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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길2구역·제물포역 등 5곳, 도심 공공주택 후보지 지정

    신길2구역·제물포역 등 5곳, 도심 공공주택 후보지 지정

    국토교통부는 서울 영등포 신길2구역 등 5곳을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예정지구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3080+ 대도시권 주택공급방안’(2·4대책)에 따라 추진 중인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2차 예정지구로 지정된 곳은 신길2구역과 도봉구 쌍문역 서쪽, 도봉구 덕성여대 인근, 인천 미추홀구 제물포역, 경기 부천 원미사거리 등이다. 이곳에는 모두 8478가구가 새로 들어서며, 이 가운데 3976가구를 공공분양으로 일반에 사전청약으로 공급한다. 이번에 예정지구로 지정된 5개 구역의 주민 분담금은 민간 정비사업에 비해 30% 이상 낮은 수준이다. 주민에게 현물보상으로 공급하는 주택 가격은 59㎡가 3억 1000만~5억 8000만원, 84㎡는 4억 2000만~7억 6000만원으로 추정됐다. 주민들의 가구별 평균 부담금은 3000만~2억 4000만원으로 민간 재개발사업으로 추진할 때보다 30% 이상 낮은 수준이라고 국토부는 설명했다. 예정지구로 지정된 지역은 1차 예정지구와 마찬가지로 주민 찬성이 높은 곳을 골랐다. 신길2구역은 뉴타운에서 해제된 이후 장기간 개발이 지연됐던 곳이지만, 법 시행(9월) 후 약 2개월 만에 지구 지정을 위한 법적 요건인 주민 동의율 3분의2 이상 확보하는 등 사업 추진 의지가 높운 곳이다. 인근 도심복합사업 후보지인 신길4·15구역, 영등포역세권이 함께 개발되면 영등포역·신길동 일대가 새로운 명품 주거 단지로 탈바꿈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 제물포역 인근은 역세권이라는 입지를 지녔음에도 지역 상권 위축으로 주거환경 개선이 어려워 노후화가 급속히 진행된 곳이다. 인천시가 복합행정타운으로 추진 중인 도화도시개발사업, 도화역세권 도심복합사업이 연계 개발되면 이 일대는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변모할 것으로 보인다.
  • 공분만 더 키운 이순자씨 ‘15초 대리사과’

    공분만 더 키운 이순자씨 ‘15초 대리사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마무리된 가운데 부인 이순자씨가 ‘15초 대리사과’를 했다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두고 한 발언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여론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일부 대선후보들은 이씨의 사과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5·18 관련 공약을 내세웠다. 이씨는 지난 27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남편의 재임 중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깊이 사죄를 드리고 싶다”고 사과했다. 이씨의 3분 20초 전체 발언 중 단 15초에 불과한 이 발언은 과오에 대한 전씨 측의 첫 사죄 발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같은 날 전씨 측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이 서울추모공원에서 기자들에게 “(이씨가) 5·18에 관해 말씀하신 게 아니다. 분명히 (대통령) ‘재임 중’이라고 말하지 않았나”라고 해명하면서 여론의 공분을 샀다. 전씨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뒤 1980년 계엄령 전국확대와 광주에서의 유혈진압으로 정국을 장악하고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일각에선 이씨가 국회에서 본인 사망 후에도 추징금 환수가 가능하도록 법 개정에 나선 움직임을 의식해 억지로 사과하는 시늉을 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씨는 956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채 사망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28일 광주에서 이씨의 대리사과에 대해 “또 한번 5·18을 폄훼하고 희생자들을 모욕하고 있다. 학살자는 천수를 누렸지만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실 왜곡과 망언에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역사왜곡처벌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이날 광주 5·18 민주묘역을 찾아 기자회견을 열고 “차기 정부는 임기 시작 즉시 개헌 논의를 시작하고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기리고 계승한다는 내용을 넣자”고 다른 대선후보들에게 제안했다. 반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전날 기자들이 이씨 대리사과 관련 입장을 묻자 “제가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다”고만 답했다.
  • [여기는 중국] “이러고도 교사?” 기숙학교의 무자비한 ‘수도 파이프’ 체벌

    [여기는 중국] “이러고도 교사?” 기숙학교의 무자비한 ‘수도 파이프’ 체벌

    학교 공용 화장실 수도 파이프로 제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교감이 현지 공안에 붙잡혔다. 지난 23일 중국 하이난성 둥팡시 소재의 한 실험학교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은 교감의 폭행 현장에 설치돼 있었던 CCTV가 SNS에 공개되면서 큰 공분을 사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7일, 익명의 누리꾼이 인터넷에 공개한 영상 속 중년 남성은 이 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인 A씨로 확인됐다. 그는 사건 당일 평소 자신이 지도했던 제자 3명의 상의를 강제 탈의시킨 뒤 공용 화장실 수도 파이프로 학생들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사건이 발생한 학교는 외딴 산악 지역의 소수 민족 자녀를 중심으로 한 의무 교육을 위해 설립한 기숙 학교로 알려졌다. 이 지역 소수 민족 자녀들을 위해 지방 정부와 시 정부, 홍콩언애기금회(香港言爱基金会) 등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설립된 저소득층을 위한 학교다. 평소 기숙 학교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강요받았던 피해 학생들은 이날 역시 교감이 휘두른 폭행에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무자비한 폭행을 자행하던 A씨는 3명의 피해 학생들에게 상의를 탈의하도록 강제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 학생들은 화장실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가학적인 폭행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A씨의 만행을 만류하고 학생들을 구조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또, 긴 폭행 과정 중 분을 이기지 못한 A씨는 자신이 지금껏 학생들에게 휘둘렀던 수도 파이프를 열어 학생들의 몸에 물을 퍼붓기도 했다. 일종의 물고문과 같은 폭력을 휘둘렀던 것. 이 과정에서 피해 학생들은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채 A씨의 폭력에 단 한 차례도 저항하지 못했다. 공개된 CCTV 영상 속에는 이날 교감의 폭력에 노출됐던 학생들의 몸에는 폭행 흉터가 선명했다.더욱이 문제의 교감이 사건 이전에도 수차례 학생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는 추가 증언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양상이다. 영상이 온라인에 공개된 직후 관할 공안국과 둥팡시 교육청은 문제의 교감과 학부모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가해 교감의 직위를 즉시 해제한 상태라고 밝혔다. 또, 문제의 학교 측은 공식 사과 입장을 공개한 상태다. 또, 관할 교육청은 피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 등 후속 조치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관할 공안국은 해당 교감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학생들을 겨냥한 폭행 사건이 있었는지 여부를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사건은 지난 3월을 기준으로 중국 당국이 학생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정신적 체벌을 모두 금지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학교장에 대한 형사 처벌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중국 교육부는 지난 3월 1일을 기점으로 직접적인 체벌과 언어폭력을 포함한 장시간 기립 등 가학적인 처벌을 모두 금지했다.   
  • 공분만 더 키운 이순자의 ‘15초 대리사과’

