등으로 다양하다. 종교는 박근혜 당선인을 비롯, 박정희·최규하·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교이며, 이승만·윤보선·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개신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불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김성수 기자 sskim@seoul.co.kr
  • 광화문 현판글씨 한자로 확정

    광화문 현판글씨 한자로 확정

    광화문 현판 글씨를 두고 한자로 해야 한다, 한글로 해야 한다는 격렬한 논의가 2년 넘게 진행된 끝에, 경복궁 중건(1865~68) 공사 책임자로 당시 현판을 쓴 훈련대장 임태영의 한자 현판 ‘光化門’으로 결정됐다. 문화재위원회는 2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사적·건축·동산·근대문화재의 4개 분과 합동회의를 열어 광화문 현판 글씨 문제를 논의해 이같이 결정했다. 문화재청은 2010년 8·15 광복절에 맞춰 광화문 복원 공사를 끝냈으나 석달도 안 된 그해 11월 광화문 현판에 균열이 발생하자 교체를 발표했다. 이때 이참에 한글로 바꿔 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장과 임태영 현판 글씨에 대해서도 불만이 제기돼 현판을 두고 공방이 진행되었다가 이번에 일단락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고종 시대에 중건된 모습으로 경복궁 전반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2005년부터 광화문을 원래 자리에 복원했고, 이에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 현판도 복원됐다. 이에 앞서 1968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광화문이 복원될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로 쓴 ‘광화문’이 내걸렸다. 이날 회의에서 문화재 위원들은 “한글 현판은 문화재 복원 정신과 맞지 않는다”면서 “광화문 현판은 경복궁 복원이라는 전체 틀에서 제작되어야 하며, 따라서 현판 또한 중건 당시 임태영 글씨로 제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동철 논설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26일 문을 연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 이은 또 하나의 대형 국책 박물관이다. 중앙박물관은 고고미술사 박물관이지만, 최근 역사박물관의 개념을 일부 도입해 고조선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전시실을 새로 꾸몄다. 역사박물관이 출범하면 고조선에서 대한민국에 이르는 한반도 역사가 망라된다는 의미도 있다. 역사박물관은 지난 2008년 제63주년 광복절 및 건국 60주년 기념식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기적의 역사를 남들은 신화라고 하지만, 그것은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산물”이라면서 “이 역사가 기록되고, 새롭게 이어질 수 있도록 현대사박물관을 짓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후 ‘국립대한민국관’으로 불리다가 2009년 지금의 이름으로 확정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현대사를 긍정의 시각에서 다룬다는 박물관의 성격을 분명히 한 것이다. 특정한 시대의 역사는 어떤 이념을 들이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역사박물관 역시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보수와 진보가 무 자르듯 양쪽으로 갈라진 현실에서 박물관 전시 내용이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칠 때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역사박물관은 벌써부터 전시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여주려고 기획했다.”는 책임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전시가 경제발전과 산업화에 집중됐고,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폭력이나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자칫 제18대 대통령선거 결과가 지금과 달랐더라면 역사박물관은 문도 열어보지 못하고, 전시물을 교체하는 해프닝을 빚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태생적 한계를 인식했다면 준비 과정부터 달랐어야 했다. ‘역사’보다 ‘박물관’에 초점이 맞춰진 추진단 구성부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균형 잡힌 시각’이 목표라면 다양한 시각의 역사학자를 대거 참여시켜 논란의 소지를 줄여야 했지만 그런 노력은 부족했다. 진보진영은 물론 보수진영의 역사학자마저 발을 담그기 주저하면서 지난달 열린 개관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역사학 분야 토론자는 구색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한동안 논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야구인은 아직 목마르다, 야구장 ‘280% 부족할 때’

    야구인은 아직 목마르다, 야구장 ‘280% 부족할 때’

    한 해 동안 야구장이 급증했는데도 여전히 태부족인 것으로 확인됐다. 20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산하 야구발전실행위원회(위원장 허구연)는 지난 두 달 동안 전국 238개 지방자치단체의 야구장 현황을 처음으로 전수 조사한 결과 지난해보다 99면이 늘어난 260면이 운용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야구장 인프라를 정확히 파악해 동호인들이 구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실시됐다. 올해 35개 지자체에서 신설 구장을 포함해 52면의 야구장이 새롭게 파악됐다. 여기에 국토해양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꾸며진 47면을 더하면 올해에만 모두 99면이 늘어난 셈이다. 이에 따라 전국의 야구장은 지난해 161면에서 260면으로 크게 늘었다. 새로 추가된 야구장은 안산시 사동 야구장(6면), 구리시 주니어야구장(1면) 등 경기도가 22면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경남 16면, 경북 12면 순이다. 강원도에는 동해시 1면, 정선군 2면 등 올해 3면이 완공됐고 제주 지역에는 신설 야구장이 한 곳도 없었다. 그동안 야구장 수는 프로야구의 인기와 함께 동호인들이 급증하면서 꾸준히 늘어났다. 전국야구장백서가 처음 발간된 2009년에는 140면이었으나 지난해 161면으로 15%가 늘었고 올해는 62%나 급증한 셈이다. 하지만 2만여개로 추산되는 동호인 팀들이 이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33개 지자체에서 야구장 건립을 추진 중이지만 실행위원회는 2020년까지 1000면이 꾸며져야 경기장 부족이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시·군·구마다 약 4.2개의 야구장이 들어서야 가능하다. 허구연 위원장은 “1000면을 조성해도 20개 팀이 한 면을 사용해야 할 판이다. 야구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많지만 인프라가 부족하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야구장 조성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최근 3면을 신설한 경남 의령군은 외지에서 온 동호인들 때문에 주민들의 소득이 늘었고 전북 익산시는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를 유치해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고 전했다. 김광복 전국야구연합회 사무처장은 “연합회 소속 사회인 팀만 6000개가 넘는데 야구장 한 곳당 평균 50~60개 팀이 나눠 쓰고 있다. 많은 팀들이 야구장을 구하지 못해 초등학교 운동장 등에서 경기를 한다.”고 아쉬움을 털어 놓았다. 실행위는 야구장 건립을 계획하고 있는 지자체 등에 적극 협조하는 것은 물론 조만간 KBO 홈페이지에 ‘2013 전국야구장백서’를 게재할 계획이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비운의 ‘흉탄 고아’… 22세에 퍼스트레이디 역할

