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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개장터~해남 ‘이순신길’ 조성

    화개장터~해남 ‘이순신길’ 조성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남도 이순신길’이 조성된다. 전남도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섬진강 화개장터~곡성~ 순천~ 보성~강진~해남 우수영 사이를 육상과 해상으로 연결하는 총 연장 250㎞의 탐방로를 만든다고 15일 밝혔다. 이 구간은 1597년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거제시 하청면) 해전 패전 후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재건하면서 명량대첩지로 이동했던 역사 현장이다. 당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뒤 이 길을 통해 명량대첩지로 한달여간 이동하면서 군사와 무기·병선 등을 모았다. 도는 이달부터 내년 1월까지 역사 고증과 기초 조사용역을 실시한 뒤 공사에 착수, 2014년 9월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바다 구간인 장흥 회진에서 해남 우수영까지 110㎞ 구간은 육로로 대체 조성된다. 탐방로엔 안내판, 안내지도 설치와 충무공이 당시 머물렀던 유숙지와 유적지 정비 등도 이뤄진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三代의 이야기속 질곡의 한국사 100년이…

    三代의 이야기속 질곡의 한국사 100년이…

    일제강점기와 분단, 6·25 전쟁, 1950년대 빈곤과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발전, 1970·80년대 민주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은 역사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집안이든 삼대(三代)의 인생을 털어 보면 행복 또는 불행의 형태로 100여년의 근·현대사들이 씨줄날줄로 촘촘히 엮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화가 정용연(44)의 3권짜리 ‘정가네 소사’(휴머니스트 펴냄)에는 그 정씨 집안 남자들과 며느리, 손녀의 인생을 통해 어쩌면 그렇게 한국사가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을까 싶은 내용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전남 장성 출신의 증조할아버지는 한학자로, 아버지 정동호에게 명심보감이며 한학을 가르쳤다. 만주로 이전해 농사를 지었지만 수확하기 전에 해방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귀국길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의무병이었던 아버지는 한학을 배운 덕분에 군대에서 일본어 의학책을 읽으며 의술을 익혔지만,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 탓에 무면허 의사로 살아야 했다. 학업을 연장하기에는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전북 김제평야 천석지기의 아들이던 외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식민지 한국에 돌아왔지만 금광을 찾아 헤매다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첩에게 남편을 빼앗기고도 무너진 가정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외할머니. 곱게 자란 양반집 아씨가 비단을 팔러 다니며 자식들을 키웠다.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소녀는 무면허 의사 아버지와 만나 살림을 꾸렸지만, 서울 산동네를 전전하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밖에 정가네 소사에는 빨치산이 된 육촌 할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엮여 육군사관학교 진학이 좌절된 형이나, 이발 기술로 돈을 벌었지만 못된 아가씨에게 홀랑 날리고 1980년대 중동개발 붐이 일 때 사우디로 간 순호 당숙, ‘청량리 588’의 서러운 아가씨가 있다. 또한 정부가 농가의 수입원으로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려 양잠을 권유했지만, 핑퐁 외교의 결과로 일본이 비단실 수입처를 중국으로 바꾸는 바람에 모두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1970년대 농촌 현실 등이 독자들을 매콤하고 아련한 1970~80년대의 추억으로 인도한다. 그래픽 노블 분위기의 자전 만화인데 정용연 작가는 “외할아버지를 방탕하게 그리고 아버지를 무능하게 그리게 돼서 정말 미안한데, 사실과 다르게 포장하기는 어려웠다.”고 30일 말했다. 정 작가는 “기억에 의존해 쓱쓱 그린 만화가 아니라 보이스카우트의 복장이나 순호 당숙의 이발소에 걸린 1983년 3월의 달력, 아버지의 군복 등 대부분 고증을 거친 것으로 생활사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헹궈 줄 때 조리개를 이용한다든지, 가스레인지 탓에 사라진 귀한 성냥의 존재 등도 신기하다. 옴니버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에피소드가 겹치기도 하는데, 기억을 덧댄 부분이 풍성해서 지루하지는 않다. 7년에 걸쳐 600쪽의 원고를 그렸다. 이 책을 기획한 위원석 교양만화 주간은 “100년 역사가 담담하고 따뜻하게 그려져 있다.”면서 “웹툰에 익숙한 청소년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적지 않아 한 번쯤 꼭 읽어봐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문화마당] ‘대세 세종’ /조혜정 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영화평론가

    [문화마당] ‘대세 세종’ /조혜정 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영화평론가

    가히 사극의 전성시대다. TV 드라마로 매년 굵직굵직한 사극들이 만들어지더니 영화에서도 사극이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작년만 해도 ‘최종병기 활’(김한민),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김석윤), ‘혈투’(박훈정), ‘평양성’(이준익)과 같은 사극영화들이 등장했다. 올해에도 이미 ‘가비’(장윤현), ‘후궁: 제왕의 첩’(김대승)이 개봉했으며, ‘나는 왕이로소이다’(장규성),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김주호),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또한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권력 다툼을 배경으로 한 ‘관상’이 제작될 예정이다. 사실 사극이 본격적으로 한국영화 장르의 한 줄기를 형성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1955년 ‘춘향전’(이규환)의 대성공 이후 ‘심청전’(이규환·1956), ‘단종애사’(전창근·1956) 등 역사를 배경으로 한 사극영화들이 붐을 이뤘다. 사극영화의 붐은 1960년대에도 이어져 ‘연산군’ 시리즈를 비롯해 ‘성웅 이순신’(유현목·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1965) 등 역사인물을 다룬 작품들이 연달아 제작됐다. 1970년대에는 국책영화로서 ‘난중일기’(장일호·1977) 같은 사극영화들이 만들어졌지만 편수는 대폭 줄었다. 1980년대에는 ‘어우동’(이장호·1985)처럼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만 성적코드를 접목시키거나 야담을 다룬 작품들이 주로 등장했다. 1990년대에도 사극영화가 여전히 간헐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중 ‘영원한 제국’(박종원·1995)은 한국 사극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2000년대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과 ‘취화선’(2001),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2003)과 ‘왕의 남자’(2005)를 거쳐 ‘쌍화점’(유하·2008),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준익·2010) 등 주목할 만한 사극영화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사극의 부활을 알렸다. 근래 사극영화가 붐인 이유는 뭘까. 먼저, 역사가 매력적인 콘텐츠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상을 지적해야 한다. 역사는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만화, 드라마, 연극 등 모든 콘텐츠 장르에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제공해 준다. 소재, 주제, 스토리, 캐릭터 등 모든 이야기 요소들을 역사에서 끌어낼 수 있고 장르융합이 가능하다. 역사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새로운 재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한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나 인물해석이 열려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역사에서 고증이 필요한 부분은 마땅히 살려 나가야 하지만, 상상으로 채워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리얼리티 강박에 매달리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요즘 관객들에게 거부감 없이 수용된다. 특히 판타지를 도입해 이른바 ‘퓨전 사극’의 가능성을 개척해 나가는 것도 사극영화의 붐에 일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컴퓨터 그래픽(CG) 등 기술의 발달에 따라 다양한 스펙터클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극이 ‘묵은’ 영화가 아니라 새롭고 신선한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한 것이 주효했다. 또 하나, 현재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치인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방편으로 일종의 ‘롤 모델’을 역사인물에게서 찾았다. 특히 대선주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역사인물의 리더십을 종종 거론한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때에는 정조에 대한 책과 드라마(‘이산’, ‘한성별곡-正’)가 뜨면서 정조를 롤 모델로 삼는 정치인들이 많았다. 최근에는 세종대왕이 대세인 것 같다. 아마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의 애민의식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배우 한석규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 그 이미지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일 터. ‘나는 왕이로소이다’도 세종이 진정한 군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룬 영화이니, 세종 마케팅은 정치나 대중문화에서나 대세다. 그러나 사극은 극일 뿐 현실이 아니다. 누가 진정한 ‘대세 세종’이 될 수 있을지는 꼼꼼히 지켜볼 일이다.
  • [문학 새 책]

