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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당해진 朴대표 “조기全大는 왜?”

    당당해진 朴대표 “조기全大는 왜?”

    한나라당 혁신위원회는 오는 18일 마무리 회의를 열고 그동안 논의한 혁신방안의 최종 골격을 결정한다. 이에 따라 지도부의 대응에 촉각이 쏠린다. ●재보선 승리후 입지 반영 혁신위가 2개월여 동안 정책·이미지·당헌당규 등 3개 분야에 걸쳐 마련한 주요 혁신방안은 집단지도체제, 당권·대권 분리, 책임당원제 등이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표를 비롯, 당 지도부는 당헌·당규 문제는 운영위원회에서, 원내 대책 문제는 의원총회에서 의결한다는 방침이다. 원칙을 강조한 것이지만 4·30재보선 승리 뒤 공고해진 박 대표의 입지를 바탕으로 당당하게 대응하겠다는 자신감도 묻어난다. 지도부가 혁신위 방안 가운데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은 집단지도체제와 조기 전당대회 소집이다. 혁신위는 지난달 28일 현행 대표·원내대표 체제 대신에 당무최고집행기구로 최고위원회를 두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집단 지도체제는 지금도 집단지도체제”라며 반대의 뜻을 간접적으로 비쳤다. 박 대표 측근도 “현재 박 대표가 독재·전횡을 하지 않고 있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면서 “혁신위가 말한 9인위는 실패로 드러난 시스템”이라고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김무성 사무총장도 “효율성 면에서 야당 체제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독재·전횡않는데 왜 바꾸나” 당권·대권 분리나 책임당원제에 대해서도 지도부는 환영하고 있다. 다만 조기 전당대회 개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김 사무총장은 “운영위에서 안건으로 채택돼야 할 사항인데 시기를 못박거나 전대를 전제로 내세우는 것은 ‘대표 흔들기’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정부 “韓·日 FTA 연내 불가능”

    한·일간 자유무역협정(FTA)의 연내 타결이 어려울 것 같다. 지난해 11월 6차 협상에서 일본측이 농수산물 개방에 난색을 표명한 데다 올들어 독도 및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까지 겹치면서 양국간 협상논의가 전면 중단된 상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6일 “일본측의 무성의한 태도와 FTA 체결을 위한 통상적 일정 등을 감안하면 연내 타결은 불가능하다.”며 “다음달 한·일 정상회담이 열려도 FTA 협상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재정경제부 등 관련 부처에 따르면 2003년 이후 모두 6차례의 협상을 가졌으나 지난해 11월 사전협의 단계에서의 이견으로 차기 회의 일정조차 잡지 못한 채 협상은 결렬됐다. 우리측은 농수산물 시장을 포함해 산업기술, 서비스·투자 자유화, 정부조달, 비관세 장벽의 철폐 등 포괄적인 FTA를 바라지만 일본측은 공산품의 관세철폐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FTA가 맺어지면 품목별로 시장을 개방하는 수준인 ‘양허율’을 90%로 정하는 게 보통인데 일본은 농수산물 분야에서 50% 안팎의 양허율만 고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일본은 한국 공산품 시장의 개방을 99%까지 요구, 기술적·생산적 비교우위에 있는 부품소재 등 공산품 위주로만 FTA 협상에 임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정부는 공산품 부문과 서비스 산업을 일본에 개방, 단기적으로는 무역적자를 감수하더라도 일본이 농수산 품목을 개방하면 장기적으로는 우리 경제에 이득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지난해 8월 5차협상에서의 긍정적이던 분위기와 달리 일본 농민단체가 개방에 반대하며 집권 자민당에 강력히 항의하자 태도를 돌변했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일본이 농수산품 양허율을 90%까지 높이지 않는다면 FTA 협상은 물 건너간 것과 다름없다.”며 “현재 일본의 입장에 변화가 있다는 징후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일간 FTA가 맺어지면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단기적으로 1억달러 정도 악화되지만 장기적으로는 6억달러 이상 개선될 것으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분석했다. 또 국내총생산(GDP)은 단기적으로 0.22∼0.33%포인트, 중장기적으로는 0.82∼1.9%포인트 증가할 것으로 조사됐다.FTA로 시장이 커지면서 외국인 투자유치가 활성화되고 중국의 저가공세에도 공동 대처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수출하려는 주요 농수산품에는 밤, 피망, 장미, 돼지고기, 낙지 이외에도 소주와 라면 등이 꼽히고 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데스크시각] 빛을 감추고 힘은 길러야/구본영 정치부장

    어린이날인 5일, 푸르러가는 5월의 하늘을 보며 지난 4월 중순 제주도의 짙푸른 봄 바다를 새삼 떠올린다. 성산포의 유채꽃과 눈이 시리게 맑은 물은 보름도 더 지난 지금도 눈시울에 찍혀있다.‘상생정치와 언론’이라는 주제로 열린 관훈클럽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의 기억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풍광보다 더 선연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화두가 있다.“한국적 정치풍토에서 상생(相生)이란 가당치 않다.”는 원로 언론인들의 빗발치는 이의제기였다. 세미나 분위기야 시종 화기애애했다. 주제발표를 한 정세균, 강재섭 두 여야 원내대표는 워낙 우리 정치판에서 합리적이고 유연한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어차피 다툴 수밖에 없는 여야 관계라면 페어플레이 속에서 상쟁(相爭)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게 다수 참석자들의 속마음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갖가지 정쟁과 입씨름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을 편 이후의 날선 공방이 대표적이다. 동북아 균형자론에 비판적인 이들은 “중·일 대결이나 미·중 충돌이 발생했을 때 한국이 중재역을 맡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비현실성을 지적한다. 한·미·일의 남방3각과 북·중·러의 북방3각이라는 냉전구도에서 탈피하려는 취지도 한·미 동맹의 포기나, 반미로 비쳐질 경우 또 다른 화를 부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이 남북통일 문제 등에서 한국 편에 설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칫 게도 놓치고 구럭도 잃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이같은 비판이 꼬리를 물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측이 동북아 균형자론이 한·미동맹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공식 해명하고 나섰다. 중·미간이 아닌, 중·일 분쟁시 중재역을 하겠다는 취지였다.“동북아 균형자론은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중견국가의 위상에 맞는 ‘평화의 균형자역’을 맡겠다는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민주주의 역량, 의제설정 능력, 문화 역량 등 이른바 ‘소프트파워’(연성국력)를 통해 추구하겠다는 부연설명이었다. NSC의 복잡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기자는 동북아 균형자론이 결국엔 한국이 지향해야 할 큰 비전일 수 있다고 본다. 언젠가는 강대국들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판 자체를 주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비전이 공허한 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만한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얼마전 원로인 강원룡 목사도 동북아 균형자론은 통일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고언했다. 역사 속에서도 국제 관계에서 외교적 슬로건에 앞서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읽을 수 있다. 중국이 오늘의 미국에 비견될 초강대국격이던 시절 명·청 교체기를 맞자 조선에선 청에 대한 화친론과 주전론이 맞섰지만 어느 길도 자의로 선택할 수 없었다. 끝내 주전론을 고집했다면 사직과 백성의 공멸을 뜻하는 옥쇄외에 달리 길이 없었을 터였다. 마지못해 택한 화친론도 인조가 청태종을 향해 얼어붙은 맨땅에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절을 하고 머리를 땅에 세번 부딪기를 세번 반복)’하는,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중국 여성의 전통 의상 중 치파오(旗袍)가 있다. 허리 아래로 옆이 터져 허벅지살이 허옇게 드러나는, 아름답지만 퍽 도발적인 옷이다.1972년 죽의 장막을 헤치고 미·중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찾았을 때다. 누군가 부인 패티 여사에게 치파오를 본 소감을 묻자 이렇게 응수했다.“중국 인구가 이렇게 많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고. 패티 여사, 아니 미국은 당시 이미 인구 10억이 넘는 ‘공룡’ 중국의 잠재력을 예감했던 셈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대외전략, 즉 ‘도광양회’(光養晦)정책을 선택,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현 시점에선 주변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동북아의 균형자’가 아닌 ‘평화의 중재자’정도의 겸손한 수사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에 앞서 집권 3년차인 청와대가 해야 할 더 시급한 과제는 여야간, 세대간, 계층간 이해다툼을 조정하는 ‘내치의 균형자’를 자임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를 통해 우리의 단합된 힘부터 길러야 평화의 중재자역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뜻에서다. 구본영 정치부장 kby7@seoul.co.kr
  • 性 인식의 혁명 이렇게 시작됐다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영화적 소재가 ‘섹스’일 것이다. 그렇다면 13일 개봉하는 ‘킨제이 보고서’(Kinsey)는 잇속빠른 할리우드가 어떻게 이런 먹음직한 이야깃감을 여태껏 그냥 놔뒀을까 싶은 ‘섹스영화’이다. 영화는 현대인의 성 실태 연구로 1940년대 미국 보수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동물학자 알프레드 킨제이(1894∼1956)의 일대기를 그렸다.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알고 싶은 급한 관객들에게 먼저 귀띔, 섹스의 정치사회학을 맨살처럼 까발린 작품이긴 하되 에로티시즘과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영화가 주목한 것은 욕망의 ‘행위’로써가 아닌,‘개념’으로써의 성(性)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동물학 교수였다가 세계적 성 연구가가 된 한 남자의 집념 가득한 인생을 어린시절부터 차분히 복기한다.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을 받은 킨제이(리암 니슨)는 기술자가 되라는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생물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생물학 교수가 된 그는 제자 맥밀란(로라 리니)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그 즈음 대학에서 성교육 강좌를 처음 열어 ‘물의’를 빚기 시작한다. 보수적 종교인인 아버지와의 갈등을 집중 부각시킨 초반부는 일면 가족드라마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섹스연구로 미국사회를 뒤흔들 향후 킨제이의 드라마틱한 삶에 힘을 실어주는 ‘반동적’ 장치로 유효했다. 성교육 개방을 주장하며 대학내 성 강좌를 고집하는 한편으로 킨제이는 면담을 통해 미국인 성의식 실태조사에 들어간다. 강요된 엄숙주의에 짓눌린 ‘섹스 자유의지’를 과학적 데이터로 짚어내는 그의 집념 쪽으로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이전에 한번도 공론화된 적 없었던 성 행위에 대한 고찰은, 미국 전역을 헤집는 킨제이의 집요한 조사작업을 통해 조금씩 학문으로서의 틀을 갖춰나간다.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킨제이의 인물정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괴짜같은 삶의 편린들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영화의 작은 성과다. 식탁에 앉아서도 사춘기의 두 딸들과 섹스이야기만 하는 ‘이상한’ 아버지, 성 이해가 지나쳐 아내와 제자의 섹스까지 용납하는 ‘이해못할’ 남편. 얼마간의 과장은 있을지라도 주인공에 대한 이해를 돕는 흥미로운 설정들이다. 자신도 몰래 동성애에 빠져 아내와 위기를 겪고, 정치적인 계산으로 지원을 거부하는 록펠러 재단과 갈등하는 등 주인공의 내면은 다각도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애써 잔재미를 뜯어보지 않는다면 문득문득 무중력 상태에 빠져버릴 수도 있을 듯하다. 킨제이의 자잘한 개인적 갈등은 스크린 안에서만 맴돌 뿐, 관객에게 공감을 불어일으킬 여지는 크게 없어뵌다. 일대기 드라마에서 감동의 스케일을 기대하는 관객에겐 권하기가 좀 망설여지는 이유다. 애초에 킨제이라는 인물 자체에는, 그가 발표한 보고서만큼의 극적 요소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주목받았다.‘러브 액추얼리’에서도 함께 나왔던 리암 니슨, 로라 리니의 숙성된 연기에는 토를 달 수가 없다.‘갓 앤 몬스터’‘시카고’의 각본을 쓴 빌 콘돈의 감독 데뷔작.18세 이상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눈도 귀도 즐거워]모세의 기적?

