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고증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시어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핵문제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빠른 발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종양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64
  • 한복디자이너 허영씨/하와이서 「우리 인형과 옷」전

    ◎23∼27일/조선여인 복식 등 25점 한복 디자이너 허영씨가 오는 23일부터 27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알라모아나 전시장에서 「우리 인형과 옷」전시회를 연다. 지난 5월 미국 뉴욕 전시회에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는 하와이 한국 미술인협회가 현지인들에게 한국풍물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초청 행사.허씨는 전통의 서울굿 12거리의 무복을 비롯해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 나온 조선시대 여인 복식,궁중정재 선유락과 승무·살풀이에 쓰인 춤옷등 25점을 60㎝정도 키의 인형에 입혀 선보인다. 허씨는 승무와 살풀이춤에 사용됐던 의복을 정확히 재연하기 위해 이매방씨(중요 무형문화재 살풀이춤 기능보유자)등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으며 속곳 속속곳 단속곳 등 전통옷의 기본 속차림에도 정확성을 기했다고 말했다.
  • 일 「라면 박물관」 큰 인기

    ◎50∼60년대 회사원의 「퇴근길 한잔 골목」 재현/라면역사도 한눈에… 두달만에 33만명 찾아 50∼60년대 일본 샐러리맨들이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술한잔과 라면으로 회포를 풀었던 「라멘(라면의 일본식 발음)골목」.일본 경제부흥의 뒤꼍에서 직장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라멘골목을 완벽히 재현,지난 3월 요코하마에 문을 연 「라멘박물관」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라멘박물관에는 라멘에 관해서는 없는 것이 없다.우선 박물관 지상층 전시장에는 중국 면이 일본으로 건너와 라멘이 된 라멘의 초창기 모습이 전시돼 있다.50년대 사용된 금이 간 식탁,행상들의 호객용 피리,라멘집의 커튼인 「노렌」,라멘뽑는 기계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그리고 현재 전세계에서 판매되는 인스턴트 라멘이 모두 망라돼 있으며 1백엔으로 비디오게임을 통해 라멘먹기대회에 참가할 수도 있다. 이같은 전시물보다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50년대말 도시풍경이 그대로 살아 있는 지하의 「라멘골목」이다.이곳에는 삿포로·도쿄·구마모토 등지로 나눠져 당시 정경을 연출하며 지역별 특색 있는 라멘을 실제로 판매한다. 지하1층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사이로 왕년의 영화배우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거리에는 나무 울타리,찢어진 선거포스터,집집마다 놓여있는 우유통,대나무 끝에 매달려 있는 옷가지들이 보인다.좀 더 걸어가보면 일본 전통술집인 이자카야가 줄지어 있다.이곳에서는 마치 넥타이를 풀어젖힌 샐러리맨들이 술주정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하 2층은 역도산의 프로레슬링경기가 길한쪽 텔레비전에서 방송되고 있는 광장이다.광장은 옷가게·이발소·라멘집으로 둘러싸여 있다. 라멘박물관 전시의 역사적 고증을 책임진 음식문화연구가 게이코 코수게씨에 따르면 지난 58년 니신사에서 인스턴트 「치킨 라멘」을 발매한 이후 라멘이 일상용어가 됐다 한다. 박물관 설립자인 요지 이와오카씨는 열렬한 라멘애호가.그는 처음에는 일본 전역의 라멘을 맛볼 수 있는 장소만을 생각했으나 준비과정에서 라멘을 일본문화유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게 돼 박물관설립에까지 나섰다. 지난 90년 박물관 설립을 계획하고 설립위원 20명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략 1천여개의 라멘가게를 들렀다.모든 라멘을 맛본 뒤 이 가운데 8곳을 선정,박물관에 전시하기까지에는 3년반의 시간이 걸렸다.라멘가게 주인들은 좀더 새롭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원했으며 박물관 관계자들은 이를 선정하는데 꽤나 고심했기 때문이다. 향수도 느끼고 진귀한 라멘도 먹을 수 있는 이 박물관은 사업적으로도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개장 첫달인 3월에는 16만명이,4월에는 17만명이 찾았다. 박물관에서 사업및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히로미 사와다씨는 『어떤 날은 방문객이 너무 많아 라멘의 양을 충당할 수가 없을 정도』라며 『앞으로는 계절에 맞게 가키고리(향기나는 얼음) 등도 내놓을 계획이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물론 50년대를 기억하는 중년층 이상에 특히 인기가 높다.하지만 대화가 부족한 요즘 핵가족들이 이곳을 찾으면 30년전 저녁놀을 배경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멘 국물을 먹으며 굳어진 혀를 풀고 마음을 덥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며 박물관 관계자들은 가족 나들이 장소로 이곳을 꼭 권한다.
  • 「중도」 임정청사 내년상반기 복원/한­중,협정체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인 중경청사 복원이 내년 상반기에 완료돼 광복 50주년인 95년 8월15일 이전에 현지에서 복원기념식을 갖는다. 독립기념관(관장 최창규)과 중국 중경시 인민대외우호협회는 지난달 30일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경청사 복원 협정서」를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한·중 양국은 각 1백30만달러씩 모두 2백60만달러를 들여 중국중경시 연화지 38의1,2,3,4호에 있는 2층짜리 건물 2동과 4층 건물 2동의 임정 청사를 원래대로 재현하고 당시의 유물도 전시한다. 문화체육부는 지난 91년말 도시개발로 임정청사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청사복원을 위해 중국 및 중경시 당국에 건물 보존을 요청했으며,관계 전문가를 파견해 고증과 실측조사를 추진했다.
  • 일 외환 보유고/최고치를 경신/총 1천1백14억불

    【도쿄 AFP 연합】 6월중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5월에 비해 45억6천만달러 늘어난 1천1백14억6천만달러를 기록,사상최고치를 경신했다고 일대장성이 1일 발표했다. 이같은 외환보유고증가 발표는 중앙은행격인 일본은행이 원화에 대한 달러화의 가치하락을 막기 위해 달러매입을 계속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은 후 나온 것으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8개월째 계속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엔화에 대한 달러화의 가치는 지난 한달동안 무려 6.4%나 하락했으며 이날 도쿄외환시장에서는 미·일무역협상 교착에 대한 우려 때문에 1달러에 97.68엔으로 거래되는 사상최고의 엔화가치상승을 기록했다. 외환보유고는 외국의 태환화폐와 김,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을 합친 것이다.
  • 불교건축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16)

