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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간 외면한 한국군 위안부 300여명…“아픈 과거사 직면할 때”

    70년간 외면한 한국군 위안부 300여명…“아픈 과거사 직면할 때”

    일본군 위안부는 한국군 위안부라는 또 다른 아픈 과거사로 이어졌다. 일본군 장교 출신의 한국군 장교들은 동족과 싸워야 하는 군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고스란히 심었다. 일본 우익에서는 한국군 위안부를 두고 피장파장의 오류로 왜곡시키기도 한다. 1996년부터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 교수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우리 정부가 한구군 위안부라는 아픈 과거사에 대해 진상조사하고 사과할 때”라며 “자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에도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1951년 5, 6월부터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으로 교착되며 지난한 장기전이 시작됐다. 이에 한국군은 전선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지역에 공식적으로 ‘특수 위안대’를 만들었다. 군의 공식 문서에 확인된 곳만 서울, 강원 강릉, 춘천, 원주, 속초에 이른다. 때로는 최전선에서 교대휴식하는 병사들에게 여성들을 출동시켰고, 섬에 있는 부대에는 따로 위안부를 배치했다. 당시 서울은 행정 복구가 덜 된 데다가 일제시대부터 있던 군부대 시설에 떨어져 있었기에, 서울에서 군 위안부는 민간인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그러나 군이 마을을 빼앗아 주둔하던 속초는 달랐다. 속초 주민들과 주둔하던 미군 폴 팬처는 “시청 인근에 있던 군 위안부 앞에 육군이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이들은 부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낮에는 밥과 빨래 등 일을 노예처럼 하고, 밤에는 성착취를 당했다”고 증언한다. 위안부는 일반 병사들이 ‘총알받이’를 한다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제5 보급품’이었다. 고위 장교들은 북에서 데려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 포로를 ‘첩’으로 삼았는데, 병사들이 이를 좋게 볼리도 없었다. 납치된 이북 여성이나 북한군이 점령할 당시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됐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장교들은 일반 병사에게 너희들도 북에서 여성들을 데려와 같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 3, 4개를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5연대도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우리 연대는 위안부대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티켓을 나눠줬고, 훈장을 받았다면 우선권을 줬다.”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육군과 장교들의 기록 한국군 위안부의 규모는 군 공식 기록을 통해 추산할 수 있다. 1956년 육군본부가 후방 지원 업무를 발전시키기 위해 ‘후방전사(인사편)’를 펴내면서 특수 위안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서울 1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총 79명)라는 기록과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1개 소대(총 89명)를 적은 표를 종합하면,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에 약 128명의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김 교수는 “여기에 춘천, 원주, 속초 등의 위안부와 1953년 서울에 추가로 설치된 4개 소대를 합하면, 전국 위안부는 약 300명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또한 ‘후방전사’의 ‘특수위안대 실적 통계표’에 따르면 서울과 강릉의 4대 소대에서 위안부 89명이 1952년 한 해에만 20만명이 넘는 군인을 ‘위안’했다. 단순 계산하면 위안부 한 명이 하루 평균 6명 이상의 군인에게 성착취를 당한 것이다. 소대별로 들여다보면 서울 제2소대(중구 초동 105번지)가 그해 8월 1명의 위안부가 상대한 군인수가 한달 평균 269.6명(하루 8.7명)으로 가장 많았다. 1952년 4월과 8월 강릉 제1소대(강릉 성덕면 노암리)에서도 30명의 위안부가 1명당 한달 평균 266.7명(하루 8.6명)을 ‘위안’했다. 1954년 3월에야 특수 위안대는 없어졌다. 김 교수는 “이들은 직업 여성이 아니라 대부분 납치된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목격자들이 “치장하지 않은 매우 어린 여성으로 보였다”고 증언하고, 한 북파 공작원은 김 교수에게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여성을 납치해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 리영희 교수도 1988년 첫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역정’에서 “낙산사 주변 방공호에서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케 하는 은전을 베풀었는데, 병사 한명이 자기 고향에서 흘러온 아가씨를 만나 눈물에 젖었다”고 적었다. 복수의 증언자의 소개로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로 추정되는 여성들을 찾았다. 이들은 “나는 자식들을 키웠을 뿐”이라며 낯선 연구자에게 울음만 토해냈다. 다만 당시 의대생이던 정씨는 국군에게 부역자로 몰려 위안부가 될 뻔했다고 말했다. 피난을 가지 못한 학생들과 인민군을 치료했다는 이유에서다. 정씨는 “○○여대다. ○○여중생이다 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국군들은 우리를 인민군에게 버림받은 찌꺼기로 여겼다. 친구 3명과 나는 부대 장교 4명에게 배정됐지만 한 군인(남편)의 부탁으로 빠져나왔다. (헤어진 친구 3명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못 다한 얘기는 가슴에 묻은 채 관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원류가 조선시대 기생제?”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특별 위안대의 설치·운영 책임자는 육군본부 후생감(휼병감)이다. 위안대가 만들어진 1951년 무렵 부임한 장석윤 후생감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0여년을 일본군, 만주국군에서 복무했다.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그의 뒤를 이은 김병길 후병감도 태평양 전쟁 당시 학도병 출신이었다. 김희오 장군은 회고록 ‘인간의 향기’에서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됐다. 이는 과거 일본군대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 앙양을 위한 발상을 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의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정면 반박한다. 조선시대에는 군 위안부가 없었고 일제시기부터 생겨났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조선시대 전통적 기생은 예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고 제물포(인천) 등지를 조차하면서 예인이 지워진 기생이 등장하고 러일전쟁 때 확산됐다. 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없었다면 한국군 위안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역사 왜곡도 경계한다.장군들의 회고록에는 위안부에 대한 반성이나 문제의식을 찾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공론화가 한국군 위안부의 ‘불편함’을 일깨웠다. 김 교수는 “상급 장교들은 ‘자신을 왜 일본군 취급을 하느냐’며 위안부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 여성을 납치한 군인은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일본인과 달리 정이 통한다’고 변명했다. 또 다른 군인은 ‘위안소를 이용하면 빨리 죽는다는 소문이 돌아 나는 이야기만 나눴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고 리영희 교수는 “사실 내가 강릉 부대에 있을 때 위안부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인권 의식이 부족해서 전쟁 체험담으로 기록을 했는데, 부끄럽다”고만 할 뿐 말을 아꼈다. 군 당국은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김 교수가 2002년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외압도 이어졌다. 당시 재직하던 학교를 통해 청와대와 국방부는 ‘조용히 연구하라’고 전했다. 지금도 군은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함구하며 외면하고 있다. 육군 관계자는 서울신문에 “한국군 위안부 관련 진상조사는 한 적이 없다”면서도 “후방전사 인사편에는 특수 위안대 관련 일부 내용이 기술돼 있으나 지금까지 기술된 내용 외에 구체적인 사료나 자료가 없어 추가적인 사실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또한 “관련 희생자 위령사업 등에 대해 현재 별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일본군 경력이 있는 일부 한국군 간부들이 위안부를 설치·운영했다’는 “학계의 주장에 대해서는 육군에서 언급할 사항이 아니”라고 밝혔다. “아픈 과거사 진상조사해야…일본에도 더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김 교수는 공개되지 않은 군 자료 가운데 진상의 실마리가 숨어 있을 것으로 본다. ‘후방전사’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일본군 위안부처럼 한국군 위안부가 일주일 2회 군의관에게 성병 등을 검진받도록 했다. 기초 신상과 정확한 규모를 추정하는 단서가 기록됐을 것으로 본다. 발굴 작업은 김 교수의 은퇴 이후 연구 목표이기도 하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여러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했지만 군 위안부는 다뤄지지 못했다. 전쟁 중 만연했던 성범죄도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여순 사건 등 직권조사한 사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피해자나 유가족이 신청한 사건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만들어지기 전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김 교수는 성폭력 사건과 한국군 위안부를 다루자고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연말쯤 꾸려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 김 교수는 “내년부터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현재 잣대로 심판받는 위인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현재 잣대로 심판받는 위인들

    노예제도 상징적 인물들에 대한 비판 ‘美 건국 아버지’ 워싱턴 동상 훼손 번져 유럽서도 처칠·드골 동상 공격 잇따라 “과거 반성” “역사 왜곡” 팽팽히 맞서 신대륙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이어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까지…. 인종차별 반대 시위의 파장이 서구 제국주의 시대 인물들에 대한 힐난으로 이어지며 과거사 논란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시위가 촉발된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관련 상징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과거 인물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는 게 정당한 것이냐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수난을 당했던 미국에서는 이제 나라를 세운 위인들까지 재평가 대상이 되고 있다. 시카고 언론들은 시카고 남부에 위치한 공원 워싱턴파크에 있는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동상이 낙서로 훼손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고 1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동상에는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와 ‘아메리카’를 합성한 ‘갓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kkka), ‘노예 소유주’ 등의 낙서가 스프레이로 쓰여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의 소행임을 짐작하게 했다. CBS는 앞서 시카고 그랜트 공원 내 콜럼버스 동상도 낙서로 훼손되는 등 역사 속 위인들의 상징물이 잇달아 수난을 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과 워싱턴의 동상 등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의 표적이 되자 학계 등에서는 우려가 나왔다. 시카고주립대 흑인역사학과 라이오넬 킴블 교수는 “역사를 파괴하기보다는 워싱턴의 생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토론하는 것이 더 낫다”면서 “과거의 상징을 모두 파괴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역사 저술가이자 저명한 우파 언론인인 인드로 몬타넬리의 동상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로마제국사’ 등 명저로 유명한 몬타넬리는 1936년 파시스트 정권이 일으킨 에티오피아 2차 침공 때 현지의 12세 여자아이를 매수해 결혼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그는 생전 인터뷰와 글에서 이 같은 행동이 당시 현지의 문화이자 관행이었다며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몬타넬리에 대한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 인종차별 반대 시위와 함께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주말 사이 밀라노의 몬타넬리 동상이 붉은 페인트 범벅이 되고 ‘인종주의자’라는 낙서로 도배되는 ‘반달리즘’(문화유산 파괴행위)이 일어났다. 여기에 철거 주장까지 나오자 주세페 살라 밀라노 시장까지 나서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는 페이스북에 몬타넬리를 둘러싼 논란을 인정한다면서도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오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삶은 여러 복잡한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며 동상을 철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유럽의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들도 시위대의 표적이 되고 있다.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 전 총리 동상이 낙서로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한 데 이어 프랑스에서는 올해 타계 50주년을 맞은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흉상이 잇따라 훼손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프랑스 북부 소도시 오몽의 샤를 드골 광장에 있는 드골 흉상이 15일 주황색 페인트로 뒤덮였고, 흉상 거치대 뒤에는 ‘흑인 노예제 찬성자’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면서도 “역사에서 어떤 흔적이나 이름도 지우지 않겠다”며 동상 철거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추미애, ‘한명숙 정치자금법 사건’ 진상조사 필요성 재차 강조