    [눈도 귀도 즐거워]모세의 기적?

    데뷔앨범 ‘사랑, 그 간절한 그리움’을 들고 나온 신인가수 모세의 기세가 무섭다. 록밴드를 고집해 온 그야말로 순수 신인이다. 그의 이번 앨범은 알 앤 비, 팝, 네오-솔, 퓨전 하우스, 펑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타이틀곡 ‘사랑인 걸’은 국내 최고의 작사가 심현보가 작사, 작곡한 곡으로 한번만 들어도 귀에 쏙 들어오는 익숙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분위기에 모세 특유의 호소력 짙은 보컬이 더해진 드라마틱한 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모세의 ‘사랑인 걸’을 컬러링으로 다운받으려면 휴대전화로 ‘##90’과 코드번호 5자리 ‘00383’과 통화버튼을 누르면 된다.
  • [이집이 맛있대] 서울 압구정동 ‘밀탑’

    [이집이 맛있대] 서울 압구정동 ‘밀탑’

    날씨가 더워지면 간절한 것이 팥빙수다.20년 동안 한자리에서 팥빙수를 파는 집이 있다. 그것도 입맛 까다로운 서울 강남, 고급의 대명사격인 백화점에서.‘아니 어떻게 단순 메뉴 팥빙수 하나로 20년을 버틸까.’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전설의 빙수’를 찾아 나섰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5층에 있는 밀탑에서 밀크팥빙수를 주문했다. 커다란 통팥이 하얀 얼음 위에 올려져 나오는 겉모습이 여느 레스토랑의 세련됨보다는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졌다. 하얀 눈송이 같은 빙수를 한 수저 떠넣었다. 차가움보다는 혀끝에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아이스크림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이번엔 팥과 함께 먹어봤다. 통팥이 씹히는 질감이 예술적이다 못해 오묘하다.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적당한 느낌과 고소함이 묻어났다. 빙수 맨 위에 올린 두 개의 찰떡은 말랑말랑한 것이 보통 팥빙수집의 그것과는 격이 달랐다. 갖은 맛의 전쟁터인 백화점에서도 단순한 팥빙수로도 장수하는 노하우인 듯했다. 밀탑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얼음 가는 기계를 쓰는데도 얼음이 한겨울 눈송이처럼 곱고 부드럽다. 얼음을 얼리는 온도와 강도를 조절해 부드러운 얼음을 만들어 낸다. 또 팥은 국산을 고집하며 매일 직접 삶는다. 과일빙수에 올리는 과일은 하루 2차례 백화점 슈퍼에서 사와 신선도를 유지한다. 손님에게,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 1985년 현대백화점 개장과 함께 문을 연 밀탑이 오늘까지 인기를 끄는 비결이다. 커피를 즐기고 단것이 싫은 사람을 위한 커피빙수, 팥을 싫어하거나 새콤함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딸기빙수, 웰빙족을 위한 녹차빙수,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밀크팥빙수까지 모두 5000원이다. 장담하건대 가서 한번 맛을 본다면 지금까지 읽은 것이 불필요하리라.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문화마당] 종교가 해야 할 일/강주헌 펍헙에이전시 대표· 번역가

    1997년 우리 경제가 IMF의 관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출판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이른바 성공학에 관련된 실용서가 많이 팔리기 시작했고, 출판계가 큰 불황에 빠진 지금도 실용서는 꾸준히 팔린다. 이같은 실용서들의 뿌리에서 읽히는 정신은 무엇인가. 개인의 경쟁력 강화가 곧 국부의 근간이며, 시스템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개인의 변화가 없으면 그 훌륭한 시스템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계발을 장려하는 책은 영국인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자조론’이 원조로 평가되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한 세기 이상 전에 미국에서 시작되었다.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은 깊은 불황에 빠졌고, 현재의 우리처럼 수많은 청년이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실업자로 지내야 했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이 실의에 빠졌다. 이렇게 좌절감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던져준 사람들은 기독교의 한 종파인 유니티교파였다. 그들은 ‘신사고 운동’을 펼쳤다. 종교의 교리보다 삶과 행복에 대한 실질적인 철학을 가르쳤고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면서 생각이 갖는 무한한 힘을 강조했다. 이런 가르침은 데일 카네기를 거쳐,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의 저자인 나폴레온 힐까지 이어졌으며 요즘의 실용서들에서도 면면히 이어진다. 우리나라 기독교 교리의 기준에서 유니티교파가 이단종파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한 종파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교세의 확장을 목표에 두지 않고 좌절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들이 책을 쓸 때마다 빠뜨리지 않았던 가르침이 그 증거다. 수입의 10%는 가난한 사람를 위해서 쓰라고 가르쳤다. 교회에 그 만큼을 헌금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미국의 기부 문화는 여기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추론이 맞다면 미국의 기부 문화는 100년의 전통이 만들어낸 결실인 셈이다.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고 지리적 공간도 다르다. 우리는 청년실업을 비롯한 온갖 사회적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염려는 있지만 그 해결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저출산 문제로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고, 저출산의 원인으로 육아비용과 과도한 사교육비가 거론되지만 대책이라고는 출산 장려금이 전부이다. 고등학교 1학년들은 내신평가방법에 불만을 품고 집단시위까지 계획하며 자살이란 단어를 서슴없이 거론하지만 교육부는 딴청이다. 교사들은 교원평가제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그들의 요구를 먼저 들어달라고 고집을 피운다. 속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한 세기 전 유니티교파가 미국에서 그랬듯이 우리 종교계는 그런 일을 해낼 수 없을까? 우리나라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들에게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기독교이거나 불교이다. 하여간 종교가 없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둘 중 하나이다. 이렇게 풍부한 자원을 가진 우리가 기적을 이뤄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어 교회나 절을 근거로 제2의 교육자가 된다면, 목사나 스님이 그들에게 교회나 절을 교육의 장으로 기꺼이 개방해준다면 수능시험을 앞두고는 내 교회, 내 절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앞다퉈 기도회를 갖는 외식적 행위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 교회나 절을 들여다보면 회의적이다.“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이나,“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섬기며 공양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경계를 짓지 말고 남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예수와 부처는 스스로 고행의 길을 택했지만 지금의 성직자들은 호의호식에 길들여진 듯하다. 두 분은 결코 이름을 얻는 데 힘쓰지 않았지만 지금의 성직자들은 이름을 남기려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경전의 가르침과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을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그들부터 변할 때, 한 세기 전 유니티교파가 지금의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듯이 우리 종교계도 대한민국을 진정한 소강국으로 키워가는 데 큰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강주헌 펍헙에이전시 대표· 번역가
  • 미·러 핵감축 나서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2일(현지시간) 시작된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 개막연설을 통해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 감축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한 데 이어 일부 서방 국가들까지 이런 입장에 동조해 주목된다. 이란·북한 등의 핵개발 억제와 제재에 이번 회의의 초점을 맞추려던 미국의 구상이 첫날부터 어긋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란은 우라늄 농축을 재개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란 “우라늄 농축하겠다” 카말 카르자이 이란 외무장관은 3일 열린 이틀째 회의에서 “모든 국가는 핵기술을 개발할 권리가 있다.”면서 “이란은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평화적인 핵기술 개발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아난 총장은 2일 “핵 없는 세상을 진정 원한다면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핵물질 감축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첫걸음이 돼야 한다.”면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조기 가입 약속을 재확인하고 냉전의 두 라이벌은 핵탄두를 수천개가 아닌 수백개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2년 체결된 모스크바조약은 미국과 러시아로 하여금 2012년까지 핵탄두를 각각 1700개와 2000개로 감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난 총장은 이란 등을 겨냥,“평화적 목적의 핵개발을 구상한다면 무기 제조에도 혼용될 수 있는 개발 방식을 고집해선 안 된다.”고 못박고 “이들 나라가 핵물질 농축이나 재처리 시설 개발을 포기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합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 “이란과 북한, 평화적 핵개발도 금지” 강성 발언 그러나 미국 대표로 나선 스티븐 레이드메이커 국무부 차관보는 “우리는 핵무기 감축을 위해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우리의 노력이 마무리되면 1990년대 배치된 전략 핵탄두의 80%가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란과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 연구와 개발도 일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독일의 주요 정치인들은 이날 NPT 회의 개막에 발맞춰 서유럽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들을 즉각 회수할 것을 요구했다. 현재 독일에 150기를 비롯, 서유럽 전역에 480기의 미 핵무기가 배치돼 있다. 또 한국 대표인 천영우 외교부 외교정책실장은 3일 기조연설에서 “미국 등의 감축 노력이 냉전 이후 높아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더 적극적인 감축 노력을 주문했다. 천 실장은 또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핵물질 농축 및 재처리 기술의 이전 금지와 관련,“이를 일절 금지하자는 미국의 주장은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데스크시각] 80점짜리 기업도시?/박건승 산업부 차장