    ◎호국사찰 건립 성왕때 본격화/왕흥·미륵사가 대표적… 기술 일에 전수/1사1탑 원칙… 남북축으로 건물 배치/왕권­미륵신안 결부… 통치·호국수단으로 세워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보다 12년이 뒤져 384년인 침류왕원년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불교가 전래된 이듬해 한산(서울지역)에 불사를 조영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지금까지 서울 근방에서 백제의 사찰터가 확인된바는 아직 없다.백제의 사찰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도읍을 공주로 옮긴 후부터다.즉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대통사라든가 수원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의 사찰 유적이 본격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성왕대 이후인 6세기초 부여시대(사비시대)에서부터라 할수있다.이 시대에는 절 이름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만도 왕흥사를 비롯하여 호암사·칠악사·오함사·도량사·자복사·제석사·오금사·보광사·미륵사·사자사·북부수덕사 등이다.이중에서 도양사·자복사·보광사 등의 위치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그 외는 대체로 위치가 밝혀져 있다. ○한산에 첫불사 지어 특히 왕흥사와 미륵사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 자세한 기록이 있고 백제의 호국사찰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소개를 한다.먼저 왕흥사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백제 제29대 법왕의 휘(죽은 이를 높여 부르는 이름)는 선인데 혹은 효순이라고도 한다.개황10년 기미년(599년)에 즉위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소를 내려 살생을 금하였다.민가에서 기르는 새나 매 그리고 짐승 등을 풀어주고 고기잡이나 사냥에 쓰이는 기구를 불살라 사냥을 일체 금지시켰다.이듬해 경신년에 30인의 승려를 두어 왕흥사를 사비성에 세웠다.처음 터를 닦을때 왕이 승하하여 무왕이 이를 이었다.아버지가 기초를 놓고 아들이 이루었으니 수십년이 지나 이루어졌다.이 절의 이름도 역시 미륵사라 했다.또 그절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있어 4계절의 꽃과 나무가 수려하여 아름다웠고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갈때 그 경치가 장관을 이루었다』라고 되어있어 익산 미륵사와 창건연대가 비슷하고 이름도 같아 우리에게 혼돈을 일으킨다. 이 사찰 역시 국왕이 세운 호국사찰임이 분명하다.지금 부여의 북쪽 백마강을 건너 규암 왕은리 부락에 이 절터가 있어 초석의 일부가 노출되고 있지만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알수없다.익산 미륵사에 대하여도 재미있는 창건설화를 「삼국유사」에 남기고 있다.즉『하루는 무왕(600∼640년)이 부인과 같이 용화산위의 사자사를 가는 길에 용화산밑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서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하하여 배례를 하였다.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큰 절을 세우기를 원한다고 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연못을 메울것을 물었더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이에 미륵삼존을 법상으로 불전과 탑·낭 등을 세우고 절의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하였다.이에 진평왕(신라)은 백공을 보내어 이를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백제는 왕권과 미륵신앙을 결부시켜 통치와 호국의 수단으로 미륵사를 세웠음을 알수 있다.또 기록으로 보아 절의 가람배치는 3곳에다 불전과 탑,그리고 회랑을 배치한 형식임을 알수있다.이 절터는 1980년부터 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전부터 반파되어 남아있는 서탑을 비롯하여 금당터의 초석 그리고 두곳의 당간지주석이 남아 있었다.실제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로는 3개의 탑이 동서축을 맞추어 나란히 열을 지어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그중 중앙의 것은 목조탑이었고 동서양쪽의 것은 석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여기에 곁들여 각 탑앞에 중문터와 뒤에 금당터가 각기 발견되고 회랑도 각 구역마다 이용이 되었음을 알수 있었다.이렇게 세개의 전탑이 병렬로 놓인 예는 아직 다른 곳에는 밝혀진바 없다.또 절터의 지반을늪지를 메워 이루었음도 확인되고 절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이러한 사실은 위의 기록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었다. ○목조건물 모두 소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동탑에 사용했던 탑부재 약2백60편을 비롯하여 건축목재의 일부와 생활용구인 큰 토기항아리,녹청색 유약을 입힌 서까래 장식기와,금동제 판불 등 1만8천여점이나 되어 백제사찰건축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1992년 동탑을 9층으로 고증하여 복원할 수있었다. 이렇듯 백제는 일찍부터 미륵신앙을 발전시켜 왕의 권위를 한층 높이는데 이용한 것이다.불타에는 과거불과 미래불이 있는데 미륵신앙은 인류에게 평안과 희망을 주는 미래불의 도래 사상을 의미하며 미래불은 즉 미륵인 것이다.미륵신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미륵하생신앙으로서 석가가 입멸한후 56억7천만년이 지나서 미래불인 미륵불이 도솔천으로부터 중생계로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성왕이후 부여시대의 백제의 사찰은 기록된 것이외에도 일제시부터 해방후 근래까지 그 터가 많이 조사되어 왔다.부여 군수이와 동남리절터,정림사와 부소산 폐사터,금강사터,용정리절터,구아리절터 등 이외에도 많다. 이들 절터의 조사결과 그 특징은 탑이 하나 있는데 대부분 목탑이었고 그 가람의 배치도 대체로 남북축을 맞추어 남쪽에서부터 중문과 탑·금당·강당을 두고 중문과 강당을양측으로 연결하여 회랑을 돌림으로써 방형의 안뜰을 만들었다.이것은 소위 백제의 전형적인 1탑식 가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일본에 전래되어 대판의 사천왕사식 가람을 형성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어 동남리절터에는 탑자리가 확인되지 않았고 금강사터에서는 동서축에 맞추어 건물배치를 함으로써 가람이 동향을 한 것이다.백제는 538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아울러 경전과 불상은 물론 조불,조사공을 보내어 불사를 조영하는데 기술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였다.따라서 비조사를 비롯하여 사천왕사·법륭사 등 비조시대(552∼645년)와 나양시대 초기의 불사건축들의 대부분은 백제의 기술에 의존하여 세워졌다고 믿어진다. 한편 백제의 뛰어난 사찰 건축기술은 신라에서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신라의 호국정신이 담긴 황룡사 9층탑은 백제의 아비지의 조탑기술을 빌려 높이 80m나 되는 목조탑을 세우게 됐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다.아비지는 이 거대한 신라의 통일탑을 세우는 도중 어느날밤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는 공사를 중단하였었다는 기록은 지금 생각하여도 수긍이 갈만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이 찬란했던 건축문화로서 백제사찰의 목조건축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려시대의 건축도 몇동만 남아있음)따라서 백제의 사찰건축을 연구하려면 일본에 남아있는 나라시대의 사찰목조건축을 그 방증자료로 연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우면서도 가슴아픈 일이다.장경호(공박·문화재연구소장) ◎사찰과 미륵신앙/미륵신앙 6세기에 널리 퍼져/“강력한 왕조” 염원서 대가람·불상 세워 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은 원찰로 조성되었다.다시 말하면 어떤 간절한 염원을 사찰창건의 동기로 삼은 것이다.이 시대의 대표적 가람은 사비도성 밖 백마강 건너 왕흥사와 익산 미륵사다.이들 가람은 호국과 깊이 연관된 미륵신앙을 담았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가 제자인 미륵에게 장차 성물을 한 뒤에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할 것이라고 예견한 대승적 자비사상에서 비롯되었다.미륵신안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고 원래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연유한 말이다.기독교의 메시아(Messiah)와 비유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유토피아적 희망의 신앙이라는 점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미륵신앙은 6세기 이후 백제에 널리 퍼졌다. 이는 미륵과 연관한 사차르이 창건과 미륵반가사유상의 조상이 널리 성행한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글고 위덕왕(재위AD554∼597)때 신라의 승려 진자가 미륵화신을 친견코자 웅진(공주)이 수원사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비도성 바로 지척에 완공한 왕흥사와 더불어 익산에 미륵사가 창건되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시기는 무왕의 재위기(AD600∼640년)에 해당한다.법왕이 옥천전투에서 전사한 이른바 옥천회전 패배이후 동요된 백제왕권을 회복한 그는 신라에 설욕전을 폈다.신라를 압박,낙동강까지 진출함으로써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그래서 백제 정치사속에 우뚝한 인물이기도 하다. 무왕의 업적은 국민들이 품고있다 기층적 미륵신앙과도 맞물려 자연스럽게 호국으로 연결되었다.이같은 미륵신앙은 호국사찰을 표방한 대가람창건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 대원군 유품 1백38점 공개/5세손 이청씨 서울시에 기능

