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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산 철거민 참사] “옥상에 쓰러져 짓밟히고 맞았다”

    용산 화재참사 당시 건물 옥상에서 경찰특공대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생존자들의 주장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경찰은 폭행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어 검찰수사에서 진위가 가려질지 관심이 모아진다. 용산4구역 철거민측 김종웅 변호사는 27일 “입원 중인 부상자들 가운데 4명으로부터 경찰 폭행 진술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의 주장은 일관된다. 경찰이 망루 4층 꼭대기에서 옥상으로 떨어진 생존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순천향대병원에서 치료 중인 천모씨는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왼쪽 눈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천씨는 “급박한 상황이어서 몇명인지 기억은 못하지만 쓰러진 나를 경찰들이 군홧발로 짓밟았다.”고 말했다. 그는 온몸에 멍이 들고 발목 신경계통도 다쳐 정밀검사를 앞두고 있다. 김 변호사는 “천씨가 옥상에서 거적에 싸인 채 바닥에 방치돼 있었고 화재 진압을 위해 올라온 소방관들에게 ‘살려달라.’고 가까스로 외쳐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왼쪽 발목 부상으로 입원 중인 김모씨 역시 “망루에서 떨어질 당시 의식이 혼미했지만 경찰로부터 맞은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녹색병원에 입원 중인 생존자 2명도 동일한 진술을 했다. 부상자들이 망루에서 옥상으로 떨어진 직후여서 의식은 희미했지만 폭행 사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철거민 부상자들은 26일 기자회견에서도 경찰의 폭력 진압을 주장하며 엄중한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여성은 “망루가 기우는 상황에서 경찰특공대가 안으로 진입해 앞에 있던 남자의 머리를 발로 밟았고 나 역시 맞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현장을 지휘했던 경찰 특공대 제1제대장은 “내가 망루 현장엔 없었지만, 폭행은 전혀 없었다고 보고받았다.”고 반박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베이징 페럴림픽 알고 즐기자] (상) 비장애인 경기와는 다른 규칙

    [베이징 페럴림픽 알고 즐기자] (상) 비장애인 경기와는 다른 규칙

    베이징올림픽보다 더 진한 감동의 드라마가 이틀 뒤 시작된다. 제13회 베이징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이 6일 오후 9시(한국시간) 개회식을 시작으로 열전 12일에 들어간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가 주요 경기를 생중계하고 국내외 언론의 관심도 여느 때보다 뜨겁다. 대회 개막을 앞두고 패럴림픽 종목은 얼마나 다르고 경기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패럴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종목, 주목할 스타들을 3회로 나눠 살펴본다. 올림픽과 달리 패럴림픽에 참가하는 역도 선수들은 벤치프레스에서 바벨을 들어올린다.4년 전 아테네패럴림픽에서 세계기록(250㎏)을 작성한 박종철(90㎏급) 선수가 벤치에 누운 채 자신의 몸무게 3배 가까운 바벨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감동 그 자체. 정신지체 및 청각장애를 제외한 수영 참가자들은 영법에 관계없이 출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휠체어테니스 선수들은 공이 두 번째 바운드된 뒤 상대 코트에 넘겨도 된다. 패럴림픽에는 장애 정도에 따라 한 종목 안에서도 여러 경기가 열리기 때문에 여러 수상자가 나오게 된다. 올림픽 육상과 수영의 금메달은 각각 47개와 46개였지만 패럴림픽에선 160개와 140개가 나온다. 장애 유형에 따라 참가가 제한되는 경기가 있는 건 물론이다. ●수영 출발은 각자 선택 기초종목 중의 으뜸 육상 트랙에선 시각장애인들이 길잡이들과 함께 뛴다. 선수의 팔꿈치를 잡고 뛰거나, 끈으로 인도하는 방법, 서로 나란히 뛰는 방법 중에서 고르고 길잡이로부터 구두로 지시를 받는 것도 허용된다. 또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곤봉던지기 종목이 따로 있다. 2회 바운드가 허용되는 휠체어테니스에서 첫 번째 바운드는 반드시 코트 안에 닿아야 하지만 두 번째는 바깥이어도 괜찮다. 휠체어를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반드시 하드코트에서 경기를 진행한다. 수영의 출발 방법은 풀 사이드와 출발대, 물속에서 출발 등을 스스로 선택한다. 물속에서 출발할 때는 반드시 한 손을 벽에 대고 있어야 한다. 벽을 잡을 수 없을 때에는 코치의 손을 잡을 수도 있지만 코치가 선수 손을 밀어주면 실격 처리된다. 시각장애 선수가 터닝할 때 벽에 닿은 것을 알려주기 위해 심판이나 코치가 머리나 등을 두드릴 수 있다. 청각장애 선수들은 깃발을 보고 스타트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 유도 경기는 주심이 두 선수를 서로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자리잡게 한 뒤 경기를 시작하는 게 특징. 청각장애인은 음성신호 대신 선수의 몸을 건드린다든지 수신호로 심판 판정을 전달한다. 조정은 팔만 쓰는 종목, 팔과 몸통을 쓰는 종목, 팔다리와 몸통을 모두 쓰는 종목 등이 있다. ●좌식배구 엉덩이 떨어지면 반칙 탁구는 1∼5등급까지는 휠체어에 앉은 채 경기를 벌이고 6∼10등급까지는 서서 경기한다.1∼2등급은 라켓을 붕대로 몸에 묶어 고정시킨 채 경기에 나선다. 휠체어복식에서 선수들의 휠체어는 테이블 센터라인을 가상으로 연결해 놓은 선을 넘어선 안 된다. 이럴 경우 심판은 상대의 1득점을 선언한다. 휠체어 경기에선 공이 거꾸로 돌도록 하는 커트서브를 할 수 없다. 시각장애 선수는 특별히 소리나게 제작된 공을 네트 위가 아니라 아래로 쳐서 상대 테이블에 넘겨야 한다. 좌식배구는 공격, 블로킹, 서비스할 때 엉덩이를 지면에서 들어올리면 반칙으로 간주되고 일어서거나 스텝을 밟는 수비 역시 반칙이다. 휠체어럭비는 남녀 혼성 선발이 가능하다.4명이 나서며 후보 8명이 뒤를 받친다.8분씩 4피리어드로 진행되는데 공을 갖고 있는 선수의 휠체어 두 바퀴가 상대 키에어리어 안의 엔드라인에 닿으면 득점이 인정된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Beijing 2008] 리듬체조 신수지 ‘희망의 12위’

    한국 리듬 체조의 희망 신수지(17·세종고)가 아쉽게 결선진출에 실패했다. 신수지는 22일 베이징공과대학 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리듬체조 개인종합 예선에서 전체 24명 가운데 12위를 차지했다. 리본에서는 16.850점, 곤봉에서는 16.600점을 받아 최종합계 66.150점이 됐다. 리본 7위, 곤봉 9위로 선전한 신수지는 전날 14위에서 순위를 두 계단 끌어 올렸지만 10위까지 진출하는 23일 결선에는 나가지 못하게 됐다.10위로 결선 막차를 탄 알무데나 시드(스페인)와는 0.675점 차이로 12위에 그친 신수지는 본선 출전 선수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대신 나갈 수 있는 리저브 2명 안에는 들었으나 실제 뛰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선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신수지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리듬체조 출전권을 따냈다.베이징 올림픽특별취재단
  • 앰네스티 “경찰, 촛불 과잉진압”

    앰네스티 “경찰, 촛불 과잉진압”

    지난 2주간 촛불집회 현장을 조사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경찰의 과도한 진압 과정에서 인권침해 사례가 있었다며 한국 정부가 이를 철저히 조사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조치를 마련할 것 등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노마 강 무이코(41·여) 조사관은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권력 행사 과정의 인권침해 사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한국정부는 평화로운 촛불 시위대에 과도한 무력을 행사한 경찰의 인권침해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촉구했다. ●“촛불 배후 없고, 전의경 생활 열악” 무이코 조사관은 지난 4일 방한해 인권활동가·변호사·의료지원단·경찰폭력피해자 등 시민 52명과 경찰·법무부·외교통상부·청와대 관계자, 부상당한 전의경 등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무이코 조사관은 이날 회견에서 “경찰이 평화로운 시위대에 과도한 무력을 행사했고, 인도에 있는 사람도 자의적으로 체포했으며, 구금시 의료 조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시민단체 활동가를 표적으로 삼아 탄압했고, 한 여성을 5명 이상의 경찰들이 둘러싸 머리를 밟고 곤봉으로 때리는 등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처우를 했다.”고 지적했다. 또 “경찰이 근거리에서 물대포와 소화기를 발사하는 등 비살상 군중통제 장비를 남용했다.”고 밝혔다. ‘촛불 배후론’에 대해 무이코 조사관은 “지도자도 없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의지로 참석하면서 집회는 유기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주도세력이 있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시위대가 경찰에 대항해 폭력을 행사하고 차량을 파손한 것도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경찰의 폭력에 시민들의 분노가 증폭된 측면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전의경 제도에 대해서는 “20∼22세의 어린 나이에 징집된 젊은이들이 전의경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면서 “수면부족과 불규칙한 생활에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진압현장에는 이들을 위한 의료진조차 없었다.”고 강조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이번 조사 결과를 이날 전 세계에 배포했으며,2009년 발간 예정인 연례보고서에 포함시킬 계획이다. ●법무부 “과격 촛불에 최소한의 공권력 조치” 이에 대해 법무부는 “촛불시위와 관련된 공권력 행사는 일부 과격한 폭력행사 등을 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당한 조치로, 피해로 인한 고소고발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반박했다. 경찰청도 “(조사결과는) 주최측의 일방적인 주장이 대부분 반영된 것으로, 객관성과 공정성이 결여돼 있다.”고 비판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무협지 발끝에 중국이 있다(상)

