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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변화에 탈바꿈한 이산가족 상봉

    2015년 10월 이후 2년 10개월 만에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26일 작별상봉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이번 상봉 때 이산가족들은 가족끼리만 식사하는 시간을 따로 갖는 등 이전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났다. 이전 정부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달라진 남북관계가 이산가족 상봉행사에도 반영된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에서도 명맥을 유지했으나 지금과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특히 납북자·국군포로 상봉 문제로 남북이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2007년 제8차 남북 적십자회담 때는 남측 언론이 ‘납북자·국군포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북측이 “이런 식으로 하면 회담 진행이 어렵다”며 우리 측 대표단을 압박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금강산 현지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취재하던 우리 언론의 방송 테이프에 ‘납북자’, ‘나포’ 등의 표현이 들었다는 이유로 방송 송출을 중단시키고 개별 상봉을 7시간 동안 지연시킨 일도 있었다. 2005년에는 상봉행사를 지원하는 북측 보장성원(진행요원)이 상봉장에서 남측 기자의 취재수첩을 빼앗아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비롯한 특수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테이블에는 북측 보장성원들이 배치돼 대화에 관여한 일도 있었고, 북측 이산가족이 각종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나와 체제 선전을 해 남측 가족을 아연실색하게 하는 일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런 장면이 줄었다. 이전보다 정치색이 상당 부분 배제된 게 특징이다. 북측은 이번에 고령의 이산가족들을 배려해 동선을 최소화하는 등 유연성을 발휘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탈바꿈한 셈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시작됐다.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란 이름으로 남과 북의 이산가족 각각 50명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다. 이후 남북은 1989년 2차, 1992년 3차 고향방문단 협의를 시도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활기를 띤 것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부터다. 초기 1~3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서울과 평양에서 교환방문 형식으로 이뤄졌으며 4차 때부터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자리 잡았다. 남북은 2005년 8월 15일 광복절을 계기로 화상상봉이란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하기도 했다. 남측은 서울을 비롯한 7개 지역, 북측은 평양의 특정 장소를 지정해 화상으로 이산가족들을 만나게 했다. 눈앞에 있으나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 안타까움에 이산가족들은 더 몸서리쳤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거주지와 가까운 상봉장에서 북측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대면상봉처럼 만나서 정을 나누지 못하다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나마 화상상봉은 남북관계 경색으로 2007년 이후 중단됐다.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도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현정 기자 hjlee@soul.co.kr
  • [데스크 시각] 다시 열려야 할 그 길, 금강산/조현석 산업부장

