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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망명녀’ 다시 잇다

    100년 전 ‘망명녀’ 다시 잇다

    신랄하고 리듬감 넘치는 근대 여성 작가 김말봉의 이야기를 한 세기 뒤의 여성 작가인 박솔뫼가 이어서 썼다. 같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말씨도 어휘도, 심지어 그들이 서 있는 마음의 풍경조차도 크게 다르다.‘기도를 위하여’(작가정신)는 출판사의 프로젝트인 ‘소설, 잇다’의 네 번째 책이다. 근대와 현대의 여성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한 뒤 이들의 소설을 한 권의 책에 담아서 읽어 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선배가 쓴 소설의 뒷이야기를 후배가 상상력을 발휘해 이어 나가는 방식이다. “나를 흉악한 구렁에서 건져낸 은인에게 머리를 베어 신이라도 삼아 바쳐야 할 윤숙이에게 이렇게 쓴잔으로 갚아야 되는가 어디 남자가 없어서 하필 윤숙이의 애인을 빼앗게 되는고……”(‘망명녀’, 44쪽)김말봉의 데뷔작 ‘망명녀’는 박솔뫼의 ‘기도를 위하여’로 이어진다. 담배와 모르핀에 중독된 명월관 기생 최순애는 친구 허윤숙의 도움으로 구렁텅이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계기를 얻는다. 그러나 이미 흐트러진 생활의 기강을 혼자서 다잡는 건 어려운 일. 그러던 순애는 별안간 윤숙의 애인 윤정섭이 설파하는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되고, 자연스레 그에게도 이끌린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떠오르는 세 사람의 엇갈린 사랑. 순애는 정섭과 결혼을 맹세하고 그와 함께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둘의 결혼식 날 정섭은 순애에게 소포를 보내는데, 어떤 위험한 물건을 전해 달라는 내용이다. 박솔뫼는 감옥에 갇힌 순애와 정섭이 ‘옥중 혼례’를 치른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도 윤숙의 도움으로 순애는 감옥을 빠져나오지만, 목숨을 오래 부지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하지만 죽은 순애는 이내 산 사람의 세계로 넘어오고 순애의 혼과 윤숙, 정섭은 한자리에 눕는다. 셋은 각자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단편과 장편을 넘나들며 활약한 김말봉은 개성이 뚜렷한 필치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 좀처럼 제대로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 그는 당대 어느 문학평론가가 소설을 왜 쓰느냐고 묻자 대뜸 “돈 벌려고 쓰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누가 뭐래도 소설은 재밌어야 하고 널리 읽혀 독자들에게 선의의 감동을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설은 철저히 대중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철칙을 지켰던 그는 현실에서도 대중 안에 있었다. 3·1운동 때 시위대 맨 앞에 있다가 구금됐으며, 해방 후에는 공창 폐지 입법화에도 앞장섰던 대가 센 여성 운동가다. ‘망명녀’ 외에도 김말봉의 걸작 단편 ‘고행’과 ‘편지’도 실려 있다. 특히 ‘고행’은 읽고 있으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좀체 참을 수 없을 정도다.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아내를 속이고 내연녀 ‘미자’의 집으로 간 주인공 남성. 그러나 미자와 절친한 사이인 그의 아내도 때마침 미자네 집으로 찾아온다. 결국 알몸으로 벽장에 숨어서는 아내가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린다. 하필 수박을 한 접시 먹고 거기다가 맥주까지 마신 그는 밀려오는 요의에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힘껏 오줌을 참으면서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그의 모습은 애잔하기 짝이 없다. “그래 남자가 오입 좀 하였기로서니 어떻단 말이야. 세계를 정복한 나폴레옹의 궁중 생활은 어떠하였으며 더구나 진시황은 삼천 궁녀를 그리고 솔로몬 왕은 일천 왕비를 두지 않았는가. 남자가 이렇게 담이 없고 기분이 없어 어디다 써?”(‘고행’, 82쪽)
  • ‘5·18 폄훼’ 인천시의장 의장직 박탈

    ‘5·18 폄훼’ 인천시의장 의장직 박탈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내용이 담긴 정기간행물을 동료의원 전원에게 배포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허식(65) 인천시의회 의장이 의장직을 박탈당했다. 인천시의회는 24일 본회의를 열어 한민수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시의원 18명이 공동 발의한 ‘인천시의회 의장 불신임의 건’을 찬성 24표, 반대 7표, 기권 2표로 가결했다. 의장이 불신임으로 물러나게 된 건 1991년 인천시의회 출범 이후 처음이다. 인천시의회는 국민의힘에서 탈당해 무소속이 된 허 전 의장을 뺀 39명 중 국민의힘 소속 의원이 25명,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이 14명이다. 허 전 의장은 5·18 폄훼 논란과 관련해 자신의 징계를 논의할 국민의힘 인천시당 윤리위원회 개최가 예고되자 지난 7일 탈당했다. 탈당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들은 허 전 의장이 지방의원의 품위 유지 의무를 위반했고 역사를 왜곡해 시의회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며 불신임안을 발의하고 의장직 자진 사퇴를 요구해 왔다. 이날 본회의에 참석한 허 전 의장은 신상발언을 요청, 시의원 39명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의장불신임안 반대를 읍소했지만, 의원들은 대거 불신임표를 던졌다. 허 전 의장은 의장직을 잃었지만, 시의원 신분은 유지된다. 당초 시의회는 전날 불신임안을 심의·의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본회의 진행을 맡은 허 전 의장이 안건 상정을 거부해 처리하지 못했다. 허 전 의장은 앞서 지난 2일 동료 의원실에 ‘5·18 특별판’이 실린 특정 간행물을 배포했다. 총 40면으로 제작된 신문에는 ‘5·18은 DJ 세력·북한이 주도한 내란’이라거나 ‘5·18 유공자 상당수가 5·18과 관련 없는 인물’이라는 등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주장이 담겼다. 그는 과거에도 “인천 교육이 교묘히 공산주의를 교육시키고 있다”거나, “미추홀구 초등학생들은 욕을 입에 달고 다닌다”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켰다.
  •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가 필요한 지금, 프라하 ‘존 레논 벽’ [한ZOOM]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가 필요한 지금, 프라하 ‘존 레논 벽’ [한ZOOM]

    4년 전 가을 구글 맵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있었다. 도착한 장소는 스트리트 뷰로 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가 봐도 공사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레논 벽’(Lennon Wall)은 불투명 천막에 가려져 있어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4년이 지나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때 다행히 몸은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 멀리 4년 전 천막에 가려져 있던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벽 앞에 서서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마침내 ‘존 레논 벽’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 이에요.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It’s been a long time. Good to see you again.)서울의 봄 그리고 프라하의 봄 1968년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ček·1921~1992)가 체코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개혁주의자였던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의 행보는 체코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소련은 둡체크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둡체크가 일으킨 변화의 물결이 공산권 국가로 퍼져 나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체코로 군대를 보냈고,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는 소련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끌려갔다. 둡체크는 유혈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체코 군대와 국민들에게 소련에 저항하지 말 것을 당부한 후 소련에 투항했다. 당시 한 외신기자가 이 사태를 두고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라는 기사를 썼다. 이후 ‘봄’은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부다페스트의 봄’, ‘서울의 봄’ 등 자유화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체코사태 이후 약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동구권에 불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이 프라하에도 불었다. 1989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찰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무력은 변화의 바람을 이길 수 없었다. 주변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체코의 반정부 평화시위도 식을 줄 몰랐다. 결국 체코 공산당은 물러갔고, 역사는 이 혁명을 피를 흘리지 않고 자유를 얻었다고 하여,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기록하고 있다.‘프라하의 봄’을 예견한 존 레논 1980년 12월 8일 미국 뉴욕 다코타 빌딩(The Dakota) 앞에서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을 맞은 남자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과도한 출혈로 사망했다. 그는 비틀즈의 멤버였고 싱어송라이터 이자 평화주의 사회운동가인 존 레논(John Lennon·1940~1980)이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던 존 레논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체코에서 익명의 화가가 천주교 성당 벽에 존 레논의 얼굴과 그의 노래 가사를 그렸다. 이후 이 벽에는 자유와 평화를 주제로 한 글과 그림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공산당 정부는 이 벽에 그려진 메시지를 지웠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메시지들이 채워졌다. 벽을 허물면 그만이겠지만 아무리 정부라고 해도 천주교 성당 벽을 마음대로 허물 수는 없었다. 1989년 프라하에서 벨벳혁명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비밀리에 모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개방된, 그러면서 잘 알려진 장소가 필요했다. 레논 벽이 바로 그런 장소였다. 매일 이 곳에서 출발해 바츨라프 광장으로 이어지는 시위와 촛불집회가 일어났고 결국 자유를 얻어낼 수 있었다.만나지 못한 ‘존 레논’과 ‘레논 벽’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레논 벽을 찾아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존 레논은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많은 사람들이 존 레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 곳을 찾는 이유는 존 레논과 같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가족을 잃어가고 있다. 존 레논 당신이 꿈꾸었던 세상이 자꾸만 거꾸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평화를 위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도로 힘을 보태기 위해 이 곳을 찾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그 기도가 실현되길 바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 “우리 찍지 마” 영국 유튜버에 행패 中 제작진… “여기 영국인데?”

