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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졸자 「하향취업」 늘고있다

    ◎취업난 심화되자 “우선 일자리 얻고 보자”/작년 2만명 「비전공」에 진출/81년비 10% 증가/여대생 “부적격 취업”도 8배로 경기침체로 기업들은 사원채용을 줄이고 있으나 대학졸업자는 늘어나 대학출신들의 취업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나 대학졸업학력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로 하향지원하는 이른바 「부적격취업」 대졸자가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비해 전문대 출신은 오히려 전공분야에의 취업이 늘고 대학출신들에게 맡겨지던 전문기술직이나 경영능력을 요구하는 관리직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국고등교육연구회가 24일 발표한 「대학생의 진로지도와 취업기회확대 방안을 위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대학출신 취업자 7만6천5백94명 가운데 27.8%인 2만1천2백93명이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로 취업했다. 이는 취업자 2만8천5백24명 가운데 18.3%인 5천2백20명이 비전공분야에 취업했던 지난 81년보다 크게 늘어난 것이다. 특히 여자대학 출신은 81년 총취업자의 4.3%만 비전공분야에취업했던데 비해 지난해에는 전체의 33.7%가 다른분야에 취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전문대 출신은 계속 취업률이 높아진 탓인지 81년 전체취업자 1만2천7백77명 가운데 19.7%인 2천5백17명이 비전공 분야에 취업했었으나 지난해에는 4만1천3백16명 가운데 18.5%인 7천6백43명만이 비전공분야에 진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81년 대학출신의 59.5%가 전문기술직이나 행정관리직 등에 취업했던데 비해 지난해에는 47.3%만 진출,12.2%포인트나 낮아졌다. 이에반해 전문대나 고교출신이 지원해온 관리 및 사무관련직으로의 하향취업은 81년 17.1%에서 지난해에는 28.9%로 크게 증가했으며 판매ㆍ서비스직도 4.2%에서 11.0%로 늘어났다. 여자의 경우 81년 전체취업자 1만7천9백40명 가운데 86.1%가 전문기술직이나 행정관리직 분야에 취업했으나 지난해에는 52.8%만 이 분야에 취업했다. 전문대졸 취업자는 반대로 81년 30.8%를 차지했던 전문기술직 및 행정관리직 취업자가 지난해에는 51.4%로 20.4%나 크게 늘어났고 운수장비 운전을 포함,단순 노무직ㆍ생산관련직 취업자는 81년 33.3%에서 지난해에는 7.4%에 그쳤다. 관계전문가들은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대졸자들이 비전공 분야라도 취업할 길을 찾게 되고 대졸자의 임금과 대우는 포기하고 개별적으로 취업을 위한 기능기술을 익혀 하향지원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비전공분야 취업 또는 하향지원 취업은 사실상 잠재적 실업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어 사회불안의 요소가 될 뿐 아니라 고급인력의 낭비이며 잘못된 교육투자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 보안사 해체ㆍ사과 요구/내각제등 포기 않을땐 정권퇴진운동

    ◎야권 「사찰」규탄대회… 김대중총재는 불참 평민ㆍ민주당과 재야의 국민연합,통추회의 등 9개 정당 사회단체가 주관하는 「보안사 불법사찰 규탄과 군정청산 국민대회」가 13일 하오 3시부터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주관 단체들은 결의문을 통해 ▲보안사 사찰내용 및 인력ㆍ예산ㆍ지휘보고체계의 공개와 보안사 해체 ▲안기부ㆍ치안본부대공분실 등의 사찰내용공개 ▲최고책임자인 노태우 대통령의 퇴진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의 즉각 철폐 ▲민중생존권 확보를 위한 정책적 결단제시 ▲국회 해산 및 내각제개헌 포기선언 및 지자제 전면실시 등을 여권에 요구했다. 결의문은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 민주세력이 연합해 노 정권 퇴진 국민운동을 전면적으로 벌여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또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통해 ▲보안사 해체 및 대국민 사과 ▲지자제 약속이행 ▲금융실명제 실시와 경제정의 실현 ▲군정청산과 민주화 실현에 대한 용의가 있는지를 물었다. 6일째 단식농성중인 김대중 총재를 대신해 연설을 한 평민당의 최영근 부총재는 평민당이 주장하는 여권의 내각제 포기선언ㆍ지자제 전면실시ㆍ보안사 해체 및 노 대통령의 사과ㆍ민생문제 해결 등 4개 요구사항을 거듭 촉구했다. 이기택 민주당 총재는 『보안사 사찰폭로로 노 정권은 군사독재정권임이 증명된만큼 노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보안사를 해체하여야 한다』면서 『민생해결과 국제정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노 정권을 퇴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대회가 끝난 뒤 승용차편으로 돌아가던 민주당의 박찬종 부총재,장석화 대변인과 당원 등 20명은 야권통합을 외치는 관중들이 던진 돌과 빈병에 맞아 부상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고문 무죄선고 항의/치안본부앞서 시위

