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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을 파는 착한콘서트’ 오는 8일 개최..이승철-백청강 등 재능기부

    ‘희망을 파는 착한콘서트’ 오는 8일 개최..이승철-백청강 등 재능기부

    희망을 파는 사람들과 서울경기케이블 TV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착한콘서트가 함께 만들어가는 ‘2016 희망을 파는 착한콘서트’가 12월 8일 저녁 6시 30분 일지아트홀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은 50년간 장애인을 돌보며 봉사해오신 소아마비 장애인 희동 할아버지와 7명의 중증 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집을 수리하고 전동 휠체어를 마련하기 위한 자선콘서트다. 이번 착한콘서트는 희망을 파는 사람들 대표인 가수 채환과 길건이 공동 MC로 호흡을 맞추고 유리상자 박승화, 백청강, 서지안, 설하윤, 레이지본, 불독, 더히든, Ten years gone, 큐티엘, 박도윤, 분리수거, 솔티, 이승철, 이현, 윤오, 안젤리나다닐로바, 에이디이, 비오케이, 임영웅, 힐링소년소녀합창단 등 많은 가수들의 재능기부 참여와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엔터테이너모임 작자들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뿐만 아니라 2014년과 2015년 착한콘서트를 함께한 폐지 줍는 지적장애우 병우형제와 소아암 어린이를 비롯해 우리 주변 소외된 홀몸장애인 50여명을 초대하여 희망을 노래하며 따뜻한 시간을 함께 만들어갈 예정이다. 가수 채환(희망을 파는 사람들 대표)은 “착한콘서트를 계기로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전해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희망을 파는 사람들은 구순구개열 및 화상환자 무료 수술지원 사업, 홀몸노인 쉼터 ‘희파랑’ 운영, 저소득층 무료 건강진료 봉사, 홀몸노인 희망곰탕 나눔사업 등 지속적인 활동으로 따뜻한 나눔 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수요미식회 육개장 맛집 3곳 어디? “추억을 먹는 느낌”

    수요미식회 육개장 맛집 3곳 어디? “추억을 먹는 느낌”

    tvN ‘수요미식회’ 23일 방송에는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육개장 맛집이 소개됐다. 문 닫기 전에 가봐야 할 가게 중 첫 번째로 선정된 집은 2대를 이어온 60년 전통의 육개장 집 다동 부민옥이었다. 황교익은 선짓국 양곰탕 각종 탕 종류가 많아서 해장하러 가기에 좋은 가게라고 했다. 권인하는 “한쪽 방 안에서 한잔을 하면서 육개장을 먹는데 추억을 먹기 위해서 온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산들은 60년 전통임에도 20대가 먹어도 손색이 없다면서 고기가 맛이 있다고 했다. 권인하는 조금 짠 맛이 단점이라고 지적을 했다. 신동엽 역시 식었을 때 강하게 느껴지는 짠맛이 있다고 했다. 두 번째 가게는 대구 토박이들이 사랑하는 육개장 집 대구 진골목식당. 1980년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이 가게는 깔끔한 맛으로 대구 토박이들이 좋아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칼칼하면서도 깊은 맛으로 일반적인 대구식 육개장과 달리 이 가게의 육개장은 무가 없이 오로지 파만 들어가 있는 게 특징이다. 이현우는 스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이 집의 호박전은 호박향이 퍼지면서 아삭한 느낌이 감자전을 생각하게 한다고. 황교익은 한정식에서 호박전을 내놓으면 맛이 없는 이유가 호박 분말로 만들기 때문이라면서 이런 집에서는 진짜 호박을 일일이 긁어서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가게라고 칭찬했다. 홍신애는 한우 양지를 쓰기 때문에 오래 끓이면서 흩어져서 고기가 적게 느껴질 수 있다고 했다. 세 번째 가게는 진한 사골 국물 맛을 느낄 수 있는 육개장 집 강남구 역삼동 동경 전통육개장. 빨간 국물과 두툼한 지단이 올라간 30년 전통의 육개장 집으로 단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직장인이나 술 마신 사람들에게 유명한 집이기도 하다. 국물의 개운함을 위해 지단 형식으로 계란을 올리게 됐다. 홍신애는 보통 생각하는 육개장의 이미지에 90%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권인하는 육개장 칼국수의 면이 탱탱하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다면서 아쉬움이라고 했다. 홍신애는 제육볶음이 진짜 맛이 있다면서 돼지고기가 양념을 드레스처럼 입었다고 했다. 육개장과 제육볶음이 찰떡 궁합이라고 했다. 황교익은 육개장의 이름의 유래에 대해 “개장국에 넣는 고기를 개가 아닌 소고기로 바꾸면서 앞에 고기 육 자를 붙이게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수요미식회 곰탕편’ 류수영, 박하선 언급 “직접 빵 만들어주면 좋아해”

    ‘수요미식회 곰탕편’ 류수영, 박하선 언급 “직접 빵 만들어주면 좋아해”

    ‘수요미식회 곰탕 편’ 배우 류수영이 공개연인 박하선을 언급했다. 16일 방송된 tvN ‘수요미식회’의 곰탕 편’에서는 개그맨 남희석, 배우 류수영, 가수 화요비가 출연했다. 이날 류수영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빵을 만든다”며 “반죽이 잘 되면 아기 엉덩이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그 느낌이 좋다. 반죽을 발효시키고 오븐에 구워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 그것 자체가 힐링이 된다”고 밝혔다. 이어 류수영은 “강력분을 사면 식빵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고, 박력분을 사면 과자 만드는 법이 나와 있어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어지간해서 다 맛있다. 요리를 따로 배운 적은 없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특히 류수영은 공개연애 중인 연인 박하선에 대해 묻자 “만들어서 가져다주면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말로는 다 못한 가슴 속 응어리 노랫말로 읊다

    말로는 다 못한 가슴 속 응어리 노랫말로 읊다

    “오늘도 거리엔 사람들이 모이고 소리 모아 외치고 또 둘러싼 경찰들 그들을 바라보는 높은 곳에 그분 무슨 생각하실까 생각이나 할까. 권력이란 무상한 것 무섭다가 우스운 것 똥오줌 못 가리는 것 달콤하다 쓰디쓴 것 날아가다 기어가는 것 매우 외로운 것 늙어 숨어 사는 것 끝이 초라한 것.” ●‘시대 노래꾼’ 안치환 무료 음원 공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한 노래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고 있다. 시대의 노래꾼 안치환이 국민의 분노와 열망을 담아낸 디지털 싱글 ‘권력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17일 안치환닷컴(www.anchihwan.com) 등에서 무료 공개한다. 안치환은 “정의로운 세상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허망하게 보내 버리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 노래를 발표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역사를 바꾸는 길에 음악으로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길가에 버려지다’ 두 번째 버전 선봬 오는 18일에는 국민 위로곡 ‘길가에 버려지다’의 두 번째 버전이 나온다. 지난 11일 가수 이승환과 이효리, 전인권이 함께 부른 첫 번째 버전이 공개된 바 있다. 두 번째 버전에는 장필순, 한동준, 김광진, 크라잉넛을 비롯한 37개 팀 뮤지션들이 참여한다. 이번 사태로 상처받은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싱어송라이터 이규호가 작사·작곡하고 이승환이 프로듀싱했으며 기타리스트 이상순,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등이 재능기부로 제작에 참여했다. 이승환은 지난 12일 100만명이 운집한 촛불집회 문화제에서 “내 몸에 날개가 돋아서 무너지는 이 땅을 지탱할 수 있길. 내 의지에 날개가 돋아서 정의의 비상구라도 찾을 수 있길”이라고 열창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민중가수 연영석 ‘하야해’로 직격탄 민중가수 연영석은 지난 7일 나훈아의 ‘18세 순이’를 개사한 ‘하야해’를 공개했다. 그는 이 노래에서 “누가 이런 나라를 원했었나요, 이젠 그만해 청와대 방빼”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가수 모세는 ‘곰탕’, ‘프라다 구두’, ‘말’ 등 은유적 표현을 담아 이번 사태를 풍자한 발라드 ‘SS’를 만들었다. 이 밖에도 조PD·윤일상의 ‘시대유감 2016’, 래퍼 아웃사이더와 배우 윤현민의 ‘카악 퉤’, 래퍼 디템포의 ‘우주의 기운’, 래퍼 제리케이의 ‘HA-YA-HEY’(하야해) 등 이번 사태를 비판·풍자한 노래가 줄을 잇고 있다. 강태규 대중음악 평론가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움직임에 반응하는 일종의 문화 운동”이라고 평가하며 “삶의 방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등이 바뀌면서 대중음악,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개그콘서트서 쏟아진 ‘최순실 게이트’ 풍자