    공분만 더 키운 이순자의 ‘15초 대리사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마무리된 가운데 부인 이순자씨가 ‘15초 대리사과’를 했다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두고 한 발언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여론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일부 대선후보들은 이씨의 사과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5·18 관련 공약을 내세웠다.이씨는 지난 27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남편의 재임 중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깊이 사죄를 드리고 싶다”고 사과했다. 이씨의 3분 20초 전체 발언 중 단 15초에 불과한 이 발언은 과오에 대한 전씨 측의 첫 사죄 발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같은 날 전씨 측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이 서울추모공원에서 기자들에게 “(이씨가) 5·18에 관해 말씀하신 게 아니다. 분명히 (대통령) ‘재임 중’이라고 말하지 않았나”라고 해명하면서 여론의 공분을 샀다. 전씨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뒤 1980년 계엄령 전국확대와 광주에서의 유혈진압으로 정국을 장악하고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일각에선 이씨가 국회에서 본인 사망 후에도 추징금 환수가 가능하도록 법 개정에 나선 움직임을 의식해 억지로 사과하는 시늉을 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씨는 956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채 사망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28일 광주에서 이씨의 대리사과에 대해 “또 한번 5·18을 폄훼하고 희생자들을 모욕하고 있다. 학살자는 천수를 누렸지만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실 왜곡과 망언에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역사왜곡처벌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이날 광주 5·18 민주묘역을 찾아 기자회견을 열고 “차기 정부는 임기 시작 즉시 개헌 논의를 시작하고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기리고 계승한다는 내용을 넣자”고 다른 대선후보들에게 제안했다. 반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전날 기자들이 이씨 대리사과 관련 입장을 묻자 “제가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다”고만 답했다.
  • 신길5구역,제물포역 인근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

    국토교통부는 서울 영등포 신길2구역 등 5곳을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예정지구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3080+ 대도시권 주택공급방안’(2·4대책)에 따라 추진 중인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2차 예정지구로 지정된 곳은 신길2구역과 도봉구 쌍문역 서쪽, 도봉구 덕성여대 인근, 인천 미추홀구 제물포역, 경기 부천 원미사거리 등이다. 이곳에는 모두 8478가구가 새로 들어서며, 이 가운데 3976가구를 공공분양으로 일반에 사전청약으로 공급한다. 이번에 예정지구로 지정된 5개 구역의 주민 분담금은 민간 정비사업에 비해 30% 이상 낮은 수준이다. 주민에게 현물보상으로 공급하는 주택 가격은 59㎡가 3억 1000만~5억 8000만원, 84㎡는 4억 2000만~7억 6000만원으로 추정됐다. 주민들의 가구별 평균 부담금은 3000만~2억 4000만원으로 민간 재개발사업으로 추진할 때보다 30% 이상 낮은 수준이라고 국토부는 설명했다. 예정지구로 지정된 지역은 1차 예정지구와 마찬가지로 주민 찬성이 높은 곳을 골랐다. 신길2구역은 뉴타운에서 해제된 이후 장기간 개발이 지연됐던 곳이지만, 법 시행(9월) 후 약 2개월 만에 지구 지정을 위한 법적 요건인 주민 동의율 3분의2 이상 확보하는 등 사업 추진 의지가 높운 곳이다. 인근 도심복합사업 후보지인 신길4·15구역, 영등포역세권이 함께 개발되면 영등포역·신길동 일대가 새로운 명품 주거 단지로 탈바꿈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 제물포역 인근은 역세권이라는 입지를 지녔음에도 지역 상권 위축으로 주거환경 개선이 어려워 노후화가 급속히 진행된 곳이다. 인천시가 복합행정타운으로 추진 중인 도화도시개발사업, 도화역세권 도심복합사업이 연계 개발되면 이 일대는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변모할 것으로 보인다. 국토부는 2·4대책 발표 이후 도심 내 주택공급 후보지로 모두 141곳(15만 6000가구)을 발표하고 지방자치단체와의 사전 협의, 주민설명회 등 지구 지정 절차를 밟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 [여기는 중국] 구글에 ‘에이즈’ 입력하자 ‘우한사람’…엉뚱한 번역에 中 분노