    무협지 발끝에 중국이 있다(상)

    자네 받으시게. 속세를 떠나 두문불출, 면벽수행한 지 꽤 흘렀네. 벽지(僻地)에 박혀 지낸다 해도 바람이 툭툭 떨어뜨리는 세상 소식 몇 자락은 들리기 마련이라, 애쓰지 않아도 바깥세상 돌아가는 모양은 대강 알고 있었지. 김용의 소설이 새 단장을 해서 나왔다지 아마. 감회가 새로웠네. 불멸의 무엇인가를 꿈꾸며 불면의 밤을 보낸 청춘이 내게도 있었지. 자네는 아는가. 그 잠 못 이루던 시절, 김용을 탐독하며 밤을 지새운 것을. 한낱 무협지라 폄하하지 말게. 어지러운 세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의인들이 살아 숨 쉬는 무협 덕분이었으니. 문득 궁금하더군. 위대한 이야기를 잉태해 거대한 소설로 뿜어내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그리하여 떠난 걸세. 김용의 《의천도룡기》를 벗삼아. 영화를 보면 신기(神技)에 가까운 무공을 뽐내며 악의 무리를 쓸어버리는 고수들이 있지. 그들은 어쩌면 소림사에 빚을 지고 있네. 영화가 소림무술을 직접 차용한 것이 아니라 해도, 오늘날 중국 무술의 대부분은 소림사의 명성에서 비롯된 게 많거든. 사방팔방 이름을 떨치는 소림무술은 중국 무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세. 달마도를 통해 잘 알려진 달마대사가 만든 18수가 소림권의 기원이라는 말이 있네. 소림사는 여기에다 중국 각지에 퍼져 있는 전통 무예를 흡수하여 제 식으로 발전시켰지. 소림사는 오악(五嶽) 중 하나인 숭산(嵩山)에 있네. 오악이라 함은 중국의 대표적인 산악 다섯 군데를 말하지. ‘우뚝솟을 숭’자를 쓰는 숭산은 자연경관이 빼어나 절경을 이루네. 게다가 4대 서원의 하나인 숭양서원(嵩陽書院), 가장 오래된 측백나무 장군백(將軍柏), 원나라 때 건립된 천문대인 관성대(觀星臺) 등 명성이 자자한 문화유산이 많으니 그 이름이 잘 어울리는 곳이네. 소림사에 당도하면 제일 먼저 사람을 반기는 것은 ‘숭산소림’이라 새겨진 커다란 돌기둥이라네. 중국 각지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지. 때마침 소림사 승려들의 시범 공연이 있다 하여 공연장으로 갔네. 높은 천장, 화려한 조명 등 현대식으로 잘 꾸며진 공연장으로 갔지. 잿빛 도복을 입은 소년 승려들이 등장하여 각종 무술을 선보였네. 사마귀의 모습을 본 딴 당랑권(螳螂拳), 뱀처럼 움직이는 사권(蛇拳), 원숭이를 흉내 낸 권법 등 독특한 무술이 펼쳐졌지. 동작 하나만 봐도 해당 동물이나 곤충이 연상될 정도로 특색 있는 권법이었어. 곤봉이나 창, 도(刀)와 검(劍)을 이용해 아슬아슬한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어. 그중에는 뾰족한 창끝에 올라가 배를 깔고 엎드려서는 온몸의 무게를 지탱해내는 무술도 있었지. 정신을 잠깐이라도 놓으면 창이 몸으로 관통할 정도로 위험한 무술이었어. 무협지의 무술에는 허풍과 과장이 다소 있겠지만 온갖 무술을 내 눈으로 보고 나니,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두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네. 그런데 그토록 보고 싶었던 소림무술을 다 관람하고 나니 마음이 허전했어. 외상(外傷)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했을 수련생들, 심신의 수련보다 보여주기식 무술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공연환경이 떠올랐네. 게다가 선종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소림사의 명성이 불법(佛法)보다는 기기묘묘한 무예에서 비롯된 것일까 생각하니 씁쓸했어. 다 내 기우이길 바랄 뿐이야. 관객의 요란한 박수에서 벗어나 공연장 바깥으로 나왔네. 먼 산에 눈길 주며 서 있는데 갑자기 내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네. 공연장 근처에는 소림권법의 동작을 취하고 있는 조상(彫像)이 있네. 매우 크고 위풍당당하지. 그런데 그 근엄한 상(像) 중 하나가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품위에 어울리지 않게 콧물이라니? 그 모양새가 너무 우스워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 저런! 날이 추워 하필이면 콧구멍 아래에 고드름이 달린 것이었어.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콧물이었지. 그래, 소림사의 어린 승려들도 이렇게 재미난 풍경 하나 사물 하나를 찾으며 깔깔 웃겠지. 공연장에서 벗어나 소림사 안으로 깊이 들어오면 바깥과는 달리 사뭇 엄숙하고 경건하네. 절 곳곳에 서 계신 스님들에게 말이라도 붙일라치면 자리를 뜨는데, 일행의 말에 따르면 스님들은 관광객, 특히 여자 관광객과 말을 나누는 게 금지되어 있다고 하네. 일상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모양일세. 불상 앞에서 카메라를 마구 눌러대는 관광객들에게 찍지 말라고 조용히 손짓하는 스님들도 계시네. 불상을 카메라에 담으면 부처의 영험함이 사라진다는 속설도 있지만, 부처의 영험함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겠는가. 예서제서 번쩍번쩍 터지는 플래시와 브이를 그리며 사진을 찍는 이들이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 소림사도 절인지라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러 찾아오는 이들이 꽤 많아. 여기서도 향을 피우거나 작은 촛불을 밝혀 마음을 올린다고 하는데, ‘불(佛)’자의 모양을 본뜬 커다란 촛대가 인상적이었네. 보통 사람들의 몸집보다도 더 큰 촛대에, 속계의 소망과 염원이 불을 밝히면 그 모습은 어떠할까. 소림사에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린 것은, 잠시 그 불을 끄고 마음의 불을 밝히라는 부처의 뜻이 아닐까. 서기 496년 북위 때 창건된 소림사는 당나라 때에는 호시절을 누렸지만, 1928년에는 군벌 하나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다 사라져버렸다네. 그 까닭에 지금 보는 건물들은 이후에 지어진 것이 많아. 왕조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 소림사도 그에 따라 부침을 겪는 것이지. 요즘 소림사가 맞닥뜨린 현실은 무엇일까. 소림사의 명성에 기대어 아랫동네에 즐비한 무술학교, 명성이 높아질수록 사방팔방에서 몰려오는 관광객,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관광지로 단장해야 하는 운명. 그리하여 무예의 산실이나 심신의 수련장인 소림사는 퇴색하고 볼거리 위주로 재편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들지. 중국의 문화재와 유적을 상품화하여 수익을 올리려는 중국 정부의 노력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우선시하는 현대인의 부박함 때문인지도 모르네. 소림사를 거니는 내내 《의천도룡기》에서 만났던 공견 스님과 같은 대덕고승은 과연 어디에 계신지 감지되지가 않았다네. 수시로 물밀듯이 찾아오는 소란함을 피해 아마 어느 깊은 곳에서 수련을 하시는 것이겠지. 세상이 어지러울 적에 원로고승이 그 모습을 드러냈듯, 아직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이 어찌해볼 수 있는 세상인가 보네. 그러니 자네나 나나 정진하며 내공을 꾸준히 쌓도록 하세. 은둔하는 자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법. 세상을 마음의 눈으로 볼 때 분명 무림고수들이 미소를 보낼 걸세. 그럼 나는 소림사 탑림을 마저 돌겠네. 건강하시게.(계속) 글·사진 홍민 자유기고가       월간 <삶과꿈> 2008년 7월호 구독문의:02-319-3791
  • [열린세상] 정부는 ‘법치주의’를 버리려는가/하승수 제주대 법학부 교수·변호사

