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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상회담준비위, 이행추진위로 개편…부처별 역할 조정

    남북 적십자회담서 이산상봉 논의 연락사무소·체육 협의 이어질 듯 북·미 정상회담 진전 상황이 변수 정부가 ‘판문점 선언’ 후속 조치를 이행하기 위한 잰걸음에 나섰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이 키를 잡고 진행해 왔던 남북 관계도 내각 차원의 이행을 위한 각 부처별 논의로 확대될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는 29일 “통일부, 문화체육관광부, 국토교통부 등 각 부처가 후속 조치 검토를 시작했지만 전체적인 시스템은 이번 주 초에 정리될 것”이라며 “이낙연 총리가 내각을 책임지는 만큼 후속 조치와 관련한 역할 조정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는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를 ‘남북 정상선언 이행추진위원회’로 개편할 예정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 총리의 30일 주례 회동과 다음달 1일 국무회의 등을 거쳐 판문점 선언 후속 조치를 위한 내각 시스템도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 주재로 남북 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위한 내부 점검회의를 가졌다. 조 장관은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같은 경우 준비에도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될 것 중에 하나”라며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하는 쪽으로 검토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남북은 판문점 선언에서 8·15 광복절을 계기로 남북 이산가족·친척 상봉을 진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통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위한 남북 상봉자 선정과 생사 확인 등 절차에는 2~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통일부 관계자는 “적십자회담이 열리면 이산가족 문제의 시급성을 고려해 남북이 함께 더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성묘, 전면적 생사 확인, 수시 상봉 등의 논의도 예상된다. 조 장관은 내부 점검회의에서 “합의를 어떻게 잘 이행해 나가느냐. 그냥 이행하는 게 아니라 속도감 있게 압축적으로 잘 이행해 나가느냐. 이행 과정에서 난관이 있더라도 뒤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달 남북 적십자회담과 고위급회담, 장성급 군사회담이 이어질 경우 그외 후속 조치들도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 시기와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6·15 남북 공동기념행사와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관련 체육 논의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관계자는 “조속한 시일 내에 후속 고위급회담을 개최해 이번 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실천에 옮기는 조치를 협의할 것”이라며 “연락사무소가 설치되면 남북 간 정치적 신뢰 구축이 진전되고 교류협력 확대를 촉진하며 남북 관계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여 남북 관계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다만 관건은 북·미 정상회담의 진전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등과 현 남북 관계 진전 상황을 맞춰가야 하는 부분이다. 조 장관도 “판문점 선언에 담긴 많은 합의내용 중에 어떤 사안은 바로 실행해야 될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앞으로 북·미 정상회담 및 관련 국가들과 협의를 하면서 풀어나가야 될 것도 있다”고 설명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대체복무제 도입 검토·국보법 남용 방지 가닥

    대체복무제 도입 검토·국보법 남용 방지 가닥

    이산가족·국군포로 의료지원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추진문재인 정부의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청사진이 포함된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2018~2022) 초안이 29일 공개되면서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위축됐던 대북 지원이 다양한 분야에서 재개될 전망이다. 초안은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포함된 국가인권정책실무협의회에서 논의를 거쳐 다음달 국무회의에서 확정된다. 법무부가 밝힌 기본계획 초안에는 북한 인권 개선 및 이산가족 등 인도적 문제 해결 내용이 포괄적으로 담겼다. 특히 북한 주민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산가족 문제와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내용도 언급됐다.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과 보건의료 지원 방안이 거론됐고, 중장기적으로 농업 분야 등의 개발 협력 추진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산가족 실태 조사를 통해 기초 자료를 만들고 사후 교류 가능성을 감안해 유전자 검사를 하며 서신 교환 가능성을 고려해 영상편지 제작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남북 당국이 협의를 통해 생사 확인, 서신 교환,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고향 방문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 민간에서 이산가족 사업을 벌일 경우 경비를 지원하고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통일부의 ‘2018 통일백서’에 따르면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은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크게 위축됐다. 인도적 목적이라고 해도 정부와 협의를 거치지 않으면 대북 지원을 할 수 없게 했다. 2010년 404억원이던 대북 인도적 지원 규모는 이듬해인 2011년 196억원으로 절반으로 줄었다. 이후 다소 완화됐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2016년 대북 인도적 지원 규모는 29억원으로 떨어지는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은 사실상 중단됐다. 지난해에는 정부 차원의 대북 인도 지원이 전혀 없었다. 아울러 기본계획에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 문제 등이 담겼다. 정부는 향후 국회의 도입 결정에 대비해 주무 부처인 국방부를 중심으로 독일, 대만, 프랑스 등 해외 사례를 참고해 ‘합리적 대체복무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을 기본계획 초안에 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600∼800명이 병역 거부로 처벌된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꾸준히 제기된 국가보안법 문제의 경우 정부는 국회 차원의 법 폐지 논의가 소강 상태인 점 등을 고려해 폐지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신중한 적용으로 남용을 막겠다는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정부는 생명권과 관련해 지속해서 논쟁의 대상이 된 사형제 폐지 문제와 관련해 신중한 접근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이미 사형 집행을 20년 이상 하지 않고 있지만, 국민적 공분을 사는 잇따른 강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형 집행 요구가 잇따르는 등 국민 여론이 폐지 쪽으로 합치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분홍’ 리설주·‘하늘’ 김정숙… 남북 퍼스트레이디 첫 만남

    ‘분홍’ 리설주·‘하늘’ 김정숙… 남북 퍼스트레이디 첫 만남

    리 여사 오후 6시17분 깜짝 등장 金 여사가 평화의집 현관서 맞아 文 “남북 오갈 그날 위하여” 건배 南해금·北옥류금 합주로 시작 文 “백두산·개마고원 트레킹 꿈” 金 “아무 때든 전화로 의논합시다”“내가 오래전부터 이루지 못한 꿈이 바로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트레킹하는 것입니다. 제가 퇴임하면 백두산과 개마고원 여행권 한 장 보내 주시겠습니까?”(문재인 대통령) “필요할 때에는 아무 때든 우리 두 사람이 전화로 의논도 하겠습니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역사적인 2018 남북 정상회담 선언문이 발표된 27일 저녁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 공식 수행단원 등 60명이 참석한 환영만찬 행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갔다. 만찬 행사는 남측의 대표 국악기인 해금과 북측의 대표 악기인 옥류금의 합주로 시작했다.평창동계올림픽에서 폐막식에서 ‘올림픽 찬가’를 불러 유명해진 제주도 초등학생 오연준(12)군이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를 때 김 위원장은 감동한 얼굴이었다. 오군이 동요 ‘고향의 봄’을 부를 때는 리설주 여사도 미소를 보였다. 문 대통령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라고 건배 제안을 하고 김 위원장 부부와 잔을 부딪쳤다. 김 위원장은 “모든 분들의 건강을 위해서 잔을 들 것을 제안한다”고 답사했다.이날 헤드테이블에는 두 정상 부부와 남측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서훈 국정원장, 북측의 김영남 최고위원회의 상임위원장,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앉았다. 환영 만찬에는 문 대통령과 함께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 등 정치인·경제인 34명이 참석했다. 만찬에 앞서 역사적인 남북 퍼스트레이디 간 첫 만남도 성사됐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판문점 선언’ 직후인 오후 6시 17분 리설주 여사는 군사분계선(MDL)을 차량으로 넘어왔다. 하늘색 코트 차림의 김정숙 여사는 평화의집 현관에서 화사한 분홍색 치마 정장 차림의 리 여사를 맞았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상대 배우자와 악수를 했다. 처음부터 화기애애했다. 리 여사가 먼저 “이번에 평화의집을 꾸미는 데 여사께서 작은 세부적인 것까지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가구 배치뿐만 아니라 그림 배치까지 참견을 했는데…”라고 말을 받았다. 그러자 리 여사는 “그래서 조금 부끄러웠다. 제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이렇게 왔는데…”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 이에 김 여사는 리 여사에게 손을 뻗어 다독이며 “저는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두 분의 전공이 비슷하기 때문에 남북 간 문화예술 교류, 그런 것을 많이 해 주시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김 여사는 결혼 전까지 서울시립합창단원으로 활약했다. 리 여사 역시 북한 은하수관현악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북한은 전날까지도 리 여사의 방남 여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청와대가 리 여사의 정상회담 만찬 참석을 발표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30분쯤이었다. 역대 북한 최고지도자의 부인 가운데 정상 외교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가 처음이다. 리 여사는 김 위원장의 집권 후 첫 외국 방문이었던 지난달 방중 때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과 능숙하게 첫 ‘퍼스트레이디 외교’를 선보였다. 한편 패션업계 관계자는 “김 여사의 푸른 롱재킷과 안에 입은 원피스는 상하의가 모두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면서 “한반도 통일의 희망을 스타일로 표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물산의 한 패션 담당자는 “우연인지 몰라도 김 여사의 하늘색 원피스와 차이나칼라 롱재킷은 리 여사의 분홍빛 의상 색깔과 좋은 대비를 이뤘다”고 후하게 평가했다. 또 패션 전문가는 “살구색 치마 정장은 미국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부인인 재클린의 ‘재키룩’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판문점공동취재단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이번엔 고향을 방문할 수 있을 것 같다… 죽기 전 옛 이웃과 잠시라도 살고 싶어”