    비운의 ‘흉탄 고아’… 22세에 퍼스트레이디 역할

    박근혜 당선자의 당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 탄생이라는 기록도 만들었다. 청와대에서 영애(令愛)로 유년기를 보낸 퍼스트레이디 대리는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됐다. 박 당선자의 삶과 정치 여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박 당선자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부모님을 꼽는다. 그는 1990년 일기에서 “비범하셨던 부모님을 모셨던 것부터가 험난한 내 인생 길을 예고해 주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20대에 부모님을 모두 흉탄에 잃은 비운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전차 타고 등교한 대통령의 딸 박 당선자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었고 육 여사는 중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 대구 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해 재직 중이었다. 육 여사는 충북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중)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일했다. 박 당선자의 외조부인 육종관은 육 여사가 과거 혼인 경력이 있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육 여사는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딱딱한 군인 이미지와 달리 가족에게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분”, “젊은 시절 아버지는 로맨티스트”라고 회상했다. 육 여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내 안에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았다.”고 할 만큼 신뢰와 애정을 가졌다. 특히 육 여사에 대해서는 단아한 외모와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을 떠올린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의 어린시절 의장 또는 대통령의 자녀라고 해서 특권의식을 갖지 않도록 평범한 생활을 강조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대통령의 자식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 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날이었다.”고 적었다. 박 당선자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어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학점은 4.0 만점에 3.82였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가 사학을 전공하길 바랐으나 박 당선자는 산업 역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전자공학을 택했다. 졸업 직후에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친 뒤 강단에 서는 것이 꿈이었지만 순식간에 운명이 바뀌었다. ●육 여사 장례 6일 만에 퍼스트레이디역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육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했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박 당선자는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영문도 모른 채 귀국길에 올랐다가 가판대에 놓여진 신문 1면에 육 여사의 사진과 ‘암살’이라는 글자를 보고 “온 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 왔다.”고 회상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의 장례식을 치른 지 엿새 만에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참석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청와대에 들어온 민원을 점검하고 영세 기업, 소외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수행했고 아침마다 신문을 읽어 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주고받기도 했다. 1974년부터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퍼스트레이디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박 당선자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은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어 가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며 외교적 식견도 넓어졌다. 19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내외가 방한했을 당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팽팽하게 맞섰으나 박 당선자가 로절린 여사와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원활하게 풀어가 ‘근혜·카터 회담’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육 여사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은 맏딸인 박 당선자에게 많은 의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려고 너를 두었는가 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1974년 11월 일기에서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마저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또다시 비극을 맞았다. 27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의 소식을 접한 박 당선자는 가장 먼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날 밤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직접 빨면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박 당선자는 장례를 치른 뒤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공개되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매진했다. 박 당선자는 이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표현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가 청와대 시절 자신들에게 겸손을 강조한 이유도 신당동에 돌아와서야 절실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권력의 중심부인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것이다. 당시 박 당선자가 적은 일기들에는 특히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많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들이다. 신뢰를 가장 중시하고 배신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반감을 갖게 된 것도 그 당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어차피 약한 인간이기에 차츰 권세와 명예와 돈을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1981년 8월), “계속해서 인간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충성을 얘기하고 뭐가 어떻고 말이 많았던 그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은 자리 하나였다.”(1989년 1월 17일) 등 박 당선자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된 기간도 오래 지속됐다. 박 당선자는 1980년대 후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는 등 기념사업회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1989년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언론 인터뷰를 하고 추도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청와대를 떠난 18년의 세월이 은둔, 칩거로 표현되는 것에 대해 박 당선자는 “쓴웃음이 나온다.”면서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 당선자는 ‘평범함’을 갈구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으로 1980~1990년 사이 일기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박 당선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결국 평범함 속에 있다고 느껴진다.”면서 “마음의 평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며 가장 누리고 싶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를 계기로 박 당선자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뿌리 깊은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을 따라 경제 안정에 주력했고 가까스로 일으켰는데 무너져 내렸다는 허탈함과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야당 대표를 지내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 당선자의 정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판사 임용자 절반…‘법관 양성소’ 123년 최고 두뇌집단 역사 속으로

