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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오독립선언 76돌 기념식/세종회관서 열려

    일제때 조국독립을 위한 3대독립선언 가운데 가장 앞선 대한독립선언(일명 무오독립선언)선포 제76주년 기념식이 2일 낮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승곤 광복회장·조만제 삼균학회장·김시복 국가보훈처차장등 관계자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광복 50주년행사로 처음으로 열린 이 행사는 김광복회장의 개식사에 이어 조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이강훈 전광복회장의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또 이날 행사에서는 이현희 성신여대교수의 「대한독립선언과 정통성문제」,정용대 건국대교수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이라는 주제의 학술강연이 있었다.
  • 광복 50/「부민관사건」 주역 조문기옹은 말한다

    ◎“일본은 진심으로 사죄 한 적 없다”/속죄는 한풀이 아닌 선린우호 위한 “첫발”/일부 젊은이 왜색 심각… 「한국혼」 회복 절실/45년 친일파대회 폭탄투척… 건국포장 받아 『우리나라와 일본은 서로 가장 가까운 나라가 돼야 한다.그러기 위해 일본은 진심으로 과거사를 사죄해야 합니다』 일제때 국내 마지막 무장항일운동인 부민관사건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조문기씨(68·광복회 경기지부장·경기도 수원시 천천동 주공아파트)는 광복 50주년인 새해를 맞아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일본」의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애국청년단」 결성 부민관사건은 해방직전인 45년 7월24일 서울 부민관에서 친일민족반역자 박춘금의 주최로 열린 「아세아민족분격대회」라는 친일어용대회장에 조씨,유만수(작고)등 애국지사들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이들은 같은해 5월 서울 종로구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 모여 「대한애국청년단」을 조직하고 일제를 단죄하면서 조국의 독립정신을 떨칠 기회를 믿고 있던 중이었다. 조씨등은 부민관사건으로 당시 5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는등 일제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고향인 경기도 화성으로 내려가 야학운동을 펼치다 광복을 맞았다. ○약탈문화재 반환을 조씨의 경우 광복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어왔으며 지난 82년 건국포장을 정부로부터 수여받았다.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의 관계에서 벗어나 선린우호에 바탕을 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바로 일본이 과거를 사죄하는 것입니다』 조씨는 일본의 사죄요구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으로서의 한풀이가 절대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사죄가 첫번째』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는 지의 여부는 일제 강점동안 한국으로부터 「도둑질」해가고 약탈해간 것을 모두 돌려주고 피해를 갚을 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즉,한­일간에 문제로 지적돼온 문화재반환·재일한국인 처우향상·역사왜곡 시정·정신대 문제등 각종 현안에 대해 성의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재일한국인의 경우 그들 대부분이 자의가 아닌 일제의 징용등으로 일본땅에 끌려간 만큼 일본은 그들을 내국인 보다 더 우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한국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본 스스로 더 잘 알것』이라면서 『일제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망언이 되풀이 된다는 것은 일본이 과거사를 사죄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개했다. 그는 2000년대의 새로운 한­일관계 형성을 위해 일본의 사죄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국내의 「한국혼」되살리기가 더 시급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요즘 일부 젊은이들을 보면 여기가 일본땅인지 한국땅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고 온나라가 질서를 잃고 있는데 이 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혼」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일본 동경대 역사교수로부터 「한국사람은 겉으로 반일을 외치지만 오늘 이 시간 일본이 한국을 재침할 경우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국기를 만들어 거리로 나와 일본군을 환영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부터라도 국가적으로 한국혼 되살리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교육 바로서야 그는 『대화혼을 숭상하는 일본과 한국혼을 잃은 한국이 충돌했을 때 누가 이길지는 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우리나라가 지난 5000년간 변변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어도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조들이 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라고 했다. 그는 이와 관련,앞으로 정부에서 민족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혼 살리기 교육」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이번 광복 50주년 행사는 지난 50년간 되풀이 돼온 일회성 행사 차원에서 한단계 높은 행사로 승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광복절 행사의 참석자들은 모두 동원된 공무원으로 자리에서 몸을 비비꼬며 한시바삐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역력했다』면서 『물론 행사도 있어야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후세에 민족정신교육자료로 활용될 문화유산을 만드는 일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노 독립운동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관계의 정립과 한국내부의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을 끝냈다. 조씨는 10여년 전 외동딸을 출가시키고 부인 장영심씨(66)와 8년전 입주한 16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광복회일에 열중하고 있다.
  • 독립유공자 후손 박유철·양준자씨 부부(인터뷰)

