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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서운 이웃집 아저씨들] PC방 주인 결정적 제보… 35시간만에 검거

    [무서운 이웃집 아저씨들] PC방 주인 결정적 제보… 35시간만에 검거

    35시간 걸렸다. 경찰이 전남 나주의 초등학생 A(7)양 성폭행 용의자 고종석(23)을 검거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범인을 잡는 데 이처럼 최단시간이 걸린 것은 다름 아닌 고종석이 다니던 나주 PC방 주인이 건네준 쪽지 덕분이었다. 나주시 영산대교 밑에서 성폭행당한 A양이 발견된 것은 30일 낮 12시 55분쯤이다. 만신창이가 돼 발견된 A양은 범인에 대해 “(고종석이) 삼촌이라고 했다.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었다. 머리가 짧았다.”고 간신히 범인의 인상착의를 묘사했다. 경찰은 ‘삼촌’이라고 지칭한 점으로 미뤄 범인이 20~30대 남성인 것으로 추정하고 즉각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나주경찰서 강력 2팀 최선주(48) 경사는 30일 오후 1시 20분쯤 범행현장 주변 PC방을 찾아가 범인의 인상착의와 유사한 우범자가 있는지를 주인에게 물었다. PC방 주인은 “PC방에서 자주 보는 사람이 있다. 이름을 알아봐 주겠다.”고 말한 뒤 최 경사에게 ‘고종석’이라고 적힌 쪽지를 건넸다. 경찰은 고종석이 즐겨 찾는 순천의 PC방을 알아낸 뒤 경찰 5명을 잠복시켰다. 경찰은 이 PC방에서 속옷 등 고종석의 소지품을 발견했다. 순천 지역 여관을 전전하던 고종석은 태풍 볼라벤으로 일감이 없자 방을 빼 소지품을 PC방에 맡기고 나주로 왔다. 경찰 잠복 24시간 만인 31일 오후 1시 20분 고종석이 PC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나주 성폭행범’ 관련 기사를 검색하던 고종석은 오후 1시 25분쯤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붙잡혔다. 결정적 제보와 경찰의 탐문수사가 일궈낸 결과였다. 나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무서운 이웃집 아저씨들] 범행 직전, PC방서 엄마 만나 “아이들 잘 있나” 확인까지…

    [무서운 이웃집 아저씨들] 범행 직전, PC방서 엄마 만나 “아이들 잘 있나” 확인까지…

    집에서 자던 어린 초등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엽기적인 사건의 용의자는 피해자 A(7)양의 어머니와 잘 알고 있는 이웃사촌이었다. 미성년자 성폭행범의 상당수가 피해자와 평소 가깝거나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고종석은 범행 당일 A양의 어머니 B(37)씨를 PC방에서 만나 “아이들은 잘 있느냐.”고 아이들 안부를 물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남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인 고종석은 뚜렷한 주거지 없이 나주와 순천을 오가며 막노동 일을 해왔다. 최근 잦은 비로 일감이 없어진 고종석은 며칠 전 나주에 와 숙모 집에서 생활했다. 고종석은 번 돈을 술값, PC방 게임비로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A양은 태풍 덴빈이 비바람을 몰고 오던 지난 29일 오후 10시쯤 거실에서 언니와 오빠, 동생과 함께 잠이 들었다. A양의 집은 원래 분식점이었으나 가게를 개조해 거실로 쓰고 있었고 평소처럼 출입문을 잠그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오후 11시쯤 어머니 B씨는 드라마를 본 뒤 아이들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 컴퓨터게임을 하기 위해 인근 PC방에 갔다. B씨가 집에 돌아온 시간은 다음 날 새벽 2시 30분쯤. A양이 안방 아빠 곁에서 자고 있을 것이라고 여긴 B씨는 별 의심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곤한 잠에 빠졌던 A양은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가는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고종석이 자신을 이불에 싸 골목길로 접어들자 공포에 질린 A양은 “아저씨 살려주세요. 왜 그러세요.”라고 애원했다. 이때 용의자 고종석은 “삼촌이야. 괜찮다. 같이 가자.”며 영산강변으로 A양을 데려가 성폭행한 뒤 그대로 버려둔 채 사라졌다. 딸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아침에 안 A양의 부모는 아이를 찾아 나섰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자신의 집에서 직선거리로 130m가량 떨어진 영산강변에서 성폭행을 당한 A양은 직장이 파열되고 출혈이 낭자한 상황에서 이불을 안고 알몸으로 집을 향했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한걸음에 달려갔을 거리였지만 영산강 둑에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경찰이 A양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낮 12시 55분쯤이었다. 태풍 덴빈으로 인한 추위와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 A양은 긴 새벽과 오전 한나절 동안 버려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도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문모(81·나주시 영강동)씨는 “저녁 6시가 넘으면 이 근처는 차 말고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 너무나 불안하다.”며 “이곳은 초등학교와 남녀 공학 중학교가 있지만 방범용 폐쇄회로(CC)TV 하나 없을 정도로 안전의 사각지대”라고 말했다. 이모(48)씨는 “두 딸이 학원에 갔다 밤 10시나 돼야 돌아오는데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특히 어머니가 게임 중독이라며 가정을 소홀히 한 것도 이번 사건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A양의 어머니 B씨는 거의 매일 밤마다 집에서 100m 떨어진 D게임방을 찾아 새벽 3시쯤까지 3시간 정도 게임을 했다고 인근 주민들은 전했다. 춤을 추면서 점수를 올리는 ‘오디션’이라는 게임을 즐겼다는 것이다. 김모(48)씨는 “아이 부모를 모두 잘 아는데 엄마가 게임 중독에 빠져 일용직 아빠가 많이 속상해했다.”고 말했다. 4살 딸을 둔 평범한 시민이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다음 아고라에서 ‘7세 여아 성폭행 강력처벌 바랍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요?’라며 9월 한 달 동안 10만명을 목표로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편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나영이’의 주치의였던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은 나주를 찾아 “아이에게 2차 피해가 안 가도록 조사해야 한다.”면서 “경찰이 수사와 치료를 조율하면서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또 이웃집 아저씨였다 아동 포르노狂이었다

    또 이웃집 아저씨였다 아동 포르노狂이었다

    전남 나주 초등학생 A(7)양 성폭행 사건의 범인 고종석(23)은 아동 포르노광(狂)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주거가 일정치 않은 고종석이 모텔방이나 PC방에서 어린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은 일본 포르노물을 즐겨 봤다고 진술했다.”고 31일 밝혔다. 고종석은 사건 당일인 30일 새벽 PC방에서 A양의 어머니 B(37)씨와 만나 10여분간 게임 이야기 등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술에 취한 고종석은 B씨와 대화 도중 “아이들은 잘 있느냐.”며 안부를 묻기도 해 계획적인 범행 의혹도 사고 있다. 사건 하루 만인 31일 오후 1시 25분쯤 고종석을 검거한 경찰은 고종석을 상대로 범행 동기 등을 집중 추궁했다. 고종석은 경찰조사에서 “술을 먹고 정신이 없었다. 술김에 그랬다.”며 범행을 시인했다. 나주종합병원에서 이날 오후 광주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진 A양은 다른 외과수술을 하지 못할 만큼 현재 큰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양의 아버지는 “정말 착하고 언니 오빠와 잘 지내는 아이였다. 활달하고 똑똑한 아이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이후 인근 PC방과 유흥주점 등을 탐문 수사하다 모 PC방 업주로부터 손님 중 한 명이 게임을 하다 새벽 1시쯤 나갔으며, 피해자가 진술한 범인의 인상착의와 비슷하다는 첩보를 받고 고종석이 사용했던 컴퓨터 기록 등을 통해 인적사항을 파악했다. 경찰은 오후 1시 20분쯤 고종석이 자주 가던 순천시 풍덕동 모 PC방에 잠복해 있다 게임을 하러 온 고종석을 붙잡았다. 고종석은 B씨와 PC방에서 자주 만났고 사건 이전에도 몇 차례 A양의 집에 간 적이 있어 집안 구조를 비교적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석은 순천 등지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다 최근 잦은 비로 일감이 없자, A양의 집에서 300m가량 떨어진 작은어머니 집에서 지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에 따르면 고종석은 사건 전날인 29일 저녁 술을 마시고 PC방에 왔다가 다음 날 새벽 2시 30분에서 3시 사이에 피해자의 집으로 가 A양을 이불로 싼 뒤 업고 가 130m 떨어진 영산대교 밑에서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고종석은 절도죄로 한 건의 벌금 전과만 있을 뿐 성범죄 전력은 없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1일 오전 피해자의 집과 범행현장에 대한 현장 검증을 실시하기로 했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를 대신해 국민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을 방문해 김기용 경찰청장으로부터 수사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치안 강화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수·나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무서운 이웃집 아저씨들] 범행 동기·과정 풀리지 않는 의문

