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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명 티베트인’에서 ‘명동 철거민’ 기구한 운명

    ‘망명 티베트인’에서 ‘명동 철거민’ 기구한 운명

    국내 유일의 티베트 레스토랑인 서울 명동 ‘포탈라 레스토랑’이 재개발 계획으로 철거 위기에 놓였다. 사장인 텐진 델렉(34)은 망명 티베트인 2세로, 박범신의 소설 ‘나마스테’의 주인공 ‘카밀’의 실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국에서 쫓겨난 델렉은 재개발 시행사에서 보내온 통보문 한 장에 이국에서 일군 삶의 터전을 잃을 상황에 처했다. ●박범신 소설 ‘나마스테’의 실제 인물 델렉은 티베트에서 네팔로 망명한 아버지를 둔 네팔 국적의 티베트인. 1998년 한국에 들어와 청바지 공장과 공사판 등을 전전했다. 2008년부터는 국내에서 티베트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해 3월 중국이 티베트 민중 봉기를 유혈 진압하자 그는 국내에서 ‘프리 티베트’ 시위의 선봉에 섰다.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 행사가 열린 광화문에서는 티베트 국기를 펼쳐 들었다가 중국 유학생들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델렉은 그해 6월 명동성당 앞에 ‘포탈라 레스토랑’을 열었다. 티베트의 현실을 한국인들에게 더 잘 알릴 수 있다는 것이 주요 동기였다.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TV와 잡지 등에 ‘이색 맛집’으로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런 포탈라도 재개발의 굉음을 비켜가지 못했다. 2008년 8월 포탈라가 세들어 있는 건물이 재개발 시행사에 매각되고 말았다. 그는 “그냥 건물주가 바뀌는 줄만 알았지 그 회사가 재개발 시행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4월 초 명동 제3구역이 용역업체 직원들에 의해 강제 철거되던 날, 상인들이 철거에 반대해 자해 소동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며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 4월 26일 그에게 한 장의 통고서가 전달됐다. 재개발 시행사가 보내온 통보문은 ‘5월 31일까지 명도를 하지 않으면 강제 명도를 단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주비나 보상비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수차례 구청에 민원을 넣었지만 답변조차 없었다. 구청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답변만 들었다. ●조국 현실 알리려 티베트 레스토랑 오픈 포탈라가 위치한 저동1가 일대 명동 제4구역의 가게 19곳은 같은 날 똑같은 통보를 받았다. 급기야 상인들은 비상대책위를 구성, 구청에 생존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철거 기한인 5월 31일을 넘겼지만 델렉 부부는 어떻게든 포탈라를 지킬 생각이다. 델렉은 “국회의원들은 선거철이면 가장 먼저 서민을 찾지만, 금배지를 달고 나면 서민들을 잊어버린다.”면서 철거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위정자들을 비판했다. 그의 얼굴에 얼핏 티베트의 수난이 어리는 듯했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양말사업 성공 前개그맨 정이래씨

    양말사업 성공 前개그맨 정이래씨

    ‘한때 잘나가다 망가진 연예인’에서 양말 사업가로, 변신에 성공한 전 개그맨 정이래(48)씨의 ‘역전 인생 2막’이 화제가 되고 있다. ●빚더미에 공사판 전전… 한때 자살 생각도 요즘 신세대들은 잘 모르지만, 정씨는 1990년대 인기 개그맨이었다. 1987년 M방송사의 개그콘테스트에서 동상을 받으며 데뷔한 그는 정신없이 방송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했다. 개그맨을 하기 전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했고, 대학졸업 후 광고회사의 조감독 겸 카피라이터로 근무하기도 했다. 개그 작가로 뛰면서 탁월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사의 홍보일도 했다. 1995년 어느날 그는 MC 강호동이 출연해 인기를 끌었던 MBC의 ‘오늘은 좋은날’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방송계를 떠났다. 미래가 불투명한 연예인보다 늦기 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뭔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란 자신감도 들었다. 처음 정씨는 속옷 사업에 뛰어들어 괜찮은 돈벌이를 했다. 하지만 얼마 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빚더미에 내몰린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국의 공사판을 돌아다녔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늘 모자를 눌러 쓰고 다녔다. 너무 힘들어 자살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정씨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두 딸 때문이었다. 정씨는 “떨어져 사는 두 딸이 너무 보고 싶어 삶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면서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의 인생철학은 ‘살아서 행복하다.’가 됐다. ●군부대 직접 돌며 영업… 올해 매출 10억 예상 마음을 다잡은 정씨는 2005년 경기 의정부시에 사무실을 차리고 양말 사업(www.jung7.co.kr)에 도전했다. 군 복무시절 무좀과 발 냄새로 고생했던 기억에서 착안한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음이온 전문가의 도움으로 무좀과 발냄새를 없애는 양말 40여종을 개발했다. 상품 이름이기도 한 ‘J7’은 정씨의 성을 딴 ‘J’와 행운의 숫자를 뜻하는 ‘7’을 합한 것. 사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갈 무렵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사업은 적자로 돌아섰고, 매출은 급감했다. 그러나 10여년 전만큼 좌절이 크지 않았다. 정씨는 직접 영업에 나서며 양말을 들고 군부대 등을 돌아다녔다. 친화력과 개그맨 경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난해 해외파병 부대인 동명부대를 시작으로 정씨가 만든 양말이 군부대에 납품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매출은 1억 4000만원. 올해 예상액은 10억원이 넘는다. 정씨의 성공담이 인터넷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는 요즘 보험사 등으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고 있다. 정씨는 “살아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며 “퇴직자나 은퇴자들 모두 고민하는 그 순간에 절대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2010 베스트&워스트 어워즈 (3) 연극] 나이 잊은 연기혼 윤소정 ‘베스트’ 명성만 기댄 무대 아쉬워 ‘워스트’

    [2010 베스트&워스트 어워즈 (3) 연극] 나이 잊은 연기혼 윤소정 ‘베스트’ 명성만 기댄 무대 아쉬워 ‘워스트’

    올해 최고 연극은 ‘에이미’와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로 낙착됐다. 한 해 100편 이상의 작품을 보는 8명의 연극광들은 올해 베스트 세 작품을 꼽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두 작품에 5표씩을 던졌다. ●윤소정 주연 ‘에이미’·‘33개의 변주곡’ 베스트 톱 10 올라 ‘에이미’는 연극배우 장모와 영화감독 사위 간의 날선 대화를 통해 공연예술의 의미와 신구세대 간 갈등을 보여준 작품이다. 최용훈 연출의 견고한 연출력에 대한 칭찬도 있었지만, 특히 장모 역을 맡은 배우 윤소정에 대한 극찬이 넘쳤다. “예순이 넘어가는 나이임에도 놀랍게도 계속 발전하는 배우”(전정옥), “관객과 능숙하게 소통하는 연출도 좋지만 무엇보다 윤소정의 내면 연기가 일품”(엄국천) 등의 찬사가 쏟아졌다. 말레이시아로 은퇴 이민을 떠난 일본인 부부(정재진·예수정)를 통해 현대인의 병폐를 그려낸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의 평은 사뭇 흥미로웠다. “현대인의 소외, 고독, 단절을 섬세하게 짚어냈다.”(허순자)는 데는 별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연출임에도 극작이 너무 매력적”이라는 평가와 “어려운 극사실주의 작품임에도 연출로 위트를 살려냈다.”는 평이 엇갈렸다. 결국 “히라타 오리자 작가와 박근형 연출은 서로 다른 개성을 보이는 인물임에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절묘하게 섞였다.”는 얘기다. 3위는 4표를 얻은 ‘1동 28번지, 차숙이네’가 차지했다. 공동 1위 원작이 영국, 일본이라는 점과 베스트 순위권의 다른 작품이 이미 이름 깨나 있는 라인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예 연출가 최진아가 직접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이 반갑다. 자식들이 이차숙 여사에게 새 집을 지어주는 게 연극의 핵심 골격. 무대 위에 실제 집 짓는 장면을 연출해 더 화제가 됐다. 최 연출은 실제 공사판을 서너달 관찰한 끝에 대본을 완성, 사실성을 높였다. 덕분에 “살아가는 얘기를 ‘사람’이 아니라 ‘집’으로 풀어낸 연출의 시선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거나 “전문 정보를 전달하는 렉처 퍼포먼스와 드라마가 잘 결합한, 희곡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참신한 작품”(이진아)이라는 호평을 끌어냈다. 베토벤 말년의 비밀을 좇는 음악학자 캐서린의 얘기를 다룬 ‘33개의 변주곡’과 안중근과 아들 안준생의 비극적 사연을 그린 ‘나는 너다’는 각각 2표씩을 얻어 공동 4위를 차지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33개의 변주곡’이 단독 4위에 더 가깝다. ‘나는 너다’가 얻은 두표 가운데 한표는 “예상보다는 낫다.”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33개의 변주곡’은 “극본 자체는 지루한 감이 있었으나 연출의 힘, 적역배우들의 호연으로 이를 잘 극복했다.”(구자흥)는 평을 들었다. 차근호 작가의 밀도 높은 창작희곡으로 관심을 모은 ‘루시드 드림’,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작가 리홀이 미술을 통해 노동과 예술의 의미를 질문하는 ‘광부화가들’ 등도 베스트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벚꽃동산’ 해외연출가 초청 제작시스템 문제제기 반면, ‘워스트’ 선정 작업은 어려웠다. 워스트가 ‘최악이라기보다 기대에 못 미쳐 아쉬운 작품’이라는 점을 극구 강조했음에도 연극광들은 주저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연극계 현실에서 애써 노력하는 ‘연극쟁이’들의 열의를 꺾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단 도마에 오른 작품은 ‘벚꽃동산’. 한때 국립극단 예술감독 물망에 올랐던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의 연출작이었음에도 “해외 연출가 초청 제작 시스템을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 제기를 낳았다. 이윤택이 연출한 연희단거리패의 ‘경성스타’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친일 연극인의 모습을 그려내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연극 만세, 연극인 만세’를 외치는 점은 불편했다는 지적이었다. 강화정 연출의 ‘방문기×’도 이런 범주에 들었다. 그간 보여온 실험적 작품으로 기대치를 한껏 부풀려 놓았는데, 정작 본게임에서는 새로운 성취를 선보이지 못했다는 평가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1940년대 경북 안동으로 무대를 옮겨와 재해석한 ‘왕벚나무동산’ 역시 시도는 좋았으나 몸짓과 움직임을 강조하는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스타일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는 쓴소리를 들었다. 전인철 연출의 ‘순우삼촌’은 지나치게 상투적이었다는 평을 받았으며, 예수정·서인석 등 출연진이 화려했던 ‘메카로 가는 길’은 과잉연기로 인해 좋은 희곡이 멜로물로 변질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심사위원 구자흥 명동예술극장장 구히서 연극평론가 김방옥 동국대 연극학부 교수 엄국천 한국공연예술센터 공연기획부장 이진아 숙명여대 국문학과 교수 이소선 남산예술센터 기획제작PD 전정옥 연극평론가 허순자 서울예대 연기과 교수
  • [글로벌 시대]팍스 시니카(Pax Sinica)/전경수 서울대 인류학 교수

