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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석기·청동기 유물 대량발굴/전남곡성·승주서

    ◎반월형석도 등 1백20점 전남 곡성군과 승주군 등 2개 지역에서 지석묘,폐기장,홍도,숫돌 등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유물 1백20여점이 나왔다. 문화재관리국은 22일 전남 곡성군 석곡면 유정리의 호남고속도로 석곡인터체인지 건설 예정지에서 전북대학교 조사팀(책임조사원 윤덕향교수)이 기원전 10세기 이전 신석기 시대와 기원전 4세기 전후 청동기 시대의 유적,유물 1백여점을,승주군 승주읍 서평리에서 전남대학교 조사팀(책임조사원 임영진교수)이 청동기 시대의 유적,유물 20여점을 출토했다고 밝혔다. 유정리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 10기,주거지 4기,폐기장 2개소에서 마제석검,반월형석도,돌끌,석촉,홍도 등과 신석기 시대의 토기,석기 등이 발굴되었다. 승주의 서평리에서는 지석묘 11기,석곽묘 5기,소형 석관묘 2기 등 청동기 시대의 매장시설과 함께 홍도,곡옥,석촉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 20여점을 발굴했다.
  • “중풍 10년째… 자식에 짐된다”/60대부부 자살

    ◎전세금은 빼내 딸 줘 지난 13일 서울 강동구 고덕1동 야산에서 목매 숨진채 발견된 노인부부는 서울 성동구 송정동 삼청연립 1층에 세들어 살던 김윤호씨(67)와 부인 허경례씨(64)씨로 15일 밝혀졌다. 김씨 부부는 슬하에 맏아들(47·대전 거주·운전사),둘째아들(40·분당거주·이발사),셋째아들(35·서울 노원구 월계동·무직)과 외동딸(31·경기 하남시)등 3남1녀를 두었으나 모두 살기가 어려워 거의 찾아오지 않았고 중풍과 요통에 시달리며 외롭게 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드러났다. 1년전에 송정동에 이사온 김씨 부부는 미리 죽음을 준비한 듯 지난달 30일 장농이며 이불·솥단지·숱가락 등 몇 안되는 세간살이를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이웃 사람들이 이때 『이제 자식들 집에 들어가시나 보죠.정말 잘됐네요』라며 기뻐했지만 노부부는 쓸쓸한 미소만 지었다는 것이다.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집을 나선 부부는 경기 하남시 신장동에 사는 외동딸(31)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으면서 연립주택의 전세금 3천8백만원 등 모두 4천6백여만원을 딸에게 건네줬다. 김씨는 어머니·아버지가 『평소 신경을 써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돈을 건네주고 시골인 전남 곡성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김씨는 10년전부터 중풍을 앓아왔다고 했고 부인 역시 허리가 굽어 잘 움직이지 못했지만 막내딸 이외에는 거의 찾아오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자식들이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 파업관련 사전영장/금호노조간부 구속

    【광주=최치봉기자】 광주 광산경찰서는 19일 타이어 생산업체인 (주)금호 노조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금호노조 곡성지부장 신호식씨(30·광주시 서구 화정동)를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 전남·북 일원 반짝 단비/곡성 최고 58㎜… 가뭄해갈엔 부족

    【광주=최치봉기자】 가뭄으로 시달리던 전남·북 일부지역에 22일 하오 최고 60㎜에 가까운 소나기가 쏟아졌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이날의 소나기는 지역에 따라 길게는 30여분정도 내려 가뭄에 타들어가던 농작물에 큰 도움을 주었으나 전체적인 해갈에는 역부족이었다.지역별로는 곡성군 오산면 58.2㎜를 최고로 삼기면 43.3㎜,광주시 42.7㎜,화순군 북면 45㎜,장성군 동화면,35.5㎜등 비교적 많은 양이 내렸으며 이밖에 담양·광양·승주·보성·화순·강진·해남·영암·무안·나주·함평·영광등 19개 시·군지역에도 단비를 뿌렸다. 전북지역에서는 순창 17㎜,임실 22㎜등 도내 동남부지역에 20㎜ 안팎의 소나기가 내렸으며 수원·인천·서울변두리의 일부지역에도 이날 더위를 씻어주는 소나기가 내렸다
  • 흥망성쇠(백제를 다시본다:20)