    추미애, ‘한명숙 정치자금법 사건’ 진상조사 필요성 재차 강조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한명숙(76) 전 국무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추 장관은 29일 오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한 전 총리 사건에 대해) 언론이 문제를 제기한 만큼 검찰 수사방식에 문제가 없었는지 조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추 장관은 “‘비망록’에 따르면 검찰은 증인을 70여차례 이상 불러 조사했는데, 조서는 5회에 불과하다”며 “그 많은 과정은 검찰의 기획대로 (증인을) 끌고 가기 위해 말을 맞추는 과정이었다는 의혹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검찰의 강요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는 허위 진술을 했다’는 내용의 한신건영 전 대표였던 고 한만호씨의 비망록이 공개되며 논란이 일고 있다. 이어 추 장관은 ”검찰의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적이 있는 만큼, (한 전 총리 사건도) 예외 없이 한번 진상조사는 해봐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추 장관은 지난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 전 총리 사건에 대해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데 충분히 공감한다고 언급했었다. 반면 검찰은 비망록이 당시 재판부가 근거없다고 사법적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오는 7월 출범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1호 수사 대상에 대해서 추 장관은 “성역이 없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추 장관은 “공수처는 검찰이 제대로 사법 정의를 세우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탄생한 것”이라면서 “(검찰의) 권력 유착이나 제 식구 감싸기 등 과오가 있었던 사건들이 공수처의 우선적인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특정 개인의 문제를 (공수처 수사 대상으로 거론하며) 논란을 하면 공수처 출발을 앞두고 그 본래의 취지가 논란에 빠져서 바람직하지 않다”며 “출범 취지에 맞게끔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 ‘식물과 동물’ 넘나들던 20대 국회 오늘 물러난다

    ‘식물과 동물’ 넘나들던 20대 국회 오늘 물러난다

    식물국회와 동물국회를 넘나들었던 20대 국회가 29일 막을 내린다.21대 국회는 탄핵과 정권교체라는 사건을 겪으며 온탕과 열탕을 오갔다. 2018년 말 시작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정국’은 ‘국회선진화법’ 도입 7년 만의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육탄전과 감금·너도 나도 광장으로… 정치 실종·입법 외면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을 밀어붙이려는 더불어민주당과 소수정당, 이를 저지하려는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이 뒤엉켜 육탄전을 벌였고 당시 바른미래당(현 민생당) 소속이었던 채이배 의원이 의원실에 감금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여야 정치권을 향해선 ‘동물국회’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지난해 9∼10월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극한 대치가 겹치면서 의회 정치는 실종됐다. 여야는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서 광장 정치를 벌였다. 극한 대립 속에 어떤 법안도 처리되지 못했고 이번에는 ‘식물국회’라는 비난이 잇따랐다. 동물과 식물 사이를 오가는 국회가 실적이 좋았을리도 없다. 당연히 20대 국회는 법안 처리율도 낙제점을 받았다. 20대 국회에 접수된 법률안은 2만4141건이고, 처리된 법률안은 8924건(철회 제외), 미처리 법률안은 1만5002건이다. 법안처리율은 37%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구하라법·제주4·3 특별법 좌절…과거사법·n번방 방지법 막차 부양의무를 제대로 못 한 부모나 자식 등에 재산 상속을 막는 일명 ‘구하라법’도 빛을 보지 못하고 폐기된다. 해당 법안은 국회 입법 청원에서 10만명이 넘는 국민의 동의를 얻었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계속 심사’ 결론이 나 본회의에 오르지 못했다. 12·16 부동산 대책의 후속 법안인 종부세법 개정안과 공직자 직무 과정에서 이해관계 개입을 방지하는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도 폐기된다. 제주4·3사건 특별법 개정안도 행정안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해당 법안은 4·3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 근거 내용을 담았다. 이에 오영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제주시 을)은 21대 국회에서 개정안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헌법불합치 판결이 내려진 세무사법 개정안도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사상 초유의 동물 국회를 반성하기 위한 ‘일하는 국회법’도 21대 국회로 넘겨진다. 다만, 마지막 본회의(20일)에서는 형제복지원 등 조사가 완료되지 못하거나 미진했던 과거사에 대한 조사를 재개하도록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된 지 7년 만에 배·보상 문제를 제외하고 최종 처리됐다. n번방 방지법 후속 법안과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법, 공인인증서 폐지법, 헌법불합치 관련법 등도 20대 국회 막차를 탔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본 게임보다 작전타임에 열광… 유튜브가 바꾼 ‘핫 플레이어’

    본 게임보다 작전타임에 열광… 유튜브가 바꾼 ‘핫 플레이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동영상 공유 서비스 유튜브는 스포츠계도 예외는 아니다. 스포츠의 기본은 경쟁하는 상대방과 무대, 경쟁을 위한 규칙이 세세하게 정해져 있지만 유튜브 시대의 스포츠는 기존 틀을 파괴하며 종목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코로나19로 ‘슬기로운 집콕 생활’이 화두로 떠오른 시대에 유튜브와 스포츠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펴봤다.●다양하게 변신하는 스포츠 축구는 팀당 11명의 선수가 직사각형의 운동장 안에서 상대 골대에 골을 넣어 승부를 가리는 스포츠다. 농구와 야구 역시 경기장 규격, 출전 선수 규모는 다르지만 승부를 위한 기본 규칙이 있다. 풋살 축구, 3대3 농구 등 변형된 규칙을 적용한 사례도 있지만 기본 틀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튜브에선 다르다. 축구 전문 유튜브 채널 ‘슛포러브’는 축구로 다양한 실험을 펼친다. 35m 밖에서 축구공을 차서 농구 골대에 넣기, 36m 높이에서 떨어지는 공 트래핑하기, 시속 40㎞로 달리는 차에 축구공을 차서 넣기, 한강을 가로질러 축구공으로 과녁 맞히기 등 기상천외한 콘텐츠를 발굴해 유저들에게 제공한다. 다른 종목과의 결합도 시도한다. 최근에는 골프 선수 박인비, 배상문과 은퇴한 축구 선수 이영표, 조원희와 함께 골프공과 축구공으로 하는 볼링핀 맞히기 대결 등을 펼쳤다. 전통적 의미의 축구는 아니지만 축구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농구와 야구 등도 마찬가지다. 농구 유튜브 채널 ‘뽈인러브’는 자전거 타고 중거리슛 넣기, 바다에서 수중농구하기 등 농구를 변주한 콘텐츠를 제작했다. 햄버거 체인점 ‘맘스터치’는 자사 유튜브 채널 ‘터치플레이’를 통해 은퇴한 농구 선수들이 전국의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농구 대결을 펼치는 ‘새싹 밟기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에 볼 수 없던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야구 유튜브 채널 ‘프로동네야구’도 프로선수와 일반인이 던진 공의 분당 회전수(RPM) 비교 등 야구라는 틀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신선한 콘텐츠로 인기다.●하승진·김연경·김동현 등 개인 채널 인기 최근 몇 년 사이 은퇴 선수들에게 새로운 진로가 생겼다면 바로 ‘유튜버’다. 비단 은퇴 선수뿐만 아니라 현직에 있는 선수들도 ‘유튜브’에 뛰어들고 있다. 레전드 골키퍼 김병지는 은퇴 후 유튜버로 변신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가 운영하는 ‘꽁병지tv’는 구독자 33만명을 거느린 중견 유튜브 채널이다. 김병지 정도의 경력을 가진 선수라면 프로 생활을 접고 지도자로 직행할 수 있었지만, 그는 유튜브를 통해 선수가 아닌 일반인과 유소년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축구 노하우를 전수하는가 하면 축구 관련 이슈가 생기면 채널을 같이 운영하는 구성원들과 함께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누기도 한다. 농구 선수 하승진도 은퇴 후 20만 구독자를 보유한 프로 유튜버가 됐다. 하승진은 유튜브 초기 ‘한국 농구가 망해가는 이유’라는 콘텐츠를 제작해 농구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반적인 코스처럼 은퇴 후 코치 과정을 밟았다면 가지지 못할 영향력이 유튜브를 통해 발휘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배구 김연경(‘식빵언니 김연경’), 농구 이관희(‘농구선수 갓관희’), UFC 김동현(‘매미킴TV’) 등은 유튜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선수다. 김연경처럼 스타성이 큰 선수들이 직접 자신의 일상을 전하고 소통하자 팬들의 호응도 크다. 농구와 배구는 연맹이나 구단이 직접 선수들을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한국농구연맹(KBL)이 운영하는 ‘크블TV’, 한국배구연맹(KOVO)이 운영하는 ‘코보티비’ 등을 비롯해 각 구단들도 자체 유튜브 채널을 통해 팬들과의 교류 접점을 넓히며 톡톡 튀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인기 영상으로 뜬 ‘자료 화면’ 유튜브 시대가 되면서 주목받지 못했거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던 일화들이 다시 뜨기도 한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엔 방송사에서 자료 화면으로 제공해야 볼 수 있던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언제든 찾아볼 수 있게 되면서 소비자가 직접 콘텐츠를 주도하고 소비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유튜브로 가장 화제가 되는 스포츠는 단연 농구다. 농구는 열정적인 작전 타임 영상 등이 다양한 ‘밈’(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한 문화 요소와 콘텐츠) 현상을 만들어 낸다. 농구계 최고의 밈으로는 ‘신명호는 놔두라고’, ‘이게 불낙이야’ 등이 꼽힌다. 슛이 약한 신명호를 수비하느라 다른 선수에게 찬스가 만들어지자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이 선수단에 “신명호는 놔두라고 40분 내내 얘기했는데 안 들어먹으면 어떡하자는 거야”라고 호통치면서 신명호는 농구계 최고의 유튜브 스타가 됐다. 여기에 착안해 ‘신명호를 놔둬봤습니다. 신명호의 1:1 실력은?’, ‘신명호를 놔두면 안 되는 이유는?’ 등의 서브 콘텐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감독 시절 불같은 성미를 자랑했던 허재 전 감독은 아예 광고까지 찍었다. KCC 감독 시절 심판 판정에 대해 “이게 불낙(블락)이야”라고 화를 낸 과거 발언은 예능인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를 놀리는 말로 자리잡았다. 최근 고양 오리온을 통해 코트에 복귀한 강을준 감독도 과거 창원 LG 사령탑 시절 “성리(승리)했을 때 앵웅(영웅)이 나타나”라는 작전 타임 발언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됐다. 팬들은 벌써부터 ‘성리학자’ 강 감독의 작전 타임을 기대하고 있다. 과거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일으켰던 선수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담아 스타가 되기도 한다. 축구 선수 시절 ‘풍운아’로 이름을 떨쳤던 이천수는 유튜브에서 자신의 과거 사건 모음집을 보면서 오히려 웃음 소재로 소화시켜 호감을 얻었다. 야구계의 풍운아 정수근도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의 ‘김인식TV’, 전 투수 출신 박명환의 ‘박명환야구TV’ 등에 나와 자신의 과거사를 웃음 소재로 제공해 팬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줬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라면 과거 행동으로 미운털이 박힌 채 대중의 기억에 남았을 선수들이 유튜브를 통해 재조명받으며 팬들에게 스타로 자리잡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어둑한 근대사에 돋보기…행간 속 민족을 사색하다