    ◎회갑기념으로 그린 영정·의복 등 포함/도총관으로 임명될 때의 교지 2점도 흥선대원군 영정(초상화)과 병풍·의복등 그의 유품 1백38점이 한꺼번에 공개됐다. 서울시는 23일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씨(58)가 대원군 영정 1점,교지 2점등 유품 다수를 기증했다고 밝히고 이날 이들 유품들을 공개했다.시는 영정과 병풍,의복등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국보나 보물등으로 지정해주도록 관계부처에 건의하기로 했다. 이들 유품중 대원군의 영정은 1881년에 회갑기념으로 당시의 왕실화가인 이한철이 그린 것으로 대원군의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8방향으로 진주알이 박힌 의관을 쓴 당당한 모습의 영정은 고감도채색을 사용해 1백1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변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대원군이 25살때인 헌종 11년(1845년)수능관으로 제수돼 노비 6명과 전50결(16만3천7백50평)을 하사받고 헌종 13년에는 요즘의 수방사령관격인 오위도총부의 책임자인 도총관으로 임명될 때의 내용을 담은 교지(왕의 사령장)2점도 처음 공개돼 학계의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대원군의 손자며느리이자 순종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가 1906년 13살때 황태자비로 책봉될때 입은 가례복도 선보였다.짙은 청색바탕에 9줄의 공작무늬가 수놓인 가례복은 황태자비로 책봉될 때의 예복이다. 한편 서울시는 대원군의 유품이 한꺼번에 공개되기도 처음인데다 대부분이 귀중한 문화재로 여겨져 정도 6백년기념사업으로 복원하고 있는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 이를 전시,오는 95년말부터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 김혜란 「서울 굿」 무대에/28일 KBS홀/회심곡 등 7거리 재현

    우리 민속예술의 보고랄 수 있는 「굿」을 무대예술로 양식화시킨 김혜란씨(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준문화재)의 서울굿 공연이 28일(하오 3시,6시30분)여의도 KBS홀에서 열린다. 지난해 11월 예술의 전당에서 가졌던 공연이 큰 호응을 얻어 앙코르무대를 마련하게 됐다. 서울굿의 대가인 이지산씨에게 서울굿의 12거리를 모두 전수받은 김씨의 굿은 단순한 흥미거리로서가 아니라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무가는 물론이고 무복·무구도 모두 원형대로 재현된 것이다. 스승은혜감사 대잔치로 마련된 이번 공연은 부정거리­불사거리­마누라거리(상산거리)­조상거리­대감놀이­창부거리­회심곡등 모두 7거리로 압축해 보여준다. 임정란 김금숙 전숙희 이금미씨 등 21명이 출연한다.음악은 피리 김찬섭,장구 김춘강,제금 장전순,해금 김한국,대금 박문웅씨가 맡는다.
  • 「받들어 칼」 의장대(청와대)

    「받들어 칼!」이란 독특한 의전관행이 청와대에 있다.관행이라 해봐야 역사가 3년도 안되긴 했다.그러나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외교의전인데다 양식의 독특함으로 해서 국제외교가의 화제행사가 됐다. 어느나라나 임지에 부임한 대사들은 그나라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게 마련이다.본국에서 받아 온 신임장을 주재국 원수에게 전달하는 행사다.대사들에게 있어 신임장 제정은 주재국에서의 첫번째 공식행사이자 그나라 원수와 대면하는 첫 기회가 되고 있다.그만큼 대사들에겐 의미있는 행사다.이 행사에서 대사들은 전통의장대를 사열하면서 「받들어 칼!」이란 경례의 특이한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이다. 30명의 국방부 전통의장대는 청와대 본관 현관입구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의 10m 거리에 양쪽으로 도열한다.조선시대의 포도청 군사복장에 왼손에 긴칼을 쥐고 있다. 신임장을 제정할 대사가 차에서 내려 현관에 들어서면 의장대장(장창구소령)의 「받들어 칼!」이란 구령이 떨어진다.의장병들은 허리를 15도쯤 구부리면서 두손으로칼을 받들어 순한국식 경의를 표시한다.「받들어 칼!」 경례를 받으면서 대사들은 온몸을 훑는 짜릿함을 맛본다고 한다. 전통의장대는 청와대를 방문하는 국빈들에게 서울이 도쿄나 워싱턴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진 고도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청와대 앞뜰에서 열리는 국빈환영행사 때 국빈은 육·해·공군 의장대에 이어 전통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덤덤하게 「받들어 총!」 경례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국빈들도 전통의장대 앞에 이르면 묘한 긴장을 느낀다고 한다.오색찬란한 5방6정기 22기가 「받들어 칼!」 구령과 함께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국군국악대(대장 김호석소령)의 대취타조가 「무령지곡」을 연주하면 「원더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는 것이다.「무령지곡」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중한 음악.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찬가에 해당한다. 현대도시 서울만 생각하고 있던 국빈들도 「무령지곡」과 「받들어 칼!」 경례를 받고는 서울이란 도시의 역사와 한국문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때의 전통의장대는 43명으로 늘어난다. 국방부에 전통의장대가 탄생한 것은 91년 9월이다.91년 6월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미국방문에서 독립전쟁 때의 군복차림으로 나온 전통의장대로부터 상당한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노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전통의장대의 구성을 지시했고 같은 해 10월 몽골대통령의 청와대 방문때 처음으로 이 의장대가 선을 보였다. 기수단의 5방6정기는 예전 왕의 행차때 사용하던 기를 고증해 재현했다.5방은 동서남북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청룡·백호·주작·현무·황룡이 그려져 있다.6정은 6명의 의로운 신하를 뜻하며 12간지중 짝수 간지의 상징동물로 그려져 있다. 전통의장대의 복장은 조선조 말기의 포도청 복제를 고증해 재현한 것이다.의장대장은 포도대장의 복장이고,의장병은 포도대장밑의 장교복장을 입는다. 요즘 사람들에겐 생소한 「받들어 칼!」 구령은 「받들어 총!」에서 따왔다.본래 조선시대에 검으로 예를 표할 때는 땅에 무릎을 꿇고 칼을 받쳐드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의장대가 무릎을 꿇기는 어려워 칼을받쳐들되 허리를 15도가량 굽히고 있다.
  • 궁궐/서울정도 6백년 기념 문화재 재건사업