    「박종철기념사업회」 「민주화실천유가족협의회」 등 12개 재야단체소속 30여명은 22일 상오10시쯤 서울 서대문구 홍제3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앞에서 강민창전치안본부장 등 박군고문 은폐기도 경찰관 4명이 무죄선고를 받은데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20분만에 경찰에 의해 모두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눈을 세계로 더 크게 떠라/유재천 서강대교수ㆍ신방학(세평)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신문이 발생하게 되었던 가장 큰 동기가 국민을 개화시키려는 데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으로 나라의 문호가 세계를 향해 개방됨에 따라 일본및 서양 여러나라와의 통상이 시작되고 서양 신문명의 수입이 뒤따르게 되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의 정부나 지식인들이 당면했던 최대의 과제는 자주와 개화를 함께 성취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신문은 바로 그와 같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만 보더라도 세계 각국의 정세를 자세히 알리고 독자로 하여금 세계를 향해 눈을 뜨도록 만들기 위해 「지구론」이나 「정부론」과 같은 해설기사를 대폭 게재했었다. ○역사교훈 되새겨야 그러나 결과는 제국주의 열강에 나라의 이권을 모두 빼앗기고 마침내 국권마저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같은 뼈아픈 역사적 체험은 여러가지 복합적인조건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만 특히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무지도 큰 몫을 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오늘의 상황은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만 최근에 이르러 서두르고 있는 이른바 북방정책을 보면서 그와 같은 역사의 교훈을 상기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상대를 모르는 한 어떤 협상이나 경쟁 또는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경험법칙 때문일 것이다. 이런 뜻에서 몇가지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미국을 항상 우방이라고 생각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각 분야에서 기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산다. 정치나 외교ㆍ통상및 문화에 있어 가장 관계가 깊은 나라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미국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예컨대 미국의 정치나 외교에 대한 전문가는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당연히 미국을 잘 알고 있다고 치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문분야별로 따지다보면 그러한 인식이 허상임을 쉽게 깨닫게 된다. 분야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전문가가 없는 영역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유학생이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전공분야와 전공에 따른 관심영역들이 생각보다 다양하지 못하다. 특히 인문및 사회과학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들 분야에서 미국자체를 연구한 사람들이 드문 탓이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해방이후 세대가 우리나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지금 과연 일본전문가들이 얼마나 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즉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일본정치ㆍ일본의 역사ㆍ일본경제ㆍ일본문학ㆍ일본의 언론ㆍ일본사회 등 각 분야에 대한 전문인력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유학의 길이 꽉 막혀 왔던 탓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 우리를 배우려는 유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우리가 일본을 배우려는 경우보다 휠씬 많다.