    [열린세상] 정부는 ‘법치주의’를 버리려는가/하승수 제주대 법학부 교수·변호사

    미국산 쇠고기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정부가 점점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가 아니라 선거로 선출된 정부’라는 것을 명분으로 강경진압을 밀어붙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촛불시위 때문에 ‘법치주의’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법치주의에 대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우선 선거로 선출된 정부라고 해서 잘못된 공권력 행사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파시즘의 대명사로 꼽히는 히틀러도 상당한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집권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법치주의’라는 단어도 제대로 쓰여야 한다.‘법치주의’의 반대말은 불법 시위가 아니라 ‘권력자에 의한 자의적인 지배’이다. 본래 ‘법치주의’는 공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온 원리가 아니라, 공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온 원리이다. 즉 전제적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에 맞서, 법 앞의 평등과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법에 의한 지배’를 하려는 것이 법치주의인 것이다. 사실 ‘법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행태를 보여 왔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에 임기가 남아있는 공공기관장들에 대해 법적인 근거도 없이 사표를 종용했다.‘법의 지배’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태였다. 임기제를 통해 공공기관장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이고 ‘법치주의’이건만, 이명박 정부는 임기제 정착을 위해 그동안 해 왔던 노력들을 한순간에 무산시켰다. 그리고 최근에는 촛불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을 하고 있다. 그 명분은 ‘법치주의’ 회복이다. 그러나 일부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법치주의’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시위진압 경찰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법치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 국민이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해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법치주의’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법 어디에도 경찰이 누워있는 시위대를 발로 밟고 곤봉으로 내리치고 방패로 찍으라고 하는 내용은 없다. 그런데 지난 6월28일 밤 경찰은 비폭력적으로 누워있는 YMCA 이학영 사무총장을 비롯한 시민들을 밟고 내리치고 찍어서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이런 초법적인 폭력진압을 묵인하는 정부는 ‘법의 지배’와는 거리가 먼 정부이다. 또한 ‘법치주의’의 기본은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수사권, 감사권을 휘두르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PD수첩의 보도가 일부 공정하지 못했다고 치자. 보도가 공정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다고 해서 특별수사팀을 꾸려 수사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한다지만,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국가와 국민의 명예를 훼손한 장본인은 언론이 아니라 졸속협상을 주도한 사람들이다.KBS에 대한 특별감사, 네티즌들에 대한 수사 등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비판의 자유’를 억누르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권력기관들이 정권 핵심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면, 법치주의가 유린되었던 독재정권 시절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오히려 현 정부야말로 ‘법치주의’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중단하고, 시위에 대한 불법적인 과잉진압을 중단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법치’를 통해 ‘선진화’를 달성하겠다고 한 정부다. 그런데 지금의 행태는 ‘선진’이 아니라, 후진기어를 넣고 페달을 밟는 것이다. 법치가 아닌 ‘자의적 통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리는 이런 행태는 정권에도, 국민에게도 모두 불행한 일이다. 하승수 제주대 법학부 교수·변호사
  • 주말 48시간 촛불집회 폭력 격화

    주말 48시간 촛불집회 폭력 격화

    경찰이 야간 촛불집회 원천봉쇄에 들어간 29일 촛불집회는 사실상 열리지 못했다. 촛불집회가 예고와 달리 열리지 못한 것은 지난달 2일 촛불집회가 시작된 뒤 처음 있는 일이다. 경찰은 전·의경 11개 중대 1000여명과 경찰버스 30여대로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서울광장 주변을 1∼2겹으로 에워쌌다. 광장 주변에 주차됐던 대책회의와 화물연대의 무대차량를 견인해 갔고, 항의하던 시민 16명을 연행했다. 이에 따라 시위대는 명동, 종각, 동대문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인 뒤 종로1가 보신각 앞에 모여 농성을 벌였다. 사전체포영장이 발부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지도부는 이날 연락이 닿지 않았으며, 대책회의 일부 인사는 농성에 동참했으나 집회를 주도하지는 못했다. 집회를 생중계해 왔던 일부 인터넷 뉴스들은 방송 장비가 물에 젖어 이날 방송을 하지 못했다. 농성에 참여했던 노회찬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경찰이 집회와 시위를 일시적으로 해산할지 모르지만 국민 마음속의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란색 형광 염료 물대포 첫 사용 앞서 2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는 경찰 추산 1만 8000여명(주최측 추산 20만여명)의 인파가 모여 ‘6·10 촛불대행진’ 이후 가장 많았다. 경찰과 시민들은 전경버스를 사이에 두고 양측 모두 폭력을 동원하며 대치했다. 경찰은 시민들이 경찰버스를 흔들자마자 오후 8시50분쯤 물대포를 뿌렸고, 일부 시위대는 쇠파이프 등으로 버스를 부쉈다. 경찰이 조기 해산 작전에 들어가자 흥분한 시위대는 깃대등으로 전경버스의 유리창을 부수고 계란과 돌, 물병 등을 던졌다. 시위대는 고립된 경찰의 살수차에서 빼낸 소방호스를 인근 건물 소화전 등에 연결해 경찰에게 즉석 물대포를 쏘는 등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벌어졌다. 오후 11시50분쯤 시위대가 일부 경찰차량을 끌어내자 경찰은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전경들은 노약자와 여성 등을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내리쳤다. 소화기, 쇠파이프, 각목 등을 시위대를 향해 집어던졌고 진압봉과 방패를 마구 휘둘렀다. 일부 흥분한 전경들은 곤봉에 맞아 도로에 넘어진 시민에게 몰려들어 짓밟기도 했다. 전경들은 이를 말리던 시민들을 폭행했고 인도까지 올라가 시민들을 무차별로 때렸다. 일부 시위대가 휘두른 쇠파이프와 각목 등에 전·의경의 부상도 이어졌다. 한 전경은 시위대에 폭행당해 뇌진탕 증세를 앓고 있고, 한 20대 여성은 전경들로부터 집단으로 폭행을 당해 오른팔이 골절됐다. 파란색 형광 염료를 넣은 물포가 처음으로 사용됐다. 경찰 부상자는 자체 추산으로 112명, 시민 부상자는 대책회의 추산으로 300여명이다.55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밤샘 시위는 29일 오전 7시쯤 남아 있던 시민들이 자진해산하며 끝났다. ●경찰, 대책회의 간부 2명 첫 구속 한편 경찰은 서울 지하철 경복궁 역앞 기습시위 현장에서 검거된 대책회의 안진걸(35) 조직팀장과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윤희숙(32·여) 부의장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주최측 간부가 구속된 건 처음이다. 대책회의는 기자회견을 열고 “80년대 군사독재를 방불케 한 폭력 경찰의 만행은 평화적인 시민을 폭력 시위자로 매도함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탄압의 명분을 획득하려는 것”이라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시위에 대해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게임’이라고 했지만 지금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건 바로 국민들”이라고 주장했다. 김승훈 장형우 황비웅기자 zangzak@seoul.co.kr
  • 시위대·경찰 둘다 “폭력의 가해자”

    시위대·경찰 둘다 “폭력의 가해자”

    주말 촛불시위 과정에서 국회의원이 경찰에 맞고 경찰 간부가 시위대에 잡혀 취조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통합민주당 강기정 의원은 29일 오전 1시 서울 태평로 화단에 서 있다가 전경 1명으로부터 곤봉으로 허리를 얻어맞아 부상당했다고 주장했다. 강 의원은 1시30분쯤 김석기 경찰청 차장을 면담해 “내가 오늘 폭력시위를 했느냐. 가만히 서서 ‘국회의원이다’고 밝혔는데도 (전경이) 갑자기 곤봉으로 찍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차영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현역 국회의원을 곤봉으로 폭행한 것은 헌정사상 유례없는 일”이라면서 “어청수 경찰청장을 비롯한 폭력진압 지휘라인의 총사퇴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여대생 군홧발 폭행’ 사건이 벌어진 지 한 달여 만에 전경이 쓰러진 여성을 발로 짓밟고 곤봉으로 무차별 가격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0시30분쯤 서울신문사 앞에서 장모(25·여·경기도 평택시)씨가 넘어졌고, 전경 5∼6명이 장씨를 둘러싸고 온몸을 발로 밟고 곤봉으로 수차례 내리쳤다. 장씨는 “살기 위해 몸을 굴렸지만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오른팔이 부러지고, 전신 타박상을 입었다. 이에 대해 경찰청 장전배 경비과장은 “50여명의 전경이 고립됐다가 풀려나 흥분한 것 같다.”면서 “넘어진 여자를 때리는 건 비겁한 행위다. 감찰에서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7일 오전 1시20분쯤 서울광장 인근에서는 남대문경찰서 강력1팀 오모(47) 경위가 시위대에 붙잡혀 취조를 당했다. 시위대가 호텔 기물을 부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코리아나 호텔로 출동한 오 경위는 호텔 앞에서 대형화분을 엎고 흙과 쓰레기를 로비 안으로 뿌리는 등 난동을 부린 한 50대 남성을 체포했다. 오 경위가 타고 온 승합차 뒤 좌석에 남성을 태우자, 그는 바깥에 있던 시위대에 “잡혔다.”고 소리를 질렀고 시위대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 경위가 형사라고 신분을 밝혔지만 시위대는 오 경위를 서울광장 구석에 설치된 ‘칼라TV’(진보신당이 제공하는 인터넷 방송) 천막 부근으로 끌고 갔다.50대 남성은 그 사이 사라졌다. 오 경위에게는 “(경찰이라면서) 왜 사복을 입고 시민을 납치했나.”는 등의 질문이 쏟아졌으며, 오 경위는 1시간10분 뒤에 부근의 동료들에게 인계됐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국회 한달째 공전

