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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서 4·3 추념행사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서 4·3 추념행사

    제주4·3 범국민위원회는 지난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제주4·3 추념행사를 개최했다고 2일 밝혔다. 추념행사는 제주4·3 범국민위원회와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보리아트연구소 등이 공동주최했다. 제주4·3 범국민위원회 등은 노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제주4·3에 대해 사과하고 진실을 밝혀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노 전 대통령 묘역에서 추념행사를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31일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도민과 유족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써 과거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어 2006년 58주기 추념식에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 으로 참석했다.추념행사에는 제주4·3 희생자 유족, 여순10·19 사건 희생자 유가족, 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 희생자 유가족, 경산 코발트 광산 희생자 유가족 등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희생된 민간인 유족과 1987년 10월 항쟁 유가족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추념행사는 노 전 대통령 묘역에 헌화·분향, 4·3 진실을 밝히는 책과 보고서 헌정식, 4·3 진실 규명 과정 기록 및 작품 전시·관람, 제주4·3과 여순 10·19 강의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젊은 시절 경찰이 쏜 총에 턱을 잃은 한 여성의 삶을 엮은 ‘무명천 할머니’, 제주 4·3 사건 진실규명 과정을 기록한 ‘4·3의 진실을 찾아서’, 노 전 대통령 사과이후 발간된 ‘제주4·3 사건 추가진상조사 보고서’, 4·3역사를 작품화 한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노력으로 바뀐 중학교·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개정판 등을 노 전 대통령이 잠든 너럭바위에 바쳤다.이상언 제주4·3 희생자 유족회 상임부회장이 ‘제주 4·3’ 3만 희생자와 6만 유가족을 대표해 노무현 전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이 부회장은 “노 전 대통령 재임 때 만들어진 제주 4·3 진상조사 보고서, 위원회 건의 사항은 4·3 해결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법의 판단 기준이 됐다”며 “유족들은 노 전 대통령이 유족들 가슴에 맺혀 있던 한과 아픔을 쓸어주고 4·3 평화공원 조성, 희생자 명예 회복 추모사업, 유해 발굴 등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준 것을 기억하고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참석자들은 묘역 옆 깨어있는 시민문화체험전시관(노무현 전 대통령 기념관)에서 4·3 추념행사를 했다. 추념행사에 이어 주철희 박사(여순사건위원회 소위원장)가 ‘제주 4·3사건, 여순 10·19 사건’을 주제로 강의를 했다.
  • 육지형무소로 끌려간 4·3희생자 신원확인 추진

    육지형무소로 끌려간 4·3희생자 신원확인 추진

    제주4.3당시 억울하게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의 신원 확인이 처음으로 추진된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도외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4·3 희생자의 신원확인을 위해 대전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 중 200여구에 대한 유전자 감식 시범사업을 추진한다고 18일 밝혔다. 대전 골령골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사이에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와 대전·충남 지역에서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이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돼 묻힌 곳으로, 지난해까지 1361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를 위해 올해 국비 14억 7000만 원을 투입해 도내·외 암매장지 유해 발굴과 유전자 감식을 추진해 유족들의 한을 풀어줄 전망이다. 도는 발굴 유해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위해 지난해 7월부터 행정안전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대전 동구청과 수차례 협의가 이뤄졌고 감식 협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최근 산내유족회로부터 유전자 감식 서면동의를 받음으로써 대전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가 안치돼 있는 세종추모의집(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민간인 유해가 임시 봉안된 장소) 유해 유전자 감식 시범사업 추진에도 탄력을 받게 됐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국회의원 당시 “진화위가 추진하는 유해 발굴 사업에 대해 유족을 찾아주기 위한 유전자 감식 예산이 전혀 책정되지 않고, 제주4·3 유해발굴 및 유전자 감식 사업과 연계가 되지 않고 있다”며 “전국적으로 데이터 수집·관리·분석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제주도와 행안부, 진화위, 대전동구청간 협업이 추진됐으며, 진화위에서는 유전자감식 예산 12억원을 처음으로 확보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특히 이번 유전자 감식 결과는 그동안 도외행불인 유족을 대상으로 한 채혈 결과와 대조해 신원을 확인하게 된다. 대전형무소 수감자 명단을 토대로 확인한 결과 4·3희생자 298명이 집단 학살된 후 대전 골령골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유전자 감식 결과에 대한 유족들의 기대가 큰 상황이다. 이를 위해 올해 5월까지 100여구, 올해 12월까지 100여구 등 총 1·2차에 걸쳐 200여구에 대한 시료 채취와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이 확인되면 행정안전부와 유해 인계 등을 협의해 나갈 계획이다. 