    “이번엔 고향을 방문할 수 있을 것 같다… 죽기 전 옛 이웃과 잠시라도 살고 싶어”

    27일 오전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자 실향민들은 “이번에는 고향을 정말 방문할 수 있게 될 것 같다”며 가슴 벅찬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임진강 건너 민통선에 있는 장단군 진동면이 고향인 윤금순(91) 할머니는 “몇 년 전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에 갔더니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집은 물론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서 “죽기 전에 다시 예전처럼 집을 짓고 옛 이웃들과 잠시라도 어울려 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할머니는 현재 ‘괸돌(고인돌)수용소마을’로 불리는 경기 파주 상지석동에 66년째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1·4후퇴 때 진동면에서 피난 나온 주민 300여 가구가 정착했다. 문산 태영부동산 조병욱 공인중개사는 “진동면을 비롯해 민통선 안에서는 개발행위허가를 받을 수 없어 농사만 지을 수 있다”면서 “남북 간 평화체제가 확립돼 민통선 안에서도 사람이 집을 짓고 다시 살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슴 높이까지 눈이 쌓인 겨울 부친과 단둘이 함경남도 풍산에서 월남했다는 김용한(76·경기 파주 교하동)씨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너무 그리워하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아쉽다”면서 “어머니와 누이들은 이미 돌아가셨겠지만 당시 갓난아기였던 막냇동생은 생존해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통 크게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폐허처럼 변한 강원 고성군 명파리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함경남도에서 1·4후퇴 때 어머니와 남동생을 남겨 놓고 아버지와 단둘이 월남했다는 김모(88)씨는 “북에 두고 온 가족 모두 사망한 사실을 몇 년 전 확인했지만 조카들의 생사는 아직 모르고 있다”면서 “이번 남북 정상 간 만남으로 곧 고향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12세 때 함경북도 북청에서 월남해 실향민 마을인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에 사는 김진국(78) 노인회장은 “실향민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고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았다”며 “남은 사람들만이라도 고향땅을 밟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아바이마을에 생존한 실향민 1세대는 대략 100여명. 이 가운데 절반은 고령으로 거동이 매우 불편하다. 파주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철원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남북 정상회담 공동 선언문의 주요 키워드는...?

    남북 정상회담 공동 선언문의 주요 키워드는...?

    27일 남북 정상회담 공동 선언문의 주요 내용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뭘까.이날 발표된 공동선언문에서 가장 눈에 뛰는 것은 ‘종전선언’을 꼽을 수 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 직후 남북은 군사적으로 대립해 왔다. 이 같은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직결된 문제라는 데 이견이 없을 정도다. 남북은 다음달 군사회담을 통해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조치로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다음으로는 북측 지역인 개성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설치다. 남북 간 공동연락사무소를 사실상 각자의 ‘대사관’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남북 간 발생할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소통 창구이자 플랫폼이라는 설명이다. ‘이산가족·친척상봉’도 실향민들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다. 남북이 인도적인 사안인 가족 상봉으로 남북 주민들의 숙원을 해결해 주는 것이 때문이다. 이는 1985년 이뤄졌던 이산가족 고향방문의 부활이란 관측이 나온다. 당시 남북 주민들은 평양과 서울 상호 방문했다. 때문에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남북 주민의 자유왕래로 이어가려는 뜻도 담겨 있다는 해석이다.불가침 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군축 논의도 진일보한 결과물이다. 이날 합의문에는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고 서로의 군사적 신뢰가 실질적으로 구축되는 데 따라 단계적으로 군축을 실현해 나가기로 했다”고 명시했다. 이를 위해 남북은 국방장관급과 장성급 군사회담을 통해 구체적 실행을 이어나가기로 밝혔다. 이와 함께 북방한계선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조성해 우발적 군사충돌을 막기 위한 조치도 강구될 것으로 전망된다. 평화체제를 위한 남·북·미 3자회담과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도 주요 사안이다. 사실상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리전 양상을 띄었던 한국전쟁이후 당사자들이 모여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이 실현될 경우 ‘재팬 패싱’ 논란도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서 외톨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 대통령의 올 가을 평양 방문도 또 다른 관심거리다. 이것이 실현되면 한국 대통령으로는 세번째 방북이자, 문 대통령의 첫번째 방북이다. 다만 문 대통령의 방북은 이날 발표한 공동 선언문의 구체적 이행이 담보되지 않으면 정치적 부담이 따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귀빈 맞이를 위해 남북 공동 합의에 따른 행동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공동취재단·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역대 최대 취재진 3000여명… 휴가 내고 구경 온 시민 ‘북적’

    역대 최대 취재진 3000여명… 휴가 내고 구경 온 시민 ‘북적’

    취재 등록 24일까지 2850명 마쳐 단상 앞에 1300여석 기자석 마련 현장 찾은 어린이기자단 30명 “정상회담 넘어 통일까지 갔으면” 대동강 솔향 등 통일향수전 열려 실향민들 고향 추억 향기로 느껴 “정상회담으로 끝내지 말고 통일까지 가즈아.”26일 경기 고양 킨텍스의 남북 정상회담 메인 프레스센터를 찾은 통일부 어린이기자단 안효건(12)군은 어떤 회담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안군은 “한 민족이 두 나라로 분단돼 있는데도 많은 사람이 평화통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면서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통일부 어린이기자단이 됐다”고 소개했다. 파란색 티셔츠를 똑같이 맞춰 입은 30여명의 어린이기자단은 프레스센터 곳곳을 둘러봤다. 취재진도 어린이기자단의 방문에 잠시나마 잔뜩 굳어 있었던 인상을 펴고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프레스센터는 전 세계에서 온 언론인들의 취재 열기로 가득했다. 휴가를 내고 자녀를 데리고 킨텍스를 찾은 김호섭(44)씨는 “외국에서 이 정도로 관심이 있는 줄 몰랐는데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가 대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느낀다”면서 “한편으로는 외신에서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분단국가라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프레스센터를 찾은 김재민(9)군은 “외국에서 온 기자들이 우리나라의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써 줘서 고맙다”며 “생큐”를 외쳤다. 메인프레스센터인 킨텍스 3홀에는 역대 최대 규모의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남북 정상회담 공식 슬로건인 ‘평화, 새로운 시작’이란 문구가 걸린 단상 앞에는 1300여석의 내외신 기자석이 마련됐다. 현장을 찾은 수천명의 취재진은 상기된 표정으로 기사를 쓰거나 청와대의 브리핑을 듣는 데 열중했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25일 기준으로 360개 언론사 소속 기자 2850명이 취재 등록을 마쳤다. 내신은 176개사 1981명, 외신은 총 36개국 184개사 869명이다. 정상회담 당일 현장에서 등록하는 취재진 수를 더하면 3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에도 ‘프레스 배지’ 발급 데스크 앞에는 현장 등록을 하려는 취재진의 대기줄이 길게 이어졌다. 프레스센터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자원봉사자도 대거 투입됐다. 이날 방송 중계석과 방송사 전용 부스 등으로 구성된 국제방송센터(IBC) 헬프데스크를 담당하던 자원봉사자 오지현(22·서울대 정치외교학과)씨는 “정상회담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에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는 첫 공간인 프레스센터에서 함께하게 돼 기쁘다”면서 “좋은 소식이 잘 알려질 수 있도록 취재진을 적극 돕고 있다”고 말했다. 센터 한편에는 통일부에서 마련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통일향수전(統一鄕水展)’이 열렸다. 북한이 고향인 고령의 이산가족 5명의 추억을 바탕으로 전문 조향사가 향을 제작했다. ‘평안남도 대동강 솔 향’, ‘황해도 해주 바다내음 향’ 등 5개의 향수는 실향민들이 고향에 대한 추억을 후각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센터 입구에 전시된 한반도기 모양의 조형물에는 전 세계 838명이 43개의 언어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소망을 적은 메모지가 붙어 있다. 베네딕트 윙클러는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명확한 방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통일뿐만 아니라 나아가 남과 북이 화합하고 성장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고 적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김정은, 오전 9시 30분 도보로 분계선 넘는다…남북 정상, 공동기념식수도

