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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은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다.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적용되면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 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의 타격이 컸다. 재난지원금 등 정부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다 방역이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에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아 19일 서울 주요 상권 5곳(중구 명동, 서대문구 신촌동, 용산구 이태원1동, 종로구 종로1·2·3·4가동, 강남구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사정이 어렵다고 상인들은 토로했다.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다음달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유명세를 탔다.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명동의 한식업 점포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가 감소했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 명동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저렴하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춰 받는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사람들이 이태원을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이날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프다.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으려고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1년 내내 곤두박질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돈다.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끊겼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 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46·가명)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에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 버렸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식으로 장사했는데 5000~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33·가명)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던 이씨는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하루 300만원까지 찍었던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44·가명)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 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 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감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 회식 후 2·3차를 위해 가던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노래방, 당구장 등이 대표적으로 지난해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하는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 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 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명품으로 분류할 만한 다른 소매업도 활황이었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 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 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사회부 사건팀 : 이성원·오세진·김주연·이주원·손지민·최영권 기자
  •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해외여행 못 가니 명품백이라도”… 강남 매장 대기줄만 200팀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은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다.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적용되면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 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의 타격이 컸다. 재난지원금 등 정부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다 방역이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에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아 19일 서울 주요 상권 5곳(중구 명동, 서대문구 신촌동, 용산구 이태원1동, 종로구 종로1·2·3·4가동, 강남구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사정이 어렵다고 상인들은 토로했다.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다음달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유명세를 탔다.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명동의 한식업 점포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가 감소했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 명동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저렴하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춰 받는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사람들이 이태원을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이날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프다.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으려고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1년 내내 곤두박질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돈다. 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끊겼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46·가명)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에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 버렸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식으로 장사했는데 5000~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33·가명)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던 이씨는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하루 300만원까지 찍었던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가명·44)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 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 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감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회식 후 2·3차를 위해 가던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노래방, 당구장 등이 대표적으로 지난해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하는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 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 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명품으로 분류할 만한 다른 소매업도 활황이었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 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 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사회부 사건팀 - 이성원·오세진·김주연·이주원·손지민·최영권 기자
  • 관광객 사라진 명동, 낙인에 우는 이태원… “희망이 있긴 할까요”

    관광객 사라진 명동, 낙인에 우는 이태원… “희망이 있긴 할까요”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은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다.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적용되면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 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의 타격이 컸다. 재난지원금 등 정부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다 방역이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에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아 19일 서울 주요 상권 5곳(중구 명동, 서대문구 신촌동, 용산구 이태원1동, 종로구 종로1·2·3·4가동, 강남구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사정이 어렵다고 상인들은 토로했다.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다음달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유명세를 탔다.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명동의 한식업 점포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가 감소했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 명동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저렴하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춰 받는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사람들이 이태원을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 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이날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프다.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으려고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1년 내내 곤두박질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돈다. 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끊겼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 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46·가명)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에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 버렸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식으로 장사했는데 5000~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33·가명)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던 이씨는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하루 300만원까지 찍었던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44·가명)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 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 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감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 회식 후 2·3차를 위해 가던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노래방, 당구장 등이 대표적으로 지난해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하는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 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 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명품으로 분류할 만한 다른 소매업도 활황이었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 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 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사회부 사건팀 : 이성원·오세진·김주연·이주원·손지민·최영권 기자
  • 도미노처럼 무너져가는 서울 상권…단, 청담동만 불 밝혔다

    도미노처럼 무너져가는 서울 상권…단, 청담동만 불 밝혔다

    주요상권 5곳 업종별 매출 분석·심층인터뷰‘경제’보다는 ‘방역 우선’ 지침에 생업 포기“버틸 수 있다” 희망은 머지않아 절망으로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난 1년간 자영업자들이 차례대로 무너졌다. 지난해 2월 중국 후베이성을 거친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으로 서울 명동 같은 외국인 관광·쇼핑 명소가 타격을 받더니, 5월에는 이태원 클럽 발 확산으로 서울 주요 상권이 붕괴했고, 지난 8월 수도권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격상으로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매출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특히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노래방과 헬스장, PC방 등이 타격이 컸다. 그 사이 자영업자에게 재난지원금 등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경제’보단 ‘방역’ 우선이라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자영업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서울신문은 코로나19 확산 1년을 맞는 20일 서울 주요 상권 5곳(명동, 신촌동, 이태원1동, 종로1·2·3·4가동, 청담동)의 업종별 매출 증감률을 분석하고 상권마다 자영업자 10명씩 총 50명을 만나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매출액 분석은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 데이터를 이용했다. 상권 특징마다 업종별 매출액 감소 차이는 있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물론 이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권과 업종도 있었다. 손꼽히는 부촌인 강남 청담동의 가방업종 매출은 코로나19 전보다 수십 배 뛰었고, 집합금지업종으로 분류된 헬스장 역시 매출액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외국인 관광객 감소, 첫 직격탄 맞은 명동 명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기석(61)씨는 지난해 4월 직원을 한 명 줄였다. 2~3월 매출액이 줄어든 것은 어떻게든 버텨 봤지만, 4월엔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때 이씨 가게는 과거 일본 공영방송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돼 일본인에게 유명새를 타면서 많을 땐 하루에 손님 300명 정도를 받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그러나 지금은 월세 120만원과 전기·가스비 등 100만원을 내고 나면 빠듯하다. 이씨는 지난 18일 “가게가 작아 그나마 고정비가 많지 않아 버티고 있다”며 “오늘도 20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4차 재난지원금이 나올 만큼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광·쇼핑 명소인 명동은 지난해 1월 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국내에서 발생한 이후 빠르게 상권이 식었다. 코로나19 여파로 한국을 찾는 일본·중국 관광객이 급감하니 장사가 잘될 리가 없었다. 실제로 명동의 한식업 점포당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1월 3278만원이었지만 2월 2374만원, 3월 1909만원으로 떨어졌다. 3개월 사이 42.8% 떨어진 것이다. 소매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3분기(7~9월) 명동의 가방매장의 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이 없던 전년 동기 대비 71.2%나 감소했다. 화장품(55.1%↓), 의류(44.8%↓), 신발(35.8%↓) 모두 하락세였다. 현장 체감 온도는 더 나빴다. 지난 18일 기준 명동거리는 주한중국대사관이나 명동성당 인근 등을 제외하면 10개 점포 중 문을 연 점포 1개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월세가 그나마 낮고 서울시가 월세를 반값으로 낮춘 지하상가도 10개 중 2~3개꼴로 ‘잠정 휴업’ 상태다. 30년째 명동 지하상가에서 가방을 판 이경구(가명·62)씨는 “빈집은 3040대 남자 사장들이 냉동창고에서 일하거나 택배, 라이더를 하러 간 것”이라면서 “남은 사람들도 적자이지만 나이가 많다. 올해면 ‘코로나가 끝나겠지’ 하는 희망으로 버틴다”고 했다.●이태원 클럽발 확산, 무서운 낙인효과 “사람들이 이태원을 ‘다녀오면 코로나19 걸리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도 이러한 낙인효과가 쉽게 사라질까 모르겠어요. 이태원에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12년째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구자훈(52)씨는 19일 텅 빈 가게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태원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태원의 성장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최근 이태원의 위기가 누구보다 마음 아플 수밖에 없다. 구씨는 코로나19가 발생한 지난해 초까지는 금방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 발 사태 이후 간신히 버티던 매출이 90%나 빠지면서 희망이 무너졌다. 최근 하루에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고작 3팀 정도다. 밀린 임대료를 갚기 위해 부업으로 배달 플랫폼업을 하고 있지만 변변찮다. 구씨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과거와 같은 날이 다시 올지 확신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렵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태원1동 상권의 매출액은 곤두박질 쳤다. 특히 일반 음식점의 경우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중식이 80.8% 떨어졌고, 일식과 한식은 각각 68.5%, 56.5% 감소했다. 서울 전체 같은 기간 업종 매출액 평균 증감률(중식 16.2%↓ 한식 15.2%↓ 일식 1.1%↓)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문제는 이태원의 낙인효과다 서울시 상권분석 데이터에 따르면 이태원을 찾는 고객의 80%는 외지인이다. 20~30대 젊은 층이 주요 고객인데 지난해 5월부터 집단감염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하면서 발길이 순식간에 멈췄다. 지난해 1월 코로나19 발생 이후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이태원 상권 매출액은 지난해 5월 기준 전월보다 호프업종은 49.7%, 치킨전문점은 46.4%, 한식은 46.5% 급락했다. 야간 영업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외식업은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매출이 70~80% 집중됐다. 이태원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최지훈(가명·46)씨는 “가뜩이나 어려운 업주들에게 1~2시간만 장사하고 문을 닫으라고 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다”며 “영업 제한 시간을 상권에 맞게 조정해야 이태원 상권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관광객·대학생 사라진 신촌동, 남은 건··· “이화여대 앞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이 위주예요.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기니까 상권이 죽어버린 거죠. 이대는 원래 미용실, 신발·옷가게가 싼 걸로 유명해요. 외국인 상대로 박리다매 식으로 장사를 해온 거죠. 이제 그런 게 없으니 5000원~1만원짜리 옷 한두 벌을 손님 5명에게 판다고 무슨 장사가 되겠어요.” 5년간 이대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한 이정희(가명·33)씨는 지난해 5월부터 코로나19 충격이 컸다고 했다. 3~4월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5월부터 손가락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며 손님 수가 쭉 떨어졌다고 했다. 반등도 없었다. 물건을 대량으로 사갔던 외국인 관광객도 코로나19 여파로 자취를 감쳤고, 하루 매출 300만원까지 찍었던 가게 매출은 하루에 1만원짜리 옷 한 장 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이씨는 “주변에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보면 인적은 없고 공사판인 곳에 누가 이곳에 오려고 하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8일 찾은 신촌 내 이대 정문 앞 상권과 신촌역 부근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옷과 가방 등을 박리다매로 사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신촌동의 주요 소매점의 매출 타격이 컸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1.5% 줄었다. 화장품업도 74.7% 줄었고, 의류업은 61.2% 줄었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성지민(40)씨는 “어떨 때는 (손님이 가게에) 하루에 한 명도 안 들어올 때도 있다”며 “보증금이 1억 원 정도라고 하면 6000만 원 정도가 월세로 빠졌다”고 말했다. 신촌역 부근 대학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대학생이 등교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유동인구는 자연스레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3분기 신촌동의 한식업 매출액은 전년대비 36.6% 줄었고, 대학생들이 부담없이 찾는 패스트푸드점과 치킨전문점, 분식점 매출액은 같은 기간 46.0%, 57.1%, 44.3% 줄었다. 신촌역 부근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김장훈(44)씨는 “이 가게는 대학생이 이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평소엔 학생들이 3~4인 단위로 자주 왔는데, 지금은 초토화됐다”며 “세금낼 돈도 없어 대출금 1억원 중 일부로 세금을 냈다. 그렇다고 폐업할 엄두도 못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2차 문화 사라진 오피스·학원가 종로 종로는 학원에 다니는 성인 학생들과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일과 수업이 끝난 후 갖는 저녁 모임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오후 9시 이후 영업이 제한된 음식점을 중심으로 매출이 크게 줄었다. 회식 단골 메뉴인 삼겹살 등이 포함된 한식 업종과 중식 업종은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6%, 29.0% 감소했다. 서울시 전체 매출 가소분(각각 15.2%, 16.2%)을 고려하면 종로1·2·3·4가동은 이보다 2배 가까이 줄었다. 회식 2·3차 업종들은 타격이 더 컸다. 회식 자체가 크게 줄었거니와 1차만 모인 후 모임을 해산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회식 2·3차 업종인 노래방, 당구장 등은 집합금지 업종으로 지정돼 지난해 절반을 문을 닫은 채 보내기도 했다. 종로1·2·3·4가동의 노래방 매출은 같은 기간 3분기 매출액은 67.2%가 급감했다. 당구장 매출액도 서울시 전체로 보면 거의 줄지 않았지만, 종로의 경우 39.7%가 감소했다. ‘종각 젊음의 거리’ 상권만 따로 보면 당구장 매출은 62.3% 줄었다. 종로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박중훈(가명)씨는 “2주간 겨우 14만 3000원을 번 적도 있었다”면서 “평소에도 오후 9~10시쯤 첫 손님을 받곤 하는데 운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일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성훈(가명)씨는 “보통 2차나 3차로 많이 오는데 문을 열어도 낮에 장사가 돼야 영업을 하지 않겠느냐”면서 “이 일대는 임대료가 비싸다. 1층은 한 달에 1500만원 정도 하고, 나도 2층 전체를 쓰면 한 달에 2000만원 정도를 낸다. 규모가 크게 장사하는 사람부터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말했다.●해외여행 대신 명품···청담동 샵 매출 폭등 지난 18일 월요일 오전 10시. 청담동 인근 갤러리아백화점 샤넬 매장 앞에는 고객 16팀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앞에서 만난 손님들은 “지갑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서” 왔고, 주로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매장을 방문한 여성은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생일을 맞아 저 자신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비웃기나 한 듯 청담동에 있는 명품매장의 소비는 급격하게 늘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매장은 ‘가방업’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난해 3분기 청담동 내 가방업종 매출액은 전년동기 대비 796.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거리를 품고 있는 압구정 로데오거리(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의 임의적 분류)에 한정하면 매출 상승액은 같은 기간 1380.1%에 이른다. 코로나19에 갈 곳 잃은 돈들이 명품 구입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 전역 기준 가방 판매점의 같은 기간 매출액 상승률(23.5%↑)과 비교해도 50배 이상이다. 다른 명품으로 분류할만한 소매업도 증가세를 보였다. 시계·귀금속 업종의 매출은 같은 기간 148.2% 상승했고, 화장품 업종도 148.6% 뛰었다. 청담동 인근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해외 인기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는 주말에는 오픈시간에 맞춰가도 벌써 200팀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명품을 구입하는 등 일종의 보복 소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일식과 중식의 매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기간 청담동 내 일식과 중식의 매출액은 12.6%, 16.3% 올랐다. 일식과 중식의 경우 고급 음식점이 많고 개별 방으로 구분된 식당이 많다보니 코로나19의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집합금지업종이었던 피트니스센터도 같은 기간 18.5% 매출액이 늘었다. 골프연습장은 79.4%나 늘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손지민 기자 sjm@seoul.co.kr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서울시의회 반민특위, ‘일본어 잔재’ 청산 나선다

