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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재 예술가 고흐는 천문학에도 조예 깊었다

    천재 예술가 고흐는 천문학에도 조예 깊었다

    썰렁 농담 하나. 예술가는 모두 할망구다. ‘영감’이 있을 때만 일해서다. 예술혼에 불타오르는 고귀한 천재들 얘기, 지칠 법도 하다. 그래서 ‘필’받은 천재 예술가를 부정하는 ‘실험실의 명화’(이소영 지음, 모요사 펴냄)가 흥미로운지도 모르겠다. 도입부에서 이미 19세기 영국 화가 조지프 터너의 눈과 1995년부터 목성을 관측한 우주선 갈릴레오호의 렌즈를 ‘풍경화가’라는 기준으로 비교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이다. 광기어린 천재의 대표선수 고흐를 두고 측두엽 뇌전증 환자였고 당대 천문학 지식을 충분히 연구했다고 지적한다. 측두엽 뇌전증은 뇌가 오버해서 주변 자극을 더 크고 활발하게 받아들인다.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면 왠지 그럴 것도 같다. 고흐의 천문학 지식도 상당했다. 17세기 플랑드르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를 두고서는 먹지로 대상을 베끼듯 그림을 베껴서 그렸을 것이란 추측을 소개해 뒀다. ‘천지창조’ 등의 그림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시스티나대성당의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해부학 강의였단다. 그러니까 그 천장에 뇌와 장기와 등뼈가 가득했다는 얘기다. 영국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은 거의 기상학자 대접을 받는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는 2004년 캐나다에서 발견된 ‘틸타알릭’ 화석을 떠올리는 식이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좀 거북하다. 모처럼 우아와 교양 한번 떨어보려는데 재 뿌리는 것 같아서다. 그럼에도 왜 이런 얘기를 할까. “과학의 출발이 그러한 것처럼 예술의 출발도 관찰”이라 믿기 때문이다. 과학과 예술은 관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책에서는 갈릴레오와 카할(1906년 노벨생의학상 수상자)처럼 뛰어난 과학자들이 남긴 아름다운 드로잉도 만날 수 있다. 이 얘길 듣다 보면 소설가 김연수가 떠오른다. 김연수는 제일 듣기 싫은 말로 “소설 쓰고 있네”를 꼽았다. 어떤 장면, 심리, 상태를 문장으로 묘사하는 건 집요한 관찰의 결과물인데 제 마음대로 지어내면 된다고 착각한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저자의 주장을 재수없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디서 “예술하고 있네” 비아냥 소리가 들린다면, 충분히 함께 흥분해줄 것 같으니까. 소재가 딱히 새로운 건 아닌데, 주물럭대며 비빈 손맛이 좋다. 1만 68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디지털 시대 예술의 모습은…

    디지털 시대 예술의 모습은…

    디지털이 빠르긴 하다. 조금 더 편한 게 없을까 싶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덧 새 기술에 맞춰 살기만도 바쁜 시대가 되어버렸다. 2013년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TV가 디지털로 전환돼서다. 솔직히 공중파인데도 공중파 같지가 않아서인지 아주 큰 충격이랄 것까지는 없다. 다만, 디지털이 첨단에서 일상으로 진입했다는 선언으로는 의미가 있다. 백남준은 1984년 이미 “대중매체가 미래의 미술관이 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새해 초입, 이 말의 의미를 짚어보는 전시 2개가 열린다. 오는 28일까지 16명의 작가가 참여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서린동 아트센터나비에서 열리는 ‘디지털 퍼니처’전은 전시 제목에서부터 이런 변화상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디지털이라는 최첨단 용어에다 집안에서 가장 오래된 도구인 가구를 접목시켜 놓아서다. 최첨단의 일상화다. 이는 최근 현대미술과도 통한다. 순수예술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1%를 위한 오리지널리티였다면, 이제는 99%가 손가락 몇 개 놀려서 쉽게 받아보고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는 의미다. 전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됐다. ‘텔레 + 비전’(tele + vision)은 초기 흑백 TV에서 최근 스마트TV에 이르기까지 TV의 모든 것을 선보인다. 멀리 내다보되, 그 멀리가 국내 수준이 아니라 글로벌이다. ‘디지로그’(Digilog)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관계를 찢어 놓고 보기보다는 연결해서 보자는 제안을 품은 작품들을 모아뒀다. ‘핑퐁’(Ping Pong)은 탁구 용어를 사용한 데서 드러나듯, 일방향을 벗어나 쌍방향 미디어를 탐구한 작품들을 담았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대신 ‘작품에 손을 대주세요!’라고 외치는 작품들이다. ‘나비 팟캐스트’(Navi Podcast)는 인터넷 방송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무대다. 전시 마감 때까지 실제 인터넷방송을 제작, 하루에 하나씩 공개한다. 2월 28일까지 광주시 운암동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열리는 ‘굿나잇 아날로그 굿모닝 디지털’전은 백남준의 뒤를 잇는 미디어 아티스트라 불리는 이이남 작가의 작품 40여점이 선보인다. 작가의 장기랄 수 있는, 동서양 고전회화를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여전하다. 고흐와 겸재 정선을 한 화면에다 같이 옮겨뒀을 뿐 아니라, 8폭 병풍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미디어아트도 눈길을 끈다. 전시장 한쪽 구석에다 낮에는 밤의 풍경을 틀어주고, 밤엔 낮의 풍경을 보여주도록 해둔 것도 장난기가 넘친다. ‘이사야 53장’은 나무 십자가에 휴대전화를 들이대면 전화기에 예수상이 나타나면서 이사야 53장으로 만든 찬송가가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눈길을 붙잡는 것은 과거에 대한 얘기들이다. ‘침묵’은 백남준의 ‘촛불 하나’에서 따온 디지털 촛불들을 방안 벽에다 가득 배치한 뒤 그 가운데에 타자기만 홀로 놓아 뒀다. 타닥거리는 타자기 소리와 함께 완성되는 조서는 점차 5·18 관련자들의 얼굴들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자동차 사이드미러에다 옛 광주시내의 모습을 담아둔 작품에다가는 ‘역사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을 붙여뒀다. 사이드미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는 더 가까이 있음’이라는 문구를 패러디한 것이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고 핸들을 함부로 꺾었다가는 이런저런 사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2013 신춘문예-평론 당선작]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 :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들/유인혁

    [2013 신춘문예-평론 당선작]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 :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들/유인혁