    ◎헐렸던 경복궁복원… 숭정전부터 “우뚝”/숭정문·회랑등과 함께 마무리공사 한창/자정전·태녕전등 「2단계 공사」 9월부터/운현궁은 고증없이 증축한 회랑 보수작업 착수 서울 옛 도성안에는 아직도 여러 궁궐이 남아있다.경복궁을 비롯,창덕궁·덕수궁·창경궁 등이다.역사교육장으로 때로는 휴식의 장소로 사랑받는 전통공간이 되어왔다.이들이 모두 조선의 궁궐임을 쉽사리 안다. 그러나 잃어버린 조선의 궁궐들을 아는 이들은 흔치 않다.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까맣게 모르는 조선의 궁궐,그것은 바로 경희궁(사적271호)과 운현궁이다.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모두가 헐리고 2채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궁궐터마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그 경희궁이 제모습을 찾기시작했다.1907년 일제통감부가 중학교를 세우면서 헐린 조선의 궁궐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서울시가 정도6백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경희궁 복원이 실현되어 정전인 숭정전부터 우뚝세워졌다.그리고 숭정문이 들어서고 회랑이 둘러쳐졌다.오는 9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궁궐터마저 파괴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왕기가 서린 경희궁을 해체하고 긴 식민통치를 펴는 동안 자취없이 사라진 경희궁.조국광복을 맞고도 한동안 염두에 두지 못한 경희궁복원이야기가 나오더니,지난 87년부터 궁터발굴이 진행되었다.그리고 착공 6년만에 잃어버린 궁궐모습을 떠올렸다.서울시가 이번 1단계 복원사업에 쏟은 예산만도 58억1천3백만원에 이른다. 서울시는 경희궁정비 2단계사업으로 오는 96년까지 편전인 자정전,임금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태령전,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한 흥정당 등을 복원한다.숭정권 뒤편에 터를 잡았던 자정전 자리는 명지대건축문화연구소가 확인한 바 있다.자정전은 기단지의 호석및 바닥전돌이 발굴됨으로써 이미 복원되고 있는 숭정전축과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궁궐지」에 의하면 경희궁은 본래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있는 것으로 되어있다.정궁인 경북궁과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인다.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다는 점과 다른 것이다.또 경희궁은 정문을 바른쪽 모퉁이에 배치한 것도 특이하다. 이같은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었던 창덕궁에서도 찾아진다.결국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렸다는 이야기가 된다.각 건물의 배치는 우선 외전의 경우 숭정전을 서쪽에 앉혀 동향을 바라보게 하면서 주위는 행각을 돌린 가운데 사방에 문을 냈다.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이 있고 주변에 태령전이 위치했다.숭정전 오른편 즉 북쪽에 흥정당,그 주변에 왕이 책을 읽는 장소인 존현각과 석음각을 두었다는 것이다. ○58억들여 6년 공사 오른쪽 내전으로는 정침인 회상전,융복전,장락전이 있었다.그 주위에는 용비·봉상이라는 누각과 연못,연회장인 광명전을 배치했다.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5군데로 되어 있으며,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이 정문이다.경희궁은 흥화문을 거쳐 내전 앞을 지나 서쪽 끝의 외전 정전에 도달하는 특수한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희궁의 전각들은 거의 모두 헐려 없어졌으나 정전인수정전과 정문인 흥화문,후원의 정자 황학정이 남아있다.정전은 1926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동국대 캠퍼스에 다시 세워졌다.정면 5칸,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 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1686년 처음 지은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흥화문 역시 1686년에 세워졌다.지난 1932년 일본인들의 절 박문사로 옮겼다가 지난 88년 제자리에 복원되었다.지난 1923년 민간인에게 팔렸던 황학정은 서울 사직공원 사직단 뒤편으로 옮겨 복원했다. 경희궁은 야주현대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에서 광채가 나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는데서 유래한다.흥화문의 현판글씨는 경복궁 동무광에 보관되어 있다. ○교육장으로 활용 서울시는 경희궁을 현재 건립중인 시립박문관과 연계,역사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경희궁 경내를 야외문화전시공간으로 조성하는 한편 궁중가례를 재현시켜 국내외인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수시로 전통문화행사를 유치키로 했다.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사업 이외에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사적257호)복원계획도 정도6벡년 기념사업에 포함시켰다.시는 83억2천8백만원을 들여 지난해 토지(2천1백48평)와 건물을 매입,현재 보수작업을 펴고있다.40억3천7백만원을 들여 회랑을 신축하는 등의 보수공사를 오는 95년12월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 역사전통공간은 대원군유품을 비롯한 고미술품전시장,전통예절교육장,고건축 연구학습장,전통혼례식장,민속놀이마당으로 활용된다.이를 위해 72평의 회랑을 새로 짓고 마당 3백40평을 확장키로 했다.그리고 고증없이 최근에 증축한 부분을 제거,옛 모습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운현궁은 본래 흥선대원군의 사저다.조선 후기의 주택건축물로,고종이 임금자리에 오른 뒤 대폭확장하면서 궁으로 부르게 되었다.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하던 1863∼1873년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담에는 4곳의 대문을 설치했다.그 안에는 아재당을 비롯 사랑채인 노안당,안채인 이로당,노안당,선조들을 모신 사당 등을 두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음산한 겨울날 숨을 거두는것으로 시작되는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무대이기도 하다.파락호 시절에 겪었던 수모와 시련,이를 극복하고 섭정의 권좌에 도달한 대원군의 체취가 서린 역사현장이다.그래서 운현궁은 풍운의 근세사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 ▷경희궁 약사◁ ▲1620년(광해군12년)이궁으로서의 경덕궁을 지어 궁궐 모습을 갖춤 ▲1623년 인조가 즉위하면서 정사를 보기 시작함 ▲1654년(문종8년)숙종이 이 궁의 회상전에서 태어남 ▲1688년(숙종14년)경종이 이 궁의 융복전에서 태어남 ▲1760년(영조30년)궁명을 경희궁으로 개칭함 ▲1777년 정조가 이 궁의 숭정문에서 즉위함 ▲1835년 헌종이 숭정문에서 즉위함 ▲1907년 일제 통감부가 궁 서쪽에 중학교를 세움 ▲1915년 경성중학교(서울고 전신)가 궁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파괴 ▲1922년 전매국 관사용지로 궁터를 파는 등 4만1천여평으로 축소됨 ▲1923∼32년 황학정,숭정전,회상전 뿔뿔이 이축됨 ▲1974년 서울고 이전과 더불어 부지를 현대에 매각 ▲1984년 서울시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교환형식을 빌려 부지를 확보함 ▲1985∼87년 경희궁 복원계획에 따라 궁지발굴(단국대) ▲1987년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 ▲1989년 숭정전 발굴(명지대) ▲1990∼94년 숭정전,숭정문,회랑공사
  • “개인소장 고전자료 무료감정 해줍니다”

