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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白凡 재조명:2­1(정직한 역사 되찾기)

    ◎생애 재평가/利害­이념 초월… 독립­통일 헌신/애국단 의거·광복군 참전 지휘/상황논리 정치이익과 타협 배격/‘한국의 간디’ 역사성 부여해야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그러나 세계사는 일그러진 역사로 얼룩져 있다.세계사의 많은 갈등과 분쟁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이다.한국의 현대사에도 일그러진 역사가 있다.그중의 하나가 백범 金九 선생에 대한 잘못된 평가다. 백범의 독립운동은 과격한 테러에 의존했고 현실인식도 부족했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다.그의 실패한 남북협상은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그러한 평가는 그러나 친일세력들의 식민사관과 백범을 죽인 권력집단의 인위적인 ‘평가절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뿐이다. 테러리즘 비난은 주로 ‘한인애국단’ 활동 때문이었다.백범은 애국단을 창설하고 애국단의 李奉昌 의사와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지휘했다.그러나 애국단 활동을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제 강점을 합법적 지배구조로 보는 민족 반역적인 친일 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의 愼鏞廈 교수는 “애국단 활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을 부활시킨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애국단 활동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과 독립운동의 성과를 재인식하고 재정지원 등을 재개했다.그 결과 집세도 제대로 못내던 초라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신뢰와 협조를 다시 얻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활성화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았다.일제가 조작한 1931년 7월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증오와 적대행위가 만연되며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尹奉吉 의사의 의거는 일본침략군에게 상하이(上海)를 점령당한 중국인들의 울분과 한을 풀어준 통쾌한 일이었다.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군 30만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그후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었다.애국단의 의거는 특히 국제도시 상하이·도쿄 등에서 일어났기때문에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백범은 국제사회의 냉엄함도 잘 알고 있었다.망명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어떻게 수탈하는 지를 체험을 통해 알았다.자주적 독립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의 참전을 서두른 것도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보다 빨리 바뀌었다.광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그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수년간 애써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라며 아쉬워했다.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전후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연합군에 앞서 파리 입성을 고집했듯이 백범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일본과의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자주독립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백범은 귀국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통일한국만이 진정한 민족의 광복이라고 강조했다.일부는 백범의 이러한 통일노력을 공산주의 본질을 잘 몰랐던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라고 매도했다.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이념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특히 중국에서 국공(國共)분열이 얼마나 참담한 비극이었는 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결국 분단국가가 성립되면 같은 민족간의 갈등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통일한국의 건설을 위해 남북협상을 강행했다. 그는 정치적 이익과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받쳤다.그의 위대함은 상황이 불리한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애국의 역사였다.그러나 현실정치는 그에게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그러한 오류는 고쳐져야 한다.백범은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야 한다.그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정직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암살의 진상/이승만 정권­軍部 합작품 1949년 6월26일.그날은 비극의 일요일이었다.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金九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분노와 애도의 물결 속에 온 겨레는 슬픔에 잠겼다. 백범은 7월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함께 묻혀 버렸다.자신의 집무실 경교장(京橋莊)에서 당시 포병소위였던 안두희에게 피살됐으나 그 배후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러나 1년도 못되어 석방된 후 육군에 복귀,대위까지 진급했다.후에 국회에서 그 사실이 문제되자 제대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의 비호아래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李承晩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다.그러나 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진상조사활동은 거의 중단됐다.그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은 없었다.곽태영·권중희·노송구씨 등에 의한 안두희 추적만 있었을 뿐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없었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92년 11월5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 진상위원회(위원장 이강훈)’가 국회에 청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국회의 청원심사소위원회(위원장 강신옥 의원)는 95년 12월18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보고서는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고 결론내렸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암살사건은 고급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이 전반적으로 조율했다.그의 지시를 받는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이들은 모두 정권적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쪽 이었다.암살명령은 장은산 당시 포병사령관이 내렸다.김창룡 특무대장은 사건후 적극 개입했다.채병덕 총참모장,전봉덕 헌병부사령관,원용덕 재판장,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사후 처리를 주도했다. 백범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李承晩 전 대통령과 미국의 관련성이다.李 전대통령은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도덕적 책임이 있다.사건후 개입한 것도 확인됐다.미국도 암살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판단된다. ◎안두희 ‘처단’ 朴琦緖씨/“정의 일깨우고 싶었습니다”/힘겨웠던 독방생활/김구 선생 떠올리며 감내/어려운 사람 잘 사는 세상 왔으면 朴琦緖(49)씨는 버스 운전기사다.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金九 선생 암살범 安斗熙를 죽인 ‘정의의 사나이.’ 그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安斗熙를 죽인 것도 사회의 정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위대한 민족 지도자 金九 선생을 시해한 사람이 제명을 다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 10월23일.安斗熙는 朴씨의 ‘정의의 봉’에 맞아 죽었다.“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죄의식은 크게 없었습니다.하지만 고뇌의 시간도 많았습니다.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년형의 판결을 받았다.감시 카메라가 있는 독방에서 생활했다.“교도소 생활은 힘들었습니다.추위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귀와 발이 동상에 걸렸습니다.그러나 고통의 순간마다 金九 선생의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생각했습니다.金九 선생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편한가라고 위로했습니다.”성당에 다니는 그는 성경과 백범일지,역사책 등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13일 사면으로 청주감옥을 나왔다.잠시 중단했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부천에 있는 소신여객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회사 노조원들의 석방운동이 고마왔습니다.광복회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의 석방운동도 감사했습니다.” 출옥후 그의 집에는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아이들(딸 2명 아들 1명)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그저 평범한 아빠로 보던 그들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살인자의 아내’라는 부담을 느끼던 아내도 자랑스런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운전기사로 남기를 원한다.그는 오늘도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과 월미도 사이를 달린다.“나의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金九 선생의 큰 뜻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말했다.
  • 사회단체 대표 청와대 오찬 이모저모