    [데스크 시각] 다시 열려야 할 그 길, 금강산/조현석 산업부장

    금강산이 또 한번 눈물바다가 됐다. 지난 20일 금강산호텔에서 피난길에 잃어버린 네 살배기 아들을 67년 만에 다시 만난 이금섬(92) 할머니는 백발이 성성한 아들 리상철(71)씨의 얼굴을 매만지며 오열했다. 1951년 1·4 후퇴 때 아내와 헤어진 유관식(89) 할아버지도 태어난 것조차 몰랐던 딸 유연옥(67)씨를 만나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남측 이산가족 89명은 꿈에 그리던 북측 가족을 만났고, 한평생을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2박3일의 상봉 기간 내내 금강산에 메아리쳤다.금강산은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이산가족 상봉의 상징적인 곳이다. 금강산에서는 2002년 4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모두 17차례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2008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뒤에도 네 차례나 상봉이 이뤄졌다. 그동안 남북한 3512가족 1만 6031명이 그리운 가족과 만났다. 2008년 금강산에 이산가족면회소가 준공돼 상봉 정례화 기반이 마련되면서 이산가족들의 희망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20년, 중단된 지 1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금강산은 남북한 소통과 민간 교류의 장으로 활용됐다. 1998년 6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됐고, 같은 해 11월 동해항에서 금강호가 출항하면서 금강산 관광의 막이 올랐다. 금강산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3년 2월 육로 관광길이 열렸고, 다음해 11월 남북 동해선 본도로가 완공됐다. 2006년 화진포 아산휴게소가 개소한 데 이어 2007년 6월 내금강 관광이 재개됐다. 금강산 관광에서 구축된 남북한 신뢰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6·15공동선언)을 견인했고, 개성공단 등 남북 경협 및 남북 교류협력 활성화를 추동했다. 금강산 현지에서는 장관급 회담과 적십자회담, 철도 및 도로연결 실무회의 등 중요한 당국 회담이 개최돼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금강산에서는 청소년과 대학생, 여성,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남북 공동행사가 열렸다. 영농, 축산, 농림 등 다양한 남북 협력사업이 실현되면서 민간 교류의 장으로도 자리매김했다. 2009년 9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산을 방문했다. 금강산 관광객은 해마다 급증하면서 2007년 한 해에만 34만 8263명이 금강산 관광을 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008년 7월 관광객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단됐다. 1998년부터 2008년 관광이 중단될 때까지 10년간 금강산을 방문한 관광객은 195만 5951명에 이른다. 2008년 관광이 중단되기 전까지 금강산 관광에 북한 관련 종사자 1000여명이 근무하면서 남북한 작은 통일 공간으로 활용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남북 경제협력을 강조하며 금강산 관광 재개 의지를 내비쳤다. 또 지난 20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는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 상시 운영을 강조했다. 물론 유엔의 북한 제재와 선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반대 등 넘어야 할 산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금강산 관광 재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선결 과제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이후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재개하는 등 대화와 교류 단절로 인해 오히려 남북 관계가 경색됐다. 다음달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린다. 또 다음달 열리는 유엔총회에 김정은 국무위원장 참석 가능성 얘기가 나오고, 제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보듬고, 민족의 번영을 위해 금강산 관광은 하루빨리 재개돼야 한다. 정부도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얻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 내년 봄에는 남북 화해의 디딤돌이 될 금강산을 꼭 볼 수 있었으면 한다. hyun68@seoul.co.kr
  • [글로벌 In&Out] 일본이 역사에 예민해지는 까닭은/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글로벌 In&Out] 일본이 역사에 예민해지는 까닭은/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한국과 일본에 8월은 ‘역사의 계절’이다. 일본의 ‘종전’ 기념일, 한국의 광복절인 8월 15일 양국 지도자가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지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기 때문이다.최근 10년 일본은 한국 대통령의 한·일 관계 언급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역사 문제로 한·일 사이의 틈새가 깊어졌음을 뜻한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어땠는가. 아베 신조 총리를 ‘동북아 평화번영의 동반자’라 하고 북·일 국교 정상화에 기대감도 내비쳤다. 북한의 비핵화에 따른 평화번영의 실현에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문재인 정부의 뜻이 반영돼 있다고 본다. 돌아보면 역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의 자세가 많이 변했다. 과거에는 한국이 역사에 집착하고 일본은 역사에 구애되지 않고 미래로 가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와 현재진행형의 한·일 관계는 별개라고 한국이 강조하는 반면 오히려 역사 문제에 일본 쪽이 과민반응하고 있다. 몇 년 전 유학생 관련 학내 회의에서 “한국은 반일의 나라이기 때문”이라던 일본인 동료의 발언에 놀란 적이 있다. 한국 유학생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의도이긴 했지만. 일본에서는 “일본이 무엇을 한들 한국의 반일은 바뀌지 않는다. 한·일 관계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스며들고 있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이 올해 75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한국 젊은이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오는 현상도 보인다. 이런 현실에서 많은 한국인에게 “한국은 반일”이라는 일본 시각은 놀라울 것이다. 한국인을 보는 일본의 시각과 실제 한국인 사이에는 괴리가 있음을 일본은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왜 일본에서는 “한국은 반일”이라는 주장이 급속히 퍼졌는가.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이후 한·일 관계 20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공동선언으로 한·일이 새 단계에 들어갔다고 기대했던 일본인은 지금 “한국의 반일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에 기대하지 말자”고 포기하기 시작했다. 영토 문제를 놓고 “외교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한 노무현 정부, 독도를 전격 방문(일본에선 ‘다케시마 상륙’으로 표현)한 이명박 정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전제 조건으로 한·일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았던 박근혜 정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커졌다. 그 책임을 한국에만 물어서는 안 된다. 일본 측 배려가 부족한 측면도 있다. 걱정스러운 것은 일본 사회의 변화에 한국이 둔감하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피해자·가해자라는 한·일 관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중국에 추월당한 일본이 한국에도 따라잡히고 있는 동아시아의 판도 변화 속에서 역사 문제로 일본이 압박받고 있다는 ‘피해자 의식’을 갖게 된 건 아닌가. 반대로 한국에서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일본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정의’에 근거해 당당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본이 과거의 역사에 대해 더 진지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나 자신,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혼자 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20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국회 연설에서 전후 일본이 걸어온 평화·번영의 길을 칭찬한, 한국의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했던 일을 왜 했는지는 중요한 시사를 던진다. 많은 일본인에게 감동을 줌으로써 일본을 움직이고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방북과 북·일 평양선언으로 대북 화해 협력 정책에 대한 한·일 협력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주도하는 한국의 역할이 점차 재평가되고 있다. 일본 사회에 한국의 긍정적 이미지를 침투시킨다는 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대일 정책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매우 기대된다.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문화재 수난사 연구하는 정규홍씨가 말하는 ‘문화재’“우리 문화재의 과거사를 정리하다보면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가슴 아픈 일이 많아요.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골동품상 이희섭(李禧燮)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에서 조선대공예전람회를 7차례 엽니다. 전람회 한 번에 우리 문화재 1500점에서 3000점을 도쿄와 오사카에서 전시하고 모조리 팔아치웁니다. 이희섭은 도록을 7권 만들었지요. 도록에 실린 문화재 일부가 일본 국보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7차례 전람회에 진열된 문화재가 1만 4516점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희섭은 서울에 ‘문명상회’라는 본점을 두고 도쿄와 오사카에 지점을 개설해 우리 문화재를 상설 전시해 팔아먹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으로 팔려나간 문화재가 최소 3만점에서 5만점에 이를 겁니다. 한 나라의 문화재가 통째로 옮겨진 것인데요, 한 개인이나 상인이 그렇게 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조씨 문중, 가전 서적 700여권 일본에 스스로 갖다바쳐” 우리 문화재 수난사를 30년째 연구해 정리하는 정규홍(62)씨는 광복절 다음날인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아본 일본이 빼앗아 간 것도 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 갖다바친 것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이완용(1858~1926)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투구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어느 조씨 가문에서는 일본 도쿄대박물관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서적 700여권을 아주 싼 값에 넘겼다는 기사가 고고학 잡지에 나옵니다.” 어느 문중이냐고 묻자 정씨는 “기사에서 그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한자로 조나라 조(趙)가 적혀 있더라.”고 소개했다.