    초등학생 A(7)양을 성폭행한 용의자로 고종석(23)이 검거됐지만 범행동기와 과정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찰은 A양이 30일 새벽 2시 30분에서 3시 사이에 납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A양의 어머니 B(37)씨의 진술은 일관성을 잃고 있다. B씨는 당초 경찰수사에서 “전날 밤 11시쯤 PC방에 갔다가 다음 날 새벽 2시 30분쯤 집에 돌아와 보니 A양을 포함한 네 자녀가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던 B씨가 31일에는 “A양을 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B씨가 고종석을 PC방에서 만난 것은 30일 새벽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고종석은 새벽 1시 13분쯤 나주 PC방에서 나갔다. 이후 고종석은 걸어서 5분 거리인 B씨 집에 곧장 갔을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고종석의 A양 납치는 이날 새벽 2시 이전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오락가락하지만 딸을 보지 못한 것 같다는 B씨의 말이 설득력이 더 있다. 또 고종석이 B씨에게 딸의 안부를 물었던 것도 B씨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상하게 여겼어야 한다. 고종석이 주거가 일정치 않고 정상적인 생활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낌새를 채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아무리 잠을 자고 있었다 하더라도 A양을 포함해 다섯 식구가 다 집에 있는 상황에서 보쌈하듯이 납치했다는 것도 석연치 않다. 고종석이 술에 취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대담한 범행이었다. 7살 여자아이의 몸과 마음을 망칠 정도로 큰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로 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일각에선 계획적인 범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종석은 B씨와 PC방을 드나들며 알게 된 사이로 범행 당일에도 아이들의 안부를 묻기도 해 피해자 가족의 집과 환경, 가족관계 등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 첫 공개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 첫 공개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로건 서클 역사지구’ 15번지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내부가 102년 만에 공개됐다. 당시 명칭이 ‘대조선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大朝鮮駐箚 美國華盛頓 公使館)이었던 3층짜리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은 대한제국 시절인 1891년 11월 고종 황제가 당시로서는 거금인 2만 5000달러를 하사해 매입한 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돼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14년간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사용됐다.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은 당시 일제로부터 단돈 5달러를 받고 강제 매각당한 이 건물을 최근 350만 달러(약 39억원)에 매입하기로 했고, 경술국치 102주년인 29일(현지시간) 현지 조사단을 파견해 건물 내부 상태를 정밀 검사했다. 이날 공개된 내부 모습 역시 건물 외부와 마찬가지로 100년의 세월이 무상할 만큼 당시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조사단이 접견실과 집무실, 주방과 식당 등으로 사용된 1층을 둘러본 결과 벽면에 붙어 있는 세 개의 벽난로와 타일 문양, 벽체와 천장을 잇는 몰딩 장식, 샹들리에가 걸린 천장 부분의 타원형 테라코타 등 사진 속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내부 골조나 벽체를 허물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공사의 침실과 휴식 공간으로 사용됐던 2층 역시 유리창 구조와 정교하게 깎은 나무를 조립해 만든 창문 가리개 등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3층은 중간 벽이나 칸막이 없이 완전히 터진 공간으로 당시 미국 정부 관계자나 외국 외교사절을 초청해 연회를 열거나 각종 이벤트를 벌이는 다용도 공간으로 쓰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올해 안으로 건물 내·외부에 대한 정밀조사를 마친 뒤 전문가와 재미교포 사회의 의견 수렴을 거쳐 건물을 한국 전통문화 전시 및 홍보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연합뉴스
  • “단군 제자리 모시고 산업의 연성화 필요 통일 한반도 대비도”

    1880년 5월(음력)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홍집은 일본에서 주일청국 참사관 황준헌(黃遵憲) 등과 필담으로 외교정책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다. 귀국길에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와 고종에게 바쳤다. 조선책략은 ‘동진하는 러시아를 방어하기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라.’고 조언했다. ●현재는 19세기 말과 판박이 옛 재무부 공무원 출신인 박상은 환경그린코리아 고문이 최근 펴낸 ‘21세기 대한반도 책략’(이미지북 펴냄)은 내용에서 19세기 말 조선책략과 다르지만, 한국이 21세기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외교·경제정책 31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책략’과 같은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서술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에 둘러싸여 있는 현재는 19세기 말과 판박이라는 인식이다. 책략의 첫머리에서 박 고문은 우선 일제 식민사관에 묻혀 5000년 전 단군조선을 신화와 설화의 영역에 머물게 한 것은 실책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상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단군을 제자리에 모셔 와야 한다는 것이다. 양적으로 잘사는 것뿐만 아니라 불행한 계층을 포용해 질적으로도 잘살아야 하고, 자본주의 4.0의 키워드인 ‘행복, 박애, 스마트파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섬세한 4강 외교 필요 둘째, 10여년째 ‘중진국 함정’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권력층 주변의 부패와 정치적 무능, 국민의무 불이행 등 비선진국적 행태가 사회비용 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산업의 연성화와 스마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화석연료 고갈의 위기를 서해안의 청정에너지인 조력에너지에서 찾아볼 것을 제안했다. 셋째, 2020~2030년쯤 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지만, 저자는 경제규모만으로는 패권을 장악할 수 없으므로, 한국의 4강 외교는 섬세한 교섭력과 정보력으로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대한민국 건국이념, 미국産 아닐세”

    “대한민국 건국이념, 미국産 아닐세”