    [글로벌 시대]팍스 시니카(Pax Sinica)/전경수 서울대 인류학 교수

    전한과 후한을 통틀어 장구한 세월 동안 사용된 돈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오수전(五銖錢)이다. 동그란 엽전에 사각형 구멍이 나 있고, 구멍의 오른쪽에는 ‘五’자, 왼쪽에는 ‘銖’자가 양각되어 있다. 오수전은 내륙과 도서의 동남아시아, 서역과 터키를 거쳐 로마의 경역 및 인도 고대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도 발굴되었다. 오수전은 기원 전후 강력한 힘을 자랑하였던 한제국의 국제무역용 결제화폐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미국 달러와 같은 위력을 가진 셈이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자리를 굳힌 중국은 한제국을 모델로 하여 2000년 만에 세계 최강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미국의 견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중국대륙은 우리의 미래에 어떤 입장을 요구하는가? 지금은 중국인들이 한국으로 밀항도 하고, 조선족이 한국에서 직업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주머니를 바꾸어 차는 날이 올 것이 예견된다. 중국의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농민공’ 대신 공사판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줄을 서는 때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400~500년 전 베이징(北京)의 동쪽 관문인 조양문(朝陽門) 밖에서 성 안의 동태를 기웃거리던 조선인 사신들의 또 다른 행색이 21세기 베이징 거리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애써 외면할 수는 없다. 거목은 그늘이 넓다. 북한은 ‘책봉’을 빌미로 이미 그늘 밑으로 자진해서 들어간 것 같다. 이 세상에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일곱 군데다. 중국은 특별행정구역인 마카오를 앞세워 포르투갈어 사용권을 하나의 경제협력공동체로 묶어내는 회의를 개최한다. 요코하마의 아시아·태평양 회의에서 후진타오는 일련의 미팅을 했다. 또 다른 특별행정구역인 홍콩의 수장을 불러서 악수한 후 주석은 손바닥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타이완의 국민당 최고 고문을 파트너로 불러서 환담을 했다. 소위 ‘양안관계’의 밀착이 특별행정구역의 수준까지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위였다. 미국도 참여한 아·태 회의가 모두 환율에 몰입하고 있을 때, 중국은 타이완의 정치적 지위를 가늠하는 포석을 한 것이다.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열도) 사건으로 ‘힘’을 과시하였던 중국이 난사(南沙)·시사(西沙)군도에 관한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 언행을 쏟아내는 동시에 아세안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강조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엑스포의 열기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으로 이어지고, 광서장족자치구의 난닝에는 아예 아세안 타운을 만들었다. 그 속에 일본과 한국의 영사관도 들어가도록 계획된 현장을 보았다.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의 고고문물연구소는 동남아고고학연구소를 병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윈난대학 민족연구원은 동남아시아 제국과의 학술교류를 강화하는 프로젝트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쿤밍시내 남부의 ‘로스완’ 상무성(商務城)은 동남아 상인들로 붐비고, 중국상품을 실은 라오스행 대형 트럭들은 꼬리를 물고 달린다. 인민해방군이 카자흐스탄 육군과 합동훈련하는 모습과 인민해방군 공군기가 카자흐스탄 기지에서 발진하는 모습이 CCTV로 반복해서 방영된다. 중국의 의료진들이 파키스탄의 전쟁피해 지역과 홍수피해 지역의 복구를 위해서 땀 흘리는 장면이 겹쳐지고 있다. 거목이 쓰러지면 주변에 피해가 크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생존전략은 일방적으로만 적용해도 곤란하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힘의 진공상태가 나타나는 순간을 능동적으로 낚아채지 않으면, 부딪치는 고래들 사이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등 터지는 새우가 된다. 새우가 살아가는 방법을 재삼 새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한 세기 전에 국치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또다시 유사한 구렁텅이로 후손들을 몰아넣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생과 화해의 언급이 입장마다 달라지는 것은 먹고 먹히는 국제정치의 기본이다. ‘팍스 시니카’를 향한 숨가쁜 국제정세가 돌아가고 있다.
  • [14일 TV 하이라이트]

    ●현장르포 동행(KBS1 오후 11시30) 아빠 선봉씨는 자활 일을 시작한 지 이제 1년이 넘었다. 늦은 나이에 만난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남매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친척에게 빌린 돈으로 겨우 얻은 낡은 쪽방에서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어린 자식들과 살아가기 위해 도배 일을 배우고 공사판도 다녀 봤으나 늙고 아픈 몸을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다. ●롤링스타즈(KBS2 오후 4시30분) 킹의 홈런이 파울 선언되면서, 롤링스타즈는 역전의 기회를 한 번 놓치고 만다. 몰수패 위험 때문에 심판에게 항의조차 하기 힘든 롤링스타즈는 킹과 베이비로 이어지는 강타선에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어 보는데…. 지구 야구 대표팀, 롤링스타즈. 지구를 구하기 위해 부활한 엽기 코믹 히어로들의 모험과 활약상이 펼쳐진다. ●볼수록 애교만점(MBC 오후 7시45분) 여진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토하는 모습을 본 경실은 옥숙에게 여진이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모욕을 준다. 그리고 다음날, 규한이 거리에서 노인을 밀치는 장면이 목격되고 이를 알게 된 옥숙은 더 분통이 터진다. 수정은 뮤지컬을 보고 싶어 하는 선호에게 티켓을 구해 오겠다고 큰소리친다. ●대물(SBS 오후 9시55분) 손본식 국장을 만난 강태산 의원은 서혜림이 리포팅을 하는 조건으로 보도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해 보라고 권한다. 하도야 검사는 조배호 의원이 대리인으로 중수 부장 출신 변호사를 보내자 기분 나빠 한다. 한편 조배호 의원이 헤리티지 클럽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하도야 검사는 조사를 하겠다며 헤리티지 클럽으로 향한다. ●세계테마기행(EBS 오후 8시50분) 먼 옛날부터 톈산산맥의 빙하수를 끌어 들여 오아시스 도시로 거듭난 투루판은 찬란한 고대 오아시스 왕국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고, 세계적인 청포도와 건포도 산지가 될 수 있었다. 1년 내내 물을 공급해주는 카레즈와 당도를 높여주는 뜨거운 태양열, 병충해를 막아주는 건조한 기후가 있기 때문이다. ●꿈꾸는 U(OBS 밤 12시30분) 상큼발랄한 배우 이청아가 여주인공으로 활약한 단편영화 ‘멋진 하루’가 공개된다. 귀여운 4차원 스토커 역할에 완벽히 몰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배우 이청아의 또 다른 연기 변신이 관전 포인트. 입담에 물이 오른 패널들과 ‘멋진 하루’와 ‘도마 위에 오른 어머니’를 연출한 감독들이 벌이는 유쾌한 수다가 펼쳐진다.
  • [구의회 의장을 만나다] 송파구 김철한 의장