    어둑한 근대사에 돋보기…행간 속 민족을 사색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자 원로 비평가인 임헌영(79) 선생의 이미지는 불가피하게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선명하게 각인된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인한 투옥과 시련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로 상징되는 사회운동에의 투신이 한 축의 면모라면, 다른 한 축은 치밀한 자료 섭렵을 통해 한국 근현대문학의 실증적·사상적 연구를 축적해 온 면모로 귀납된다. 그 가운데 연구소에서 오랜 열정과 공력을 다해 펴낸 ‘친일인명사전’(2009)의 성과는 우리 근대사의 어둑한 순간들을 현재로 소환해 반성적 자료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 권 분량에 4300여명을 수록한 이 책의 성과는 두고두고 임헌영 선생의 생애를 집약하는 표지가 돼 줄 것이다.●알리고 밝히고 세워 가야 할 역사 친일 행적을 밝히는 게 쉬울 리 없다. 당시 작업에 대한 폄하와 공격도 상당했다. 선생이 연구자들에게 강조한 점은 이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조상 다루듯 하라.’ “많이 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뺄 수 없을 경우에만 넣도록 하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창의적 교육관이 아니라 단순히 수동적 집행에 머물렀던 교육자 같은 이들은 모두 빠졌죠.” 민족사적 관점에서 반성적 자료가 되기에 족한 이들, 제국주의 협력의 자의식을 가진 이들만 추린 모종의 정예화 결과인 셈이다.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한쪽에서는 당사자인데도 이러한 과정을 흔연하게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분들이 준 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파인 김동환의 자제 김영식 선생은 전집에 아버지가 쓴 친일 문건을 다 실었어요. 아버지가 사죄할 기회가 없었는데 자신이 대신 사죄한다면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큰 힘을 줬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어쨌든 인명사전 출간 후 친일 청산에 대한 긍정적 지지자는 많이 늘어났고, 다수 여론조사에서 친일 청산 여론이 70%가 넘는다고 했다. “우리 연구소는 시민단체 가운데 가장 역사의식이 투철한 구성원들로 이뤄진 것 같아요. 이제 저희 과제는 오늘도 여전히 일본이 옳았다고 하면서 학문이나 예술이나 경제 논리로 포장하는 이들과의 싸움에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일본의 새로운 파시스트들과의 싸움이 중요하지요.” 최근 연구소는 각고의 노력으로 서울 청파동에 새 건물을 마련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튜디오를 만들어 팟캐스트를 찍고 그걸 유튜브에 공개해 일반 시민들과 연구소 성과를 공유하고 있다. 일본 파시즘 지지 세력과 우리 쪽 일부 세력이 보여 주는 정치적 화음에 주목할 때 아직도 연구소가 알리고 밝히고 세워 가야 할 역사의 흐름이 만만치 않은 듯했다. 물론 일본에도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우경화 반대를 외치는 이들이 있고, 우리 쪽에도 민족 경험을 훼손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현재형을 돌파해 제대로 된 민족사를 쓰기 위해 선생의 헌신과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친일 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설립된 연구소가 펼치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과거사 청산 작업 역시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국내외를 망라한 작가들의 정치의식 탐색 사실 인터뷰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는 선생이 오랜만에 두 권의 역저를 잇달아 낸 데 있었다.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역사비평사, 2019),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소명출판, 2020)가 그것이다. 두 책은 대조적 속성을 띠고 있다. 앞의 것이 광폭의 발품과 해박한 독서력을 기반으로 해외에 눈을 돌렸다면, 뒤의 것은 한국소설의 맹장들에 대한 정치적 관점에서의 독법이 담겼다. 먼저 유럽문학 기행은 어떤 의미였을까? “감옥에서 나와 여행을 못 다닌 게 원통했어요. 문화센터 같은 데서 강의하다가 외국 문인들의 박물관 방문 프로그램을 계획했는데 모집이 잘돼 제 뜻대로 계획도 짜고 진행도 했어요. 성공적이었지요. 이 책에서 다룬 분들은 모두 평화, 반전, 반제국주의의 작가들이에요. 민중적 정치의식을 가진 분들의 문학을 테마로 한 결과이지요.” 책은 영독불러의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다. 푸시킨, 톨스토이, 고리키, 스탕달, 위고, 괴테, 횔덜린, 헤세, 바이런, 로런스 등이 선생의 열정적인 답파(踏破)와 재구성에 의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에세이풍으로 써 가는 선생의 친절하고도 에두름 없는 문장들이 책의 가독성을 한결 높여 준다. 위대한 작가들의 사생활, 특별히 외도 경험 같은 어둑 한 측면까지 훤칠하게 재현했다.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는 어떠할까? “우리가 위대한 시민혁명을 했는데도 여전히 발전된 정치의식이 빈곤하다는 것을 최근 절감했어요. 늘 흔들리고 위태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소설가들을 통해 역사를 올바로 보는 눈, 정치를 제대로 하는 힘을 빌리자고 생각했지요. 이왕이면 독자가 많은 작가들을 골랐어요. 되도록 각주를 빼고 연애소설 읽듯이 쉽게 풀어 갔습니다.” 책에는 장용학, 이호철, 최인훈, 박완서, 이병주, 남정현, 황석영, 손석춘, 조정래, 박화성, 한무숙 등이 담겼는데, 문학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병주가 다가올 것 같고, 문학의 자의식이 큰 분들에게는 최인훈과 남정현이 매우 유의미하게 다가올 것 같다. “정치사 비판의 현장 중계는 이병주 선생이 최고봉이에요. 어떤 정치평론가도 못 따라가요. 최인훈 선생은 우리 문단의 고질병인 파벌을 넘어선 범례로 다루면 좋겠고요. 그 지성의 날카로움과 처연함이 단연 빛나지요.” 아직도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말을 향한 기대와 혐오의 엇갈림이 있다. 그러나 정치야말로 가장 첨예한 예술이 아니던가. 책 서문에 인용된 나폴레옹의 말처럼 모든 공동체에서는 “정치가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이 책은 선생의 사회적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비평가 임헌영’의 두께를 한 뼘 늘려 줄 것이다.●고단하고도 외로운 길 선생은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그 후 카프(KAPF)나 해방기에 대한 자료를 누구보다도 선구적으로 모았고 자료집을 냈으며 그 논리와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진력했다. 선생은 1980년대 이후 우리 지성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 시리즈에서도 단골 필자였다. 이쪽을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등단하기 전부터 카프에 대한 애정을 가졌어요. 해금 전부터 납월북 작가에게 관심이 많았고요. 그때는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카메라로 직접 찍었어요. 해독이 잘 안 되면 살아 계신 분들께 전화로 직접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을 걸었지요.” 임헌영 비평은 참여문학, 민족문학, 리얼리즘, 민중문학에 이르는 패러다임을 모두 품고 있다. 안으로는 동학농민혁명, 4·19혁명, 광주민중항쟁, 6월항쟁과 관련한 문학에 대해 꾸준한 비평을 해 왔고, 밖으로는 글로벌 시대의 해외동포문학에 대한 탐구도 줄기차게 수행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혀 갔다. 이처럼 선생은 근현대 민족 수난사와 함께하면서 디아스포라 문제에도 눈을 떴다. 물론 선생은 서정적이고 예술적인 언어도 세상에 많이 내놓았다. 이 점, 선생을 설명하는 데 퍽 중요한 균형추가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구소 곁 숙명여대에서 재직하는 권성우 교수가 동석을 해 줬는데, 권 교수가 선생께 ‘앞으로 어떤 책을 내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북한문학 한번 정리해야 하고요. 해외동포문학도 중요합니다. 해외동포 쪽은 제가 제일 먼저 손대지 않았나 싶어요. 문학사회사, 특별히 필화사에 애정이 가요. 아마도 필화사가 제일 먼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이후로 두 분의 치열한 대화가 오갔다. 재일조선인문학, 특히 김석범과 김시종과 서경식에 대한 경험적 대화는, 비록 즉각적이었지만 임헌영 선생의 경험과 사유가 어디까지 뻗어 나가 있는지를 실물적으로 알려 줬다. “젊은 작가들의 세계를 평하기에는 이제 제 비평의 틀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변해도 문학의 원칙은 그대로라고 생각해요. 그걸 훼손하면 안 됩니다. 원래 문학은 문학 하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어요. 교양의 정점에서 문사철을 모두 이끌어 갔습니다. 손끝으로 하는 문학 말고 가슴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학을 지금도 옹호하고 또 대망하고자 합니다.” 굵직한 의제들을 버리고 쇄말주의에 빠진 우리 문학에 대한 원로다운 문제 제기인 셈이다. 선생의 말씀처럼 근본적 문학의 위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되 변하지 않을 문학을 위해, 여전히 현재형 의제인 민족사 복원을 위해, 선생이 걷는 고단하고도 외로운 길은 아직도 가파르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 길은 누군가는 걸어 우리에게 비춰야 했던 오랜 지남(指南)으로 남을 것이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180석으로 다 해치우고 싶겠지만… 폐족 수모 잊지 말아야”

    “180석으로 다 해치우고 싶겠지만… 폐족 수모 잊지 말아야”