    ◎근초고왕,북 평양성·남 마한까지 정복/야심적 국토 확장… 가야도 영향권에/고구려 장수왕에 한성 잃고 공주로/한강유역 되찾은 성왕 사후엔 서남부에 고립… 1백년뒤 멸망 우리 역사상 삼국시대처럼 장기간에 걸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때는 달리 없다.삼국이 본격적으로 정립의 형세를 갖추게 된 것은 대략 4세기 중엽이었다.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 무렵이었으니,삼국간의 항쟁은 3백년동안이나 지속된 셈이다. 현재 남한지역에는 약 8백개소에 달하는 고대 산성이 분포되어 있다.삼국간의 항쟁이란 이 산성의 탈취를 둘러싼 공방전에 다름아니었다.그런데 삼국의 전쟁양상을 보면,고구려와 신라가 대체로 영토팽창을 목적으로 하여 시종일관 공세적 입장을 취한 반면 백제는 고토의 수복 내지 조국수호를 목적으로한 수세적 입장을 취한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하긴 이는 어디까지나 대체적인 경향을 말한 것일뿐,주어진 형편에 따라서 혹은 군주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방어적 입장 견지 백제가 가장 야심적인 팽창을 꾀한 것은 4세기 중엽 근소고왕때였다.실로 그는 백제의 전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정복군주였다.바야흐로 당시는 중국이 남북조 분열의 혼란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이에 따라 그때까지 줄곧 중국세력과 대치해 있던 고구려는 재빨리 대동강유역에 있던 낙낭군을 없애버리고 여세를 몰아 황해도일대로 진격해왔다.이에 이른바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근초고왕은 북진을 개시,고구려군을 황해도방면에서 잇따아 격파했다.근초고왕은 369년 고구려대군을 치양(백천)전투에서 크게 이겼고,2년 뒤에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케 했다.한편 근초고왕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호남지방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마한 잔존세력을 정복했고,다시 서쪽으로 손을 뻗쳐 경상도 남해안지방의 가야세력에도 영향력을 과시했다.신라는 백제의 위협에 직면하여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만 근초고왕이 죽은 뒤 백제는 차츰 수세에 몰리게 된다.광개토왕의 대원정으로 백제는 크게고전했고,서기 475년에는 장수왕이 거느린 고구려대군이 수도 한성(서울)을 기습적으로 포위공략하여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이때 백제는 기름진 한강유역을 송두리째 고구려에 빼앗겨 충남 아산∼천안을 국경선으로 하여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했다.이렇게 시작된 공주시대 60여년간은 백제 최대의 시련기였다.다만 이 시기에 신라와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한 것이 그나마 큰 힘이 되었다. 서기 538년 성왕은 야영도시 공주를 버리고 오래 전부터 점찍어둔 부여로 천도했다.성왕은 국가중흥을 기약하며 여러 부문에서 나라의 면목을 일신했다.그런 다음 신라의 진흥왕을 설득하여 551년을 기해 북진을 개시,한강유역에서 고구려군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지난날 백제의 심장부이던 한강하류 현서울일원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신라가 갑자기 표변하여 한강 상류지역에서 하류지역으로 소리없이 침투하여 순식간에 백제군을 몰아내었다.이로써 성왕의 웅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신라의 배신행위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국경으로 쳐들어가던중 현 충북 옥천지방의 관산성에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부여로 옮겨 정비 이때부터 백제는 660년에 멸망될 때까지 한반도 서남부에 고립된 채 국가경영을 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비록 때때로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항했으나,서해안과 남해안을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신라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하긴 신라의 약점도 있었다.왜냐하면 백제와의 국경선이 너무나 길어진 결과 전선의 탄력성이 감소했기 때문이다.7세기 전반기에 무왕은 이 점을 최대로 이용했다.그는 40여년간 재위하는 동안 신라의 약점을 계속 건드렸다.전북 무주에 있는 나제통문일대와 남원 설봉에서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경남 함양에 이르는 일대가 당시의 격전지였다.백제는 이 두 방면의 전투에서 우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선은 고착되고 말았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자마자 신라에 대해 야심적인 전쟁을 벌였다.즉 백제군은 함양을 발진기지로 하여 단기간내에 멀리 진주·협천방면에까지 손을 뻗쳤다.신라의 낙동강방면군 사령부가 위치했던 합천의 대야성이 함락된 것이 642년의 일이었다.이로써 백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신라 수도 경주를 위협하게 되었다.그러나 이같은 의자왕의 군사적 승리가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었음은 역사의 아리로니가 아닐 수 없다.왜냐하면 이로써 의자왕은 헛된 자만심에 빠져 그 뒤 정치를 그르치게 되었고,반면 신라는 국가위기상황에서 절치부심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제국의 군사력을 이용하고 말겠다는 비밀외교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항쟁을 통해서 볼 때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평화지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근초고왕때 고구려군대를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수곡성(황해도 신계)서북에까지 이르렀던 장군 막고해가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해야 한다며 회군을 건의한 사실이라든지,불교 교리에 투철했던 법왕이 599년 즉위하자마자 일체의 생물을 죽이지 말도록 금령을 내리면서 심지어 물고기 잡는 그물까지 불태워버리게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사실 같은 시기 신라 최고의 지성이었던 원광법사가 세속5계를 제정,비록 단서를 달긴 했지만 살생을 허용했던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합천 대야성 함락 삼국시대는 첩보전이 유행한 때이기도 했다.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전에 승려 도임을 첩자로 백제에 밀파하여 개로왕을 유혹,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게 하면서 내부분열을 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 점은 신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김유신은 현령이었던 조미곤을 포로로 가장하여 백제에 잠입시킨 뒤 그를 통해 백제의 기밀을 입수했을 뿐아니라 끝내 좌평 임자와 같은 유력인사를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백제의 경우에는 이같은 비열한 첩보전략에 열중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기이한 느낌마저 든다.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항상 비정한 것이고,인간의 선의만 가지고서는 결코 대업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전쟁기록/6세기후반부터 본격 삼국항쟁/옥천전투선 백제 성왕등 3만명 전사 삼국이 정립한 시기는 영토확장을위한 많은 정복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립의 시대에 해당한다.「삼국사기」에 나타난 크고 작은 정쟁기록만 보아도 4백80회에 이른다. 이 같은 기록은 「삼국사기」 전체 기사 가운데 16.8%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전쟁기사의 비중은 큰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횟수는 「삼국사기」기록 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을 통한 전쟁기록만 검토해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광개토왕 재위연간(AD 392∼412년)의 전쟁기사는 고작 3회 정도이지만,능비에 적은 전쟁기록은 7회로 집계되었다. 광개토왕 자신이 종횡무진으로 전쟁에 참여한 정복군주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문 기록이 합당할 수도 있다. 광개토왕릉비가 보여주는 것처럼 4세기는 우선 국왕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는 시기다.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면서 국왕이 친히 총사령관으로 정복전쟁에 참여한다. 보기라는 말로 보병과 기병이 동원된 가운데 오늘날 경기 북부와 서울일원에서 광개토왕이 백제 아화왕과 직접 조우하는 것도 이시기다. 동북아 세력판도변화에 따라 고구려가 후연과 같은 북방에 신경을 쓰고 있을 무렵 고구려 남방을 공략하기도 했다. 이같은 전쟁은 일반백성의 참여는 물론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결국 잦은 전쟁은 국력 대결양상의 총력전 기반구축을 촉진함으로써 6세기 후반이후 1백년 동안 삼국은 피나는 항쟁기를 맞는다. 백제의 경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체기사 가운데 전쟁기록은 20.6%를 차지한다. 전체평균치(16.3%)에 비해 높은 것은 고구려와 신라를 겨냥하고 싸웠기 때문이다. 백제 쪽에서 볼때 가장 처참한 전쟁은 왕이 전사하는 AD554년 관산성(옥천)전투다. 신라에 의해 3만대군을 잃었다. 이를 원상 회복하는 데 반세기가 걸렸다. 삼국이 막바지 각축을 벌인 7세기 중반에 백제가 거둔 빛나는 승리가 있다면 AD642년 신라의 수도를 위협한 대야성 함락. 같은 해 신라군을 몰아낸 당항성(경기 화성군 서신면 당성) 전투와 더불어 백제의 마지막 전승으로 기록된다.
  • 폭염 17일째/휴일 피서인파 250만/밀양 37.2도

    ◎방학·휴가로 가족나들이 많아/농촌선 지하수개발 구슬땀/소방차로 다락논 물대기도 전국적으로 35도안팎을 오르내리는 불볕더위가 17일째 계속 되고 있는 가운데 7월의 셋째일요일인 17일 전국피서지에는 해운대 80만명을 비롯,올들어 가장 많은 2백50만명이상의 인파가 몰려 찜통더위속의 피서를 즐겼다. 그러나 농촌지역에서는 농민뿐만 아니라 공무원들까지 동원돼 한방울의 물이라도 논밭에 대기 위한 양수작업에 땀방울을 흘리는등 안타까운 가뭄극복작업이 계속됐다. 농민들은 이날 지역적으로 한때나마 소나기가 올 것이라는 예보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으나 구름만 다소 낄뿐 기다리는 비는 내리지 않자 타들어 가는 농작물을 바라보며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이날 하루동안 부산지역의 5개 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은 1백만명을 돌파,올들어 최고인파를 기록. 특히 해운대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이 80만명을 넘어 발디딜 틈도 없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광안리해수욕장에는 25만명의 피서인파가 몰려 해수욕으로 더위를 식혔다. 해운대의 하이얏트호텔과 파라다이스비치호텔앞 백사장에는 해수욕을 즐기느 보통피서객들과는 달리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낀 20대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몸에 오일을 잔뜩 바른채 「선베드」에 눕거나 엎드려 건강한 몸매를 과시하며 일광욕을 만끽. ○…붉게 잎이 타들어 가고 있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 배감마을의 천수답.이곳 17㏊ 가운데 15㏊에는 옥과천에서 릴레이식 5단계 양수작업으로 연결된 1.2㎞의 호스 2개가 간신히 논바닥에 물줄기를 쏟아냈으나 거북등 같은 논바닥을 적시는데는 역부족. 이곳 마을주민과 옥과면사무소직원등 50여명이 밤을 새워가며 교대로 양수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수압을 이기지 못한 낡은 호스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공들인 만큼 작업능률은 오르지 않았으며 호스가 닿지 않은 산등성이 다락논에는 소방차를 동원,물을 뿌리기도. 마을이장 박기남씨(59)는 『앞으로 사흘안에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올농사는 포기해야할 것같다』면서 『벼 한포기라도 더 건지기 위해 현재 할 수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전남 강진군칠량면 장계천에는 실타래처럼 얽힌 양수호스가 물구덩이를 찾아 옮겨다니고 있으나 별다른 효과는 못올리고 있는 형편. 이는 대형관정들이 여기저기 뚫림에 따라 기존의 소형관정들마저 메말라버렸기 때문인데 더이상 하상굴착을 시도하려해도 염기가 섞인 바닷물이 올라와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태. ○…동해안 각 해수욕장과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도내 산간계곡에는 이날 지난해에 비해 3배가 많은 17만여명의 피서객이 몰려 무더위를 식혔다. 또 동해안 최북단 고성 통일전망대에도 김일성사망이후 북한의 변모된 모습을 직접 보려는 관광객들로 초만원. 강릉 경포대해수욕장의 경우 대부분의 초·중·고 학생들이 방학을 맞은 탓인지 가족단위의 피서객 2만여명이 몰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물놀이를 즐기며 휴일 하루를 보냈다. 또 설악산국립공원에 1만1천여명의 등산객이 입장했으며 ▲치악산 3천4백여명▲오대산 소금강계곡에 3천9백여명의 인파가 몰려 폭염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도. ○…서울에서는낮기온이 33.4도까지 올라가자 시민들은 여름음식을 장만,가족들과 함께 북한산과 관악산·도봉산들지의 시원한 계곡과 과천 서울랜드산림욕장들을 찾았으며 한강고수부지 수영장과 타워·워커힐·스위스그랜드 등 시내 호텔수영장에도 수영객들로 북적거렸다. 이에따라 관악산은 평소보다 5만명가량 많은 25만명이 찾았으며 여의도·잠원·이촌·광나루 등 7개 한강고수부지수영장에는 올들어 최대인 4만여명이 몰려들었다.
  • 시군법원 47곳 새로 설립/대법원 잠정결정