    ◎“애국선열 유해봉환 적극 나서야”/고생하는 유공자가족에 죄송/서훈늘리고 보상금 올려주실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은 민족사의 영원한 거울입니다.그것이 흐려졌으면 다시 닦아 들여다 보면서 미래의 진로를 열어 나가야지요.그분들의 피나는 독립투쟁의 역정과 죽음으로 항거한 애국애족 정신을 생각하면 이렇게 살아서 선열들을 기리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의 장손 박유철씨(56·건설부 건설공무원 교육원장)와 항일언론인 우강 양기탁 선생의 손녀 양준자씨(50·안양 대신대 교회음악과 교수) 부부의 해방 50돌을 앞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강남아파트 1동 101호.잘 가꿔진 상록화분이 인상적인 널찍한 응접실 북쪽 벽에는 백암 선생의 영정과 「국혼은 살아있다」는 휘호가 나란히 걸려있어 청사에 빛난 민족선각자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도 있듯이 생존 유공자나 후손들은 대부분 불우한 생활을해왔습니다.유족들중엔 배우지 못한 탓에 무직자들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그런 점에서 최근 정부가 독립유공서훈자를 늘리고 보상금을 인상하는 등 예우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친(박시창 장군·전 광복회회장)이 오랫동안 군에 봉직했던 관계로 자신은 다행히 교육도 제대로 받고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오직 정신적 자부심 하나로 애옥살이를 견뎌내고 있는 다른 유공자 가족들을 보면 괜히 죄스런 생각마저 든다고 박씨는 말한다.현재 광복회 이사이기도 한 박씨의 집안은 친가,외가,처가 모두가 독립운동과 연결돼 있다.친할아버지 백암,처할아버지 우강선생 외에 외할아버지인 최중호 옹은 임정에서 김구선생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으며 선친 또한 김홍일 장군과 함께 중국대륙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다. 두사람은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됐지만 며느리감이 우강선생의 손녀란 말에 박씨의 부친이 더 열성적으로 결합을 추진했다고.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쳐야한다는 것이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때 동지들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셨다고 합니다.선친께서는 늘 「평생 네 할아버지처럼 겸손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한 백암의 인품으로 인해 인맥과 분파로 얽혀있던 당시 상해 독립운동가 사회에서도 선생만은 적이 없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될 수 있었을 것이란게 박씨의 설명이다. 지난해 8월 박은식선생을 비롯,중국 상해시 만국공묘에 안장돼 있던 애국선열 5위의 유해가 국내에 무사히 봉환,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던 것을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무엇보다 가슴 뿌듯하게 생각한다는 박씨.하지만 아직도 많은 독립유공자들의 유해가 해외에 산재해 있는만큼 이들의 조속한 국내 봉환을 위해서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유해봉환문제는 부인 양준자 여사에게는 한층 간절한 소망이자 아픔으로 다가온다.올 봄 우강선생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확인됐지만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혁작업때 인근 물구덩이에 매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국무령으로까지 추대된 할아버지는 당시 임정의 동상이몽에 회의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그래서 말년엔 고당암이라는 한적한 시골암자에 칩거,중국인들을 상대로 참선과 기공을 가르치며 수도자같은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아버지(양효손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6·25때 납북)로부터 귓결에 전해들은 것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지만 양준자 여사의 조부에 대한 정은 유별나다.『늦어도 해방 50돌을 맞는 내년까지는 할아버님의 유해를 반드시 모셔와 고국땅에서 편히 쉬시도록 하겠습니다』
  • 순국선열 공동추모제/이 총리·유족 등 800명 참석

    ◎국립묘지 현충관서 이영덕 국무총리는 17일 『민족의 정기가 바로 선 바탕 위에 선진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제2의 광복」 소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총리는 이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열린 제75회 순국선열 공동추모제전에서 추모사를 통해 『정부는 내년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독립운동사를 재발굴하고 독립유공자를 대대적으로 포상함으로써 왜곡·단절돼 온 민족사를 재정립하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순국선열 공동추모제전위원회(대회장 김승곤)의 주관으로 거행된 이날 행사에는 이총리,김종필 민자당대표,이기택 민주당대표,이충길 국가보훈처장,김승곤 광복회장,이종갑 순국선열유족회장등 8백여명이 참석했다.
  • 중국서 환국 선열유해 4위/대전국립묘지 안장