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기업의 사원과 그 가족만 해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전문인력 양성 시급 이와같이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고 또 비교적 교류가 자유로운 두 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러할진대 소련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더 말할필요조차 없겠다. 통일을 그렇게 강조하고 염원하면서 과연 우리가 북한에 대해 무엇을,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자문할 때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실정은 말할 것도 없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무차별하게 적용해온 결과인 것이다. 아무리 이념투쟁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순수한 학문적인 연구는 허용했어야 했다. 아니 그보다 정부가 그렇게 하기를 도왔어야 옳았다. 들리는 바로는 소련에서 우리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전돼 왔으며 그에 따른 축적도 상당하다고 한다. 우리의 정치와 경제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연구성과도 괄목할 만한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평가가 어느 정도 진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소련을 연구하는 것보다 그들이 상대인 우리에 대한연구를 휠씬 더 맣이 해 왔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나아가 우리의 각 분야에 대한 정보수집도 놀라운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는 물론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체험담도 들린다. 이에비해 소련과의 수교를 서두르는 우리는 부끄럽게도 소련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외교관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한다. 소련의 역사도,정치메카니즘도,문화도 잘 모르는 채 통상이나 경제협력을 서두르고 수교를 추진한다는 것이 현실의 요청이라는 점에서 불가피하다고 할 지라도 우리의 한계라는 인식은 필요하다고 하겠다. 특히 우리가 경계할 바는 지금 우리의 소비생활이 그들보다 풍요하다고 하여 마치 우리나라가 소련보다 선진국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릇된 인식은 하루빨리 바로잡아 주어야 하리라고 본다. 마치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어주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어서는 한소관계의 장래를 그르치게 할 것이다. ○“정체감 상실 경계를”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세계의 여러나라와 통상을 더 확대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있다. 또한 국력이 신장함에 따라 세계속의 한국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늦은 감은 있으나 더 큰 대가를 지불하기 전에 각국에 대한 지역연구를 활발하게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의 북방외교나 세계 각국과의 통상 등에서 한계에 부딪힐 것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하고 지역연구에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뒤따라 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이다.
  • 민방위대 방범순찰 나선다/시장ㆍ유흥가등 취약지역 중점/내무부

    ◎검침ㆍ징수원도 신고요원 활용/모든 공중전화 동전없이 「112」신고 93년까지 내무부는 3일 민생치안의 확보가 경찰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민방위대를 지역단위의 범죄신고및 자율방범의 중추적 민간조직으로 활용키로 했다. 이날 내무부가 각 시ㆍ도에 시달한 「주민신고및 자율방범활동강화지침」에 따르면 지금까지 간첩과 용공분자에 한했던 주민신고대상을 민생치안 사범ㆍ사회질서위반자ㆍ지명수배자ㆍ재난발생요소등으로 확대하고 도시지역은 반이나 아파트ㆍ직장단위로,농ㆍ어촌지역은 자연부락단위로 민방위주민신고망을 설치해 민생치안과 관련된 각종 신고를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범죄발생빈도가 잦은 공단주변이나 여관촌등 집단하숙지역,시장ㆍ백화점ㆍ터미널등 다중집합장소,음식점ㆍ다방등 대중이용업소,오지ㆍ해안ㆍ낙도등 대공취약지역에는 특별관리신고망을 만들어 각종 범죄가 발생했을때나 신고대상자를 발견했을때 즉각 신고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내무부는 또 신고를 보다 쉽게 할수 있도록 읍ㆍ면ㆍ동단위로 집배원ㆍ징수원ㆍ검침원ㆍ외판원ㆍ경비원ㆍ의용소방대원ㆍ청원경찰 가운데 10∼20명씩을 이동신고원으로 위촉,유사시에 신고활동을 맡도록 했다. 또 도시지역의 방범취약지역은 9∼10개 가정 또는 업소를 1개조로 묶어 상호 연락을 위한 이웃간의 방범비상벨을 설치,비상시에 경찰관서에 즉시 연락할 수 있도록 하고 비상벨 관리책임자를 지정,평소에 작동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도록 했다. 내무부는 특히 주민신고를 보다 손쉽게 하기위해 전기통신공사의 협조를 얻어 전국 21만대의 공중전화를 93년까지 동전을 넣지 않고도 112,119등의 신고전화를 할수 있도록 바꿀 계획이다