    “180석(더불어시민당 17석 포함)을 얻은 이때가 기회라며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해치우자는 욕망이 더불어민주당 내부에 있습니다. 미숙한 태도를 보여선 안 됩니다. 열린우리당이 왜 폐족까지 언급되며 실패했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16년 전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던 당시 의장이었던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21일 서울 종로 율곡로의 사무실에서 한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이해찬 대표가 ‘열린우리당의 아픔을 깊이 반성한다’며 오랜만에 옳은 지적을 했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실패했던 건 내부 문제 때문”이라며 이같이 말했다.민주당이 4·15 총선에서 ‘슈퍼 여당’이 된 직후 가장 많이 언급된 표현이 ‘열린우리당 트라우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치러진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차지했다. 이에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안, 언론개혁법안, 과거사진상규명법)을 추진했지만 결국 입법도 실패했고 정권도 뺏기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민주당이 그때와는 다르다며 “민주당 안에서 ‘좌익 맹동주의’는 나타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언론개혁 운동을 하며 정치적 언급을 자제해 왔던 이 이사장은 이날 오랜만에 정치권에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는 “지금 여야가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국민을 지원해 주고 비례위성정당을 빨리 원래 정당과 합쳐 위법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국채라도 발행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이 압승했다. 예상했나. “180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반은 훌쩍 넘길 것으로 봤다. 민주당이 잘해서 얻은 의석이 아니다. 코로나19 대응에 대한 컨벤션 효과, 미래는커녕 현재도 못 보는 너무나 무능한 야당 때문에 이긴 것이다. 특히 격전지에서는 선거 막판에 미래통합당 김대호·차명진 후보의 막말 논란, 통합당의 형편없는 공천의 영향이 컸다.” -잘해서 이긴 게 아니란 의미는. “통합당에 비해 실수를 덜 한 것이다. 상대방이 잘못해서 큰 승리를 거뒀다면 민주당이 자만할 필요는 없다. 운이 좋았다.” ●열린우리당같이 난장판 되지는 않을 것 -최근 ‘열린우리당 트라우마’라는 말이 계속 언급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는데 그때 초선만 108명이었다. 초선일수록 의욕도 정치적 기대도 큰데 각자가 노 전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는 게 느껴졌다. 이들은 당론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언론에 말하는 등 제어가 안 됐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108번뇌’라는 말이 나왔다. 이들이 4대 개혁입법을 정하고 특히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보법은 유지돼 있고 열린우리당은 ‘종북당’으로 낙인찍혔다. 그때 일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야당(한나라당) 때문에 국보법 폐지를 못했다고 주장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올 초 언쟁이 있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152명 중 68명이 국보법 폐지를 반대했다. 한나라당 130여석까지 합치면 200명 가까이 국보법 폐지를 반대했다. 그래서 내가 중진들과 상의해 폐지가 아니라 5개 독소조항을 걷어내는 쪽으로 정하고 박근혜 대표와 물밑 합의했다. 국내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부분만 걷어내고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은 처벌하자는 타협안이었다. 그런데 이를 의원총회에서 원내대표가 거부하며 단 한 점, 한 획도 고치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다. 당시 초선들이 중진들을 배신자라 욕했고 중진들은 초선들의 주장이 청와대의 의사라고 생각해 침묵했다. 친북당, 종북당으로 매도당하면서 당 내부가 분열됐고 노무현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 버렸다.” -이 대표의 ‘열린우리당의 아픔을 깊이 반성’한다는 말은 내부 분열을 우려한 것인가.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되풀이한다는 건 다수 의석을 만들어 줘도 제대로 일을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중요한 일들도 많았는데 이념적으로 쏠리니까 배가 옆으로 기울어 스스로 뒤집힌 것이다. 그리고 타협안을 뒤집도록 주도한 이들은 통일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법무부 장관 등으로 떠나 버렸고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민주당이 그런 과거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나.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현재 민주당 안에서 ‘좌익 맹동주의’ 같은 게 쉽게 나타나긴 어렵다. 이 대표가 강하게 쐐기를 박지 않았나. 이 대표의 우려가 180명 의원들 머릿속에 제대로 자리잡길 바란다. 이후 누가 당대표가 될진 모르겠지만 열린우리당 같은 난장판 상황이 되진 않고 제어될 것으로 본다.” -민주당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코로나19가 끝난 게 아니다. 경제 위기를 잘 처리하고 난 다음에 다른 개혁법안들을 처리해도 된다. 여야가 선거에서 공약한 게 코로나19 위기에서 피해를 본 국민들을 돕자는 게 아니었나. 그 약속부터 지켜야 한다. 통합당이 지금 말을 바꾸고 있는데 야당이 약속을 어기려 해도 여당 주도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도 여당이 국민과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있도록 국채라도 발행해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도와야 한다.” -민주당이 몸조심하면서 개혁입법 처리가 미뤄진다는 지적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게 먼저다. 코로나19로 악화된 경제를 살리고, 기업 특히 중소기업을 빠르게 회생시키는 등 할 것부터 한 다음에 나중에 원하는 법안 처리에 나서면 된다. 이념 섞인 법안부터 하려고 해서 일부러 싸움을 벌일 이유는 없다. 국민이 많은 의석을 준 이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니까 이때 (쟁점법안을) 해치우자는 그런 욕망이 있을 텐데 경제부터 잘 살리고 지금처럼 국민 지지를 넓게 받으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원하는 법안 처리도 가능해질 수 있다. 국민이 민주당에 다수 의석을 준 건 의석수로 밀어붙여서 법안을 처리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유를 가지고 쟁점이 큰 법안 등은 국민과 야당과 털어놓고 토론한 후 처리하라는 뜻이다.” ●야당은 이제 좀 정상적이고 유능해져야 -통합당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한다면. “통합당이 저렇게 처참하게 패배한 건 조·중·동 언론과 (극우) 유튜버 등이 통합당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고 착시효과를 일으켰고 여기에 통합당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전광훈 목사 같은 분이 코로나19 사태에도 집회를 추진하는데 거기에 야당 대표 및 유력 정치인들이 뜻을 같이하는 것을 보면서 진보뿐 아니라 중도 및 중도보수에 속하는 일반 시민들이 저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나 걱정했을 것이다. 거기서 나온 환호성과 박수 소리를 국민들이 주는 표라고 착각했다. 야당이 좀 정상적이고 유능해졌으면 좋겠다. 모든 걸 다 바꾸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앞으로 2년 동안 노력해야 대선도 바라볼 수 있지 않겠나.”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이부영은 누구인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재야 민주투사이자 정치 원로다. 동아일보 해직 언론인 출신으로 민주화 투쟁을 하다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3당 합당에 반대해 만든 민주당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뒤 14~16대 서울 강동갑에서 3선을 했다. 1995년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통합민주당에 남아 있다가 합당 후 한나라당에서 원내총무, 부총재 등을 지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인 152석을 차지했던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다. 2015년 정계를 은퇴했고, 지난해부터는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으로서 올바른 언론 환경 조성에 노력하고 있다. ▲1942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동아일보 기자 ▲14~16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부총재 ▲열린우리당 의장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조직위원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 “열린우리당 아픔 반성”… 총선 후 첫 시험대는 원내대표 선출

    “열린우리당 아픔 반성”… 총선 후 첫 시험대는 원내대표 선출

    공수처장 후보 추천할 수 있어 권한 막강 김태년·노웅래·윤호중 등 후보군 10여명 “친문, 국회의장·대표 등 역할 분담 고심” 원내전략 실패땐 ‘열린우리당 전철’ 경계 17대 152석→ 지지율 급락→ 대선 패배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17석)을 포함해 180석의 ‘슈퍼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4·15 총선 이후 연일 몸조심·입조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해찬 대표의 입에서부터 ‘열린우리당의 아픔’을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가운데 다음달 7일 예정된 차기 원내대표 선출이 민주당의 열린우리당 트라우마 극복의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21대 국회 개원 직후 민주당이 어떠한 입법 실력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2년 뒤 대선에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입법 지휘권을 가진 원내대표가 누가 될지 어느 때보다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특히 이번 민주당 원내대표는 오는 7월 출범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자 추천에도 관여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도 막강하다. 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군으로 꼽히는 3선은 24명, 4선은 11명에 이르며 이 중 10여명의 의원이 거론된다. 대표적으로는 지난 원내대표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 김태년 의원, 노웅래 의원이 있다. 또 윤호중, 정성호, 안규백, 박완주, 윤관석, 전해철, 박홍근 의원이 후보로 거론되며 5선이 되는 조정식 의원도 언급된다. 다만 친문(친문재인) 핵심 의원들이 대거 원내대표 출마를 저울질하면서 친문 내부의 교통정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과 윤 의원, 전 의원 등이 친문 핵심들이다. 당내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남은 2년의 임기를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도록 원내대표뿐만 아니라 국회의장, 8월 전당대회 등을 모두 통틀어 친문 내부에서 역할 분담에 고심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친문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이인영 원내대표가 선출됐던 때처럼 친문의 분화나 비주류가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계파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치러진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차지했다. 이후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안, 언론개혁법안, 과거사진상규명법)을 추진했지만 경제 문제는 등한시했다는 비판과 함께 여야 갈등과 당내 계파 갈등이 폭발하면서 지지율 급락을 겪었다. 당내에서는 이번에도 원내 사령탑이 전략을 잘못 짤 경우 지지율 급락으로 정권을 빼앗긴 전철을 밝을 수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온다. 앞서 이 대표가 지난 17일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열린우리당의 아픔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면서 “그것을 반성해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을 깊이 생각하며 국회와 정당을 잘 운영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2000자 인터뷰 28]양기호 “강제동원, 먼저 피해자 수용가능한 안 국내서 만들어야”

    [2000자 인터뷰 28]양기호 “강제동원, 먼저 피해자 수용가능한 안 국내서 만들어야”