정규홍씨는 1981년 교직 연수를 받으면서 석굴암에 대한 일본인들의 참담한 취급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헌책방 등을 돌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문화재 수난일지와 우리문화재 수난사, 유랑의 문화재 등을 펴낸 수난 문화재 전문가다. 문화재 수난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중학교 교사직도 그만뒀다. 그동안 정부나 관계당국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 경북지역 문화재 수난사를 쓰면서 용역 의뢰받은 것이 당국의 지원 전부였다. - ‘돈 안 되는’ 우리 문화재 역경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무슨 엄청난 사명감이나 그런 것이 있어 하는 건 아닙니다. 이 일이라는 게 희한하게도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희열감도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존감이랄까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측면도 있고···. 일종의 중독성이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잠자면서도 술마시면서도 그 생각이 들고, 꼬투리가 잡히면 잊으려해도 그게 안돼요. 강단에 있는 사람들은 강의 때문에 중도에 끊기는데, 난 그런 것도 없기에 이것 하나만 파고 들어갑니다. ●“문화재 수난사 정리 이유?···중독성에 희열감이죠”- 많이 힘들겠다.☞ 돈 안되는 일을 하니깐 무엇보다 집사람에게 미안하죠. 교직에 있을 때 월급받아 상당액을 이것 연구에 쏟아부었으니깐. 지방에 한번씩 현지 조사 다니면 교통비에 숙박비도 만만찮죠. 책도 사고,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도 엄청 합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때 복사비가 한장에 3원이었는데 이젠 50원으로 16배가 됐어요. 문화재 수난사에 관한 책을 냈는데, 잘 팔리는 분야가 아니라서···.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책 몇 권 주고 그걸로 끝이예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니 시간은 잘 갑니다. - 그만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이번에 ‘요것만 정리하고 손 떼야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있지요. 그런데 한 건을 정리하다 보면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기에서 또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러다보면 숙제처럼 이만치 쌓입니다. 그러니깐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이러고 있습니다.- 수난 문화재가 그동안 왜 공식적으로 정리가 안 됐나.☞ 1945년 해방 직후에 박물관 관계자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정리해 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고적조사와 유적연구 등에 한국인의 근접을 못하게 했어요. 일본인들이 독점했거든. 해방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지식을 가진 한국 사람이 없었어요. 일본이 떠나고 나니깐 총독부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남은 고적조사, 발굴보고서 등의 정리를 전혀 못한 채 박물관에 쳐박혀 있었던거지요. 아직도 다 정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유물 목록과 실물과의 대조가 정확하게 안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인력 부족 탓이지만 국가적으로 재원을 투입해서라도 빨리 했어야 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일제시대 한국인 유적연구 차단···유몰 목록과 사료 대조 못 해”- 문화재 수난 분야, 처음 연구는 어떻게 했나.☞ 처음엔 마땅한 자료가 없으니 헌책방을 많이 기웃거렸죠. 1981년 이후 헌책방에 다니면서 문화재 관련 책을 사모았죠. 그리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축쇄본을 돋보기로 보면서 자료를 모았죠. 또 일본인이 남긴 조사자료와 잡지 이런 것을 위주로 연관지어 보죠. 연관성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는 거죠. 예컨대 발굴사업 보고서가 나오면 이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옵니다. 기사와 고적조사 보고서가 약간 차이가 날 경우가 있거든요. 무덤 발굴의 경우 일본인들이 1차적으로 유물명을 기록하고 바로 박물관에 수장시키지 않고 1년간은 걔네들이 연구를 해요. 그 기간 유물이 분실될 수가 있어요. 실제로 분실이나 망실 그런 문헌이나 문서가 나와 있어요. 이를 비교해서 불법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 당시 일본이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혈안이 됐나.☞ 일본의 각 대학이 잔치를 벌이듯이 우리문화재를 진열해 놓고 경쟁적으로 전람회도 가졌지요. 낙랑 유물부터 그때까지. 도쿄대 공과대와 문과대가 별도로 진열할 정도였으니. 당시 전람회 도록이나 기록들이 감춘 게 없이 매우 정확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영구 통치할 줄 알았던 게지. 식민지 정착을 위한 하나의 사료로 삼기 위해 우리 문화재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수집해 가져갔지. 그때 조선에는 1908년 설립된 ‘이왕가박물관’ 뿐이었거든. 1915년 12월에서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생기면서 법으로 유물 반출이 금지돼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서 작성을 핑계로 얼마든지 일본으로 가져갔지. 이런 단체로는 조선고적연구회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일본 도굴꾼들이 대거 몰려들어 우리나라 무덤을 다 파헤쳤죠. 1908년 이전에 고려 무덤의 경우 거의 다 파괴됐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실록을 보면 수시로 어느 무덤이 파괴되고, 어떤 무덤은 4~5회에 걸쳐 도굴됐지요. 심지어 대낮에 총칼을 갖다놓고 후손들이 보는 앞에서 도굴하고···. ●“고려 무덤 마구 도굴···日대학들, 우리 문화재 진열 경쟁도”- 해방이 되면서 문화재 수난이 줄었나.☞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진주합니다. 그리고 9월20일 미군 300명이 부산항에 들어오지요.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 군인의 무장해제와 퇴출이예요. 미군이 부산에 들어오기 전에 눈치빠른 일본인들이 문화재를 잔득 가지고 일본으로 나갔던 거죠. 미군이 10월 말쯤부터 일본 민간인을 퇴출시키죠. 그때 귀국 일본인에게 돈 1000원과 작은 옷보따리 정도만 허용하고 귀중품은 모두 압수했든거죠. 그러니깐 일본인들은 어선같은 것을 빌려서 밀항을 합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공주에 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같은 이들이 어마어마한 유물을 가져간 것이지요. 이들에 빌붙어 밀한을 도운 게 한국사림이예요. - 미군에 의한 문화재 유출도 있었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귀국을 원활히 하기 위해 ‘세화인회(世話人會)’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일본인들의 물품 같은 것을 맡아서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맡은거지요. 당시 서울역에서 화물을 부산으로 보내면 중간인 대전역에서 미군이 화물을 압수해 물자영단(物資營團)에 넘겨버리는 것이지. 그 물자영단 창고를 미군이 관리했는데, ‘우리 문화재나 귀중품은 박물관에 넘기고 나머지는 P.X에 넘긴다’고 말하지만 미군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거나 처분해버린 경우도 많았죠. 해방전후 골동계에서 유명한 이영섭이 부산에서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며 물자영단에 있는 그림 1000점 이상을 싼 값에 샀지. 그가 샀던 그림들이 어떻게 흩어졌는지 알 수 가 없어. 또 한때 현재 심사정(1707~1769)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진 ‘맹호도’ 출처는 흥미롭지. 1946년 한 미군이 골동품 상인 두명을 일본인 창고로 데려갔지요. 골동품 상인들에게 감정을 요청해 감정해 주니 미군이 그 댓가로 주었던 게 맹호도이지요. 나중이 국립중앙박물관이 거금을 주고 사들였지만 미군에 의해 흩어진 문화재도 부지기수예요. ●“미군정기와 6·25 전쟁서 문화재 수난도 어머어마”- 6·25 한국전쟁 때도 문화재가 많이 파괴·유출되었다.☞ 6·25 때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파괴됐지. 성보문화재(불교문화재) 파괴가 가장 심했지요. 유엔군이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초토화작전을 펼쳤던거죠. 소개령이 떨어지니 사찰에선 중요 유물들을 갖고 나옵니다. 작전이 끝나고 돌아가보면 절은 없어지고 재만 남은 거예요. 그러면 그 유물들이 절로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것이죠. 전국을 돌아다녀보면 오래된 절인데 건물만 새로 짓고, 유물이 없는 사찰이 많아요. 또 부산으로 피난 간 문화재는 극히 일부인데, 이마저도 용두산 대화재로 많이 불타버렸지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리 문화재는 미군들이 찾아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종묘에 있는 옥새와 금보(金寶·선왕이나 선비에게 올리는 추상존호를 새긴 도장) 이런 것이 상당히 분실됐지요. 1952년 신문을 보면 미군들이 옥새와 금보를 금은방에 가져와 감정해달라고 하다가 다른 미군에 의해 검거되는 그런 기사가 몇건 나옵니다. - 그 이후엔 문화재 수난이 더 없었나.☞ 1960~70년대에는 왠 도굴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일본인 밑에 따라다니면서 도굴을 배운 기술자들이 그렇게 많이 도굴을 해요. 일재 잔재지요. 심지어는 집 짓는다하고 장막을 두르고 밤에 도굴을 하기도 했어요. 이런 유물은 1970년대엔 이삿짐으로 위장해 미국에 갖다나르다 적발된 경우가 많지요. 유물을 모조품처럼 가장해서 밀수출하다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밀수전문가들과 한국의 중간 브로커들하고 짜고 가져간 것도 감당을 못할 정도로 많지요.- 지금까지 수난당한 문화재는 몇 점이 되나.☞ 1981년부터 올 4월까지 조사해 파악한 국외유출 문화재는 17만 2300여점에 이릅니다. 이것은 관공서·도서관·박물관 등 공식기록을 비교 조사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를 포함한 것으로 낙랑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유물입니다. 제 조사는 관공서 위주여서 개인소장은 거의 포함돼 있지 않거든요. 오구라가 반출한 문화재의 경우에는 극히 일부인 1100여점만 도쿄박물관에 기증됐고, 나머지 수천점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어요. 이런 식으로 개인이 소장한 것을 포함하면 100만점이 해외에 떠돌고 있지 않겠느냐고 추산합니다. ●“파악된 수난 문화재 17만 2300여점···실제론 100만점 넘을듯”- 국외 유출 문화재를 환수하려면 어떻게.☞ 현재 파악된 17만 2300여점은 물론이고 앞으로 소재가 확인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부와 민간단체가 합심하여 경로 추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개인이 하기엔 너무 벅차지요. 어떤 과정을 거쳐 발굴해 소장했느냐는 경로 파악을 위해 고적 조사자료, 잡지에 실린 논문, 신문기사 한 줄까지도 축적해 종합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쌓아나가다 보면 불법성 드러날 것입니다. 불법성이 드러난 것은 환수 운동을 펼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일협정 때의 ‘청구권 포기 규정’ 때문에 정부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 환수 부분은 민간단체가 적극 나서야지요. 정씨는 “문화재는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혼이자 공동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것 즉, 함부로 관리하고 방치한 것은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열심히 하면 결과가 좋아야 한다고? 과정이 행복이야”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열심히 하면 결과가 좋아야 한다고? 과정이 행복이야”