  • 김근태씨 고문경관 중형구형/특별검사/4명에 10∼5년

    ◎“반인륜적행위 용납못해” 전 「민청련」의장 김근태씨의 재정신청에 따라 김씨를 고문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경찰관 4명에게 징역10∼5년이 각각 구형됐다. 이 사건 특별검사인 김창국공소유지담당변호사는 18일 서울형사지법 합의22부(재판장 강홍주부장판사)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김수현피고인(57ㆍ전치안본부대공수사단 경감)에게 징역10년,백남은피고인(55ㆍ〃경정)과 김영두피고인(52ㆍ〃경위)에게는 징역 7년씩,최상남피고인(43ㆍ〃)에게는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이들에게는 특정법죄가중처벌법의 독직 폭행죄와 형법의 공무원의 폭행ㆍ가혹행위죄가 적용됐다. 김변호사는 논고를 통해 『이 사건이 비록 5년전 제5공화국 말기에 발생한 범행이라 할지라도 미리 계획된 조직적인 고문행위로서 그 수법의 치밀성과 잔혹성이 유례를 찾기 힘들 뿐만 아니라 피고인들에게서 반성의 빛을 전혀 찾을 수 없어 중형을 구형한다』고 밝혔다. 김변호사는 또 『이 사건을 단순한 경찰관의 가혹행위라는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고문행위가 다시는 이땅에 발붙이지 못하게하고 우리나라가 고문이 예사로행해지는 비문명국이라는 오명을 씻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피고인등은 지난 85년9월4일 상오7시30분부터 낮12시30분 사이에 「삼민투」배후 조종혐의 등으로 치안 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된 김씨를 물고문하고 다음날에도 3시간동안 전기고문을 하는등 여러차례에 걸쳐 고문을 한 혐의로 서울고등법원의 재정결정에 따라 재판에 회부됐었다. 김근태씨는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은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된 뒤 징역5년형을 복역해오다 지난해 6월 특별가석방조치로 풀려났다. 피고인들은 이날 최후진술에서 『검찰의 고소사건 수사에서도 밝혀졌듯이 김씨의 혐의사실을 입증할 물증과 자술서가 있었기 때문에 고문할 이유가 없었다』고 고문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선고공판은 다음달 23일에 열린다.
  • 나홋카 경제특구 설립안 소 연말께 입법화

    소련 나홋카 등지에의 경제특구설립안이 올 연말쯤 입법화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부터 나흘동안 소련 대외경제관계부 주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한ㆍ일ㆍ소등 동북아 3개국 경제합동회의에 참석하고 온 대한무역진흥공사 관계자들은 17일 방소보고서를 통해 오는 7월초의 제28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채택될 것으로 보이는 계획시장경제로의 경제체제 개혁안에 따라 경제특구 설립안이 올연말쯤 구체적 형태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무공은 이 보고서에서 소련측이 한국의 소련내 도로ㆍ항만등 사회간접자본시설 건설에의 참여를 희망하는 한편 수산가공및 목재가공분야,소비재 생산분야 등에서의 한국의 진출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 문공위 19일 열기로/여야총무 합의/KBS사태 논의

    여야는 16일 상오 국회에서 총무회담을 갖고 법사ㆍ내무위 등 이날 하오부터 열린 5개상임위 외에 KBS문제를 다루기 위한 문공위를 19일 열기로 합의했다. 이날 회담에서 평민당측은 KBS문제를 다루기 위해 문공위와 함께 노동위를 열자고 제의하는 한편 방소관련 문제를 다루기 위한 외무통일위 소집도 요구했으나 민자당의 반대로 일단 문공위만 열자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평민당은 4ㆍ3보궐선거부정시비와 관련해 국회본회의를 소집,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했으나 민자당측이 국조권 발동은 국회본회의를 소집해야 하는등 형식적인 번거로움과 함께 내무위에 실태파악소위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조사활동을 벌일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벌이다 내무위에 소위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한편 이에 앞서 정부와 민자당은 최병렬공보처장관등이 참석한 가운데 문공분과당정협의를 갖고 KBS사태를 다루기 위해 국회 문공위소집을 결정하는 한편 방송이 하루속히 정상화되도록 KBS측에 촉구했다.