    [구의회 의장을 만나다] 송파구 김철한 의장

    동료가 적으로 바뀌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다. 공무원에서 지방의원으로 변신한 김철한(62) 송파구의회 의장이 이런 존재다. 김 의장은 28년 동안 공무원으로 재직했다. 한때 ‘직업이 동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10여년간은 동장으로 활약했다. 지금은 어느덧 4선 의원이 돼 의장까지 맡게 됐다. 공무원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 있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지역 살림을 감시하는 든든한 지킴이다. 김 의장은 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행정에 주민들의 뜻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생활정치를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장 중심의 생활정치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우선 잠실 제2롯데와 문정동 법조단지, 위례신도시, 거여·마천뉴타운, 가락시장 재건축 등 굵직굵직한 개발사업이 임박해 있다. 그만큼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자칫 공사판이 싸움판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의장은 “각종 개발사업 추진 과정에서 행정기관과 주민 간 갈등은 물론 주민끼리의 분쟁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지방의회가 이런 입장 차를 보다 적극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역할을 찾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송파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가 크다는 점도 현장을 중시해야 할 원인으로 꼽았다. 인구가 68만여명으로 서울시내 25개 자치구 중 최대다. 인구가 13만여명으로 가장 적은 중구에 비해서는 무려 5배 이상 많다. 김 의장은 “겉으로는 부자 자치구라는 인식이 강한 반면 속으로는 인구가 많은 데다 복지 수요 등도 급증하고 있어 재정 압박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주민들이 느끼는 지역 현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정된 예산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만큼 예산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방자치 강화라는 근본적인 관점에서 더 많은 권한과 예산이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이양될 수 있도록 건의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공무원보다 의원으로서의 역할이 좀 더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김 의장은 “활동에 대한 주민 평가가 보다 직접적이기 때문”이라면서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로 문제점을 찾아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의회가 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말을 맺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송파구 의회는 송파구의회는 전체 의원 26명 중 한나라당 14명, 민주당 11명, 국민참여당 1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성 의원은 9명으로 전체의 3분의1가량을 차지한다. 여성 의원 중 유일하게 재선인 이정인 의원은 7일 “무엇보다 주민 우선의 구의회가 되는 데 디딤돌을 놓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또 초선 의원이 15명으로 재선 이상 11명보다 많다. 최다선 의원은 한나라당 우세 지역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무려 5선에 성공한 박용모 의원이다. 의장단은 김철한 의장과 구자성 부의장, 임춘대 운영위원장, 이배철 행정보건위원장, 노승재 재정복지위원장, 박인섭 도시건설위원장 등으로 구성됐다. 초선 의원 중 유일하게 의장단에 포함된 이배철 위원장은 “초심을 잊지 않고 참신하게 의정 활동을 펼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자이언트’ 이문식, 통쾌한 복수극...팬들 “반전 캐릭터” 반색

    ‘자이언트’ 이문식, 통쾌한 복수극...팬들 “반전 캐릭터” 반색

    SBS 월화드라마 ‘자이언트’ 박소태(이문식 분)가 드디어 복수에 성공했다. 공사판 방식 ‘생매장 복수’로 황정식(김정현 분)의 혼을 빼놓은 것. 사람 죽이러 가서 자기칼에 엉덩이 찔리고 술자리마다 파슬리를 귀에 꼽는 ‘활력소’ 캐릭터의 색다른 변신은 시청자들에게 긴장감을 선사했다.정식의 악행으로 피눈물을 흘렸던 세월, 소태는 더 단단해졌다. 더이상 옛날처럼 당하고만 사는 소태가 아니다. 23일 방송된 ‘자이언트’ (극본 장경철 정경순 / 연출 유인식) 29회분에선 정식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빼어든 소태의 모습이 그려졌다.정식은 죽은 줄만 알았던 소태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뒤 이번에도 자신의 주무기 ‘돈’을 써 매수하려 들었다. 소태는 한치 변함없이 살고 있는 정식의 비열함에 질려하며 “제임스 리의 정체가 알고 싶으면 밤 10시에 공사판으로 나와 직접 확인해라”며 꾀어냈다.‘공사판에서 벌인 일이니 공사판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정식은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마중나온 소태를 비웃으며 “야, 지금 간첩 접선 하냐. 하는 짓거리가 3류 같다”며 깐죽거렸다. 이때, 소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던 정식 일행이 갑자기 땅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소태가 처음부터 구덩이를 파고 정식을 기다린 함정이었던 것.정식은 제처지를 모르고 “박소태, 너 죽을래? 너 나가면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반전 캐릭터 소태는 미소를 잃지 않고 “죽어? 누가 죽어? 내가?”라며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누가 악역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분간이 안가는 대목. 소태가 "액션!" 지시를 내리자 잠잠했던 굴삭기에 시동이 켜졌다.정식은 소태가 자신들을 생매장 하려한다는 상황을 눈치채고 무릎꿇고 목숨을 구걸했다.소태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정식의 모습을 보며 “나도 속으로 그 말 많이 했었다. 제발 살려달라고”라며 씁쓸히 되뇌었다. “무섭지? 화도 좀 나고. 나는 그것보다 100배는 더 무섭고 화가 났었다. 너 같은 새끼는 땅에 묻어버려도 땅이 아까워”라는 소태의 독백에서 그간 묻어 두었던 분노의 깊이가 느껴진다.복수 후반부. 소태는 비열한 정식과 한 약속까지 지켰다. 소태의 소개를 받고 등장한 한강건설의 대표 제임스 리는 “하우 두 유두”라는 인사를 건넸고 소태는 “유두가 몇 개냐고 묻잖아”라며 정식을 놀려댔다. 제임스 리가 다름아닌 영출(송경철 분)이었던 것. 약속을 지키고 돈가방을 챙겨 떠나는 소태의 뒷모습은 고난이도 액션신 보다도 통쾌한 시원함을 안겨줬다. ‘정식 안티’를 자처하는 시청자들은 방송직후 뜨거운 감상평을 남기며 복수극에 동참했다.사진 = SBS 월화드라마 ‘자이언트’ 화면 캡처서울신문NTN 전설 기자 legend@seoulntn.com▶ 김정은, 표정연기 7종 세트…‘절망부터 분노까지’▶ ‘이혼설 웬 말?’ 한가인-연정훈 분가…새 보금자리 마련▶ ‘리틀 이준기’ 윤찬, 연잉군 라이벌로 ‘동이’ 등장▶ 신세경-에프엑스 청바지 차림 비교해보니…청바지 여신은▶ ‘부상투혼’ 이준기, 팬들 구명운동 “생각만 해도 눈물나”
  •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미얀마에서 온 마웅저(41)가 한국에서 얻은 첫 직장은 인천의 한 도색 공장.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50만원을 받았다. 한국인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야 인마.” 이게 공장에서 마웅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결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함께 일했던 미얀마 친구는 걸핏하면 사장에게 얻어맞았다. 7개월을 일했는데, 월급은 5개월치밖에 못 받았다. 이듬해 경기 부천의 구두 형틀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지만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한번은 TV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료가 채널을 돌렸다. “너 같은 건 우리나라 여자 쳐다볼 자격이 없어.” ●힘겨운 난민의 삶 2000년에는 정식으로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로부터 신문과 비슷한 인터뷰를 받았지만, 돌아온 것은 ‘불허한다’는 통지. 그것도 신청한 지 5년이 지나서였다. 법원은 다행히 마웅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법무부는 계속 상소를 하며 ‘발목’을 잡았다. 결국 2008년 대법원에서 승소하면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하늘의 별을 땄다.” 난민으로 인정된 직후 어떤 기분이 들었느냐고 묻자 마웅저는 이렇게 말했다.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머족’ 로넨(42)의 삶도 ‘코리안 드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택시를 탔다. 외국인인 걸 눈치챈 기사. “어디 가냐?” “5000원이다. 내놔.” 서른을 훌쩍 넘긴 로넨이었지만, 초등학생 대하듯 했다. 난민 인정에 인색한 정부 탓에 처음 몇 년간은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공장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 선교사 빅토르(가명·46)는 우리나라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입국과 동시에 난민신청을 했지만 불허됐고, 1심 재판에서도 졌기 때문이다. 위협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찰이나 무슬림으로 추정되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다. 8월 2심 재판이 열리지만, 결과가 바뀐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내 이름은 (나이지리아) TV에도 많이 나왔기 때문에 돌아가면 바로 들킨다. 한국 정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미얀마 출신 코와인(42)은 원래 변호사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장 행을 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일을 해서는 안 됐다. 난민 신청 기간 중에는 취업이 금지돼 있기 때문. 하지만 난민 신청을 한 지 4년이 지나도록 결과를 받지 못했다. “I need too much money for living expenses, so should I work.(생활비 때문에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코와인이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은 하소연이었다. ●‘꿈’을 안고 대한민국으로 왔지만 1988년 8월8일. 세계사에 ‘8888 버마민중항쟁’으로 기록된 날이다. 수도 양곤의 고등학생이었던 마웅저. ‘군부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대학생 형, 스님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목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쳤다. 항쟁은 서슬 퍼런 군부의 총부리에 밀려 실패했지만, 마웅저의 투쟁은 계속됐다. ‘버마전국학생연합(ABSFU)’에 가입해 ‘지하운동’을 했다. 탄압이 시작됐다. 생사를 함께하기로 결의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 경찰에 잡혀갔다. 이름을 바꾼 채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다. 어머니와 다름없던 누나가 마웅저를 부른 것은 1992년. “망명해라.” “여권도 비자도 없는데….” “브로커를 쓰자. 돈은 내가 댈게.” 누나는 푼푼이 모았던 21만차트(Kyat·미얀마 화폐단위)를 내놓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350만원쯤 된다. 큰돈이다. 마웅저는 대한민국을 골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8888항쟁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마음이 끌렸다. 2년 뒤 마웅저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미얀마 민주화를 도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줌머족’ 로넨은 ‘인종 청소’를 하는 정부에 맞서 무장단체에서 활동했다. 산악지대인 치타공에서 종족의 생존을 걸고 싸우다 체포됐다.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마을로 돌아왔지만, 탄압은 더 심해졌다. 마을에는 1㎞마다 하나씩 검문소가 들어섰다. 대원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심심하면’ 때렸다. 1999년에는 대규모 약탈과 방화가 있었고, 여성들이 집단으로 성폭행당하기도 했다. 로넨은 이듬해 고향을 떠났다. 한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한국으로 왔다. 한국인이 같은 몽골계고, 불교신자가 많다는 점에 끌렸다.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한 중견국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전사(戰士)’가 아닌 ‘시민(市民)’으로 살 수 있다는 꿈이 가슴을 매웠다. 빅토르는 나이지리아 ‘오순절협회(PEN)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강연에 나가 나이지리아의 부패한 경찰을 강하게 비난했다.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고 있는 일 그만둬라.” “누구냐?”고 물으면 끊었다. 험악한 인상을 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가족을 위협했다. 운전기사가 괴한에게 폭행당하고 차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는 2005년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미국을 생각했지만, 총이 없는 한국을 선택했다. 기독교도가 많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가족들도 불러 ‘제2의 삶’을 꾸릴 계획이었다. ●여전히 꿈 키우는 난민들 그러나 난민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먹고살려는 게 아닌 신념과 양심, 존엄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인 만큼, 다양한 활동을 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마웅저는 1998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끌고 있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미얀마 대사관 앞으로 가 시위를 하고, 틈 날 때마다 길거리로 나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미얀마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2004년부터는 우리나라 시민단체에서 활동했고, 다음달에는 자신이 직접 단체를 만들 예정이다. 단체명은 ‘버마민주화를 돕는 단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한국인 동료 100여명이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코와인은 2003년 인천에 작은 미얀마 불교 사찰을 세웠고, NLD 회원들과 민주화운동에 쓸 자금을 모으고 있다. 국내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화요일에는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주한미얀마 소수민족 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다. 한때 대사관이 그를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했다는 트집을 잡아 검찰에 고발했지만,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카카나(27·여)는 얼마 전부터 일요일에는 출근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나오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며 버틴다. 일요일만큼은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에 나가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말을 어느 정도 익히면 미용기술을 배울 계획이다. 빅토르는 한남동의 한 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강제 송환을 당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할 것이다. 동생이 정치 운동을 하는 바람에 연좌제에 걸려 2005년 한국에 온 쇼네(가명·40·토고)는 8월 둘째를 낳는다. 병원비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최근 난민에게도 의료 혜택을 확대하는 정책을 발표해 시름을 놓았다. 새로 태어날 아이는 한국을 보고 느끼며 자랄 것이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내 아들 길태야 자수해라”…부모 눈물