    1948년 그 모습을 드러냈던 건국헌법에 대해 널리 알려진 해석은 한마디로 ‘날림 공사’다. 좀 있어 보이는 표현을 쓰자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급격한 이식’ 정도가 된다. 그러니까 어수선하던 해방 공간에서, 더구나 다가오는 광복 3주년에 맞춰 하루빨리 건국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급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꼭 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조항은 얼렁뚱땅 통과시키면서도 내각제만큼은 엄청난 몽니를 부려 대통령제로 뒤집었다는 정도다. 이는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가 커 그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일정 정도 진통을 겪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 주장이 한발 더 나아가면 아주 직설적으로 말해 대한민국 독재자들은 시대 상황상 무죄라는 논리에 가닿는다. 그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수준이 그 모양인데 그 좋다는 해외 명품을 가져다 놔 봤자 어디에다 쓰겠냐는, 대개 국민을 비하하고 독재의 불가피성을 옹호하기 위해 쓰이는 ‘민도’(民度)라는 표현이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 부분에서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건국헌법을 읽어 나가다 보면 그만 어색해진다. 헌법기초자인 유진오 박사는 건국헌법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대거 포함했다고 평가했고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다 헌법상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을 정도로 좌편향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흥재 서울대 교수는 기업 이윤을 노동자들에게도 분배하라고 못 박아 둔 건국헌법 18조, 소위 말하는 ‘이익균점권’ 조항이 경제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립됐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얘기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하나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급격한 이식’이란 표현이 성립하느냐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김육훈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은 1948년 시한이 촉박했던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건국헌법이 성립됐다는 그동안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구한말, 식민지, 광복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적 시야 아래 건국헌법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선왕조에 망조가 들 무렵부터 광복한 직후까지 한국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았겠느냐는 지적이다. 더구나 저자는 역사 교사들의 모임인 전국역사교과서모임 회장을 지냈고 초중고 및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이들의 연구모임인 역사교육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현직 역사 교사다. 그래서 독자들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듯 부드럽게 풀어 쓴 서술 또한 매력적이다. 저자는 3·1운동을 핵심에 놓는다. 그러니까 그 이전 시기는 왕조를 부활할까, 왕정보다는 그래도 입헌군주제가 낫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왕정을 없애고 공화주의로 나갈까라는 각기 다른 생각들이 교차했던 시기로 본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마침내 왕정 복고 운동은 종말을 맞고 공화주의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가지 근거를 든다. 3·1운동 와중에 고종의 친아들 이강을 상하이로 빼돌려 황제 중심의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다 실패한 대동단 사건이다. 오랜 습관 때문에 왕조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 벌어진 일이었으나 이 사건 이후 왕조 부활 운동은 사라진다. 또 하나는 3·1운동 이후 각종 임시정부의 설립 운동이다. 대조선공화국을 내건 한성정부, 신한민국을 내건 경성독립단에다 너무도 잘 알려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이들 모두 각기 다른 국가명과 정부 조직 체계를 내세웠지만 핵심은 이들 모두 왕정 폐지와 공화주의를 선언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다 ‘3·1운동’을 못 박아 둔 것은 3·1운동이 일제에 한 방 먹인 통쾌한 사건이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 작업에 관여한 이동년 임시의정원 의장은 “우리는 이제 군주제를 부활하려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백히 말해 뒀다. 이승만도 1948년 제헌의회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뒤 기념 연설에서 “대한민국은 1919년의 민국을 재건했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니까 3·1운동을 계기로 이제 우리가 피땀 흘려 싸워서 되찾아야 할 나라는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합의에 모두가 도달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봐야 할 점은 이때의 민주공화국이 ‘우파 정체성’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조소앙이다. 그의 지향점은 1917년 상하이에서 만난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대동단결선언’에서 이미 확인된다. 조소앙이 기초하고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등이 관여한 이 문건에는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하는 때요, 구한국 최후의 하루는 곧 신한국 최초의 하루다. (중략) 그러므로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곧 우리 국민 동지들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우리 동지들은 당연히 주권을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라는 대목이 들어가 있다. ‘대한제국 끝, 공화주의 시작’을 명백히 선언한 것이다. 이 논리 아래 조소앙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언, 1941년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등 헌법에 준하는 각종 문건 제정 작업에 참여했다. 그 내용도 눈길을 끈다. 조소앙은 기본적으로 우파였으나 좌우파의 최대공약수를 뽑아내는 데 주안점을 뒀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치열한 항일투사라는 점을 인정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주장 가운데 받아들일 내용이 많다는 점도 인정”했으나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무산자 독재란 이름으로 정치적 자유가 소멸되고 있음을 준열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나 자유주의가 곧 민주주의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미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돈 많은 이들과 많이 배운 이들의 독재가 이뤄진다.”고 봐서다. “민중을 우롱하는 자본주의 데모크라시”, “무산자 독재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데모크라시”를 배격한 자신의 주장을 조소앙은 ‘신민주주의’라 불렀다. 이제는 한물간 듯한 표현을 빌리자면 조소앙식 제3의 길이었던 셈이다. 조소앙이 통합시켜 놓은 이런 큰 물줄기 때문에 길게 보면 남한의 건국헌법이 “자유경제를 주장하면서도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북한의 첫 헌법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경제 요소를 두루 인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가 조소앙을 일컬어 “헌법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좀 더 전문적인 논의를 원한다면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서희경 지음, 창비 펴냄)을 참고해도 좋다. 헌정사 연구자인 저자는 만민공동회에서 시작해 3·1운동을 거쳐 임시정부의 헌법과 규약에 이르는 과정을 한국 헌법의 원형질이 생성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앞선 저자의 논지와 일치하는 주장을 내놓는다. 동시에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공화주의의 효시로 꼽고 이에 참여한 조소앙의 중요성을 부각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근대 한국 헌법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점도 흥미롭다. 그동안은 유진오가 그런 인물에 해당한다고 평가됐다. 1945~48년만을 놓고 보면 유진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조소앙의 역할이 한층 더 근본적이고 유진오의 역할은 제한적이라고 해뒀다. 더 두껍고 학술적이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입체적 묘사가 돋보인다. 각 권 1만 5000원, 3만 3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60년’ 국악인 신영희씨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60년’ 국악인 신영희씨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후회하지 않을까. 그게 처절하든 아니든 말이다. 그런데 후회라는 단어를 한 번도 떠올려 보지 않고 외길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온 한 여인이 있다. 지난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신영희 국악 연습실’에서 20여명의 젊은 여인들이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다. ‘저 처량한 새 울어 울어, 평생 낭군을 못잊어 이팔 청춘 과부되어, 공방 적적 홀로 뚝~’ 가만히 들어 보니 새타령 가락이긴 한데 처음 듣는 가사내용이었다. 하지만 곱디고운 목소리에 내면 깊숙한 한이 곳곳에 서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새달 15, 16일 이틀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신영희 소리인생 60주년 콘서트’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다. 국악인 신영희(70)씨는 2002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50주년 기념공연을 한 이래 10년 만에 대형무대를 마련한다. 함께 연습 중인 신씨와 잠시 만났다. 방금 전 불렀던 노래에 대해 먼저 물었다. “조선 말기 5명창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전설의 소리꾼 이동백 선생의 새타령입니다. 1900년 고종 황제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벼슬을 얻었지요. ‘춘향가’, ‘적벽가’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새타령’은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새타령에는 온갖 상상의 새들이 다 등장합니다. 가사나 가락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소리 인생 60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터. 소감을 물었다. “세월이 무상하지요. 10살 때 소리를 시작했는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하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본분에 충실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지요. 뒤돌아보니 그동안 고생도 있었지만 많은 제자를 길러낸 것을 가장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60년 국악인생’ 처음으로 무대 올려 제자 자랑이 계속 이어진다. 지금까지 대통령상 수상자 8명, 국무총리상 수상자 20여명, 장관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며 웃는다. “저는 제자들에게 항상 주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 돼라. 그 다음에 소리다’라고 말입니다. 소리가 조금 부족하면 연습해서 도달하면 되지만 인간이 안 되면 연습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효제사상, 그러니까 덕을 갖추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라고 늘 강조합니다. 이런 관계로 20년, 아니 30년된 제자들도 여럿 있지요.” 다시 공연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신씨는 “이상벽(방송인)이랑 누나 동생하며 지내는 사이인데 이상벽이가 그래요. ‘누나, 올해가 60주년인데 그냥 있으면 되겠습니까. 멋진 공연 한번 해 보시지요. 송해 선생님도 하는데 못할 게 뭐 있습니까’라고 해서 이번 무대를 마련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하여 이씨가 사회를 보고 친구인 배우 사미자, 김형자, 윤문식씨가 함께 출연한다. 한때 개그 프로그램에서 명콤비를 이루었던 ‘쓰리랑 부부’의 김미화와 김한국씨도 무대를 빛낸다. 김미화씨는 신씨의 딸과 오랜 친구이다. 신씨의 애제자 30여명도 함께 출연한다. 60주년인 만큼 퓨전 국악무대로 꾸민다. 1부에서는 신씨의 60년 일대기가 드라마 형식으로 펼쳐진다. 사미자, 김형자씨가 어머니 역할로 번갈아 출연하고 명창 김일구씨가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신씨의 제자 둘이 10~30대 연기를 하고 40대 이후 역할은 본인이 직접 맡는다. 2부에서는 쓰리랑 부부와 함께 흥겨운 마당놀이로 꾸며지며 옹헤야, 뱃노래, 새타령, 물레타령 등 신나는 노래를 직접 들려준다. “지난 60년 세월, 그러니까 제 인생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영민, 이주희 작가가 대본을 썼는데 그걸 읽고 세번이나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와 제가 소리하면서 고생했던 대목에서 울었지요. 이래저래 이번 무대에서 진정한 저의 모습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잠긴 듯했다. 몸 상태를 물었더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빼고는 컨디션이 좋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저녁에는 올림픽 공원에서 걷기 운동으로 컨디션을 조절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자신에게는 식지 않는 패기와 정열, 그리고 용기가 있으니 좋은 무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국악은 내 팔자이자 생명 그 자체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국악을 할 것입니다. 국악이 서양음악에 비해 훌륭한 이유를 아시나요. 서양음악은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바리톤, 테너 등으로 나눠 부르지만 국악은 이 모든 것을 함께 아우르며 고저 장단의 음을 다 소화해내지요. 외국에 공연가면 서양음악인들은 바로 이런 점을 매우 놀라워합니다.” 그가 국악을 하게 된 계기는 판소리 명인 아버지(신치선)의 영향을 받았다. 10살 때인 어느 날 아버지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제자들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소리를 배우겠다고 아버지한테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살림이나 하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노래 솜씨가 영 없는 것은 아니니 한번 가르쳐 보라.”고 설득해 그날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들은 것이 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반대하셨지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어느덧 60년이 됐네요.” 신씨가 16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소녀 가장이 됐다. 고등학생인 오빠, 그리고 초등학생인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열심히 판소리를 했다. 권투를 하는 오빠와 공수도를 하는 남동생 사이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권투와 역기, 아령 등을 익힌 것도 이때였다. 이에 대해 신씨는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교육자로 살아가는 오빠를 볼 때마다 늘 자랑이고 보람을 느낀다.”고 술회했다. 고생했던 일도 기억한다. “15살 때인가 그래요.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어혈이 심하게 생겼습니다. 목과 배가 너무 아파 식초와 섞은 계란 흰자를 1년 넘게 먹으면서 견디기도 했지요. 좀 고생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소녀 가장이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에서 무대예술을 전공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출연하는 무대는 대부분 직접 무대감독과 안무까지 한다. 국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우리 국민들이 우리 것을 외면할 때, 남의 나라 음악을 추구할 때였다.”고 말한다.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국악 중의 꽃은 바로 소리입니다. 장단과 몸놀림까지 합쳐진 종합 예술이지요. 그런 자부심으로 1979년부터 유럽, 미국, 일본 등으로 해외공연을 다녔습니다. 특히 독일 공연 때 함성소리와 함께 기립박수를 받았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우리의 판소리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임을 실감했지요.” ●“국민들이 국악 외면할 때 가장 힘들어” 우리 문화가 살아야 나라도 산다고 강조하는 그는 세 가지 실천 덕목을 지킨다.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먹고, 꾸준한 운동으로 몸관리를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봉사활동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알고 보니 그는 1976년부터 교도소와 수녀원 등을 다니면서 36년째 매년 남 모르게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지난 6월에는 육군교도소와 영월교도소에서 1시간 넘게 공연을 했고 7월에는 나자로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국악하는 지인,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간다. 이럴 때면 좋은 쌀을 사다가 절편 등 직접 떡을 만든다. 대개 1시간 20분 정도 무료공연을 하는데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 등을 곁들인다. 올가을에만 4곳에서 예정돼 있다. “제가 국악인의 딸로 태어나 국악인으로 사랑을 받았으니 당연히 사회에 봉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무대의 수익금도 봉사활동을 하는 데 쓰일 것입니다. 나이 70인 제가 늙지 않는 것도 이런 즐거움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지요(웃음).” 선임기자 km@seoul.co.kr [신영희씨는] 박봉술·김소희 선생 등에 익혀… 판소리 준문화재 지정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판소리 명창인 아버지한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6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판소리를 불러 오빠와 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이후 안기선, 김준섭, 박봉술, 강도근, 김상룡, 김소희 선생한테 판소리를 익혔다.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김소희 선생 전수장학생에 선정됐다. 1976 중앙 국립창극단에 입단했으며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준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에서 무대예술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 판소리보존회 이사와 원광대학교 국악학과 교수 등을 맡고 있다. 남원 춘향제 명창부 최우수상(1977)과 2005년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 [씨줄날줄] 화성돈 공사관/노주석 논설위원