    1 이야기의 끝, 혹은 끝없는 이야기 이집트의 영조(靈鳥) 피닉스는 수명이 다하면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태양의 신전으로 날아가 스스로 불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피닉스는, 이윽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이 영조는 불사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보르헤스는 불 속에서 파괴되며 재생하는 이 영원한 순환을 묘사한 적이 있다. ‘원형의 폐허들’의 주인공은 ‘불의 신전’에서 한 소년을 만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소년의 폐동맥과 심장, 뼈대, 눈꺼풀, 셀 수 없이 많은 머리카락 등을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생생하게 떠올렸다. 정교한 상상 속에서, 소년은 마침내 실체가 되어 현신했다. 그런데 이 창조자는 소년이 언젠가 자신이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라 걱정했다. 불의 신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결국 불이 될 것이다. 환영은 불에 탈 리가 없으므로, 언젠가 소년은 불에 닿았을 때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고민으로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노심초사하다가 불타는 신전으로 뛰어들었다. 이 기나긴 고민을 끝내줄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불타는 폐허 안에서, 그는 자신이 불에 타지 않음을, 그러니까 자신도 누군가의 환영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소년 또한 먼 훗날 환영을 만들 것이다. 이 과정은 영원히 반복 되리라…. 피닉스와 보르헤스의 환영은 모두 반복을 통해 영원을 성취한다. 그것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직선이 아니라, 영구히 되돌아오는 원환이다. 그러니까 끝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 펼쳐진다는 뜻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는 바로 반복이다. 끝에 도달했을 때, 모든 것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끝과 무한(無限). 최근 소설쓰기 자체를 주제로 삼은 일련의 메타픽션 속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참으로 이렇다. 한유주는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당신들에 의해 쓰였다. 나는 읽어본 적이 없는 문장들을 베끼고 또 베낀다”(한유주, ‘농담’,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30쪽)고 말한다. 이때 새로운 글쓰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된다. 대홍수가 인간의 문명을 송두리째 박살낸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의 세계에서, 창작의 가능성은 이 세상과 함께 종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한유주는 끈질기게 자신이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한유주는 자기 글쓰기의 한 조건으로 ‘이야기의 끝’을 상정하고 있다. 이미 “이야기는 오래전에 모두 매진되” (한유주, ‘죽음의 푸가’, “달로”, 문학과지성사, 2006, 48쪽)어서 그 어떤 처녀작도 새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최제훈은 끝없는 이야기의 모델을 보여준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모두, 오래전부터, 당신들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은 오히려 충만한 자유를 제공한다. ‘괴물을 위한 변명’에서 “프랑켄슈타인”을,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는 흡혈귀 전설을, ‘셜록 홈스의 숨겨진 사건’에서는 셜록 홈스의 이야기를 솜씨 있게 패러디했던 그는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애거사 크리스티, 에도가와 란포, 오스카 와일드, 스티븐 킹, 로베르트 비네 등을 종횡무진 누빈다. 기성의 작품이 많으면 많을수록, 최제훈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한유주에게 제약이었던 것이 그에게는 기회요,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최제훈은 바로 이러한 조건 아래서 “완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이야기” (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82쪽)를 상상했다. 2 플롯 없는 소설들 왜 차라리 ‘소설의 끝’이 아니라 ‘이야기의 끝’인가.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에서 진실로 끝나버린 것은 바로 플롯이다. 바꿔 말해 시작과 끝을 유기적으로 형성하는 서사가 부재하고 있다. 한유주의 소설에서 내용이 짐작 가능한 이야기는 드물게 출현한다. 한유주의 소설은 대부분 그녀의 의식을 (불)투명하게 묘사하는 데 진력할 뿐이다.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그 진위는 참으로 모호하다. ‘흑백사진사’에서 ‘아이’는 유괴당한 지 일주일 만에 목이 졸려 살해됐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소설의 화자는 납치된 지 나흘 째 되는 날 풀려났고 중학생이 되어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이 의도적인 교란은 화자의 모든 진술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때 이야기는 진술들의 나열일 뿐이지 통일되고 연속적인 흐름을 형성하지 못한다. 심지어 한유주의 소설에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위로서의 사건(event)도 없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사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한유주는 어떤 행위를 묘사하거나 진술한 다음, 곧바로 그것을 부정한다. 누군가 담배를 피웠는데 “연기는 나지” 않고 “재는 떨어지지”(한유주, ‘재의 수요일’, “얼음의 책”, 문학과지성사, 2009, 208쪽) 않는다는 식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소설 속의 내용이 사실 허구(虛構)라는 점을 계속해서 인식시킨다. 이것은 부정문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허구0’에서 한유주 본인으로 짐작되는 화자는 현재진행형 시제의 문장을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 행동, 계획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허구0’이라는 제목은 이 모든 진술들이, 그러니까 가장 투명하게 작가의 머릿속을 베껴낸 이 문장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암시한다. ‘불가능한 동화’ 역시 같은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부정문, 혹은 명명(命名)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이제 소설의 형식 자체를 통해 실천된다.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우선 앞에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소녀의 테러리즘을 다룬다. 이 소녀는 반 급우들의 일기에 “나도 죽여보고 싶다”, “바늘 끝은 뾰족하다”, “불은 뜨겁다” 따위의 문장들을 몰래 적어 넣었다. 선생님은 이 테러의 진의를 알 수 없다. 그는 아이들에게 성을 내지만, 이것이 왜 나쁜 행동인지는 좀처럼 설명할 수 없다. 이 교실에는 “없어진 것도, 사라진 것도 없”으므로. 그저 “의미도 불분명하고 출처도 없는 문장들이 있을 뿐”이므로(한유주, ‘불가능한 동화’, “문학과 사회” 2011년 겨울호, 165쪽) 이것은 타인의 문장에 가해진 목적이 불분명한 테러인 것이다. ‘불가능한 동화’는 이렇듯 모호한 폭력을 가한 소녀를 중심으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발아시킨다. 이름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소녀의 정체는 미스터리이다. 그녀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도 알 수 없다. 한편 소녀는 미아라는 급우가 자신의 범행을 알고 있을 것이라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소녀는 미아를 살해하고 도망친다. 이제 우리는 미스터리의 해결(소녀는 누구인가)과 서스펜스의 지속(소녀는 잡힐 것인가)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한유주는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는 한 여성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수업 도중 강의실 뒤편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크게 놀란다. 그 아이는 바로 ‘소녀’. 자기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아이는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왜 자신을 끔찍한 모습으로 창조했는지 따져 묻는다. 이제 한유주는 앞선 이야기가 모두 허구였음을 고백하고, 허구란 대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한유주 소설의 시그니처와 같은 부정문은 형식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그녀는 말한 다음, 바로 부정한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제시한 다음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노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마치 만다라와 같은 작업이다. 형형색색의 모래를 뿌려 만들어지는 이 신성한 그림은, 완성과 동시에 물에 씻겨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유주가 가지고 있는 언어에 대한 회의 때문에 생겨났다. 그녀는 언어가 현실을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좀처럼 갖지 못한다. 이는 사전에 대한 불신 속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K에게’에서 사전은 “모두 다섯 권이었지만, 첫 번째 사전부터 마지막 사전까지 합친 두께가 손바닥 한 뼘을 넘지 않”는 “무성의한 생일 선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조야한 방식으로 선별된 하나의 작은 세계”를 펼쳐 놓고, “수수께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낼 뿐 아무런 해답도 내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한유주는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은 틀린 것”이라고 진술한다(한유주, ‘K에게’, “얼음의 책”, 문학과 지성사, 2009, 72~73쪽). 사전이 결코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언어는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할 수 없다.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문학은 세계를 열등하게 모사한 것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문학에서 삶과 현실을 찾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유주는 자신의 글이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한유주, ‘허구0’, “얼음의 책”, 문학과 지성사, 2009, 19쪽)라고 선언한다. 언어는 그런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유주의 해답은 바로 메타픽션이다.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다. 언어는 결코 현실을 적절히 재현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언어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유주에게 ‘이야기의 끝’이란 단순히 모든 이야기가 이미 쓰였다는 인식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가 현실을 재현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때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도대체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 의심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한유주 소설의 특징은 좀처럼 요약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오이디푸스왕’을 오이디푸스에게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중심으로 요약할 수 있다. 라이오스왕의 죽음, 이오카스테와의 결혼, 모호하면서도 분명한 신탁…. 하지만 한유주의 소설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수고롭게 그러한 작업을 한다고 해도 그녀 소설의 특징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요약할 수 없다는 것은, 최제훈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최제훈이 한유주처럼 사건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최제훈의 소설에서 사건은 너무 많이 일어난다. 다만 그것들은 좀처럼 결말을 향해 회수되지 않는다.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장편소설’로 소개되고 있지만, 실은 ‘여섯번째 꿈’, ‘복수의 공식’, ‘π’,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네 편의 소설이 느슨하게 연결된 연작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여섯번째 꿈’에 나오는 민규, 현숙, 세나, 연우, 영수, 태식 등의 인물들은 뒤의 세 작품 안에서 조금씩 설정과 역할을 달리하여 변주된다. 예를 들어 ‘여섯번째 꿈’의 연우와 ‘π’의 M은 동일인물로 보인다. 연우와 M은 모두 번역가인데, 자기가 번역을 맡은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운명을 바꾼 일이 있다. 비중이 거의 없는 인물을 슬그머니 죽은 것으로 오역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가 스페인어 번역가인 데 반하여 M은 일본어 소설을 번역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죽음을 맞는다. 연우가 눈이 오는 산장에 고립되어 수수께끼의 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면, M은 소설을 쓰다가 탈진해 쓰러졌다.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려는 탐욕스러운 셰헤라자드에게 “안에서부터 파먹”혀 “거죽만 남”은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58쪽). 한 편의 장편소설에서 인물이 복수(複數)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사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소설은 인간의 삶을 재현한 것이고 어떠한 인간도 두 번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음은 삶의 의미를 확정하는 사건이다.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는데,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삶의 의미는 오로지 그들의 죽음에 의해서만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185쪽). 많은 소설들이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적과 흑”은 줄리앙 소렐의 죽음으로 끝나며, “레미제라블”은 장 발장의 죽음으로 끝나고, “보바리 부인”은 엠마 보바리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들의 죽음이 삶과 소설의 의미를 확정짓는 것이다. 하지만 최제훈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여러 겹의 삶을 살아가고, 복수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차라리 연극이다. 예컨대 햄릿의 죽음은 연출가의 각색에 따라 매번 달라지지 않는가. 이러한 최제훈 소설의 특징은 그가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기법에 의해 촉발되었다. 바로 패스티시다. 한유주 소설이 부정문의 특징을 형식적 차원에까지 확장한 결과라면, 최제훈은 패스티시의 가능성을 극단까지 활용하여 “일곱개의 고양이 눈”을 쓴다. 예를 들어 ‘여섯번째 꿈’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을 인용하고 있다. ‘여섯번째 꿈’에서 민규, 현숙, 세나, 연우, 영수, 태식 등은 연쇄 살인범의 세계를 탐구하는 ‘실버 해머’라는 인터넷 동호회의 회원들이다. 이들은 어느 겨울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회장의 초대장을 받고 산장에 모였다. 그런데 정작 ‘악마’는 나타나지 않고, 회원들은 폭설로 고립된 산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살해당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악마’가 숨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판사, 사업가, 의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열 명의 사람이 외딴섬에 모인다. 그들은 어느 사업가에게 초대 받았다. 그런데 ‘여섯번째 꿈’과 마찬가지로 초대장의 주인은 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의 노랫말에 맞추어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한편 ‘쥐덫’에서도 사람들은 밀실에 갇혀 있다. 이들은 ‘여섯번째 꿈’과 마찬가지로 폭설이 내리는 산장에 고립된 것이다.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에서 ‘붉은 방 클럽’은 ‘실버 해머’처럼 극단적이고 파격적인 취미에 빠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때 ‘여섯번째 꿈’은 애거사 크리스티와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인용하고, 수정하는 가운데 쓰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여섯번째 꿈’은, 그리고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다른 소설을 재현하는 글쓰기이다. 소설의 인물이 두 개의 죽음을 경험하는 이유는, 그들이 각각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제훈의 소설에는 이야기만 있을 뿐 그 이야기가 재현하는 인간의 삶이 없다. 그런 것은 도무지 중요하지가 않다. 이야기가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물들이 선택되는 것이다. 이때 소설에서 인간적 삶의 내용은 사라지고 주인공은 그저 한 기능으로 퇴락한다. 그러니까 “돈키호테”에서 이 우스꽝스러운 기사는 다만 “무관한 일화와 에피소드의 모음으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것에 통일을 주기 위해”(프레드릭 제임슨, 윤지관 옮김, “언어의 감옥”, 까치, 1977, 61쪽) 고안되었다는 식이 된다. 소설은 한 인간의 삶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야기 재료들의 짜깁기가 되는 것이다. 3 전문가로서의 작가 그래서 패스티시의 소설은 반인간적이다. 소설 속의 인간에게 고유한 삶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스티시는 소설 바깥의 인간에게서도 존엄성을 빼앗는다. 그러니까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에게서 창조주의 권위를 앗아간다. ‘π’에서 M은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직업은 소설가가 아니라 번역가이다. 즉, 그는 타인의 언어를 거쳐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쓸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M이 결코 글쓰기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M은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밤마다 M에게 으스스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M이 쓰고 있는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이 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M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셰헤라자드이자, M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이기도 하다. 그런데 셰헤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이 되기 위해서, M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는 맵시벌의 다큐멘터리에서 우의적인 방식으로 설명된다. 맵시벌은 거미의 몸에 알을 깐다. 세월이 흘러 다 자란 “유충은 쓸모없어진 거미의 몸을 뚫고 밖으로” 나간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숙주의 목숨이 희생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M은 “맵시벌 다큐멘터리를 전에도 본 것 같았다”(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44쪽). 채널을 돌려도 화면에는 계속 맵시벌만 나타났다. 여기서 M은 사실 환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그의 배역은 다름 아닌 거미인데, 이야기가 완성되자 “안에서부터 파먹”혀 “거죽만 남”은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M의 운명은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이라고 지칭했던 현상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바르트가 주장한 바, 근대적 글쓰기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997, 32쪽)이다. 이때 작가는 작품의 유일하고도 온전한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마치 신이 인간을 창조하듯이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는 다만 다른 소설을 베끼는 필경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저자의 죽음은 단지 M의 운명을 통해 우의적으로 표현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문학론은 실제 ‘π’의, 그리고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작법(作法)을 통해 실현된다. ‘π’는 그 자체로 “인용들의 짜임”이다. 우선 우리는 “천일야화‘의 이야기꾼인 셰헤라자드의 흔적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 표현주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영향을 감지하게 된다. ‘π’의 액자 속 주인공 하루는 어느 터널에 49일이나 갇혀 있었고, 결국 미쳐버렸다. 그는 이제 정신병원에 있다. 그리고 정신병원의 의사, 간호사, 동료 환자들을 상상 속에서 변형시키며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로베르토 비네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한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프란시스는 박람회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상자를 보게 된다. 그 상자에는 체사레라는 몽유병 환자가 누워 있다. 체사레는 프란시스의 약혼녀인 제인의 죽음을 예언하는데, 칼리가리 박사는 이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상의 이야기는 매우 기이하다. 비현실적이며 악몽을 닮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프란시스가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칼리가리 박사는 정신병원의 원장이며, 체사레는 병원의 직원이다. 제인은 프란시스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을 앓는 환자였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망상 속에서 이들 인물을 변주하여 이야기를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미 대중문화 안에서 여러 번 변주된 바 있다. 최근에는 리들리 스콧의 ‘토탈 리콜’(1990)이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오픈 유어 아이즈’(1997),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마틴 스코세이지의 ‘셔터 아일랜드’(2010)에서 활용되었다. 요컨대 이미 널리 알려진 수법이라는 뜻이다. 그런 만큼 최제훈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넌지시 인정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작가의 역할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작가는 이제 독창적인 트릭을 고안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트릭에 의존한다. 