    ”길태야 자수해라.”  부산 여중생 살해범 김길태(33)의 부모가 “좀 더 강하게 아들을 훈육하지 못했던 게 뼈에 사무치게 후회된다.”고 털어놓았다고 10일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이들은 사망한 이양과 부모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사죄했다.  김의 부모는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하루아침에 살인범이 된 이후 매일 죄책감에 시달린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김의 아버지 김모(70)씨는 “맨 정신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어 소주 한잔 마셨다.”며 인터뷰 내내 담배를 물었다.  이들은 31년전 처제가 다니던 교회앞에 버려진 김을 입양했다. 김 씨는 “딸만 셋이라 아내가 아들 욕심이 너무 컸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이) 초등학교 때는 동네에서도 잘 뛰어놀고 친구도 많았다.”며 ‘착하고 명랑했던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김은 주판을 잘 다루고 계산에 능했다고 한다. 김의 부모는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상업고등학교에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때 부터 김은 점점 말수가 없어지고 학교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 윤모(68) 씨는 ‘내성적이고 착한 아들’이었던 김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 씨는 “아들 손을 잡고 고등학교 정문까지 데리고 간 적도 있다.”며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한 아들을 위해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선생님에게 거짓말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은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범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둔 이듬해 김은 폭행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지켜보던 윤 씨는 쓰러져 입원했다.   김씨는 아들에게 사식을 넣어주고, 공사판에서 모은 일당을 부치며 희망을 잃지 않았었다. 그는 “지난해 여름, 교도소에서 나오면서 이번에는 잘해보자고 손을 잡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문제있는 아이였지만 잘 될 줄 알았다.”며 “대학이라도 보냈어야 했는데….”라고 한탄했다.  윤 씨는 남편의 손을 붙잡으며 “손자도 보고 싶었는데…. 30년 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다.”며 “(이양의) 부모님께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서울광장] ‘엄친아’ 두바이의 위기가 주는 교훈/이순녀 논설위원