    “우리 찍지 마” 영국 유튜버에 행패 中 제작진… “여기 영국인데?”

    영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유튜버가 공공장소에서 영상을 촬영했다 중국 TV 제작진에게 영상을 삭제하라는 황당한 요구를 받아 화제다. 평소 자신의 연주를 생중계하는 유튜브 구독자 219만명의 브렌던 카버너(Brendan Kavanaugh)는 최근 영국 런던의 한 쇼핑센터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피아노 주변에는 오성홍기를 든 중국인 무리가 있었는데 그의 연주 영상에 중국인들이 함께 담겼다. 지나가는 다른 시민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등 평소처럼 영상을 찍던 그는 모여 있던 중국인들에게 말을 걸었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여성이 다가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이 영상에 담기느냐고 물었다. 카버너는 “나도 모르겠다. 허락받아야 하느냐?” 묻자 그 여성은 “우리는 중국 TV 촬영을 왔기 때문에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중국 법에 따라 여기서 촬영할 수 없다는 거냐”고 물었지만 중국인들은 반복해서 초상권을 주장했다. 이어 카버너가 한 여성이 들고 있던 중국 국기를 가리키자 상황이 악화됐다. 무리의 한 남성이 “그녀에게 손대지 말라”고 소리 질렀고 “우리 얼굴을 안 나가게 해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이들은 “우리 이미지를 공유할 수 없다. 이건 우리 권리”라고 주장하며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카버너는 “우리는 중국이 아니라 영국에 있다. 우린 자유국가에 있지 공산주의 중국에 있는 게 아니다”고 말하며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에 살고 있고 원하는 곳에서 촬영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경꾼 한 명도 “촬영되는 게 싫으면 떠나라”고 말했다. 이들의 다툼에 결국 영국 경찰까지 출동했다. 중국인들은 영국 경찰관에게 삭제를 요청했지만 오히려 “공공장소에서는 촬영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촬영 중이고 당신이 공공장소에 있다면 당신 얼굴이 비디오에 나올 수 있다”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얼굴이 나가길 원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 유튜브 영상은 23일 오후 3시 기준 37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엑스 등 다른 소셜미디어(SNS)에서도 수없이 공유되며 수백만명이 영상을 봤다. 화제가 되자 카버너는 22일(현지시간) 유튜브에 긴급 후속 영상을 올려 중국인으로부터 온 메일을 소개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익명의 메일이 왔는데 영상 속 나온 이들이 허가 없이 불법적으로 촬영을 하는 것 같아 보인다더라”고 말했다.
  • [김천식의 통일직설] 대한민국은 통일 이끌 책임 국가다/통일연구원장·전 통일부 차관

    [김천식의 통일직설] 대한민국은 통일 이끌 책임 국가다/통일연구원장·전 통일부 차관

    북한은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대한민국을 핵무기로 초토화시키는 대사변을 준비하고 있다. 남한은 더이상 동족도 아니며 화해와 통일을 추구하지도 않겠다고 한다. 이에 맞춰 헌법을 바꾸고 남북 관계 기구를 폐쇄하며 통일기념물을 치우는 등 분단 영구화에 몰입하고 있다. 북한은 핵을 가졌으나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인민들의 마음은 자꾸 ‘남조선’으로 향하고 있다. 여러 법을 만들어 사형까지 시키면서 한류를 틀어막고자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통일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다. 이제 북한 주민들의 마음에서 동족·화해·통일을 완전히 지우고 적대감에 들끓게 함으로써 남한에 대한 동경과 기대를 단념시키는 것이 급한 듯하다. 한민족은 통일된 자주독립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해 개인의 생명,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한결같은 꿈을 갖고 있다. 이를 거부하거나 방해하면 누구든 반민족 세력이 되는 것이다. 분단되는 순간부터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하겠다는 목표로 치열한 체제 경쟁을 해 왔다. 이러한 관계에서 남북한은 자기 체제가 한민족의 꿈을 더 잘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마지막 선택은 자유로운 8000만 한국인이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북한 정권은 북한 주민의 자결권 행사를 봉쇄해 평화통일의 가능성을 없애려 한다. 북한 정권은 스스로 반민족 세력, 반평화 세력임을 증명했다. 이제 핵전쟁의 참화를 막고 8000만 한민족 통일 국가의 꿈을 실현하며 민족사의 정통을 이어 가야 할 책임은 완전히 대한민국의 몫이 됐다. 북한이 핵전쟁을 추구하며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합의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자유와 인권의 보편 가치나 민주공화국을 실현한 정치적 선진성이나 경제력 면에서 통일을 이끌 힘과 당위성은 대한민국에 있다. 그러나 북한이 두 국가 관계를 주장하자 이에 맞장구치며 북한을 우리나라 영토에서 떼어내자고 하는 세력이 있다. 두 국가 주장은 명백히 헌법 위반이며 국가 반역이다. 한반도는 자연적·역사적·문화적으로 본래 하나의 실체이며 분리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영토다. 분단은 8000만 한국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하고 전쟁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한반도는 통일돼야 하며 이것이 역사의 순리다. 분단 고착을 추구하는 2국가론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핵을 가진 북한을 도와주는 일이다. 우리는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에 합의했다. 지금 우리가 2국가를 주장하게 되면 우방국이 우리의 통일 의지를 의심하게 된다. 과거 동독이 2국가 2민족을 추구했지만 결과는 인민에 의한 동독 체제 소멸이었다. 서독은 통일될 때까지 한 번도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단일 국적을 유지했다. 동독이 서독 기본법의 통일 원칙 삭제를 요구할 때에도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동독과 소련에 공한을 보내 독일 민족의 자결권 행사로 통일한다는 국가 목표는 변함없다고 통보했다. 서독 외무부는 끝까지 내독 관계에 관여한 바가 없다. 우리가 어느 길을 가야 하겠는가. 한민족은 5000년 역사로 형성됐다. 북한이 다른 민족으로 부른다 해서 뿌리 깊은 민족 정체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정권은 유한할 것이나 한민족은 앞으로도 장구할 것이다.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남북한이 개방하고 소통해 언어가 달라지지 않도록 하고 북한 동포들의 삶과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당하다. 북한의 반민족과 핵전쟁 기도는 역사의 순리를 거역하는 것이며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 작품이 되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 작품이 되다

