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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닉스 이천공장 증설 물건너 갔다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정부 관계부처들도 하이닉스반도체의 이천공장 증설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이닉스는 난감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경기도 의회는 불합리한 규제라며 정부에 공장증설을 촉구했다. 박병원 재정경제부 제1차관은 5일 KBS1라디오에 출연,“하이닉스 문제는 수도권의 공장 증설과 관련한 규제만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수도권 상수원 구역에서 독성물질인 구리를 배출하는 환경 문제가 심각한 고려사항으로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내 다른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이닉스의 이천공장 증설은 어렵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면서 “하이닉스도 이같은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산업자원부는 일찌감치 ‘청주행’ 쪽에 무게를 둔 상태다. 산자부 고위관계자는 “대안이 전혀 없다면 몰라도 청주에 기존 공장이 있는 만큼 하이닉스가 이천만 고집하지 말고 청주로 가는 방안을 더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앞서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하이닉스가 청주행을 택하면 모든 문제가 즉각 해결될 것”이라면서 “그러지 않고 이천을 고집한다면 현행법 때문에 공장 증설에는 아주 긴 시간이 요구될 것”이라고 말했다. 청주행을 대안으로 제시한 셈이다. 하지만 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는 “해마다 라인 1개의 증설이 필요하고, 라인 1개에 3조∼4조원이 투자된다.”면서 ‘증설 불가론’에 대해 난감해했다. 이 관계자는 “반도체는 투자시점이 정말 중요한 산업”이라면서 “투자의 적기를 놓치면 시장도 고객도 모두 잃게 된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회사의 공식 입장은 없다.”면서도 “현재의 경기 이천공장에서 투자가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 라인 1개에 2000명의 고용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기도의회 규제개혁특별위원회 등은 4일 대정부 결의문을 통해 “하이닉스 등 설비 투자계획을 갖고 있는 33개 기업의 55조 6500억원의 투자를 즉시 허용해야 한다.”면서 “팔당 상수원의 수질 보호에 기여하지 못하는 자연보전권역을 합리적으로 재조정하고 친환경적인 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수도권에서의 과도한 규제를 즉각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일자리 창출과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도 공장 증설은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백문일 이기철기자 mip@seoul.co.kr
  • [일요영화] 마오리족 소녀가 추장을 꿈꾸는데…

    #웨일 라이더(SBS 밤 1시05분) 웨일 라이더는 뉴질랜드 정부가 자국의 대규모 영화제작을 지원하기 위해 2000년에 설립한 ‘뉴질랜드 필름 프로덕션 파운드’의 투자를 받아 제작된 최초의 영화.1987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웨일 라이더’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부문에 초청돼 국내에 소개되면서 당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또 2003년 선댄스 영화제, 로테르담 영화제,2002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바 있다. 뉴질랜드의 작은 해변마을에 사는 아름다운 소녀, 파이키아는 마오리족 추장 혈통의 마지막 후손이다. 하지만 파이키아가 태어날 때 그녀의 어머니와 쌍둥이 남동생이 함께 숨을 거둔다. 파이키아의 할아버지는 사내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했지만 여자아이가 살아남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죽어버린 손자와 외국으로 가버린 아들에게 실망한 ‘코로’할아버지는 마을의 소년들을 모아 추장이 되는 훈련을 시키며 전설 속의 예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남자아이가 추장이 될 거라는 믿음에 따라 마을의 장남들을 모아다가 훈련을 시킨 것이다. 파이키아는 훈련에 동참하여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행동 자체가 부족을 망치는 짓이라고 꾸중할 뿐이다. 하지만 파이키아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코로’할아버지는 남자아이들을 뛰어넘는 그녀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반드시 남자아이가 추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한 전설을 느낄 수 있는 영화로 각박한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준다.2004년작.101분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70대 노부부 “힘 있는 한 이웃사랑”

    70대 노부부가 하루도 쉬지 않고 5년 동안 폐품을 수집해 모은 10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쾌척했다. 경남 진해시 경화동에 사는 김영권(75) 할아버지와 배추선(70) 할머니는 2002년부터 한푼씩 저축한 1000만원을 연말연시 모금운동을 하는 언론사에 기탁했다. 노 부부가 사는 집은 마당이 고물상을 방불케 할 정도로 폐지와 고철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폐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인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군종합정비창에서 퇴직한 김 할아버지는 병을 앓다가 한 스님으로부터 “이웃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부터 길에 버려진 폐품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배 할머니는 “처음에는 구질구질한 폐품을 가져와 집 곳곳에 쌓아 놓는데 정말 싫었다.”면서 “나중에 고집스러운 남편의 진짜 뜻을 알고 난 뒤부터는 오히려 함께 돕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쇠약했던 김 할아버지는 매일 폐품을 모으면서 건강을 회복했다. 할머니도 폐품 수집을 거들었다. 노 부부는 2002년부터 적금을 넣듯이 폐품을 팔아 매일 1000∼5000원을 은행에 저금했다. 이렇게 모은 돈이 5년 동안 1000만원. 폐지가 1㎏에 30원인 점을 감안하면 하루 무려 200㎏를 모아야 6000원이기 때문에 모두 1825일을 한결 같이 저금한 셈이다. 동네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전모(65·여)씨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아야 몇 푼 되지도 않을 텐데 그렇게 큰 돈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도운 것에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난청증세를 보이다 지금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는 “남은 힘이 있는 동안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열심히 폐품을 모아 돕고 싶다.”며 행복하게 웃었다.진해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한·미 8~9일 美産쇠고기 검역 협의

    한·미 두나라는 오는 8∼9일 경기도 안양에 있는 국립수의검역과학원에서 미국산 쇠고기 검역과 관련한 기술적 협의를 벌인다. 미국은 미국산 쇠고기 전수 검사와 뼛조각 검출시 불합격 판정 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수입위생 조건에 변화가 없겠지만 전수 검사를 샘플 조사로 바꾸는 문제 등에는 다소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해상 농림부 차관은 3일 “뼈를 제거한 살코기에 국한한다는 수입위생 조건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협의 대상을 위생조건이 아닌 기술적 문제로 국한하겠다는 뜻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샘플조사가 아닌 전수검사를 하면서 일부 박스에 뼛조각이 나왔다고 전부 반송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면서 “샘플조사로 전환하는 문제를 포함해 개선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협의에서 미국산 쇠고기에서 다이옥신이 허용치 이상 검출된 사실도 짚고 해명을 요구할 방침이다. 한국측 대표는 이상길 농림부 축산국장, 미국측 대표는 척 램버트 농업부 차관보로 전해졌다.한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정부내 다른 관계자는 “농림부가 일부 여론에만 편승, 국제적으로 불합리한 검역 절차를 고집하고 있다.”면서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FTA 협상에서 우리측에 상당히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주요그룹 총수들 새해 화두

    삼성, 현대·기아차,LG그룹 등 주요그룹들은 2일 일제히 시무식을 갖고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이건희 삼성, 정몽구 현대차, 구본무 LG회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 적극적인 사고, 고객 우선주의 등을 강조했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창조적 혁신으로 경쟁력 강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올해 신년사를 통해 ‘창조적 혁신’을 화두로 꺼냈다. 우리의 경제 현실과 삼성이 처한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은 만큼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서울 신라호텔에서 서울지역 임원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시무식에서 “일본은 앞서가고 중국은 쫓아오는데 우리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영원한 1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경쟁력을 잃는 순간 일류의 대열에서 사라진다.”며 “삼성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재의 위치에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있는 말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처방도 내렸다. 이 회장은 “정상의 새 주인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우리(삼성)만의 경쟁력을 갖자.”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급변하는 국내외의 여건과 흐름을 신속하게 읽고 미리 대응해야 하며, 세계의 인재들이 삼성에서 상상력을 펴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경영시스템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실패와 창조는 물과 물고기 같아서 실패를 두려워하면 창조가 살 수 없다.”며 실패를 받아들이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현재 우리의 대표 산업은 순환의 고리에 따라 곧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로 옮겨갈 것”이라며 “반도체, 무선통신의 뒤를 이을 신수종 사업을 찾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회장은 또 잃어버린 활력을 되찾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업이 선두에 서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글로벌 리더로 도약하는 원년”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은 올해를 글로벌 리더로 도약하는 원년으로 선언했다. 이를 위해 ‘고객 우선’과 ‘글로벌 경영 안정’을 내걸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안팎 기업환경이 좋지 않은 때여서 역발상의 공세가 눈길을 끈다. 직접 언급하지 않았을 뿐,‘뚝심의 현대정신으로 위기를 돌파하자.’는 주문이 강하게 묻어났다. 정 회장은 “위기 때마다 임직원 여러분이 일치단결해 회사를 한단계 도약시켰던 경험을 되살린다면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2년 전 ‘고객가치 혁신’(리노베이션)을 강조했던 정 회장은 “브랜드나 감성, 품질과 같이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는 아직까지 선진업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연구개발, 생산, 판매, 정비 등 모든 경영 활동에 고객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라.”고 주문했다. 또 “빠른 속도로 글로벌화를 추진해 오면서 그만큼 직면하는 위험 요인들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라며 “내실있는 체제로 글로벌 경영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기아차가 일을 너무 크게 벌인다.’는 일각의 우려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실제 체코·슬로바키아 신규 공장, 인도·중국 제2공장, 충남 당진 일관제철소 등 올해 마무리짓거나 시작해야 할 투자가 줄지어 있다. 정 회장은 “수익성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만큼 마케팅 능력과 브랜드 가치 향상, 원가 경쟁력 제고 등에 노력을 더 해달라.”고 당부했다. 시스템 경영의 정착과 효율적인 내부 의사소통을 각별히 언급한 것도 눈에 띈다. 비자금 사건때 내걸었던 기업문화 쇄신 약속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풀이된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구본무 LG그룹 회장 “일등경영 통해 미래 변화 주도”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고객중심 일등경영’을 강조했다. 구 회장은 2일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올해는 지난 60년의 성과를 기반으로 100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기업으로 발전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라며 “고객 가치를 선도하는 ‘일등 경영’을 통해 미래 변화를 주도해 나가자.”고 독려했다 2000년대들어 줄곧 ‘일등LG’를 천명했지만 오히려 지난해 일부 사업분야에서의 부진에 따라 위축된 그룹의 분위기 반전과 재도약을 주문한 것이다. 구 회장은 “지난 60년 간 선도적인 제품 출시로 국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켰다.”면서 “앞으로 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로 LG 브랜드를 새로운 가치창출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5년 전,10년 전 관행을 고집하며 실수만 하지 않으려는 타성에 젖은 습관이 있다면, 과감히 벗어던져야 한다.”면서 “적극적인 도전과 혁신을 권장하고 그 과정에서 학습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문화를 하루속히 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다 적극적인 공격경영을 하겠다는 의지로 읽혀진다. 구 회장은 또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워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경영진이 미래를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이를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며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LG만의 성장전략을 세울 것을 주문했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후세인사형 파문] 교수형 직전 “나를 희생물로 바친다”