    홍천의 작은 산사서 환경설치미술전 여는 성민 스님의 ‘행복’‘2018 강원 환경설치미술 초대 작가전’ 개막 사흘 전이자 광복절인 15일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210번지의 백락사. 이 작은 사찰에서 이런 국제적 행사를 13회째 이어오는 스님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서 찾았다. 마침 도착 시간이 낮 12시, 점심 공양 시간이어서 50여명이 대웅전 옆 밤나무 아래에 친 큰 천막 아래에서 옹기종기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성민 스님은 어디에 계실까요?”라고 물었더니 식사 중이던 한 50대 남성이 “내가 성민입니다.”라며 일어선다. 작업복 차림에 목에 흰 땀 수건을 두른 그는 까까머리가 조금 자란 밤송이 같은 머리에, 농부처럼 검게 그을린 얼굴···. 영락없는 일꾼의 모습이었다. 먼저 식사를 권한다.●밤송이 같은 까까머리에 작업복···포크레인은 장난감 “평소에도 작업복 차림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성민(性敏) 스님은 “네, 맨날 막일을 하다 보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잿빛 승복을 입고 좌선에 잠겼거나 단청이 멋진 절집에서 예불을 올리는 통상의 스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전시회를 앞둔 요즘은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작업한단다. 절 입구에는 덩그렇게 서 있는 작은 포크레인은 ‘스님의 장난감’. “수년 전 자격증을 따졌지요. 길도 내고, 텃밭도 만들고···.” ‘딸랑’ 하는 풍경소리에 맞춰 스님과 함께 대웅전 뒤쪽의 오솔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여전히 34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지만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줬다. 중턱까지 잣나무가 쑥쑥 뻗은 산책길에는 이태 전에 설치했던 작품들과 함께 새로운 작품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오솔길을 무대로 삼은 작가들이 곳곳에서 전시 준비로 바쁘게 손을 놀렸다. “외국 작가 작품들은 철거가 안 되니 그대로 둡니다. 시간의 더께에 저절로 삭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지요.” ●“여기 만의 가치를 찾는 것···새로운 감성은 존재의 가치”올해 전시회에는 대만·일본·러시아·몽골 등 국내외 환경설치미술 작가 32명이 참여했다. 행사의 테마를 묻자 스님은 “발 딛고 선 땅에서의 환경”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무대는 홍천이지만 여기에서 보고 시야를 돌려서 내가 사는 환경에서 얼마든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취지”라고 설명한다. “우리 각자 개개인이 하나의 우주인 것처럼 대한민국이 다 예쁘고 관리가 잘되고 있지만, 여기만의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니깐, 작가들 입장에선 새로운 어떤 감성이랄까 생각을 떠올려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끊임없이 뭔가 솟아난다는 것이 존재의 가치가 그런 것이겠지.” 주음치는 옛날 딸을 시집보낸 아비가 너무 슬퍼 술을 마시고 넘은 고개라 하여 붙여졌다.짙은 나무 그늘 속으로 조금 더 가다 보니 한 작가는 땅을 파고 그 속에 거울을 묻고 있었다. 거울은 나뭇잎 사이의 햇살을 반사했다. 스님은 환경을 자연에서 더 확대한다. “요즘은 다 냉담하지 않습니까, 내 일이 아니면 가치도 없고, 옆집에 불이 나도 신경도 안 쓰고···, 이런 시대에 살면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환경이 되었지. 이 환경이라는 의미 자체가 자연환경도 있겠지만 사람들 간의 어떤 환경도 굉장히 중요해졌지.”●“자연환경을 넘어 인간 간의 관계에서 오는 환경도 중요” 이렇게 작은 사찰에서 국제적 행사를 십 년 넘게 이어오는 힘은 어디서 날까? 이 절에는 성민 스님 혼자 상주하며, 스님의 식사를 준비하는 공양주도 없다. 스님은 “다들 고생하는데 행사가 원만히 잘 치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결과가 좋기는 한데, 과정이 더 중요하지. 남들이 봤을 때는 다 잘하고, 잘 되는 것으로 보여도 그 안의 실상에 들어가 보면 다 나름대로 애환도 있고 힘든 것도 있고···. 고민을 안 할 뿐이지. 다 그걸 이겨내 가면서 도전해가면서 해 나가는 것이지.”라고 말한다. 일손이 없으니 직접 포크레인을 몰거나, 초파일 앞두고 혼자 등을 달 때도 있다고 한다. 전시회는 2006년부터 해마다 이어오고 있다. 해외 작가는 다른 전시회에서 만난 작가들이 네트워크가 되어서 초대한다고 전했다.그동안의 전시회에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묻자 스님은 독일 작가 부부라고 말한다. “부인이 한국 사람인 독일 작가 부부였는데, 결혼한 지 오래된 것 같더라고. 주위에 애들이 뛰노는 게 보이고 해서 ‘얘기들은?’하고 물어보니 ‘없다.’라고 하더라. ‘왜 없냐.’고 반문하니 ‘스님, 우리 작품이 얘기 아닌가요.’하더라고요. 이 이야기를 듣고 초월했다고 할까. 범상찮은 그런 표현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일반적인 삶의 기준이 아니고 다른 기준이나 가치도 얼마든지 적용하면서 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봤지.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 속에서도 제 마음에 와 닿는 울림이 아주 컸지.” ●“삶의 다른 가치도 있어···뭔가 한다는 과정이 진정한 행복”“다른 기준이나 가치가 뭘까요.” 하고 되묻자 스님은 “그 독일 작가 부부에겐 돈, 권력, 가족, 자식 그런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작품에 몰두하면서 그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도 큰 행사를 벌여서 결과를 도출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뭔가를 한다는 이런 과정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진정한 행복이고 가치라고 생각해.”라고 답한다. 지나가면서 보니 한 작가는 대나무로 집인 듯, 동굴 같은 작품을 설치하고 있었다.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작품 이름이나 작가 이름은 없었다. 전시회에 참여했던 한 작가 부부에게서 받은 편지 사연도 들려줬다. “수년 전 외국 작가 부부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말썽만 피우는 10대 딸을 데리고 왔지요. 그 딸이 여기에서 부모의 작품 활동을 도와주고, 주변의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귀염을 받았지요. 인기도 좋았고. 돌아가서는 딸이 자신이 굉장히 사랑받는 존재구나 하는 걸 알게 됐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사춘기를 잘 지냈다며 고마워하더군요. 누군가에게서 사랑받는다는 느낌 하나만으로도 큰 희망이고 가능성이지.”스님은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결과가 잘 나오면 좋지만, 전시회 자체는 과정이야. 결과와는 관련이 없어. 여기에서 작가 간의 소통이라든지, 작가가 땀 흘리는 모습,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외국 작가들이 작품 제작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서 일찍 들어와서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면, 돈을 주고 하라면 저렇게 하겠느냐 싶을 정도의 그런 열정들 역시 과정이지요.” 올해 여기 가장 일찍 들어온 작가는 대만 부부 작가란다. 유난했던 올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2일 입국해 보름째 작업에 씨름하고 있다. “열심히 하면 결과가 좋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따졌더니 스님은 “옛날에는, 젊은 시절에는 내가 열심히 사니까 당연히 결과가 좋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했지.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는데 나이가 드니깐 그게 아니고,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스님 생활하면서 주변서 받았던 고마움을 자꾸 되새겨”스님에게 다소 황당한 질문을 던졌다. “스님 생활, 보람 있습니까.” 그는 뜻밖인 듯 “보람이라.”라며 되뇐다. “꼬집어 이야기할 건 없고, 나이가 드니깐 살아가면서 (스님이 된 게) 고마운 일이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지. 내 공간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주변에서 도와주는 은혜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런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고 되새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고맙지요. 사실 고마움이 자꾸 생기고, 그게 보람되고 행복하다 그런 생각이 들지요.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은혜스럽게 베푼 것을 좀 더 나눠줘야겠다 생각해요.”한 바퀴 돌아 절집으로 내려왔다. “예술은 어떻게 보면 종교 이전에 인간의 어떤 궁극적인 욕구일 거야. 종교가 그 나름대로 인간을 편안하게 해 준다면, 예술도 예술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스님의 말씀을 귓전으로 흘리며 오밀조밀한 도량을 살펴봤다. 곳곳에는 미술품인 듯 조각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다. 온몸에 칼집 상처투성이인 나뭇조각 부처, 날개 달린 천사처럼 생긴 아기 동자, 머리가 깨어지고 얼굴이 금 간 부처,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장난감 나무···. 멋진 콜렉션들이다. 올해 환경설치미술 초대 작가전은 18일 오후 5시 개막한다. 오후 7시 기념음악회도 열린다. 전시회는 다음 달 8일까지 계속된다. ●13회째인 올해 전시회는 18일부터 9월 8일까지스님이 된 계기를 묻자 그는 허허 웃으며 “인연 따라 그렇게 된 것이죠. 인연 따라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광풍이 불며 풍경소리가 요란했다. 성민 스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 시동을 켜자 소나기가 앞을 가릴 듯 짙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작품이 좋다, 나쁘다 이게 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고, 잣대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런 잣대를 놓아버렸으면 좋겠다.”라고 하던 스님이 말씀이 자꾸 생각났다.스님은 1984년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영하 스님 아래로 출가했다. 84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87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통도사승가대학을 졸업했다. 93년 이곳의 폐가를 손질해 ‘백가지 행복’을 담은 백락사를 창건해 25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열린세상] 소확평과 피스빌딩/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열린세상] 소확평과 피스빌딩/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몇 년 전 방문한 대만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던 ‘소확행’(小確幸)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의미다. 과거 화려했던 경제성장 시기를 지내 오며 강요됐던 대기업 취업과 경쟁을 통한 불투명한 출세의 압박에서 벗어나 즐겁고 잘할 수 있는 일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겠다는 노력이었다. 더이상 맹목적으로 부와 성공을 뒤좇지 않고 욕심을 내려놓은 대만의 젊은이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한 번뿐인 인생’이란 뜻의 ‘욜로’(YOLO) 열풍에 이어 우리 사회에도 ‘소확행’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소확행’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0년대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로 알려졌다. 하루키는 갓 구워 낸 빵을 손으로 찢을 때나 깨끗이 세탁해 잘 마른 하얀 셔츠를 입을 때 느끼는 감촉과 같이 사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찰나의 순간을 다소 근사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소확행’은 대만보다는 하루키와 닮았다. 그러나 연애와 결혼 등을 포기한 ‘N포 세대’의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 위안이 되고 힘이 돼 줄 수 있는 사소하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다는 점에서 더 현실적이다. 하루키와 대만이나 한국 젊은이들이 그리는 ‘소확행’에는 차이가 있지만 평화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행복한 삶이란 결국 평화로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행복과 평화는 맞닿아 있다. 평화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임이 틀림없다. 늘 평화로울 수는 없지만, 평화는 곁에 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도 아니고,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주장은 역시 권력자의 궤변일 뿐이다. 평화는 결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분단된 몸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사회를 치유하고 행복한 삶을 영유하려면 평화가 우선돼야 한다.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평화가 경제”라며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분단을 극복하고 정치적 통일은 멀었더라도 남북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자유롭게 오가는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광복”이라고 말했다. 또 접경 지역에 통일경제특구 설치, 남북한 철도·도로 연결 및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제안했다. 분명 실현 가능하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평화가 우리가 만들어 갈 큰 꿈이고 희망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평화가 남북 경제공동체가 피어날 단단한 토양이 되기 위해선 건강한 평화공동체가 우선돼야 한다. 70여년 나뉘어 살아온 사람들에게 분단 극복과 평화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군사 철책을 걷고 정치와 경제의 제도적 결합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극복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은 마음의 분단이고 마음의 평화다. 미래의 큰 평화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작은 평화도 소중하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작지만 진정한 평화 ‘소확평’(小確平)이 함께해야 한다. ‘소확평’은 사소한 평화마저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단순할지 모른다. 극복해야 할 난관으로 가로막힌 한 방의 큰 평화보다 별것 아닐지라도 실현 가능한 여러 개의 작은 평화가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주는 평화가 어쩌면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작은 평화라고 해서 큰 평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위한 평화의 꿈은 크게 그리되 지금 이 순간 작은 평화를 찾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제 평화 지키기(peace keeping)가 아닌 평화 만들기(peace making)를 넘어 평화 쌓기(peace building)를 해야 할 때다. 하향식(Top down)의 큰 평화와 상향식(Bottom up)의 작은 평화의 노력이 함께해 나가야 경제는 물론이요 다양한 분야에서 공동체를 세울 단단한 땅을 조성할 수 있다. 국민의 ‘소확평’으로 시민사회 바닥부터 평화에 대한 비전과 가치를 만들고 변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작지만, 평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모여 크고 확실한 평화를 쌓아 가는 한 장 한 장의 작은 벽돌이 되기를 바란다.
  • 베일 벗은 로숙영, 금빛 날개 보인다