  • “아직도 자녀를 때리십니까”/황산성 변호사(서울시론)

    ◎「매질의 악습」은 악행만 조장할 뿐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개패듯이 때려 키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랑하는 아내를 동네북치듯 치고 공권력을 맡기면 폭력을 휘둘러댄다. 서구의 민주국가에서는 개를 때려도 동물 학대죄에 해당되니 그같은 법에 따르면 우리국민 모두가 전과자가 될 판이다. 헌법상 우리국민은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향유하는 존엄한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정에서부터 이 위대한 선언을 파기하고 학교나 사회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자존심이 꺾이며 인권을 유린당하는 매질의 소굴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체벌은 최후의 수단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나보다도 성격이 밝고 명랑한 친구들이 암기력이 부족하여 점수가 나쁘다고 선생님에게서 뺨을 얻어맞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깍지를 끼우는 고문당하는 모습이 가슴아파 선한 뜻으로 점수를 도왔다. 만약에 에디슨 아인슈타인 수준의 아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자란다면 부모와 선생님의 매질에 의해 요절하거나 불구가 되겠지. 최근 시험답안지에서 틀린 문제의 수에 따라서 혹독한 매질을 한 여선생님의 처벌행위가 사랑의 매로 미화되었고,판사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미국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을 체벌할 경우,어떤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가한다는 사전예고와 처벌아닌 다른 수단을 다한 끝에 최후수단으로 선택되어야 하며 당사자의 변명을 듣고 다른 학생의 입회하에 가할 수 있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우리네 중고등학교에는 소위 대공분실이라는 체벌밀실이 있다고 하니 가히 개패듯 자식을 때려 키우는 야만인 사회임에 틀림없다. 이미 지난 올림픽 경기 때 권투시합에서 우리의 야만적 문화배경을 전세계에 과시한 적이 있다. 부모와 선생님의 혹독한 매질과 학대에 못이겨 지난 5년간 7백여명의 중고생이 자살하였고 모진 매질에 견디어 낸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약 15%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10년새 소년범죄 급증 죽지 않고,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의 자녀들이 민주화를 주장하면서 돌과 화염병이 필수 휴대품이 되었다. 대학생들이 일으킨 동의대사건,각 대학 학원프락치사건 등에서 보듯 또래의 젊은이들을 죽이고 고문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당황하는 모습을 엿볼 수가 없다. 숱한 주먹질,구둣발길질을 당하고도 그 정도는 고문이라고 호소하지도 않는다. 초ㆍ중ㆍ고생 성폭행에 대한 가해자의 55%가 고교생이라는 사실은 더 끔찍하다. 어머니를 매질하는 아버지를 칼로 방어하는 충동 역시 매질의 복습일 것이다. 1978년부터 최근 10년간 소년범죄의 수는 약 30% 증가하였고 특히 살인강도ㆍ집단폭력 등 강력범죄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얼마전 인천의 어느 전자오락실에서 국민학교 4ㆍ5학년생 4명이 고분고분 자기들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하여 국민학교 1학년생을 인근 공원으로 끌고가 집단구타하고 눈위에 방치하여 목숨을 잃게 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등학교 학생 3명이 날품팔이하는 아버지로부터 국민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용돈 8천원을 빼앗기 위해 또 집단구타하여 그 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학생들은 그렇게도 끔찍한 범행을 자행하고도 수사과정 중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리며 장난치는 등 그들의 자세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매질은 자녀들에게 두려움과 불안감,기분나뿐 감정등으로 잠재의식 속에서 쌓여가며 마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과 같다고 한다. 