    김정은, 오전 9시 30분 도보로 분계선 넘는다…남북 정상, 공동기념식수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오전 9시 30분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어 문재인 대통령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두 정상은 공동 기념식수 행사도 가질 예정이다.대통령비서실장인 임종석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은 26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정상회담 일정을 발표했다. 임종석 위원장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T2와 T3 사이로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을 예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앞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맞이한다. 두 정상은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우리 군의 전통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공식 환영식장으로 걸어서 이동한다. 오전 9시 40분쯤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 사이에 있는 판문점 광장에 도착해 의장대 사열을 포함한 공식 환영식을 갖는다. 앞서 2000년과 2007년 각각 평양을 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도 공식 환영식에서 북측 육해공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은 바 있다.의장대 사열이 끝난 뒤 두 정상은 양측 공식 수행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영식을 마치게 된다. 이어 회담장인 평화의 집으로 이동, 1층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한다. 두 정상은 접견실에서 회담 전 환담을 나눈 뒤 2층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해 오전 10시 30분부터 본격적으로 정상회담을 시작한다. 정상회담 오전 일정이 끝나면 양측은 따로 오찬과 휴식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오후에는 남북 정상이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공동 기념식수 행사도 진행할 예정이다. 식수 위치는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던 ‘소떼 길’ 인근에 있는 군사분계선 위에 심는 것으로 정해졌다. 두 정상은 함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소나무를 심는다. 임종석 위원장은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로 정했다”면서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생 소나무”라고 설명했다. 소나무 식수에는 한라산과 백두산의 흙을 함께 섞어 사용하고, 식수 행사 뒤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한강 물을, 문재인 대통령이 대동강 물을 주기로 했다. 식수 표지석에는 ‘평화와 번영을 심다’라는 문구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서명이 새겨진다. 임종석 위원장은 “공동식수 행사는 우리 측이 제안했고, 북측이 우리가 제안한 수종과 문구 등을 모두 수용하면서 성사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공동식수 행사를 마친 뒤 두 정상은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도보다리’까지 함께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눌 예정이다. 도보다리는 정전협정 직후 중립국감독위원회가 판문점을 드나들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습지 위에 만든 다리로, 유엔사령부에서 ‘FOOT BRIDGE’(풋 브릿지)라고 부르던 것을 그대로 번역해 ‘도보다리’라고 칭하게 됐다. 도보다리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며 확장 공사가 이뤄졌다. 임종석 위원장은 “이 다리의 확장된 부분에 위치한 군사분계선 표식 바로 앞까지 남북 정상이 함께 찾아가는 것 자체가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고, 협력과 번영의 시대를 맞는다’는 의미”라면서 “이제부터 ‘도보다리’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슬로건인 ‘평화, 새로운 시작’ 그 자체를 상징하는 역사의 현장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정상은 동반 산책 뒤 다시 평화의 집으로 이동, 오후 회담을 이어간다. 정상회담을 모두 마치면 합의문 서명과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그 형식과 장소는 합의 내용에 따라 결정될 방침이다. 오후 6시 30분부터는 양측 수행원까지 참석하는 환영 만찬이 평화의 집 3층 식당에서 열린다. 환영 만찬 메뉴로는 옥류관 평양냉면을 비롯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 가거도산 민어해삼편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산 쌀로 지은 밥 등이 오를 예정이다. 만찬이 끝나면 환송 행사로 이어진다. 두 정상은 판문점 평화의 집 전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해 상영되는 영상을 함께 감상하며 공식행사가 모두 마무리된다. 이 영상의 주제는 ‘하나의 봄’으로 “한반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표현될 것”이라면서 “남북 정상이 나눈 진한 우정과 역사적인 감동의 순간을 전 세계인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라고 임종석 위원장은 설명했다. 임종석 위원장은 북측 공식 수행원 명단도 전했다. 북측 수행원은 모두 9명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휘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리수용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리명수 총참모장, 박영식 인민무력상, 리용호 외무상,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다. 남측 공식 수행원으로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가정보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송영무 국방부 장관에 정경두 합동참모의장이 새롭게 포함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식사의 정치/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식사의 정치/황성기 논설위원

    17세기 영국의 군인이자 저술가였던 새뮤얼 피프스는 “즐거운 만찬은 모든 사람을 화해시킨다”는 명언을 남겼다. 함께 먹는 유쾌한 밥 한 끼에 담긴 뜻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밥 한 끼가 외교 무대, 특히 정상끼리의 점심이나 저녁이라면 의미는 더 각별해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빈 초청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에게 베푼 공식 만찬이 화제다. 멜라니아는 트위터에 “몇 개월 전부터 준비했다”고 쓸 만큼 정성을 들였다. 백악관은 만찬 메뉴가 “프랑스 영향을 받은 미국 최고의 요리와 전통”이라고 마크롱 대통령의 기분을 한껏 치켜세웠다. 만찬에는 백악관 정원에서 기른 채소로 만든 샐러드, 양고기 갈비구이, 잠발라야(미 남부의 쌀 요리) 등이 제공됐다.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공화당 예비선거 때 “대통령에 취임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호화로운 식사가 아닌 맥도널드의 빅맥을 제공하고 곧바로 실무 회담을 하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정상회담 햄버거 발언’은 2016년에도 이어져 “김정은과 회담 탁자에서 햄버거를 먹고 대화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트럼프는 그러나 2017년 4월 미·중 정상의 만찬 때 햄버거가 아닌 시저 샐러드, 스테이크, 혀가자미 요리, 쵸콜릿케이크 등을 시 주석 테이블에 올렸다. 5, 6월에 있을 북·미 정상회담 때야말로 초유의 햄버거 식사가 실현될지 관심을 끈다. 2015년 10월 영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주석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이 환영 만찬을 베풀었는데, 이날 제공된 한 병에 300만원짜리 1989년산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이 구설에 올랐다. 일각에서 “톈안먼 사건이 발생한 같은 해의 와인을 내놓음으로써 영국이 중국의 인권 탄압을 빗댔다”고 빈정거린 것이다. ‘향연에 나오는 것에는 모두 의도(의미)가 있다’는 의전의 철칙을 영국 왕실이 몰랐을 리 없겠지만 음식이나 음료 선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 주는 일화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2018 남북 정상회담의 만찬 메뉴 10가지가 공개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 고향인 신안 가거도산 민어해삼 편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에서 난 쌀로 지은 밥이 메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배려해서는 유년 시절을 보낸 스위스의 가정요리인 ‘뢰스티’(감자를 강판에 갈아 둥글게 부친 요리)를 우리 식으로 바꾼 감자전과 함께 평양 옥류관 냉면도 밥상에 올린다. 북한에 ‘큰 쌀독 열어 놓고 손님 대접한다’는 말이 있는데, 남측의 정성 들인 식사에 김 위원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정상회담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정상회담 앞두고… ‘고려 협상가’ 서희 선생의 외교술 만나다