    북극 사냥꾼들의 일상 꽁트집 ●북극허풍담 전 3권(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별천지 펴냄) 덴마크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저자가 북극에 사는 괴짜 사냥꾼들의 비범한 일상을 그린 연작 콩트집. 온통 눈과 빙산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북극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대한민국의 7~8월 찜통더위에 읽으면 그저 마음이 시원할 듯하다. 책표지도 북극 눈처럼 새하얗다. 각 콩트는 독립돼 있지만, 전체는 연결돼 있고, 허풍 같은데 묘한 현실성이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 감독의 소설 ●히다리 포목점(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푸른숲 펴냄) 영화 ‘카모메 식당’의 감독이 지은 소설집.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봉틀을 물려받은 청년 모리오는 자신을 위한 꽃무늬 치마와 모리오의 재봉틀 소리를 들어야 편두통에서 벗어나는 아래층 소녀 카트린을 위한 꽃무늬 치마를 만들기로 한다. 그래서 전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가는 오래된 섬유거리의 포목점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고양이 사브로와 말 없이 꽃무늬 포목을 골라주는 아주머니가 있다. 소심한 사람들이 잔잔하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 英추리작가협 골드대거상 작품 ●가짜 경감 듀(피터 러브시 지음, 이동윤 옮김, 엘릭시르 펴냄) 영국추리작가협회의 골드대거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영국 타임스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미스터리. 1920년 격변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유쾌함과 풍자, 서스펜스, 미스터리를 한데 맛있게 버무려 놓았다. 철저한 시대적 고증을 거친 작품으로 월터 듀 경감은 1910년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크리펜 박사 살인사건을 해결한 실존인물이다.
  • 신채호 글 200여편 발굴·분석

    ●신채호문학연구초(소명출판 펴냄) 단재 신채호의 작품 200여편을 새롭게 발굴한 고증학적 연구의 성과물이라고 저자인 김주현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말한다. 10년 가까이 단재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황성신문’ ‘권업신문’ ‘중화보’ ‘독립신문’ 등 신문과 잡지에 기고된 단재의 글을 찾아서 확보했고, 특히 ‘중화신보’ ‘북경중화신보’ 등에서 119편의 논설을 찾아내 고스란히 복원해 냈다. ‘월남망국사’ ‘의대리건국삼걸전’의 최초 번역을 단재가 했고, 애국계몽기 연극개량론의 주요 논설도 단재의 것이라고 밝혔다.
  • 1500년전 칠지도 ·환두대도 만나보세요

    1500년전 칠지도 ·환두대도 만나보세요

    고대 제철 방식으로 복원한 ‘칠지도’(위·七支刀)와 ‘무령왕 환두대도’(아래·環頭大刀)가 일반에 공개됐다. 충남도 백제역사문화관은 3일부터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 내 문화관 1층에서 최근 복원한 칠지도와 환두대도를 상설 전시한다. 칠지도는 칼날 양쪽에 굴곡진 가지를 3개씩 돋아나게 만든 것으로 백제시대 한·일 교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일본 국보로 지정돼 현재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에 보관돼 있다. 칼에 칠지도라는 이름과 함께 ‘백제가 왜왕에게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의 글자가 금으로 상감돼 있다. 이 칼을 일본 왕에게 선물한 왕은 백제 근초고왕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환두대도는 1971년 무령왕릉 출토 시 무령왕의 허리춤에서 발굴됐다. 백제유물 역사상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칼로 환두대도 중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손잡이에는 금실과 은실이 차례로 감겨 있고, 양쪽 끝은 봉황이 새겨진 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실물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있으나 부식 등으로 원형이 많이 훼손돼 있다. 두 칼은 제철에서 세공까지 전문가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전통 제철 기술로 만들어졌다. 역사문화관 관계자는 “단접기술(쇠를 접는 기술)로 칼날을 복원하는 등 1500년 전 백제의 최첨단 기술을 재현한 데 의미가 있다.”며 “문화관에는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등 백제 복제 유물 250여점도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부여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씨줄날줄] ‘생고무표’ 만리장성/구본영 논설위원

    “달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지구상 유일 인공 구조물” 만리장성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표현한 수사다. 몇 년 전까지 중국 여행 사이트와 교재에도 실렸다던, 중국식 과장법의 백미다.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가 “안 보인다.”고 진실을 알릴 때까지 통용되던 현대판 ‘신화’였다. 중국 당국이 만리장성의 길이를 또 크게 늘렸다. 중국 국가문물국 측은 “2007년부터 진행한 조사 결과 만리장성의 총길이가 2만 1196.18㎞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중국 당국은 2000년대 중반까지 6300㎞라고 하더니 2009년 이미 8851㎞로 늘려 발표한 바 있다. 중국 거리 단위로 10리는 5㎞이기 때문에 그제 발표 내용대로라면 이제 만리장성은 4만리 장성으로 고쳐 불러야 할 판이다. 중국 당국은 유적 조사와 측량의 결과라며 이번에 기존 장성의 끝단을 좌우로 잡아당겨 길이를 늘렸다. 장성의 동쪽 끝은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까지 확장했다. 그 의도는 뻔하다. 옛 고구려와 발해가 지은 성까지 만리장성의 한 자락이라고 강변하려는 것이다. 중국 측은 2009년에는 장성의 동쪽 기점이 랴오닝(遼寧)성 단둥시 북쪽의 박작(泊灼)성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도 고구려식 우물터가 발견된 고증을 무시하고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황허 문명의 발상지 중국이 인류 문명사에 끼친 공적은 누가 뭐래도 부인하기 어렵다. 나침반·화약·종이 등 고대 세계 3대 발명품을 내놓은 나라가 아닌가. 이민족에게 중원을 내줄 때도 많았지만,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한족이 갖고 있는 중화(中華) 자부심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재청에 해당하는 중국 국가문물국의 행보는 문화 혹은 문명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마오쩌둥 치하의 ‘문화혁명’도 이름과 달리 인민을 도탄에 빠뜨린 야만적 사건이었다. 1966∼1976년 홍위병의 광기 속에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고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선택하면서 현대 중국은 비로소 긍정적 역사 발전을 일궈 왔다. 하지만 동북공정이니 서북공정이니 하는 역사 왜곡은 문명사의 물길을 다시 거꾸로 돌리는 행위일 게다. 탄성계수 100% 생고무처럼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린다고 역사의 진실이 달라지겠는가. 중국 당국은 “역사는 두번 되풀이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소극(笑劇)으로”라는 속설을 음미했으면 싶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김정은 기자의 백스테이지] 무대의상계의 무한도전, 디자이너 김영지