    [여기는 중국] 구글에 ‘에이즈’ 입력하자 ‘우한사람’…엉뚱한 번역에 中 분노

    구글 번역기가 중국인들을 분노케 하는 엉뚱한 번역을 내놔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최근 중국 웨이보에 게재된 한 누리꾼의 구글 번역 오류 사례를 인용해 ‘구글 시스템의 번역 오류로 중국인에게 모욕감을 줬다’는 기사를 보도해 논란이 됐다. 한 중국인 누리꾼이 제보한 내용에 따르면, 구글 영어 번역 시스템에 중국어로 ‘에이즈 바이러스’라는 특정 단어를 입력하자 ‘우한 사람’으로 번역된 것이 확인됐다. 우한은 중국 화동지역인 후베이성의 성도다. 중국 내 첫 코로나19 발병자가 발견되면서 국제 사회로부터 코로나19 발병지라는 오명을 얻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이다. 이 같은 번역 오류는 러시아어 번역 시스템에 ‘에이즈 감염자’라는 중국어 단어를 입력한 경우에도 ‘우한 사람’으로 결과가 도출돼 중국인들을 분노케 했다는 지적이다. 이를 처음 제보한 익명의 누리꾼은 “구글 번역에 그 외의 ‘신문’, ‘전파’ 등 다수의 단어를 입력할 시에는 동일한 단어로 번역 결과가 도출된다”면서 “때문에 특정 단어에 대해서만 오답을 내놓는 악의적인 번역 오류 사례”라고 주장했다. 번역 오류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 누리꾼들 사이에서 큰 공분이 일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웨이보 등 중국 SNS에는 구글의 이상한 번역 결과를 공유하는 글과 사진 등이 지속적으로 게재되고 있다. 한 누리꾼은 “내 눈을 믿을 수 없다”면서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이 특정 단어에만 유독 불쾌한 번역 오류를 도출하는 것은 악의적인 번역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도가 지나친 번역 오류 사례”라고 지적했다. 또, 일부 누리꾼들은 최근 불거진 중국과 미국의 외교 갈등과 연계해 “미국이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모든 면에서 중국을 비방하고 있다”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중국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세뇌하기 위해 비열하고 유치한 행각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누리꾼들은 구글 측에 강력한 항의를 하는 등 집단적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다수의 관영매체들은 이번 사건을 겨냥해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우리는 경제적인 교류를 정치화하려는 태도를 단호하게 반대한다’면서 ‘(중국을 겨냥한)구글의 부당한 비난과 이러한 관행들에 대해 분노를 표시한다’고 공식 입장을 게재했다. 또, 지난 2010년 중국 대륙에서 서비스 일체를 철수한 구글 사업 방침에 대해 당시 산업정부기술부의 입장을 인용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2010년 3월 구글이 중국에서 서비스를 전면 철수한 것을 겨냥해 리이중 당시 산업정보기술부 장관은 “중국 인터넷 시장은 개방돼 있다”면서도 “다만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한편, 구글은 지난 2016년부터 웹과 모바일 ‘구글 번역’ 서비스에서 영어-중국어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당시 구글 측은 영어-중국어 번역 서비스를 최초로 도입, 기타 언어 번역 서비스 대비 중국어 번역이 가장 어려운 일이며 중국어 사용자가 많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지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현재 구글 번역은 이른바 ‘딥러닝’으로 불리는 기술을 활용해 오고 있다. 인간의 두뇌 신경망처럼 스스로 학습해 지식을 확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인공 신경망 기술을 적용해오고 있는 것. 기계가 방대한 단어와 구절, 문장을 기억하고 연관성이 없는 것은 하나씩 없애는 방식으로 정확한 해석을 해나갈 수 있는 학습능력과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입력된 특정 단어에 대해 인공지능은 훈련에 사용된 방대한 자체적인 사전을 활용해 가장 적합한 단어를 찾아내는 방식이다.  
  • “허망하다”…만취여성의 아빠 폭행 지켜본 6살 딸 정신장애 진단

    “허망하다”…만취여성의 아빠 폭행 지켜본 6살 딸 정신장애 진단

    만취한 20대 여성으로부터 ‘묻지마 폭행’을 당한 40대 가장의 6살 딸이 대학병원에서 정신장애 진단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26일 헤럴드경제에 따르면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20대 여성으로부터 이유 없이 폭행을 당했던 40대 가장 A씨의 딸 B(6)양이 지난달 26일 한양대병원에서 심리검사를 받은 결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관찰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A씨가 공개한 딸의 심리학적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B양은 정서적 증상과 관련해 인지적 효율이 저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 과제에서 목표 자극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았으며, 충동적인 오류도 관찰됐다. 또 주의 유지에서 효율이 저조해진 상태다. 검사를 진행한 의사는 ‘아동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부친과 오빠의 피해 장면을 목격한 이후 외부에 대한 경계가 상승하며, 높은 수준의 불안정감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소견서에 기재했다. 이어 ‘폭행 사건 이후 부정적 정서가 증가해, 사소한 일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사료된다. 사건에 대해 반복적으로 반추해 불편감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A씨는 지난 7월 30일 오후 11시쯤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산책로에서 만취 상태의 여성 C씨로부터 주먹·발길질과 함께 휴대전화 등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당시 폭행은 C씨가 A씨의 중학생 아들에게 대뜸 맥주캔을 내민 데서 비롯됐다. 당연하게도 중학생 아들은 C씨가 내미는 맥주캔을 거절했는데, C씨는 이에 격분해 먼저 A씨 아들의 뺨을 때렸다. 이후 도주하려는 C씨를 A씨가 막아서자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했다. A씨가 C씨의 폭행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한쪽 팔만 잡아 도주를 막자 C씨는 휴대전화로 A씨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당시 폭행 현장에는 A씨의 아내와 중학생 아들, 7살 딸 등 온 가족이 함께 있었고, C씨의 폭행과 욕설을 두려움 속에서 지켜봐야 했다. 당시 C씨는 출동한 경찰에게 ‘A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결과 그런 정황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C씨는 자신을 저지하는 경찰관들에게 욕설을 하기도 했다. 반면 A씨는 C씨의 도주를 막고 폭행을 저지하다 불가피한 신체접촉으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무차별 폭행을 당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딸이 받은 소견에 대해 “아이까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돼 허망한 심정만 남았다”면서 “가해자는 아직도 직접 찾아와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건 직후 A씨는 합의 조건으로 C씨가 직접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자필로 쓴 반성문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지만, 두 차례 합의 논의 자리에는 C씨의 부친만 나왔을 뿐 C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C씨와 C씨의 모친은 번갈아가며 A씨에게 사과 문자를 대량으로 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C씨가 지인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는 사진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공개해 다시 한번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해당 사건은 검찰에서 서울 성동경찰서로 이첩됐으며, 경찰은 폭행·아동학대·무고 등의 혐의로 C씨를 입건해 수사 중이다.
  • ‘정인이 사건’ 양모 2심서 징역 35년 감형…양부 징역 5년형

