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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골」등 재현,문화ㆍ휴식공간으로/「남산가꾸기」 어떻게 추진하나

    ◎경관 가린 아파트ㆍ대형건물 철거/민속촌 수목원 등 확충,학습장화/일제땐 왜인촌 들어서… 60년대 개발여파 크게 훼손 서울시가 17일 발표한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은 훼손된 남산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정부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민들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총면적 89만6천평에 이르는 남산은 수도 중심부에 자리잡은 대형자연공원으로 60년대이후 개발바람을 타고 각종 건물이 들어서는 바람에 훼손돼 중병을 앓아왔다. 특히 정보기관ㆍ군시설 등이 들어서 시민들의 접근이 어려웠으며 접근이 용이한 동서쪽이 사실상 차단돼 전체공원면적의 절반가량이 진입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에따라 시의 이번 계획은 늦은감이 있지만 시민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을 것으로 보인다. 시의 이번 계획은 지난 6월 노태우대통령의 남산 복원계획 수립검토지시와 용산 미8군 시설이전계획 등 여건성숙에 따라 윤곽을 드러낸 것으로 오는 94년 서울 정도 6백년 기념사업과 연계,추진된다. 시는 이같은 계획에 따라 세부추진방안을 마련,남산을 명실상부한 시민휴식공간으로 가꿀 계획이다. ▷잠식경위◁ 서울의 상징인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 북쪽 기슭인 회현ㆍ필동 일대와 서쪽 기슭은 후암동 일대에 외인촌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그뒤 해방과 6ㆍ25동란으로 인한 혼란기를 거치면서 월남민들의 판잣집이 산허리까지 들어서 크게 훼손됐으나 실질적으로 경관이 훼손된 것은 60,70년대 10여차례이상 갖가지 명분으로 건물들이 들어선 때문이다. 지난 57년 9월 용산구 이태원동 산 1의 7 일대 3만3천㎡가 외국인 주택단지조성 명목으로 공원지구에서 풀린 것을 비롯,62년 7월 타워호텔 및 자유센터 건립을 위해 장충동 산 5의 19 일대 12만2천㎡,63년 6월엔 월남피난민 주택지불하로 12만1천㎡,65년 8월엔 동국대 건립부지 2만7천㎡가 공원지역에서 각각 해제됐다. 또 67년 5월과 8월엔 군장교 주택건립및 불량주택 재개발을 위해 이태원동 258의 48 일대 5만7천㎡와 신당동 432 일대 11만㎡가 풀렸으며 69년 1월과 5월 한남동 726의 180 일대 3만8천5백㎡와 이태원동 산 1의 7 일대 4만7천㎡가 이화여대병원부지와 외인아파트 건립부지로 각각 떨어져 나갔다. 특히 70년대 들어선 재벌들이 호텔건립에 나서면서 대규모로 남산이 잠식됐다. 71년 3월엔 한남동 747의 8 일대 7만4천㎡에 하이아트호텔이,75년 5월엔 장충동 201 일대 12만㎡가 신라호텔로 둔갑되기도 했다. ▷추진방향및 사업내용◁ 시는 「남산위에 저소나무」로 상징되는 원래모습으로 남산을 복원해 자연환경을 회복하고 시민들이 걸어서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잠식시설을 이전시키고 주변경관관리를 해나갈 계획이다. 이번 계획의 핵심적 사항은 이곳에 있던 국가안전기획부를 비롯,군부대 미군통신대의 이전과 외국인아파트ㆍ남산 맨션아파트ㆍ외국인 임대주택의 철거등 공원구역내 부적격 시설물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수방사가 올해 이전되며,주공외인아파트 2동,남산맨션 1동,주공외국인 임대주택 43동,개인주택 13동을 92년까지 철거한다. 93년엔 안기부 이전을 추진하고 미군통신대와 외국공관 9동은 미8군 이전과 연계,96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외국인아파트및 맨션아파트는 지난 72년에 지어져 92년이면 20년째가 돼 철거가 가능해진다. 남산 맨션아파트는 당초 외자를 도입,관광호텔을 지으려다 외국기관 주택문제해결을 위해 불법용도 변경된 대표적인 불법건물로 남산경관을 가로막고 있다. 태국ㆍ콜롬비아ㆍ페루ㆍ멕시코대사관 등과 콜롬비아 등 5개국 관저도 외무부와 합의,이전이 완료되면 공원 남쪽인 이 지역은 생태교육장ㆍ수목원ㆍ체육시설로 활용된다. 올해말 이전하는 수방사 자리에는 인근에 있는 「한국의 집」과 연계,옛 양반촌인 민속마을 「남산골」을 재현시켜 민속촌으로 꾸밀 예정이다. 