    [서울광장] ‘엄친아’ 두바이의 위기가 주는 교훈/이순녀 논설위원

    ‘사막의 기적’, ‘중동의 진주’로 칭송받던 두바이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국영기업 두바이월드가 590억달러가 넘는 빚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면서 국가 신뢰에 치명타를 입었다. 다행히 두바이 쇼크는 세계 금융위기로 확산되지 않고 빠르게 진정되고 있지만 21세기형 성장모델로 승승장구하던 두바이의 성공 신화에는 급브레이크가 걸리게 됐다. 지난해 3월 두바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특집기사 취재를 위해서였다. 실용주의와 CEO형 리더십을 내건 이명박 정부의 벤치마킹 대상인 두바이 모델을 현지에서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출장을 가기 전 국내외 언론을 통해 머릿속에 각인된 두바이의 이미지는 휘황찬란한 꿈과 환상의 도시, 그 자체였다. 세계 최고층 빌딩(버즈 두바이), 야자수 모양의 세계 최대 인공섬(팜 주메이라), 사막 한가운데 설치된 대형 실내스키장(스키 두바이) 등 말만 들어도 입이 쩍 벌어지는 대역사(大役事)를 실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막상 가 보니 두바이의 첫 인상은 몹시 어수선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사판 같았다. 이곳저곳에서 초고층 건물들이 정신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인구 150만명의 소도시에 저렇게 많이 지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유명 스타를 비롯해 외국 투자자들이 물밀듯 들어오던 터라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해 보였다. 현지 관계자들의 태도는 낙관적이었다. 불과 6개월 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기사는 두바이 모델의 우수성에 찬사를 보내고, 두바이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의 상상력과 창조적 리더십을 본받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됐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두바이 성공 신화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한 셈이 됐다. 두바이가 한창 잘 나갈 때도 한쪽에선 위험을 지적하는 경고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제조업 기반 없이 건설업과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차입경영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지적과 더불어 공급과잉으로 인한 거품 붕괴 시나리오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돈벌이에 눈먼 투자자들과 화려한 외양에 취한 세계 지도자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우리 정부도 그랬다. 이명박 정부에게 두바이는 닮고 싶은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였다. 과감한 규제개혁과 개방정책으로 무역, 금융, 관광, 정보기술(IT)의 허브를 꿈꾸는 두바이의 전략은 모범생의 답안 같았다. 인천 송도신도시, 부산 신항만, 전북 새만금 등이 앞다퉈 두바이를 개발 모델로 삼았다. 엄친아가 하루아침에 문제아로 전락한 꼴이지만 이번 위기를 두바이의 침몰로 단정짓기는 일러 보인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 경제는 여전히 강하고 견고하다.”고 주장한다. 채무 구조조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단기적으론 고통을 겪더라도 장기적으로 체질개선을 위한 호기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두바이 모델을 추종해온 우리 정부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성공을 벤치마킹하는 것 못지않게 실패를 벤치마킹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두바이 위기의 원인으로 토목과 건설 등 외형에 치중하고, 단기간에 무리한 성과를 내려는 조급증을 지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리더십이 일방통행으로 흐를 때 초래될 위험에 대한 신호를 읽어내기도 한다. 4대강을 비롯해 대형 국책 사업을 추진하는 현 정부가 모두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무전취식… 술먹고 쌈박질 일삼고…잡범처럼 살던 시인 유용주의 자전소설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이라면 “내가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면 대하소설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보자. 돌솥 뚜껑처럼 두텁고 넓은 손바닥, 그리 크지 않은 눈에 두툼한 눈두덩, 빗물이 고임직한 넓은 평수의 콧구멍, 튀어나온 광대뼈가 제대로 된 촌놈 얼굴이다. 커다란 덩치에 핏줄 튀어나온 굵은 팔뚝까지 완벽하다. 비교적 귀여운 느낌의 ‘슈렉’을 제외하더라도 ‘백곰’, ‘고릴라’, ‘멧돼지’ 등 별명 역시 딱 어울리는 것들만 모았다. 술 먹고 쌈박질 일삼는 전형적인 ‘잡범(雜犯)’의 모습 아닌가. 게다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열네살부터 겪지 않은 일이 없다. 공사판 막노동은 기본. 중식, 일식, 한식집 주방을 섭렵했으며, 제과점, 구두닦이, 유리공장, 사탕공장, 술집 지배인, 트럭운전, 목수, 우유보급소 등 거치지 않은 일이 없다. 그 뿐인가. 엉덩이 비벼댄 형무소도 군대, 사회 가리지 않았다. 시인 유용주다. 하지만 잡범같은 그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 사람에 대한 뜨거운 애정, 문학에 대한 확신,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이 바로 그 재능이다. 유용주의 삶이야말로 소설 그 자체다. ‘가장 가벼운 짐’(1993), ‘크나큰 침묵’(1996), ‘은근 살짝’(2006) 등 시집으로 평단의 뜨끈뜨끈한 호응을 얻었고, 2000년에는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가 ‘느낌표!’ 도서에 선정되며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름을 각인시킨 그였다. 유용주가 자전적 장편소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한겨레출판 펴냄)를 내고 ‘소설가 선언’을 했다. 이미 또다른 자전적 성장소설 ‘마린을 찾아서’를 냈지만, 이번 작품은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작품에 가깝다. 시(詩) 안에만 담아놓기에는 삶의 굽이마다 빼곡히 새겨진 이야기 보따리가 너무도 터질 듯 부풀어있는 탓이다. ‘어느 잡범’은 고스란히 유용주, 자신의 얘기다. 공무집행방해, 재물손괴, 폭행, 무전취식 등을 저지른 잡범 ‘김호식’이 군대에서 겪은 기구한 3년(군대 2년+군 교도소 1년)의 시간을 중심으로 사회에 나와서도 잡범 신세를 전전하는 삶을 펼쳐냈다. 초가을 바람과 안개만으로 숭늉 냄새를 맡고 들판에 나락이 팼음을 짐작하는 시인의 감성(321쪽)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오랜 세월 시를 써온 유용주 식 운문(韻文)의 감성이 걸쭉한 입담을 타고 산문(散文)의 형식에 접목되는 과정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유용주는 “최근 ‘루저 파문’이 있었는데 나야말로 최상급 루저”라면서도 “소설을 통해 승자들이 만든 세상이 고작 이 정도냐고 묻고 싶었고, 그들이야말로 위장전입, 논문 표절, 탈세 등 거짓된 삶 아니었냐고 따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뉴스다큐 시선] 연탄을 담은 풍경들[동영상]