    열린우리당 강봉균 의원은 지난해 10월 초 기업도시법 제정을 위한 국회 정책포럼에서 이런 말을 했다.“정부의 기업도시법 내용은 70점은 되는 것 같다. 전경련이 100점짜리 법안을 만들자고 요구하면 국회 통과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80∼85점짜리 법안을 만든 뒤 차츰 정비하는 것이 좋겠다.” 포럼의 좌장 자격으로 한 말이다. 법안에 담길 노동·환경·세제 부문의 규제완화 수위를 놓고 정부, 재계, 시민단체간에 목소리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양보하자는 주문이었다.‘꾀돌이’로 불리는 강 의원다운 재치가 돋보이는 타협안이었다. 기업도시법은 이렇게 서로 속셈이 다른 주체들간에 타협의 산물로 그해 12월 빛을 보게 된다. 당초 재계가 구상했던 기업도시의 취지와 정신은 법안에서 상당히 빛을 바랜 채로, 그렇다고 시민단체의 요구가 대폭 받아들여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채로 말이다. 아무튼 법안 제정 이후 외견상 기업도시 건설작업은 급물살을 타는 양상이다. 지난 4월15일 8개 지역 컨소시엄이 시범사업 신청서를 낸 데 이어 5월1일에는 기업도시법이 발효됐다. 다음달엔 4곳 정도를 시범사업자로 선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혹시나가 역시나’가 돼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무엇보다 기업도시 시범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일부 기업들의 면면이 미덥지가 못한 탓이다. 어떤 컨소시엄은 신청 마감일에 맞춰 급조된 흔적이 역력하고, 다른 컨소시엄은 정부의 토지용도변경 허가 의지를 떠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들린다. 심지어 어떤 컨소시엄은 상당수 기업이 실체없는 유령회사(페이퍼 컴퍼니)라는 소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500만평짜리 기업도시를 개발하려면 3년간 18조원이 투입되고 배후시설 건설에 10조원이 들어가는 등 최소한 28조원이 필요하다는 게 일반적인 셈법이다. 이처럼 막대한 돈이 들고 불확실성이 큰 사업에 그만그만한 기업들이 제아무리 컨소시엄을 이뤄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어느 정도의 투자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시범사업 컨소시엄 명단을 아무리 훑어도 국내 재계의 대표주자인 삼성·LG·SK·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수조원씩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빅4’는 ‘재벌 특구’라는 기업도시를 왜 외면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부가 낙후지역을 시범사업 우선 선정 대상으로 고집함으로써 대기업의 참여의지를 꺾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경쟁력 확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투자에 나서지 않는 법이다. 전경련은 2년전 기업도시 구상을 정부에 제안할 때 투자활성화, 일자리 창출,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환란 이후 기업의 설비투자율이 0.3%대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기업도시란 무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를 도외시한 채 지리적 여건이나 인력, 인프라가 뒤진 지역을 우선 선정대상으로 삼겠다고 하니 선뜻 투자에 나설 기업이 얼마나 있겠는가. 애초부터 재계와 정부는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 셈이었다. 정부는 기업도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다음달로 예정된 시범도시 선정때 낙후지역 개발과 균형발전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기업도시의 취지를 최대한 살려 엄정한 잣대로 참여 컨소시엄의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 과거 산업공단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정부의 특정 지자체 밀어주기 의혹이 나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더욱이 차기 대선과 총선을 염두에 두고 기업도시 문제를 정치논리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시범지역은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격에 못미치는 곳은 과감히 탈락시켜야 한다. 시범지역은 한두 곳이면 충분하다. 지역안배 차원이 아닌, 시범사업의 취지에 걸맞게 본보기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로서는 지역별로 고루 기업도시를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끼겠지만, 시범사업을 방만하게 펼칠 경우 시행착오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시범사업이란 말 그대로 모범을 보이는 사업이 아닌가. 기업도시가 80점짜리가 될지, 아니면 60점짜리가 될지, 그 운명은 이제 한달여 뒤의 정부 결정에 달려 있다. 박건승 산업부 차장 ksp@seoul.co.kr
  • [문희상 의장 본지 단독 인터뷰] “차기대통령 시대 꿰뚫는 ‘슈퍼파워’ 필요”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은 3일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된 만큼 민주당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과도 정책연대를 해야만 한다.”면서 “물론 연대에는 통합도 포함한다.”고 밝혔다. 이는 전날 관훈토론회에서 문 의장이 “민주당과의 통합을 논의할 때가 됐다.”고 한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자 한걸음 물러선 것이다. 4·30 재보선에서 참패한 데 이어 국회 본회의에서 ‘과거사법안’ 처리를 앞두고 당의 개혁파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등 내홍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문 의장과의 인터뷰는 국회 당의장실에서 1시간 10분간 이뤄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열린우리당이 이번 23곳의 재보선 선거에서 한 석도 못건졌다. 유례가 없지 않나. 공천실패나 실용노선 추구, 과도한 개혁 추구 등이 참패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완패의 원인이 뭔가. -유례가 많다. 재보선에서 거의 그랬다. 유권자의 생각이 다양하듯 모든 국민의 생각이 다양하고, 그같은 이유들이 다 조금씩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소장파는 재보궐 선거의 패인이 개혁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용만 주장한 적이 없다. 나는 동반성공론자다. 재보선 참패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복지부 장관의 조기 복귀설이 거론된다. -그 두분이 선거를 치르면 더 나았을까?대중성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대중성을 보면서 두분을 돌아오라고 하면 그분들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차기 대권주자로 정 장관, 김 장관외에 이해찬 총리,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문 의장이 대선 후보로 주목되고 있다. 문 의장이 거론되는 이유가 뭐냐.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된다고 하는데, 밀려서 와서 갈데 없는 것이다. 대권주자 거론은 내 뜻과는 상관이 없다. 차기 대권주자의 덕목은. -국민통합과 국가경영 능력이다. 하나는 민주성과 하나는 효율성으로,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차기는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향후 10년 아주 중요한 만큼 차기 대통령은 시대상황을 꿰뚫는 확고부동한 슈퍼파워가 필요하다. 대통령과 거리는 소원한가. -의장 당선 축하연때 말고 공식적으로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나거나 하지 않았다. 당정 분리가 확고히 됐다. 다만 정책적 협의는 역대정부에서 이렇게 많이 한 정부가 없다. 정책협의는 자주 많이 하라는 것이 대통령 뜻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차기 대권주자 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인가. -대선주자를 관리한다는 것은 새정권 창출이 목표가 되듯이 중요하게 된다. 아마 서로 상의하게 될 것이다. 민주당과의 통합은? -대전제를 했다. 왜 평소보다 무게가 실리냐면 과반수 의석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책결정을 여당 맘대로 할 수가 없다. 그것을 연대라고 한다면 정책연합도 한나라당, 민주노동당하고도 할 수 있다. 연대는 통합도 포함된 말이다. 제 정파와 연대하지 않으면 국회를 운영할 수가 없다. 새로운 결혼보다 이혼한 사람이 재결합하기가 어렵다. 4·30 재보선에서 경북 영천이 못내 아쉬웠을 것 같다. -옛날에는 영남에 내려가면 말도 못 붙였다. 그런데 이번 선거 때 영천에 갔더니 말을 다 받아주더라. 더구나 영천 선거에서 지역발전이 큰 이슈가 됐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자체가 지역감정이 없어졌다는 얘기다. 선거제도 개편이 지역주의 극복의 답이라고 보는가. -권역별 비례대표를 도입하면,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아니어도 뽑힌다. 선거가 없는 금년 내 정기국회에서 고쳐야 한다. 행정 체제 개편은 어떻게 보는가. -평소 지론이다. 행정서비스 개선 차원에서 그렇다. 시’군 통합도 하나의 개혁이지만, 지금처럼 도, 시·군·구, 읍·면·동의 단계를 하나로 줄이는 작업이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국가보안법은 대체입법을 찬성한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폐지가 지론이다. 형법보완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야가 대체입법에 합의한다면 소신과 달리 따를 수 있다. 386가운데 지도자 반열에 오를 만한 사람을 꼽아달라. -마음 속으로 꼽는다고 해도, 말하긴 어렵다. 황희 정승 말처럼, 검은소가 일을 잘 한다고 하면, 흰소가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내코도 석자인데, 내 것도 못하는 주제에 남을 품평할 때인가.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투자 의혹과 관련해 이광재 의원이 연관되지 않았다고 보는가. -이 의원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아직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믿는다. 유전의혹 특검을 하자는 얘기가 있다. -검찰이 이미 수사 중이라는 게 중요하다. 특검은 검찰 수사가 미진할 때 보완적으로 진행하면 된다. 법률 자체가 그렇게 돼 있다. 이 정부가 대통령 측근과 관련해 소홀했거나 덮으려고 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대법원에서 확정 무죄판결 받으려고 홀라당 다 공개했다. 그런데 우리가 특검을 반대한다고 하는 것은 옛날 발상이다. 당 의장 경선에서 한명숙 상임중앙위원은 도리어 여성 할당제의 피해를 봤다는 얘기가 있다. -여성이 사회, 특히 정치로 진출할 때는 아직 불이익을 받을까봐 만든 제도다. 한 위원처럼 특수한 한 사례를 보편화해 방식을 바꿀 수는 없다. 말이 안 된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차기 대권후보가 될 수 있다고 보는가. -다른 당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내가 본 박근혜 대표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유연하고 괜찮은 분이다. 온유하다. 검경의 수사권 문제는 어떻게 보는가. -잘 타협해 합의될 것으로 본다. 그 전에 자치경찰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자치경찰은 교통사고, 도난 등을 중심으로 하고, 전국적인 마약·테러·살인마 사건은 검찰이 하면 된다. 업무가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검찰이 자꾸 인권문제를 거론하는데, 그것은 옛날에 경찰의 수준이 아주 낮았을 때 얘기다. 검찰이 너무 자기 방어적인 거다. 여야가 과거사법 등을 비롯해 3개 항에 합의했는데, 한꺼번에 너무 양보한 게 아닌가. -판단의 주체가 누구인가. 아무도 얘기할 수 없다. 다만 여야가 조금씩 양보하는 민주적 과정이 중요하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신뢰를 쌓아야 한다. 누가 더 양보했느냐를 따지면 한이 없다. 합의해 놓고 약속하면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안 된다. 국회의장 자문기구인 정치개혁협의회가 지역정당을 허용하자고 했는데. -독일처럼 연방과 연방이 서로 법 체계가 다른 국가연합 같은 곳에선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에겐 지역정당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치후원금 제도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도를 늘릴 생각이 있는가. -지금 정해진 후원회의 한도를 오버해서 후원금을 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돈이 어떻게 들어오고 어떻게 쓰여지는지, 투명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간당원에게 앞으로도 힘을 줄 것인가. -기간당원이 꼭 필요하고, 그들에게 힘을 줘야 한다. 상향식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이것부터 흔들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 물론 실험을 하다 보니 문제도 있었다. 이번 공천처럼 상향식 공천이 능사가 아니라는 문제점은 물론 있다. 대담 구본영 정치부장 kby7@seoul.co.kr 정리 문소영 박지연기자 symun@seoul.co.kr ■ 4·30전패후 첫 인터뷰를 마치고 4·30 재보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유례없는 전패를 당한 뒤 사흘 만인 3일 문희상 의장과 마주앉았다. 예상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시원시원했다. 특유의 정연한 화법도 여전했다. 그는 “유권자의 생각이 다양하듯이 패인도 특별한 한가지 이유라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나의 대중성이 (박근혜 대표보다)떨어져서인지도 모른다.”며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기도 했다. 적어도 그의 겉모습에서 구질구질한 패장의 상흔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투박한 그의 얼굴에서 기자는 ‘겉은 장비지만 속은 조조’라는 그에 대한 세평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물론 그는 터프한 외모가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닮았다는 것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조조라는 별칭에는 머리만 좋고 원칙이 없는 마키아벨리즘을 연상시킨다며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차라리 제갈공명으로 불러 달라는 농담성 주문과 함께. 그를 조조에 비유하든, 제갈공명으로 부르든, 부르는 이의 마음이겠지만, 그가 원칙있는 전략가를 지향하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인터뷰에서도 “문 의장의 실용정치 때문에 선거를 망친 게 아니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지만,“원칙만 따라가면 탈레반주의, 전략만 따라가면 마키아벨리즘이나 인기영합주의”라며 ‘개혁적 실용주의’를 고집할 뜻을 분명히 했다. 최고위 당직인 의장을 맡은 지 한달 만에 재보선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그에게 대권에 도전할 의사가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한번도 대권에 나갈 의사가 있다는 말을 한 사실이 없고. 앞으로도 그런 마음이 변하겠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구본영 부장 kby7@seoul.co.kr
  • ‘名博 파문’ 고개 숙인 高大…부총장등 사퇴