    ◎국립중앙도서관,오늘부터 「상담실」 개설/고증·서지적 감정결과 그자리서 통보/사장된 희귀문화재 대거 “햇빛” 볼 전망/가치 인정되면 문화재 지정받도록 도와줄 예정줄 개인이 소장한 고전자료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감정·평가받을 수 있게 됐다.국립중앙도서관(관장 이경문)은 도서관 7층 고전운영실에 고전자료상담실을 개설,10일부터 개인이 갖고 있는 고서·고문서·고지도등에 대해 고증및 서지적인 감정을 해주기로 했다. 권위있는 국가기관에서 개인소장 고전물을 언제라도 감정하는 기구를 갖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따라 그동안 감정받는 길을 몰라 고전물을 묵혀두었던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서 전해내려오는 자료들을 평가받을 것으로 예상돼 사장됐던 문화재들이 대거 햇빛을 보게 될 전망이다. 고전자료상담실은 고서전문원 4명으로 운영되며 개인이 갖고 온 고전자료들의 내용·제작연대·편저자·판별등 서지적 가치를 1차 감정해 그 자리에서 결과를 통보해 주게 된다. 또 그 자료에 대한 평가가 어렵거나 문화재급의 가치가 있다고판정될 경우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위원회」에 넘겨 정밀감정할 계획이다. 「고서위원회」는 강주진 성균관재단이사장,천혜봉 성균관대명예교수,최승희 서울대교수등 원로 서지학자 8명으로 구성돼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고서위원회」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은 고전자료에 대해서는 문화재관리국과 연결시켜 문화재지정을 받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중앙도서관은 고전물 감정에 소요되는 시간·경비에 상관없이 비용은 받지 않을 방침이다. 그러나 고전자료에 대한 가격평가는 하지 않으며 감정결과를 문서로 작성해 주지도 않기로 했다. 한편 고전자료상담실에서는 도서관이 소장한 「십칠사찬고금통요」(국보 제148호) 「석보상절」(보물 제523호)등 고서 20여만권에 대한 정보를 함께 제공해 주기로 했다. 이에 관한 문의는 전화·우편으로도 가능하다. 이귀원고전운영실장은 『고전자료상담실 운영으로 묻혀 있던 희귀한 고문서들이 많이 발굴되고 고전자료에 대한 국민의 의식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실장은 또 『고서·고문서·고지도등은 각 집안에서 관리하기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훼손될 위험성이 크다』고 지적하고 새로 가치가 인정된 고전자료들이 도서관에 기증돼 국민의 문화유산으로 활용되기를 바랐다. 고전자료상담실의 주소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산60의 1 국립중앙도서관내이며 전화번호는(02)535­6306.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상오10∼하오4시 문을 열며 매달 둘째·넷째 월요일과 국경일엔 쉰다.
  • 미대사관서 비자발급 미끼 3천명에 2억여원 챙겨/번역업체대표 영장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13일 이태호씨(39·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314의8)를 관광진흥법및 사인위조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씨는 지난 88년 12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진학회관 605호에 동명기획이란 번역업체를 차려놓고 미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김모씨(34)등 3천여명에게 『미국비자를 발급받게 해주겠다』며 위조한 B상호신용금고 직인으로 은행잔고 증명서를 떼주는 수법으로 1인당 2만∼1백50만원씩 모두 2억4천여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이씨에게 비자발급을 의뢰한 사람들가운데 일부는 이씨가 발급한 잔고증명서를 미국대사관에 제출,비자를 발급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 거꾸로 타는 가야금/송혜진(굄돌)

    국민학교 때 읽은 어느 동화책에선가,흥부 놀부의 성이 제비 연(연)씨로 소개된 적이 있다.이후 판소리 홍보가를 제대로 들어 보고서야 「흥부가」가 아니라 「흥보가」가 옳다는 것을,그리고 두 형제의 성이 제비 연씨가 아닌 「박」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는 『전라도는 운봉이 있고,경상도에는 함양이 있는데,운봉·함양 두 얼품(사이)에 박씨형제가 살았으되 형이름은 놀보요,아우 이름은 흥보였다…』라는 「흥보가」의 첫대목을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알 일이다. 물론 전래 이야기를 새로운 동화로 창작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이런 상상력은 가뜩이나 만날기회가 없는 전동문화에 대한 상식을 더 비 상식적으로 만든다. 최근에는 이런 일도 겪었다.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음반 진열대를 둘러보는데 지난해 발매되었다는 한 레이저 디스크의 겉표지를 보고 놀라움과 씁쓸함을 가누기 어려웠다.그 표지에는 아무리 국악에 관심없다해도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자주 보는 이들이라면 금방 다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가야금 연주자의연주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그 어른이 글쎄 가야금을 거꾸로 안고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것은 분명 겉표지를 디자인 하는 과정에서 미처 실수를 바로잡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은 되었지만 기가 막힌 심정은 이내 가라앉지 않았다.이 음반이 나온 것이 엊그제 일도 아닌데 그 실수가 아직도 바로잡혀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음악과 관련된 「잦은 실수」와 「게으른 바로잡음」,그리고 속내까지 알려하지 않는 무신경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텔레비전의 사극을 제작할 때에 의상 고증을 하느라 누구누구의 자문을 받아 얼마를 들여 재현했다는 기사는 이따금 보지만 드라마 속의 음악을 고증했다는 얘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원로 선생님의 지적,연주자가 부는 악기가 대금이거나 단소거나 피리거나 할것 없이 그저 「피리」 아니면 「퉁소」라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악을 잘 몰라서…』라고 말꼬리를 얼버무리겠지만 사실 『모른다』고 태연히 말할 수 있는 현실은 잘못되어도 너무잘못된 것은 아닌가.이렇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교육과정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한국인답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교육부터 소홀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청산/이연복(기고)