    안경신(1888~?)과 현미옥(1903~1956?). 생소한 이름의 두 사람은 독립운동사에서 많이 조명받지 못한 인물들이다. 수많은 서사에 가려있던 이들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최근 두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명한 연극이 연달아 무대에 올랐다.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에 선정돼 지난 14일 공연을 마친 ‘언덕의 바리’, 오는 2월 1일까지 선보이는 ‘아들에게: 미옥 앨리스 현’이 그것이다. ‘언덕의 바리’는 ‘여자폭탄범 안경신’의 이야기를 한국 대표 신화 중 하나인 바리데기와 엮어 꿈과 현실을 오가는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이다. 안경신은 188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출생한 인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군중을 선동해 만세를 부르다 체포된 이력이 있다. 1920년 8월 3일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 폭탄 투척 사건을 일으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10년형으로 감형됐고 7년이 되던 해 가출옥해 친오빠의 집으로 갔다는 기록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바리공주는 한국 신화에서 대표적인 신이자 영웅으로 무당들의 조상으로 대접받는 존재. ‘바리의 언덕’은 바리라는 신화적인 존재와 안경신이 감옥에서 출소해 아들을 만났고 세상으로부터 사라진 지점을 신비롭게 결합했다. 제목에 맞춰 원래 관객들이 앉아야 하는 객석은 언덕이 됐고 관객들은 무대 바로 옆을 둘러싼 객석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구조였다.“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해요”라는 대사처럼 경신은 겉보기보다 심지가 독한 사람이다. 당대 시대상으로는 약자인 여성이지만 강한 면모를 드러내는 공통점이 바리와 경신을 이어준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임신한 몸으로 폭탄 테러를 준비한다. 임신한 경신이 아들이 혹여 예정보다 일찍 나올까 몸을 꽉 조여 맨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무한한 축복을 받아야 하는 새 생명마저 축복하지 못하는 비극적 시대상, 어미로서 죽을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했던 경신의 독기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며 강렬히 열망하는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는 경신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초 끝에 매달린 불꽃처럼 위태롭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살아가는 삶에서는 어떤 숭고함도 느껴진다. 김정 연출은 “안경신은 폭탄 투척에 실패한 뒤 자취를 감췄다는 점에서 성공하지 못한 독립운동가로 볼 수도 있다”면서도 “그의 강렬한 열망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미니멀한 무대를 한 여성의 서사가 꽉 채우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 작품이다.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아들에게’는 1903년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중국,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중국, 러시아,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현미옥(앨리스 현)의 이야기이다. 치열한 삶을 살았으나 공산주의자였기에 결국 남한과 미국에서는 설 곳이 없었고 북한에서는 미국 간첩 혐의로 죽은 경계인의 삶을 그렸다. 작품은 1956년 함경북도 청진 해안에서 미옥이 즉결심판으로 바다에 던져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디선가 나타나 기자로 칭한 인물인 박기자가 미옥의 삶을 취재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현미옥은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현순(1880~1968) 목사의 딸로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며 여운형, 박헌영과 친분을 쌓았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넘나들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을 펼쳤다. 해방 뒤엔 남한에서 미군 군무원으로 일하다 공산주의자로 찍혀 미국으로 추방됐다. 1949년 아들이 의사로 일하던 체코를 거쳐 북으로 건너가 조선중앙통신, 외무성 등에서 일하다 박헌영이 ‘미 제국주의 간첩’으로 기소됐을 때 간첩 활동 매개자로 지목돼 처형당한다.‘아들에게’는 몇 줄 글로 빠르게 요약되는 그의 삶을 아주 상세히 풀었다. “죽은 정신으로라도 이 길을 거닐겠다”며 투철한 신념을 따라 살았던 현미옥의 인생이 3시간 가까이 펼쳐진다. 제목에 대해 김수희 연출은 “현미옥의 자신의 삶을 항변한다면 가장 먼저 아들에게 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붙였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고 여자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경계인으로서 세상에서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죽는 비극을 맞는다. 현미옥의 아들 정웰링턴의 삶도 비극적인데 그 역시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1963년 체코에서 부인과 자녀를 남기고 자살한다. 격정적인 드럼 연주와 그림자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무대 연출, 삶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이 대극장 연극의 힘을 보여준다. 다만 한 사람의 삶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다 보여주려고 있었던 일을 최대한 다 넣은 탓에 극이 지나치게 늘어진 점이 작품 감상을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두 작품은 개별적이지만 나란히 요즘 창작물의 추세가 담겼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최근 창작물을 보면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 서사의 개발과 근현대 역사에서 소재를 발굴하는 흐름이 주를 이루는데 두 작품은 이 두 가지를 다 담은 딱 요즘 시대 작품이었다.
  • “여자=잠재적 성매도충”…‘국힘 인재’ 변호사가 만든 커뮤니티 논란

    “여자=잠재적 성매도충”…‘국힘 인재’ 변호사가 만든 커뮤니티 논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의 1호 영입 인재인 박상수 변호사가 만들고 운영했던 커뮤니티에 극단적인 여성 혐오 발언이 다수 게재돼온 것으로 드러났다. 박상수 변호사는 2011년 11월 로이너스를 개설했고, 이 커뮤니티에는 로스쿨 출신 변호사 및 로스쿨 재학생 2만여명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9일까지 이 커뮤니티의 회원가입 창에는 박 변호사가 ‘개인정보 보호 책임자 및 운영자’로 기재됐지만 10일 현재는 책임자가 변경된 상태다. 이 커뮤니티는 2018년 2월 서지현 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검찰 내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국면에서 “여자=잠재적 성매도충” “여자는 잠재적 영아 살인범” 등 극단적 여성혐오 발언을 담은 게시물이 올라와 논란이 됐다. 로이너스에는 지난달까지도 출산율 관련 게시글에서 “페미니즘은 공산주의 같은 것으로 경쟁에 도태된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찬동(한다)” “이쁜 여자는 페미니즘을 하지 않는다”는 댓글이 달렸다. 이와 관련 박 변호사는 지난해 로이너스 운영진직을 내려놓았으며 “커뮤니티 내 게시물을 무단으로 삭제할 경우 역으로 운영진이 고소·고발을 당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공간에서 운영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을 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현재는 블라인드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 특정 게시물에 회원 신고가 지속적으로 접수되면 해당 게시물 접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지난 5일 “국민들이 전혀 공감하지 않는 극단적인 혐오의 언행을 하는 분은 우리 당에 있을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정작 1호 영입 인재인 박 변호사가 커뮤니티 운영자로서 혐오 발언을 방치해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 선거참여 위해 4년마다 수천명 대만인 고향 방문하는 이유