다만 그 트릭을 끊임없이 변주한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붉은 방’을…. 이때 최제훈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창조자라 할 수는 없다. 그는 저자가 아니다. 자기 작품의 “유일하고 동일한 목소리”(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997, 28쪽)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의 언어와 아이디어를 활용하고 있으므로 자기 작품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돈키호테가 서로 다른 우스꽝스러운 사건에 통일을 부여하는 기능인 것처럼 그는 서로 다른 이야기의 묶음에 통일을 부여하는 기능이다. 이제 소설의 인물과 작가는 모두 하나의 기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최제훈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창조는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조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노동일까? 그는 문화산업의 많은 ‘크리에이터’(creator)들이 하고 있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불가사리’(1962)가 ‘고질라’(1956)를 참조하고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 ‘지상 최후의 사나이’(1964)를 차용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다만 진귀한 구경거리(spectacle)를 생산하고 있는 것인가? 반쯤은 옳다. 그는 창조하기보다 생산한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부품을 조립하여 완제품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할만한 것이다. 아마 “안에서부터 파먹”혀 “거죽만 남”아버린 M의 모습은 초과노동에 시달리는 어느 현대 노동자의 비유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지 않는가. 하지만 최제훈은 뒤샹이 예술가인 만큼은 예술가이다. 레디메이드를 활용하더라도 그것을 조합하는 방식은 자유에 맡겨진다. 아무리 풍부한 재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그것에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뉴욕의 어느 배관공이 ‘샘’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정말이지 없다. 뒤샹 스스로 인정했듯이, “당신의 가능성은 나의 가능성과 같지 않은 것이다”(“Your chance is not the same as my chance.” (Calvin Tomkins, The Bride and the Bachelors: Five Masters of the Avant-Garde, Penguin, 1968, p.33)). 여기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전문가(specialist)로서의 작가이다. 무엇인가 짜깁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재료를 많이 구비해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짜깁기의 예술은 풍성해질 수 있다. 이것은 규칙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참가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래서 최제훈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노동자로 볼 수 없다. 자기가 조작하는 이야기의 관습을 썩 훌륭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유주는 이러한 점을 좀처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다. 한유주는 ‘저자의 죽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문학적 조건으로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다. 이미 “문장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당신들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심지어 미리 “읽어본 적이 없는 문장”들을 적을 때도 그것은 베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유주는 “모든 사물들은, 혹은 모든 사물화 된 문장들은, 일종의 자연사 박물관에 귀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도서관의 어느 서가에 진열된 책들은 모두 일종의 “전시된 죽음들”이며, “검은 플라스틱판에, 흰 글씨로 이름을” 새겨 넣은 명패가 달린 박제이다(한유주, ‘자연사 박물관’,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87쪽). 한유주는 이러한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녀가 누구를 참조하고 있는지, 도대체 누구를 ‘베끼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렵다.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컨대 ‘허구0’이라는 제목은 “픽션들”이라고 하는 보르헤스의 단편집 표제를, 그리고 “얼음의 책”이라고 하는 표제는 ‘모래의 책’이라고 하는 보르헤스 단편의 제목을 떠올리게 만든다. 허구의 영점(零點)과 허구의 복수형은 분명한 대비를 형성한다. 거기에 만들어지자마자 모두 녹아 사라지는 얼음의 책과, 영원히 모래처럼 변화하며 두 번 다시 같은 페이지를 펼칠 수 없는 모래의 책은 모두 의미가 고정되지 않거나, 아예 사라지는 책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그녀는 주의 깊게도 단서를 남겨놓지 않았다. 이것은 한유주 스스로 어떤 작품을 베끼고 있다고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한유주는 ‘자연사 박물관’,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인력이거나, 척력이거나’ 세 편의 작품을 통해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끼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상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것은 오히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와 달라지려 하는 한유주의 부단한 노력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는 연극에 대해 논문을 쓰려는 한 사내가 어느 광인을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이 광인은 자신이 22년 전에 살해한 여성의 옷과 구두를 몸에 걸치고 있다. 한유주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이 짤막한 이야기의 틈을 헤집고 억지로 자신의 언어를 밀어 넣는다. 한유주는 이 사내와 광인을 각각 트리스탄과 햄릿이라 명명하고, 그들의 조우에 복잡한 운명을 부여한다. 그런데 아마 한유주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면,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의 흔적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이란 시간을 물어보는 행위, 다리 위에서의 대화 등 몇몇 지점에서 눈치채기 어려운 방식으로만 나타난다. 아무리 주의 깊은 독자라도 이 정도의 단서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흔적을 알아채는 것은 훨씬 어려워진다. 주인공 하령은 대재앙이 닥쳐 대륙의 절반이 물에 잠기고, 인구의 절반이 죽어버린 세계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녀는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껴서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를 쓰려 한다. 하지만 그녀가 베끼려고 하는 소설은 책장에 없거나, 아니면 물에 젖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무엇인가 베끼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한유주,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189쪽). 하령은 무엇인가 참조할 때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결말과는 다른” 페이지들을 마주하게 된다(한유주,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203쪽). 그래서 하령의 베끼기는 계속해서 원작과 달라진다. 이것은 굉장히 수고로운 작업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와 언어의 관습들을 익혀야 한다. 이미 모든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잠깐의 방심은 ‘베끼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표절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든 멜로디를 검토하는 작곡가나, 신기술을 개발하기 전에 기존의 특허를 검토하는 기술자의 태도에 비견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한유주는 이러한 자신의 노력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한유주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데, “언어는 진화하지 않고, 문학은 진보하지 않”는다. 그저 베끼는 와중에 조금씩 변화할 뿐이다. 그것은 진화의 개념이 사라진 돌연변이와 같다. 대재앙 이후의 세계에서 호랑이는 아가미를 발달시켰다. 물에 잠긴 세계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이 “진화인가 퇴화인가” 말할 수 없다(한유주,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201쪽). 한유주의 소설 역시 ‘자연사 박물관’에 박제된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제시된다. 그녀의 ‘베끼기’가 박제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문학을 ‘진보’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다만 돌연변이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그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끝’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의 세계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은 인류와 함께 절멸했다. 이 ‘끝’에서 문학은, 그리고 글쓰기는 과거의 박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창조의 엿새는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으므로. 4 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 ‘이야기의 끝’이거나 ‘끝없는 이야기’이거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새로움’의 쇠퇴이다. 이제 작가는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으며, 다만 기왕의 설계도를 다소 변형시키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유주와 최제훈의 작품이 새롭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타자의 언어를 베끼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그들의 작품은 전에 없이 독특하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펼친 페이지에서도 한유주의 문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부정문을 사용하는 방식은 참으로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제훈은 기성의 관습들을 짜깁기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마치 괴물처럼 낯설다. 이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창조적이라는 아이러니와 무관하지 않다. 존 케이지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4분33초’를 만들었으며, 앤디 워홀은 대중문화 속의 이미지를 조합해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 여기서 예술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새로운 것은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파천황의 것이며 예술의 경계를 도전적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움은 공허한 것이다. 마치 ‘4분33초’처럼 덧없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하지만 그 다음은? ‘4분33초’는 결코 녹음되거나 재연(再演)될 수 없다.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의미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앤디 워홀의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워홀의 유명한 병뚜껑, 혹은 메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바라보며 이것이 어째서 예술인지 질문하고, 대체 예술이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이 새로움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공허함을 다음과 같이 간파했다. “앤디 워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은 반 고흐의 신발이 가진 직접성을 전적으로 결여한 채 우리에게 말을 건다. 정말이지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어떤 말도 걸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프레드릭 제임슨, 강내희 옮김, ‘포스트모더니즘 ―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 정정호·강내희 편, “포스트모더니즘론”, 문화과학사, 1989, 150쪽)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은 분명 새롭다. 그들은 우리에게 소설이란 무엇인지, 소설쓰기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소설은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사용되지 않”(한유주, ‘허구0’, “얼음의 책”, 문학과지성사, 2009, 19쪽)기 때문이다. 이때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은 모든 책무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한 형식이 된다. 즉, 자족적인 동시에 자기폐쇄적인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유주와 최제훈 소설의 공간들이 감옥을 닮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자연사 박물관은 모든 생명들이 박제되어 진열된 공간이며,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에서 사람들은 온통 물에 잠겨버린 건물에서 고립되어 살아간다. ‘불가능한 동화’에서 선생님은 마치 취조실의 형사처럼 아이들을 겁주고 추궁한다. 최제훈을 살펴보면, M은 맵시벌의 둥지에 갇혔고, 하루는 동굴 속에 갇혔으며, 영수는 산장 안에 갇혔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액자 속의 미미는 스토커에게 납치당해 갇혔고, 액자 바깥의 ‘나’는 망막박리에 걸려 눈이 먼 채 병실에 갇혔다. 모두가 갇혀 있다.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은 메타픽션이며, 이들은 모두 알레고리 속의 인물이다. 이들을 가두고 있는 감옥은 사실 상징적인 방식으로 글쓰기 자체를 가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언어의 감옥이다. 한유주와 최제훈의 글쓰기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타인의 언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치 모든 발화가 랑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소설 역시 글쓰기의 관습이나 전통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타인을 흉내 내며 말을 배운다. 소설이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에 있는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은, 소설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폐쇄적인 형식이 된다는 뜻이다. 이때 언어는 자기를 가리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동어반복과 다름없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며, 작가란 발언을 하는 사람(parleur)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요구하기 위해, 혹은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심지어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글을 쓴다(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27쪽).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말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책무가 다만 다른 소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되었을 때, 글쓰기는 베끼기가 된다. 이때 독서란 소설 안에 존재하는 다른 소설의 흔적을 찾는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라는 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 없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김수용 옮김, “파우스트” 1부, 책세상, 2006, 78쪽). 오직 언어로 이루어진 곳을 헤매는 것이 독서라면, 그것은 언어로 이루어진 테마파크를 유람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언어의 감옥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나 지나야 그곳이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그러니까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179쪽).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파우스트는 평생에 걸쳐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신학까지 열성을 다하여 연구”한 끝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탄식했다. 그가 마술의 세계에 몸을 맡기기로 결심했던 것은, 정통한 지식들이 세계에 대해 조금도 알려주지 않는 “부질없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김수용 옮김, “파우스트” 1부, 책세상, 2006, 31~33쪽). 그가 악마와 계약하여 처녀를 희롱하고, 신화 속의 전쟁에 뛰어들고, 바다를 메우는 개간사업을 시작했던 것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는 세계관을 거부하고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선언한 후였다. 가장 열심히 말의 세계를 믿었던 자가, 행동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아마 파우스트와 같은 모험이 필요할 것이다. 파우스트가 자신의 서재를 벗어나 시공을 뒤집는 모험에 나섰던 것처럼, 한유주와 최제훈도 이야기의 끝, 혹은 끝없는 이야기라는 감옥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때 소설 역시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엄을 되찾을 것이다. ■당선소감 책은 끝없는 미로… 내 모든 단어 빚지고 있어 아직 더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은데 덜컥 당선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더듬더듬 잘 모르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문득 어지럽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길은 앞이 명확했던 적이 없었다. 책을 한 권 읽으면, 세상은 그만큼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권의 책을 숙제로 남겼다. 그러니까 이 길은 목적지가 분명한 대로가 아니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미로이다. 이 미로를 열심히 헤매고 싶다. 고마운 사람이 너무 많다. 사실 나는 그들이 전해준 것을 비로소 적었을 뿐이다. 나는 모든 단어들을 빚지고 있다. 그래서 당선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는 말은 단순히 수사가 아니다. 우선 나는 박광현 선생님에게 글쓰기의 모든 것을 배웠다. 내가 지키고 있는 규칙들은 전부 선생님에게 받은 것이다. 황종연 선생님은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보여주셨다. 한만수 선생님은 어떻게 학문이 정의로워질 수 있는지 알려주셨다. 그리고 김춘식 선생님께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배웠다. 더불어 오랫동안 함께 공부한 ‘책읽기의 즐거움’의 멤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허병식 선생님, 복도훈 선생님, 서희원 선생님, 조형래 선배, 김민선, 박진솔, 임세화, 전호성, 한정현, 홍덕구 등 모두들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들에게 동의하거나, 혹은 반박하면서 비로소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내 글을 가장 먼저, 그리고 아마도 가장 즐겁게 읽어준 경연에게 감사한다. 너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뿐이다. 고집 센 아들의 선택을 지금까지 지지해주신 부모님께는 가장 큰 감사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많이 부족한 글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싶다. ●약력 ▲1983년생 ▲ 2002년 동국대 국문과 입학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심사평 균형적 함의 도출 … 평론가로서의 앞날 기대 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17편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이들 작품을 통독하고 그 가운데 최종 논의 대상으로 4편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를 정독한 후 장시간의 논의를 거쳐 당선작을 확정하였다. 심사기준으로는 응모 평론이 기본적으로 작품의 가치를 잘 부각시키고 이를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가에 두었으며, 글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비평적 견식을 담보할 수 있는 문장력도 면밀히 살펴보았다. 대체로 올해의 평론 응모작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 성향에 있어서도 여전히 세부적 탐색과 분석에 치중하고 동시대 사회 속에서 해당 작품이 가진 의미를 구명하는 데는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평론이 단순하게 한 작품의 성과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배태하고 산출한 환경과 문학사적 친연성 등을 두루 고찰하고 있을 때 객관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터이다.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4편의 평론 가운데 이은이의 ‘희미해져가는 인간다움에 대하여’는 유연한 상상력과 감각적인 문장이 뛰어났다. 하지만 보다 정치한 시각과 정론적 방식으로 대상 작품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정영의 ‘비린내, 혼종의 정체성에 저항하는 존재성’은 후각적 관점을 중심으로 작품을 규정하는 독창성이 참신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독창적 사유가 총괄적 해석력을 확보하는 데 미흡했고 비린내와 혼종성의 상관관계도, 좀 더 명료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만영의 ‘유령의 서사, 열림의 정치’는 시종일관 무난하고 균형성 있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분석 대상이 된 두 작품의 저변을 보다 치열하게 드러내고 그 상관성에 대해서도 입체적 조명이 있었으면 하는 후감이 있었다. 당선작이 된 ‘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는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이 가진 문학적 함의를 비교적 정확하고 균형성 있게 도출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에 있어서도 폭넓은 공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평론가로서의 앞날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낙선한 분들께는 따뜻한 위로와 함께 다음 기회의 분발을 바라마지 않는다.
  • 명화 ‘모나리자’와 대화를