    서울시의회 반민특위, ‘일본어 잔재’ 청산 나선다

    574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서울시의회 친일반민족행위청산 특별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위원장 홍성룡)는 “진정한 친일반민족행위 청산은 무의식중에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잔재’ 청산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홍성룡 위원장은 “일본어 잔재는 한·일간의 자연스러운 언어 접촉 과정에서 우리말에 유입된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한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강제로 유입된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나 지난 현재까지도 일본어 잔재가 우리 삶과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홍 위원장은 일본어 잔재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순 일본어’, ‘일본식 한자어’, ‘일본어 음차어’를 꼽았다. 홍 위원장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순 일본어로는 짬뽕, 우동, 가라, 기스, 사라 등이 있다. 이는 초마면, 가락국수, 가짜, 흠, 접시로 순화해서 사용해야 한다. 일본식 한자어로는 망년회, 익일, 가불 등이 있는데 이는 송년회, 다음 날, 선지급으로, 일본어 음차어인 모찌, 유도리, 만땅 등은 찹쌀떡, 융통성, 가득(차다/채우다)로 각각 사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건설 분야나 당구 등과 같은 특정 전문 분야에서 노가다(→(공사판)노동자), 함바(→현장식장), 와쿠(→틀), 겐세이(→견제), 시네루(→회전), 다이(→당구대) 등 충분히 사용가능한 우리말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투 용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인사동, 송도, 욱천, 원남동, 관수동 등과 같은 지명도 일제가 우리의 얼과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본식으로 바꾸거나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붙인 것”이라면서, “지명 변경에 따른 혼선과 막대한 예산이 든다는 핑계와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이러한 일본식 지명들도 홍보와 공론화 과정을 거쳐 반드시 우리 고유 이름으로 되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홍 위원장은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큰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행정용어에도 몽리자(→수혜자), 사력(→자갈), 계리(→회계처리), 관창(→노즐) 등과 같은 일본어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라며, “일본어 투 용어는 대개 이해하기 어려워 일반 국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만큼 반드시 순화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광복 직후부터 꾸준히 국어 순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해 상당수 일본어 잔재를 정리했지만 여전히 비공식적인 자리나 특정 분야에서 일본어 투 용어가 버젓이 쓰이고 있는 이유는 정부나 자치단체, 국민들이 유난히 삼일절, 광복절, 한글날 등과 같은 기념일의 10년 단위가 되는 해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홍 위원장은 “매번 정부와 자치단체의 의지부족과 국민들의 무관심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조례 제정 등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적어도 행정용어에서 만큼은 일본어 잔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서울시의회 반민특위가 앞장서 나가겠다”라고 전했다. 한편, 서울시의회 반민특위는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와 일본어 잔재, 일제를 상징하는 조형물 등 일제잔재를 청산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지난달 15일 출범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살아남은 고통 12년째… 바뀐 것 없는 현실에 이가 갈립니다”

    “살아남은 고통 12년째… 바뀐 것 없는 현실에 이가 갈립니다”