    ◎“지방선거후 정계개편 시기올것” 金 대통령/金炯旭 실종·각종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적재적소 인재등용·장애인 고용 등 촉구 金大中 대통령은 14일 낮 청와대에서 가진 시민단체와 사회단체 대표 39명과의 오찬에서 이전과는 달리 말을 극도로 아꼈다.국정현황과 국정운영 철학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참석한 단체장들로부터 허심탄회한 질문을 듣고 핵심만 답하는 ‘간소함’을 즐겼다. ○현안 폭넓게 질문·건의 단체장들의 질문은 무척 광범위했다.인사문제에서부터,대통령의 ‘고군분투’모습,유(柔)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국정운영,장애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전반적인 현안들이었다.그러나 金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애정은 짙게 깔려있었다. 다음은 단체 대표와의 대화록. ▲權快福 광복회=국난때마다 온 국민이 일치단결해 슬기롭게 극복했듯이 다함께 극복해 나가자. ▲徐英勳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회=임기중 민족의 운명이 번영의 길로 나가도록 대통령을 밀어 국난을 헤쳐 나가자. ▲姜汶奎 녹색연합=기업구조조정은 부진하고 노동계만 불평등하게 고통이 분담되고 있는 것 같다.‘작은 정부’ 실천에도 국민의 이해가 부족하다. ▲明魯根 한국YMCA연맹=유하게 정국을 이끌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기업은 개혁돼야 할것 ▲金대통령=기업은 개혁돼야 할 것이다.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을 것이다.노사정 2기 활동기간중 고치자는 것이다.대통령만 고군분투하는 건 아니다.나는 외환위기 극복에 주력하고 있고,정부도 함께 노력하고 있다.유하다고 하는데,강하게 하는 것은 내 전문이다(웃음).그러나 국민과 대화하고 의견을 수렴하면서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宋寶炅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개혁성과 전문성을 고려,적재적소에 인재를 써야 할 것이다. ▲배다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회=통일부을 개방,수시로 협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민주화운동의 희생자도 보훈법 대상이 되어야 하고,의문사도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金대통령=개혁성과 전문성을 기준으로 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지적은 매우 옳다.전국연합이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라고 통일부에 얘기해 주겠다(웃음).의문사 진상규명과 관련,金炯旭씨 실종사건 등은 당사자가 민주화투사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진상은 규명돼야 한다. ▲金성재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장애인고용 약속이 외환위기로 지켜지지않고 있다. ▲徐敬錫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회=인도적 관점에서 탈북자를 처리하고,현정계개편이 제한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金庸來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시민단체지원법 제정이 이뤄져야 한다. ▲金대통령=장애인에 대한 국민인식이 달라져야 한다.지방선거 끝나고 정계개편 시기가 오지 않나 생각한다.
  • 도산 배우기/최홍운 논설위원(외언내언)

    겨레와 나라 위해 한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다 간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정확한 사망시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주요한의 ‘도산 전기’에는 “1938년 3월10일 밤,시계가 12시를 땡땡 치는 것과 동시에 도산의 맥박과 호흡이 끊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938년 3월10일자로 종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각 경찰서장에게 보낸 경종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2468호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을 보면 0시 6분으로,그리고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경동고비(경성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1070호 ‘정치 요시찰인 사망에 관한 건’에는 0시 5분으로 돼 있다. 1∼6분의 차이가 있어 당시 시계의 정확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겠는가.민족의 큰 별이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떨어진 사실만은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10일 상오,선생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묘소에서는 신임 김의재 보훈처장과 권쾌복 광복회장,흥사단원 등 200여명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비록 조촐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추모식이었다. 선생께서 그토록 염원했건만 결국 보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던 조국의 광복이 이룩된 지 53년,그리고 나라가 세워진지 50년이 되었건만 우리는 지금 6·25이후 최대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IMF관리하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밥을 먹어도 독립을 위해,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외친 민족주의 사상가 도산 선생의 가르침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되새겨야 할 부분은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한다’는 뜨거운 민족애와 ‘폭력보다 정신력이 앞서는 독립운동’을 주창하고 실천한 평화주의,수감중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심문을 받는 중에도 ‘조선민족 독립의 대업을 이루려는 것이 흥사단과 동우회의 목표’라고 분명히 밝힌 용기와 정직성일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는 결코 자신이 나서지 않고 이승만을 앞세웠던 점도 정부요직 인사철인 요즘 생각해볼 일이다.‘무실역행’. 정신적인 실력뿐아니라 현실적인 실력도 길러 실천하는 길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 “국난 극복 위해 신명 바칠것”/김 대통령 3·1절 기념사