    한일정상회담, 해법 논의 안한 절반의 성공 문희상 안은 여러가지 한계 있어 아쉬워 승소판결 난 피해자 보상 해결에 집중해야 국가가 책임지거나, ICJ에 가는 것은 반대한일관계 전문가인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27일 서울신문 평화연구소와 인터뷰를 갖고 한일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판결 문제와 관련 “지금이라도 정부, 피해자 원고단, 강제동원 단체, 민족연구소 등이 민간공동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는 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 교수는 논란이 되고 있는 문희상 국회의장의 ‘기억·화해·미래 재단 법안’은 “문제가 많다”면서 실패한 위안부합의, 아시아여성기금의 한국판이 될 수 있어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양 교수와의 일문일답 내용. Q. 지난 24일 중국 청두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1년 3개월만에 양국 정상이 만났다는 데 의의가 있었을 뿐 현안 해결에 큰 진전은 없었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A. 이낙연 총리의 10월 방일로 양국 사이에 모멘텀은 만들어졌다. 정부가 11월 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의 조건부 유예를 결정하면서 일본의 대한국 수출규제, 지소미아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를 분리시킨 것은 잘한 것이었다. 이번 회담은 보도를 볼 때 강제동원이 메인이었다. 회담에서는 양자 간 입장 차를 확인하고 끝났다. 구체적 해법은 물론 문희상 국회의장의 ‘기억·화해·미래 재단 법안’도 논의하지 않았다. 다만 올해 초부터 한일이 대립하는 극단적 갈등에서 벗어나 연말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 문제를 현안으로 인식하고 대화로 풀어나가자 한 것은 잘 한 것이라고 본다. 간단히 정리해 대화 분위기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해법은 진전이 없었으니 절반의 성공이었다. Q. 회담에서 수출규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7월 1일 이전으로 되돌리자고 한 데 대해 아베 신조 총리는 당국 간 협의를 통해 해결하자고 했다. 아베 총리의 이런 말은 강제동원 판결 문제를 한국 측이 책임을 지고 해결하기 전에는 수출 규제 해제는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A. 내가 알기로는 일본 경제산업성(경산성)은 처음부터 수출규제와 경제보복을 연동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경산성은 전략물자통제를 한일이 상호검증하고 한국 측에 신뢰가 생기지 않는 한은 수출 규제를 철회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이 전략물자관리위원회 인원을 확충했고, 양국이 함께 검증하자고 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 수출된 전략물자가 제3국으로 유출된다는 증거가 없는 한 원상복귀할 수 있다는 게 경산성의 생각인 것 같다. 현금화에 따른 경제보복의 카드로 여기는 총리 관저와는 약간 결이 다른 셈이다. 다만 현재 우리 정부 내에서 내년 3월 말까지 수출 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 철회를 하지 않으면 다시 지소미아 종료를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인데 수출 규제와 화이트리스트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며 지소미아 카드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Q. 논란이 되고 있는 문희상 국회의장의 강제동원 문제 해법인 ‘1+1+알파’에 대해, 일제강제동원희생자유족협동조합은 조속한 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으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사죄없이 청구권을 소멸시키려는 것이라 반발하고 있다. 조합 측은 피해자는 우리들인데 왜 시민단체가 나서서 반대하느냐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문희상 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A. 문희상 안은 큰 결함이 있다. 최소한의 마지노선인 대법원 판결 이행이 빠져 있다. 특정 원고와 특정 피고가 존재하는 민사소송이다. 게다가 법안은 기부금을 강제 못한다는 조항이 있다. 현재 판결이 난 3개 일본 피고 기업이 나는 기부에서 빠지겠다고 하면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대법원 판결에는 피고 기업에 사죄하라는 주문은 없다. 법안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재확인으로 사죄를 얘기하고 있어 사실상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사죄 부분이 누락돼 있다. 과거사 반성이 없는 상황에서 돈 주면 끝난다는 점에서 제2의 위안부합의 나아가 실패한 일본 정부·민간의 아시아여성기금 한국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모금이란 형식을 취했지만 결국 일본 정부가 80~90%를 댔다. 문희상 안의 ‘기억·화해·미래 재단’ 또한 기금이 모자라면 정부가 메워나가는 건데 그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다. Q. 청와대가 문희상 안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일부 보도에서는 문희상 안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평가했지만, 정부가 6월 19일 일본에 제시한 ‘1+1’안보다는 진전된 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청와대가 생각하는 피해자의 범주는 무엇이며, 그 범위를 특정할 수 있는 것인가. A. 정부의 6·19안은 대법원 판결이 난 부분에 대해서 피해자가 동의할 경우 한일 기업이 기금 모아서 지급한다는 것이다. 보상 판결이 난 일본 3개 기업, 그리고 청구권 자금을 쓴 한국 16개 기업이 대상이지만 일본은 그날 즉각 거절했다. 문 의장은 1500명에 대한 보상을 얘기하고 있다.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990명과 현재 살아계신 피해자 본인 500명 이 추가로 소송할 것으로 전제로 해서 1인당 2억원씩, 3000억원을 얘기한 것이다. 피해자 단체 중 일부는 문 의장을 직접 만나 법안에 찬성을 했지만 문제는 대법원 승소판결을 받은 이춘식씨 등이 반발하니. 이들의 동의가 포함돼야 한다. 피해자는 21만명 혹은 27만명이라고 하는데 일단은 승소 확정 판결이 난 분에 대해 한일양국이 판결이 이행되도록 집중할 필요가 있다. 승소한 분들이 현금화해 버리면 끝난다. 65년 청구권협정 깨지는 것이다. Q. 2018년 10월 판결이 65년 협정의 불완전성, 즉 식민지배의 합법·불법의 역사인식, 청구권 소멸 부분을 애매하게 정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면 판결은 사실 65년 체제를 수정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현재 진행되는 것을 보면 65년 체제를 보완할 기회는 놓쳤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A. 대법원 판결 등은 청구권 협정을 준수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정신적 위자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65년 체제와 상충되는 게 아니다. 일본 정부는 간 나오토 총리 담화 등을 통해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반성을 말하고 있고, 위안부합의 등을 통해 65년 체제를 스스로가 보완해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추가적인 정신적 위자료 보상이 있는 것이다. 일본 기업은 빨리 끝내고 장사하고 싶은데 아베 총리가 협정으로 다 끝났다면서 보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이다. 북한이나 동남아에서 식민시대 개인보상 관련 소송이 제기되면 일본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만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것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지나치다. 18년간 이어온 소송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보상을 가로막는 것은 부적절하다. Q. 외교 당국간 협의가 내년부터 활성화할 것으로 예측된다. 일본이 주장하는 국제법 위반 상태의 원상복귀와 한국 측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하라는 것, 그리고 한국이 말하는 피해자중심주의, 사법부 판단 존중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개념인데, 해결책을 내년에는 찾을 수 있을까. A. 어떻게 생각하면 강제동원은 국내 문제다. 피해자가 수용하지 못하는 안은 절대 안 된다. 첫째 한국 정부, 피해자 원고단, 강제동원 지원단체, 민족문제연구소 등으로 구성된 민간공동위원회를 만들어서 토론할 수 있는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피해자 원고단과 얘기를 해야 한다지만 지금 부정기적으로 얘기하고 연락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제도화를 해야 한다. 국내에서 해법이 나오지 않는데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 누구한테 어떻게 얼마를 보상할 것인지, 피해자들이 사죄를 원하는데, 사죄는 어떻게 받아내야 하는 건지, 논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 둘째는 대법원 판결이 이행되는 과정이 보증돼야 한다. 특정 기업이 특정 개인에 보상하는 게 보장돼야 한다. Q.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것 자체가 국가의 책임이라고 한다면, 국가가 식민시대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고난에 몰아넣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맞으며, 그런 점에서 피해자들이 제기해 판결이 나온 것은 별도로 하고 향후 제기될 소송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해결하는 게 맞다는 국내 의견도 있다. A. 그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가보면 한국 정부가 다 보상하고, 도덕적 우위에 서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부는 7000억원 보상을 했다. 적지 않은 액수이며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Q.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냐 아니냐, 식민지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외교당국 간, 혹은 정상회담에서도 해결하기 힘든 난제이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물어보는 게 양국 간 대립의 불씨를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방안이라는 의견도 있다. A. 반대다. 한일 간 특수 사안을 국제무대로 갖고 가져 가서는 안 된다.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은 대략 3년 걸린다. 피해자들은 80~90대이다. 매년 1000명 단위로 돌아가신다. 지난해 봄 5200명이던 것이 올해 4000명이 안되는데 3년 지나면 생존자가 1000명도 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인도적인 면에서 옳지 않다. 이 문제를 ICJ에 묻고 일본이 그럼 독도를 ICJ에 걸어보자고 한다면 우리가 거부할 명분이 없게 된다. 그리고 ICJ에서 식민지배 합법불법 문제가 가려지지 않거나 합법이라고 나왔을 경우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하는 판결이 되므로 ICJ에 갖고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황성기 평화연구소장 marry04@seoul.co.kr
  • 日과 닮은꼴 벨기에 ‘과거사 반성’ 나서나

    학살자 ‘레오폴드2세’ 도로명 개명 추진 식민통치 전시한 왕립박물관 재개관도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저지른 가장 악독한 만행으로 꼽히는 벨기에의 콩고 지배 역사와 관련, 벨기에가 최근 전향적인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3일(현지시간) “벨기에가 (식민 지배의) 과거를 직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압력을 받고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면서 “역사 교과서 등에서 관련 기조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1800년대 후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침략, 지배하며 원주민 학살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콩고 원주민을 고무 생산 등에 동원한 뒤 무자비하게 학살해 식민 지배 20여년간 희생된 콩고인이 최대 1000만명에 이를 것이란 추정도 있다. 벨기에 정부는 당시 피해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입장으로, 사과와 배상 대신 인프라 건설 등 경제 지원으로 갈음하려 했다. 하지만 벨기에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과거를 정면으로 대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학살자’ 레오폴드 2세 지우기 작업이다. 벨기에 북서부 코르트리크 의회는 도시 내 ‘레오폴드 2세’라는 이름이 붙은 도로명 바꾸기에 나섰다. 같은 도로 이름이 있는 서북부 도시 겐트에서도 이를 바꿔야 할지를 검토하는 실무회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가디언은 시민들이 학살자의 이름이 붙은 도로 이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또 최근 레오폴드 2세의 콩고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벨기에 시민들이 여론의 압박을 느끼게 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 밖에도 나치 협력자의 이름이 붙은 도로명을 바꾸는 등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전향적인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벨기에는 지난해 식민통치를 전시하는 중앙아프리카왕립박물관을 재개관하며 자신들의 잔혹한 행위를 자세히 서술하고 콩고인들을 추모하는 전시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김학의 사건 오늘 1심 선고…검찰 징역 12년 구형