    “12년 동안 달라진 게 하나도 없더군요. 남편과 제가 일하던 냉동창고와 작업 환경까지 똑같았어요. 보는 순간 너무 화가 나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리더군요.” 임춘월(57)씨는 2008년 1월 7일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이천 냉동창고 화재의 생존자다. 임씨는 지난달 29일 이천 물류센터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을 쏟고 말았다. 12년 전 화재에서 그는 얼굴과 몸의 절반에 3도 화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새살 돋는 부위를 가라앉히려 얼굴에 썼던 압박 복면(가먼트)은 3년 만에 벗었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흉터투성이다. 임씨는 3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악몽 같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중국 지린성에 살던 임씨는 2000년 4월 동갑내기인 남편 이성복씨를 따라 한국에 건너왔다. 임씨 부부는 경남 밀양, 울산 등 전국 공사장을 돌며 일했다. 사고가 났던 그날 임씨는 남편의 우레탄폼 발포 작업을 옆에서 돕고 있었다. 누군가 “불이야”라고 소리치자 남편은 다른 동료들을 구해야 한다며 임씨를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천장에서 시작된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고 폭발음이 들렸다. 임씨는 뒤통수를 몽둥이로 때리는 듯한 통증에 쓰러졌다. 불길에 눈을 뜨기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열기 속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남편 이씨는 창고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임씨는 남편의 죽음을 사고 후 석 달 뒤에야 알았다.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화상 치료를 이겨 내야 하는 임씨를 걱정한 가족들의 배려였다.다정했던 남편을 잃은 슬픔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임씨를 짓눌렀다.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임씨는 “글을 몰라 의사 선생님이 불러 주는 질문을 듣고 답을 했더니 99점이 나왔다. 심각한 우울증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뒤로 꼬박꼬박 심리 치료에 나갔고, 한글을 배워 귀화했다. 몸에 난 상처도 임씨를 괴롭혔다. 얼굴과 등, 엉덩이에 화상을 입은 임씨는 10여년간 크고 작은 수술을 35차례 받았다. 오랫동안 가먼트를 착용한 탓에 치아가 다 틀어졌고 피부 곳곳은 수시로 가렵다. 잠을 자는 새 긁어 피딱지가 앉기도 여러 번이다. 임씨는 “화재 사고와 화상은 평생 고통받는 끝이 없는 병”이라고 했다. 그는 “솔직히 죽을까 생각도 많이 했다”면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는 게 싫어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다가 앞을 못 보고 넘어지기 일쑤였다”며 “왜 이렇게 살아남아 설움을 당해야 하나 수백 번 되물었다”고 말했다. 불이 난 냉동창고 운영회사인 코리아2000은 사고 후 1년 동안 치료비를 내주다가 사정이 어려워졌다며 지원을 끊었다. 임씨는 “회사가 원망스러웠지만 너무 지치고 싸울 의지도 없었다”면서 “몇 년씩 소송할 엄두도 안 났다”고 말했다. 임씨는 산업재해로 장해 7등급을 받았다. 수술비 지원을 받긴 했지만 35번에 걸친 수술을 할 때마다 적게는 60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의 비급여 부담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2017년부터는 산재치료마저 끊겼다. 화상 때문에 민간 보험회사는 임씨의 실손의료보험 가입을 번번이 거절했다. 임씨는 화상 관리에 필수인 보습제도 제일 저렴한 알로에젤을 쓰고 있다. 돈 부담 때문이다. 화상으로 생긴 귓불의 구멍을 줄이는 수술을 또 받아야 하는데 임씨는 차일피일 수술을 미룬다. 그는 “돈만 있으면 아무 때나 병원에 가겠지만 병원비가 많이 들까 봐 못 간다”고 했다. 임씨는 2년 전 결혼한 아들 부부를 따라 올해 초 제주로 내려와 손주를 돌보며 지내는 중이다. 일을 다시 하고 싶지만 얼굴 흉터를 보곤 일감을 주는 곳이 없었다. “큰 욕심 없이 여생을 보내려 한다”는 임씨는 “이번 같은 사고가 다시 반복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임씨는 “공사판에서 일하면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하고 온몸이 땀범벅인데 안전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며 “작업의 위험성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회사가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지고 챙겨 줘야 한다”면서 “정부도 관리 감독을 더 강력하게 해서 재발을 막아 달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임씨는 이번 이천 사고의 생존자와 가족들,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는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분들을 생각하면 비통하고 괜스레 내가 미안하다. 희생자 가족들이 서로 보듬고 의지했으면 좋겠다”면서 “다친 분들을 응원한다.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치료받으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50년, 詩만 보고 달렸다…칠순·팔순, 詩가 터졌다

    50년, 詩만 보고 달렸다…칠순·팔순, 詩가 터졌다

    “‘나 건드리지 마, 또 시(詩) 나온다!’ 친구들을 만날 때 인사말 대신 건넨 농담이 제 트레이드마크가 됐습니다. 이제 시를 그만 써야 할 때도 됐는데. 허허허.” 문학을 천명으로 알고 50여년 외길을 걸어온 한국문인협회 원로시인 이운룡(83·전 중부대 국문과 교수·전북 전주시 중화산동) 박사. 그는 팔십 중반의 나이지만 아직도 시를 써야 삶의 의미를 느끼고 행복한 현재 진행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다.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마음은 문학청년이다. 솟구쳐 오르는 시상을 억누르지 못해 매일 시를 쓴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통 좁은 청바지와 스니커즈 스타일을 좋아하는 ‘멋쟁이 시인’이다. 깨끗한 피부와 살아 있는 눈빛, 힘이 있는 목소리, 밝은 표정에서 건강미가 넘친다. 항상 깔끔한 차림에 활기가 느껴진다. 젊은이도 따라가기 힘든 총기와 지성미가 풍기는 화법은 올곧게 살아온 문인의 향기를 내뿜는다. 이 박사는 ‘삶의 방정식’을 ‘근면’, ‘성실’, ‘정도’, ‘직진’으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시인의 길을 한평생 쉼 없이 달려왔다. 집념과 의지로 밤낮없이 시에 매달려 살았다. 두 번의 암 수술도 그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문학은 나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농촌의 자연은 꿈을 키웠고, 꿈은 문학을 키웠으며, 문학은 나를 키웠다”면서 “나와 시, 시와 나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고 강조한다.그는 1969년 등단한 이후 1355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70~80대에 쓴 것이다. 시인으로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가 많은 시를 쉬지 않고 쓸 수 있는 비법은 시상과 영감, 제재가 떠오를 때마다 잊기 전에 메모하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주제의식에 따라 언어를 구조화하면서 첨삭을 거듭한다. 시상을 더 정확하고 표상하기 위해서다. 전심전력 언어의 형상화에 투신하면 무르익은 시를 쓰고 후회하는 일을 덜 수 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에는 좋은 시를 쓰려고 고뇌했지만 인생을 숙고하고 성찰하면서 우주의 충만한 존재 문제에 천착하려는 시 정신과 시작 태도가 나이 든 시인의 소명임을 늦게 깨달았지요. 이제야 시가 쉽게 나옵니다.” 이 박사는 2018~2019년 2년 동안 무려 555편의 시를 발표했다. 하루에 0.76편, 나흘에 세 편꼴로 시를 쓴 셈이다. 어떤 날은 하룻밤에 80개의 제재가 떠올랐고 사흘 밤낮 16편의 시를 내리 쓰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집 2권을 한꺼번에 펴냈다. 그는 이런 현상을 “시가 터졌다”고 표현한다. 그는 긍정적 사고와 규칙적인 운동, 문인들과 진솔한 교류, 어릴 적부터 계속해 온 문학활동으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목욕과 편식 없는 식사는 건강을 유지하고 일상을 즐기는 그만의 방법이다. 치아 관리도 철저해 아직도 상한 이가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 시를 쓰는 작업이 마음을 늙지 않게 하는 비결이다. 문학계 후배와 자녀들에게는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 항상 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 자강불식(自强不息) 정신을 주문한다. 평생 교육자이자 시인으로 살아온 이 박사는 얼핏 ‘금수저’ 같아 보이지만 ‘흙수저’ 출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전북 진안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구름 위로 솟아오른 용이 되라는 뜻으로 운룡(雲龍)이라고 이름을 지어 줬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46년 진안초등학교에 재입학한 아홉살 소년은 평범한 시골뜨기였다. 그에게 인생의 길라잡이가 돼준 책은 한국전쟁 당시 전주에서 시골로 피란 온 친구의 초등학교 교지였다. 동시 “하늬바람 불어오면/ 전깃줄은 쓰르릉 피리 불고요”라는 구절을 보는 순간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무작정 시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쓴 최초의 동시 ‘달밤’이 학급 문집 ‘글벗’에 수록됐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1959년 전북대 국문과에 진학하면서 이 박사는 시인이 되기 위한 본격적인 담금질을 시작했다. 대학 2학년이던 1962년 10월 경북대 주최 제5회 전국대학생문예작품 현상공모에 ‘기도’가 당선됐다. 이어 1964·1965·1969년 ‘현대문학’에 연 3회 추천되면서 등단에 성공했다. “앞만 보고 뛰어가는 외곬으로 뚫린 성격, 철저한 준비성과 꼼꼼한 정리벽,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긍정적 사고, 끝장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근성이 저의 유일한 자산이지요.” 그가 시인으로서 문학의 앞길을 열기까지 과정은 시련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시대적 상황에 휩쓸리고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지만 오직 정신력 하나로 이겨냈다. 중학생 때부터 학비 마련을 위해 장작 장사를 했고 공사판에서 등짐을 졌다. 대학 시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에 시달렸지만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쳤다. 가난은 시련과 고통이었으나 성취욕 강한 그는 오히려 성장의 자양분으로 치환했다.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나는 주제넘게 시인이 되기를 꿈꾼 비현실주의자입니다. 시와 함께 사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었지요.” 이 박사는 오로지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노력했을 뿐 경제적으로는 빵점짜리 가장이었다. 부인이 생활고를 탓하며 바가지를 긁으면 “선비가 돈 버는 것 봤느냐”며 되레 큰소리치고 헛기침을 했다. 이 박사는 전북문인협회장, 초대·2대 전북문학관장을 역임하며 향토문학계에 족적을 남겼다. 그가 22년 동안 이끈 ‘열린시문학회’와 ‘시창작교실’은 전북 지역 문인 배출의 산실 역할을 했다. 그가 닦아 놓은 문학 기반은 전북도 문화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서울신문 향토문화대상 등 수많은 수상 경력이 증명해 준다. “나는 어린 시절 희망대로 여전히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생활력과는 담을 쌓고 살았지요. 저승의 부모님에게는 불효막심이고 형제에겐 자기 이상만 고집해 온 이기적이고 염치없는 졸장부지요. 어찌 보면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돈도 백(배경)도 없는 촌놈이 문학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불꽃은 가난 속에서 팔순까지 지칠 줄 모르고 문학인으로 담금질하는 에너지원이었다. 또 세 자녀를 낳은 아내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나, 10년 전 전립선암과 위암 수술로 사경을 헤맬 때도 그를 지탱해 주고 일으켜 준 힘이 됐다. “그동안 옆걸음 치면서 타인의 어깨 너머를 넘보지 못했고 유유자적 느림의 미학도 탐할 수 없었지요. 자녀들도 모두 자리잡아 걱정이 없다 보니 이제야 숨 돌리고 인생과 문학을 정리할 때가 왔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불청객 세월이 가르쳐 준 결과지요.” 이 박사는 한때 이 세상 사람으로 살았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시집 20권, 문학이론서 및 시론서 등 13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제 소망이 있다면 작은 개인 문학관을 건립하고 자신이 제정한 ‘중산문학상’이 계속 후배 문인들에게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함을 즐기지 못하는 그의 문학사랑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는 ‘언제까지 문학 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이제 그만 써야겠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2022년에 단행본 시집 7권을 합본한 3번째 ‘이운룡 시 전집’과 시론집 ‘시와 비평의 등가성’을 발간할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글 사진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일용직 아버지가 의대 합격한 딸에게 아웃백 사주던 날