    개그콘서트서 쏟아진 ‘최순실 게이트’ 풍자

    KBS2 예능 프로그램 ‘개그콘서트’가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을 풍자하고 나섰다. 지난 6일 방송된 개그콘서트 ‘세젤예’ 코너에서 이수지는 흰 셔츠 차림에 선글라스를 머리에 꽂는 등 최순실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수지는 식당 주인인 유민상의 입에서 태블릿 PC, 독일, 실세, 이대, 말 등 최순실과 관련된 단어가 나올 때마다 기겁하며 “나 그 사람 아니에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클러치 백에서 태블릿PC를 꺼내다가 당황한 이수지는 식당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신발 한 켤레가 벗겨지는 모습을 연출해 마지막까지 최순실을 떠올리게 했다. ‘가족같은’ 코너에서는 박휘순이 송영길이 조사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아버지 역할인 김준호에게 손을 내밀며 “영길이 곰탕 사주게 돈을 달라”고 말하는가 하면 “요즘 조사받을 때 곰탕 먹는 게 유행이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1대1’ 코너에서도 최순실 관련 풍자는 이어졌다. 래퍼로 등장한 김태원은 “모든 걸 다 밝혀라, 최순실”이라고 랩을 하고는 MC유민상에게 “이거, 제가 작성한 가사들인데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유민상이 “왜 이걸 나한테 봐달라고 하냐”고 묻자 김태원은 “원래 친한 사람들끼리 봐주고 고쳐주고 그러는 거라더라”라며 최순실 게이트를 풍자했다. 사진·영상=개그콘서트/네이버tv캐스트 영상팀 seoultv@seoul.co.kr
  •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비문 사라져…네티즌 “연설문 담당자 곰탕 먹고 있어서”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비문 사라져…네티즌 “연설문 담당자 곰탕 먹고 있어서”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에 대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가운데, 담화문에서 박 대통령이 자주 썼던 비문이 사라져 네티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대국민담화를 통해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히 임할 각오이며 특별 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또 박 대통령은 “이번 최순실씨 관련 사건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실망과 염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정을 맡겨주신 국민 여러분께 돌이키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드려서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고 밀했다.이날 네티즌들은 온라인 상에서 “박 대통령이 그간 자주 써온 ‘우주의 기운’,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 등의 비문이 사라졌다”며 “담화문 담당자가 교체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네이버 아이디 ‘k903****’는 “대통령 되서 이룬 거라고는 4년만에 비문을 안쓰게 되어따!!”라는 댓글을 달았다. 같은 포털 사이트의 ‘geni****’는 “연설문 담당자는 곰탕 먹고 있으니 없을 수밖에”라고, ‘toon****’는 “대국민당황문!! 대지의 기운과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라고 비꼬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쭈글쭈글 쌍꺼풀이 진짜 최순실” 최순실 대역 논란 불거져

    “쭈글쭈글 쌍꺼풀이 진짜 최순실” 최순실 대역 논란 불거져

    청와대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 대역 루머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1일 긴급체포 후 서울구치소로 이송되는 최순실 씨의 모습이 31일 검찰 출두 때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는 것. 지난 2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하루만에 최순실이 바뀌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에는 구치소로 이송된 최씨의 모습과 검찰 출두 당시 사진을 각각 첨부하며 두 사람이 다른 인물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해당 누리꾼은 “탈모처럼 보이게 하려고 머리 조금씩 묶고 실핀 꽂은거 들통났다”며 “콧대, 쌍커풀 진짜 많이 다름. 최순실 눈 옆 콧등 거의 없는데 콧대가 뭐 하루만에 저렇게 높아짐? 저 두터운 손으로 가린 얇은 쭈글쭈글 쌍커플이 진짜 최순실”이라고 말했다. 검찰이 최씨의 조사 장면을 녹화하지 않았다는 보도는 이러한 의혹을 더욱 키우고 있다. 검찰은 최순실씨를 ‘영상녹화실’로 데려가 조사했지만, 영상은 녹화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지만,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피의자 조사 과정을 녹화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어서 위법사항은 아니라고 전해진다. 최순실씨가 검찰 출두 첫날 곰탕으로 식사했던 점을 비꼬면서 ‘최순실 곰탕 다이어트 효과’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오고 있다. 한편 검찰에 대한 불신으로 생긴 대역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대역을 썼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세월호 기관장으로 알려진 신모씨가 다른 사진에선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는데 머리 길이나 귀 모양 등이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실제로 다른 사람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채동욱 전 검찰총장 “검찰 수사 쉽지 않을 것”…“보통 아닌” 최순실, 곰탕·과자·파스 요구

    채동욱 전 검찰총장 “검찰 수사 쉽지 않을 것”…“보통 아닌” 최순실, 곰탕·과자·파스 요구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3년 2개월 만에 언론에 등장했다. 채 전 총장은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후 변호사 등록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지내다 2일 한겨레TV에 출연했다. 채 전 총장은 “눈치 없이 법대로 하다가 잘렸다. 검찰의 최순실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3일 밤 최씨에 대한 구속 여부가 결정되는 가운데 최씨가 검찰 조사 도중 파스를 붙이고 과자까지 먹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날 중앙일보에 따르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최순실은 ‘대통령의 비선실세가 맞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라고 부인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최순실은 100% 혐의를 부인했다. 질문마다 ‘아니다’ ‘모른다’고만 하니 수사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검찰 관계자는 최순실 태도에 대해 “듣던 대로 보통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매일경제신문은 최씨가 검찰 출두 과정에서 벌어진 소동 때문에 어깨 통증을 호소했고, 쉬는 시간에 변호인이 준비해 온 파스를 어깨에 붙였다고 보도했다. 또 심장이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평소 먹던 약을 복용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심리적 안정이 찾아올 때면 조사 도중 간간이 과자를 먹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현장 블로그]“인터뷰는 독일 아닌 덴마크” “곰탕·설렁탕 시나리오설”…‘순실의 진실’ 찾아나선 네티즌 수사대

