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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변화에 탈바꿈한 이산가족 상봉

    2015년 10월 이후 2년 10개월 만에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26일 작별상봉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이번 상봉 때 이산가족들은 가족끼리만 식사하는 시간을 따로 갖는 등 이전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났다. 이전 정부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달라진 남북관계가 이산가족 상봉행사에도 반영된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에서도 명맥을 유지했으나 지금과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특히 납북자·국군포로 상봉 문제로 남북이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2007년 제8차 남북 적십자회담 때는 남측 언론이 ‘납북자·국군포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북측이 “이런 식으로 하면 회담 진행이 어렵다”며 우리 측 대표단을 압박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금강산 현지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취재하던 우리 언론의 방송 테이프에 ‘납북자’, ‘나포’ 등의 표현이 들었다는 이유로 방송 송출을 중단시키고 개별 상봉을 7시간 동안 지연시킨 일도 있었다. 2005년에는 상봉행사를 지원하는 북측 보장성원(진행요원)이 상봉장에서 남측 기자의 취재수첩을 빼앗아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비롯한 특수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테이블에는 북측 보장성원들이 배치돼 대화에 관여한 일도 있었고, 북측 이산가족이 각종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나와 체제 선전을 해 남측 가족을 아연실색하게 하는 일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런 장면이 줄었다. 이전보다 정치색이 상당 부분 배제된 게 특징이다. 북측은 이번에 고령의 이산가족들을 배려해 동선을 최소화하는 등 유연성을 발휘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탈바꿈한 셈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에 시작됐다.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란 이름으로 남과 북의 이산가족 각각 50명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다. 이후 남북은 1989년 2차, 1992년 3차 고향방문단 협의를 시도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활기를 띤 것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부터다. 초기 1~3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서울과 평양에서 교환방문 형식으로 이뤄졌으며 4차 때부터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자리 잡았다. 남북은 2005년 8월 15일 광복절을 계기로 화상상봉이란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하기도 했다. 남측은 서울을 비롯한 7개 지역, 북측은 평양의 특정 장소를 지정해 화상으로 이산가족들을 만나게 했다. 눈앞에 있으나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 안타까움에 이산가족들은 더 몸서리쳤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거주지와 가까운 상봉장에서 북측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대면상봉처럼 만나서 정을 나누지 못하다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나마 화상상봉은 남북관계 경색으로 2007년 이후 중단됐다.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도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현정 기자 hjlee@soul.co.kr
  • ‘인종학살’ 로힝야 1년...“살인·성폭력 뒤 남은 건 무관심뿐”

    ‘인종학살’ 로힝야 1년...“살인·성폭력 뒤 남은 건 무관심뿐”

    2017년 8월 25일 새벽 1시쯤. 무장한 괴한 수백명이 미얀마 서부 라타인주의 경찰초소와 군기지를 덮쳤다. 이 괴한 부대의 정체는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핍박을 받으며 살아온 로힝야족을 돕겠다며 나선 반군단체였다. 이날 군경 12명이 살해됐다. 반군단체의 돌발 행동이었지만, 불똥은 미얀마 로힝야 민간인에게 튀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얀마군은 로힝야족 민간인을 학살했고 이들은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방화, 성폭행, 고문 등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된 로힝야족은 70만명이다.로힝야 사태 1주년을 맞은 24일 독일, 캐나다, 아일랜드 등 세계 각국에서는 이들을 기억하고 연대하는 행사 “Rohingya Genocide Remembrance Day(로힝야 학살 연대의 날)”가 열렸다. 한국 시민단체들도 이날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주한 미얀마 대사관에 로힝야 난민 사태 책임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제출했다. 참여연대,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공익법센터 어필 등 32개 시민단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인정하고, 이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협조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1년 전 로힝야 학살로 약 2만 5000명의 민간인이 집단살해, 강간, 구타, 재산 약탈을 당했다”면서 “그럼에도 미얀마 정부는 여전히 이를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한다”고 비판했다.로힝야 난민 캠프를 오가며 난민들을 인터뷰한 김기남 인권 변호사는 이날 발언에서 “로힝야 난민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과정에서 군인에게 끌려다니며 수차례 강간을 당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군인이 칼로 목을 따버린 이야기도 들려왔다”고 눈물을 훔쳤다. 김 변호사는 “과거 한국 국내의 잔혹한 일에서도 국제 사회의 개입이 큰 도움이 됐듯 우리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또한 단순히 다른 나라의 누군가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잃은 사람들을 인식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로힝야 사태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미얀마 정부에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잇따랐다. 유엔난민기구와 국제 엠네스티 등은 이들의 인권문제를 들어 미얀마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특히 미얀마의 국가자문을 맡고 있는 인권운동가 아웅산 수치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박이 이어졌다. 지난 22일 영국 에든버러시는 아웅산 수치에게 2005년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로로 수여한 에든버러 명예시민권을 박탈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도 2012년 수여한 엘리 위젤 상을 철회했다. 지난해에는 영국 옥스퍼드시와 아일랜드 더블린시가 각각 명예 시민권을 박탈했다. 아웅산 수치는 우리나라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해 만든 인권상 수상자이자 광주 명예시민이다.아웅산 수치는 지난 21일 싱가포르 방문 중 진행한 강연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귀환자들은 방글라데시에서 보내줘야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국경에서 그들을 환영할 수 있을 뿐”이라면서 “방글라데시는 난민 송환 절차를 언제까지 마무리할지에 대해서도 시급히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발언은 유혈사태를 피해 피신한 로힝야족 난민의 송환의 책임이 방글라데시에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한편 이날 오후 6시 서울시 비영리단체지원센터에서는 로힝야 학살 1주기 추모행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열린다. 이 행사에서는 로힝야 난민 다큐, 현장 사진전, 전문가들의 좌담회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황무지 개간권·을사늑약 부당성 폭로… 항일의 선봉 ‘우뚝’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황무지 개간권·을사늑약 부당성 폭로… 항일의 선봉 ‘우뚝’