    【대전=이천열기자 】중국 길림성에서 돌아온 독립유공자 이화일,손병헌,강백규,김기선선생등 네분의 유해 안장식이 18일 하오 대전시 유성구 궁동 대전국립묘지에서 이충길 보훈처장과 유족,광복회원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한편 중국에서 함께 돌아온 윤희순여사의 유해는 20일 강원도 춘천 소재 선영에 안장된다.
  • 오늘 국군의 날/서울도심 시가행진/성남 서울비행장등서 화려한 행사

    건군 46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1일 3부요인을 비롯한 정부와 군 고위관계자·참전용사·시민·장병등 1만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도 성남 서울비행장과 서울 도심일원에서 거행된다. 정부는 이번 국군의 날에 문민시대들어 새롭게 탄생한 우리 군의 위용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민·군화합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방침아래 기념식 행사장을 지난해의 계룡대에서 서울비행장으로 옮기고 90년이후 중단됐던 서울도심 시가행진도 실시하는등 화려하게 치른다. 주행사장인 서울비행장에서는 취타대및 고적대연주·의장대시범등의 식전행사에 이어 상오 10시부터 45분간 본행사가 거행된뒤 2시간에 걸쳐 민군총화축하행사·분열·식후행사등이 진행된다. 민군총화 축하행사에서는 공중에서 특전사 요원들의 집단강하·공중탈출이 펼쳐지는 가운데 지상에서 사물놀이와 서울시립무용단 공연이 동시에 진행된다. 또 현역장병 중심으로 진행됐던 분열행사는 민과 군의 화합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6·25참전 16개국 기수단·광복회원·참전상이용사·역대 여군및 간호장교등 군 관련인사는 물론 고적대와 시민·학생등도 참여하게 된다. 서울도심 시가행진의 경우 보병부대가 서울역∼남대문∼광화문,기계화부대가 서울역∼남대문∼광화문∼동대문 구간을 각각 행진하며 사물놀이패·민속농악대·장병가족·시민등도 행진에 참가한다.
  • 친일파 인명사전 만든다/2만5천명 행적 수록

    ◎독립운동단체/“식민잔재 청산” 국민적 지원 호소 친일파 인명사전의 출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이강훈옹(91),반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45)등 22개 독립운동 관련단체 대표와 안춘생옹(82)등 27명은 국치일인 29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민족정기확립을 위한 민족단체 지도자모임」을 갖고 95년까지 친일 인명사전을 편찬키로 했다. 이들은 이날 「광복 50주년을 바라보는 국치일에 국회·정부·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통해 『내년이면 광복50주년이 되지만 우리는 아직도 친일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며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역사속에서 심판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친일 인명사전의 편찬과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의 제정이 시급하다』며 국민들의 지지를 촉구했다. 친일 인명사전은 91년 2월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되면서 발간을 추진해 온 것으로 2만5천여명에 달하는 친일파의 행적을 정치인,군인,법조인,언론인등 20여개 분야로 나눠 백과사전식의 26권으로 엮을계획이다. 연구소측은 이 사전편찬을 위해 대부분 수집된 국내자료에 이어 국외자료도 수집키로 했으며 친일파 개인의 일생을 추적,친일행위의 자의성과 개인적 이해관계,역사적 상황을 공정하게 조사할 「친일파 심사위원회」도 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구소측은 그러나 『자료수집및 집필에 필요한 1천여명의 인건비등 1백억원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편찬에 따른 재정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고 지원을 받기위한 국회의원 서명운동도 벌일 방침』라고 밝혔다. 발간사업의 실무를 맡은 반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광복과 함께 심판되지 못한 친일파가 우리 역사속에서 어떻게 뿌리내려 또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라며 『인명사전은 48년 친일파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최종 판결문에 해당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소장은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않고는 진정한 문민의 역사를 펼쳐 나갈 수 없는 이상 한 시대를 매듭짓는 차원에서 사전발간이 시급한 만큼 범국민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모임에는 광복회,한국독립운동유공자협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한국광복군동지회,순국선열유족회,민족대표33인 유족회등이 참가했다.
  • 49돌 광복절기념식/독립기념관서… 3천여명 참석