    김학의 사건 오늘 1심 선고…검찰 징역 12년 구형

    억대 뇌물을 수수하고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1심 선고공판이 22일 열린다. 앞서 검찰은 김학의 전 차관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선고공판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정계선) 심리로 이날 낮 2시에 열린다. 김학의 전 차관은 2007년 1월~2008년 2월 건설업자 윤중천씨로부터 3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비롯해 1억 3000만원 상당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를 받고 있다. 또 2003년 8월~2011년 5월 사업가 최모씨로부터 3950만원을 수수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외에도 2006년~2007년 강원 원주 별장 등에서 13차례의 성접대를 받은 혐의도 적용됐다. 검찰은 김학의 전 차관의 성접대 의혹과 관련해 폭행, 협박이 없었다며 성폭행 혐의 대신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했다. 김학의 전 차관의 이른바 ‘별장 성폭행 사건’은 그가 윤중천씨가 소유한 강원 원주 별장 등에서 성폭행을 했다는 사건으로 2013년 3월 공개된 동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됐다. 당시 경찰은 김학의 전 차관에게 특수강간 혐의를, 윤중천씨에게는 특수강간 및 성폭력처벌법·마약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2013년 7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김학의 전 차관은 2006년 4~5월과 2008년 3~4월 각각 제주도와 윤중천씨의 별장에서 피해여성 2명을 강제추행한 혐의도 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2013년 11월 김학의 전 차관에게 혐의없음 처분을 했다. 이후 2014년 7월 피해여성 이씨가 자신이 동영상 속 여성이라며 김학의 전 차관 등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2014년 12월 김학의 전 차관에게 또다시 혐의없음 처분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 조사와 ‘김학의 수사단’(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의 수사를 통해 김학의 전 차관과 윤중천씨의 혐의사실이 다시 규명됐다. 지난달 29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김학의 전 차관에게 징역 1년과 벌금 7억원, 추징금 3억 3760여만원을 선고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다지만 혐의 전체를 부인하고 있다”면서 “범죄의 중대성이 공소사실만 봐도 충분히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학의 전 차관은 검찰의 신문 과정에서 윤중천씨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원주 별장에 간 적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나를 아무도 안 믿는다. 아내조차 나보고 괜찮으니 그냥 갔다고 하라고 하더라”라고 답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서울광장] 한일 지소미아 종료가 사필귀정인 까닭/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한일 지소미아 종료가 사필귀정인 까닭/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한일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는 태생부터 뭔가 이상했다. 쫓기듯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 와중인 2016년 1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졸속으로 처리됐다. 재추진 발표 20여일 만이다. 과장급 실무협의 두 차례가 전부였다. 다음날 기자들을 피해 한국 국방장관과 주한 일본대사 간에 비공개로 조인식을 가졌다. 카메라 기자들은 밀실 협정 체결에 반발, ‘제2의 을사늑약’이라고 항변하며 취재를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자신도 모르게 협정이 체결됐다”고 국회에서 폭로한 바 있다. 이명박 정권 말인 2012년 6월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밀리에 지소미아 체결을 추진했다가 밀실행정이란 거센 반발 끝에 서명 50분을 앞두고 전격 취소됐다. 국민 정서에 역행하면서까지 밀어붙였던 것은 미국과 일본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일 지소미아는 한미일 삼각 군사공조를 만들려는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급부상과 북핵·미사일 사태 악화로 국제 정세가 급변한 것이 배경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북아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 한반도 분단 상황을 이용해 ‘전쟁 가능한 국가’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군사대국주의가 결합한 산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일 지소미아는 미국과 일본에는 ‘복음’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치가 크다. 지소미아 종료(23일 0시)를 앞둔 시점에 한미 안보협의회(SCM), 한미 국방장관회의, 한미일 3자 국방장관회담 등을 통해 전방위 압박에 나선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입장은 좀 다르다. 군사정보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서로 등가성 있는 정보 교환이 핵심이란 측면에서 우리로선 효용성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평가다. 한일 지소미아 체결 이후 최근까지 30건의 정보 교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이 필요해서 요청했다고 한다. 일본이 한국에 준 북한 관련 정보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는 ‘그저 그런’ 수준이다. 군사 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일본이 절실히 원하는 휴민트(인적 네트워크)를 비롯해 한국의 고급 정보를 통째로 내놓으라는 것이 지소미아의 본질”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보상 신뢰관계 훼손’을 이유로 경제 보복을 감행한 아베 정권이 지소미아 종료에 반발하는 건 참으로 어이가 없다. 일본 스스로 ‘안보 신뢰가 없다’고 커밍아웃한 마당에 지소미아를 유지하자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런 일본의 무도한 경제 보복과 외교적 결례·무시 속에서 미일 압력에 굴복해서 지소미아를 연장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로서는 굴욕일 수밖에 없다.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일본의 야욕을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도와주는 꼴이 돼선 안 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 철회 없이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은 누가 봐도 타당하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권과 보수 언론은 ‘지소미아 종료로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며 연일 안보 불안을 자극하고 있다. ‘억지 춘향이’ 격으로 한미동맹 균열이나 미군 철수 가능성으로 몰아 가는 것 자체가 정파적 이익을 노리는 책략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외교전략연구실장은 “현재 미국의 세계 전략상 중국 견제가 가장 중요한데 한국만 한 군사 주둔지를 찾기는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엘리엇 엥겔 미 하원 외교위원장마저 “주한미군 철군은 바보짓”이라고 일갈하는 마당에 안보 불안을 부추기는 이유를 묻고 싶을 뿐이다. 식민지의 아픔을 겪은 우리로서는 가해자인 일본으로부터 더이상 굴욕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많다. 지소미아 종료든 연장이든 우리 국익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주권의 문제라는 의미다. 일본이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수출 규제를 해제하면 언제든지 복원될 수 있는 협정인 것이다. 과거사 반성도 없이 군사대국화로 향하는 아베 정권 편에 서서 지소미아 재개를 압박하는 미국이 되레 한미동맹의 호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믿는 국민들이 적지않다. 한미동맹이 우리에게 소중한 대외 전략의 중추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익에 앞설 수 없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다. 단언컨대 주권을 포기하면서 국익을 지킨 사례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냉엄한 교훈이다. oilman@seoul.co.kr
  • “폭침에 스러진 강제노역 귀향선 잊지 말아야”

    “폭침에 스러진 강제노역 귀향선 잊지 말아야”

    새달 1일 광화문광장 무대서 무료 공연 제작비 1000만원 마련에 크라우드펀딩“부끄러움과 책임감 때문이겠지요.” 김현성(47) 한국인플루언서산업협회장은 이력만 놓고 보면 과거사 청산이나 뮤지컬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서울시 디지털 보좌관을 역임하고 디지털사회혁신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그가 최근 몇 개월 동안 뮤지컬 ‘우키시마마루’ 프로듀서로서 홍보와 제작지원에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는 건 우키시마호의 비극을 모르고 살았다는 반성, 그리고 이제라도 이 사건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우키시마호는 해방 직후 일본 오미나토 해군 비행장 등에서 강제노역했던 조선인들이 귀국하기 위해 탔던 배 이름이다. 조선인들을 태우고 부산을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4일 갑작스럽게 침몰했다. 일본 정부 공식발표로는 탑승자 3754명 가운데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실종했지만 생존자들은 약 8000명이 배에 탔고 이 가운데 사망·실종자가 약 6500명에 이른다고 반박한다. 침몰 원인 역시 공식발표로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 때문이라고 하지만 생존자들은 여러 정황상 일본이 조직적으로 배를 폭파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김 회장은 “북한에선 해마다 8월 24일이 되면 조선노동당 명의로 진상규명과 일본의 책임을 묻는 성명을 발표한다.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살아 있는 영혼들’를 제작하기도 했다”면서 “그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고 우키시마라는 이름을 처음 알았다는 게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와 책도 나왔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 우키시마호를 외면했다”면서 “뮤지컬 우키시마마루가 그날의 비극을 알리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뮤지컬 우키시마마루는 바로 이 우키시마호 폭침 사고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이다. 항구 곳곳에서 만세를 외치며 배에 탑승하는 사연으로 시작해 일본군 승무원들이 구명정을 타고 사라진 뒤 가라앉기 시작한 우키시마호의 비극을 음악과 연극으로 알린다. 지난해 대법원이 사법부 최초로 일제강점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던 걸 기념해 11월 1일 서울 광화문광장 가설무대에서 무료로 공연한다. 김 회장이 맡은 핵심 과제는 출연배우와 스태프가 60명이 넘는 등 만만치 않은 제작비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가 선택한 건 크라우드펀딩과 기업후원이다. 김 회장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 24일까지 1000만원 모금을 목표로 후원 모금 중이다”면서 “17일 현재 158명이 참여해 592만원을 모집했다”고 밝혔다. 기업후원도 진행 중이다. 그는 “세계 안마기 시장을 독차지하던 일본 업체들을 제친 바디프렌드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일본제품 불매운동 여파로 인지도와 시장점유율이 더 올라갔는데 의미 있는 곳에 쓰자고 제안하자 흔쾌히 도움을 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글 사진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정찬형 YTN 사장 “공정방송 투쟁 10년 해직·정직 피해자와 가족께 사죄”

    정찬형 YTN 사장 “공정방송 투쟁 10년 해직·정직 피해자와 가족께 사죄”