    ◎북에 특사교환 재촉구 김대중 대통령은 1일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이 있은지 79년후인 지난 2월25일 50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국민에 의해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룩됐다”고 전제하고 “‘국민의 정부’는 3·1 선열들에 의해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받드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천명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수한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과 광복회 회원 및 3·1운동 희생선열 유족,시민대표 등 4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79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국난을 극복하고 내일의 재도약을 실현하기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대통령은 특히 “튼튼한 안보 위에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며 북한당국에 대해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교환을 거듭 제안한 뒤 “평화공존·평화교류,그리고 장차의 평화통일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수준의 대화에도 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남북합의서에서 합의된 화해와 협력,불가침관계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면서 “우선 최소한의 대화,교류를 통해 무엇보다도 이산가족의 상봉 내지는 생사확인만이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3·1운동은 대화합의 절정을 이룬 국민적 총참여,바로 그것이었다”면서 “이러한 정신이 다시 한번 발현되기 위해 노사,동서,노소,남녀가 화합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으며,노·사·정 대타협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날 기념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김상길 광복회 고문의 3·1운동 경과보고,권쾌복 광복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기념식 노래인 ‘동방의 등불이여’ 독창 및 합창,김대통령의 기념사,3·1절 노래 제창과 김국회의장의 선창에 의한 만세삼창의 순서로 40분동안 진행됐다.
  • 대통령 이·취임식 앞으로 23일

    ◎김대중 당선자­노사정 합의도출·구조조정 등 숙제 산적/외환위기로 미뤘던 인사카드 점검 분주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오는 25일 ‘당선자’라는 꼬리표를 떼지만 현재도 사실상의 대통령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동안은 외환위기의 해결이라는 ‘책임’만이 부여된 절반의 역할이었다.그런 만큼 취임식은 ‘권한’까지 넘겨받는 공식 의례다. 그런 김당선자에게 2월은 결코 청와대 입성이라는 기대에만 부풀어 있기에는 난제가 쌓여있다.그것도 노·사·정합의 도출과 정부조직개편안 처리,새 정부의 청와대 수석과 내각 인선,대기업 개혁,정치권 구조조정 등 하나같이 부담스럽다.그는 먼저 2월 임시국회에서 정부조직개편안과 정리해고를 법제화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처리해야 한다.특히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위해서는 노·사·정합의가 필수적이다.김당선자가 공무원에 대한 정리해고에 해당하는 직권면직제를 도입,공무원수는 10% 줄이려는 것도 고통분담을 실천하여 노동계를 설득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외환위기의고비를 넘기기 위해 중순 이후로 미루어놓은 청와대 수석과 내각 인선을 위해 그는 일요일인 1일도 삼청동 임시공관에서 인사기록카드를 검색하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재벌개혁을 놓고 당사자인 대기업쪽에서 간간히 불멘소리가 들려온다.이래저래 취임에 앞선 2월은 김당선자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정치력을 검증하는 관문인 셈이다. ◎김영삼 대통령­마지막 국정 챙기기… 일정도 빡빡/상도동자택 수리 완료… 비서관도 확정 5년전 변화와 개혁을 외치며 ‘문민 대통령’ 으로 화려하게 출발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주변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짙게 배어나고 있다.취임초 90%가 넘는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역사에 남는 대통령을 꿈꿨던 김대통령과 주변인사들이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강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들은 김대통령이 마지막 순간까지 국정을 챙기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전한다.앞으로 얼마 남지않은 기간이지만 일정이 비교적 빽빽하다.3일에는 헌정회.광복회 회원들을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함께 한다.이어 5일에는 주한외교단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다과회를 갖고 7일에는 같이 일했던 전직 국무위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격려할 생각이다. 제일 관심을 끄는 대목은 한나라당 이회창 명예총재,그리고 전두환.노태우두 전직대통령과 화해의 자리를 가질까이다.최근 이명예총재도 긍정적인 뜻을 전해온 것으로 알려져 조만간 ‘만남’이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청와대 관계자들의 얘기다.그러나 전·노 두 전직대통령과의 회동은 아직은 부정적이어서 퇴임전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와함께 퇴임후 돌아갈 상도동 자택 수리는 이미 끝나 이삿짐도 대부분 정리됐으며,함께 갈 비서관들도 확정된 상태다.
  • 정부조직 개편 심의위 공청회 중계