    일용직 아버지가 의대 합격한 딸에게 아웃백 사주던 날

    지독했던 가난을 딛고 일어선 학생의 사연이 감동을 주며 화제가 되고 있다. 페이스북 익명 페이지 ‘연세대학교 대나무숲’에는 지난 10일 연세대 의대생의 글이 올라왔다. A씨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 아웃백에 갔다”며 운을 뗐다. 어릴 적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당시 여덟 살이었던 언니와 다섯 살이었던 자신을 키우기 위해 일용직 노동자로 공사판에 나갔던 아버지에 대해 소개한 A씨는 “우리를 없게 키우지 않기 위해 아빠는 피눈물을 흘렸지만 애석하게도 아빠 피눈물의 대가는 크지 않았다. 세 식구가 죽지 않고 살 정도였다”고 말했다. A씨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가난’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적었다. A씨는 “집 벽에 곰팡이가 피지 않을 수 있단 것을, 집에 신선한 과일이 준비돼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집에 미끄럼틀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설명했다. A씨의 언니는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상고에 진학했다. A씨는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했다. 내 재능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현실로 다가온 첫 번째 순간이었다”며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원 하나 안 다니고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문제집을 사서 전교 2등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계속 공부하면 우리 가족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뻤다”고 했다. 기쁨도 잠시 A씨의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A씨는 “당장 나 하나 일을 안한다면, 1년에 한 번 새해를 맞아 다 같이 모여 먹는 두 마리에 8000원짜리 바싹 마른 전기구이 통닭을 못 먹게 되는 정도의 가난으로 끝날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A씨는 언니가 목이 쉴 때까지 울던 자신을 안아주면서 “어떻게든 언니가 돈 벌어올 테니 너는 공부해서 개천에서 용 한번 제대로 나라”며 토닥였고, 언니의 배려와 헌신에 학업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렇게 A씨는 수능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거뒀다. 그는 “국어 2점짜리, 지구과학 2점짜리에 X표가 쳐져 있는 가채점표를 붙들고 온 가족이 목놓아 울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자고 조르던 아웃백 한 번 못 데려다준 못난 애비 밑에서 잘 커줘서 너무 미안하다”며 울었다. 연세대 의대생이 된 A씨는 과외를 해 번 돈으로 밀린 월세 300만원을 갚고 남은 돈 400만원을 아버지와 언니에게 반반 나눠줬다. A씨는 “오늘, 아빠가 아웃백을 사줬다. 인생의 한 줄기 빛이 열린 우리 모두의 모습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우리 아빠, 우리 언니에게 생일이 아니라, 새해 첫날이 아니라, 무슨 특별한 날이 아니라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먹고 싶으니까 아웃백에 가서 4인 랍스터 세트를 시켜 먹을 수 있는 인생을 선물해 주기로”라며 글을 마쳤다. 이 사연은 현재 4만2000개에 이르는 ‘좋아요’를 받고 4200회 공유되며 적지 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오보의 기준’은 무엇일까-법원과 언론중재위 다른 잣대 논란