    제49주년 광복절 경축식이 15일 상오 김영삼대통령과 광복회원,독립유공자및 가족,이영덕국무총리 황락주국회의장 윤관대법원장등 3부 요인,김종필민자당대표 이기택민주당대표를 비롯한 여야 주요인사,주한외교사절,시민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남 천안군 목천면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거행됐다. 정부는 경축식에서 독립유공자 고민효식선생과 고석창륜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국장을 추서한 것을 비롯 강윤석 김종철 정희택 조종환 진치만 유한종선생등 고인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경축식이 끝난뒤 겨레의 집 뒤뜰에서 행사 인사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 연회를 가졌다. 이날 온 국민이 참여하는 경축분위기를 위해 서울에서는 독립유공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정오에 보신각 타종식을 가졌으며 시·도마다 별도의 경축식을 거행했다.
  • 광복절 49돌 기념행사/“재미있고 다채롭게”/범국민 축제로 유도

    ◎인기 체육·연예인 경축식 초청/특별 문화행사 다양하게 준비/글짓기·그림그리기·웅변대회도 열기로 올해 제49주년 광복절 행사는 되도록 많은 국민이 참여하고 관심을 갖도록 하자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정부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한해 내내 국가적 행사를 벌일 계획을 짜고 있다.올해는 그에 앞서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킬 필요가 있어 광복절 행사를 다채롭게 가지기로 한 것이다. 가장 특색있는 것은 15일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거행되는 경축식이다.경축식이라면 흔히 딱딱하고 의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올해는 거기에서 탈피,재미있게 행사를 꾸며 되도록 많은 시민이 TV를 통해서도 시청하게끔 유도한다는 방침이다.예년과 달리 일반인 5백명에게도 초청장을 발송,전체 참석규모를 1천6백명으로 늘렸다. 경축식이 재미있으려면 역시 참석인사가 일반의 눈길을 끌어야 된다.이번에는 인기 체육인·연예인이 대거 경축식에 초청되었다.마라톤 영웅인 손기정옹과 황영조선수를 비롯,현정화(탁구)전병관(역도)김수령(양궁)선동렬 장종훈(야구)홍명보(축구)씨 등이 체육계 대표로 참석한다.연예계 인사로는 안성기 이덕화 강수연(영화배우)박인수 오현명(성악가)이미자 최희준(가수)박동진 성창순(국악인)김을동 박규채(탤런트)구봉서(희극인)씨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축식장 분위기도 전통을 살려 새로 꾸미기로 했다.전통복식의 의장대(62명)와 취타대(37명)를 식장 주변에 배치해 경축분위기를 북돋울 계획이다.의장기도 황룡 백호 현무 주작 청룡을 나타내는 5방기와 12간지 가운데 상서로운 6가지 동물을 상징화한 6정기를 식장 좌우에 도열시키기로 했다. 광복절 경축식말고도 갖가지 문화행사를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KBS의 「열린 음악회」 프로그램을 광복절 특집으로 꾸며 8·15전야에 방영한다.또 광복절을 전후해 전국에서 태극기와 무궁화 및 애국가를 소재로한 글짓기와 그림그리기·웅변대회를 연다.덕수궁 청소년음악제(20일)국립 중앙극장광장 판소리마당(20일)도 계획되고 있다.전국 주요 시·도청 앞에 홍보탑도 세웠다. 창덕궁을 제외한 고궁및 능원이 14∼16일 국민에게 무료로개방된다.광복회원들에게는 철도 버스의 무임승차와 국립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무료입장 혜택이 주어진다.
  • 광복회원 가족등에 열차 무료이용 혜택/14∼16일

    철도청은 11일 광복절 49주년을 맞아 14일부터 3일동안 광복회 회원과 회원가족 1명에 한해 수도권 전철과 무궁화호 이하의 열차 일반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 독립유공자 7명/광복절 건국 훈장

    정부는 오는 15일 제49주년 광복절을 맞아 고 민효식선생등 독립유공자 7명에게 건국훈장을 주기로 하고 내년의 광복50주년을 앞두고 올 광복절관련 행사도 다채롭게 갖기로 했다고 총무처가 6일 발표했다. 정부는 15일 상오 충남 천안군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열리는 광복절 경축식에 3부요인과 애국지사,광복회원이외에도 일반시민 희망자와 체육·연예분야의 인기인들을 참석시키는 한편 전통의장대,취타대와 전통의장기,무궁화꽃,청사초롱을 식장에 배치해 예년과 다른 행사를 갖기로 했다. 정부는 또 KBS의 「열린 음악회」를 광복절 경축식장인 독립기념관에서 오는 7일 녹화해 14일 저녁 광복절 전야 특집으로 방영하는 것을 후원하기로 했다.
  • 이강훈 역사증언록/이강훈 지음(화제의 책)