    화성돈(華盛頓)은 워싱턴(Washington)의 음역어이다. 음역어란 한자를 이용해 외국어의 음을 나타낸 말이다. 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음역한 말을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기 때문에 원래의 소리와 차이가 나는 게 보통이다. 국명이나 지명, 인명에 음역어가 많다. 구라파(歐羅巴·유럽), 아세아(亞細亞·아시아), 불란서(佛蘭西·프랑스), 독일(獨逸·도이칠란트), 이태리(伊太利·이탈리아), 서반아(西班牙·스페인), 월남(越南·베트남), 인니(印尼·인도네시아), 몽고(蒙古·몽골), 소련(蘇聯·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희랍(希臘·그리스)은 병행 사용할 정도로 많이 쓰이는 음역어이다. 이 밖에 나성(羅城·로스앤젤레스), 성항(星港·싱가포르), 백림(伯林·베를린), 애급(埃及·이집트), 서전(瑞典·스웨덴)도 빈도수가 높은 편이다. 러시아를 한때 아라사(俄羅斯)라고 불렀는데 아라사국 공관으로 고종이 옮겨갔다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은 거기서 연유됐다. 기독(基督·그리스도), 야소(耶蘇·예수), 유태(猶太·유대), 구락부(俱部·클럽), 호열자(虎列刺·콜레라) 등도 대표적인 음역어의 범주에 든다. 음역어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화기의 역사적 산물이다. 맞춤법조차 없던 시절이라 한자음을 이용한 외래어 표기가 불가피했다. 지금도 신문기사나 책에 자주 쓰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가 없다.”라고 불평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신세대 활용사례도 있다. ‘석호필’이 그것이다. 미드(미국 드라마) 선풍을 가져온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스코필드에게 음절 구조와 발음을 고려해 재치 있는 한국식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던 ‘대조선주차(大朝鮮駐箚) 미국 화성돈 공사관’을 102년 만에 되찾았다고 한다. 대한제국 때 고종이 내탕금 2만 5000달러를 주고 사들여 1891년부터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까지 공사관으로 쓰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일제가 1910년 단돈 5달러에 매입해 10달러에 미국인에게 팔아치운 것을 정부가 이번에 350만 달러를 주고 되사들였다. 한국전통문화 전시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헐값에 팔고 비싸게 사 준 서울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이 생각난다. 1890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 부지를 2200멕시칸달러(2000년 기준 2억여 원)를 받고 팔았다. 이후 우리 정부는 옛 배재학당 터에 러시아 대사관 건립 부지를 제공하는 등 3000억원 이상의 대가를 치렀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19세기 후반 세계는 해양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조선을 변화시켰다.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바탕으로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호 연대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측의 대응도 있었다. 외압에 대응해 조선 역시 열강과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하나의 축이자 조선과 국경을 맞댄 나라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일본, 청국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전략으로 공러(恐)의식을 조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대원군, 러 견제위해 佛신부와 접촉도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초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을미사변의 주역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만 정확히 파악하면 동양의 뛰어난 외교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860~1870년대 서구열강과의 접촉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했고, 러시아 또는 미국 등 서구열강 일국에 편중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이 외교관계의 미묘한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다. 거기에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 吳拜)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묘를 도굴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 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에서는 청나라와, 갑오개혁 때는 일본과 각각 대립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1885년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개국기원절 日인사 초청 놓고 반일친러 분위기 형성 명성황후는 외교 분야의 현안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1895년 9월 4일 왕실은 조선왕조 504년 건국 기념일인 ‘개국기원절’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국인 중 궁내부 고문관(宮內府 顧問官) 러젠드르 장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의 자매이자 궁내부에 소속된 손탁 여사, 그리고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러젠드르 장군은 사무장(事務長)이라는 명예위원으로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손탁 여사는 음식과 식탁 준비를 담당했으며, 사바친은 식장의 장식 부분을 총괄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손탁을 궁내부에 고용하도록 추천했다. 독일 엘자스(Elsass) 출신인 손탁은 궁궐에서 유럽식 향연을 준비하면서 명성황후를 자주 만나 2~3시간씩 연속으로 황후와 대화했다. 이날 회의에서 행사와 관련된 한 명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식탁 시중을 위해서 일본 급사를 초청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찡그렸고, 일본인들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침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러젠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에게 시중드는 유명한 기사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탁 여사는 왕실로부터 자신의 개인 집을 짓기 위해 약 1만 달러를 받았고, 그녀의 지도 아래 조선 여인들이 다양한 수공예를 배울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사바친은 일본공사관의 외교관 및 일본과 연대하고 있는 조선 관료들의 명성황후를 향한 적개심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때 사바친은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작은 사건 같지만, 이와 비슷한 작은 사건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어떤 음모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손탁과의 관계 속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지원을 예상하고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반일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둘러싸고 일본이 외교적으로 패배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명성황후 주변의 미국인도 자국의 이권과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유럽인들의 약속을 받았고, 유럽인들이 궁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신은 조심하는 자를 보살필 뿐이었다. ●명성황후, 왕실 日세력 제거… 日 ‘친러’ 비판하며 을미사변 개국기원절 행사 이후 왕실은 1895년 9월 재정, 법률, 내각, 군대 등에 대한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관과 연대하는 정치 세력을 점차 제거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도 공사 이노우에 공사가 9월 17일 귀국길에 오르자 왕실이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신제도와 신군대의 파괴에 착수했다.”고 분노했다. 왕실은 1895년 9월 20일 기존 법률과 칙령 번호를 무시하고 새롭게 칙령 1호를 발표했다. 왕실은 궁내부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반대세력인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파면하고 내무협판 유길준을 의주관찰사로 전출시켰다. 무엇보다도 왕실은 일본 장교에 의해 교육받은 훈련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홍계훈을 훈련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명성황후는 훈련대를 해산, 김홍집 내각을 약화시켜 갑오개혁 이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공사는 히로시마재판소에서 1895년 9월 1일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후 “궁중에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게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며 왕실의 권력 장악을 비난했다. 그는 “훈련대를 흩어지게 하며 그 사관을 내치고자 하는 무리가 일본을 박대했다.”며 궁중의 일본 ‘박대론’을 주장했다. 그는 “독립의 실상을 실행하는 내각 관원들을 내치고, 혹 살육하여 정권을 궁중에 거두고자 하는 계교가 있었다.”며 궁중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니, 일본의 위엄과 믿음을 보존할 것을 생각했다.”며 일본의 ‘국익’을 위한 정변 실행을 결심했다. 그는 ‘박대’와 ‘계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궁중을 비난하고 일본의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미우라 공사는 황후의 ‘친러정책’에서 일본의 ‘국익 보존’으로 을미사변 원인에 관한 초점을 옮겼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을 언급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을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국익 보존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국제세력에 맞서 왕실 보호를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상층부 두 인물의 핵심 세력은 각각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로 갈렸다. 하지만 들판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는 법이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15일 광복절 맞는 독립기념관·문화재청·행안부] 이준·한용운 등 묘역 7곳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이준과 안창호, 한용운, 손병희 등 서울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 묘역 7곳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13일 말했다. 문화재청이 이번에 등록 예고한 묘소 7곳은 모두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라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1호 검사’인 이준은 고종의 명을 받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돼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현지에서 순국했다. 그의 묘가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이준의 묘를 비롯해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 성균관 대학을 설립한 유림의 대표인 김창숙,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회의장과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암살된 신익희의 묘가 모두 수유동에 있다. 천도교의 제3대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의 실질적 대표인 손병희의 묘는 강북구 우이동에 있다. 독립협회 활동을 한 안창호의 묘는 강남구 신사동,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을 선도한 불교계의 지도자 만해 한용운 묘소는 중랑구 망우동에 있다.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커버스토리] 멕시코 한인후손 33명 모국체험 현장 가보니…

