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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위안부 부정하면 국가신용 잃을 수도”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주도한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이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할 경우 국가 신용이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노 전 관방장관은 8일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된 연재물 ‘시대의 증언자’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993년에 발표한 ‘고노 담화’와 관련, “자료상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전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위안부)의 존재와 전쟁 중의 비극까지 없었다는 주장에 슬픔을 느낀다.”며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면)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일본의 인권의식이 의심받아 국가의 신용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는 자신의 전임자인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이 1992년 7월 위안부 문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과했으나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에 자신이 경찰과 방위성, 외무성, 문부성, 후생노동성 등 각 부처에 다시 조사를 의뢰했다고 말했다. 고노 전 장관은 결국 위안부 16명을 대상으로 한 직접 청취 조사를 통해 “일본군이 위협해 여성을 연행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속였고 이 여성들이 때로는 하루 20명 이상의 병사를 상대했으며 일본군이 패주할 때 버려졌다는 증언이 있었다.”고 밝혔다. 고노 전 장관은 이런 일들이 일본군에 거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강제성’을 인정해야만 하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다며 당시 위안부의 증언을 읽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고노 담화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미국의 국립공문서관 등의 자료를 신중하게 검토해 당시 미야자와 내각의 책임으로 결정한 ‘내각의 의지’라고 규정했다. 그는 “고노 담화를 각의에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 모든 자민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이 답습해 왔다.”고 강조했다. 고노 전 관방장관은 1993년 8월 4일 담화에서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됐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는 구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다.”고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정부·민간기관 ‘종이 공문’ 없앤다