    ◎가벼운 공사 그 지역서 해결토록/포천·영천·진해등 30곳 내년에/홍천·부여등 17곳은 96년까지 내년부터 연차적으로 전국 47개 지역에 새로 들어서게 되는 시·군법원 설치지역이 잠정 결정됐다. 대법원은 12일 사법개혁관련 법률가운데 일반서민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시·군법원설치에 관한 계획안을 입안,법원조직법등 법률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대로 이를 확정할 방침이다. 대법원이 마련한 잠정안에 따르면 내년 9월1일부로 우선 설치될 지역은 경기도의 경우 파주 남양주 포천 김포 화성 안산 광주 이천등 8곳이 내정됐다.충청도와 경북은 금산 장항 당진 온양및 영천 성주 영주 포항등 각각 4곳씩이다.경남은 양산 김해 진해 산청 거제도등 5곳이며 전남은 영광 곡성 나주 여수등 4곳,전북은 김제와 이리이다.제주도지역은 서귀포에의 설치가 확정된 것을 비롯,내년안에 모두 30개 지역에 시·군판사를 상주시킨다는 계획이다. 또 2차로 96년까지 홍천 부여 양양 구미 남해 영암 고흥 광양등 17곳에 법원을 설치키로 했다. 시·군판사제는 간단한 소송사건을 거주지에서 먼 지방법원을 찾지 않고 가까운 시·군법원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입법취지이다. 예를 들어 대법원의 시안대로 경기도 포천군에 시·군판사가 상주하게되면 법관 1명이 포천군 연천군 철원군일대와 동두천시지역의 경미한 민·형사사건재판을 관장하게 된다.주로 20만원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나 과료에 처할 경미한 즉결심판과 협의상 이혼의 확인 및 화해·독촉·조정에 관한 사건과 소액사건심판법의 적용을 받는 민사사건이 해당된다. 따라서 시·군판사는 주로 같은 지역주민들사이에서 벌어지는 송사를 「동네웃어른」의 자격으로 재판이 아닌 예방차원에서 화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시·군법원이 어느 지역에 설치되느냐를 놓고 지역주민은 물론 지역구 국회의원,지역출신 법조계인사등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시안대로 확정될 경우 몇몇지역에서는 난항이 예상된다.강원도 동해시는 삼척주민들이,화성에 포함된 안성 또는 금산으로 낙찰된 조치원 주민등 자기지역으로 시·군법원을 유치하지 못한 지역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특히 국회의원의 지역구가 서로 갈라지는 곳일수록 심하다.
  • 선암사/낙안성/송광사/문화유적답사 조상숨결 체험

    ◎최대의 전통측간 특별히 볼만/선암사/임경업장군 때의 석성 원형 보존/낙안성/신라말 창건… 조계종의 중흥 도장/송광사 싱그러운 녹음이 아름다운 계절.주말쯤 취미를 같이하는 이들끼리 길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이런 때 절등 우리 문화유적지를 찾아 여행을 하고 싶지만 낯선 길을 선뜻 떠나기란 쉽지 않아 망설이다 주저앉아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길손을 안내하는 각종 특색 살린 여행프로그램이 늘어나는 속에 지난 주말인 23,24일에는 전국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역사의 숨결을 체험하는 「두레문화여행」(회장 김재일)단 40명이 1박2일 일정으로 전남 승주일대의 사찰답사에 나섰다. 선암사.송광사등 유명사찰과 낙안민속마을을 돌아보며 우리문화 유산을 「보고」「 느끼고」「사랑하는 마음을 키우자」는 뜻이 담긴 이 여행에는 부부·주부·어린이·대학생·칠순노인등이 동행이 되었다. 복잡한 서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리기 5시간. 전남 승주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요란한 굉음속에서 곡성∼순천간 호남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가 한창이고 한편에서는 담배 모를 내는 농촌아낙네들의 모습등이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일요일 새벽6시30분.싱그러운 새벽공기를 마시며 답사일정에 들어 갔다.승주군청에서 8㎞떨어진 조계산(해발887m)내 태고종 사찰인 선암사. 경내에 들어서니 겹벚꽃·철쭉등으로 절 전체가 온통 꽃밭이다. 이 절은 신라말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정유재란때 대부분 불타버렸고 현존 건물은 순조 25년(1825년)에 중건된 것이며 대웅전·원통전·팔상전 등 20여개동이 남아있다.삼층석탑과 입구의 승선교가 보물 제395호와 400호로 지정돼 있는 곳이다. 광주민학회소속 향토사학자 강정환씨(53)는 『선암사에는 보물등 유적도 많으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측간이 특히 볼만하다』고 설명했다.서양식 화장실에 어느새 익숙해버린 우리에게 사찰의 측간형태는 자연을 귀히 여기며 훼손시키지 않고 살았던 생활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교육장이기도 했다. 선암사의 지허 주지스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찾아낸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지나가는 길손을 위해서도 설법을 들려줬다. 마음속에서 자신의 화두를 찾으며 일행이 발을 돌려 들른 곳은 승주군 낙안면 사적 제302호인 「낙안읍성 민속마을」. 낙안성은 인조때 임경업장군이 군수재직중 토성을 석성으로 중수한 곳.1.4㎞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내에는 현재 원형을 그대로 유지,민속보존자료로 지정된 초가 9채등 민가와 관아·주막등이 당시의 마을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이곳에는 임장군의 영혼이 마을을 수호한다는 전설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는 면민대제를 지낸다.때마침 영화「태백산맥」의 촬영이 한창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군청에서 28㎞ 떨어진 다음 답사 코스인 송광사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신도들과 행락객들로 무척 붐볐다.다음달 18일의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연등이 일찌감치 경내 곳곳에 내걸려 불심 큰 불자들이 많이 찾는 큰 절임을 쉽게 느낄 수 있게한다. 송광사는 조계종의 중흥도장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와 승보(승보)사찰로 유명하다.신라말 창건돼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크게 일으켰다.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송광사는 특히 국보 제56호로 16국사의 영정을 봉안,일반에 공개하지않는 국사전을 두레기행단을 위해 특별공개,직접볼 수있는 기쁨을 주었다. 문화기행에 참가한 전재현씨(43.출판사대표)는 『처음 여행에 참가했던 이들중 절반이상이 다음 행사때도 참가한다』면서 『이런 답사를 따라 나서면 문화유적을 보고 느끼는 안목을 갖게된다』고 유적답사를 따라 나서는 장점을 꼽았다.「두레문화기행」문의전화는 02­712­5813.
  • 오동나무심기 25년/독림가 김병연씨의 식목인생(식목일 화제)