    [김정은 기자의 백스테이지] 무대의상계의 무한도전, 디자이너 김영지

    뮤지컬이나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은 다양한 공연 의상을 입고 거닌다. 각각의 의상은 배우별 캐릭터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관객의 눈을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공연 의상은 어떤 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걸까. 뮤지컬 ‘김종욱 찾기’, ‘파리의 연인’, ‘풍월주’,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연극 ‘돈키호테’ 등 다수의 작품에서 의상을 담당한 김영지(34) 디자이너를 만나 공연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일단 작품을 맡게 되면 기초 작업으로 대본을 읽은 뒤 캐릭터 분석에 들어간다. 연출가와 함께 콘셉트를 잡고서 여러 가지 시안 자료나 영화, 잡지, 미술 작품 등을 참고해 일러스트 작업을 거친다.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풍월주’의 경우 대본상 나와 있는 신라시대 대신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의상 콘셉트로 택했다. 극중 등장인물인 진성여왕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의 기구한 사랑이 다른 듯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증도 중요하지만 때론 콘셉트로 김 디자이너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외사촌이자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이 죽자, 거의 40년을 홀로 살면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미망인을 자처했대요. 이것을 계기로 장례식 때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게 됐죠. 진성여왕도 여왕이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열을 잃게 돼요. 권력을 쥐고 있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갖지 못하죠. 그런 점에서 착안해 신라시대 복식을 고증하지 않고, 빅토리아 시대의 중세풍 옷으로 바꿔 만들었죠.”라고 설명했다. 특히 진성여왕과 여인들의 복식은 프랑스의 화가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의 오후’를 많이 참고했단다. 남자 기생인 풍월의 경우 ‘블랙에 레드 포인트 하나’로 세련됨을 나타내는 ‘프라다’의 콘셉트를 빌렸다고. 그녀는 “풍월의 열정을 표현하고자 심플한 복장에 빨간 단을 달았고, 열과 진성여왕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사는 사담은 회색의 중성 칼라를 달았다.”고 설명했다. 김 디자이너는 공연계에서 ‘무한 도전’으로 통한다. 프랑스 파리의 리세 쥘 베른 국립대에서 무대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뒤, 2005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국립 무대 의상 자격증을 딴 그녀는 화려한 스펙은 갖췄지만, 정작 한국에서 일하기엔 아는 인맥도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었던 것. 그래서 무작정 포트폴리오를 들고 ‘CJ E&M’, ‘에이콤’, ‘설앤컴퍼니’ 등 국내 대형 뮤지컬 제작사를 찾아 자신을 알렸다. 처음에는 한국시스템은 외국과 달라서 어렵다는 거절을 숱하게 들었다고. ●늘 이 작품이 마지막이란 각오로 김 디자이너는 “안 된다고 하니까 더 오기가 생기더라.”며 웃었다. 거절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계속 찾아다녔더니 기회가 왔다. 2007년 뮤지컬 발레 ‘심청’의 외국 의상 디자이너가 갑자기 펑크를 내면서 평소 부지런히 얼굴을 알린 그녀가 관계자들 사이에서 추천 대상으로 거론된 것. 결국 그녀가 의상을 맡게 됐고, 의상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면서 이후 다양한 작품을 맡게 됐다. “저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이 작품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요.”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만의 성공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남한산성 행궁, 10년만에 다시 문 열다

    남한산성 행궁, 10년만에 다시 문 열다

    병자호란 47일간의 항전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일제에 의한 훼손 등 굴곡진 역사를 안은 남한산성 행궁이 10여년의 공사를 끝내고 24일 일반에 공개됐다. 경기도는 남한산성 행궁권역 복원 공사 완료를 축하하기 위해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행궁 인근에서 낙성식을 가졌다. 둘레 약 8㎞로 백제 온조왕 때 축성된 남한산성 안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행궁(조선 인조 4년 건립)은 1907년 일제가 군대해산령을 내리고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하면서 사찰 및 문화재와 함께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는 행궁에 대한 발굴 작업을 거쳐 2002년 상궐(침전)의 내행전, 좌승당, 재덕당, 행각 등 72.5칸을 처음으로 복원했다. 이어 2004년에는 좌전 26칸, 2010년에는 하궐(정전)의 외행전과 일장각, 한남루, 행각, 통일신라유적지 등 154칸을 복원한 데 이어 올해 하궐 단청과 남한산성 안내전시시설 설치를 끝으로 10여년 간에 걸친 복원공사를 마무리했다. 지금까지 모두 215억원이 투입됐다. 도는 낙성식을 조선 정조 때 발간된 수원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등의 고증을 통해 전통 낙성연을 그대로 재현해 진행했다. 도는 이날부터 낙성연이 계속되는 오는 28일까지 일반인들에게 남한산성 행궁을 무료 개방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낙성연 기간인 26일에 풍류음악회, 27일에 광지원농악을 공연하는 등 다양한 전통문화공연도 펼칠 예정이다. 행궁 관람은 앞으로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가능하다. 이재철 도 문화예술과장은 “연간 320만명이 찾아 도내에서 에버랜드에 이어 두 번째로 방문객이 많은는 남한산성의 행궁이 복원 완료되면서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한산성은 2010년 1월 10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정식으로 등재됐고, 지난해 2월에는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내 13곳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가운데 우선 등재 대상으로 선정했다. 내년 1월 유네스코에 정식으로 등재신청서가 제출될 예정이며, 등재 여부는 2014년 6월 결정된다. 도는 낙성식을 계기로 33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도 출범시킬 계획이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서울시 “한양도성 2015년 유네스코 등재”