    30일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재판정에서도 당당함과 고집스러움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이라크의 대통령”이라며 판사를 준엄하게 꾸짖고 “총살형을 바란다.”고 주문했다. 아랍어로 ‘맞서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중동의 패자로 미국에 대항하다 몰락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가 남긴 말들이다.●나는 나를 희생물로 바친다. 내 영혼이 순교자의 길을 걷는다면 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교수형 직전)●당신들은 이라크 국민이 아닌 점령자의 이름으로 재판하고 있다.(2006년 8월 쿠르드족 학살 첫 재판에서)●나는 35년간 당신들의 지도자였는데, 나가라고 명령하느냐.(2006년 1월29일 재판에서 퇴정명령을 받고)●우리의 적은 미국인이 아니라 이라크를 파괴하고 있는 미국 정부다.(2005년 12월21일 재판에서)●내 이름은 사담 후세인이다. 나는 이라크의 대통령이다. 협상을 하자.(2003년 12월 체포된 뒤)●범죄자인 아들 부시가 인간성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2003년 3월 미국이 침공한 첫 날)●미국은 중동 석유를 손에 쥐기 위해 이라크를 파괴하려 한다. 궁극적으로 전 세계의 원유와 경제뿐 아니라 정치까지 손에 넣으려고 한다.(2002년 9월 유엔 총회의 경고 메시지에 대해)●미국은 그동안 자신의 지도자들이 세상에 뿌린 가시를 거두고 있다.(2001년 9ㆍ11테러에 대해)
  • [서울신문 신춘문예-소설당선작] 그들만의 식탁/황시운