    정상회담 앞두고… ‘고려 협상가’ 서희 선생의 외교술 만나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대화 등을 앞둔 가운데 고려의 외교가·협상가로 이름을 날린 서희(942~998) 선생을 기리는 경기 이천시 ‘서희테마파크’에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희 선생은 거란 침공 때 소손녕과 담판해 80만 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를 회복하는 등 뛰어난 외교술로 널리 알려졌다. 24일 이천시에 따르면 서희테마파크는 선생의 고향인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 자락에 2016년 6월 개원했다. 조병돈 이천시장이 설립을 주도했다. 157억원을 들여 14만 2000여㎡ 규모로 조성됐다. 다양한 형상물과 함께 연면적 617.31㎡의 서희역사관을 비롯해 전시관과 추모관, 누각으로 꾸며졌다.우선 이곳에선 선생의 일대기를 서사적인 얘기로 엮은 산책로가 있다. 국내 유명작가가 30종의 조형 작품으로 형상화한 600m 정도의 길이의 산책로다. 관람객들은 산책로를 걸으면서 서희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조형물 가운데 서희 선생과 소손녕의 담판을 보여주는 동상은 역사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소손녕과 마주하고 앉아 협상하는 모습을 담은 이 동상이 테마파크의 메인 조형물이다. 또한 서희역사관 2층 누각에 올라 이천시를 바라보며 1000년 전 거란 80만 대군을 담판 협상으로 물리친 선생의 외교력을 되새겨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서희테마파크에는 유치원생과 초·중·고교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국군장병과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 외교 관 후보생들이 현장체험 학습을 한다.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서희테마파크를 활용한 ‘학교교육과정 연계 체험 프로그램’은 학생과 교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은 초등학교 3학년 ‘우리 고장 이천’ 과목과 연계해 지역 시설을 살펴보는 이천 바로 알기 체험이다. 테마파크와 효양산을 비롯해 이천과 서희 선생의 역사, 효양산 전설 찾아가기로 이뤄진다. 서희역사관 1층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시실을 관람하며 문제를 푸는 서희 OX 퀴즈, 미래의 외교관 임명장 코너, 고려시대 갑옷 체험, 사진을 인화해서 가져가는 서희와 함께 찰칵, 외교 담판 영상 감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학생들이 친근하게 서희 선생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코너는 서희역사관에 마련된 미래의 외교관 임명 장소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외교관으로서의 덕목을 스스로 선택해 실천 의지를 다짐하며 사진을 찍고 외교관 임명장도 받을 수 있다. 2층 추모관에는 이천 서씨 종중 200명의 얼굴과 두상 등을 바탕으로 제작돼 국가 표준영정 제95호로 지정된 가로107㎝, 세로 180㎝ 크기의 서희 선생 영정사진을 만나볼 수 있다. 서희역사관은 학생들의 체험 학습과 이천시티투어 프로그램과의 연계, 야외 결혼식 운영 등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관람객 수가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방문객은 1만 3000명이었다. 전화로 예약하면 무료 해설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또 오는 10월에 열리는 ‘장위공 서희문화제’에서는 서희 담판 재현 연극, 이천시의 지명이 유래된 이섭대천(利涉大川) 퍼포먼스, 효양산 금송아지 전설 인형극, 서희 선양 전국 미술대회와 백일장, 각종 전통문화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된다. 이천시는 고려 태조 왕건이 이섭대천에서 글자를 따와 하사한 명칭이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덕을 쌓고 몸을 기르면 대천을 건너 큰 공을 세워 천하가 이롭게 된다는 뜻이다. 조 시장은 “세치 혀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를 획득한 외교·협상의 달인 서희 선생과 같은 지혜로운 영웅이 절실한 시대에 많은 시민들이 실리·자주외교 정신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책으로만 본 내용을 현장에서 조형물을 통해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다”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인 서희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시민들에게 선생의 일대기를 스토리텔링하여 흥미롭게 소개하고 선생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교양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서희 선생은 소손녕과 담판 협상 80만 거란군 물리쳐 서희 선생은 942년(태조 25년)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이다. 할아버지 서신일은 이천지역의 토착 호족이었으나, 아버지 서필이 광종 대에 내의령을 지내면서 집안이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했다. 선생은 960년(광종 11)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에 이르렀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장군이라 불리지만 본래는 문관 출신이었다.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송에 사신으로가 십수년간 단절됐던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이를 물리치고 강동 6주를 회복한 것이다. 시호는 장위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됐다.
  • [평화의 문 여는 남북정상회담] 생존자보다 사망자 많은 이산가족… 정례·화상상봉 마지막 꿈

    [평화의 문 여는 남북정상회담] 생존자보다 사망자 많은 이산가족… 정례·화상상봉 마지막 꿈

    오는 27일 남북 정상회담의 인도적 부문 의제 중 가장 큰 관심사는 ‘이산가족 상봉 재개’다. 2016년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사망자 수가 생존자를 처음 넘은 뒤, 현재 이산가족 10명 중 6명의 나이가 80세 이상이다. 이런 시급한 상황을 감안해 한국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를 최우선 의제로 꾸준히 강조해 왔다.통일부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으로 등록 이산가족 수는 13만 1531명이고 이 중 사망자는 7만 3611명(56%)이었다. 생존자는 이보다 적은 5만 7920명이다. 특히 2016년부터 사망자 수(6만 5922명)가 생존자 수(6만 4916명)를 앞섰다. 이산가족 생존자의 고령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지난달 말 이산가족 생존자(5만 7920명)의 연령별 구성을 보면 80대(41.5%·2만 4031명), 90대(22.7%·1만 3167명), 70대(22.1%·1만 2771명) 순이었다. 80대 이상은 전체의 64.2%, 70대 이상은 전체의 86.3%나 된다.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남북에 이산가족들이 생긴 후 첫 상봉은 남북 적십자사 간의 합의로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처음 있었다. 이때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란 이름이었다. 남북 정부가 나선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그해 8·15 때 시작했다. 2015년 10월 북 금강산에서 제20차까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뒤 2년 6개월째 중단됐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1월 9일 열린 첫 고위급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회담의 의제로 올렸다. 하지만 북측은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남북연락사무소 직통 전화 재개 등에 합의하면서도 이산가족 문제는 선을 그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재개의 대가로 2016년 4월 중국 내 북한식당에서 한국으로 집단 탈출한 종업원의 송환을 요구해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는 남북 간 신뢰가 막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현재는 남북 예술단의 상호 공연, 북 마식령 공동 스키 훈련, 평창동계올림픽 공동 입장,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등 수차례의 교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문제가 타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이유다. 청와대 관계자도 “이산가족 문제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라고 전했다. 2000년·2007년 정상회담에서도 각각 이산가족 상봉이 합의됐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이산가족의 고령화를 감안할 때 대규모 상봉 및 상봉의 정례화가 필요하다. 이용화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현 생존 이산가족 전원의 대면상봉을 위해서는 90회의 상봉행사가, 90세 이상의 대면상봉을 위해서는 20회의 행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2000년부터 15년간 대면상봉 평균인원(647명)을 적용한 결과다. 2018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 재개가 합의된다면, 이르면 6·15(남북 공동선언 18주년 기념일)에도 시작할 수 있다. 올해로 73주년인 8·15 광복절이나 9월 추석 등도 좋은 계기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의 운영을 상시화하는 방안이나 제2면회소 건립을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이미 남북에 20여개의 화상 상봉장이 설치돼 있기 때문에 화상 상봉을 재개하거나 2003년 중단된 서신 교환을 재허가하는 것도 시간을 두고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개나 고양이처럼 바라봐 주세요” 털 없는 귀요미 사랑꾼

    “개나 고양이처럼 바라봐 주세요” 털 없는 귀요미 사랑꾼

    ‘털 없다고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우리들도 인기 있는 반려동물이예요’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 인구가 천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마뱀·개구리·육지거북 등 양서파충류들을 집 안에 들여놓는 또 다른 반려동물 인구도 약 10만 명 정도로 성장 중이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박종순(31)씨. 그는 어릴적 동물들을 좋아했다. 이를 알게 된 부모는 박씨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반려동물로 이구아나를 입양해 주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서파충류들의 사육과 번식까지, 그의 취미는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 또한 집안에 이러한 ‘평범치 않은’ 동물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을 불편해하신 부모를 위해 사육과 분양을 통해 얻은 수익금 중 동물 관리유지 비용을 제외한 전액을 드리는 효자가 됐다. 박씨는 현재 거북이 70마리, 도마뱀 100마리, 뱀 2마리, 개구리 10마리 정도를 직접 관리하며 사육 중이다.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는 “월급 삼분의 일이 먹이와 온도 조절을 위해 켜놓아야 하는 열등(熱燈) 전기료로 지출된다”고 한다.그가 함께하는 셀렙 중, 보기에도 매우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박스터틀(Box Turtle)은 암수 한 쌍 기준으로 약 1600만 원, 하이포 걸프코스트 박스터틀(Gulf Coast Box Turtle)은 약 400만 원의 몸값을 자랑한다. 마치 작은 용이 환생한 것처럼 보이는 거들테일 아르마딜로 리자드(Armadillo Girdled Lizard)도 역시 암수 한 쌍 기준으로 500~600만 원이나 나가는 고가 종들이다. 거들테일 아르마딜로 리자드 같은 경우는 워낙 희귀종이라 분양가도 매우 높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키우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특수동물을 키우면서 그들 ‘고향’을 직접 방문해 그 나라의 환경 및 기후가 어떤지를 직접 체험하며 채집의 경험도 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양서파충류를 좋아하는 매니아 수준을 넘어 브리더(이들을 서로 교배할 수 있는) 수준의 전문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기성 인큐베이터가 많지 않아 레오파드 육지거북이가 산란했던 알들을 직접 만든 번식기를 통해 부화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동물들을 어떻게 관리할까? 박씨는 온도, 습도 등 털 없는 귀요미들의 생존 환경을 잘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수분 공급을 원활히 해주어 탈수 증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도마뱀류는 사육장 안의 온도를 생존에 적합하도록 잘 조절해 이들이 가장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먹이를 먹게 되면 세 시간 정도 가량은 열등을 틀어 놓는다”고 한다. 박씨는 양서파충류를 기르려는 초보자들에게 충고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기르려고 하는 동물의 크기나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 등에 대해 충분히 고민을 한 후 입양해야 한다”며 “보기에 귀엽고 예뻐서 입양했다가 파양하는 경우도 많다”며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개나 고양이처럼 이들도 반려동물이라는 인식을 갖고 바라봐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 영상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