    ‘정인이 사건’ 양모 2심서 징역 35년 감형…양부 징역 5년형

    생후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 양을 학대해 숨지게 한 양모 장모씨가 2심에서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다. 1심에서 선고된 무기징역보다 형이 줄었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성수제·강경표·배정현)는 26일 살인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장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5년을 선고했다.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함께 기소된 양부 안모씨는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5년이 선고됐다. 두 사람 모두 200시간의 아동학대 치료프로그램 이수명령과 10년간 아동 관련 기관 취업을 제한하는 명령이 부과됐다. 재판부는 장씨의 살인, 상습아동학대, 상습아동방임 등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살인 고의가 없었다는 장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수차례 학대로 이미 쇠약해진 피해자를 다시 강한 근력으로 폭행하면 장기손상 등 치명적 부상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이 충분히 예견 가능하고, 장씨에게 피해자 사망 결과가 발생할 위험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재판부는 “장씨를 영구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무기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이 정당화될 만한 객관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감형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양형은 책임주의 원칙에 따라 신중해야 한다”며 “장씨가 살인 의도를 갖고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볼 수 없고 범행 이후 살인을 은폐하려고 하지 않은 점, 이 사건 전에 벌금형 외에 별다른 전과가 없고 사회적 위치나 관계가 견고했던 점 등을 고려했다”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장씨가 분노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감정 통제 능력이 약한 심리적 특성이 있어 이 사건에 범행에 이르렀지만 장기간 수형생활로 성격적 결함을 고칠 가능성이 있고 출소 후 재범을 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라고 밝혔다. 남편 양씨는 2심에서 정인 양의 양팔을 꽉 잡아 빠르고 강하게 손뼉을 치게 해 정서적으로 학대를 한 혐의에 대해서는 1심과 달리 무죄가 선고됐다. 정인 양을 방임하고 아동학대를 방조한 혐의에 대해서는 그대로 유죄가 인정됐다. 재판부는 “안씨는 양부로서 피해자 보호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장씨의 기분만 살피며 학대를 방임해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안씨가 장씨의 행위를 제지하거나 적절한 구호 조치를 했다면 사망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양형기준상 권고형의 범위를 벗어나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라고 밝혔다. 이날 선고 직후 방청석에서는 울음이 터져나오거나 감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장씨는 지난해 6∼10월 정인 양을 상습적으로 폭행·학대하고 10월 13일 복부에 강한 충격을 가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 [속보] 정인이 양모 2심서 감형…무기징역→징역 35년

    [속보] 정인이 양모 2심서 감형…무기징역→징역 35년

    생후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양을 학대하고 숨지게 해 전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양모가 항소심에서 감형받았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성수제 강경표 배정현)는 26일 살인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모 장모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1심을 깨고 징역 3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장씨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영구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무기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이 정당화될 만한 객관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장씨는 지난해 6~10월 입양한 딸 정인양을 상습적으로 폭행·학대하고 10월 13일 복부에 강한 충격을 가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1심에서 장씨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검찰은 항소심에서도 “이 사건은 스스로 방어하기 어려운 16개월 아이를 상대로 한 범행이라는 점에서 죄질이 크고 반사회적”이라며 사형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재판부는 아동복지법 위반(아동학대) 혐의로 함께 기소된 양부 안모씨에게는 1심과 같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 조깅하던 흑인 쏴죽인 백인들 유죄 평결에 21개월 “동영상 유출된 덕”

    조깅하던 흑인 쏴죽인 백인들 유죄 평결에 21개월 “동영상 유출된 덕”