    뼛조각을 쥔 남자의 손가락에 양념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댔다. 엄마는 간혹, 맨밥만 끼적이고 있는 내 쪽으로 슬며시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밀어주었다. 그러나 꼬리찜의 기름이 둥둥 뜬 나박김치, 허연 밥풀이 앉은 겉절이, 되는 대로 헤쳐 놓은 나물들까지, 어느 것 하나 남자의 흔적이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된장찌개로 수저를 가져가려다 또다시 멈칫했다. 밥풀이 잔뜩 묻은 남자의 숟가락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찌개냄비를 휘젓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자의 수저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 시선을 의식한 엄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양 볼이 메어져라 우겨 넣은 음식들을 우물대다 말고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의 수저를 흘끔댔다. 남자도 쥐고 있던 자신의 수저를 내려다봤다. 수저엔 여전히 밥풀과 음식의 양념들이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커다란 식탁 앞에 둘러앉은 우리 세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남자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러나 남자는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엄마 역시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찌개를 떠먹었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맞은편의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기엔 우리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커다란 식탁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와 엄마의 얼굴이 차츰 흐릿해졌다. 나는 잠시 멀거니 찌개 위에 뜬 기름기를 바라보았다. 찜 그릇이 다 비워지자 남자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남자의 시선은 엄마가 덜어놓은 내 접시 위 꼬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속이 울렁댔다. 나는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왜, 좀 더 먹지 않고…….” “그러지 그러냐. 이거, 오늘 고기가 유난히 단데 말이다.” 엄마의 걱정에 남자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이미 내 접시 위의 꼬리를 덥석 집어 들고 있었다. “전 다 먹었어요. 마음 쓰지 말고 더 드세요.” 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엄마를 향해 짐짓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집안 가득 밴 음식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뼈에 붙은 고깃점을 다 훑은 남자가 크게 트림을 하며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는 급히 남자에게 물수건을 건넸다. 그러나 남자는 건네받은 물수건으로 손가락에 묻은 음식 찌꺼기를 닦는 대신 땀이 흐르고 있는 얼굴과 목덜미를 훔쳐냈다. 남자는 엄마의 네 번째 남자였고 내게는 세 번째 저기요였다. 엄마의 남자들에게 나는 단 한번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게 아버지는 엄마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흰 피부의 키가 큰 남자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흰 피부와 큰 키를 가진 엄마의 다른 남자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호칭을 생략하려 애썼지만 부득이한 경우 나는 늘 그들을 저기요, 라고 불렀다. 저기요, 식사하시래요. 저기요, 전화 받으세요. 저기요……. 코끝을 쏘는 고추냉이의 냄새와 생선 비린내를 감지하는 순간, 경화제를 섞은 실리콘을 휘젓던 팔에서 힘이 쑥 빠지고 말았다. 독한 경화제 냄새 속에서도 용케 부품들의 생생한 냄새를 찾아내고야 마는 유난스러운 후각에 진저리가 쳐졌다. 모두들 퇴근하고 난 토요일 밤, 휑한 제작실의 공기가 후각을 한층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충분히 저은 실리콘을 골판지 틀 안에 천천히 붓자 후각을 자극하던 부품들의 냄새도 실리콘 반죽 속에 갇혀 버렸다. 드라이어의 온도를 최대한 낮춰 틀 위에 가져다 댔다. 원칙적으로 실리콘 틀은 자연건조시켜야 하지만 납품기일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제작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지금쯤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는 아내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별스러운 걸 기대했던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소박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대수로울 것 없는 잡담이나 나누며 함께 밥 먹는 일상을 원했던 것뿐이라고.” 오 년여의 시간을 정리하던 날 그가 말했다. 시종일관 차분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던 나와 달리, 그날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놓았다. 도저히 널 이해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할 땐 눈물이 그렁하게 맺히기도 했다. 그 뒤로도 서너 번쯤 더 그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막막한 심정으로 마주 앉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 헤어졌다. 나는 누군가와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잡담이나 늘어놓으며 보내게 될 일상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얼마 후, 그는 결혼을 했다. 드라이어를 내려놓은 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러나 곧 담배를 담뱃갑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제작실 문에 걸린 금연 푯말을 일별한 후 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를 서성이다 빈 사무실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과식 소화불량에 파라나 정―변비 식욕부진에 카이셀 과립’. 맞은편 건물 위에 세워진 전광판의 글자들이 색깔을 달리하며 우르르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자신들 사이에 괴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좁은 사무실은 전광판이 뿜어내는 빛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다. 볕에 널어뒀던 북어껍질을 거둬들이는 엄마의 손이 붉게 빛났다. 노을은 엄마의 손뿐만 아니라 부엌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엄마는 나무 도마 위에 북어껍질을 뒤집어 올려놓고 절굿공이로 타닥타닥 두드렸다. 좁고 동그란 엄마의 어깨가 유연하게 들썩였다. 엄마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북어껍질을 물에 담가둔 뒤 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살짝 데친 숙주를 잘게 썰고 으깬 두부를 면포에 싸 꼭 짜냈다. 핏물을 뺀 소고기까지 다져낸 엄마는 준비해둔 재료들을 한데 그러모아 양념하고 치대기 시작했다. 얇은 면 티셔츠가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엄마의 뒷모습엔 다양한 표정이 담겨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음식을 만드는 순간의 엄마는 다른 어떤 때보다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뒷모습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언제나 그늘져 있었고, 그늘 속의 엄마는 날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엄마는 물에 불린 북어껍질을 건져 비늘을 긁어냈다. 물에 분 북어껍질은 탱탱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그러고는 반듯하게 잘라낸 북어껍질에 소를 넣어 아물린 뒤 계란 옷을 입혀 지져냈다. “너무 기름지면 개운한 맛이 덜하니까 주의해야 해. 소고기 대신 북어대가리로 육수를 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지.” 지져낸 전은 한 김이 빠지자마자 냉동실에 넣어 식혔다. 잠시 뒤 엄마는 북어대가리와 무, 그리고 파만으로 우려낸 육수에 나박나박 썬 호박과 함께 식혀뒀던 전을 넣었다. 엄마는 국물이 한소끔 끓자 된장을 풀면서 다시 말했다. “된장은 마지막에 풀어라. 처음부터 장을 풀고 끓이면 떫은맛이 나기 십상이거든. 맑게 끓이려면 국간장으로 간을 해도 괜찮고.” 엄마는 썰어놓은 파와 미나리를 끓고 있는 탕 속에 집어넣으며 처음으로 내 쪽을 돌아봤다. “지금이야 쓸데없는 소리 같겠지만 들어둬라. 들어두면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있겠지.” 신문을 뒤적이던 저기요가 엄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식구가 쓰기엔 너무 큰 식탁은 곧 엄마의 음식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저기요는 벌써부터 커다란 식탁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뒀지만 어글탕의 비릿한 냄새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다시 위가 저릿대기 시작했다. 엄마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엄마보다는 엄마가 만든 음식에 홀려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엄마가 야물게 차려내는 음식에만 열중할 뿐, 엄마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엄마의 남자들이었지만 솜씨 좋은 요리사를 찾는 단골손님들 같기도 했다. 엄마 역시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틈에서 나는 맛깔스러운 음식을 차려내는 요리사의 딸로서 그들 모두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엄마의 남자들과 엄마 사이에 음식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따위도 문제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마치 잘 차려진 음식상에 어울리지 않게 놓인 이 빠진 종지 같았다. 나는 날마다 타들어 갔다. 엄마가 만들어내는 온갖 맛깔스러운 음식들도 나를 살찌우진 못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이렇게 대단하신데 어떻게 넌 그렇게 비쩍 마를 수가 있었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어머니, 한영이 얘, 다이어트 한답시고 걸핏하면 굶고 그러죠?” 처음 인사를 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날 그가 말했다. 엄마는 말없이 엷게 웃어 보였고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서글서글한 성품의 그는 식사를 하는 내내 감탄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엄마와 나의 세 번째 저기요는 흐뭇한 얼굴로 그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음식 타박 없이 무엇이든 잘 먹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날, 두 남자가 게걸스레 먹어댄 음식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나는 저녁 내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야, 어머니 음식 솜씨 정말 대단하시더라. 나 완전히 횡재한 기분인 거 있지? 어머니 닮았으면 너도 보통 솜씨는 아닐 거야. 그렇지?” 그 뒤로도 그는 종종 벌쭉벌쭉 웃어가며 만족스러워하곤 했다. 자신의 예상이 완벽하게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실망하는 기색은커녕 넉살 좋게 객쩍은 농담을 던지며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딸은 엄마 닮는다는데, 그 피가 어디로 가겠냐? 안 해봐서 그렇지 너도 했다 하면 보나 마나 끝내줄 거라니까.” 그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의 말이 사실이면 어쩌나 싶어 한동안 몹시 불안했다. 엄마는 그 유난스러운 손맛 때문에 한순간도 자신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손가락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쭉 고르고 하얗던지, 처음 봤을 땐 꼭 멀미라도 치밀 것처럼 속이 다 울렁댔더랬지. 그렇게 훤칠한 양반이 매번 앉은 자리에서 해장국을 두 사발씩이나 뚝딱뚝딱 비워내는데,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던 건지 볼 때마다 속이 짠한 게….” 결국 나는 솜씨 좋은 해장국집 외동딸이 자신의 가슴을 짠하게 한 남자를 위해 뚝배기에 아낌없이 퍼 담아줬던 선지 덩어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었다. 한번도 묻지 않았고 엄마 역시 이후의 일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었지만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기가 치밀 만치 하얀 피부를 가졌던 그 훤칠한 양반은, 사실 선지 해장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혼기 놓친 해장국집 외동딸 따위가 눈에 찰 리 만무했을 것이다. 입에 맞는 해장국을 먹기 위해 일생을 걸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엄마의 첫 번째 남자이자 나의 아버지였던 양반은 머지않아 해장국보다 더 나은 먹거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끝. 통속적이지만 명쾌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가정식 백반으로 식당의 메뉴를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음식 장사에 매달렸다. 타고난 손맛 때문인지 식당은 언제나 손님들로 붐볐고, 덕분에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리 생각해 보려 해도 엄마는 그때 음식 장사를 시작해선 안 되는 거였다. 선지 덩어리를 퍼 담아 주다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들쳐 업고 기껏 다시 시작한 일이란 게 음식 만드는 일이었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해도 엄마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무책임했다. 생의 대부분을 음식 냄새 속에 갇혀 지내는 동안, 엄마는 요리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점점 무관심해져 갔다. 엄마가 찾아낸 새로운 삶이었을 저기요들조차 모두 엄마의 백반 집과 갈비 집의 단골손님들이었다. 이를테면 엄마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온 셈이었다. 남자들과 살림을 합칠 때마다 엄마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행동했다. 간혹 내 의견을 물어오기도 했지만 내가 보이는 반응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물론, 단 한번도 엄마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돼먹지 못한 심술을 부려 엄마와 저기요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사실, 엄마의 방으로 옷가지 몇 벌을 옮겨왔을 뿐인 단골손님들에게 내가 불손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각자 어딘가 조금씩 불편하고 거북하긴 했지만 우리들의 동거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만만한 게 뭐라고, 아무튼 제작팀을 무슨 개똥대가리로 안다니까! 납품기한 하나 제대로 조절 못하는 즈이 놈들 책임은 간데 없고 허구헌날 나만 들볶으면 안 될 일이 된대? 에이, 썅!” 작업가운을 벗어 던진 제작팀장이 담배를 빼물었다. 그러고는 서너 번쯤 신경질적으로 빨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진 뒤 제작실을 나가버렸다. 부서져라 닫은 문에 걸린 금연푯말이 덜렁댔다. 팀장은 종종, 자신이 늘 하는 말처럼 제작팀을 개똥대가리 취급하는 이 개 콧구멍만 한 회사를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말 기세로 성깔을 부려대곤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지, 그는 덜렁대는 금연푯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다시 제작실 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와 나머지 팀원들을 몰아치곤 했다. “다들 들었지? 개 썅! 드럽고 치사하지만 어쩌겠어, 까라면 까는 수밖에. 자, 분발들 하자고!” 결국 그는 이 개 콧구멍만 한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퍽 유능한 관리자인 셈이었다. 예열 된 오븐 안에 모형들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타이머를 조절한 뒤 새로 작업할 음식의 부품들을 정리했다. 팀장은 조금 전 오더가 넘어온 열한 가지나 되는 스테이크의 메뉴와 자료들을 내게 넘기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까지는 완성해야 된다고 지레 숨넘어가는 소리를 해댔다. 물컹대는 스테이크의 표면을 마른 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아낸 뒤 작업판 위에 접착했다. 골판지로 스테이크와 부품들의 주변을 두르고 파라핀으로 테두리를 마무리했다. 온갖 음식 부품들과 화공약품의 냄새가 뒤섞인 작업실은 마치 거대한 냄새창고 같았다.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가는 환풍기 소음 때문에 골이 지끈거릴 지경이었지만 이 지독한 냄새를 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스테이크의 틀을 완성한 뒤 성형이 끝난 초밥 부품들의 착색 작업을 시작했다. 날 생선을 주로 쓰는 일식은 무엇보다도 색감의 표현이 중요하다. 각각의 생선부품들에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하는 만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한 스프레이 작업 후, 보다 세밀한 표현을 위해 붓을 들었을 때 작업대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의 램프가 깜빡였다. 발신번호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램프는 한참을 더 깜빡이다 꺼졌다. 칠 개월 만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망설임 없이 뛰어넘어도 괜찮을 만큼 달라진 상황들이 단순한 것도 아니었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졌다. 잠시 후, 다시 램프가 깜빡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붓을 쥔 채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붓에 묻은 물감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너 통에 붓을 헹군 뒤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 나야.”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낯설었다. “좀 만났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전보단 확실히 낮아진 목소리도 조심성 없는 그의 성품을 감춰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달라진 상황들로 인해 망설이고 있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결국, 아직은 서로의 목소리를 잊어도 좋을 만큼 멀리 오진 못한 셈이었다. 모형음식이 필요한 이유와 그것의 가치는 일맥상통한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량생산으로 맞춘 듯이 찍어내는 싸구려 모형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모형음식의 예술적 승화 운운하며 걸핏하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릴 해대는 제작팀장이나, 직원들 보너스조차 변변히 챙겨주지 못하면서 소규모 주문제작만을 고집하고 있는 회사의 오너조차도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모형음식은 신기한 볼거리도, 획기적인 전시 아이템도 아니라는 점이다. 가짜들에 대한 환상 따위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환상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모로 열악한 여건들을 감수하면서까지 뒤늦게 이 일을 시작한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모형음식은 음식을 포함한 모든 환상들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했다. 유일했고 완벽했다. 착색을 마친 모형에선 금방이라도 물기가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붓을 내려놓은 뒤에야 참았던 숨을 조심스레 몰아쉬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전화에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언제고 그가 연락을 해오리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가 나를 떠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을 쏘이자 딱딱하던 생선 모형들이 노골노골해졌다. 고추냉이를 표현한 초밥 위에 접착제를 바른 뒤 부드러워진 생선을 얹었다. 