    베일 벗은 로숙영, 금빛 날개 보인다

    박지수 빈자리 채워 공수 두루 활약 “당장 국내 리그 뛰어도 최상위급” 오늘 대만과 2차전 ‘원팀 면모’ 기대 허재號, 몽골 108-73 꺾고 2연승남북 단일팀 사상 처음으로 종합대회 승리를 안긴 여자농구 단일팀 선수 가운데 가장 돋보인 선수는 역시 북측의 로숙영(25·182㎝)이었다. 로숙영은 광복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겔로라 붕 카르노(GBK) 스포츠 콤플렉스 농구장에서 열린 개최국 인도네시아와의 조별리그 X조 첫 경기에 22득점 8리바운드 5어시스트 4스틸 활약을 펼쳐 108-40 대승에 앞장섰다. 최장신(198㎝) 박지수(라스베이거스)가 언제 합류할지 불투명한 상황에 그의 견실한 플레이는 단일팀에 대한 미심쩍은 시선을 걷어 냈다. 현재 단일팀 멤버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로숙영은 안정적으로 골밑을 지키며 득점력을 뽐냈다. 득점을 챙기면서도 경기 흐름을 읽고 움직이는 모습이 돋보였다. 골밑에서 상대 선수들을 지치게 만들고 수비에도 적극적이어서 전술적으로 요긴했다. 센터 요원인 곽주영(신한은행)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로숙영의 존재감은 더욱 빛난다. 이문규 단일팀 감독도 출국 전 “로숙영은 당장 국내 리그에서 뛰어도 최상위 수준”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감독은 전략 노출 없이 선수들에게 경기를 맡겼다. 선수 전원이 10분 이상씩 뛰며 득점을 기록해 실전 감각을 조율했다. 북에서 온 단신의 정통 포인트 가드 장미경(26)은 이날 코트에 많이 나서지 않았다. 상대가 약체여서 우리 전력을 모두 보여 주지 않았다. 장미경과 로숙영이 제대로 호흡을 맞추면 단일팀 전력은 더욱 상승세를 탈 것이다. 북쪽 슈터 김혜연(20)도 12득점으로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실전 능력을 확인하고 더 나은 상대와 맞설 해법을 모색한 만큼 17일 낮 12시 대만과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한층 무르익은 ‘원 팀’의 면모를 보여 줄 차례다. 박혜진(우리은행)은 “북측 선수들이 잘 뛰어다닌다”며 호흡을 맞추는 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대만은 1차전에서 카자흐스탄을 72-42로 눌러 단일팀에 이어 조 2위를 달리고 있다. 국제농구연맹(FIBA) 랭킹 52위로 한국(15위)보다 크게 낮지만 지난달 윌리엄 존스컵 맞대결에서 남측 선수들로만 구성된 팀에 일격을 가해 방심할 수 없다. 당시 대표팀은 높이 싸움에서 밀리며 득점에서도 폭발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로숙영이 가세해 설욕할지 주목된다. 한편 허재 감독이 이끄는 남자농구 대표팀은 16일 A조 2차전에서 몽골에 108-73 완승을 거뒀다. 한국은 이틀 전 인도네시아를 제압한 데 이어 2연승으로 승점 4점을 확보, 오는 22일 태국과의 3차전에 관계없이 8강행 티켓을 사실상 확보했다. 앞서 필리핀은 D조 1차전에서 카자흐스탄을 96-59로 격파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갈등 사회의 역설…워마드와 태극기 극과 극 ‘분노 동맹’

    갈등 사회의 역설…워마드와 태극기 극과 극 ‘분노 동맹’

    광복절 보수단체 집회에 워마드 동참 광화문서 “文대통령 탄핵” 함께 외쳐 안희정 前지사·제주 예멘 난민 문제 등 정치→사회 문제로 갈등 영역 다양화‘촛불’로 모아졌던 시민사회가 다분화되고 있다. 사회 갈등 구조가 복잡해진 데다 난민 문제와 젠더 이슈 및 경제 정책에서 문재인 정부의 ‘우회전’ 논란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특정 이슈가 불거지면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던 진영 논리도 약화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열린 보수 단체의 ‘문재인 대통령 탄핵 집회’에 남성 혐오 사이트 ‘워마드’ 회원 50여명이 동참한 것은 이 같은 현상을 잘 보여 줬다. 두 단체는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반(反)문재인’ 구호를 함께 외쳤다. 집회장 주변에는 ‘워마드’와 정반대 편에 있는 여성 혐오 사이트 ‘일간베스트’(일베) 회원들도 보였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은 사법부가 내렸지만 여성들의 분노는 문재인 정부로도 향하고 있다. 대선 국면에서 남녀가 평등한 세상을 약속했지만, 여성 차별적인 정책이 여전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기존 여성주의(페미니즘) 단체들은 안 전 지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사법부와 양성평등 정책에 미지근한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극단주의적인 워마드와는 선을 긋고 있다. 평소 진보적 가치를 지향했던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을 성폭행이 우려된다며 반대하는 것도 기존 잣대로 재단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와 관련해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는 “페미니즘 의제에선 진보와 보수의 경계선이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촛불 국면에서 ‘박근혜 정권 탄핵’에 앞장섰던 진보적 시민사회세력 중 일부는 요즘 “문재인 정부의 보수화가 본격화했다”며 비판적인 자세로 돌아섰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에서도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를 기점으로 문재인 정부와 선을 긋고 있다. 전문가들은 갈등이 ‘정치’의 영역에서 ‘사회’의 영역으로 옮겨 오면서 주체별 균열이 생겨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가치가 전환하는 시대에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정권 찬반 문제로 지나치게 단순화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많았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정치적으로 같은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젠더·환경·난민 문제 등 사회 영역에서 다원화·구체화되고 있다”면서 “단순히 진영의 균열로 봐선 안 된다”고 진단했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안희정 무죄에 반발하는 여성단체도 원래 문 대통령 지지층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이슈가 바뀌면서 스탠스가 바뀐 것”이라면서 “완전한 지지 철회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하며 현재로선 유동성이 강화된 것 정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갈등을 발전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김윤철 경희대 교수는 “사회의 영역에 그대로 두면 갈등은 더욱 심해지고 강자가 독식할 수밖에 없다”면서 “다양한 갈등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동시에 이를 중재, 조정하는 정치가 구현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사유리 태극기 셀카, 광복절에 공개→삭제 ‘남다른 역사의식’