    ◎“50만그루가 내 아들”/“속성수 착안” 69년부터 숲가꾸기 시작/한때 실패 거듭… 우량묘목 개발로 극복 전남 담양군 고서면 보촌리 김병연씨(62)는 해마다 식목일이면 예외없이 70㏊ 야산에 50만그루의 참오동나무숲을 찾아 거닐곤 한다.「오동나무 박사」로 더 잘 알려진 김씨가 「나무인생」을 살게 된 것은 식목일이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꽤 큰규모의 미곡상을 하며 넉넉하게 살던 김씨는 33살때인 65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생과 사를 몇번이고 넘나들었던 4년간의 병원생활을 청산한 69년 김씨는 때마침 국민식수기간으로 식목활동이 한창이던 그해 4월 우연히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리를 찾게 됐다. 김씨는 물기가 촉촉히 오른 땅에 뿌리를 내리는 묘목들을 보고 나무와 함께 나머지 인생을 살기로 하고 그곳 곡성에 5㏊,고향인 함평에 60㏊의 야산을 구입해 오동나무를 심으며 독림가의 꿈을 키웠다.오동나무가 속성수라는 장점외에도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늘어나는 목재수용에 비해 생산량이 절대 부족한데다 당시 대부분의 벌거숭이산을 쉽게 울창한 숲으로 바꿀수 있다는 계산도 김씨의 구미를 당겼다. 그러나 함평군 해보면 산내리 야산에 심은 4만여그루의 오동나무가 가지를 자르면서 침투한 근두연병등 각종 병충해로 속절없이 말라 죽어갔다.실패를 거듭한 김씨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무재배는 우량묘목을 생산하는게 첫걸음이라고 깨닫고 그해 곡성농장에 3백평 규모의 비닐하우스 종묘장을 설치했다.밤낮으로 오동나무에 붙어 생태변화등 관찰을 거듭했다. 육묘장에서 3개월 동안 최저기온 15℃ 최고 31℃를 유지하면서 묘목을30여㎝가량 키운다음 이를 비닐하우스내로 옮겨 뿌리활착력을 강화시키는 이른바 「치상양묘법」을 개발해 냈다. 김씨는 「나무인생」 10년만에 개발해낸 「우량오동나무」묘목으로 자신의 70㏊의 야산을 푸르게 가꾸기 시작한 것은 물론 전국에 우량오동나무 묘목의 보급에도 앞장서 왔다. 『오동나무는 환경림뿐만아니라 고급목재로서 상품가치가 매우 높다』는 김씨는 『어느 곳이든 심어놓기만하면 큰 돈이 될 것』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 백제인의 도교사상(백제를 다시본다:6)

    ◎금동향로에 「불로장생의 신선관」 재현/풍요로운 경제생활… 느긋한 심성반영/궁남지섬을 신선 사는 방장산에 비유/“불종율령” 무령왕릉 지석은 웅진시대 도교신앙 입증하는 귀중자료 백제인의 성정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지형적,지리적 입지조건이다.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처럼 산악지대를 터전으로 하여 자라난 나라가 아니었다.삼국 중 백제는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었고 또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선은 중국을 향해 거의 무방비상태로 개방되어 있었다.백제가 농업생산력이나 대외교역면에서 선두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이것은 백제 역사의 전개에 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짐승과 화초 길러 백제인의 느긋한 심성은 결국 여유있는 경제생활의 산물이었던 것 같다.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시대 유적이나 미술품을 대하면서 우리들이 한결같이 감명을 받는 것은 그들이 진정 풍류와 멋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사비도성의 진산인 부소산성 동쪽 산봉우리에는 영일루가 있었는데 왕과 신하들이 멀리 계룡산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실로 이곳에서는 계룡산 연천봉과 남쪽으로 가림산성(성흥산성),구룡평야 등 훌륭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또한 백제 지배층은 부소산성 바로 밑을 흐르는 금강을 마치 하나의 내해,호수쯤으로 생각하여 이곳에서 북과 거문고를 타며 연유를 즐겼다. 백제인의 풍류와 멋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 궁원문화이다.「삼국사기」를 보면 백제가 왕궁에 연못을 파서 즐긴 것은 한성시대인 진사왕7년(391년)의 일이었다.이때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서 인공산을 만들어 이상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고 한다.그뒤 웅진시대인 동성왕22년(500년)봄에도 궁성 동쪽에 높이가 다섯 발이나 되는 임류각을 세우고 못을 파서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현재 부여에 남아 있는 궁남지는 사비시대의 전성기였던 무왕35년(634년)3월에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만든 것이었다.기록에 의하면 못언덕에는 사방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겼다고 한다.뒤에 못가에 망해루를 지어 궁중 연회장소로 이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백제에 도교사상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증언해 준다.고대 중국의 도가사상에서는 특히 불로장생설이 유행하여 동해(우리의 서해)의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선이 사는 세개의 산이 바로 방장산과 봉래산,그리고 영주산이다.그러니까 궁남지에 만든 인공섬을 방장선산으로 여겼다는 것은 도교사상의 영향임에 틀림없다.사실 도교사상은 비교적 일찍부터 백제에 들어온 듯하다. 한성시대의 근소고왕은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고 북쪽으로는 황해도방면에서 고구려군대를 크게 무찌른 일세의 정복군주였다.근초고왕 24년(369년)장군 막고해는 승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을 계속,마침 수곡성(황해도 신계)북쪽에 이르렀을 때 태자 근구수에게 더 이상의 추격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막고해는 태자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지금 얻은 것이 많은데 어찌 다시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이로 미루어 볼때 당시 백제의 지배층 사이에서는 노자의 「도덕경」이 읽혀졌던 것 같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은 웅진시대 백제의 도교사상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다.즉 무령왕비의 지석 끝에 음각된 매지문에는 「불종율령」(율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란 문구가 있는데 이는 도사들이 주문을 외울때 마지막 대목에 으레 따라붙은 「급급여율령」이란 구절을 백제식으로 고친 것으로 짐작된다.하긴 도교 용어가 보인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도교사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일지도 모른다.학계 일각에서는 이 매지권의 사상적 근거를 유교사상에서 찾고 있다. ○도교제도를 제정 그렇지만 지석과 함께 출토된 두개의 구리거울,즉 의자손수대경과 방격규구신수경의 명문에 「상유선인 불지로」(위에 선인이 있어 늙음을 모른다는 뜻)라는 문구가 있는 점을 아울러 고려할때 역시 「불종율령」이란 문구는 6세기초 도교신앙의 실태를 엿볼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본래 도교는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나온 종교이다.거기에는 음양오행설이나 신선사상,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노장의 은둔사상등 갖가지 요소가 뒤섞여 있다.그것이 남북조시대인 5세기경에 불교의 자극을 받아 경전과 사원(도관)이 만들어지고 전문 사제직으로 도사제도가 제정되면서 정식 도교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백제에 도교의 요소는 침투해 들어왔다고 생각된다.장군 막고해가 「도덕경」을 인용한 것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불로장생과 현세에서의 부귀와 향락을 추구하는 도교는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널리 유포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된 때였으므로 도교는 불교와는 다른 측면에서 백성들에게 안심립명의 위안을 주는 심리적 효과가 컸을 터이다. 도교사상은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를 즐긴 백제인의 기질에 잘 들어맞는 점이 있었다.더욱이 지배층이나 일반국민은 가릴것 없이 장기간의 전란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던 만큼 장생불사하면서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도교의 가르침은 그 자체 유토피아사상에 다름 아니었다.사비시대에 불교와 더불어 도교가 크게 융성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그리하여 그것은 의장이나 제작 기법으로 볼때 도교적 요소가 짙은 궁남지와 같은 정원문화를 창출하게 되고 또한 독자적인 조형미술을 꽃피우게 했다. ○조형미술 꽃피워 오래 전에 부여군 규암에서 발견된 이른바 산경무늬 벽돌만 해도 품자형의 세 봉우리가 중첩하고 산 밑에는 암석이 돌기,산 위에는 수목이 총립,한 가운데는 집 한채,오른쪽에는 도사로 짐작되는 한 사람이 새겨져 있다.이는 분명히 삼신산과 도관,도사를 표현한 것으로 그자체 유현한 도교적 세계관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지난해 연말에 기적적으로 발견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사비시대 백제의 도교신앙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이 향로의 몸체를 덮고 있는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다시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때기에 앉아있거나 날아가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바로 도교의 삼신산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 향로를 명명함에 있어서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을 부가한 것은 적절하다고 하겠다.실로 이 금동제향로는 사비시대 도교의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적 표현주의가 한껏 발휘된 최고의 명품이 아닐수 없다. ◎6세기 고구려에 처음 들어와/삼국유사에 기록… 한때 유교·불교보다 우위 도교의 본바탕은 신선사상이다.거기에 노장사상과 유교·불교와 함께 민속신앙의 여러 요소들을 수용하여 종교로 발전한다. 신선사상은 기원전 3세기쯤 중국에서 생겨났다.산악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신선사상은 결국 도가사상으로 태어난다.이 도가사상은 도교가 종교형태를 띠고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래서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조절한 주요 사상이기는 하나 본래부터 도교가 도가사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도교는 5세기 쯤에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비로소 종교형태를 갖춘다.도교가 추구하는 궁국적인 목적은 불로장생이다.특히 그 원류가 신선사상에 연결되어 건강관리를 중시하게 되었다.결국은 질병치료에서 불로장생에 이르는 도교의학을 성립하는데,그 극치가 이른바 김단이다.특히 금단에서 이끌어낸 물리화학적 방술의 단학을 도법 수련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도교가 들어온 기록은 삼국유사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AD624년(영류왕7년)에 당나라 고조가 도사를 파견,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케 함으로써 영류왕이 나라사람들과 같이 들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그 뒤에 AD640년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로부터 도사 8인과 「도덕경」을 다시 구해와 도교를 유교와 불교보다 우위의 종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 가운데 백제에 대한 도교유입기록은 거의 없다.백제의 경우 도교적 정황이 약간은 풍겨왔다.그런 가운데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 도교의 실상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는 주요자료로 부상했다. 어떻든 도교는 삼국과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평정과 건강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 임병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완의 의병조직 독립의군부 이끌어/12년 고종밀서 받고 대규모 전쟁준비/착수 2년만에 일경에 발각… 수포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돈헌 임병찬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되믿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장세력인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추진하다 일제에 붙잡혀 유배중 숨진 애국선열이다. 선생은 44세때인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선비로서 지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제 불량배들에게 시해되는 치욕스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66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의병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선생은 1851년 2월 전북 옥구군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세살때에 천자문을 읽을 만큼 총명을 타고난 선생은 15세때 전주부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관직에 나섰으며 38세때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다. 다음해 낙안군수에 임명됐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기로 하고 곧 관직을 청산,귀향해 회문산 북쪽 종성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일제를 물리칠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집안의 남녀종복을 풀어주는등 가산을 정리한 선생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기 1년전인 1904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으나 정부 대신들이 『시기가 이르다』고 만류하자 거사를 일단 중단하기도 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고는 즉시 의기투합,서로 사제의 의를 맺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포천에 살고 있던 면암은 같은해 정월무렵 영호남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 것을 도모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문인들이 『호남의 한 선비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자 선생을 믿아왔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따라 그해 6월4일 의병 80여명을 모아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높게 들고 일어났다. 이 의병들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날로 태인지방을 휩쓸어 군기와 군량을 확보한데 이어 정읍·순창을 차례로 격파,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다. 거사 5일만인 6월8일에는 순창에서 마주친왜군을 단숨에 물리쳐 곡성을 점령하는등 기염을 토했으며 의병수도 9백여명으로 처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면암과 선생은 6월12일 전주와 남원 진위대군사가 반격작전에 돌입하자 동포간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조직한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전주진위대는 해산과정의 의병들을 공격,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했으며 선생과 면암등 13명이 전주진위대를 거쳐 일본군사령부에 잡혀가 7월9일 대마도 위수영에 감금됐다. 그뒤 면암이 옥중단식으로 순국하자 선생은 1907년 첫 유배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불매동맹·국채보상운동등을 전개하다가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됐다.선생이 순무대장으로 지명된 것은 1906년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례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려보냈으나 황제는 다시 밀소를 내려보내 그를 신임했다. 선생은 1914년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주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립의군부의 이같은 계획은 그해 5월 일경에게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일경이 6월3일 총사령인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키자 선생은 자결을 결심하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12일 금고 1년을 선고받은뒤 거문도에 다시 유배됐다.선생은 2년뒤인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 도읍 공주서 부여로(백제를 다시본다:1)