    1904년 7월 조선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신문을 발간하자마자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켰고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도 전국에 알렸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사실을 타전해 일본의 강압적 침략 의도를 세계에 폭로했다. 베델은 한반도 항일 투쟁에 있어 가장 믿음직한 지원군이었다.●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을 전후해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야욕을 본격화했다. 대장성(현 재무성) 관리를 지낸 나가모리 도키치로라는 일본인을 앞세워 “50년간 전국 황무지의 개간권을 위임하라”고 요구했다. 조선 땅의 개간·정리·척식(개척) 등 모든 권리를 광범위하게 이전하는 것으로 ‘나가모리 프로젝트’로도 불렸다. 나가모리 프로젝트는 다수의 일본인을 조선으로 이주시켜 한반도를 일본의 원료·식량 공급 기지로 삼으려는 의도로 조선 침략의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1903년 12월 조선에 온 나가모리는 이듬해 3월부터 궁내부 대신 민병석과 교섭에 나섰다. 협상이 본격화되자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이런 ‘밀실야합’은 6월이 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소식에 여론이 들끓었다. 이미 국권의 상당 부분을 빼앗겨 울분에 차 있던 국민들은 전 국토의 3분의1에 달하는 황무지를 대가도 없이 가져가려는 일제의 음모를 묵과할 수 없었다. 신보가 창간된 1904년 7월은 이런 일본의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나 국민의 반발이 가장 거셀 때였다. 베델은 이런 시류를 정확히 읽고 영문판 KDN을 통해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알렸다. 당시 주한 영국공사였던 J N 조던(1852~1925)이 본국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베델은 KDN 7월 22일자에 윤치호가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한 논설을 독자 투고 형태로 실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 비판에 나섰다. 친일 성향의 ‘재팬 메일’과 ‘고베 헤럴드’가 KDN의 8월 4일자 논설에 대해 “(KDN이) 유해한 글을 게재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일본의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KDN이) 한국과 일본을 이간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KDN은 9월 1~6일 5회에 걸쳐 반박 논설을 내보내며 반일 태도를 분명히 했다. 항일단체 보안회도 일제의 음모에 각종 집회를 열며 계몽운동에 나섰다. 결국 일본은 조선인들의 저항이 커지자 8월 10일 개간권 요구를 공식 철회했다. 훗날 나가모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황무지 개간권 요구가 좌절된 이유는 KDN과 (KDN의) 기사를 받아 써 이를 공론화한 영국인 소유 신문사들 때문이었다”고 밝혔다.●을사늑약 부당성·헤이그 특사 파견 보도 일본은 러일전쟁이 마무리된 직후인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자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신보는 일제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려 나갔다.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스스로 도운 ‘다섯 매국노’(을사오적)인 이완용(학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박제순(외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은 신보의 지속적인 비판 대상이 됐다. 신보는 11월 21일자에서 “을사늑약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체결한 것이며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1864∼1921)을 체포하고 이를 게재한 황성신문(1898~1910)을 정간시킨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했다. 11월 27일자에서는 호외(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내는 신문)를 통해 을사늑약의 진상을 알리고 시일야방성대곡도 영어와 한문으로 번역해 게재했다. 신보는 항일운동 보도에 어느 매체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신보는 조선인에게 가장 신뢰받는 언론으로 성장하게 됐다. 베델은 2년 뒤 ‘헤이그 특사 파견’도 집요하게 취재해 알렸다.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한반도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고종은 러시아와 손잡고 운명을 건 저항에 나서는데, 이것이 헤이그 특사 파견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 명의 특사 이상설(1870~1917)과 이준(1859~1907), 이위종(1887~?)을 극비리에 파견했다. 이들은 일제의 방해와 러시아의 변심으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도 각국 취재기자들을 상대로 간담회를 열어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등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입수한 베델은 이를 그대로 신문에 실었다. 곧바로 영국 등 세계 주요매체들이 이를 전재했다. 신보 보도에 당황한 일본은 결국 헤이그 특사 사건을 문제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아들인 순종을 왕위에 올렸다.●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KDN의 영향력 베델이 신보와 KDN을 창간한 20세기 초에는 이미 중국과 일본에 여러 영자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규모가 작아 외국에 특파원이나 통신원을 둘 형편이 못 됐다. 이 때문에 영자지들은 외국 신문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해외 소식을 전했는데, 이를 통해 영어신문들은 국가를 초월한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조선의 유일한 영어 일간지였던 KDN의 기사 역시 동아시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의 매체들이 인용 보도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 독일 등 다른 열강보다 힘이 약해 국제 여론에 매우 민감했다. 첫 식민지로 삼으려던 조선에서 항일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 KDN의 기사는 일본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나의 수백 마디 말보다도 신보의 신문기사 한 줄이 더 힘이 세다”고 탄식했다. 일제는 신보와 KDN에 대응하고자 1906년 영국인 J W 하지가 운영하던 주간지 ‘서울프레스’를 인수해 일간지로 바꿔 여론전에 나섰다. 하지만 서울프레스는 ‘통감부 기관지’라는 오명을 쓴터라 신보와 KDN의 영향력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는 “신보가 한·일 두 나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일본의 대(對)조선 정책도 강하게 반대해 양국 모두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런던에서 만난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당시 할아버지(베델)의 행동은 일본은 물론 고향인 영국에서도 전혀 이해받지 못했다. 열강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면서 “아무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할머니(메리 모드 게일)도 이 점을 평생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서울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산상봉 열리는 금강산도 태풍 영향권…文 “필요시 장소·일정 재검토”

    24~26일 이산가족 상봉행사 2차 만남이 열리는 금강산 지역이 태풍 ‘솔릭’의 영향권에 들 수 있다는 예보가 나오면서 고령자가 많은 이산가족의 안전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정부는 일정대로 상봉을 진행할 계획이지만 태풍 상황에 따라 일정 조정의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2차 방북단 81가족 326명은 65년 만에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는 설렘과 태풍에 대한 걱정을 안고 23일 강원 속초 한화리조트에 모였다. 당초 83가족이 방북할 예정이었지만 두 가족이 건강 문제로 막판에 불참하게 됐다. 태풍으로 가족당 1개의 우산을 지급했지만 대부분이 이미 우산을 챙겨왔다. 북측에 있는 삼촌을 만날 전민근(57)씨는 “내일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태풍이 오면 미뤄질 수 있다는데 순서대로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규춘(65)씨도 “(태풍이 오면) 하루 미뤄질 수도 있다는데, 2박 3일 통째로 미뤄지는 것인지 1박 2일이 되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상봉 일정에 차질이 없기를 바랐다. 북측 여동생을 만날 최고령자 강정옥(100)씨도 제주도에서 전날 항공편으로 상경했다. 이날은 대부분 항공편이 결항이었다. 17세에 제주도 고향을 떠나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생 강정화(85)씨를 만나는 강 할머니는 제주도 사투리로 “오라(오려무나)! 집에 가게”라고 되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연로하신 분이 많으니 이분들의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 달라. 필요하다면 상봉 장소와 일정, 조건 등을 신속하게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번 방북단 중 90세 이상 노인만 10명이고 100세 노인도 포함돼 있다. 총 326명 가운데 82명이 80세 이상 고령자다. 특히 숙소에서 온정각이나 이산가족면회소까지는 도보로 5분 이상을 움직여야 한다. 태풍 북상으로 현지 소방인력은 8명에서 16명으로 늘었다. 금강산 숙소와 상봉장 등이 고층건물이고 시설이 낡아 구급차 1대와 고가사다리차 1대도 추가로 배치됐다. 소방헬기 1대는 강원 양양에서 대기한다. 이산가족들은 24일 오전 9시쯤 속초에서 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출발해 오후 1시쯤 금강산 온정각에 도착하고 오후 3시에 첫 단체상봉을 한다. 속초 공동취재단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사설]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작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남측 이산가족 89명과 동반가족 등 197명은 금강산에서 열린 2박3일간의 상봉행사를 마친 뒤 65년 만에 만난 가족을 뒤로하고 어제 남쪽으로 귀환했다. 상봉자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고령인 관계로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북측 이산가족 83명이 남쪽의 가족들과 만나는 2차 상봉은 24∼26일 금강산에서 1차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산가족들이 고령화되면서 점점 부부, 형제자매 상봉이 줄고,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의 배우자나 자녀를 만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번 상봉 행사 땐 부부 상봉은 한 쌍도 없고, 부모·자녀 간 직계 상봉도 일곱 가족에 불과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은 헤어진 지 65년 된다. 최연소 이산가족 나이가 65세인 셈이다. 지난 7월 말 현재 이산가족 등록자는 13만 2603명인데, 이 중 5만 6862명만 생존해 있다. 생존자 중 70세 이상이 전체의 85%인 4만 8320명에 이른다. 고령자가 많다 보니 최근 5년간 매년 3600여명이 숨지고, 지난달에만 316명의 이산가족이 북측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산가족 상봉이 상시화돼야 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연간 몇 차례 정례적 상봉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산가족 생사 확인을 거쳐 생사와 주소가 확인되면 이산가족들이 서신, 전화, 화상 등을 통해 언제든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후 상호 방문, 성묘·고향 방북, 상설면회소 설치 등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남북은 이산가족의 응어리를 외면하지 말고 근본적인 상봉 대책에 나서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다음달 평양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에서 ‘민족분단으로 발생한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는 판문점 선언을 기억하고 상봉 정례화에 합의하기를 기대한다.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유럽 음식에 새겨진 이슬람의 흔적들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유럽 음식에 새겨진 이슬람의 흔적들

