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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와 차 한잔] ‘후한서’ 완역한 장은수 민음사 대표

    [저자와 차 한잔] ‘후한서’ 완역한 장은수 민음사 대표

    기원전 206년 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왕조는 서기 9년 왕망의 정변으로 신(新)나라를 세울 때까지 유지됐다. 서기 25년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수(劉秀)가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재건했으니 그가 광무제(光武帝)다. 역사에서는 신나라 이전을 전한, 이후를 후한으로 각각 구분한다. 후한은 서기 220년 헌제(獻帝)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제위를 물려줌으로써 막을 내린다. 남북조 시대 유송(劉宋) 왕조의 역사가 범엽(范曄·398~445)이 200년가량 지속한 후한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후한서’(後漢書)가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역사학자도, 한문학 전공자도 감히 엄두를 내지 않았던 후한서 번역에 도전한 이는 현대문학을 전공한 전문 출판인 장은수(46) 민음사 대표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민음사 소회의실에서 만난 장 대표는 “후한서는 단순한 중국사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통사로 우리의 고대사와 맞물려 있기에 의미가 큰데도 지금까지 너무 소홀히 다뤘다”면서 “아마추어적 작업의 결과물이라 쑥스럽지만 좋은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그저 갈증을 달래는 용도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범엽의 ‘후한서’는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진수의 ‘삼국지’와 함께 중국사 전체를 포괄하는 25사 중 으뜸인 4사로 불린다. 후한은 오늘날 중국 정치문화의 토대를 이룬 시기이자, 중화(中和)의 사상적 기반이 다져진 중요한 시기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왕조의 역사서, 선비의 역사서로 널리 읽혔다. 중국의 역사와 동아시아의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명심보감’, ‘천자문’, ‘소학’을 마지못해 외웠던 것을 빼고는 한문과 담을 쌓았던 그가 후한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삼국지에 펼쳐진 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해 보려는 마음에서였다. “정사 삼국지를 원문을 참조해 보다가 이 시기를 다룬 또 다른 역사서인 후한서와 대조해 읽어보려고 번역본을 찾았는데 우리말 번역본이 없었어요. 삼국지와 시기가 겹치는 후한서 본기 중 마지막 세 황제의 기록 부분을 한문공부도 할 겸 조금씩 옮겨 본 것이 그 시작이었죠.” 번역자를 찾다가 포기하고, 2005년부터 5년 동안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직접 한 줄 한 줄 번역했다. 대학 선배가 주간으로 있는 새물결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로 하고는 말을 다듬고, 주석을 번역하고 정리하는 데 또 3년이 걸렸다. 범엽은 비록 역적모의로 한창 집필 중에 죽임을 당했지만 사마천에 못지않는 역사가이며 대단한 문장가로 후대에 평가받은 인물이다. 장 대표는 “출판편집인으로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원작자가 역사의 서술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고, 특히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광무제가 여러 호족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일으키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내심과 포용력이었습니다. 대의를 생각해 자기를 굽힐 줄 알고, 기본적으로 관대하고 이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상층부가 부패하고 백성의 삶에 대한 관심이 끊어져 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지도자의 솔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후한서는 본기 10권과 열전 80권, 제도사에 해당하는 지(志) 등 전체 100권으로 구성된다. 이번에 본기가 나왔으니 10분의1이 번역된 셈이다. 장 대표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열전을 옮겨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대한제국 시절 ‘20원 금화’ 경매서 1억5000만원 낙찰

    대한제국 시절 ‘20원 금화’ 경매서 1억5000만원 낙찰

    대한제국 시절 만들어진 ‘20원 금화’가 1억 5000만원에 낙찰됐다. 수집용 화폐 전문업체인 화동양행은 지난 15일 연 희귀 화폐경매 ‘화동옥션’에서 광무(光武) 10년인 1906년 제조된 20원 금화가 이날 경매 최고가인 1억 5000만원에 낙찰됐다고 16일 밝혔다. 1908년 만들어진 5원 금화는 6200만원, 1906년 제조된 10원 금화는 4300만원에 낙찰됐다. 화동양행 관계자는 “이번 경매에 나온 금화 3종은 최초의 근대 금화이지만 통용되지 못해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주화”라고 설명했다. 고종 때 화폐개혁으로 인쇄된 국내 최초의 지폐 호조태환권은 6400만원에 낙찰됐다. 호조태환권은 2010년 화동옥션에서 9350만원에 팔린 적이 있으나 이번에는 평가액인 8000만원의 80% 수준에서 팔렸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아베가 참배한 요시다 연구 전무… 한국역사가 日우경화 방조한 것”

    “아베가 참배한 요시다 연구 전무… 한국역사가 日우경화 방조한 것”

    “한국 역사학계에서 이들(요시다 쇼인과 도쿠토미 소호)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가장 큰 피해국인 한국이 오늘 일본의 우경화를 방조하는 행위가 된다.”(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1905년 을사늑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원천무효였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에 의해 강박된 1907년 광무 황제의 황위 이양은 유효했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들도 좀 더 논리적 정합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김명섭 연세대 교수) 2010년 한일병합조약 무효 선언을 내놓았던 한·일 지식인들이 27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동북아역사재단에 다시 모였다. 이날 ‘2010년의 약속, 2015년의 기대’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 참석한 지식인들은 현 한·일 상황에 대한 문제를 진단하고, 제안을 내놓으면서 발전적인 양국 관계 설정을 모색했다. ‘근대 일본 한국 침략의 사상적 기저’를 주제로 발표한 이 교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관과 행보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요시다 쇼인과 도쿠토미 소호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선 2013년 8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대신 요시다의 묘소를 선택한 것을 한국 언론들이 ‘개인적 취향’으로 판단한 것을 두고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요시다 쇼인은 기토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한국 침략에 수훈을 세운 인물들의 스승”이라면서 “그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정한론(征韓論)을 일본이 나아갈 길로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정한론은 1870년대 일본정계에 일었던 조선 침략론을 일컫는다. 그는 아베 총리가 지난해 말 야스쿠니 신사를 찾은 것에 대해서는 “기습적인 기획이 아니라 정확한 순서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요시다의 묘소를 참배한 뒤 그의 가르침으로 대외 침략정책을 수행하면서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가는 수순이었다는 것이다. 이어 일본 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평론가였던 도쿠토미 소호를 “요시다의 팽창주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 간 주역”으로 소개하면서 아베 총리의 역사관은 팽창주의 사관을 이어 가면서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는 역할을 해내겠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김영섭 교수는 국내 역사 인식과 역사교과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김 교수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은 원천무효라면서 1910년을 대한제국의 ‘역사적 종점’으로 설정한 현행 교과서의 서술은 논리적으로 상충될 수 있다”고 했다. 한일병합으로써 대한제국이 소멸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 한일병합조약의 영향력은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토론자로 나선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는 한·일 간 ‘새로운 21세기 패러다임’을 제안하면서 “아베 정권은 20세기 전반 제국주의시대 패러다임으로 돌아가 있다. 21세기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한·중, 한·미, 일·중 관계가 연동되면서 한·일 관계는 더 구조적이고 어려운 상태가 됐다”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정도다. 식민지 책임론을 가지고 논쟁하면 끝이 없다. 한·일 간극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는 대상을 놓고 대화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부고]