조상범 제주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은 “도외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4·3희생자에 대한 유전자 감식사업을 통해 유족의 평생 한을 위로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진화위가 진행한 6.25당시 민간인 학살지역 조사에서 ▲대구 형무소 ▲청주 형무소 ▲김천 형무소 3곳에도 4.3희생자들이 끌려간 뒤 희생돼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에 세번째 무죄 선고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제1형사부(송백현 부장판사)는 여순사건 당시 대전시 산내동 골령골에서 학살된 김중호(당시 20세)씨 등 민간인 희생자 12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28일 밝혔다. 재판부는 “민간인들에 대한 체포·감금이 일정한 심사나 조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후 조사과정에서 비인도적인 취조와 고문이 자행된 사실이 인정된다”며 이같이 판시했다. 또 “여순사건 이후 군경이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피고인들 또한 법원이 발부한 영장 없이 체포·감금됐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당시 이들에게 적용된 포고령 제2호에 대해 “미국 육군대장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 제2호의 내용도 적용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통상의 판단 능력을 갖춘 국민이 법률에 따라 금지된 행위가 무엇인지 예견하기 어려우므로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돼 위헌·무효다”고 강조했다. 김씨 등은 여순사건 당시 전남 여수시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 군인 등 반란군들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자 반란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내란 및 포고령 위반 혐의로 영장도 없이 체포됐다.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6월 대전시 산내동 골령골 등에서 학살당했다. 이번 재판은 대법원이 2019년 3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재심 개시를 결정해 이뤄진 세번째 무죄판결이다. 대법원 재심결정에 따라 2020년 1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재심 선고 공판에서 철도기관사로 일하다 처형당한 장환봉(당시 29세)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지난해 6월에는 순천역 철도원으로 근무했던 김영기(당시 23세)씨와 대전형무소에서 숨진 농민 김운경(당시 23세) 씨 등 민간인 희생자 9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 [포토] 희생자를 위한 천무도

    [포토] 희생자를 위한 천무도

    2일 대전 동구 낭월동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 발굴 유해 안치식에서 천무도가 진행되고 있다. 2021.11.2 뉴스1
  •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9명 ‘무죄’ 선고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9명 ‘무죄’ 선고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제1형사부(부장 송백현)는 24일 여순사건 당시 순천역 철도원으로 근무했던 김영기(당시 23세) 씨와 대전형무소에서 숨진 농민 김운경(당시 23세) 씨 등 민간인 희생자 9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희생자들에게 적용된 포고령 위반과 내란 혐의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재판부는 “군경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고 영장 없이 구금해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공 정책을 펼치면서 공정한 재판 없이 군사재판에 넘겨 사법부를 비롯해 국가가 불법적인 재판을 자행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판시했다. 송 판사는 “이번 선고가 무죄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 명예 회복과 실질적인 피해 구제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무죄가 선고되자 재판을 참관하던 유족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재판을 마치고 나온 김영기 씨의 아들 규찬(73) 씨는 “73년 만에 명예 회복을 해준 재판부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눈물을 떨궜다. 그는 “다행히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무죄를 받았지만, 많은 유족이 있어 기쁘지만은 않다”며 “하루빨리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돼 진실이 규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순천역에서 근무하던 김영기 씨는 여순사건이 발발한 뒤 동료와 함께 진압군에 영장도 없이 체포돼 내란죄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포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마포형무소로 이감된 뒤 한국전쟁이 터진 후 행방불명됐다. 김운경 씨 등 8명은 포고령 위반 혐의로 잡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6월 대전시 산내동 골령골에서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학살 당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9년 3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었다. 앞서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지난해 1월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재심 선고 공판에서 철도기관사로 일하다 처형당한 고 장환봉(당시 29세)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장맛비가 퍼붓던 지난 4일, 경북 경산시 평산동의 폐(廢)코발트광산. 일제가 군사용 코발트를 확보하려고 1930년대 채광을 시작해 1942년 폐광된 동굴 입구는 냉동 창고 문이라도 열어 놓은 듯 한기를 쏟아냈다. 