    [현장 블로그]“인터뷰는 독일 아닌 덴마크” “곰탕·설렁탕 시나리오설”…‘순실의 진실’ 찾아나선 네티즌 수사대

    “최순실씨 인터뷰는 사실 독일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덴마크다.”(트위터 사용자 @reid******) “최씨가 검찰에서 시켜 먹은 곰탕은 외부 조력자들에게 보내는 신호다.”(네티즌 A씨) ●“檢·言 못 믿어” 불신이 낳은 현상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소위 ‘네티즌 수사대’들이 각종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부는 확인 불가능한 게 대부분인데요. 취재 중 만난 한 네티즌은 믿을 수 없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이 실재했다는 것이 밝혀진 뒤로 검찰이나 언론이 내놓는 사실조차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불신이 낳은 현상이라는 의미죠. 지난달 28일 트위터 사용자 ‘@reid******’는 세계일보가 독일 헤센주의 한 호텔에서 진행했다는 최씨 단독 인터뷰가 덴마크에서 진행된 것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인터뷰 사진의 왼쪽 아래에 있는 콘센트가 독일 것이 아니라 덴마크 것과 같다고 했죠. 독일의 콘센트와 전화선 설치 규정은 바닥에서 떨어져 있는데, 사진 속의 것은 바닥에 붙어 있다는 의혹도 나왔습니다. ●미르 압수수색 ‘보여주기식’ 지적 지난달 26일 검찰의 미르재단 압수수색 사진은 ‘보여 주기식 수사’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검찰 수사관 2명이 압수품을 담은 6개의 큰 박스를 세로로 포개 들고 나왔는데 빈 박스가 아니라면 운반할 수 없는 무게라는 겁니다. 한 네티즌은 지난 6월 교체된 국가정보원(국정원)의 새 상징에도 최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청룡과 백호가 횃불을 감싸는 문양인데, 최씨가 실소유주로 알려진 재단법인 미르의 상징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국정원 측은 “용맹과 진취의 상징인 청룡과 백호를 엠블럼에 담았다. 미르재단과는 상관이 없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래도 비밀 정보를 취급하는 기관과 청룡·백호의 연결고리는 어색하다는 네티즌들의 반박도 이어졌습니다. 거리 사진을 보여 주는 ‘다음 로드뷰’에 최씨가 소유한 빌딩 주소를 검색해 최씨로 추정되는 여성의 모습을 찾아낸 네티즌도 화제에 올랐습니다. 유머 정도로 보이는 의혹도 있었습니다. 지난달 31일 검찰에 출두한 최씨가 곰탕을 먹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곰탕 시나리오, 설렁탕 시나리오, 추어탕 시나리오 등을 미리 짜 놓고 ‘곰탕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라’는 신호를 외부 조력자에게 보낸 것”이라고 설명한 글입니다. ●“해석장애 상태… 해결책은 진실 규명”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민들이 초유의 사건을 겪으면서 정보가 매일 쏟아지자 이를 해석할 수 없는 ‘해석 장애’ 상태에 빠진 것 같다”고 진단했습니다. 청와대발 신뢰 붕괴가 이처럼 ‘뒤집어 보기’, ‘말한 대로 듣지 말기’의 일상화라는 국민적, 국가적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네티즌들의 의혹 제기는 당분간 지속될 겁니다. 해결 방법요?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진실 규명과 청와대의 진정한 사과’라는 정공법밖에 없지 않을까요. 강신 기자 xin@seoul.co.kr [정정보도문] “세계일보, 최순실 인터뷰는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본 신문은 지난 10월 29일자 홈페이지 사회면 초기화면에 “최순실 인터뷰 장소 독일 아니다, 의혹 제기” 기사를 정치면에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세계일보의 최순실 인터뷰’는 독일 헤센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져, 이를 바로잡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오는 5일 답사는 ‘인권을 생각하며 걷는 남산둘레길’을 주제로 이필용·손안나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중에서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것들은 ‘위기의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관리주체가 없어서 보전이 어렵거나 적극적인 수리·보수가 필요할 경우 미래유산 보존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한다. 이 경우 소유자는 적극적인 개방을 통해 시민들과 유산의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최근 문화지평이 답사하는 과정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성우이용원의 이남열 대표이발사는 건물이 노후해 수리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건물은 실제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고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줄줄 샌다고 한다. 또 다른 서울미래유산인 공씨책방의 경우 건물주가 퇴거를 요청하면서 미래유산으로서의 공유가치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이들 모두 위기의 미래유산인 셈이지만 먼저 미래유산 보존위원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서울 남대문부터 광교까지 뻗은 남대문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한국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1번지였다. 13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경성 월스트리트를 가다’를 주제로 지난달 15일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이 해설사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두고 해설하는 한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울미래유산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하늘이 맑은 데다 도심 한복판 평지를 걷는 편안한 코스라서 다른 때보다 많은 40명 가까운 인원이 답사에 참여했다. 이날 참석한 선현호 아시아나국제특허법률사무소 관리부장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약식 30여개를 싸와 답사팀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약식은 선씨의 부인이자 이바지 음식 전문가인 강기숙씨가 아침에 손수 만들어 보낸 것이라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옆 작은 공원에서 답사팀은 모였다. 2008년 2월 10일 설날 연휴에 방화로 완전히 불타 버린 숭례문은 2013년 5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돼 일반에 공개됐다. 화재 전에는 도로 위에 섬처럼 서 있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공원화되면서 출입이 자유롭다. 문화재 관리의 소중함을 교훈으로 간직한 숭례문에서 이번 답사 여정이 시작됐다. 이 해설사는 “오늘 답사길은 시내 한복판이라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며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가로세로 동서남북형 도로와는 다르게 소공로처럼 대각선 도로와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남대문에서 소월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조금 오르면 남산육교 고가차도가 나온다. 1961년 말 만들어진 일반교량으로 오래된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남대문시장 안에는 은호식당이란 노포가 있다. 1932년 ‘은성옥’이란 상호로 문을 연 꼬리곰탕집이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 피란처에서도 임시로 문을 열었다가 휴전 후 지금 자리에 건물을 짓고 재개업했다. 현재 4대째인 정용식씨가 운영하고 있고 서소문, 여의도에 직영점이 있다. 같은 지역에서 84년 동안 운영되면서 남창동 일대의 시대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장소라는 이유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남대문시장 전체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414년 정부 임대시전으로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게 시장의 시초다. 종로 시전과 동대문 이현과 함께 남대문 칠패는 조선 내내 주요한 시장의 기능을 했다. 1608년(선조 41년)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되면서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911년 3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내부대신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정식 근대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해설사가 남대문시장 초입의 선혜청 표지석 앞에서 답사팀을 멈춰 세웠다. 17세기 초 조선시대 대동법 실시에 따라 대동미(米)·대동포(布)·대동전(錢) 출납을 관장한 관청이 있던 자리다. 쬐끔 과장해서 월스트리트는 이미 17세기 조선조부터 시작된 셈이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납세제도다. 벼농사가 어려운 산간지방이나 쌀 납부가 어려운 경우에는 베·무명(대동포), 돈(대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선혜청의 의미는 대동법 실시 이후 등장한 공납 대납업자들이 산업자본가로 성장해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는 데 있다. 이렇듯 돈이 흘러가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운송활동도 증대하면서 교환경제가 발달하게 됐다. 서울역이 남대문시장 인근에 위치한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이유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남대문 2층 한옥 상가벽돌 쌓아 올린 한·양 절충식 건물 남대문 지하보도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정확한 준공 시기는 알 수 없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대문 4가 대로변에는 생소하게 한옥 기와를 이고 선 2층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바로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다. 올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62호로 등록됐다. 1910년대 만들어진 벽돌조 한양(韓洋) 절충식 건물로 전통적인 단층 목조 건축 양식에서 벗어난 벽돌조란 특징을 갖는다. 업무상 중국 출장이 잦은 김유림(40·넥스나인 대표)씨는 “중국 VIP 및 비즈니스 고객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남대문 일대 관광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동안 흔하게 알려진 것만 설명하는 데 그쳤다”며 “이번 답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을 중국인들에게 보다 풍성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 해설사는 답사팀을 북창동 먹자골목을 통과해 플라자호텔 쪽으로 이끌었다. 길 건너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때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한창이다. 수문장 교대식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국립극장장을 지낸 허규씨가 병상에서 아이디어를 내 관광 콘텐츠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즉 역사에 이런 수문장 교대식은 없었다. 명동 나석주 열사 동상 나 열사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곳 이 해설사는 “대한문 앞 도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근대적 도시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며 “환구단을 거쳐 소공로를 뚫어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개설했고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 역시 구체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가 사회 구성원 간 소통의 부재라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 해설사는 “도로가 넓어지면 교통은 편리해지지만 사람이나 차가 빠르게 이동하면서 교류가 어려워지게 된다”며 “이는 도로의 발달이 사람보다 자동차에 우선권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도로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편리하게 걸어가면서 정보를 얻고 교류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야 사람 간 교류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환구단 일대 호텔가일제강점기 경성 대표적 상업지역 눈을 조선호텔 쪽으로 돌리자 사적 157호 환구단이 나타났다. 2007년 수유리 그린파크호텔 재개발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환구단 정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이전 복원된 사연을 갖고 있다. 환구단 일대는 지금도 각종 호텔이 빼곡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경성을 찾는 외국인이 묵는 호텔이 많았다.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경성의 대표적인 상업지역이었던 셈이다. 백화점과 양판점이 들어서면서 막대한 시장 자금이 돌자 자연스레 금융시설도 들어섰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인 SC제일은행에는 조선저축은행, 한국은행 소공별관 자리는 조선상업은행, 롯데 애비뉴엘에는 조선신탁주식회사가 있었다. 그 바로 옆 롯데백화점은 식산은행, 길 건너편에는 제일은행, 외환은행 자리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다. 이 밖에도 시청 을지로별관에는 제국생명, 신한은행 광교빌딩은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에는 동일은행 등이 있었다. 우리은행 종로지점은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으로, ‘1924년 8월에 문을 열었다’는 동판이 벽에 부착돼 있다. 이렇게 금융회사가 밀집해 있었던 역사로 인해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거리다. 한국은행 앞 사거리부터 을지로입구역까지 남대문로 일대를 아우른다. 한편 소공로는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을 대각선으로 잇는 짧은 도로였지만 모던보이들이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이 즐비했다. 소공로 중간쯤 있는 서울미래유산 해창양복점은 1945년 문을 열었다. 부산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창업주 이용수씨가 소공동으로 이전 운영하다가 1958년 아들 이순신씨에게 가업을 넘겼다. 1995년 재단사로 일하던 한창남씨가 경영에 참여한 이후 2004년 완전히 인수했다. 지금은 일대가 부영그룹에 의해 개발되면서 조선호텔 건너편으로 이전했다. 소공로 해창양복점 거리모던보이들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하나은행 옆 골목 초입에는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있다. 이곳은 1926년 12월 나 열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다. 답사단은 광교 위에서 이번 답사를 정리했다. 고등학생인 두 딸과 함께 참석한 이은순씨는 “오늘 답사를 하면서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 왔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새로이 알게 됐다”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따뜻한 사람들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졌다”고 후기를 전했다. 이 해설사는 “이번 답사 지역은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여년간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들 기억 속에 내재해 있는 대표적인 곳”이라며 “일제 치하 경성 금융가, 도로 확장이 주는 사람들 사이 소통의 문제를 엮어서 진행해 봤다”고 끝맺음을 했다. 을지로입구에서 답사를 마무리한 팀 일부는 청계천을 따라 을지로4가까지 걸었다. 그곳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인 춘천막국수집에 들러 막국수와 돼지고기 보쌈을 나눠 먹으며 훈훈하게 답사를 정리했다.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연세대 공주전, 뜨거운 반응…네티즌 “필력 장난 아냐, 국어책에 실려야”