    ‘名博 파문’ 고개 숙인 高大…부총장등 사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고려대 명예 철학박사 학위 저지소동과 관련, 고려대 부총장과 9명의 처장단이 3일 사퇴했다. 총학생회도 홈페이지를 통해 돌출된 행동이 일어나 물의를 빚은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안문석 교무부처장 등은 이날 오전 긴급회의를 갖고 일괄사표를 냈으며 이들의 사표 수리는 5일의 개교 100주년 기념식 이후 어윤대 총장이 결정키로 했다. 어 총장은 이날 이례적으로 발표한 사과문을 통해 “이번 학위수여가 이 회장님의 거듭된 겸양에도 저희가 굳이 고집해 성사됐음을 생각할 때 이 회장님 가족과 행사에 참석한 내외빈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고 밝혔다. 어 총장은 “돌발적 사태였지만 학생신분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비민주적ㆍ폭력적 행위로 스승이자 총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바른 교육을 통해 학생이 균형잡힌 시각과 절제된 행동양식을 갖추도록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고려대는 이 사과문을 이메일로 삼성에 보냈으며 삼성은 이를 그룹 홈페이지에 띄울 것을 검토 중이다. 고대 관계자는 “학위수여식 소동이 보도되자 동문으로부터 ‘시위를 한 학생을 징계하라.’는 수많은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면서 “하지만 학교측은 징계여부에 대한 방침이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려대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학위수여 저지를 주도한 대학연합조직 ‘다함께’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찬반 토론이 벌어지고, 접속이 폭주해 총학생회 홈페이지가 한때 닫혔다. ‘반운동’이라는 ID의 한 학생은 “이번 행동은 개념 없는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행동으로 전체 학생을 대변한 행동이 아니었다.”면서 학생회의 사퇴를 요구한 반면 ‘재학생’이란 ID의 한 고대생은 “잘못된 것을 묵인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네티즌들은 “학교측이 지나치게 삼성의 눈치를 본다.”는 의견과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으로 엇갈렸다. 유지혜 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MLB] 빅초이 ‘시위용 2루타’

    ‘빅초이’ 최희섭(26·LA 다저스)의 방망이가 식을 줄을 모른다. 최희섭은 2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홈경기에 1루수 겸 2번타자로 선발출장해 2루타 1개를 포함,3타수 1안타 1볼넷으로 팀의 2-1 승리를 뒷받침했다. 최희섭은 올시즌 3번째 2루타를 쏘아올리며 시즌 타율을 .259에서 .263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최희섭은 선발로 나선 최근 7경기에서 타율 .393(28타수 11안타)에 2홈런 5타점의 불방망이를 뽐내 상대 좌·우완 투수에 타라 최희섭과 올메도 사엔스를 번갈아 투입하는 ‘플래툰 시스템’을 고집하는 짐 트레이시 다저스 감독을 압박했다. 첫 번째 타석에선 상대 선발 숀 차콘에게 중견수 플라이로 허망하게 물러났지만,3회 1사 2루에서는 침착하게 볼넷을 골라 걸어나갔다. 1-1로 팽팽히 맞선 5회 무사 1루에 타석에 나선 최희섭은 차콘의 4구째를 노려 우월 2루타를 폭발시켰고, 선행주자 세자르 이스투리스를 3루까지 진루시켰다.3루 주자 이스투리스는 제프 켄트의 중견수 희생플라이 때 홈을 밟아 결승점을 올렸다. 결국 최희섭이 찬스를 만들어 3,4번 타자에게 연결하는 ‘테이블세터’의 역할을 충실히 해 승리를 엮어낸 셈. 3연승을 내달린 다저스(16승8패)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1.5경기차로 따돌리고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선두를 굳게 지켰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사설] 北은 미사일 쏘고, 南은 못본체 하고