    ‘허위사실 보도’를 다투는 재판에서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을 뒤집고 ‘사실과 다른 기사 내용’을 ‘의견의 표명’으로 보는 판결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전주지방법원 제4민사부는 전북 임실군이 ‘허위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을 이유로 A 인터넷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재판에서 언중위와 현저하게 다른 판결을 내렸다. 앞서 언중위는 임실군에 대한 비판기사를 쓴 언론사에 ‘정정보도문 게시와 1000만원의 손해배상금 지급 결정’을 내렸으나 법원은 반대로 언론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법원은 언중위가 허위 보도로 보고 정정보도를 결정한 내용에 대해 대부분 ‘의견의 표명’이라고 판단했다. 사건의 발단은 201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A인테넷 언론사는 지난해 3월 22일부터 4월 26일까지 4건의 기사와 2건의 사설로 임실군 행정에 의혹과 의문을 제기했다. 문제가 된 비판적 기사는 ▲임실군, 불법단체 군청입주 및 운영비 지원 ▲임실군 농공단지 불법 특혜 매각 ▲임실군, 토양오염정화업 과잉대응 대책위 주민 사망 ▲임실군, 초호화 하천정비 등이다. 이에 임실군은 A인터넷 언론사의 기사는 사실과 다른 보도라며 언중위에 제소했다. 임실군은 언론사가 공적 임무수행과 관련하여 허위사실이 포함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양측이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언중위는 지난해 5월 28일 6건의 기사를 모두 왜곡 보도로 인정하고 해당 언론사에 ‘정정보도문 게시와 손해배상금 1000만원 지급’을 결정했다. 언중위는 ‘기사 내용이 대부분 충분한 취재가 없었고 제기한 의혹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다. 임실군은 언중위의 결정을 근거로 A인터넷 언론사에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언중위와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재판부는 “정정보도 청구의 대상인 보도가 ‘사실적 주장’에 관한 것인지 ‘단순한 의견 표명’인지를 먼저 가려봐야 한다”면서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허위사실이라고 보기에 부족하므로 기사가 악의적이거나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라고 볼 수 없다”고 임실군의 청구를 기각했다. 특히, 설령 기사로 인하여 원고의 명예가 훼손될 여지가 있다고 보더라도 감시·비판·견제라는 정당한 언론활동의 범위 내에 속하는 것으로 위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불법 단체 군청 입주 및 운영비 지원 A인터넷 언론사는 지난해 3월 22일 ‘임실군이 불법단체인 임실군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 청사 지하 사무실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연간 60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단체는 대부분 군수 측근들로 구성돼 있고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라고도 지적했다. 그러나 협의회는 불법단체가 아니라 지속가능발전법과 관련 조례에 근거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사무실 사용료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성원도 대부분 전임 군수 시절 위촉됐고 대부분 임실 지역 내 인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결과보고서에 사진 한 장 없다는 보도 또한 사실과 달랐다. 언중위는 이같은 점을 들어 정정보도를 결정했다. 이에대해 재판부는 ‘불법단체’라는 표현은 그 의미를 객관적으로 확정하기 어렵고 ‘사실의 적시’라기 보다는 ‘의견의 표명’이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예산 지원 부문도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표현은 지원된 예산 규모에 비하여 활동내역이나 사업결과보고서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취지로 보아 ‘지엽적인 부분’이라고 판단했다. 군수 측근, 외지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사실의 적시라 보기 어렵기 때문에 허위사실이라고 보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농공단지 불법 특혜 매각 A인터넷 언론사는 2019년 3월 26일자에 ‘임실군, 337억 농공단지 80억에 매각...불법 특혜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같은 해 4월 2일에는 ‘임실군, 제2농공단지 커넥션 수사해야’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었다. 국비와 지방비 등 337억원을 들여 임실읍 갈마리에 10만 2000평 규모의 제2농공단지를 조성한 후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2019년 2월 15일 일진경금속 주식회사에 80억원에 일괄 매각한 것은 특혜라는 지적이다. 이 기사에 대해 언중위는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기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경우 분양가격을 조성원가 이하로 정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바 임실군은 대기업 유치를 위해 2010년 일진제강, 임실군, 전북도 등 3자간 협정 내용대로 일진제강에게 제공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정정보도를 하도록 결정했다. 반면 법원은 ‘불법특혜’ 내지 ‘커넥션 논란’이라는 취지의 표현은 ‘사실의 적시’라기 보다는 ‘의견의 표명’이라고 봄이 상당하고 임실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기사 내용이 허위사실이라고 보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보도 내용을 농공단지 조성에 투입된 예산의 적절성, 매각 상대방의 선정 및 매각금액의 결정절차 등의 공정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본 것이다. 그 이유로 ▲매각 당시 이미 협정에서 정한 공사기간이 경과했고 ▲전북도, 임실군, 일진경금속 사이에 공사기간 조정 협의가 별도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없으며 ▲기간이 지난 협정이 유효함을 전제로 수의계약을 체결한 점을 들었다. ●토양오염정화업 과잉 대응 주민 사망 A언론사는 지난해 4월 15일자에 ‘임실군 토양오염정화업 과잉대응...대책위 주민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임실군이 광주광역시의 권한행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주민들이 이 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여 규탄대회를 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고 급기야 대책위 소속 주민이 사망했지만 누구도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없는 현실이다고 고 보도했다. 이에 언중위는 임실군은 대책위를 구성하게 하거나 대책위 활동에 주민들을 동원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으로 정정보도를 하도록 결정했다. 임실군이 환경부의 토양정화업 등록·관리 업무처리 지침 예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내용도 덧붙이도록 했다. 이에대해 법원은 보도 내용에 임실군이 대책위 구성 내지 활동에 관여하였다거나 주민의 사망에 임실군의 귀책사유가 있다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소제기는 부당하다거나 주민의 사망에 대하여 임실군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와 같은 표현 역시 사실의 적시라고 보다 의견의 표명이라고 봄이 상당하다며 언론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해예방 아닌 초호화 하천공사 A사는 지난해 4월 26일자로 ‘임실군의 균특예산 사용, 해도 너무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임실군이 120억원을 사용한 사업은 재해예방이 아닌 초호화 하천공사라고 지적했다. 공사현장은 생활하수가 유입되는 반면 홍수로 인한 피해는 없는 만큼 친환경하천조성사업을 해야 할 곳이라는 것이다. 목적이 불분명한 공사판을 벌였다는 논리다. 이에 임실군은 해당 사업은 2011년 국토해양부와 전북도로부터 국고보조사업으로 승인, 교부 결정된 임실천 하천 환경정비사업으로 공사 방법은 전라북도 지방하천관리위원회와 지방건설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반영해 추진했다고 반박했다. 공사비가 많이 투입된 구간은 상가, 주택 등이 밀집된 지역으로 하폭이 좁아 통수 단면을 확보하기 위해 옹벽으로 시공했다고 해명했다. 언중위도 임실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정보도를 결정했다. 법원은 언론 보도가 하천 정비사업의 필요성과 적정성 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균특예산이 정당한 용도로 사용되어야 함을 지적한 취지이므로 중요 부분이 허위사실이라고 보기에 부족하다고 밝혔다. ●사실적시와 의견표명 경계 모호 이같이 법원과 언중위가 상반된 판단을 하면서 지역 관가와 언론계에서는 ‘오보의 기준과 범위’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법원의 판결문에서 나온 ‘사실 적시’와 ‘의견 표명’도 정의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언론의 자유를 넘은 오보가 남발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활자화 됐거나 인터넷에 노출된 기사는 언론의 공공 기능과 일반인의 인식을 감안할 때 의견의 표명을 넘어 사실 적시에 가깝다는 지적도 나온다. 명확하지 않은 오보의 기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법관도 자칫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법의 잣대를 마음대로 남용할 우려도 제기된다. 일선 기자들은 “기사 내용이 100% 실체적 진실과 부합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보도된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기인 언론기관에 상당한 책임이 수반되는 만큼 완성도 높은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충분한 취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들어서는 가짜뉴스로 인한 폐해도 큰 만큼 일선 취재기자들이 실체적 진실을 보도하기 위한 모범을 보이고 높은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전북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법원이 정의한 사실적시와 의견의 표명은 경계가 모호한 부분이 있다”며 “언중위는 지역의 특수한 맥락을 고려해 임실군의 입장을 반영한 것 같고 법원은 소극적 판결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임실군이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함으로써 ‘허위 보도의 기준’에 대한 논란은 더욱 뜨거워 질 전망이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여기는 중국] 차비없는 농민공에게 하룻밤 새 일어난 감동 사연

    [여기는 중국] 차비없는 농민공에게 하룻밤 새 일어난 감동 사연

    깊은 밤, 차비가 없어 도로를 걷고 있던 중국의 한 가난한 농민공에게 하룻밤 새 일어난 놀랍고도 아름다운 사연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펑파이뉴스는 지난 18일 청두(成都)시 두장옌시(都江堰市)에 사는 농민공 장빈(江彬) 씨의 특별한 사연을 전했다. 딸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그는 열흘 전 청두에서 시안(西安)으로 향했다. 시안의 한 공사판에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거라는 지인의 말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시안의 공사판은 자금 부족으로 공사 시작이 미뤄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일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열흘이 훌쩍 지나자 수중에는 단돈 20위안(한화 3400원)만이 남았다. 장씨는 결국 다시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빈민구제소의 도움으로 여비를 마련해 기차에 올랐다. 지난 12일 자정 무렵 청두역에 도착했지만, 이미 대중교통은 운행이 끊긴 뒤였다. 기차역에서 집까지는 20여 km, 결국 그는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도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던 장씨, 그 시간 택시 기사 왕궈창(汪国强) 씨는 야간 운행 중이었다. 왕씨는 공교롭게도 이날 도로 위를 걷는 장씨를 두 차례나 목격했다. 깊은 밤 도로 위를 걷고 있는 장씨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왕씨는 택시 손님에게 "오늘 밤 이 차도를 걷는 한 남성을 두 차례 봤는데, 뭔가 곤경에 처한 것 같다"면서 "만일 한 번 더 마주하게 되면 그를 태우고 싶다"고 말했다. 손님 장빈(张彬)씨는 "얼마든지 태우시라"고 화답했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각, 왕씨는 다시 한번 차도 옆을 걷고 있는 장씨를 발견했다. 차를 세우고 그에게 목적지를 묻고는 택시에 타라고 청했다. 장씨는 "돈이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왕씨와 장빈 씨는 "돈은 필요없으니 그냥 탑승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끈질긴 요청에 결국 장씨는 택시에 올랐다.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장씨가 딸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시안까지 갔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사연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장씨는 돈이 없어 이틀을 꼬박 굶은 상태였다. 운전자 왕씨는 간식으로 싸온 과일을 장씨에게 건넸다. 먼저 탑승한 손님 장빈 씨의 목적지에 도착하자, 장빈 씨는 "기사님은 영업을 해야 하니, 내가 장씨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깜짝 발언을 했다. 장빈 씨는 직접 본인의 차를 몰고 와 장씨의 집으로 향했다. 도중 식당에 들러 장씨에게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장빈 씨가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자 시간은 이미 새벽 4시를 훌쩍 넘겼다.이튿날 장빈 씨는 장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관리하는 공사판 중에 농촌의 재래식 화장실을 개조하는 곳이 있는데 일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장씨를 돕고 싶은 마음에 일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장씨가 지금껏 일해온 시멘트 작업과 비슷한 일이었기에 장씨는 흔쾌히 응했다. 장씨는 "일자리가 생겨서 돈 걱정을 덜었다"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게다가 숙식까지 제공하는 터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장씨의 딱한 사연에 장빈 씨는 일반 수리공보다 높은 급여와 복지 혜택을 제공한 것이다. 생계와 딸의 학비 걱정으로 시름에 빠져있던 장씨에게 하룻밤 새 쏟아진 두 사람의 온정, 이 사연이 알려지자 수많은 누리꾼은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다", "여전히 좋은 사람이 많다"는 등의 훈훈한 댓글이 줄을 이었다.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 015B 김태우 “공사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가수 수입 無”

    015B 김태우 “공사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가수 수입 無”

    ‘불타는 청춘’ 015B 김태우가 공사 일용직으로 일했던 사실을 언급했다. 최근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서는 015B 김태우가 깜짝 손님으로 출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김태우는 “015B로 공연은 잘 안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에 홍석천이 “그럼 뭘로 돈을 버냐”고 묻자, 김태우는 “나는 돈을 못 번다. 재작년에는 공사 일용직을 1년 정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태우는 “정말 힘들었다. 장인어른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1년 정도 했는데, 노동이라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한여름이랑 한겨울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태우는 이어 “그냥 하고 싶어서 했는데 와이프도 만류했다. 덤프트럭 흙 싣는 것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게 뙤약볕에 공사판에 계속 있어야 한다. 그래서 힘들었다”면서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 존경스럽더라”고 말했다. 사진=SBS ‘불타는 청춘’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김태우 수입고백, 015B 멤버가 일용직을?

    김태우 수입고백, 015B 멤버가 일용직을?