    100년 이상 최고 두뇌 집단의 상징으로 군림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해 온 서울대 법과대학이 2018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서울대 법대 폐지는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을 개원하면서 법학과 관련된 학사학위 과정을 따로 둘 수 없게 된 데 따른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당초 2008년 마지막으로 입학한 법대 신입생이 졸업하는 기간에 맞춰 2012년까지만 법대를 유지하라고 권고했다가 군입대, 휴학 등으로 졸업이 늦어지는 학생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유지 기한을 2017년으로 조정했다. 서울대 법대는 13일 재학생들에게 ‘2017년을 마지막으로 법과대학 조직과 명칭을 폐기한다’는 내용을 이메일과 우편 등으로 공지했다. 서울대 법대는 1895년 근대 법학 교육이 최초로 시작된 대한제국의 법관양성소를 연원으로 2018년이면 123년의 역사를 갖게 된다. 이를 기념해 서울대 법학도서관인 국산(菊山)법학도서관 정면 현관 위에는 법관양성소의 설립 연도인 1895년이 표기돼 있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로 바뀌었고 광복 후에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와 통합돼 현재의 서울대 법대로 변모했다. 서울대 법대는 사법고시, 판사·검사 임용에서도 다른 대학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해 왔다. 2010년의 경우 전체 판사 임용자의 51.7%가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다. 법대 폐지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이에 대한 소회를 담은 글과 이에 공감하는 재학생들의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현직 판사라는 김모(32)씨는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흥분했던 때가 아직도 생생한데 정들었던 모교가 사라지게 된다니 아쉽다.”고 말했다. 명희진기자 mhj46@seoul.co.kr
  • 야스쿠니 방화범 “위안부 할머니 존엄성 위해 범행”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 중국 국민의 존엄성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화염병을 던진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중국인 류창(38)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반인륜적 행위에 저항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싶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29일 서울고법 형사20부(부장 황한식) 심리로 열린 범죄인 인도심사 청구 첫 심문에서 “지난해 한·일 정상회담 때 이명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과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한 것에 화가 나 신사에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신사를 다 태우려 했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그는 “전부 태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사는 종교법인이라는 일본의 입장에 대해서는 분노한 목소리로 “그렇다면 왜 광복절만 되면 일본 고위급 간부들이 신사 참배를 하느냐.”고 되물었다. 류창의 변호인은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류창의 지위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정부가 인도를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야스쿠니 신사 방화를 처벌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범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타당치 않다.”면서 일본으로의 인도 허가를 요청했다. 앞서 류창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데 격분, 올 1월 8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졌다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해 12월 26일 야스쿠니 신사에 화염병을 던진 것도 자신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일본 당국은 지난 5월 류창의 신병을 넘겨 달라며 범죄인 인도 요청서를 보냈다. 중국 당국도 류창을 정치범으로 인정해 자국에 송환해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중국 측은 류창을 보호하기 위해 법무법인 세종 소속 변호인 5명 등 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최지숙기자 truth173@seoul.co.kr
  • 직장인 연휴 대박

    내년은 징검다리 연휴가 많아 직장인들에게 ‘축복받은 해’가 될 것 같다. 2013년 달력을 보면 지난해, 올해와 마찬가지로 주 5일 근무를 기준으로 공식 휴일이 총 116일이다. 그러나 추석 연휴가 5일 연속 이어지는 데다 토·일요일과 하루 건너 쉴 수 있는 ‘징검다리 휴일’이 많아 연차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인이라면 더 여유로운 휴일을 보낼 수 있다. 대부분의 공휴일이 화·목요일에 몰려 있어 주말과 하루 건너 이어진다. 새해 첫날(1월 1일)이 화요일이고 현충일(6월 6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이 목요일이다. 연차를 활용하면 주말까지 나흘 연속 쉴 수 있는 셈이다. 한글날(10월 9일)이 공휴일에서 빠졌다가 다시 지정된 것도 감안해야 한다. 내년 9월 18~20일로 잡힌 추석은 수~금요일이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바로 주말이 이어지기 때문에 총 5일을 쉴 수 있다. 추석 전 월~화요일에 연차를 낸다면 9일간 넉넉한 연휴를 만끽할 수도 있다. 다만 설 연휴(2월 9~11일)가 토~월요일인 점과 어린이날(5월 5일)이 일요일인 것은 아쉬울 수 있겠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조국은 사할린을 버렸다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조국은 사할린을 버렸다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사할린에는 ‘이제 곧 귀국한다’, ‘조선인이 먼저 떠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1949년 7월 23일 마지막 일본인들을 태우고 간 귀국선 ‘운센마루’는 돌아오지 않았다.” 파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귀국선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열여덟 살 청년. 그는 이제 팔순의 노인이 됐다.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 영주귀국노인회의 고문 성점모(81)씨는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러시아 사할린(당시 일본령)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 1세대의 후손이었다. 2010년 12월 가까스로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왔지만 망향의 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1965년 한·일 협정에 따라 사할린 동원자의 재산권은 소멸했다.”며 보상을 거부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버티기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참다 못한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2295명은 지난 23일 “국가가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성씨는 이 자리에서 사할린 동포들의 수난사를 기록한 수기 ‘망향의 반세기, 사할린 동포의 눈물 젖은 과거’를 서울신문에 제공했다. 성씨의 아버지는 하루 12시간 넘게 도로 건설에 노동력을 착취당했지만 우편저금 등의 명목으로 빼앗긴 임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수기에는 한인들의 고통과 분노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하루 한 줌도 안 되는 콩밥과 간한 청어 한 토막으로 2년을 버텼다. 분노를 참지 못해 반항하면 아이구… 때리고 또 때리고 죽도록 얻어맞았다.”(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던 이기복) “어렸을 때 그물로 멸치를 잡던 일이 어제 같다. 그 멸치를 삶은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으면 왜 그렇게 맛이 있던지.… 한 번이라도 가봤으면 한다.”(노동에 시달리다 현지에서 사망한 울산 출신 김길용) 광복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황국신민화정책’을 통해 일왕에 충성을 강요했던 일제는 전쟁이 끝나자 사할린 동포들의 국적을 박탈한 뒤 모르쇠로 일관했다. 소련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들을 억류했다. 그들의 모국은 힘이 없었다. 동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소련 국적을 취득하거나 무국적자로 남았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배상의 길이 열리는가 했지만 사할린 문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성씨는 “그때 ‘조선이라는 것은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접고 러시아어를 배워 모스크바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국 대신 생존을 택한 이들을 새롭게 가로막은 것은 이념 갈등이었다. 북한과 소련은 한국 정부와 교류가 없었다. 사할린 동포들은 일본과 소련에서 귀향 운동을 시작했다. 경기도 출신 도만삼씨는 1977년 소련 공산당위원회 앞에 가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외쳤다. 소련은 어쩐 일인지 “귀국 준비를 하라.”고 답했다. 그러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두만강 기슭이었다. 북한 장교가 ‘환영 인사’를 건넸을 때 도씨는 충격에 휩싸여 기절했다. 성씨는 “도씨 등 조선인 40명이 북한으로 추방된 뒤 한인사회는 공포에 휩싸여 귀향에 대한 말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귀향의 꿈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가 소련 사회를 개방한 뒤에야 찾아왔다. 1990년 6월 제주도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해 한국 가수들이 찾아와 사할린에서 위문 공연을 가졌다. 성씨는 “너무 늦었지만 드디어 잃었던 모국을 찾았다.”면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눈시울을 적셨다.”고 회고했다. 1992년부터 영주귀국 사업이 시작돼 지난 3월까지 4000여명의 동포 및 배우자, 장애 자녀가 귀국했지만 망향의 한은 지워지지 않았다. “남한 노인들이 말하더군요. ‘사할린 동포들은 사할린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랏돈을 받는다’고. 나라를 잃고 설움 속에 헤맨 우리들의 고통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이준·손병희·이시영… 17일만큼은 꼭 기억해야 할 그들