    [커버스토리] 멕시코 한인후손 33명 모국체험 현장 가보니…

    1905년 5월 12일, 한인 1031명이 낯선 멕시코 남단 살리나 크루스항에 내렸다.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한 달여의 항해 끝에 닿은 곳이었다. 19세기 말 열강의 식민지 침탈로 해운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선박 로프의 원료가 되는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을 대량 재배하는 멕시코의 농장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이민 노동자를 대거 모집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무렵 멕시코 유카탄 주(州)의 에네켄 농장주들이 파견한 이민 브로커인 영국인 존 마이어스는 신문에 광고를 낸다. 4년 계약에 이동 경비 지원, 거주가옥 임대 및 연료 무료 제공, 파격적인 임금, 자녀교육 등을 제시했다. 지독한 가난과 열강의 핍박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꿈 같은 기회로 여겨 머나먼 땅으로의 이민을 결행한다. 그러나 모두 사기였다. 당시 회사 측은 가족 단위 이민을 권유했는데 알고 보니 이민 노동자들의 현지 이탈을 막으려는 악랄한 책략이었다. 살리나 크루즈항에 도착한 한인들은 곧바로 기차와 배를 타고 에네켄을 재배하는 농장 여러 곳에 10~50명씩 분산 배치됐다. 농장생활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새벽 4시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땡볕 아래서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기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하루 1만개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질이 가해졌다. 약속된 임금은 나오지 않았고 무상 지원하겠다던 집과 식량도 거액을 주고 사야 했다. 이들은 결국 일 할수록 빚만 쌓여갔다. 이들의 참상을 듣고 고종은 눈물을 흘렸다. 고종은 이들의 송환을 위해 외부협판(차관급) 윤치호를 멕시코 현지로 보내려 했지만 일본이 가로막았다. . 1909년 5월 계약노동이 끝나 한인들은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이듬해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돌아갈 곳을 잃었다. 언어 장벽 때문에 다른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다. 살 길을 찾아 많은 한인들이 유카탄 주를 떠났지만 대부분은 이듬해 다시 돌아왔다. 멕시코 혁명의 여파로 동양계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1920년대 인조섬유의 등장으로 에네켄 산업이 몰락하자 한인들은 또다시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다. 지난 8일 오후 1시 서울 강남구 삼정호텔 로즈마리홀. 신정환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 통번역학과 교수가 한국 모국체험에 나선 한인 후손 33명에게 들려준 ‘멕시코 한인 이민사’ 일부다. 신 교수가 강의 참고자료로 이민 1세대 사진을 보여주자, 한인 후손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인 4세인 엘윈 박 사바라(16)가 사진 속에서 현조 할머니를 발견한 것. 엘윈은 “할머니 사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면서 “가족 구성원들이 강연 내용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고 나의 역사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선조들의 멕시코 이주사에 대해 약 두 시간 동안 강의를 들었다. 졸거나 딴청을 피우는 이들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려웠다. 멕시코 유카탄 지역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는 선조들의 사진이 스크린에 뜨자 디지털 카메라로 강의 내용을 담는 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이미 자신의 ‘일부’라는 인식이 뚜렷했다. 얼빙 노에 리 구티에레스(35)는 “나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한국 역사에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오늘 강의로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면서 “오늘 강의한 신정환 교수의 논문을 2편 정도 미리 읽은 적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아는 모든 한국의 문화를 그대로 전수해 주겠다.”고 덧붙였다. 얼빙은 또 “내가 온 캄페체에서는 한인 후손들 사이에 한국 이름을 짓는 게 하나의 유행”이라고 전하면서 “과거 2, 3세대 선조들은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4, 5세대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생각해 놓은 한국 이름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한빛’이라는 이름을 갖고 싶다.”며 주저없이 운을 뗐다. 그는 “한국 이름이 예쁘다.”면서 밝게 웃었다. 같은 날 오후 4시.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아파트 단지 태권도 학원에서는 한국문화체험 행사가 열렸다. 이들은 ‘KOREA’라는 검은 글씨가 등에 새겨진 하얀 도복을 갖춰 입고 맨발로 파란색 고무 매트 위에 섰다. 태권도 체험은 영어로 이뤄졌다. 멕시코 한인 후손들은 박철웅(40) 국기원 외국인 지도사범의 지도에 따라 서툴고 엉성하지만 활기찬 움직임으로 제각기 발차기 실력을 뽐냈다. 이들의 기합에 체육관이 쩌렁쩌렁 울렸다. ‘태, 권, 도’라고 하나하나 끊어 읽으며 한 동작 한 동작 따라 하는 이들의 눈에는 늠름함이 배어 있었다. 박 사범이 “아이 러브 코리아(I love Korea)!, 아이 러브 멕시코(I love Mexico)!” 하면 이들은 더 큰 소리와 함성으로 화답했다. 흐르는 땀을 연신 소매로 훔쳐내던 세사르 안토니오 로사드 총(30)은 “태권도를 배우는 게 내 꿈이었다.”면서 “멕시코에 있을 때부터 태권도를 꼭 배워보고 싶었는데 가르치는 곳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실제로 태권도를 해 보니까 정말 기쁘다.”면서 감격해했다. 태권도가 한국 운동인지 몰랐다는 안순 구 로만(19·여)은 “직접 옷을 입고 체험해 보니 재미있고 태권도가 한국 운동이라니 정말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또 “태권도의 매력은 운동 전 ‘안녕하세요’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처럼 예의범절을 준수하는 것”이라는 설명까지 해줬다. 엘윈은 “오늘 나의 문화 가운데 새로운 한 가지를 추가해서 무척 기쁘다.”고 웃음지으며 말했다. 이들은 9일에는 한국인들과 2대1로 짝을 이뤄 서울을 둘러보는 시간도 가졌다. 이날 멕시코 한인 후손에게 인사동을 소개한 강신영(26) 한국외대 스페인어과 학생은 “멕시코 한인 후손들이 모국을 방문한다는 학교 홈페이지 공고를 보고 통역 봉사를 신청했다.”면서 “멕시코에서 1년 1개월 동안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멕시코 사람을 많이 만나봤지만 이들은 느낌이 뭔가 다르다. 한국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씨와 함께 인사동을 둘러 본 세사르는 “언어 문제가 가장 걱정이 됐는데 신영이가 스페인어를 잘해서 지금은 모든 게 완벽하다.”면서 “인사동에 처음 와봤는데 신기한 것투성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세사르는 “날이 더우니 맥주 한 잔 하자.”는 강씨의 제안에 “좋다. 그렇다면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마시자.”라고 말하며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한민족으로서의 ‘무엇’인가가 통하는 순간이었다. 한국 가정에서 일일 홈스테이 체험도 가졌다. 9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아파트. 박범용(51)씨 집에서 일일 홈스테이를 하게 된 아브라함 박 딥(17)과 루이스다니엘 메디나 김(28)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집안을 둘러봤다. 한국관광공사를 통해 그동안 중국, 스페인 등 외국인 여행객을 맞아 왔던 박씨와 그의 아내 박영미(50)씨, 그리고 네 딸 미선(24), 소영(15), 쌍둥이 소진·소미(14)양이 따뜻하게 그들을 맞았다. 미영씨는 이들을 위해 잡채, 통닭, 불고기, 마파두부 그리고 흰 쌀밥을 수북하게 담아 식탁에 올렸다. 모두가 둘러앉아 ‘와’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아브라함은 따뜻한 잡채를 입에 넣으며 연신 “맛있다.”를 연발했다. 루이스다니엘은 미영씨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한국에서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줘서 친척 집에 온 것 같다.”면서 “남자 형제밖에 없는데 누나와 여동생들이 생긴 게 특히 기쁘다.”며 환하게 웃었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둘째딸 소영양도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다. 소영양이 더듬더듬 “하우 올드 알유?(How old are you)”라고 묻자 아브라함이 “세븐틴(seven teen). 내가 오빠.”라고 한국말로 답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소진양은 한국 가정에 대한 첫 인상이 궁금했다. 루이스다니엘은 ‘바닥재’가 인상 깊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은 나무모양의 느낌인 장판이 깔려 있는데 멕시코 가정집의 대부분은 시멘트 바닥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한인 후손들에게 불고기, 잡채 같은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모국의 따뜻함과 좋은 이미지를 전해 주고 싶어 일일 홈스테이를 자처했다.”면서 “한국 핏줄 아니냐. 한국인이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모국에 와서 보고 느끼면서 한인 후손들이 한국과 연결고리를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명희진·신진호기자 mhj46@seoul.co.kr
  • 교통사고, 눈 오는 겨울보다 여름에 더 잦다