    ◎독립운동가의 광복·통일운동 체험기 광복회장을 지낸 90세의 독립운동가가 평생 자신이 추구했던 조국 광복과 통일운동의 체험을 밝혔다.안중근·김구·김좌진등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의 진면목과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내용이 잘 그려져 있다. 또 조국광복 후 친일세력이 여전히 남아 사회 지도층을 형성한데 대한 분노가 글 곳곳에서 드러난다. 지은이는 1933년 3월 중국 상해에서 일본인 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는 「육삼정 의거」를 계획했으나 동지의 실수로 체포돼 광복될 때까지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광복후에는 재일거류민 사회에서 통일운동을 주도하다「5·16」후 다시 투옥되기도 했다. 이제 우리사회에 몇 분 남지 않은 원로 독립운동가의 생생한 증언록으로서 사료적 가치도 크다. 인물연구소 7천원.
  • 8월의 문화인물 박은식선생/일제때 민족사연구·독립운동에 헌신

    ◎추모세미나·강연회·관련 자료전 다양 문화체육부는 8월의 문화인물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백암 박은식선생을 선정했다. 박은식선생(1859∼1925)은 황해도 황주 태생으로,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 민족사 연구,언론활동,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18 98년 이래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민족고전을 보급,지도하다 한일합방 이후 19 11년 만주로 망명,고대사 연구와 독립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대통령을 지낸 선생의 유해는 지난해 조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왕양명실기」,「대동고사론」 등이 있다. 문체부는 「박은식의 달」을 맞아 8월 한달동안 관련단체와 함께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학술세미나,관련 자료 전시회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마련한다. 각종 기념행사는 다음과 같다.(주관처) ◇강연회 및 세미나=△추모 학술 세미나:12일 하오 1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신용하교수(서울대) 등이 「박은식의 애국계몽사상과 민족주의 역사관」 등에 대해 발표(광복회,한국민족운동사 연구회)△강연회:12일 하오 3시 전북 진안군 마령면 이산묘에서 유장호 전주문화원 사무국장이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강연(전주문화원) ◇전시 및 공연=△관련 사진자료 전시회:1일부터 31일까지 독립기념관에서 선생의 영정 등 사진자료 12점 전시(독립기념관)△관련자료 전시회:1일부터 31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국통사」 등 10종10책을 전시(국립중앙도서관)△박은식의 달 및 광복 49년 기념 축제:14,15일 이리역 광장에서 사물놀이,관현악 연주 등 공연(예총 이리지부)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김공집선생 유해 환국/러서 67년만에… 국립묘지 안장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27년 8월 러시아에서 비행훈련중 순국한 애국지사 김공집선생의 유해가 4일 하오 1시25분 대한항공 924편기로 모스크바에서 환국했다. 이날 김포공항에는 선생의 손자인 종근씨(62·미국LA거주)등 유족들과 광복회원등 50여명이 나와 고인의 유해를 봉영했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하오 곧바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겨져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선생의 유해봉환은 46년 윤봉길의사등 3분의 애국지사가 환국한 이후 33번째이며 러시아에서 봉환되기는 처음이다.
  • 양기탁선생 묘소를 찾기까지/백범이 남긴 약도로 사후56년만에 확인