    이준·손병희·이시영… 17일만큼은 꼭 기억해야 할 그들

    ‘순국선열의날’인 17일 서울 강북구가 수유동에 위치한 일성(一醒) 이준(1859~1907) 열사 묘역에서 ‘제1회 삼각산 순국선열 합동 진혼제’를 갖는다. 순국선열의날은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고자 국가가 을사늑약 체결일에 맞춰 제정해 73회를 맞았다. 이번 진혼제는 북한산에 안장돼 있는 이준 열사, 손병희(1861~1922)·이시영(1869~1953)·신익희(1894~1956)·김창숙(1879~1962) 선생, 광복군 17위 등 독립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애국지사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다.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한국대중예술진흥협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식전행사인 율려춤 공연, 기천 단배공 시연, 본국검 시연을 시작으로 총 3부에 걸쳐 실시된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순국선열묘역이 지난 6월 ‘서울 근현대 미래유산화 기본구상’의 시범사업지로 선정된 데 이어 10월 순국선열묘역 5곳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로 등록된 가운데 진혼제가 열려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구에서는 앞으로 북한산에 안장돼 있는 순국선열들의 유품, 자료 등을 한자리에 모은 근현대사기념관을 세워 선열들이 남긴 애국애족의 마음을 후세에 널리 전하도록 애쓰겠다.”고 덧붙였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씨줄날줄] 한글날 ‘부활’/박정현 논설위원