    ◎예산실 이관·통상부 신설 열띤 논쟁/예산·거시경제 총괄 재경원 존속 반론도/통상부 소속 청와대­총리실­외무부 팽팽/정무 2장관실 존폐 논쟁… 공무원 감축 목소리 커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위원장 박권상)는 16일 하오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정부조직개편 공청회를 열고 15일 마련한 개편시안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들었다.구본호 울산대 총장,김용정 동아일보논설위원,노진귀 한국노총정책본부장,박윤흔 대구대총장,송보경 서울여대 교수,신대균 행정개혁시민연합사무총장,유근일 조선일보논설위원,조석준 서울대 명예교수,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최동규 중소기업연구원부원장 등 각계 인사 10명이 토론에 나서 4시간동안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특히 재경원 예산권의 이관과 통상외교기능 조정등의 쟁점에 대해서는 첨예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또 보훈처 폐지를 주장한 유근일 조선일보논설위원의 발언에 대해 방청하던 광복회 회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항의하거나,폐지가 거론된 부처 관계자들이 발언권을 얻어 이의를 제기하는 등 토론은 시종열띤 분위기를 이어갔다. 토론내용을 쟁점별로 정리한다. ▷재경원 개편·예산기능 이관◁ 조석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재경원 인책론과 연결시켜 “재경원은 예산실을 떼어내 국고부나 재무부로 축소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조교수는 “예산실을 총리실에 두면 예산실장의 권한만 강해진다”며 대통령실에 둘 것을 주장했다.신대균 사무총장도 같은 주장을 편 뒤 이에 더해 “예산실에 관료외에 민간 경영혁신전문가들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반면 최동규 부원장은 예산실을 재경원에서 분리하되 정책조정기능을 감안,대통령실이 아닌 국무총리실에 둘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장 출신 구본호 울산대 총장은 예산실 분리와 재경원 축소에 강력 반발했다.구총장은 “국제수지 방어와 물가·고용 안정 같은 거시경제를 통합조정할 리더가 있어야 하므로 경제부총리는 그대로 둬야 하며 예산기능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박윤흔 대구대 총장도 “경제부처의 좌장에게 예산기능을 안주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없다”며 “우리나라는 아직 경제를 총괄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국무위원이 있어야 한다”고 재경원 존속을 지지했다.좌승희 원장도 “규제완화와 시장자율화를 위한 경제조정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재경원은 예산권을 유지한 가운데 존속돼야 한다”고 맞섰다. ▷통상외교전담기구 신설◁ 통상외교전담기구를 새로 두자는 의견과 외무부가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김용정 논설위원은 “통상문제는 복잡다기할 뿐 아니라 국내산업과 밀접히 연계돼 있어 외무부 조직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면서 청와대 직속의 대외경제부 신설을 주장했다.조석준 교수와 박윤흔 총장도 “대외경제협력부문은 외무부나 통상부 모두 자격이 없다.대통령 직속으로 50명 정도 새로 공개모집해 전문협상단을 구성해야 한다”고 가세했다.송보경 교수는 “무역위원회와 통합,총리실 산하에 대외통상위원회를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비슷한 의견을 냈다. 그러나 유근일 논설위원은 “대외경제부를 신설하면 외무부 재외공관만큼세계 각 주요도시에 모두 대표부를 두려할 것”이라며 외무부가 통상외교기능을 전담할 것을 주장했다. 신대균 사무총장은 대외경제부 신설에 반대하면서도 “민간전문가 50여명으로 대통령 직속의 태스크포스를 구성,경제외교기능을 맡겨야 한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기타 쟁점◁ 조석준 교수 등 일부 토론자들은 공무원 감축을 강도높게 촉구했다.조교수는 “고통분담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부처 통폐합과 별도로 언제까지 공무원 몇명을 줄이겠다는 혁명적인 공무원 감축방안이 제시돼야 한다.단순히 장관을 차관으로,치관을 1급으로 낮추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박윤흔 총장도 가세했다. 정무2장관실의 폐지여부도 쟁점이 됐다.박윤흔 총장은 “상징적 의미에 불과한 만큼 굳이 유지할 게 아니라 여성특위로 전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그러나 송보경 서울여대 교수는 “당선자의 정치적 약속이자,사회 구성원의 절반이 지켜보는 사안”이라며 존속되거나 여성부를 신설할 것을 주장했다. 이밖에 신대균 사무총장은 “현정부에는 국정평가기능을 맡는 부처가없다”며 총리실의 정책평가기능과 기획조정기능,안전관리기능이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 52주년 광복절 경축식

    제52주년 광복절 경축식이 15일 상오 천안 독립기념관내 겨레의 집에서 김영삼 대통령,김수한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김용준 헌법재판소장,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김종필 자민련 총재,강경식 경제부총리 등 3부요인과 정당대표 및 국무위원,생존 애국지사,광복회원,지역 주민 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경축식에서는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주미외무위원을 지냈던 고 김호 선생,독립운동단체에 군자금을 제공했다가 옥고를 치른 고 황상현 선생 등 독립유공자들을 대신해 그 후손들이 건국훈장 등을 받았다.
  • 오늘 광복절 52돌/모범수 360명 가석방