    18대 국회가 공식 임기를 개시한 지 30일로 한달째를 맞는다. 한나라당은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 발효를 계기로 국회를 조속히 정상화하자며 단독 개원을 시사하는 등 야권을 압박하고 있다. 반면 통합민주당 등 야권은 고시의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장외 투쟁을 가속화하고 있어 정국 경색이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날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가 통합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와의 회동에서 국회 정상화를 위한 14개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양당의 전격적인 합의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도 여당은 야당에 등원할 수 있는 명분을 주고, 야당은 원구성 협상 등에서 실리를 얻은 뒤 국회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18대 국회가 첫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다음달 4일까지 개원이 안 될 경우 국회 사상 최초로 첫 임시회 기간에 의장단이 선출되지 못하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 국회는 국회법(5조 및 15조)에 따라 임기 개시 후 7일 내에 첫 회의를 열어 국회의장단을 뽑아야 한다. 국회의장에는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이 내정됐으나 야권의 등원 거부로 공식 선출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다음달 17일 제헌절 60주년 기념식 행사를 위해 100여개국 귀빈에게 초청장을 발송해야 하지만 국회의장이 선출되지 않아 초청장 발송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가 장기 공전함에 따라 각종 폐해도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7월 시행을 목표로 국회에 제출한 고유가 극복 민생종합대책을 비롯해 각종 경제살리기 법안 처리 지연이 불가피한 실정이다.18대 개원 이후 지난 25일까지 총 88개 의안이 발의됐으나 상임위원회 회부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문 못여는 국회… 폐해 속출 여기에다 유엔 레바논 평화유지군의 파견 시한이 다음날 18일로 끝나 국회가 파견 연장 동의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평화유지군 주둔 자체가 위헌이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29일 오전 원혜영 원내대표와 국회 농성장에서 한시간 반 정도 얘기했다.”며 “이번주 초에 다시 만나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기로 했다. 임시국회 회기 마지막날인 다음달 4일까지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며 여야 합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원혜영 원내대표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국회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명분과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등원한다. 등원은 여당의 결단에 달렸다.”고 한나라당을 압박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는 조기 등원론에 여전히 부정적이다. 지난 27일 안민석 의원이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폭행을 당한 데 이어 28일에는 강기정 의원이 경찰에 곤봉으로 허리 부위를 얻어 맞고 김재균·이용섭 의원도 소화기 분말 세례를 받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차영 대변인은 이날 어청수 경찰청장의 사퇴와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전문가들 “여야 지혜 모아야” 정치학자와 전문가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대타협을 통해 국회 정상화를 조속히 이뤄낼 것을 주문한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여당은 야당에 명분을 줄 부분을 세세하게 고민해야 하고, 야당은 적당한 명분이 있으면 받아야 한다.”며 양측의 성의 있는 협상을 촉구했다. 김 교수는 “국회 개원 여부는 한나라당이 키를 쥐고 있는 만큼 대폭 양보해야 한다.”며 “가축전염병 예방법과 관련해 자유투표를 한다고 했으면 진정한 자유투표가 이뤄지도록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 컨설턴트업체인 폴컴의 윤경주 대표는 “한·미 쇠고기 수입 추가협상 이후에 장관고시, 관보게재 과정에서 정부와 여당이 전략·전술적으로 무리수를 둔 측면이 있다.”며 “야당과의 협상과정에서 법사위원장을 양보하는 등의 성의를 보이면 개원 협상의 가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제안했다. 김윤재 변호사도 “청와대가 국회 개원의 키의 많은 부분을 쥐고 있는 만큼 야당에 해줄 수 있는 몫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종락 홍희경 한상우기자 jrlee@seoul.co.kr
  • [건국 60주년] 공권력에 대항한 민주화 세력들

    1960년 4월19일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해 학생들과 시민들이 달려간 곳은 경무대였다.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저항의 본거지로 처음 찾아 나선 곳은 도청이었다. 광장에서 시작해 권력의 중심으로 달려가는 시위의 양상은 2008년 촛불시위에도 이어지고 있다.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부정선거에 맞서 거리로 달려 나왔던 학생과 시민들은 군경의 총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집무실인 경무대로 향했다. 이른바 ‘피플 파워’는 한때 ‘국부’로 추앙받기까지 했던 절대권력을 무너뜨렸다.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 전까지 집회·시위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략과 전술이 필요했다. 경찰은 대학 내에 이른바 ‘학원CP(Command Post)’를 차려놓고 정보과 형사들과 사복으로 변장한 전경들을 상주시키면서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했다. 희생양이 되기로 각오한 한 명이 유인물을 뿌리면서 학교 광장을 내달리면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곧 최루탄이 터지면서 전투경찰의 곤봉세례가 이어졌다. 청와대로 달려갈 수 없었던 당시 대학생들의 분노는 독재정권의 탄생을 묵인했던 미국을 향했다.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3년 뒤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으로 이어졌다. 산발적인 거리시위가 있었지만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선 것은 1987년이었다. 연일 이어지는 호헌철폐의 요구는 거리에서 시작해 명동성당으로 이어졌다.1980년 5월의 봄 이후 7년 만에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안고 100만 시민이 다시 거리에 섰고, 이미 군사정권의 양보를 얻어낸 뒤였다. 그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건장한 팔뚝에 검푸른 작업복을 입은 남성노동자들이 시위의 전면에 나섰다. 주로 캠퍼스에서 시작해 거리로 나갔던 시위대는 이제 바리케이드를 쌓아 올리고 파업현장을 지키는 것으로 변모했다. 이후 1990년대 대학의 시위는 이적논쟁에 시달리며 잦아들었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국가경쟁력 논리에 부딪쳤다.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광장과 거리를 ‘밟는 맛’을 깨달은 대중은 미군 장갑차 사건과 2004년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다시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 대신 공감과 나눔을 상징하는 촛불을 들었다. 올해 촛불의 행렬은 청계천과 서울광장을 출발해 거리를 거쳐 청와대로 향했다. 이번에 촛불을 들기 시작한 소녀들은 공권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시위여성 폭력진압 파문