    내년 이후부터는 정부와 민간 기관 사이에 주고 받는 문서도 우편, 팩스 형식 등이 아닌 전자문서로 통하게 될 전망이다. 행정기관에서는 전자정부 구현의 방법으로 전자문서유통시스템이 1995년 구축돼 시행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7일 “행정·공공기관 간 전자적 문서유통 체계를 민간까지 확대하기 위해 민관 사이 문서유통 현황을 조사하는 등 시스템 구축을 위한 기반 작업을 시작했다.”면서 “내후년 정도면 본격적으로 전자문서를 통한 유통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2416만건 중 87%가 종이 행안부는 이를 위해 지난달 말까지 민관 유통 문서의 양, 종류, 방법 등에 대한 현황 조사를 진행했다. 행정기관 420곳, 공공기관 677곳 등 1097개 행정·공공기관과 14곳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 한해 동안 행정·공공기관에서 2416만건의 문건이 민간으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87%에 달하는 2102만건의 문서가 종이 형태로 전달됐다. 나머지는 이메일 등 전자문서 형태였다. 종이문서는 우편이 63.3%, 팩스가 32.4%로 주종을 이뤘으며 인편 전달 등이 3.9%를 차지했다. 민간에 보내는 공문서는 대부분 고지·통보·안내와 민원회신, 입찰·계약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민간에서 행정·공공기관으로 발송하는 문서 역시 85.7%가 종이문서 형식을 띄었다. 공공기관 관계자는 “종이문서를 전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자적 전달 수단이 없다는 점과 전달의 신뢰성 문제가 가장 큰 만큼 전자문서유통 환경이 만들어지면 좀 더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공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의 성격상 수신확인, 문서보안 등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행안부 역시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대목이다. ●“수신확인·보안문제 해결 중요” 박덕수 행안부 행정제도과장은 “이처럼 종이문서를 우편, 또는 팩스로 민간에 전달함에 따라 매년 226억원 정도의 지출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예산절약의 필요성과 업무의 효율성과 함께 전달 시점 확인, 진본 확인 등 문서보안 강화를 염두에 두고 시스템 구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박영효(1861~1939·왼쪽)와 유길준(1856~1914·오른쪽). 두 사람은 19세기 말 조선을 대표하는 개화파였다. 두 사람은 모두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주도한 핵심적 인물이었으며 이미 갑오개혁 이전에 구체적이며 명확한 개혁안을 담은 ‘상소문’과 ‘서유견문’을 각각 집필했다. 당시 조선 내의 권력 지형에서 개화관료들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갑오개혁 기간 내내 협력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대립했다. 왜 그들은 협력이 아닌 대립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1883년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남아 유학생활을 하던 유길준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유길준이 포도대장이던 한규설의 집과 민영익의 별장에서 유폐생활을 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민영익이 유길준을 청과 조선의 보수 세력으로부터 보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유길준은 당시 왕실의 비밀창구로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규설의 숨은 자문역이었다. 그는 이 기간에 주로 집필에 전념하여 1889년에 ‘서유견문’을 탈고, 한규설을 통해 고종에게 제출하기도 하였고 몇몇 외교문서를 대신 작성해 주기도 했다. 이후 유길준은 1894년 6월 당시 민씨 척족을 대표하던 민영준에 의해 ‘일본당’을 대표하여 외아문의 주사로 발탁됐다. 민영준은 일본당을 등용하여 일본 측과의 관계를 개선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유길준은 일본 공사관 측에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한편, 공식적으로는 외아문의 주사로서 일본의 개혁 요구와 속방론 철폐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공사관 측에서는 그가 일부러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려 했다고 파악했다. ●군국기무처를 주도한 유길준 1894년 7월 23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불법 점령,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군국기무처를 수립했다. 이때부터 유길준은 갑오개혁의 핵심 브레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격적으로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된 그는 총리대신 김홍집을 직속으로 보좌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일본 측에서는 당시 유길준이 군국기무처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찡그린 얼굴, 냉소적인 말, 기염 높은 논의, 대담하면서도 침착한 태도’로 ‘내정의 신법’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7월부터 10월까지 군국기무처가 진행한 개혁안은 190개에 달했다. 대외적으로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했다. 일본의 군사교관을 초빙하는 한편 일본의 화폐 유통권을 허가하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동학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초기에는 일정 정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농민군이 2차 봉기의 움직임을 보이자 10월 중순부터는 무력탄압에 들어가게 됐다. 그 밖에도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를 분리시켜 왕권을 약화시켰으며 의정부에 권한을 집중시켰다. 사실 이 모두를 유길준이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군국기무처 내에 유길준만큼 근대국가를 직접 체험했거나 체계적인 저술을 남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를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유길준은 이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대원군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유길준은 10월 일본에 파견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의 파견 및 차관 제공을 요청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무쓰 무네미쓰 외상을 만나 ‘세 가지 수치(三恥論)’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혁이 진행됨으로써 조선 국민, 세계 만국 그리고 후대에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는 독립을 보전하고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개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박영효의 귀환 갑신정변 실패 후 박영효는 10년간 일본 망명생활을 하다가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은 박영효를 귀국시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대원군 세력과 개화관료 세력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길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박영효는 개화세력의 대표인물이면서 부마라는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왕실과도 일정한 소통이 가능했고, 망명 중 대원군과도 수차례 접촉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박영효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 후 고종을 알현하여 자신에게 개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원로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이 일본 공사관 측에 항의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단 제물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공사로 파견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노우에는 10월 27일 부임하자마자 대원군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고 조선 왕실의 고문관 또는 ‘외신’(外臣)으로까지 불리며 왕실과 손을 잡았다. 이와 함께 박영효의 기용을 요청했고 결국 12월 17일 김홍집-박영효 연립정부가 출범하게 됐다. 이때 박영효는 내무대신에 임명됐다. 박영효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조선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박영효는 이 시기 개혁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추구한 것은 동학 농민군에 대한 확고한 진압과 일본을 모델로 한 개혁의 추진이었다. 박영효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의 처형에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확고하게 하려고 종속관계의 상징물을 파괴하고 태극기를 사용하며 공문서에 한글을 사용하게 했고 독립기념일을 제정했다. 그는 이때 내무대신 직권으로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자를 역적으로 처벌하는 건’을 ‘내무대신령’ 1호를 통해 발표했다. 또한, 그는 지방제도 개편에 심혈을 기울여,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와 331개의 군으로 개편했다. 아울러 경무청관제를 발표하여 무장경찰을 육성하고 상비군을 육성하려 했다. 그런데 박영효는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일본 측의 기대와는 달리 김홍집을 ‘줏대 없는 소인배’라며 내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리대신이 될 생각으로 권력투쟁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박영효는 자신의 세력을 지방관은 물론, 군부와 경찰의 요직에 임명했다. 더욱이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맞서 일정하게 조선의 국익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결국, 박영효는 김홍집을 5월 17일에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총리대신의 자리는 박정양에게 돌아갔다. 다만, 박영효는 내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왜 대립하였을까? 박영효와 유길준. 어찌 보면 함께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해 보일 법한 이들은 실제로는 처음부터 첨예하게 대립했다. 윤치호의 당시 일기에 보면, 유길준은 철저하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박영효와 전면적인 대립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그 사상적 이유는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에서 찾을 수 있다. 유길준은 ‘개화의 등급’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을 ‘허명의 개화’를 주장하는 자들로 비판하면서 ‘실상개화’를 제시한다. 그는 허명개화를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남이 잘된 모습을 보면 부러워서 혹은 두려워서 덮어놓고 시행하자고 주장하여 비용은 많이 들이면서 실용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아무런 분별 없이 외국의 것이라면 다 좋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외국을 칭찬하는 나머지 자기 나라를 업신여기는 폐단까지 있는데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개화의 죄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개화하는 데 있어서 폐해는 지나친 것이 모자란 자보다 더욱 심하다고 말하면서 “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속에 주견도 없는 개화의 병신”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둘 사이의 정치적 차이도 존재했다. 유길준은 민영익과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그를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데려가 미국에 유학까지 시켜 준 사람 또한 민영익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민영익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길준 자신이 갑신정변 후 미국에서 보낸 편지 안에서도 그는 “그들이 군왕에게 충성하고 국가에 진실할 때에는 내 친구들이었으나 그들은 역적이고 나라에 큰 해를 끼쳤기 때문에 이제는 나의 큰 원수”라고 써서 보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유길준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1894년 박영효가 다시 등장했을 때 그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길준이 박영효 세력을 ‘개화의 병신’으로 비판한 부분은 1889년에는 없던 내용으로 6년 뒤인 1895년 출간 당시에 새로 써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유길준은 박영효가 개혁을 주도하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개혁관료들의 결집이 절실하던 시절에 치열하게 대립함으로써 결국 모두 몰락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사설] 부유층 빗나간 자식 사랑 국적까지 바꾸나