    ◎부여 금동용봉향로가 말하는 사비시대/풍요로운 곡창서 「사비문화」 무르익다 백제는 곧잘 잃어버린 왕국으로 간주되어왔다.그 까닭은 정사성격의 사료부족과 또 승자에 의한 문화유산파괴에서도 찾아진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연말 발굴된 부여 능산리 출토유물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사 연구의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다.서울신문은 이를 계기로 전문학자들이 백제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장기기획물 「백제를 다시본다」를 주1회씩 연재키로 했다.금동향로가 제시하는 자료를 근거로 백제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넓은평야 끼고 있어 “3국중 가장 자족”/도성체제 완벽… 5부 구획에 2중 방어/국방 한창 뻗어나갈때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비명에 저버려 일찍이 조선후기의 대실학자인 정채산은 국가의 운명이 수도의 입지조건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다.그런만큼 반드시 요충지대를 점거하여 위압의 형세를 이루어야만 일단 위기가 닥치더라도 능히 이를 극복하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이던 오늘날의 서울은 문자 그대로 김성탕지와 같은 곳이라서 건국이래 4백93년간이나 국세를 유지했으나,한번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긴 뒤에는 1백85년만에 망했다고 한다.사비시대는 웅진시대 63년을 제외하면 겨우 1백22년에 지나지 않는다. ○각부는 또 5권으로 큰 들녘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비도성은 확실히 한성(서울)과 같은 천연적인 요새는 아니다.그렇다고 백제의 지배층이 도성의 방어체제를 게을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지난 십수년간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들은 사비시대의 도성계획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밖 남쪽에 세웠다.이는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내의 광장에 구축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옛 문헌에 의하면 사비도성의 시가지는 크게 5부로 구획되고 또한 각부는 5권으로 나누어지는등 실로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한마디로 사비도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볼 때 가장 잘 디자인된 수도였다.한국고대의 도성제 발달사상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공주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떨어진 부여로 천도한 것은 일세의 영주인 성왕 16년(서기538년)봄의 일이었다.실로 국가재흥을 목적으로 한 웅대한 경륜에서 나온 결단이었다.백제는 이보다 앞서 서기 475년 서울로부터 공주로 천도했는데,이는 고구려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급박한 국가위기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러나 부여천도는 이와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공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으나 그자체는 고립된 곳이고 수도가 들어시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이 야영도시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공주시대 역대 군주들의 꿈이었다.마치 고구려가 압록강가의 산악지대인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려 한 것과 같은 취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성왕때부터 부여의 중요성에 주목한 백제의 최고지배층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요량으로 사냥을 겸하여 자주 이곳에 들러 지세를 살피는등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예의검토해왔다.금강가에 위치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부여지방은 방어에도 적합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곳으로 비쳤다. 그리고 지리상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지방으로의 진출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백제조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이 기름진 곡창지대를 적극개발함으로써 보상하려고 했다.요컨대 부여천도는 장기간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단행된 것이었다. ○결실못본 화평세계 이처럼 사비시대는 개막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극심한 전란기였다.영토확장을 목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삼국간의 국경선은 수시로 뒤바뀌었다.이같은 살벌한 시대풍조 속에서도 백제는 삼국중 가장 자족함을 알며 인을 실현코자 노력했다.한성시대인 근소고왕때 장군 막고해가 승승장구 고구려군대를 추격하던중 수곡성(황해도 신천)북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회군을 결행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비시대 법왕은 서기 599년 즉위하자마자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다.이에따라 민가에서 기르던 매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사냥도구와 그물마저 태워버리게 했다.이는 같은 시대 신라와는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다.즉 신라왕의 최고고문이었던 원광법사는 바로 이때 「살생유택」의 덕목이 들어 있는 세속5계를 제정하여 비록 조건을 달았지만 살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궁극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어쨌든 백제의 지배층이 국가의 위기상황 아래서도 인을 구현하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사비시대 화평의 세계를 실현하려던 백제인의 웅지는 끝내 결실을 하지 못했다.무왕의 야심에 찬 팽창정책과 그 아들 의자왕의 거듭된 실정은 신라를 자극했다.그래서 신라로하여금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아예 지도상에서 말살하려는 비밀외교에 열중하게 만들었다.신라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당과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고 양국 연합군은사전계획에 따라 서기 660년 전격적으로 백제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마침내 사비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그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수도의 지세를 중요시하는 정다산은 백제의 멸망원인이 사비도성의 집중성 결여에 있는 것인 양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방위체제는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우아·격조 높은 문화 한 시대의 문화는 정치를 비추는 거울이다.흔히 이야기되고 있듯이 사비시대야말로 백제문화가 그 절정에 도달한 황금기였다.얼마전에 별세한 삼불 김원용선생은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기력해질 때 생기는 퇴폐나 타락의 양식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소멸되어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백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사비시대의 백제문화 역시 쇠퇴·타락의 징후는커녕 완숙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다.결국 백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끝에 멸망된 것이 아니라 한창 국력이 뻗어나갈 즈음 칼에 등을 찔려 비명에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일제가 이른바 부여신궁을 지을 목적으로 거두어들인 석재더미 속에서 백제말기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의 당탑 건립기념비석이 일부 파괴된 채로 발견된 일이 있다. 이로써 사비시대 백제문화의 우아하고도 격조높은 기품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백제말기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 근처의 한 건물지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여기서 나온 금동제 향로를 비롯한 사비시대 후기의 유물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완숙기에 접어든 백제문물의 찬란함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또 덧붙여 말하거니와 신비스러운 빛깔로 떠오른 새로운 문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대하면서 백제를 뒤돌아보고 재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비시대의 문화상/출토유물 통해 「선진문화」 확인/능산리·궁남지유적발굴로 실체 드러나 사비시대 백제(AD538∼660년)의 문화상은 고분과 절터·성곽유적 등에서 출토된 매장문화재를 통해 드러난다.신라와의 각축에서 패망의 길을 걸은 백제는 외형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당했기 때문에 땅속에 묻힌 유물만이 겨우 백제의 잔영을 남기는 비운의 역사를 겪었다. 이 시대의 백제고분은 충남 부여군전역에 분포되어 있다.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중심으로 능산리등 13개 고분군이 대표유적으로 꼽힌다.거의가 돌방무덤(석실분)인 고분유적은 껴묻거리(부장품)라는 유물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고고학이나 역사연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사비시대 고분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처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능산리 고분군 발굴이후부터다.1917년까지 모두 6기가 발굴되었다. 능산리 고분에서 사신도벽화가 있는 1호분이 특히 유명하다.널길(선도)이 달린 굴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는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금동투조식금구 등이 발굴되었다.그리고 일찍부터 왕릉으로 전해왔다.이번에 햇빛을 본 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바로 능산리 고분군 이웃에서 출토되었고,마주보고 있는 나성의 일부도 발굴되어 사비도성 방어요새가 밝혀진바 있다. 최근에는 금동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지역 말고도 궁남지유적 3차발굴사업이 진행되어 벼농사유적인 논유구와 함께 목각의 새와 수레바퀴 등을 출토하는 수확을 거두었다.이밖에 정림사터를 비롯,부소산성 도성내의 도시계획 유구 등이 발굴되어 사비시대 백제의 선진문화상을 속속 보여주었다.특히 사비시대 백제문화권을 전북 익산지역으로까지 확대,백제 최대의 가람 미륵사터를 발굴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실상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 유적으로는 세기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비롯,공산성과 임류각 발굴도 고고학 성과로 치부된다.이와 더불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발굴된 한성시대(AD18∼475년)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몽촌토성과 백제 초기의 건국집단의 무덤으로 보이는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적석총)도 백제연구 고고학자료가 되고 있다.
  • 구용상 전남지사(신임 차관급 프로필)

