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애인의 재활과 사회통합
4월은 열아홉번째 맞는 ‘장애인의 달’이다.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환기시키고,이들을 위해서 실시해 온 국가정책과 제도를 점검하고 평가하는계기가 되는 달이기도 하다.
1981년 유엔은 ‘완전 참여와 평등’의 주제 아래 ‘세계장애인의 해’를선언했다.장애인의 인권존중과 사회통합을 겨냥한 정책적 함의를 지닌 선언이었으며,장애인도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생활과 사회발전에 완전히 동참할수 있어야 하고,사회적·경제적 발전의 결과로 이룩된 생활조건의 향상 역시 장애인들에게 평등하게 배분돼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장애인들이 충분히 사회에 통합될수 있도록 이들의 사회적 적응을 도와야 하고 재활을 통해서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실천강령도 포함됐다.
그간 우리나라도 정부차원에서 장애인의 복지향상과 재활 및 직업을 통한사회통합을 위해서 꾸준히 정책적 관심과 배려를 해왔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서는 상당히 개선되고 향상된 결과를 낳고 있다.그 가운데서도 1991년부터실시되기 시작한 ‘장애인 의무고용제’와 ‘장애인 고용촉진공단’의 출범은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위한 가장 대표적인 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국민의식과 관행,제도적 측면에서 장애인의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숱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이들 요소의 제거야말로사회통합을 위한 필수조건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현재 100만명을 넘는 장애인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으며,장애 발생의 88%가 각종 사고와 재해 등 후천적 원인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에는 동질적이고 평균된 보편성의 인간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성향이 강하게 내재돼 있어 이질적인 개성을 지니고 있는 장애인들을비가치화하고 멸시와 편견의 눈으로 보는 경향이 일반화돼 있다해도 과언이아니다.이러한 부정적인 멸시와 편견의식은 하루빨리 불식돼야 한다.그리고이들을 이질성과 특유의 잠재력을 지닌 개성있는 인간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의식전환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아울러 장애인 가족과 장애인 스스로도 장애 사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낙심이나 비관할 것 없이 자기 나름대로 창조적인 발전책을 모색하는 긍정적인태도를 가져야 한다.긍정적인 태도야말로 자신을 재사회화(再社會化)하여 적응능력을 높여주는 길이며,사회통합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다.
장애인을 사회에 연결해 통합을 촉진시키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주택,공공시설,교통수단 등 공간구조적,물리적 환경의 조성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지금껏 계획과 투자면에서 미흡했고,또한 이들의 생활환경과 관련된 대부분의법률이 의무규정이 아닌 선언적 규정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잠재능력의 일부가 결손되어 있는 장애인의 경우,잔존 능력의 개발과 촉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알맞은 특수교육이 필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직업 재활능력을 높이고 사회적 참여와 통합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데도 이를 실시하기 위한 특수학교의 수용능력은 크게 부족하다.
또한 시설과 설비 및 실습자료비 부족,그리고 전문적 기술지도교사의 확보난 등으로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보편화돼 있는 개별화(個別化)와 최적화(最適化)의 교육방법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회통합의 핵심적 제도인 장애인 의무고용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 부담금을 납부하고 있는 점이다.최근까지의 장애인고용실태를 살펴보면,공공기관과 민간기업체 할 것 없이 법적 고용률 2%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용의무사업체의 장애인 고용률은 0.46%에 불과하고,정부 및 공공기관 1.15%,정부투자기관 0.79%,정부출연기관 1.27%이다.솔선수범해야 할 정부와공공기관마저 의무고용비율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장애인들을 크게실망시키고 있다.
장애인 사회통합의 최선의 길은 재활과 직업교육을 통해서 정상인과 동일한 자격으로 스스럼없이 사회에 진출하여 취업하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능력있는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지역별로 정부출연의 보호작업장(Samhall)을 마련해 취업기회를 극대화하고,제품의 유통까지도도와주고 있는 스웨덴의 장애인 통합정책은 오늘의 한국 장애인정책에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文石南 전남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