    일부 재벌 3, 4세와 상류층 인사들이 여권을 위조해 자녀를 국내 외국인학교에 부정 입학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인천지검 외사부에 따르면 이들 학부모는 자녀를 외국인 학교에 보낼 목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외국 국적으로 바꾸거나, 자식을 외국 국적으로 바꿔 여권을 위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자식이 외국 국적이거나 부모 중 한 사람이 외국인이면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다는 규정을 악용한 것이다. 상류층 인사들의 빗나간 자식 사랑과 교육열이 국적까지 바꿀 정도로 막나가는 것을 보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검찰 조사를 받는 이들은 재벌가 3, 4세, 병원장, 투자업체 대표, 변호사 부부들이라고 한다. 이들이 브로커를 통해 불법 여권을 만드는 데 5000만원에서 1억원이 들었다니 장바구니 물가에 오금이 저리는 서민들이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일부 상류층 사이에서는 외국인 학교가 조기 유학의 대안으로 부상해 불법·탈법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자녀를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게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자녀를 홀로 외국에 유학보내지 않아도 되고, 상류층 자녀들끼리 학교를 기반으로 인맥까지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일부 재벌가와 지도층 인사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원정 출산‘을 보내더니, 이제 이들은 자식들에게 외국인 학교 졸업장을 안겨주기 위해 국적을 버리고 있다. 사회에 모범을 보여야 할 이들이 재력을 이용해 이런 탈법·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도덕적 해이의 극치다. 더구나 가짜 여권를 만든 것은 공문서 위조로 엄연한 범죄 행위다. 혹여 이들이 영향력이 막강한 로펌의 변호사를 사서 법망을 빠져나가지 않도록 법대로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일부 외국인학교는 한국인 비율이 80%를 넘는다고 하니 다른 외국인학교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
  • [씨줄날줄] 노인과 어르신/최광숙 논설위원

    미국 뉴욕에 사는 할머니 스트릭랜드는 한 슈퍼에서 17년간 일했다. 80세인 그는 그동안 회사로부터 ‘최고 판매자상’을 받을 정도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얼마 전 해고되었다고 한다. 회사에 24센트(300~400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에 발끈한 할머니는 “24센트의 경제적 손실이 해고 사유가 아니라 나이가 든 고령 노동자를 해고하려고 한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80세 노인이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고 법적 투쟁에 나선 것이다. 요즘 노인은 예전의 노인이 아니다. 91세의 할아버지와 74세의 할머니가 식스팩을 자랑하며 세계 최고령 보디빌더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세상이다. 지난해 6월 향년 104세로 별세한 미국의 최고령 연방판사 브라운은 죽기 3개월 전까지 재판을 진행했다고 한다. 1962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시절 연방 지방판사로 임명된 그는 지난해 어떻게 은퇴할 것이냐는 질문에 “죽어서 물러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이는 현실이 됐다. 과거 노인 하면 나이가 든 늙은 사람을 뜻했다.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인 면에서 기능이 손실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노동현장에서 은퇴해 역할과 소득을 상실했다고 봤다. 나이로는 보통 65세 이상을 노인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미국 미네소타주 의학협회에서는 노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을 늙었고, 배울 만큼 배웠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느낄 때라고 한다. ‘이 나이에 그깟 일은 뭐해.’라고 생각하거나,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젊은이들의 활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때, 좋았던 과거 시절을 그리워할 때 노인이라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노인의 정의도 이렇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서울시가 ‘노인’ 명칭을 ‘어르신’으로 바꿔 사용하기로 했다. 모든 공문서와 공식행사 등에서 어르신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노인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첫 조치라고 한다. 어르신 하면 왠지 지혜와 연륜을 가진 어른이라는 뜻이 풍겨져 듣기에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 명칭 하나로 노인들이 존경받거나 대접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들의 소득수준은 OECD 30여개국 중 최하위 수준이라고 한다. 요즘 노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뉴욕의 할머니처럼 일자리라고 한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시혜 차원에서 베풀어 주는 무상복지도, 어르신이라고 폼나게 불러주는 ‘립 서비스’도 아니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日정부 위안부 강제 동원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이끌어낸 요시미 요시아키(66) 주오대 교수는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이 강제로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가 매우 많은 데도 이를 부인하는 몇몇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요시미 교수는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현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문제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담긴 공문서 6점을 발견, 공개해 일본 정부의 진상조사를 이끌어 냈다. 일본 정부는 조사 끝에 1993년 8월 ‘일본군이 강제로 위안부를 모집하는 데 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의 주역이 군이란 것은 공문서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며 1944년 10월 1일 버마(현 미얀마)에 주둔하던 미군이 작성한 한국인 위안부 20명에 대한 보고서를 제시했다. 요시미 교수는 “일본, 조선, 타이완에서 위안소를 위해 군이 업자를 선정하고, 해당 업자들이 여성들을 모으는 방식을 취했다.”며 “위안부를 모을 때 지역 헌병 및 경찰과 연계해 밀접하게 하라고 육군이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당시 강제 모집 사실을 적시한 일본 육군성 차관의 문건도 1992년에 이어 다시 공개했다. 요시미 교수는 “민간업자에 위안소 운영을 위탁했다고 해도 군이 감독, 통제했기 때문에 위안부 강제 모집에 대한 책임은 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3년 고노 담화가 발표된 직후에도 ‘위안부를 모집할 때 군이 하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모집하지 않았다’는 등의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거론했다. 하지만 그는 “군이 민간업자를 통해서 모았지만 대체로 ‘번듯한 일자리를 준다’고 속여서 끌고 간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는 일본의 형법에서 유괴나 인신매매에 해당한다.”며 일본 정부의 위안부 강제 동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시론] 위안부 문서는 일본 정부가 제시해야/강정숙 이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