    지난해 2월 미국 조지아주에서 조깅을 하던 25세 흑인 청년이 백인 남성 셋에게 총격을 받고 숨졌는데 배심단이 가해자들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기까지 1년 9개월이 걸렸다. 유죄가 인정된 것은 정의가 실현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미국의 사법 절차에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NBC 뉴스에 따르면 조지아주 브런즈윅의 주택가 도로를 달려가던 아머드 아버리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한 혐의로 그레고리 맥마이클(65)과 그의 아들 트래비스(35), 이웃 윌리엄 브라이언(52)이 24일(이하 현지시간) 글린 카운티 지방법원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 평결을 받았다. 이들은 동네에서 발생한 잇단 절도 사건에 아버리가 연루된 것으로 의심하고 트럭으로 추격한 끝에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사실이 인정됐다. 아버리는 조깅을 하다 변을 당한 것으로 파악됐으며 범죄에 연루됐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초 이 사건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묻힐 뻔했다. 사건 발생 70여일이 지나도록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뒤늦게 가해자 중 한 명인 브라이언 이 휴대전화로 녹화한 영상을 누군가가 언론에 흘려 지난해 5월 5일 공개됨으로써 충격적인 사건의 진상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공분이 일었고, 경찰도 여론의 압력에 떠밀려 수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방송은 지적했다. 이날 유죄 평결로 이들 피고인에게는 적어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선고되게 된다. 이들은 증오범죄 혐의로도 따로 재판을 받는다. 아버리의 어머니는 흐느꼈다. 아버지는 안도감에 탄성을 질렀다가 판사의 제지로 퇴장했다. 아버리의 어머니는 “이 싸움을 함께 해준 모두에게 감사하다. 길고 힘든 싸움이었다”면서 “아들이 이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법정 밖에 모인 이들은 “정의가 이뤄졌다”고 외치며 기뻐했다. 아들을 데리고 방청하러 온 흑인 아버지들이 많았다고 일간 워싱턴 포스트(WP)는 전했다. 재판 내내 인종적 편견이 작동해 공정한 판결이 이뤄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용의자 체포에 시간이 너무 걸렸던 데다 배심원 12명 중 11명이 백인으로 구성돼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평결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이어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아버리 피살 사건은 이 나라에서 인종적 정의를 위한 싸움이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 보여주는 충격적 사례”라면서 정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버리 사건은 같은 해 5월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숨지는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확산하면서 함께 주목받았다. 최근 위스콘신주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총을 쏴 2명을 숨지게 한 18세 청소년 카일 리튼하우스가 정당방위를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져 무죄 평결을 받아 흑인 사회가 분노하고 있는데 아버리 사건 평결은 어느 정도 정의에 부합하는 평결이 내려졌다.
  •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군사반란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두 책임자가 사망함으로써 일그러진 역사의 한 페이지는 막을 내렸다. 전씨는 현재 진행 중인 고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사건 재판의 피의자로서 반성은 물론 진실 고백도 거부했다. 또한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1980년 5월 광주 학살에 대한 참회나 사죄도 하지 않았다. 언론 탄압을 비롯해 삼청교육대,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등 민주주의 말살, 인권유린, 노동운동 탄압, 간첩단 조작 사건, 천문학적 비자금 조성 등 수많은 과오에 대해 변변한 유감의 표시조차 없었다. 단언컨대 전씨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과만 있고 공은 찾기 힘든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1996년 군사반란 수괴죄, 반란 모의 참여죄,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사형이 선고돼 헌정 질서 파괴와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정치적 고려에 의한 대통령 사면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사면이 그의 죄에 대한 판결을 없애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에 걸쳐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광주의 피해자들과 국민들 앞에 한마디 반성도 참회도 없었다. 오히려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뻔뻔하게 주장했고,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던 ‘전 재산 29만원’ 운운으로 전체 2205억원의 추징금 중 956억원의 미납금을 남기고 갔다. 세금 체납액도 9억 7000만원에 이른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건 존재의 소멸을 통해 그 생애의 공과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하곤 한다. 하지만 전씨의 죽음을 대하는 많은 국민들은 어두운 역사의 일단락을 깔끔하게 맺지 못했다는 답답함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식들을 통해 밝혔던 것처럼 뒤늦게나마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하는 일 또한 어느 정도 가능했을 터다. 피해자의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와 사죄에서 출발한다. 사회의 화합은 거기에서 비로소 싹틀 수 있었으나 안타깝기만 하다. 그를 단죄해야 할 법적 다툼의 실효성은 사라졌다. 오직 남은 자들이 판단하고 역사가 심판해야 할 과제가 됐다. 전씨는 비록 사죄·증언 없이 떠났지만 역사의 심판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살아 있는 자들이 구현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규명되지 않은 5·18 진상에 대해서도 끝까지 밝혀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부여됐다. 더디더라도 계속해서 화합과 치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우리의 또 다른 사명이기도 하다.
  •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군사반란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두 책임자가 사망함으로써 일그러진 역사의 한 페이지는 막을 내렸다. 전씨는 현재 진행 중인 고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사건 재판의 피의자로서 반성은 물론 진실 고백도 거부했다. 또한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1980년 5월 광주 학살에 대한 참회나 사죄도 하지 않았다. 언론 탄압을 비롯해 삼청교육대,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등 민주주의 말살, 인권유린, 노동운동 탄압, 간첩단 조작 사건, 천문학적 비자금 조성 등 수많은 과오에 대해 변변한 유감의 표시조차 없었다. 단언컨대 전씨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과만 있고 공은 찾기 힘든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1996년 군사반란 수괴죄, 반란 모의 참여죄,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사형이 선고돼 헌정 질서 파괴와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정치적 고려에 의한 대통령 사면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사면이 그의 죄에 대한 판결을 없애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에 걸쳐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광주의 피해자들과 국민들 앞에 한마디 반성도 참회도 없었다. 오히려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뻔뻔하게 주장했고,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던 ‘전 재산 29만원’ 운운으로 전체 2205억원의 추징금 중 956억원의 미납금을 남기고 갔다. 세금 체납액도 9억 7000만원에 이른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건 존재의 소멸을 통해 그 생애의 공과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하곤 한다. 하지만 전씨의 죽음을 대하는 많은 국민들은 어두운 역사의 일단락을 깔끔하게 맺지 못했다는 답답함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식들을 통해 밝혔던 것처럼 뒤늦게나마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하는 일 또한 어느 정도 가능했을 터다. 피해자의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와 사죄에서 출발한다. 사회의 화합은 거기에서 비로소 싹틀 수 있었으나 안타깝기만 하다. 그를 단죄해야 할 법적 다툼의 실효성은 사라졌다. 오직 남은 자들이 판단하고 역사가 심판해야 할 과제가 됐다. 전씨는 비록 사죄·증언 없이 떠났지만 역사의 심판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살아 있는 자들이 구현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규명되지 않은 5·18 진상에 대해서도 끝까지 밝혀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부여됐다. 더디더라도 계속해서 화합과 치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우리의 또 다른 사명이기도 하다.
  • [사설] 범인 제압 훈련을 온라인으로 때웠다는 경찰

    [사설] 범인 제압 훈련을 온라인으로 때웠다는 경찰

    대통령의 질타와 경찰청장의 사과에도 최근 잇따른 경찰의 부실 대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어제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들이 “인천의 흉기 난동 사건과 서울의 신변보호 여성 피살 사건의 문제점을 국회에서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원들은 “이번 사건들로 경찰이 쌓아 온 신뢰가 무너지고 국민 불안이 가중될 것”이라며 “시스템을 바꾸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은 출동 경찰관 2명이 피해자를 놔둔 채 현장을 이탈한 사실만으로 국민적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일부에서는 여자 경찰관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실상은 부실한 교육과 훈련이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실제로 흉기 난동 사건에 투입된 순경은 현장 대응 훈련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중앙경찰학교에 입교한 이 순경은 코로나19로 인해 6개월간의 교육 기간 중 매달 2시간씩 대면으로 해야 할 물리력 대응 훈련을 온라인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게다가 별도의 대면 훈련 없이 현장에 배치됐다. 경찰 교육의 실상이 이러니 현장에 갓 나온 순경에게 제대로 된 대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신변보호를 요청한 여성이 피살된 사건은 스마트워치의 오류로 경찰 출동이 늦어진 데 원인이 있다. 하지만 3년 전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개선 권고를 받았는데도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는 점에서 경찰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신변보호자에게 오류 가능성을 알려 주지도 않았다고 하니 스마트워치를 ‘만능시계’로 믿고 있었다가 소중한 목숨만 잃고 말았다. 차제에 경찰은 일선 경찰관들의 현장 대응 시스템을 면밀히 살펴보길 바란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과잉진압 논란을 의식해 테이저건 등 총기류 사용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일선 경찰관들의 현실을 되짚어 보고 공론화를 거쳐 특단의 조치를 내놓길 바란다.
  • “광주는 폭동” “전 재산 29만원” 분노만 키운 정치군인의 퇴장