    북핵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동해를 향해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이 단순히 군사훈련의 목적으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유리한 여건을 만들기 위한 벼랑끝 전술이라고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이 벼랑끝 전술로 재미를 보았던 1993년 북핵위기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미국의 집권세력이 바뀌었고, 일본이나 중국의 정치·군사적 생각도 변했다. 북한만 여전히 변하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위협은 고립만 자초할 뿐이다. 북한이 핵무기도 있고 미사일도 계속 개발하고 쏜다면 누가 두려워할까. 미국이나 일본이 두려워하기보다는 남북만 위험해질 뿐이다. 고집도 기댈 데가 있어야 통한다. 미사일 발사와 같은 북한의 행동은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참여국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북한핵은 6자회담의 틀속에서 대화와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 당사자인 북한이 극한행동으로 나머지 참여국들을 모두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보는 남한당국의 대응도 실망스럽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일본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사실이 타전된 시점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한참 뒤에는 이 미사일의 사거리가 120㎞밖에 안 되고 성능개량 실험용일 것이며, 종종 발사하는 연례훈련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북한이 종종 발사하는 미사일이어서 별것 아니라고 국방당국이 판단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국방당국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남의 집 불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고도의 판단에서 그랬다면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북한은 가만있는데 우리가 먼저 나서 사거리가 짧다느니, 연례훈련 수준이니 하는 것은 북한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한당국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북한의 고립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제 핵실험을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균형감각을 찾기를 바란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올해는 현대산업개발 정세영(77) 명예회장과 정몽규(43) 회장이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째 되는 해다. 자동차를 운영하던 경영인이 과연 건설을 잘 이끌겠느냐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대산업개발은 빠르게 새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일찌감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정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에 인생의 32년을 묶어두는 바람에 뒤늦게 독립했다. 정주영가의 다른 형제들이 현대건설에서 땀 흘리며 가꾸던 회사를 발판으로 분가한 것과 달리 정 명예회장의 ‘왕회장’ 독립은 2세 경영체계 구축과 함께 갑자기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 부자는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만들어야 팔린다.”면서 ‘현대자동차 신화’를 건설에 접목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교수하면 배고파”, 현대와 인연 정 명예회장이 현대와 인연을 맺은 때가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이다. 고려대 정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 명예회장은 왕회장 밑에서 잡역부 아르바이트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도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손을 도왔다. 이미 두 형님(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 정순영 현대시멘트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은 큰형의 메시지가 작용했다.57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으나 당리당략에 빠진 현실 정치에 빠져들기 싫어 정치 지망생의 꿈을 접고 대신 대학 교수의 길을 찾았다. 욕망은 모교 강단에 서고 싶었으나 우선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 채용 사실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왕회장은 “나랑 같이 일하자.”고 소매를 잡았다. 늘 그랬지만 그에게 맏형의 말은 제의나 권유가 아닌 명령이나 다름없었고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내 사업으로 생각하고 32년 동안 일궜던 현대자동차도 왕회장이 사실상의 장조카 MK(정몽구)에게 넘겨주라는 한마디에 순순히 따랐을 정도다. 첫 직책은 신입사원 채용위원장. 동시에 신규 사업 진출을 검토하는 일도 겸했다. 왕회장이 처음 맡긴 프로젝트는 시멘트 공장 건설에 필요한 국제개발국차관(AID)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둘째형(인영·85)과 함께 충북 단양의 광산을 사들이는 한편 미국과 국내에서 공장 건설을 위한 교섭을 벌여 어렵사리 성사시켰다. 하지만 그에게 가난보다 더 무서운 시련이 찾아왔다.30대 초반인데도 건강에 이상이 감지됐다. 간경변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마와 씨름하느라 회사를 나가지 못했다. 아내의 정성어린 간병과 용기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일에 뛰어들었다. 새로 부임한 곳이 단양 시멘트공장 공장장이었다. 사선을 넘나들던 건강을 되찾으면서 일에 미쳤다. 65년 대한건설협회 해외시찰단 일원으로 동남아 여러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마침 태국에 세계은행 자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정보를 캐낸 그는 이 사실을 서울 큰형님에게 보고한다. 정 회장은 왕회장으로부터 “태국에 그대로 눌러앉아 공사 진행상황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방문단에서 빠져 관련 정보 입수에 본격 나선다. 이렇게 해서 현대건설 방콕지점장이 됐고 파타니∼나리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고속도로건설 경험도 없었던 현대였고, 국내 최초의 해외건설 공사 수주로 기록됐다. ●‘포니 정’,32년의 자동차 인생 시작 1967년 시멘트 공장 기계를 사기 위해 미국에 있던 중 본사로부터 포드자동차와 접촉하라는 전보를 받는다. 포드 자동차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해 조사단이 방문했는데 서울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미국에서 포드측에 관심있다는 뜻을 전하라는 메시지였다. 즉각 움직여 자동차 산업에 대한 현대의 관심을 전달하고, 포드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둘째형의 적극적인 협상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같은 해 말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는 현대자동차 회사가 설립됐고, 초대 사장으로 임명돼 있었다. 이렇게 해서 ‘포니 정’의 32년 자동차 인생이 시작됐다. 자동차 진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포드와의 조립계약을 맺은 뒤 68년 3월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자동차 공장 구경도 못하고 자동차 공장을 지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를 수출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워갔다. 본격적인 공장 건설과 함께 인재 사냥에 나섰다. 급한 대로 현대건설에서 유능한 사람을 빼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양섭 부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 이 부장은 20년 넘게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면서 사장까지 역임했다. 윤주원씨도 현대건설에서 스카우트해 사장까지 지냈다. 신동원씨는 당시 상공부로부터 추천받은 경우다. 신입사원도 뽑기 시작했다. 이들이 오대양 육대주를 달리는 오늘의 현대차를 있게 한 일꾼들이었다. 마침내 68년 11월 제1호 ‘코티나’가 나왔다. 공장을 짓고 자동차를 생산하기까지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해 5월부터는 중형 승용차 포드 20M도 생산했고,8월에는 자체 설계한 첫 버스를 출고하는 저력을 발휘하면서 쾌속질주를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현대차의 질주를 시기하고 배 아파하는 소리도 들렸다. 경쟁사인 신진자동차와 정치권의 압박으로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70년초 1차 석유파동에 휩싸이면서 판매도 급감했다. 할부로 판매한 자동차의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때 막내 동생 상영(KCC명예회장·69)씨가 잠시 금강슬레이트 경영을 접고 부사장으로 와서 채권회수팀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 한 마디에 자동차 인생 종지부 언제까지 단순 조립생산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포드와 50대50 합작회사를 만들어 엔진 공장을 짓고 기술을 이전받아 자립의 길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포드가 약속한 지분 50%에 대한 자본 납입을 미루고 협상이 결렬되면서 ‘마이웨이’를 외쳤다.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74년 국산 1호차 조랑말 ‘포니’가 탄생했고 이를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모터쇼에 내놓는 기염을 토했다.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 76년 2월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고 중남미를 중심으로 수출까지 이끌어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는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세계 기업으로 커갔다. 아울러 96년 MK(정몽구 현대차 회장)가 그룹 회장을 맡을 때까지 9년 동안 왕회장을 대신해 현대호를 이끌었다. 이즈음 현대가의 2세 경영체제가 이뤄지면서 자동차 회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았다. 정 회장은 용산고, 고려대 경영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8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를 몰고가는 드라이버는 몽규 회장이었다. 하지만 삼성자동차 허가, 외환위기라는 거센 풍랑과 맞서 싸워야 했다. 여기에 노사분규 시련도 덮쳤다. 젊은 정 회장에게는 경영자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정 회장은 의연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방주, 김수중, 김판곤 등의 임원이 정 회장의 훌륭한 참모 역할을 했다. 하지만 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뒤 경영 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MK가 현대차와 기아차의 새 회장으로 오면서 몽규 회장은 부회장으로 내려앉는다. 장차 밀어닥칠 일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었다. 마침내 99년 3월3일 왕회장은 명예회장을 부른다. 왕회장은 “MK한테 자동차 회사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는 말로 자동차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잘못된 것 없다.”는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그렇게 해.”라는 왕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내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이끌었던 사업이었지만 거역하지 않고 “예”라는 한마디로 32년 자동차 인생을 접었다. 아울러 왕회장의 생각과 달리 아들 몽규도 함께 자동차를 떠나 현대산업개발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지어야 한다 새 사업을 가꾸고 키우는 일은 몽규 회장과 전문 경영인이 맡았다. 명예회장은 경영 자문만 할 정도다. 정 회장은 아파트에 자동차 제조업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사소한 하자가 나와도 불량품이 완전히 고쳐질 때까지 모든 공정을 멈추는 것이다. 현장 중시와 품질경영 기치를 내세웠다. 체면 따위는 내팽개쳤다. 경쟁사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삼성래미안 아파트 강남 일원동 주택전시관을 찾은 적도 있다. 지난해에는 용산 시티파크 모델하우스를 찾아 경쟁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파트 이름을 ‘I-PARK’로 바꾸는 등 변신도 꾀했다. 무리하게 덩치를 키우지 않는 것도 다른 건설사와 다르다. 안정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수주·매출 목표를 줄이는 것도 그에게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 만에 부동산 박사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서울 강남 역삼동 스타타워(아이타워)사옥 매각도 그의 판단이었다. 부채를 갚아 정상적인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로는 최고의 조건으로 넘겼고, 부동산 개발회사가 특정 사옥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돈이 된다 싶으면 정든 사옥도 팔 수 있고, 부동산 회사가 개발 이익을 남기고 사옥을 옮기는 것은 결코 흉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부동산업자는 시장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낭만적인 ‘포니 정家’혼맥 ‘포니 정’과 정 회장은 결혼 과정이 비슷하다. 낭만적이다. 처음부터 명문가를 골라 배필을 정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소개해준 여성과 사랑을 싹 틔우다가 결혼에 골인했다. 정 명예회장은 대학 시절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한때 사무실 여직원에게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유학길에 오르는 바람에 첫사랑의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유학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봤고 현대건설 입사 이후에는 일에 파묻혀 서른이 넘도록 노총각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뉴욕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의 소개로 박영자(69) 여사를 만난다. 박 여사는 부산에서 올라와 이화여대 3학년에 다니던 귀여운 단발머리 학생이었다. 첫눈에 사로잡혀 매일 데이트를 할 정도였고 세 번째 만나던 날 프러포즈를 했다.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큰형님과 형수에게 인사를 시켰는데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어했다. 명문대가를 따지지 않는 현대가의 결혼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으로 내려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은 뒤 만난 지 100일이 안돼 약혼하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정 명예회장은 큰딸을 결혼시키면서 노신영 전 총리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 사위 경수(51)씨가 노 전 총리의 장남이다. 노씨는 서울대 교수로 국제정치 전문가다. 노 전 총리 차남은 중앙일보 고 홍진기 회장 딸 홍라영씨와 결혼했다. 이로 인해 노신영가는 국내 굴지의 그룹인 현대, 삼성가와 동시에 사돈 관계를 맺었다. 정 회장의 결혼도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순수함 그대로였다. 역시 반 중매 반 연애로 이뤄졌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김나영(39) 여사를 만났다. 결혼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 몽규 회장이지만 몇몇 절친한 친구한테는 결혼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나영씨는 연대 수학과를 나온 재원. 키도 크고 미인이었다. 첫 만남에서 정 회장은 상당한 호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정 회장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키도 크고 집안도 좋고 미인인 데다 마음까지 곱다.(아까운데)친구 중 누구 소개 시켜주면 안 될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친구들이 오히려 격려해 줬다.“너보다 키 작은 여성을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 천생배필이다.”며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영씨는 당시 대한화재보험 김성두 사장의 딸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화재는 기울어가는 회사였다. 정략적 결혼이었다면 잘나가는 집안과 결혼했을 터이지만 현대 집안에서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정씨 일가의 결혼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계기로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시절 사돈인 대한화재를 살리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위장계열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중점 관리 대상으로 지정돼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회사는 뒤에 대한생명으로 인수된다. 범 현대가의 경영 특징이지만 현대산업개발에도 처가쪽 사람이 없다. 정 회장 처남이 잠깐 현대자동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근무했으나 지금은 독립,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 딸 유경(35)씨는 김석성 전 전방회장의 1남4녀중 막내인 종엽씨와 결혼했다. 몽규 회장에 이어 재계 인맥을 형성한다. 유경씨는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한 뒤 현대산업개발에서 잠시 근무했다. 종엽씨는 미국 벨뷰대학 출신으로 전방 계열의 내의류 생산업체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역시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나 1년 동안 사귀다가 결혼하게 됐다. ●다재다능한 전문 경영인 포진 현대산업개발 전문 경영인은 삼각편대로 구성됐다. 자동차에서 정 회장과 함께 현대차를 키웠던 전문 경영인과 현대산업개발에서 잔뼈가 굵은 건설통이 주력부대다. 여기에 금융기관 등에서 스카우트한 전문가 그룹이 한 축을 버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 이방주 사장은 정 명예회장과 정 회장의 핵심 브레인. 전형적인 재무통. 현대자동차 재경본부장과 사장을 거쳤다. 정 회장이 현대산업개발로 옮길 때 함께 배를 갈아탔으며 현대차·현대산업개발을 키운 1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너의 신임이 남달리 두터워 자동차에 이어 건설회사에서도 대표이사 사장을 6년째 맡고 있다.ROTC 포병장교 출신. 연극계 대부 고 이해랑씨가 부친이며 문화계에도 아는 사람이 많다. 건설업계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주택협회회장을 맡을 정도로 부동산과 건설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보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정 명예회장과는 고교·대학 동문인 셈이다. 김정중 사장은 77년 현대산업개발에 입사, 국내외 현장을 누빈 건설업계 산증인. 기술연구소장, 건축본부장, 영업본부장을 거쳤다. 과거 현대아파트는 물론 I’PARK까지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현대산업개발이 지은 아파트다. 마케팅팀 및 영업기획팀을 신설하는 등 공격적인 전략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전고와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김택 현대역사 사장은 현대산업개발 에 입사해 관리본부장, 리모델링 사장을 거쳐 2003년부터 현대역사 사장을 맡고 있다. 고속철도 용산역에 8만 2000평 규모의 복합쇼핑몰 ‘스페이스9’를 운영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다. 소탈한 성격에 정확한 판단과 추진력을 갖춘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용산고, 고려대를 나와 정 회장과 고교·대학 동문이다. 인텔리전트 빌딩, 첨단 홈네트워크 시스템 구축 업체인 아이콘트롤스는 김대철 사장이 맡고 있다. 주거 공간의 유비쿼터스 환경을 구축, 주거혁명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현대산업개발 자재담당 임원과 기획실장을 지냈다. 서라벌고와 고려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출신이다. 장동열 아이앤이 사장은 음악·시·영화 등에 관심이 깊다. 따뜻한 카리스마로 감성경영을 한다는 평을 받는다. 의사결정까지는 심사숙고하지만 일단 정해진 일은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을 지녔다.2년전 현대산업개발의 기계·전기팀에서 떨어져 나간 회사다. 광주고와 전남대 건축공학과를 나왔다. 현대엔지니어링플라스틱 이건원 사장은 현대차 부품개발분야에서 27년 동안 몸담으면서 국내 자동차 부품 및 자동차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현대산업개발 유화사업부로 출발,2000년 분사한 회사. 충남 당진에 공장을 갖고 있으며 자동차 내외장재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분야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제품 사용 범위를 밥솥, 김치 냉장고 등 생활가전으로 넓혀가는 중이다. 아이앤콘스는 부산 아이파크 프로축구단장과 현대산업개발 영업기획 임원을 역임한 곽동원 사장이 이끌고 있다. 경남고, 성균대를 나왔다. 중·소규모 아파트와 빌라를 짓고 건물 리모델링, 개발사업 등 부동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업체다. 유일한 금융관련 회사인 아이투자신탁운용도 있다. 유가증권 투자·운용과 투자자문 업무를 하면서 신뢰받는 금융서비스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표는 글로벌에셋운용 총괄본부장을 역임한 우경정 사장이다. 프로축구단 아이파크스포츠는 이준하 사장이 책임진다. 정 회장과 용산고 동문이자 오랜 친구다. 어려서부터 양쪽 집안끼리 가까웠다. 연대 출신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를 받았다. 현대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영업·마케팅, 홍보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데 있어 모험적이고 개척정신이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 경영 목표를 ‘한국형 클럽스포츠의 성공적 사업 모델 구축’으로 정했다. 우승과 동시에 스포츠단에도 사업 마인드를 접목시키기 위해 사업다각화와 경영합리화를 꾀하고 있다. chani@seoul.co.kr ■ ‘만능 스포츠맨’ 정몽규 회장 현대산업개발 CEO들은 유난히 스포츠에 애착을 갖는다. 스포츠로 뭉친 인맥경영을 보는 듯하다. 특히 정몽규 회장은 스포츠광이다.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다. 선수 수준인 종목만 5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수영은 프로급이다. 승마, 수상스키, 스키(요즘은 보드를 탄다)도 수준급이다. 수상 경력이 있는 종목도 있다. 그는 격한 운동을 좋아한다. 철인3종경기,MTB(산악 자전거타기) 마니아다. 기업인 중심으로 구성된 철인3종경기 동호인이다. 얼마전에는 스키장에서 보드로 스피드를 즐기다가 안전 펜스를 뛰어넘으면서 어깨를 다친 적도 있다. 기계 위에서 하는 운동은 별로다. 가끔 한강변이나 남산에서 뛰기도 한다. 정 회장은 “콧구멍이 시커머지더라도 밖에서 운동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한다. 골프는 할 줄은 알지만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 운동할 때는 운동에 전념해야 하는데 골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도 싫다. 정 명예회장도 30년 이상 수상스키를 즐겼다. 바쁜 일정 중에도 양수리에서 물 위를 활주하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수상스키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선수 육성과 보급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이방주 사장도 스포츠를 즐기는 CEO다.1년에 3∼4회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다. 최근 10㎞를 1시간 안에 뛰었다. 시간이 나면 등산을 한다. 회사 차원에서는 프로축구 아이파크 스포츠단을 운영한다. 회사 차원의 지원도 대단하다.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10여곳의 재개발단지를 수주하는데 상당한 보탬이 됐다고 한다. 대부분의 스포츠단이 그렇듯이 아이파크 축구단도 해마다 적자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적극 밀어준다. 스포츠단 이준하 사장은 재미있는 스포츠에 사업성을 가미한 경영을 한다. 올해 적자폭을 줄이고 돈을 벌 수 있는 별도 사업을 추진, 스포츠단을 모회사에 손을 내밀지 않을 정도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chani@seoul.co.kr ■ 정세영·몽규 父子 ‘막노동 경영수업’ 정세영 명예회장과 몽규 회장은 경영 수업의 첫 출발도 비슷하다. 이 때 형성된 인맥은 건설이나 자동차 회사의 초석을 다지는 주역이 됐다. 정 명예회장은 부친이 부산 피란시절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막 벌여놓은 현대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큰형(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둘째형(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이 미군 공사를 수주해 오면 시장에 나가 현장에 투입할 인부를 모아오고 자재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이 때 만난 이춘림씨는 훗날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다. 이 전 회장은 그래도 건축도(당시 서울대 건축학과 3학년생)라서 설계를 하고 공사 감독도 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그야말로 잡역부이자 막노동꾼이었다. 막노동판에서 만난 인맥은 현대건설을 떠날 때까지 끈끈하게 유지된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외아들 몽규에게 혹독하게 경영 훈련을 시켰다. 대학생이었던 정 회장은 방학 때면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고된 잡일을 해야 했다. 임직원들도 모르게 했다. 땡볕 아래서 리어카를 끌고 숙식도 독신자 기숙사에서 해결하는 생활이었다. 정 회장은 울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것을 가장 기억이 남는 과거로 떠올린다. 자식뿐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도 가혹했다. 어디에 내놓아도 강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게 훈련시켰고 인맥을 관리했다. 자동차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경영인들을 잘 관리했고, 그 뒤에 현대산업개발로 모셔와(?) 중역을 맡겼다. 이방주 사장을 비롯해 김판곤 전 현대역사 사장 등이 자동차에서 날리던 선수들이다. 이들은 정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키운 베테랑 경영자들이다. 정 회장 역시 자녀 교육에 엄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학생인 큰아들 준선(13)이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영국으로 홀로 유학보냈다. 준선이는 재능을 인정받아 당당히 이튼스쿨에 자력으로 입학했다. 따로 돌봐주는 사람 없이 기숙사에서 생활토록 하고 있다. 호랑이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바위에서 떨어뜨리는 식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베트남전 종전 30주년] 끝나지 않은 40년전 악몽…반전운동·종교 귀의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한국은 32만여명을 파병, 전사 5099명, 부상 1만 1232명이라는 희생을 안았다. 한국군에게 피해를 당한 베트남 사람들도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두 나라는 1992년 수교한 뒤 서로의 상처를 보살펴 주며 과거의 악연을 씻고 있는 중이다. 베트남전 종전 30주년을 맞아 전쟁 희생자들의 고통 속에서도 돈독해지고 있는 양국 관계를 살펴봤다. ■ 참전 생존자들의 고통 “1년에 몇번씩은 퀴논의 그 지긋지긋한 전략촌을 찾아갑니다. 손에는 M1 소총을 들고 있죠. 그리고는 저의 오발로 밀림에서 죽은 30대 여인의 치켜뜬 두 눈과 목에서 분수처럼 피를 쏟아내던 정 일병이 겹쳐집니다. 소리치며 깨어나면 가슴이 콱 막혀 숨을 못 쉬겠어요.40년이나 지났으면 잊혀질 법도 하련만….” 지난 28일 오후 서울 명동의 커피숍. 떨리는 목소리로 40년 묵은 악몽을 얘기하던 박정익(가명·59·목사)씨의 눈가가 젖어든다.1965년 12월3일. 이 날은 박씨의 가슴에 핏빛 화인(火印)으로 남아 있다. ●밀림 헤매는 ‘김상사’ 박씨에게 베트남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194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박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거들다 65년 10월 맹호부대 기갑연대 3중대 소속으로 베트남 중부 캄란 땅을 밟았다. 전쟁보다 가난이 더 무섭던 시절.1년만 버티면 집 두 채를 산다는 말에 자원했다. 하지만 전장에 나서기엔 박씨는 너무나 여렸다. 실전 투입 한달도 안돼 퀴논 지역 작전에서 동료를 잃었다.“살아서 소 몰고 고향에 같이 가자.”고 약속했던 친구였다.“그때는 눈이 뒤집혀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무조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저 자신이 점점 ‘짐승’이 돼 갔지요.” 이듬해 11월 무사히 귀환해 수원에서 큰 포목점을 열었지만 전쟁의 악몽은 베트남 해변가의 안개처럼 머릿속을 짓눌렀다. 그를 ‘구원’한 건 신앙의 힘이었다. 뒤늦게 신학대학에 진학해 개척 교회를 열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도 베트남의 상처를 말하지 못했다.“퀴논에서 목회를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짙은 그림자 남긴 베트남의 악몽 강인용(가명·부산)씨는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이 자기와 가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베트남에서 귀환해 가정을 꾸렸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가지 못했다. 스트레스와 불안에 가족들을 괴롭혔고 결국 아들과 부인이 차례로 목숨을 끊었다. 현재 강씨는 세상과 연락을 끊은 채 살고 있다. ●속죄의 길로 택한 반전 운동 베트남의 기억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다른 쪽으로 바꾼 경우도 많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김용삼(55)씨는 ‘추악한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왜곡된 현대사 바로잡기에 뛰어들었다. 해병대 5중대 소속으로 68년 7월 전쟁터에 뛰어든 그는 이듬해 4월 최전방이던 호이안 지역 전투에서 오른손에 총알 관통상을 입고 제대했다. 우연찮게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를 돌보게 됐고 이를 계기로 한국 근현대사는 물론, 베트남 전쟁의 본질 규명에 나섰다. 경남 마산의 시민사회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 대표 김영만(59)씨는 해병대 포병 3대대 11중대 소속으로 참전했다.67년 2월14일 ‘짜빈동 전투’에서 코에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200명의 해병대는 짜빈동 전투에서 월맹군 3000여명을 격퇴했다. 해병 전투사는 이를 ‘베트남전 최고의 해병 전투’로 기록한다. 김씨 역시 ‘학살’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짜빈동 전투 이틀 전 30대 남자 포로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았다. 당시 포로 즉결 심판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죽은 포로의 어머니가 찾아와 ‘아들을 찾아달라.’고 울며 애원했다.“고향에 계신 친할머니 같았어요.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트남에 오기 전의 정상적인 청년으로 돌아온 거죠.” 김씨는 화랑무공훈장도 보훈 혜택도 마다하고 제대한 뒤 모든 것을 잊고 ‘희망의 땅’ 미국으로의 이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민 준비를 위해 호텔 견습생으로 들어갔다가 척추를 다쳤다.30대의 대부분을 하반신 불구로 보냈고 부인은 행상에 나섰다. 2003년 3월 그는 배상현씨 등 열린사회희망연대 회원들을 전쟁을 막기 위한 ‘인간방패’로 이라크에 파견했다. 김씨는 “이라크 파병은 우리 민족이 베트남전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잘못된 결정”이라면서 “전쟁을 없애는 것이 베트남에서의 죄갚음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고엽제후유증 8만명 고통 PTSD는 치료도 못받아 “포탄 날아온다. 모두 피하라.” 2003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 LA의 USC 부속병원. 낯선 한국말 고함이 병동의 새벽 정적을 깼다.“여보, 제발 정신 좀 차려봐요.”눈을 뒤집은 채 병상에서 소리치고 있는 목사 김모(58)씨의 손을 잡고 부인 김모(56)씨가 눈물로 애원했다. “여기가 어디야. 또 월남 아니야.”김씨는 결국 꽁꽁 묶여 정신병동으로 갔다. 원인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백마부대 소속으로 1968년 9월부터 15개월을 베트남에서 보냈던 그는 현재 중풍과 PTSD 증세로 대소변도 못 가눌 정도가 됐다.PTSD는 전쟁 등 극단적인 사건에 노출된 뒤 나타나는 불안 장애. 헛것이 보이거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등 충격을 현실처럼 느끼기도 하고 한없이 차가워지기도 한다. 미국은 베트남전에 의한 PTSD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PTSD로 150만여명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2만여명이 자살을 택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파월 장병들이 PTSD에 시달리고 있다. 대구·경북지역 고엽제 환자 280명 중 60%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그러나 보상은커녕 치료마저 요원하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병상 일지에 관련 증세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어야 전투와 연관된 상해로 인정받기 때문에 PTSD 전상자는 공식적으로 없다.”면서 “미국처럼 PTSD 환자를 위한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구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아버지는 PTSD로 고통받았고, 그 고통이 유영철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전이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엽제의 고통도 끝나지 않았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와 후유의증 환자는 8만여명. 그러나 판정 조건이 너무 엄격하다. 진단받은 사람 가운데 17.9%만이 후유증으로 판정받고, 이중 58.3%만이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는다. 고엽제는 참전자 2세의 생명도 위협하고 있다.2000년 182명의 부산·경남지역 고엽제 후유증 환자 2세 연구에 의하면 선천성 기형이 15건, 전신 허약이 12건이나 나타났다.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건강 장애를 보였다. 고엽제 피해로 미국뿐 아니라 호주와 뉴질랜드도 2억 4000만달러를 보상비로 챙겼다. 그러나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32만여명을 보낸 한국은 한 푼도 못 받았다. 이두걸 이효용기자 douzirl@seoul.co.kr ■ 당시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예비역중장 “주한美軍 차출 막으려 파병” “주한미군을 자꾸 나가라고 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패망 직전의 월남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주위로부터 많이 듣고 있어요.”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 5년 가까이 파병부대를 지휘한 채명신(80) 예비역 육군 중장은 베트남전 종전 30주년과 관련해 이 전쟁이 주는 교훈이 뭐냐고 묻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반미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사회 일각의 풍조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요즘 그는 베트남참전동지회와 6·25 유공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강의차 지방출장도 자주 다니고 있으며, 옛 전우들도 자주 만난다고 했다. “올해가 월남전 종전 30주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투부대 파병 4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답게 그는 종전보다는 전투부대 파병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듯 했다. 월남 파병을 ‘용병(傭兵)’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자 파병의 불가피성을 들었다. ●朴대통령 “쉽지 않은 전쟁” 고민 “당시 파병은 주한미군 철수와 연계돼 있었습니다. 미국이 월남에 지상군을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을 밝혔을 때 주한미군을 빼는 것은 시간문제였지요. 미국 본토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제한적이었거든요.” 당시 우리보다 GNP가 많고 군사력도 월등한 북한이 오판할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파병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 경제발전과 5·16 이후 불편했던 미국과의 관계 등도 고려됐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파병 직전 박정희 대통령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던 자신을 불러 전투병 파병을 논의했었다는 얘기도 털어왔다.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전투수행에 관한 한 군의 최고 전문가다. 당시 파병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았던 만큼 박 대통령도 적잖은 고민을 한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박 대통령에게 월남에 파병되면 게릴라전을 수행해야 하는데, 뚜렷한 목표의식과 인간적인 존경을 받는 카리스마의 리더십, 은신과 보급이 가능한 지리적 환경 등을 호찌민부대가 갖추고 있어 싸움은 쉽지 않겠지만 미국을 붙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민간인 무차별 총질 결단코 없었다” 최근 월남전과 관련해 이따금씩 보도되고 있는 베트남 양민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참전 의미를 훼손하려는 의도적인 비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주민으로 가장한 베트콩들이 많은 마을에서 수색작전을 하는 과정에 수류탄을 던지고 달아나는 일부 주민들과 교전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무런 혐의도 없는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총질을 한 적은 결단코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게 당시 사령부의 지휘방침이었다고도 했다. 실제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의 전과(戰果)를 거론했다. 당시 한국군은 사살자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베트남에 주둔하는 8년간 4만명 이상을 사살했는데 총이나 수류탄도 대략 2만정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베트콩들은 동료가 쓰러지면 시체보다 총을 먼저 챙길 정도로 무기를 생명처럼 여겼는데 이 정도로 많은 무기를 노획한 것은 한국군이 얼마나 알뜰하게 베트콩만 골라서 공격했는지에 대한 증거라는 것이다. 미군과의 작전지휘권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문제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파병 직전 박 대통령도 현지에서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작전 지휘권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고집, 결국 그의 뜻대로 됐다. “미군은 당시 한국군 병력이 2만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미군의 통제를 받으라고 강요했지만, 애초에 미국의 (월남전) 개입이 잘못됐고, 잘못된 군사전략에 우리가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게 내 신념이었습니다.” ●용병 논란 우려 독자 작전권 고집 한국군이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되면 ‘용병 논란’이 생길 게 뻔하고, 미군도 전쟁을 청부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작전권을 가질 때만 이 전쟁의 성격 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로 설득했더니, 의외로 미군들도 수긍을 하더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이 결국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 그는 경제개발을 첫 손에 꼽았다. 파병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점차 인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금융기구에서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했던 차관을 선뜻 내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또 현대건설 등 월남전 특수에 힘 입은 것도 분명한 사실 아니냐고도 했다. 그는 ‘고엽제’ 등 전쟁의 부작용의 대해서도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고엽제 후유증이 그렇게 심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고엽제 부작용 이렇게 심할줄을” 문민정부 때부터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를 후유증으로 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해 왔다. 현재 1만 2,000명이 후유증 판정을 받았으며,3만명은 의증 판정을 받은 상태다. 참전유공자회 책임자를 맡은 만큼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서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철군한 이후 베트남을 방문하지 않다가 수년전 관광차 하노이만 잠깐 한차례 들렀다고 한다. 또 월남전과 관련해 제작된 각종 영화 등도 관심있게 봤다. 하지만 상당수 작품의 경우 허구가 지나쳐 고개를 돌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요즘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 등에 대해 회고록을 집필중이다. 잘 하면 올 연말쯤이면 책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그는 나중에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는 현지 사령관을 마친 뒤 귀국, 군사령관을 마치고 군문을 떠났으며, 이후 스웨덴과 그리스, 브라질 등의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기업 1000여곳 진출… 한류열풍 한국사람으로서 지금 베트남에 간다면 자신감을 만끽할 수 있다. 이제 한창 ‘성장’의 맛을 들인 이 후발 개도국에서 한국의 이미지는 경제적·문화적으로 선망의 대상이다. 불과 30년전 총부리를 겨눈 적(敵)이었다는 역사는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2005년 베트남의 정서는 친(親)한국 일변도다. 하노이 도심 곳곳에서는 ‘SAMSUNG’과 ‘LG’와 같은 한국 기업의 간판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마티즈, 매그너스 등의 승용차는 30년전 탱크가 밟고 다녔을 법한 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한다. 한국 제품이란 사실이 부각돼야 시장 점유율이 올라갈 만큼 베트남에서 한국의 경제적 이미지는 ‘선진국급’이다. 한국의 베트남 투자는 가속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까지 총투자액이 40억달러를 넘었고 최근 3년간 투자금액은 타이완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KOTRA 하노이 무역관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은 농업을 뺀 베트남 전체 취업 인구의 3%(35만명)를 고용하고, 베트남 수출액의 10% 이상을 기여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주’한 한국 기업은 1000개는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섬유·의류·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출발한 우리 기업의 베트남 진출은 90년대 중반부터 철강·통신·사회간접시설을 향해 정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양국간 교류 확대가 ‘돈벌이’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1997년 드라마 ‘의가형제’로 시작된 한류 열풍은 이제 완전한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베트남의 주요 TV채널에선 저녁 황금시간대에 ‘파리의 연인’과 ‘리멤버’ 등 한국 드라마끼리 시청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뉴스도 경제뿐 아니라 스포츠·문화·사회현상과 같은 시시콜콜한 영역까지 보도돼 서울과의 시차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다. 한국 유학이나 한국 기업 취업을 위한 ‘한국어 배우기’ 붐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해외에선 드물게 한국어 인증시험이 치러지는 곳이 베트남이다. 응시생이 월 200∼300명에 이른다.TV에서 한국어 강좌가 방영되고, 호찌민과 하노이의 주요 7개 대학에 한국어 학과가 개설돼 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나를 놓고 하나가 되자/권도갑 원불교 도봉교당 주임교무