    선거참여 위해 4년마다 수천명 대만인 고향 방문하는 이유

    오는 토요일인 13일 치러지는 대만의 대선은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란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대만인 수천명의 귀국 행렬이 이어질 전망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7일(현지시간) 총통(대통령)과 입법위원(국회의원)을 뽑는 이번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4000여명의 대만 재외 국민이 중앙선거위원회에 등록했다고 보도했다. 대만은 부재자 투표가 없기 때문에 선거가 벌어지는 4년을 주기로 고국을 찾는 재외 국민의 숫자가 상당하다. 대만의 재외 국민 수는 약 200만명이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미국에 사는데 이들은 선거철마다 수천달러를 들여 고향을 찾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재외 국민들의 투표 경향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대만의 정당은 해외 유권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을 방문하는 모든 대선 주자는 재외국민들을 만나는 것이 필수 코스다. 또 정당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유권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한 표를 던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항공편과 호텔을 주선하는 미국 내 조직의 숫자도 상당하다.제1야당인 국민당은 중국에 사는 100만명 이상의 대만인들을 동원하기 위해 중국 내 대만동포투자기업연합회가 10개 항공사와 협력해 선거 특별 프로모션을 마련했다가 민진당의 반발을 샀다. 민진당은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을 지지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 거주 대만인들에게 선거용 할인항공권을 제공하는 건 선거 개입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올해 선거는 1996년 첫 총통직선제 실시 이후 그동안 권력을 양분해 오던 국민당과 민진당이 아닌 제3의 정당인 민중당의 커원저(64) 후보가 얼마나 선전을 벌일지가 관심이다. 30년 가까이 외과 의사로 일하다 8년간 대만 수도인 타이베이 시장을 역임한 커 후보는 2030 젊은 대만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미국에서 30여년 산 이중국적자인 폴(65)은 선거 때마다 고국을 찾는데, 그동안은 주로 친중 성향인 국민당에 표를 던졌다. 그는 SCMP에 “투표는 대만 민주주의의 성공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이라며 “공산당 일당독재의 중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폴은 많은 대만인처럼 국민당과 민진당의 대결에 피로감을 느낀다며 “국민당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자신의 근본을 상실했으며, 민진당은 너무 급진적이고 국민당보다 더 부패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아직 3자 대결인 이번 총통 선거에서 누구를 찍을지는 선택하지 못했지만 양당체제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커 후보에 쏠린다고 털어놨다. 그는 “커원저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떠올리게 한다”면서 “기존 양 당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제는 어떤 이익이나 정당에 휘둘리지 않는 지도자를 원한다”고 말했다.현재 여론조사 발표는 금지된 상태지만 총통 후보 가운데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가 국민당의 허우유이와 커 후보를 누르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입법위원은 국민당의 지지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커 후보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10만명으로 다른 두 후보보다 훨씬 많은 등 정치 양극화에 불만을 가진 2030 세대의 지지를 얻고 있어 선거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고 홍콩프리프레스(HKFP)는 전했다.
  • [열린세상] 북한 스스로 증명한 ‘거짓평화’와 ‘무력통일’/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센터장

    [열린세상] 북한 스스로 증명한 ‘거짓평화’와 ‘무력통일’/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센터장

    북한은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연말이 되면 긴 전원회의 결과를 신년사로 대체해 왔다. 매년 대내, 대남, 대미 정책에 변화가 있는 듯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지만, 8차 당대회 이후 북한의 메시지는 북한 주민들의 정치사상 강화와 국방력 강화라는 두 개의 기조에만 매달리며 이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 개발과 수단에만 집중해 왔다. 2024년 신년사를 대체한 제8기 제9차 전원회의도 이 두 개의 기조를 강화하기 위한 평가와 정책 개발에 집중돼 있다. 북한은 김정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김정은 체제의 통일 구상과 통일정책 방향을 드러냈다. 8차 당대회에서 조기 달성을 제시한 5대 전략무기들이 상당 부분 달성됐다고 자평하고 있지만, 김정은은 경제발전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여전히 국방 최우선 정책의 속도를 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김일성의 병진정책이나 김정일의 선군정책 모두 김정은의 국방 최우선 정책과 동일하다. 명칭만 다를 뿐이다. 3대 세습체제 유지를 위해 김일성ㆍ김정일ㆍ김정은 모두 외부 위협 극대화를 통한 국방력 강화에 초점을 두어 왔던 만큼 북한 당국은 세습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국방력 강화를 위한 구실이 필요한 셈이다. 핵무력 대업 완성을 대외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카드로 초대형 핵탄두와 규격화된 전술핵탄두 화산-31의 핵실험을 제외하면 김정은에게 남은 전략 도발 카드는 없다. 속도전을 극대화한 나머지 전략 도발 카드가 거의 소진된 셈이다. 김정은이 집권 이래 손을 대지 않은 분야가 있다면 바로 통일정책이다. 따라서 이번 전원회의 결과는 그동안 장황하게 써내려 갔던 북한 사회를 향한 내부 메시지보다는 남북 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새로운 입장과 대적 사업의 정책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남북 관계가 더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돼 있다면서 이제 50년이 넘은 김일성 고려연방제의 폐기 수순을 밟겠다고 시사하고 있다. 대남 적대시 정책 강화의 새로운 버전으로 김일성ㆍ김정일 시대의 통일정책과 차별화된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통일정책 추구다. 김일성의 1973년 고려연방제, 1980년 고려민주연방제, 1991년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모두 체제경쟁에서 북한이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1민족 1국가 2체제의 ‘거짓 평화공존에 기반한 통일’을 추구했다면 김정은은 2국가 2체제의 노골적인 공산주의 무력통일 정책을 지향하고 있다. 핵국가임을 대내외에 표방하고 대남 선제 핵공격까지 법으로 설정한 이상 남북한 간 경제력, 외교력, 군사력, 정보력 등의 차이는 핵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북한은 핵무기를 통해 북한 주민의 이상적 삶이 실현되는 공산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한반도로 확대시키면 김정은 체제의 통일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어쨌든 북한은 이번 전원회의를 통해 우리에게 북한의 실체를 스스로 명확히 해 줬다. 2018년 김정은의 ‘전략적 결단’이 선대의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운 위장평화 카드가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에도 작동 가능한지를 테스트해 보기 위한 결정이었음이 드러났다. 남한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기조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통일 방안이라는 점도 밝혀졌다. 올해는 북한이 대남 정책과 통일정책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전환하는 해로 삼아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통일은 한반도의 전 주민이 소망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평화통일 방안이어야 한다. 올해는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이 채택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북한의 무력통일 방안을 무력화할 수 있는 2024년 대한민국의 새로운 통일 구상을 기대한다.
  • 머스크 “쪼개진 한반도 70년후” 위성사진 공개…北 암흑 南 불야성

    머스크 “쪼개진 한반도 70년후” 위성사진 공개…北 암흑 南 불야성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가 2023년의 마지막날인 31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남한과 북한의 위성사진을 공유했다. 머스크는 이날 ‘밤과 낮의 차이(Night and day difference)’라는 글과 함께,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을 게시했다. 조명 없이 칠흑같은 어둠에 파묻힌 북한과 눈부신 불빛에 휩싸여 불야성인 남한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머스크는 해당 사진에 “미친 아이디어:한 나라를 반은 자본주의, 반은 공산주의로 쪼개 70년 뒤 확인해 보자”는 문구를 달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따라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난 뒤 70년이 지난 지금, 남과 북의 경제적 격차가 하늘땅 차이로 벌어졌음을 시사한 것이다. KAIST 분석에 따르면 대북 경제제재가 심화된 2016년과 2019년 사이 북한에선 달러를 벌기 위해 개발한 관광경제개발지역에서 약간의 변화가 보일 뿐, 전통적인 공업지역이나 수출경제개발지역은 변화가 멈춘 것으로 나타났다. 20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3 북한의 주요통계지표’에 따르면 남북한의 1인당 소득 격차는 30배로 확대됐으며 대외 무역액 격차는 892배에 달했다. 현재까지 머스크의 게시글은 3236만명이 조회했고 36만명이 좋아요를 눌렀으며, 5만명 이상이 리트윗했다. 1만 8000개 넘는 답글도 달렸는데, 이 가운데는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인 브라이언 크라센스타인의 전망도 있었다. 크라센스타인은 “(70년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은 아마 그곳에 없을 것이다. 기술은 공산주의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자본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멸종시킬 기술을 만들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빈부 격차가 계속 벌어지지 않고 기술이 우리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도록 해결책을 찾기를 바란다”고 썼다. 영국의 한 천체물리학자는 답글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탈성장을 이뤘다. 수십년 동안 성장하지 않은 결과 탄소발자국도 적다. 꿈을 이뤘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 “북 추종세력은 내부위협”, “이승만 혜안의 지도자” 軍 정신전력 교재 개정