    교통사고, 눈 오는 겨울보다 여름에 더 잦다

    겨울보다는 여름에 교통사고가 더 많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위 탓이다. 겨울철 눈길·빙판길 교통사고가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안 그렇다는 얘기다. 경찰청이 보유한 전국 월별 교통사고 통계를 7일 분석한 결과 1977년부터 2011년까지 35년간 혹서기인 7월에 발생한 교통사고는 63만 9237건(8.8%), 8월 사고는 64만 5987건(8.9%)으로 집계됐다. 반면 혹한기인 1월은 51만 1494건(7.0%), 2월은 47만 2535건(6.5%)이었다. 7~8월과 1~2월의 합계로 비교해 보면 각각 128만 5224건과 98만 4029건으로 혹서기가 혹한기보다 30만 1195건 많았다. 연 평균으로 치면 약 8600건에 이른다. 자동차 보급이 늘어난 최근 10년간의 교통사고 발생 건수를 봐도 7~8월이 많았다.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발생한 교통사고는 7월에는 월 평균 1만 9209건(8.6%), 8월에는 1만 9151건(8.6%)이었다. 반면 1월은 1만 6652건(7.5%), 2월은 1만 4990건(6.7%)이었다. 여름철 교통사고가 더 많은 이유는 더위로 인한 졸음운전과 운전자의 부주의 때문으로 지적됐다. 최석훈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종합분석센터 과장은 “여름에 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면 내부 공기 순환이 제대로 안 돼 운전자가 졸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면서 “고온다습한 날씨에 불쾌지수까지 높아지면 운전자의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여름철 교통사고가 겨울보다 잦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최근 5년간 휴가철 7~8월에 발생한 교통사고 가운데 62%가 ‘졸음운전 등으로 인한 전방주시 태만’이었다. 이어 최 과장은 “여름은 겨울보다 낮 시간이 길어 야외활동이 많고, 휴가철이 끼어 있는 것도 사고율을 높이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여름철 뜨거운 햇살 때문에 생기는 눈부심과 도로의 신기루 현상 등도 사고 유발 원인이 된다. 특히 복사열에 가열된 도로에 빛이 굴절돼 마치 도로 위에 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로 신기루 현상은 마주오는 차량이나 보행자를 못 보게 할 가능성이 크다. 10일 넘게 이어지고 있는 찜통 열대야와 런던올림픽과 같은 수면방해 요인들도 사고율을 높이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경찰 관계자는 “통계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시차가 큰 나라에서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이 벌어질 때 졸음 운전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체조하는 이화학당 출신 며느리 안삼을래”

    “체조하는 이화학당 출신 며느리 안삼을래”

    런던올림픽을 맞아 이화여대가 공식 블로그 ‘따끈따끈 이화통신’에 ‘이화에서 거침없이 하이킥! 이화 역사 속 스포츠’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우리나라 신여성의 스포츠사를 조명했다. 1일 블로그에 따르면 1892년 이화학당 제3대 당장에 취임한 조세핀 오필리아 페인이 본 한국은 유교적 분위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운동을 접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면역력과 체력이 약해 전염병에 쉽게 감염돼 학업을 그만두는 학생들도 많았다. ●1910년대 들어서야 치마 입고 농구 페인 당장은 체력을 기르면 질병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여학생들에게 체조부터 가르쳤다.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 몸동작을 최소화한 체조였다. 그게 문제가 됐다. 이런 사실을 안 시민들 사이에 “이화학당 출신은 며느리로 삼지 않겠다.”는 말이 퍼진 것. 일부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딸을 빼내 집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페인 당장은 고종이 1895년 ‘덕(德)·체(體)·지(知)’ 3대 교육강령을 담은 ‘교육입국조서’를 공표할 때까지 온갖 반대에 직면했다. ●1920년대 항아리 모양 반바지 입고 스케이팅 1910년대에 들어서야 여학생의 운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었다. 이때 비로소 여학생들은 농구, 정구 등 운동다운 운동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 때문에 빨리 달리기는커녕 뛸 때마다 치마가 흘러내려 어려움을 겪었다. 보다 못한 진네트 월터 선생이 어깨에 끈을 단 ‘어깨허리’ 치마를 고안해 냈다. 이 치마는 전국적으로 보급돼 현재의 한복 치마 원형이 됐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에는 반바지가 도입됐다. 1920년대 여학생들은 저고리에 항아리 모양의 반바지를 입고 농구도 하고 스케이트도 탔다. 종아리를 드러내는 게 수치스럽다며 수건으로 다리를 감싸는 여학생도 있었다. 여성의 권위가 확대되면서 1930년대에는 이화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졸업반끼리 정구 시합도 하고, 전국여고보 농구대회도 열렸지만 일제가 방해해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 광복 후인 1945년에야 이화전문학교에 국내 최초로 체육학과가 개설됐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습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선교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떻게 살았을까.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독특한 전시회가 열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8일 개막해 9월 2일까지의 일정으로 서울 합정동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100주년기념교회·담임 이재철 목사) 양화진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양화진 선교사 탁본 및 사진전시회’가 그것. 이 전시회에는 150여점의 양화진 선교사 묘비 탁본과 60여점의 한국 기독교 초창기 모습이 담긴 사진이 들어 있어 흥미롭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구한말 복음의 씨앗을 한국에 뿌린 벽안의 선교사들이 안장된 개신교 성지. 1890년 7월 28일 묻힌 최초의 의료 선교사 존 헤론을 비롯해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 등 145명이 안장돼 있다. 이번 전시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조성 122주년과 100주년기념교회 설립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전시 개막일도 처음 묻힌 존 헤론 선교사의 안장일(7월 28일)을 택했다. 전시회의 주제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이다. 고종의 밀사로 활약한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묘비명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에서 딴 것이다. 전시에는 헐버트 선교사 말고도 가슴 뭉클한 사연과 묘비명 탁본이 수두룩하다. ‘만일 나에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습니다’(한국에 온 지 8개월 만에 26세의 나이로 숨진 의료 선교사 루비 켄드릭),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제중원에서 일했던 헤론 선교사)….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과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폰 에케르트 등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반인 안장자의 탁본도 눈에 띈다. 여기에 1880년대 후반∼1930년대 말에 걸친 선교사들의 각종 행사·모임과 가족 사진, 1900년대 초반 서울 모습을 담은 사진도 선교사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전시회를 기획한 박종호 목사는 “초기에 이 땅에 들어와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희생하다 목숨을 잃었다.”며 “도심의 살찐 닭둘기처럼 편하고 안이하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인의 모범을 다시 생각하고 세우기 위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시회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 국악기 11점 112년만에 귀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 국악기 11점 112년만에 귀환

    지난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때 출품됐다가 프랑스에 기증된 우리 국악기 11점이 112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다. 국립국악원은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 악기박물관이 소장한 거문고와 정악가야금, 해금, 대금, 단소, 양금, 향피리, 세피리, 북 등 11점이 오는 30일 아시아나항공 편으로 한국으로 향한다고 26일 밝혔다. 이 국악기들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고종황제의 지휘 아래 왕실 생활용구와 도자기, 무기류 등과 함께 출품됐으나, 박람회 폐막 후 비용 문제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출품작들과 함께 프랑스에 기증된 것들이다. 11점의 국악기는 다음달 7일부터 10월 7일까지 2개월간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재관과 함께 특별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7월16일부터 18일까지 쓰시마에 다녀왔다. 제주도보다 가까이 있는 이 섬은 과거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풍광이 좋은 고요한 섬으로 남아 있다. 쓰시마 이즈하라(嚴原)의 슈젠지(修善寺)에서 고 황수영 선생께서 발의해 세운 ‘대한인 최익현 순국지비’를 보고는 울적해졌다. 정토종의 이 절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는데, 순국비는 그 납골원 어구에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관광 안내문이나 답사 보고문은 대개 최익현이 슈젠지에서 순국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최익현이 함께 갇힌 문생들에게 치포관을 만들어 쓰라고 권했던 엄수영(嚴戍營)은 아니다. 최익현은 엄수영에 갇혀 있으면서 문생들이 상투를 드러낸 채 염발질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상투를 싸맬 크기의 검은 베 조각을 구해 머리를 덮으라고 했던 것이다. 엄수영은 이즈하라에 있던 병영이었고, 슈젠지는 최익현의 시신이 일단 안치됐던 절이다. 광무 10년인 1906년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의 감옥에 갇혔다. 최익현은 일본의 문물이 크게 흥성한 것을 눈으로 보았고, 일본의 온순한 통역과 보병들을 만나 보고 타국에도 이웃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최익현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단식을 했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쓰시마로 조선의 쌀과 보약을 보내라고 훈령을 내렸다. 일본 병사들이 부산에서 쌀을 가져오자, 최익현은 사흘 만에 일단 단식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울화증과 풍토병 때문에 반 년 뒤에 병사했다. 슈젠지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최익현의 시신은 부산 초량으로 운구됐다. 1907년 1월 11일의 일이다. 나는 최근 ‘국왕의 선물’을 집필할 때 최익현이 고종의 뜻을 따라 대원군을 탄핵해 고종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지식인들과는 소원해져서 의병을 일으킬 때 호응이 낮았던 사실을 적었다. 위정척사의 논리는 같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적 파벌 의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한편 쓰시마 와니우라(鰐浦)의 한국전망대에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 2월 5일 정역과 부역이 탄 배가 조난하면서 112명이 사망한 사실이 밝혀져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쓰시마 도주 소게(宗家)의 문서에서 실려 있는 기록을 근거로 했다면서, 격군은 물론 성씨 없는 많은 종자들의 이름을 추도비 앞의 부비(副碑)에 하나하나 새겨 두었다. 거기에는 112명 이외에 기록에 없으나 시신을 수습한 한 사람의 이름을 추기해 두었다. 그런데 ‘숙종실록’의 숙종 29년(1703) 2월 19일(갑오)의 기록에 “일본 도해선이 침몰하여 역관 한천석 등 113명이 모두 빠져 죽었는데,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을 별도로 거행하게 하였다.”라고 돼 있다. 곧 한천석 등 113명은 계미사행 때 풍기포(?崎浦)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왜인이 우리 측의 지참 물품을 조사하려 하자 한천석 등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크게 일어나 조난을 당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거늘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을 번역한 책에는 계미를 인조 21년 즉 1643년으로 잘못 설명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는 와니우라에 우리 통신사들이 오가며 조난자들을 제사 지낸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추도비가 선 것은 저들의 호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공동체든 공통의 역사 기억을 가질 때 비로소 서로 결속할 수 있다. 역사 교육은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 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국 학교교육에서 역사 과목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게티즈버그의 전몰자 수를 어린 학생들에게 외우게 할 만큼 자잘한 사실까지도 공통의 기억으로 형성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쓰시마는 왜구의 거점이었고, 동아시아 감합무역의 중개 지점이었으며, 교린외교의 흑막 지역이었다. 우리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섬에 대한 역사 기억들을 뚜렷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 명왕성, 위성이 무려 5개… 태양계 9행성 지위 되찾나