    사유리 태극기 셀카, 광복절에 공개→삭제 ‘남다른 역사의식’

    일본 출신 방송인 사유리(38)가 광복절에 태극기 셀카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일본 네티즌을 의식한 듯 이내 게시물을 삭제했다. 사유리는 광복절인 15일 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잘자요. sweet dreams”라며 여러 장의 셀카를 게재했다. 카메라 어플리케이션의 애니메이션 합성 효과를 이용한 셀카에는 다양한 표정을 한 사유리의 매력이 돋보였다. 여러 장의 사진들 중에는 태극기와 태극문양의 스티커가 등장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의 광복절을 기념하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러나 일본 자국민의 반응을 의식한 듯 사유리는 게시물을 현재 삭제한 상태다. 사유리는 201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3000만원을 기부했다. 2008년도 100만원 기부에 이어 두번째다. 뿐만 아니라 사유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사유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일본에 있을 때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면서 “나는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가 최고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창피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애국자”라고 밝힌 바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사설] 광복 73년에도 아직 갈 길 먼 독립유공자 발굴과 예우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광복절 경축사에서 “묻힌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마지막 한 분까지 최선을 다해서 찾아내고, 그 공적을 기리는 일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에도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9월 독립운동 사료에 대한 국가 입증 책임을 강화하고, 포상 심사 기준 재검토 등을 담은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확대 계획안’을 내놓았다. 지난 6월엔 ‘수형(옥고) 3개월 이상’이라는 기준 조항을 없애고, 당시 사회 구조상 관련 공식 기록이 많지 않은 여성은 일기, 회고록, 수기 등 직간접 자료도 폭넓게 인정하는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 개선안’을 확정했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고(故) 안맥결 여사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안 여사는 한 달여 만에 가석방됐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해 이번 광복절 독립유공자 포상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혁명군으로 활약한 조부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더니 70년이 넘은 중국 법원의 재판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어느 후손의 한탄은 보훈처가 누구를 위한 기관인지 되묻게 한다. 그동안 소외됐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도 시급하다. 지난 1년간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이 발굴돼 이 중 26명이 이번에 서훈을 받은 건 다행이다. 하지만 전체 포상자 1만 5000여명 중에 2%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차별을 딛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여성 애국지사들의 항일 역사가 온전히 복원될 때 광복의 의미가 더욱 빛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사설] “평화가 경제”, 남북 공동 번영이 진정한 광복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광복절 73주년 경축사를 통해 “남북이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이라면서 “평화가 경제”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경축식에서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한 남북 경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평화’를 21차례나 언급했다. ‘경제’라는 단어도 19번 꺼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공영과 경제협력이 선결 과제임을 강조한 셈이다. 문 대통령은 또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야 본격적인 (남북) 경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며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 지역에 통일경제특구를 설치할 뜻도 밝혔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남북 경협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최소 17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고 북한의 일부 지하자원 개발 사업을 더한 수치다. 이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선순환을 바탕으로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가 실현되면 본격적인 남북 경협을 추진해 경제 성장의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뜻을 역설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특히 남북 경제공동체의 토대가 될 철도·도로 연결 사업과 관련해 “올해 안에 착공식을 갖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처음으로 ‘연내’라는 목표 시한을 제시한 것에 주목한다. 올해 안에 비핵화에 진전이 있어 경협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도 제안했다. 남북 경협에 관해 매우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이런 경제협력의 선결 조건으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을 강조했다. “평화 정착이 진정한 광복”이라고 언급해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북·미 간 의견 차이를 좁히고 비핵화 합의를 앞당기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이달 말 방북과 9월 평양에서 열릴 3차 남북 정상회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등을 통해 비핵화 협상의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북·미가 지난주 판문점에서 실무협의한 것이 뒤늦게 밝혀져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해체, 국외 반출, 폐기 핵무기 리스트 제출과 북한 체제 보장을 위한 ‘종전선언’을 맞교환하는 데 의견 접근이 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에 큰 기대를 건다.
  • 108-40…여자농구 단일팀 ‘상쾌한 출발’

    여자 농구 남북 단일팀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첫 경기에서 68점 차 대승을 거두며 대회 2연패 전망을 밝혔다. 여자 농구 단일팀은 15일 자카르타의 겔로라 붕 카르노 스포츠 콤플렉스 농구장에서 열린 인도네시아와의 A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108-40으로 크게 이겼다. 카누, 조정과 더불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 여자 농구 대표팀이 광복절에 가장 먼저 출격해 쾌조의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종합대회 단체 구기 종목에서 구성된 남북 단일팀의 사상 첫 승리이기도 하다. 대만과의 2차전은 17일 열린다. 북측의 로숙영은 양팀 통틀어 가장 많은 22득점을 올리며 승리에 앞장섰다. 남측의 강이슬(12득점), 박혜진(11득점), 김한별(12득점)도 35득점을 합작하며 제 몫을 다했다. 북측의 김혜연은 14득점, 장미경은 득점은 없지만 5어시스트, 4스틸을 기록했다. 대회가 임박해 단일팀이 구성돼 걱정을 샀지만 한 수 아래인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는 조직력에 큰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남북 단일팀은 남측 4명(박혜진, 임영희, 김한별, 박하나)과 북측 1명(로숙영)을 스타팅멤버로 내세웠다. 김한별이 로숙영의 어시스트를 건네받아 대회 첫 득점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줄곧 인도네시아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박혜진, 로숙영을 비롯해 주전 선수들의 득점이 고루 터졌다. 2쿼터에는 강이슬이 6분 48초를 뛰면서 3점슛만 4개를 성공시키는 맹활약을 펼친 끝에 58-20으로 크게 앞서며 전반을 마쳤다. 승부의 추가 기울자 단일팀은 식스맨을 적극 활용하며 선수들의 체력을 안배했다. 모든 선수가 최소 한번씩 코트를 밟아 봤다. 그러면서도 경기 종료 2분 32초를 남기고는 박하나의 레이업슛으로 100득점째를 기록하며 상대의 추격 의지를 꺾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그림 하나 제대로 못 보고 인생 마감… 그래서야 되겠나”

    “그림 하나 제대로 못 보고 인생 마감… 그래서야 되겠나”