    연세대 공주전, 뜨거운 반응…네티즌 “필력 장난 아냐, 국어책에 실려야”

    박근혜 대통령과 이번 정부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의 이야기를 다룬 풍자 소설 ‘공주전’에 네티즌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27일 연세대학교 대나무 숲 페이스북에 올라온 ‘공주전’은 공개된 지 4일 만에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온라인상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공주전을 읽은 네티즌들은 “필력이 진짜 엄청나더라. 대충 줄거리만 보고 흥미진진하여 공주전 찾아봄. 진짜 잘씀. 필력이 장난 아니다”(0904****) 등의 반응을 보였다. 또 “전쟁 후 민심 담았던 박씨전이 생각납니다. 공주전도 훗날 국어책에 실리면 좋겠네요. 이 나라가 망하지 않고 정의로운 나라로 존속이 된다면 말이에요”(vlft****), “정치가 드라마보다 막장이니 뉴스가 드라마보다 재미지다. 이게 나라냐?(shko****)”라는 댓글도 있었다. 다음은 공주전 원문 공주전 옛날 헬-조선에 닭씨 성을 가진 공주가 살았는데 닭과 비슷한 지력을 가졌다. 그 자태가 매우 고결하여 저잣거리에 흔히 파는 어묵을 먹는 방법을 몰라 먹지 못했고,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백성들이 악수를 청하면 겸허히 물러서서 손을 뒤로 빼는 등 공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았다. 공주가 처신을 잘못할 때면 공주를 숭배하는 자들이 변호하기를, “공주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독재에 여념이 없어, 공주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라고 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애정을 담아 공주에게 ‘그네겅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모친을 잃은 공주가 스물셋이 되던 해 신분 세탁의 기회를 엿보던 무당 최씨가 공주를 뵙기를 청했다. 무당이 말하기를, “소인이 돌아가신 중전마마에 빙의하는 미천한 재주를 보여드릴 수 있나이다.” 공주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그.. 그.. ‘빙위’라는 것이 나로 하여금 정신을 좀 차리게 만들고 또 그와 함께 이런 어떤 슬픈 마음 같은 것들을 굉장히 잘 가라앉히게 해가지고 그래서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참 좋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한다.” 번역기를 돌린 후에야 공주가 승낙했다는 것을 가까스로 이해한 무당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닭은 인제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하고 생각하였다. 무당이 공주의 모친 육씨의 성대모사를 하는 등 각종 재주를 시전하자 이에 홀닭 반한 공주는 그날부터 매일같이 무당을 불러들였다. 무당은 기뻐하며 청에 응했고 곧 공주를 등에 업고 날로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를 알게 된 공주의 아버지는 대로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색에 빠져 있던 중 날아온 탄환에 비명횡사하였다. 무당이 공주를 짐짓 위로하며 말하였다. “소인은 약간의 도술을 부릴 줄 알고, 공주마마께서는 유체로부터 이탈하는 화술을 지녔으니 힘을 합치면 새로운 세상(新天)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공주가 이를 듣고 과연 옳다 여겨 무당이 스스로 교주가 되어 이끄는 사람들을 돕는 데 열성과 국고를 아끼지 않았다. 무당에게는 시리라고 불리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재주나 간특함이 아비 못지않았다. 어느 날 무당이 딸을 불러 긴히 이르기를, “공주는 참으로 순수한 뇌를 지녀서 네가 보좌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라 위로하며 뒷일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무녀는 부친의 조언에 따라 공주에게 수제 가방을 선사하여 신임을 얻었고, 곧 서로를 언니, 동생이라 칭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공주는 최씨 무당을 기리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새누리(新天)’라 명명하고, 부친을 잃은 설움을 호소하여 세간 사람들의 동정을 꾀하였다. 새누리 무리는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의미에서 ‘개(開)’자를 써서 개누리라 불리며 공주를 수호하는 데 여념하였다. 하루는 공주의 근심하는 낯빛을 보고 무녀가 연유를 묻자 공주가 대답하기를, “지금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가 머리가 그렇게까지 막 좋은 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런 어떤 것들이 나를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근심하게 만들고 그게.. 그리고 연설문을 작성하는 법을 도통 모르겠으니 노오력을 해가지고 준비를 잘 하고 그러면 될 텐데 그게 또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나를 괴롭히는 것, 그게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무녀는 실성한 공주를 위로하는 한편 그 자리에서 즉시 연설문을 빨간펜으로 고쳐 공주에게 보였다. 학습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던 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무녀에게 이후에도 계속하여 자신을 도와 달라고 졸랐다. 무녀는 공주의 뛰어난 지적능력에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공주의 연설이나 토론은 물론, 의복과 표정을 정하는 것까지 돕기를 힘써 마지않았다. 공주는 무녀의 모든 가르침을 귀중한 수첩에 받아적었고 한 문장이면 될 것을 스무 문장으로 늘리는 기적에 가까운 화술을 선보였다. 공주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오하고 난해하여 전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밤새 토론하였으나 말씀의 진위를 반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한 신하가 감탄하며 그 비결을 묻자 공주가 대답하기를,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므로 누구나 유체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 라 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앞다투어 우주의 기운을 얻은 공주의 화술을 번역하고자 힘썼고 공주에게 ‘수첩공주’ 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선사하였다. 공주가 보기 드물게 #순실한마음 을 지녀 무녀를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빨간펜 세우기와 책상 내려치기밖에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공주가 푸른 기와집으로 거처를 옮긴 지 이 년이 흘렀을 때 여객선이 침몰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무녀는 덕국(德國)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시차로 인해 아직 자고 있을 무녀가 깨기를 기다리던 공주는 대책을 마련하는 대신 끊임없이 빨간펜을 세우는 기술을 갈고 닦는 근면함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구조 작업을 의뭉스럽게 방해하여 수많은 음모론의 탄생에 크게 기여하였다. 민심을 달래기 위해 공주는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겠다는 전무후무한 비책을 내놓아 뭇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는 기록이 있다. 평소 간을 잘 보기로 명성이 자자한 안(安)이라는 자가 이를 알았더라면 한참 간을 본 끝에 이렇게 평했을 것이다. “이때 고심한 자는 공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수첩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루는 효심이 지극한 공주가 부친의 찬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역사서를 새로이 편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뜻 있는 많은 선비들과 학생들이 일어나 반대하였으나 공주는 망설이지 않고 이들을 모두 ‘혼이 비정상’ 이라 칭하는 신비한 예지력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감탄하자 공주가 단호히 이르기를,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렇게 해서 그런 기운이 오고 또 그런 마음을 그 기운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다라는 것을 내가 몹시 잘 알겠다” 라 하자 아무도 그 심오한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어느덧 공주가 무녀를 위해 여러 재단을 세우고 횡령한 국고가 수천억 원에 이르러 바야흐로 #순실의시대 가 도래하였다. 또한 부친의 뜻을 본받아 왜국과 굴욕적인 협상을 맺는가 하면 물대포를 가격하여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나아가 민심을 직접 읽고자 민간 통신수단을 친히 사찰하고 불만을 드러내는 자에게는 택배를 보내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때문에 사람들의 원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져 하늘을 찔렀으나 그때마다 놀랍게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열애설이 터져 공주는 늘 비난을 모면하였다. 공주가 학비를 반값으로 줄이겠다는 무녀의 공약을 받아적기는 했으나 지키지 않아서 나라의 젊은 학생들은 밤낮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쳐서 울부짖었다. 공약을 왜 지키지 않느냐는 힐난이 쏟아지자 공주는 “내가 말한 적 없다”라 단언하여 모든 것은 무녀가 말한 것이라는 진실을 은연중에 인정하였다. 보다 못해 공주를 따르는 새누리 무리 중 ‘킹’ 으로 불리는 자가 지친 학생들을 “고생도 좀 해 보고 빚도 있어봐야 한다” 라는 주옥같은 따스한 말로 위로하였다. 또한 전에 나라의 교육을 맡아보던 한 관리는 민중을 포유류인 개와 돼지에 빗댐으로써, 민중이 조류인 닭보다 지적으로 월등히 앞섬을 완곡하게 표현하려 하였으나 소통에 실패한 바 있다. 한편 무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으니 정이라고 했고 공주라 불리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정감록을 실현코자 하였다. 정은 말 타는 기수가 되고자 했으나 실력은 영 좋지 못하였다. 백날 닭을 잡고 굿을 해보아도 진척이 없자, 무녀는 고심 끝에 정에게 학사경고를 선사한 지도교수를 친히 찾아가 건물이 떠나가라 크게 호령하였다. “교수 같지도 않은 게.” 무녀가 전 지도교수를 쫓아내고 새로 앉힌 교수는 먼저 정의 안부를 묻고 시중을 들 학생을 몸소 구해주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또한 정이 비속어와 색다른 철자법이 난무하는 과제의 특이점을 인정받아 놀라운 학점을 받자 많은 학생들의 원한이 사무쳤다. 무녀와 그 딸은 세간의 눈총을 피해 덕국으로 잠적하였으나 곰탕과 김, 가루커피를 챙기는 대신 공주를 위해 작성한 수천 건의 문서를 흘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손(孫)씨 성을 가진 의로운 선비와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이를 알고 크게 놀라 특종으로 내보냈다. 세간 사람들이 공주와 최씨 일가의 농간에 대해 알고 경악하는 한편 의로운 선비들 및 사상 최초로 민심을 하나로 모은 공주의 깊은 뜻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이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병신년(丙申年) 모월 모일 모시에 이 글을 기록하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순실 곰탕 사랑…유럽 도피생활 중에도 인스턴트 ‘사골곰탕’