    ●한호성(분당서울대병원 암뇌신경진료부원장)송희(미국 거주)씨 부친상 유경하(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씨 시부상 25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31)787-1503 ●오용우(전 삼환기업 차장)경숙(약사)씨 모친상 고태성(뉴스1 정치부장)씨 장모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30분 (02)3410-6902 ●이완(한국항공우주산업 전문위원)씨 부친상 양동정(전 수협중앙회 감사위원장)전용길(KBS미디어 사장)지영섭(프랑스 거주)씨 장인상 25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8일 오전 (02)2227-7569 ●박우순(동양기획 대표)씨 별세 성표(강동성심병원 안과 교수)씨 부친상 이주형(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씨 장인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3410-6919 ●백학순(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인순(KBS 북한부 팀장)문순(이천세무서)왕순(평화재단 팀장)씨 모친상 26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 30분 (031)787-1502 ●이성조(전 세림실크·삼도물산·조광무역 대표이사)씨 별세 재혁(한국타이어 팀장)씨 부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30분 (02)3010-2262 ●조건진(KBS 아나운서)씨 모친상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5시 30분 (02)3410-6915 ●손광식(전 문화일보 사장)충식(전 한국조폐공사 처장)문식(전 토러스증권 상무)형식(재미 건축가)씨 모친상 26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29일 (02)2258-5940 ●장윤환(경북대 명예교수)씨 부인상 효성(한국산업기술평가원 수석연구원)효재(사업)매희(서울여대 교수)씨 모친상 곽미정(서울아산병원 마취과 교수)씨 시모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 (02)3010-2000
  • [지상파 하이라이트]

    ■시사기획 창(KBS1 밤 10시) 2013년을 살아가는 노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취재진은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 쉼터 탑골공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100명이 넘는 노인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최근 화두로 떠오르는 기초노령연금 문제부터 노인 일자리 사업까지, 관련 이슈들에 대해 당사자인 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해외특별기획 드라마 초한지(KBS2 밤 12시 45분) 광무에서 대치하던 초군과 한군은 유방의 계책으로 장기전에 돌입한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를 처형한다며 유방에게 싸움을 걸어 보지만 유방은 이를 무시한 채 대치 상태를 유지한다. 한편 항우는 유방에게 담판을 청한다며 그를 끌어내고, 항우를 조롱하는 유방에게 화살을 날려 명중시키는데…. ■명의의 건강비결(EBS 오전 10시 20분) 뼈와 관절의 명의인 정형외과 전문의 유명철 교수는 ‘고관절 표면 치환술’ 국내 최초 도입, ‘절단 수지 재접합 수술’ 국내 최초 성공 등 최초의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려는 유 교수에게서 뼈와 관절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 본다. ■현장 21(SBS 밤 8시 55분) 행정부를 감시하는 국회 기능의 꽃, 국정감사. 지난달 14일부터 시작된 국감이 지난 2일 막을 내렸다. 이번 국감은 역대 가장 많은 628개 피감 기관을 선정했고 200여명의 기업인 증인을 채택해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국감 기간 20일 중 주말을 제외한 15일 동안 1개 상임위가 하루 서너개에서 많게는 20개 가까운 기관을 감사해야 했다. ■장수의 비밀(EBS 밤 10시 45분) 70년 세월에 백발이 된 할머니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뽀뽀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반찬을 먹여 주며 자신이 먹을 때보다 더 즐거운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다. 한결같이 지고지순한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를 업어주고 안아주고 싶단다. 세월이 갈수록 애정이 더 깊어져 서로가 없으면 한시도 못 산다는 부부 금실의 비결은 뭘까. ■쇼킹 70억(OBS 밤 9시 50분)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영위하며 살아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민족과 부족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촌 이웃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각기 다른 역사와 자연환경의 토대 위에서 뿌리내린 70억 인구의 놀랍고도 이색적인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 [열린세상] 때를 잘 읽을 때/최흥집 강원랜드 대표

    [열린세상] 때를 잘 읽을 때/최흥집 강원랜드 대표

    하늘이 짙은 쪽빛 속살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먼 산의 단풍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벽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덩굴은 진홍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시나브로 사람들의 입성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으며,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낙엽 타는 냄새에서 진한 커피 냄새를 맡고 싶은 날들입니다. 이렇게 계절은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황금색 들판은 풍요로운 가을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이 결실을 위해 농사짓는 이들은 봄부터 여름까지 때를 맞춰 열심히 일하고 땀 흘렸습니다. 때를 맞춰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모를 키웠습니다. 때를 맞춰 모내기하고, 김도 맸습니다. 제때 흘린 농부의 땀이 풍성한 가을을 불러왔습니다. 제대로 된 때를 안다는 것은 기업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득롱망촉(得?望蜀). 농서 지방을 얻고, 촉 땅을 바란다는 말입니다.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를 무너뜨린 후한의 광무제 유수는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천하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했지만, 오직 농서의 외효와 촉 지역의 공손술만이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버텼습니다. 이에 격분한 장군들이 군대를 동원해 정벌할 것을 주장하지만, 광무제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기다릴 것을 명했습니다. 얼마 후 외효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이 농서 땅을 들어 항복해 왔습니다. 마침내 광무제는 농서를 수중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촉을 바라보며 ‘농서를 얻자 촉을 바라다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면서 군대를 움직여 촉마저 점령했고, 천하는 다시 통일 국가로서 안정을 되찾게 됐습니다. 유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하통일의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이백년쯤 지난 후한 말기, 천하는 군웅들의 세력 다툼으로 어지러워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촉을 점령한 유비가 오나라의 손권과 대립하게 되자 그 틈을 노린 조조가 직접 군사를 지휘해 한중과 농서 지방을 차지했습니다. 이때 조조 진영의 참모인 사마의와 유엽이 나서서 승기를 잡았으니 이 기세를 이어 촉을 칠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백년 전 광무제 유수가 섰던 자리에 서게 된 조조는 광무제와 달리 ‘농서를 얻자 촉을 바라다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미 농서를 얻었으니 촉까지 바라지는 않겠다’며 회군을 결정합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유비는 촉을 안정시키고, 결국 천하는 본격적인 삼국 대립의 시대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유수군과 조조군이 처했던 상황이 다를 수는 있지만, 어쩌면 조조의 실기(失期)가 천하통일을 미루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겠습니다. 매일 같은 모습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강물도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이 다릅니다. 이렇게 세상은 항상 변하고 있으며, 이 속에서 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변화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변화는 한꺼번에 오지 않고, 수많은 조짐과 함께 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변화의 조짐들 속에서 그것들을 보고 또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일엽지추(一葉知秋).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를 보고 천하에 가을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비 한 마리가 여름을 만들지는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이 말들은 변화의 조짐에 관한 것입니다. 그 변화의 조짐 속에는 한 잎의 낙엽처럼 진정한 변화를 알려 주는 조짐이 있는가 하면 잘못 날아온 제비처럼 거짓된 신호도 있습니다. 우리는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서도 계절의 변화를 미처 느끼지 못하고 망한 나라나 기업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아직 변화의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레짐작으로 나섰다가 오히려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 기업이나 나라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변화를 잘못 읽은 탓입니다. 계절의 변화는 빠르고 늦는다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다만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사람들이 때를 놓치고 투덜댈 뿐입니다. 옷장을 열어 보니 여름옷이 치워지고, 추동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가을입니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⑥ 세종로 사거리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⑥ 세종로 사거리