    “북 추종세력은 내부위협”, “이승만 혜안의 지도자” 軍 정신전력 교재 개정

    국방부가 북한 추종 이적 세력은 ‘내부의 위협’으로 명시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혜안의 지도자’로 묘사한 정신전력교재를 발간했다. 25일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실에 따르면 최근 개정 발간된 국방부 정신전력교재는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명백한 우리의 적”이라는 내용과 함께 “헌법에 반해 북한 이념과 체제 등을 추종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체제 근간을 흔들려는 세력”을 내부 위협으로 적었다. 교재는 이어 “북한의 대남적화 획책에 따라 우리 내부에는 대한민국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북한 3대 세습 정권과 최악의 인권유린 실태, 극심한 경제난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북한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통일혁명당 사건,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등이 대표적 북한의 지하당 구축 노력 사례라며 “2000년대 이후 적발된 사례로는 일심회 사건, 왕재산 간첩단 사건이 있으며 2014년에는 국회의원의 내란선동죄에 따라 정당이 해산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교재는 “최근에도 전국 곳곳에서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고 간첩 활동을 하는 등 국가보안법 위반 활동이 드러나 조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라며 “이러한 우리 내부의 위협세력은 북한식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주한미군 철수, 반공정권 타도 등 반미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현 정신전력교재에는 없는 내용이다. 교재는 또 이승만 전 대통령을 “혜안과 정치적 결단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은 지도자”로만 묘사했다. 이 전 대통령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한반도 공산화를 저지한 공(功)이 있지만, 6·25전쟁중 한강 인도교 폭파와 3·15 부정선거, 사사오입 개헌 등 과(過)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교재에 이런 과오는 전혀 담기지 않았다. 교재는 또 근현대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문민화 이전 권위주의 정부 시기에 대해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부 과오도 발생했다”라고만 썼다. 개정 정신전력 교재는 이달 말까지 전군에 배포된다.
  • “미추홀구 애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아” 인천시의회 의장 실언 논란

    “미추홀구 애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살아” 인천시의회 의장 실언 논란

    허식 인천시의회 의장이 “미추홀구 애들이 욕을 입에 달고 다닌다”며 지역을 비하하는 듯한 실언을 해 논란에 휩싸였다. 허 의장은 지난 19일 인천항 상상플랫폼에서 열린 ‘제물포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대시민 보고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최근 한 기자가 ‘미추홀구로 이사 왔는데 두 가지 면에서 실망했다. 원래 살던 청라나 송도로 돌아가야겠다’고 했다”며 “첫째는 (미추홀구) 초등학생들이 욕을 입에 달고 다닌다. 청라에선 그런 걸 못 봤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청라에는 호수공원이 있어서 쾌적하고 산책하기 좋았는데, 이쪽에 오니까 그런 물이 하나도 없다”라고 했다. 이번 발언은 제물포르네상스의 밑그림을 그리는 용역에서 중구와 동구, 미추홀구 등 인천 원도심 지역에 친수공간 사업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허 의장이 미추홀구를 비하하는 듯한 사족을 덧붙여 논란을 키웠다는 비난이 나온다. 배상록 미추홀구의회 의장은 “300만 시민을 대표하는 자리라면 단 한 마디라도 신중히 발언해야 한다”며 “본인은 원도심을 생각해서 한 말이라고 하지만 미추홀구 주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길래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허 의장은 “인천 원도심 지역에 친수공간이 부족한데도 도시 개발 용역에 이런 부분이 빠져 있어 부실하다는 점을 짚다가 나온 얘기”라며 “미추홀구 주민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앞서 허 의장은 지난 10월 송도 컨벤시아에서 열린 ‘제2회 세계를 품은 인천교육 한마당 개막식’에서도 “인천 교육이 교묘히 공산주의를 교육시키고 있다”고 발언해 구설에 올랐다.
  • [메멘토 모리] ‘붉은 여단’ 멤버 이탈리아 좌파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

    [메멘토 모리] ‘붉은 여단’ 멤버 이탈리아 좌파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

    이탈리아 출신의 좌파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AFP 통신과 dpa 통신이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네그리의 부인이자 프랑스 철학자인 주디스 레벨은 AFP에 남편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면서 고인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며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해 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망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이탈리아 좌파 정치철학인 자율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네그리는 1933년 북부 파도바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33세에 파도바 대학의 정치학 교수가 된 네그리는 시위를 조직하고 각종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탈리아 급진 좌파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극좌 주도 민중봉기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졌다고 dpa는 전했다. 네그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사보타주(파괴행위)를 촉구하면서 여러 저서를 냈고,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 운동인 ‘노동자의 자율’(Autonomia Operaia)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1978년에는 기독교민주당 소속이었던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총리가 극좌 테러조직에 암살된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공산주의 무장 조직인 붉은 여단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하지만 네그리는 급진당에 입당해 1983년 총선에서 당선된 뒤 의원 면책 특권을 활용해 출국, 프랑스로 망명했다. 1984년 이탈리아 법원은 그에게 징역 30년형을 선고했다. 그 뒤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프랑스에서 대학강사로 활동하다가 1997년 귀국해 자수했다. 검찰과 양형 거래를 해 13년형으로 감형받겠다고 약속하고서였다. 2003년 출소한 뒤에는 사망할 때까지 베네치아와 파리를 오가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학 이론 분야에서 그가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제자인 마이클 하르트와 함께 집필해 2000년 내놓은 책 ‘엠파이어’였다. 글로벌 규모의 세상에서 권력과 주권이 어떻게 변형되는지 탐구한 역저로 제국주의가 탈중심에 탈영토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또한 이 책은 학자들과 활동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 현대 정치학 이론 분야의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의 저서 대부분이 수감 생활 중 출간된 점도 흥미롭다. 언젠가 미국에서도 점유하라(occupy) 운동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 창시자가 고인이다. 2011년과 이듬해 팸플릿을 만들어 뿌렸다.
  • 尹, 헤이그 리더잘 찾아 애국정신 기려… 한국전 참전용사에 ‘영웅의 제복’ 전달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헤이그와 암스테르담을 오가며 ‘보훈’ 행보를 펼쳤다. 윤 대통령은 헤이그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리더잘’(기사의 전당)과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해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을 기렸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참전용사 간담회를 열고 오늘날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어 준 희생에 감사를 전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리더잘을 찾아 전시물을 관람하고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뜻을 되새겼다. 현재 개보수 작업이 진행 중인 리더잘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지만 네덜란드 측은 ‘헤이그 특사’ 파견과 같은 한국의 주권 회복 역사에서 지닌 의미를 고려해 특별히 윤 대통령의 방문을 주선했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리더잘에서 뤼터 총리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이준 열사 기념관을 찾아 이준 열사가 사용했던 방과 침대, 고종 황제가 수여한 특사 신임장과 전시물 등을 관람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파견됐던 이준 열사가 순국한 장소인 드용호텔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유럽 내 유일한 한국 독립운동 기념 장소로 알려져 있다. 윤 대통령은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복귀해 왕궁 인근의 한 호텔에서 열린 참전용사 간담회에서 70년 전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워 준 구순의 노병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간담회에는 특별 참석자인 카투사 출신 최병수(90)씨를 비롯해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 한국전 참전용사와 유가족,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임원, 양국 정부 인사 등 50여명이 자리했다. 최씨는 한국전쟁 당시 네덜란드 부대의 부대원으로 원주,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곳 암스테르담에서 70여년 만에 옛 네덜란드 전우들과 다시 만났다. 또 이 자리에선 한국전 참전용사 코르트 레버르(93)에게 6·25전쟁 참전 유공자 단체복인 ‘영웅의 제복’이 전달됐다.
  • 아르헨 심장 뛰게 만들까…최악 경제난 해결 ‘숙제’ 안고 밀레이 대통령궁 입성