시는 또 오는 93년이전 목표인 안기부는 기존 건물을 도서관ㆍ시사자료관ㆍ전시관으로 쓰고 공터는 조경시설을 하는 한편 남산 1호터널 북쪽끝 차폐시설을 철거할 방침이다. 이와함께 현재 남대문쪽 뿐인 진입로에서 후암동ㆍ한남동ㆍ장충동ㆍ필동 방면의 5개 도로축을 개설,시민들이 걸어서 쉽게 공원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보행안내표지판도 설치할 계획이다. 후암동축은 1백6만평에 이를 용산공원과 연계시킬 계획이다. ▷문제점◁ 안기부를 비롯,이를 이전대상 시설물이 모두 옮겨가더라도 남산주변은 순환도로를 경계로 외곽에 하이아트ㆍ신라ㆍ힐튼ㆍ타워호텔 등 고층건물과 남산등 대한적십자사 건물들이 경관을 가로막아 전망좋은 도심공원으로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또 힐튼호텔 양쪽 토지개발공사의 도심재개발지역에 서울시가 이번 조치와는 달리 지난 5월과 7월 18층및 20층 빌딩이 건축허가를 내준 상태에 있다. 특히 이번 계획이 차질없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확고한 뒷받침이 전제돼야 하며 순환도로위에 위치한 일부 학교의 이전추진과 남산케이블카의 철거도 검토돼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 노대통령 방미외교 3박4일 취재비화

    ◎“정상회담장 극비 예약자는 고르비”/소 겉으론 “덤덤” 안으론 “치밀한 준비”/라이사도 한인 점포서 “계산된 쇼핑”/성과 없었으면 두 대통령 기념촬영 못했을 듯 노태우대통령의 지난 3박4일간에 걸친 샌프란시스코ㆍ워싱턴 일정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전후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인 분단 한반도를 어느날 갑자기 화해와 협력의 세계물결의 중심부에 실어 놓았다. ○끝난 뒤에 겨우 촬영 노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뒤 주미대사관저에서 수행기자단,워싱턴주재 한국특파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우리가 세계변화의 중심에서 세계의 변화를 만들고 있다』 『힘이 없어 강대국의 분단을 감수해야 했던 과거는 가고 이제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우리가 개척하고 결정하는 시대가 왔으며 그 누구도 우리의 가는 길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 4일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신관 23층 스위트룸에서 있은 노­고르비 대화는 아직도 많은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정상간의 만남은 물론 모든 국가간의 회담은 외교관행상 포토세션(기념촬영의 의전절차)은 언제나 회담직전에 이뤄진다. 그러나 노­고르비 대좌의 기념촬영은 회담이 끝난뒤 가까스로 이뤄졌다. 한소 양측의 공식 기록사진사 1명씩 2명이 회담시작 전부터 회담장 바깥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소련측 경호원들은 회담이 시작되어도 촬영을 허용치 않았다. 1시간여에 걸친 회담이 끝나자 그들은 소련측 사진사만 들여보냈다. 이에 우리측 배석자 한 사람이 『우리 사진사는 왜 안 들어 오느냐』고 재촉하자 우리측 촬영사를 들여보내 역사적인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우리 사진사가 두 대통령에게 악수하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노대통령은 고르비에게 손을 내밀었고 고르비도 미소를 지었으며 노대통령은 다시 왼손으로 고르비의 허리를 감싸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소련측은 두 정상의 만남을 사진기록으로 남기는 데 반대했으나 우리측은 「사진 안 찍으면 회담은 무효다. 누가 그런 회담을 믿느냐」고 완강하게 버텼다는 것. ○총영사관저등 주장 우리측 수행원의 한 사람은 노­고르비회담의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면 그들은 회담후에도 기록촬영을 거부했을 지 모른다고 피력. 