     “평생 그림 하나, 꽃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마감하는 게 우리 삶입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광복절 경축식이 열리기 전날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일향(一鄕)한국미술사연구원을 찾았더니 강우방(77) 원장이 3시간여 인터뷰가 끝날 즈음 이렇게 되물었다. 강 원장이라면 문화재 업계에선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유홍준 교수가 추사 위작(僞作)들을 무분별하게 대중들에게 진품인 것처럼 소개한다고 지적해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터였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이었을 때도 국정감사 나온 국회의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면 “검토해보겠습니다” 대신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꾸했던 그다.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중앙박물관 학예사로 “어렵게 취업”해 밤낮 없이 그림과 불상과 도자기 등을 들여다보며 모든 것을 홀로 공부했다. 박물관에 고고학과나 미술학과 나온 인재들은 수두룩했지만 그처럼 매년 몇 편의 논문을 꾸준히 내놓는 이는 많지 않았다.  2000년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옮긴 뒤 2004년 이대 후문 쪽에 연구원을 열었다. 성덕대왕신종(속칭 에밀레종)에 새겨진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 마을이 되었네’ 명문에서 따왔다. 10여년 전 그리스 유적들을 돌아보다 벼락에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우리가 보는 예수나 부처 그림 가운데 아이콘은 20%에 불과하고 장식(ornament)이 80%를 차지하는데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장식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미술사학 강의를 듣지 않고 독학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 이르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 때부터 장식들에 숨겨진 의미들을 파헤치는 데 몰두했다. 수많은 장서와 슬라이드 책자로 둘러싸인 연구소의 한쪽 방에는 그만의 채색분석 방이 따로 있다. 꽃과 새, 패턴 문양 등이 어떤 순서로 그려졌는지 원리원칙을 톺아봤다. 그렇게 분석하며 색칠한 그림만 9000점이 된다고 했다. 그림의 작업 순서를 표시하느라 한 색 칠하고 스캔 뜨고 다른 색 칠하고 스캔 뜨고 했다. 컴퓨터 화면을 클릭할 때마다 작업 순서에 따라 볼 수 있게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엄청난 공력이다. 그의 데스크톱 컴퓨터 용량이 웬만한 기업의 데이터 처리 용량에 맞먹는 15테라바이트나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 원장은 “보통 오전 11시쯤 출근해 연구원에서 밤늦게까지 머무른다”며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 있고 매주 수요일 문하생 수업이 있어 준비하고 논문 쓰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고 했다. 접근하기 쉬운 인상은 아닌데 웃으면 아이 같은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종일 연구에 붙들려 있는데도 “시력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건강의 비결을 물으니 “색채 분석에 몰두하다가 의심이 풀리거나 궁금증이 해소되면 온몸에 희열이 뻗친다. 그 덕에 이렇게 건강한 것 같다”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15년 채색분석에 매달렸더니 우리의 불화(佛畵)나 중국 자금성의 장식, 프랑스 고딕 양식이나 그리스 이오니아 양식 등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른바 ‘영기화생(靈氣化生)’론이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나 그리스, 독일 학자들을 모아 강연하면 모두들 장식이라고만 치부했던 것에 그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그의 주장에 반색했다고 했다.  평소 “죽음만이 정년”이라고 외쳐온 강 원장이지만 이렇게 동서양을 통틀어 자신만이 하는 연구가 질적, 양적으로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 강의를 듣는 이들 가운데 독창적으로 뭘 해보는 이도 있고, 제가 항상 떠들던 얘기를 몇 년 뒤 스스로 깨달았다고 기뻐하는 수강생들도 있어 희망을 가져봅니다. 하지만 이 연구를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고교 때부터 클래식을 들어온 그의 CD 라이브러리 얘기를 꺼냈더니 진지하게 귀 기울일 만한 답이 돌아왔다. “보통 그림은 슬쩍 한 번 보고 지나치잖아요? 그래놓고 다 봤다고 생각들 하죠? 하지만 작품들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에는 엄격한 조형의 전개원리가 있음을 알아냈지요. 그러므로 채색분석해 보아야 조형예술작품을 한 점 봤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사이에 해석은 자연히 이루어집니다. 작품에 따라 한 시간, 일주일, 혹은 열흘 걸립니다. 그런데 음악은 흔히 시간예술이라 하지 않습니까? 베토벤 운명 교향곡은 30분 걸려 한 연주를 듣지요,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처럼 이틀 걸리는 작품도 처음부터 끝까지 귀 기울여 듣잖아요? 음악처럼 조형예술작품도 채색분석을 하며 시간적인 흐름을 타는 것처럼, 조형예술작품을 시간예술로 바꿔놓았다고 감히 자부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조형예술작품도, 현실 자연의 변화도 눈여겨 보지 않는다. 강 원장은 “뭐가 뭔지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고 개탄했다. 그는 “출근하며 길가의 꽃이 예뻐 카메라를 들이대면 사람들이 ‘그깟 꽃 뭐하러 찍느냐’고 한다. 그런데 꽃 하나를 설명하라고 하면 한두 줄도 못 쓴다. 전문가 연(然)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꽃을 열심히 찍는 까닭은 인류가 창조한 조형들 가운데 꽃 모양이 주류를 이뤄 그 꽃 모양이 세계미술을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에 비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3시간여 인터뷰를 해보니 그는 꽉 막힌 원칙주의자가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내뱉는 기자의 엉뚱한 얘기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른 이를 웃게 만들었다.  어느 대목에서는 “이제 대충대충 살까 싶어요”라고 했다가 다른 대목에선 “불의를 보고 지나치면 안 된다”고 했다. 수십년 전 좌천되듯 경주박물관 내려가 경주 분지 서쪽의 아름다운 선도산 중턱에 한 대학 병원이 들어서는 일을 극적으로 막아낸 강단도 있다. 최근 충남 예산군이 추사 작품을 매입하겠다고 여기저기 공고를 낸 일을 언급하며 “정말 모르니 이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것”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  강 원장은 “평생 정직해야 한다고 믿고 살아왔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 척하면 안된다”고 했다. 이어 “내가 학위나 진급이나 자리 욕심이 있었다면 지금의 삶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세계의 미술을 올바로 풀어주고 선도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세계미술의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복식을 혼자서 풀어내고 있다. 실제로 영기화생론으로 세계의 미술을 풀어낸 저서가 금년에 출간될 예정이라 흥분된다”고 말한다. 앞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을 선정해 매년 두 권씩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라 한다.  이렇게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수많은 오류가 서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으며, 그 오류들을 일본이 그대로 받아들인 뒤 우리가 다시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연구할수록 오류가 축적될 뿐이라고 한탄했다. 강 원장은 자신의 연구로 세계미술의 르네상스가 이뤄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어찌 보면 돌연한 자신감마저 내비쳤다.  연구원 현관을 나서려는데 강 원장이 “집사람은 늘 나보고 정신연령이 10세라고 해요”라고 말했다. 호기심 어린 소년이 환히 웃으며 문을 닫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광복절 수요집회

    광복절 수요집회

    제73주년 광복절인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겸 1348차 정기 수요시위’에서 참석자들이 수백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진을 들고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공식 사죄 등을 촉구하고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한자리에 모인 여야 5당 지도부

    한자리에 모인 여야 5당 지도부

    여야 5당 지도부가 15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개최된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를 듣고 박수를 치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 바른미래당 김동철 비대위원장,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정의당 이정미 대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 애국지사 김산의 아들 “지금 한민족, 새 발자취 만들어”

    애국지사 김산의 아들 “지금 한민족, 새 발자취 만들어”

    김산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린 혁명가 항일군정대학서 물리학·수학 등 가르쳐 아들 고영광씨 “내 성은 고려에서 따와”“내 성 ‘고’는 ‘고려’에서 따온 것이라오.” 혁명가의 늙은 아들은 비록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고려의 영원한 빛이라는 뜻처럼 빛났다.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애국지사 김산(1905~1938년)의 아들 고영광(81)씨는 성의 유래를 설명하며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15일 중국 베이징 한국대사관에서는 중국 인민군해방가를 작곡한 정율성 지사의 딸 정소제씨,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로 일한 김동진 지사의 딸 김연령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 7명을 초청한 광복절 경축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고씨는 “광복 73주년이라는 것 자체가 한민족에게 매우 크고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한 살 때 처형당한 아버지 김산(본명 장지락)은 미국 여성 언론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노래’를 통해 불멸의 혁명가로 남게 됐다. 평안북도 용천 출신인 김산은 3·1 만세시위운동 이후 중국 대륙을 누비며 전 생애를 혁명에 바쳤으나 일본 스파이로 몰려 극비리에 처형되었고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1983년 누명을 벗고 복권됐다. 김산은 1920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운 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교정원 및 인쇄공으로 일했다. 1925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베이징에서 1·29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허베이성 스자좡에서 4000여명의 학생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다. 공산당의 요청으로 옌안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다 님 웨일스를 만나 ‘아리랑의 노래’를 구술하게 된다. 고씨는 웨일스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편지를 교환했으며 “김산의 희생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희생이었다”란 회신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웨일스는 “아들을 한 명 두었으니 김산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다”며 ‘아리랑의 노래’ 영문 초판을 보내줬다고 소개했다. 김산의 불꽃 같은 삶은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고씨는 “아버지의 생애가 영화화된다면 ‘아리랑의 노래’에 따라 만들어지고 다른 이야기를 창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73년 동안 남과 북이 모두 아름다운 국가를 건설했으며 이제 한민족이 새로운 발자취를 만들어 가고 있다”며 “남북 정상이 이미 두 번 악수했고, 오는 9월에 제3차 정상회담을 하는데 73년간의 노력이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접경지 통일경제특구·개성공단 재개…광범위한 대북 경협카드