    조선 건국 초부터 600여년간 서울 도심을 보호해 온 한양도성의 전 구간이 2015년까지 다시 연결된다. 또 한양도성을 전담 관리하는 조직이 신설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된다. 서울시는 이와 같은 내용을 포함한 ‘한양도성 보존·관리·활용 종합계획’을 7일 발표했다. 박원순 시장은 “한양도성은 세계에서 가장 긴 기간 동안 이어진 도성으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본주의적 공간”이라며 “지난 1월 시민, 전문가, 직원들과 함께 한양도성을 순성하며 고민한 바를 담았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시는 우선 곳곳이 끊어진 한양도성의 전 구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한다. 현재 한양도성은 총연장 18.6㎞ 중 12.3㎞의 복원이 완료됐다. 인왕산, 남산, 숭례문 구역 등 1㎞는 복원 공사 중이다. 시는 도성 전체를 원형대로 복원하기보다는 기존 복원 및 현 상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이미 도로가 나 있는 구간은 단순히 흔적만 표시하는 형상화 방식을 쓰고 고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복원한 구간은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의 하나로 두기로 했다. 시는 한양도성 업무를 전담하는 ‘한양도성 도감’도 신설한다. 이와 별도로 ‘시민과 함께 한양도성을 만든다’는 취지로 시민순성관리관을 임명, 담당 구역을 정해 맡긴다. 도성에 인접한 성북동 달동네는 한옥마을로 개발을 추진하며 인근 군부대, 민간시설 등도 이전을 협의할 계획이다. 시는 2015년까지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최종 등재시킬 계획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공정률 70%에서 문루 고증작업 지연… 경주 월정교 복원 차질

    공정률 70%에서 문루 고증작업 지연… 경주 월정교 복원 차질

    우리나라 최초의 누교(橋)형 다리로 통일신라 최전성기인 경덕왕 19년(서기 760년)에 축조된 경북 경주시 인왕동 월정교(조감도·사적 제457호) 복원공사가 문루(門樓) 고증이 지연되면서 차질을 빚고 있다. 3일 경주시에 따르면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 사업의 하나로 지난 2008년 4월부터 월정교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국비 232억원 등 총 332억원을 들여 길이 66m, 폭 9m, 높이 8m 규모인 월정교를 복원하는 것. 월정교는 신라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결하는 주 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공정률은 70%이지만 월정교 양쪽 교대 위의 문루에 대한 문화재위원회의 고증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복원공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 이는 월정교 형태(구조)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다. 이런 가운데 시는 문루 복원 공사를 위해 올해 말까지 문화재위의 고증작업과 복원심사를 통과하고 내년 초 설계 등을 거쳐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80억~100억원의 관련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게 과제다. 시 관계자는 “고증 작업이 지연되면서 월정교 복원 공사가 빨라야 2014년쯤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이민 갔던 노인 교포 ‘의료비 역이민’ 러시

    미 교포 노인 사회에서 한국으로의 역이민이 유행하고 있다.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려는 이민 1세대도 있지만 미국의 비싼 의료비 부담을 피해 귀국하는 경우도 있어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건강보험 재정의 악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2일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이주 신고자는 753명으로, 해외 이주가 정점에 달했던 1976년 4만 6533명 대비 1.6%에 그쳤다. 1977년부터 해외 이주가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연간 1만명 이상이 해외로 이주했다. 2003년 9509명으로 1만명대가 깨지고 2010년 889명으로 다시 7년 만에 1000명대가 무너졌다. 반면 같은 기간 외국에서 국내로 역이주한 교포는 2003년 2962명에서 2011년 4257명으로 43%나 급증했다. 지난해 역이민자를 국가별로 보면 미국이 2122명으로 제일 많다. 이어 캐나다 693명, 중남미 지역 국가 629명, 뉴질랜드 115명, 호주 67명, 기타 631명 등이다. 역이주 사유로는 현지 생활 부적응, 국내 취업, 노령, 이혼, 신병 치료, 국내 취학 등으로 조사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2005년 이후 역이민을 선택한 해외 한인은 매년 약 10%씩 꾸준히 늘고 있으며 세계적 금융 위기가 최정점에 달했던 2009년도부터 해마다 4000명을 넘고 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영주 귀국 신고를 하지 않고 재외동포비자 등을 통해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포까지 합치면 실제 역이민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주민등록증과 같은 ‘거소신고증’을 받으면 한국에서 운전면허증 취득, 은행 계좌 개설, 부동산 거래는 물론 의료보험 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역이민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미국 내 극빈층 교포들은 수입이 없어도 매월 600~700달러의 생계 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의료비도 무료다. 그러나 재산과 소득이 있는 경우 의료보험료와 병의원 의료비가 한국보다 약 10배나 비싼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병·의원을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교포 노인층이 한국으로 역이민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과거 좀 더 잘 살아보려고 이민을 갔던 동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온다니 같은 동포로서 환영할 일이지만 상당수의 역이민자가 직장을 은퇴한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상반기에 귀국한 A 노부부는 “미국의 의료비와 약값을 감당할 수 없어 그 비용이 미국 대비 10% 정도에 불과한 한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면서 “인터넷에는 역이민자들 간 정보를 교류하는 카페들도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B 노부부는 미국에 남아있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증여한 뒤 제주도에 정착했다. 소득과 재산이 거의 없어 15만원가량의 기초노령연금을 받으며 내는 의료보험료는 7만원 이하로 알려졌다. “미국에서는 웬만한 일로 병원을 갈 경우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병원비를 낼 수 밖에 없어 자칫 전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고 귀국 사연을 말했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3) 대구 도동서원 ‘김굉필 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3) 대구 도동서원 ‘김굉필 나무’