    최순실 곰탕 사랑…유럽 도피생활 중에도 인스턴트 ‘사골곰탕’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로 지목돼 국정 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60)씨의 ‘곰탕 사랑’에 1일 온라인 상에서 네티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씨는 지난 31일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다가 저녁 시간에 곰탕을 시켜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운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당초 검찰에 출석하면서 공황장애 등 건강이 좋지 않다고 밝혔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곰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것이다. 최씨는 유럽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에도 곰탕을 즐겨 먹은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달 20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최씨 모녀가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호텔 식당 안에 전기밥솥이 있었고 지하 창고 쓰레기봉투에 사골곰탕 봉투 2개, 김, 커피믹스 등 한국 음식의 포장지들이 들어 있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순실 긴급체포 “곰탕 먹고싶다”…네티즌 “靑에 보내는 암호같다”

    최순실 긴급체포 “곰탕 먹고싶다”…네티즌 “靑에 보내는 암호같다”

    ‘비선 실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60)씨가 서울중앙지검에서 약 11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1일 새벽 2시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로 이송됐다. 서울구치소는 서울중앙지검에서 부패 사건으로 수사를 받다 수감된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기업인 등 거물급 인사들이 거쳐 간 곳으로 유명해 속칭 ‘범털 집합소’라고 불린다. 검찰은 전날 밤 11시 57분 최 씨를 각종 혐의에 대해 일체 부인하여 증거를 없앨 염려가 있다며 긴급체포했다. 검찰은 “이미 국외로 도피한 사실이 있는 데다 주민등록상 주소에 거주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국내 일정한 거소가 없어 도망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최 씨는 검찰 출석 직전까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엘루이호텔에 머물면서 검찰 수사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 출두한 후에는 공황장애를 호소하다 변호사 입회 상태에서 약을 먹고 “곰탕을 먹고 싶다”고 해 저녁으로 배달된 곰탕을 한 숟가락만 남기고 모두 비웠다. 이 사실에 보도되자 SNS 상에서는 ‘곰탕 한 그릇’이 청와대에 보내는 암호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최씨는 재판에 넘겨지기 전까지 매일같이 구치소와 검찰청을 오가며 조사를 받을 전망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프라다 구두·모자까지 벗겨진 ‘실세’… 고성·몸싸움 아수라장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프라다 구두·모자까지 벗겨진 ‘실세’… 고성·몸싸움 아수라장

    시민 수백명에 외신까지 몰려 한 시민, 청사에 오물 투척 ‘항의’ 최씨 “공황장애” 호소에 약 복용 저녁식사로 곰탕 한 그릇 다 비워 “딸만 있지, 아들 없다” 진술도 주인 잃은 검은색 프라다 명품 신발 한 짝이 인파에 밀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을 굴러다녔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주워다 준 뒤에야 대한민국을 뒤흔든 비선 실세 의혹의 주인공은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 국정을 농락하던 ‘만인지상’에서 평범한 ‘강남 아줌마’로 돌아온 최순실(60·긴급체포)씨는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쏟았다. 31일 오후 3시 최씨의 등장과 함께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날 오전부터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 외에 시민 200여명이 모여 최씨가 변호인의 차에서 내리자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일부 시민들은 “최순실을 구속하라”고 외치며 청사 안으로 들어서는 최씨를 뒤따랐다. 이날 검찰청사 앞에는 해외의 관심을 반영하듯 국내 매체뿐 아니라 미국 AP, 프랑스 AFP, 일본 NHK·TBS·후지TV 등 외신 취재진도 대거 운집했다. 검은색 코트와 남색 바지를 입고 모자와 목도리로 얼굴을 가린 채 모습을 드러낸 최씨는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놀란 듯 이내 자신의 손으로 남은 얼굴마저 감쌌다. 당초 최씨는 포토라인에 서서 자신의 입장을 짧게 밝힐 예정이었으나 쏟아지는 함성과 몸싸움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검찰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부랴부랴 청사로 진입했고, 몰려든 취재진 등에게 떠밀린 최씨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세 차례에 걸쳐 휘청거렸고, 결국 수행한 검찰 관계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현관을 통과했다. 신발 한 짝과 모자, 그리고 안경까지 벗겨진 채였다. 검찰 청사 내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이후에야 최씨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라며 국민들을 향해 자신의 첫 입장을 밝혔다. 목도리로 입을 가리고 흐느끼더니 이내 얼굴이 눈물 범벅이 돼 있었다. 최씨가 청사에 들어간 뒤 한 중년 남성은 오물통을 들고 청사에 난입하려다 제지당하고, 이 과정에서 오물이 서울중앙지검 청사 입구에 뿌려지기도 했다. 최씨는 서울중앙지검 7층 형사8부장실에 들어서고서야 벗겨진 신발도 찾고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최씨는 부장실에 있던 한웅재 부장의 쌍둥이 딸 사진에 관심을 보이면서 “(일부 언론 보도와 달리 자신에게는) 딸만 있지 청와대에 근무하는 아들이 없다”고 말했다. 20분가량 이뤄진 부장검사 면담에서 그는 한 부장에게 “나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겨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심장이 안 좋고 평소 공황장애가 있다”고 호소했고, 검찰은 처방전을 확인한 뒤 약 복용을 허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이날 저녁 식사로 청사 인근에서 배달된 곰탕 한 그릇을 다 비운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검찰은 “일부 시위대의 무질서한 행동으로 포토라인이 무너진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최씨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최씨의 변호를 맡은 이경재 변호사(법무법인 동북아)는 “최씨가 출두 과정에서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며 “최씨가 서울의 한 호텔에 체류했고, 귀국 후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며 일부에서 제기한 증거인멸 가능성을 부인했다. 한편 최씨는 2007년 소송 과정에서 “1979년부터 강남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상가에서 패션 대리점을 2년간 운영했으며, 1982년부터 1985년 사이 인테리어점과 학원을 통해 재산을 늘렸다”고 주장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학력 위조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그동안 최씨는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의 ‘퍼시픽 스테이트 대학’에서 학사와 석·박사 학위를 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최순실 검찰 출석 후 ‘곰탕’ 한그릇 비워…세면도구·슬리퍼 챙겨 밤샘조사(종합)