    서양 음식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언제였을까. 단골로 언급되는 순간은 1492년, 바로 신대륙이 발견된 해다. 미국의 역사학자 알프레드 크로즈비는 당시 벌어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 인적, 물적 교류를 두고 ‘콜럼버스의 교환’이라 이름 붙였다. 말이 좋아 교환이지 실제로는 일방적인 수탈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유럽 세계와 신대륙의 문화적 충돌 이후 세계 식문화 지형도는 크게 변했다. 유럽, 그러니까 구대륙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토마토, 감자, 옥수수, 고추 등 신대륙의 작물이 유입됐고 이들은 이내 유럽인의 식탁을 점령했다.‘콜럼버스의 교환’은 문화 간 충돌이 대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식문화의 관점에서만 보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후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작물인 감자와 옥수수로 인해 유럽은 만성적 기근을 버틸 수 있는 길이 열렸고, 고추나 토마토 같은 작물은 식단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피멘톤이라 불리는 고추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재료 중 하나며 남미가 고향인 토마토는 비록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먹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신대륙 발견 말고도 식문화의 극적인 순간은 또 있었다. 두 문화 간의 뿌리 깊은 반목의 역사로 인해 자주 간과되는,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충돌이다. 기독교 문화권으로 대표되는 유럽 음식의 근원을 찾다 보면 많은 부분이 이슬람 식문화와 연관이 있음을 종종 목도하게 된다. 유럽의 전통 음식 중 튀기는 요리, 달콤한 디저트, 증류한 술, 견과류와 말린 과일을 이용한 음식 그리고 형형색색 음식에 물을 들여 시각적인 효과를 주는 음식 등은 대부분 이슬람 문화에 빚을 지고 있다. 유럽에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가장 깊게 새겨져 있는 곳은 이베리아반도와 이탈리아의 남쪽 섬 시칠리아다. 시칠리아는 약 200년, 이베리아반도는 무려 780년 동안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두 지역이었을까. 이유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두 지역은 유럽에서 북아프리카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무슬림들의 안마당이었던 북아프리카와 가깝다는 건 쉽게 건너갈 수 있었다는 것과 동시에 기후도 비슷하다는 의미도 된다.한국인이 외국에 정착해 살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김치를 담그는 것이다. 배추와 고추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으면 직접 심고 키워야 한다. 낯선 땅을 점령한 무슬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향의 뜨겁고 건조한 기후와 비슷한 그곳에 그들이 먹는 작물을 심었다. 대표적인 것이 레몬과 오렌지, 가지, 아몬드, 대추야자, 쌀 등이다. 이베리아반도와 시칠리아 두 지역의 식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이다. 스페인 발렌시아가 쌀로 만든 요리인 파에야와 오렌지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가 레몬과 아몬드로 유명한 건 이 때문이다. 이슬람 문화는 두 지역의 식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숨이 멎을 정도로 달콤한 디저트 문화는 무슬림이 남겨준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다. 달콤함에서 오는 쾌락을 죄악으로 여기던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 문화에서 달콤함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하나의 목표였다. 음식 역사학자 레이첼 로던은 무슬림을 두고 ‘현세의 쾌락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낙원에서 누릴 기쁨의 예시로 여겼다’고 설명한다. 과일과 벌꿀에서 달콤함을 얻은 기독교인들과 달리 무슬림들은 사탕수수에서 뽑아낸 설탕을 가공해 갖가지 디저트를 만들었다. 단맛에 눈뜬 유럽인들이 훗날 아프리카 노예를 동원해 신대륙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인류가 ‘인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는 걸 당시의 무슬림은 짐작이나 했을까. 무슬림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증류기술이다. 증류는 무슬림들이 선호하는 향수나 의약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됐다. 무슬림의 증류기술을 알게 된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액체를 증류해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데 열정을 다했다.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생명의 물’로 불리는 독한 증류주였다. 지금이야 유흥을 위해 독한 술을 즐기지만 당시에는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진귀한 약이었다. 위스키, 보드카, 테킬라, 코냑 등 오늘날 애주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증류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술을 마시는 걸 율법으로 금한 무슬림의 기술과 연금술사의 황금을 향한 열정이 빚어낸 산물인 셈이다. 이 역시 무슬림들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붉은 벽돌 마을…수제화거리…7080 뚝섬의 추억을 거닐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붉은 벽돌 마을…수제화거리…7080 뚝섬의 추억을 거닐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5회 성수동(서울숲 밤마실) 편이 8월의 셋째 주말인 지난 18일 진행됐다. 절정을 향해 치닫던 여름이 거짓말처럼 선선한 가을로 바뀐 이날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수동에 몰렸다. 정원 초과로 결국 몇 분은 오디오 가이드시스템 없이 해설자의 육성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이날 투어는 집결 장소인 분당선 서울숲역 3번 출구를 출발, 116개의 컨테이너로 조립된 언더스탠드에비뉴를 거쳐 옛 뚝섬경마장을 상징하는 기마상과 갤러리아 포레 주상복합아파트가 보이는 서울숲 바닥분수에서 서울숲 조성 경위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시작했다. 답사단은 성수동의 새 명물로 떠오른 붉은 벽돌마을을 걸어 공씨책방~웅덩이마을~수제화거리~카페거리를 거쳐 서울경찰기마대에서 짧지만 긴 일정을 마무리했다. 해설을 맡은 김은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철저한 사전준비로 서울의 핫플레이스 성수동 투어를 이끌었다. 특히 종착지인 서울경찰기마대에서 마구간을 공개하는 깜짝 선물로 참가자들을 감동시켰다. 설문조사에서 “웅덩이마을이나 붉은 벽돌 마을, 공씨책방, 경찰기마대 같은 예상치 못한 곳을 경험한 소중한 밤마실” 이라는 소감이 쏟아졌다.뚝섬은 섬이 아닌 섬이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만들어진 퇴적평야지대이다. 3개의 하천이 가로지르며 3면을 둘러싸다 보니 마치 섬처럼 보인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도성 밖 동교(東郊) 혹은 살곶이다리 밖 교외라는 뜻에서 전교(箭郊)라고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에 “동쪽에서 흐르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 중랑천이 서쪽에서 흐르는 한강과 합하는 중간에 있으므로 자연히 평야가 형성됐다”고 적혀 있다. 한양의 열 가지 명승지를 노래한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봄이면 살곶이벌을 찾는다는 내용의 ‘전교심방’(箭郊尋訪)이 꼽혔다.동교는 전국에서 사육한 4만~5만 마리의 말 중 ‘서울로 보낸’ 준마만을 키우던 국립목장이자 왕의 사냥터, 군대 사열 장소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에서 성종까지 100년 사이 151번이나 찾았을 정도로 조선 초기 역대 왕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뚝섬의 랜드마크는 단연 살곶이다리(箭串橋)다. 1420년 세종 때 공사에 들어갔으나 1483년 성종 때 완공됐다. 왕은 당시 가장 긴 돌다리에 ‘제반교’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938년 성동교가 개설돼 사용가치를 잃고 방치되기 이전까지 서울에서 아차산 아래 뚝섬, 강 건너 광주를 잇는 교통의 요로였다. 이태원, 홍제원, 보제원과 함께 4대 관용숙소인 전관원(箭串院)이 자리했다. 한양인 듯 한양이 아니고, 섬인 듯 섬이 아닌 뚝섬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시설인 뚝도수원지(수도박물관)로 장소의 관성이 이어졌다. 경기 고양군과 양주군에 속했던 이 지역이 일제강점기 서독도리(성수동1가)와 동독도리(성수동2가)로 서울에 편입된 이후 대변화가 휩쓸고 지나갔다. 이 시기 뚝섬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시설물은 ‘기동차’였다. 1930년 왕십리~뚝섬 간 4.3㎞를 달렸다. 1934년 동대문~왕십리 간 별선을 놓으면서 동대문~뚝섬 구간이 완성됐다. 전성기 총 37대까지 운행된 기동차는 1960년대 중반 폐지될 때까지 뚝섬 주민들의 발이자 채소 수송수단으로 이용됐다.기동차의 진가는 뚝섬유원지용 피서열차로 애용되면서 발휘됐다. 동뚝섬역에서 600m 떨어진 한강가에 유원지와 수영장, 어린이놀이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강수욕과 뱃놀이의 추억은 1986년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사라졌지만 옛 뚝도공립보통학교(경동초등학교) 자리에 뚝섬유원지의 여름경찰서가 있었다. 1960~70년대 여름철이면 하루 10만명, 절정 때는 20만명의 행락객이 몰려들었다. 70척의 놀잇배가 뚝섬유원지를 오갔다. 그 시절 서울의 여름 피서는 뚝섬유원지가 책임졌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초부터 무, 배추, 토마토 등 채소 재배지에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처럼 국가 주도 산업단지가 아니라 도심의 제조업체들이 교통이 편리하고 땅값이 싼 성수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1971년 당시 성수공단에 입지한 제조업체는 모두 671개로 서울 전체의 20%를 넘을 정도였다. 무허가 공해업소에서 쏟아내는 폐수로 인한 수질 악화 등 공해 문제가 발목을 잡으면서 결국 30년을 넘기지 못했다. 도시형 전통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제화, 인쇄, 자동차정비업 중심으로 지역경제가 재편됐다.왜 성수동에 신발업체가 모였을까. 지하철 2호선 라인인 성수역과 화양역 사이에 봉제공장이 많았다. 피혁, 의류, 가방공장이 따라 들어왔다. 봉제산업이 피혁산업과 제화산업으로 연쇄효과를 낳은 셈이다. 1996년부터 2000년 사이 서울에서 설립된 제화업체의 절반이 성수동에 입지한 게 이를 방증한다. 본래 서울의 수제화는 염천교와 명동에서 살롱화라는 이름으로 발달했다. 70년대 후반 명동에만 100개가 넘는 수제화 업체가 있었다. 50년대부터 신발공장이 들어선 염천교는 구두백화점, 신발만물상 수준이었다. 기성화시대로 접어들면서 국내 양대 제조업체인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어가 금호동과 성수동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을 떠났지만 하청업체들은 남았고, 이들이 80년대 성수동으로 모여든 게 성수동 수제화 역사의 시작이다. 성수동은 우리나라 구두제작업체의 중심지가 됐다. 2000년대 중반 구두제작업체의 44.4%, 구두 부분품 및 재단제품 제조업체의 58%가 성동구에 몰렸다. 성수동에 구두제작업체의 86%, 구두 부분품 및 재단제품 제조업체의 70%가 집중된다. 구두뿐 아니라 다양한 패션제품으로 폭이 넓어졌다. 2013년 현재 성동구의 섬유 및 의류제조 업체는 380개, 자동차정비업은 190개, 구두제조 관련 업체는 650개에 6000여명의 종사자가 몰려 있다. 성수동은 명실상부한 수제화의 메카이다. 뚝섬은 1950년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성수동(聖水洞)으로 이름을 바꿨다. 성수동은 성덕정(聖德亭)이라는 왕이 머물던 정자에서 ‘성’(聖) 자를 따고 뚝도수원지에서 ‘수’(水) 자를 딴 합성 지명이다. 지명은 바뀌었지만 뚝섬의 정체성인 목장과 수원지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54년 경마장이 뚝섬으로 옮겨온 것은 말 목장이던 뚝섬이라는 장소의 관성이 살아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1958년 마장동에 우시장이 들어서고 뒤이어 도축장까지 들어와 가죽을 다루는 수제화 집적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게 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현대의 이동수단인 자동차를 수리하는 정비공장들이 대거 성수동에 둥지를 튼 것도 ‘말(馬)의 고향’이라는 600년 이어진 장소의 관성 탓은 아닐까.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여름야행 5=양화진(한강 밤풍경) ●일시: 8월 25일(토) 오후 6~8시 ●집결장소: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남북 관계 좋아지면 남한서도 이산가족 만날 것”