    가정에서 부부 사이와 부모·자식간에는 하나가 되어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 및 아랫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를 나누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면 갈등이 일어난다.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고 고정관념을 내세우면 언제나 상대와 충돌이 생기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를 앞세우며 업적을 쌓고 성공하는 일에 마음을 다 쏟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가정과 학교에서 끊임없이 교육하고 있다. 주위와 조화를 이루려면 항상 나를 놓고 상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를 없앤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과연 나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오늘날 경쟁이 극심한 사회에서는 나를 두고 무아로 산다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승리하고 앞서야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생각에 깊이 세뇌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간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나를 위해서 공적을 쌓고 부자가 되며 명예를 얻는다 하여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있으면 항상 대결할 상대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항상 실패를 걱정하고 긴장하며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몸은 지치고 마음은 황폐해져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을 통해서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 함께하는 인연을 소중히 하고 사랑함으로써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나를 낮추고 상대와 하나가 되려면 반드시 자신이 먼저 충만해 있어야 한다. 이미 나 자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사실 나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기적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가슴이 풍요로워지면 스스로 여유가 생겨서 나를 내려놓는 것이 손쉬워진다. 이제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자. 먼저 상대의 말을 내가 하는 말로 듣는 일이다. 부부간에 서로의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로 들어보자. 아이들의 말을 천천히 나의 말로 들어보자. 부모님 말씀을 자신이 하는 것으로 조용히 경청해 보자. 그러면 자연히 내가 없는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나와 너를 나누어서 서로를 판단하며 살았다. 옳고 그름으로 나누며 좋고 나쁨으로 분별하여 나를 높이고 앞세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끊임없는 갈등과 마찰이 생겼던 것이다. 또 하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며 이를 내가 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보자. 그러면 그가 되는 순간 나는 없어지고, 텅 비워진다. 그러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 세상이 모두가 나뿐임을 느낀다.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와 아랫사람이 하는 행동을 볼 때 이들을 내가 하는 것으로 바라보자. 그러면 조금씩 그가 나의 생각을 말하고 나의 뜻을 실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수많은 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모든 사람은 바로 나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무슨 분별이 있고 경쟁이 있겠는가? 그와 나는 처음부터 하나이다. 이렇게 되면 나의 의식이 나 한사람 속에 갇히지 않는다.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 되고 그를 경험한다.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내 의식이 점점 확장되고 서로가 하나임을 체득할 것이다. 이는 정말 사랑의 귀한 체험이 된다. 생활하면서 이 경험을 나누고 느껴보자. 우리는 그동안 어리석음에 가려서 이 몸 하나만을 나인 줄로 생각하여 작은 나, 국한된 나, 집착된 나를 나로 알고 살았다. 그런데 상대를 통해서 다양한 나를 경험하다 보면 그동안 전혀 보지 못한 나를 보게 되고, 알지 못했던 나를 찾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안목이 열린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나를 바라보면 볼수록 삶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4월28일은 소태산 대종사가 큰 깨달음을 얻고 원불교의 문을 연 지 90년이 된 날이다. 이 땅에 하나의 진리인 일원상의 소식을 만천하에 알린 최고의 경축일이다. 모두가 깨어나서 너와 내가 하나된 세상을 즐기도록 하자.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누려보자. 이것이 지금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요청하는 일이 아닌가? 권도갑 원불교 도봉교당 주임교무
  •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리민(李敏·81) 여사는 10년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을 지낸 천레이(陳雷·90)의 부인으로 조선족이다. 12살에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1942년부터 45년까지 3년여 동안 김일성·김정숙 부부, 김정일과 함께 당시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인근 브야츠크 마을의 소련군 야영지에서 88특별여단에 편입됐다. 리 여사는 이 곳에서 김일성, 최용건, 안길, 강건, 최현, 김일, 최광 등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는 빨치산 대원들을 만났다. 리 여사는 후에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다. 리 여사는 하얼빈 자택에서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 내내 노전사답게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60년이 넘는 과거사임에도 정확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42~45년까지 김일성부부와 활동 리 여사는 김일성이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북한 지도자로 옹립됐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리 여사는 “당시 88여단 내에서 최용건과 김책 등이 김일성보다 상급자였다. 이들은 해방 후 투쟁 방향과 진로를 모색하는 내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해방 후 중국과 북한의 공산세력 확대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88여단의 소련측 책임자가 ‘조선인 가운데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 것이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최용건 등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의 군사적·정치적 능력이 탁월하고 나이도 우리보다 젊다. 그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고 추대 이유를 설명했다고 회고했다. ●문학적 재능 많았던 김일성 김일성은 88여단 시절 ‘단결무’라는 가무극을 직접 만들어 조선인 부하들과 함께 공연하고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리 여사는 “정열적이고 활달했던 김일성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줬으며 문학적 재능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 여사는 당시 김일성이 직접 작사했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고 하시던 말씀. 아아 귀에 쟁쟁해….”라는 노래인데 당시 조선인 전사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결혼 주례 김일성과의 일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결혼 주례 사건이다. 당시 리 여사는 중국인 천레이와의 연애 사건에 휘말렸다. 천레이는 자아비판과 함께 공산당에서 제명된 상태였고 조선인 동지들도 리민의 장래를 위해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을 만류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단순한 연애가 아닌 ‘혁명적 동지의 결합’이란 김정숙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일성이 중국인 지도부를 설득, 전격적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다.1943년 섣달 그믐날 리민 부부는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날 최광·김옥순 부부도 백년가약을 맺었다. 리민 부부는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대를 받는 각별한 관계였다.9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통역없이 이들을 단독 접견했다. ●김정일은 전쟁놀이 즐겼던 골목대장 리 여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첫 만남을 42년 가을로 기억하고 있다.“42년 가을 강보에 싸인 젖먹이 김정일을 처음 봤다. 이후 45년 8월15일까지 김정일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고 밝혔다. 당시 리 여사는 통신대대에 근무, 상관인 최용건을 자주 만났다. 당시 최용건은 김일성과 같은 막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막사에 가면 가끔 어린 김정일을 만날 수 있었는데 피부가 검은 데다 키가 작고 총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김정일은 아버지의 큰 모자를 쓰고 목총을 갖고 군대놀이를 즐겨했다. 큰 모자 때문에 눈이 가려진 채 뛰어다니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고 막사에 손님이 찾아오면 중국말과 한국말로 번갈아 ‘엄마, 아빠’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전해지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파티가 벌어지고 흥에 겨워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평소 바지를 입기 싫어하던 김정일이 이날만은 스스로 바지를 찾아 입고 또래 유치원생들을 이끌고 전선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주위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94년 7월20일 김일성 주석 장례추도대회가 끝난 직후 리민 부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우리 부부가 조의를 표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앞으로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내 뺨에 갖다 대는 무례를 범했다. 옛날 김정숙 동지의 얼굴과 김 위원장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서였다.”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의 천레이 부부 접견 사진은 이례적으로 노동신문에 공개됐다. 리민 부부는 98년 9월 공화국 창건 50돌에 다시 초청을 받아 27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만주 항일전사 리민 리 여사의 항일 투쟁은 남한의 역사책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30년대 만주 항일 운동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조선의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함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창립했다. 이 부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45년 종전 당시 1000여명 가운데 300여명이 조선인이었다. 리민은 중국인 리자오린(李兆麟) 장군이 총사령인 3로군 예하 부대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1로군(동만주),2로군(지린성 동부),3로군(북만주)으로 재편된다. 당시 김일성은 1로군 제2방면 6사장(師長·대대장급)으로 일본군에 의해 동북항일연군이 와해되는 시점인 41년 전후로 상급자들이 대부분 사망,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최용건은 2로군, 김책은 3로군 소속이었지만 김일성보다 나이는 물론 직책도 높았다. 1924년 헤이룽장 오동하에서 태어난 리 여사는 부모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 인근에서 살다가 압록강을 건너 헤이룽장 삼강평원에 정착했다.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사망했고 천레이는 오빠와 절친한 전우였다. 리 여사는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무장투쟁 부대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유격대원들의 취사 보조원, 간호원 등 비전투원으로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리 여사는 소총이나 기관총 사격은 물론 말타기에도 익숙해져 완전한 전투원으로 임무를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37∼38년 무렵 일본군의 토벌공세가 거세지면서 송화강 유역 삼강평원 일대의 부금이나 밀산·완달산 등지에서 큰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3로군은 기병대가 주력인 일본군에 맞서 수목이 울창한 삼강평원의 늪지대로 퇴각하는 유격전술을 폈다. 1938년 여름 완달산 전투에서는 300여명의 부대원 가운데 고작 60여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일본군은 군인과 개척단 수천명을 동원, 동서남 3면을 포위하고 고립 전술을 폈다. 서서히 좁혀 오는 포위망 속에서 6일간 물 한 방울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다. 결국 북쪽 절벽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상당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 리 여사는 “일본군 총에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가던 전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고 회상했다. 일본군은 30년대 말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유격대가 숨을 만한 산림을 아예 불태워 근거지를 없앴다. 배고픔과 추위는 그런 대로 참았지만 일본군의 교활한 귀순작전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 전우들의 배반이 가장 가슴 아팠다. 리 여사는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그가 속한 3로군은 41년 국경선을 넘어 옛 소련령으로 들어갔다. 천레이 부부는 문화대혁명(66∼76년) 당시 반동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실권 장악과 함께 복권됐다. oilman@seoul.co.kr ● 리민 여사는 1924년 중국 헤이룽장성 오동하에서 태어나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1942∼1945년 김일성 주석과 부인 김정숙 등 북한 핵심 인사들과 88특별여단에서 활동하며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중국인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식 주례를 김일성 주석이 할 정도였다.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반동으로 몰렸다가 복권됐으며, 남편 천은 후에 헤이룽장성 성장을 10년간 지냈고, 리 여사 역시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설훈 전의원 만난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항일 전사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통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천레이(陳雷·90) 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의 부인이자 정협 부주석을 지낸 리민(李敏·81)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리해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기 위해 찾아온 설훈 전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 항일동북연군에서 10년 가까이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리 여사는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6·15 공동선언’을 전해 듣고 며칠 동안 기쁨에 들떠 있었다고 한다. 리 여사는 “2002년 6·15선언 2주년을 맞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도자기’ 2개를 만들어 그 중 하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지만 김대중 선생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동안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은 설 전 의원은 “리민 여사의 통일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남은 여생 동안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고 말했다. 리민 여사가 기증한 통일기원 도자기는 김대중 도서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oilman@seoul.co.kr
  • ‘모래와 안개의 집’ 29일 개봉