안전모를 쓴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들어선 갱도 바닥에는 광산 내부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고 침침한 전구 불빛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색의 갱도 옆 벽면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꼭 온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100여m를 더 들어가자 수직으로 뚫린 또 하나의 굴과 연결됐다. 동행한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박의원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수직 동굴 저 위쪽에서 6·25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들이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 채 총으로 쏴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수직 동굴 높이가 50m 정도인데 시체로 가득 차 더는 못 떨어뜨리게 되니까 나중에는 골짜기 이곳저곳에 시체들을 묻었다고 해요. 동굴에서 기관총 탄피나 수류탄 흔적도 발견됐어요. 산 채로 떨어진 사람들을 확실하게 처리했던 모양이에요.” 1950년 7~8월, 이곳에서 민간인 3500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들은 경산, 청도 등지의 국민보도연맹원 1000여명,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여명 등이다. 앞서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좌익에 전향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1년 만에 보도연맹원 숫자는 30만명을 웃돌았다. 지역 할당제가 떨어지자 빨치산의 짐을 날라 주고 밥을 해 주고 심부름을 해 줬던 이들까지 보도연맹원으로 엮어 넣은 탓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과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동시다발적으로 집단 학살에 나섰다. 1950년 여름, 남한 전역 수십여 곳에서 벌어진 학살 중 대전 산내 골령골과 더불어 가장 희생자가 많은 곳이 바로 경산이다. 1990년대부터 경산코발트광산 사건 규명에 천착해 온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정말 논매고 밭매다 붙들려 간 억울한 분들도 있겠지만 희생자 대부분이 보도연맹원인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단순 부역을 했던 분들이다. 전쟁 중이라고 해도 법적 근거 없이 죽임을 당할 죄는 결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회는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유족들은 군사정권의 서슬에 ‘빨갱이’로 몰릴까 봐 숨을 죽였다. 2000년대 들어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이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정부와 경산시는 뒷짐만 졌다. 2005년 비로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굴에 나서 420여구를 수습했다. 이전까지 유족회가 발굴한 유골이 80여구다. 그동안 이곳에는 골프장과 노인요양병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수십~수백m 떨어진 폐광과 골짜기에는 여전히 3000여구의 유골이 방치된 상황이다. 2010년 특별법 종료와 함께 발굴은 중단됐고, 그나마 유족들이 발굴한 80여구마저 임시 컨테이너에서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2010년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5·16 이후 유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으며 현재까지 사회적 약자로 살아오고 있으며, 특히 연좌제로 인한 사회적 차별로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유가족 300여명은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121억여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남편을 잃은 10여명의 부인들을 비롯한 유족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비극을 겪고 있다. 나정태 유족회 부회장은 “3000여구의 유골도 수습해야겠지만 시급한 건 컨테이너에 보관된 탓에 빠르게 훼손되고 있는 80여구를 처리하는 문제”라면서 “충북대에 보관 중인 420여구도 내년까진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군 유해 발굴 사업처럼 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똑같은 국민”이라면서 “유골을 모아 합동 화장을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와 작은 기념관 정도는 세울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산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대전형무소사건 유해발굴

    한국전쟁 전후 최대 규모의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으로 알려진 ‘대전형무소사건’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진실규명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층층이 묻힌 유골 매장형태로 볼 때 집단희생 정황이 뚜렷하단 분석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9일 “지난 6월말부터 진행한 ‘대전형무소사건’ 유해발굴조사 결과, 현재까지 모두 4곳의 매장추정지에서 총 35구 이상(추정치)의 유골과 명찰 및 신발 등의 유품을 발견했다.”며 발굴현장을 공개했다. 대전형무소사건은 1950년 7월초, 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에서 국군과 경찰이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인근 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집단학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사회플러스] 국가차원 첫 민간인 유해발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7일 전남 구례군 봉성산 공동묘지를 시작으로 올해 안에 충북 청원군 분터볼, 경북 경산군 코발트 광산, 대전 동구 낭월동 및 산내 골령골 일대 등 4곳에 대한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기로 의결했다고 26일 밝혔다.