    접경지 통일경제특구·개성공단 재개…광범위한 대북 경협카드

    ‘통일특구’ 남쪽의 제2 개성공단 육성 철도 연결 연내 착공…금강산관광 재개 文 “北의 완전한 비핵화가 전제” 강조 새달 평양 방문때 상당한 진전 급선무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남북 경제협력 구상을 광범위하게 천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73주년 광복절과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사를 통해 경기·강원도의 남북 접경 지역에 통일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연내 남북을 잇는 철도·도로 연결에 착공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또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언급하고 남북한과 중국·일본·러시아·몽골·미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도 제안했다. 북한 비핵화에 따른 대북 제재 해제를 전제하며 한 말인데, 뒤집어 보면 비핵화에 따른 제재 해제를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한편으론 경협에 속도를 내길 바라는 북한을 향해 완전한 비핵화를 이룬다면 남북 경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도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야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면서 “평화경제, 경제공동체의 꿈을 실현시킬 때 우리 민족 모두가 함께 잘사는 날도 앞당겨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라며 향후 30년간 남북 경협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최소 170조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을 소개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연구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내놓은 ‘남북한 경제통합 분석모형 구축과 성장효과 분석’ 보고서로, 올해부터 2047년까지 30년간 7대 남북 경협 사업을 추진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경제성장 효과를 총 169조 4000억원으로 추산했다. 7대 경협 사업은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단천지역 지하지원 개발, 조선협력단지, 남북 철도 및 도로 연결, 한강 하구 공동 이용, 경수로 등이다. 문 대통령은 이 중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주목했다. 문 대통령은 “이미 금강산 관광으로 8900여명의 일자리를 만들고 강원도 고성의 경제를 비약시켰던 경험이 있다. 개성공단은 협력 업체를 포함해 10만명에 이르는 일자리의 보고였다”고 설명했다. 경협의 핵심 인프라인 철도·도로 연결과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는 북한이 줄곧 요구해 온 경협 사업이다. 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용산을 “경의선과 경원선의 출발지였던 곳”이라고 소개하며 광복절을 출발점 삼아 남북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분단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북·미 대화 교착 국면에서도 문 대통령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언급하고 연내 목표를 밝히는 등 경제협력을 빠른 속도로 진척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북한 역시 이를 긍정적 메시지로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문 대통령이 처음 밝힌 통일경제특구 구상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문 대통령은 통일경제특구에 대해 “많은 일자리와 함께 지역과 중소기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동해안 수산업 가공공단처럼 우선 우리 근로자만 일하는 통일경제특구를 만들고, 이후 비핵화 진전에 따라 남북 근로자가 함께 일하는 ‘남쪽의 제2의 개성공단’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며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런 문 대통령의 구상은 ‘북한 비핵화’라는 전제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과 다음달 중순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등을 통해 비핵화 협상에 상당한 수준의 진전이 이뤄지는 게 급선무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文 “평양서 종전선언·평화협정 담대한 걸음”…북·미에 진정성·속도감 있는 비핵화 협상 촉구

    “남북 관계 발전, 비핵화 촉진 동력” 강조 北 핵리스트 수용…폼페이오 방북 촉각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다음달에 열릴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하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가기 위한 담대한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라고 밝혔다. 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위한 전제 조건인 북·미 간 비핵화 대화를 촉진하겠다고 했다. 북·미 양측에 진정성 있는 대화 의지 및 속도감 있는 협상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 “남북과 북·미 간의 뿌리 깊은 불신이 걷힐 때 서로 간의 합의가 진정성 있게 이행될 수 있다”며 “남북 간에 더 깊은 신뢰 관계를 구축하겠다. 북·미 간의 비핵화 대화를 촉진하는 주도적인 노력도 함께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은 양 정상이 세계와 나눈 약속”이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행과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포괄적 조치가 신속하게 추진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간 미국이 주장하던 ‘핵시설 리스트’ 제출에 대해 북측이 일부 받아들일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이르면 이번 주 말쯤 방북할 거라는 분석이 나오는 상황에서 양측의 적극적이고 진정성 있는 협상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 관계자들은 판문점에서 북한과 비공개 실무 협상을 꾸준히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도 비핵화 리스트 완전 확보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고 북한도 조금씩 내어 줄 마음은 있기 때문에 어디서 절충선을 마련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또 문 대통령은 “남북 관계 발전은 북·미 관계 진전의 부수적 효과가 아니다”라며 “남북 관계의 발전이야말로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하는 동력”이라고 말했다. 최근 북측이 판문점 선언 이행에 있어 남한이 대북 제재 때문에 소극적이라고 불만을 제기하는 데 대한 답변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어 ‘동아시아철도공동체’ 등 남북 경협의 거대한 청사진과 함께 경제적 효과를 설명했는데, 이 또한 북한의 불만과 조급함을 누그러뜨리려는 뜻이 일부 포함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야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며 선후를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서울 용산에서 광복절 행사를 처음 개최한 의미 중 하나로 “한국전쟁 이후 용산은 한반도 평화를 이끌어 온 기반이었다. 지난 6월 주한미군사령부의 평택 이전으로 한·미 동맹은 더 굳건하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고 한·미 동맹을 강조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용산서 처음 열린 광복절 경축식… ‘데니 태극기’ 등 태극기 5종 게양

    용산서 처음 열린 광복절 경축식… ‘데니 태극기’ 등 태극기 5종 게양

    제73주년 광복절 및 제70주년 정부 수립 기념 경축식이 15일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행사장에는 1890년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O N 데니에게 하사한 ‘데니 태극기’를 비롯해 독립운동가 남상락 선생이 1919년 충남 당진에서 독립만세 운동 때 사용했던 ‘자수 태극기’, 1923년 ‘임시정부의정원 태극기’, 1942년 재미 독립운동가가 사용했던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게양 태극기’ 등 4종의 옛 태극기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 태극기’ 등 5종의 태극기가 함께 게양됐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보수 ‘전유물’로 변색… 광복절에도 태극기 꺼리는 시민들

    보수 ‘전유물’로 변색… 광복절에도 태극기 꺼리는 시민들

    보수 집회 광화문 등 서울 도심 점령 朴탄핵 후 태극기 부대 ‘상징’ 돼버려 시민들 “오해받을라” 국기 게양 기피 ‘수요시위’ 땐 배부했다 10분 만에 회수국경일을 기념하며 집집마다 내걸던 태극기의 상징성이 최근 급격히 변색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상징이 돼 버린 까닭이다. 현관이나 창문에 태극기를 내걸면 ‘태극기 부대’로 오해받을까 봐 아예 국기 게양을 꺼리는 일반인도 속출하고 있다. 15일 광복절을 기념하며 서울 광화문 등 도심으로 나온 시민들 상당수는 태극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날 태극기가 ‘문재인 대통령 탄핵 집회’ 참가자임을 식별하는 ‘표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제1348차 수요시위’에서는 참가자들에게 태극기가 배부됐다가 10분 만에 황급히 회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태극기를 배부한 임진옥(41·여)씨는 “광복절을 기념하는 의미와 할머니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태극기를 준비했는데 다들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고 ‘태극기 집회’를 열려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급히 회수했다”고 말했다. ‘한일합의 무효 요구 대학생 평화선언집회’ 참가자들도 태극기를 들지 않았다. 이태희(21·여) 평화나비네트워크 회원은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애국심을 표출하는 건 맞지만, 방식이 너무 과격하다”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보수단체의 상징처럼 돼 버린 태극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고 전했다. 반면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날 한 손에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 서울광장, 덕수궁 대한문 앞, 서울역광장 등을 모조리 점령했다. 이들이 흔드는 태극기는 광복절을 기념하는 태극기가 아니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정모(65)씨는 “태극기는 당당한 우리나라의 상징 아니냐. 우리는 순수하게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나왔다”면서 ‘박근혜 석방’과 ‘문재인 탄핵’을 목놓아 외쳤다. 박모(65)씨도 “무능력한 정부가 복지를 남발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정부를 갈아엎어야 한다”며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날 서울의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에서 태극기를 게양한 가정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용산구에 사는 이정엽(71)씨는 “태극기를 내걸었다가 내가 ‘태극기 부대원’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날 것 같아 포기했다”면서 “태극기 부대가 대한민국의 국기를 오염시켰다”고 말했다. 강남구 주민 김모(27·여)씨도 “자랑스러운 국기는 옛말이 됐다. 태극기 걸기가 부끄러워졌다”면서 “이제 거리에서 태극기만 봐도 태극기 집회만 떠올라 피하게 된다”며 안타까워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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