    한글은 우리 민족의 영욕과 궤를 같이한다. 민족이 질곡에 처했을 때 한글은 무시당했고 천대받았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글이 아닌 반글, 속된 글자라는 뜻의 언문으로 불렸다. 중국과의 사대관계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위한 글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한글이라는 온전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913년 주시경 선생에 의해서다. 하지만 일제하 한글은 명맥만 유지할 뿐, 학교에서 주로 사용된 문자는 한자와 일본의 문자인 가나(?名)였다. 광복을 맞고 나서 1945년 10월 9일이 한글날로 지정됐고 이듬해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을 맞아 한글날은 공휴일로 정해졌다. 한글과 한글날이 명실상부하게 우리 글로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그러나 1991년부터 한글날은 국군의 날과 함께 사뭇 황당한 이유로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이완된 사회분위기를 바로잡고, 10월에 집중된 연휴를 줄임으로써 수출 부진 등 업계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타개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설명이다. ‘공휴일 한글날’이 사회분위기를 흐리고 수출 입국에 차질을 준다는 어설픈 개발경제·성장제일주의 시대의 명분에 밀린 것이다. 한글이 어떤 문자인가. 566년 전 창제된 한글의 우수성은 디지털 시대에 최고의 알파벳으로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한글로 5초면 작성하는 문장이 한자나 가나로는 35초나 걸린다. 광속의 시대에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갖춘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작가 존 맨은 그의 책 ‘알파 베타’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한글의 위상은 격하됐다. 한글날이 내년부터 다시 공휴일로 지정된다고 하니 만시지탄이다. 2005년 기념일에서 국경일로 바뀐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되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노는 날 하나 더 는 것으로 가볍게 봐 넘길 일이 아니다. 공휴일 지정의 사회적 편익이 5조원에 육박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경제적 효과를 높이는 한글 국경일로 만들어야 한다. 한글은 한류(韓流)의 꽃이다. 삼성 사장단이 최근 ‘21세기와 훈민정음’이라는 특강을 들었다고 한다. 훈민정음에 담긴 혁신·위민의 정신을 배우자는 뜻에서 였을 것이다. 대선의 계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세종대왕의 정치’가 그립다. 한글의 가치는 우리가 지킬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박정현 논설위원 jhpark@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5)경남 창원 몽고정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5)경남 창원 몽고정로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시인 이은상(1903~1982)의 시에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이 이듬해 곡을 붙인 국민 가곡 ‘가고파’의 앞소절이다. 마산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떠나온 고향을 못내 잊을 수 없어 고향 바다를 그렇게 간절히 회억했으리라. 하지만 이 노래는 ‘마산 예찬곡’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국민 애창곡이 되어 광복 이후 교과서에까지 실린 것은 구구절절 노랫말이 일제강점기 잃어버린 조국을 외쳐 부른 통한의 절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마산” 했을 때 대번 기억의 회로를 돌아 자동으로 점등되는 대명사는 이 노래 제목뿐만이 아니다. 한번 가보지 않고서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표 지물(地物) ‘몽고정’(夢古井)이다. 오래전 시인이 꿈에서조차 그렸던 남쪽 바닷가 지척에 몽고정은 자리해 있다. 마산만의 평화를 요란스럽게 들깨우는 어시장 입구에서 부지런히 10여분만 걸음을 재촉하면 만날 수 있는 옛 우물이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몽고정로. 새 도로명 주소로 바뀐 통에 길 찾기가 애매해졌다는 하소연일랑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경남문화재 제82호로 등록된 자산동의 명물 몽고정을 기점으로 북쪽을 향해 북성로와 맞닿는 지점까지 이어진 길이 몽고정로다. 엄밀히 따지면 몽고정은 도로 번호로는 몽고정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다. 도로명 주소상으로는 북성로와 만나는 북쪽 지점이 도로가 시작되는 ‘몽고정로 1’인 것이다. 몽고정의 연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고군이 일본을 정벌하고자 고려와 합세해 여·몽 연합군을 조직한 1281년(고려 충렬왕 원년). 당시 합포(지금의 마산)에 주둔하게 된 병사들의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팠던 우물이다. 몽고 군사와 그들이 부리던 말도 함께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 모양 석물이 하나 있는데, 당시 물을 길어 올릴 때 발판으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몽고정의 원래 이름은 ‘고려정’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 초기 마산에 살았던 한 일본 지식인이 쓴 기록물 마산항지(馬山港誌)에는 “고려정이라 불리던 우물을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적혀 있다. 몽고군이 거쳐간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우물은 지역민들의 식수원으로 사랑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여러 향토 기록에는 1906년쯤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 즉 마산포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년간 이용한 우물이었다는 표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7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우물은 그러나 세월의 더깨를 그대로 뒤집어쓴 채 도심 한구석에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다. 근처 음악학원에서 나오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를 붙들어 짐짓 우물의 내력을 아느냐고 물었다. “고려 때 몽고 군사가 물 마시던 곳”이라고 기특한 답변을 내놓는다. 꼬마는 “오며 가며 표석에 새겨진 유래를 읽어서 잘 안다.”고 했다. 700여년을 붙박이로 버텨온 공력이 그래도 영 헛되지는 않았음이다. 몽고정로의 끝지점에 상징물처럼 자리 잡은 건물이 몽고간장 공장이다. 몽고정의 물은 미네랄과 칼슘이 유달리 풍부해 장류 식품 제조에 더없이 좋은 수질로 꼽혀 왔다. 그런 배경으로 1905년 일본인이 장유공장을 처음 차렸고, 이후 1945년 김홍구 사장이 지금의 이름으로 재창업해 마산의 명물로 컸다. 몽고정에서 출발해 몽고정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산의 명소들이 요소요소에서 곁가지로 뻗어 나가 있다. 마산 출신의 조각가 문신(1923~1995)을 기리는 문신미술관도 왼편 언덕배기 쪽으로 1㎞쯤 가면 닿는다. 몽고정로 중간쯤인 추산동에 자리한 사찰 정법사도 길손의 발길을 잡아 끈다. 통도사의 마산포교당으로 1912년 일제시대 민생구제라는 담대한 뜻을 품고 창건된 유서 깊은 공간이라고 입구 안내판이 친절히 귀띔해 준다. 세월의 힘은 사물의 생기를 속수무책으로 무력화하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몽고정로 일대에도 그건 통하는 얘기다. 한때 50만명을 넘어섰던 ‘대도시’ 마산의 쇠락한 현주소를 대변하듯 생기를 잃고 침잠한 모습에 옛 고향을 모처럼 찾은 이들은 가슴이 헛헛해진다. 중고 가구, 싱크대 제작, 맞춤복 등을 취급하는 작은 점포들만 즐비할 뿐 한낮에도 거리는 적막하기만 하다. 20여년 전 이 길은 젊은 발자국 소리로 요란했다. 근처에 명문으로 꼽히는 중고교들이 몰려 있어 그들이 단체 영화를 보거나 미팅을 갈 때면 삼삼오오 어깨를 붙이고 들떠서 걷던 길이었다. 마산합포구 새주소 담당인 손대근씨는 “예전에 이 길은 마산에서도 번화한 축에 들었다.”면서 “십수년 만에 들른 사람이라면 뒷골목처럼 밀려난 지금의 모습에 씁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몽고정로에서도 1번지에 해당하는 자리는 예전에 마산 시내에서도 최고로 쳤던 중앙극장이 있었던 곳. 지금 극장은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에 대형 아웃렛 가구 매장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주인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장 담벽에서는 ‘몽고정로 1’이라는 도로명 주소판을 찾아볼 수 없다. 몽고정로를 벗어나 그 앞길인 북마산가구거리에 들어서면 비로소 한때 50만 인구를 자랑했던 도시의 위용이 읽힌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짬을 내서 한 번쯤은 둘러볼 만한 곳이다. 각종 ‘브랜드’ 가구들을 판매하는, 5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명소다. 비탈진 가구거리를 걸어내려와 3·15대로를 만나는 즈음에서 꼭 한 번 찾아봄 직한 곳이 어시장이다. 고적한 몽고정로와 지근거리에 있는데도 분위기는 딴판이다. 횟집촌, 온갖 물 좋은 생선과 푸성귀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모여 대단지를 이룬다. 사람 사는 냄새에 파묻혀 긴장을 풀 만한 곳으로 시장통만 한 곳이 또 있을까. 이곳에서는 버스를 타더라도 마산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20여분이면 충분하다. 글 사진 창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6회에는 전북 군산시 창길을 소개합니다
  • ‘한국 현대연극 산증인’ 원로 배우 장민호 하늘무대로