    명왕성, 위성이 무려 5개… 태양계 9행성 지위 되찾나

    태양계에는 몇 개의 행성이 있을까. 이 같은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저절로 머릿속에서 ‘수·금·지·화·목·토·천·해’라는 문구를 떠올리며 세어 보게 마련이다. 현재 태양계의 행성은 모두 8개.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이 아직은 어색할 수 있다. 입버릇처럼 ‘해’ 다음에 따라나오던 ‘명’, 곧 명왕성을 애써 지워야하기 때문이다. 태양계의 행성이 9개에서 8개로 줄어든 것은 2006년 8월이었다. 지구와 동등한 자격을 잃고 왜행성(왜소행성·dwarf planet)으로 격하된 명왕성의 현재 공식 명칭은 ‘소행성134340’이다. ●새롭게 조망받는 ‘쫓겨난 행성’ 명왕성이 다시 천문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이 지난 12일 “허블우주망원경이 명왕성 주위를 돌고 있는 또 하나의 위성을 발견했다.”고 밝히면서다. 달보다 작고, 행성 지위에서 쫓겨난 명왕성이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무려 5개의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성·금성은 위성조차 없고, 지구는 하나, 화성은 두 개에 불과한데 말이다. 과학전문 뉴사이언티스트는 “명왕성의 다섯 번째 위성은 명왕성의 지위 격하를 둘러싼 논란에 신선한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죽음의 신 ‘플루토’(Pluto)에서 따온 이름만큼이나 명왕성의 운명은 기구했다. 1930년 2월 18일, 23살의 천문대 조수 클라이드 톰보가 미국 애리조나주의 로웰천문대 망원경을 통해 처음으로 명왕성을 발견했다. 명왕성의 발견은 천문학계의 놀라움이자 기쁨이었다. 천문학자들은 명왕성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행성X’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가 태양계 별의 족보를 정리한 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까지 150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태양계의 별은 태양을 포함해 7개뿐이었다. 천지개벽으로 여겨졌던 지동설조차도 별의 숫자가 아닌 중심축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기는 데 머물렀다. 그러나 망원경의 발달로 1781년 3월 영국의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하면서 이 같은 상식이 무참히 깨졌다.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한 뒤 물리학자들은 뉴턴 물리학을 기반으로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망원경으로 관찰한 천왕성은 뉴턴의 공식을 완벽하게 따르지 않았다. 프랑스의 위르뱅 르베리에는 천왕성 외부에 또 다른 행성이 있어 천왕성의 궤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고 위치를 계산해 1846년 베를린 천문대의 요한 갈레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그날 밤 갈레는 르베리에가 지목한 장소에서 정확히 새로운 행성, 해왕성을 찾아냈다. 명왕성의 발견 역시 해왕성의 궤도가 계산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시작됐다. 1890년 퍼시벌 로웰은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에 천문대를 세우고 해왕성 이외에 천왕성의 궤도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행성 즉, ‘행성X’를 찾고자 했다. 논점을 이탈하는 얘기지만 천문학자이자 외교관, 실업가였던 로웰은 한국 역사에도 등장한다. 1876년 일본을 찾았다가 조선의 첫 미국 사절단의 통역을 맡았다. 오랫동안 한국을 뜻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로웰이 조선을 다녀간 뒤 쓴 책의 제목이다. 로웰은 노월(越)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고종의 사진을 처음으로 찍어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로웰이 예언하고, 그토록 찾고자 했던 행성은 그가 사망한 지 15년 뒤에야 발견됐다. 톰보가 발견한 행성은 11세 소녀 베네티아 버니의 제안에 따라 미지의 영역인 태양계의 끝에 있다는 의미로 플루토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공교롭게도 첫 두 글자 P와 L는 퍼시벌 로웰의 이니셜이기도 하다. ●뉴호라이즌스호의 2015년이 기대되는 이유 명왕성 발견 당시 아마추어 천문학자에 불과했던 톰보는 일생 동안 혜성 하나와 초은하단 하나, 성단 6개, 소행성 750개를 발견했다. 1992년 NASA는 톰보에게 명왕성을 탐사하기 위한 위성 ‘뉴호라이즌스’호 탐사계획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1997년 세상을 떠난 톰보는 결말을 보지 못했다. 대신 2006년 1월 발사된 뉴호라이즌스호에는 톰보의 유골이 실렸다. 톰보는 2015년 7월 명왕성에 도착할 예정이다. 반세기 넘게 태양계의 막내로 인정받았던 명왕성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 태양계에서 소행성을 비롯한 미확인 천체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부터다. 명왕성과 비슷한 크기의 소행성들이 여럿 등장하자 국제천문연맹(IAU)은 이들을 모두 행성으로 인정할 것인지(당시 발견된 것들을 모두 포함하면 태양계의 위성은 12개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아니면 명왕성을 행성에서 제외할 것인지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논의 끝에 2006년 8월 24일 IAU 총회는 ‘태양 주위를 돌아야 한다.’ ‘충분히 큰 질량을 가져 자체 중력 때문에 둥글어야 한다.’ ‘자신의 공전궤도면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강력한 존재여야 한다.’라는 행성의 세 가지 정의를 발표했다. 지름이 지구의 5분의1, 질량이 500분의1에 불과한 명왕성은 앞의 두 조건은 충족하지만 세 번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명왕성의 궤도는 찌그러져 있어 공전 중에 해왕성보다 더 태양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자신의 위성인 카론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 이 때문에 명왕성은 왜행성으로 격하되면서 행성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그해 미국에서는 몰락을 뜻하는 신조어인 ‘그 친구 명왕성 됐어.’(He’s plutoed)라는 문장이 올해의 문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76년간의 믿음, 그것도 과학적 사실이 변하는 것은 그만큼 전 세계에 충격이었다. 명왕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꼬마 행성인 명왕성의 위성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하나가 추가되면서 5개로 늘었고, 명왕성이 에리스와 쌍둥이별이라는 주장도 있다. 뉴사이언티스트는 “뉴호라이즌스호가 명왕성에 가까이 가면 얼마나 많은 위성이 새롭게 밝혀질지 모른다.”면서 “명왕성에 다시 행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새로운 근거가 마련되기를 많은 학자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명왕성은 행성일 당시 유일하게 미국에서 발견한 행성으로, 미국 천문학계의 자존심이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 현대음악 개척 강석희 前서울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 현대음악 개척 강석희 前서울대 교수