    [시론] 위안부 문서는 일본 정부가 제시해야/강정숙 이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

    일본의 전·현직 총리까지 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며 최악으로 치닫던 한·일 갈등이 다른 현안들에 가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하시모토 도루 일본 오사카 시장은 지난달 21일 “위안부가 (일본)군에게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일본 우익이 자주 언급해 왔던 내용이고, 아베 신조 전 총리 발언의 연장선상의 표현이기에 대응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유력한 ‘차기 일본 총리감’으로 언급될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기에 그의 발언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본군에게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한다면 ‘그렇다.’이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이미 결론 난 부분이다. 한국의 피해자 증언에서 일본군 경관의 관여 등이 확인되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인과 네덜란드인 여성들을 군인이 폭력적으로 끌고 간 사실을 기록한 공문서가 있다. 이 발언의 문제 핵심은 징집과정에서 군의 폭행·협박에 끌려갔다는 증거를 요구함으로써 징집뿐만 아니라 이송, 배치과정에 있었던 강제성 전체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위안부’를 징집하는 데 일본군의 직접 수행을 일반화하지는 않는다. 일상적으로는 일본군에 속하거나 명령 받은 ‘(준)군속’ 혹은 ‘군 종속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거의 전권을 가지고 다양한 강제적 방식으로 수행했다고 본다. 강제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강제란 또한 군위안소 내 행위까지 적용되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를 만든 것 자체가 범죄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정부는 미성년자 인신매매 금지를 위한 국제조약에 가입한 상태였다. 미성년 여성들의 국제적 성매매를 방지하기 위한 조약으로, 정부가 나서서 인신매매·유괴·협박 등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국외이송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국내법 형법 제226조에서도 국외로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매매하거나, 유괴 혹은 매매된 자를 국외 이송하는 것에 대해서도 금지하고 어길 경우 2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지에 있던 일본군이 조선총독부나 ‘조선군’에게 요청하여 다양한 불법적 방식으로 여성들을 동원하였음은 이미 당시 문서자료에서 확인되었다. 또 주목할 것은 1939년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인신매매에 대한 신문보도가 있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이들을 처벌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반면 전쟁상황이나 ‘위안부’제와 연관되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육해군형법으로 엄하게 처벌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일제의 주구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폐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도 1940년 이후에는 없었다. 이러한 엄혹한 사회 분위기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이었던 일본군의 필요라면 심지어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도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 강력한 일본군의 요구 중 하나가 바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인 동원방식은 주범인 일본군의 명령과 요구에 의해 종범인 대리인이 강제적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피해자 증언이 자료가 되지 못한다면 문서자료는 일본 측이 제시해야 한다. 패전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체계적으로 자료를 소각정리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자료들은 복수로 만들어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으므로 일본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에게 문서자료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법무성, 경찰청, 출입국 관련 자료, 군사우편국 등의 ‘위안부’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 공개하는 것이 순서이다. 앞으로 중요한 위치로 나아갈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유사한 발언을 반복적으로 하지 말고 눈앞의 이익을 뛰어넘어 이젠 동아시아의 인권 수준을 높이는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 공무원들 국어 공부 ‘삼매경’

    공무원들 국어 공부 ‘삼매경’