    아르헨 심장 뛰게 만들까…최악 경제난 해결 ‘숙제’ 안고 밀레이 대통령궁 입성

    나라를 싹 바꾸겠다며 국민들 앞에 ‘전기 톱’을 들고 나섰던 하비에르 밀레이(53)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10일(현지시간) 취임한다. 2027년까지 4년간 일할 초보 정치인은 당장 연간 140%대에 이르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과 40%를 웃도는 빈곤율 등 경제 근간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지상 과제를 안고 벅찬 걸음을 내딛는다. 1983년 군사정권 종식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사를 지배한 페론주의(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을 계승한 정치이념) 집권 세력을 누르고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한 그의 앞엔 녹록잖은 현실이 기다린다. 밀레이 정부는 그러나 일단 초반 내각을 온건파로 꾸렸다. 선두주자는 루이스 카푸토(58) 경제장관 내정자다. 우파 마우시리오 마크리 정부(2015∼2019년)에서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인물로 밀레이 당선인 핵심 공약인 ‘달러화 도입’에 비판적이다. 중앙은행 총재 내정자도 공약과 달리 ‘달러화 도입 선봉장’ 에밀리오 오캄포(60)를 포기하고 산티아고 바우실리(49) 전 재무장관을 낙점했다. 역시 마크리 정부 핵심관료 출신이다. 이에 대해 현지 매체 라나시온과 암비토는 ‘달러화 도입 공약 철회’까지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내놨다. 밀레이 당선인은 그러나 “그런 걸 고려한 적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는 ‘여소야대’ 정치지형에서 반대 정파를 끌어들이며 국정운영의 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환경을 감안한 결정으로 읽힌다. 본선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한 뒤 결선투표 선거운동 과정에 마크리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운 부분도 내각 구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치안장관에도 대선 본선 라이벌이었던 ‘마크리 측’ 파트리시아 불리치(67) 전 치안장관을 내정한 바 있다. 밀레이 당선인은 선거운동 과정에 중국, 브라질, 남미공동시장(MERCOSUR) 등과의 교역에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해 왔다. 특히 중국에 대해선 “공산주의자들과 거래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등 공개적으로 반중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 및 이스라엘과의 협력 체계를 더 공고히 다질 것”이라며 미국 중심 외교 정책 구상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밀레이 정부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국이나 브라질을 등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교역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 자료를 보면 지난해 총교역액 기준 대외 교역국 1·2위는 나란히 브라질과 중국이었다. 브라질의 경우 수출액(126억 6500만 달러)만 놓고 보면 2위 중국(80억 2200만 달러)·3위 미국(66억 7500만 달러)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다만, 밀레이 정부는 지난 8월 승인을 받아둔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가입(내년 1월)에 대해 “실제적 이점이 없다”며 철회 의사를 밝혔다. 기존 18개 부처를 9개로 줄이는 부처 슬림화는 확정됐다. 애초 8개로 출범할 예정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보건부가 살아 남았다고 라나시온은 보도했다. 사회개발부, 노동사회보장부, 공공사업부, 환경부, 여성인권부 등 진보 정권에서 유력했던 부처들은 줄줄이 대통령 비서관실로 이관되거나 다른 부처로 흡수됐다. 외교부, 국방부, 내무부, 경제부, 법무부, 보건부, 치안부 등은 유지된다. 기간시설부와 인적자원부 등은 기존 부처 업무 조정을 거쳐 신설됐다. 여기에 더해 수석장관까지 장관급은 10명 선으로 꾸려졌다. 밀레이 정부 출범과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주목한 또 다른 이슈는 밀레이 당선인의 여동생 카리나(51)의 역할이다. 밀레이 당선인이 ‘보스’라고 부르며 신뢰를 숨기지 않는 카리나는 밀레이 선거 캠프 내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하는 ‘키맨’이었다. 일각에서는 카리나가 정부 부처 요직을 맡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고 텔람통신은 전했다. 그러나 실제론 특별한 직책을 맡지는 않아 오히려 자유로운 운신으로 오빠를 지근에서 보좌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그는 밀레이의 연인인 유명 코미디언 파티마 플로레스(42) 대신 영부인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고돼 있다. 밀레이 당선인은 현지 매체 인터뷰에서 “더 나은 상품을 좋은 가격에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게 성공이고, 그게 플로레스의 진정한 가치”라며, 플로레스를 방송 등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게 두는 것으로 교통 정리한 듯한 언급을 했다. 경제학자 출신 비주류였던 밀레이 당선인이 후보 시절 ‘팬덤’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한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건 특유의 ‘거친 입’ 덕분이었다. 그는 기성 정치권을 ‘카스트’(계급사회)로 형용하며 “이 길을 계속 간다면 50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큰 빈민가를 갖게 될 것”이라고 거대 여야를 싸잡아 비판했다. 자국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악마’라고 지칭하는 등 대선 후보라고 보긴 어려운 과격한 언행을 일삼았다. 자신의 첫 직장(인턴)이기도 한 중앙은행을 “정직한 아르헨티나인들로부터 물건을 훔치는 메커니즘”이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욕설을 섞은 거친 표현까지 쓰는 그에 대해 지지자들도 비속어를 넣은 구호로 화답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지난달 19일 대선 결선투표 승리 이후 무정부주의적 선동가 면모와 크게 달라진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부각했다. 자신과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당장 절연할 것 같던 ‘이웃 대국’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78) 대통령에게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속해서 공유하고 싶다”며 한층 바뀐 모습을 보여 놀라움을 안겼다. 기성 정치권과의 극단적인 차별화 전략으로 대권을 잡은 밀레이 당선인의 이런 변화 모색은 역사적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정치와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국민들의 기대를 밑돌 경우 밀레이 정권은 큰 시련에 직면하며 아르헨티나를 더 큰 혼란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영상)“위원장 동지, 울지마시라요”…北 김정은 눈물 뚝뚝, 관중은 오열 [포착]

    (영상)“위원장 동지, 울지마시라요”…北 김정은 눈물 뚝뚝, 관중은 오열 [포착]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공식 석상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를 본 참석자들도 오열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중앙통신의 4일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평양에서 열린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에 참석했다. 이날 김 위원장은 개회사에서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해짐에 따라서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은 더 높아지고 있으며 국력 강화와 혁명의 전진에 있어서 우리 어머니들의 공헌의 몫은 더욱 커지게 되여있다”며 “지금 사회적으로 놓고 보면 어머니들의 힘이 요구되는 일들이 많다”며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어 “우리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 혁명의 대를 꿋꿋이 이어나가는 문제도 그렇고 최근에 늘어나고 있는 비사회주의적인 문제들을 일소하고 가정의 화목과 사회의 단합을 도모하는 문제도, 건전한 문화·도덕 생활 기풍을 확립하고 서로 돕고 이끄는 공산주의적 미덕, 미풍이 지배적 풍조로 되게 하는 문제도 그리고 출생률 감소를 막고 어린이 보육 교양을 잘하는 문제도 모두 어머니들과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우리들 모두의 집안의 일”이라고 강조했다.이후 리일환 노동당 비서가 대회 보고에 나서 “어머니들이 당의 노선과 정책에 민감하며 그 관철을 위한 투쟁에서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는 자녀들의 훌륭한 스승, 귀감이 되여야 한다”고 말했고 이를 들은 김 위원장은 눈물을 훔쳤다. 현장에서는 한복을 입은 많은 여성이 객석에 앉아 있었고, 김 위원장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 위원장의 연설이 끝난 뒤 현장을 빠져나가자, 객석에 있던 남녀가 모두 함께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다. 김정은 위원장, 눈물을 보인 진짜 이유는? 김 위원장이 공식 석상에서 눈물을 보인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북한의 저출산율과 체제 유지에 대한 우려, 그리고 딸 주애에 대한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 나왔다. 김 위원장이 일명 ‘눈물 정치’를 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0년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당시 열린 열병식에서는 주민들에게 재난을 이겨내자고 호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난 7월에는 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도 북한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려 보는 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했다.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은 실제로 자주 운다. 기록영화를 보면 우는 장면이 자주 나오고, 눈시울을 붉혔다는 표현도 자주 나온다”며 “김정은은 일단 감성적”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2012년 이후 무려 11년 만에 열린 전국어머니대회에 김 위원장이 직접 참석해 연설한 것은 미래 세대가 외부에서 유입되는 남한 문화 등 비사회주의적 요소에 물들지 않도록 가정 내 사상 통제 강화를 당부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출생률 감소 문제가 북한에서도 사회적 문제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지표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통일부가 지난 10월 유엔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북한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 수)은 1.79명으로 추정된다. 2034년부터 인구 감소가 예상된다. 2022년 기준 한국의 합계출산율을 0.78인 것과 비교하면 2배에 달하지만, 다른 저소득 국가들의 합계 출산율이 4.47명인 것과 비교하면 북한은 저출생 상태로 평가된다.
  • 김정은, 어머니대회서 이틀 연속 연설… “누구도 어머니 임무 대신할 수 없어”