손으로 초밥을 꼭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헛헛하던 속이 비로소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애초부터 나는 혀를 홀리는 음식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남자들과 살림을 합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과 헤어질 때 역시 나는 별다른 감응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헤어짐의 원인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저기요가 짐을 꾸리며 내뱉은 말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저놈의 자식이랑 같이 밥상머리에 앉아 있다 보면 내가 무슨 개, 돼지가 된 것 같단 말이야! 더러워, 아주 더러운 기분이야!” 그는 순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식당근처의 보험회사에서 근무하던 남자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의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곤 했다. 엄마도 단 음식을 유난히 싫어하는 그를 위해 음식의 간을 따로 할 만큼 그에게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그는 또, 엄마와 살림을 합친 후부터는 나에게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나는 그가 엄마 모르게 쥐어줬던 약간의 용돈을 매번 무척 요긴하게 쓰곤 했다. 물론 그런 그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와 함께 한 밥상머리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을 만큼 별나게 굴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지만, 사춘기를 무기 삼아 공연한 심술을 부려댈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아저씨는 그저 엄마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야.” 엄마의 위로도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언제나 웃었다. 엄마에게도, 저기요에게도, 심지어 엄마의 음식들에게조차 나는 웃어 보였다. 엄마의 집으로 많지 않은 짐들을 옮겨오던 날, 세 번째 저기요는 말했다. “너랑 불편하게 지내게 될까봐 은근히 마음이 쓰였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보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응?”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함께 산 지 오 년이 넘도록 그는 내가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종종 헛웃음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 하지만 그도 어쩌면, 그것이 헛웃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거라면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유가 뭐냐? 오 년씩이나 잘 만나던 사람이랑 느닷없이 헤어졌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냔 말이다. 집에 인사까지 시켜놓고 이제 와서 결혼 못하겠다고 나자빠진 이유가!” 뒤늦게 그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다그쳤다. 하고 싶은 말도 해줄 말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엄마와 엄마의 남자들에게 담담했던 것처럼 엄마도 내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게 알고 싶은 거죠? 엄마가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구요? 도무지 결혼이라는 게 현실 같지가 않아서 싫었어요. 당연한 일 아니에요?” 엄마의 삶을 비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삶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나에겐 엄마의 삶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비록 엄마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내 지난 시간들이 상한 음식처럼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그늘 속에 방치되어 왔다 해도 말이다. 그때, 엄마의 선택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엄마 혼자만의 탓이 아니었다. 게다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가장 괴로웠을 사람은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었을 테니, 나까지 거들지 않는다 해도 엄마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의 문제였을 뿐이다. 엄마도 그걸 이해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초밥모형의 주문처는 확장이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회전초밥 집이다. 주문량은 회전용 접시 스물두 개 분량이다. 모리작업을 위해 색색의 접시들을 꺼내 깨끗이 닦았다. 회전초밥 샘플의 경우엔 특별한 데커레이션이 필요 없다. 자료사진과 비교해가며 각각의 접시 위에 초밥모형들을 접착했다. 그러나 업체 쪽에서 넘겨준 자료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초밥 집에서 판매되는 음식들은 모형에 훨씬 못 미칠 것이 뻔했다. 그런 지경으로 어떻게 가게를 확장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접착제 튜브를 내려놓고 뻣뻣해진 뒷덜미를 꾹꾹 주물렀다. 잠시 후 그를 만나면 함께 식사를 할 것인지 얼른 결정을 해야 했다. 그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는 일은 보나마나 고역일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음식을 먹든 안 먹든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코팅작업을 위해 클리어래커에 래커시너를 배합하고 있을 때 휴대폰의 램프가 깜빡였다. 작업실을 가득 메운 시너냄새를 뚫고, 이미 휘발되었던 그가 온전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순간, 약속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장소이기도 한 레스토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긴, 채 일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난 칠 개월은 그와 나, 우리 두 사람을 변하게 하기에만도 벅찰 만큼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점심시간인데도 레스토랑은 한산했다. “네가 만드는 음식모형쯤으로 생각하면 돼. 어차피 너에게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잖아?” 그는 빈정대고 있었다. 앞에 놓인 음식이 다 식어빠지도록 끼적대고만 있는 내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널 다시 만나고 싶어, 라고 말했다. 나는 칠 개월 만에 다시 연락을 해온 그가 조금쯤은 초췌해졌거나, 적어도 이전보다는 깊은 눈을 갖게 되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전보다 훨씬 부예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타이핀과 커프스버튼의 디자인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음 직한 동창생 아내의 흔적까지 덕지덕지 바르고 나타났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빈정거리고 있었다.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스테이크의 붉은 속살을 포크로 쿡쿡 찔러대고 있던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아직도 내게 기대하는 게 남았다는 뜻이야? 도대체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르겠어.” 부지런히 음식을 씹고 있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쥔 채 말했다.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내. 차라리 쥐고 있는 포크로 내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버려. 제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사람 좀 질리게 하지 말란 말이야! 넌 늘 그런 식이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이미 결정해 놓고도 망설이는 척……. 그런 식으로 너 자신을 방어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나본데, 웃기지 마. 넌 그냥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뿐이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딱딱한 음식모형을 만드는 여자에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표정이 뭘지 항상 궁금했다. 회사를 나서기 전에 한 움큼이나 되는 약을 먹어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목구멍을 타고 신물이 역류했다.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주말에 전화해. 주중엔 당신뿐 아니라 누구와도 잘 수 없을 만큼 바빠. 그리고 다시 만날 땐, 제발 그 타이핀이랑 커프스버튼은 빼고 나타나 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이 흔들렸고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동시에 뺨이 얼얼해졌다. 아프긴 했지만 화가 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나이프의 날엔 스테이크소스가 지저분하게 엉긴 채 굳어 있었다. “진정해. 혹시 포크로 내 얼굴을 찌르고 싶더라도 참아 줘. 우린 칠 개월 만에 만났어. 그 사이 당신은 결혼을 했고, 당신 말대로 난 여전히 마주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사소한 잡담이나 나눌 만큼 편한 상대가 못돼. 당신도 알잖아.”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시 연락을 해올 것이다. 그때 가서 그를 다시 만나건 만나지 않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일을 두고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봉합해두지 않았던 탓에 꾸덕꾸덕해진 클리어래커에 시너를 다시 배합해 접시 위에 가지런히 데커레이션 된 초밥의 코팅작업을 했다. 래커의 양을 조절해가며 최대한 얇고 고르게 펴 발랐다. 실제 음식이건 모형음식이건 간에 실없이 번쩍대는 음식이 입맛을 돋울 리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음식모형도 그렇고, 그와의 관계도 그렇고, 엄마나 저기요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자칫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그 모든 것들은 대책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오후엔 사무실에 다녀온 제작팀장이 다시 한번 작업가운을 벗어 던지며 길길이 날뛰었고 망할 놈의 환풍기는 아예 규칙적인 박자까지 맞추며 덜덜 돌아갔다. 나는 완성된 초밥모형만을 간신히 넘긴 뒤 서둘러 퇴근했다. 한번 뒤집힌 속은 다시 약을 먹어도 쉬 가라앉지 않았다. 어둠에 잠겨 있는 방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주무시지 않고,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묵직한 머리를 흔들어 남은 잠을 털어내며 물었다. “아저씨가 들어오지 않으셨다.” “겨우 그것 때문에 이 밤에 주무시지도 않고 그러고 계신 거예요? 곧 들어오시겠죠. 좀 늦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며칠 전부터 꽃게가 잡숫고 싶다고 하셔서 수산시장에 다녀왔다.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점심때가 다 돼서야 돌아왔지 뭐니. 돌아와선 또 한참이나 게를 손질하고 찜통에 쪄냈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들어오지 않으시는구나.” 그러고 보니 미처 맡지 못했던 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순간 비어 있던 위가 저릿해졌고 동시에 신물이 올라왔다. 처음엔 그저 감전된 것처럼 저릿하기만 하던 위의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버렸다. 허리를 구부린 채 통증을 참아내고 있는 나를 향해 엄마는 말했다. “어쩐지 영 안 들어오실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하긴, 오 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 그동안 너나 그 양반이나, 참 용케도 견뎌내는구나 싶었다.” 웅크린 몸 구석구석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한동안 말없이 이불을 덮어쓴 내 몸을 토닥이던 엄마가 이불을 걷어내고 나를 바로 눕혔다. “약 어디 있니.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닌데, 어디 약이 있을 거 아니냐.” 엄마는 비칠비칠 일어나 약을 찾아 먹고 다시 누운 내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만 하면 됐지 않니. 그게 다 뒤숭숭한 에미 팔자 같이 겪어내느라 얻은 병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만, 너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그만 마음을 풀었으면 좋겠구나. 도대체 내가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 네가 먹어줄는지……, 정말이지 모르겠다. 네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차진 속을 덥혀 줄 음식이야. 이런 약 따위로 나아질 일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니.” 엄마는 전에 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뒤틀리던 속도 차츰 가라앉았다. 배를 쓸어주던 엄마가 이불 속을 더듬어 내 손을 찾아 쥐었다. 목구멍이 따끔댔다. 딱히 뭐라 단정지을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식탁을 바꿔야 해요. 지금 건 너무 커……. 너무 커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엄마가 도무지 보이질 않아요. 그 커다란 식탁 앞에 앉아 있으면 온통 엄마의 음식들만 보여. 나뿐만이 아니라 거기선 누구도 엄말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엄마는 땀으로 끈적이는 내 얼굴을 한번 더 쓸어준 뒤 방을 나갔다. 나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위는 여전히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림자만 가득한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림자마저 묻어버릴 만큼 완벽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빛은 끊임없이 사물을 굴절시키고 왜곡한다. 속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굴절된 삶 속에서 진짜를 가려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는 피곤이 밀려왔다. 다시 잠들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몸으로 익힌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사소하기만 한 몸의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그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낯설었다. 망설이듯 주춤대는 손길이나 어딘지 불편한 듯한 신음을 내뱉는 목소리까지. 하지만 어쩌면 그는 줄곧 같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손은 차가웠고 가슴을 그러쥔 아귀의 힘은 너무 강했다. 삽입 전의 행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태도는 지루했다. 서너 차례 타이밍을 놓치면서부터는 눈에 띄게 조급해하기까지 했다. 삽입 이후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치골이 부딪힐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고 유난히 건조하고 까슬까슬한 그의 피부가 불편했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연속되는 천장의 무늬와 삐걱대는 매트리스의 소음에 몰입했다. 마치 커다란 식탁 위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기분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는 순식간에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마지막 타이밍만은 놓치지 않고 정확히 페니스를 빼낸 그는 내 아랫배 위에 사정했다. 끈적끈적한 정액을 뒤집어 쓴 아랫배가 환한 형광등 아래서 번들대고 있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앙다문 입술을 파고드는 그를 힘껏 밀쳐냈다. 쫓기듯 욕실로 들어간 그는 비누의 향이 너무 강하다며 한참동안 투덜댔고, 결국 비누를 사용하지 않은 채 샤워를 마쳤다. 어쩌면 그는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조금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함께 있는 내내 우리는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댔다. 지난 밤, 샤워를 마친 그는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셔츠에 물을 뿌리고 단정하게 걸어놓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천연덕스레 잠들어 있는 그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었다. 방을 나오기 전, 화장대 위에 놓인 타이핀과 커프스버튼을 가져다 변기 속에 빠뜨리고 물을 내렸다. 그의 동창생 아내의 세심한 배려를 단숨에 삼켜버린 변기는 크릉크릉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마도 그는 사라진 타이핀과 커프스버튼 때문에 한동안 몹시 곤란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을 것이다. 간혹 단순한 몸의 문제가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므로 어쩌면 나는 그런 그가 조금쯤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래 전의 내게 그러한 사실은 분명히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이미 흉터로 남은 일은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잊혀졌던 흉터를 확인하는 일이 괴롭긴 하겠지만 역시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엄마의 짐작대로 세 번째 저기요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네 번째 남자의 귀가를 포기한 엄마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엄마는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음식을 만들거나 권하지 않았다. 그것은 식당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과거와는 달리 최종적으로 음식의 간을 보는 일 외엔 주방 일에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엄마가 네 번째 저기요를 찾는 일까지 그만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케이크 전문점에서 주문한 케이크 모형은 총 열세 가지이다. 생과일주스를 비롯한 음료까지 합하면 모두 스물다섯 가지나 된다. 나는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음료를 만들 젤라틴에 첨가할 색을 결정하기 위해 색상표를 들여다보고 있다. 테스트용 물감을 풀어 샘플을 여러 개 만들어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색을 찾아내지 못했다. 가스레인지 위에선 중탕한 젤라틴이 끓고 있었다. 감색 수채물감에 흰색을 약간 섞어 젤라틴과 혼합했다. 역시 너무 들떠 있었다. 견본의 색과 별 차이는 없어 보였지만 여름 음료의 색감이 힘없이 들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심해(深海)와도 같은 색을 만들고 싶다. 한여름, 뜨겁게 달궈졌던 머리꼭지까지 서늘해질 만큼 강한 색감이어야만 한다. 완성된 샘플들을 모두 버리고 또다시 불려둔 젤라틴을 중탕했다. 건조 테이블 위에선 케이크의 틀이 천천히 굳고 있었다. 엄마는 끝내 커다란 식탁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사 엄마가 다섯 번째 남자를 만나, 그를 다시 커다란 식탁 앞에 앉힌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끝내 엄마가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건 엄마 몫의 삶일 뿐이다. 누구나 그렇다. 어차피 그 모든 것들은 단순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음은 한 곳을 향해 있게 마련이고 그걸 흔들어놓을 만한 몸의 문제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불필요한 갈등은 몸의 균형마저 깨뜨리고 말 뿐이다.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거른 탓인지 비어 있던 속이 다시 저릿해졌다. 또다시 한 움큼의 약을 삼키며 엄마의 말을 돌이켜봤다. 엄마는 내게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차진 속을 데워줄 음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속을 데워 줄 수 있는 것은 혀를 홀리는 음식이 아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색감의 음료모형이다. 애초부터 나는 혀를 홀리고 배를 채워주는 음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으므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밖의 것들은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진짜보다더진짜같아야한다진짜보다더진짜같아야한다진짜보다더…….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주문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저릿하던 속이 가라앉고 포근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600년만의 황금돼지해] 올 신생아 2만명 웃돌듯… 출산 장려금 한몫