    지난달 27~29일 경기도 수원시 지방행정연수원에서는 5~6급 공무원 52명이 모여 국어 공부를 했다. 이들 공무원은 공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바른 국어 사용으로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전문과정에 참여했다. 귀책사유(불이익 부과 요건), 봉입(물건을 넣고 봉함), 불비(갖추지 않음), 익일(다음 날) 등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어와 외국어 대신 쉽고 정확한 언어로 국민과 소통하는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이번 교육의 목표였다. 국립국어원은 2009년부터 ‘공공언어지원단’을 꾸려 공무원의 국어사용능력 증진과 공문서 표현 개선을 위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황용주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는 지난달 31일 “새로 발령받은 모 부처 고위공무원이 장관 보고자료에 있는 외국어의 뜻을 알지 못해 곤경에 처한 적도 있다.”면서 쉽고 정확한 언어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어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정책용어로 꼽은 것은 원소스멀티유스(OSMU) 킬러콘텐츠, 라이선싱 페어, 탄소 캐시백, 죄악세, 마이크로 크레디트, 잡 셰어링, 배드 뱅크, 개인 프리워크아웃(사전 채무조정), 자활인큐베이팅, 패스트 트랙, 뉴스타트 프로젝트, 바우처, 데이케어센터 등이다. 국어원에서는 정부 각 부처의 어려운 용어를 정리해 쉬운 정책용어 사용 협조공문을 보낸다. 올해는 교육과학기술부의 ‘농촌어메니티체험과정’ ‘도네이션 스쿨’ ‘브레인리턴500’과 여성가족부의 ‘레인보우스쿨’, 고용노동부의 ‘스토어365’, 외교통상부의 ‘해피플라이트’, 지식경제부의 ‘모바일-K오피스’ 등에 대해 쉬운 언어로 바꿔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교과부의 ‘필통톡’처럼 정체불명의 합성어도 있다. 미국에서는 의회에서 2010년 쉬운 글쓰기 법이 통과됐다. 이를 통해 민원이 줄어 퇴역군인청은 연간 4만 달러의 예산을 절약하고, 미국 애리조나 국세청은 공무원의 업무시간이 늘어 연간 3만건의 민원을 추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공공언어지원단의 황용주 학예연구사는 “공무원들이 쉽고 정확한 국어를 쓰면 5년간 570억원의 예산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500억 성형男’, 병실동료 처제에 접근하더니…

    ‘500억 성형男’, 병실동료 처제에 접근하더니…

    500억원대 자산가라고 속이고 중년 여성들에게 접근해 7억원대의 사기를 친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남성은 성형까지 해 가면서 부산, 서울 등지에서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전남 나주경찰서는 18일 여성들을 속여 투자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빼앗은 박모(51)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해 부산에서 500억원대 회사를 소유한 기업가 행세를 하며 50대 독신 여성 A씨 등 2명에게 사업자금과 부동산 투자를 미끼로 5억원을 뺏는 등 여성 5명을 상대로 50여 차례에 걸쳐 7억원 상당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3월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한 박씨는 같은 병원 환자의 처제 A씨에게 직원 급여, 장비 구입 잔금 지불 등을 이유로 “금방 쓰고 돌려주겠다.”며 돈을 요구했다. 그의 재력을 의심하지 않은 A씨와 가족은 그해 8월까지 수억원을 빌려줬으나 박씨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경찰은 박씨가 범행 과정에서 시장 명의의 확인서 등 공문서와 부동산 매매 계약서 등을 위조해 건네는 한편 도주 과정에서 얼굴 성형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밝혔다. 지난 10일 서울 삼성동의 한 호프집에서 체포된 박씨는 날카롭던 원래 모습은 간데없고 유명 기업가를 닮은 쌍꺼풀 진 눈에 둥글둥글한 얼굴형으로 변해 있었다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경찰은 박씨의 여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나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두 얼굴’의 사기꾼