    31일 밤과 1일 새벽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경찰의 과도한 강경대응을 촬영한 동영상 등이 온라인을 통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신문에는 경찰이 넘어진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동영상에서 경찰은 시위대를 막기 위해 세워둔 좁은 버스 사이로 지나가던 시위대 중 한 젊은 여성을 홱 가로채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이어 군홧발로 여성의 머리를 밟고 곧이어 힘껏 걷어찼다. 여성은 구타를 피해 전경버스 밑으로 피했고, 경찰간부(경정)가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취재를 막는 모습도 고스란히 화면에 잡혔다. 또한 도망가는 시민의 머리를 곤봉으로 가격하는 사진도 공개됐다. 이에 네티즌들은 “끔찍하다.”면서 “경찰을 잡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 관계자는 이 동영상에 대해 “서울경찰청이 감찰 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사실로 드러나면 관련자에 대해 징계, 인사조치, 사법처리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서도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시간만 끌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촬영만 안 됐을 뿐 경찰의 방패에 찍히는 교묘한 폭력은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봄 기운이 완연한 요즘,30대 직장인들의 술자리에는 ‘벚꽃 구경’과 함께 ‘백골단’이 단골 메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경찰이 불법 시위 엄단 조치의 하나로 발표한 ‘체포 전담반’이 90년대 중반까지 시위 현장에서 흰색 헬멧을 쓰고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던 ‘백골단’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봄과 함께 시작되곤 했던 대학가 시위와 ‘백골단’을 둘러싼 30대들의 추억을 들어봤다. 90학번인 조모(37)씨는 봄만 되면 등줄기가 욱신거린다. 실제 상처가 남아 있다기보단 그저 화인처럼 남아 있는 곤봉 폭행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이던 90년은 수업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다. 매일 현장 노동자들이 파업 진압에 픽픽 쓰러지고, 농민들은 시장 개방에 비쩍 말라갔다. 책을 든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시절 조씨에게 ‘백골단(白骨團)’은 공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1991년 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학과 동료를 위해 법원 마당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 앞에 전·의경들이 서 있었고, 경찰 기동대장은 해산을 요구했다.“평화시위를 해산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한 지 10여분 뒤. 청재킷과 흰 운동화, 몽둥이를 든 백골단이 전·의경 머리 위로 날아오르듯 확 튀어나오더니 시위대를 마구 팼다.“몸집이 참 큰 사람들이었죠. 그저 공포였습니다. 철거예정지에 가면 가끔 조폭들과 연계해 나타나기도 했죠. 대학생들이 왜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냐고 말들 많지만, 배우는 학생들이 주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게 21세기가 원하는 협동심과 리더십을 공유한 사람이 되는 길이죠.” 직장인 이모(36)씨도 봄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벚꽃놀이 갈 생각에 설레는 게 아니라 대학 새내기 시절인 91년 봄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학교 앞 집회에서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매일 집회가 계속 됐죠.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 굉음과 강의실까지 스며드는 최루가스가 절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집회가 시작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강의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강씨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관대생 김귀정씨도 을지로 골목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숨졌다. 이후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고, 매일 대규모 집회가 서울시청 주변에서 열렸다.“서울시청 광장을 놓고 백골단·전경과 매일 싸웠죠. 지금 생각하면 다른 장소도 많은데 왜 꼭 서울시청 광장만 고집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씨는 91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청바지·청재킷에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과 명동, 시청, 종로, 을지로 거리에서 숨바꼭질을 계속했다.“백골단은 전·의경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력’을 보유했죠. 한마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경찰이 바로 백골단이었습니다. 두꺼운 진압복을 입은 전·의경은 그저 특정 장소를 지키는 일에 주력했지만, 백골단은 검거가 목적이었죠. 백골단에 잡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뛰었던지….” 최근 경찰이 체포 전담반을 꾸린다고 하자 이씨는 가슴이 벌렁거린다.“지금이 대체 어떤 때입니까. 진짜 과거의 백골단을 다시 만든다는 얘기는 아니겠죠?” ●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대상´ 통일운동가 황선(34·여)씨도 씁쓸한 추억담을 털어놨다.92학번인 황씨는 같이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백골단에 의해 숨지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참 많이 닦아냈다고 돌아본다.“87년 민주화 이후에 집회시위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백골단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죠. 당연히 집회 참가자들은 더욱 분개했고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운동가 안진걸(37)씨도 백골단에 대한 ‘추억’ 아닌 ‘추억’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 안씨는 백골단이 단순히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존재’였다고 말한다.“무작정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백골단이 누가 시위대고 누가 시민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죠. 이유도 모른 채 다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한군데 하소연할 때도 없었습니다.” 96학번인 대학생 황모(31)씨는 백골단의 끝물을 맛봤다.97년 노동절 집회 때 한양대 근처에서 당한 토끼몰이식 폭행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집회는 80년대와는 달리 선배의 강압 없이, 자기 생각대로 나가든 말든 결정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경찰은 96년 있었던 한총련 집회 뒤 또다시 강경 진압을 남발했다. 집회에 갔다가 여자 후배 한 명과 함께 백골단에 쫓겼고 여자 후배를 멀리 피신시킨 뒤 자신만 집중 폭행을 당했다.“백골단은 시위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생겼던 조직입니다. 해외에도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리는 경찰들이 있지만 이들은 최소한의 방어선을 유지하다 시위대가 흥분해 주변 시민을 위협하면 그제서야 곤봉을 듭니다. 무조건적인 체포와 폭력진압을 위주로 하는 백골단과는 성격이 다르죠.” 중학교 교사가 된 96학번 이모(31·여)씨는 같은 대학, 같은 학번 노수석씨를 기억한다.96년 초 새내기였던 이씨는 선배들의 권유로 등록금 투쟁에 나섰다. 이씨는 “당시에도 등록금은 치솟고 있었고, 신입생 때는 무엇이든 참여하고픈 생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남대문에 다다르자 ‘등록금 투쟁’ 구호는 ‘정권 타도’로 바뀌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느낄 무렵 최루탄이 터졌다. 이씨는 남자 동기의 손을 잡고 서울역 방향으로 무조건 뛰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백골단이다. 남대문엔 골목이 많다. 큰길로 뛰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었다.“대부분 서울역으로 뛰었죠.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 노수석씨를 비롯한 몇몇이 골목으로 뛰었다는 거예요. 골목은 목격자도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데….”결국 노씨는 백골단에 폭행당해 숨진 채 발견됐다.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유모(32)씨는 백골단하면 촌스러운 청재킷이 떠오른다.96년 여름, 신분증 검사도 떠오른단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측은했다고 말했다.“연세대에서 8월 사태가 있었죠. 그리고 교문을 들어갈 때면 신분증 검사를 해야 했어요.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위에서 시킨다고 폭력까지 휘둘렀던 백골단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백골단으로 불리는게 너무 싫었어요” 90년대 초반 광주에서 ‘백골단’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던 전남지방청 소속 한모(44) 경사에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누가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당시엔 초임 경찰관 가운데 덩치가 좋고 날렵한 사람들이 대거 검거전담반으로 차출됐죠. 백골단으로 불리는 게 너무 싫었는데…. 진압복도 입지 않은 채 대학생들이 휘두르는 쇠파이를 막느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더이상 그런 아픔은 없어야 겠죠.” 회사원 이모(32)씨는 98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다. 그가 기억하는 백골단은 시위를 진압하는 ‘최후의 수단’이다.“의경 입장에서는 하얀 헬멧과 청재킷만 봐도 힘이 났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대학생들 앞에서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백골단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씨에게 대학 시절 백골단은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지만, 전·의경 복무 시절 시위 현장에서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갑자기 시위와 관련된 모든 이론이 싫어졌어요. 어떤 생각도 뛰어넘은 평화주의자가 되고 싶었죠.” 사건팀 nomad@seoul.co.kr ■ 백골단을 아시나요? “백골단이요? 알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백골부대를 모르는 사람 있나요.” 백골단이 한창 활동하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코흘리개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벌써 어엿한 대학생과 직장인이 됐다. 그들에게 백골단은 그저 생소한 이름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회사원 김모(25·여)씨는 백골단을 백골부대의 다른 이름으로 알았다.“백골단, 유명한 부대잖아요. 여자인 저도 아는 걸요. 해골 부대 마크 있고…. 철원에 있잖아요. 백마부대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대 중 하나 아닌가요.” 백골단은 80∼90년대 활동했던 사복 시위 진압대라고 알려주자 김씨는 몹시 당황했다.“그런 진압대가 있었나요. 처음 들어봅니다. 아무리 그 당시 유치원생이었지만 우리 근대사의 일부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 부끄럽네요. 인터넷에서 좀 찾아봐야겠어요.” 새내기 대학생 정모(19)씨도 백골단을 부대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글쎄요. 왠지 군대쪽에 관련된 거 같긴 한데…. 학교 다닐 때 백골단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아직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안돼 잘 모르겠네요.” 정씨는 기자로부터 백골단의 의미를 알게 되자 되레 의아해했다.“정말 그런게 있었나요. 진짜 조선시대 이야기 같습니다. 당당하게 경찰복을 입고 진압하지 왜 치사하게 사복을 입고 진압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직장인 최모(26)씨도 백골단은 금시초문이었다. 최씨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모습을 담았던 영화 ‘화려한휴가’를 본 뒤 관련 책 등을 읽어봤지만 백골단은 난생 처음 듣는 단어였다. “사복경찰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그들이 백골단이란 이름으로 움직인 조직원들인지는 몰랐습니다. 고작 20여년밖에 안 된 일인데 정부가 교묘히 국민을 탄압했다는 사실에 그저 화가 나네요.”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조폭 뺨치는 교도관