    [600년만의 황금돼지해] 올 신생아 2만명 웃돌듯… 출산 장려금 한몫

    안녕 뚱순아, 나야 뚱님이. 네가 사는 그 별도 겨울이니? 여기는 지금 난리야. 행복한 난리. 글쎄 새해부터 집값이 확 잡혔지 뭐야. 경기가 살아나서 일자리가 넘치고 월급도 올랐어. 벌써 며칠째 범죄건수가 ‘0’이어서 유치장이 텅텅 비었어. 이혼·자살건수도 뚝 떨어지고 헌혈차 앞은 연일 장사진이야. 정치인들도 서로를 칭찬해대는 바람에 닭살이야. 그리고 왜 있잖아. 북한이 드디어 핵을 깨끗이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어.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해졌냐고? 사랑 때문이지. 왜 갑자기 사랑하게 됐냐고? 인생이 너무 짧아 미워하거나 욕심을 부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된 거지. 우린 예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걸 말야. 이곳이 무섭다며 그 별로 떠났던 뚱순이 네가 이제 돌아왔으면 해. 보고 싶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아기를 낳자’ 600년만에 한 번 돌아온다는 2007년 정해년(丁亥年) ‘황금돼지띠’의 해를 맞아 새해 벽두부터 임신·출산 붐이 일고 있다. 쌍춘년이었던 지난해 백년해로를 위해 서둘러 결혼했던 신혼부부는 물론 중년 부부들까지 임신과 출산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불임부부들도 그 어느 해보다 출산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황금돼지 띠의 아기는 재복이 많고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역술가들에 따르면 정해년 황금돼지해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에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더해 따지기 때문에 600년만에 한번꼴로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특히 새해를 황금돼지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오행에서 정(丁)은 불을 뜻하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600년이라는 정확한 계산법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혼인신고 밀레니엄 이후 5년만에 증가세 이런 분위기 속에 그동안 저출산으로 불황을 겪던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 유아용품업계 등 출산 관련업계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올 한해 밀레니엄 베이비 이상의 신생아 출산 붐이 일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6년 10월까지 대법원에 신고된 혼인건수는 25만 6320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 24만 7134건에 비해 9186건(3.7%) 증가했다. 증가폭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2001년 이후 거의 매년 감소 추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의미있는 반등이다. 특히 쌍춘년이었던 지난해 11,12월 2개월동안 막바지 결혼이 전례없이 봇물을 이룬 점을 감안하면 증가폭은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결혼에 성공한 부부들은 신혼을 즐길 틈도 없이 아기 갖기에 바쁘다. 지난 12월 결혼한 김성호(28·회사원·경북 구미시)·이미숙(27·교사)씨 부부는 당초 결혼 후 1∼2년이 지나서 아이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곧바로 아이를 가지라는 양가 부모님의 성화 때문에 결국 아이를 갖기로 했다. 이씨는 “인생의 계획도 중요하지만, 효도와 아이의 재물복을 위해 올해 출산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한 자녀만을 고집하던 부부들도 둘째, 셋째 출산을 준비하고 있다. 결혼 8년차인 김성해(회사원 37·부산 남구 대연동)씨와 이영희(35·주부)씨 부부 사이에는 올 8월쯤 둘째아이가 태어난다. 첫째아들을 출산한 지 7년만이다. 이들 부부는 “지난해 주위에서 ‘황금돼지해에 아이를 출산하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둘째아이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한 직장에 근무하는 기혼여성들이 나란히 임신해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곳도 눈에 띈다. 부산 남구 남천동 베어링 수입업체인 A상사는 전체 기혼 여직원 7명 중 5명이 나란히 아기를 가져 올해 출산을 앞두고 있다. 여성전문병원도 임신부들로 북적대고 있다. 대구 M여성전문병원측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정기 검진과 임신을 확인하러 오는 여성이 예년에 비해 2∼3배 늘었다.”면서 “이런 현상은 병원 개원 5년 만에 처음”이라고 반겼다. 대구시 북구 D산후조리원도 “출산 4∼5개월 전부터 산후조리실을 예약하고 있다.”며 “이같은 현상은 예전에는 거의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신생아 출산 전폭 지원 심각한 출산율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치단체들은 황금돼지 해를 맞아 출산가정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신생아 수는 지난해(45만여명)에 비해 전년도 혼인건수 증가 등으로 2만여명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2000년 밀레니엄 베이비 특수(63만 7000여명)로 인해 전년(61만 6000여명)보다 2만 1000여명 증가한 것과 맞먹는 것이며, 최근 7년간 최대 증가폭이다. 경북 영덕군은 올해 출산 장려금 액수를 지난해 30만원에서 신생아 1인당 100만원으로 대폭 올렸다. 또 셋째아이를 낳으면 50만원을 추가 지급한다. 청송군도 지난해까지 신생아 구분없이 1인당 30만원씩 지급하던 출산장려금을 올해부터 첫째∼셋째 50만∼150만원까지 대폭 확대했다. 안동시 역시 13억원의 예산을 확보, 출산장려금을 2배로 늘렸다. 첫째 36만→72만원, 둘째 60만→120만원, 셋째 120만→240만원이다. 문경·김천시는 올해 출산장려금제를 신설해 둘째아이 100만원과 30만원, 셋째아이 150만원과 100만원을 각각 지급하기로 했다. 의성군은 신생아 1인당 출산장려금 100만원 지급과 함께 출생신고를 한 가정을 읍·면장이 직접 방문,3만원 상당의 미역을 전달하고 식목일을 전후해 의성읍의 구봉산·둔덕산에 신생아 출생 기념식수를 하기로 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31일 TV 하이라이트]

    ●인사이드 월드(YTN 오후 6시30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수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인간과 어울려 살아 오던 가젤이 사냥꾼들에 의해 사라지자 영국 동물학협회와 협력해 이들을 보호하고 나섰다. 이들은 새끼를 가진 가젤을 보살피고 사육한 뒤 야생으로 돌려 보내는 등 가젤의 수를 늘리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스페이스 공감(EBS 오후 10시) 뮤지션, 영화감독, 음악 칼럼니스트 10명이 2006년 방송된 스페이스 공연중 가장 인상적이였던 공연을 추천한 ‘2006 공감 베스트10’을 방영한다. 영화감독 김태용은 기획시리즈 ‘우리가 그들을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의 김창완을,‘뜨거운 감자’의 보컬 김C는 록 밴드 ‘자우림’의 공연을 꼽았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SBS 오후 6시30분) 2006년 한 해를 정리하며 대상, 최고작품상, 최우수연기상, 신인상, 인기상 및 여러 시상식과 시청자 직접 인터넷 투표로 선정한 2006 웃찾사 최고의 코너 베스트 10으로 이루어진다. 게스트 MC몽의 축하무대와 보고 싶었던 코너와 보고 싶었던 얼굴들이 출연해 한해를 마무리 한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오후 5시35분) 2006 몰래카메라 총결산. 그동안 방송되었던 몰래카메라 59편 중에서 최고의 작품과 최고의 주인공들을 선정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시청자가 직접 뽑는 최고의 상 베스트5. 역대 주인공들 중에서 영예로운 수상자는 누구일까? 수상자들이 밝히는 몰래카메라 비하인드 스토리도 공개된다. ●싱싱 일요일(KBS2 오전 8시) 무항생제 돼지사육에서 유기축산까지 시도하고 있는 이연원·이경실 부부. 무항생제를 고집하는 유기농돼지 농장주인 이연원씨 부부와 암돼지들 간에 벌어진 임신촉진 운동 대작전이 펼쳐진다. 톡 쏘는 매운 맛과 특유의 향을 자랑하는 갓. 갓의 효능, 아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갓 요리법이 공개된다.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TV쇼 진품명품’을 통해 그동안 공개된 다양한 우리의 고미술품을 소개한다. 과연 우리를 놀라게 했던 2006년 최고 감정가 의뢰품은 무엇일까? 또한 추사 유품 기증,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등 한 해 ‘TV쇼 진품명품’을 통해 재발견된 우리의 예술품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 [책꽂이]