    오늘은 52주년을 맞는 광복절이다. 정부는 이날 상오 3부요인과 생존애국지사,광복회원,시민 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경축식을 갖는다. 개관 1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의 한인동포 3세 20명이 특별히 초청됐으며,고 김호 선생(1884∼1968) 등 독립유공자 7명에에 건국훈장이 수여된다. ◎민생침해사범은 제외 법무부는 14일 8·15 광복절을 맞아 무기수 9명과 징역 10년 이상 장기수 35명 등 모범 수형자 318명을 가석방하고,모범 보호감호자 42명을 가출소시키는 등 모두 360명을 15일 상오 석방한다고 밝혔다. 이번 가석방에는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8년 7개월을 복역한 김모씨를 비롯해 각종 기능자격 취득자 95명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조직폭력범 가정파괴범 인신매매범 마약사범 등 민생 침해사범은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됐다.
  • 미·중서 독립운동/선열유해 5구 봉환/오늘 대전국립묘지 안장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을 바친 미주지역 독립운동가 부부 정양필·이화숙 선생과 홍언 선생,중국지역의 독립운동가 차원몽·남인상 선생 등 해외의 독립운동 선열 유해 5위가 5일 국내로 봉환됐다. 유해는 이날 하오 김포공항에 도착,박상범 국가보훈처장 권쾌복 광복회장과 유족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봉영식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임시로 안치됐다.6일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다. 정부는 이에 앞서 선열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및 애족장을 추서했다.
  • 광복회 회원 조계진 여사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며느리이며 애국지사 이규학 선생의 미망인으로 광복회회원인 조계진 여사가 21일 하오6시30분 별세했다.향년 100세. 조여사는 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의 모친이기도 하다.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이며 발인은 25일 상오 9시.장지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이다. 유족으로는 아들 종원(재미)·종찬씨,딸 정현씨 등 3남2녀가 있다.
  • 임정요인 손정도 선생 유해 환국

    ◎서거 65년만에 오늘 동작동국립묘지 안장/무장독립운동단체 「의용단」조직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급인 의정원 의장으로서 무장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종교지도자였던 해석 손정도 선생(1882∼1931)의 유해가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에서 서거 65년만에 11일 하오 고국으로 돌아왔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 임시 안치된 뒤 12일하오 2시 동작동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부인 고 박신일여사와 함께 안장된다. 정부는 이날 하오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에서 황창평 국가보훈처장,권쾌복 광복회장과 유족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해 봉영행사를 가진데 이어 12일에는 이수성 국무총리,황보훈 처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유족 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장식을 거행한다.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고 손원일 제독(80년 사망)이 선생의 장남이며 유족으로는 2남 원태(82·재미교포·의사),3녀 인실씨(79·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와 장손인 명원씨(55·쌍용자동차 사장) 등이 있다. 1992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손정도선생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에 파견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운동 시위계획에 참여했다가 상해로 망명,이동령 등 동지 30여명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부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20년 1월에는 김입·김철·김구·윤현진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발표했으며 의용단 단장인 김석황은 같은해 8월 평양경찰서와 평양시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활동을 보였다.
  • 김 대통령·DJ 간단히 악수만 교환/광복절 경축행사 스케치

    ◎경축사 대부분 한반도 4자회담에 할애/「과격시위 단호 대처」 대목에만 박수터져 ○…김영삼 대통령은 15일 상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51주년 경축식에 참석,내빈으로 참석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조우했으나 간단히 악수만을 교환. 경축식이 끝난뒤 김 대통령은 단상 귀빈석의 3부요인과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김 국민회의 총재,김수한 국회의장 등 여야정치인과 차례로 악수를 교환.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경축식에 불참. 김 대통령은 이어 예정에 없이 단하로 내려가 일반 참석자·합창단 등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뒤 퇴장. 김 대통령은 이날 18분여에 걸친 경축사 내용의 대부분을 한반도 4자회담 문제에 할애. 김 대통령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참석자들은 최근 한총련의 과격시위와 관련,『자유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체제전복세력에는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는 대목에서 박수로 공감을 표시했고 『군의 최고통수권자로서 막강한 국방력으로 나라와 국민을 확고히 지킬 것』이라는 대목에서도 박수. 이날 경충식은 광복회원,독립유공자및 가족,여야 정치인 등 3천여명이 참석. ○…정부는 광복절 경축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이날 낮12시 보신각종을 33번 타종했으며 각 시·도에서는 자체 경축식을 별도로 개최. 정부는 또 이날 하루 전국 고궁 및 능원을 전 국민에게 무료개방하고 광복회원과 동반가족 한사람에 한해 14일부터 16일까지 시내버스·전철·지하철과 무궁화호이하의 열차를 무임승차할 수 있도록 했다.
  • 광복 51돌 경축식/이병희 여사 등 7명에 훈포장

    정부는 15일 상오 제51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김수한 국회의장 등 3부요인,광복회원,독립유공자 및 가족,여야정치인,시민 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식을 거행했다. 정부는 이날 경축식에서 독립유공자 이병희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임표 선생 등 이미 고인이 된 6명의 독립유공자에게도 건국훈장 및 포장을 추서했다.
  • “통일은 광복의 완성”/김 대통령,광복회원 초청 오찬

    김영삼 대통령은 광복절 51주년에 즈음해 14일 낮 김승곤 회장을 비롯한 광복회 회원 76명을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함께 하며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조국의 통일을 이루고 세계 일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진정한 광복의 완성』이라며 『광복 반세기를 넘긴 이제야말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이 민족사적 소명을 다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정부는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독립유공자들이 우리 사회로부터 더욱 존경받고 삶의 보람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나라 걱정하는 모임」 원로 1백명 시국선언