    정찬형 YTN 사장이 30일 취임 1주년 성명문에서 사내 미래발전위원회 활동 마무리를 알리고 해직·정직 등 피해자와 가족에게 사과했다. 정 사장은 과거사 청산을 위해 조직한 미래발전위원회 활동을 돌아보는 것으로 성명문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10년 공정방송 투쟁에 나섰던 구성원들에게 회사가 행했던 명백한 잘못을 확인했다”며 “회사를 대표하는 사장으로서 진심을 담아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YTN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가늠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던 해직과 정직 등 중징계 피해자들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그 긴 기간 아픔을 함께 겪었을 가족들에게도 고개 숙여 사죄드리고 감사와 위로의 뜻을 전하다”고 덧붙였다. 정 사장은 “저는 취임하자마자 이 같은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사 합의에 의한 독립기구인 ‘미래발전위원회’를 발족시켜 9개월 동안 공정방송 훼손 등 잘못된 과거 행적을 엄정하게 조사하도록 했다”고 설명한 뒤 “회사 인사위원회는 사규에 따라 잘못된 과거 행적에 대해 책임을 묻는 징계 조치를 내렸다. 미발위 조사와 인사위원회의 결정을 존종해 (처벌을) 확정했다”고 부연했다. 정 사장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복조치는 단순히 과거사의 책임에 대한 우리 내부의 정리가 최종 목표일 수 없다”며 “더 신뢰받는 방송사로 거듭나기 위한 선결 조치이자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선서”라고 선언했다. 보도전문채널로서의 YTN의 방향과 관련해서는 “지난 여름부터 보도전문채널로서 기본에 충실한 보도로 기본적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면 시청자의 신뢰가 상승한다는 것을 수치로 확인하고 있다”고 자평한 뒤 “여러분의 땀과 노력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임직원을 격려했다. 정 사장은 “우리는 지금 완전히 새롭게 제기되는 시청자들의 강력한 요구와 기대를 마주하고 있다. 훨씬 지혜로워진 시청자들은 우리 기사를 팩트체크하고 훨씬 더 정확한 보도, 허점 없는 보도, 훨씬 공정한 보도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편파적이지 않는 패널 배치로 균형 있는 분석을 해달라고 준업한 목소리로 요구한다”며 “‘믿고 볼 수 있는 뉴스’, ‘맥락과 통찰력이 있는 뉴스’를 만들고 있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끊임없이 스스로에 붇고, 붇고 또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정 사장은 “빛나는 10년의 정신을 바탕으로, 더 빛나고 자랑스러운 10년을 향해 고민하자”며 “건강한 YTN의 미래를 위해 우리 함께 지혜를, 용기를,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으로 시작해서 조국으로 끝난 한 달여 시간을 보냈다. 전 국민이 조국 사태에 매달렸다. 그 상황의 중심에 정부 여당과 자유한국당의 적대적 대결이 존재했고 그 가운데 조국 사태가 있었다. 특이하고 낯선 광경이지만 비슷한 상황을 2년 내내 겪었다. 그러나 그 전인들 달랐으랴. 정치권의 후진적인 광경을 언제까지 봐주어야 할지 의문이다. 인류사회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싸움에 관한 것인데 한반도는 지난 200년 동안 원치 않는 싸움을 겪었다. 조선 후기의 농민반란과 동학혁명, 망국에 저항한 의병운동, 식민통치하에서의 독립운동과 전시동원 등 형극의 길을 걸었다. 동학혁명 후 자행된 대량 살육과 식민지 말기에 군국주의가 강요한 징병과 징용, 정신대와 위안부 등 전방위적인 수탈은 가혹한 고통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독립으로 보상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은 역사로부터 배신당하고 강대국에게서 배신당했다. 조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친일파에게 점거되면서 해방의 꿈은 사라졌다. 해방된 조선에서 친일파의 부활은 모든 환란의 원인이었고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구약 말씀을 빌리면 ‘태초에 친일파가 있었다’. 해방으로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친일파로 인해 일본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1공화국에서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거듭 바뀌었지만 친일파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4월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이 군사쿠데타로 무너졌을 때 그 자리는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가 차지했다. 일본군 장교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음지의 친일 권력은 양지로 확장됐다. 이 상황은 1960~7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관통했고 박정희가 사라진 1980년대로 연장됐다. 1990년대에도 무늬만 바뀌었다. 그러므로 친일파 문제는 1945년 이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며 반일종족주의로 드러난 식민지근대화론은 그 하나의 병증에 불과하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역사는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역사청산에 거듭 실패했다. 1940년대에는 해방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반민특위는 해산됐고 애국자가 학살되고 배제된 자리를 친일파가 채웠다. 1960년대에는 4월혁명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을 청산하지 못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박정희를 청산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는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래도 역사는 발전했고 그 정점에 6월항쟁이 있다. 해방 후 정치는 6월항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특히 정치변동의 경우 1987년 이전의 정변이 6월항쟁 후에는 대통령선거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정권은 4월혁명으로, 장면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은 부마항쟁 직후 암살로, 전두환 정권은 6월항쟁으로 무너졌다. 모두가 정변이었다. 그러다가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부활하면서 선거가 정치변동의 제도적 계기로 작동했다. 한 단계 질적 도약을 이룬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의 좌절을 7년 만에 성공으로 복원해 낸 희망의 횃불이었고 한국 현대사의 거듭된 실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의 첫 번째 결과는 노태우 집권이었고, 두 번째 결과는 3당 합당이었다. 기대에 반하는 두 번의 실패로 전두환 독재는 사실상 살아남았다. 전두환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굴절된 현대사가 살아남았고, 부패 기득권 세력은 반성도 처벌도 없이 민주사회에 정착해 민주화의 혜택을 누렸다. 오늘날의 모순적인 정당체제, 언론체제, 재벌체제, 신앙체제, 교육체제가 그 미완성의 산물이며 소모적인 정치적 대결도 여기서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과 역사청산의 실패, 이 두 가지 언어의 모순적인 조합이 6월항쟁 이후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드는 상황,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은 간절하지만 친일파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압도하는 상황, 정의와 도덕을 향한 의지는 강하지만 불의와 부도덕이 판치는 세상,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이 소모적인 대결, 이것이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한국 정치는 이렇게 구조화된 역사사회적 대결 구조를 여의도 방식으로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표출한다. 이것이 여의도 현실 정치의 민낯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시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청산하는 과제와 맞닥뜨려 있다. 이 과제는 지난 9년간의 국정 파탄을 정리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 청산되지 못한 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두 전직 대통령과 몇몇 측근이 구속됐지만, 중요한 것은 인신 구속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정부와 정치권의 한계도 있지만, 역사청산에 반대하는 기득권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탄핵 이전의 헌정 질서 문란과 탄핵 이후의 정치적 갈등 역시 그 저항의 일환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의 국회는 소란한 동물국회와 무능한 식물국회를 합친 동식물 합동국회로 전락해 버렸다. 삼권의 한 축인 국회에서는 모든 안건이 논란으로 비화하고, 논란은 저급하기 짝이 없고, 어떤 형태의 시시비비조차 가리지 못하고,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렸다. 국회는 가장 나쁜 사람들의 집합소인 양 타락해 버렸다. 국회가 실종되고 삼권분립체제가 무너진 상황이다. 그 근저에 친일파가 있고 친일파에서 변신을 거듭해 오늘에 이른 부패 기득권 세력이 있다.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는 반공주의자로, 군사쿠데타 후에는 경제역군으로, 6월항쟁 후에는 자칭 산업화 주역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뿌리가 친일파이고 근본 속성이 부패 기득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친일 전력과 부패 문제가 불거지자 이들은 반공안보 논리에 기대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화가 부패 기득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추상적 이념 대결이나 단순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상을 만들어 가는 본질적인 과정이다. 결국 현대사의 누적된 이 갈등 구조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식이 역사적 대결일지 역사적 타협일지를 결정해야 할 양자택일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묵인과 지연이 용납됐지만, 더이상은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과 같이 소모적인 정파적 대결이 계속되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도 없고 장차 나라의 미래가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저급한 정파적 대결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국면에서 역사적 대결론은 확실한 역사청산을 통해서 현대사를 바로잡고 그것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역사적 타협론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우리 사회가 그 반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공존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든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그 후의 대통령선거가 역사청산의 마지막 계기가 될 것이다. 바로 이 역사의 전환기 국면에서 촛불이 혁명으로 발전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를 태워 미래를 밝힌다. 촛불혁명은 30년 전 거세게 타올랐던 6월항쟁의 횃불을 계승해 6월항쟁의 미완성 의지를 복원하기 위한 혁명으로 자리잡았다. 촛불혁명은 부패 권력의 국정농단에 대한 저항이라는 1단계 현재시제를 표상하지만 아울러 6월항쟁이 이루지 못한 역사청산의 최종적인 종결을 지향하는 과거완료형인 동시에 조만간 다가올 통일된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미래완료형으로서 과거와 미래까지 함축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 2단계와 3단계를 기대한다. 상지대 총장
  • 심재철 의원에 “정신질환자” 글 올린 30대, 모욕죄 무죄

    심재철 의원에 “정신질환자” 글 올린 30대, 모욕죄 무죄

    법원 “과격하지만 의견 제시…처벌하면 표현의 자유 침해 위험”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을 향해 ‘정신질환자’라고 표현한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고소당한 30대가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4단독 박용근 판사는 모욕 혐의로 기소된 조모(35)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14일 밝혔다. 조씨는 2017년 11월 29일 자신의 주거지에서 블로그에 접속해 심재철 의원을 모욕하는 글을 올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조씨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이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했으나 그는 더 나쁜 인간이 됩니다. 변절의 아이콘 심재철이 또 하나의 별명을 만들고자 합니다. 바로 정신질환 심재철입니다. 대꾸할 가치가 없는 멍멍이 소리입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검찰은 공연히 피해자를 모욕한 혐의로 조씨를 벌금 100만원에 약식기소했지만, 조씨는 무죄를 적극 다퉈보겠다면서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조씨의 게시물이 모욕적 언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사회의 통상적 규범에 어긋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정신질환자 지칭과 ‘멍멍이 소리’라고 표현하는 글은 객관적으로 심재철 의원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모욕적 언사에 해당한다”면서도 조씨가 글을 올렸을 당시 정치 상황과 표현의 자유를 고려할 때 위법성은 없다고 판시했다. 2017년 11월 28일 당시 국회 부의장이었던 심재철 의원은 국회 정론관에서 ‘문재인 정부는 불법적으로 국민의 혈세를 사용해 점령군처럼 국가기밀을 마구 뒤지는 모든 과거사위원회를 즉각 해체해야 한다. 내란죄와 국가기밀누설죄로 형사고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언론 브리핑을 해 논란이 일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심재철 의원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려고 글을 작성한 것이지 모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면서 “실제로 피고인은 당시 심재철 의원 발언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모욕 표현을 기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게시물의 표현을 다소 과격하고 모욕적인 언사로 볼 수 있지만, 심재철 의원을 망신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정치인의 자격이나 행동과 관련해 정치적 행위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상당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공인의 공적 활동에 대해 비하적 표현으로 부정적 의견을 제기했다는 사유로 광범위한 형사처분이 가해질 경우 활발한 비판과 토론을 통한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사설] 일본은 독일의 과거사 반성 노력 안 보이나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촉발된 사상 최악의 한일 대립이 장기화할 조짐이다. 일본은 대법원이 내린 일본 기업에 대한 배상 명령을 한국 정부가 해결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주권 국가의 사법부 판결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고, 민간 기업이 져야 할 배상 책임을 가로막는 일본 정부의 오만과 비상식은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배 36년의 과오를 망각한 아베 신조 정권의 역사수정주의에서 비롯됐다. 지난 1일 폴란드 비엘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는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나란히 참가했다. 비엘룬은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 공군이 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며 기습공격을 감행해 도심의 75%가량이 파괴되고 1200명의 인명이 희생된 지역이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독일의 압제에 희생된 폴란드인들을 기리며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했다. 그는 지난달 이탈리아에서 열린 나치의 민간인 학살 추모행사에 참석해서는 “독일의 책임은 종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언제까지 한국에 사죄해야 하느냐”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고 가해자가 도리어 피해자인 양하는 일본과는 천양지차다. 독일도 처음에는 전후 국가배상에 소극적이었지만 피침략 국가와 시민들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독일의 책임은 종결되지 않는다’는 겸허한 입장으로 바뀌었다. 주목할 것은 2000년 들어 독일 정부와 기업이 각각 50억 마르크씩 출연해 ‘기억·책임·미래재단’을 만들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돼 보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한국 사법부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세계는 독일이 묵묵히 실천하는 과거사 반성의 노력을 주목한다. 일본은 보복을 철회하고 사태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야 한다.
  • “독일은 진솔하게 반성” 文 작심비판에도… 정상외교 포기한 日

    “독일은 진솔하게 반성” 文 작심비판에도… 정상외교 포기한 日

    日, 한국 외교적 해결 노력 무대응 일관 지소미아 종료 후 첫 국장급 협의도 이견 韓 “한일 수출관리당국 조속히 대화를”문재인 대통령은 29일 일본의 명분 없는 경제보복에 대해 ‘정직’을 키워드로 앞세워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형식상 외교 당국 간 채널은 유지하면서도 기존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어 사실상 ‘정상외교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비판마저 제기된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은 끝이 없는 일로, 한 번 반성을 말했으니 반성을 끝냈다거나 한 번 합의했으니 과거가 지나갔다고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독일이 과거에 대해 진솔하게 반성하고 잘못에 대해 시시때때로 확인하며 이웃 유럽국가와 화해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신뢰받는 나라가 됐다는 것을 일본은 깊이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사는 외면한 채 적반하장식 경제보복을 강행한 일본의 태도를 같은 전범국인 독일에 빗대 역사를 바라보는 ‘정직한 태도’가 사태 해결 및 미래지향적 관계의 출발점임을 지적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며 “모든 나라가 부끄러운 역사를 갖고 있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할 때 우리는 거듭날 수 있다”고 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도 “일본 정치인들은 역사 앞에서 얼마나 정직한지 묻고 싶다”며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 및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사례를 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쉽사리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최근 강경 대응에 나선 배경에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적 노력을 무시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1월 한국 법원이 강제징용 배상과 관련, 신일철주금 자산 압류를 결정하자 한일 청구권협정 3조 1항에 의거해 외교적 협의를 요청했다. 일본은 애초 이 문제를 한국과 협의할 생각 없이 서둘러 보복 조치의 수순을 밟고자 답변 기한을 이례적으로 ‘30일 이내’로 설정했다. 5월에 일본은 한국이 30일 이내로 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로 청구권협정에 따라 중재위원회 개최를 공식 요청했다. 정부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청구권협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분쟁 절차가 아닌 통상적인 외교 협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정부는 6월 일본 측에 한일 기업이 출연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1+1’안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묵살했다. 오히려 일본의 중재위 개최·구성 요청에 대한 답변 기한인 60일 이내에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은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했고, 이후 한국의 대화·협의 요청을 거부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편 김정한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이날 서울에서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결정 이후 처음으로 국장급 협의를 가졌지만 이견만 확인한 채 끝났다. 외교부 관계자에 따르면 가나스기 국장은 먼저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재검토할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에 김 국장은 “다른 것을 논하기 전에 일본이 지난 28일 시행한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 한국 제외를 철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한일 수출관리 당국 간 무조건적이고 진지한 대화가 조속히 성사돼야 함을 강조했다. 가나스기 국장이 한국의 메시지를 경제산업성에 전달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산성은 대화 거부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성사 가능성은 낮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정-치어쓰] ‘백색국가 제외’ 끝내 강행한 아베는 누구인가