    “남북 관계 좋아지면 남한서도 이산가족 만날 것”

    “1년에 수천명의 이산가족 신청자가 돌아가시고 있어서 이것보다 긴급한 게 없습니다. 이번 상봉 행사는 일회성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2년 10개월 만에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주관한 대한적십자사의 박경서(79) 회장은 21일 북한 외금강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평양에 가려고 한다. 9월 중에 가는 것으로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평양에) 가서 인도주의라는 적십자사 정신에 입각한 협업, 이들(북측) 말로 호상 협력 프로그램이 결정돼서, 그리되면 기자들과 정식으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양을 방문해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 및 상시화, 화상 상봉, 고향 방문단, 전면적 생사 확인뿐 아니라 북한적십자병원 현대화사업 재추진, 북한 주민들을 위한 보건·의료사업 등도 협의할 것으로 보인다. 또 박 회장은 “제가 적십자사 책임을 맡아 이번이 두 번째 방북”이라며 “(통상 금강산 입경에) 3∼5시간 걸린다. 그런데 어제는 전체가 1시간 10분 걸렸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변하는 게 우리 입장에서는 더디겠지만, (북측도) 실은 우리를 위해 노력한다”고 평가했다. 박 회장은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남측 지역에서도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그럼요”라고 답했다. 그는 “대통령 담화 속에서도 금강산 면회소가 언급되지 않았느냐”면서 “그걸 짓는 것과도 연결고리가 있고, 여기(금강산)는 여기대로 하고, 서울 가까운 데서도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해 봐야겠다는 얘기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발전되고 있으니까 그리 알아 달라”고 했다. 또 남북 관계의 진전을 위해 다음달 남북 정상회담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상회담) 메시지가 판문점 선언처럼 나올 거라고 보는데 그렇게 나오면 상황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며 “2019년 1월부터는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 준비 과정에서 가장 큰 우려는 ‘폭염’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거의 1000명이 움직이는데 처음 겪는 지독한 폭염으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 싶었다”며 “하지만 날씨가 도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근무하던 시절과 이후 인권대사로 총 29차례 북한을 방문했으며 1992년에는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났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IS 손아귀에서 탈출한 나디아 무라드, 인권운동가와 약혼

    IS 손아귀에서 탈출한 나디아 무라드, 인권운동가와 약혼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야지디족 출신으로 이슬람 국가(IS) 무장집단의 손아귀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나디아 무라드(25)가 야지디 인권운동가 아비드 샴딘과 약혼한 사실을 공개했다. 무라드는 고향인 코초 마을을 IS 세력이 공격해 여섯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자신은 납치된 4주기를 지낸 지 며칠 만인 20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우리 부족을 위한 투쟁” 때문에 둘이 가까워졌다며 전날 약혼한 사실을 공개하면서 둘이 함께 촬영한 사진들을 공유했다. 피랍 이후 그녀는 여러 차례 사고 팔려 집단 성폭행 등 성적, 신체적으로 유린당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뒤 자신의 사연을 세계인과 함께 한 뒤 2016년 인신매매 생존자의 존엄을 위한 친선대사 1호로 임명됐다. 둘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에 거주하는 샴딘은 “우리 둘다의 삶에 어려운 시간을 견뎌 커다란 싸움을 이겨내고 사랑을 발견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무라드는 “우리 민족을 위한 투쟁이 둘을 한데 묶었고 우리는 이 길을 함께 계속 걷기로 했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이 이들의 약혼 사실을 기뻐했다. 둘이 함께 일하고 있는 미국의 비정부기구(NGO)인 야즈다는 사진 하나을 올리고 “둘이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고 모든 학살 생존자들에게도 밝은 미래가 있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죽음 앞에서 동등…묘지도 도시처럼 설계하다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죽음 앞에서 동등…묘지도 도시처럼 설계하다