    ◎“15대국회 정쟁 지양을” 각계 원로들의 모임인 「나라를 걱정하는 모임」(대표 서영훈)은 22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15대 국회와 여야 정치인에게 보내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총선 결과 심각한 지역할거와 보스 중심의 파벌경쟁,부정한 공천경쟁 등 고질적인 병폐가 그대로 되풀이됐다』며 『정부와 정당 및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드러난 국민의 뜻을 받들어 당파를 초월해 국정 과제들을 현명하고 공정하게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 하라』고 촉구했다. 균형있는 경제발전과 민생안정,정의로운 질서확립,생존 환경보호,교육개혁,문화복지 실현,세계사 속의 민족정체성 확립과 통일기반 조성 등에 역점을 둘 것도 당부했다. 서대표를 비롯,고흥문 전 국회부의장,조완규 전 교육부장관,이강혁 전 한국외대 총장,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김지길 목사,이세중 변호사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선언에는 이한빈·현승종 전총리,강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이영덕 한국정신문화 연구원장,김승곤 광복회장,송 연세대·홍일식 고려대·박홍 서강대·고건 명지대·김진현 서울시립대 총장과 김성수 전 성공회 대주교 등 각계 지도급 인사 1백명이 서명했다.〈김태균 기자〉
  • 정부 기념행사

    1일은 제77주년 3·1절이다. 정부는 이날 이수성 국무총리를 비롯,김상길 광복회고문과 김승곤 광복회장,3·1운동희생선열유족,시민·청소년대표 등 각계인사 4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을 갖는다.
  • 일재 식민사관 맞선 애국계몽 사상가/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채호선생

    ◎자주적 한국 고대사 재구성,민족사관 확립/연해주서 광복활동… 「조선혁명선언」도 집필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정언을 지낸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살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살때 행시를 지었으며 12살때 사서삼경을 독파,신동으로 불렸다.18살때 한말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천원군 목천 사저를 출입하면서 신·구서적을 섭렵,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키워간다. 26살때인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위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당시의 애국계몽운동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던 상황에서 실력을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한 방법이었다.그러나 같은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됨에따라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조약을 규탄하자 황성신문은 압수조치와 함께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1906년 영국인 베델이 사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참가,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일본 사학자들은 「조선사」등을 저술,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의 초기식민주의사관을 퍼뜨리면서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에 광분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같은 일제의 거짓학설에 대한 학문적 투쟁을 전개,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다.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먼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한 뒤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생은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선생은 연해주에서 광복회를 조직하고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는 박은식 등과 박달학원을 세우는 등 국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임시정부 발기회의 참가했으나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그가 윌슨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하고 퇴장했다.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를 묶어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역시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반 임시정부의 노선을 걸었다.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한 선생은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이 선언은 일제의 요인과 기관을 암살·파괴할 폭탄·단총과 함께 의열단원이 휴대하는 필수품의 하나였을 정도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일제당국을 공포에 빠뜨렸다. 1924년 집필된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씌어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를 집필,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들 역사서를 통해 제시된 선생의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사관은 당시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대응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과에 따라 대만에서 화폐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순국했다.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영원한 의병장 의암 유인석(압록강 2천리:20)