    500억원대 자산가라고 속이고 중년 여성들에게 접근해 7억원대의 사기를 친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남성은 성형까지 해 가면서 부산, 서울 등지에서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전남 나주경찰서는 18일 여성들을 속여 투자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빼앗은 박모(51)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해 부산에서 500억원대 회사를 소유한 기업가 행세를 하며 50대 독신 여성 A씨 등 2명에게 사업자금과 부동산 투자를 미끼로 5억원을 뺏는 등 여성 5명을 상대로 50여 차례에 걸쳐 7억원 상당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3월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한 박씨는 같은 병원 환자의 처제 A씨에게 직원 급여, 장비 구입 잔금 지불 등을 이유로 “금방 쓰고 돌려주겠다.”며 돈을 요구했다. 그의 재력을 의심하지 않은 A씨와 가족은 그해 8월까지 수억원을 빌려줬으나 박씨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경찰은 박씨가 범행 과정에서 시장 명의의 확인서 등 공문서와 부동산 매매 계약서 등을 위조해 건네는 한편 도주 과정에서 얼굴 성형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밝혔다. 지난 10일 서울 삼성동의 한 호프집에서 체포된 박씨는 날카롭던 원래 모습은 간데없고 유명 기업가를 닮은 쌍꺼풀 진 눈에 둥글둥글한 얼굴형으로 변해 있었다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경찰은 박씨의 여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나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행정용어 순화어’ 告示 사흘만에 취소 논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3일 고시한 행정용어 순화어를 사흘 만인 6일 어물쩍 취소해 논란이 되고 있다. ‘행정용어 순화어 목록에 오류가 있다.’고 문화부가 관보에 밝힌 취소 사유도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공직 내부에서는 “관보가 일기장 수준”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이에 대해 김혜선 문화부 국어정책과장은 “이 고시에서는 ‘국가브랜드’를 ‘국가상표’로 바꿔 놓는 등 당장 우리 과에서도 사용하기 어려운 말이 포함돼 있었다.”면서 “좀 더 시간을 갖고 검토하려고 고시를 취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적기구인 국어심의회의 심의, 의결을 거친 고시 내용을 너무 쉽게 취소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국어심의위원회는 국어기본법 13조에 따라 국어학·언어학 분야 전문가 60명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된, 어문규범의 제정·개정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는 기구다. ●“관보에 실린 고시 취소는 부적절” 행정안전부 법무담당관실 관계자도 “물론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 취소할 수도 있지만 사흘 만에 관보에 실린 고시를 취소하는 건 이례적이고 부적절하다.”면서 “적어도 관보에 게재하려면 보다 면밀하게 검토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준국어대사전 등재 계획도 차질 관보는 각 정부기관은 물론 전자관보 형태로 전 국민에게 공개된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신중하지 못한 관보 게재·취소 행위를 따로 제재할 규정이나 지침은 없다.”고 말했다. 또 취소 과정에서 부처 내외 협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용어 순화어를 기획하고 선정한 행안부 관계자는 “취소할 때 문화부에서 (우리 쪽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 관계자도 고시 취소와 관련해 “사정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과장도 “전임 과장이 심의했던 것이 고시됐는데 최근 보니 ‘이건 정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문화부 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이번 행정용어 순화어 고시는 각 부처가 국어책임관을 두고 공문서를 어문규정에 따라 한글로 작성하도록 2005년에 국어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처음 실시됐다. ‘가이드라인’을 ‘지침’으로,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바꾸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내용을 연말까지 중앙부처 결재 시스템인 ‘온나라’에 탑재해 입력한 단어가 자동 변환되게 하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할 계획이었다. 이번 고시 취소 결정으로 이 같은 일정에 차질이 생길 전망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행정용어 순화어’ 告示 사흘만에 취소 논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3일 관보에 고시한 행정용어 순화어를 사흘 만인 6일 어물쩍 취소해 논란이 되고 있다. ‘행정용어 순화어 목록에 오류가 있다.’고 문화부가 밝힌 취소 사유도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공직 내부에서는 “관보가 일기장 수준”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이에 대해 김혜선 문화부 국어정책과장은 “이 고시에서는 ‘국가브랜드’를 ‘국가상표’로 바꿔 놓는 등 당장 우리 과에서도 사용하기 어려운 말이 포함돼 있었다.”면서 “좀 더 시간을 갖고 검토하려고 고시를 취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적기구인 국어심의회의 심의, 의결을 거친 고시 내용을 너무 쉽게 취소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국어심의위원회는 국어기본법 13조에 따라 국어학·언어학 분야 전문가 60명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된, 어문규범의 제정·개정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는 기구다. ●“관보에 실린 고시 취소는 부적절” 행정안전부 법무담당관실 관계자도 “물론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 취소할 수도 있지만 사흘 만에 관보에 실린 고시를 취소하는 건 이례적이고 부적절하다.”면서 “적어도 관보에 게재하려면 보다 면밀하게 검토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관보는 각 정부기관은 물론 전자관보 형태로 전 국민에게 공개된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신중하지 못한 관보 게재·취소 행위를 따로 제재할 규정이나 지침은 없다.”고 말했다. 또 취소 과정에서 부처 내외의 협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용어 순화어를 기획하고 선정한 행안부 관계자는 “취소할 때 문화부에서 (우리 쪽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 관계자도 고시 취소와 관련해 “사정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과장도 “전임 과장이 덜컥 고시를 했는데 최근 부임해 보니 ‘이건 정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문화부 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표준국어대사전 등재 계획도 차질 이번 행정용어 순화어 고시는 각 부처가 국어책임관을 두고 공문서를 어문규정에 따라 한글로 작성하도록 2005년에 국어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처음 실시됐다. ‘가이드라인’을 ‘지침’으로,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바꾸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내용을 연말까지 중앙부처 결재 시스템인 ‘온나라’에 탑재해 입력한 단어가 자동 변환되도록 하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할 계획이었다. 이번 고시 취소 결정으로 이 같은 일정에 차질이 생길 전망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김정일, 생전 핵무기 대량생산 지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원자폭탄의 대량 생산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2일 도쿄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내부 문서를 인용해 김 위원장이 우라늄 농축 활동과 관련, 고농축 우라늄을 원료로 한 핵무기의 대량 생산을 제1목적으로 하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우라늄형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김 위원장의 지시가 공문서로 명백하게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이는 북한이 지금까지 대내외적으로 밝혀 온 ‘핵의 평화적 이용’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북한은 일관되게 우라늄 농축 활동은 전력 생산을 위한 것으로 저농축이며 핵에너지의 평화 이용 권리는 국가의 자주권에 관한 사활이 걸린 문제로,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조선노동당이 김 위원장 사망 후인 올해 2월 작성한 19페이지 분량의 내부 문서에는 북한이 2010년 11월 미국 과학자 등에게 공개한 우라늄 농축 시설에 대해 김 위원장이 “우라늄 농축기술은 민수공업에 이용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소개됐다. 문서는 또 김 위원장이 “(우라늄 농축이) 군사적 측면에서 원자폭탄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며 대량의 핵무기를 생산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명기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학생 자살’ 중학교 교사, 학교폭력 설문 조작 혐의로 입건