    #1 부산교도소의 재소자 A씨는 2006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신청하려 했지만 교도관은 “내일 계구(戒具·사슬이나 수갑)를 풀어주려고 하는데 인권위에 진정하면 풀어주겠냐. 살아서 나가려면 잘 생각하라.”며 진정 신청을 막았다.#2 교도관 5명은 2006년 9∼10월 사이 5회에 걸쳐 재소자 B씨를 바닥에 넘어뜨려 배를 바닥에 깔고 팔과 다리를 등 뒤로 연결해 묶은 뒤 곤봉으로 때렸다. 하소연하는 B씨를 모포로 덮고 종이상자를 머리에 씌워 때렸다.#3 동맥파열로 수술을 받았던 재소자 C씨는 지난해 4월 의무과 진료를 요청하다가 오후 5시쯤 끌려가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사슬로 묶여있었다. 대변을 보기 위해 사슬을 풀어달라고 하자 교도관은 ‘그냥 싸라.’고 했다. 국가인권위는 24일 수감자에게 가혹행위를 저지른 당시 부산교도소 관구계장(6급) K씨 등 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수감자에게 함부로 계구를 사용하고 피해자들의 인권위 진정을 방해한 K씨 등 3명과 당시 부산교도소장(4급) 한모씨 등 모두 5명을 징계하라고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부산교도소 수용자 박모(33)씨 등 8명은 2006년 9월 팔다리가 묶이고 모포가 씌워진 채 곤봉으로 얻어맞는 등 여러 차례 교도관들의 폭행에 시달렸다고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는 폭행 장면을 목격한 다른 수용자들이 있고, 교도관들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으며, 피해자와 비슷한 수법으로 폭행당했다는 수용자가 많다는 점 등에서 폭행 사실이 일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부산교도소 내부 문서를 통해 교도소장이 과도한 계구 사용을 지시한 사실도 확인했다.2006년 10월1일∼2007년 3월31일 수용자에게 사슬을 사용한 총 시간을 집계한 결과 8254시간에 달했다. 이는 전국 11개 교도소가 계구를 사용한 시간(4886시간)의 2배에 가깝다.한 소장의 부임을 전후한 10개월간을 비교 조사한 결과, 부임 전에는 총 181시간 동안 사슬을 사용했지만 이후에는 3094시간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변호사도 무샤라프에 등돌렸다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파키스탄에서 변호사들의 저항이 거세다. 5일 AP·AFP통신과 미국 CNN방송 등 외신들에 따르면 카라치, 라호르, 라왈핀디에서 시위를 벌이던 변호사 가운데 적어도 1500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지난 3일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임시헌법령(PCO) 발동에 맞서기 시작, 이날 하루만 전국에서 1만여명이 집회를 갖는 등 본격화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난달 치러진 대선에서 육군참모총장직을 겸한 그의 후보자격이 적법한지를 놓고 대법원이 6일 결과를 발표하려 하자 전격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모든 헌법기능을 중단시켰다. 이들은 무샤라프의 퇴진 등 구호를 외치며 법원으로 행진하다가 곤봉을 휘두르고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밀려 주춤거렸다. 이날 펀자브 주도인 라호르에서는 2000여명의 변호사들이 고등법원 인근에 모여 정권퇴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변호사들은 거리행진을 위해 거리로 나섰으나 경찰은 경고 방송을 내보낸 뒤 곧바로 최루가스를 쏘고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아프타브 치마 라호르 경찰서장은 “변호사들이 먼저 경찰에 돌을 던지며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시위에 참여했던 원로 변호사 사르프라즈 치마는 “변호사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독재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려는 것”이라고 비난한 뒤 “우리는 절대 비상사태 선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라치 고등법원 판사인 라시드 라즈비는 “파키스탄 역사상 이렇게 많은 변호사들이 체포된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남부 항구도시인 카라치에서도 법원 진입을 시도하던 변호사들과 취재진이 경찰과 충돌했다. 또 이슬라마바드 인근의 군사도시인 라왈핀디 법원에서도 50∼60명의 변호사들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에 나섰다. 경찰은 변호사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으며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촬영을 막았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페샤와르 변호사협회의 라티프 아프리디 회장은 AP통신에 “수많은 동료들의 연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집회를 열어 정권에 대한 분노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 지도자인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는 “2002년 총선에서 정보당국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재 집권당은 장외집회와 시위, 유세 금지를 요구하고 있다.”면서 “이는 정권 연장을 위해 내년 1월 총선을 부정하게 치르려는 명백한 음모로 의심되는 전조”라고 지적했다. 지난 9월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하려다 정부에 의해 좌절된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도 “악정을 연장할수록 국가는 혼란상황에 빠질 것”이라면서 “나를 보호해 주는 이곳 사우디 인사들과 귀국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경고했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미얀마, ‘이 한 장의 사진’/심재웅 한국리서치 상무이사

    지난주 가장 큰 뉴스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승려와 민간인을 미얀마 군부독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추석 다음날인 26일 옛 수도 양곤에서 수만명의 승려와 시민들이 가두시위를 벌였고, 미얀마 군·경은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하여 적어도 10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서방의 외교소식통 등에 따르면 사망자의 수는 수십명에서 이백여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독재정권에 맞서서 미얀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와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는 현장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이 금요일인 28일자 조간에 일제히 실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진은 양곤에서 로이터가 전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경찰과 군대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달아나는 민간인을 곤봉을 든 경찰과 자동소총을 겨눈 군대가 쫓는 장면을 담고 있다. 붉은 색의 커다란 철제 시설물과 변전시설을 에워싼 철망을 배경으로 시위대가 잃어버린 샌들이 흩어진 도로의 오른쪽 하단에 일본인 기자인 나가이 겐지가 쓰러진 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있고, 그의 바로 옆에는 한 병사가 그를 향하여 자동소총을 겨누고 있다. 나가이 기자는 바로 이 장면에서 가슴을 관통한 한 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로이터가 전한 ‘이 한 장의 사진’은 전 세계에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남녀노소의 민간인이 대나무 방패와 곤봉을 든 경찰과 자동소총을 겨누는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장면은 폭압정권의 실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달아나는 시위대 군중 속의 한 남자가 달려오는 곤봉을 든 경찰이나 자동소총을 겨눈 군인이 아닌 길바닥에 쓰러진 기자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아보는 모습도 보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사진은 28일자 조간에 일제히 실렸다. 그러나 이 사진을 1면 머리로 실은 다른 신문과 달리 서울신문은 국제면인 16면에 게재하였다. 게다가 카메라를 든 채 도로에 쓰러진 기자의 모습과 그 기자를 향해 자동소총을 겨누고 있는 미얀마 병사의 모습을 담은, 가장 극적인 사진이 아닌 이미 숨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 기자를 병사들이 지나쳐서 시위대를 향해 쫓아가는 모습이 담긴 연속 촬영의 다음 장면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 장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긴박한 현장의 생생한 순간을 담은 가장 극적인 사진은 분명 아니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대한 28일자의 사진 설명도 미흡하였다. 서울신문의 사진설명은 “미얀마 반정부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27일 군·경이 옛 수도 양곤 중심부에서 수천명의 시위대에 발포, 해산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한 한 남자가 길위에 누워 있다.”고 전했다. 같은 사진을 게재한 한 조간은 “오른쪽에 쓰러진 채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는 사람이 일본인 기자 나가이 겐지다. 그는 결국 숨졌다.”고 현장상황을 인적 사항과 함께 전하며 쓰러진 사람의 생사를 확실하게 보도하였다. 물론 또 다른 조간은 같은 사진에 대해 “오른쪽에 부상당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시위자가 힘없이 길 위에 누워있다.”는 잘못된 사진설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서울신문은 29일 토요일자 지면에 나가이 겐지가 카메라를 든 채 쓰러져 있고 미얀마 병사가 자동소총을 겨누는 극적인 장면의 사진을 다시 게재하고 상세한 정황 설명과 함께 “아무도 안 가는 곳 누군가는 가야” 한다고 했던 나가이 겐지의 기자정신을 기리는 도쿄특파원의 박스기사를 11면 톱으로 실었다. 금요일자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한 후속보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감이 든다. 나가이 겐지 기자와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모든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 한 장의 사진’을 촬영한 기자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심재웅 한국리서치 상무이사
  • 한국 교민 철수계획 마련