    ◎유족들,제자와 함께 정확한 위치 찾아/“유해봉환위해 정부차원 지원 있어야” 『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산과 골이야 아무리 깁허도 우리마음은 당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물과 불이야 아무리 겁나도 우리마음은 해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달과 놀이야 아무리 발거도 우리마음은 빗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셔도 우리마음은 뚜룰수 없누나/…』(양기탁 「아해들 노래」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자 언론선각자로 평생을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우강 양기탁선생(1871∼1938)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상해에서 내륙쪽으로 7시간 이상 버스로 달려가는 강소성 남부의 작은 마을 대부진 남문두에는 아직도 우강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우강이 기거하던 고당암터와 묘소터를 확인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해서 7기간 거리 우강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행동하는 필봉」으로 민족자존의 횃불을 드높였다.또 일제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민족적 자각과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이번에 그의 묘소가 사후 56년만에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오는 7월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 90주년을 앞두고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가족들은 물론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해오고 있는 정부와 뜻있는 이들의 애를 태워왔다. 우강의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후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던 묘소의 약도였다.백범은 우강과는 5년 연하로 신민회 활동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등에서 함께 활동해와 남다른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 우강의 유족인 장남 효손(6·25때 납북)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라며 현장의 위치를 그려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이 약도는 우강이 말년에 기거하던 고당암과 주변의 뽕나무밭,묘소위치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3월 이 약도를 들고 묘소를 찾아나섰던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는 『납북된 남편의 뜻을 40여년만에 이루게돼 여한이 없지만 어서 유해를 모셔와 고국에서 편안하게 영원히 쉬시게 하는 일이 남아있다』며 울먹였다. ○농지개선작업때 이장 우강의 묘소를 찾는 작업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손자이자 최씨의 사위인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가 4∼5년전부터 모친(최윤신·77)의 중국에 사는 친척들을 통해 수소문하면서 시작됐다.그 결과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됐으며 이번에 박씨가 모친·장모와 함께 현장을 답사,백범의 약도와 비교해보고 생존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된것이다. 우강의 묘소는 원래 고당암 앞의 뽕나무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선작업때 4∼50ⓜ 남쪽으로 이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밭 한가운데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이 마을에서 만난 제자이자 이장을 역임했던 번정재씨(79·농업)는 『선생은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기공의 경지가 높아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기거하시던 고당암에는 늘 기공을 연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덧붙였다. 우강의 유족측은 올 가을쯤 다시한번 강소성의 묘소를 방문,구체적인 유해봉환을 위한 절차를 현지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는 반드시 유해봉환이 이뤄질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줄것을 강력히 촉구했다.◎양기택선생의 항일 족적/대한매일신문 창간… 국권회복 앞장/신민회 결성… 독립군 양성 등 무장투쟁 말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돼가던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태어난 우강은 소년시절 한학을 배운뒤 15세때 상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25세때 부친과 함께 미국인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그 과정에서 일본 미국등을 다니며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개혁당 당원으로 활약하는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을 맡기도 했다. 우강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할권을 내세우는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따라서 당시 영국 데일리뉴스의 임시특파원으로 서울에 와있던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새신문을 창간했던 것. 국한문 혼용의 국내용 신문과 별도의 영문판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잔혹한 통감정치 하에서도 전국각지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루고 국채보상운동을 펴는등 국운이 쇠하여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민족에게 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심어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재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강은 또 안창호·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대한매일신보 사무실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벌이던 신민회는 1909년 전국대회를 열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어서 한일합방을 앞둔 1910년 3월에는 신민회가 만주 망명을 결정하고 서간도에 기지를 마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이같이 신민회의 활동이 해외거점을 확보하자 일제는 1911년 7월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날조,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하고 신민회를 해체해버렸다.이어 13년에는 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4년만에 감형으로 출소한 우강은 16년 주거제한지인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를 탈출,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했다.그러나 2년뒤 18년에 천진에서 일본경찰에게 다시 체포돼 국내로 압송,전남 거금도로 유배됐다. 20년 4월 유배를 끝나고 서울에 와있던 우강에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가 고문및 편집감독으로 추대를 제의해 왔지만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거절했다. 34년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 우강은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그는 주석직도 얼마 가지 않아 사임했으며 모든 관직을 떠나 강소성 율양현으로 들어가 선도에 몰입하다 38년 4월,67세로 이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우강은 이같은 공로로 62년 독립유공자중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으며 86년 독립기념관의 독립유공자 임정위원 42인에 추대됐다. ▷연보◁ △1871 평남 평양 소천출생 △1885 한성외국어학교 영어수학 △1895 게일의 영어사전편찬 도움 △1900 나가사키 유학 △190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 조직 △1913­5 「양기탁 보안법 위반사건」 및 「105 사건」등으로 투옥 △1916 만주로 탈출 △1918 전남 거금도 유배 △1922 만주에서 의성단 조직 △1926 임정 국무령 추대,거절 △1934 임정 주석 선출 △1938 강소성 담양현 고당암에서 선도연구중 사망
  • “통일로가는 큰걸음”대체로 환영/남북정상회담합의를 보는 시민의소리