    불문학자이자 문학 평론가인 황현산(1945~2018) 선생의 영결식이 열린 건 사흘장의 발인 날 아침이었다. 고려대 교수로 정년 퇴임하셨고 같은 대학 병원에서 투병하셨으니 장소는 고려대병원 장례식장이었다. 기억할 만한 2018년 여름의 태양이 이른 아침부터 새하얗게 내리쬐었다. 평생의 도반 김인환 선생의 조사와 후배 문인, 가족들의 마지막 인사는 빈소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빈소 밖에는 훨씬 많은 조문객이 모여들었다. 행렬이 영정을 따라 3층의 빈소부터 1층까지 걸어 내려와 정문 옆으로 좁게 난 쪽문을 비집고 나가자, 주차장에 운구차가 트렁크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바퀴 달린 카트에 실려 온 관이 매끄럽게 올라탔을 때 선생의 사모님은 기사에게 잠시 문을 닫지 말아 달라 부탁하셨다. “아주까리 꽃 그림자 흔들리는 섬 속에 / 하모니카 안타까운 강남달 시절 / 갈매기 울어 울어 해 지는 선창에 / 모자를 흔들면서 떠나던 사람아.” ‘풍각쟁이’ 최은진(58) 선생의 ‘아주까리 수첩’이 울려퍼졌다. 일제강점기의 시인 조명암이 작사하고 목포 사람 이봉룡이 작곡한 1940년대 노래다. 남도 섬의 헤어짐과 기다림을 그린 이 노래를, 황현산 선생은 그로부터 열흘 전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다. (‘아주까리 수첩’은 선생의 다음 책 ‘전위와 고전’이 수록될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음반 출시를 앞두고 고향이 전남 신안 비금도인 선생께 먼저 들려드렸을 때 “얼마나 예뻐” 하시더니, 사모님이 따로 청하여 이루어진 무대였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고마웠습니다. 모두 선생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가수 최은진 선생의 마이크 소리에 맞춰 모인 이들이 마지막 인사를 드린 그 장면은, 모두에게 아름답게 기억되었으리라 믿는다.노래의 여운은 짧았다. “자, 다음 발인 못 하고 있거든요. 빨리 나가 주세요.” 상조 회사 옷을 입은 아저씨가 뒤를 몰아쳤다. 운구차와 버스는 화장장으로 떠나고, 각자 타고 온 차들이 줄지어 나가고, 사정없는 햇볕 아래서도 남은 자들의 마음은 눅눅하다. “1990년대부터 갑자기 바뀐 거 같아요. 90년대 초반까지는 입원해 있다가도 임종이 임박하면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래서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설계할 때 승강기 구조를 고쳐서 관을 수평으로 운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비좁은 아파트 살던 시절에 부모님 빈소를 마련했는데, 상주도 문상객도 불편하더라고요. 그게 떠올라서 건물 사이에 공간을 많이 비워서 천막을 칠 수 있게 했어요. 거기서 노제도 하곤 하더니, 어떻게 순식간에… 없어졌어요.” 영결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성룡 선생은, 묘지 이야기를 꺼냈다. 스웨덴의 건축가 시구르드 레베렌츠가 조경을 맡은 스톡홀름의 우드랜드 묘지공원(스콕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 이른바 ‘숲의 화장장’부터 시작한다.“시내에서 전철로 갈 수 있어요. 굉장히 넓은 땅인데 전차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정문이 있어요. 들어서면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요. 멀리 언덕 너머에 소나무 숲이 걸려 있고 거대한 십자가 모양 조형물이 눈에 들어와요. 대개는 정면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죠. 하지만 안내자를 따라 오른쪽의 ‘양탄자 깔듯이’ 잔디로 조성한 언덕, 느릅나무 있는 곳으로 갔어요. 원래 있던 숲의 일부를 조정해 인위적으로 만들었음을 드러내는 구간이죠. ‘기억의 작은 숲’을 지나 1㎞ 떨어진 ‘부활 교회’까지 긴 길을 걸었어요. 숲속을 걸으면서 죽음과 대화하는 시간이었죠. 레베렌츠가 쓴 짧은 수필이 하나 있는데, 묘지에 수직 구조물을 바라지 않는다, 수평으로 낮은 비석이 근대 시민에게 어울린다고 썼어요. 소나무가 울창한 숲속에, 그런 묘비들이 햇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반짝이지요.” “스웨덴이 100여년 전에 사회민주주의를 하면서 고민한 제일 중요한 것이 노동자 주거 정책이고 의료, 노숙자, 노인 대책을 열심히 만들었나 봐요. 그중에 하나가 묘지예요.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는 현상은 유럽 어디나 산업혁명 하면서 겪었고 그러다 보니까 묘지가 난개발이었죠. 이 사람들이 고민하면서 여러 논의를 해 나가죠. 인간이 죽음 앞에서 동등하다, 민주주의 가치에 따른 묘지를 만들자는 논의를 하면서 국제 현상 설계 공모를 해요. 지침부터가 대단히 자세했어요.” 1912년에 스톡홀름 시 의회가 소나무가 무성한 채석장을 확보한 다음에 내세운 공모 지침은 자연 풍경을 훼손하지 말 것, 품위 있게 설계할 것, 디테일까지 예술적일 것, 기존 채석장의 돌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독일 묘지를 본뜨려고 했어요. 그런데 공모를 하자마자 1차 대전이 터지니까 독일은 전쟁에 빠져들었죠. 그 바람에 젊은 국내파들이 당선된 거예요.” 스웨덴 사람들이 모델로 삼았던 것은 1907년에 설립된 뮌헨의 숲 묘지였다. 뮌헨 지자체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묘역을 조성하는 대신 도시 외곽의 동서남북 네 군데 묘지를 나누어 숲 묘지를 조성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도시”이자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화해 주는 자연이었다. “군나르 아스플룬드라는 건축가가 건물을 맡고 전체 조경 계획은 레베렌츠라는 사람이 맡아요. 묘지가 완성을 볼 때까지 30~40년이 걸려요. 굉장히 오랜 시간이죠. 아스플룬드하고 레베렌츠가 학교 동창이야. 그런데 두 사람이 약간 달랐어요. 아스플룬드는 성공의 길을 아는데, 레베렌츠는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거야. 이 사람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없고 생각을 글로 남기지도 않았어요. ‘숲의 화장장’도 한동안 아스플룬드가 한 거로 알려졌어요.” 숲의 화장장에서 ‘건물과 풍경이 하나’ 되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레베렌츠의 주도였다. 사업 자체가 워낙 장기화되고 바뀌면서 레베렌츠가 해임되는 일도 있었다. 레베렌츠는 한동안 창문 새시 공장을 운영하면서 다른 공공건축을 해나갔다. 그러나 1940년 아스플룬드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레베렌츠가 마무리 작업을 맡게 된다. 1970년대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한 스톡홀름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레베렌츠의 작업 중 또 하나의 묘지가 1916년에 설계 경기로 당선된, 항구도시 말뫼의 동부 묘지다. “평화롭고 고요한 묘지라면서 좋아들 하지요.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는 도시를 봐요. 스톡홀름의 묘지가 거대한 장묘 단지라면 말뫼 묘지는 도시의 일부 같거든요. 지형에 따라 두 구역으로 구획하고 그 사이 도로변에 방문자센터, 화장장, 기념 교회, 광장, 추념 공간을… 마치 도시처럼 계획했어요. 마지막으로 묘지 입구에 거친 콘크리트로 아주 작은 꽃집(1974년)을 지었어요. 그때 레베렌츠 나이가 89세였어요. 우드랜드나 레베렌츠를 소개하려는 게 아니에요. 결국 우리 문제 말이죠. 일제 때의 묘지 계획 답습하면서, 오히려 그 뒤로 더 나빠졌어요. 우리가 신도시를 계획할 때 묘지를 미리 제대로 숙고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말로는 동방예의지국이니 하면서요. 그래 놓고서 유럽 어디 갔더니 무슨 묘지 멋있더라, 그렇게 감상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닙니다. 도시 계획 자체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봐요. 그랬다면 우리 동네에 대형 화장장, 납골당은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심했을까요. 광화문광장 고치는 문제보다 아파트 단지마다 동네마다, 운구차가 멈췄다 떠날 작은 장소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나.”집에서 관이 나오면, 망자가 살던 마을 어귀에서, 일하던 장터 입구에서도 노제를 하는 것을 불과 20년 전에도 볼 수 있었다. 길바닥에 돗자리 깔고 병풍 치고 꽃상여 걸쳐 놓고서 다시 제를 지냈다. 이웃들은 대개 그 언저리에서 술 한잔으로 먼 길을 배웅한다. 그럴 때 상엿소리를 하거나 풍물을 치거나 살풀이며 종이꽃을 만드는 갖가지 재주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를 잇거나 떼어 주는 일을 맡았다. 이제 그런 일들이 하나하나 예술이 되었다. 그 예술은 우리의 비루한 삶과 죽음 속에서 궂은 기능을 맡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발인장은 주유소를 닮았고 관은 컨베이어벨트처럼 바퀴 위에 실린다. 알지 못하는 301호와 204호 누군가가 십 분 간격으로 기다리는데, 우리는 애틋한 의식의 시간을 나눌 수 없다. “어렸을 때 마을 뒷동산 기슭에 공동묘지가 있었죠. 가면 쭈뼛하죠. 그렇게 죽음이 곁에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배우죠. 동네마다 조금씩 작은 무덤을, 평화롭게 만들면 좋겠지. 무덤을 가까이 못 두면 아파트 단지 어디에 거기 살다가 죽은 가족을 기억할 작은 숲이라도, 나무 몇 그루라도 둘 수는 없는가. 의식을 하려면 장소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냥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왜 마을 뒤에 싫은 묘지를 두었는가, 그걸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다음 세대에 교육할 때, 우리 삶이 정말 좋아지고 정말 민주 사회가 될 거예요.” 황현산 선생의 영결식은 아름다웠다. 비금도 섬 그림자가, 다도해의 물결이 잠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사소하지만, 노래 한 곡절로도 우리는 한결 잘 헤어졌다. 죽으면 다 소용없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나 이 품위는 죽은 사람을 위한 건가, 산 사람을 위한 건가.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 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 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황현산, ‘소금과 죽음’(한겨레신문 2009년 8월 15일자) 기획 수류산방 조성룡 건축가·도시건축 대표 심세중 수류산방 편집장■ 시구르드 레베렌츠(1885~1975)는 스웨덴의 건축가로 원래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군나르 아스플룬드(1885~1940)와 함께 29세이던 1914년에 스톡홀름 남쪽 우드랜드 묘지공원 설계 공모에 당선되었다. 이후 한동안 건축을 멀리하다가 말년에 다시 설계를 맡았다. 레베렌츠가 설계한 묘지와 교회, 시립 극장과 노동자 주택 등은 대부분이 공모를 통한 공공 작업이었다. 오로지 건축 현장에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려고 한 드문 근대 건축가이자 조경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1970~80년대에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 유산 목록에 수많은 묘지가 있지만 근대 건축가가 계획한 사례는 유일하다.
  • 유일한 원외 후보… “분권이 국민 안전이자 시대정신”