    최순실 검찰 출석 후 ‘곰탕’ 한그릇 비워…세면도구·슬리퍼 챙겨 밤샘조사(종합)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로 지목돼 국정 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 씨가 31일 오후 3시쯤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고 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에 따르면 최씨는 이날 밤늦게까지 서울중앙지검7층 영상녹화실에서 조사를 받는 중이다. 이날 오후 3시께 검찰청사에 도착한 최씨는 포토라인에 제대로 서지 않고 인파에 둘러싸인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청사 7층으로 직행한 최씨는 한웅재 형사8부장과 약 20분간 면담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최씨가 매우 당황해 소위 ‘멘붕’(멘탈 붕괴·큰 정신적 혼란) 상태였다고 전했다. 한 부장검사는 최씨와 관련해 여러 의혹이 제기됐고 온 나라가 이 사건으로 시끄러운 만큼 최씨에게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책임지고, 억울한 점이 있으면 소명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 부장검사는 자신의 쌍둥이 딸 사진을 보이며 최씨에게 “나도 딸이 있다. 독일에 있는 딸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의혹이 규명되도록 잘 진술하고 판단하라”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는 자신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겨 매우 죄송하며 조사를 잘 받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수사본부 관계자는 전했다. 면담 이후 한 부장검사 방 옆에 있는 영상녹화실에서 조사가 시작됐고, 7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큰 문제 없이 조사는 잘 진행되고 있다. 본인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최씨의 건강에 큰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심장이 좋지 않고 공황장애가 있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최씨 측 요청에 따라 변호사 입회 상태에서 약을 먹게 했다. 저녁 식사는 배달된 곰탕 한 그릇을 거의 비운 것으로 전해졌다. 형사8부가 주로 진행하는 이 날 조사는 밤늦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밤샘조사를 대비하는 듯 최씨 변호인 측에서 세면도구와 슬리퍼, 약 등을 넣은 종이가방을 조사실로 갖고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최씨 변호인 측은 “최씨를 직접 보고 왔는데 신경안정제와 심장약 등 약부터 찾았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날 밤 최씨를 긴급체포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재단 기금 강제모금과 기금 유용 등의 혐의를 중심으로 적용 혐의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순실 검찰 출석, 저녁식사 ‘곰탕 한 그릇’ 다 비워…밤까지 조사 계속

    최순실 검찰 출석, 저녁식사 ‘곰탕 한 그릇’ 다 비워…밤까지 조사 계속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 씨가 31일 오후 2시쯤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고 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에 따르면 최씨는 서울중앙지검 7층 영상녹화실에서 조사를 받는 중이다. 이날 포토라인에 제대로 서지 않고 인파에 둘러싸인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청사 7층으로 직행한 최씨는 한웅재 형사8부장과 약 20분간 면담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최씨가 매우 당황해 소위 ‘멘붕’(멘탈 붕괴·큰 정신적 혼란) 상태였다고 전했다. 한 부장검사는 최씨와 관련해 여러 의혹이 제기됐고 온 나라가 이 사건으로 시끄러운 만큼 최씨에게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책임지고, 억울한 점이 있으면 소명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 부장검사는 자신의 쌍둥이 딸 사진을 보이며 최씨에게 “나도 딸이 있다. 독일에 있는 딸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의혹이 규명되도록 잘 진술하고 판단하라”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는 자신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겨 매우 죄송하며 조사를 잘 받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수사본부 관계자는 전했다. 면담 이후 한 부장검사 방 옆에 있는 영상녹화실에서 조사가 시작됐고, 5시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큰 문제 없이 조사는 잘 진행되고 있다. 본인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최씨의 건강에 큰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심장이 좋지 않고 공황장애가 있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최씨 측 요청에 따라 변호사 입회 상태에서 약을 먹게 하고 있다. 저녁 식사는 근처 식당에서 배달된 곰탕 한 그릇을 거의 비운 것으로 전해졌다. 형사8부가 주로 진행하는 이 날 조사는 밤늦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연세대 공주전 화제 “닭은 인제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연세대 공주전 화제 “닭은 인제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한 연세대 학생이 익명 커뮤니티인 ‘연세대학교 대나무숲’을 통해 ‘공주전’이라는 글을 공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고전소설 문체로 쓰인 맛깔나는 필력에 네티즌들은 감탄했다. 최근 뉴스를 빼놓지 않고 봤다면 ‘최순실 게이트’가 떠오를 만 하다. 대하소설에 담기도 벅찬 이 의혹을 대학생이 오직 ‘픽션’으로 풍자했다. 다음은 공주전 원문 공주전 옛날 헬-조선에 닭씨 성을 가진 공주가 살았는데 닭과 비슷한 지력을 가졌다. 그 자태가 매우 고결하여 저잣거리에 흔히 파는 어묵을 먹는 방법을 몰라 먹지 못했고,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백성들이 악수를 청하면 겸허히 물러서서 손을 뒤로 빼는 등 공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았다. 공주가 처신을 잘못할 때면 공주를 숭배하는 자들이 변호하기를, “공주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독재에 여념이 없어, 공주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라고 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애정을 담아 공주에게 ‘그네겅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모친을 잃은 공주가 스물셋이 되던 해 신분 세탁의 기회를 엿보던 무당 최씨가 공주를 뵙기를 청했다. 무당이 말하기를, “소인이 돌아가신 중전마마에 빙의하는 미천한 재주를 보여드릴 수 있나이다.” 공주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그.. 그.. ‘빙위’라는 것이 나로 하여금 정신을 좀 차리게 만들고 또 그와 함께 이런 어떤 슬픈 마음 같은 것들을 굉장히 잘 가라앉히게 해가지고 그래서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참 좋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한다.” 번역기를 돌린 후에야 공주가 승낙했다는 것을 가까스로 이해한 무당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닭은 인제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하고 생각하였다. 무당이 공주의 모친 육씨의 성대모사를 하는 등 각종 재주를 시전하자 이에 홀닭 반한 공주는 그날부터 매일같이 무당을 불러들였다. 무당은 기뻐하며 청에 응했고 곧 공주를 등에 업고 날로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를 알게 된 공주의 아버지는 대로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색에 빠져 있던 중 날아온 탄환에 비명횡사하였다. 무당이 공주를 짐짓 위로하며 말하였다. “소인은 약간의 도술을 부릴 줄 알고, 공주마마께서는 유체로부터 이탈하는 화술을 지녔으니 힘을 합치면 새로운 세상(新天)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공주가 이를 듣고 과연 옳다 여겨 무당이 스스로 교주가 되어 이끄는 사람들을 돕는 데 열성과 국고를 아끼지 않았다. 무당에게는 시리라고 불리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재주나 간특함이 아비 못지않았다. 어느 날 무당이 딸을 불러 긴히 이르기를, “공주는 참으로 순수한 뇌를 지녀서 네가 보좌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라 위로하며 뒷일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무녀는 부친의 조언에 따라 공주에게 수제 가방을 선사하여 신임을 얻었고, 곧 서로를 언니, 동생이라 칭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공주는 최씨 무당을 기리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새누리(新天)’라 명명하고, 부친을 잃은 설움을 호소하여 세간 사람들의 동정을 꾀하였다. 새누리 무리는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의미에서 ‘개(開)’자를 써서 개누리라 불리며 공주를 수호하는 데 여념하였다. 하루는 공주의 근심하는 낯빛을 보고 무녀가 연유를 묻자 공주가 대답하기를, “지금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가 머리가 그렇게까지 막 좋은 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런 어떤 것들이 나를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근심하게 만들고 그게.. 그리고 연설문을 작성하는 법을 도통 모르겠으니 노오력을 해가지고 준비를 잘 하고 그러면 될 텐데 그게 또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나를 괴롭히는 것, 그게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무녀는 실성한 공주를 위로하는 한편 그 자리에서 즉시 연설문을 빨간펜으로 고쳐 공주에게 보였다. 학습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던 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무녀에게 이후에도 계속하여 자신을 도와 달라고 졸랐다. 무녀는 공주의 뛰어난 지적능력에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공주의 연설이나 토론은 물론, 의복과 표정을 정하는 것까지 돕기를 힘써 마지않았다. 공주는 무녀의 모든 가르침을 귀중한 수첩에 받아적었고 한 문장이면 될 것을 스무 문장으로 늘리는 기적에 가까운 화술을 선보였다. 공주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오하고 난해하여 전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밤새 토론하였으나 말씀의 진위를 반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한 신하가 감탄하며 그 비결을 묻자 공주가 대답하기를,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므로 누구나 유체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 라 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앞다투어 우주의 기운을 얻은 공주의 화술을 번역하고자 힘썼고 공주에게 ‘수첩공주’ 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선사하였다. 공주가 보기 드물게 #순실한마음 을 지녀 무녀를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빨간펜 세우기와 책상 내려치기밖에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공주가 푸른 기와집으로 거처를 옮긴 지 이 년이 흘렀을 때 여객선이 침몰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무녀는 덕국(德國)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시차로 인해 아직 자고 있을 무녀가 깨기를 기다리던 공주는 대책을 마련하는 대신 끊임없이 빨간펜을 세우는 기술을 갈고 닦는 근면함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구조 작업을 의뭉스럽게 방해하여 수많은 음모론의 탄생에 크게 기여하였다. 민심을 달래기 위해 공주는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겠다는 전무후무한 비책을 내놓아 뭇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는 기록이 있다. 평소 간을 잘 보기로 명성이 자자한 안(安)이라는 자가 이를 알았더라면 한참 간을 본 끝에 이렇게 평했을 것이다. “이때 고심한 자는 공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수첩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루는 효심이 지극한 공주가 부친의 찬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역사서를 새로이 편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뜻 있는 많은 선비들과 학생들이 일어나 반대하였으나 공주는 망설이지 않고 이들을 모두 ‘혼이 비정상’ 이라 칭하는 신비한 예지력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감탄하자 공주가 단호히 이르기를,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렇게 해서 그런 기운이 오고 또 그런 마음을 그 기운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다라는 것을 내가 몹시 잘 알겠다” 라 하자 아무도 그 심오한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어느덧 공주가 무녀를 위해 여러 재단을 세우고 횡령한 국고가 수천억 원에 이르러 바야흐로 #순실의시대 가 도래하였다. 또한 부친의 뜻을 본받아 왜국과 굴욕적인 협상을 맺는가 하면 물대포를 가격하여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나아가 민심을 직접 읽고자 민간 통신수단을 친히 사찰하고 불만을 드러내는 자에게는 택배를 보내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때문에 사람들의 원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져 하늘을 찔렀으나 그때마다 놀랍게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열애설이 터져 공주는 늘 비난을 모면하였다. 공주가 학비를 반값으로 줄이겠다는 무녀의 공약을 받아적기는 했으나 지키지 않아서 나라의 젊은 학생들은 밤낮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쳐서 울부짖었다. 공약을 왜 지키지 않느냐는 힐난이 쏟아지자 공주는 “내가 말한 적 없다”라 단언하여 모든 것은 무녀가 말한 것이라는 진실을 은연중에 인정하였다. 보다 못해 공주를 따르는 새누리 무리 중 ‘킹’ 으로 불리는 자가 지친 학생들을 “고생도 좀 해 보고 빚도 있어봐야 한다” 라는 주옥같은 따스한 말로 위로하였다. 또한 전에 나라의 교육을 맡아보던 한 관리는 민중을 포유류인 개와 돼지에 빗댐으로써, 민중이 조류인 닭보다 지적으로 월등히 앞섬을 완곡하게 표현하려 하였으나 소통에 실패한 바 있다. 한편 무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으니 정이라고 했고 공주라 불리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정감록을 실현코자 하였다. 정은 말 타는 기수가 되고자 했으나 실력은 영 좋지 못하였다. 백날 닭을 잡고 굿을 해보아도 진척이 없자, 무녀는 고심 끝에 정에게 학사경고를 선사한 지도교수를 친히 찾아가 건물이 떠나가라 크게 호령하였다. “교수 같지도 않은 게.” 무녀가 전 지도교수를 쫓아내고 새로 앉힌 교수는 먼저 정의 안부를 묻고 시중을 들 학생을 몸소 구해주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또한 정이 비속어와 색다른 철자법이 난무하는 과제의 특이점을 인정받아 놀라운 학점을 받자 많은 학생들의 원한이 사무쳤다. 무녀와 그 딸은 세간의 눈총을 피해 덕국으로 잠적하였으나 곰탕과 김, 가루커피를 챙기는 대신 공주를 위해 작성한 수천 건의 문서를 흘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손(孫)씨 성을 가진 의로운 선비와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이를 알고 크게 놀라 특종으로 내보냈다. 세간 사람들이 공주와 최씨 일가의 농간에 대해 알고 경악하는 한편 의로운 선비들 및 사상 최초로 민심을 하나로 모은 공주의 깊은 뜻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이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병신년(丙申年) 모월 모일 모시에 이 글을 기록하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남대문 옆, ‘시장의 역사’ 품은 떠들썩함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남대문 옆, ‘시장의 역사’ 품은 떠들썩함