    ◎임정수립 75주년 아침에 4월13일 오늘은 이역만리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가 수립 선포된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1919년4월10일과 11일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29명의 의원으로 임시의정원을 구성,국호·연호및 관제를 의결해 국무원을 선거함과 함께 임시헌장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출범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이는 4월13일 내외에 선포되었다. 임정은 말할 나위없이 3·1운동의 한 결정체였다.독립을 선언한 이상 정부의 수립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그리하여 이 무렵 무려 8개곳에서 임정이 수립 선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실제로 활동한 정부는 한성정부,노영정부,상해정부였으며 이 정부들은 1919년9월15일 ①임정의 위치를 상해로 ②법통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 ③노령정부는 해소된다는 선에서 통합되었다.이는 헌법개정으로(1차) 이루어졌다.그리고 2차 개헌(1925년)에서는 국무령제(의원내각제)를,3차 개헌(1927년)에서는 국무위원제(집단지도제)를,4차 개헌(1940년)에서는 주석제를,그리고 5차 개헌(1944년)에서는 주석·부주석제를 채택함으로써 모든 당파의 임정으로의 합류와 정치적 상황에 대처해 나가면서 법통을 유지해 왔다.그 사이 임정은 연통제와 교통국의 설치,외교활동,군사활동 등 외로운 항쟁을 지속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임정도 정부조직으로 환국하지 못했다.개인자격으로 귀국했지만 제2의 독립운동이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그후 임정의 법통은 비상국민회의→국민회의(대한국민회)→대한민국에 계승된 것이다. 1948년 제헌 헌법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부를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 국가로 재건함에…」라고 하여 (현)대한민국은 임정을 재건한 것이라 하였으며,5·16헌법 전문에서는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유신헌법에서도 같이 표현),그리고 5공화국 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민족사…3·1운동의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하였으며,6공화국 헌법 전문에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제1공화국과 함께 임정의 법통을 명시한 것이 특이하다 하겠다.즉 모든 헌법전문에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 하였다.정권의 정당성을 논의할 때 그 정통성이란 무엇인가? 이는 전근대사회에서는 혈연적인 의미를 내포한 「바른계통」 「정당한 혈통」을 뜻하는 적장의 계통을 가리켰다.그런데 근대 이후 대중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대중의 지지를 근거로 한 것인가에 따라 그 정통성 여부가 가려지게 마련이다.임정의 법통이란 정통성에 다름아니라고 할 수 있다.역대정권이 과연 얼마나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임정의 법통을 계승하였는지 의문이다.그 계승한 자취를 체계적으로 밝혀내고 더욱 소중하게 이어나갈 참된 노력이 부족하거니와 어느 의미에서는 독립운동의 전통이 도시 희미하고 그것이 여러가지로 문제시되지 않은데에 여전한 민족적 고난의 씨앗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다행히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상해의 마지막 임정청사 「마당로4호」가 복원되고 1990년부터는 임정수립기념식이 정부주관으로 행해질 뿐아니라 1993년 이래 임정요인들의 유해가 국립묘지에이장되고 있다.또 멀지 않아 중경의 임정청사가 복원된다고 하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이런 일들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국이 선포된 김신부로 22호도 정확한 고증을 받아 보존할 가치가 있다.이런 유사한 유적지를 상당수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정부라면 임정주석 김구의 암살 경위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청산하지 못한 역사부터 청산해야 하지 않을까?
  • 바람직한 역사의 방향/변태섭(일요일 아침에)

    요새 신문이나 방송들은 모두가 새로운 국사교과서 개편안에 대한 논란으로 떠들썩하다.특히 현대부분 용어에 대하여는 학계 뿐 아니라 정치계까지도 비판의 소리가 요란하다. 이 개편안을 작성한 「국사교육 내용전개준거안 연구위원회」는 사방으로부터 공박을 받아 몹시 난처한 모양이다.몇년전 이와 유사한 작업을 맡아 곤혹을 치른 바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같지 않은 동정이 간다. 86년 문교부의 「국사교육심의회」의 책임을 맡아 새 국사교과서의 집필방향을 제정하였을 때도 역시 각계로부터 혹독한 공박을 받았다.이번의 문제점이 주로 현대부분이고 진보주의사관에 비판이 가해진데 반하여 당시의 문제점은 고대부분이고 재야사학자들의 국수주의사관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점이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재야사학자들은 끈기있게 자기들의 학설을 교과서에 반영하 것을 요구해 왔다.단군을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든가,고조선의 영역이 만주 뿐 아니라 황하 또는 산동반도까지 이르렀다는 주장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러한 국수주의적인 역사인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느낌이 든다.오히려 근래에는 재야사학자 뿐 아니라 문인이나 의사 등 역사학과는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가세하고 있는 형편이다.이들 비력사학자들의 역사서술은 오늘의 정통사학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역사연구가 역사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님은 물론이다.오히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국민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그 나름대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역사학계로 볼때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들의 역사서술이 한국사를 왜곡하고 국민들을 오도한다면 이는 결코 방치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역사연구의 주역은 아무래도 대학 사학과에서 역사학연구에 대한 엄격한 교육을 받고 과학적인 역사연구의 경험을 가진 전공학자라야 함은 상식적인 일이다.문헌을 고증하는 방법이나 역사인식의 방법론 같은 역사연구의 기초지식을 쌓은 후에 역사서술에 손을 대야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역사학의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은 정통사학에서 볼 때 문외한일수 밖에 없다.좋게 표한하여 「아마추어 사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들의 만용에 가까운 무책임한 역사서술은 역사전공자의 눈에는 지극히 위험하게 비치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한국사를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공자가 우리민족의 조상이고 한자가 우리 고유의 문자라고 우긴다.고대일본이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나라가 세워지고 그들의 고대문화는 전적으로 우리의 전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일반국민으로 볼 때는 기분 좋은 학설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과학적인 한국사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북한학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얼마전의 뉴스에 의하면 평양에서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전자측정 결과 5천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어 단군이 실존인물임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5천년 전이라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데 어떻게 청동왕관을 지닌 단군의 실존이 가능하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국수주의사관과 더불어 이번 국사교과서 개편안에서 문제가 된 진보주의사관에 대하여도 우리들은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있을 것 같다.이번 개편안은 각계의 비판과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별 문제없이 처리되는 듯 하지만 국사학계 일각에 일고 있는 진보사관에 대하여는 우리 스스로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역시 역사학은 엄격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과 그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의미부여가 생명이라 생각된다.어떤 고정된 이념을 미리 설정하고 그에 맞추어 역사를 해석한다면 그것은 허구적이 될 우려가 있다.역사학의 이데올로기화는 역사학의 본질을 퇴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학계는 냉정한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제 한국사학계의 새로운 방향은 국수주의적 역사인식과 함께 진보주의적 역사인식에서도 자기를 보호하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 제모습 찾는 경복궁후원(청와대)