    검찰이 지난해 11월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한 여중생 사건과 관련, 해당 학교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한 데 이어 생활지도교사를 사법처리하자 교육계가 발끈했다. 교사의 직무 범위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학교폭력에 대한 교사들의 대응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는 게 교육계의 논리다. 서울남부지검 형사1부(부장 김훈)는 최근 서울 양천구 S중학교 윤모 생활지도교사를 허위 공문서 작성 등의 혐의로 입건했다. 윤 교사는 학교 측에 지난해 4월과 6월 각각 실시한 학교폭력 설문 조사 결과를 축소해 제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학급별 통계결과표를 폐기한 혐의도 받고 있다. S중 관계자는 “학생들이 무기명 응답 과정에서 장난으로 기재한 부분들에 대해 확인을 거쳐 사실무근인 내용을 반영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을 축소한 것이 아니다.”라고 검찰의 수사에 반박했다. 또 “윤 교사가 담임교사들로부터 설문조사 결과를 통보받을 때 받은 메모를 무기한 보관할 수 없어 버린 것이지 공무 방해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당시 2학년 김모양은 수면제를 다량 복용한 뒤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내용의 메모를 남기고 자신의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경찰은 앞서 안모(40) 담임교사가 사건 발생 몇 달 전부터 “딸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조치를 취해 달라.”는 김양 부모의 요청을 받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며 직무유기 혐의를 적용, 입건한 뒤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교육계는 검찰의 수사 방식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검찰이 단순한 행정 절차상 오류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있다.”면서 “학생생활지도나 교사의 직무범위에 대해 사법적 잣대로만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보훈처서 허위 공문서 발급받아 정부와 845억 인쇄물 수의계약

    국가보훈처 공무원으로부터 받아낸 허위 공문서를 이용, 국가·공공기관과 수백억원대의 수의계약을 맺은 인쇄업자와 공무원 13명이 경찰에 무더기 적발됐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8일 인쇄업자 심모(51)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 혐의로 구속하고 공범인 류모(37)씨 등 인쇄업자 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또 심씨에게 허위 공문서를 발급해 준 이모(56) 서기관 등 보훈처 공무원 5명을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은 인쇄업자들과 공무원 사이에 금품이 오갔는지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심씨가 보훈처를 포함, 9개 기관 직원 18명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씨 등은 지난 2000년 1월부터 지난 4월 20일까지 12년 동안 공공기관과 수의계약이 가능한 국가 유공자 단체에서 운영하는 인쇄조합의 명의를 빌린 뒤 보훈처 공무원으로부터 허위공문서를 발부받아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등 45개 국가기관을 상대로 6100여건, 845억원 상당의 인쇄물 납품계약을 체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 결과 이들은 175억원의 부당이익을 챙겼다. 이씨는 경찰에서 “허위 증명서를 발부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대가성은 전혀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이영준·명희진기자 apple@seoul.co.kr
  • [서울시신청사 건축학 개론] “도서관·기록관 통합해야… 새로운 시민참여 모델로”

    [서울시신청사 건축학 개론] “도서관·기록관 통합해야… 새로운 시민참여 모델로”

    새롭게 들어서는 서울시 대표 도서관은 옛 시청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총독부 경성부 청사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기록관리 전문가인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장은 25일 인터뷰에서 서울도서관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서울도서관이 단순한 도서관에 그치지 않고 기록관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도서관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제 지배를 상징하는 옛 청사가 도서관으로 환골탈태하고, 거기에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광장과 공존한다는 게 우선 반갑다. 건설적인 제언을 한다면 책뿐만 아니라 서울시가 생산한 각종 공문서 등 다양한 정보를 시민들과 공유하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쉽게 말해 도서관과 기록관을 결합하는 것이다. →서울시기록관과 관련해 서울시에 자문을 많이 하는데. -개인적으론 서울시기록관, 그러니까 정보소통센터를 서울도서관과 한 공간에 통합시켰으면 좋겠다. 시민들로서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는 게 중요하다. 그 정보가 책인지 공문서인지 구별은 중요한 게 아니다. 최근 학계에선 ‘열린 도서관’(Open library) 논의가 활발하다. 예전에 도서관이 조용히 공부만 하는 공간이었다면 열린 도서관에선 시민들이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경우에 따라선 공연도 한다. 서울도서관이 정보와 토론과 문화를 한데 아우르는 왁자지껄한 공간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정치’도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해외에선 도서관과 기록관을 어떻게 결합하나. -캐나다 같은 경우는 이미 국립도서관과 국립기록관을 통합시켰다. 도서관과 기록관이 별개 조직으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영국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도서관과 기록관에 박물관까지 결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국회도서관에 국회기록보존소를 두고 있지만 아직 업무를 별개로 처리하는 실정이다. 서울시에서도 도서관을 중심에 놓고 기록관과 광장을 단계적으로 융합시킨다면 새로운 시민참여 모델이 될 수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위조여권·밀항·잠적… 뺑소니는 ‘잡범’ 수준