    여기, 베트남에서 온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분의 이름은 응우옌티탄(58)입니다. 베트남 중부 꽝남성(‘성’은 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의 퐁니 마을이 그의 고향입니다. 다른 한 분의 이름도 응우옌티탄(61)입니다. 꽝남성의 하미 마을에서 왔습니다. 퐁니 마을과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이 지난 19일 어렵게 한국 국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왜 한국군은 여성과 어린아이뿐이었던 우리 가족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나요. 어째서 집까지 모조리 불태우고 시신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인가요.”두 사람은 이름도 같지만 동시에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 생존자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부는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 철군하기 전까지 32만 5000여명 규모의 한국군을 베트남 전쟁(1964년 8월~1975년 4월)에 파병했습니다. 장병 5000여명이 전사했고, 1만 2000여명이 지금까지도 고엽제로 인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군은 베트남에 주둔하는 동안 전투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학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의 가옥, 무덤,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불도저로 시신을 훼손했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일어난 국가범죄이자, 전쟁 중에도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제규범을 위반한 전쟁범죄입니다.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1968년 2월 12일에 발생한 ‘퐁니·퐁넛 사건’의 피해 생존자입니다. 퐁넛 마을은 퐁니 마을 바로 옆에 있는 마을입니다. 당시 한국군의 해병 제2여단(이른바 ‘청룡부대’)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이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해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74명이 살해됐고 17명이 다쳤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그는 이 사건으로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 동생을 잃었습니다. 자신도 배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저는 배에 총상을 입었고, 오빠는 엉덩이가 다 날아갈 정도의 중상을 입었습니다. 죽은 남동생은 한국군이 쏜 총에 입이 다 날아갔습니다. 남동생이 울컥울컥 핏물을 토해낼 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배 밖으로 튀어나온 창자를 부여안고 어머니를 찾아 헤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어 그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는 그날의 잔인한 학살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고 호소했습니다.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도 1968년 2월 22일에 벌어진 ‘하미 사건’으로 어머니, 남동생, 작은 어머니, 사촌 동생 2명을 잃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11살이었습니다. 자신도 한국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 허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 때 입은 상해로 현재까지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날 해병 청룡부대 예하 5대대 26중대 소속 군인들은 하미 마을에 진입해 마을 사람들을 네 곳으로 모았습니다. 이후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트렸습니다. 총검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다음 날 불도저를 동원해 전날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매장한 시신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훼손했습니다. 이 학살로 135명이 사망했습니다.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하미 사건의 충격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 안개가 끼거나 사람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면 학살 현장의 끔찍한 공포가 떠올랐습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남동생의 유해를 지금까지 찾지 못해 가슴이 아픕니다”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역대 대통령들의 발언은 ‘과거에 양국 간에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유감이다’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는 정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4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대로입니다. 두 응우옌티탄은 국회 정론관에서의 기자회견을 통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다른 학살 피해자와 유가족들,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대신하여 묻습니다. 어째서 한국군은, 한국 정부는 그러한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그 어떤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인가요.”사실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이번 방한이 두 번째입니다.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2015년 4월 생애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부정하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단체들의 반발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당시 응우옌티탄은 또 다른 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떤런(67)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거주하는 경기 광주 나눔의집 역사관 방문을 시작으로 국회 기자회견,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 참석, 지역 순회 간담회 등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참전군인 단체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임재성 변호사는 “누군가는 민간인 학살 사건이 없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직접 겪어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정작 진실을 밝힐 책임이 있는 정부는 침묵하고 있습니다”라면서 “한국에 온 두 분은 두려운 마음으로 ‘제가 증거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오빠와 주변 이웃들이 자신의 방한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 무서운 곳에 어떻게 가느냐’, ‘가서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거길 갈 수가 있느냐’는 반응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조카의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두가 반대할 때 제게 한국에 가라고 이야기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제 조카입니다. 조카는 저의 방한이 ‘그 날 죽은 135명의 영령들을 위한 일이 아니냐’면서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제가 한국에 와서 증언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한국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두 응우옌티탄은 “우리는 앞으로도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이 자리도 많이 떨립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용기를 내는 이유는 50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의 가족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지난날 있었던 어둡고 고통스럽고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을 세상에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비단 피해 생존자들만의 몫은 아닙니다. 오는 21~22일 ‘시민평화법정’(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립니다. 오래 전부터 학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시민사회가 어렵게 마련한 자리입니다.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이 진행됩니다. 학살의 진실이 망각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의 몫입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여주시 다문화가족 고향방문 신청자 선정

    여주시 다문화가족 고향방문 신청자 선정

    경기 여주시는 시에 정착한 다문화 가족들이 고향에 다녀올 수 있도록 ‘2018년도 다문화가족 고향방문사업’ 대상자를 선정했다고 19일 밝혔다. 시는 18일 다문화가족 고향방문사업 선정 심사위원회를 열고 여주에 거주하면서 오랫동안 고국을 방문하지 못한 11가정 중 거주기간, 결혼기간, 자녀수 등은 종합적으로 검토해 기준 조건을 충족하는 4가정을 선정했다. 선정된 가정 중에는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결혼 4년 만에 남편과 고향을 방문하는 대상자도 포함됐다. 선정된 A씨는 “오랫동안 고향을 방문하지 못해 가족이 너무 그리웠는데, 이번에 선정이 되어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다. 시는 선정된 한 가정당 300만원 범위 내에서 왕복항공료와 여행자보험료를 지원할 예정이며, 5월~10월 중 고향을 방문할 계획이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인물 플러스] “남 속이지 않고 선하게 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깁니다”

    [인물 플러스] “남 속이지 않고 선하게 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깁니다”