    ‘모래와 안개의 집’(House of sand and fog·29일 개봉)은 모래처럼 부서지기 쉽고, 안개처러 잡히지 않는 삶의 희망 혹은 절망에 관한 영화다. 한때 조국 이란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나 강제로 추방돼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 온 매수드 아미르 베라니(벤 킹슬러). 늘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출퇴근하는 그는 외견상 성공한 이민자의 전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족들도 모르게 그가 하는 일은 고속도로 공사장의 막노동이다. 자신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자식들 남부끄럽지 않게 교육시키고, 좋은 짝을 찾아 맺어주는 게 최대 인생 목표인 평범한 가장이다. 이혼의 상처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캐시(제니퍼 코넬리).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집 한채다. 작고 허름하지만 아버지가 30년간 모은 돈으로 장만한 집은 그녀가 절망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힘들게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공통점 외에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 두사람을 연결하는 고리는 다름아닌 집이다. 세무당국의 실수로 경매에 넘겨진 캐시의 집을 매수드가 싼 값에 구입하면서 이들의 예기치 않은 악연은 시작된다. 어떻게든 집을 되찾으려는 캐시와 집을 개조해 비싼 값에 되팔려는 매수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펼친다. 여기에 우유부단하고, 충동적인 경찰관 레스터(론 엘다드)가 가세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소한 오해와 고집이 불러온 사건의 결말치고는 대단히 참혹하다. 소유권 분쟁이 첨예해질수록 캐시와 매수드가 보여주는 행동은 정상적인 권리주장이라기보다 집착에 가깝다.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더 이상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후까지 놓지 않는 지푸라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거대한 운명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 이들에게 작은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안드레 듀버스 3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CF감독 출신 바딤 페렐만이 스크린으로 옮겼다. 어린시절 구소련을 떠나 빈에서 로마로,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한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은 어디에서든 고국의 바다를 그리워하는 매수드 가족의 모습에 투영돼 있다.‘간디’의 벤 킹슬리와 ‘뷰티풀 마인드’의 제니퍼 코넬리가 펼친 열연이 눈부시다.15세 관람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현금영수증 10% 더 내라니…