    ‘한국 현대연극 산증인’ 원로 배우 장민호 하늘무대로

    한국 연극계의 큰 별, 원로배우 장민호씨가 2일 새벽 1시 45분 별세했다. 88세. 1924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그는 1947년 조선배우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성극 ‘모세’에 출연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이해랑 선생이 극예술협회를 모태로 재건한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에 입단한 뒤 60년 동안 230여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연극계의 살아 있는 전설’, ‘한국 현대 연극사의 산증인’으로서 자리했다. ●‘현역 최고령’ 폐기흉 재발로 스러져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성우로 활동하기도 한 고인은 1960년대 한국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에 10년 동안 생방송으로 출연했고 1966년에는 한국성우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67년 1월 국립극단 단장으로 취임한 뒤 1980년에 다시 단장을 맡으면서 국립극단 사상 최장수(15년) 단장으로 기록돼 있다. 고인은 모든 예술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영화 ‘백치 아다다’(1956), ‘잃어버린 청춘’(1957) 등에 출연했고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를 제작했다. TV탤런트로도 활동했으며 2004년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와 2007년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에도 출연했다. 60여년을 공연예술계에 몸담은 고인은 대한민국 예술상, 국민훈장 목련장, 동랑연극상, 호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지난해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국립극단은 자체 공연장을 백성희장민호극장으로 이름 지었다. 연극계의 오랜 단짝인 두 노배우, 장민호와 백성희(88)에게 헌정하는 의미였다. 두 배우는 개관 기념 공연인 ‘3월의 눈’ 무대에 함께 오르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연극이 끝난 뒤 10년 전 앓았던 폐기흉이 재발하면서 ‘현역 최고령 배우’ 장민호는 결국 스러졌다. ●“마지막 무대 커튼콜 때 힘 있는 눈빛 못잊어” 연극 ‘3월의 눈‘에서 고인과 호흡을 맞춘 연극배우 박혜진(54)은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별세)소식을 듣고 가슴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면서 고인에 대한 기억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그는 “마지막 무대 커튼콜에서 그 힘 있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면서 “건강을 잃어 가면서 몸과 마음이 늘어지는 게 아니라, 그조차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과 호흡으로 승화시켰다.”고 떠올렸다. 영결식은 오는 5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과 1남 1녀.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 장지는 경기 성남 메모리얼파크. (02)3010-2000.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학술플러스]

    ‘역사학 올림픽’ 전국역사학대회 ‘역사학 올림픽’이라 불리는 국내 역사학계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제55회 전국역사학대회가 오는 26~27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다. 전국역사학대회는 각 지역의 역사학자들이 1년 만에 모여 연구성과를 발표한다. 올해는 77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공동주제는 ‘역사 속의 민주주의’이다. ‘민속학자대회’ 글로벌과제 발표 국립민속박물관은 오는 26~27일 충북 제천에서 ‘한국민속학자대회’를 연다. 2004년 이후 매년 여는 대회로 올해는 ‘2012 충북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글로벌 시대 한국민속학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전국 8개 민속학 관련 학회 대표 8명이 발표를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 판소리의 위상과 글로벌 시대 구비문학의 대응을 논의한다. 동남아 국경지역 조명 학술대회 서강대 동아연구소는 25~26일 서강대 가브리엘관에서 ‘동남아 변경지역의 사회적 구성’을 주제로 중국, 필리핀, 호주, 영국 등 10명의 학자가 참석해 ‘비공식 무역과 국경 경제의 재편’, ‘지역 정치와 내적 분화’, ‘국경 공동체의 새로운 형성’ ‘국경의 역사화와 의미화’ 등 4개 분과로 학술대회를 진행한다. 홍범도 장군 서거69주기 학술회의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는 25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홍범도 장군 서거 69주기 추모식과 학술회의를 연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등이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한다. 조선조선군조선척후단 창설 90주년 특별전 독립기념관은 오는 12월 31일까지 기증자료전시관에서 ‘조선소년군·조선척후단 창설 90주년 기념 기증자료 특별기획전’을 연다. 1922년 창설된 조선소년군·소년척후단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조국광복과 새나라 건설을 위한 주역으로 길러내는 데 앞장 섰고, 사회문화 개선과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고취했다.
  • [기고] 한국, ‘그린 트라이앵글’ 체제 구축했다/장성호 배재대 정치학과 교수