    3D 입체 체험관인 ‘디아트 뮤지엄’이 10일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 레저동 4층에서 개관식을 갖고 내년 11월 30일까지 운영에 들어갔다. 디아트 뮤지엄은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빈센트 반 고흐 등 서양 유명화가의 명화에 3D 입체 및 애니메이션 효과, 홀로그램, 센서인식과 같은 미래형 정보기술(IT)을 접목시킨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관람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또 센서인식을 통해 음성과 동작을 인지, 관람객과 대화하고 관람객의 말과 행동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상호작용이 이뤄진다. 이처럼 콘텐츠가 보고 듣고 만지고 대화하는 체험형으로 구성돼 일방적인 관람위주였던 기존 전시회의 틀을 깼다. 아이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서양미술사에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어 친숙함과 이해도를 높이고 감성회복 및 정서순화에도 도움이 된다. 또 음성인식시스템을 이용, 영어·일어·중국어 등 4개 국어로 자동 번역 안내를 하며 장애인을 위한 수화 시스템도 운영된다. 디아트 뮤지엄 관계자는 “부산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와 체험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책꽂이]

    ●권력을 향한 허상들의 말춤(이철용 지음, 통비결 펴냄) 장애인이자 빈민운동가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저자가 이번 대선을 앞두고 불고 있는 안철수 열풍에 대한 반감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1만 2000원. ●덕불고(정두근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저자는 육군 3사관학교 7기생으로 중장으로 예편한 예비역 장성. 32사단장 시절 상호존중과 배려 운동을 도입해 군 문화 개혁 운동을 벌인 주인공으로 이 운동이 어떻게 탄생하고 이어졌는지 설명했다. 또 전역 이후에도 이 운동을 이어 ‘상호존중과 배려운동본부’를 꾸려 총재직을 맡고 있다. 1만 4000원. ●세상은 나의 멘토(UNGO아카데미 강사진 지음, 책마루 펴냄) UNGO란 UN과 NGO의 합성어다. 월드비전, 유니세프, 유엔난민기구, 한국국제협력단(KOICA), 참여연대 등 세계기구와 시민단체 쪽에서 활동하는 젊은이 13명이 모여 만든 아카데미다. 국제 활동이나 기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각 단체의 실무들을 다뤘다. 1만 5000원.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허원순 지음, W미디어) 현대의 속도 경쟁사회에서 행복의 키워드는 하이테크가 아닌 로테크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직 언론인인 저자는 책에서 하이테크와 로테크, 하이콘셉트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4개의 키워드로 현대 사회를 설명하고 문화의 안목을 키우라고 권한다. 1만 3000원. ●치바이스가 누구냐(치바이스 지음, 김남희 옮김, 학고재 펴냄) 중국의 부상과 함께 중국 미술의 값어치가 천정부지로 솟고 있는 가운데, 가장 중국적인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목공 출신 치바이스의 자서전. 피카소가 “치바이스가 있는데 왜 중국 사람들이 미술을 하러 프랑스에 오느냐.”고 되물었다는 일화는 물론 최근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면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화가의 얼굴, 자화상(로라 커밍 지음, 김진실 옮김, 아트북스 펴냄) 미술 평론가로 신문에 관련 글을 기고하는 저자가 초상화 가운데 자화상에만 집중해서 써낸 책으로 뒤러,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뭉크, 반 고흐, 워홀 등 세계적 작가들의 자화상에 대한 얘기들을 담았다. 화려한 도판과 함께 진행되는 평이한 수준의 설명이 흥미롭다. 3만 5000원.
  • 넘치는 기획전 골라보는 재미

    연말이 다가오면서 각종 기획전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볼만한 전시 몇 가지를 꼽았다. ① 킨텍스 첫 미술전 ‘형형색색’ 경기 고양시 대화동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는 12월 31일까지 ‘CAYAF 2012’(Contemporary Art & Young Artists Festival·이하 카야프)가 열린다. 현대 미술을 다루는 젊은 작가들을 집중 조명하는 자리지만 이 전시가 눈에 띄는 것은 킨텍스 개관 이래 처음 여는 미술 전시여서다. 경기 지역에 거주하거나 작업실을 둔 30~40대 작가 108명이 500여 점을 내놨다. 전시 주제도 ‘형형색색-오늘을 읽다’다. 공성훈, 김석, 김용관, 성태진, 임안나, 정국택, 전수경, 주도양, 한지식 작가 등이 눈에 띈다. 전시 총괄 기획을 맡은 전승보 감독은 “경기 지역으로 한정됐지만 컨벤션센터를 이용한 지역 예술의 활성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성인 6000원, 초중고생 4000원. ② 사진 찢어 붙여 색칠한 ‘시간의 풍경들’ 사진전도 볼만하다. 오는 25일까지 경기 성남시 야탑동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미술-시간의 풍경들’에는 이정, 강홍구, 권오상, 정연두 등 25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의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스트레이트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찢어 붙이거나 색을 칠하기도 하고 사진으로 아예 큰 조각상을 만들기도 했다. 성인 5000원, 초중고생 3000원. ③ 우리 동네 골목길 찰칵 ‘서울사진축제’ 12월 30일까지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등 전시장 23곳에서 동시에 열리는 ‘2012 서울사진축제’는 스트레이트 사진 위주다. 도시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 마을, 지역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사진들을 선보인다. 특히 일반인이 소장한 사진까지 수집해 전시하고 자신의 역사를 사진으로 재구성하도록 해놓은 특별전을 마련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전시 총괄 기획을 맡은 이경민 감독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을 늘렸다. 이 자료들은 그냥 전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 아카이브로 구축해 연구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④ 반 고흐, 혹은 바티칸박물관 엿볼 기회 고전 작품이 궁금하다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으로 가볼 만하다. 내년 3월 24일까지 열리는 ‘반 고흐’전이 디자인미술관에서 개막한 데 이어 12월 8일부터는 한가람미술관에서 ‘바티칸박물관’전이 시작된다. 르네상스 시기 소장품으로, 한국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특별 복제품이 눈길을 끈다. 내년 3월 31일까지. 6000~1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파리 시절의 반 고흐를 만나다