  • 민간인 학살지 유해발굴 현장실사 “땅속에 묻힌 진실 밝혀낼것”

    과거사 정리를 위한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학살지인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등 전국 4개 지역의 유해발굴 작업을 앞두고 10일부터 유족들을 대상으로 사전조사에 착수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자에 대한 민간 차원의 소규모 유해발굴 작업은 있었지만 국가가 대규모 발굴 작업에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대해 유족들은 ‘늦었지만 다행’이라며 입을 모았다. ●경산 코발트광산 유족 증언 청취 진실화해위는 이날 경산시 민주평통사무실에서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대표적 집단 민간인 학살사건인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 피해 신청인 14명을 대상으로 의견 청취를 했다. 조사는 주로 사건발생 일시 및 장소, 가해조직 등에 대한 증언정취로 진행됐다. 이날 증언에 나선 박일홍(67·경산시 남천면 산전리)씨는 “한국전쟁 직후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경산경찰서로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이후 이웃들로부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김장선(67·여·〃)씨는 “전쟁 발발 전에 군인들이 집으로와 시아버지와 시누이를 강제로 끌고 간 이후 연락이 끊겼다는 것을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국과수서 DNA 유전자 정보분석 진실화해위는 또 코발트광산(평산동 백자산) 현지를 방문해 유해 발굴작업을 위한 기술적인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이와 함께 11,12일에는 청도경찰서 문서고에 보관된 집단 학살 관련 자료 확인과 사건 당시 경산·청도지역 경찰·군 관련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탐문조사를 벌일 계획이다. 이어 11일에는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을,12∼14일엔 청주 청원 분터골을 방문해 유해 발굴작업에 앞선 사전실무 조사에 착수한다. 다음주에는 전남 구례 봉성산을 찾아 사전 조사를 벌이는 등 4개 지역에 대한 사전 조사를 끝낸 뒤 30일까지 발굴작업에 참여할 사업자 선정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진실화해위는 발굴작업으로 확인된 유해들에 대해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DNA 유전자 정보분석을 의뢰해 정확한 희생자 수를 확인하는 한편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임시안치소에 유해를 보관할 예정이다. 청주청원유족회 박남순 회장은 “이번 발굴을 통해 억울하게 숨진 양민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위령탑 건립과 위령제가 정례화되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령탑 세워 편히 잠들게 해야” 대전 산내 희생자유족회 김종현 회장은 “희생자의 명예 회복은 물론 배·보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순사건유족협의회 박찬근(72·전남 구례군 간전면 효곡리) 구례지회장은 “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발굴팀이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에 나서 다행”이라고 반겼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유족들에게 “이번 조사와 발굴을 통해 땅속에 감춰진 진실을 반드시 밝혀 내겠다.”고 다짐했다. 경산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韓國戰 정전 50년 양민학살 재조명

    한국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났는데도 몸서리쳐지는 아픔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당시의 양민학살 현장에서 최근 유골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보상,명예회복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다. ■경남 산청 외공리사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는 3년 전부터 매년 4월5일 위령제가 열린다. 소정골에서 양민들이 학살됐다는 소문은 2000년 5월 14일 사실로 확인됐다.진주와 산청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앞장서 현장에서 250여구의 유골과 유품을 발굴했다. ●통비(通匪)로 몰린 마을주민 떼죽음 당시 발굴작업을 지켜본 참석자들은 설마하다 쏟아져 나오는 유골을 보며 치를 떨었다.굴삭기가 땅을 1m쯤 파내려가자 희생자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됐다.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도 다수 있었다.발굴단은 당초 6기의 무덤을 모두 발굴키로 했으나 1기에서 엄청난 유골이 나오자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발굴된 유골만 수습해 합장하고 작업을 중단했다. 