    [기고] 한국, ‘그린 트라이앵글’ 체제 구축했다/장성호 배재대 정치학과 교수

    우리나라가 환경 분야의 세계은행으로 불리는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인천 송도에 유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국격 상승의 홈런포를 쐈다.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의 공식 출범 이후의 ‘녹색 스타일’ 겹경사다. 2008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새로운 국가발전 어젠다로 내세운 저탄소 녹색성장을 주창한 이래 2010년 6월 서울에 설치된 GGGI가 명실공히 국제기구로 공식 출범하는 것이다. 정부는 “녹색성장이야말로 개도국의 관심 사항인 개발과 기후변화라는 두 가지 이슈에 동시에 대응할 수 있는 어젠다”라면서 “국격을 높이고 사업적인 ‘컨벤션 비즈니스’ 면모에서도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개발도상국이 환경을 통한 지속가능 경제를 지원하고 녹색성장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된 GGGI는 기존의 자원 소모적인 화석경제 시스템을 대체하고 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과 인류 공존을 위한 환경문제를 결합한 새 패러다임을 제시,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GGGI는 녹색성장의 거점 국가로서 국제적인 위상 제고, 환경과 성장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보여 줬다. 한국을 포함해 영국·덴마크 등 16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GGGI는 녹색성장 모델의 확산, 개발도상국의 녹색성장 전략 지원이라는 두 가지 목표 아래 국가·지역별로 맞춤형 녹색성장계획(GGP)을 지원하는 싱크탱크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주와 협력해 산림 보전과 황폐화 방지 전략을 수립해 주고 있으며, 캄보디아 정부와는 태양열 조리기 설치 사업을 진행 중이다. 녹색성장 전파 사업은 2010년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인도네시아 등 3개국에 불과했지만 현재 17개국 24개 프로젝트로 늘었다. 우리는 척박한 천연자연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한 인적자원 양성과 국제 무역과 교류를 통해 지난 세기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경제발전과 개발을 견인해 왔다. GGGI는 우리 주도로 만든 첫 번째 국제기구라는 점과 함께 녹색성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고 결실을 맺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이다. GGGI의 역할은 그동안 기후변화협약(UNFCCC)에 가입한 194개국이 참여하는 기후변화 대응기금인 이른바 GCF 사무국 유치가 치열하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기후변화와 녹색성장’의 본산이 한국이 된다는 역사적 의미에서다.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성장 모델을 공유할 수 있는 GGGI의 위상 제고와 새로운 역할 변화는 더욱 주목되고 있다. 2013년부터 기금 조성이 시작돼 2020년부터는 해마다 1000억 달러(약 110조원)씩 조성되는 GCF는 영향력 면에서 향후 국제통화기금(IMF)을 능가할 전망이다. 경제 효과도 3812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한국은 GGGI-GCF-녹색기술센터(GTC)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 세계 환경 클러스터인 이른바 ‘그린 트라이앵글’을 구축, 해당 분야의 선도 국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차제에 GGGI 지식과 GTC 기술, GCF 기금의 삼각 협력체 중심 국가인 한국이 새로운 국가 발전과 국민통합의 계기를 만들고, 전 세계 지속가능 경제의 메카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이 맞고,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이 올바른 용어다. 을미사변이 아니라 ‘명성황후 암살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임경석(54)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막 출간돼 따끈따끈한 ‘한국근대외교사전’(사람의무늬 펴냄)을 펴들고 지난 15일 교수회관 4층 연구실에서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줘야 제대로 된 꽃(역사)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임 교수는 “다소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외교사전이 발간돼서 다행”이라며 “한국사는 한국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시선으로 외교사건을 정리해야지, 한·일역사를 일본학계의 시선으로 정리해서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876~1910년 한국 근대외교史 정보 ‘한눈에’ 임 교수는 “‘한국근대외교사전’은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한국 외교의 역사에 등장한 사건, 조약, 인물, 조직에 대한 정보를 담은 감히 ‘국내 최초의 외교사전’이라 자부할 수 있다.”면서 “한국사뿐 아니라 중국사, 일본사, 서양사를 각각 전공한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 외교사학자, 법학자 등 28명의 학자가 모여 239개 항목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와 그의 후배이자 역사학자인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항준 서울여대 사학과 강사가 대표 편·저자이고, 주요 저자로 연갑수 서울대 교수, 조재곤·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 주진오 상명대 교수, 한철호 동국대 교수, 홍준화 고려대 연구교수 등이 참여했다. 사전에 참고문헌과 책임 저자를 명시해 기술 내용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높였다. 한국근대외교사전은 원래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예산과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지원을 받아 3년 만인 2010년 결과물을 내놓았다. 당시에는 한중연의 ‘한국민속문화대백과’에 수록돼 있었다. 임 교수는 “여기에 2년 동안 수정·보완하고 20여개를 추가해 239개 항목으로 확대해 별도의 책으로 펴냈다.”고 말했다. ●가나다순 항목… 연구·실무자에게 최고의 길잡이 한국근대외교사전의 강점은 무엇인가.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나 역사와 외교관련 실무자들이 관련 항목을 가나다순으로 쉽게 찾아가며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특히 한국 관련 근대사에 영향을 미친 외국인을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 예를 들자면 대한제국 시절의 러시아 외교관이었던 포타포프가 있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상황에서도 러시아 정부와 임시정부 사이에서 외교를 통해 한국의 독립에 많은 도움을 줬다. 우리 독립운동에서 러시아가 많이 배제됐는데,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는 일본에 복수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고, 그것은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유지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러시아 연해주에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권업회’나 권업회 산하의 항일무장단체였던 ‘대한광복군정부’ 등도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 근대외교史, 한국인의 시선으로 서술해야” 최근 국사편찬위원회가 을사늑약이라 쓴 역사교과서를 을사조약으로 고치라고 요구했던 것과 관련해 그는 “국사편찬위의 사고방식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상당히 다르다.”며 “각국의 외교사는 국익의 충돌 속에서 존재하고 특히 한국의 근대 외교사는 외세 피침의 역사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독자적인 시선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더 나아가 임 교수는 “국사편찬위가 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다가 우경화됐다.”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과정이 조약과 같은 합법적인 외양을 띠고 있지만 이것은 형식논리”라며 “최근 ‘유럽식 근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 세계 외교사가 강대국 위주로 서술돼 있기 때문에 침략을 당했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강대국의 편견이 가득한 시선을 배제한 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단순히 외교사를 정리한 책이 아닌 만큼 오늘날 한국의 외교적 생존전략을 파악하고 정책수립에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참전유공자 위로금 지자체 생색내기용?