    유일한 원외 후보… “분권이 국민 안전이자 시대정신”

    현직 충남 논산시장으로 오는 25일 열리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한 황명선(52) 후보는 20일 “세월호 참사는 과도한 중앙 권한 집중으로 지역이나 현장 책임자가 지휘를 못해 많은 무고한 생명을 잃은 사건”이라고 말했다.황 후보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분권이 국민의 안전이고 시대정신”이라면서 “최고위원 한 표는 꼭 지방정치세력에게 달라”고 호소했다. 당 대표 후보와 최고위원 후보 11명을 통틀어 유일한 원외 후보인 그는 “황명선 개인이 아니라 민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대표해 출마했다”면서 “현역 국회의원처럼 조직은 없지만 자치분권 세력과 지방의회, 지방정부를 대표하는 분이 함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기초자치단체장협의회장인 그는 민주당 소속 151명의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과 지방의원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우리 정당도 자치분권화된 정당으로 가야 한다”며 “여의도 국회 전유물로 이끌어졌던 당이 당원이 중심이 되는 당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1995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벽보를 붙이던 자원봉사자로 정치권과 연을 맺은 황 후보는 이제껏 당을 위해 헌신해온 자랑스러운 당원이라고 자부한다. 2003년부터 서울시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한 뒤 2005년 당 지도부의 요구로 고향인 논산시장에 출마했다. 황 후보는 “당시 충청은 자민련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민주당이 후보조차 내지 못하는 험지였다”며 “선당후사의 마음으로 고군분투하다 2010년에 당선됐다”고 말했다.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면 논산시정과 최고위원직을 동시에 수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에 황 후보는 “그런 염려가 바로 우리 정치가 여의도에 갇혀 있다는 방증”이라고 반박했다. 주요 경선 일정에 시간을 내려고 연가를 사용하고 있는 그는 “권력은 쪼개고 쪼갤수록 주민을 위해 더 깊은 서비스가 가능하고 정당도 마찬가지”라며 “여의도로 집중된 권력을 벗어나 지방과 지역과 현장, 이게 바로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분권”이라고 역설했다. 황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방 자치의 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가 균형 발전의 꿈, 김근태 전 의장의 민주주의의 꿈, 그리고 자랑스러운 문재인 대통령의 자치분권 국가를 만들겠다는 꿈을 반드시 이루는 민주당의 역사를 황명선과 함께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방북 89명 중 7명만 자녀 만나… “시간 없다, 수시로 상봉해야”

    방북 89명 중 7명만 자녀 만나… “시간 없다, 수시로 상봉해야”

    방북 87% 80대 이상… 2명 100세 이상 절반 이상 조카·며느리 등과 만남 그쳐 文대통령 “인도적 사업중 최우선 사항” 한적, 북측과 면회소 상시 운영 등 논의금강산호텔에서 70년 만에 이산가족을 만난 남측 방북단 89명의 평균 나이는 무려 86.1세였다. 부자 상봉을 한 경우는 7명(7.9%)에 불과했다. 빠른 고령화로 이산가족에게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상봉의 정례화 및 대규모화, 화상 상봉, 편지 왕래, 고향 방문 등의 방안이 절실하며 이를 위해 남북 관계의 지속적인 진전이 필요한 상황이다.문재인 대통령은 20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95세 어르신이 이번에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하자 이제 끝났다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보도를 봤다”며 “저 역시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 그 슬픔과 안타까움을 깊이 공감한다. 정말로 시간이 없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최근 5년 동안 3600여명이 매년 돌아가셨고 올해 상반기에만 3000명 넘게 세상을 떠났다”며 “그분들이 헤어진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천추의 한을 안고 생을 마감하신 것은 남과 북의 정부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1988년부터 현재까지 전체 이산가족 신청자는 13만 2603명이었다. 지난달 말까지 7만 5425명(56.9%)이 세상을 떠났다. 또 이들의 사망연령은 80대가 45.2%로 가장 많았다. 현재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5만 6862명) 중 62.6%가 80세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이산가족 상봉 확대가 시급하다. 이날 이산가족을 만난 방북단 89명 중에도 77명(86.5%)이 80대 이상이었다. 100세 이상도 2명 포함됐다. 또 급격한 고령화로 형제나 자식을 만나는 경우가 줄고 한 다리 건너 상봉이 이뤄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실제 이날 상봉에서 단 7명이 북측에 사는 아들이나 딸 8명을 만났다. 26명이 북측의 형제·자매(이복 포함) 35명을 마주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50명은 북측의 조카, 조카손자, 형수, 매부, 5촌 등을 만났다. 대한적십자사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계기로 정기 상봉행사, 전면적 생사 확인, 화상 상봉, 상시 상봉, 서신 교환, 고향 방문 등의 ‘상봉 확대 방안’을 북측과 협의한다. 또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 건설 당시의 취지대로 상시 운영하는 것을 논의할 계획이다. 문 대통령은 “이산가족 상봉을 더욱 확대하고 속도를 내는 것은 남과 북이 해야 하는 인도적 사업 중에서도 최우선적인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오랜 시간 기다려왔는데...” 상봉직전 숨진 안타까운 사연들

    “오랜 시간 기다려왔는데...” 상봉직전 숨진 안타까운 사연들

    오랜 기간 헤어진 혈육간 만남을 고대해 왔지만, 상봉 직전 이승을 하직한 가족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허비고 있다. 20일 금강산에서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에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와 여동생만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 남겨둔 채 피난길에 오른 김진수(87) 씨는 올해 1월 여동생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돼 북측의 조카 손명철(45) 씨와 조카며느리 박혜숙(35)를 대신 만나게 됐다. 김씨는 상봉 전 취재진과 만나 “금년 1월에 갔다고 하대… 나는 아직 살았는데”라며 말끝을 잊지 못했다. 이어 “부모님이 어떻게 살다 가셨는지 묻고 싶다”면서도 생전 처음 보는 조카인 만큼 “지금으로선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러움도 내비쳤다. 2000년부터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한 조옥현(78)씨와 남동생 조복현(69)씨도 6·25전쟁 때 헤어진 북측의 둘째 오빠가 올해 사망해 대신 둘째 오빠의 자녀들을 만나게 됐다. 조씨는 “한적에서 연락받기 전 동생 복현이가 전화해 ‘큰형이 살아있으면 85세다’라고 말했다”면서 “그래서 북한에서 오빠들이 살아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얼마 있다가 적십자에서 전화가 왔다”고 안타까워했다. 동생 복현씨는 “아버지와 형님 생사확인만이라도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만나게 되니 완전히 로또 맞은 기분”이라며 “(조카들에게) 자손이 또 있는지, 아버지 산소는 어디 있는지, 제사는 지내는지 등 질문할 것을 수첩에 적어놨다”고 말했다. 공동취재단·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민주당 최고위원 출마 황명선 “문재인정부 분권은 여의도 권력 쪼개는 것”

    민주당 최고위원 출마 황명선 “문재인정부 분권은 여의도 권력 쪼개는 것”

    현직 충남 논산시장으로 오는 25일 열리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한 황명선(52) 후보는 20일 “세월호 참사는 과도한 중앙 권한 집중으로 지역이나 현장 책임자가 지휘를 못해 많은 무고한 생명을 잃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황 후보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분권이 국민의 안전이고 시대정신”이라면서 “최고위원 한 표는 꼭 지방정치세력에게 달라”고 호소했다. 당 대표 후보와 최고위원 후보 11명을 통틀어 유일한 원외 후보인 그는 “황명선 개인이 아니라 민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대표해 출마했다”면서 “현역 국회의원처럼 조직은 없지만 자치분권 세력과 지방의회, 지방정부를 대표하는 분이 함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기초자치단체장협의회장인 그는 민주당 소속 151명의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과 지방의원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우리 정당도 자치분권화된 정당으로 가야 한다”며 “여의도 국회 전유물로 이끌어졌던 당이 당원이 중심이 되는 당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1995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벽보를 붙이던 자원봉사자로 정치권과 연을 맺은 황 후보는 이제껏 당을 위해 헌신해온 자랑스러운 당원이라고 자부한다. 2003년부터 서울시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한 뒤 2005년 당 지도부의 요구로 고향인 논산시장에 출마했다. 황 후보는 “당시 충청은 자민련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민주당이 후보조차 내지 못하는 험지였다”며 “선당후사의 마음으로 고군분투하다 2010년에 당선됐다”고 말했다.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면 논산시정과 최고위원직을 동시에 수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에 황 후보는 “그런 염려가 바로 우리 정치가 여의도에 갇혀 있다는 방증”이라고 반박했다. 주요 경선 일정에 시간을 내려고 연가를 사용하고 있는 그는 “권력은 쪼개고 쪼갤수록 주민을 위해 더 깊은 서비스가 가능하고 정당도 마찬가지”라며 “여의도로 집중된 권력을 벗어나 지방과 지역과 현장, 이게 바로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분권”이라고 역설했다. 황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방자치의 꿈,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균형발전의 꿈, 김근태 의장의 민주주의의 꿈, 그리고 자랑스러운 문재인 대통령의 자치분권 국가를 만들겠다는 꿈을 반드시 이루는 민주당의 역사를 황명선과 함께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평양 출신 가수 현미 “이산가족 상봉 신청...두 동생 찾는다”