    파리 시절의 반 고흐를 만나다

    11월 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막을 올리는 ‘반 고흐 인 파리’전은 1886~1888년에 이르는, 짧지만 강렬했던 반 고흐(1853~1890)의 파리 체류 시절을 다룬다. 오늘날 고흐 하면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풍경’ 같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얇고도 밝은 붓 터치를 이용한 독특한 그림체를 떠올린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그린 건 아니다. 37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가 화가로 활발히 활동한 기간은 불과 생애 마지막 10여년. 그 가운데 네덜란드에 머물러 있던 전반부 6년 동안에는 아주 두껍고 어두운 필체를 구사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농부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화풍의 변화는 동생 테오의 후원 등으로 파리로 오면서 일어난다. 큰 문화적 충격과 함께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어떻게 하면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모색해 나가는 시기가 파리 시기다.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때 고흐가 색채, 양식, 구도를 두고 어떤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추적하기 시작했고, 7년간의 추적 결과를 모아 지난해 봄 네덜란드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이번 전시는 바로 이것을 가져온 것이다. 작품은 파리 시기를 중심으로 한 55점의 유화. 파리에서 고흐에게 물감을 제공했던 미술상인을 그린 ‘탕귀 영감’ 같은 작품은 프랑스 로댕박물관 소장작품인데 프랑스 이외 지역으로 반출되는 것은 처음이다. 전시작품들의 보험평가액은 깎고 깎아서 5500억원대에 이른다. 여기에다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진행했던 X선 촬영 사진 등 연구 자료들을 함께 전시했다. 또 눈길을 끄는 대목은 9점에 이르는 자화상들. 고흐는 평생 36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27점을 파리 시기에 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연구를 위해서는 직접 그려 봐야 하는데 돈이 없어 모델을 쓸 수 없으니 자기 얼굴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표현해 본 것이다. 이 가운데 9점의 자화상이 전시된다. 전시 총감독을 맡은 서순주 박사는 “마침 네덜란드 쪽에서 대대적인 미술관 개보수 작업이 이뤄져 이번 같은 전시가 가능해졌다.”면서 “2007년 80만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간 고흐전이 대표작을 모은 일종의 회고전이라면, 이번 전시는 고흐의 천재적 화풍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교육적인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24일까지. 성인 1만 5000원. 청소년 1만원. 1588-2618.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피카소 그림 등 명작 7점 네덜란드 미술관서 도난

    피카소 그림 등 명작 7점 네덜란드 미술관서 도난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퀸스트할 미술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해 피카소와 모네 등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 7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했다고 AFP 통신이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로테르담 경찰 대변인은 “오전 3시쯤 작품을 도난당했으며 철저하게 준비된 범행으로 보인다.”면서 “누가 어떤 경로로 들어오게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폐쇄회로(CC)TV와 목격자를 찾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사라진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광대의 초상’(그림) ▲앙리 마티스의 ‘희고 노란 옷을 입은 책 읽는 여인’ ▲클로드 모네의 ‘런던의 워털루 다리’와 ‘런던의 채링 크로스 다리’ ▲폴 고갱의 ‘약혼녀라 불리는 열린 창 앞의 여자’ ▲마이어 데 한의 ‘자화상’ ▲루치안 프로이트의 ‘눈을 감은 여인’ 등 모두 7점이다. 해당 작품들은 지난해 사망한 네덜란드의 대부호 빌럼 코르디아가 설립한 트리톤재단의 소유로 창립 20주년을 맞아 퀸스트할 미술관에서 19~20세기 화가들의 작품을 모은 특별전시회를 기획했으며 지난주부터 일반인에게 그림을 공개해 왔다. 트리톤재단은 과거에도 화가 1~2명의 그림을 전시한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모든 화가의 그림을 동시에 전시한 것은 처음이다. 미술관에 전시 중인 작품 가운데는 도난당한 6명의 화가 작품 외에도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마르크 샤갈, 로이 리히텐슈타인, 피에트 몬드리안, 마르셀 뒤샹, 르네 마그리트, 오귀스트 로댕, 앤디 워홀의 그림 150점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퀸스트할 미술관 측은 이날 국영 라디오를 통해 “범인이 미술관에 침입한 즉시 비상벨이 울렸지만 경찰이 도착하기 직전 도망쳤다.”면서 “도난된 미술품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한국 古목판화 채색 없어… 中·日은 17·18세기에 발달

    한국 古목판화 채색 없어… 中·日은 17·18세기에 발달

    “중국은 17세기부터 채색판화가 발달했고, 중국의 채색판화를 받아들여 일본이 18세기 중엽부터 다색판화와 우키요에 등으로 가장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반면 조선에서는 남송의 문인화 위주의 수묵화를 선호하다 보니 판화도 채색 판화가 없는 것 같다.” ‘한·중·일 목판화 특별전과 국제학술대회’를 기획한 한선학 명주사 주지이자 고판화박물관관장은 지난 8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한·중·일 3국의 판화를 이렇게 비교했다. 이런 비교 분석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강원도 원주 신림면 황둔리에 있는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은 오는 12일부터 올 연말까지 ‘아시아 목판화 삽화 특별전’을 연다. 특히 12~14일 3일 동안에는 ‘제3회 원주 고판화 축제’라는 이름으로 ‘한·중·일 국제학술세미나’와 ‘한·중 전통 판화시연회’ 등의 프로그램이 추가된다. 아시아 목판화 삽화 특별전은 아주 특별한 전시인데, 이 박물관이 소장한 아시아 고판화 유물 4000여점 중 목판화 원판과 삽화 200여점을 골라 선보인다. 몽골과 티베트의 목판 작품도 선보이는데, 국내에서 처음이라는 설명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은 일본 에도시대 소설 삼국지와 초한지 등의 목판화 원판 각각 14점과 2점 등 모두 16점과 현대 만화의 효시가 된 목판화 화가 호쿠사이(1760∼1849)의 다색 화보 삽화 등이다. 특히 호쿠사이는 유럽에 ‘우키요에’를 널리 알리며 19세기 모네·고흐 등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일본 작가 중 하나다. 일본의 목판화 삽화를 보면 일본이 왜 디자인과 미술 쪽에서 강세를 보이는지를 잘 알 수 있단다. 일본 에도시대의 삼국지는 일본 대중들이 쉽고 재밌게 읽도록 간간이 삽화를 넣었는데, 그 섬세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목판은 금속활자판과 달리 많이 사용하면 마모되기 때문에 돌배나무나 자작나무 등과 같이 단단한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판화 원판으로 보통 책을 3000~5000부 정도 찍었다고 한다. 국내에 유일한 오륜행실도 목판도 선보인다. 이 목판은 지난 2006년 한 관장이 입수해 공개한 유물인데, 일제강점기 때 제 모습을 잃고 가운데 부분이 두 쪽으로 나뉜 채 4각의 일본 화로용 목함으로 변형된 상태다. 유물훼손의 사례로도 활용되는데 가장 아름다운 한글체가 오륜체였기 때문에 훼손됐더라고 그 가치는 유효하다. 한 관장은 “다색판화가 아닌 흑백판화는 국내에서도 19세기 중엽부터 언문반각본으로 많이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200여개의 소설을 찍었다면 소설당 50개의 목판이 필요했고, 약 1만 장의 목판 원판이 존재해야 하는데 전쟁 중에 다 소실됐는지 여성의 분곽으로 변형된 유충렬전 목판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흔히 ‘조 대비’로 널리 알려진 신정왕후(1808∼1890)의 칠순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 목판도 나온다. 한 관장은 “해인사가 고려시대 목판을 소장했다면, 명주사는 조선시대 목판과 아시아의 목판을 가지고 있다.”면서 “템플스테이까지 겸해서 역사 속으로 푹 들어가보라.”고 권유했다. 명나라 때 단색 판화로 만들어진 관세음보살과 관련한 그림도 아름답다. (033) 761-7885.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어린이 책꽂이]

    ●내 모자 어디 갔을까(존 클라센 글·그림, 서남희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 나선 곰은 길에서 마주친 동물들에게 자신의 모자를 봤느냐고 묻는다. 곰의 모자를 본 동물은 아무도 없다. 모자를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곰은 실의에 빠지고…. 작품 속 동물들 간의 소통을 통해 어린 독자들에게 대화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1만 1000원. ●도토리 마을의 빵집(나카야 미와 글·그림, 김난주 옮김, 웅진주니어 펴냄) 도토리 마을의 빵집 주인 부부는 ‘새로운 빵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는데…. 자녀들은 이야기를 읽으며 항상 바쁜 일과 속에서 육아에 신경 써야 하는 맞벌이 부모의 처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도토리 마을의 다양한 직업군까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덤이다. 1만원. ●마녀 위니의 공룡 소동(밸러리 토머스 글, 코키 폴 그림, 노은정 옮김, 비룡소 펴냄) 1987년 첫 발간된 ‘마녀 위니’ 시리즈의 열세 번째 책이다. 부스스한 머리에 풀린 눈을 지닌 익살스러운 모습의 마녀 위니와 자상한 까만 고양이 윌버를 주인공으로 박물관 ‘공룡 그리기 대회’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아낸다. 그리기 대회에 출품된 작품 중 피카소와 고흐의 화풍을 패러디한 그림을 찾아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 1만 500원.
  • [씨줄날줄] 공자의 ‘강남스타일 삶’/최광숙 논설위원