    그룹 015B 멤버 김태우가 수입을 고백했다. 김태우는 18일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불타는청춘’에 새 친구로 합류했다. 그는 이날 멤버들을 위해 식재료와 커피를 준비해 왔다. 이날 김태우는 “우리팀은 공연을 잘 안 한다”며 “난 돈을 못 번다”고 고백했다. 이어 “재작년에는 공사판에서 일용직도 했다. 1년 정도 했는데 힘들었다”며 “장인어른이 하지 말라고 했다. 공사장에서 1년 하니까 죽을 것 같더라. 노동이라는 게 힘들고 아름다운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한여름에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 밝혔다. 김태우는 “그냥 하고 싶어서 했는데 아내도 말렸다. 덤프트럭 흙 싣는 일을 했다. 뙤약볕에 공사판에 그냥 있어야 한다”며 “너무 존경스럽더라. 그 안에서 평생을 일한 사람, 10년 일한 사람, 젊은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 보면 존경스럽다”고 덧붙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亞 금서 55권 한자리… 출판의 자유를 묻다

    亞 금서 55권 한자리… 출판의 자유를 묻다

    전환시대의 논리·노동의 새벽 등 주목 냉전 세계관과 노동 착취 비판 서적부터 일본·태국·터키 등 부조리 고발 책까지 ‘현대판 금서 사건’ 블랙리스트 성찰도반공주의가 형형하던 군사독재 시절, 미국 중심 세계관에 맞서 비판적인 시각을 선보여 ‘불온서적’ 딱지를 받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1974). 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후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 내 출판 금지 조치를 당한 나가이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히비야출판사·1949). 대한출판문화협회와 아트선재센터가 공동 기획한 금서 전시회 ‘금지된 책: 대나무 숲의 유령’에서 선보일 책들이다.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권력이 배포를 막거나 회수한 책 가운데 주목할 만한 아시아의 금서 실물본 55권이 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관객을 맞는다. 한국 금서는 31권, 외국 금서는 24권으로, 이 가운데 중요도가 높은 금서 6권을 꼽아봤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폭압적인 시대, 세계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 ‘지적 해방의 단비’로 불렸다. 1974년 6월 출간 직후 대학생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가 됐고, 군사정부가 급기야 1979년 판매금지 조치했다. 저자인 리영희는 책을 썼다는 이유로 1970년대 후반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겪었다.박노해의 ‘노동의 새벽’(풀빛·1984)은 군자동 섬유 공장, 청량리 공사판, 성수동 영세 공장, 안양 버스회사 등에서 일하던 스물일곱 살 현장 노동자인 저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혹한 노동 착취의 현장을 실감 나게 묘사한 시집이다. 시집 출간 당시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린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이라는 말에서 따온 필명으로, 본명은 박기평이다. 금서 조치에도 책은 100만부 가까이 팔리며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이용악의 ‘낡은 집’(기민사·1986)은 일제 치하 처참한 민족사를 생생하게 그려 낸 시선집이다. 초판은 1938년 삼문사에서 발간됐다. 저자는 서정주, 오장환과 더불어 1940년대 문단의 3대 시인으로 불렸지만, 한국전쟁 도중 월북해 우리 문학사에서 지워졌다. 1987~88년에 걸친 월북문인에 대한 단계적인 해금 조치로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나가이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은 일본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의료대(현 나가사키대 의학부) 조교수였던 저자의 구호활동을 그린 에세이다. 원폭 투하 지점에서 700미터 정도 떨어진 나가사키의대 진료실에서 피폭을 당한 저자는 오른쪽 머리 쪽 동맥이 절단된 중상에도 붕대를 머리에 감은 채 구호활동을 벌였다. 책은 피폭 당시 파괴된 나가사키시, 화상을 입은 채로 죽어가는 동료와 시민들의 모습 등을 세세하게 그렸다. 1946년 8월 출간하려다 연합군최고사령부(GHQ) 검열로 출판금지당했다. GHQ가 일본군의 마닐라 대학살에 관한 기록집 ‘마닐라의 비극’을 합본하는 조건으로 책의 출간을 허가하면서 1949년 1월 세상에 나왔다.루앙 팟퐁 팍디의 ‘니라트 농 카이’(1868)는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태국의 금서다. 저자는 라마 5세 섭정왕 솜데트 차오프라야 보롬마하 스리수리야웡이 비효율적으로 군사작전을 진행한 것을 책으로 비판했다. 정부는 저자를 잡아 50번의 채찍형을 내리고 감옥에 가뒀다. 책은 모두 압수되고 나서 소각됐다. 이 책을 좌파 독립학자이자 공산주의 게릴라인 지트 푸미삭이 남은 판본을 편집해 출판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6일 쿠데타 이후 다시 금서로 지정됐다. 현존하는 판본은 태국 정부 예술국에서 1955년 편집, 출판한 것이다.카짐 카라베키르 ‘터키의 독립전쟁에 관한 사실들’(1933)은 터키 독립전쟁 지휘관이자 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전우인 저자가 ‘민족투쟁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맞서 낸 책이다. 책은 1933년 인쇄 단계에서 몰수, 소각됐고 정부는 카라베키르의 집을 급습해 문서를 압수했다. 책이 온전히 출판된 것은 57년이 지난 뒤였다. 김해주 아트선재센터 부관장은 이번 전시회에 관해 “6권의 책은 역사적으로 중요도가 높은 책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용희 대한출판문화협회 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권에서 세종도서 리스트를 좌지우지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은 현대판 금서 사건이라 할 수 있다”면서 “전시회를 통해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돌아보고 출판의 자유를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전시회를 기획했다”고 강조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꼬방동네 서민의 팍팍했던 삶

    [그때의 사회면] 꼬방동네 서민의 팍팍했던 삶

    1980년대까지 전국에서 사람들은 서울로 모여들었고, 서울 인구는 급증했다. 밑바닥 서민층 또는 빈곤층으로 편입된 이들은 주로 일용직에 종사하며 판잣집에서 힘겹고 팍팍한 삶을 이어 갔다. 남자가 당장 할 수 있는, 그래도 손쉬운 일은 막노동이었다. 공사판 노동시장은 창신동, 신촌로터리, 영등포, 삼양동 등지에 형성돼 있었다. 막노동 말고는 엿장수, 손수레 행상, 노점상, 지게꾼,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 보따리 행상, 웨이터, 외판원, 때밀이 등의 직업을 선택했다(동아일보 1983년 1월 24일자). 당시 서울에 노점상만 6만~7만개가 있었다고 한다. 젊은 여성들의 일자리는 더 한정돼 여공, 가정부, 안내양, 미싱사, 다방 레지 등에 종사했다. 윤락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길로 빠진 것도 생계유지의 이유가 컸을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윤락촌이 종삼, 청량리, 용산, 도동과 양동, 미아리, 회현동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1981년 서울시가 단속한 앵벌이, 부랑자, 걸인, 행려병자의 수도 5000명이 넘었다. 판잣집이 산을 뒤덮었고, 반면에 고급주택들도 이웃해 사는 극단적인 양극화의 모습을 불과 수십 년 전까지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재개발된 사당동은 ‘가마니촌’이라 불렸는데 언덕배기에 6평짜리 블록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봉천동에는 3대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고, 구로동 ‘뚝방’에는 공단 종업원들에게 임대하는 방 60개짜리 집이 있었다. 이를 ‘벌통집’이라 불렀다. 한 방에 4명이 산다면 240명이 한 집에 산 셈이다(동아일보 1983년 1월 24일자). 이 밖에도 ‘문바위골’, ‘밤나무골’, ‘희망촌’, ‘거북바위’, ‘밤골’, ‘양지마을’, ‘빨랫골’, ‘쑥고개’ 등으로 불리던 영세민 주거 지역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다. 줄잡아 60여곳의 달동네가 있었다. 달동네를 ‘꼬방동네’라고도 했는데 판잣집의 일본어인 ‘하꼬방’에서 나온 말이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이 개봉된 것은 1982년 7월이다. 1984년 12월 서울시는 꼬방동네 47곳을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올림픽 개최에 대비한 것이었다. 상계동도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서부이촌동, 불광동 등지의 무허가 주택 철거로 이곳으로 쫓겨 온 영세민 세입자들은 재개발로 또 한번 집을 잃었다. 국제대회를 앞둔 재개발 밀어붙이기로 철거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그때도 영세민촌 주택의 80%가 무허가 건물이었고, 52%는 단칸방에 거주하고 있었다(동아일보 1989년 11월 21일자). 꼬방동네에는 번듯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작은 보금자리를 잃은 서민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전태일 평전 밤새 읽고 접견 온 盧변호사…노동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정치인이었다”

    “전태일 평전 밤새 읽고 접견 온 盧변호사…노동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정치인이었다”