    “떡 장수, 메밀묵 장수, 국수 장수, 활기에 넘치고 가지가지 소리가 있는 시장, <페르시아 시장>이 아니고 전쟁이 밟고 지나간 장터에도 음악은 있다. 장난감 파는 가게에 인민군들이 서 있고 그들이 돌아갈 때 누이와 동생, 아들과 딸들에게 선물할 장난감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박경리의 작품, ‘시장과 전장’(1964)에 묘사된 남대문 시장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한국전쟁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도 삶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 유일한 공간으로 그리고 있다. 흡사 붉은 양탄자 층층이 올린 아라비아 페르시아 시장 뒷골목에서 양탄자가 날아오르는 요술처럼, 남대문시장에서도 피난민들의 남루한 삶을 날려 줄 마법의 램프 속 도깨비가 남대문시장에는 있었을 듯하다.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시장4길 21. 흔히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 없다는 말같이 도깨비처럼 뚝딱 소리 한 번에 모든 물건을 다 구할 수 있어 ‘박격포’까지 판다는 허명(虛名)마저 되새김질하는 시장이 바로 ‘남대문시장’이었다. 남대문시장은 지금도 명실상부 의류를 비롯해 각종 섬유 제품, 액세서리, 안경 같은 잡화, 주방용품, 공산품, 토산품, 수입 상품, 농수산물 등 1700여 종의 물품들이 거래되는 한국 제일, 최고(最古), 최대 전통시장임은 분명하다. 대지면적으로만 2만 467㎡, 건물연면적으로는 6만 4613㎡에 달하며, 점포 수는 이미 만 여곳 이상이 성업 중인, 하루 4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발도장을 찍는 서울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곳에는 도소매를 겸하는 전문 상가가 있어 일반 손님들도 원하는 물품이 소량이라도 편리하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 서울 시민의 넉넉한 안살림을 채워주는 곳간과도 같은 곳이다. 최근에는 남대문 시장이 한류(韓流)의 중심지로 다시금 각광받고 있다,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의 아메요코(アメ)시장이나 대만 최대 재래시장 디화지에(迪化街)처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단연 1순위 관람코스로 새롭게 등장하여 과거의 전성기를 누릴 심사를 남대문 시장은 품고 있다. ●옛 모습은 숭례문 밖 생선 팔던 칠패(七牌)시장 남대문시장의 역사는 이러하다. 원래 17세기 초부터 한양 도성에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하여 조정으로부터 물품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시전(市廛)상인들이 종루(鐘樓) 행랑을 중심으로 모여 조선팔도 모든 물목들을 어깨 힘 잔뜩 넣은 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도성 외부에 인구가 몰리는 17세기 후반 남대문과 서소문 밖을 중심으로 상가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바로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칠패(七牌)시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아울러 18세기 중엽, 서울 동부의 어의동(於義洞) 근처에도 또 다른 상가가 등장하게 되는 데 이는‘동대문시장’ 전신인 ‘이현(梨峴)상가’였다. 이로 인하여 서울 도성 안팎의 상가는 종루 시전상가와 이현, 칠패 상가를 합하여 삼대시(三大市)로 나뉜다. 제각각 취급하는 물품도 다양해서 종루 시전상가는 궁궐이나 관아, 그리고 양반 사대부가에 필요한 사치품이나 중국 수입물품, 생활용품을 판매하였다. 반면 남대문시장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칠패시장은 마포나루터와 인접해 있어 새벽녘 마포(麻浦) 서강(西江)을 거쳐 들어오는 곡식이나 생선같은 상품들을 도성 안 서민들에게 대주었다. 특히, 칠패의 어물전(魚物廛) 명성은 지금의 노량진 유명세보다 훨씬 윗길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남대문 시장의 대표 음식인 '갈치조림'의 명맥이 뜬금포처럼 등장하지 않은 연유가 바로 이러하다. 18세기 후반 한양 도성을 기록한 당시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회현동, 죽전동, 주자동, 어청동, 어의동, 이현, 명문 등지에 칠패시장에서 미리 매점매석한 어물이 산처럼 쌓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 지역은 번성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1914년, 우리나라 제1호 시장으로 등록 구한말에 이르러 칠패시장의 규모가 종로와 남대문로를 뒤덮을 정도로 성장하자 대동미와 대동포 출납을 관장하던 선혜청(宣惠廳)으로 시장의 중심 터전이 옮겨가게 되고 이로부터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의 자리가 옛 선혜청 자리로 잡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상인들에 의해 시장 경영권이 당연히 넘어가게 된다. 1922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시장의 경영권이 넘어가고 조선의 유통을 장악하려던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남대문 시장은 1936년경 등록된 상인의 수만 무려 230여 명이 될 정도로 급성장한다. 또한 1930년대 시장의 하루 거래액이 8만원에 이를 정도로 시장은 활성화되어 현재 남대문 시장의 규모가 만들어진다. 당시 주요 거래 품목은 미곡(米穀)과 과일, 채소, 생선 등 농수산물과 식료품이었으며, 이 외에도 고기류나 생활 잡화도 취급하여 명실상부한 거래액 규모에서는 조선 최대 전통시장의 면모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남대문 시장은 동대문시장과 아울러 서울의 중심시장 자리를 지켜온다. 1947년에 215개의 점포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1952년에 252개로 늘어났고, 종전 후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150개의 점포와 500여 개의 노점들이 생업을 이끌어가는 공간으로 살아 남아 있었다. 특히 휴전 이후 남대문시장은 주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룬다. 전후복구를 위한 미군의 구호물자와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내려오던 적산(敵産) 사치품과 밀수품 들이 거래되면서 소위 ‘도깨비’처럼 단속을 피해 물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이 남대문 시장 안에서는 빈번하였다. 특히 50,60년대 정부에서 유통 금지 물품으로 단속을 하던 밀수품들인 카메라, 양주, 담배, 시계, 양산 등이 남대문 시장 곳곳에 등장했다가 없어지곤 해서 당시 서울 시민들의 호기심을 가득 받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들의 군복, 담요, 시레이션(C-ration) 박스 등 접하기도 힘든 고급 군수물자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어 항간에는 ‘박격포’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그럴듯하게 퍼지기도 하였다. 1960, 70년대에는 빈번한 불난리를 피해 시장 건물 현대화사업에도 박차를 가한 기간이었다. 1969년 1월에는 지하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이 완공되었고, 이후 1975년까지 667개의 점포가 추가되어 그 때의 건물들이 현재까지 이르러 지금의 시장의 틀을 만들었다. 1980년대는 바야흐로 남대문 시장 전성시대였다. 흔히 ‘남문’패션이라고 해서, 베이비붐 세대들인 1970년대 생 아동들이 학교에 입학할 즈음 전국적으로 아동복에 대한 수요가 넘쳐흘렀고 이를 남대문시장이 감당하였다. 40대 이상이라면 지금도 귀에 익숙한 ‘부르뎅’, ‘원 아동복’ 등의 아동복 브랜드가 당시 ‘국민학교’ 학생들의 ‘워너비’ 메이커가 되었다. 또한, 신발류로는 ‘프로스펙스’, ‘르까프’, ‘까발로’, ‘타이거’, ‘슈퍼카미트’, ‘프로월드컵’ 등의 브랜드가 등장하여,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서울, 경기를 넘어 전국 각지로 어린이들의 동심을 흔들어 놓았다. 특히 어린이날 전후로는 물건을 떼러온 ‘봉고’들이 남대문 시장 입구 10Km부터 줄지어 서있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남대문시장의 호황은 1997년 IMF와 더불어 막을 내린다. 더구나 백화점과 할인마트가 등장하고 인근의 동대문 시장이 의류 특화 상권으로 성장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의류 중심의 상권이 대거 액세서리, 안경점, 여성 전문 패션, 그릇, 내복류 등으로 이동하여 2000년대를 맞이한다. 오늘날 남대문시장은 비록 예전의 ‘박격포’까지 팔 기세의 위세는 점점 사그라졌을지라도, 여전히 서울의 대표 전통시장으로 발을 굳건히 붙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 일본 관광객들의 급증으로 인하여 한류상품, 인삼, 김, 가죽 제품 등과 같은 관광상품을 취급하는 상점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출현한 어물 유통의 중심지, 남대문 밖 칠패(七牌)시장으로서의 오랜 역사를 지닌 남대문 시장. 현재 인터넷, 모바일 쇼핑 등의 변화된 유통 환경에서도 그 옛날 나랏님도 어쩌지 못하던 난전(亂廛)시장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한류(韓流)의 물살을 타고 단단히 이어가길 바란다. <남대문시장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너무나 당연하다. 남대문시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이다. 서울을 방문하는 초심자에게 남대문 시장은 경복궁, 남산 타워와 아울러 기본 탐방 코스다. 2. 누구와 함께? -나이 드신 부모님과 함께 가 보면 좋다. 추억과 더불어 시장 골목골목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3. 가는 방법은?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길 권유한다. 지하철4호선 회현역 5번 출구로 나오는 것이 제일 낫다. 4. 감탄하는 점은? -규모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크다. 점포수가 만 개가 넘으니 넉넉한 시간을 두고 둘러보는 것이 낫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80년, 90년대의 부르뎅 아동복이나 원 아동복을 그리워하는 세대들에게는 그 당시만 못하더라도 여전히 전통시장 특유의 진한 삶의 내음은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많다. 6. 꼭 봐야할 상점이나 거리는? -수입상품거리나 그릇 도매점, 액세서리 상가도 볼만한 것이 많다. 특히 수입상품상가 강추! 7. 먹거리 추천? -원래 남대문시장 최고의 인기 음식은 단연 갈치조림이다. 갈치조림골목은 남창동 본동상가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회현역 5번 출구 인근의 칼국수 골목도 유명하다. 또한 안경점 골목 주변의 노천 생갈비도 먹을 만하다. 이외에도 곰탕, 닭곰탕 등등의 먹거리 투어 장소로도 손색이 없는 시장. 8. 홈페이지 주소는? -www.namdaemunmarket.co.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남대문 시장 만으로 한나절 넉넉하다. 주변이 바로 명동이어서 남산이나 경복궁, 광화문 등지로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우선 남대문 시장을 방문하기 전에는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전체 지도를 꼭 보고 가야한다. 또한 전문적인 상가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구매 목적에 맞는 상가 위치를 미리 알고 가면 좋다. 그리고 주차 문제는 심각해서 반드시 주차장에 세워 두어야 견인, 과태료 부과를 피할 수 있다. 에누리 없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종로구·KT 사랑의 ‘빨간밥차’ 29일 첫 배식