    나무와 더불어 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땅을 만들자는 뜻에서 정한 기념일, 식목일이다. 처음 지정한 60여년 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기후 탓에 날짜를 앞당겨야 한다는 논의도 있지만, 아직은 그대로다. 굳이 나무를 심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겨 보는 날로서도 충분하다는 이유에서다. 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나무를 골라 보호수로 지정하는 산림청 방식이 있는가 하면, 살아 있는 생물로서 최고의 지위라 할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문화재청 방식도 있다. 또 지방자치단체가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독자적 방법도 있다. 그 가운데 대구광역시의 나무 보호 방법은 유난히 눈에 띈다. ●나무에 스쳐간 옛 사람의 자취를 찾아 “2002년이었어요. 당시 녹지과장이던 이정웅 선생님이 아이디어를 내셨지요. 사람과 더불어 오래 살아온 생명체이니, 나무에서 선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보호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어요. 나무를 스쳐간 옛 사람들의 삶을 찾아내 나무에 새기고, 지역을 빛낸 선조들의 업적도 기리자는 거죠. 나무를 보호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겠지요.” 대구시청 공원녹지과의 이재수(29) 주무관은 10년 전 특별한 방법을 찾아내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그때에도 지금처럼 녹지과에 근무했다. 달성군 도동서원 대문 앞에 우뚝 선 커다란 은행나무가 ‘김굉필 나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그때였다. 도동서원을 처음 지으면서 심은 이 나무는 서원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그저 ‘서원목’(書院木)으로만 불리던 도동서원 지킴이 나무였다. 나무의 이름이 된 김굉필(宏弼, 1454~1504)은 서울 태생이지만 청소년기를 대구의 현풍 지역에서 보낸 인물로, 고려의 정몽주에서 조선의 김종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정통성을 지킨 사림(士林)세력의 중추였다. 연산군 재위 시절인 1498년에 신흥 세력을 경계하기 위해 훈구파들이 일으킨 무오사화에 연루돼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그는 중종 반정(反正)으로 조광조가 정치세력의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복권되어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추앙됐고, 대구 지역 정신사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선조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도동서원은 그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외증손인 예학자 정구(鄭逑, 1543~1620)가 세운 400년 전 건축물이고 서원 앞의 은행나무는 완공을 기념하여 정구가 손수 심었다. ●대구 지역을 빛낸 인물과 나무의 만남 “대구시를 빛낸 인물들과 또 대구를 대표할 만큼 훌륭한 나무를 함께 찾았지요. 인물과 나무의 연관성을 찾은 뒤에는 향토사학자를 비롯해 해당 인물의 문중 어른들께 꼼꼼한 심사를 부탁했지요.” 이 주무관의 이야기대로 치밀한 고증 과정을 거쳐 사람의 이름을 얻은 대구시의 나무는 모두 24그루다. 식민지 시대의 화가 이인성이 그림으로 표현했던 계산성당의 감나무에는 ‘이인성 나무’, 천년 고찰 동화사의 법당 뒤편에 서 있는 오동나무에는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을 기억하기 위해 ‘심지대사 나무’라는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어 시청에서는 이 같은 나무들을 더 많이 알리고 지키기 위해 사연을 알기 쉽게 새긴 안내판을 세웠다. 안내판에는 디자인뿐 아니라 내용 등에도 세심한 손길이 닿았다. 여느 보호수 안내판과 달리 자세한 사연과 함께 나무와 관련된 정보 등을 알알이 적었을 뿐 아니라, 나무에 어울리는 단아한 디자인도 고려했다. “기념할 만한 나무를 정한 뒤에 시민 답사단을 모집했지요. 참가자들은 나무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았어요. 그동안 그저 문화재만 찾아보았는데, 이제는 문화재를 아름답게 하는 자연물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는 반응이었어요.” 도동서원과 김굉필 나무는 그런 점에서 더없이 맞춤한 선택이다. 도동서원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 서원의 전형을 갖춘 빼어난 건축물인 데다, 은행나무도 대구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체의 은행나무를 대표하고도 남을 만큼 훌륭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낸 건축물과 그 곁에서 자라난 자연물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좋은 답사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땅바닥에 내려앉은 가지 풍경은 절경 25m의 큰 키에 줄기 둘레가 8.7m에 이르는 김굉필 나무는 사방으로 30m 가까이 나뭇가지를 펼쳤는데, 그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만히 땅바닥에 내려앉은 남쪽의 굵은 가지가 펼쳐 보이는 나무 풍경은 가히 절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의 큰 가지는 30년쯤 전에 부러졌다. 당시 부러진 가지를 치우기 위해 잘라내자 8t 트럭이 가득 찼다고 한다. 전체적인 균형은 깨졌지만, 그 바람에 오히려 비상하려는 몸짓이 느껴질 만큼 나무는 웅혼한 기상을 갖췄다. 그동안 사람들은 도동서원이 누구를 배향한 서원인지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원 앞에서 ‘김굉필 나무’라는 이름으로 우뚝 선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면, 도동서원과 김굉필과의 관계는 잊지 않을 것이다. 또 김굉필이라는 옛 선비가 대구를 빛낸 인물이었음도 자연스럽게 기억할 것이다. 서원을 지은 사람도, 나무를 심은 사람도 모두 떠났지만 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이제 사람의 이름을 얻어 사람처럼 보호받으며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나무를 사람처럼 보호하려는 대구시의 독특한 나무 보호법이 유난히 고마운 식목일이다. 글 사진 대구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대구시의 서쪽에 자리잡은 도동서원에 가려면 중부내륙고속국도의 현풍 나들목으로 나가서 우회전한다. 700m쯤 가면 오른쪽으로 저수지가 나오는데, 그 옆으로 난 도로로 나간 뒤 다시 저수지를 끼고 우회전한다. 4.5㎞ 가면 낙동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제방이 나온다. ‘도동서원’을 알리는 교통안내판에 따라 우회전한다. 다람재라는 이름의 그리 험하지 않은 고개를 넘으면 낙동강이 내다보인다. 고개 넘어 만나게 되는 첫 마을에 도동서원이 있다. 나무는 서원 대문 앞 너른 마당에 있다.
  • [Weekend inside] 제주 서귀포시 하멜 표착 지점 수년째 논란

    [Weekend inside] 제주 서귀포시 하멜 표착 지점 수년째 논란

    “우리 동네가 하멜이 표착한 곳입니다. 바로잡아 주세요.” 헨드릭 하멜의 제주 표착 지점을 두고 제주의 한 마을이 “우리 마을이 확실하다.”며 수년째 주장해 논란을 빚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 향민회는 최근 시에 ‘하멜의 표착지 확인 및 표지석 설치 요청’ 진정서를 제출했다. 현재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남쪽 용머리 해안이다. 1980년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이 이곳을 하멜 표착지로 정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2003년 옛 남제주군(현 서귀포시)이 용머리 해안에 하멜 상선 전시관을 설치해 제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이곳은 하멜의 표착지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됐다. 하멜 상선 전시관에는 하멜이 타고 왔던 전장 36.6m, 폭 7.8m, 갑판 높이 11m, 돛대 높이 32m의 3층 갑판 범선인 스페르웨르호를 재현해 놓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1997년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1633~1704)가 쓴 ‘지영록’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지영록에는 하멜이 제주에 표착한 1653년 7월 24일(음력) 당시의 풍경이 묘사돼 있다. “서양인 헨드리크 얌센 등 64명이 함께 탄 배가 대정현 차귀진 아래 대야수 해변에서 부서졌다.”(서국만인 헨듥얌센등 육십사명동승일반 치패우대정현지방 차귀진하대야수연변·西國蠻人 헨듥얌센等 六十四名同乘一般 致敗于大靜縣地方 遮歸鎭下大也水沿邊)” 주민들은 ‘차귀진하대야수연변’을 지금의 수월봉 부근인 제주시 한장동과 서귀포시 신도 2리 일대라고 주장한다. 이는 오래전부터 한장동이 ‘대물’ 또는 ‘큰물’로 불려왔고 1702년(숙종 18년)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형상이 제주도의 각 고을을 순회한 장면을 기록한 채색 화첩인 ‘탐라순력도’ 등에도 수월봉 부근이 ‘대야수포’(大也水浦)라고 표기돼 있다. 특히 신도 2리 향민회는 “하멜표류기의 표착지 삽화에 신도 1리의 녹난봉과 한라산이 그려져 있다.”며 “이 삽화와 일치하는 풍경은 신도리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3년 국립제주박물관이 발간한 ‘항해와 표류의 역사’에서도 ‘차귀진하대야수연변’을 거론하며 하멜 표착 지점을 “현재의 고산리 한장동 해안에서 신도리 해안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지영록을 번역한 김익수 전 제주도 문화재 전문위원은 “당시에도 자료 부족 등으로 철저한 고증 없이 주변 경치가 수려하고 인근에 관광지가 많은 것 등을 고려해 산방산 아래에 하멜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후 지영록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만큼 하멜 표착지를 바로잡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도 2리 향민회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제주도와 제주도의회 등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지속적인 자료 검토와 고증 자문이 필요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도 관계자는 “당시 네덜란드 등과 함께 용머리 해안을 표착지로 정한 것이어서 이를 수정할 경우 네덜란드 등과도 협의해야 한다.”며 “학계 등의 자문을 계속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도 2리 향민회 이용훈 회장은 “하멜기념비를 옮겨 달라는 게 아니고 외국인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알리는 게 창피해 이를 바로잡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인 하멜은 일행과 함께 네덜란드를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1653년(효종 4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해 13년간 억류됐다가 1666년(현종 7년) 9월 일본으로 탈출했다.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제주 표착 과정과 조선에서의 억류 과정, 당시 조선의 문물과 생활, 풍속 등을 기록한 하멜표류기를 썼다. 이 표류기는 조선을 유럽에 처음 소개한 책자로도 유명하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돌사자 원래 위치에 놓고 일제 강탈 고발해야”