    청와대 정문 앞 길건너 맞은편에 신무문이 있다.경복궁의 북문.항상 헌병 두사람이 서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곳이다.그 안에 청와대 경비업무를 맡고 있는 수도방위사령부 제30경비단이 주둔하고 있다. 30년 넘게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던 이곳이 내년말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청와대 주변 군부대의 외곽이전 방침에 따라 30단의 본부와 내무반이 모두 서대문구 현저동 제33단 자리로 옮겨가게 돼있어 경복궁의 후원으로 제모습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이곳의 넓이는 모두 1만2천평.61년 5·16 때 서울에 들어왔던 군부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경복궁후원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으로 됐다. 30단의 내부는 연병장과 테니스장일대,탱크·차량등이 있는 주차장일대,문화재건물일대등 3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이들 땅의 내력은 서로 다르다. 연병장지역은 경복궁 창건 때 궁중에 상이 나면 시신을 안치하는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건물 이름은 태훤전·영사재 등이었던 것으로 구전된다.그러나 정확한 고증자료가 없어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도 복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5·16 때도 지금의 연병장은 그저 빈터로 남아 있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조선조말에는 이곳이 궁중요리에 쓸 소나 돼지의 도축장으로 사용됐고,일부는 궁궐수비대가 궁중난방용 장작을 쌓아 놓기도 했던 곳이다.이를테면 궁중의 궂은 일을 하는 곳이었다.그래서 터가 세다는 말도 들린다. 주차장지역에는 천체관측을 하는 간이대·규표등의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역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옛 문화재가 남아 있는 지역은 30단 본부건물 앞.청와대 쪽 담장을 등지고 팔우정.집옥재·협길당이 왼쪽부터 차례로 서 있다. 이들 건물은 모두 궁중도서관겸 서재로 쓰였던 곳이다.집옥재와 협길당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짜리 기와집이다.팔우정은 8각 2층의 중국풍 정자.한때 명성황후의 독서실로 이용됐다고 한다. 이곳에는 보현당이란 건물도 나란히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그러나 1917년 창덕궁에 큰불이 나 복원공사를 할 때 이 건물의 목재를 가져다 쓰느라 헐어버렸다고 문화재관리국의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다. 30단본부는 전두환전대통령이 이곳 대대장으로 있을 때인 지난 68년1월에 준공한 2층 슬래브 건물이다.12·12 때 신군부의 주도세력들이 모여 병력이동을 지휘했던 부대장실은 이건물 2층에 있다.또 하나 「현대사의 장」인 셈이다.따라서 이 건물을 과거사의 복원을 위해 헐지,아니면 「역사의 현장」으로 보관할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듯 하다. 이곳의 명물은 집옥재 앞에 있는 수십그루의 큰 은행나무들.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오래된 문화재들과 어우러져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이곳이 개방되면 시민들의 공간은 그만큼 더 늘어난다. 그러나 청와대 경호실의 부담은 훨씬 더 커진다.아무리 문민시대라 하더라도 군이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경비업무를 맡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무엇보다 군이 철수하면 청와대 경비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게 불어난다.청와대 경비업무의 일부를 맡고 있는 서울지방경찰청 제101경비단만 해도 연간 1백억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비슷한업무를 맡은 30단의 예산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 기형아 유발「다운증후군」24시간내 판별 가능/고대 김영태교수 개발

    선천성 염색체 이상 질환의 하나인 「다운 증후군」(몽고증)을 24시간 안에 판별할 수 있는 산전진단법이 국내 최초로 개발됐다. 고대 안암병원 김영태교수(산부인과)가 최근 개발한 이 진단법은 분자생물학적 기법을 응용한 것으로 기존 양수검사등에 비해 판별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다운 증후군은 사람의 염색체 23쌍(46개)중 제21번 염색체쌍의 이상으로 생기는 질환으로 빨리 발견해 내지 못하면 기형아 출산을 막을수가 없다. 김교수는 태아에서 미량의 디옥시리보핵산(DNA)을 추출해 중합효소연쇄반응법(PCR)으로 충분히 늘린 뒤 이를 엑스선 필름에 노출,염색체쌍의 밀도를 획인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정상태아는 21번 염색체쌍의 포물선이 같은 크기로 2개,또는 이 2개가 합쳐친 크기로 하나만 나타난다.이와 달리 3개의 포물선이 보이거나 정상보다 1.3∼2배 남짓 큰 포물선과 보통 크기의 포물선이 하나씩 나타날 경우에는 다운증후군으로 판별한다는 것이다. 국내 다운증후군환자는 신생아 7백명당 1명꼴로 매년 1천명이태어나고 있다.
  • 국사교과서 개정 문제있다(사설)

    중·고 국사교과서 개정시안을 보고 당장 우리는 깊은 우려를 갖게된다.역사적 고증과 해석이 더 필요한 것이 있고 그런가하면 미묘한 부분에까지 서둘러 개념을 정립하지 않았나 여기는 데서 그러하다.몇몇 역사용어를 두고 격심한 논쟁을 예상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우리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국사교과서를 시대에 맞게 개편해야 한다거나 일부 역사용어는 바르게 고쳐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돼왔다.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명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시대적 요청이 그것이다.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이해시켜야할 필요성은 큰데도 그러지 못한게 현실이기도 했다.냉전시대의 산물이거나 지난날의 권위주의 시대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이번에 개편시안을 통해 역사용어를 정리하려하는 시도는 일단 평가해도 좋을듯싶다.그러나 그 내용을 교과서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구폭동」과 「제주도4·3사건」에 대한 기술이다.이들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미 보편화된 시각이 있어왔다.그런 것을 「항쟁」으로 바꾸려 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고치려 할 때에는 충분한 논의과정이 있어야 하는데도 서둘렀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또하나는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새교과서는 주체사상의 기본틀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수령유일체제와 김정일후계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도록 기술할 것으로 들린다.뜻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북한과의 이념경쟁에서 이길수 있도록 청소년들에게 확실한 교육이념을 뿌리박도록 해야하는 데도 주체사상 교육으로 자칫 북한의 선동적인 구호만을 인식시키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와서는 교육현장의 혼란이 엄청날 것이라는 걱정의 소리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현대사의 용어까지 바꾸려고 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최근의 역사는 관련인물들이 살아있어 객관성을 띠기가 어렵고 또 반대나 이견이 많으며 어떤것에 대해서는 정의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개편에 포함시킨 것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언제 또 바뀔지도 모르는 개편은 곤란한 것이다.그런데다 「의거」「혁명」「동란」등의 용어에 대해서는 역사적 해석에 따른 개념정의부터가 있어야한다. 이같이 개편시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일부 급진시각을 걱정하고 있고 또 교과서에 급격한 변화를 주는 것이 청소년들의 교육에 타당한 것이냐에도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앞으로 몇차례의 심의과정에서 시일에 얽매이지 말고 충분한 논의와 함께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기를 당부한다.
  • 동학농민구 자료 한자리에/농민전쟁 1백돌 기념 민속전