    기초지방자치단체들이 참전 유공자들에게 특별위로금을 새로 지급하거나 기존 금액을 올리고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보훈단체를 끌어안으려는 의도지만 위로금인지 막걸리값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 생색내기용 선심성 행정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11일 전국 지자체와 보훈단체 등에 따르면 경기 구리시는 내년부터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 유공자들에게 특별 위로금을 지급하기 위한 조례 개정안을 최근 입법 예고했다. 6·25전쟁 참전 유공자는 매년 6월 20일에, 월남전 참전 유공자는 매년 7월 20일에 3만원씩을 받게 됐다. 구리시에는 현재 458명의 6·25전쟁 참전 유공자와 551명의 월남전 참전 유공자들이 산다. 이에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8월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매월 3만원씩 지급하는 참전 유공자에 대한 명예수당을 2014년까지 5만원으로 인상하고 애국지사 44명에게는 보훈 예우 수당 명목으로 매월 10만원씩 새로 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보훈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또 현재 1만 8800명에 달하는 3·1절, 8·15광복절 등 각종 기념일 위문 대상자도 내년부터 매년 2000여명씩 늘리고 3만~5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최성 고양시장도 지난 8일 기자회견에서 6·25전쟁 당시 금정굴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역사평화공원 조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시 집행부 발의로 제정한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이를 반대해 온 보훈단체 관계자들을 위해 68세 이상 참전 유공자 4100명에게만 지급해 온 매월 3만원씩의 보훈수당을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7900명에게 확대 지급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 경남 남해군이 참전 유공자의 명예수당을 연간 36만원에서 60만원으로, 사망 위로금을 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인상하기로 했다. 국가수호정책연구소 백동일 소장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쓴 유공자들에게 위로금을 주는 것은 고맙지만 대선을 앞둔 시기에 소액을 나눠 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면서 “지급 기준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고 자긍심을 고양할 수 있는 방안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조선 독립 열망했던 ‘불량학생’ 강상규

    조선 독립 열망했던 ‘불량학생’ 강상규

    11일 밤 10시 KBS 1TV 역사스페셜은 ‘경성유학생 강상규의 조선독립 10년계획’을 방영한다. 강상규는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경성으로 유학왔다. 성적도 상위권이고 품행도 좋은 모범학생이었다. 그러나 때는 1941년. 일제 강점 막바지 가혹한 사회통제가 이뤄지던 때다. 강상규는 어느 날 조선 독립을 열망하는 불량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붙잡힌다. 치안유지법, 육군 형법, 해군 형법 등에 따라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의 일기에서 그 단초를 찾는다. 그 당시 학교는 일본어로 일기를 써오게 한 다음 그 내용을 검사했다. 그런데 강상규는 일본어 말고 한글 일기를 은밀하게 썼다. 일본어 일기에 차마 적지 못했던 은밀한 생각들을 여기다 기록해둔다. 두 개의 일기는 그의 이중생활을 드러낸다. 학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착실한 학생이었지만, 마음 속에는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품고 있었고 비록 학생 신분이었지만 10년에 걸친 장기 독립계획까지 세울 정도였다. 이를 실행에 슬슬 옮기면서 동료들을 포섭하려다 적발된 것이다. 일제 시대는 청년들에게 큰 좌절을 안겨줬다. 입신출세에 대한 욕망은 강렬했으나 식민지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아서다. 이런 현실은 다른 사람들의 일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 유학 중이던 K, 경성의 한 공장에서 숙련공으로 일하던 A, 농사를 짓던 S의 일기 내용도 함께 공개한다. 그렇다면 학생임에도 10년에 걸친 조선 독립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강상규는 어찌됐을까. 그는 2년 뒤 출옥한다. 출옥 조건은 마음에도 없는 전향서를 쓰라는 것. 광복 이후 강상규는 정치범으로 체포된 뒤 사라져버렸다. 정말 그는 전향했을까, 전향한 뒤 착실하게 살았을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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