    “광주는 폭동” “전 재산 29만원” 분노만 키운 정치군인의 퇴장

    빈농의 아들 출신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11·12대 대통령직을 움켜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욕은 굴곡지고 어두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전씨는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채 23일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중에 육군사관학교 입학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가족을 부양했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서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처음부터 돋보이지는 못했다. 군 생활 초반에는 한직을 전전하다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소장의 눈에 띈 이후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기용된다. 그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30대대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출세가도를 걸었다. 그가 속했던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도 군 내 주류 모임으로 급부상했다. 전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마침표를 찍은 10·26 사태가 발생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건 수사·처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12·12 신군부 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생들이 군부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나선다. 그러자 전씨는 ‘시국 수습’을 핑계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5월 18일 서울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도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계엄군·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며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에야 마무리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개헌까지 하며 11·12대 대통령 연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 직후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10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을 누리는 국가 개발 시기에 정권을 잡았으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탄압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졌고, 맞대응으로 내놓은 4·13 호헌조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집권여당 대표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198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전씨는 여생 내내 심판대에 올랐다. 퇴임 직후 전씨가 ‘5공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한 데 대해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비판한 것은 사회가 그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전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강원 백담사로 들어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인 법적 심판이 시작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을 거쳐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을 최종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 없는 모습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전씨는 2003년 법원의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 29만원’을 기재하며 사실상 납부를 거부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전씨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환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씨는 훈장 반환도 거부하다 7년 만인 2013년에야 12·12 이후 받은 9개 훈장을 반납했다. ●조비오 신부 사자 명예훼손 등 1심 유죄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상계엄은 “정당한 법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사자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등으로 고발했다. 전씨는 1심 내내 알츠하이머 투병, 고령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다 2019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해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해 재판을 진행하다 오는 29일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 8월 다발성 골수종 확진을 받았던 전씨는 생전 가깝게 지낸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쿠데타 주역, 민주화 탄압, 현대사 퇴행… “공과 언급할 가치 없어”

    쿠데타 주역, 민주화 탄압, 현대사 퇴행… “공과 언급할 가치 없어”

    유신 체제에 억눌렸던 민주화 열망을 12·12 군사반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짓밟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생을 마감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퇴행시킨 ‘정치군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씨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제5공화국 7년 동안 국민 다수에게 적용되는 정의는 없었다.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채 총칼과 ‘체육관 거수기’로 집권한 터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나 박종철·이한열 열사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 프레임에 걸리면 예외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희생됐다.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땡전뉴스’에서 보듯 언론 자유도 말살됐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됐다.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당했다. 새 질서 확립과 불량배 교화를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도 많았다.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공과’란 표현을 쓰기 어려울 만큼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를 그나마 평가하는 대목은 단임 실천이다.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 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애초에 4·13 호헌 조치로 5공 연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민주화 시위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타오른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치적으로 삼고자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데다 국민들의 거스르기 힘든 민주화 열망, 그리고 미국의 압박 등에 마지못해 물러섰고, 6·29 선언을 타협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 1981년 21.4%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이 1982년 7.2%, 1983년 3.4%, 1984년 2.3%로 안정세를 찾았고 경제성장률은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상승세를 탄 점을 두고 전두환 시대의 성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세계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호황’ 기조에 힘입은 덕분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국제 금리가 내려가면서 외환 문제가 해결됐고 유가·달러화 동반 하락으로 국내 물가가 안정되며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과소비와 투기 현상이 심화했고, 이런 불안 요인들은 이어진 6공화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설상가상 전씨 개인의 부정 축재로 더 빛이 바랬다. 1997년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 전씨는 재임 중 재벌로부터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추징금 2205억원 중 956억원은 지금까지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7·30 교육개혁조치’로 과외를 금지시키는 한편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를 도입했다. 공교육을 정상화시켰다는 평가와 과외를 음성화시켰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도 펼쳤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 이처럼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드러났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궤변으로 정당화하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어 공분을 자아냈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강변했고, 2017년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았고, 12·12에 대해서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과를 언급할 대상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고, 전두환을 끝내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애도하고 조문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전두환 시대는 공과라는 표현 자체가 적용이 안 된다고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반인륜적 성격을 가진 정권인 데다 집권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서 “보수, 진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임은 처음부터 본인이 약속했던 일인 데다 등 떠밀리듯 한 걸 평가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고도성장도 ‘3저 호황’이란 국제경제 조건이 조성됐고, 이전부터 이어진 자본 축적의 결과다. 전두환의 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 국가장 안한다…“전직 대통령 중 처음”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 국가장 안한다…“전직 대통령 중 처음”