    [뉴스다큐 시선] 연탄을 담은 풍경들[동영상]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그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詩,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조선팔도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득바득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연탄차라고. 불이 붙으면 그대로 재가 될 때까지 뜨겁게 더 뜨겁게 자신을 태우는 연탄. 세상을 얼릴 듯했던 겨울 새벽 추위를 모두 몸으로 견딘 것처럼 연탄은 회색빛 재로 변해 버렸습니다. 연탄보일러가 데운 한 칸 방의 온기, 연탄불에 구운 노릇노릇한 고구마의 달콤함….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기만 한 연탄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간직한 이들이 있습니다. 연탄재처럼 부서져 가는 기억의 마지막 끝을 일상인 양 잡고 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글 사진 안석기자 ccto@seoul.co.kr 제가 태어난 곳은 서울 시흥동의 연탄공장입니다. 오늘(21일)은 날씨가 좀 풀려서 그런지 공장 너머 지하철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은 아침부터 트럭 행렬이 이어지면서 휴일인데도 평일보다 더 시끌시끌합니다. 저는 지금 25t짜리 대형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저와 제 친구들이 가는 곳이 부자 동네인 강남이라네요. 저도 이제 ‘강남물’ 좀 먹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자! 제가 어디로 가는지 함께 따라오시죠. ●서울 시흥동 연탄공장 이야기 제 고향 ‘고명산업’은 서울에 2개뿐인 연탄공장 중 하나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는 11월은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지요. 하루 연탄 생산량은 30만장 수준입니다. ‘얼마 안 되네.’라고 생각하시나요? 무려 100대가 넘는 차량이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오가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직원분들은 누가 오가는지도 신경도 안 쓰고 일만 하십니다. 제 아버지(?)는 1978년부터 이 공장에서 근무한 신희철 전무입니다. 아버지가 일을 시작했던 1970~80년대만 해도 서울에 연탄공장이 무려 19개나 있었답니다. 그때는 서울의 하루 연탄 소비량이 2000만장이나 됐다고 합니다. 당시 이 공장의 하루 연탄 생산량도 지금의 두 배가 넘는 60만~70만개 수준이었죠. 1970년대 석유파동 때는 하루 100만장까지 찍어내기도 했습니다. 현재 서울 지역 하루 연탄 소비량은 얼마나 될까요. 아버지 말로는 70만장 정도에 불과하다네요. 이 공장은 1990년대만 해도 과거 삼천리연탄(현 삼천리E&E)의 시흥 공장이었습니다. 연탄산업이 사양길을 걷던 1997년, 본사가 시흥 공장을 폐쇄하기로 하자 아예 당시 직원들이 공장을 인수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답니다. 공장을 새로 열 당시만 해도 10명에 불과했던 직원 수는 한때 60명이 넘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외환위기로 석유 대신 연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경기가 회복되자 직원 수는 자연스럽게 줄어 현재는 27명이 공장에 몸담고 있습니다. 직원 평균 연령이 60살이 넘을 정도로 평생을 연탄과 함께 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새 직원을 고용하면 되지 않냐고요? 모르시는 말씀. 요즘 젊은이들은 연탄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꺼려합니다. 올 들어 경제가 어렵다 보니 사무실에 석유난로 대신 연탄난로 놓는 분들도 많지요. 그런데 아마 이런 인기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네요. 정부 아저씨들이 무연탄 수급 불균형 해소라는, 한번 들으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정책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랍니다. 쉽게 말해 공장에 지급하던 보조금도 줄이고 가격을 자율화한다는 얘기입니다. 벌써 1일부터는 연탄의 공장도 가격이 개당 403원에서 483원으로 올랐답니다. 시설농가 등에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지요. 여하튼 저는 이제 강남으로 갑니다. 트럭에서 잠깐 잠이나 자야겠네요. ●거여동의 연탄 이야기 “47, 48, 49, 50…. 아니다, 49개까지 옮겼지. 다시 합니다, 49, 50, 51….” 어, 이게 무슨 소리야. 벌써 도착했나. 밖을 보니 20대 청년들과 10대 학생, 50대 아저씨가 함께 나란히 줄을 지어 연탄을 옮기고 있습니다. “연탄 200개를 옮기려면 아직도 멀었다.”면서 일행을 재촉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언뜻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남자가 함께 연탄을 들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는 모습도 눈에 띕니다. 부자(父子) 사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어린 친구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부자 사이는 아니군요. 분명히 강남으로 간다고 했는데 여기는 강남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튼 연탄 특유의 냄새가 아침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을 전체로 번졌습니다. 아! 이제 알았습니다. 여기는 송파구 거여동. 서울에서 가장 연탄을 많이 때는 동네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은 ‘따뜻한 한반도사랑의 연탄나눔운동(한반도연탄나눔운동)’의 무료연탄배달 행사에 온 분들이라는군요. 법무법인 지평지성, 대학생 동아리 단체 ‘케피터즈’ 등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렇게 연탄 나르면 안 되는데, 몇 명은 처음 연탄배달을 하는 분들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연탄 몇 번 나르다 보면 땀이 저절로 흐를 겁니다. 자, 이제 제 차례가 됐습니다. 저는 어디로 갈까요. 저의 새로운 안식처는 홀로 사는 김융래(71) 할아버지의 집입니다. 김 할아버지는 자신의 단칸방 옆에 차곡차곡 쌓이는 연탄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는군요. 아마 5월까지 연탄을 써야 한다며 머릿속으로 연탄 수를 세고 계신 듯합니다. 김 할아버지를 비롯해 한 가구당 들어가는 연탄은 200~300장 수준입니다. 추울 때는 하루 3~4개, 날이 풀리면 1~2개의 연탄을 쓰지만 대부분 어르신들은 날이 조금이라도 풀릴 때에는 한 장이라도 아끼신답니다. 그래야 봄 사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추위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웃 주민인 안귀래(80) 할머니도 연탄을 쓰십니다. 안 할머니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데요. 몇몇 분들이 연탄을 받지 못하신다고 한숨을 쉬시네요. “지난번에는 연탄 없는 집에 우리 집 연탄을 나눠주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집이 생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안 할머니의 고운 마음에 저도 갑자기 뭉클해집니다. 올해 한반도연탄나눔운동과 함께한 단체는 지난해 300여개에서 500여개로 늘었다고 합니다. 참가자도 3만 2000명에서 5만명으로 늘었다는 것이 원기준 사무총장의 설명입니다. 기업체 등의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지만, 봉사활동 참가자가 많아지니 그래도 힘이 되는 소식 아닙니까? 한반도연탄나눔운동은 봄·여름 사이 전국을 대상으로 저소득층 연탄사용가구 실태조사를 한 뒤 9월부터 본격적으로 연탄 배달을 시작합니다. 원 사무총장의 표현을 빌리면, 연탄봉사활동은 ‘사회적 효도’입니다.. ●노원구 월계2동 연탄가게 이야기 아 참, 말이 나온 김에 얘기 하나 더 할게요. 동네 연탄가게 혹시 보신 적 있으세요? 요즘에는 공장에서 직접 배달을 해 연탄가게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연탄을 살 일도 거의 없을 테구요. 제 친구 가운데 재개발이 예정된 노원구 월계2동의 연탄가게로 간 애들이 있습니다. 가격이 530원 정도에 팔린다니 저보다는 비싸게 팔리는 친구들이죠. 주인 김문국(53)씨가 구멍가게와 연탄가게를 함께 운영한다고 하는데요, 평생을 그곳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김씨 연탄 창고에는 지금도 1000장 남짓한 연탄이 쌓여있습니다. 많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200장씩 나눠 갖는다고 계산하면 다섯 사람 정도 분량밖에는 되지 않는 양입니다. 제가 호황을 누리던 1960~70년대에는 하루에 수 백 장이 팔리는 것도 예사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주문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오히려 짜증을 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경사가 가파른 동네까지 배달을 나가다 보면 웬만한 공사판 노동일보다도 고됐기 때문이지요. 김씨가 연탄배달 나갈 일이 크게 줄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인근에 주공상계19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대의 연탄 판매량은 갈수록 급감했고 지금은 단골 빼고는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제가 김씨의 연탄가게에 갔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봄이 될 때까지 새 주인도 못 만나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저는 이제 담담히 재가 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모두 따뜻한 겨울 보내십시오. 그래픽 김선영기자 ksy@seoul.co.kr ■ 연탄의 역사 1966년 석유에 밀려 하향기 1990년대 초 폐광시대 맞아 탄광매몰 사건이나 연탄가스 중독사고는 1970~80년대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한 단골메뉴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연탄무료배달 소식 정도만 간간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연탄전성시대는 갔다. 우리나라 연탄공장의 효시는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인이 평양에 설치한 공장이다. 광복 후에는 대성산업이 연탄공장의 맹아(萌芽)였고, 삼표·삼천리연탄 등 3대 메이저사가 1960년대를 대표했다. 이후 연탄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1963년 말 전국의 연탄공장 수는 400여개에 달했다. 그러나 업체 간 과열경쟁은 여러 부작용을 낳았고 불과 2년 뒤인 1965년에는 3분의1 수준인 130여개로 공장 수가 줄었다. 정부도 1966년부터는 에너지 정책 중심을 석탄에서 석유로 옮기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석유가 전체 에너지 소비의 37.4%를 차지해 처음으로 석탄을 추월했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연탄 소비량이 잠시 늘기도 했지만 내리막길을 걷는 연탄의 소비감소 추세를 막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도시가스의 보급으로 연탄의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1990년대 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폐광시대를 맞았다. 현재 에너지 소비에서 연탄·무연탄이 차지하는 비중은 2.1% 수준이다. 난방보다는 고깃집 등 음식점 연료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길섶에서] 아침소음/김성호 논설위원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 어느 쪽이든 낙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식구끼리 아침·저녁형을 놓고 다툼이 일곤 한다. 그때마다 속내는 ‘너희들이 새벽의 맛을 알겠느냐.’고 속으로 득의양양한다. 혼자만의 고요적막과 그속에서 뭔가 해냈을 때의 성취감을 어찌 알까. 사나흘 전부터 아침고요를 박탈당해 언짢다. 신문배달 오토바이 소리와 청소차의 엔진소리는 익숙한 소음. 그게 아니라 멀지 않게 들려오는 공사판 굉음에 빼앗기는 아침의 짧은 행복이 아깝다. 이른시간 공사가 웬일인가. 굴착기 굉음과 망치질, 목재 부딪는 소리…. ‘오늘은 꼭 따지겠다.’며 별러 왔다. 소리를 따라 찾은 공사판이 제법 크다. 크레인과 시멘트·목재 더미 속에 분주한 인부들. 두셋·서넛씩 호흡을 맞추는 작업 손발이 척척 맞는다. 한참 바라보다가 말을 꺼내 본다.“저기요….” 흘낏 돌아보는 인부들의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다시 “저기요….” 소리쳐보지만 목구멍에 걸리고. 결국 목적달성을 못하고 돌아섰는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건 왜일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공사판옆 아찔 보행… 찻길 내몰린 행인

    공사판옆 아찔 보행… 찻길 내몰린 행인

    27일 오전 서울 역삼동의 한 건물 신축현장. 2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을 짓고 있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낙하물 방지망과 보행자 통로는 찾아볼 수 없다. 현장 바로 앞이 인도인 탓에 사람들은 공사장 아래를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건물 위에서 조그만 볼트라도 떨어지는 날엔 인명 피해를 막을 수가 없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같은 날 오후 강남역. 한 건물 신축공사현장 주변은 바쁘게 드나드는 레미콘차에 승용차까지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행인들은 위태롭게 건물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낙하물 방지망은 설치돼 있었지만 따로 만들어진 보행자 통로조차 없었다. 근처에서 회사를 다니는 이모(28)씨는 “낙하물 방지망이 설치됐긴 하지만 공사장과 보도가 바로 붙어 있어서 불안하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같은 시간 영등포시장 건너편 상가건물 공사현장도 마찬가지였다. 보행자를 위한 안전 통로는 보이지 않았고, 공사장 가림막 바로 앞에 빨간 고깔만 몇 개 놓여져 있었다. 지난 25일 발생한 의정부 경전철 공사현장 사고를 계기로 본지가 서울 주요지역의 공사현장 10여곳을 둘러본 결과 도심 건설현장이 상시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도심 건설현장은 행인이 많고 면적이 좁아 언제, 어디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데도 상당수 공사장이 허술한 안전규정에 시공사와 지자체의 안전 불감증까지 겹쳐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전문가들은 안전규정과 관련된 현행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찬오 서울산업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노동부 주관인 산업안전보건법, 국토해양부 주관인 건설산업기본법 등 공사현장 관리가 여러 부서로 나뉘어 있다 보니 종합적인 안전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며 컨트롤 타워의 부재를 지적한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의 허술한 안전규정도 도마에 올랐다. 박종국 건설노조 노동안전국장은 “산업안전보건법은 작업장 내 근로자의 안전에 대해서만 규정해 놓았을 뿐 보행자의 안전에 대한 규정은 없어 시공사가 굳이 돈이 더 드는 안전장치를 설치할 의무를 느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현장 밖 인도는 구청 등 각 지방자치단체 관할인데, 지자체는 보행자 안전을 시공사에만 맡겨 놓은 채 나몰라라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전문가들은 꼬집었다. 이런 이유로 의정부 경전철 사고 이전에도 도심 건설 현장에서 안전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서울 회현동에서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건설 자재가 쏟아지는 바람에 근처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행인이 숨졌다. 7월 초에는 남대문 근처 공사장에서 외벽 타일 수백장이 수십m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던 반포로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천장이 무너지기도 했다. 모두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건설 감리회사 관계자는 “안전수칙은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시간과 비용의 문제로 대부분의 시공사들이 강풍, 폭우, 인부의 숙련도 미숙 등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비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글 사진 박건형 김민희 오달란기자 kitsch@seoul.co.kr
  • [중산층 두껍게] 희망 잃은 빈곤층 2인 인터뷰