    ◎군임명장·노비 매매문서 전시/짚둥우리·쇠가죽솥등도 재현 동학혁명 당시의 농민군의 생활상과 활동상을 한자리에 모은 민속학 전시회가 눈길을 끌고 있다. 「짚·풀생활사박물관」은 「1백주년기념 동학농민전쟁 민속전」을 오는 6월15일까지 열 예정.전시회장은 지난 10일 개막이후 동학혁명을 낳고 진전시킨 당시의 생활사를 한 눈으로 이해하려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품된 자료는 역사학자와 민속학자들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당시의 짚둥우리·쇠가죽솥등의 민속자료를 비롯,규장각과 개인소장자들로부터 입수한 동학군 임명장과 나주동학군명록,노비매매문서등의 각종자료 1백50여점.25평 남짓한 전시공간에 오밀조밀하게 배치 돼 있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모은다. 전시는 전봉준과 김개남·손화중등의 사진과 일본군의 서울침입 화보,농민군에게 주저리를 씌워 불태워 죽이는 장면을 재현한 사진을 순서대로 나열함으로써 보는이로 하여금 상상적 체험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것이 특징.또 동학2대 교주인 최시형의 사진과 생전에 그가즐겨 소일거리로 삼았다는 짚신 만드는 과정도 전시실 한편에 마련해 발길을 잡아둔다. 박물관장 인병선씨는 일제시대 민족사학자 인정식씨의 딸이자,시인 신동엽씨의 미망인.그는 『우리 농촌은 아직도 농민전쟁의 아우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라면서 『우리 민속학도 이제 유리장에서 나와 역사의 현장에 당당히 설 때가 됐다고 생각해 이번 전시회를 기획했다』고 말했다.「짚·풀생활사박물관」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다.문의는 516­5585
  • 선천성 박약/산전 진단 길 열려

    ◎제일병원 최수경박사팀,6개가계 20명 조사/태아 DNA 추출,결손유전자 찾아내/「프래자일 X증후군」 보인자 확인 성공 선천성 정신박약증의 40%를 차지하는 「프래자일 X증후군」을 산전 진단할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제일병원 최수경박사(유전학 연구실장)팀은 최근 분자생물학적 기법을 이용해 6가계 20명에서 프래자일 X증후군의 보인자를 확인하는데 성공했다. 최박사팀은 산모의 융모막과 양수에서 태아의 DNA를 추출한 뒤 중합효소 연쇄반응법(PCR)과 대립유전자 지도작성법등을 이용해 결손 유전자를 찾아냈다. 프래자일 X증후군은 남성의 성염색체(X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생겨 유전되는 질환.일단 발병하면 뚜렷한 치료법이 없기 때문에 산전진단을 통해 출산을 막을수 밖에 없다.남성의 경우 신생아 1천명에 1명,여성은 1천2백명에 1명 꼴로 나타나 다운증후군(몽고증)과 비슷한 발생빈도를 보인다.이 증후군은 멘델법칙대로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남성의 성염색체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뒤 딸에게 유전돼 이 딸의 2세에서부터 정신박약아가 생기는것이 특징.특히 이 증후군은 돌연변이가 일어난 남성이나,아버지로부터 유전자를 물려 받은 딸에는 아무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즉 처음에는 건강한 남자로부터 시작되는 데다 유전자를 물려 받은 여성들 조차 외모나 정신적으로 전혀 이상이 없기 때문에 정신박약아를 낳기전까지 산모의 보인자 유무 식별이 불가능,정신박약아 출산에 속수무책일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최박사는 『프래자일 X증후군 환자는 귀와 이마가 튀어 나오고 손금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등 특이한 양상을 보이지만 보통 언어구사및 보행능력이 떨어지는 3∼4세 이후에야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며 6촌 안에 정신박약아를 둔 여성은 임신중 반드시 진단을 받도록 권장했다. 한편 제일병원측은 산전 유전검사실 개소를 기념해 임신 8∼18주 사이의 임신부및 가계를 대상으로 희망자에 한해 프래자일 X증후군을 실비에 진단해주고 있다.
  • 의원 재산변동 실사/윤리위/금융기관등서 자료 받아 조사

    국회공직자윤리위(위원장 박승서)는 14일 하오 국회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지난달말 공개한 국회의원의 재산변동신고 내용에 대한 실사에 착수했다. 윤리위는 이날 회의에서 우선 건설부와 은행등 관계기관에 대해 부동산과 금융자료를 요청,이 자료를 토대로 의원들의 성실신고 여부를 가린뒤 재산증가분에 대한 실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윤리위는 이에 따라 내무·건설부와 국세청에 전의원의 부동산관련 자료를 요청하는 한편 재산변동이 없다고 신고한 58명의 의원과 일반예금등에 증감이 없다고 신고한 의원의 주거지및 사무실 주변의 금융기관 4∼5곳을 선정해 전산자료를 받기로 했다. 또 지난해 실사대상에서 제외됐던 제2금융권을 상대로 모든 의원의 금융자산을 실사하기로 하고 증권회사가 몰려있는 여의도 23개 지점을 포함,주거지및 사무실 주변의 증권회사 지점에도 자료를 요구키로 했다. 그러나 이번 변동신고에 예금잔고증명서를 제출한 금융지점에 대해서는 자료요청을 하지 않기로 했다. 윤리위는 이들 기관으로부터 자료가 도착되는 대로 내용을 분석한 뒤 이를 토대로 다음달 25일쯤 전체회의를 열어 면밀한 실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윤리위가 소명요구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는 대상자는 ▲부동산등을 매각하고 대금 사용처가 불분명한 의원 ▲예금과 부동산의 구입 근거를 밝히지 않은 의원 ▲생활비등이 과다하게 책정돼 있는 의원 ▲신고내용만으로는 재산내역을 추론하기 힘든 의원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