    국가장 도입 후 사망 전직 대통령 중국가장 치르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 정부가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국가장’(國家葬)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2011년 국장과 국민장을 통합해 국가장이 도입된 이후 사망한 전직 대통령 중 국가장을 치르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승만·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정부가 장례를 지원하지 않은 세번째 전직 대통령이 된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전 전 대통령에 대해) 국가장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며 “국가장을 하지 않기로 한 만큼 유족들이 가족장을 치르더라도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없다”고 밝혔다. 국가장법에 따라 정부는 국가장을 추진할 경우 행정안전부 장관이 제청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정하게 되지만, 행안부는 이런 절차를 밟지 않기로 했다.국가장 치른 노태우와 달리 가족장으로 장례 치를 듯 국가장법은 2조에서 전·현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이 사망시 국가장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중대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법의 목적을 담은 1조는 “이 법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逝去)한 경우”라는 표현을 썼다. ‘국가·사회에 현저한 공훈’이 있거나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을 국가장의 대상자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결정은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살다 지난달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른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는 전씨의 경우 과오에 대해 나름의 반성의 뜻을 표한 노 전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여온 것을 고려해 국가장을 치르지 않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는 노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이라는 큰 역사적 과오를 짊어지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사과 표명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의 발언으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방송 인터뷰를 통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하는 등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선고받은 추징금 2205억원은 완납하지 않았다.청와대 “진정성 있는 사과 없어 유감” 청와대는 이날 전씨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거나 조문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여야 대선주자들과 지도부도 전 전 대통령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사망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면서도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달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역사적 과오가 적지 않지만, 성과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지면서 논란이 있었지만, 문 대통령은 대통령 명의의 조화와 함께 유영민 비서실장을 통해 조문했다.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청와대 차원의 조화는 물론 조문도 하지 않기로 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발언 당시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도 생략한 것으로 알려졌다.여야 대선주자들 및 지도부도 비판…“죽음조차 유죄” 여야 대선주자들과 지도부도 싸늘한 반응을 보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날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디지털 대전환’ 공약 발표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 전 대통령을 ‘전씨’라 지칭했다. 이 후보는 “내란, 학살사건 주범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확인됐다.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최하 수백명을 사살하고 국가권력을 찬탈한 범죄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았다”며 “이 중대범죄 행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조문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민주당은 조화·조화·조문·국가장 모두 불가“라고 밝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조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가 별도의 입장문을 통해 가지 않겠다며 입장을 번복했다.국민의힘 당대표 차원 조화만…”조문은 개인적 판단“ 국민의힘은 당대표 차원의 조화를 보내기로 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조문할 계획이 없다. 당을 대표해서 조화는 보내도록 하겠다. 당내 구성원들은 고인과의 인연이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조문 여부를 결정하셔도 된다”고 설명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성찰 없는 죽음은 그조차 유죄다. 역사를 인식한다면 국가장 얘기는 감히 입에 올리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의 깊은 상처는 오로지 광주시민들과 국민의 몫이 됐다”고 지적했다. 여영국 정의당 대표도 “역사적 심판과 사법적 심판이 끝나기도 전에 사망했다. 죽음조차 유죄”라고 비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페이스북을 통해 “스스로 굴곡진 삶을 풀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면서 “고인의 역사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인정하지 않고 국민께 사과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 “스토킹처벌법 반의사불벌 조항 삭제… 피해자 보호 기간 늘려야”

    “스토킹처벌법 반의사불벌 조항 삭제… 피해자 보호 기간 늘려야”

    서울 중구 신변보호 여성 스토킹 살인사건으로 사회적 공분이 큰 가운데 시행 중인 스토킹처벌법의 입법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반의사불벌 조항을 삭제하고, 피해자 보호의 사각지대를 메워야 한다는 목소리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3일 ‘스토킹 피해자 보호와 지원 강화를 위한 입법과제’를 주제로 제32차 젠더와 입법포럼을 개최했다. 법에서 규정하는 스토킹의 범위가 일상에서 벌어지는 스토킹 양상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먼저였다. 주제발표에 나선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스토킹 처벌법이 포괄하는 스토킹의 범위가 좁아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스토킹을 포함하지 못하고 보호 대상 역시 제한적이다”고 지적하며, “스토킹 피해자가 안전과 생활상의 평온을 확보할 수 있도록 위험성 평가, 안전계획 수립, 신변과 개인정보의 안전 확보, 의료지원 등 필요한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법을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보람 비움 변호사는 “스토킹행위의 정의에서 ‘의사에 반할 것’이라는 요건을 삭제하고, 피해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도 피해 대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스토킹처벌법 상 반의사불벌 조항의 삭제도 거론됐다. 스토킹 규제의 실효성을 확보하고, 재발 위험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김구슬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연구원은 “스토킹 사건의 상당수가 과거 연인사이 등과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이 경우 피해자는 자신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가해자와의 관계를 고려하거나 보복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독일·일본에서도 초기에는 스토킹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했으나, 최근 삭제한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처벌법 상에 피해자 보호조치가 미비하다는 지적도 많다. 피해자 보호 조치로 응급조치, 긴급응급조치, 잠정조치가 가능하다. 응급조치는 신고 받은 경찰관이 처벌 경고, 피해자의 상담소·보호시설 인도, 행위자와 피해자 분리 등을 담고 있다. 긴급응급조치는 경찰관이 스토킹 행위가 지속적·반복적으로 나타날 우려가 있고 긴급을 요하는 경우 100m 이내 접근 금지,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 금지 등을 명하는 것이다. 잠정조치는 스토킹범죄 중단에 관한 서면 경고, 100m 이내 접근 금지, 유치장 또는 구치소에의 유치 등이다. 이들 기간의 최대 기간은 6개월이다. 김구슬 연구원은 “현행법이 규정하고 있는 긴급응급조치, 잠정조치의 기간이 너무 짧아서 피해자를 실효성 있게 보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가정폭력처벌법과 같이 피해자가 법원에 직접 신청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피해자 보호명령 제도가 없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피해자가 형사절차와 상관없이 접근금지 등의 보호명령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 권한을 강화하는 제도로 평가받는다. 피해자 보호명령의 기간은 기본 1년, 최대 3년까지 가능하다.
  •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유신 체제에 억눌렸던 민주화 열망을 12·12 군사반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짓밟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생을 마감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퇴행시킨 ‘정치군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씨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제5공화국 7년 동안 국민 다수에게 적용되는 정의는 없었다.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채 총칼과 ‘체육관 거수기’로 집권한 터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나 박종철·이한열 열사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 프레임에 걸리면 예외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희생됐다.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땡전뉴스’에서 보듯 언론 자유도 말살됐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됐다.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당했다. 새 질서 확립과 불량배 교화를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도 많았다.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공과’란 표현을 쓰기 어려울 만큼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를 그나마 평가하는 대목은 단임 실천이다.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 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애초에 4·13 호헌 조치로 5공 연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민주화 시위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타오른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치적으로 삼고자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데다 국민들의 거스르기 힘든 민주화 열망, 그리고 미국의 압박 등에 마지못해 물러섰고, 6·29 선언을 타협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 1981년 21.4%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이 1982년 7.2%, 1983년 3.4%, 1984년 2.3%로 안정세를 찾았고, 경제성장률은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상승세를 탄 점을 두고 전두환 시대의 성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또 한 세계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 기조에 힘입은 덕분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국제 금리가 내려가면서 외환 문제가 해결됐고 유가와 달러 가치 동반 하락으로 국내 물가가 안정되며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과소비와 투기 현상이 심화했고, 이런 불안 요인들은 이어진 6공화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설상가상 전씨 개인의 부정 축재로 더 빛이 바랬다. 1997년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 전씨는 재임 중 재벌로부터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추징금 2205억원 중 956억원은 지금까지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도 펼쳤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이처럼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드러났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궤변으로 정당화하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어 공분을 자아냈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강변했고, 2017년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았고, 12·12에 대해서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과를 언급할 대상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고, 전두환을 끝내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수백여 명을 죽였고, 과오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애도하고 조문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전두환 시대는 공과라는 표현 자체가 적용이 안 된다고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반인륜적 성격을 가진 정권인 데다 집권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서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정치적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임은 처음부터 본인이 약속했던 일인 데다 등 떠밀리듯 한 걸 두고 정치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고도성장이란 것도 ‘3저 호황’이란 국제경제적 조건이 조성됐고, 이전부터 이어진 자본 축적의 결과다. 전두환 시대에 발현됐을 뿐 전두환의 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빈농의 아들 출신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11·12대 대통령직을 움켜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욕은 굴곡지고 어두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전씨는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채 23일 세상을 떠났다.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가족을 부양했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서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처음부터 돋보이지는 못했다. 군 생활 초반에는 한직을 전전하다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소장의 눈에 띈 이후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기용된다. 그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30대대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출세가도를 걸었다. 그가 속했던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도 군 내 주류 모임으로 급부상했다. 전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마침표를 찍은 10·26 사태가 발생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건 수사·처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12·12 신군부 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생들이 군부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나선다. 그러자 전씨는 ‘시국 수습’을 핑계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5월 18일 서울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도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계엄군·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며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에야 마무리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 직후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10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을 누리는 국가 개발 시기에 정권을 잡았으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탄압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졌고, 맞대응으로 내놓은 4·13 호헌조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집권여당 대표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198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전씨는 여생 내내 심판대에 올랐다. 퇴임 직후 전씨가 ‘5공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한 데 대해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비판한 것은 사회가 그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전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강원 백담사로 들어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인 법적 심판이 시작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을 거쳐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을 최종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 없는 모습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전씨는 2003년 법원의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 29만원’을 기재하며 사실상 납부를 거부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전씨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환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씨는 훈장 반환도 거부하다 7년 만인 2013년에야 12·12 이후 받은 9개 훈장을 반납했다.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상계엄은 “정당한 법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사자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등으로 고발했다. 전씨는 1심 내내 알츠하이머 투병, 고령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다 2019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해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해 재판을 진행하다 오는 29일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 8월 다발성 골수종 확진을 받았던 전씨는 생전 가깝게 지낸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군홧발에 짓밟힌 민주주의, 끝내 사과는 없었다