    “인간은 반드시 뿌리가 있고, 뿌리에서 나무가 자라 마디가 생기고 열매가 열립니다. 운명은 뿌리에서 나무가 자라듯 바꿀 수는 없지만 ‘남을 속이지 않고 선하게 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평생동안 외길을 걸어오며 당대를 대표하는 수경학(壽鏡學)의 대가(大家)인 백파카운셀러상담원(한국수경학연구원) 백파 원장의 이야기다. 수경학은 운명을 통찰하는 학문으로 동양철학의 정수가 담긴 학문이다. 수경학의 창시자이자 불세출의 명인인 윤대현 백파 원장은 남다른 ‘통찰력과 선견지명’으로 심오한 수경학의 경지를 터득, 국내의 유일무이한 수경학 대가로 평가된다. 관록(貫祿)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희망’을 쏘고 있는 백파 원장은 ‘상담활동’ 외에도 봉사, 나눔활동을 통해 사회 공공의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다. 본지는 ‘세종시’ 사랑에 빠진 수경학의 명인 백파 원장을 만나 지난 생애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현재 백파 원장의 충북 청주 제1사무실과 서울 종로구 제2사무실에는 예약 없이는 상담이 어려울 정도로 상담자가 끊이지 않는다. 그의 통찰력이 신통하기 때문이다. 수경학은 풍수지리와 사업, 직업, 상호명, 가정문제, 작명, 운세 등 많은 분야의 상담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백파 원장을 찾고 있다. 백파 선생은 지난 1960년대 기업들이 태동하던 시기에는 기업인들과의 인맥을 이어오면서 우리나라 산업계의 발전은 물론, 지리학을 통한 도로, 도시개발 등 국가 기반시설 기획에도 많은 기여를 해 온 인물이다. 사주는 물론, 태어난 시에도 초시, 중시, 말시로 세분화하여 판단하고 상담자 집안의 본과 지역까지 감안해 운명을 통찰하는 백파 선생은 상담자가 모든 것을 허물없이 털어놓고 상담하며 운명과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카운셀링으로 정평이 나 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에 국운이 걸려 있다” 백파 선생의 통찰력과 예지력은 참으로 신기할 정도다. 해외에서도 백파 선생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지난 2002년부터 미국의 한인방송과 CBS 방송 등에서 5년간 재미교포와 현지인을 대상으로 수경학 상담활동을 펼친 바 있다. 매일 진행된 ‘즉문즉답’을 통해 명쾌한 운세판단과 가이드를 제시해 인기를 누렸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미국, 중국 등 세계 39개국으로 특별 초청되어 국운과 글로벌기업의 장래를 카운셀링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백파 선생은 최근 세종시의 발전을 통한 국가 융성 전략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세종시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다. 백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책사를 역임하면서 세종시로 행정수도 이전을 최초설계했던 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행정수도 이전을 준비했던 풍수지리 및 명리학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백 원장은 이미 1973년도부터 국가 수뇌부에 현재의 세종시 자리인 당시 공주군 장기면, 의상면, 연기군 금남면, 남면 등 일대에 나라의 수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한 바 있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도 백파 원장의 의견을 신뢰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인 수도 건설을 위한 실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수도 이전은 미뤄졌지만 백파 원장의 제언에 힘입어 금남면 일대는 항상 수도 이전 최적지로 정치권의 관심을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권에 이르러 본격적인 세종시 건설로 이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 초 지금의 세종시 지역에 큰 사고가 있었고 그때 나는 국가 수뇌부의 요청으로 그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세종시 지역을 면밀히 살펴보고 지형이 너무나 좋아서 나라의 수도 자리로 국가 수뇌부에 건의했고 이를 계기로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받는 곳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오늘날 세종시의 탄생을 볼 때 제 예견이 맞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1973년부터 국가 수뇌부에 현재의 세종시 위치로 수도가 옮겨져야만 나라가 편안해진다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가보시면 세종시의 지형적 구조가 굉장히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풍수적으로 판단하면 계룡산, 갑하산과 대전 동학사, 마곡사 줄기를 볼 때에 현 세종시의 운기는 바람이 불어 내려와서 쉬었다 가는 형국입니다. 즉 하늘이 내린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은 일반인 중에서도 잠을 못 자거나 피로하거나 정신이 어지러울 때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 몸이 회복되는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그만큼 대단한 지형이고 그래서 이미 40여년 전부터 국가 수뇌부에서도 수도 이전자리로 기획해 왔던 곳입니다.” 백파 원장의 지론이다. 세종시의 현재 위치는 하늘이 내린 자연환경과 지리적 여건으로 과거에도 수차례 국가 융성을 이끌 도시 건설의 최적지로 꼽혀왔던 곳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종시의 위치는 1500년 전 삼국시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으며, 조선 건국기에는 서울보다 유력한 왕도의 후보지로 거론됐던 곳이기도 하다. 수경학의 창시자이자 불세출의 명인 수경학은 목숨 ‘수’, 거울 ‘경’자로 동양철학의 정수가 담긴 학문이며 백파 원장은 수경학의 창시자이자 불세출의 명인이다. 백파 원장이 태어난 고향은 옛날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좌천리 187번지이고, 아버지 윤만갑과 어머니 조재현의 장남으로 1941년 12월 24일 태어났다. 그는 확실히는 모르나 주위 분들이 말하기로 그 당시 어려운 시대였지만, 나름대로 먹고사는 것은 별다른 문제 없이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당시 시절은 잘 모르고 주위 사람들 말로 들은 것뿐이다. 백파 아버지는 삼남매로, 누님 한 분과 남동생 한 분이 계셨는데, 누님은 일찍 세상을 떠나 남동생 한 분만 계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제가 태어난 지 8개월만에 호열자라는 전염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9일 만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삼촌댁에 가게 되어, 그곳에서 1년 정도 지냈다”고 한다. 당시 너무 어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삼촌은 건달로 삼촌과 함께 생활하던 부인은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 술집에 종사하는 여자였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제 나이 돌이 막 지났을 때 도저히 삼촌댁에서 생활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던 모양으로 먼 친척의 도움으로 자라던 동네 인근 옥정사라는 절의 비구니 스님이 저를 키워주었다고 한다. 백파 원장의 소회다. 어린 시절 백파 원장은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송파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당대 수경학의 대가(大家)로 성장했다. 그는 남다른 통찰력과 예지력을 가진 인물로 심오한 수경학의 경지를 터득하여 국내 유일무이한 수경학 대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후 “해인사 송파 큰스님이 자식처럼 키워주셨고, 스님께서 수경학과 지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시켜주셔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중 큰스님이 타계하시고 큰스님과 인연이 있던 고마우신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과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하여 큰스님이 가르쳐주신 수경학을 통한 상담업을 부산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백 원장의 소회는 계속되었다. 그 당시 속칭 ‘총각도사’라는 소문이 부산지역은 물론 전국에 자자했고, 백 원장을 만나려면 3~4일은 걸려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정도로 이름이 났다. 심지어 백 원장의 상담소 주위에 조그마한 여인숙과 여관이 있었는데 그에게 상담을 받기 위해 손님들이 기다리는 기간에는 주위 숙박업소들이 방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국가 수뇌부의 높은 분들은 물론, 지금은 굴지의 재벌이 된 많은 기업의 창업 회장들의 운명을 상담해 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도 저는 절에서만 자라서 돈의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형제 하나 없는 단신으로 생활해왔기 때문에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으며 살아왔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왜 돈과 세상 물정을 모르고 오로지 상담과 수경학 공부에만 집중했는지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그는 서민부터 국가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접해왔다. 특히 60년대 우리나라 기업들이 태동하던 시절 기업인들과 인맥을 이어오면서 우리나라 산업계 발전은 물론 지리학을 통한 도로, 도시개발 등 국가 기반시설 기획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 당시는 산업발전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기업집단을 ‘그룹’이라는 말로 부르지도 않았고, 지금은 누구나 아는 세계적인 기업들도 당시엔 이름조차 생소한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기업들이 사업상 새로운 성장을 시작할 때 또 사업전략을 수립할 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이 형성되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백파 원장은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으로서 정계 수뇌부와 국내 굴지의 그룹 총수들의 곁에서 도움을 주며, 국운은 물론 사업 방향과 인재 등용 등 중요한 결정에서 상담활동을 해왔다.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의 저서와 정태수 한보그룹 전 회장의 증언에서도 백파 선생이 언급된 바 있기도 하다. 백파 선생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財界(재계)에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 한보 정태수 회장, 럭키 구본은 회장, 두산 박용성 회장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인사와 교류했다. 오해와 억울함으로 굴곡진 세월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백파 원장은 어처구니없게 구설수에 휘말리고, 불필요한 고생까지 하게 되는 굴곡을 겪게 된 일도 있다. “지금도 제게 피해를 줬던 얌체 같은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정말 치를 떨 정도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게 많이 당하고 금전적인 손실도 많았어요. 백 원장은 말한다. 예를 들어볼까요? 제 상담객 중에는 사업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납품, 사업 인허가 등 여러 가지 애로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돈만 밝히는 얌체 같은 정치인들은 저를 통해 접근해 애로사항을 해결하겠다고 장담하고 정치후원금을 원했고, 저는 순진하게 남을 도울 수 있다는 마음에 그 말을 믿고 상담객에게 정치후원금을 받아 정치인에게 전달하면 그 뒤로 정치인은 나 몰라라 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일이 처리되지 않으니 상담객은 나를 사기로 고소합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정치인에게 경찰이 전화하면 정치인들은 그런 일 없다고 발뺌하여 나만 억울하게 당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검사, 경찰 등 사법기관에서 편파적으로 저를 처벌하여 억울했던 울분의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백파 원장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기가 찰 노릇이지만 일개 개인이 힘을 가진 고위공직자를 당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모든 누명을 백파 원장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무조건 전과가 있다 하여 전후 충분한 조사 없이 백 원장에게 벌을 주기도 했고, 심지어 조사관은 백 원장의 말은 듣지도 않고 고위직의 말만 믿고 사건을 처리하기도 했다. 백파 원장은 금전적인 이익만을 챙긴 고위직 대신 자신이 죄를 뒤집어쓰고, 이후 자신을 언제 보았냐는 듯 하는 그들을 보며 사회의 비정함과 비열함을 느꼈다고 한다. 배신과 모함으로 얼룩진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오늘을 버티어 왔다. 봉사와 나눔의 대부(代父) 그러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수경학의 대가인 백파 원장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여러 가지 기부활동 외에도 ‘희망과 용기를 주는 밥차’ 활동, 지역 봉사활동, 나눔활동을 통해 사회 공공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을 속인 적이 없고, 단 십원도 남에게 손해를 끼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인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범법자 취급을 받으며 재산까지 다 빼앗긴 것이 지금도 말할 수 없이 억울합니다. 정치인의 모략에 빠져 전과가 생겼고, 또 전과가 있다 하여 이후 사건에서도 일방적으로 누명을 쓴 것이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억울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남을 속이지 않고 선하게 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기 때문에 앞으로 더 베풀고 나누며 살려고 합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상담을 받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분들은, 망설이지 마시고 방문해 주시면 성심성의껏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똑같은 상담을 정성껏 진행하더라도 형편이 어려우신 분들께는 절대 사례금도 받지 않고 언제든 무료로 상담해드리고 있습니다. 제 나이 팔십이 넘고 보니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주위 여러분들을 최대한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백파 원장의 ‘사랑과 정’이 담긴 뜻이다. 백파 원장의 선견지명의 카운셀링은 그의 관록(貫祿)과 통찰력이 더해져 상담자들에게 ‘희망’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파 원장은 지금도 상담이 맞지 않을 경우 일절 상담료를 받지 않는다. 백파 선생은 오직 누굴 도우면 도왔지 피해나 주고 신세 지지는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만일 제가 돈을 벌자는 마음을 먹었다면 재벌 회장쯤 되었을 것입니다만 그런 미련은 없고 그저 그동안 잘 먹고 잘 살고 ‘지금도 늘 누굴 무엇을 도와드릴까’만 생각한다는 원장. 그는 굴곡진 인생에서 배운 ‘지혜와 통찰력으로 사회에 봉사한다’는 신념으로 상담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세종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 한다는 백파 원장. ‘봉사와 나눔의 대부(代父)’ 백파 원장의 향후가 기대된다.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
  • 영화보다 더 뜨겁게 살다 간 ‘불멸의 여배우’