소련측은 겉으로는 한소 정상회담이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듯 회담직전까지도 회담성사가 유동적인 인상을 주려고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노대통령과의 회담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우선 회담장소문제인데 소련측은 노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전날까지도 샌프란시스코 소련총영사관이나 총영사관저를 주장했다. 우리는 「미국내 소련영토」인 총영사관은 불가하다면서 제3의 장소를 주장했다. ○23층 스위트룸 추적 우리 실무팀들은 온갖 정보채널을 동원,회담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페어몬트호텔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원수급이 사용하는 스위트룸의 예약상황을 점검했다. 4개의 스위트룸은 노대통령 숙소(본관 7층과 그 위층)와 IMF총회에 참석중인 미 재무장관,스위스은행연합회장의 숙소 등으로 3개는 예약자가 파악이 되었으나 나머지는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호텔측이 극비에 부친 나머지 한개의 스위트룸 예약자는 바로 고르비였다. 소련측은 회담장소를 고르비의 숙소인 소련 총영사관저나 총영사관을 주장하면서도 그이전에 이미 노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신관 23층 스위트룸을 예약해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당초 노­고르비회담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됐던 4일 하오 4시무렵 고르바초프대통령 부인 라이사여사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는 한국인 점포에 우연히 들르는 것처럼 해 한국상품을 사면서 「보드카는 얼마나 팔리느냐」고 묻는등 한국에 대한 친근한 제스처를 보였던 것도 그 실례가 된다. ○소 외무부 소외된 듯 소련수뇌부의 의사결정은 고르바초프대통령과 대통령궁의 핵심막료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이번 한소정상회담 추진도 거의 막판까지 고르비와 두 핵심참모등 3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이 핵심참모는 이번 회담에 배석한 5명의 소련측 인사가운데 두 사람이라는 것. 배석인사는 마슬리코프 경제담당정치국원,프리마코프 대통령위원회위원(전 연방최고회의의장),도브리닌 대통령외교고문(전 주미대사),체르니아예프대통령안보보좌관,말케비치 연방상공회의소장 등인데 도브리닌과 체르니아예프가 그 두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도브리닌은 30년간 주미대사를 했기 때문에 서방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체르니아예프는 골수당료 출신으로 고르비와는 40년동안 친분을 유지했으며 흐루시초프때부터 개혁을 주장한 인물. 안보보좌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대통령제로 체제를 바꾸면서 신설한 최근접보좌관 4명 가운데 1명으로 정식 직함은 자본주의국가담당 대외정책보좌관인 것으로 전해졌다. ○수준높은 화술 구사 이번 회담에 셰바르드나제외상이 배석에서 빠진 것은 유럽지역의 국가와 외상회담이 사전에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한소 정상회담이 한소 외무성도 모르는 가운데 추진됐기 때문에 외무성이 외상회담 일정을 따로 잡아놓았을 것이란 분석들. 노대통령은 이번 고르비와의 회담때 매우 수준높은 대화술을 구사,고르비와의 친근미를 돋보이게 했다. 회담장소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사실을 들어 한소 두 나라가 태평양국가임을 자연스럽게 지적했고 방한공연했던 레닌그라드교향악단 지휘자의 「고르비대통령은 너무 바빠 우리 교향악단공연을 관람한 적이 없으나 한국의 대통령은 관람해줘 고맙다」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대소우의를 표시. 노대통령은 고르비와의 회담에 대비,러시아 속담 슬라브 속담을 섭렵했고 고르비대통령도 아무런 서류파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을 공부하고 임했다는 것. 이번에 노대통령을 수행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대통령이 어느새 이렇게 커져버렸나」하는 것이었다.