    ◎정치감각 탁월한 행정관료 출신 정관료 출신으로 기획력이 뛰어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정치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외모는 부드럽게 보이나 추진력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허락지 않는다.지난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장을 역임.여당의원(구 민정당 화순·곡성)출신으로 야당일색으로 구성된 전남도 의회와의 관계정립이 관심.부인 이우선씨(57)와 외동딸.최근에는 공직을 맡지 않아 재산은 등록치 않았다. ▲전남 화순(58) ▲서울대 법대 ▲내무부 기획예산담당관 ▲목포·광주시장 ▲전북부지사 ▲12대 국회의원
  • 연일 「쌀개방 성토」 시위/전국서 집회·가두행진

    ◎전남도의원 단식농성 7일 서울에서 있은 쌀시장개방반대 대규모집회에 이어 8일에도 전국 각지방에서 농산물의 수입을 반대하는 농민 대학생 농민단체등의 반대시위가 이어졌다. 전남도의회 민승연 유지형 이채형 김명국 임인철의원은 이날 도의회 의원휴게실에서 쌀수입 반대를 요구하며 삭발및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충북 제천시·군 농민회와 영농후계자협의회등 제천 농민대표자 50여명도 이날부터 ▲쌀시장개방 적극반대 ▲쌀시장개방에 대한 국민투표실시등을 요구하며 제천군 농협지부장실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한국농어민후계자 경기도연합회 농민 1천여명은 이날 수원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에서 농민대회를 갖고 농기계와 농어민후계자 자격 반납운동을 벌이기로 했다.이들은 또 정부가 쌀수입을 강행한다면 개방일로부터 보유양곡 소각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전북 화순군 농민회 회원 1천여명은 화순읍 우시장 공터에서 「쌀수입 반대 화순군 농민대회」를 갖고 쌀수입이 저지될 때까지 모든 방법을 통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구례군 농민 5백여명과 곡성군 농민단체연합 농민 3백여명도 구례실내체육관과 곡성읍 5일시장에서 「기초 농산물 수입저지를 위한 농민대회」를 각각 갖고 쌀수입 저지와 재해대책법및 농작물재해보상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충남 아산·온양 농민회등 농민단체 농민과 대학생 4백여명은 온양역광장에서 쌀수입 개방 철회를 위한 농민대회를 갖고 1.8㎞ 떨어진 온양관광호텔 앞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전북 부안군의 위탁영농회사인 「끌밀회」 회원및 가족 1백여명은 부안군 농협앞에서 「쌀수입 개방반대」를 주장하는 농민대회를 갖고 1·5㎞ 떨어진 부안군청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전남대 조선대등 남총련소속 대학생 5백여명은 광주시 도심에서 「쌀수입반대 서명운동」을 벌였고 전북 군산·이리지역 총학생회 간부 20여명도 군산시청앞과 이리역광장에서 각각 「쌀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농성과 서명운동을 벌였다.
  • 의원·대사 등 공직자 71명/강원땅 90만평 보유