    미얀마의 반정부 시위 사태가 28일 11일째를 맞았지만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미얀마 군정의 무자비한 강제진압과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 옛 수도 양곤 중심가에는 1만명의 군중이 집결해 시위를 벌였다. 제2도시 만달레이에서는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오토바이에 타고 거리 시위를 벌이다 군경에 의해 저지됐다. 보안군은 시위대에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어 경고 사격을 가하고,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러 강제해산시켰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보안군은 셰다곤탑과 술레탑 등 시위 중심지인 5대 사찰을 봉쇄했으며, 양곤 중심가로 통하는 도로를 막았다. 미얀마 군정은 지금까지 진압과정에서 10명이 숨졌다고 밝혔지만 AP통신은 밥 데이비스 미얀마 주재 호주 대사의 말을 인용,“10명의 몇 곱절되는 수가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박도 강도를 높여 가고 있다. 미국은 전날 미얀마 군정 최고 지도자인 탄 셰 장군과 제2인자 마웅 아예 장군 등 고위 당국자 14명의 미국내 금융자산을 동결하는 등의 경제제재조치를 발동했다. 일본 정부도 전날 미얀마에서 취재하다 보안군의 총탄에 사망한 자국 기자의 진상규명을 촉구할 방침이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관방장관은 28일 기자회견에서 이같은 내용 외에 재발방지도 강력히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은 새달 2일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인권이사회 특별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편 미얀마 정세가 악화일로를 향해 치닫자 한국 교민 1000여명은 현지 공관을 중심으로 철수계획 등 단계적인 비상대책을 마련했다고 미얀마에 주재한 국내기업 관계자가 전했다. 아직까지 교민 피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지옥같은 관타나모 1600일 증언

    지옥같은 관타나모 1600일 증언

    “‘너 알카에다 맞지?’ ‘아니요.’ 군인 중 하나가 내 얼굴을 갈긴다.‘너 탈레반이지?’ ‘아니요.’ 다시 갈긴다.‘넌 오사마를 알고 있어!’ ‘아니, 아니요.’ 다른 군인이 내 턱을 때린다.‘너 알카에다 대원이지?’ ‘아니요….’” 반복되는 질문, 반복되는 대답, 반복되는 구타… 반복되는 고문, 반복되는 기만, 반복되는 역사…. 한국에서 익히 봐왔던 장면들이 이라크에서 반복되고, 미국에서 반복되고, 쿠바에서 반복된다. 자유, 평화, 인권이란 절대 가치를 지키겠다며 억압, 전쟁, 인권탄압을 서슴지 않는 거짓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2001년 9·11사태 직후 어느 날, 터키계 독일인 무라트 쿠르나츠가 증발했다. 코란을 공부하러 간 파키스탄에서였다. 쿠르나츠는 독일로 돌아오기 직전 검문소에서 파키스탄 보안요원에게 체포됐다. 테러리스트 용의자란 이유였다.‘이슬람 형제’ 파키스탄 보안요원들은 3000 달러에 그를 미군에게 넘겼고,‘그의 나라’ 독일은 석방요구를 외면했다. 쿠르나츠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미군기지에 두 달간 갇혔고,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로 옮겨져 지난해 8월까지 수감됐다.1600여일간이었다. 갓 결혼한 19살 앳된 청년 쿠르나츠는 수염이 치렁치렁한 24살, 부인마저 떠난 이혼남이 돼 있었다.‘가장 고약한 죄수들’만 가둔다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쿠르나츠는 오직 혼자였다. 논픽션 ‘내 인생의 5년’(무라트 쿠르나츠 지음, 홍성광 옮김, 작가정신 펴냄)은 쿠르나츠가 보낸 지옥 같은 시간의 기록이자, 전쟁 이면에 대한 육화된 고발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쿠르나츠는 테러리스트란 자백을 강요받으며 온갖 참혹한 고문에 시달린다. 전기고문, 물고문, 잠 안 재우기와 무산소 독방 감금에, 때론 먹음직스런 음식으로 유혹하고 때론 여자까지 동원해 괴롭힌다. 등을 바닥에 붙이고 잠을 자야하고, 간수를 쳐다봐서도 말을 붙여서도 안 되며, 규칙을 어기면 군기교육조가 투입돼 고춧가루를 뿌리고 곤봉으로 두들겨 팬다.“장갑은 내 손을 따뜻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고, 귀마개는 내 귀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마스크 역시 얼굴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오로지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물 수 없었고, 침 뱉을 수 없었으며, 할퀼 수도 없었다.”며 쿠르나츠는 절규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악명은 굳이 새로운 증거를 필요치 않는다. 수용소의 잔혹함은 이미 수많은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났다.‘내 인생의 5년’은 뉴스 언어로는 느껴지지 않는 ‘먼 나라 남의 고통’을 내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선혈처럼 선명한 아픔으로 되살려낸다. 진실은 늘 불편함을 동반하고, 불편한 진실은 생생하게 아프다.“그저 내가 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쿠르나츠. 그는 관타나모를 겪은 후 세상 도처에 숨겨진 관타나모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다.“인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됐고,“정치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간파할 수 있으며,“어떤 행동을 하는지” 직시할 수 있게 됐다. 관타나모는 모든 은폐의 실체다.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미국의 국가적 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자, 미국이 감추고 싶은 가장 미국다운 곳이다. 도무지 가식이란 없는 행위들이 낯 부끄럼 없이 이뤄지는 현장이자, 어떤 조직이나 체제, 국가가 내보이기 싫은 가장 벌거벗은 속살이고 치부다. 모든 전쟁이 적을 상정하나 전쟁이 노리는 적은 따로 있다는 사실,‘범죄와의 전쟁’이 범죄만을 노리는 게 아니듯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만을 노리는 게 아니란 사실, 노태우와 부시의 쌍둥이 조어(造語)는 전쟁 이면을 간파하게 만든 언어의 관타나모다. 반복되는 언어, 반복되는 거짓, 반복되는 관타나모…. 쿠르나츠는 “말해야 하고, 알려야 한다.”며 외치고 또 외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0)마재인(馬才人)과 마상재(馬上才)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0)마재인(馬才人)과 마상재(馬上才)