    김정은, 어머니대회서 이틀 연속 연설… “누구도 어머니 임무 대신할 수 없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틀 연속 전국어머니대회에 참석해 체제 결속을 위한 ‘어머니’의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5일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전날 평양에서 있었던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 마지막 날 폐막식에서 ‘가정과 사회 앞에 지닌 어머니의 본분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자식이 잘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어머니라면 자식들을 혁명 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의 실천 속에서 의식적으로 단련시켜야 한다”며 “나라의 대들보로 자라는 자식의 성장을 보는 것보다 어머니들에게 큰 낙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사회의 주력으로 되고 강대한 우리 국가를 떠받들어야 할 새세대들을 잘 준비시키는 것은 제1차적인 혁명 과업”이라며 “가정 교양과 학교 교양, 사회 교양 중에서도 가정 교양이 첫 자리를 차지하며 여기서도 어머니의 영향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어머니들 자신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정신 도덕적 풍모를 지닌 공산주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며 “어머니가 공산주의자로 되지 않고서는 아들딸들을 공산주의자로 키울 수 없으며 가정을 혁명화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혁명가의 첫걸음도 어머니의 젖줄기에서 시작되며 그의 참된 성장도 어머니의 손길 아래서 이뤄질 수 있다”면서 “그 누구도 어머니의 위치와 임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도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 내각총리 김덕훈은 참가자 20명에게 새로 제정된 ‘공산주의어머니영예상’과 선물 증서, 금반지를 수여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3일 개막식에서도 개회사를 통해 바람직한 공산주의 어머니상을 거론하며 이들의 역할을 강조했었다. 어머니대회에 대한 김 위원장의 관심은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전국어머니대회는 지난 1961년 11월 제1차 대회를 시작으로 1998년 2차, 2005년 3차, 2012년 4차 대회를 열었다. 1차 대회에서 당시 김일성 주석이 연설을 했지만 2·3차 대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불참했고, 김정은 위원장도 지난 4차 대회에서는 사진만 찍었다. 반면 김 위원장은 이번 어머니대회 개회사에서 “당 중앙은 어머니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로 보나 우리 국가와 혁명 앞에 나서는 현실적 문제들로 보나 이번 대회가 당대회나 당 중앙 전원회의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나 역시 당과 국가사업을 맡아 하면서 힘이 들 때마다 늘 어머니들을 생각하곤 한다”며 “어머니들의 용기와 헌신이 나에게 쓰러져서는 안 될 의무감, 이름할 수 없는 무한대한 책임감과 힘을 안겨주곤 했다”고 했다. 대회 관련 보고를 듣던 중에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통일부도 “김정은이 (어머니대회에서) 개막식과 폐막식 연설을 한 것은 이 행사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특히 연설 메세지를 볼 때 기존의 출산장려책을 강조한 것에 더해서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라며 “비사회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젊은 세대의 이념적 이탈을 막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또 “과거 대회부터 계속 강조해 왔던 다산 외에 출생률 감소 방지를 언급했는데, 북한도 저출산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며 “‘공산주의어머니영예상’을 제정한 취지도 이런 맥락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이 공식 석상에서 출생률 저하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북한의 합계출산율은 2014년 1.89명에서 지난해 1.79명으로 꾸준히 줄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 위원장이 딸인 주애에게 후계를 계승할 것을 염두에 두고 여성에 대한 역할을 강조하고 존경심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통일부 당국자는 “그 부분도 유의해서 보고 있다”면서도 “대회에서의 메시지만으로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11년 만에 열린 어머니대회서 눈물까지 흘린 김정은… 김주애 후계 분위기 만드나

    11년 만에 열린 어머니대회서 눈물까지 흘린 김정은… 김주애 후계 분위기 만드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1년 만에 열린 전국어머니대회에 참석해 개회사를 통해 출산율 문제와 사회주의 내부 결속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지난 3일 평양에서 열린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에 직접 참석해 개회사를 통해 “이 자리를 빌어서 애오라지 자식들의 성장과 조국의 부강을 위해 심신을 깡그리 바치며 거대한 공헌을 해오신 어머니들께 가장 뜨거운 경모의 마음으로써 삼가 인사를 드린다”고 말했다고 4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지금 사회적으로 놓고 보면 어머니들의 힘이 요구되는 일들이 많다”며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 혁명의 대를 꿋꿋이 이어 나가는 문제도 그렇고 최근에 늘어나고 있는 비사회주의적인 문제들을 일소하고 가정의 화목과 사회의 단합을 도모하는 문제”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건전한 문화 도덕 생활 기풍을 확립하고 서로 돕고 이끄는 공산주의적 미덕, 미풍이 지배적 풍조로 되게 하는 문제도 그리고 출생률 감소를 막고 어린이 보육 교양을 잘하는 문제”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당 중앙은 어머니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로 보나 우리 국가와 혁명 앞에 나서는 현실적 문제들로 보나 이번 대회가 당대회나 당 중앙 전원회의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나 역시 당과 국가사업을 맡아 하면서 힘이 들 때마다 늘 어머니들을 생각하곤 한다”며 “어머니들의 용기와 헌신이 나에게 쓰러져서는 안 될 의무감, 이름할 수 없는 무한대한 책임감과 힘을 안겨주곤 했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들이 지닌 그 정신과 힘은 비단 한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미래를 가꾸는 자양분이 되었으며 덕과 정으로 단합되고 전진하는 우리의 사회주의 대가정을 꿋꿋이 지켜내는 원동력”이라고 치켜세웠다. 김 위원장은 이번 어머니대회를 두고 “조국의 미래를 대표하는 후대들과 어머니들을 신성시하고 모든 것의 첫 자리에 놓는 우리 위업의 정당성과 양양한 전도를 다시금 뚜렷이 과시하는 정치축전”이라고도 했다. 북한은 1961년 11월 제1차 어머니대회를 시작으로 1998년 2차, 2005년 3차, 2012년 4차 대회를 열었다. 김 위원장은 4차 대회에서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번 5차 대회에는 내각총리 김덕훈과 당 비서 리일환·김재룡·박태성 등 주요 간부들을 비롯해 약 1만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리일환 당 비서의 보고를 듣던 중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도 포착됐다. 11년 만에 열린 어머니대회에서 김 위원장의 이러한 개회사 내용은 북한 내부의 어려운 사정과 관련해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며 사회 분위기를 개선해 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매년 꾸준히 하락하는 저출산 문제를 비롯해 육아나 청년들의 한류 등 자본주의 문화 접근 등을 문제점으로 짚고 이를 위한 가정에서의 교육과 학습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여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딸 김주애와 관련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임을출 경남대 북한학과 교수는 “아직은 이르지만 김주애의 후계 계승 기반을 닦는 차원에서 여성을 존경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여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냉전시대 ‘죽의 장막’ 걷어 낸 ‘외교의 전설’