    ◎대부분 무연고… 투기 의혹 【춘천=조한종기자】 강원도지역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71명의 공직자들이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본인 혹은 부인이나 자녀들 명의로 강원도에 사둔 땅은 모두 2백98만5천7백13㎡로 땅값은 공시지가만 따져 무려 42억5천4백11만여원에 이른다.고위공직자들 소유 부동산은 대부분 주요 개발예정지나 관광지주변에 몰려 있으며 부동산 투기바람이 일기 시작한 80년대초이후 매입한 것으로 밝혀져 다른 투기지역에 땅을 가지고 있는 공직자들과 마찬가지로 투기의혹을 받고 있다.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액수의 땅을 가진 고위 인사는 경기 용인등에도 대량의 부동산을 사둔 김동권의원(민자·경북 의성)으로 속초시 설악동 두곳에 6억3천2백여만원에 해당하는 1천6백26㎡의 노른자위땅을 87년 한꺼번에 사둔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으로 전남 곡성이 지역구인 민주당의 황의성의원은 속초시 조양동 610등 4군데에 최고 3천7백26㎡등 6천9백70㎡(공시지가 5억6천4백32만2천원)의 토지를 매입,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고 있다. 경기도 용인,제주도등지에도 본인 및 부인·자녀들명의로 큰덩어리의 땅을 가지고 있는 남평우의원(민자·수원)은 속초시 조양동 일대에 모두 3억1천9백55만여원에 해당하는 2만2천2백1㎡ 임야를 매입해둔 것으로 밝혀졌다. 인천출신의 이승윤의원(민자)도 2억1천여만원 상당의 동해시 발한동 1만5천9백62㎡의 땅을 소유한 것을 비롯,국민당의 김용환의원,무소속 차수명의원등 모두 25명의 국회의원이 강원지역 곳곳에 갖가지 부동산을 사두고 있었다. 부산고등검찰청 신상두차장검사도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 4필지 49만1천5백7㎡를 비롯,장남명의로 횡성군 내곡면에 6만9백92㎡등 모두 55만2천4백99㎡ 1억8백59만6천원 상당의 임야를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도 대사,대학총장,정부투자기관 사장등 41명의 공직자들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강원도 지역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다.
  • 주민 태운 트럭 추락/4명 사망·16명 부상

    【순창】 13일 하오 7시40분쯤 전북 순창군 풍산면 금곡리 호성저수지 앞 도로에서 광주8나 1584호 1.5t 트럭(운전사 김일택·44·광주시 북구 누문동)이 1.5m 아래 농수로로 추락, 운전사 김씨등 4명이 그자리에서 숨지고 트럭 적재함에 타고있던 박명순씨(55·여)등 금곡리 한마을 주민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전남 곡성에서 깻잎을 따는 들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한동네 주민 19명을 적재함에 태우고 순창쪽으로 가던 트럭이 커브길을 과속으로 달리다 미끄러지면서 길옆 농수로로 추락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중이다.
  • 지난달 자살소동벌인 30대/또 한강교아치 올라가 소란(조약돌)

    ○…3일 하오 4시40분쯤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대교 동쪽끝 네번째 아치위에서 조용훈씨(34·전남 곡성군 곡성면 신곡리 100)가 자살소동을 벌이다 30여분만에 경찰에 끌려 내려왔다. 조씨는 『4년전 전남 화순에서 교통사고를 입은 형의 사고처리가 부당해 항의하기 위해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경찰조사결과 조씨는 지난달 30일에도 이 다리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여 경찰에서 구류3일의 처분을 받고 2일 풀려난 것으로 밝혀졌다.
  • 남해안 피서객 긴급대피/태풍 「퍼시」 영향/항공·선박운항 전면중단

    ◎어선 1만3천여척 피항/중부에 호우… 농경지등 곳곳 침수 전국 대부분이 북상중인 제6호 태풍 「퍼시」의 간접영향권에 든 29일 지역별로 집중호우가 내려 전국에서 1명이 실종되고 빗길교통사고로 7명이 숨졌으며 농경지 5백여㏊가 침수되는등 피해가 잇따랐다. 이날 하오부터 제주·부산등 남해안에서는 제주∼목포간 카페리와 항공편의 운항이 전면중단돼 피서객들의 발이 묶였고 각 항구에는 긴급 대피한 어선등 각종 선박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날 상오 11시30분쯤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반송1리 오산천에서 이연정양(14·수원 곡성중 1년)이 자정부터 내린 집중호우로 물이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 또 이날 하루동안 전국에서는 빗길 교통사고가 2건이나 발생,7명이 그자리에서 숨지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 자정부터 우리나라에 걸쳐있던 비구름대와 태풍의 비구름대가 겹치면서 집중호우가 내려 충남 당진에서는 당진읍과 신평면 일대 소하천 7곳의 물이 넘쳐 농경지 2백3㏊와 서산군 일대등 모두 2백32㏊의 농경지가 침수됐다. 경기도에서는 화성군 우정면 조암리와 장안면 석포리일대 논 2백64㏊등 모두 2백67.5㏊의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오산에서는 오산천 고수부지에 세워져있던 승용차 20여대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태풍의 영향으로 제주에서는 목포·부산등지로 가려던 항공편과 여객선 운항이 전면 중단돼 피서객들의 발이 묶였고 제주 연근해에서 조업중이던 각종 어선 2천77척이 제주와 서귀포항등에 긴급 대피했다.또 이날 북제주군 구좌읍 평좌리 비자림 야영장에서 개막되는 제6회 세계걸스카웃대회 일정이 취소돼 1천5백여명의 대회참가자들은 성산국교등 이웃 7개 국교에 분산 대피했다. 부산·거제·가덕도 항에도 긴급 대피한 소형어선 7천2백65척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고 동해안의 각 항구에도 4천여척의 어선들이 긴급 대피했다. 부산·제주·강원등 지방재해대책본부는 태풍피해로 인한 인명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등산객을 긴급 하산시키고 제주의 해수욕객 1천여명을 비롯,피서객을 안전지대로 긴급 대피시키고 해수욕을 전면 금지시켰다. 강원도는 영서지방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북한강 상류지역의 유수량이 크게 늘어나자 상오부터 의암댐 수문 1개,청평댐 5개,팔당댐 6개의 수문을 각각 열어 방류,수위조절에 들어갔다.
  • 오지리에 두고온 서른살(화제의 책)

    ◎악령세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파 신예 작가 공선옥의 첫장편.최근 우리 소설이 소홀히 다뤄온 악령의 세계를 파헤치는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공선옥의 소설은 세상의 「다른 얼굴」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드러낸다.요즘의 젊은 작가들이 시시한 일상의 감동꾸미기에 몰두하고 있을때 지은이는 우리가 잊고 있거나 체험하지 못한 악마적인 세계의 엄연한 실존을 보란듯이 펼쳐준다. 공선옥은 63년 전남 곡성출신으로 전남대 국문과를 중퇴했다.91년 창작과 비평에 「씨앗불」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92년 「장마」로 여성신문문학상을 탔으며 이후 「목숨」「가뭄」등 자신의 체험을 소설화해 왔다. 공선옥지음 삼신각 5천5백원.
  • D­45일(대전엑스포’93:1)