    “돌사자 원래 위치에 놓고 일제 강탈 고발해야”

    “다보탑 돌사자는 전통적 미술양식으로 볼 때에도 반드시 네 귀퉁이에 있어야 합니다. 국보 35호 화엄사 3층석탑, 국보 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의 경우 모두 네 귀퉁이에 돌사자가 위치해 있지요. 현재의 다보탑 돌사자처럼 중앙에 위치한 경우는 미술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원래의 자리인 귀퉁이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다보탑 돌사자의 위치 오류를 서울신문을 통해 지적한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은 21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문화재의 역사성’을 새삼 강조했다. 다보탑의 돌사자 중 3구가 일제에 의해 수탈되고 하나가 남았다면 현재의 중앙이 아닌 원래의 위치에서 사실 그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문화재란 수많은 세월을 함께하면서 가치를 더하는 것이기에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현장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불국사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도 일제가 저지른 반문화적 행위에 대해 분명히 고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원위치 이동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돌사자 1구만 원위치에 있으면 미관상 좋지 않아 중앙으로 옮겼을 것이라는 일부 의견에 대해서는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세월의 풍상 속에 3구의 돌사자가 사라졌지만 나머지 1구의 돌사자가 제자리를 찾는다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잘못을 고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1960년대 당시 문화재 보존정책이 지금처럼 학문적 고증을 거쳐 이뤄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의 실수를 변명하고 마치 그것이 옳은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화재 보존 및 복원에 있어서 ‘원형 보존’을 최고의 가치로 내걸고 있는 문화재청은 원위치가 확인된 돌사자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산정호수 김일성별장 원형 복원

    산정호수 김일성별장 원형 복원

    경기 포천시가 산정호숫가에 위치한 김일성 별장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주변을 재정비한다. 포천시는 19일 “7년여 전 산정호수 제방 끝 지점에 위치한 김일성 별장 터 주변을 정비하면서 수변 전망대와 정자 등을 설치했으나 역사적 고증을 거쳐 원형을 최대한 다시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접한 건물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주변을 추가로 정비하고 전문가 고증을 거쳐 김일성 별장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이야깃거리가 있는 관광명소로 만들 예정이다. 소요사업비 6억 6000만원 전액은 시비로 마련할 방침이다. 산정호숫가에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증빙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시는 “별장이 주거 형태로 지어진 건물은 아닐 것으로 추정하고 2006년쯤 수변 전망대와 정자를 신축했으나 최근 산정호수 재정비 사업을 추진하면서 별장 원형 복원도 함께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산정호수는 1925년 축조된 인공저수지이며 한국전쟁 이전에는 3·8선 북쪽에 해당돼 북한 땅이었다. 산정호숫가에서 태어나 현재 식당을 운영 중인 이성범(57)씨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였던 김일성 장군이 군사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며칠 묵어갔고, 한국전쟁 직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다녀간 후 ‘김일성 별장’으로 더 잘 알려졌으나 1978년 국민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산정호수’로 불리게 됐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아직 두 김일성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 박진식 시 문화관광과장은 “김일성 별장지는 과거 산정호수를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 직원들이 숙소로 사용해 오던 곳을 여러 차례 수선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면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최대한 원형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다보탑 돌사자 멋대로 옮겼다 기단 모서리로 이동키로

    다보탑 돌사자 멋대로 옮겼다 기단 모서리로 이동키로

    반세기 가까이 엉뚱한 자리에 있던 국보 20호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가 제자리를 찾는다. 문화재청은 18일 다보탑 서쪽 기단 중앙부에 있는 돌사자를 원래 위치인 기단 모서리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60년대 초 복원하다 생뚱맞다며 옮겨 돌사자 이동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이 다보탑 돌사자 위치가 잘못됐다며 지난 1일 국민신문고를 통해 질의하고 이동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혜문 스님은 국민신문고에서 “다보탑 돌사자 자리가 원래의 위치에서 달라진 사실을 발견했다.”면서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돌사자 4개 중 3개를 훔쳐 가던 과정이나 해방 이후 다보탑 보수 중에 옮겨지거나 변형됐다고 생각한다.”고 질의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6일 회신을 보내 “일제강점기에 다보탑 돌사자 4마리 중 3마리가 없어졌고 한 마리가 극락전 앞에 보존돼 있었다.”면서 “과거 기록이나 사진을 통해 기단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배치돼 있었으며 1969년 추진된 불국사 현황 조사 때 돌사자가 지금의 서쪽 기단 중앙부에 자리 잡은 것을 확인했다.”고 오류를 시인했다. “돌사자의 위치가 달라졌다면 원래 위치로 옮길 의사가 있는가.”라는 혜문 스님의 질의에 문화재청은 “돌사자를 원위치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확보되면 전문가 등의 심층 검토를 거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이미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1마리씩 앉아 있는 다보탑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경주박물관 다보탑 복제품 돌사자 4개 문화재청 관계자는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1960년대 초반 다보탑 복원팀과 불국사 측이 논의한 결과 원래 모서리에 있던 돌사자 한 마리의 모습이 생뚱맞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당시 공사 참가자의 증언이 있다.”면서 “돌사자 이동은 고증 자료를 더 확보한 뒤 불국사 측과 협의해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없어진 돌사자 3마리 중 적어도 2마리는 일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화재청이 정확한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환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문·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인사]