    귀족 가문 출신인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쓴 편지의 3분의2는 돈을 꾸어달라고 사정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가 쓴 소설은 하나같이 출판사로부터 선불을 받아 마감에 쫓기며 쓴 것이란다. 석영중 고려대 교수는 ‘도스토옙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라는 책에서 “주인공이 돈을 위해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것으로 시작되는 소설 ‘죄와 벌’ 등은 모두 ‘돈의 코드’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대 최고의 작가이던 그가 왜 항상 빚 독촉에 시달렸을까? 한때는 도박에 빠졌고, 돈이 생기는 대로 펑펑 썼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시골의 초라한 역에서 객사했지만 평생 가난과 거리가 멀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넓은 영지와 저작권을 놓고 사회 환원 문제를 부인과 다퉈야 했던 부자였다. 간디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항상 3등칸 열차만 탔다. 또 양과 소젖에 비해 가격이 싼 염소젖만 마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염소는 비싼 비누로 매일 목욕을 했고, 사료값도 엄청 많이 들었다고 한다. 간디가 자신이 세운 공동체 아슈람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이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후원자들 덕분이다. 간디의 후계자이던 여류 시인 나이두는 “간디에게 청빈한 삶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나라 전체로 볼 때 어마어마한 재산이 들었다.”고 말했다.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을 판 고흐나 악성 베토벤 등은 평생 가난과 싸우며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기에 흔히 사상가, 문인, 예술가의 삶은 가난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간디처럼 귀족가문의 ‘엄친아’들도 적지 않다. 간디 등의 청빈한 삶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최근 중국의 한 30대 칼럼니스트는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공자·맹자가 고급 주택에 살았고 경제적으로 윤택했다.”고 썼다. 공자가 위나라 관학에서 받은 연봉은 좁쌀 90t이었다고 한다. 280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집도 3칸이긴 했지만 대지가 2만여㎡로 거의 농장 수준인 호화주택이었다. 맹자는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 제나라에서 좁쌀 1만 5000t을 연봉으로 받았다. 그를 흠모한 송과 설나라 임금으로부터 어마어마한 황금 덩어리도 받았다고 한다. 성인 군자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라면 더욱 궁핍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뒤집어지는 순간이다. 유가는 결코 물질을 경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어떤 방법으로 부를 이룰지 그것이 문제일 뿐.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주말 영화]

    ●백만달러의 사랑(EBS 일요일 오후 2시 30분) 보넷은 타고난 예술가로 고흐, 세잔과 같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위조해 경매시장에 갖다 파는 것을 즐기며 살아 간다. 보넷의 외동딸 니콜(오드리 헵번·오른쪽)은 이런 아버지를 걱정하지만 위조 작품을 그리는 일에 매료되어 있는 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보넷은 비너스 조각상을 박물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니콜은 그림은 위조가 가능하지만 조각상은 조각을 하는 데 사용했던 재질과 기술적 검증 등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쳐 진위를 가리기 때문에 위험한 짓이라고 말린다. 하지만 평소 보넷을 위대한 예술품 소장가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리몬트 박물관 관장은 비너스 조각상의 진위를 가리지도 않은 채 조각상을 박물관에 버젓이 전시해 놓는다. 그렇게 비너스 조각상이 처음 박물관에 전시되던 날, 보넷은 박물관의 비너스 전시 개막식에 참석하고 니콜은 집에 홀로 남는다. 그날 밤, 보넷이 그린 가짜 고흐의 그림을 훔치려는 도둑이 집에 든다. 니콜은 도둑을 협박하다가 그만 실수로 그에게 총을 쏘고 만다. ●천국을 향하여(EBS 토요일 밤 11시) 팔레스타인의 젊은 청년들은 이스라엘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차별정책과 절대적 빈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자신의 온몸을 산화시켜 이스라엘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자이드와 할레드 역시 저항군 조직의 부름을 받고 기꺼이 순교자의 소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막상 가슴에 폭탄 띠를 두르고 이스라엘로 향하던 두 청년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것보다는 영웅적인 죽음을 택해 천국으로 가고자 했던 그들. 끊임없이 죽이고 죽고, 보복에 보복을 거듭하는 이 저항방식에 대한 의문들이 그들을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모범시민(OBS 일요일 밤 11시 25분)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들에 의해 클라이드의 아내와 딸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범인들은 곧 잡히지만 담당검사 닉은 불법적인 사법거래로 그들을 풀어주고 만다. 이에 분노한 클라이드는 범인들과 그들을 보호한 정부를 향해 거대한 복수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클라이드 가족 살인사건의 범인이 잔혹하게 살해되고, 그 살인범으로 클라이드가 지목된다. 이에 클라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유죄를 인정하고 감옥에 들어간다. 그런데 클라이드가 감옥에 수감되자마자 도시는 그가 경고한 대로 연일 처참한 살인사건과 대형 폭파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다. 당황한 닉은 온갖 사법수단을 동원하지만 그의 거침없는 복수행각을 막을 수가 없는데….
  • 뭉크 ‘절규’ 1378억원에 사들인 사람은?

    뭉크 ‘절규’ 1378억원에 사들인 사람은?

    지난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 ‘절규’를 역대 최고 경매가로 사들인 ‘미스터리 낙찰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1일(현지시간) 미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미국 억만장자 리언 블랙(61)이 ‘절규’를 1억 1990만 달러(약 1378억원)에 사들인 주인공이라고 그의 지인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사모펀드투자회사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의 대표인 블랙은 지난 3월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세계 갑부 순위 330위(재산 34억 달러)에 올라 있다. 소더비와 블랙측 대변인들은 각각 보도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당시 경매에서 12분 만에 ‘절규’를 손에 넣은 낙찰자가 누군지는 미술계의 일급 비밀이었다. 블랙은 7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빈센트 반 고흐의 소묘와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 회화, JMW 터너의 수채화 등도 포함돼 있다. 2009년에도 그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 산치오의 소묘, ‘뮤즈의 초상’을 4760만 달러에 사들여 화제를 모았다. 당시 종이에 그린 작품으로는 최고 경매가였다. 블랙이 ‘절규’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가 이사로 재직 중인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MoMA) 사이에 치열한 작품 유치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 두 예술기관 모두 석판화 버전의 ‘절규’만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블랙은 자신이 소장한 미술품을 집 밖에 내보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맨해튼 파크애비뉴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미술품 거래상들이 “다양한 스타일과 시대별 예술품들의 향연”이라고 말할 정도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7000개 도미노로 재현…반 고흐 명화 ‘별이 빛나는 밤’

    7000개 도미노로 재현…반 고흐 명화 ‘별이 빛나는 밤’

    7000개 이상의 도미노로 재현한 반 고흐의 명화 ‘별이 빛나는 밤’이 화제다. 25일(현지시각)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소개한 이 영상은 ‘플리피캣’(Flippy Cat)이란 아이디로 활동하는 한 도미노 전문가가 총 11시간 동안에 걸쳐 만든 도미노 작품이다. 공개된 영상을 보면 한 전문가가 검은 바닥에 파란색, 하얀색, 노란색 등 도미노 블록을 하나하나 쌓으며 쓰러진 부분을 다시 쌓는다. 그는 이 같은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한 끝에 총 7067개의 도미노를 사용해 ‘별이 빛나는 밤’의 형상을 띤 작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도미노의 묘미가 쓰러트려야 제맛이듯 그는 이내 자신이 쌓아올린 도미노를 쓰러트렸고 차례로 쓰러지는 모습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마지막 하나까지 쓰러지고나자 도미노들은 실제 고흐의 작품처럼 소용돌이치는 듯한 구름과 별, 태양처럼 불타는 달의 모습으로 재현됐다. 한편 이 영상은 지난 22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돼 지금까지 22만 명이 넘는 네티즌이 감상했다. 사진=해당 영상 캡처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예술과 관객을 질투한 평론의 그럴듯한 이론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로저 킴볼 지음, 이일환 옮김, 베가북스 펴냄)는 제목 그대로다. 알아듣기 힘든 현란한 이론을 동원한 평론가들이 관객과 미술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격리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원제를 보니 한술 더 떴다. ‘The Rape of Masters’(더 레이프 오브 마스터스). 그러니까 미술사가들이 평론을 들이대면서 미술 대가들을 능욕, 더 직설적으로 강간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머리 좋고 책 좀 읽었다는 이들이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흔히 ‘PC’라 표기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다 예술을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손가락질은 포스트이론, 정신분석이론, 페미니즘이론 같은 것들에 날아가 꽂힌다. 덕분에 후련한 구석도 많다. 파격과 일탈을 강조하다 보니 현대 예술이 “실상은 핏기 잃은 성적 용어들로 채워”지고 있고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에로스의 승리가 아니라 과묵과 겸손의 패배”라 지적한다. 외설이냐 예술이냐라는 아주 지겨운 테제를 확 비꼬아 둔 것이다. 예술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술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평론가들은 멋져 보이는 이론을 억지로 가져다 붙여 작품을 관객들로부터 “약탈”해 가지 말고 “예술 작품의 직접적 파악을 가로막는 덤불 숲을 쳐 주는 것”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비판이 공격적이고 신랄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거부감도 든다. 미술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에서 평론이라는 것은 결국 작품을 통해 이 세상을 두껍게 읽고 쓰는 행위라는 점, 그래서 그로 인한 풍부한 해석의 살결 역시 문화적이라는 점에서 너무 가혹하게 일방적으로 깎아내린 것처럼 보인다. 몇몇 대목에서는 우리나라 색깔론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보수적이다. 구스타브 쿠르베, 마크 로스코, 존 싱어 사전트, 페테르 루벤스, 윈슬로우 호머,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등 대가 7명에 대한 해석 문제를 다뤘다. 관심 가는 작가가 있다면 들여다볼 만하다. 물론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균형감각은 별개다. 1만 3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20대女, 아픈 과거 회사에 잘못 얘기했다가…

