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11년만에 복원된 ‘천상의 화원’
꼭 11년이 걸렸다.
막바지 장맛비가 중부지방을 마구 할퀴던 지난 22일,지리산 서쪽의 영봉이며 동쪽 천왕봉(1,915m)에 이르는 25㎞ 산마루길의 출발점인 노고단(1,507m) 정상을 찾았다.건너편 만복대(1,433m)를 뒤덮던 구름이 바람에 밀려 들어오자 구름인지 안개인 지 모를 희뿌연 어둠 뒤로 노란 원추리꽃이 활짝웃음을 터뜨린다.원추리 뿐인가.
여름날 탁발 떠난 노승을 기다리다 얼어 죽었으나 이듬해봄 붉은 꽃으로 태어났다는 동자꽃의 붉은 미소도 싱그럽다.
비비추,붓꽃,쥐오줌풀,뚝갈,이질풀,속속이풀 외에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는 골잎원추리와 붉은지리터리풀 등등.
지리산 노고단이 살아났다.사람들 발길에 차이고 할퀴어 생채기를 입었던 노고단이 지난 91년 통행을 막기 시작한 이후 끈질긴 생태계 복원작업 끝에 마침내 제 모습을 찾았다.8월1일부터 아침 10시,오후 1,2,3시 시간별로 100명씩,하루 400명에게만 그 품을 열어젖힌다.예약 www.npa.or.kr.
지리산 자락의 고찰,화엄사 계곡을 뒤로 한 채 고갯길을 한참 오르면 성삼재휴게소.곧게 난길을 따라 40분을 오르면노고단 야영장이 나온다.
대피소 건물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노고단 고개에 오른다.
조금 오르자 왼편으로 초지개발 시험포가 눈에 들어온다.여기에서 노고단 생태계 복원작업의 기초가 잡혔다.
91년 사람들 발길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한 당국은 3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사람들 발길에 짓밟힌 노고단은 그 발길이 끊어져도 회생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등은 94년부터 이곳에 시험포를 만들고아고산대 특유의 식생을 연구하며 자생식물을 키우며 정상에 이식하는 작업을 해왔다.외부에서 씨앗을 가져다 뿌리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으나 이곳 식생대에는 어울리는 방법이 아니었다.자연 스스로의 복원능력을 북돋는 쪽을 택했다.
침식된 지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목공사를 한 뒤 산아래외래종자가 침투할 수 없도록 심토(深土)와 각종 비료 등을섞어 개량표토를 깔았다.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볏짚 매트를 깔고 그위에 격자식으로 짜여진 황마그물을 올렸다.뿌리가 지탱하는 힘이 약한 풀포기들이 고원지대에 몰아치는바람을 이겨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노력 끝에 노고단 정상의 초지 7,859㎡가 복원됐다.
노고단 고개.1.5㎞ 떨어진 돼지평전과 임걸령을 거쳐 종주능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사람들 발길이 이어져서인지 시벌건 흙이 드러나 볼썽사납다.
그러나 최근 복원작업을 마친 정상쪽은 원추리꽃 등 여러꽃들이 활짝 피어 대조를 이룬다.나무로 만든 데크가 정상에 이르는 600여m 구간에 깔려 사람들 발길을 막고 있었다.
백합과의 다년초 식물인 원추리는 섬진강의 습한 기운탓에노고단 아래 자주 깃들이는 운해(雲海)만큼이나 유명하다.꽃봉오리 말린 것을 지니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 해 의남화(宜男花)라고도 불렸으며 꽃향기가 부부의 금실을 좋게 한다하여 금침화(衾枕花),합환화(合歡花),근심을 몰아낸다 해서망우초(忘憂草)라고도 했다.
애기원추리,큰원추리,각시원추리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곳 노고단을 장식하는 것은 골잎원추리.잎에 새긴 골이 선명한 것이 특히 아름답다.
눈을 감는다.꽃과 새들이 대화를 나눈다.외래종인 작은달맞이꽃이 꽃잎을 웅크리고 동자꽃은 동자승의 청량한 목소리로 노래한다.붉은이질풀의 연붉은 아름다움은 꼭 새악시 미소같고 ‘여로’라는 신비로운 이름의 꽃은 렌즈를 가까이 댈수록 감춰진 아름다움이 화려한 날갯짓을 한다.
이야말로 ‘천상의 화원’.물론 탐방객들에 주어진 시간은겨우 1시간.미리 도감 등을 통해 충분히 꽃에 대한 정보를파악한 뒤 노고단에 오르는 것이 좋겠다.
정상 바로 아래 반야봉이 바라보이는 지점에 새로 만든 조망대에서 잠시 쉰다.구례읍 주변의 잘 정리된 논밭과 지리산 자락들을 훑는 재미가 쏠쏠하다.저 아래 골짜기에서 안개가 훅 불어오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김완섭 노고단 대피소 주임(47)은 “일요일 새벽 4시부터나와 무단출입하는 이들을 적발하곤 한다”고 말했다.지금도 모 방송국 중계시설 뒤쪽을 통해 몰래 들어오는 이들이 있다.
심한 경우 벌금을 물리지만 가벼운 위반자에게는 지리산의사계를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강제로 보게 해 자연보호의식을 고취시킨다.
“자연을 망치는 건 순식간이지만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이 계속되어야 하는 지 모릅니다.부분개방은 하지만 ‘참 힘들어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노고단 정상에 내려진 자연휴식년제는 내년 말 끝난다.이곳을 오르는 모든 이들이 조심,또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10년 이상의 세월을 노고단으로부터 격리당할지 모른다.
지리산 글·임병선기자 bsnim@.
◎여행 가이드.
●가는 길=전라선 기차를 이용,구례구역까지 가 택시로 성삼재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대절에 2만∼3만원.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나들목을 나와 임실·남원을 거치는 19번 국도를 탄다.뱀재터널이 뚫려 구례에 이르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산수유로 유명한 산동마을 지나 천은사 입구로 방향을 틀어 861번 지방도로를 타면 된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구례까지 아침 9시10분부터 오후 5시20분까지 4회 운행되는 버스를 이용(4시간30분 소요)한 뒤 구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성삼재행 버스를 이용한다.50분 소요.
여행답사단체의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
●잠잘 곳=노고단산장(예약전화 061-783-9100∼2 예약이메일 chiri2@npa.or.kr)은 8월20일까지 여름 성수기에 특히 붐비므로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화엄사 계곡에는 지리산프라자호텔(061-782-2171)과 지리산파크호텔(061-782-9881) 등 여관과 하나민박(061-782-3819)과 모과민박(061-782-7118) 등의 민박집이 다수 있다.
●노고단 생태탐방=지리산국립공원남부관리사무소(소장 이현우)는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8월 6일부터 12일까지 여름 생태·문화탐방 프로그램을 마련한다.노고단 대피소에서 1박을 하며 노고단 일대에 핀 야생화를 들여다보며 밤하늘 관찰,새 관찰,슬라이드쇼로 이루어지는 노고단 생태문화탐방과 화엄사와 화엄계곡을 가득 채운 동백나무 대나무 서어나무숲 등을 찾는 화엄사 생태·문화탐방으로 나뉜다.
1회 30명을 모집하며 지리산남부관리사무소(061-783-9100)에서 예약을 받는다.참가비는 공원입장료와 시설사용료만 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