    ◎대좌만으로도 큰뜻… 빠른 시일내 성사돼야/북한의 전략전술 여부 파악,신중대처 긴요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18일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김영삼대통령이 이를 전격 수용한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과 사회단체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도 다만 시행착오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진단을 함께 내렸다. ▲서경석 경실련사무총장=이번 정상회담 제의로 긴박했던 한반도 주변 상황이 호전되는 쪽으로 급진전된 것을 환영한다.특히 핵문제는 어디까지나 민족내부의 문제로 이제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해결해야 한다.나아가 남북한 경제교류및 통일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진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백계현 광복회사무총장=북한 핵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우리나라 주변 상황이 희망적으로 변한 것을 환영한다.남북한 관계가 급진전될 계기가 마련됐다는 느낌이다.그러나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정상회담 제의는 그동안의 관행으로 볼때 현실화되지 않을 가능성도 많은 것으로 보여져 한편으로는 걱정이다.남북한 정부가 서로진실성을 갖고 대화를 해 좋은 결과가 얻어지기를 희망한다. ▲양성철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교수(54)=남북정상회담은 그 시기와 장소·조건 등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기때문에 무조건 이를 수용한다는 것은 오히려 북한의 전술에 말려들 위험성이 높다.특히 북한핵문제는 쾌도난마식으로 단순하게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고 자칫 북한의 최면술이나 고도의 전술·전략에 말려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부는 보다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서정우변호사(51)=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할 일이다.특히 북한같이 한 사람에 의해 모든 사항이 결정되는 국가의 최고책임자와 직접 만나 회담을 갖는다는 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당장은 회담의 성과가 없을 수도 있으나 남북 정상이 일단 만나게 됐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으며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시기와 방법은 실무자들이 구체적으로 결정하겠지만 방법에 너무 구애받지말고 빠른 시일내에 회담을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창복 전국연합상임의장=북한 핵 등 남북한의 현안을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자주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크게 환영한다.우리 정부가 정상회담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준비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바란다. ▲한장섭군(26·동국대 총대의원회 의장·독문학과 4년)=어떤 형식이 됐든 남북간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민족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 찬성이다.그동안 북한 핵 문제로 남북관계가 지나치게 긴장돼 있었으며 또 사실이상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양쪽 최고 권력자가 만나 이러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김영미씨(27·주부·강서구 화곡동)=이번 정상회담 수락을 계기로 그동안 일반시민들을 불안속으로 몰아넣은 북한 핵문제가 두 정상의 허심탄회한 대화로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또 나아가 남북한 경제교류와 인적교류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향휴 일정을 마련,통일의 기초를 마련해주었으면 좋겠다. ▲이헌호씨(31·공인회계사)=반드시 남북정상회담을 성취하기 바란다.남북이 정략적 차원에서 곧잘 이용해온 정상회담을 탄탄한 국민적 지지를 받고있는 문민정부가 이루어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성과를 올린것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오치규씨(27·서울대 정치학과4년)=핵문제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 민족 스스로의 해법으로 풀수 있도록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그 초석을 닦아놓았으면 한다.두 정상간의 대화로 갑작스런 평화무드가 형성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이루어내야할 민적의 대과업인 통일에 한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다.
  • 일본 나가노 망언/규탄시위 잇따라

    태평양전쟁은 정당방위이고 대동아공영권 해방목적이었다는 일본 나가노 시게토법상의 망언을 규탄하는 시위및 성명서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공동대표 양순임)소속 회원 1백여명은 6일 하오1시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앞에서 집회를 갖고 나가노 법상의 즉각 해임과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하는 항의시위를 벌였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상임의장·이창복)도 이날 성명서를 통해 『이번 나가노 장관의 발언은 태평양전쟁범죄인정및 이에대한 법적 처벌과 보상을 백지화시키려는 일본 내각의 정치적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가노 법상의 사죄와 전쟁피해에 대한 보상을 촉구했다. 광복회(회장 김승곤)도 이날 하오 성명에서 『일본 법무상이 지난날 일제가 저지른 군국침략의 야만적 행위를 은폐하고 미화하려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중국등 기타 피해국가에 대한 모독이며 이 속에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모색이라는 저의가 담겨 있다』고 비난했다.
  • “임정은 민주헌정 시발점”/이 총리,임정수립 75돌 기념식서 강조