발굴작업을 주도했던 ‘지리산 외공리 민간인학살 진상규명대책위원회’ 김영이 사무국장은 “뒤엉켜 있는 유골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면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유골이 나와 작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전 당시 거창·함양에서 양민들이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낮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밤에는 인공기를 꽂는 상황이었지만 국군들은 양민들을 통비(通匪)로 몰아 무차별 처형했다.당시 열한살이었던 강복석(63·진주시 상봉서동)씨도 “학살현장에서 2시간 정도 총소리가 들렸고,골짜기에서 나온 군인들이 삽과 곡괭이를 강물에 씻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이곳에서의 학살은 사건발생 10년만에 신문보도로 드러났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쿠데타로 다시 어둠속에 묻혔다. ●유골 쏟아져 작업중단 외공리 대책위는 누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난 3월 개혁당 김원웅 의원을 통해 국회에 청원도 했다.외공리 대책위 서봉석 실행위원장은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반인륜적인범죄”라며 “한국전이 끝난지 5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안됐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산청 이정규 기자 jeong@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사건 경북 경산시 평산동 폐(廢)코발트광산 인근 대원골에서 최근 한국전쟁 직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두개골·치아 등 25점의 유골과 신발밑창 등 다량의 유류품이 발견됐다.2000년 3월 폐쇄된 코발트광산 입구 및 갱도 속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형된 희생자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데 이은 것이다. ●70년대 초 정부가 갱도 입구 폐쇄 경산 폐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의 희생자는 35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들 대부분은 대구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건이 터진 것은 50년 8월 중순쯤.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북측에 가담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전국적으로 대량 학살이 저질러질 때였다. 학살은 군경이 이들을 폐광산 위 수직갱도 주변으로 끌고가 총살하거나 산 채로 수직갱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알려졌다.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김모(73)씨는 “사건 후 폐광산 주변 계곡에서 흘러 나온 물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악취도 심해 농사를 짓지 못할 지경이었다.”며 “그러다 70년대 초에 와서 정부가 갱입구를 시멘트나 흙,철망으로 막아 버렸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95년 평산동청년회 등이 중장비를 동원,광산 입구를 파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그러나 이후 5년여간 방치돼오다 ‘경산시민모임 민간인학살대책위(위원장 장명수·47)’가 구성되면서 본격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2000년 첫 확인… 본격 진상조사 경산시의회도 지난해 말 ‘경산 민간인학살 특별위원회’를 구성,학살현장 확인 등 조사활동을 벌인 뒤 관련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유족과 시민모임대책위는 2000년부터 매년 7월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경산유족회 이태준(66·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 공동대표는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문제를 제쳐 두고라도 50여년간 구천을 헤메고 있을 원혼을 달래려면 정부 차원의인도적인 진상규명과 유골 수습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경산 김상화기자 shkim@ ■대전 산내사건 대전 ‘산내학살사건’의 희생자는 7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제주 4·3사건 관련자 300명,여순반란 및 보도연맹사건 관련자 3000여명에다 민간인들도 상당수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이 터진 것은 1950년 7월 초에서 중순 사이.북한 인민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말에 군경이 대전 동구 산내동(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 계곡에 이들을 모아놓고 2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첫번째 학살은 7월4일부터 6일까지 사흘 동안 이뤄졌다.