    황토마루서 바라본 사대문 풍광에 정도전이 칭송詩 읊었다는데… 세종로 사거리는 본디 사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선 지도를 펼쳐 보면 오늘의 광화문광장인 육조거리와 남대문을 잇는 남북 간 도로는 없었다. 지금의 태평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세종로 사거리에서 솟아올랐다가 정동과 청계천광장을 거쳐 무교동 쪽으로 흘러내린 나지막한 고개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이 고개가 황토마루(황토현)였다. 아쉽게도 지명으로만 남아 있을 뿐 사진이나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생김새와 위치를 짐작할 뿐이다. 고개 덕분에 사대문 안의 등뼈에 해당하는 남북 간 상징 축선은 육조거리에서 정(丁)자 모양을 그리면서 운종가로 꺾여 종루(보신각)까지 이어지고 나서 청계천 광통교를 건너 남대문까지 뻗었다. 황토마루에서 바라보는 사대문 안의 풍광이 가장 아름다웠다. 삼각산을 병풍처럼 두른 북악과 경복궁, 그리고 육조 관청 담벼락(長廊)이 장관을 이뤘다. 한양천도 직후 정도전은 ‘여러 관아 높은 건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이/하늘의 별들이 북두칠성을 둘러쌌네/달 밝은 새벽 관청거리 물같이 고요한데/말 구슬 소리 들려오고 티끌 한 점 일지 않누나’라고 육조거리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아마 야밤에 황토마루에 올라 북악 쪽을 바라보면서 읊었을 것이다. 인왕산 지맥인 황토마루는 풍수지리학상 관악산 불길이 경복궁에 미치는 것을 막는 장치였다. 그래서 길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청계천을 파낸 흙을 보태 언덕을 덧쌓았다. 조선지도에 동령동(東嶺洞)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친 황토마루 동쪽 마을이었다. 무기를 만드는 군기시(軍器寺)가 남쪽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신문(한국프레스센터)과 서울시청쯤이다. 일제는 1912년 ‘황토현 언덕을 없애서 폭 100m, 길이 220m의 광장을 만든다’는 총독부 훈령을 내려 고개를 뭉개 버렸다. 황토현을 없애고 나서 광장은 만들지 않았다. 대신 태평로를 내서 경복궁과 남대문을 연결하는 일본의 상징 축선을 만들었다. 황토현을 없애 버림으로써 육조거리를 파괴하고, 조선의 남북 상징 축선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 광복후 신생 대한민국, 지명 즉흥 결정 육조거리·운종가 전통 이름 사라져 광복 후 1년여 지난 1946년 10월 초대 서울시장 김형민은 일본식 동명이나 가로명을 바꾸는 작업을 했다. 당시 군정청 문교부장(교육부장관) 유억겸의 제안에 따라 일제강점기 가로명의 뒷말인 통(通)을 로(路), 정목(丁目)을 가(街),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특히 큰 가로명에는 역사상 위인의 시호를 붙이기로 했다. 개정 작업에 참여한 국어학자 황의돈은 회고록에서 “세종로는 우리나라 문치의 위인으로서 민족의 태양과 같은 세종대왕의 이름을, 충무로는 무인으로서 위훈을 추모하는 충무공을, 을지로는 육군의 대표 인물인 을지문덕을, 원효로는 불교의 대표 인물인 원효 대사를, 퇴계로는 유학계의 대표 인물인 이퇴계를, 그리고 충정로는 순국열사 중에서도 맨 처음인 민충정공으로 택정하였다”라고 썼다. 이에 따라 광화문통은 세종로, 황금정통은 을지로, 본정통은 충무로, 소화통은 퇴계로 등으로 변경됐다. 개정 작업은 논란 없이 간단하게 끝났다. 36년이란 식민 통치 기간이 너무 길어선지, 광복의 기쁨에 들떠선지, 일제잔재 지우기에 열중해선지 세종로 사거리가 황토마루였다는 점을 일깨웠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광화문통을 육조가로 되돌리자는 의견이 개진됐으나 무시됐다. 일제가 새로 만든 대표적인 길인 태평통도 태평로로 버젓이 살아남았다. 종로도 옛 지명인 운종가를 되찾지 못했다. 지명과 가로명 개정 작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열렸지만,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지명이란 자연과 지리, 풍속, 제도의 산물임에도 식민통치를 갓 벗어난 신생 대한민국은 숙고 없이 지명을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오늘날 사대문 안을 오가는 숱한 청소년들이 육조거리와 황토현, 운종가 같은 우리 지명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좋은 역사나 전통이라도 계승하지 않으면 잊히게 마련이다. 교보빌딩옆 ‘고종즉위40년 비전(碑殿)’ 도난당하고 헐리고 부실 복원까지 세종로와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전이 서 있다. 육중한 덩치의 교보빌딩 때문에 일견 왜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날아갈 듯한 추녀가 북악에 겹쳐 보이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기단을 높이 쌓고 돌난간을 두른 장중한 기품이 주변 고층건물 숲을 압도한다. 1902년 세워진 이 건물은 건축사적으로 대한제국기 전통 양식의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된다. 현대식 건물밖에 없는 삭막한 세종로 사거리에 역사의 향기를 풍기는 존재다. 한때 세종로 사거리를 ‘비각 앞’이라고 불렀다. 이 건물의 가치를 깎아내린 일제의 몹쓸 잔재다. 아직도 관광 안내 책자나 교통 관련 안내문에 비각이라고 잘못 기록한 사례가 많다. 비각(碑閣)이 아니라 ‘비전’(碑殿)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궁궐 전(殿)자는 경복궁 근정전처럼 임금이 사용하는 건물에만 붙는 글자다. 전통 건물은 격에 따라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누(樓)-정(亭) 순으로 이름이 붙는데 비각은 비전의 부속 건물에 불과하므로 이를 바꿔 부르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이 쓴 비문에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썼으며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세운 일’ 등이 기술돼 있다. 단순히 고종 즉위 40년을 기리는 건물이 아니다. 대한제국 건국 사실과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다는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헐릴 뻔한 위기를 넘겼다. 1966년 광화문 지하보도 공사 당시 비전이 공사에 거추장스럽다는 보고를 받은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60년밖에 안 된 것이니 헐어 버리라”라고 막말을 했다고 한다. 주위의 만류로 간신히 살아났지만 10년 후 종로길 확장 공사와 교보빌딩 신축공사 때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1979년 해체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자리 잡았지만 부실 복원을 면치 못했다. 지붕 꼭대기 절병통(節甁?) 모양이 달라졌다. 어찌 된 셈인지 회칠을 한 추녀 마루가 기와로 바뀌면서 잡귀를 물리치는 어처구니(雜像)도 간데없다. 또 비를 보호하는 꽃담과 철제 틀도 사라져 옹색해졌다. 출입구였던 만세문(萬歲門)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뜯어다가 자신의 집 대문으로 사용했는데 한국전쟁 통에 일부 파손됐다. 비전이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리케이드 밖에선 비문이 보이지도 않는다. 광화문광장을 오가는 숱한 내외국인들이 대한제국의 당당한 위엄을 엿볼 수 있도록 원형대로 복원돼야 한다. 국제극장·감리회관 부지에 광화문 빌딩 주인 둘, 담당 구청도 둘이 된 사연 세종로 사거리는 광장이 들어설 자리였다. 건물이 들어설 수 없었다. 1952년 3월 25일자 내무부 고시에 의해 확정된 7만 700㎡의 대광장 계획범위 안이기 때문이다. 전후 복구계획에 따라 세종로 사거리 중심에서 반지름 150m 원 넓이의 광장 부지가 잡혀 있었다. 이 반지름 안에는 지금의 교보, 현대해상화재, 동아일보, 광화문우체국, 광화문빌딩 등이 포함된다. 이 계획은 엄청난 로비에 의해 꼬리를 내렸다. 1962년 12월 8일자 건설부 고시에 의해 3만 3228㎡(반지름 102m)로 확 줄었다. 광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개발지상주의 때문이었다. 도로와 광장계획에 걸려서 정식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땅이지만 가(假)건물을 허용했다. 청계천 쪽 동아일보사와 정동 쪽 국제극장, 감리회관이 대표적 가건물이었다. 동화면세점이 입주한 광화문빌딩의 탄생 비화도 흥미롭다. 1986년 신문로 도심재개발사업에 따라 1950년대 말~60년대 초 장안 최고의 개봉관이었던 국제극장과 감리회관을 헐고 새 건물을 짓게 됐다. 시행 주체는 동아흥행과 감리회유지재단이었다. 건축허가 과정에서 2개의 건물을 따로 짓는 것보다 하나로 묶는 것이 낫다는 아이디어가 서울시와 건축위원회 등에서 제시됐다. 시행 주체를 설득하고 나니 담당 구청이 걸림돌이었다. 두 건물이 속하는 종로구청과 중구청이 막대한 세원 확보를 놓고 한 치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국제극장은 종로구 세종로동 211번지였고, 감리회관은 중구 태평로 1가 68번지였다. 설득과 타협, 숙고를 거듭한 끝에 수평분할 방식에 합의했다. 지하 5층에서 지상 12층까지는 동아흥행 소유로 종로구에, 지상 13층부터 20층까지는 감리회유지재단 소유로 중구에 속하게 하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 건물은 1993년 완공됐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광화문빌딩은 몸체는 하나, 주인은 둘, 담당 관청도 둘인 특기할 만한 건물”이라고 말했다. joo@seoul.co.kr
  • [고시열전] ⑩ 행시 30회 합격자들