    “노동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정치인 노무현. 노무현이 최초로 사랑한 노동자 문성현.”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10주기인 23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서울신문 광화문 라운지에서 10년 전 조문록에 썼던 글귀를 떠올렸다. 문 위원장은 “경사노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도 사실은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라면서 “변호사 노무현이 변론했던 첫 노동자가 바로 나”라고 소개했다. 문 위원장과 노 전 대통령의 첫 만남은 1985년 구치소 변호사 접견에서 이뤄졌다. 당시 경남의 방위사업체(통일중공업)에서 일했던 문 위원장은 노조위원장으로서 파업을 이끌고 구속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문 위원장을 보자마자 “나는 상고를 졸업하고 ‘새가 빠지게’ 공부해 고시 패스하고 돈 벌려고 변호사가 됐는데, 서울대 경영학과까지 나온 당신은 왜 돈 버는 길을 마다하고 노동운동을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문 위원장은 “저를 이해하려면 전태일 평전부터 읽어 보시라”고 권했다.“전태일이 누구요?”라고 되묻던 노 전 대통령은 그날로 책을 사서 밤새 다 읽고 다시 구치소로 왔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전태일의 이야기에 공감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진작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면 나도 노동운동 했을 것이다. 나는 대학도 나오지 않고 공사판에서 일했기 때문에 당신보다 노동운동을 더 잘했을 것”이라면서도 “지금은 변호사가 됐으니 변호사로서 노동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검사와 판사에게도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라고 권했던 노 전 대통령은 징역형이 유력했던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아냈다. 첫 노동재판을 무사히 끝낸 노 전 대통령은 1986~1987년 창원, 울산, 거제 등에서 ‘노동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문 위원장과 인연을 이어갔다.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를 한 달 앞두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노무현 후보 옆에 ‘노동’이 없어 외로우니 꼭 같이 해달라”고 제안했지만 문 위원장은 거절했다. 노 전 대통령도 대선 3일 전 “내가 대통령이 된다. 같이 하자”고 했지만, 또 거절했다. 당시 문 위원장은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를 위해 뛰고 있었다. 문 위원장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인간적 회한이 몰려왔다”고 했다. 문 위원장이 2012년과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도운 것도 마음의 빚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대화가 참 어렵다”면서도 “노무현, 문재인 두 변호사에게 인간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애를 쓰겠다”고 말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전태일이 누구요” 물었던 노무현, 내가 사회적 대화 이끄는 이유

    “전태일이 누구요” 물었던 노무현, 내가 사회적 대화 이끄는 이유

    “그런데 전태일이 누구요?” 뜻밖의 일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처음 만난 1985년에, 당시 대학생들이라면 이름 석자는 다 들어봤을 인물에 대해 그런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문성현 위원장은 마침 노 전 사망 10주기인 23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서울신문 광화문 라운지가 27번째로 연 ‘노동존중 사회와 사회적 대화’ 강연 첫 머리를 열며 노동자 계급을 처음 가슴으로 이해했던 대통령인 노무현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85년 구치소 변호사 접견실에서였다. 당시 경남의 방위사업체(통일중공업)에서 노조를 결성한 것만으로도 구속 감이었던 문 위원장은 파업까지 이끌어 구속된 뒤 부산에서 찾아온 노무현 변호사를 맞았다. 무명의 변호사라 마뜩치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난 부산상고를 졸업해서 정말 쎄빠지게 공부해서 고시 패스한 뒤 판사하다 돈이 안돼 돈 벌려고 변호사가 됐는데, 서울 상대까지 가서 돈 버는 길 마다하고 왜 노동운동을 합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금방 마음이 풀어졌다고 했다.문 위원장은 노 대통령에게 “날 이해하고 싶으면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라”고 권했고, “전태일이 누구요?”라고 되묻던 노 대통령은 책을 사서 밤새 다 읽고 다음날 문 위원장을 찾아와 ‘내게 대학생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전태일의 얘기에 속속들이 공감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진작 내가 전태일 평전을 읽었더라면 문 위원장처럼 노동운동을 했을 것이다. 난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공사판에서 일해기 때문에 문 위원장보다 노동운동을 더 잘했을 것”이라면서도 “지금은 변호사가 됐으니까 변호사로서 노동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검사와 판사도 재판을 잘하려면 전태일 평전을 사서 읽어보라고 권했던 노 대통령은 징역형이 유력했던 문 위원장이 집행유예를 받게 만들었다. 첫 노동재판을 승리로 장식한 뒤 이듬해부터 1987년까지 경남 창원, 울산, 거제 등에서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며 문 위원장과 돈독한 인연을 맺었다. 10년 전 그날, 문 위원장이 경남 봉하마을을 찾아 조문하고 조문록에 ‘노동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정치인 노무현. 노무현이 최초로 사랑한 노동자 문성현’이라고 적은 이유이기도 했다. 문 위원장은 “이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은 노 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이라며 “노 대통령도 변호사 시절 노동자였던 날 만났기에 조금 더 일찍, 그리고 깊이 있게 노동자를 사랑하는 변호사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한달 앞두고 유시민 당시 작가가 “노 대통령 옆에는 노동자가 없어 외로우니 꼭 좀 같이 해달라”고 제안했지만 당시 민주노동당원으로 권영길 후보 대선 운동을 하고 있던 문 위원장은 거절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이 대선 투표 사흘을 앞두고 전화를 걸어와 “내가 대통령 된다. 같이 하자”고 했지만, 또 거절했다. 노 정부 시절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청와대 앞에서 단식 투쟁을 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다 2009년 노 대통령이 사망하자 문 위원장은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인간적 회한과 자책이 밀려와 힘들었다고 했다. 문 위원장이 2012년과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운동을 돕고 노동계로부터 변절 얘기를 들으면서도 경사노위 위원장을 맡은 이유이기도 했다.문 위원장은 최저임금, 노동시간 단축, 탄력 근로제 등 노동계의 지난한 이슈들을 해결해 온 과정을 돌아보며 “사회적 대화가 참 어렵다”고 털어놓은 뒤 “대화의 참뜻이 뭔가, 이념이나 진영, 파당의 논리를 떠나 상대방을 존중하고 최선이 안되면 차선,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며 타협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돌아본다”고 밝혔다. 또 자신이 온갖 핀잔과 험구(險口)를 들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노동자를 위해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다하지 못한 인간적 도리를 문재인 대통령에게라도 대신 해야 하겠다는 마음가짐 하나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강연 내내 강조한 것은 최저임금은 받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주는 사람의 입장도 중요하니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국민토론회 같은 것을 열어 논의의 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싶어 직언했지만 잘 이뤄지지 않았으며, 지금 최저임금 때문에 경제가 파탄났다고 프레임을 짜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좋다, 그렇다면 최저임금 올리지 않을테니 반대하는 이들은 국내 제조업, 특히 자동차 산업을 살려낼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봐라, 민주노총이 여러 차례 불참과 참가를 번복하면서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타협의 DNA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한국노총 간부가 어용이란 비난을 듣고 ‘어려울 때 용기를 내는 게 어용’이라고 반박하며 사회적 대화에 꾸준히 나서는 이유를 돌아보라고 강조한 대목이다. 여기에다 북유럽의 사회적 대타협과 규모도 작고 거리도 있지만 SK이노베이션 등 SK 계열사 세 곳 노동조합은 기본급의 1%를 회사와 매칭펀드 형식으로 적립해 협력사 임금 인상 재원으로 활용하며 , 제2금융권 공공노조들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재원 기금을 적립하고 있어 이를 전국적으로,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또 광주형 일자리를 값싼 일자리로 오해들 하고 있는데 중국 자동차 산업과 맞서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지난한 고민을 안고 출발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아파트를 제공하는 것마저도 복지 차원이 아니라 제조업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고육책이란 점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김수근作 서울대예술관 전통미… 전뢰진 작업공간은 방치