대전형무소 수감자 3000여명을 트럭으로 이곳에 실어온 뒤 총살했다.2차 학살은 17일 같은 곳에서 있었다.이 때 여성 등 민간인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美국립문서보관소 관련자료 나와 지난해 4월 발굴된 영국 데일리 워커지 앨런 위닝턴 기자의 증언록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는 “학살 직후 현장엔 6개 구덩이에 7000여명이 묻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그는 “인민군이 금강을 돌파하자 이날 새벽 남아 있던 대전형무소와 인근 교도소 정치범 등을 트럭 1대에 100명씩 모두 37대에 태워 옮긴 뒤 학살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의 관심으로 바깥에 알려졌다.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사건으로 군경에 의한 학살사건이 공론화되자 이 단체는 99년 10월 ‘산내학살사건 민간조사단’을 구성하고 진상조사에 나섰다.같은 해 12월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증거가 나왔다.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비밀문서가 해제된 뒤 탐라대 이도영 교수가 아버지를 잃은 4·3사건 관련자료를 뒤지다 이를 발견한 것이다. ●“최고 상층부서 지시” 기록 비밀문서에는 “사흘간 대전형무소 수감자 1800명이 산내에서 학살됐다.”며 “이는 최고 상층부의 지시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그러나 위닝턴 기자는 증언록에서 “미군의 지시로 일어난 학살사건 중 하나다.”고 밝혀 누구의 지시로 학살사건이 이뤄졌는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유가족과 대전참여연대는 2000년부터 매년 7월8일 희생자들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특별법청원 박재욱의원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이 추진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관심도 탄력을 받고 있다.개혁당 김원웅 의원 등이 발의한 법률안 2건이 계류돼 있고,경북 경산 등 전국적으로 15곳에 이르는 사건의 특별법 제정 청원이 24건이나 된다. 지난 해와 올해 두 차례 입법청원을 낸 한나라당 박재욱(사진·경북 경산·청도) 의원과의 일문일답. 청원서를 내게 된 배경은. -경산에 코발트 광산이 있었는데 6·25 직후에 3500명 가량이 갱도에서 처형됐다.규모로는 전국에서 제일 클 것이다.3∼4년 전부터 유족과 지역주민들의 제기로 진상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해 경산시의회 등에서 청원이 올라왔다.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이다.피해보상까지 해주면 좋지만 현재로선 기념식과 위령탑 건립을 바라고 있다. 사실 이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당시에는 법도 없었고 재판절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양민이 상당수 무고하게 희생됐을 것으로 본다. 최근 예결위에서도 정부의 지원을 요구했는데. -행정자치부는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서류나 증거물이 미비하다며 국회나 기타 신뢰성 있는 조사기관이 진상조사를 실시하면 정부 차원에서 적극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예산 문제다.조사가 시작되면 아마 전국적으로 피해 신고가 봇물처럼 올라올 것이다.일개 부처에서 손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국회 차원의 조사 활동은. -곧 시작할 것이다.공청회도 해야 한다. 박정경기자 olive@
  • 이 사람/ 제주 4·3희생자 유족회 이성찬 회장

    ‘4·3’이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일반적으로 ‘4·3’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지구 소속 한라산무장대가 미 군정 하의 경찰을 향해 본격 공격을 개시한 1948년 4월3일을 일컫는다.이후 제주도 전역이 전란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6년 6개월동안 군·경과 ‘산(山)사람’들로 인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된다.지난 2000년 1월12일 공포된 4·3특별법에 의해 공식 신고된 희생자수만 사망 1만 715명,행방불명 3171명,후유장애 142명 등 1만 4028명.신고 이전에 죽은 사람과 미신고자까지 포함하면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인 2만 6000명 정도가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4·3이후 산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가해졌던 ‘연좌제’라는 형벌 아닌 형벌이었다.