    냉전시대 ‘죽의 장막’ 걷어 낸 ‘외교의 전설’

    10대 때 히틀러 박해 피해 美 이주‘핑퐁외교’로 미중 수교 성사 주역미소 ‘전략무기 제한협정’ 이끌어베트남전 종전 이후 노벨평화상 일각에선 ‘전쟁범죄 배후’ 비난도올해 100세 때 中 100번째 방문시진핑 “中인민의 라오펑유” 조전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란 발언으로 유명했던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이자 외교관이며 행정가인 헨리 키신저가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1923년 5월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 때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68년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 된 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면서 그의 외교 행보는 시작됐다. 그는 도덕성을 따지지 않는 현실주의 정책을 펼쳐 ‘죽의 장막’을 걷어 내고 공산 진영과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성사시켰다. 1971년 미국 탁구팀이 중국을 찾아 ‘핑퐁외교’로 교류의 물꼬를 텄는데 고인의 아이디어였다. 이듬해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고 ‘상하이 코뮈니케’에 서명해 1979년 수교의 발판을 마련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와 함께 냉전 시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3대 거두로 꼽혔다. 물론 인지도에서는 고인이 가장 앞섰다. 닉슨 정부에 이어 제럴드 포드 정부 시절 중요 관료였으며 1970년대 미국의 외교 정책을 거의 혼자서 주물렀다. 정의나 감정에 치우친 판단보다 국익을 우선했지만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피노체트 칠레 군사독재 정부를 용인한 일이다.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나 역대 수상자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오래가는 논란에 휩싸였다.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랑스에서 평화 협상이 진행 중이었는데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야 한다며 남베트남에 더 많은 군사원조를 하면서 결국 전쟁을 더 길게 끌었다. 영국계 미국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냉전 시대 미국이 저지른 온갖 더러운 행위의 배후로 지목하며 그를 전쟁 범죄자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닉슨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번갈아 지냈는데 1973~1975년에는 두 직책을 혼자 맡았다. 외교 정책의 전권을 쥐며 미국과 소련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이끌었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도했다. 아들 데이비드가 지난 5월 25일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는 장수의 첩경으로 알려진 소식이나 채식을 하지 않았다. 독일 소시지와 오스트리아식 돈가스인 슈니첼을 즐겼다. 스포츠는 직접 하지 않았고 관객으로만 즐겼다고 한다. 좋지 않은 생활 습관에도 키신저가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었다. 95세 때부터 인공지능(AI)에 관심을 기울여 AI와 관련된 책을 두 권 썼고 정파에 관계없이 여러 정치인들과 교류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여파로 독일에서 하마스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리자 독일 난민 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등 세상사에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 뉴욕타임스(NYT)는 “냉전의 역사를 조형한 인물”이라며 “전후 가장 강력한 국무장관으로서 그의 업적은 추앙과 매도를 동시에 받는 복합적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WP는 “독일식 억양, 예리한 재치, 올빼미 같은 외모 및 영화배우들과의 데이트로 그는 절제로 일관한 전임자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전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면서 “그가 국무장관에 임명됐을 당시 갤럽 조사에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선정됐다”고 전했다. 지난 7월 20일에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왕이 외교부장 겸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을 만나는 등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시 주석은 그의 100세 생일과 함께 중국을 100번째 방문한 것을 짚어 “두 개의 100이 합쳐진 중국 방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이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앞으로 조전을 보내 고인을 “중국 인민의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 하오펑유(好朋友·좋은 친구)”라고 표현하며 “‘키신저’라는 이름은 영원히 중미 관계와 이어져 있을 것이며, 중국 인민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그리움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 [메멘토 모리] 탈냉전 세계 질서를 짠 키신저 100세로 타계, 공과 과

    [메멘토 모리] 탈냉전 세계 질서를 짠 키신저 100세로 타계, 공과 과

    “미국에게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란 발언으로 유명했던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이자 외교관이며 행정가였던 헨리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 로이터 통신은 그가 30일(현지시간)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100세를 꼭 채웠다. 도덕성을 따지지 않는 현실주의 정책을 펼쳐 ‘죽의 장막’을 걷어내고 공산 진영과의 데탕트(Detente, 긴장 완화)를 성사시킨 주역이다. 1971년 미국 탁구팀이 중국을 찾아 ‘핑퐁외교’로 교류의 물꼬를 텄는데 고인의 아이디어였다. 이듬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당시 주석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고 ‘상하이 코뮈니케’에 서명해 1979년 공식 수교의 발판을 마련했다. 즈그니에프 브레진스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와 함께 냉전 시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3대 거두로 꼽혀 왔다. 물론 인지도에서 고인이 가장 앞섰다.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정부 시절 중요 관료였으며, 1970년대 미국의 외교 정책을 거의 혼자서 주물렀다. 정의나 감정에 치우친 판단보다 미국의 국익을 우선했지만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피노체트 칠레 군사독재 정부를 용인한 일이다.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나 역대 수상자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오래 가는 논란에 휩싸였다.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랑스에서 평화협상이 진행 중이었는데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야 한다며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을 어르고 달래 남베트남에 더 많은 군사원조를 해줘 결국 전쟁을 더 길게 끌었다. 실은 본인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전쟁의 참화에 몰아넣은 것이었다. 한참 뒤 미국과 베트남의 평화협상 내용은 프랑스 것을 베끼다시피했다는 것이 옛 동료들 증언으로 확인됐다. 영국계 미국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냉전 시대 미국이 저지른 온갖 더러운 행위의 배후로 지목하며, 전쟁 범죄자로 국제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닉슨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번갈아 지냈는데 1973~1975년에는 두 직책을 혼자 맡았다. 외교정책의 전권을 쥐고 흔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미국과 소련의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을 이끌었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도했다. 아들 데이비드가 지난 5월 25일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는 장수의 첩경으로 알려진 소식이나 채식과 거리가 멀었다. 독일 소시지와 오스트리아식 돈가스인 슈니첼을 즐겨 먹었다. 스포츠는 직접 하지 않았고, 관객으로만 즐겼다고 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생활 습관에도 키신저가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었다. 95세 때부터 인공지능(AI)에 관심을 기울여 AI와 관련된 책을 두 권 썼고, 정파에 관계 없이 여러 정치인들과 교류했다. 목소리가 아주 낮은 바리톤이어서 누구라도 그의 얘기를 들으면 설복당하기 쉬웠다. 하지만 일부는 무덤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고 비아냥댔다. 아들은 아버지의 외교에 대해 “결코 게임이 아니었다. 나치 독일에서 겪었던 참혹한 경험과 신념에 바탕해 외교를 했다. 아들이라 객관적일 수 없지만, 일관된 원칙과 역사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토대로 국정 운영을 하려고 한 아버지의 노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냉전의 역사를 조형한 인물”이라며 “전후 가장 강력한 국무장관으로서 그의 업적은 추앙과 매도를 동시에 받는 복합적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WP는 “독일식 억양, 예리한 재치, 올빼미 같은 외모와 영화배우들과의 데이트로 그는 절제로 일관한 전임자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전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며 “그가 국무장관에 임명됐을 당시 갤럽 조사에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선정됐다”고 전했다. 지난 7월 20일에는 중국을 방문, 시진핑 국가주석과 왕이 외교부장 겸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을 만나는 등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주히 지냈다. 시 주석은 두 달 전 100세 생일을 지낸 것과 중국을 100번째 방문한 것을 짚어 “두 개의 100이 합쳐진 이번 중국 방문은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중국중앙(CC)TV가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그의 생애를 돌아보는 1분 57초 분량의 영상을 보도한 것도 미-중 관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회복하는 시점이라 눈길을 끈다. 고인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여파로 독일에서 하마스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리자 독일 난민 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등 마지막까지 세상사에 눈과 귀를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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