    [미래유산 톡톡] 김수근作 서울대예술관 전통미… 전뢰진 작업공간은 방치

    투어단이 탐방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미래유산은 모두 3곳이다.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 서울대 예술관 6개 동 건물은 한국식 전통마당의 멋과 흥겨움을 고스란히 옮겨 놨다. 지형과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관악캠퍼스를 정립하는 기준이 됐다는 점에서 보존가치를 평가받아 2003년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설계 당시 예술관에 구현하고 싶었던 붉은 벽돌과 유리 공간, 단과대별 개성을 드러내는 6가지 색깔의 코어는 없지만 그의 건축 신념을 고스란히 담은 수려한 건축물을 볼 수 있었다.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관악산 문화원 앞 주차장을 지나면서 신림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지금은 사라진 콜럼버스 스넥카 미래유산터를 만났다. 2015년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신림동 경전철 공사로 인해 용지가 사라지면서 지난해 안타깝게 폐차가 되고 말았다. 콜럼버스 스넥카는 1970~1980년대 여의도와 강남 개발 당시 공사판 건설 노동자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이동식 밥차였다.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자동차로서는 최초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대체 용지를 확보하지 못해 폐차 수순을 밟게 됐다.신림동 고시촌 호암로 22길에 있는 조각가 전뢰진(90)의 작업공간은 거의 방치 수준이었다. 그는 1976년 자살바위로 유명한 부산 태종대에 높이 2m, 너비 1m에 이르는 ‘모자상’을 설치한 후 자살률을 큰 폭으로 줄이는 등 환경조각가로 유명하다. 2013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으나 이후 2층을 임대하면서 세입자가 살고 있다. 1층은 여전히 작업공간으로 남아 있지만 미래유산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돌조각가의 주택으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 됐지만 마치 황량하게 버려진 건물처럼 보존이 전혀 안 되고 외부인 출입도 막고 있는 실정이다. 생명의 손을 가진 그의 조각이 신림동 고시촌에 큰 울림을 주는 작업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신수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In&Out] 달라지지 않은 ‘토건 공화국’/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In&Out] 달라지지 않은 ‘토건 공화국’/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흑산도가 들썩거리고 있다. 공항 건설 때문이다. 계획 단계부터 논란이다. 경제적 타당성뿐 아니라 환경 생태에 대한 훼손 우려 탓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환경 이슈로 떠올랐다. 전략환경평가가 진행 중이다. 국토교통부는 강행할 태세이지만 환경부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국립공원으로서 흑산도가 멸종위기동물의 주된 서식지여서 그렇다.흑산도공항은 국토부 말고도 추진에 애착을 갖는 정부부처가 있다. 바로 총리실이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전남지사 시절부터 흑산도공항을 적극 추진했다. 총리가 되고 나서 제대로 추진하는가 했는데, 환경부가 제동을 걸고 있다. 그래서인지 김은경 환경부 장관은 이런저런 환경 현안 때마다 총리에게 지적을 받는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흑산도공항을 매개로 총리와 환경부의 불화설까지 이야기한다. 흑산도는 섬이다. 배편 말고 비행기가 시간이나 접근성에서 용이할 수 있다. 하지만 1개 읍면까지 공항을 만들어야 하느냐는 논란은 남는다. 더욱이 자연공원법과 자연환경보전법을 포함해 여러 환경 법규에 저촉되는 사항들도 적지 않다. 환경부가 법대로 타당성을 따져서 검토하면 흑산도는 영원히 천혜의 ‘자연 보고’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결정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1000억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읍면에 공항이 들어설 수도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도 개발과 토건에선 자유한국당을 뺨친다. ‘토건족’의 망령은 정권이 바뀌어도 그대로다. 돈을 정말 제대로 써야 할 곳은 지천이지만 그럼에도 토건에 골몰하고 있다. 예전엔 도로와 댐, 지방공항 건설이 유행처럼 번졌다. ‘토건 공화국’의 최대 상징인 도로 건설은 그나마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더이상 건설할 곳이 없어서다. 고속도로는 국토 면적 대비 세계적인 보급률을 보이고 있다. 4차선 국도도 마찬가지다. 도로가 마땅치 않다 보니 이젠 철도로 ‘토건 바이러스’가 옮겨가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은 토건 잔치판이었다. 강원도가 온통 공사판이었다. 도로와 철도는 관리할 기관이라도 있지만 경기장은 서로 외면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강원도는 ‘양육의 책임을 외면하는 부모’처럼 관리가 어렵다고 토로한다. 중앙정부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지만 올림픽이라는 ‘잔치판’에 도취해 이를 간과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기획재정부의 책임이 크다. 토건 공화국의 배후에는 기재부가 있다. 적자 사업도 균형 발전과 국제 경기, 관광 활성화라는 이유로 예산을 투입했다. 예산타당성 제도가 기재부 관료들의 정치적 보험 수단으로 악용되는 셈이다. 문제는 건설 후 관리단계에서 ‘나 몰라라’ 하는 태도다. 토건 망령의 씨앗을 뿌리는 예산타당성 제도에 수술이 필요해 보인다. 투명하고 책임 있는 구조로 운영이 바뀌어야 한다. 자기 주머니라면 ‘거품 예산’을 마구 보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 “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국가는 왜 날 가뒀나’ 이 의문을 푸는 진상 규명이 우리에겐 생존입니다. 그때 기어이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우리는 ‘피해 생존자’입니다.”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228일째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모임의 대표 한종선(42)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씨가 오랜 농성으로 건강이 나빠져 광주광역시 한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다 퇴원한 지 이틀 만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이날 한씨는 “이런 날씨엔 복지원에서 관리자가 수용자를 뜨거운 햇볕 아래 고문하듯 세워 놓고 넘어지면 마구 때렸다”고 회상했다. 한씨는 군부 독재 시절 ‘부랑인 선도’ 명목으로 자행된 인권 유린의 피해자이자 어렵게 목숨을 이어 온 생존자다. 당시 정부는 30여개 수용시설을 지원해 거리의 부랑인을 해결하려고 했다. 부산 형제복지원에는 수천명이 불법 감금됐다. 한씨는 1984년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3년 동안 강제 노역과 구타에 시달렸다. 최소 513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사건은 1987년 세상에 알려졌고 시설은 폐쇄됐다. 잊혔던 이 사건은 한씨가 2012년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하며 환기됐다. 한씨가 농성을 시작하게 된 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면서부터다. 한씨는 “공사판에서 몸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돼 2007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하러 구청에 갔다가 아버지와 누나의 생존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누나는 ‘형제복지원 트라우마’로 정신병원에 있었다. 한씨가 나선 이후 100여명의 피해자들이 연락해 왔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생겼고, 국회에는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법률안’이 발의됐다. 최근 검찰 과거사위에선 외압 의혹이 제기됐던 관련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왜 아직 농성을 하느냐는 질문에 한씨는 “우리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여서 국가 기관을 잘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겉으로 보기엔 변화가 생긴 것 같지만, 실제로 크게 바뀐 것은 없다”면서 “특별법은 국회에 걸려 있고, 검찰도 이제야 우리를 불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씨를 비롯해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해자’ 대신 ‘피해 생존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와 피해를 딛고 앞으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모두 포함된다. 한씨는 “‘국가는 왜 날 가뒀나’라는 질문에 국가가 제대로 답해야 비로소 피해 생존자들은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씨는 고통스러운 삶에 주저앉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재단법인 진실의힘 ‘제8회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식은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을 맞아 26일 서울 남산 문학의집에서 열린다. 글 사진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국가는 왜 날 가뒀나’ 이 의문을 푸는 진상 규명이 우리에겐 생존입니다. 그때 기어이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우리는 ‘피해 생존자’입니다.”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228일째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모임의 대표 한종선(42)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씨가 오랜 농성으로 건강이 나빠져 광주광역시 한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다 퇴원한 지 이틀 만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이날 비닐하우스 농성장에 앉아 있던 한씨는 “이런 날씨엔 복지원에서 관리자가 수용자를 뜨거운 햇볕 아래 고문하듯 세워 놓고 넘어지면 마구 때렸다”고 회상했다. 한씨는 군부 독재 시절 ‘부랑인 선도’ 명목으로 자행된 인권 유린의 피해자이자 어렵게 목숨을 이어 온 생존자다. 당시 정부는 30여개 수용시설을 지원해 거리의 부랑인을 해결하려고 했다. 부산 형제복지원에는 수천명이 불법 감금됐다. 한씨는 1984년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당시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을 방치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밥 꼬박꼬박 주는 좋은 복지원’이라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한씨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에 3년 동안 감금돼 강제 노역과 구타에 시달렸다. 12년간 최소 513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사건은 1987년 세상에 알려졌고 시설은 폐쇄됐다. 부랑인 불법 감금의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 제410조는 결국 폐지됐지만, 재판에 넘겨진 관계자들은 결국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국가 차원의 조사도 없었다. 그렇게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잊혔던 이 사건은 한씨가 2012년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하며 환기됐다. 한씨가 농성을 시작하게 된 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면서부터다. 한씨는 “공사판에서 몸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돼 2007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하러 구청에 갔다가 아버지와 누나의 생존을 알게 됐다”고 했다. 20년 만에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에 곧장 달려간 주소에는 한 정신병원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형제복지원의 기억이 한씨 아버지와 누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었다. 한씨는 “그때까진 나보다 더 똑똑한 지식인들이 이 사건을 밝혀주겠지 믿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더라”면서 “더는 기다려선 안 되고 직접 나서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씨가 나선 이후 100여명의 피해자들이 연락해 왔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생겼고, 국회에는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법률안’이 발의됐다. 최근 검찰 과거사위에선 외압 의혹이 제기됐던 관련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왜 아직 농성을 하느냐는 질문에 한씨는 “우리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여서 국가 기관을 잘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겉으로 보기엔 변화가 생긴 것 같지만, 실제로 크게 바뀐 것은 없다”면서 “특별법은 국회에 걸려 있고, 검찰도 이제야 우리를 불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특별법은 19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에 머물러 있고, 검찰 조사는 1차적으론 울산에 파견된 형제복지원생 사망 사건을 덮은 검찰의 외압 사건에 대한 재조사다. 한씨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더 많은 피해 생존자가 드러나 진상 규명이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의 특성상 여전히 국가 권력이 두려워 나서지 못하는 피해 생존자가 많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에 돌입하면 당시 전국에 비슷하게 운영됐던 선감학원 등 36개 시설에 대한 조사로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씨를 비롯해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해자’ 대신 ‘피해 생존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와 피해를 딛고 앞으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모두 포함된다. 한씨는 “‘국가는 왜 날 가뒀나’라는 질문에 국가가 제대로 답해야 비로소 피해 생존자들은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씨는 고통스러운 삶에 주저앉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재단법인 진실의힘 ‘제8회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식은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을 맞아 26일 서울 중구 문학의집에서 열린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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