    ●노자(노자 지음, 최재목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현존하는 최고(最古) 판본인 곽점초묘죽간본 ‘노자’의 완역서. 이 초간본 ‘노자’는 지금부터 약 23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중국 초나라 때의 무덤에서 출토됐다. 사마천의 ‘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노자는 기원전 571년 이전에 하남성 녹읍현에서 태어났으며,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 장서실 관리인)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노자’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존재와 원리를 도와 덕으로 설파한 도가사상의 성전. 문장의 전후가 모순되는 곳이 있고, 장과 장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곳이 있어 한사람이 쓴 게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거쳐 여러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1만 8000원.●우리말 달인(심재방 엮음, 선 펴냄) 가게는 원래 한자어 가가(假家, 임시로 지은 집)에서 온 말이다. 큰 것은 어물전처럼 전(廛)이라 했고, 구멍가게처럼 규모가 작은 것은 가가라 했다. 그 가가가 변음돼 가게가 된 것. 피죽바람이란 무슨 뜻일까. 모낼 무렵 오랫동안 부는 아침 샛바람(동풍)과 저녁 북서풍을 가리킨다. 모낼 무렵에 이 바람이 불면 벼가 큰 해를 입어 흉년이 들기 때문에 피죽도 먹기 어렵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현직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쓴 우리말 우리글 길라잡이.1만 8000원.●한국 야담 연구(이강옥 지음, 돌베개 펴냄) 야담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된 비교적 짧은 길이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가리킨다. 사전적 의미로는 정사(正史)에 대응되는 외사(外史), 즉 국가에서 임명한 사관 이외의 사람이 꾸민 역사를 말한다. 민간에 떠돌아 다니는 궁중비화나 정치 뒷이야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책은 야담의 역사적 존재방식을 밝히고 야담 고유의 서술미학을 살핀다.‘학산한언’ ‘천예록’ ‘동야휘집’ ‘금계필담’ ‘차산필담’ 등 조선시대의 주요 야담집에서부터 ‘일사유사’등 장지연의 근대 서사문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뤘다.3만원.●마티스와 함께한 1년(제임스 모건 지음, 권민정 옮김, 터치아트 펴냄) 마티스의 고향인 피카르디를 비롯해 프랑스 곳곳에 남아 있는 화가 마티스의 흔적을 좇은 여행기. 미국의 작가인 저자는 잿빛 파리에서는 마티스의 파리 시절 그림의 무거운 색조를 느끼고, 벨릴 섬에서는 빛나는 원색을, 코르시카 섬에서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이해한다. 모로코에서는 내면적인 화가였던 마티스의 고뇌를 느끼며, 마티스가 말년을 보냈던 니스와 방스에서는 마티스가 살던 방에 묵으며 들뜬 마음으로 잠을 설치기도 한다.1만 5000원.●집안에 앉아서 세계를 발견한 남자(귄터 베셀 지음, 배진아 옮김, 서해문집 펴냄) 제바스티안 뮌스터의 저서 ‘코스모그라피아’가 출간되게 된 과정과 책의 내용 등을 살폈다.1544년 처음 출간된 ‘코스모그라피아’는 바젤 대학에서 히브리어를 강의하던 뮌스터가 당시의 세계를 묘사한 책. 중유럽 사람들이 각국의 풍속과 관습, 신앙 등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뮌스터는 프랑스인을 “편 가르기 좋아하고 선동적이며 고집이 세고 이성보다는 힘이 우세한 민족”이라고 평했다. 뮌스터는 세계를 묘사했지만 제대로 된 여행이라고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학자였다.1만 6500원.
  • [30일 TV 하이라이트]

    ●라이프n조이(YTN 오전 11시35분)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설산의 신비로움이 가득한 곳. 겨울금강산, 설봉산으로 안내한다. 천하제일의 명산을 찾는 길에는 계절이 따로 없다. 겨울 금강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명불허전, 순백의 눈꽃세상이다. 북한 들녘의 소박한 겨울풍경이 마음을 사로잡고 맑고 깨끗한 설경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효도우미 0700(EBS 오후 5시20분) 북한에 두고온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탈북자의 눈물. 먼 타국에서 서러운 오늘을 사는 외국인 며느리들의 그리움. 거지왕이라는 이름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고인이 된 김춘삼씨. 그 자녀들이 말하는 내 아버지 등 각박한 오늘을 사는 자식들의 이야기.‘불효자는 웁니다’를 통해서 만나본다.   ●사랑도 미움도(SBS 오전 8시30분) 병원에서 재혁은 민호가 쏟은 음료수에 옷이 젖는다. 이에 민호는 자기 엄마한테 옷을 맡기자고 한다. 재혁은 예의가 아니라며 자리를 뜬다. 한편, 인주는 화보를 찍자는 승표 말에 건성으로 대답해 승표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다 재혁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된 인주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누나(MBC 오후 7시55분) 건우고모는 임신한 유순을 부러워하면서도 조카를 위하는 마음에 뭔가를 자꾸 사다 준다. 고모는 건우엄마에게 입맛이 없다며 김치 익은 게 먹고 싶다며 달라고 한다. 신김치를 먹는 고모를 보며 고모부는 혹 애가 선 게 아니냐고 묻는다. 한편, 승주가 건우를 못잊고 괴로워하자 민준기는 건우에게 만나자고 연락한다.   ●소문난 칠공주(KBS2 오후 7시55분) 미칠이 임신 5개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명자는 당장 집으로 가자며 억지로 미칠의 손을 이끈다. 미칠은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런 미칠의 모습에 화가 난 명자는 곧바로 일한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한편, 소라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에 기분이 좋아진 덕칠은 처음으로 아이들과 외식을 한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KBS1 오전 10시) 레게음악과 블루마운틴, 사탕수수, 그리고 아름다운 카리브해로 기억되는 나라, 자메이카. 쿠바 남쪽으로 9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달걀모양의 섬은 1만 1000㎢로 한반도의 20분의1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 지형과 식물의 다양함을 자랑한다. 카리브해의 붉은 진주, 자메이카로 떠나본다.
  • [사설] 군복무 단축 성급히 결론낼 일 아니다

    청와대가 지난 22일 군복무 단축 및 대체복무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 결론을 내리겠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21일 “군대 가서 몇년씩 썩히지 않고 직장에 빨리 가고 결혼을 빨리 하는 제도를 개발하고 있다.”고 발언한 직후에 이런 방침이 발표됐다. 대통령의 말은 군복무는 ‘썩으면서’ 하는 것인데, 굳이 그렇게 길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뉘앙스를 주기에 충분하다. 표현의 격조와 적절성 여부를 떠나, 이런 취지의 군복무 단축이라면 너무 성급하고 경박하게 정책을 추진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군복무 단축은 노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참여정부 초기에 이미 한 차례 단행된 바 있다. 따라서 임기 말에 또 시행한다는 게 어쩐지 정치적 목적을 겨냥한 선심정책이라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선거연령이 19세로 낮아진 마당에 젊은 유권자와 그 부모들의 표심을 얻겠다는 ‘꼼수’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야당 쪽에서 대선용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군복무 단축이나 병력감축 등은 안보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부처간 긴밀한 협조로 보완대책을 세심하게 마련한 뒤 접근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비록 국방당국이 복무단축과 관련한 잠정계획을 갖고 있다 해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전격 추진한다면 곤란하다. 가뜩이나 병력자원이 한 해에 몇 만명씩 모자란다는 판에, 복무기간부터 덜컥 줄여놓고 어쩌겠다는 건가. 인구감소 추세와 첨단시대를 맞아 긴 복무기간과 많은 병력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국군의 첨단·정예화에 대한 대안을 먼저 마련한 뒤에 복무기간을 거론해도 늦지 않다. 군복무 단축은 법률상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해서 가볍게 결론낼 문제가 아니다.
  • 새달 BDA회의가 분수령