    영화보다 더 뜨겁게 살다 간 ‘불멸의 여배우’

    한국영화 수백편 출연·제작·연출 남편 신상옥 감독과 78년 납북 86년 망명 후 떠돌다 99년 귀국불멸의 여배우 최은희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순간들로 수놓았던 삶을 등졌다. 92세.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16일 오후 병원에 신장 투석을 받으러 갔다가 임종했다. 고인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대표 여배우로 군림하면서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입양 등 드라마틱한 생애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동시에 그의 삶은 납북과 탈출, 망명 등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압축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했다.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고인은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알렸다. 개성 있는 외모와 직관적인 연기력으로 그는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랐다. 1950~1960년대에는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원조 트로이카’로 불리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당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며 그의 삶은 큰 전환점을 맞는다. “우리 평생, 영화를 같이 합시다”란 신 감독의 거듭된 프러포즈를 받고 서울 을지로의 한 허름한 여인숙에서 1954년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의 연을 맺은 뒤 서로의 그림자처럼 동행한 부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고인은 신 감독과 찍은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편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로 자리했다. 고인은 배우이기도 했지만 국내 세 번째 여성 감독으로도 활약하며 여성들에게 척박한 영화계 환경을 새롭게 일궜다. 1965년 ‘민며느리’를 시작으로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이자 배우로 참여했던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하지만 23년간 이어진 두 사람의 협업은 1976년 이혼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뒤흔든 납북 사건으로 이들은 다시 극적으로 재회한다. 신 감독과 이혼한 뒤 자신이 운영하던 안양영화예술학교의 해외 자본 유치차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던 최씨는 홍콩 섬 해변에서 북한으로 납치됐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됐다. 두 사람은 1983년 김정일로부터 초대받은 연회에서 다시 조우했다. 북한에서 이들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탈출기’, ‘심청전’ 등 17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과거의 전성기를 재현했다. 북한에서 만든 ‘소금’으로 고인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헝가리의 한 성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고인은 2006년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내고 건강 악화로 오래 투병했다. 최근까지는 일주일에 세 차례 신장 투석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12호실)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것은 첫 무대의 환희, 그리고 새로운 연기에 대한 꿈이었다.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첫 무대의 낯섦과 두려움, 떨림과 환희, 관객들의 숨소리, 뜨거운 눈물과 갈채를 잊지 못해요. 연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받아들이며 모든 이들의 인생이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걸 배웠죠. 더 늙기 전에, 풀기가 남아 있을 때 다시 한번 연기하고 싶어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최은희 별세, 신상옥 감독 곁으로…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삶

    최은희 별세, 신상옥 감독 곁으로…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삶

    배우 최은희씨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92세.최은희씨의 가족은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 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 ‘마음의 고향’(194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등으로 김지미, 엄앵란 등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오른 최은희씨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거장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최은희씨는 1954년 결혼했다.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이후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이후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최은희씨는 1978년 1월 혼자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다. 그리고 신상옥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믿지 못할 재회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북한 당국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최은희씨는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 영화제 수상 기록이다.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신임을 얻은 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한다. 이 때 기회를 틈타 미국 대사관에 진입,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 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영면하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 투석을 받아왔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 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12호실 이전 예정)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최은희 별세, 향년 92세..신상옥 결혼부터 北납치까지 ‘영화같은 삶’

    최은희 별세, 향년 92세..신상옥 결혼부터 北납치까지 ‘영화같은 삶’

    배우 최은희(92)가 지병으로 별세했다.고인의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16일 “어머니가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랐고,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올랐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그는 1954년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고인은 신 감독과 찍은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 편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신 감독과 이혼한 최씨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된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신 감독과 최씨는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귀국했다.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 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이날 오후 6시 서울성모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입관은 오는 18일 오후 3시 이뤄질 예정이다. 발인은 19일 이뤄지며, 장지는 안성천주교 공원묘지로 결정됐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야구공으로 친구 맺은 창원·타이중