    [고시열전] ⑩ 행시 30회 합격자들

    행정고시 30회는 행시 합격자 ‘100명’ 세대의 마지막 기수다. 지난해 5급 공채 합격자가 321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 경쟁률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된다. 이들이 응시한 1986년 1차 시험의 경쟁률은 67대1로, 역대 가장 높았다. 어느 때보다 높은 경쟁을 뚫고 고시에 합격했다고 자부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아쉽다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동기가 많아야 좋은 인재도 많이 나오고, 힘도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사회부처의 한 국장은 “다른 부처와 업무 협의를 할 때 같은 기수가 상대편에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되는데, 인원이 적다 보니 이런 경우가 다른 기수에 비해 적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1987년 5월 4일에 공무원교육원에 입교했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임명장을 받은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유신사무관으로 불린 군 전역 특별채용자들과 교육을 받은 기수도 30회가 마지막이다. 특히 당시는 6·10 민주항쟁과 6·29 선언 등이 일어난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과도 같았던 시기였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은 “연수 기간 중에 일어난 6·10항쟁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보며 ‘우리가 이렇게 교육만 받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동기들 사이에 열띤 토론과 고민도 있었다”고 연수원 시절을 소회했다. 30회는 경찰로 옮겨간 사람들이 다른 기수에 비해 많다는 점도 눈에 띈다. 당시에는 공직 생활 2~3년차 가운데 희망자를 경정으로 특별채용하는 제도가 있었다. 행정부에서 경찰로 넘어간 이들은 김기용 전 경찰청장을 비롯해 모두 4명이다. 김정식 전 경찰대 학장과 이한기 전 충북 옥천서장, 그리고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에서 경찰 수사를 축소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모두 30회다. 김 전 서울청장은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하다 경찰청으로 이직했다. 기획재정부에는 본부에 7명의 30회가 있다. 현재 재직 중인 30회 가운데 10%가량이 기재부에 있는 셈이다. 노형욱 사회예산심의관과 김용진 대변인, 고형권 정책조정국장은 부처 내 핵심 보직을 맡고 있는 ‘30회 3인방’이다. 조봉환 공공혁신기획관, 송병선 뉴욕총영사관 재경관, 최영록 조세기획관, 김선병 국장(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파견 후 본부 대기)도 있다. 안전행정부에 파견된 이철 국장을 포함하면 30회는 더 많다. 새 정부에서 역할이 더욱 막중해진 중소기업청에는 30회 출신이 4명이나 된다. 김형호 서울지방중소기업청장과 김흥빈 경영판로국장, 양봉환 생산기술국장, 최수규 청와대 중소기업비서관이 바로 그들이다. 최 비서관은 지난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파견 후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다. 안전행정부에도 30회 기수가 본부에 4명이 있다. 조직정책관으로 현 정부 조직개편의 실무를 지휘했던 심덕섭 전자정부국장과 이지헌 인사기획관, 이재율 안전관리본부장, 정태옥 지역발전정책관 등이다. 이들 외에 본부 밖에는 현재 박병호 광주시 기획관리실장과 허언욱 주베를린총영사가 있다. 30회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남자 합격자는 최희주 보건복지부 전 인구정책실장이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83학번이었던 그는 21살의 나이로 합격했다. 그는 현재 새누리당 수석전문위원으로 내정된 상태다. 30회 100명 가운데 여성 합격자는 5명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윤미량 통일부 상근회담 대표다. 통일부의 첫 여성 사무관이었던 그는 현재 고위공무원 가급(1급)인 동기들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다. 지난 정부에서 1급을 마치고 퇴직한 인물은 김한영 전 국토부 항공정책실장, 박광무 문화관광연구원장, 장석명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등 3명이다. 30회 동기들의 모임 이름은 ‘청목회’다. 이들은 매월 한 차례 점심을 함께한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문 수난사/함혜리 논설위원

    1897년 10월 12일 새로 지어진 환구단 안은 향 냄새로 가득찼다. 이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을 하늘에 고하는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왕들은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지어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됐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할 때 고종은 정남쪽에 있는 정문 인화문이 아닌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주로 통했다. 민가가 밀집하고 외국공관이 많이 들어서 있던 인화문 쪽에 비해 대안문 쪽의 도로가 빨리 정비되면서 사람들도 대안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하게 됐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수리한 뒤 고종은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문으로 삼도록 했다. 대한문의 영광은 여기까지다. 원래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에 위치했던 대한문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탄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에서 소공로까지 대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1914년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환구단을 관통하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땅 일부를 매각하면서 덕수궁 해체와 함께 대한문을 그 위치에서 다시 30칸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1961년 서울시는 태평로 도로폭을 6m 확장했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철책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복원되고 차도가 생기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맣게 남아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신세가 되자 결국 서울시는 1970년 12월 대한문을 22m 뒤로 옳겼다. 현재 위치한 곳이다. 1년 넘게 천막농성이 벌어지던 대한문 옆에서 엊그제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희망지킴이’가 캠핑시위를 벌였다. 서울 중구청이 농성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고궁의 고즈넉함은 꿈도 꿀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대한문의 시련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고 울적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뚜벅뚜벅 대구 ‘구국의 길’ 한바퀴

    대구시내 곳곳에 흩어진 구국의 흔적이 관광코스로 만들어진다. 대구시는 동인동 국채보상기념공원과 박근혜 대통령 생가, 2·28민주운동기념회관 등을 잇는 관광투어를 개발한다고 6일 밝혔다. 주제는 ‘나라사랑’, 명칭은 ‘구국의 길’(가칭)로 정했다. 코스는 중구 삼성상회 터(인교동)~국채보상운동 발상지(옛 광무사·서야동)~박근혜 대통령 생가터(삼덕동)~2·28민주운동기념회관(남산동)~국채보상운동기념관(동인동)을 잇는 3.5㎞ 구간이다. 시는 코스마다 차별화된 스토리를 입히고 안내표지판 등을 세워 내년 초부터 관광코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또 대구 중구가 운영하고 있는 ‘골목투어’ 프로그램과도 연계할 방침이다. 대구 도심을 돌아보는 골목투어는 지난해 6만여명이 참가할 정도를 인기를 끌고 있으며 5개 코스로 구성돼 있다. 삼성상회는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1938년 창업했으며 청과물·건어물·국수 등을 판매하며 기업을 일궜다. 옛 출판사였던 광문사는 대한제국 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당시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이 지역 유지들에게 “담배를 끊어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갖자”고 제의하면서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됐다. 지난달 28일 준공한 2·28민주운동기념회관은 고교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해 시위한 사건을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도 포함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혼집이자 한국전쟁 중 박근혜 대통령이 출생(1952년)한 곳이다. 시 관계자는 ”대구가 가진 소중한 자산들이 코스에 포함됐다”면서 “이곳에 얽힌 다양한 근·현대사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소개해 교육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0) 이재순 vs 이범진