    위조여권·밀항·잠적… 뺑소니는 ‘잡범’ 수준

    “비행기로, 어선으로…” 사회 유력 인사들의 파렴치한 해외 도피 행각이 ‘잡범’ 수준을 뺨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발한 도피 행각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 과정에서 뒷배에 든든한 실세들이 있는지에 따라 해외 도피 성패가 판가름 나기도 해 보는 이들을 씁쓸하게 한다.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중국 밀항 시도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은 예전 사례가 입증하고 있다. 민종기 당시 충남 당진군수는 2010년 4월 24일 인천공항에서 중국 칭다오로 출국하려다가 달아났다. 위조 여권이 발각돼서다. 여권은 중국 전문 위조단에 900만원을 주고 위조했다. 민 전 군수는 건설업자에게 인허가 특혜를 베풀면서 별장을 뇌물로 받고 경기 용인시 70평대 아파트의 분양 대금 12억 2000만원을 대납시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해외로 도주하려 했다. 출국금지 상태가 아니었던 내연관계의 여직원만 출국에 성공했다. 민 전 군수는 수도권 모텔에 숨어 지내다 도주 5일 만에 발각됐다. 검찰 수사관들이 뒤쫓자 시속 200㎞로 고속도로 등을 40㎞쯤 질주하다 붙잡혔다. 민 전 군수는 지난해 7월 뇌물 수수 및 공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 8년에 벌금 5억원, 추징금 1억 8000만원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고원준 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도 김찬경 회장처럼 배편으로 해외로 도피했다. 횡령죄로 구속됐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심 선고를 앞둔 2004년 12월에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인이 일본인이어서 일본행을 택했다. 고 전 회장은 6년 가까이 일본 도쿄에서 숨어 지내다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2010년 4월 검찰에 자수했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마무리하겠다.”고 국제전화로 검찰에 연락해 일본 도피설이 확인됐다. 징역 6년에 추징금 10억원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고 전 회장은 강원 정선 카지노에서 도박을 일삼다가 채권자들의 도박 빚 독촉이 심해지면서 상공회의소와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던 ㈜한주 자금 수십억원에 손을 대 나락의 길로 빠졌다. 한주에서 포상금 5000만원을 내걸었다. 국회의원까지 지낸 울산을 대표하는 정치인, 기업인으로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가 구속 14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난 것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권력 실세의 도움 등으로 국외 도피가 쉽게 이뤄진 경우도 있다.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비자금을 관리해온 이동조 제이엔테크 회장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양아들’로 불리는 정용욱씨 모두 해외 도피에 성공해 여전히 외국을 활보하고 있다. 지금은 박 전 차관과 최 전 위원장이 구속됐지만 이들이 잘나갈 때 두 사람은 해외로 도피했다. 정씨는 지난해 말 수사망이 좁혀져 오고 있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출국금지 조치 전에 해외로 달아나 아직도 귀국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은 도피처인 중국에서 박 전 차관이 구속되기 직전까지 박 전 차관과 통화를 계속한 사실이 드러나 실세를 등에 업은 도피자의 자유로운 행보를 엿보게 했다. ‘함바’ 비리 사건과 관련해 브로커 유상봉씨로부터 뇌물을 받은 박기륜 전 경기경찰청 2차장은 2010년 12월 검찰이 출국금지를 내리지 않은 틈을 타 태국으로 도주했었다. 수사기관 고위 공직자의 정보력을 십분 발휘했다. 대전 이천열·울산 박정훈기자 sky@seoul.co.kr
  • 국적세탁 외국인 18명 검거

    인천지검 외사부는 7일 다른 사람의 인적사항을 도용해 출입국하거나 적법 체류자 또는 한국 국적자인 것처럼 신분 세탁을 시도한 외국인 12명을 공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외국인 A모(45·여)는 국내 체류 중이던 2003년 5월 남편과 공모하여 살인죄를 저질러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강제 출국된 뒤 2010년 11월 중국 현지 브로커를 통해 ‘CUI HAIYAN’이라는 중국인의 인적사항을 도용,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아 국내에 입국해 버젓이 국내에서 생활해 왔다. 역으로 내국인이 외국인으로 신분 세탁한 유형도 있다. 고모(62세)씨는 2009년 12월 관세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중국으로 밀항해 불법 체류하다 중국인 인적사항을 도용해 비자를 발급받은 뒤 지난해 12월 국내 입국을 시도하다 적발됐다. 인천지검 관계자는 “중국 호구부(戶口簿)가 전산화돼 있지 않아 신분 세탁이 횡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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