    현금영수증 10% 더 내라니…

    결혼을 앞둔 이모(28·여·회사원)씨는 지난 24일 혼수 장만을 위해 서울 용산전자상가를 찾았다가 황당한 일을 당했다. 가전제품 매장에서 TV, 세탁기, 냉장고 등 740만원어치를 고른 뒤 현금을 주면서 현금영수증 발급을 요구했더니 종업원은 대뜸 “영수증을 받으려면 대금의 10%를 더 내야 한다.”고 했다. 연말정산 소득공제를 위해 영수증을 달라고 계속 졸랐지만 종업원은 “그렇게 하면 내가 해고당한다.”며 버텼다. 너무 화가 난 이씨는 다른 가게를 찾았지만 사정은 비슷했다. ●악덕 상혼에 소비자만 피해 잇따라 올해부터 현금영수증 제도가 도입됐지만 악덕 상혼이 기승을 부리면서 소비자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소득 노출에 따른 세금(소득세·법인세 등) 증가를 피하기 위해 업소들이 영수증 발급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영수증 발급의 대가로 웃돈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는 올들어 발급거부, 웃돈요구 등 현금영수증 관련 소비자 신고가 24건이나 접수됐다. 서울신문 사건팀이 용산전자상가, 아현가구단지, 종로세운상가 등지의 상점 30곳을 취재한 결과 전체의 4분의1도 안 되는 7곳에서만 현금영수증을 정상적으로 발급하고 있었고 나머지 23곳에서는 영수증 발급을 아예 거부하거나 발급의 대가로 최고 10%의 웃돈을 요구했다. 서대문구 아현가구단지내 한 가구점에서 이탈리아산 대리석 식탁의 가격은 380만원이었지만 현금영수증을 요구하자, 가게주인은 “10%인 38만원을 더 내라.”고 했다. 그는 “현금영수증을 받기 위해 침대, 소파, 식탁 등 2000만원어치를 현금으로 사가고 200만원을 더 낸 손님도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밀수품 유통지역은 더욱 심각 특히 밀수품 유통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디지털카메라,CD플레이어,MP3 등은 현금영수증 발급이 훨씬 더 어려웠다. 가격흥정 때부터 현금판매만 고집하던 가게주인은 “카드는 5%, 현금영수증은 10%를 추가하는 게 이 동네의 철칙”이라고 말했다. 용산전자상가에서 일하는 박모씨는 “카드로 결제하면 수수료 4∼5% 정도를 떼어야 하지만 현금영수증을 발급하면 판매내역이 바로 국세청에 보고돼 부가세 10%를 고스란히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말에 과세표준(세금부과의 기준이 되는 소득액)이 커져 세금이 불어나기 때문에 가격을 올려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현금영수증을 발급해 준다고 해서 웃돈을 요구할 근거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내야 할 세금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행위일 뿐”이라고 밝혔다. ●국세청 대대적 지도단속계획 국세청은 현금영수증 발급을 일부러 기피하거나 발급대가로 웃돈을 요구하는 업소 등은 ‘잠재적 탈세자’로 보고 다음달부터 대대적인 단속에 나설 계획이다. 국세청 조세과 김철민 과장은 “별다른 이유 없이 고의로 발급을 기피한다면 당국으로서는 탈세 혐의가 있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법상 현금영수증의 발급은 권고사항일 뿐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조사·단속 과정에서 마찰도 예상된다. 국세청 부가가치세과 양철호 사무관은 “현재 법적 논란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면서 “다음주 안으로 구체안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금영수증제도 현금으로 5000원 이상 구매한 사람에게 업소에서 영수증을 떼어주는 제도. 개인은 이를 통해 연말정산 때 소득공제 혜택을 받는다. 상거래 질서를 바로잡고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과세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도입됐다. 유영규 이효연기자 whoami@seoul.co.kr
  • [★들에게 물어봐] “연기자 안칠현입니다”

    “이제 연기자 안칠현으로 불러주세요.” 가수 강타가 연기자의 길에 도전장을 냈다. 그는 새달 2일 첫 전파를 타는 KBS 2TV 월화 미니시리즈 ‘러브홀릭’에서 주인공 서강욱 역으로 출연한다. 사고뭉치의 문제 학생이지만 ‘기면증’을 앓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율주(김민선)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바치며 운명적 사랑을 나누는 ‘사나이 다운’ 캐릭터를 연기한다. 최근 가수 출신 연기자들이 득세하고 있지만, 성공한 케이스는 극히 드문 것이 사실. 실패에 대한 부담은 없었을까.“음반시장이 불황이라 ‘끼’를 방치할 수만은 없어 평소 고집을 꺾고 드라마에 출연했어요. 하지만 정말 부담이 많이 되네요.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해 성공한 예가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최선을 다해 보려고요.” 부담 때문일까. 그는 댄스 가수의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본명인 ‘안칠현’으로 활동한다고 밝혔다. 통상 가수 출신 연기자들이 본명을 쓰는 이유는 연기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이미지 분리 전략’의 일환. 하지만 그는 “지금도 ‘H.O.T의 힘으로 버틴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팬들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면서 “연기를 통해 제 속에 숨겨진 낯선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막상 화면에 그려진 자신의 연기 모습이 만족스럽냐고 묻자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첫 술에 ‘연기 잘한다.’는 평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요. 다만 ‘안칠현을 보면 극중 강욱으로 느껴진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겁니다.” 대본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강욱이가 돼 가는 것 같아 자신감이 생기고 있다며 미소짓는다. 상당한 연기력이 요구되는 멜로물이 아닌 상대적으로 연기 부담이 적은 코믹물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처음엔 ‘말랑말랑’한 코믹물을 생각했는데, 대본을 보고 ‘다시는 이런 작품에 출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캐릭터가 쏙 맘에 들었어요. 가수 이미지 벗고 싶은 것도 한 이유가 됐죠.”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만큼 스크린에도 진출할 꿈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의 음악까지 직접 만들고 싶다는 그다. 과연 이번 드라마를 통해 ‘강타’의 이미지를 벗고 ‘안칠현’으로 거듭 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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