    평양 출신 가수 현미 “이산가족 상봉 신청...두 동생 찾는다”

    2015년 이후 중단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오늘(20일) 3년 만에 재개된 가운데 ‘MBC 스페셜’이 이산가족 상봉 특집 3부 ‘이산’을 방송한다. 20일 방송되는 ‘MBC 스페셜’에서는 70년 이산의 역사와 이산가족의 비극적 사연을 다룬 ‘옥류관 서울1호점’ 3부 ‘이산’편이 그려진다. 특히 평양이 고향인 실향민 1세대 가수 현미의 사연이 전해질 예정이어서 시청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가수 현미의 이산가족 찾기, 보고 싶은 명자야! 길자야! 올해로 데뷔 61주년을 맞은 영원한 디바 현미. 그가 삼시 세끼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바로 백미, 현미도 아닌 평양냉면. 평양이 고향인 실향민 1세대 가수 현미에게 평양냉면은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울푸드다. 현미(본명 김명선)는 평양냉면을 먹을 때마다 6.25 전쟁 중 헤어진 두 동생 김명자, 김길자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되새긴다.“우리 집이 폭격 때문에 반이 날아갔어요. 할머니가 그럼 6살, 9살은 둬라. 나중에 봄에 데려가라. 언니, 오빠, 나, 동생 둘, 부모님만 평양에서 나왔어요. 피난 가라고 했으면 악착같이 밤새 가서 (동생들까지) 데리고 갔죠. (정부가) 대동강만 건너라. 일주일만 피해 있어라. 일주일이 68년이 된 거예요.”-현미 인터뷰 中 남북 간 정식 교류가 없던 1998년, 현미는 북에 있는 동생 길자를 48년 만에 만나게 된다. 제3국의 중개업자를 통해 연락이 닿은 길자와의 만남은 결코 쉽지 않았다. 북한 당국의 엄격한 신원 확인과 삼엄한 감시 아래 현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들은 그 난관을 어떻게 이겨내고 만날 수 있었을까? 극적인 상봉의 순간은 당시 MBC 다큐멘터리로 방영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20년이 흘렀다. 현미는 상봉의 후유증으로 우울증까지 앓았다. 때만 되면 이산가족 상봉 신청서를 내던 언니와 오빠는 이제 세상에 없다. 살아남은 가족을 대표해 대한적십자사를 찾은 현미! 떨리는 손으로 직접 상봉 신청서를 작성한 현미는 과연 명자와 길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70년의 기다림, 이산가족 헤어져 흩어진, ‘이산가족’. 이번 제21차 상봉 행사의 최종 경쟁률은 569대 1이었다. 신청 대기자들에게 상봉 재개 소식은 희망이자 고통이다. 20차례의 상봉 행사를 통해 2천여 명의 이산가족이 헤어진 혈육을 만났지만 이후 재상봉은커녕 서신 왕래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대한적십자사에 상봉 신청을 한 13만여 명 중 과반수는 사망했고, 생존자 대부분은 70세 이상 고령자다. 그들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백령도(白翎島). 본래 황해도에 속했던 이곳은 뱃길로 30분이면 북한에 닿는다. 인천에서는 쾌속선으로 4시간이 걸리는 서해 최북단이다. “보고 싶고 그리운 거 그건 뭐 말로 할 수도 없고...이제 만나도... 딸이 엄마도 모를 거고 내가 딸을 모를 거고요.” - 최응팔 할머니 인터뷰 中 얼굴이 하얗고 곱던 소중한 첫 아이. 네 살 된 아이의 모습이 북에 두고 온 큰딸(김신애)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그렇게 바다 건너 지척에 서로를 둔 채 70년이 흘렀다. 93세 노모는 큰딸이 사는 고향 땅이 보이는 백령도를 70년 동안 떠나지 못했다.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20년 전 처음 상봉 신청을 한 후 자나 깨나 그려본 큰딸과의 재회. 이번에는 늙어버린 딸, 신애를 품에 안아볼 수 있을까? 최응팔 할머니는 고향 땅이 보이는 심청각에 서서 오늘도 그리움을 노래한다. ■ 그리움을 먹다, 우리 곁의 냉면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냉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장인. 마지막 평양냉면 1세대 창업자 박근성 옹이 세상을 떠났다. 평양 모란봉 냉면집의 장남이었던 그는 1951년 1.4 후퇴 당시 혈혈단신으로 피난을 온다. 그는 피난민이 모여 살던 대전 숯골에 자리를 잡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통을 지켜왔다. “젊었을 때 자식들 못 보게 돌아서서 많이 울었어요. 그런 모습 볼 때면 불쌍해서 나도 눈물이 나오더라고.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으면 저렇게 울까? 그러다 고향에 한 번 못 가보고 저렇게 돌아가셨잖아.” - 부인 한옥산 인터뷰 中 부모님의 생사조차 알 수 없어서 제사도 지낼 수 없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이면 그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목 놓아 울었다. 매일 냉면을 만들며 부모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박근성 옹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우리 곁에 그가 남긴 냉면 한 그릇. 이산과 실향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냉면을 먹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현실은 무엇인가?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가 담긴 박근성 옹의 마지막 냉면 한 그릇을 전한다. 한편 이산가족 상봉 특집 ‘MBC 스페셜’은 이날(20일) 오후 10시 50분 방송된다. 사진=MBC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냉장고를 부탁해’ 마마무 화사 냉장고 공개 “요즘 꽂힌 음식은 한치”

    ‘냉장고를 부탁해’ 마마무 화사 냉장고 공개 “요즘 꽂힌 음식은 한치”

    ‘먹었다 하면 품절’인 먹방 여신 마마무 화사의 다음 타겟은 ‘한치’였다. 20일 방송되는 JTBC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마마무 화사의 냉장고가 공개된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먹는 음식마다 전국에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만큼, 화사가 선택한 새로운 ‘먹방 타겟’이 무엇일지 기대감을 더한다. 최근 진행된 ‘냉장고를 부탁해’ 녹화에서 화사는 최근에 즐겨 찾는 음식을 밝혀 초미의 관심을 받았다. 곱창, 간장게장, 김부각에 이어 화사의 선택을 받은 식재료는 바로 한치. 화사가 냉장고 속에서 꺼낸 한치로 먹음직스러운 먹방을 펼치자, MC들은 “품절 임박이다”라며 ‘완판’을 예고했다. 또 화사는 즉석에서 각종 재료를 활용해 한치에 곁들일 소스를 만들었다. 간단하면서도 맛있는 ‘화사표 한치’를 맛본 셰프들은 “곧 한치 식당에서 이 레시피를 쓸 것 같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사 냉장고는 한치 외에도 풍성한 식재료로 눈길을 끌었다. 화사는 “부모님께서 직접 밭을 일구고 벼농사를 하신다”라며 자랑스럽게 고향에서 올라온 농산물을 소개했다. 화사의 아버지가 직접 재배한 쌀과 신선한 채소,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화제의 김부각, 장어, 꼬막, 새우 등 싱싱한 해산물 등 화려한 식재료의 향연은 계속됐다. 화사는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식재료를 활용한 셰프들의 요리를 맛본 후,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구성진 트로트 한 소절과 춤사위를 선보였다. 화사의 흥을 깨어나게 한 최고의 요리는 본 방송에서 공개된다. 특제 레시피로 완성된 ‘화사표 한치’ 먹방은 이날(20일) 오후 9시 30분 방송되는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공개된다. 사진=JTBC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길원옥 할머니와 소녀상 지킴이가 부르는 ‘아리랑’, ‘한 많은 대동강’