    13개월 만에 재개된 제5차 2단계 6자회담이 지난 22일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난 뒤 회담국간 신경전이 뜨겁다. 북·미가 서로 ‘네 탓’이라며 상대방을 압박하는 가운데 ‘6자회담 무용론’이 제기되자 한국측은 “무용론은 들어본 적 없다.”며 후유증 최소화에 바쁘다. 이런 가운데 6자회담의 최대 암초로 떠오른 방코델타아시아(BDA) 실무회의가 다음 달 22일 시작주에 다시 열릴 전망이어서 이에 따른 6자회담 향방에 귀추가 주목된다.●美 “대북제재 강화해야” vs 北 “강력 대응” 회담 이후 ‘빈 보따리’를 들고 본국으로 돌아간 북·미는 서로의 입장차에 대한 공세수위를 높이고 있다. 북한 김영춘 국방위원회 위원 겸 군 총참모장은 23일 중앙보고대회에서 “미국이 이번 회담에서도 제재 해제를 거부하고 우리의 일방적 무장해제만을 고집했다.”면서 “만일 적대세력들이 제재압력 책동을 계속 강화한다면 우리는 그에 보다 강력한 대응조치로 단호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의 강경한 태도에 미국내 시각은 부정적이다.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고문인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담당 차관보는 이날 “회담이 성과없이 끝난 것은 북한이 공동성명의 진전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북한이 계속 공동성명 이행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당사국들과 국제사회가 추가 조치를 진행할 것”이라면서 “미국은 한층 강화된 제재를 담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추진할 것이며 일본 등과 추가 조치를 취함으로써 북한의 국익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미간 갈등이 가열되자 한국과 일본, 러시아 등은 불끄기에 나선 모습이다. 우리측 수석대표인 천영우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한반도 비핵화와 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해 6자회담은 계속될 것”이라며 일각의 회담 무용론을 일축했다.일본 아소 다로 외상은 24일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 가능성에 대해 “(지금까지의)일본의 제재가 효과가 있기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 제재를 더 가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러시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 수렁에서 벗어나도록 인내심을 갖고 설득해야 한다.”고 밝혔다.●차기 회담 언제나 재개될까? 회담국들은 22일 발표한 의장성명에서 ‘가장 빠른 기회’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했으나 구체적 일정은 잡지 못했다.외교 소식통들은 이번 회담의 발목을 잡은 BDA 북한계좌 제재 문제가 어떻게 풀리느냐가 6자회담 향방을 판가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음 달 22일 시작주에 뉴욕 또는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인 후속 BDA 회의가 급진전될 경우 회담 일정도 이르면 같은 달 말이나 2월 중 잡힐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그러나 BDA 문제가 쉽게 풀릴 분위기가 아니어서 회담 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다.한 외교소식통은 “2단계 회담이 사전 조율 없이 서둘러 열려 성과를 내지 못한 만큼, 후속 회담은 BDA 등 이견이 조율된 뒤 시간을 갖고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책꽂이]

    ●21세기형 변화 경영자 CEO 모세(베른하르트 피셔 아펠트 지음, 엄양선 옮김, 뜨인돌 펴냄) 익숙한 것과의 결별,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한 전진, 고집스러운 실천, 경쟁자와 불확실성에 맞서는 용기…. 노예근성에 젖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40년간 광야를 유랑해야 했던 모세는 이런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거친 시장의 파도를 헤쳐나가야 하는 CEO들의 상황도 모세의 형편과 다르지 않다.CEO 모세가 제안하는 변화경영 전략의 핵심은 예측하고 소통하며 실천하는 것이다.1만 2000원.●연암 박지원 소설집(박지원 지음, 이가원 등 옮김, 서해문집 펴냄) 연암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기이하다. 똥 푸는 일을 하지만 고귀한 인격을 지닌 엄항수(‘예덕선생전’), 세상을 버리고 신선이 된 김홍기(‘김신선전’), 불우한 삶이지만 유쾌하게 누릴 줄 아는 민옹(‘민옹전’), 기발한 재주로 돈을 모으지만 모두 버리고 가난한 선비로 돌아온 허생(‘허생전’)…. 황당무계한 이야기 같지만 켜켜이 쌓인 비유를 걷어내고 꼼꼼히 들여다보면 주류사회에서 벗어난 이들의 모습 속에는 시대와 불화한 연암 자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짧지만 긴 여운의 소설모음집.8500원.●정의의 여신, 광장으로 나오다(강정혜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이라는 저서에서 “로마는 세계를 세번 통일했다. 첫째는 무력으로 국가를 통일했고, 둘째는 정신의 힘으로 교회를 통일했고, 셋째는 중세에 로마법으로 각국의 법을 통일했다.”고 말한 바 있다. 중세 로마법의 영향으로 오늘날 각국의 법에는 로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책은 현대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대륙법과 영미법의 형성과 차이점 등을 살핀다. 법은 삶을 이해하는 관계의 그물망이다.9000원.●사랑해, 파리(황성혜 지음, 예담 펴냄) 누군가는 “신이 제일 기분 좋을 때 만든 도시가 파리”라고 했다. 그만큼 사랑과 낭만이 있는 도시라는 얘기다. 그러나 파리를 다녀온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는다. 파리는 지저분하고 시내는 복잡하며 날씨는 우중충하다. 게다가 파리 사람들은 까다롭고 불친절하다고. 심지어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라 파리 그 자체의 딴 세상”이라고 말하는 프랑스 사람들도 있다. 파리는 과연 ‘도시 중의 도시’인가, 제멋에 빠진 ‘오만의 도시’인가. 이 책은 그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1만 1000원.
  • 30일 연재 마치는 ‘유림’ 작가 최인호씨

    30일 연재 마치는 ‘유림’ 작가 최인호씨

    작가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3년간의 대역사(役事)였지만 피곤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신문에 대하장편소설 유림(儒林)을 연재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이야기꾼’ 최인호(61)는 그랬다. 아쉽게도 유림은 오는 30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21일 서울 한남동의 집필실에서 만난 작가는 연신 “이처럼 행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수백명의 아이(작품)를 낳았지만 특히 이번에는 명분 있는 아이를 낳았습니다.3년간 꼬박 연재할 때도 그랬지만 작가라는 사실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두시간여 동안 그의 입에서 ‘키워드’들이 툭툭 튀어 나왔다.‘혼돈의 시대, 작가적 충정, 동방예의지국, 선비정신의 부활’. 그가 행복하게 ‘유교의 숲’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이 차츰 조합되기 시작했다. 그는 “21세기에는 하이에나 논리로 가득 찬 서구적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더불어 사는 유교적 자본주의가 화두가 될 것”이라면서 “이러한 때 우리의 훌륭한 유산인 ‘선비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자, 맹자, 순자, 조광조, 율곡, 안향 등 유림의 무수한 주인공 가운데 작가 최인호가 가장 주목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거침없이 퇴계 이황을 꼽았다.“석가모니의 불교가 원효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완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자의 유교 역시 퇴계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성됐습니다. 일본에서는 퇴계를 ‘해동의 공자’라고 불렀습니다. 퇴계는 불세출의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퇴계 사상의 골수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주목했다는 그는 “어려운 것을 알기 쉽게 쓰려고 무지하게 노력했다.”고 토로했다. 퇴계가 왜 위대한지, 이기이원론의 정수가 무엇인지 등이 모두 유림속에 농축돼 있다는 것. 그는 유교의 필요성을 교육문제와도 연결지었다. 교육의 난맥상을 해결하는 첫걸음은 선비사상의 부활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한 사람의 ‘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어서 문제입니다. 백사람의 ‘된 사람’을 기르는 교육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공자는 정치가이자 외교가이자 위대한 교육자였습니다. 유교에 해법이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육필원고를 고집한다. 머릿속의 진수를 짜내는 데 컴퓨터 키보드는 적합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3년간 써내려간 원고량은 200자 원고지 6500장에 이른다. 한동안 가야시대를 다룬 ‘제4의 제국’을 동시에 썼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집필만 하기도 했다. 스스로도 “태어나서 가장 초인적으로 써내려간 시기”라고 말했다. 불교(길없는 길), 유교(유림)에 이어 이제 그는 기독교에 숨결을 불어넣으려고 한다.200년 전 이 땅에서 수만명이 순교함으로써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예수 그리스도 사상의 본류를 꿰뚫어볼 작정이다. “불교다운 불교가 남아 있는 곳은 우리밖에 없고, 유교도 한반도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원형질입니다. 이제 마무리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순례 등을 통해 곧 자료수집에 착수,2년 뒤쯤 작품을 ‘출산’할 계획이다. 작가의 창작열을 ‘입덧’에 비유한 그는 스스로 ‘가임(可姙)성 작가’라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글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유림’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최인호 대하장편소설 ‘유림’은 2004년 1월5일 서울신문 지면을 통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하지만 이 보다 12∼13년 전 작가의 심장에서는 이미 유림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시 불교를 주제로 한 장편소설 ‘길없는 길’을 집필하던 그는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불교뿐 아니라 유교라는 원형질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거리낌 없이 다음 작품 주제로 유교를 점찍었다. 곧바로 공자의 고향 곡부를 둘러보고, 공자의 사당이 있는 태산에 올라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이름까지 미리 정해 두었다. 유림은 연재 시작과 함께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몰고 왔다. 학술서적 외에 유교를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소설로 형상화된 유교와 유학의 대가들을 만난 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유교를 다시 보게 됐다.”고 탄복했다. 천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퇴계 이황이 사실상 2000년 유학을 집대성했다는 사실에도 뿌듯해했다. 무엇보다 혼탁 일색인 오늘을 살아가야 할 지혜를 제공해준 작가에게 감사해했다. 연재가 완성되기도 전에 지난해 7월 조광조의 개혁정치(1권), 공자의 주유천하(2권), 퇴계의 군자유종(3권)을 묶어 이례적으로 먼저 1부 3권을 출간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식지 않았다. 한 중학생 독자는 TV 교양프로그램에 출연한 작가를 상대로 “서점에서 선 채로 유림을 읽었다. 공자가 이렇게 재밌는지 알게 해줘 고맙다.”고 말해 작가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기도 했다. 공자에서 퇴계로 이어지는 유림의 숲을 다룬 4권과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문에 정진했던 퇴계의 일생을 다룬 5권까지 모두 50만부 정도 판매된 것으로 집계됐다. 출판사(열림원)나 작가 모두 이같은 호응에 깜짝 놀라고 있다. 공자의 생애를 되살린 6권은 내년 1월15일쯤 출간된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Form 나게 Beauty 나게] 여성 재킷 연출법