  • 한ㆍ소 정상회담 어떻게 추진되나

    ◎「태백산계획」 마무리… 부산한 청와대/한국,“동등관계” 주장… 장소싸고 진통/회담 결과는 따로 「언론발표」 갖기로 역사적인 4일의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과 6일의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3일 미국으로 떠나는 노태우대통령의 방미계획(암호명 태백산계획)을 준비해온 청와대는 출국 하루전인 2일 대부분의 작업을 일단 마무리. 그러나 청와대당국은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의 회담에 따른 배경설명은 하면서도 회담의 시간ㆍ장소ㆍ의제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계속 함구로 일관. ○…한소간에 막바지까지 절충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문제는 회담장소. 회담장소는 소련측이 샌프란시스코의 소련총영사관을 주장한 반면 우리측은 페어몬트호텔로 주장. 한소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양국간 실무협상은 고르바초프가 미국에 도착한 지난달 30일 워싱턴에서 이정빈외무부제1차관보와 고르바초프의 외교고문인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주미대사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고. 소련측은 보안,경호상의 이유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이나 총영사관관저를 주장하고 있으나 한국측은 양국이 출발부터 대등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소련의 외교특권(총영사관이긴해도 대사관과 같이 치외법권을 인정해주는 것이 외교관행)이 미치는 총영사관은 곤란하며 제3의 중립적인 장소를 선정해야 한다고 완강히 반대. 제3의 장소로는 고르바초프가 한소 정상회담에 앞서 미국경제인을 상대로 연설을 하게되고 또 1948년 유엔창립총회가 열린 유서깊은 페어몬트호텔내의 특별회의실이 적절하다는 게 우리의 주장. 이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스탠퍼드대학도 한때 거론되었다고. 소련실무팀은 한국의 이같은 완강한 태도때문에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직접 결정을 내리도록 건의했다는 것. 한국측은 특히 총영사관에서의 회담이 자칫 구한말 고종의 아관파천의 기억을 국민들에게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 매우 신경을 쓰는 눈치. ○…회담시간은 4일 하오 4∼6시사이(현지시간)가 될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알려진 당일일정 가운데 비어있는 시간대는 정확히 하오 4시15분부터 5시30분까지.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이날 상오에는 레이건 전 미대통령과 조찬을 하고 한소 정상회담직전에는 미경제인 2백명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데 2천여명의 방청신청이 있어 페어몬트호텔내의 폐쇄 TV를 활용하게 된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당초 5일 귀국도중 캄차카반도에기착,대아시아정책과 관련,중요연설을 할 예정이었으나 이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안다면서 한소 정상회담의 시간도 가변적인 요소가 많다고 전망.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 시간도 하오 7∼7시30분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것도 유동적이라는 것. 회담후 양국정상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지 않고 대신 개별적인 언론발표문(Press Release)을 통해 회담결과를 발표하기로 이미 합의돼 있다고. ○…노대통령과 부시 미대통령과의 회담은 6일 상오 10시 백악관에서 약 45분간 진행될 계획이라고. 부시대통령은 노대통령과의 회담이 결정되기 이전에 이미 이날 그리스수상ㆍ유엔사무총장ㆍ콜롬비아대통령 등과의 회담일정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조찬회담이 고려됐다가다른 일정을 밀치고 다시 상오회담으로 낙착되었다고. 한편 청와대 당국자는 국내언론이 「한소 양국정상의 연내 교환방문 가능성」 「대소 대규모경협차관 검토」 등을 보도하고 있는 데 대해 『정상회담에서 상호초청의사는 표할 수 있지만 시기문제 등은 수교이후에 양국 외교경로를 통해 얘기할 성격일 뿐만 아니라 아직은 그같은 추측을 할 단계가 아니다』 『소련측에서 소련내 소비제품의 공급을 원활히 하는데 한국측이 기여해주었으면 하는 타진이외에 일체 차관공여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다』고 극구 부인.