    오는 27일 런던올림픽이 열린다. 올림픽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성화가 아닐까. 시곗바늘을 잠시 1988년 서울올림픽 현장으로 돌린다. 9월 17일 저녁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숱한 곳을 돌고 돌아온 성화가 드디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우스 신, 천둥, 번개, 투창대회, 춤 등의 이미지가 컴퓨터와 트럼펫, 여성 보컬 등에 의해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형상화됐다. 그 음악을 타고 성화대에 점화가 되는 순간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전 세계 음악인들이 놀라움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냈다.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 음악을 성화에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 오다’라는 제목에 걸맞게 문명의 다양성을 잘 조화시켜 세계 음악사적으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10월 2일 저녁 성화가 꺼질 때에도 이 같은 광경이 다시 연출됐다. 당시 이 음악을 직접 작곡하고 감독까지 맡았던 주인공이 바로 강석희(77) 전 서울대 교수다. 지금도 그날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세계 음악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1966년 국내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을 작곡했다. 이를 시작으로 30인의 타악기 주자를 위한 ‘예불’, 관현악을 위한 ‘생성69’, 피아노를 위한 ‘정점’ 등의 작품을 연이어 쏟아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음악의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자음악을 비롯한 음악극, 칸타타, 독주곡,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만들어내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아울러 1969년 그가 처음 주도한 ‘판 뮤직 페스티벌’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면서 세계 음악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970년 일본 오사카 국제박람회 때 그의 창작곡이 연주되면서 일본과 유럽의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984년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주최 세계 음악제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부회장에 선출돼 세계 무대에서 확실히 인정받기에 이른다. ●11월 도쿄·내년 4월 루브르박물관서 연주 올해로 그의 음악 인생은 55년째다. 지금까지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모두 80여 곡에 달한다. ‘가야금을 위한 다섯 개의 정경’, 국악 관현악을 위한 ‘취타향’ 등 전통과 접목시킨 것도 있고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 등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보다 유럽과 미국, 남미 등 해외에서 초연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는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솔로, 오케스트라, 오페라, 실내악 등 전통적 형식의 작품들을 형식에 따라 각기 적합한 어법으로 소화해 낸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젊은 청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악보와 여러 음악 관련 책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 까닭을 먼저 물었다. “저는 원래 피아노가 없습니다. 작곡할 때 미리 다 소리를 알고 하기 때문에 피아노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물론 피아노 앞에 앉아 소리를 들어보며 작곡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방법이지요. 제 경우는 창작할 때 고도의 집중력을 가져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곡을 다 쓰고 나서 어떻게 듣느냐고 했더니 “연주하는 무대 객석에서 처음 듣습니다. 연주는 연주가의 몫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요즘에는 어떤 일로 바쁜지 물었다. “작년에 일본으로부터 위촉받은 ‘8중주’가 있는데 8월 말까지 끝내야 합니다. 오는 11월 도쿄에서 첫 연주회가 예정돼 있거든요. ‘8중주’가 끝나면 곧바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를 써야 합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측에서 오래전에 위촉을 받아 놓은 상태거든요. 이 곡은 내년 4월에 루브르박물관에서 연주될 예정입니다.” 이렇듯 그의 곡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찾는다. 최근 브라질 상파울루와 미국 뉴욕에서 그의 오케스트라곡이 연주됐다. 11월에는 일본, 그리고 12월에는 토론토 연주회가 있으니 하반기에만 4차례 해외에서 연주되는 셈이다. “오사카엑스포 당시 오케스트라곡인 ‘생성69’와 실내악 2곡이 연주됐을 때 일본의 신문이나 음악잡지에 크게 게재됐습니다. 얼마 뒤 독일에 갔을 때였지요. 저를 알아보는 음악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는 말이 있잖아요(웃음).”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에게 대중들이 현대음악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음악이 어려우냐 쉬우냐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라면서 “좋은 음악은 분명 감동을 던져 줍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대개 현대음악에는 기립 박수가 없다고들 하지만 1997년 ‘피아노 콘체르토’ 파리 연주 때와 서울 연주 때 등 그동안 기립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작품의 성공적인 연주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함과 자신감으로 이어집니다.”고 말했다. 대중들도 음악을 자주 접하다 보면 그런 행복과 감동을 맛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1년에 2곡 정도 작업… 지금까지 80여곡 탄생 그는 한 해에 2곡 정도 쓴다. 곡을 쓸 때마다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고통을 이겨내며 난해한 수학문제를 풀 듯이 논리적으로 연결해 나가는 작업을 한단다. 마치 건축가가 설계해 놓은 전체의 디자인에 따라 그려 나가듯이. “작곡가가 작곡한다는 것은 순수한 음과의 대결을 의미합니다. 소리는 차갑고 냉정한 것이지요. 그런 소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작곡가가 할 일입니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 구조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흐르는 건축물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어떻게 해서 작곡과 인연을 맺었을까.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탐정과 추리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증조부와 손을 잡고 집을 나섰는데 도착한 곳이 경성공업고등학교 교장 선생 댁이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고종 때 장원급제하고 1900년에 일본 유학을 다녀올 만큼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고 경성공고 교장은 바로 할아버지의 제자였다. 이때 할아버지는 경성공고 교장에게 손자를 부탁했다. “그런 인연으로 나중에 음악과 전혀 관계없는 경성공고에 진학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런데 대개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나면 그 과목을 잘하게 되잖아요. 미술 선생님이 좋으면 미술을 공부했고 음악 선생님이 좋으면 음악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미술과 음악, 수학 등을 좋아했지요. 또 32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는데 그게 나중에 음악에 대한 집중력과 저력을 키우는 원천이 됐습니다.” 그는 음악대학에 진학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종로6가에 살 때였다. 하루는 서울대 음대에 놀러갔다. 우연히 작곡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고 그 모습이 아주 멋있게 다가왔다. 문득 작곡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청음 실력이 남다르다는 얘기를 듣고 있던 터였다. 곧바로 책을 몇 권 읽고 서울대 음대에 응시했다. 당시 47명이 시험을 치렀는데 8명이 합격했다. 이강숙, 백병동, 송해섭, 장광열, 이영욱, 임종영, 장성덕 등이 동기들이다. “1964년 급성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대학 동기 백병동이 ‘전기와 전자’라는 책을 놓고 갔습니다. 평소 관심이 있어서 단숨에 읽었지요. 전자음악이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퇴원하자마자 KBS 스튜디오를 빌렸고 3개월의 작업 끝에 전자음악을 만들어 냈지요.” 이후 전자음악과 컴퓨터를 접목시키는 등 오늘날까지 한국의 현대음악을 개척하며 꾸준히 이끌어 오고 있다. “예술가란 기존에 닦아 놓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험한 정글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모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작곡가 강석희는 국내 첫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 발표 1934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46년 경성공고 토목과에 진학했다가 6·25전쟁 때 경북 안동으로 피난 가서 안동고를 졸업했다. 이 무렵 성가대 활동을 통해 음악을 접했다. 이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6년 동안 정신여고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서양의 현대적 작곡 방식에 관심을 가졌으며 19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을 첫 작품으로 발표했다. 1968년 잠시 한국에 와 있던 윤이상 선생에게 작곡을 배웠다. 1969년 ‘판 음악제’의 모태가 되는 ‘서울 현대음악 비엔날레’를 개최했다. 1970~1971년 독일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배웠다. 이후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음향학자 프란츠 빈켈 등을 사사했다. 1982~1999년 서울대 작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4~1990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부회장을 맡았다. 이후 서울올림픽 폐회식 음악감독(1988), ISCM 서울 세계음악제 집행위원장 및 예술감독(1997), 계명대 특임교수(2000) 등을 지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0), 보관문화훈장(1998), 서울사랑시민상(2004) 등이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 [밥상 108년 5대 변천사] 한국 외식문화 변천사

    꽃미남 배우들이 떼로 나와 화제가 됐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배경은 고려 말에 지어진 성균관이다. 유생들이 200명 넘게 함께 살며 공부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들어 태조가 1398년 이곳에 부속건물을 지었다. 바로 유생들의 기숙사 겸 식당인 명륜당이었다. 집이 아닌 바깥에서 여러 명이 밥을 먹는 공간의 시초이기도 했다. 식당이란 말도 이 무렵의 ‘진사식당’(進士食堂)이란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세기 들어 보부상들이 늘어나면서 주막이 생겼고 5일장이 활기를 띠면서 ‘외식’(外食)도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서양식 식당도 등장했다. 독일 여성 손탁이 서울 정동의 가옥을 고종에게서 하사받아 2층식 호텔(손탁 호텔)로 개조해 그 안에 식당과 귀빈실을 지은 것이다. 외교관들의 단골 모임 장소로 자리 잡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웨스틴조선호텔의 나인스 게이트와 서울역의 그릴도 ‘한국 최초의 양식당’을 표방한다는 사실이다. 나인스 게이트의 전신은 1924년에 문을 연 ‘팜코트’로 외교 공관 성격이 짙었던 손탁호텔과 달리 상업적인 식당이라는 점에서, 1925년 경성역사에 들어선 ‘그릴’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각각 ‘최초’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릴은 정부가 지난해 옛 서울역사를 복원하면서 식당도 옛 이름 그대로 다시 꾸며 ‘추억의 돈가스’를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문 광고를 낸 최초의 식당은 어디일까. 1906년 당시 일간지였던 ‘만세보’에 광고를 실은 요릿집 명월관이다. 국내 프랜차이즈 식당 1호는 1979년에 생긴 난다랑이다. 햄버거집 1호인 롯데리아가 등장한 것도 그해 10월이다. 198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 외식산업은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인 TGI 프라이데이(1991년), 시즐러(1993년), 베니건스(1995년) 등이 잇따라 생겨나면서 외식은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홍익대 앞 등에서 보듯 주방장(셰프)이 저마다의 개성을 요리에 담아 내는 ‘셰프 레스토랑’이 대세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정답:① 난다랑 (1979년) ② 명월관 (1906년 일간지 만세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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