    군홧발에 짓밟힌 민주주의, 끝내 사과는 없었다

    행정안전부, 국가장 예우 여부 검토역사적 과오 사과 표명 없어 국가장 쉽지 않을 듯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전두환 신군부’는 시민들의 들끓는 민주화 요구를 군홧발로 잔인하게 짓밟았다. 국민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의 계속 될 것으로 봤지만 이는 얼마 가지 못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정치 과도기적 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이라고 빗댔다. 1980년 2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소위 3김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였다. 많은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독재가 무너져 곧 민주화가 이뤄지고 김대중 또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소한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 김종필 총재나 최규하 대통령이 상당 기간 정권을 이끌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3김 회동’에서 김 전 국무총리는 ‘춘래불사춘’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석 달도 되지 않아 광주 유혈진압을 통해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2시 전남대와 조선대 등 이 지역 대학에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시작된 ‘5.18 유혈진압’은 9일 뒤인 27일 새벽 4시55분 계엄군의 전남도청 접수로 ‘악몽의 10일’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열흘의 기억은 훗날 전두환 정권의 반민주적 철권통치를 종식하는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된다.전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됐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그해 3월 역시 체육관 간선제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올랐다. ‘신군부 독재’ 5공화국의 시작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시행하며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에 주력했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신군부 정권의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다. 아울러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 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하에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공포 정치를 펼치기 위해 범법자들의 인권을 유린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했다. 정치인은 물론 재야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면 가차 없이 잡아들여 고문을 자행했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강제감금·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수사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기도 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2011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폭력상은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경찰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군을 불법 체포한 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하다 사망케 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도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은폐했다.5개월 뒤인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대정부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 군이 경찰에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6·10 민주항쟁을 부르는 도화선이 됐다. 학생, 회사원 할 것 없이 전국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다. 앞서 ‘4·13 호헌조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했던 전 전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해 6월 29일.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선 후보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5공화국의 종식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다시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자신의 치적이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던 데다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라는 미국의 압박 등에 결국 물러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이라는 큰 역사적 과오를 짊어지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사과 표명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의 발언으로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이후 2003년 방송 인터뷰를 통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하는 등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선고받은 추징금 2205억원을 완납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이 이날 사망하면서 그의 장례 절차에도 관심이 쏠리지만 ‘국가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살다 지난달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진 전례가 있지만, 전 씨의 경우 과거의 과오에 대해 나름의 반성의 뜻을 표한 노 전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여온 만큼 장례와 관련한 예우도 다를 가능성이 크다. 행정안전부는 이날 전 씨의 사망 소식을 확인한 직후 국가장 등 예우 대상이 될지 여부에 대한 검토에 돌입했다. 국가장법은 2조에서 전·현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이 사망시 국가장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중대 범죄를 저질렀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법의 목적을 담은 1조는 “이 법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逝去)한 경우”라는 표현을 썼다. ‘국가·사회에 현저한 공훈’이 있거나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을 국가장의 대상자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국가장법은 국가장 여부의 결정 절차에 대해 ‘유족 등의 의견을 고려해 행정안전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적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노 전 대통령 사망 때는 고심 끝에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는 예우를 하기로 하면서 비판 여론을 고려해 정부 차원의 분향소를 차리지 않고 지방자치단체에 조기 게양을 독려하지 않았다. 전 씨는 법이 정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 대상이 아니기도 하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7조)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되긴 했지만 이런 ‘결격 사유’를 해소할 요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전 씨의 반성 없는 행보에 여권 등 정치권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지난달 노 전 대통령의 장례 때부터 이미 전 씨의 국가장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나왔다.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은 지난달 28일 CBS라디오에 나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국가장이나 국립묘지 안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완전히 다른 케이스“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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