    [선택! 역사를 갈랐다] (30) 이재순 vs 이범진

    현재 한국학계에서는 대한제국에서 추진한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가 학자에 따라 엇갈린다. 개혁의 실효성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대한제국이 부정부패로 얼룩져 근대화 사업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반대로 광무개혁을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근대화하려 한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대한제국의 다양한 평가에 앞서 한국학계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대한제국의 개혁을 추진한 정치세력이다. 개혁을 주도한 정치세력에 대한 천착이 없다면 대한제국의 다양한 해석도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군주 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자신의 정치세력을 결집시켰다. 아관파천 이후 이재순(李載純,1851~1904)과 이범진(李範晋, 1852~1911)으로 구성된 궁내부는 고종 권력의 핵심세력이었다. ●이범진, 제정러시아 대한제국 개입 유도 1896년 2월 9일 러시아 순양함 아드미랄 코르닐로프의 내부는 긴박했다. 당시 아드미랄 코르닐로프는 제물포에 포함 보브르와 함께 정박했다. 함장 몰라스는 해군대위 흐멜레프에게 러시아 수병을 이끌고 신속히 서울로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2월 10일 새벽 중위 미하일로프는 서대문에 도착해서 대위 흐멜레프를 비롯한 해병부대를 맞이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안내했다. 장교를 포함한 러시아 해병의 전체 인원은 135명이었다. 포함 보브르에서 대포 1문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송되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는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금천교(禁川橋)→내수사전로(內需司前路)→새문고개→러시아공사관으로 신속히 피신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왕이 안방을 내주고 셋방살이를 자처했다는 아관파천이었다. 2월 11일 저녁 러시아공사관과 영사관 사이의 광장에는 청색의 천막이 설치되었다. 1개 중대의 러시아 병력이 러시아공사관의 안팎에서 경계를 시작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 내부 2개의 방을 침실과 접견실로 사용했다. 공사관 정문 앞에 있는 정원에는 대포가 설치되었고, 공사관 내부의 개조된 3개의 방에 33명의 해병이 거주했다. 영사관 내부의 개조된 2개의 방에는 62명의 해병이 거주했다. 그동안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에도 불구하고 제정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현상유지’ 외교 정책을 고수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러시아의 ‘현상유지’ 외교 정책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북극곰 제정러시아를 움직인 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이범진은 2월 2일 러시아공사관으로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왕세자와 같이 대궐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서 피신하려고 한다.”는 고종의 비밀 편지를 전달했다.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스페예르는 이범진에게 고종 피신의 위험성을 알렸다. 하지만 이범진은 “만약 스페예르가 고종의 피신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고종이 대궐에서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며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심했다.”고 답변했다. 아관파천 직전 고종은 자신의 신변안전 때문에 파천의 실행을 주저했다. 그러자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의 지원을 확인하는 한편 ‘궁중(宮中)의 여화(餘禍)가 있을지 모른다.’는 일본의 ‘고종폐위설’까지 유포하여 고종의 결단을 유도했다. 1898년 9월 11일 경운궁이 발칵 뒤집혔다. 이날 저녁 식사 전에 고종과 순종은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커피의 절반을 마신 순종은 토하면서 혼절하였고, 고종은 구토했다. 남겨진 커피를 마신 내관들도 혼절하였다. ●이재순, 고종 커피에 아편 넣어 정적 제거 사건의 파장이 심각했기 때문에 신속한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날 고종의 수라상에 관련된 인물은 14명이었다. 심문과정에서 김종화(種和)라는 인물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종화의 심문과정에서 전선사(典膳司) 주사(主事)를 지낸 공창덕(孔昌德)의 개입 사실이 드러났다. 공창덕에 따르면 그는 김종화에게 1000원의 사례금을 보장하면서 김종화가 고종과 순종의 커피에 ‘아편 1량’을 몰래 집어넣었다. 무엇보다도 공창덕의 심문과정에서 배후인물이 김홍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창덕에 따르면 김홍륙은 공창덕에게 협판을 보장하면서 고종의 독살을 지시하였고, 김홍륙은 자신의 처인 김소사를 통해서 공창덕에게 ‘아편 1량’을 제공하였다. 사건에 참가한 인물 중 김종화는 이재순의 추천에 의해 각감청(閣監廳)에서 일하게 되었다. 보현당(寶賢堂)의 창고지기인 김종화는 홍릉 제사 때에 비용을 사적으로 유용해서 면직되었다. 그런데 면직된 김종화는 사건 당일 대궐에 몰래 잠입하여 고종의 독살을 실행했다. 공창덕은 고종의 아관파천 시절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고용한 요리사였다. 아관파천 이후 공창덕은 김홍륙의 추천에 의해서 전선사 주사로 임명되어 왕의 주방에서 외국요리를 관장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의문을 살펴보면 첫째, 커피를 마신 사람 중 죽은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독살의 의도가 있었다면 커피를 마신 사람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야 한다.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암살의 계획보다는 정치적 음모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둘째, 김종화라는 인물이 이 사건에 개입한 동기가 매우 부족하다. 또한 고종을 암살하려는 인물이 쉽게 체포된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면직된 인물이 대궐에 잠입할 수 있는가? 1898년 4월 부임한 러시아공사 마튜닌은 독차사건이 러시아통역관 출신 김홍륙을 파멸시키려는 음모로 파악했다. 당시 러시아의 후원 아래 김홍륙은 궁궐에 자유자재로 출입하면서 정치와 인사 문제까지 깊숙이 개입하였다. 마튜닌은 러시아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고종 독차사건의 배후로 궁내부대신 이재순을 지목하였다. 이재순은 김홍륙이 러시아공사의 후원 아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자,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재순은 자신이 김종화를 추천해 사건에 간접적으로 관련되었지만 사건의 처리과정에 개입했다. 이재순은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고종의 승인을 얻었고 경무청에 조사할 것을 직접 지시했다. 이후 1898년 10월 김홍륙·공홍식·김종화는 반역 음모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소속한 이재순과 이범진 계열을 적극 후원했다. 이범진은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를 구해준 인연으로 황후의 총애를 받아 민비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법부대신에 임명된 이범진은 을미사변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이재순을 비롯한 권력집단은 이범진의 지나친 권력 집중에 반발하였다. 결국 이범진은 1896년 6월 주미공사, 1899년 3월 주러공사에 임명되었다. 대한제국은 1900년까지 도쿄, 워싱턴에만 자국 공사를 주재시켰다. 당시는 의화단 사건 이후 대한제국과 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였다. 주러공사 이범진은 고종의 여전한 신임 아래 대한제국 외교 정책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종친정시문과에 합격한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은 종친 내부에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시종원경 이재순은 시위대 장교와 병사를 결집하여 고종 구출을 위한 춘생문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김홍륙의 암살시도 및 고종 독차사건의 배후였다. 궁내부대신을 여러 차례 역임한 이재순은 고종의 군주권 강화를 위해서 각종 정치적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대한제국 정치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는 핵심인물이었다. 이재순의 인맥은 충청도 출신자, 반면에 이범진의 인맥은 함경도 출신자가 주축이었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한 이범진과 이재순 계열은 군주권의 강화를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각각 러시아·프랑스와의 협력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지지기반이 달랐지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서는 상호 연대할 수 있었다. ●고종, 충성심 자극 위해 경쟁 유발… 갈등만 낳아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군주 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자신의 정치세력을 결집시켰다. 그런데 고종은 이들을 단일한 세력으로 통합시키지 않으면서 상호간 경쟁을 유발하여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자극했다. 이러한 상호 경쟁은 대한제국의 신속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권력 독점을 향한 지나친 대립만 초래했다. 처녀지를 개간하려면 겉으로 미끄러지는 쟁기를 쓸 것이 아니라, 땅속을 깊이 파고드는 플라우(쟁기)를 써야 한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정약용은 과연 주자학을 뒤엎고자 했을까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1855~1910)은 구한말 개혁이 신통치 않아지자 정약용(1762~1836)을 떠올리며, 그가 있었더라면 고종 황제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탤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광무개혁을 진행하던 고종 황제의 주변에 소수의 군왕주의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정치적 기반도 사상적인 힘도 크지 않았던 탓이다.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쓴 ‘정약용-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한길사 펴냄)는 자주 인용되는 정약용을 좀 깊게 읽어보자고 주문하고 있다. 성균관대 정치학과를 나온 함 교수는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중들이 읽기 쉽도록 역사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학자다. 이를테면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자음과모음 펴냄) 등과 같은 책이다. ‘한길사 인문고전 깊이읽기’ 시리즈 열한 번째인 ‘정약용’ 편에서 함 교수는 “당대의 천재이자 실학자로 신화화된 정약용을 객관적으로 다시 살펴봐야 한다.”면서 “다산이 실학의 대표선수라지만 그는 마르크스가 헤겔을 뒤집듯 주자학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깨끗이 뒤엎어버린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함 교수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중용자잠’, ‘맹자요의’ 등 다산 정약용의 방대한 저작을 꼼꼼하게 분석한 뒤 “정약용은 실학자라기보다 스스로를 유학자로 생각하고 행동한 인물”이었다며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손색 없는 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 과학자도 아니었다.”고 한다. 상식을 기초로 경전을 해석하고 세상을 바꾸려한 유학자였는데, 실사구시·이용후생 등의 단어와 어우러지면서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지만 고종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1901년에 간행토록 지시하면서 정약용의 이름값이 더 올라간 측면도 배제할 수 없겠다. 유학이 구닥다리 사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는 21세기에 다산 정약용을 읽을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을 수도 있겠다. 함 교수는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를 내팽개치고 새로운 사상에만 열중한다면 문화적 주변부, 사상적 식민지성을 지속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사상적 주체로서 한국적 사상의 모델을 만들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혁명가 인정받는 ‘김옥균’ vs 테러리스트 된 ‘홍종우’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역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북한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으로 변경했다. 한국에서 김옥균(金玉均·1851~1894)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봉건제 청산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전개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일본이라는 외세 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은 인정하는 편이다. 