    [중산층 두껍게] 희망 잃은 빈곤층 2인 인터뷰

    “게으르니까 가난한 거라고요? 잘살려고 노력할수록 가난해지더군요.” 인터뷰를 위해 만난 빈곤층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먹고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가난의 질곡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빈 손으로 남하한 뒤 돈 없고 배운 것 없어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한 모자와, 영세자영업자로 일하면서 생긴 빚으로 파산하고 만 한 가장의 사연을 통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빈곤층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 두평 쪽방살이 80대 할머니 김씨 “월수 70만원… 아들 약값에 돈 다써” 서울 후암동의 김순애(81)씨와 김수용(49)씨 모자는 한 달에 25만원을 주고 두 평 남짓한 쪽방에서 산다. 10년 전만 해도 같은 동네의 4평짜리 방에서 살았다. 하지만 아들 김씨가 7년 전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평수를 절반이나 줄여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자는 기초생활보호생활자로 등록돼 동사무소에서 각각 40만원, 30만원을 받아 생활한다. 다른 수입원은 없다. 얼마 전까지는 어머니 김씨가 리어카를 끌고 폐지와 빈 병을 주워 용돈벌이를 했지만 구청에서 나온 감시관에게 적발돼 수급비를 깎일 뻔한 일을 겪고는 그만두었다. 한 달에 70만원을 받아 방값 25만원, 아들 약값 20만원, 생활비 20만원을 쓰고 나면 남는 돈은 거의 없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아들이 사고가 난 뒤 병원비가 없어 MRI(자기공명 단층 촬영장치) 한번 제대로 찍어보질 못했어. 아직 젊은데 어쩌면 좋아.”라며 아들을 걱정했다. 그렇다고 단 하루도 게을리 보내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영등포역 뒤 영일동 판잣집에 자리를 잡았다. ‘가난해서 걸리는 병’인 장티푸스와 콜레라로 아들 넷을 모두 잃고 막내 하나만 겨우 살렸다. 그 막내는 돈이 없어 중학교 1학년을 자퇴하고 신문배달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16살부터는 공사판을 다니며 어깨 너머로 전기 기술을 배웠다. 80년대 개발붐을 타고 한강 둔치 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뒤로 일용직을 전전했으므로 4대 보험이나 정년 등은 꿈도 못 꿨다. 어머니 김씨는 “평생 번 돈은 약값으로 다 들어갔다. 만날 아들하고 둘이서 방 안에만 있어 혹시 나가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 병원비는 또 누가 내나 싶어서…”라며 한숨을 쉬었다.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모자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한다. 얼마 전 한 봉사단체가 밥솥을 줘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됐고 집 근처 교회에서 일주일에 두 번 반찬을, 한 달에 한 번 쌀을 갖다줘서 생활에 큰 보탬이 된다. 그러나 시장에 나갈 때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만 하는 물가 때문에 한숨만 는다. 아들 김씨는 “반찬값이 점점 올라서 시장에 가기가 무서울 정도예요. 파도 한 단에 3000원이나 하더라고요. 요즘엔 파를 한 번 사서 잘라둔 다음에 나눠 먹어요.”라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 20여년 직업 전전 장애인 최씨 “5000만원 빚이 두배로… 파산도 못해” 서울 성동구에 사는 최모(50)씨는 ‘만세’를 부르기 일보 직전이다. 채권추심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세’는 곧 파산을 일컫는 말이다. 20여년 동안 과일노점상, 전파상, 초고속 인터넷 대리점 등 안 해본 일이 없는데 희한하게 일을 할수록 빚만 쌓였다. 9년 전 동업하던 친구가 먼저 ‘만세’를 부르고 난 뒤 빚 2000만원이 생겼다. 그걸 갚지 못해 대여섯 개의 카드를 가지고 돌려막기를 하다가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3살 때 뇌성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최씨는 고등학교 전자과를 나와 1985년 조그만 전파사를 차렸다. 2년간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했지만 대기업이 애프터서비스망을 본격적으로 구축하면서 조그만 전파사는 고객을 한꺼번에 잃게 됐다. 12년 전 한 중소 보일러회사에 들어갔지만 학력도 낮고 장애인인 최씨에게 승진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5년간 다니다 과일 노점상으로 나섰다. 과일은 빨리 팔지 않으면 썩어서 내버리는 물건이라 재고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처음 장사를 해보는 최씨는 요령을 전혀 몰랐다. 모아둔 돈을 까먹고 나서 1998년 친구와 함께 초고속 인터넷 대리점을 열었다. 인터넷이 전국에 막 깔리기 시작한 때라 가입에 두세 달이 걸렸고 설치가 안 되는 지역도 많았다. 당연히 최씨의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신용유의자가 되자 최씨의 빚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빚 2000만원이 생겼다. 이듬해부터 카드 돌려막기를 했다. 2003년 카드대란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나 마구 카드를 발급해주던 때라 간신히 터져나오는 빚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못갔다. 2003년 최씨와 그의 아내는 신용유의자가 됐다. 최씨는 “그저 열심히 일해 가족들하고 먹고 살려고 한 것밖엔 없는데 신용유의자의 나락에 떨어져 버렸다.”며 울먹였다. 그는 “빚 원금이 5000만원이었는데 얼마 전 파산신청을 하려고 계산해보니 1억원이 됐다. 그동안 파산할 돈이 없어 파산도 못하고 있었다.”면서 “영세 자영업자들을 위한 대책과 파산제도 개선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 사진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법관 꿈꾸던 소년 59년째 가슴앓이

    법관 꿈꾸던 소년 59년째 가슴앓이

    초등학교에서 반장을 도맡아 하며 법관을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이제 70대 노인이 된 그 소년은 서울의 20만원짜리 반지하 월세방에 산다. 59년 전 전쟁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그의 부모와 세 동생은 빨갱이로 몰려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전쟁고아라는 상처를 안고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59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만난 김장성(73·서울 녹번동)씨는 “내 인생은 한국전쟁 때문에 송두리째 망가졌다.”며 한숨을 토해 냈다. 한국전 당시 경찰이나 국군에 의해 처형당한 보도연맹이나 부역자 출신의 자녀들은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사상범의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했다. 충남 아산이 고향인 김씨도 이런 전쟁고아 중 한 명이다. 김씨의 아버지 김석남(작고 당시 30세)씨는 마을의 이장으로 일하다 빨갱이로 몰렸다. 3개월간 피신생활을 하다 1950년 12월 아산경찰서로 가서 자수했지만 1·4후퇴 즈음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 최일순(작고 당시 38세)씨와 김씨의 12살, 5살, 2살짜리 동생들은 도민증을 준다며 면사무소로 오라는 소리를 듣고 갔다가 인근 성재산 방공호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희생됐다. 김씨는 온양에 심부름을 간 덕에 화를 면했다. 김씨의 둘째 동생 무일(당시 9세)씨도 경찰이 풀어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후 난리통에 동생과 오롯이 남게 된 김씨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야간고등학교를 나와 대입 시험을 봤지만 등록금 마련을 위해 부어 놓은 곗돈을 떼여 입학을 포기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군 간부후보생에 지원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4주 만에 나와야 했다. 공사판과 노점상을 전전한 김씨는 47살부터 20년간 아파트 경비로 일하며 부어 놓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7년 김씨 마을의 집단학살사건에 대해 “아산 부역혐의사건은 인민군 점령시기인 50년 9월~51년 1월 부역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77명 이상이 희생된 사건”이라는 결정문을 발표한 뒤 정부 차원의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을 공권력이 처형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씨는 “보상은커녕 정부의 공식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창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과거사 정리는 공권력의 잘못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피해자 입장에서 풀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에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진실규명 신청이 들어온 것은 총 7820건이다. 그 중 절반도 안 되는 3190건만 규명됐을 뿐이다. 특히 한국전쟁의 상흔인 전쟁고아들에 대한 통계나 연구는 전무한 상황이다. 글 사진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새를 통해 세상을 읊다

    새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이름도, 모양도 다른 100마리의 퍼덕거림이 책 위에서, 귓전으로, 머릿속으로 분주히 옮겨다닌다. 달동네 전봇대 위에 앉았고, 새벽녘 청소차 위에서 날개를 쉬었고, 바닷가 칼바람에 오그라든 해태(김)밭 다듬는 손가락 위에도 내려앉았다. 모든 지친 것들이 새의 보드라운 날개 아래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다.  2000년 등단한 뒤 왕릉과 꽃에 천착해왔던 시인 이오장(56)이 이번에는 무수한 새들의 날갯짓에 눈을 돌렸다. 이오장은 자신의 7번째 시집 ‘날개’(시문학사 펴냄)를 내고 꼬박 100마리의 새를 들여다봤다. 그는 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의 사람을 봤고, 또한 새는 각자의 역할과 몫을 드러내며 세상에 자신을 비춰 ‘너희들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줬다.  이오장의 새는 결코 한눈을 팔지 않는다. 새들의 시선은 산업화의 희생양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사내(‘뜸부기’)가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 막노동으로 근근이 연명해오거나(‘쑥새’), 뒷방에 드러누워 방문 외판원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억척 아내(‘노랑할미새’)에 얹혀 사는 이를 좇는다. 그러나 이들의 소박한 행복조차 재개발로 달동네 보금자리마저 빼앗기기 일쑤다(‘멧비둘기’). 그의 새 시집 ‘날개’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뿐인가. 불법체류자로 몰리며 손가락이 잘리면서까지 공사판을 전전하는 조선족(‘덤불해오라기’), 흑인 혼혈아이가 견뎌온 손가락질과 눈물(‘진박새’) 등에 대한 위로도 잊지 않는다.  열매의 알맹이만 파먹는 습성을 가진 ‘동고비’를 이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부동산 투기꾼에 비유하기도 한다. ‘동고비’가 서운할 일이다.  이오장은 “조류도감을 통해 새를 들여다 보니 그들의 습성이 사람의 행위와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많더라.”면서 “비유와 풍자를 통해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새를 노래했지만, 100마리의 새를 모두 하나씩 하나씩 읇조리고 나면 그가 노래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횡단보도 건너는 10대여, 어디로 가는가