    [Form 나게 Beauty 나게] 여성 재킷 연출법

    통통한 여인들이여. 재킷을 무서워 말라! 요즘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재킷의 특징을 보면 길이는 짧고, 소매는 불룩한 벨 모양에 소매 길이도 짧다. 품도 넓어 벨트를 매면 허리라인에 주름이 많이 잡혀 벨트 위 아래도 벙벙한 느낌을 줄 정도로 풍성하다. 통통한 여인들이라면 뚱뚱해 보일 것을 걱정해 그림의 떡이라며, 입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두려워 하지 말자! 오히려 통통한 몸매를 커버해 줄 수 있는 스타일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재킷이다. 지금까지 통통한 몸매를 가리기 위해 일자로 떨어지는 벙벙한 재킷을 가지고 있다면 두께가 있는(5㎝ 이상) 벨트로 포인트를 주면서 허리라인을 강조하자. 위 아래로 부푼 풍성함에 비해 허리가 가늘어 보인다. 당연히 늘씬해 보이는 착시효과가 있다. 벨트를 선택할 때는 같은색 계열이나 패션에 포인트를 줄만한 색이 좋다. 단, 마른 체격이 아니고서는 늘씬해 보이기 위해서는 보색대비가 되는 강렬한 색상은 피하는 것이 좋다. 요즘 많이 등장하는 재킷의 단추는 더블 버튼에, 귀여운 ‘베이비돌’ 스타일이 많다. 더블 버튼은 늘씬하게, 베이비돌은 귀엽게 연출할 수 있다. 버튼도 벨트 선택과 마찬가지로 포인트 색상으로 되어 있다면 늘씬해 보이는데 더욱 효과적이다. 요즘 가장 많이 보이는 원단은 체크 무늬이다. 통통하다는 이유로 단색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스트라이프(줄무늬)를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크 무늬도 크고, 화려한 색상이 배합된 것이 밝은 이미지를 준다. 단색으로 포인트를 줄 수 있는 퍼(모피) 트리밍이나 머플러로 코디를 해 주어 세련된 스타일을 연출해 주자. 패션의 자신감과 당당함, 멋진 패션의 완성은 과감한 시도에서 오는 것을 잊지 말자. 스타일컨설턴트 이혜숙 (www.cyworld.com/colorism02)
  • “한·미동맹 공고… 상호 신뢰 깊어”

    |워싱턴 이도운 특파원|미 의회내 외교분야 터줏대감으로,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인 짐 리치(공화) 하원 의원이 18일 우리 정부가 주는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이태식 주미 대사는 이날 워싱턴 주미 대사관저에서 열린 훈장 수여식에서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칼럼을 인용해 리치 의원을 ‘미 의회의 양심’이라고 소개했다. 이 대사는 “리치 의원이 수년간 한·미 동맹관계를 위해 헌신적으로 지원해준 것에 감사한다.”면서 “동맹을 깊이 이해하고 두 나라에 영향을 미칠 정치적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위대한 친구가 돼 왔다.”고 평가했다. 리치 의원은 “영광스럽다.”고 말하고 “한국은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고, 미국은 젊은 나라로 한·미 동맹관계는 공고하고 상호간 신뢰가 깊다.”며 한·미 동맹의 현주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리치 의원은 지역구인 아이오와주에서 내리 15선에 성공, 지난 30년간 하원 의원을 지냈다. 최근까지 미 하원 국제관계위 아태소위위원장을 지냈다. 특히 북핵 문제와 관련,‘6자회담’만을 고집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대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특사로 파견하라고 제안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여러차례 방한했으며 평양도 두번 다녀왔다. 이 대사는 “개인적으로 아이오와주 사람들이 중대한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치 의원이 지난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 의정활동을 중단하게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하지만 리치 의원은 최근 사퇴한 존 볼턴 유엔주재 미국대사 후임으로 거론되는 분위기여서 주목된다.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 등 평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중시해 야당인 민주당으로부터도 별로 거부감을 받지 않는 인물. 최근 하원의 민주·공화 양당 의원 15명이 리치 의원을 유엔주재 미국대사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는 서한을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했다.dawn@seoul.co.kr
  • “죽음 문턱에 선 사람들에 따뜻한 손길을”

    “죽음 문턱에 선 사람들에 따뜻한 손길을”

    “죽음의 문턱에 선 저를 살려준 사람은 이름 모를 장기 기증자였습니다.” 1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1층 로비.‘사랑의 장기기증 캠페인’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최택규(56)씨가 “장기 기증에 관심을 가져 달라.”며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장기기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행인들은 무표정한 반응으로 최씨를 외면했지만 최씨는 미소를 잃지 않고 한 장의 전단지라도 더 돌리려 목소리를 높였다. 최씨는 10년전 간 이식을 통해 새 생명을 찾았다. 이날 최씨는 간이나 신장 이식을 통해 생명을 되찾은 사람들 20명과 함께 장기이식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하며 ‘아주 특별한 송년회’를 가진 것이다. 최씨는 이식 관련 의료진들과 함께 행인들을 대상으로 장기기증 절차와 상담, 홍보 등을 하며 기증서약서 접수를 독려했다. 최씨는 “주변에 간이나 신장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만 기증자가 없어 중국에 원정 수술을 가는 사람도 있다.”면서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온정의 손길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정지은(34·여)씨도 2003년 조카 송혜진(19)양으로부터 신장을 이식받아 새 생명을 찾았다. 신장이식 뒤에는 임신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고집을 부려 결국 한달전 딸 서연이를 낳을 수 있었다. “혜진이는 결국 저와 딸 두명의 생명을 살린 셈이에요.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딸을 보면 생명의 소중함이 다시 느껴져 이 자리에 나와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호소에 대한 답은 미미했다.1시간30분 동안 20명이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서명을 한 사람은 모두 14명에 불과했다. 친구 병문안을 왔다가 장기기증 신청을 했다는 김종훈(30)씨는 “평소 장기기증을 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는데 의미있는 행사인 것 같아 동참했다.”면서 “죽은 뒤 내 장기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는 게 의미있는 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2003년 아내에게 신장을 기증했다가 이날 행사에 참여한 박태부(62)씨는 “사람들 걱정과 달리 신장이식 뒤 건강이 더 좋아졌다.”면서 “비록 14명 밖에 못 받았지만 적은 건 아니지 않겠느냐.”며 활짝 웃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1회전] 순조로운 백 승 분위기?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1회전] 순조로운 백 승 분위기?

    제7보(138∼174) 현재의 집만을 비교하면 매우 미세한 바둑이지만 앞으로 백집은 조금씩 늘어날 전망이지만 흑집은 조금씩 줄어들 전망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집에서 백이 흑을 앞서고 있고, 형세는 그만큼 백이 유리하다. 흑이 중앙 집 건설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백이 그를 역이용하는 수법이 가능하다. 백138로 어깨 짚을 때 흑은 손을 뺄 수 없고, 그 덕분에 백은 우변에 큰 집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백140이 수순 착오이다. 이 수는 흑이 144의 곳을 이어주면 백가, 흑147, 백143으로 틀어막으려는 뜻이었겠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흑141을 역으로 선수하고 143으로 반격하자 146까지 중앙 백집이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백140으로는 (참고도1) 백1을 선수하고 3으로 틀어막는 것이 정수였다. 흑에게 4의 끼움을 선수당하기는 하지만 11까지 실전보다 더 큰 집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선수를 잡아서 148로 막을 수 있어서는 백의 우세에 변함이 없다. 흑151로 빠졌을 때 백152의 치중이 날카로운 응수타진. 흑153으로는 (참고도2) 1에 잇는 것이 보통이지만 백2,4로 흑 한점을 따낼 때, 손을 빼면 11까지 그야말로 딱 두집을 내고 살아야 한다. 실전 흑153은 백이 흑 한점을 잡으면 받겠다는 뜻이다. 그만큼 현재 더 큰 곳도 없다. 선수는 계속 백이 잡고 있고, 끝내기도 순조롭다. 바둑은 이대로 끝날 듯이 보였는데…. 유승엽 withbdk@naver.com
  • 복권기금 4000억 물어낼판

    복권기금 4000억 물어낼판

    정부가 섣부른 복권 정책으로 4000억원을 날릴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이석웅 부장판사)는 14일 로또복권 사업자인 코리아로터스서비스(KLS)가 국민은행을 상대로 낸 약정수수료 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195억 570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지난 2004년 국무조정실 산하 복권위원회가 고시를 통해 복권 수수료를 내리고, 국민은행이 이에 따라 수수료를 지급하자,‘부당하다.’며 소송을 낸 KLS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지급 판결을 받은 195억여원은 우선 두 달치다. 이 판결이 최종심에서 확정될 경우 국민은행은 현재까지 미지급된 수수료 4000억여원을 지급해야 한다. 문제는 이 돈을 고스란히 정부가 물어줘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은행은 정부 위탁을 받아 판매업무를,KLS는 장비 및 전국 네트워크 설치 운영 등 시스템 기술지원 사업을 각각 맡고 있다. 로또복권은 매출액 중 절반 정도가 당첨금으로 지급되며,KLS에 3.144%, 복권 소매상에게 5%, 국민은행에 0.16%의 수수료가 돌아간다. 나머지는 전액 복권기금으로 귀속된다. 결국 수수료 인하에 따른 손실액은 복권기금에서 물어줄 수밖에 없다.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로또복권이 지난 2002년 12월 도입 이후 판매액이 당초 예상을 크게 초과하자 정부는 2004년 4월 고시를 통해 수수료율 최고한도를 4.9% 이하로 조정 고시했다. 국민은행은 이에 따라 KLS 수수료를 9.523%에서 3.144%로 대폭 낮춰 지급해왔다. 이번 판결에 대해 복권위원회측은 즉각 항소하겠다는 방침이다. 한 관계자는 “복권사업의 공익성에 관한 정부 입장이 재판부에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며 “법무부 등 관련부처와 협의해 복권위원회를 개최, 항소 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다. 그는 “수수료 조정 때 KLS측에 정식 공문을 보냈는데 아무런 공식적 답이 없었다.”며 “1심에서 졌지만 수수료 협상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반면 KLS측은 정부가 수수료 조정 협상에 나서지 않고 일방적으로 인하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반응이다.KLS 김범수 전무는 “정부와 국민은행이 초기 투자위험을 감내한 점을 무시한 채 별다른 협상도 없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김 전무는 그러나 “9.523%의 수수료율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며 정부와 협상을 통해 적정한 수수료율이 도출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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