    ◎112국 참가­ 1천만 관람 “경제올림픽” 대전엑스포의 개막이 50일 앞으로 다가왔다.대전엑스포는 종전의 일반상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무역전시회와는 달리 경제·과학·문화의 올림픽으로 치러질 계획이어서 국민의 기대는 물론 세계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대전세계박람회의 참가국은 1백20개국에 24개 국제기구.이같은 전세계의 관심과 참여도는 엑스포사상 최대의 규모다.대전세계박람회조직위원회는 오는 8월7일부터 11월7일까지 93일간의 개최기간 외국인 50만명을 포함한 1천만명의 관람객이 모일 것으로 보고 차질없는 준비에 막바지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21세기를 향하는 꿈을 심어줄 환상의 대전엑스포는 총1조6천억원을 투입해 90만㎡(27만3천평)에 보고 배울거리의 각종시설을 갖췄다.이밖에 대회장 안팎에서는 다채로운 문화예술행사가 펼쳐지게 된다. 조직위는 관람객들의 편리하고 안전한 수송을 위해 기존 운행열차외에 엑스포전용 특별열차와 셔틀버스·헬기 등을 증설운행한다.또 대전시내에서도 각 열차역·터미널과 교통요충지에셔틀버스를 연결운행키로 했다. 숙박시설도 기존호텔과 여관외에 엑스포타운을 건립,운영하며 다양한 식당등 편의시설을 불편없이 갖췄다. 한밭벌 대덕골에서 펼쳐질 세계의 큰잔치를 전국 국민들이 불편없고 유익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설과 교통·숙식 등을 알아본다. ▷시설◁ ○주변도로 단장끝내 총사업비 1조6천1백32억원을 투입,90만1천㎡(27만3천평)에 국제관 국내전시관·공연장·상설독립관·관리시설·유희시설·주차장 등이 갖춰져 있고 주변도로를 불편없게 확장및 포장을 끝냈다. 주요전시관및 행사시설은 중앙에 정부관과 한빛탑을 세워 한국의 번영을 상징하고 동쪽 국제전시구역에는 1백20개국의 외국정부관,24개의 국제기구및 해외기업관등 국제관이 자리잡고 있다. 방사형으로 설치한 이곳에는 대전관을 비롯해 15개 시·도관과 중견기업관·번영관·6개 임시독립관·대공연장·놀이마당이 마련돼 있다. 또 서쪽의 상설전시구역에는 정보통신관·우주탐험·자동차관·테크노피아관·소재관·지구관등 14개 상설독립관이 미래의 꿈을 심어주며중공연장이 자리하고 있다. ▷과학기술산업◁ ○국제 심포지엄 개최 차세대 꿈의 열차로 불리는 자기부상열차가 국내 최초로 개발돼 전시운행되며 전력에 의해 주행하는 전기자동차가 박람회장내의 교통수단으로 선을 보이게 된다. 그뿐 아니라 태양에너지를 동력원으로 달릴 수 있는 제3세대 운송수단인 무공해태양전지자동차와 임진왜란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거북선을 태양전지를 이용해 엑스포 기간중 전시운행하게 된다. 이밖에도 과학위성·과학로켓발사,고대로켓 신기전,지상관측용 무인비행선,엑스포 마스코트 꿈돌이로봇 등이 미래의 무한한 상상력을 심어주는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볼거리와 배울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과학행사로 세계로봇경연대회,인류의 미래상을 정립케 할 대전엑스포93 주제 심포지엄,청소년들에게 드높은 기상을 심어줄 국제항공대회,세계우주소년단대회,엑스포맞이 컴퓨터영상축전,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개도국들의 긍지를 높여줄 전통과학 국제심포지엄 등을 개최한다. ▷문화행사◁ 재생조형관·전통공예실·비디오아트쇼·리사이클링특별전등 문화예술 특별이벤트를 설치,운영하며 도자기·미술작품등 6개부문의 문예작품을 전시하게 된다. 공연행사로 심볼 이벤트,엑스포 그랜드쇼,메인 이벤트가 다양하게 펼쳐진다.스페셜 이벤트로는 국내외 지역별 민속축제를 비롯해 미스월드·유니버시티선발대회,세계 베스트모델선발대회,세계 기네스기록 도전대회,국제 에어로빅선수권대회,엑스포 패션쇼,엑스포 영화제 등이 눈요기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축제행사로는 서울·부산·광주·춘천에서 대전까지 이어지는 연예인들의 엑스포 길놀이와 대전공설운동장에서 개막전야제의 거대한 축제가 어우러진다.또 박람회장 안에서는 대회기간 벌어질 세계각국의 진기한 재능소유자들이 거리에서 실기를 통해 곡예·마술·거리의 악사·거리 춤·행위예술 등도 볼거리중의 하나다. ▷박람회장◁ ○관람 2박3일 소요 모든 시설을 완벽하게 관람하려면 최소한 2박3일이 소요된다.관람코스는 일정하게 정해진 것은 없으나 출입문이 동·서·남문으로 3개문을 통해 입장하게 된다.입장문에서 가까운 관람시설은 남문이 한빛관·정부관·국제관,서문은 꿈돌이동산(위락시설),동문이 국제전시구역.각 출입문에는 상세한 안내자료가 비치돼 있다. 관람시간은 8월7일부터 9월15일까지 40일간은 상오9시30분에 개장해 밤10시에 끝나며 9월16일부터 11월7일까지는 폐문시간만 하오8시로 2시간 단축된다.단 토요일과 공휴일은 종전과 같이 밤10시까지다.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내국인안내 7천7백35명,외국인안내 6백명등 8천3백35명의 자원봉사원이 불편없는 안내를 맡게 됐다. ▷교통◁ 엑스포조직위는 대회기간에 1천만명(외국인 50만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갈 것으로 보고 있다.1일 최고인파를 22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엑스포조직위는 이같은 관람객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교통혼잡이 우려되므로 승용차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줄 것을 당부하는 한편,기존 교통체계외에 특별열차와 셔틀버스·헬기등을 운행키로 했다. 엑스포전용 특별열차는 하루 서울에서 11회,부산 2회,호남·전라선의 광주·순천역을 기점으로 1회씩 박람회장 바로옆에 임시로 설치된 엑스포역까지 왕복운행한다. ○특별열차 왕복운행 중간역은 경부선이 영등포·수원·김천·구미·왜관·동대구·밀양·구포이며 요금은 서울 2천8백원,부산 4천7백원.호남선은 장성·정읍·김제·이리,전라선은 구례구·곡성·남원·전주·이리로 요금은 광주 3천3백원,순천 4천1백원이다. 승차권예매는 이미 5월9일부터 시작됐으며 행사가 끝나기 하루전인 11월6일까지 전국 각역에서 팔고 있다.전화예약은 서울·부산·대구·광주지역 철도회원 가입자의 자동전화예약을 매일 상오7시부터 하오10시까지,일반전화예약은 상오9시부터 하오6시까지.1명이 살 수 있는 한도는 5장이내.창구예매는 역이나 철도승차권 위탁발매여행사에서 매장에 제한없이 판매한다. 셔틀버스는 서울·부산·대구·광주·인천·마산·창원·춘천·강릉·경주·안동·진주·울산·청주·충주·제천·목포·순천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박람회장까지 운행.요금은 서울·인천·경주·광주·안동 1만2천원,부산·강릉 1만5천원,대구·마산·창원·울산·춘천 1만원,진주1만1천원,목포·순천 1만4천원. 헬기는 서울에서 김포공항과 잠실운동장옆 한강시민공원의 잠실헬리포트,부산 김해공항에서 각각 박람회장 헬리포트까지 운항한다.비행시간은 40분.요금은 서울·부산 모두가 5만5천원이다.서울 예약안내는 203­2972∼3. 대전시내는 주요역과 터미널·교통집중지역에 셔틀버스를 연결시켜 운행한다. ▷숙식◁ ○엑스포타운 1박 4만5천∼23만원 엑스포 관람객 숙소용 엑스포타운을 이용하면 제일 편리하다.박람회장까지는 셔틀버스가 무료로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10분정도. 아파트로 건축된 32·33·43·49·57평형등 다섯가지 평형의 여관식과 호텔식 2천1백18가구가 7월8일부터 11월14일까지 운영된다. 1가구 5∼9명 숙박에 하루요금은 여관수준의 비품을 갖춘 온돌의 여관식이 4만5천∼9만원,관광호텔수준의 비품과 침대를 갖춘 호텔식은 11만∼23만5천원선.여기서 부가가치세 10%가 가산되며 실내에서는 취사가 일체 금지된다. 편의시설로는 고급호텔수준의 식당과 셀프서비스의 카페테리아식 또는 대중음식점의 식당이 있다. 요금은 고급이 1만∼2만원,카페테리아식은 3천5백∼5천원,대중음식점은 2천5백원. 이밖에 일반숙박시설로 21개 호텔급을 비롯해 동학사지구를 포함한 여관의 1만4천3백개 객실을 확보해 놓고 있다.일반호텔이나 여관을 이용하려면 엑스포타운·서울·대전등 14개소에 설치된 숙박정보안내센터를 통해 안내를 받을 수 있다.타운내에는 우체국·전화국·은행·의무실·약국·여행사·테니스장·생활용품점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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