    횡단보도 건너는 10대여, 어디로 가는가

    1969년 8월8일 오전 11시35분, 영국 런던 세인트존스우드의 횡단보도를 존 레넌,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가 차례로 건너간다. 비틀스의 실질적인 마지막 앨범 ‘애비 로드’의 표지다. 이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만화가 강도하가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 킬러’에 이어 청춘 3부작의 완결편으로 내놓은 ‘큐브릭’의 10대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시험 도중 불현듯 학교를 벗어나 험난한 세상으로 가출한 미우는 트라우마가 있다. 네 살 때 차에 치일 뻔한 미우를 구하다가 어머니가 숨진다. 미우는 그러나, 이때 기억을 봉인하고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가정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중졸 영화감독 지망생 독우는 달동네 출신이다. 공사판에서 사고를 당해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지만 노래방 도우미를 하며 술취해 밤늦게 귀가하던 어머니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독우는 잠든 어머니 머리 맡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어머니는 정신줄을 놓게 된다. 수경이는 물안경을 쓰고 에로 영화를 찍는다. 그래서 이름이 수경이다. 에로 영화를 찍는 이유는 유명인사인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수경이는 본처 소생인 큰오빠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하며 배다른 동생들에게 상처를 입혀도 역성만 들던 아버지를 저주한다. 높이뛰기를 잘하는 소영이는 중학교 때 체육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하늘 높이 다가가는 게 낙이었지만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며 머리를 크게 다쳐 어린아이처럼 된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나오는 여일처럼. ‘큐브릭’은 저마다 절망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 청춘들의 충동적이고도 기묘한 동거를 다룬 작품이다.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지만 절망은 이어진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여전히 성폭행당하며 정신병은 깊어가고 복수는 자기 자신을 좀먹는 등 잔인한 어른들의 세상은 이들을 계속 절망으로 내몬다. 작품 제목인 큐브릭은 서로 다른 종류라도 팔, 다리, 몸통, 머리 등을 떼고 바꿔 붙일 수 있는 작은 인형을 말한다. 절망에 절망이 이어지며 큐브릭이 점점 모양을 갖춰 가는 과정에 주인공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2007년 미디어 다음에 연재됐던 작품을 애니북스가 세 권으로 묶어냈다. 각 권 1만 3000원.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그림 가치는 함께 나눌 때 더 빛나죠”

    “그림 한 점에 녹아 있는 소중한 가치는 모두가 함께 공유할 때 그 빛을 더욱 발합니다.” 40여년간 모아온 미술품 수천 점을 아낌없이 기증하는 재일교포 사업가 하정웅(70)씨는 말한다. 하씨는 1993년부터 6000점이 넘는 미술품을 국내에 기증했다. 명예관장으로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을 비롯해 전북도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영·호남 곳곳에서 그가 기증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들 작품을 한데 묶어 ‘남도 벨트’라 부른다. 하씨는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을 맞고서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부모는 일자리를 찾아 공사판을 떠돌았다. 어려운 형편에 명문 아키타 공고에 들어갔지만 졸업 이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시험조차 볼 수 없었다. 그림을 곧잘 그리던 하씨는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끝내 꿈을 접었다. 그는 “한국인이라는 차별도, 시험도 없는 그림이 좋았는데 어머니가 ‘그림으로는 밥 벌이가 힘들다.’면서 물감이며 캔버스를 모두 불태워버렸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후 하씨는 무작정 도쿄로 가 1963년 가전제품 가게를 냈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컬러TV가 불티나게 팔렸다. 살림이 나아지면서 하씨는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화황(全和凰)과 조양규(曺良奎), 손아유(孫雅由) 등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을 주로 수집해 온 하씨의 컬렉션은 ‘기도’와 ‘망향’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연결된다.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차별과 멸시를 이겨내야 했던 그의 삶이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셈이다. 하씨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정신이야말로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불행한 역사 속에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을 그림으로 공감하고 함께 고민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shlim@seoul.co.kr
  • [데스크 시각]지방의 성장동력 ‘녹색 구글’/이기철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지방의 성장동력 ‘녹색 구글’/이기철 사회2부 차장

    해바뀜이 1주일 남짓 지났으나 예사롭지 않다. 희망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이야기가 더 많다. 수개월째 문을 닫은 상가와 청년 실업…. 10여년 전 국제통화기금(IMF)체제 때보다 더 어렵다는 아우성이 가득하다. 이를 극복하고자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일 비상경제정부를 설치하면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어 정부는 녹색 뉴딜을 선언했다. 4년간 50조원을 들여 일자리 96만개를 만든다. 새해 용돈 내지 선물치곤 간단치 않다. 침체된 내수경기 부양과 지방경제 활성화라는 덕담도 함께 건넸다. 그런데 선물보따리를 받은 국민들은 맘이 편치 않다. 경제 전문가들은 전대미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대책 수립을 주문한다. 전국을 공사판으로 만드는 것 이상의 정책, 일회성 이상의 고용 대책, 녹색을 담은 국가 장기 비전 등을 요구하고 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지방도 마뜩찮아 한다. 언뜻 지방경제 활성화 명목에선 최대 수혜자로 보인다. 그러나 4대강 정비사업과 5+2 광역경제권에서 지방으로 가는 새해 예산은 여태 배정되지도 않았다. 또 향후 일정이 불투명하다고 주장한다. 사업의 ‘중도금과 잔금’ 을 받을 날짜가 잡히지 않은 셈이다. 또 국가 금고를 책임진 공무원들도 안절부절못한다. 국고가 텅 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지방소득세와 지방소비세 도입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원유 할당관세 인상이나 옥외 간판세 신설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게 다시 종합부동산세를 개편한 정부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되돌아간다. 4대강 살리기 및 정비사업에 2012년까지 18조원이 투입된다. 일자리 28만개가 생긴다. 4대강만의 생산유발효과는 23조원대로 지방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국가 균형발전에 기여하게 된다는 게 정부측의 설명이다. 이 사업에 대한 정부의 진정성을 믿지만 일자리 28만개가 어떻게 생기는지, 경제성이 있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 의문이다. 21세기가 말 그대로 삽질하는 취로사업 시대도 아니고, ‘이태백’이 굴착기 기사가 되고자 중장비 학원에 다닐 것도 아닌데…. 경제성 검토 역시 문제가 많다. 이를 소홀히 했던 지방 공항의 활주로에는 파리도 날지 않는다. 1297㎞의 자전거 길은 얼마나 경제성이 있을지. 그럼에도 지방은 이 사업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있다. 경기 활성화라는 불꽃의 심지가 될 것으로 믿고 싶기 때문이다. 녹색 뉴딜이 국가의 기본책무인 지역 통합과 국토 균형발전의 초석이 되길 바라고 있다. 지방이 보기에는 그간 이명박 정부의 균형발전 노력도, 이를 위한 진지한 성찰도 부족하다. 정부가 국제경쟁력을 들먹이면서 수도권 규제 완화를 발표하자 지방이전을 발표했던 많은 기업들이 이를 철회했다. 이들 기업의 이전을 학수고대하던 지방 자치단체장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상경할 태세였다. 이젠 지방이 목청만 높여선 안 된다. 변해야 한다. 균형발전을 빌미로 특혜나 과거 수도권에 대한 희생의 대가를 요구해서도 바라서도 안된다. 지방이 중앙 정부가 던져주는 ‘포크배럴’에 언제까지나 의지할 수 없다. 과거 미국에서 농장주가 흑인 노예를 달래면서 던져준 돼지고기가 포크배럴이다. 중앙정부의 시혜성 정책만 기대하다간 지방은 노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지방 정부는 스스로 성장동력을 찾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최후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갖는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필요하다. 이게 새해의 희망이다. 지방 정책의 키워드로 녹색성장 전략이자 에너지테크놀로지(ET)의 원천기술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새로운 경제 혁명의 주도자로 부상한 ‘코드 그린’을 말한다. ET의 출발선은 세계가 거의 같다. 지방도 해볼 만하다. 지방에서 ET로 무장한 ‘그린 구글’이 탄생하길 고대한다. 이기철 사회2부 차장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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