    연암 박지원이 ‘우상전’에서 소개한 통신사 수행원의 열댓가지 기예 가운데 하나가 마상재(馬上才)이다. 마상재란 말 위에서 하는 재주를 말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총쏘기, 달리는 말의 좌우로 등을 넘기, 말 위에 누워 달리기, 말 다리 밑으로 몸을 감추기 등의 여덟가지 무예이다.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의 신행각년례(信行各年例)에서는 “양마인(養馬人), 잡예기능(雜藝技能), 그림을 잘 그리는 자, 글씨를 잘 쓰는 자, 이름난 의원, 말타기 재주가 있는 자(馬才人)들을 거느리고 온다.”고 했다.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에 꼭 데리고 갈 전문가로 화원, 사자관(寫字官), 의원, 마상재를 꼽은 것이다. ●훈련도감에서 훈련시키고 임금이 직접 시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예를 조직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명나라 장군 낙상지(駱尙志)가 영의정 유성룡에게 “조선이 아직도 미약한데 적이 영토 안에 있으니,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급하다. 명나라 군사가 철수하기 전에 무예를 학습시키면 몇년 사이에 정예가 될 수 있으며, 왜병을 방어할 수 있다.”는 제안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곤봉, 장창, 쌍수도 등의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해 차츰 종류가 늘었다. 나중에 마상쌍검,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 등의 마술들이 추가됐다. 이를 토대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는데, 말 타고 하는 여러 가지 무예가 그림으로 자세하게 소개됐다. 마상재는 기마민족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무예로, 역대 임금들이 친히 시험하였다. 정조가 1784년 9월23일에 창경궁 춘당대에 나아가 초계문신(抄啓文臣)들에게 친시(親試)를 행하고, 별군직(別軍職)에게 자원에 따라 마상재를 시험 보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모두 회피하자 두령이었던 신응주를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하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활 쏘고 말 타는 재주 때문에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데, 오늘같이 내가 나와서 시험보는 날에도 서로 미루면서 어명에 응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말 달리거나 칼 쓰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구나. 약간의 무예를 지니고도 핑계를 대고 회피한 구순은 귀양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삭직하라.” 숙종, 영조, 정조가 춘당대에서 자주 마상재를 시험 보였으며, 조선의 마상재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자 일본에서는 통신사가 올 때마다 마상재를 꼭 보내달라고 청했다. ●쓰시마의 외교능력 등 떠보려 초청 인조 12년(1634) 12월10일에 동래부사 이흥망이 아뢰었다. 일본 쇼군이 유희를 좋아해 조선의 마상재를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비변사에서 12월14일 절충안을 내었다. 임진왜란에 끌려간 포로 가운데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마상재를 보내면서 우리 백성을 돌려달라고 청하자고 했다. 이듬해(1635년)에 역관 홍희남이 돌아와 그 내막을 아뢰었다. 쇼군이 쓰시마 도주를 시켜 마상재를 청한 까닭은 우리나라 교린정책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떠보고, 한편으로는 쓰시마 도주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복원을 주선한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정탐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쓰시마에서 국서(國書)를 위조한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 때문에 쓰시마의 외교력과 그 진심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와의 상황이 불안했으므로 후방이라도 안정을 확실히 하기 위해 1636년 제4회 통신사와 함께 마상재를 보냈다. 마상재가 단순 구경거리를 넘어 외교의 첨병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문예보다 우대받았던 무예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마다 마상재를 시범보였다.1748년 통신사의 종사관인 조명채(1700∼1764)가 기록한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 가장 자세히 기록되었다. 쓰시마에 도착하자 도주가 환영잔치인 하선연(下船宴)을 베푼다고 3월7일에 알리면서 마상재, 사자관, 화원의 기예를 보려고 청하였다. 조명채는 “전례가 그러하였다.”고 기록했다. 말타기, 글씨, 그림의 기예는 에도에 가서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지만, 일본측에서는 오가는 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했다. 조선에서는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아낌없이 재주를 자랑했다. 이날도 “사자관과 화원 및 역관들이 들어가서 재배를 하자 도주가 일어나 손을 들어 답례하고, 그가 청하는 대로 각각 제 재능을 다해 보이자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돌아와서 “태수의 집뜰 바닥에는 모두 달걀 같은 자갈을 깔았는데 밟으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며, 마루 위에 오르면 바퀴 같은 물건이 마루 밑에서 굴러 윙윙 울리는 소리가 났다.”고 이야기했다. 조명채는 “아마도 도둑을 막는 방법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조선 사대부의 집 구조와 다른 점을 기록했다. 15일에는 태수가 마상재에게 은자 두닢을, 사자관과 화원에게는 각각 한닢을 보냈다. 일본돈 한닢이 조선 화폐로는 넉냥 두돈이라고 했다. 문예를 숭상하는 조선에서는 글씨나 그림을 더 높이 쳤지만, 무예를 숭상하는 일본에서는 마상재를 두배나 높이 쳤다. 에도에 도착하자 5월30일부터 마상재 연습이 시작됐다. 비장(裨將)과 역관들이 마상재를 하는 마재인(馬才人)을 데리고 쓰시마 도주의 에도 저택에 가서 연습했다. 대문 안에 새로 판잣집을 만들어 놓고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마상재를 한 차례 시범했는데, 마장(馬場)이 짧아서 재주를 다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쓰시마 도주가 마상재가 입을 쾌자 한 벌씩을 만들어 보냈는데, 모두 큰 무늬를 놓은 비단이었다. 이 또한 전례에 따른 것이다.6월3일에 비장과 역관들이 마재인을 데리고 쇼군의 궁에 들어갔다가 오후 네시쯤에야 돌아왔는데, 조명채는 마재인의 보고를 그대로 기록했다. “쇼군의 후원은 홍엽산(紅葉山) 아래에 있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어울려 푸르고 대(臺)나 연못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주렴과 비단 휘장을 드리운 누각이 있었는데, 쇼군이 앉은 곳인듯했습니다. 누각 아래에 여러 관원들이 다담(茶)을 땅에 깔고 꿇어 앉았으며, 호위병들이 조총과 창칼을 메고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말이 나가거나 멈추는 곳에는 쓰시마 봉행(奉行)의 간검(看檢)이 있어, 말이 나갈 때에는 봉행이 쇼군의 누각 아래에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길은 펀펀하고 넓었지만 간간이 수렁이 있어 말발굽이 빠졌는데, 섰다가 도로 앉아 간신히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면했습니다. 말이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려 곧 일어서자, 궁중에서 구경하던 자들이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수렁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시험한 것인데, 잘 달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편한 길로 달리게 했습니다. 온갖 재주를 다 보여준 뒤에 끝났습니다.” ●달리는 말 타고 130보 거리 과녁 적중 구경꾼 가운데에는 그 전 사행의 마상재를 구경한 자도 있었는데, 이번 마상재가 그때보다 훨씬 잘했다고 칭찬했다.10일에는 쇼군궁에서 마상재 이세번과 인문조 외에 활쏘는 군관까지 8명을 초청했다.130보 과녁을 거리에서 쏘았는데, 이주국이나 이백령 같은 군관들은 5발을 모두 맞혔지만 마상재가 전문인 인문조는 3발, 이세번은 2발을 맞혔다. 그 다음에는 말을 타고 추인(人)을 쏘았는데, 역시 군관들은 5발을 다 맞히고 마상재는 3발을 맞혔다. 군관 이일제가 첫번째 추인을 맞힌 뒤에 말안장이 기울어져 떨어질 뻔하다가 곧 몸을 솟구쳐 안장에 바로 앉고 달리면서 나머지 화살을 다 맞히자 구경꾼들이 모두 감탄했다. 일본인들은 말을 잘 타지 못했기 때문에 날쌔게 달리는 것만 보아도 장하게 여기는데, 백발백중의 솜씨를 보이자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에도에서 일정을 다 마치고 떠나게 되자,6월12일 마상재가 타던 말 2마리를 쓰시마 도주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것 또한 전례에 따른 것이다. 이튿날 쇼군이 마상재를 포함한 사원(射員)과 화원, 사자관에게 은자 60매를 상으로 보냈다. 조선에서는 문예보다 천대받던 무예, 특히 마상재가 사무라이를 높이던 일본에서는 존중받고, 국위를 선양한 모습까지 볼 수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추락하는 유럽축구

    이탈리아와 독일 축구장의 폭력 사태 이후 잠잠하던 유럽 축구가 지난 주말 다시 폭력으로 얼룩졌다. 26일 외신에 따르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함께 연고지로 한 레드스타 베오그라드와 파르티잔의 경기 직후 양팀 서포터스와 경찰이 연쇄 충돌, 경찰관 4명을 포함해 13명이 다치고 27명이 체포됐다. 두 팀 팬들은 파르티잔이 4-2로 이긴 뒤 투석전을 벌였고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과 부딪쳤다. 레드스타와 파르티잔은 불과 100m 거리에서 각각 홈 구장을 쓰고 있고 과거에도 수 차례 폭력 사태를 빚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가 끝난 뒤 아틀레티코 팬들이 난동을 일으켜 경찰이 고무 총탄을 난사했다. 흥분한 팬들은 경기장 주변의 차량을 파손했고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는 등 17명이 다쳐 4명이 병원에 후송됐다. 웨일스 카디프에서는 런던 라이벌 첼시와 아스널의 칼링컵 결승에서 두 팀 선수들이 종료 직전 난투극을 벌였다. 존 오비 미켈(첼시), 콜로 투레, 에마뉘엘 아데바요르(이상 아스널)가 주먹을 휘두르다 레드카드를 받았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FTA 반대” 뜨거운 제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4차 협상은 대규모 한·미 FTA 반대 시위가 예고돼 있는 가운데 제주 서귀포시 중문단지 내 제주신라호텔에서 철통 같은 경비 속에 23일 개막됐다. 한·미 양국 협상단은 협상이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번에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협상에 임했다.●충돌현장 큰 불상사는 없어한·미 FTA 4차 협상이 시작된 이날 제주에서는 FTA 반대 시위대와 경찰이 곳곳에서 충돌을 빚었지만 큰 불상사는 없었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입구에서 농민 등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미 FTA 협상 중단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한때 협상장인 제주 신라호텔 진입을 시도,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는 돌멩이를 던지거나 도로표지판 등을 휘둘렀고, 경찰도 방패와 곤봉으로 맞섰으나 큰 불상사는 없었다. 또 제주도내 어민들은 어선 40여척을 동원해 중문관광단지 앞 바다에서 해상시위를 벌였고,FTA반대 시위대는 밤 늦도록 제주컨벤션센터 부근 등에서 촛불집회를 가졌다. 경찰이 폭력시위 방지 등을 위해 중문관광단지를 봉쇄하면서 제주의 최대관광지인 중문관광단지는 이날부터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경찰은 협상장인 중문관광단지 입구에 방파제 축조용 삼발이까지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관광객은 물론 일반인 차량을 전면 통제했다. 한편 김태환 제주도지사는 웬디 커틀러 미국측 수석대표를 만나 제주 감귤산업의 영세성 등을 설명하고 오렌지 등 감귤류를 한·미 FTA 협상품목에서 제외해줄 것을 건의했다. 커틀러 수석대표는 김 지사의 말을 통역을 거쳐 전해들으면서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나 특별한 대답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양국 적극적 내용 수정안 못내놔한국과 미국 협상단은 협상이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12월 협상 전까지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자세로 협상에 임했으나 입장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아 난항을 겪고 있다. 협상 개막과 함께 오전 9시쯤 10여분간 공개된 전체회의 포토세션에서 양측 수석대표는 “이번 협상을 통해 협상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짤막한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이같은 소감과는 달리 첫날 협상을 마치고 나온 우리측 협상 대표들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말로 협상에 별 진척이 없음을 시사했다. 양측이 모두 기대에 못미치는 수정안을 제시한 것은 4차 협상을 앞두고 터진 북한 핵 실험과 다음달 미국 중간선거 등으로 양국 협상단 모두 적극적인 내용의 수정안을 내놓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서귀포 김균미·황경근기자k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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