    ■방송통신위원회 △융합정책관 라봉하 ■지식경제부 △지역경제총괄과장 김선민△FTA무역종합지원센터 박태성△규제개혁법무담당관 박형민△지역특화팀장 전제구△정보통신산업과장 서성일△에너지안전팀장 김인관△투자정책과장 변영만 ■보건복지부 △장관정책보좌관 이재철 ■중소기업청 ◇승진 △서울지방중소기업청 공공판로지원과장 김대임△대구경북지방중소기업청 창업성장지원과장 임병재◇전보△강원지방중소기업청장 김종택 ■소방방재청 ◇승진·전보 △서울소방재난본부장 조성완△중앙소방학교장 류해운△소방정책국장 권순경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정책국장 곽세붕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홍보협력담당관 박혜현 ■국립공원관리공단 △경영기획이사 박영덕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비서실장 김상훈 ■전력거래소 △운영본부장 권석기 ■세종문화회관 △경영본부장 김진현 ■한국은행 ◇국·실·부장 <실장>△법규 이희원△금융통화위원회 김윤철△비서 손민호△국제협력 홍승제△공보 이명종△재산관리 서영만△안전관리 최계명△금융검사분석 진우생△국고증권 박하종△감사 신동욱<국장>△커뮤니케이션 이용회△인사경영 정희식△금융결제 이중식△발권 이홍철<기획협력국>△국장 배재수△지역통할부장 신원섭<전산정보국>△국장 이종건△전산관리부장 김춘도<인재개발원>△원장 허재성<조사국>△국장 신운△계량모형부장 박양수△국제경제〃 한상섭<경제통계국>△국장 김영배△금융통계부장 양재룡△국민계정〃 정영택<거시건전성분석국>△국장 성병희△거시건전성연구부장 강종구<통화정책국>△국장 김민호△금융시장부장 서영경<국제국>△국장 유상대△외환업무부장 김한수<외자운용원>△외자기획부장 강성경△투자운용〃 김의진△운용지원〃 이문형<경제연구원>△부원장 전승철<본부장>△부산 박창언△대구경북 허진호△목포 정남석△광주전남 장택규△전북 이은모△대전충남 오재권△충북 한영기△강원 이철수△인천 서영식△제주 박성준△경기 윤면식△경남 강성윤△강릉 손동희△울산 황인용△포항 송규성△강남 서정곤<사무소장>△프랑크푸르트 김영찬△동경 박광민△런던 유병하<뉴욕사무소>△사무소장 채선병△워싱턴주재 차현진<북경사무소>△사무소장 임호열△홍콩주재 조승형△상해주재 오인석◇1급△전산정보국 전문역 지춘우△인사경영국 연구지원반 오세만 이경태△외자운용원 준법감시인 조희근△경제연구원 연구위원 김현의 민성기 이상우 이종규 이흥모<부국장>△기획협력국 김태석△인사경영국 안희욱△조사국 장광수△경제통계국 이인규△거시건전성분석국 조정환△통화정책국 오호일△발권국 박운섭<교수>△커뮤니케이션국 조성제△인재개발원 김시환 이용호 이창영<파견>△한국금융연구원 김인섭△금융감독원 최창복△중앙공무원교육원 임경△외교안보연구원 강재택△국방대 박이락 ■중앙일보 △편집국 디자인 디렉터 정병규 ■동국대 <서울캠퍼스>△남산학사 관장 조성구(경영부총장 겸직)△건강증진센터장 성낙진 ■우리아비바생명 ◇지점장 △수원 김옥경△전주 문성숙△통영 유재현△미래 김일용△마산 이상철△서울 이승준△테헤란로 고현전△프라이드TM 박태환△우리TM 이재동◇부장△TM영업 진용 ■동아건설 ◇전무 △토목플랜트 사업본부장 고규준 ■한국아스트라제네카 △의학부 총괄 책임자 구혜원
  • 문학소재 공연 톡톡 튀네

    문학소재 공연 톡톡 튀네

    한 남자가 읊조린다. “다시 길을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갈 곳은 없지만 정신은 명료하다.” 다른 남자가 걸어나온다. “…내 발에 박힌 수천만 가지 가시조각을 나도 떼어내고 싶다. 내 조카 노산군이라는 가시조각을.” “삼촌, 제가 그렇게 미우세요. 이제 저를 그만 놓아 주세요.” 절규하는 배우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한 움큼 잘라버린다. 공연 전반에 아쟁과 장구, 가야금 소리가 잔잔하게, 또는 휘몰아치듯 치열하게 어우러진다. 지난 11~12일 서울 신당동 충무아트홀에서 열린 ‘전통에서 말을 하다’는 독특했다.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대표와 창작국악그룹 시나위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을 국악과 연극으로 표현한 공연이다. 무대는 단출하다. 김시습, 세조와 단종은 한복이 아닌, 길게 늘어진 스웨터와 폭 넓은 바지 차림이다. 큰 움직임도 없다. 자칫 지루할 법한 모양새지만, 서사시 같은 대사 하나하나가 가락 마디마디와 조화를 이루면서 문학 작품을 보여 주듯 몰입시킨다. 문학을 소재 삼은 공연은 많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독특하게’ 또는 ‘얼마나 전달력 있게’가 아닐까. 정비석의 소설로 잘 알려진 ‘자유부인’이 무용극으로 변신해 새달 15~17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오른다. 소설 ‘자유부인’은 1954년 21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된 소설로, 당시에는 파격적인 여성의 일탈을 그리며 파란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네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김지미·윤정희 등 당대 최고의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안무를 한 정의숙 아지드현대무용단 대표이자 성균관대 무용과 교수는 “세월이 흐르고, 사회 인식이 변했지만 무수히 많은 여성들은 아직도 자아 실현과 자기계발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여성들이 일을 통해 꿈꾸는 자유는 무엇이고, 진정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계기를 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야기상에서 원조 자유부인과 달라진 것은 주인공이 패션잡지 에디터라는 점. 예고 무용과에 다니던 딸은 발레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됐다. 그래서 화려한 패션쇼와 발레 클래스를 더했다. 무대에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12개 상자를 설치했다. 상자는 옛 영화 ‘자유부인’을 투사하는 스크린이자 무용수들이 춤추는 공간이다. 영상 속에서 일상을 보내던 무용수들이 상자 밖으로 튀어나와 무대를 휘저으며 역동적이거나 애절한 춤사위를 펼친다. 연출을 맡은 변혁 성균관대 영상학과 교수는 “마치 옛 영화를 보듯 무용을 즐기는 ‘시네마틱 퍼포먼스’를 표방한다.”면서 “공연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 선에서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는 연극배우 박정자와 패션모델 한혜진이 특별출연해 색다른 모습을 선사할 예정이다. 4만~15만원. (02)2000-9752. 앞서 21일 서울 왕십리 소월아트홀에서는 숙명가야금연주단이 시인 김소월과 만난다. 김소월 탄생 110주년을 맞아 준비한 공연 ‘산유화’는 한국 근대문학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된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작품에 접근한다.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문숙희 박사가 고증한 고려가요를 국악 작곡가 박경훈이 편곡하고, 그 위에 소월의 시를 덧댔다. 고려가요 ‘대악집녕’에는 ‘엄마야 누나야’를, ‘청산별곡’에는 ‘못 잊어’를, ‘가시리’에는 ‘진달래꽃’을 입혔다. 전석 2만원. (02)710-9889.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펑유란 뒤집기