반면 이와 대비시켜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홍종우(洪鍾宇· 1850~1913)는 대다수 사람들이 갑신정변 주도 인물인 김옥균 암살범이자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다. 당연히 그 평가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갑신정변’ 3일천하… 실패한 비운의 개화파 김옥균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반역자로 처단된 고균(古筠) 김옥균. 권력과 세력을 잃고 망명지를 떠돌다가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능욕을 입은 비운의 개화파….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의 주체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군부대신 등 고위관료를 역임한 윤웅렬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가지로 꼽았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서 정권의 핵심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 회고담에서 실패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에 돌리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후일 김옥균은 일본을 ‘이용’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용당한 것이고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봉건제도 청산을 위한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게는 관대하거나 이를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와 친한 일본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 도야마(頭山滿), 고도(後藤像二郞) 등 ‘대아시아주의자’이자 한국 침략을 적극 옹호한 인물 일색이었다. 말년의 김옥균은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흥아지의견’(興亞之意見)에 기초해 이를 설명했는데, 그 골자는 ‘삼국제휴 서력방알’(三國提携 西力防?)을 통해 아시아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제창하게 된 것도 정신적 스승인 후쿠자와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흥아지의견’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서 과연 김옥균이 후쿠자와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삼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자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직후 그동안 일본에 망명했던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모두 귀국하여 복권되고 식민지 시기 대다수는 친일의 거두로서 식민지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에게는 유신(維新)을 처음 제창한 사람이고 문명의 선각자로서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융희 4년(1910) 7월 27일에 추증되었다. 김옥균 추종 세력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이전 활동을 과장·미화하였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와 조선 민중에 대한 무제한의 통제 명분을 김옥균이 주장한 삼화주의에서 찾았다. 김옥균의 삼화주의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숱하게 왜곡되어 갔다. ●홍종우, 실정 맞는 근대화 추구… 佛르피가로도 ‘개화인사’ 인정 경기도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86년 3월부터 프랑스행을 결심하여 1888년 나가사키와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어 1890년 12월 파리로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 유학 후 거의 2년 동안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홍종우는 프랑스어 번역본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기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존경과 애정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홍종우의 정체관이 그간의 시대 담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척사위정론자들과 다른 것이었으며, 민족 주체성과 민족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화 지상주의론자와도 구분되었다. 1893년 귀국을 결심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종의 밀명으로 도쿄에 온 이일직과 만났고, 그로부터 김옥균 암살을 제의받게 된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세계 대세와 동양 정세를 논하는 한편 그의 상하이행을 유도했고 상하이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은 결국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는 아관파천 이후부터다. 그는 국왕을 황제로, 세자를 황태자로 높이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건원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과 황제 즉위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홍종우는 대한제국 성립 당시 비서원승으로 활약한 이래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제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대외적으로 열강의 조선 이권 침탈에 대한 절대불가론으로, 내적으로는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내 상인의 몰락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인 보호주의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한러은행 설치 반대, 외상의 도성 개잔(開棧)과 내지행상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 및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어업 및 홍삼 사매(私買) 반대, 방곡실시, 광무연호 주조, 상권보호 등이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불평등 조계 개정, 만국공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근대적 지도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정부의 자립과 과감한 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자 그는 ‘개화당의 영수’ ‘조선독립의 혁명가’ 김옥균 암살범으로 다시 각인되었고, 근대화를 저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실상부한 개화인사였다. 프랑스 저명 신문 르피가로지도 그렇게 보고 있다. 잘 알다시피 홍종우는 프랑스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자 많은 부분 우리 실정에 맞는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그가 수구파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고 그 역시 수구적인 언급을 한 바 없다. ●편견 지우고 입체적으로 보아야 김옥균과 홍종우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같다 하더라도 양자 간에는 분명한 대립각을 갖고 있었다.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서구에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선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현실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부재 상태에서 문화적 전통과 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 및 일본의 제도를 무차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나라의 발전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김옥균처럼 문명개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제국주의 이웃 강국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방식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자칫 국가를 상실할 위험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갑신정변 당시와 지금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조재곤(동국대학교 연구교수)
  •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7월16일부터 18일까지 쓰시마에 다녀왔다. 제주도보다 가까이 있는 이 섬은 과거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풍광이 좋은 고요한 섬으로 남아 있다. 쓰시마 이즈하라(嚴原)의 슈젠지(修善寺)에서 고 황수영 선생께서 발의해 세운 ‘대한인 최익현 순국지비’를 보고는 울적해졌다. 정토종의 이 절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는데, 순국비는 그 납골원 어구에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관광 안내문이나 답사 보고문은 대개 최익현이 슈젠지에서 순국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최익현이 함께 갇힌 문생들에게 치포관을 만들어 쓰라고 권했던 엄수영(嚴戍營)은 아니다. 최익현은 엄수영에 갇혀 있으면서 문생들이 상투를 드러낸 채 염발질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상투를 싸맬 크기의 검은 베 조각을 구해 머리를 덮으라고 했던 것이다. 엄수영은 이즈하라에 있던 병영이었고, 슈젠지는 최익현의 시신이 일단 안치됐던 절이다. 광무 10년인 1906년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의 감옥에 갇혔다. 최익현은 일본의 문물이 크게 흥성한 것을 눈으로 보았고, 일본의 온순한 통역과 보병들을 만나 보고 타국에도 이웃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최익현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단식을 했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쓰시마로 조선의 쌀과 보약을 보내라고 훈령을 내렸다. 일본 병사들이 부산에서 쌀을 가져오자, 최익현은 사흘 만에 일단 단식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울화증과 풍토병 때문에 반 년 뒤에 병사했다. 슈젠지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최익현의 시신은 부산 초량으로 운구됐다. 1907년 1월 11일의 일이다. 나는 최근 ‘국왕의 선물’을 집필할 때 최익현이 고종의 뜻을 따라 대원군을 탄핵해 고종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지식인들과는 소원해져서 의병을 일으킬 때 호응이 낮았던 사실을 적었다. 위정척사의 논리는 같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적 파벌 의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한편 쓰시마 와니우라(鰐浦)의 한국전망대에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 2월 5일 정역과 부역이 탄 배가 조난하면서 112명이 사망한 사실이 밝혀져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쓰시마 도주 소게(宗家)의 문서에서 실려 있는 기록을 근거로 했다면서, 격군은 물론 성씨 없는 많은 종자들의 이름을 추도비 앞의 부비(副碑)에 하나하나 새겨 두었다. 거기에는 112명 이외에 기록에 없으나 시신을 수습한 한 사람의 이름을 추기해 두었다. 그런데 ‘숙종실록’의 숙종 29년(1703) 2월 19일(갑오)의 기록에 “일본 도해선이 침몰하여 역관 한천석 등 113명이 모두 빠져 죽었는데,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을 별도로 거행하게 하였다.”라고 돼 있다. 곧 한천석 등 113명은 계미사행 때 풍기포(?崎浦)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왜인이 우리 측의 지참 물품을 조사하려 하자 한천석 등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크게 일어나 조난을 당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거늘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을 번역한 책에는 계미를 인조 21년 즉 1643년으로 잘못 설명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는 와니우라에 우리 통신사들이 오가며 조난자들을 제사 지낸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추도비가 선 것은 저들의 호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공동체든 공통의 역사 기억을 가질 때 비로소 서로 결속할 수 있다. 역사 교육은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 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국 학교교육에서 역사 과목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게티즈버그의 전몰자 수를 어린 학생들에게 외우게 할 만큼 자잘한 사실까지도 공통의 기억으로 형성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쓰시마는 왜구의 거점이었고, 동아시아 감합무역의 중개 지점이었으며, 교린외교의 흑막 지역이었다. 우리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섬에 대한 역사 기억들을 뚜렷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 伊국왕에 보낸 ‘고종 비밀친서’ 공개