    정부는 13일 상오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이회창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및 재경 광복회원등 1천3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제75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총리는 이날 기념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로 민주헌정의 시발점』이라면서 『우리는 선열들의 거룩한 유지를 이어받아 민족사의 정통성을 더욱 빛낼 결의를 새로이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천병림 장봉한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병한 이태형 서재현(생존·88세) 김성국 최광 송철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윤영백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다.이로써 독립운동으로 포상을 받은 유공자는 모두 6천4백81명에 이르게 됐다. ◎선열 7위 합동추모제 한편 이날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서울 효창공원 의열사에 모셔진 김구 이동령 조성환 차리석선생등 4위의 임시정부 요인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사등 순국선열 7위에 대한 합동추모제가 효창원 순국선열추모위원회(위원장김재홍)주관으로 광복회원및 유족,각계인사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 양기탁선생/대한매일신보 창간… 항일의식 고취(이달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결성… 만주서 독립군 양성 주도/의용군 국내에 파견,일제기관 등 습격 양기탁선생은 국운이 꺼져가던 대한제국말기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고취한 언론인이자 신민회등 비밀결사를 통해 무장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1871년 4월2일 출생한 선생은 1938년 4월19일에 운명,이달로서 서거 56주기와 탄신 123주년을 맞게 됐다. 평양 출신인 선생은 소년 시절 영어를 배워 1895년 미국인 게일박사의 한영자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사전인쇄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길에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 감명받은 선생은 귀국후 개화파들이 모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친러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는 과정에서 체포돼 조사를 받고 나온 선생은 게일박사의 도움으로 도미,3년뒤인 1901년 귀국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 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 일을 했다. 선생은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신문운영이 필요하다고 판단,고종으로부터 황실판공비인 내탕금을 지원받아 신문사 시설을 마련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헌병대의 출판물 검열을 피하기 위해 당시 영국 데일리 뉴스 임시특파원이던 영국인 배설(Earnest Bethell·1872∼1909)을 사장으로 1904년 창간됐다. 이 신문에는 박은식선생을 비롯,신채호·최익·장도빈등이 제작진으로 참여했다.외국인 명의로 발행돼던 이 신문은 일제 통감부의 검열을 피하면서 「일인입불가」를 출입문에 써붙였을 정도로 강한 반일감정을 나타냈다. 국한문혼용인 국내용 신문과 별도로 영문판을 발행한 이 신문은 통감부의 신문지법에 다른 신문들이 얽매여 의병활동을 폭도라고 표현할 당시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역할을 수행,1만3천여부의 부수를 자랑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이 신문을 폐간하기 위해 우선 사장인 배설을 영국영사재판소에 치안방해죄로 고소,중국 상해로 추방했다.배설은 형을 마친뒤 서울로 돌아와 옥고 후유증으로 숨졌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안창호선생을 비롯한 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선생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신민회본부는 대한매일신문안에 두었으며 지방지국은 연락망으로 활용됐다. 전국 8백여명의 애국세력이 집결한 신민회는 1909년 독립군 창건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선생의 집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이날 대회는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선생은 이 계획에 따라 군관학교를 세울 적당한 장소물색을 위해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이동령등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처럼 신민회의 활동이 뚜렷해지자 일제는 1911년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꾸며 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투옥시켰다. 이어 일제총독 암살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원 8백명을 전원 체포,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4년만에 석방된 선생은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에 유배됐다. 선생은 다음해인 1906년 유배지를 탈출해 만주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중 다시 일제에 체포,국내로 압송돼 전남 거금도에서 2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동양을 순방중인 미국의원단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독립만세운동을 펼쳐 또 투옥됐다. 모친 사망으로 일시 방면된 틈을 타 만주로 도피한 선생은 무장항일단체인 의성단을 결성,봉천의 만철병원 습격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4년에는 이청천·김동삼등과 함께 대한군정서·통의부등 만주내 무장항일단체를 통합,정의부를 결성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해 일제기관을 공격하게 했다. 선생은 또 중국내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도 추진,김규식선생등과 함께 1932년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을 구성했다. 1934년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국무회의가 자신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수락한뒤 한국독립당·대한독립단·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등 여럿으로 갈라진 독립세력을 규합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등 독립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미국과 중국내 독립세력의 재규합을 추진,남경에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1938년 68세를 일기로 숨졌다. 정부는 선생에게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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