오늘날 이같은 모든 악행의 표출은 매질의 악습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아이들을 얕보지 말고 과욕으로 채찍질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이들은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고 개성과 소질이 각기 다르므로 그가 가야할 길을 잘 지도하되 어른이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며 옳고 그른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잘 가르치면 된다. 잘못을 되풀이하면 매를 들 수가 있다. ○어른이 모범 보여야 그 경우에는 절대로 도구를 사용하여서는 안되며 오른손으로 때렸으면 왼손으로 안아주는 것이 사랑의 매질이다. 매질의 목적은 자녀들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보다는 마음의 교정에 참뜻이 있기 때문에 상처를 주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러시아 풍습 중 딸을 시집보내면서 장인이 사위에게 가죽채찍을 선물로 준다고한다. 그래서 길고 어두운 철권정치가 가능했을 것이다. 고르바초프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서,그녀는 분명 아들을 매질이 아니라 사랑과 기도로써 양육하였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자문업 등록요건 강화/제재기준도 엄격 적용

    투자자문업의 등록요건이 보완된다. 금융산업 발전심의회의 증권분과위는 23일 투자자문업의 난립을 방지하고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현행 등록요건중 전문인력 규정을 강화,증권거래법 시행령 개정을 거쳐 3월말부터 시행키로 했다. 이 개선방안에 따르면 현재의 자유등록제는 계속 유지하되 단순학력 기준으로 되어있는 전문인력 요건에 전공분야를 추가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영학ㆍ경제학등 증권관계분야(박사)로 되어있는 요건이 증권투자론ㆍ증권분석론등 투자자문 관계분야로 전문화 되며 「증권관계분야의 3년이상 강의(교원)」 요건도 「투자자문 관계분야를 3년이상 강의한 전임강사이상」으로 강화된다. 한편 「대학졸업자로서 증권관계기관에 10년이상 근무한 사람」 항목을 신설,투자자문회사가 필수적으로 확보해야하는 증권관계 전문인력 11인에 포함시켰다.
  • “고문 받고 쓴 약정서 무효/경찰의 불법연행… 가혹행위 인정”

    ◎서울고법,건물주에 승소 판결 치안본부 특수수사대가 대한주택공사측의 의뢰를 받아 민간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구타 등 가혹행위로 허위자술서를 받아낸 사실이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났다. 서울고법 민사9부(김형선부장판사)는 16일 대한주택공사가 김진기씨(서울 양천구 목1동 신시가지아파트 409동903호) 등 2명을 상대로 낸 약정금청구소송 항소심에서 『피고 김씨 등이 작성한 약정서는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불법연행돼 구타ㆍ구속ㆍ협박 등 가혹행위와 강박에 못이겨 허위작성된 것으로 무효』라고 판시,피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원고 대한주택공사측은 지난85년 8월 인천시 남구 만수동 일대에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하면서 이곳안에 있던 경기도경 대공분실을 이웃 김씨 소유의 건물로 옮겨주면서 전세금 9천6백만원과 건물이전비ㆍ내부시설비 등 모두 3억5천여만원을 김씨에게 주었었다. 그뒤 김씨는 조모씨에게 이 건물을 팔았으며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끝나 대공분실도 원래위치로 옮겨가게 되자 대한주택공사측은 건물의 새주인 조씨에게 전세금등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김씨가 전세금을 횡령할 목적으로 건물을 팔았다고 주장,치안본부에 김씨에 대한 수사를 해줄것을 의뢰했었다. 김씨는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연행돼 조사를 받으면서 「계약금 3억5천만원가운데 이전비와 내부시설비 2억5천4백만원은 나중에 내가 부담키로 하고 주택공사의 돈을 한시적으로 보관한뒤 계약을 해제할때 돌려주기로 했다」는 내용의 약정서를 썼으며 주택공사측은 이를 근거로 약정금반환청구소송을 내 1심에서 승소했으나 김씨측은 『이 약정서는 치안본부의 수사과정에서 잠 안재우기ㆍ전신구타 등 가혹행위에 못이겨 허위로 쓴 것』이라고 주장,항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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