    [정-치어쓰] ‘백색국가 제외’ 끝내 강행한 아베는 누구인가

    일본이 지난 28일 예정대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 대상국)에서 제외하는 제도를 강행했습니다. 이날 밤 12시를 기해 일본 기업들의 대(對) 한국 수출 절차가 대폭 강화된 겁니다. 지난 24일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한 바 있는데요.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무리한 경제 보복으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경제, 안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도 “일본이 과거사를 직시하지 않은 게 원인”이라는 자성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15일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4주년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해 반성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죠. 도대체 아베 총리는 어떤 인물이길래? 이런 ‘일방독주’의 모습을 보이는 걸까요. 아베 총리의 모든 것, 7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습니다.<아베와 세 친구(?)> 현재 아베 총리는 과거 한국 침략했던 일에 대한 사과 없이 개헌을 통해 전쟁국가로 거듭나려 합니다. 여기에 영향을 준 인물이 세 사람 있는데요. 첫 번째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입니다. A급 전쟁범죄 용의자로 구속 수사를 받았고, 군국주의의 화신이라 불리는 인물이죠. 총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베 총리의 어머니이자 기시 전 총리의 딸인 기시 요코는 “아베 정책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두 번째는 아베 총리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征韓論·조선정복론)을 주장하고 조선 침략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길러낸 인물입니다. 대표적인 일본 우익 사상가죠. 아베 총리의 정치적 고향인 야마구치 현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카스기 신사쿠’입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데요. 아베 신조 총리와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두 사람 모두 이 사람의 ‘신(晋)’이라는 한자를 함께 씁니다. 세 친구(?)를 보면 아베 총리의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겠죠.<비선 실세? ‘일본 회의’> 비선 실세는 권력을 가진 자의 뒤에서 은밀히 실제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아베 총리에게도 이러한 비선 실세가 있는데요. 바로 ‘일본 회의’라는 조직으로 우익세력의 정점에 있다고 지목되는 곳입니다. 사실상 공개된 조직이니 비선실세라기 보다 아베 총리의 지지세력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요. 여하튼 이들은 “헌법개정을 통해 패망 이전처럼 자위대를 군대 화 해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잡아야 한다”라고 일관되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본 회의 소속 국회의원 모임인 ‘일본 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입니다. 여야 의원들이 국회 안에 만든 모임인데요. 여기 속해 있는 각료가 전체의 80%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회의가 일본 정계를 주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죠. 아베 총리는 특별 고문이고요. 어떤 사람을 알고 싶으면 주변 친구들을 보라고 하는데요. 아베 총리의 주변 인물과 조직을 보면 아베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느낌이 오실 겁니다. <‘매파의 젊은 기수’ 아베> 아베 총리는 1993년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지역구 야마구치현을 물려받습니다. 이후 한국의 국무총리실 역할을 하는 내각 관방부의 ‘넘버 2’에 오르는 등 이른 나이에 중요한 자리에 오릅니다. 집안의 후광을 받아 승승장구했지만 정치인 개인으로서 ‘아베 신조’의 능력을 널리 알리는 데는 실패하죠. 그러다가 2002년 당시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로 방북하면서 정치적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북한이 납치 문제에 사과와 인정을 하지 않자 아베 총리가 “안이한 타협은 없다. 차라리 도쿄로 철수하자”라며 강경하게 대응한 거죠. 국내로 돌아온 뒤 아베 총리의 강경한 발언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아베 총리는 ‘매파의 젊은 기수’로 떠오릅니다. 2004년에는 납치 피해자 5명이 일본으로 일시 귀국하는데 아베 총리가 “(피해자들을) 북한으로 다시 돌려보내면 안된다”라고 역시나 강하게 주장합니다. 자연스레 ‘납치 피해자 문제=아베’ 이런 공식이 생겼죠. 이 사건으로 북한과 일본은 외교적으로 갈라섰지만 ‘아베 신조’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최연소 총리, 최장수 총리(올해 11월 이후)라는 타이틀도 달 수 있었던 거죠.<왜 개헌에 집착할까> 앞서 말했지만 아베 총리와 세 친구들이 꿈꿨던 세상은 군사적으로 강한 일본입니다. 아베 총리는 3연임에 성공한 뒤 “나의 맡겨진 임무로 남은 임기 동안 당연히 헌법 개정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도 “일본이 헌법 9조를 버릴 때가 됐다”라고 말했고요. 이들은 왜 헌법 개정에 집착할까요. 현재 일본 헌법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만들어졌습니다. 당연히 패망한 직후다 보니 전쟁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내용(헌법 9조)이 들어갔죠. 일본이 직접적으로 군사행동을 못 하게 한 겁니다. 실제로 일본은 군대가 아닌 자신들만을 지키기 위한 부대인 자위대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정리해보면 일본 헌법은 아베가 꿈꾸는 ‘군사대국’ 일본으로 가는 데 걸림돌인 겁니다. 그래서 헌법, 특히 헌법 9조의 내용을 바꿔서 전쟁 도발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아베 총리 인생의 과업이지만 국회와 국민들의 찬성이 있어야 해서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사학 스캔들’의 중심, 아베 아키에> 아베 아키에는 아베 총리의 부인입니다. 현재 일본은 ‘혼인한 부부는 동성(同姓)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민법 750조에 따라 부부는 서로 다른 성을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름은 남편의 성인 ‘아베’를 따라 쓴 거죠. 여하튼 아키에의 아버지는 대형 제과회사인 모리나가제과의 사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재계 사람인 거죠. 이러한 이유로 1987년 두 사람의 결혼 당시 정재계의 정략결혼이라는 말이 많았습니다. 아키에는 매우 사교적이고 술 마시기를 좋아해 아베 총리와는 좀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아키에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요. 아베 총리가 두 번째 총리가 됐을 때 술집을 연 겁니다. 최근에는 사학 스캔들의 중심에 서면서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아베의 한국 인맥은> 아베 총리 한국 인맥의 핵심은 롯데가(家)입니다. 유명한 일화는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시게미쓰 사토시, 한국 이름은 신유열씨의 결혼식 피로연장에 아베 총리가 등장한 건데요. 그냥 얼굴만 내민 게 아니라 실제 축사를 하고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롯데가는 신격호 명예회장이 재일교포로서 대그룹을 일구는 과정에서 일본 유력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신 회장이 결혼할 때도 주례를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가 맡고 그 외에 2명의 전현직 총리가 참석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베 총리는 한국 인맥이 넓은 편은 아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일간에 물밑 인맥이 중요하던 시절에는 정계에서 아베 총리가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불매운동의 중심’ 유니클로> 요즘 불매운동의 직격타를 맞은 유니클로의 본사는 야마구치현에 있습니다. 야나이 다다시 회장이 야마구치현 출신이죠. 아베 총리의 정치적 고향과 같습니다. 실제로 이곳에서 정재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죠. 여하튼 야나이 다다시 회장은 일본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매년 부자 1, 2위를 다툴 정도로 기업의 성공을 일궈냈습니다. 처음부터 회사가 엄청났던 건 아니고 시작은 야마구치 현에서 조그맣게 오고리 상사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1984년까지는 아버지가 사장을 맡아서 하고 이후에 야나이 다다시가 사장으로 취임해서 운영을 한 겁니다. 같은 해 6월 일본 서부 히로시마 시에 유니크한 의류라는 뜻의 유니클로 1호점을 열었고요. 지금은 전 세계에 매장만 2000여 개 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문 대통령 “수시로 말 바꾸는 일본…정직해야 한다”

    문 대통령 “수시로 말 바꾸는 일본…정직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9일 청와대에서 내년도 예산안 의결을 위해 주재한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일본 정부가 어떤 이유로 변명하든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문제와 연계한 게 분명한데도 대단히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일본은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일본은 경제 보복의 이유조차도 정직하게 밝히지 않고 있고, 근거 없이 수시로 말을 바꾸며 경제보복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한일관계 악화 원인을 안보상의 이유, 한일청구권협정 위반,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한국 정부의 미대응 등으로 오락가락하며 상황에 따라 말 바꾸기를 일삼는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특히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일 갈등의 원인이 한일청구권협정을 위반해 국가 간 약속을 저버린 한국에 갈등의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문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를 대하는 태도 또한 정직하지 못하다”며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행한 과거사가 있었고, 그 가해자가 일본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도 반성도 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피해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덧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첫 희생이 됐던 독도는 자신의 영토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주장도 변함없다”면서 “일본은 과거사를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해 세계와 협력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며 “모든 나라가 부끄러운 역사 갖고 있고 한국도 외세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운 역사가 있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할 때 우리는 거듭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과거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은 끝없는 일로, 한 번 반성을 말했으니 반성을 끝냈다거나 한 번 합의했으니 과거가 지나갔다고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독일이 과거에 대해 진솔하게 반성하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시시때때로 확인하며 이웃 유럽국가와 화해하며 국제사회에서 신뢰받는 나라가 됐다는 것을 일본은 깊이 새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결국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 조치가 시행돼 매우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능히 헤쳐나갈 수 있다”며 “정부는 다각도로 대비책을 준비해왔고, 우리 경제·기업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준비한 대책을 빈틈없이 시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제조업 등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기회로 삼고, 일본의 부당한 경제 보복에 대응한 조치도 당당히 실행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일본의 경제 보복 와중에 강한 경제, 강한 나라로 가기 위한 정부의 의지를 담아 예산을 편성한 만큼 앞으로 과정이 중요하다”며 “사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아니더라도 우리 경제가 가야 할 방향이었고, 일본의 보복이 그 방향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에 대한 폭넓은 국민 공감대를 형성하고 앞으로 있을 국회 예산심사가 국민 눈높이에서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국회의 이해·협조를 얻는 데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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