  • 청와대 경내 대통령 관저 신축지/“천하명당” 4백년전 표석 발견

    ◎공사중 우연히 드러나 「풍수설」 화제로/화강암 암벽에 「천하제일 복지」 음각/글씨크기 가로ㆍ세로 50cm… 해서체로/정도전도 “명당” 지목… 낙관자리 「연릉 오거」 규명이 열쇠 청와대 구내 대통령관저 신축공사장 바로 뒷산 암벽에 천하 명당자리라는 표석이 최근 발견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표석은 수직으로 된 화강암 암벽을 깍아 가로 2m50cmㆍ세로 1m20cm의 암벽면에 「천하제일복지」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글씨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50cm,획의 굵기는 9cm인데 해서체로 씌어있다. 낙관자리에는 가로 세로 12cm 크기로 「연능 오거」라고 새겨져 있어 이 표석의 글을 쓴 사람이 아닌가 여겨진다. ○획 굵기는 9cm 정도 청와대측은 지난 20일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인 청명 임창순옹을 초빙,1차 감정한 결과,글을 새긴 연대는 지금부터 3백∼4백년전인 조선조 중기쯤으로 추정되며 글씨체로 미뤄 중국 청대의 서체 영향을 받은 것같다는 의견을 들었다. 「연능오거」의 인적사항이 규명되면 더 정확한 내용이 밝혀질 것으로 보이나조선조때 서예대가로 오거라는 인물이 없는것 같고 연능이 아호인지 아니면 연능에 사는 오거인지도 불확실하다. 오거가 명필이 아니라면 조선초기나 중기의 풍수지리에 밝은 역학가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는 터에 「천하제일복지」라는 선인들이 새긴 표석이 기초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은 무언가 길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표석이 발견된 암벽은 현 청와대 본관에서 동북쪽으로 계곡을 지나 1백50m 떨어진 가파른 지역인데 암벽 전면이 나무로 가려져 있는데다 이 쪽에는 길이 없어 그동안 전혀 눈에 띄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작년 5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으로서 총독관저로 사용해온 현 청와대 건물 대신에 대통령 집무실(현 본관의 서북쪽 1백50m)과 함께 관저를 이곳에 새로 착공하면서 최근 공사를 위한 배수로를 치다가 이를 발견한 것이다.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는 북악의 언저리는 본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이태조가 서울로 천도할때부터 궁터로 점지되었던 곳이다. 한양천도 당시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 자락에 동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한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남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주장,이태조가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국 지금처럼 북악산의 정남쪽에 경복궁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한양천도 당시 풍수지리에 따른 주산(터를 등지고 있는 산) 결정과 도읍의 좌향 논의는 차천로의 오산설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학이 한양의 세를 보며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북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ㆍ백호를 삼으라고 하니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남면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따라서 궁궐은 임(서북서)좌병(남쪽)향하여 백악현무,인왕백호,낙산청용으로 해야 한다』 청와대 주변 터는 한양천도 이전인 이미 고려 숙종때 지기가 쇠해가는 송도의 왕업을 연장하기 위한 이궁터로 선택됐다. 지금부터 9백28년전인 숙종9년(1062)에 이궁을 지었으나 1백50년이 채 못된 고종19년(1210)에는 강화천도와 더불어 폐기되었다. 조선조에 들어 이 자리가 경복궁 후원으로 단장된 것은 세종8년(1426)이었으며 서현정ㆍ취로정ㆍ관전ㆍ충순당ㆍ융문당ㆍ융무당ㆍ경농제ㆍ연무장ㆍ과거장 등을 설치했다. 그후 국운의 흥망에 따라 성쇠를 함께해 임진왜란 이듬해(1593) 경복궁의 소실로 황폐화되었으며 고종8년(1868)에 경복궁이 재건되자 이곳 또한 과거ㆍ열무ㆍ근농의 행사 등이 치러지는 후원으로 옛 영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의 본격적인 조선왕실 유린으로 이곳도 훼손돼 융문당ㆍ융무당 할것 없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조선조때 건물도 남아있는 것은 약간 자리를 옮겨 일부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별채와 같은 20평 남짓한 침유각과 2평 가량의 오운정이 옛날의 향취를 다소나마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일제 식민통치의 제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남차랑)가 착공,중일전쟁으로 한차례 공사를 중단하는 곡절을 겪으며 착공 2년반만인 1939년 9월 준공을 했다. 