    펑유란 뒤집기

    동양 고전의 전성시대다. 옛 문헌을 읽는 인문학 강좌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옛 성현들의 문향(文香)을 맡기 위해서다. ‘철학사의 전환’(신정근 지음, 글항아리 펴냄)은 문향 대신 욕망의 냄새, 권력의 냄새를 읽어내려는 책이다. 표지에 시뻘건 물이 철퍼덕 뿌려지고 있다는 점이 이를 웅변한다. 사실 고전은 후대에 들어 그 반열에 오르는 법. 당대엔 시대와의 대결일 경우가 많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중국철학사를 ‘자기복제의 역사’로 읽지 말자는 것이다. 흔히 중국철학사라면 우리는 ‘선진의 제자백가→한의 훈고학→당의 사장학→송명의 성리학→청의 고증학’ 같은 공식을 떠올린다. 훌륭한 성인의 말씀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 지금처럼 동양학의 왕좌를 차지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흔하디흔한 ‘기원과 전개의 문법’이다. 저자는 이 문법이 못마땅하다. “학술의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공로는 있지만 “철학적 이슈를 뚜렷하게 부각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딱 꼬집어 틀렸다기보다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얘기다. 더한 문제는 이런 식의 해석이 근대 초입, 그러니까 서구 열강이 중국을 넘볼 때 정립된 공식이라는 점이다. 만주족이 나라를 망쳐놨으니 한족의 문명을 되살려서 이 난관을 극복하자는, 중화주의의 움직임에 결탁된 해석이라는 얘기다. 뚜렷한 중심에 따라 질서가 잡혀 왔다는 족보 만들기, 순백의 계보 만들기 작업이다. 이런 학술사 연구는 연구라기보다 “구국운동의 일환”일 뿐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펑유란 역시 구국운동가라는 평가에서다. 저자는 철학사가 “자기부정의 역사”이기 때문에 “타자와 디아스포라에 내몰린 문화적 정체성의 끊임없는 재구축 과정”으로 중국 철학사를 읽자고 제안한다. 중원의 패자로 별다른 걱정 없이 중화의식을 바탕으로 유구하게 쌓아온 사고 체계가 아니라 서주와 융(戎), 동주와 동이(東夷), 한과 흉노(匈奴), 남북시대와 오호(五胡), 송과 탕구트, 거란과 여진, 몽골과 만주족에 이은 근대의 양이(洋夷)와의 대결과정에서 나온 것이 중국 철학사라는 것이다. “무미건조하지만 완전한 자기 동일성의 재현이 아니라 타자성과의 대립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재정립되는 과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논의 내용은 철학자 강신주가 생산해 내기 시작한 ‘제자백가의 귀환’(사계절 펴냄) 시리즈와도 비교해 봄 직하다. 강신주가 시대와의 대결을 조금 더 강렬히 드러낸다면, 저자는 상대적으로 유가 사상 내부의 철학적 논리에 치중한다. 해서 강신주의 저작은 조금 더 대중적이고, 저자의 책은 상대적으로 학술적이다. 논조를 봐도 덜 공자친화적이고, 더 공자친화적인 차이가 보인다. 덕분에 서로 보완해 볼 만한 부분도 있다. 가령, 춘추전국시대는 신화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된 시대다. 이는 신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의 문제가 등장함을 뜻한다. 저자는 이 문제를 자(自), 기(己), 아(我)라는 세 글자가 쓰인 용례와 결부시켜 흥미로운 분석을 진행한다. 철(哲), 성(聖), 덕(德), 인(仁) 등 우리가 대충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글자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저자가 중국 철학사에 대한 이런 독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유가 사상의 내적 논리에 치중했다 해서 유학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 핵심적인 질문은 유학자들이 치열하게 시대와 대결하면서 “현실 개선과 구원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는데 “왜 ‘신’ 사회를 구상하는 데는 실패”했느냐 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그 뿌리를 유학 도통(道統)의 핵심에 놓인 성선(性善)에서 찾는다. 성선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는다. 성선은 악을 단지 개인의 “도덕적 함량의 결핍”으로만 여기는 순진한 인식법이다. 도덕적 교화만 잘 이뤄진다면 이 세상 악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개개인이 도 닦으면 그만인 세계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해서 “성선은 역설적으로 선의 증대를 낳기보다 악의 잠식과 고통의 양상을 방조”해 버렸다. 성선에 매달리다 보니 “평등을 도덕과 사회 구성의 원리로 관철시키기 위한 보편 및 공정의 원칙을 고안”하는 데 늦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성악의 입장이었다면 “인간의 발가벗은 모습을 직면하고 그것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일을 방비하고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성선의 해악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는 도덕의 비중이 더더욱 줄어든 시대다. 툭하면 터져 나오는 것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한탄이다. “말세”라거나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비탄이다.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부분이 생기더라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한다. 이렇게 골목에 몰릴수록 결국 위대한 성인의 출현을 기다린다. “철인이 등장해 일거에 묵은 현안을 풀어주리라는 희망”을 일러 저자는 ‘철왕(哲王) 대망론’, ‘메시아 구원론’이라 부른다. 저자는 “21세기라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푸는 메시아여야 한다.”고 쏘아붙인다. 이 문제는 고전의 문향에 무비판적으로 취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도 이어진다. “성선의 문제를 국학진흥, 국민교육, 민족정신으로 연결”짓는 것을 두고 “근본주의의 유혹에 빠져 전통과 현대를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는 꿈”이라 비판한다. 그 시절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한 것을 왜 시대가 달라진 지금 향수에 젖어 그리워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국학’(國學) 진흥에 기대어 연구자가 ‘국학대사’가 되고파서 그런 것 아니냐고 저자는 되묻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때 유행처럼 번진 ‘아시아적 가치’, ‘유교 자본주의’를 지금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까닭도 여기서 찾는다. 전통은 제대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타자:중국적인 것과 이질적 존재. 디아스포라(유배):중국인이 문학의 발생지라는 중원에서 살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쫓겨났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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