    伊국왕에 보낸 ‘고종 비밀친서’ 공개

    고종황제가 1903년(광무 7년) 11월 이탈리아 국왕에게 비밀리에 ‘중립선언 지지’를 요청하며 보낸 친서가 발견돼 2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고종황제가 러일전쟁 개전(1904년 2월) 직전인 1904년 1월 전 세계에 ‘전시 중립선언’을 타전한 것보다 이른 시점이다. 고종황제는 1903년 11월 23일 경운궁에서 “근래에 극동의 만주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한다는 소문과 나라 간에 시끄러운 기미가 있으니…(중략) 우리나라는 국외의 문제에 대해서 중립을 보전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친서를 써서 주한 이탈리아 공사를 통해 이탈리아 국왕에게 전달했다. 열강들 사이에서 스위스처럼 영세중립국과 같은 지위를 확보하려는 고종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종황제의 공개적인 ‘전시 중립선언’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전 세계에 타전됐다. 하지만 준비는 1903년 여름부터 해온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번에 발견된 친서는 이를 입증할 새로운 실물자료다. 또한 중립국 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러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불법적으로 일본군을 상륙시키고 서울 한복판까지 진주한 것은 엄연한 국제법 위반임을 입증하는 아주 중요한 사료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임차해온 이 친서는 7월 1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로세티의 서울’ 특별전에서 공개된다. 카를로 로세티는 110년 전 서울에 주재했던 제3대 이탈리아 영사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새 문화관광연구원 원장에 박광무씨

    문화체육관광부는 22일 신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원장에 박광무(58)씨를 임명했다. 임기는 3년. 박 신임 원장은 행정고시 30회 출신으로 문화부 출판신문과장,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운영단장, 문화부 문화예술국장, 한나라당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수석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 우리집도 혹시 ‘방사능 벽지’?

    우리집도 혹시 ‘방사능 벽지’?

    서울 노원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방사능 아스팔트’에 이어 ‘방사능 벽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29일 방사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모임인 ‘차일드 세이브’에 따르면 한 회원의 집에 바르고 남은 벽지에서 기준치의 최소 6배가 넘는 방사선량이 측정됐다. 조사 결과 시간당 1.942마이크로시버트(μ㏜), 연간 약 17밀리시버트(m㏜)가 나왔다. 다른 회원에게서 받은 같은 벽지 샘플에서도 연간 약 17.8m㏜의 방사선량이 검출됐다. 벽지를 펼쳐놓고 쟀을 때에도 연간 약 6.2m㏜가 측정됐다. 일반인의 연간 피폭허용치인 1m㏜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방사능을 다루는 근로자의 피폭허용치도 피폭방지 장구를 갖춘 상태에서 연간 20m㏜다. 해당 벽지는 D벽지가 생산한 ‘스프링비비드’ 벽지로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고 음이온이 나온다는 기능성 벽지다. 제보한 회원이 5년 전에 사용하고 남은 벽지였다. 차일드 세이브는 이 벽지를 프랑스의 민간 방사능연구소인 ‘아크로’에 보내 보다 정밀한 측정을 의뢰했다. 아크로 측이 고순도 게르마늄(HPGe) 감마검출기로 벽지 샘플을 분석한 결과 ,자연방사능 핵종 중 토륨이 g당 1.1베크렐(㏃), 라듐이 1.3㏃, 악티늄과 비스무트 각각 8㏃ 등 모두 합쳐 g당 31㏃ 가량의 방사능 물질이 함유돼 있었다. 인공방사능 핵종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크로 측은 “벽지에 쓰인 안료에 방사능 물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면서 “이 벽지는 사용하지 말고 당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원자력안전법은 방사능 농도가 10Bq을 넘는 물질은 중저준위 방사능 폐기물로 처리토록 규정하고 있다. 경주핵안전연대 운영위원장인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는 “고준위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높은 수치가 나온 것은 심각하다.”면서 “원적외선 방출을 위해 첨가한 광물질 때문인지 또는 형광무늬 때문에 바른 염료 때문인지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주거 공간에서 접하는 ‘방사능 벽지’가 길을 다니며 스쳐 지나가는 ‘방사능 아스팔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미나 단국대 의대 교수는 “방사능에 더욱 취약한 유아, 환자, 임신부 등이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벽지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차일드 세이브 회원들은 “아이들이 만질 때 방사능 물질이 묻어나오거나 흡입할까봐 걱정”이라며 불안해하고 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측은 “샘플을 정밀하게 살펴봐야 하는 측면이 있지만 벽지에서 17m㏜가 측정됐다면 당국의 조사가 요구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해당 벽지를 생산한 D벽지는 현재 부도를 겪고 있어 몇 달 전부터 공장 가동을 멈춘 상태다. 직원들도 거의 근무를 하지 않아 벽지에 대한 해명을 들을 수 없었다. 김진아·신진호기자 jin@seoul.co.kr
  • [열린세상] 덕수궁,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성찰 공간/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열린세상] 덕수궁,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성찰 공간/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 갔지만 /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이문세의 대표곡 ‘광화문 연가’는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우리 귀와 입에 익숙한 국민가요다. 돌담길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있을 만큼 우리들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 속 궁궐의 이름은 덕수궁(德壽宮)이다. 그런데 지난 2일 덕수궁이란 호칭이 일제 잔재이니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화재청이 명칭 변경 가부를 놓고 공청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덕수궁이란 이름을 쓰는 한 나라를 빼앗긴 황제의 울분, 망국의 역사, 식민지 지배의 흔적, 해방 이후 무원칙하고 무능한 문화유산 관리 정책만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면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역사, 외세에 둘러싸여 압박을 받으며 나름대로 그것을 물리치려 진력하던 고종과 그 시대 사람들,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시도하게 된다.” 명칭 변경의 당위성을 말하는 쪽의 주장이다. 이들은 고종이 영·정조 때 나온 군민(君民)일체의 민국(民國)이념을 계승해 자주적 근대화를 이끈 유능한 개명군주이며, 대한제국은 주체적 산업화를 모색한 근대국민국가로 호평한다. 대한제국의 붕괴 이유도 “무능·무력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광무개혁이 뜻밖의 성과를 올리자 이를 경계한 일본이 러일전쟁이란 비상수단을 동원해 국권을 강제로 앗아갔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연 그럴까? 의문이 맴돈다. 1896년 2월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전 고종이 정사를 돌보던 정궁(正宮)은 경복궁이었다. 1년여에 걸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끝낸 고종은 어떤 이유로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까? 왜 좁디좁은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삼고 강제 퇴위 이후 1919년 승하할 때까지 거처했을까? 담장 하나 사이로 러시아공사관과 미국공사관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에 유사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지하 비밀통로도 뚫어 놓았었다. 덕수궁에 머물며 고종은 러시아 힘에 기대 일본을 견제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을 펼치는 한편 제정 러시아를 모델로 대한제국을 세웠다. 1899년 8월 17일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에 의하면, 황제는 육해군 통수권·입법권·행정권·관리임명권·조약체결권 등 모든 권한을 독점한 전제군주였다. 그때 고종은 영조와 정조가 아닌 러시아의 차르가 되고 싶어 했다.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미국과 영국 두 나라가 일본과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과 영일동맹(1905년 8월)은 ‘광무개혁’을 호평하는 이들이 그리는 자화상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고종이 거처한 경운궁이 러시아·미국·영국 공사관 옆이었다는 사실도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의심하게 한다. 사실 덕수궁이란 명칭도 일제가 붙인 것이 아니다. “덕수궁이라 이름 붙인 이는 순종황제와 신하들이며, 덕수(德壽)라는 명칭에는 태황제인 고종을 잘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름을 바꿀 이유가 없다는 쪽의 설명이 합리적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가 머릿속을 맴돈다. 우리가 앞서 산 이들의 삶을 거울삼아 자신을 가다듬듯이, 국가도 그 진로를 비출 등대가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열강의 이해가 충돌하는 국제정치의 한복판에 놓인 우리의 생존전략은 균세(均勢)와 자강일 수밖에 없다. 한 세기 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만으로 왕조의 생명을 이으려 했던 고종은 쓰라린 실패의 역사를 쓰고 말았다. 남의 힘에 기대어 생존하려 했던 한 세기 전의 슬픈 역사는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는 견실한 자강이 결여된 외교적 책략만으로는 다시 돌아온 열강 각축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어려움을 잊지 않도록 일깨우기 위해 우리가 날마다 맛을 보아야 할 쓰디쓴 쓸개와 누워 자야만 할 섶나무 더미이다. 그렇기에 치욕의 역사가 쓰인 현장으로 덕수궁은 성찰의 역사공간이지 분칠할 미화의 대상이 아니다.
  • 독침테러 기도 탈북자 기소