    ◎을미항일투쟁 실패 후 보달원에 은거/제천서 궐기… 한때 원주·단양일대 석권/청·러시아 방해로 의병활동 재기 좌절/한족들이 기념비·허묘세워 충절의 넋기려 요령성 관전현일대에는 19세기말부터 조산팔도의 의병들이 몰려들었다.이른바 서간도로 불리는 이 압록강유역은 일찍 항일의병은 동의 요람을 이루었다.그 지도자는 의암 유인석(1842∼1915)이었는데,1896년에는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땅을 밟았다.1895년의 을미의병운동이 국내에서 실패하자 부득이 서간도로 들어온 것이다. ○작년 정부서 건립 그가 오래도록 살았다는 관전현 보달원은 이름그대로 가는 길이 멀었다.관전현 현성에서 80㎞나 되었으니,걸어가자면 먼 길이었을 것이다.지금도 승용차로 4시간이 걸린다.막상 보달원에 도착하고 나서 그가 숙영지로 삼았다는 고령지를 찾아가는 길은 더욱 멀었다.자동차로 고개를 넘어 혼하를 건넌 뒤 환인현 사첨자향으로 들어가 또 강을 따라 올라갔다.그리고나서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천신만고 끝에 고령지에 도착했다.유인석선생이 인솔한 의병들이 처음 자리를 붙이고 가솔들을 데려와 살았다는 고려구 골짜기가 동쪽 먼 발치로 보였다.의암 유인석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해 마을사람들을 따라 좁은 골짜기를 한참 올라갔을때 평평한 산언덕이 나왔다.거기서 천연의 바위를 기석으로 삼아 세운 의암기념비를 만났다.지난해 95년 5월 관전현 현정부에서 세운 이 비석은 너비 1m,높이 70㎝로 그리 크지는 않았다. 유인석선생은 본래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지만 18 95년 학맥을 따라 충북 제천 장담으로 거처를 옮겨 활약한 조선의 거유다.18 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그해 을미년 12월24일 제천에서 3천의병을 일으킨 그는 한때 제천·충주·원주·단양지역을 석권했다.그러나 관군에 밀려 서북지방인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했다.서북지방에서 재기활동도 결국 실패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숨어든 곳이 만주땅 서간도에 해당하는 요녕성 관전현 보달원이었다. 유인석선생과 보달원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그의 의병부대가 환인현 현재 서본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이후 오랜 유랑과망명생활을 하고 다시 돌아온 곳이 부달현이었기 때문이다.의병운동이 청국정부와 러시아정부의 방해로 좌절되자 보달원 방취동에 물러앉아 있었던 것이다.의병활동의 기회를 눈여겨보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방취동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춘천 태생 조선의 묘비 그가 말년을 살았던 방취동은 비석이 서 있는 자리에서 서쪽으로 2∼3㎞정도 떨어졌다.지금은 인가가 없고 인적도 끊겼는데,그가 「우주문답」을 저술했다는 산굴과 집터만이 남아있었다.그리고 보달원 사람들이 아직도 유인석묘소로 고집하는 무덤 하나가 자리잡았다.19 30년대 유인석선생의 증손이 유해를 고향땅 강원도 춘천으로 이장했는데 무덤이라니….당시 후손이나 독립운동가들이 여기 살아 잘못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보달원의 한족들이 유인석선생의 허묘를 실제의 묘소로 우기는 까닭을 늦게야 터득했다.허묘를 모를까 만은 그를 오래 우러러 추모하기 위한 고집이라는 것을….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도의 아내 최씨가 일본 영사관원에 능욕을 당하고 자결했을 때 그가 글을 지어서 써 준 묘비까지 문물(문화재)로 지정할 정도였다.그 묘비 「조선열부해주최씨표적비」는 지금 환인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난해 6월29일 관전현 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는 유인석학술사상연구소를 세웠다.평북 벽동군 태생인 최신화(67)선생을 소장으로 한 이 연구소에는 13명의 연구원을 두었다.그리고 유인석선생의 사촌형 유홍석선생 증손이자,현재 한국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인 유연익씨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이밖에 관전현 역사지명지판공실 상진생주임과 같은 한족 학자들도 연구소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유인석사상학술연구소는 중국 당대 역사상 첫 한국인 대상의 연구기관이다.연구소는 관전현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유역에 남아있을 유인석선생 반일활동사료를 발굴하고 있다.그러나 연구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그의 문집을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그래서 연구소장 최신화선생은 그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유인석선생의 필적과 주석하셨던 고장은 국가 문물이 되었습니다.그런데 문집은 우리가 못 구했디요.선생께서 별세하신 뒤 문하생들이 문집을 정리해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고 기래요.어떤 경로를 통해 그리 갔는지 몰라도 그 문집을 지금은 절강성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습네다.「의암문집」은 54권 29책이나 되디요.절강성도서관에 연락했더니 복사나 해가라고 기래요.부끄러운 말입네다만,복사비 5천불을 마련할 길이 없습네다』 지난해 5월 세번째 중국을 찾아온 광복회 강원도지부장 유연익선생이 기념사업에 써 달라고 노자에서 1천2백달러를 내놓았다.그도 1934년 요령성 무순시에서 태어나 무척이나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사촌동생 유인석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와 항일운동에 참가한 유홍석의 증손인지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증조부로부터 부모까지를 일제의 손에 잃었다.기구한 운명을 산 독립운동가 후손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한국인 대상 첫 연구소 그는 지난 1994년 중국 방문길에 부친 유돈상의 묘소를 찾아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독립군으로 싸우다 일제에 체포되어 무순감옥에서 숨진 부친의 시신을 할머니 윤희순이 거두어 묻었다는 무순시 용봉 남산이 도시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다행히 할머니 윤희순의 묘소는 당시 장례에 참석했다는 한족 영덕수(87)노인의 도움으로 찾아냈다.그리하여 남편과 자식을 중국땅에서 다 잃은 할머니의 골회는 고향 춘천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어떻든 강원도 춘천 가정리 유씨 일가들은 항일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었다.그런 가운데도 유인석선생은 충절을 지키면서 학덕을 쌓았다.오늘날 중국에서 그를 기리는 것을 보면 유인석선생이야말로 죽어서도 살아있는 불멸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 96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정부는 14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선생 등 12명을 96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확정,발표했다.「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조국광복에 크게 기여한 유명무명의 애국선열을 고루 발굴,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국가보훈처,서울신문사와 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92년부터 선정해왔다. 이들 독립운동가의 주요공적을 간추려본다. ▲1월 우강 송종익선생(1887∼1956)=1919년 임시정부 건설 경비를 조달하는 등 해외 한족대회에 미주대표로 활동했다.95년 독립장. ▲2월 단제 신채호선생(1880∼1936)=「조선사」 등을 저술,애국 계몽운동과 근대 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62년 대통령장. ▲3월 은재 신석구선생(1875∼1950)=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만세삼창한 뒤 체포돼 2년동안 옥고를 치렀다.63년 대통령장. ▲4월 송재 서재필선생(1866∼1951)=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미국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했다.77년 대한민국장. ▲5월 해공 신익희선생(1892∼1956)=임시정부 법무·외무총장을 지내면서 통일된 독립단체 조직 및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했다.62년 대한민국장. ▲6월 유일한선생(1894∼1971)=재미 한족연합회에서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수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제공했다.95년 독립장. ▲7월 해운당 김하락선생(1846∼1896)=명성황후 시해에 격분,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의성 등지에서 항전하다 자결.82년 대통령장. ▲8월 고헌 박상진선생(1884∼1921)=대한광복회를 결성 친일부호의 처단 등 투쟁을 전개하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63년 독립장. ▲9월 만호 홍진선생(1877∼1946)=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수반급)에 추대돼 광복 때까지 항일 구국투쟁을 전개했다.62년 독립장. ▲10월 건재 정인승선생(1897∼1986)=조선어학회에서 한글사전을 편찬했으며 일제 탄압으로 복역중 광복을 맞았다.62년 독립장. ▲11월 죽엽 전명운의사(1884∼1947)=1908년 일제 통감부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옥고를 치른뒤 미국에서 의용군을 조직해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냈다.62년 대통령장. ▲12월 정이형선생(1879∼1956)=1922년 평북 초산부근의 파출소와 일경 주재소 5곳을 습격하는 등 무장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복역중 광복을 맞았다.63년 독립장.
  • 연락원 신분 밝히고 허씨 2차례 만나/간첩 김동식 일문일답