    20대女, 아픈 과거 회사에 잘못 얘기했다가…

    김흥동 교수는 안타까운 환자 사례를 거론했다. 유정아(여·28)씨는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뇌전증, 정확하게는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문제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린이집 실습에 나선 유씨는 병원 치료 때문에 자신이 뇌전증 환자라는 사실을 원장에게 털어놨다가 설명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실습 현장에서 퇴출되는 아픔을 겪었다. 질환의 고통보다 큰 세상의 벽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는 치료에 적극적이었다. 덕분에 어릴 때보다 증세가 많이 호전돼 짧은 순간에 얼굴 근육이 조금 떨리는 경련 정도가 고작이었다. 발작이랄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어린이집 사태를 겪은 뒤부터 달라졌다. 유씨는 “하고 싶은 일을 못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을 느꼈고, 이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생각에 눈물을 쏟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천성이 밝았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긍정적으로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런 노력 끝에 대학 졸업과 함께 어린이집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가르치는 일이 생각과 달리 힘들었지만 그보다 평소 꿈꾸던 일이어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물론 일말의 불안감까지 떨치지는 못했다. 잠이 부족하거나 피곤하면 예기치 못한 경련이 발생할 수 있어서였다. 이런 사실을 주변에 미리 알리는 게 도리다 싶어 용기를 내 원장에게 뇌전증 환자임을 알렸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해고였다. 원장은 그에게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죄목’을 붙여 해고하고 말았다. 선입견과 편견만으로 생애 첫 직장에서 그를 내쫓은 것. 그에게 남겨진 상처는 컸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Weekly Health Issue] 뇌전증…“뇌의 전기적 이상에 의한 경련… 발작 편견 버려야” 잠을 자다가,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빛과 마주한 순간, 그도 아니면 멀쩡하게 자기 일을 하다가 느닺없이 특정 신체부위가 뒤틀리며 발작을 일으킨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다. 심하지 않더라도 당사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소규모 발작이 이어지는 경우도 정도의 차이일 뿐 주변을 당황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간질’이라며 신내림 정도로 여겨왔던 질환 ‘뇌전증’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발작에 대해 근거 없이 혐오와 기피의 정서를 키워왔다. 멀쩡한 사람을 두고 귀신이 씌었다거나 속되게는 ‘지랄병’이라며 기피하고, 경원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의학은 뇌전증이 지랄병에 대한 막연한 인식처럼 갈피 모를 병이거나 잡귀가 들어 나타나는 발광이 아니라 뇌의 전기적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경련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뇌전증을 두고 대한뇌전증학회 회장인 김흥동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교수와 얘기를 나눴다. ●뇌전증이란 어떤 질환인가. 일반인들에게 ‘경기’, ‘발작’ 그리고 ‘간질’(뇌전증) 등의 용어는 비교적 익숙하지만 이런 용어들이 같은 뜻을 가진 말인지, 아니면 뜻이 다른지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뇌전증이라는 말을 들으면 정신 질환으로 잘못 알거나, 치료가 어려운 불치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사코 병을 숨기고 치료조차 하지 않은 채 방치한 것이다. 뇌전증이란 ‘뇌에 전류가 흐른다.’는 뜻으로, 일시적으로 뇌의 신경세포에서 비정상적인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고, 이 때문에 몸이 굳고, 떨리거나, 의식을 잃거나, 이상 감각 등의 증상이 반복되는 질환이다. ●특히, 뇌전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뇌전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병 가운데 하나로,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나 카이사르, 나폴레옹, 도스토옙스키, 고흐 등도 모두 뇌전증 환자였다. 하지만 뇌전증은 잘못된 정보와 인식 때문에 질병과 관련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가장 심한 질환이기도 하다. 이처럼 뇌전증에 대한 오해가 심화되면서 진단과 치료를 기피하게 됐고, 이런 가운데서도 병원을 찾아 잘 치료받고 있는 많은 환자들도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다. ●뇌전증의 유병률은 어떤가. 우리나라 국민 100명당 약 1∼1.5명이 앓고 있는 흔한 질환이다. 또 연간 새로운 환자 발생률이 유방암과 비슷할 정도로 흔한 만성 뇌질환이다. ●원인은 다 밝혀져 있나. 원인은 무수히 많으나 연령대에 따라 주요 원인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환자별로 다를 수 있는 원인을 찾아 교정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뇌전증의 원인은 크게 봐 뇌가 형성되는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고, 교통사고나 출생 당시의 뇌 손상이나 뇌염 등에 의한 뇌손상, 해마경화증이나 알코올중독, 뇌종양, 뇌혈관기형, 유전적 요인 등이 원인인 경우도 있다. 이처럼 원인이 다양한 탓에 일부 환자의 경우 특정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증상을 상세히 짚어달라. 일반인들이 주로 알고 있는 증세의 양상은 눈을 치뜨고, 팔다리가 뒤틀리고, 입에 거품을 무는 등의 증상을 보이는 대발작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대발작보다 발작의 양상이 소소한 부분발작이 훨씬 많다. 부분발작은 뇌의 어느 부분에서 발생하느냐에 따라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환자 본인만 아는 전조증상이나 비정상적인 느낌 등이 있을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이 관찰하는 시각에서 보자면, 불러도 반응이 없거나 반복적으로 입맛을 다시는 행동 등이 모두 뇌전증을 의심할 수 있는 증상에 해당된다. ●치료는 어떻게 하며, 각 치료법의 예후는 어떤가. 뇌전증은 치료하지 않아도 호전될 수 있는 양성부터 정상 발달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 뇌전증성 뇌증까지 다양한 종류로 구분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치료도 달리 하는 게 일반적이다. 치료는 약물치료와 약물외 치료로 구분할 수 있다. 약물치료는 모든 뇌전증 치료의 첫 단계로, 전체 뇌전증의 약 70%는 이 방법으로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 약물 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 나머지 30%의 난치성 뇌전증은 점점 유용성이 확대되고 있는 수술적 치료나 케톤성 식이요법, 미주신경 자극술 등을 적용해 치료한다. ●뇌전증 환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나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해 달라. 국내의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뇌전증 환자 약 50%가 질환으로 인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취업할 때 뇌전증 환자임을 알린 경우 약 60%가 취업을 거부당했으며, 취업을 하더라도 40%는 발작 증세 때문에 해고됐다. 이런 이유로 일반인에 비해 취업률은 절반에도 못 미쳐 실업률은 1.7배, 미혼율은 2.6배나 높다. 사회적 참여에 있어 심각한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교육시스템 구축 및 연구 지원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뇌전증의 날을 제정, 매년 실효성 있는 캠페인을 진행한 결과, 환자 80%가 자신의 질환을 밝히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고 답할 정도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뇌전증과 관련한 정책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우선, 뇌전증을 바로 알리기 위한 캠페인과 교육 등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또 치료에 장기간이 걸리고, 비용 부담이 큰 소아뇌전증과 난치성 뇌전증에 대한 산정특례 적용, 뇌전증 수술에 소요되는 전극 비용의 수가 적용 등 실효성 있는 지원책이 절실하다. 장애판정의 문제도 지적하고 싶다. 뇌전증에 대한 지금의 장애판정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 제한적이다.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감안, 뇌전증에 대해 추가로 장애 6급을 적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Weekly Health Issue] 뇌전증

    [Weekly Health Issue] 뇌전증

    잠을 자다가,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빛과 마주한 순간, 그도 아니면 멀쩡하게 자기 일을 하다가 느닺없이 특정 신체부위가 뒤틀리며 발작을 일으킨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다. 심하지 않더라도 당사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소규모 발작이 이어지는 경우도 정도의 차이일 뿐 주변을 당황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로 ‘간질’이라며 신내림 정도로 여겨왔던 질환 ‘뇌전증’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발작에 대해 근거 없이 혐오와 기피의 정서를 키워왔다. 멀쩡한 사람을 두고 귀신이 씌었다거나 속되게는 ‘지랄병’이라며 기피하고, 경원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의학은 뇌전증이 지랄병에 대한 막연한 인식처럼 갈피 모를 병이거나 잡귀가 들어 나타나는 발광이 아니라 뇌의 전기적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경련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뇌전증을 두고 대한뇌전증학회 회장인 김흥동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교수와 얘기를 나눴다. ●뇌전증이란 어떤 질환인가. 일반인들에게 ‘경기’, ‘발작’ 그리고 ‘간질’(뇌전증) 등의 용어는 비교적 익숙하지만 이런 용어들이 같은 뜻을 가진 말인지, 아니면 뜻이 다른지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뇌전증이라는 말을 들으면 정신 질환으로 잘못 알거나, 치료가 어려운 불치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사코 병을 숨기고 치료조차 하지 않은 채 방치한 것이다. 뇌전증이란 ‘뇌에 전류가 흐른다.’는 뜻으로, 일시적으로 뇌의 신경세포에서 비정상적인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고, 이 때문에 몸이 굳고, 떨리거나, 의식을 잃거나, 이상 감각 등의 증상이 반복되는 질환이다. ●특히, 뇌전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뇌전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병 가운데 하나로,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나 카이사르, 나폴레옹, 도스토옙스키, 고흐 등도 모두 뇌전증 환자였다. 하지만 뇌전증은 잘못된 정보와 인식 때문에 질병과 관련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가장 심한 질환이기도 하다. 이처럼 뇌전증에 대한 오해가 심화되면서 진단과 치료를 기피하게 됐고, 이런 가운데서도 병원을 찾아 잘 치료받고 있는 많은 환자들도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다. ●뇌전증의 유병률은 어떤가. 우리나라 국민 100명당 약 1∼1.5명이 앓고 있는 흔한 질환이다. 또 연간 새로운 환자 발생률이 유방암과 비슷할 정도로 흔한 만성 뇌질환이다. ●원인은 다 밝혀져 있나. 원인은 무수히 많으나 연령대에 따라 주요 원인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환자별로 다를 수 있는 원인을 찾아 교정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뇌전증의 원인은 크게 봐 뇌가 형성되는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고, 교통사고나 출생 당시의 뇌 손상이나 뇌염 등에 의한 뇌손상, 해마경화증이나 알코올중독, 뇌종양, 뇌혈관기형, 유전적 요인 등이 원인인 경우도 있다. 이처럼 원인이 다양한 탓에 일부 환자의 경우 특정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증상을 상세히 짚어달라. 일반인들이 주로 알고 있는 증세의 양상은 눈을 치뜨고, 팔다리가 뒤틀리고, 입에 거품을 무는 등의 증상을 보이는 대발작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대발작보다 발작의 양상이 소소한 부분발작이 훨씬 많다. 부분발작은 뇌의 어느 부분에서 발생하느냐에 따라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환자 본인만 아는 전조증상이나 비정상적인 느낌 등이 있을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이 관찰하는 시각에서 보자면, 불러도 반응이 없거나 반복적으로 입맛을 다시는 행동 등이 모두 뇌전증을 의심할 수 있는 증상에 해당된다. ●치료는 어떻게 하며, 각 치료법의 예후는 어떤가. 뇌전증은 치료하지 않아도 호전될 수 있는 양성부터 정상 발달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 뇌전증성 뇌증까지 다양한 종류로 구분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치료도 달리 하는 게 일반적이다. 치료는 약물치료와 약물외 치료로 구분할 수 있다. 약물치료는 모든 뇌전증 치료의 첫 단계로, 전체 뇌전증의 약 70%는 이 방법으로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 약물 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 나머지 30%의 난치성 뇌전증은 점점 유용성이 확대되고 있는 수술적 치료나 케톤성 식이요법, 미주신경 자극술 등을 적용해 치료한다. ●뇌전증 환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나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해 달라. 국내의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뇌전증 환자 약 50%가 질환으로 인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취업할 때 뇌전증 환자임을 알린 경우 약 60%가 취업을 거부당했으며, 취업을 하더라도 40%는 발작 증세 때문에 해고됐다. 이런 이유로 일반인에 비해 취업률은 절반에도 못 미쳐 실업률은 1.7배, 미혼율은 2.6배나 높다. 사회적 참여에 있어 심각한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교육시스템 구축 및 연구 지원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뇌전증의 날을 제정, 매년 실효성 있는 캠페인을 진행한 결과, 환자 80%가 자신의 질환을 밝히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고 답할 정도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뇌전증과 관련한 정책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우선, 뇌전증을 바로 알리기 위한 캠페인과 교육 등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또 치료에 장기간이 걸리고, 비용 부담이 큰 소아뇌전증과 난치성 뇌전증에 대한 산정특례 적용, 뇌전증 수술에 소요되는 전극 비용의 수가 적용 등 실효성 있는 지원책이 절실하다. 장애판정의 문제도 지적하고 싶다. 뇌전증에 대한 지금의 장애판정 기준이 너무 엄격하고 제한적이다.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감안, 뇌전증에 대해 추가로 장애 6급을 적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천재=정신병자?” 오랜 의문의 해답 밝혀졌다