    독침테러 기도 탈북자 기소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상호)는 6일 대북전단을 살포해 온 보수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를 독침으로 살해하려 한 탈북자 출신 전 ㈜남북경협 이사 안모(45)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특수잠입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또 안씨로부터 압수한 독침 1개, 만년필 독총과 손전등 독총 1정씩, 독약 캡슐 3정 등을 공개했다. 독침 등 암살무기가 국내에 반입되기는 1997년 최정남 부부간첩 사건 이래 14년 만이다. 안씨는 지난달 3일 오후 3시 서울 지하철 신논현역 3번 출구에서 같은 탈북자 출신인 박 대표를 독침으로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안씨는 몽골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북한 정찰총국으로부터 독침 등을 건네받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결과, 독침은 길이 132㎝, 무게 35g의 볼펜 모양으로 뚜껑을 다섯 번 돌리면 11㎜의 독이 묻은 침이 튀어나온다. 손전등형 독총은 길이 165㎜, 무게 263g이며 안전장치를 빼고 버튼을 누르면 독약 성분이 발사된다. 유효 사정거리는 10m다. 독약 캡슐은 청산가리보다 독성이 3배 이상 강해 50㎎만 복용해도 사망에 이르는 물질로 만들어졌다. 안씨는 남북경협 사업을 위해 몽골 주재 북한 상사원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에게 포섭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함께 망명한 전 여광무역 대표 김덕홍씨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찰총국은 김 전 대표에 대한 신변보호가 강화돼 암살이 어렵자 테러 목표를 박 대표 등 탈북자 출신 반북단체 간부로 바꾼 것으로 조사됐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씨줄날줄] 상수(上壽)/박홍기 논설위원

    중국 후한 때 명장 마원이 반란군 진압을 위해 출정할 뜻을 밝히자 광무제가 말렸다. “나이가 너무 들었다.”며 주저하자 마원은 “비록 예순둘이지만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으니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훌쩍 말에 뛰어올랐다. 광무제는 “확삭(矍鑠·늙은 이가 기력이 정정하고 몸이 잼)하도다.”라며 허락했다. 마원은 평소 말해온 “노당익장(老當益壯)”을 실천해 보인 것이다. 후한서 마원전에 나오는 ‘나이가 들수록 기력과 의욕이 왕성해야 한다.’는 노익장의 유래다. 평균 수명이 길어져 요즘엔 70세 고희(古稀)쯤 돼야 노인 축에 낄 정도다. 세계보건기구(WHO)의 ‘2011 세계보건통계 보고서’는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기대수명을 80세로 잡고 있다. 남성은 76세, 여성은 83세다. 때문에 77세 희수(喜壽), 88세 미수(米壽), 91세 망백(望百) 등 나이를 헤아리는 한자어도 어렵지 않게 보고 들을 수 있다. 특히 나이를 상중하로 나눌 때 최상이라는 상수(上壽), ‘그 나이가 되기를 바란다’는 기원지수(期願之壽)를 일컫는 100세도 낯설지 않다. 그만큼 오래 사는 데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노익장을 과시하는 늙은이들이 세계적으로 적잖다. 나치 점령 때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던 프랑스인 스테판 에셀은 93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세계를 향해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며 ‘분노’를 외치고 있다. 그의 35쪽짜리 작은 책 ‘분노하라’는 프랑스에서 200만부나 팔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사흘 뒤면 만 100세가 되는 일본인 시바타 도요가 지난해 3월 발간한 첫 시집 ‘약해지지 마’는 올 1월 100만부 판매를 기록했다. 104세의 현직 판사도 있다. 1962년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 종신직인 캔자스주 연방지법 판사로 지명된 웨슬리 브라운은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지금도 법정에 나와 재판하는 등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통계청이 그제 발표한 ‘100세 이상 고령자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일 현재 100세 이상 노인은 1836명이다. 5년 전에 비해 무려 91%나 늘었다. 절제된 식생활과 낙천적인 성격, 규칙적인 생활 등이 비결이라고 한다. 의료시설 및 의술 등 사회 환경 개선도 한몫 하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노인 복지에 한층 신경써야 할 때다. 노인들의 삶이 즐겁고 따뜻한 사회는 모두가 꿈꾸는 세상 아니겠는가. 시바타가 ‘…난괴로운일도/있었지만/살아 있어서 좋았어/너도 약해지지 마’라고 읊조렸듯 긍정의 힘이 넘치는 그런 세상.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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