    서울 종로구에 5t짜리 ‘빨간밥차’가 등장한다. 종로구는 28일 KT그룹 희망나눔재단과 협약을 맺고 앞으로 1년 동안 ‘사랑해 빨간밥차’ 사업을 펼친다고 26일 밝혔다. 빨간밥차는 한 달에 한 번씩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게 된다. 빨간밥차는 한꺼번에 500인분 이상의 식사를 제공할 수 있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웃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전망이다. 종로구는 무료 식사뿐 아니라 재능나눔 문화공연과 안과 검진 의료서비스 등도 희망나눔재단과 함께 제공할 예정이다. ‘사랑해 빨간밥차’의 첫 밥상은 오는 29일 차려진다. 오전 11시 30분~오후 2시에 종로구 성균관로 경학어린이집에서 희망나눔 행사가 열린다. 명륜동과 혜화동에 사는 노인 300여명에게 꼬리곰탕과 과일, 차 등을 대접하게 된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사랑해 빨간밥차’가 우리 주변의 소외 이웃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서울 종로구 ‘사랑해 빨간밥차’ 가 밥과 문화를 실어나릅니다

    서울 종로구에 5t짜리 ‘빨간밥차’가 등장한다. 종로구는 오는 28일 KT그룹 희망나눔재단과 협약을 맺고 앞으로 1년 동안 ‘사랑해 빨간밥차’ 사업을 펼친다고 밝혔다. 빨간 밥차는 한달에 한번씩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게 된다. 빨간밥차는 한꺼번에 500인분 이상의 식사를 제공할 수 있어 한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웃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전망이다. 종로구는 무료식사뿐 아니라 재능나눔 문화공연과 안과검진 의료서비스 등도 희망나눔재단과 함께 제공할 예정이다. ‘사랑해 빨간밥차’의 첫 방상을 오는 29일 차린다. 오전 11시 30분~오후 2시에 종로구 성균관로 경학어린이집에서 희망나눔 행사가 열린다. 명륜동과 혜화동에 사는 어르신 300여명에게 꼬리곰탕과 과일, 차 등을 대접하게 된다. 4인조 밴드가 재능기부 문화공연을 펼쳐 어르신들의 위장뿐 아니라 마음도 넉넉하게 채울 예정이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사랑해 빨간밥차’가 우리 주변의 소외 이웃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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