당시 미나미는 남산의 왜성대,용산의 사택,현 적십자병원 자리의 임시사택 등을 옮겨가며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사택 신축 부지를 물색하던 중 경복궁의 후원으로 경복궁이 눈아래 보이는 이곳을 택했다. ○청대 서체 영향 받아 일제는 조선 주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리기 위해 그 전면에 총독부 청사(현 국립박물관ㆍ구 중앙청)를 지은데 이어 그 후면에 총독관저를 지어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에 있어 용맥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항설에 의하면 일제는 경성부 청사(현 서울시청)­총독부 청사­총독관저로 이어지는 남향축이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할 당시 북악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왕궁을 건설한 풍수의 맥을 압살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공중에서 보면 경성부 청사건물이 「대」자형,총독부 청사가 「일」자형이고 총독관저 건물 구조가 「본」자형으로 돼있어 동대문쪽에서 서대문쪽을 바라보면서 이를 읽어보면 「대일본」으로 읽혀진다는 항담도 있다. 그러나 풍수에 밝은 술가들 사이에는 당시 일제의 총독관저 자리 물색에 징발되었던 조선인 풍수지관이 본래 「임좌병향」의 북악의 용맥과는 약간 비켜나 있는 현 위치를 잡아주어 그 건물에 기거하게 되는 총독들이 망하도록 했다는 구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알수 없지만 이번에 발견된 표석이 북악의 혈(풍수에 있어 음양이 합해지고 산수의 정기가 응결된 곳)에 해당되는 곳이라면 그럴법도 하다. 청와대 당국이 현재의 이 본관건물을 역사의 전면에서 퇴진시키고 새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짓기로한 결정적인 동기도 이 건물이 지난 반민족적 역사성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독립한지 45년이 되고 전인류의 축제인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부상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식민통치의 채찍을 휘두르던 일제 총독의 사택을 집무실겸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민족자존을 국정의 제1 지표로 내건 6공화국 정부의 이념에는 물론 민족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 집무실의 건물은 영빈관쪽 출입문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본관 건물 서쪽 뒤편 구릉에 신축되고 있으며 한옥지붕 양식의 2층으로 총건평은 현재 본관 건물(1층 집무실ㆍ2층 대통령 살림집)의 9백평 보다 약간 적은 8백평 규모이다. 완공시기는 내년 상반기쯤으로 잡고 있어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 1년반을 이곳에서 집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관저는 명당표석이 발견된 곳으로 부터 남쪽 아래로 50여m 떨어진 곳에 동향인 본채와 남향인 별채로 나뉘어 지어지고 있는데 역시 한옥 양식의 단층으로 건축되며 총건평은 8백평 가량 된다. 관저는 빠르면 금년 9월께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집무실과 관저가 모두 한국전통의 청기와 지붕형태로 건축되기 때문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영빈관 건물,그리고 오는 7월쯤 완공되는 보도관(프레스 센터)건물 등이 한데 어우러져 현 청와대 경내는 우리 고유의 전통건축미로 조화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청와대측은 앞으로 집무실과 관저가 완공되면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부터 윤보선ㆍ박정희ㆍ최규하ㆍ전두환 전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를 보관,전시하는 기념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길조로 받아들여” 대통령 관저의 신축장소가 명당표석이 발견된 지점과 일치된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청와대 주변지반은 대부분이 암반이어서 공사하기에 쉽게 좀 넒은 터를 찾아보니 이곳이 눈에 띄었을 뿐』이라며 『전적으로 우연이었다』고 설명했다.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긴 표석의 역사적인 고증은 앞으로 전문가들의 조사와 검토가 더 있어야 밝혀지겠지만 현 본관건물 2층에서 기거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뒤끝이 별로 좋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풍수지리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새 관저 신축을 계기로 대통령의 임기가 평화롭게 끝나고 물러나서도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전직대통령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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