이제 정부 등 각계의 노력으로 4·3이 제자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사건이냐,폭동이냐,항쟁이냐에 대한 답과 함께 산사람들에 대한 폭도·무장대·공비·해방군·유격대 등의 표현이 정리되려는 즈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55주기 4·3위령제를 앞둔 이성찬(59) 제주도 4·3희생자유족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은 새로운 감회로 올 4·3을 기다리고 있다. 4년여에 걸친 각고 끝에 4·3에 대한 진상이 곧 정부 차원에서 규명되고 희생자 유가족과 제주도민들의 숙원이던 4·3평화공원도 삽질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게다가 정부가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려는 기류도 흘러나오고 있다.그렇게 바라던 4·3특별법이 제정된 지도 3년이 지났다.이 회장의 얼굴도 종전에 비해 평안을 찾은 듯하다.머리숱이 많이 빠졌을 뿐이다. 유족회장으로서 4·3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학자가 아니라 정확히 정의하기는 무리지만 느끼고 경험하고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암울한 시대에 국가폭력에 의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죽어간 ‘민간인 학살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은 과거 교과서에 실린 내용과는 다른,자칫 ‘좌익적’이라는 오해를 살 만도 하다.그러나 그것은 기우(杞優)이고,‘화해’와 ‘상생’을 힘주는 데서 가장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4·3임을 깨닫게 된다. “4·3의 해법은 ‘화해’‘상생’이 답입니다.4·3특별법이 제정된 취지도 역시 지난 세기에 자행됐던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기에는 화해와 상생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당시 돌아가신 분들은 이념 때문이거나 누구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희생자일 뿐입니다.서로 위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4·3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의 해법대로 4·3문제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 회장의 마음이 편치는 않다.“대립각은 언제나 있을 수 있지요.지금도 4·3을 왜곡하는 사람들과 과거 문제를 들춰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단체나 소수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4·3유족회장으로 간곡히 호소합니다.이제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청산해 가신 임들의 넋을 달래고 희망의 불빛을 밝혔으면 합니다.” 이 회장의 고향은 제주시 오라동,사건 당시는 제주읍 오라마을이다.오라마을은 1948년 5월1일 ‘오라동 방화사건’으로도 유명하다.그에게도 ‘상처’가 없을 리 만무했다. “아버님은 1949년 토벌대의 공격이 너무 무서워 산으로 피신했는데 이후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귀순했으나 경찰은 다른 일행들과 제주읍 동부두 주정공장에 감금해 버렸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형무소로 이감됐고 6·25가 터지자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학살됐지요.”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어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일본으로 건너가 개가했고…,당시 5살이던 저와 동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슬하에서 ‘폭도자식’이라는 질시와 냉대를 받으며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한참 뜸을 들인 뒤 기자가 보상문제로 말머리를 돌렸다.“지금 보상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4·3 해결과정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다만 국가 공권력에 의한 잘못이었다고 밝혀진다면 향후 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고맙게도 지금 공동체적 보상 형태로 국가가 4·3평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인 만큼 오는 4월3일 착공할 평화공원 조성 예산을 정부가 적극 지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중하지만 할 말을 멈추지는 않는다. “4·3이 발발한 지 어언 반세기가 훌쩍 넘었습니다.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이 사건의 진상이 하루속히 정확히 드러나 당시 희생된 원혼들과 유족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 주었으면 하는 게 유족회장으로서의 바람입니다.난항을 겪고 있는 수형인들에 대한 희생자 결정도 4·3특별법 정신에 걸맞게 처리돼 4·3중앙위원회가 4·3의 실상을 가감없이 의결해 주기를 바랍니다.욕심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이 오는 4·3 위령제 때 참석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아마 오실 것으로 믿습니다.” 글·사진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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