    “천재=정신병자?” 오랜 의문의 해답 밝혀졌다

    빈센트 반 고흐나 버지니아 울프 등 과거와 현재의 많은 천재들과 정신질환과의 연관성이 분명하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달 3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5회 월드사이언스 페스티벌에서는 심리학자, 신경생리학자 등 패널 3명이 참석해 천재와 정신질환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케이 레드필드 제미슨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임상심리학자는 스웨덴 연구팀이 16세 청소년 70만 명을 대상으로 지능 테스트를 한 결과 당시 뛰어난 지능을 가진 사람이 평범한 지능을 가진 사람보다 10년 뒤 조울증을 얻게 될 확률이 4배 높았다는 2010년도 연구결과를 예로 제시했다. 그는 “20~30개의 과학적 연구를 검토한 결과, 많은 정신병자들은 창조력이 매우 강하며 이는 조울증 등 기분장애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극한 즐거움과 극한 우울함 사이의 기분변화를 일컫는 조울증이 어떻게 창조력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또 다른 패널인 제임스 펠론 캘리포니아 어빈대학 신경생리학자는 “조울증 환자의 기분이 우울한 상태에서 즐거운 상태로 전환될 때, 뇌의 활동이 활성화 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 상태에 이르면 전두엽 아랫부분의 움직임이 차츰 가라앉고 윗부분의 활동이 증가하는데, 이는 창조력이 발휘될 때와 같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덧붙여 에린 삭스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신건강법 교수는 “정신질환 환자들은 일반인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걸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소한 것들이나 현상에 대해 자각하고 여기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튤립’이라는 단어를 주고 연관되는 낱말을 찾는 퍼즐 실험에서, 차분한 상태의 조울증 환자들은 일반인보다 주어진 시간 내에 단어를 찾는 속도가 3배나 빠르다는 실험결과를 언급하며 “억압되지 않은 순수한 생각들이 뭔가 엄청난 것을 만들어내는데 천재들의 습성과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깊은 우울증이나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는 동안에는 창의적인 에너지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삭스 박사는 “창조력은 가장 좋지 않은 정신 상태의 일부분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이러한 전문가들의 주장은 과학전문매체인 라이브사이언스 3일자에 실렸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열린세상] 아시아 문화중심도시에 거는 기대/모철민 예술의전당 사장

    [열린세상] 아시아 문화중심도시에 거는 기대/모철민 예술의전당 사장

    올해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10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방문 동기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쇼핑, 음식, 명소 탐방 등을 주요 요인으로 꼽는다. 최근에는 한류 붐을 탄 공연 등의 문화예술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파리는 매년 15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한다. 뉴욕타임스는 파리가 외국인을 끄는 매력 중 하나로 분위기 있는 동네문화를 들었다. 카페, 치즈가게, 빵집, 푸줏간 등이 전통적 영업과 형태로 도시 미관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명 ‘라파랭법’으로 불리는 제도가 대형 유통업체로부터 작은 상점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파리의 매력은 누라 뭐라 해도 문화예술이다. 세계 문화의 수도답게 사람들은 문화예술 명소를 순례하듯 다닌다. 파리 체류 당시 필자는 이 도시만의 특별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숨은 명소를 추천해 달라는 지인들의 요청을 종종 받곤 했다. 그때 안내한 곳 중 하나가 자크마르 앙드레 박물관이었다. 이곳은 19세기 은행가이며 미술수집가였던 에두아르 앙드레와 그의 부인 넬리 자크마르의 저택으로 티에폴로의 천장벽화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 18세기 프랑스 회화와 당시 풍요로웠던 귀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전시와 공연 등 풍성한 볼거리도 있다. 프랑스가 세계문화의 중심이 된 핵심 요소는 세계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몰려들 수 있게끔 그 판을 만들어 준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예술인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미술 분야의 경우 주요 인상파 작가를 제외하면 근현대 미술 사조의 프랑스 작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프랑스 도처에서 피카소와 고흐의 작품을 만날 수 있지만 이들은 프랑스인이 아니다. 명품 패션분야는 어떤가. 샤넬의 제2전성기를 연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독일 출신이고, 150년이 넘는 전통의 루이뷔통에 새로운 감성을 불어넣어 역시 루이뷔통이라는 찬사를 듣게 한 사람은 뉴욕 출신인 마크 제이컵스였다. 파리 오케스트라의 현 지휘자는 에스토니아 출신의 파보 예르비다. 국립 라디오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은 정명훈씨가 맡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 문화예술의 강점은 개방성과 다양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술인들이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이들을 지원한다. 국적은 의미가 없다. 이들의 창작품은 프랑스에서 전시 공연되고 프랑스에 남으며, 메이드 인 프랑스로 판매된다. 이를 보고 즐기고 사기 위해 전 세계인들이 프랑스를 찾는다. 지금 광주에는 아시아 문화전당 건립이 한창이다.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하여 광주를 아시아의 문화중심도시로 만든다는 국책사업의 일환이다. 무려 7000억원이 넘는 재원을 투입하여 2014년 개관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아시아 문화예술의 공연·전시·연구·교육 등의 기능을 포괄하는 복합문화예술기관을 지향하며, 다양한 아시아문화 원형자원을 수집 보존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아시아 예술커뮤니티를 조성할 것이라고 한다.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는 아시아뿐 아니라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있는 전 세계 예술인들의 작업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함께 고민하고 작업하며 새로운 문화예술을 창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계적 예술가도 배출되고 이것이 다시 전 세계 예술인을 불러 모으는 동력이 될 것이다. 더불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도 찾아올 것이다. 아시아 문화중심도시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복합문화공간인 퐁피두센터 운영재원의 80% 가까이를 국가에서 지원한다.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사업은 단순히 전당의 건립과 운영에 그치지 않는다. 당연히 전당과 연계한 도시의 문화예술적 환경을 조성하고 문화관광산업도 육성해야 한다. 광주비엔날레가 궤도에 올랐지만 아직도 작품의 유통을 담당하는 변변한 갤러리조차 없고 방문객을 위한 숙박시설도 태부족인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현재 아시아 문화중심도시가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이를 계기로 광주가 아시아 문화예술을 포용하고 융합하는 거대한 판이자 진정한 중심이 되기를 기대한다.
  • 현대인 불안을 대신 ‘절규’한 값 1355억원

    현대인 불안을 대신 ‘절규’한 값 1355억원

    ‘치유의 화가’인 노르웨이 표현주의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대표작 ‘절규’(1895년)가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다. 불안과 고독을 가득 품고도 마음껏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현대인들 대신 ‘절규’한 대가다. ‘절규’는 2일(현지시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1990만 달러(약 1355억원)에 낙찰됐다. 7명이 입찰에 참여했으며 전화 입찰자가 12분 만에 그림의 새 주인으로 낙찰됐다. 2010년 5월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던 파블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의 가격(1억 650만 달러)을 뛰어넘었다. 판매작은 절규의 주요 네 가지 버전 중 유일하게 민간인이 소장한 작품으로 파스텔로 그렸다. 최종 낙찰자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카타르 왕족이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는 설이 있다. 뭉크는 생전에 늘 불안했다. 순탄치 않은 삶 탓이다. 끊임없이 죽음과 마주쳤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9년 뒤 사랑하는 누나도 결핵으로 잃었다. 어린 누이는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남동생마저 젊은 날 죽었다. 뭉크는 “공포·슬픔·죽음의 천사가 태어날 때부터 내 옆에 있었다.”고 회상하곤 했다. 뭉크는 작품에 두려움을 끊임없이 표출했다. 아버지까지 숨진 뒤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그는 내면의 불안과 공포, 질투, 성적 욕망 따위를 화폭에 옮겼다. ‘절규’가 대표적이다. 핏빛 노을을 등지고 몸과 얼굴이 ‘S’자로 비틀어진 한 인물이 입을 크게 열고 소리친다. 지옥을 배경으로 그린 자화상이나 여성을 흡혈귀로 묘사한 회화 등 작품 대부분에 공포가 드리워져 있다. 미술·심리 전문가들은 뭉크의 작품 활동은 자기 치유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삶과 비교하면 치료 효과가 분명해진다. 분당 차병원 임상미술치료클리닉 김선현 교수는 “뭉크와 고흐는 같은 정신 질환을 앓았다.”면서도 “(심리적 불안·공포 등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뭉크는 81세까지 작품활동을 이어갔지만 (외부와의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고흐는 37세 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설명했다. ●불행했던 뭉크, 자기 치유 위해 작품활동 현대인들이 ‘절규’에 열광하는 이유도 작품에서 얻는 치유의 효과 때문일지 모른다. 많은 대중이 뭉크가 느낀 상실의 아픔에 공감한다. ‘절규’에서 공포에 찬 주인공을 뒤쫓듯 묘사된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이거나 연인일 수 있고, 취업·결혼 등 억압적인 상황일 수도 있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은 “사람들은 함성 을 지르는 군중 속에 섞였을 때 쾌감을 만끽한다. ‘절규’를 볼 때의 느낌도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매 수익금으로 뭉크박물관·미술관 세우기로 ‘절규’는 작품이 겪은 온갖 수난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뭉크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노르웨이 사업가 토마스 올슨은 2차 대전이 발발해 독일군이 자국을 점령하자 나치 정권으로부터 미술품을 지키기 위해 소장하고 있던 ‘절규’ 등 뭉크의 작품을 이웃의 헛간에 숨기고 영국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또 ‘절규’ 연작 가운데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소장 작품은 1994년 도난당했다가 몇 개월 뒤에, 뭉크미술관 소장 작품은 2004년 도난당했다가 2년 뒤 각각 되찾았다. 아버지로부터 작품을 물려받은 소장자 페테르 올센은 경매 수익금으로 노르웨이에 새 뭉크 박물관과 미술관, 호텔 등을 건립하는 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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