    길원옥 할머니와 소녀상 지킴이가 부르는 ‘아리랑’, ‘한 많은 대동강’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90) 할머니와 소녀상 지킴이 김샘(26)씨가 ‘아리랑’과 ‘한 많은 대동강’을 함께 부르는 모습이 공개됐다. 지난 14일 딩고뮤직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다. 영상에는 소녀상과 나란히 앉은 길원옥 할머니가 ‘아리랑’과 ‘한 많은 대동강’을 차례로 부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소녀상 지킴이 김샘씨는 수화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피아노 반주 위에 나지막이 흐르는 할머니의 한 서린 목소리는 듣는 이들을 숙연케 한다. 노래를 마친 뒤 제작진이 “할머니, 소원 있어요?”라고 물었다. 이에 길원옥 할머니는 “소원은 남북통일”이라며 “내 고향이 평양이거든. 그러니까 내 고향이 가고 싶기도 하고…”라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김샘씨는 “하루빨리 일본 정부가 할머니들께 사과했으면 좋겠다”며 “제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다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 많은 시민이 도와주셔서 재판을 잘 받고 잘 해결했다. 이 문제(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샘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모임인 평화나비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5년 12월 31일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며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가 기습 점거시위를 벌인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은 지난 4월 24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공동주거침입)·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다. 김씨와 함께 기소된 대학생 등 2명도 각각 벌금 50만원과 30만원이 확정됐다. 한편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239명으로 이중 생존자는 현재 27명이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특파원 칼럼] 일대일로와 스리랑카 기자의 울분/윤창수 베이징 특파원

    [특파원 칼럼] 일대일로와 스리랑카 기자의 울분/윤창수 베이징 특파원

    중국 관영언론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인 한 스리랑카 기자는 지난 40년간 공산당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찬탄했다. 그는 지난 2월부터 10개월 예정으로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중국어 강습을 받고 영문 기사를 작성하는 것 외에 베이다이허, 광시, 구이저우 등 중국의 개혁개방 40주년 현장과 주요 관광지 등을 둘러보는 출장을 자주 다닌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욕적’이라고 언급한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참여국과 아프리카에서 온 기자 60명이 현재 관영언론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85㎡(25평) 아파트의 평균 월세가 1만 2800위안(약 200만원)에 이르는 베이징에서 외신기자들은 외교관용 아파트에서 머무는 혜택도 받고 있다. 스리랑카 기자는 “우리 조국은 아름답고 자원도 풍부한데 부패한 정치인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거대한 규모의 대륙을 다스리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력에 대해서는 감탄했다. 하지만 자국의 함반토타 항구에 대해서는 “왜 우리 땅을 중국이 차지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여 울분을 토했다. 함반토타항은 중국이 제 살과 같은 영토를 99년간 영국에 식민지로 떼줬던 홍콩과 같은 신세다. 인도양의 요충지 함반토타 항구는 스리랑카 전 대통령 마힌다 라자팍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2010년 일대일로 사업 참여와 중국의 함반토타항 건설을 승인했던 라자팍사 전 대통령은 국가 채무가 된 중국 자금을 대부분 자신의 선거에 사용했다. 이미 수도 콜롬보의 항구가 번성 중이었기에 사전 타당성 조사는 분명히 경제적 이득이 없다고 밝혔지만 라자팍사는 항구 건설을 감행했고 그 결과 2012년 겨우 34척의 배가 함반토타항에 정박했다. 중국은 처음 1~2%로 시작했던 차관의 이율을 라자팍사의 묵인 아래 6.3%까지 올렸고 결국 빚의 덫에 빠진 스리랑카는 함반토타항뿐 아니라 주변 60㎢(약 1800만평)의 땅을 중국 회사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여년간 중국의 지원을 받은 항구는 세계 35곳에 이르고 주로 아프리카 서해안에 밀집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대일로를 모욕적이라고 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세계 패권 장악 의도 때문이다. 시 주석은 고대 실크로드의 확대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개발도상국에 도로, 철도, 항구 등을 중국 돈과 기술, 노동력으로 건설하고 있다. 중국이 건설한 인프라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군사기지화하려는 함반토타항처럼 결국 중국의 몫이 되고 만다. 한국 정부도 무역 상대국 다변화 등을 목표로 한 신북방·신남방 정책을 중국의 일대일로와 연계하려 한다. 일대일로에 참여한 80여 개국과는 경제 규모 차이가 현저하기 때문에 중국발 빚의 수렁에 빠질 일은 없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장담이다. 미국이 중국과 무역전쟁을 일으킨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국이 지난 40년간 미국의 지원으로 거둔 발전 성과를 독차지하려는 데 있다. 중국은 인민의 피와 땀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고 하지만 미국과의 수교와 미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후원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장은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 상무부 부부장이 22~23일(현지시간) 미국의 초청으로 4차 무역협상을 위해 워싱턴을 찾는다. 그동안 관세폭탄만 주고받던 양국이 오는 11월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정상회담에 따른 합의로 무역전쟁을 타결하기 위한 사전 협의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규모 외신기자 초청 연수로 해외 비판 여론까지 통제하려는 중국의 야심을 미국이 어떻게 다룰지 궁금하다. geo@seoul.co.kr
  • 이효석의 고장 봉평… ‘흐붓한’ 달빛언덕 보러오세요

    이효석의 고장 봉평… ‘흐붓한’ 달빛언덕 보러오세요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의 고향인 강원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 문학 테마 관광지 ‘효석 달빛언덕’이 21일 문을 연다. 효석 달빛언덕은 한국 현대 단편소설 중 뛰어난 작품으로 나뉘는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을 모티브로 책 박물관과 이효석 문학체험관, 테마형 경관, 효석광장 등으로 이뤄졌다. 근대문학체험관은 1920∼1930년대 이효석의 활동 시간과 공간, 문학을 이야기로 풀어내 한국 근대문학과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체험공간을 제공한다. 꿈꾸는 달은 이효석의 기억과 추억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꾸미고 카페, 작은 도서관, 기념품 판매점 등 휴게공간을 곁들였다. 또 각종 문화행사와 공연을 열 수 있는 시설인 나귀광장·수공간과 아름다운 효석 달빛언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달빛나귀 전망대를 설치했다. 이 밖에도 사계절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꿈꾸는 정원’과 창밖의 달 모형을 통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연인의 달’, 달빛나귀 전망대와 꿈꾸는 달 카페 옥상을 잇는 하늘 다리, 야외공간인 달빛광장 등을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게 배치해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이효석문학선양회는 개관에 앞서 지난 15~19일 시범 개방해 점검을 마쳤다. 한왕기 평창군수는 “효석문화제를 앞두고 방문객에게 만족을 안길 수 있도록 달빛공원을 매끄럽게 꾸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제와 더불어 인근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과 효석 문학의 숲, 폐교를 활용해 만든 무이예술관까지 함께 둘러보면 문학의 향기와 함께하는 최고 여행을 누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창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아시아계 영화 지지 나선 에릭남

    아시아계 영화 지지 나선 에릭남

    한국계 미국인 가수 에릭 남(본명 남윤도)과 그의 형제인 에디 남, 브라이언 남이 미국 애틀랜타의 한 극장 표 전체를 구매해 화제가 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미 메트로, CNN 등에 따르면 에릭 남 삼형제는 그들 가족이 종종 방문했던 극장에서 전날 개봉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16일 오후 6시 상영표를 전부 사들였다. 이는 에릭 남 형제들이 고향 애틀랜타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박스오피스(흥행수입)를 응원하기 위한 목적이다. 미국에서는 유명 인사들이 종종 자신들이 선호하거나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영화의 흥행을 바라며 극장표 전체를 사들여 무료 시사회를 열기도 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는 1993년 ‘조이 럭 클럽’ 이후 25년 만에 전원 아시아계 배우들을 출연시킨 할리우드 작품이다. 콘스탄스 우, 헨리 골딩, 미셸 려, 한국계 캔 정 등이 출연한다. 에릭 남은 소셜미디어에 “우리(아시아인들)는 주류 미디어에서 과소 평가되거나 잘못 전달되곤 한다. 우리는 훨씬 발랄하고 아름다우며 섹시하다. 때로는 그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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