    야구공으로 친구 맺은 창원·타이중

    관광 홍보대사 위촉, 관광객 유치… 안상수·린쟈룽 시장 깜짝 시구11일 저녁 6시 20분쯤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야구장. 홈팀 NC 다이노스와 원정팀 KT 위즈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 두 명의 시구자가 다이노스의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마운드에 올랐다. 시구자가 두 명인 경우는 이례적이다. 주인공은 안상수 창원시장과 린쟈룽 대만 타이중시장이었다. 두 시장의 시구는 경기에 앞서 낮에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창원시와 타이중시의 국제우호도시 교류협정서 체결’ 축하 행사의 한 부분이었다. 두 도시가 특이하게도 야구장에서 우호도시 협정을 체결한 것은 왕웨이중(26)이라는 대만 야구선수 덕분이다.올해부터 다이노스에서 뛰게 된 왕웨이중은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첫 대만인 선수로 대만 국민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류현진 선수 등에게 관심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왕웨이중은 잘생긴 외모에 빼어난 피칭으로 한국인 팬들도 사로잡고 있다. 그는 타이중시에 있는 대만체육운동대학 출신이어서 타이중시가 제2의 고향인 셈이다. 타이중시는 대만 중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274만명, 면적은 2215㎢이다. 미국의 글로벌 기업인 IBM으로부터 글로벌 스마트도시로 선정된 대만 제2의 도시다. 두 도시는 창원 출신 국회의원들이 지난해 타이중시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교류·협력에 나섰고, 마침 다이노스가 왕웨이중을 영입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우호도시 협정 체결은 급물살을 탔다. 결국 두 도시는 왕웨이중이 홈 구장에서 선발로 등판한 이날에 맞춰 마산야구장에서 교류협정서 체결 행사를 가진 것이다. 안 시장은 “타이중시와의 협약 체결에 따라 대만 관광객 유치에도 탄력을 받게 됐다”며 “특히 왕웨이중 선수를 활용한 관광 상품 개발을 통해 스포츠와 관광도시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대만 현지에서 창원시의 인지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린 시장 등 타이중시 방문단 14명은 지난 10일 2박 3일 일정으로 창원을 방문해 진해군항제 등을 관광하고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열릴 창원국제사격장을 이날 오전 견학했다. 그보다 앞서 창원시는 지난 5일 시청에서 다이노스 황순현 구단 대표이사와 에어부산 한태근 대표이사 등과 함께 대만 관광객 창원 유치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업무협약에 따라 창원시는 왕웨이중 선수를 창원 관광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창원시는 곧 대만 현지 여행사를 초청해 야구경기 관람과 창원지역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팸투어를 준비하고 있다. 대만 현지에서 열리는 관광 관련 박람회에도 참석해 창원 관광을 알릴 계획이다. 다이노스 구단은 야구장을 찾는 대만 단체 관광객에게 그라운드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고, 전광판에 야구장 방문을 환영한다는 문구를 내보내는 등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다. 에어부산은 회사 홈페이지에 응원댓글을 남기는 대만인을 대상으로 추첨을 해 창원 방문 항공권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이벤트로 관광객 유치를 지원한다. 창원시 관광과 관계자는 “대만인 야구선수 한 명이 대한민국과 대만 사이 훈풍을 불러왔다”면서 “왕웨이중 선수가 다이노스에 입단한 뒤 마산야구장에 대만 관광객 관중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탈북 기자의 평양공연 관전평... ‘서현, 노래 너무 못 불러’ 무슨 뜻?

    탈북 기자의 평양공연 관전평... ‘서현, 노래 너무 못 불러’ 무슨 뜻?

    탈북민 출신 동아일보 기자가 5일 방송된 남측 예술단 ‘봄이 온다’ 공연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주성하 기자는 이날 페이스북에 방북 예술단의 평양공연과 관련해 “발전을 위해서”라며 몇 가지 아쉬웠던 점도 지적했다. 주 기자는 레드벨벳 공연을 두고 “동작 좀 맞추는 정도는 북한에서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다. 북한은 무려 10만명이 일사불란하게 율동을 맞추는 나라다. 고작 넷이 저 정도 산만한 동작으론 명함도 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불러줘서 고마웠다”고 했던 최진희의 ‘뒤늦은 후회’에 대해서는 “역시 원곡이 최고”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 곡 ‘푸른 버드나무’를 왜 하필 서현이 불렀냐”면서 “저건 북한 최고 가수의 노래기 때문에 북한 여성 절반이 서현보다 더 잘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 평양을 찾았던 남측 예술단과 한국 대중가요에 얽힌 추억을 회상했다. 그가 북한에서 본 첫 ‘남측 예술’은 1985년 9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행사’에서 연주된 전통 가야금과 판소리였다. 북한이 1960년대부터 판소리를 금지했기 때문에 어린 그에겐 처음 접한 음악이 낯설고 지루했다. 주 기자는 그때부터 “예술은 북쪽이 훨씬 앞섰다”는 북한의 선전을 확실히 믿었다고 한다.다시 남측 가요를 들은 건 약 10년 뒤 겨울 평양행 열차에서였다. 전력난 때문에 몇백㎞를 가는 데 일주일씩 걸리던 때라 사람들이 지쳐있던 중 한 청년이 ‘홀로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사람들은 연신 ‘재청’했고, 주 기자는 전율을 느꼈다. 그 노래를 2005년 8월 조용필이 평양 단독 콘서트에서 불렀다. 주 기자는 “조용필이 함께 부르자고 했을 때 객석의 7000여명 평양 시민 중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다. 하지만 누가 간 크게 호응한단 말인가. 카메라에 포착된 얼굴들은 감동으로 떨렸다”고 했다. 주 기자는 평양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 평가했다. 약 20년간 지속된 문화교류 때문이다. 주 기자가 만난 한 탈북 청년은 2002년 평양을 찾은 윤도현밴드의 록 버전 아리랑을 듣고 “처량한 줄 알았던 아리랑이 저렇게 신날 수 있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한민족 특유의 ‘음주가무’ DNA가 어딜 가겠는가”라며 “평양의 예술혼은 억눌려 있었을 뿐이다. 얼어붙은 가슴을 깨워주는 이 봄이 좋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시론] 노래의 공유, 시각의 공유/윤중강 음악평론가·연출가

    [시론] 노래의 공유, 시각의 공유/윤중강 음악평론가·연출가

    다행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남북 합동공연이 잘 끝나서 참 다행이다.남측의 공연단이 그간 평양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했지만 늘 환대를 받은 건 아니다. 1985년 9월 고향방문단과 함께 남측 예술단이 평양에서 공연을 했을 때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원로 가수 김정구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열창했다. 남쪽에선 ‘눈물 젖은 두만강’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연결시킨다. 북쪽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과 북한 주민의 가난한 실상을 강조한 라디오 프로그램 ‘김삿갓 북한 방랑기’ 방송이 시작될 때면 늘 이 노래가 나왔다. 입장을 바꿔 북측에서 남측으로 내려와 공연하면서 우리(대한민국)를 자극하는 노래를 불렀으면 어땠을까. 우리도 상대의 무지와 무례에 격분했으리라. 희한하다. 노래란 게 그렇다. 같은 노래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노래의 의미가 크게 산다. 이번 평양에선 강산에가 ‘라구요’를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김정구의 노래에서 “두만강 푸른 물”을 가져왔으나 실향민의 부모를 등장시켜 통일을 노래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공연에 강산에가 참여한 건 참 다행이다. 그의 노래 중 ‘명태’가 있다. ‘명천 사는 태서방’이 등장하고, ‘함경도 사투리’로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라구요’에 이어 ‘넌 할 수 있어’도 불렀다. 강산에가 ‘선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전해진 것 같다. 강산에는 노래했다. “세상이 너를 무릎 꿇게 하여도 당당히 네 꿈을 펼쳐 보여줘.” 우리 민족이 남북을 떠나 모두 ‘굴하지 않는 보석 같은 마음’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2005년 8월 조용필은 평양에서 ‘홀로 아리랑’을 불렀다. 다른 가수의 노래를 절대 안 부르기로 유명한 ‘가왕’이지만 북측의 요구에 이 노래를 불렀고 이제는 남북이 모두 부르는 대표곡이 됐다. 이번에 최진희가 ‘뒤늦은 후회’를 부른 것도 참 잘한 일이다. 남과 북의 연결고리가 됐을 뿐 아니라 남쪽에서는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장덕의 숨겨진 노래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경험했다.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은 있으니까요.” 다시 들어 보니 이 가사가 마음에 파고든다. 남북은 모두 한반도의 이러한 장기적인 분단에 대해 ‘내 탓’으로 돌리진 않는다. 남북은 각각 상대의 체제로 인해서 분단이 고착화돼 가고 있다며 서로 ‘네 탓’으로 돌렸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남북이 ‘네 탓’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타깝다. 이번 평양 공연에 관한 언론보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국 시간’이란 말이 자꾸 걸린다. 같은 한반도에 사는데 30분의 시차가 있다. 201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북한은 표준시를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변경했다. 노래가 ‘상황’과 ‘해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듯이 ‘표준시’ 또한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도 북한처럼 표준시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1908년 4월 1일 대한제국이 표준시를 처음 시행할 때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했다. 그러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 땅에 맞춘 동경 135도가 됐다. 독립 이후 이승만 정권이 127도로 바꿨으나, 박정희 정권이 1961년 다시 135도로 변경했다. 기대한다. 대한제국 표준시에 의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표준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기대한다. 이번 공연이 한반도의 양쪽이 서로의 시각(視覺)과 시각(時刻)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뜻깊은 첫걸음으로 기록되길 바란다. “우리는 하나”를 표방한 공연이었다. 이젠 남과 북은 서로서로 사안에 따라 사이좋게 한발씩 물러나거나, 한발씩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남북 교류가 여러 장르를 통해서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남북은 이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숨을 쉬는 것에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설 거다.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는” 기쁨을 경험하게 되길 바란다. 다행을 넘어 행복을 말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행복하다’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글을 하루빨리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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