    ◎허씨,연락처 요구에 삐삐번호 알려줘/남한잡지 등 보고 1차 포섭대상 선정 부여 무장간첩 김동식은 8일 『허인회(31·구속)씨에게 「나는 북한에서 온 당연락원」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호응하는 기색이었으며 2차례 허씨를 만났다』고 밝혔다.「미전향간첩」인 김은 이날 상오 서울 내곡동 안기부 청사에서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포섭대상으로 선정한 운동권인사들에게 신분을 밝힌 것은 이들의 경력과 사상으로 미뤄 신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갈색점퍼에 회색바지를 입고 나온 김은 비교적 건강한 얼굴로 기자들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했으나 가족관계를 묻자 고개를 떨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일문일답 내용을 간추린다. ­허씨와 나눈 얘기는. ▲지난 9월16일과 20일 2차례 만났다.서울 영등포 당산공원에서 처음 만나 신분을 밝히자 호응하며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음식점에서 소주 2병을 마시며 「조국광복회」와 「타도 제국주의동맹」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연락처를 요구하자 그는 호출기번호와 호출기사용법을 알려줬다.20일 당산공원 지하다방에서 만났다. ­신분을 밝히자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는 뜻은. ▲처음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그래서 평양방송 주파수등 확인절차를 알려주자 그는 『내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들에게 대담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1차침투때도 신분을 밝히고 「변혁·통일운동」에 동참하라며 운동권인사들에게 접근했다.황인오(39·복역중)와 손병선(55·무기수)을 포섭할때 성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접촉인사의 선정방법은. ▲「말」·「길」등 남한의 잡지와 신문,북한에서 출판된 운동권 자료집을 보고 1차 선정한뒤 사회문화부에서 최종 결정한다. ­남한의 고정간첩 숫자와 북한에서 교육중인 간첩의 숫자는. ▲내가 속한 사회문화부6과에 30∼50여명이 간첩교육을 받고 있었다. ­새세대공작원이란. ▲80년대초부터 출신성분과 지적능력이 우수한 혁명유공자가족가운데 선발한다.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남화교육을 집중적으로 받는다.나의 경우 할아버지가 6·25때 미군에게 피살됐다. ­어떻게 숨어 다녔나. ▲성남과 대전 여인숙에서 주로 은신했다.제주도와 청량리역에서 검문을 받았으나 장비가 많지 않았고 위조한 주민등록증도 있었다.말투때문에 의심받은 적도 없다. ­이선실과는 어떻게 생활했나. ▲4개월가량 서울의 신대방동 아지트에서 지냈다.나는 이선실을 할머니라고 불렀고 그녀는 나를 손자처럼 대했다.이 기간에 이선실은 국내의 정치인,재야인사,대학교수 등을 접촉했으나 현재 내가 조사를 받고 있어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이 성공할 것으로 보는가. ▲국력은 곧 경제력인데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으로 볼때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체포직후 월북루트를 강화도라고 한 이유는. ▲이미 제주도에서 남파간첩과 접선,대동복귀하기로 한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놓은 상태였다.나는 잡혔지만 조원인 박광남(사망)은 살려야겠다(포위망을 빠져났을 경우)는 생각에서 거짓말을 했다. ­북한에서의 공작원교육을 받았을때의 남한과 8개월가량 간첩활동을 하면서 느낀남한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공작활동에 전념하느라 남한의 실상을 눈여겨볼 수 없었으며 따라서 갈등은 없었다. ­전향할 뜻은 있는가. ▲(20초가량 침묵)앞으로 어떻게 되겠는지….현재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관계는. ▲부모님이 고향(황해남도 용연군)에 살아계신다.여동생 2명,남동생 2명이 있으며 맨 아래 여동생은 시집을 갔다.남동생 2명은 군복무중이다.평양 모란봉구역에 처(27·치과의사)와 세살난 딸이 있다.이들은 아마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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