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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박영효(1861~1939·왼쪽)와 유길준(1856~1914·오른쪽). 두 사람은 19세기 말 조선을 대표하는 개화파였다. 두 사람은 모두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주도한 핵심적 인물이었으며 이미 갑오개혁 이전에 구체적이며 명확한 개혁안을 담은 ‘상소문’과 ‘서유견문’을 각각 집필했다. 당시 조선 내의 권력 지형에서 개화관료들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갑오개혁 기간 내내 협력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대립했다. 왜 그들은 협력이 아닌 대립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1883년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남아 유학생활을 하던 유길준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유길준이 포도대장이던 한규설의 집과 민영익의 별장에서 유폐생활을 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민영익이 유길준을 청과 조선의 보수 세력으로부터 보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유길준은 당시 왕실의 비밀창구로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규설의 숨은 자문역이었다. 그는 이 기간에 주로 집필에 전념하여 1889년에 ‘서유견문’을 탈고, 한규설을 통해 고종에게 제출하기도 하였고 몇몇 외교문서를 대신 작성해 주기도 했다. 이후 유길준은 1894년 6월 당시 민씨 척족을 대표하던 민영준에 의해 ‘일본당’을 대표하여 외아문의 주사로 발탁됐다. 민영준은 일본당을 등용하여 일본 측과의 관계를 개선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유길준은 일본 공사관 측에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한편, 공식적으로는 외아문의 주사로서 일본의 개혁 요구와 속방론 철폐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공사관 측에서는 그가 일부러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려 했다고 파악했다. ●군국기무처를 주도한 유길준 1894년 7월 23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불법 점령,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군국기무처를 수립했다. 이때부터 유길준은 갑오개혁의 핵심 브레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격적으로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된 그는 총리대신 김홍집을 직속으로 보좌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일본 측에서는 당시 유길준이 군국기무처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찡그린 얼굴, 냉소적인 말, 기염 높은 논의, 대담하면서도 침착한 태도’로 ‘내정의 신법’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7월부터 10월까지 군국기무처가 진행한 개혁안은 190개에 달했다. 대외적으로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했다. 일본의 군사교관을 초빙하는 한편 일본의 화폐 유통권을 허가하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동학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초기에는 일정 정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농민군이 2차 봉기의 움직임을 보이자 10월 중순부터는 무력탄압에 들어가게 됐다. 그 밖에도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를 분리시켜 왕권을 약화시켰으며 의정부에 권한을 집중시켰다. 사실 이 모두를 유길준이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군국기무처 내에 유길준만큼 근대국가를 직접 체험했거나 체계적인 저술을 남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를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유길준은 이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대원군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유길준은 10월 일본에 파견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의 파견 및 차관 제공을 요청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무쓰 무네미쓰 외상을 만나 ‘세 가지 수치(三恥論)’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혁이 진행됨으로써 조선 국민, 세계 만국 그리고 후대에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는 독립을 보전하고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개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박영효의 귀환 갑신정변 실패 후 박영효는 10년간 일본 망명생활을 하다가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은 박영효를 귀국시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대원군 세력과 개화관료 세력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길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박영효는 개화세력의 대표인물이면서 부마라는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왕실과도 일정한 소통이 가능했고, 망명 중 대원군과도 수차례 접촉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박영효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 후 고종을 알현하여 자신에게 개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원로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이 일본 공사관 측에 항의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단 제물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공사로 파견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노우에는 10월 27일 부임하자마자 대원군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고 조선 왕실의 고문관 또는 ‘외신’(外臣)으로까지 불리며 왕실과 손을 잡았다. 이와 함께 박영효의 기용을 요청했고 결국 12월 17일 김홍집-박영효 연립정부가 출범하게 됐다. 이때 박영효는 내무대신에 임명됐다. 박영효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조선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박영효는 이 시기 개혁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추구한 것은 동학 농민군에 대한 확고한 진압과 일본을 모델로 한 개혁의 추진이었다. 박영효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의 처형에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확고하게 하려고 종속관계의 상징물을 파괴하고 태극기를 사용하며 공문서에 한글을 사용하게 했고 독립기념일을 제정했다. 그는 이때 내무대신 직권으로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자를 역적으로 처벌하는 건’을 ‘내무대신령’ 1호를 통해 발표했다. 또한, 그는 지방제도 개편에 심혈을 기울여,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와 331개의 군으로 개편했다. 아울러 경무청관제를 발표하여 무장경찰을 육성하고 상비군을 육성하려 했다. 그런데 박영효는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일본 측의 기대와는 달리 김홍집을 ‘줏대 없는 소인배’라며 내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리대신이 될 생각으로 권력투쟁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박영효는 자신의 세력을 지방관은 물론, 군부와 경찰의 요직에 임명했다. 더욱이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맞서 일정하게 조선의 국익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결국, 박영효는 김홍집을 5월 17일에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총리대신의 자리는 박정양에게 돌아갔다. 다만, 박영효는 내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왜 대립하였을까? 박영효와 유길준. 어찌 보면 함께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해 보일 법한 이들은 실제로는 처음부터 첨예하게 대립했다. 윤치호의 당시 일기에 보면, 유길준은 철저하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박영효와 전면적인 대립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그 사상적 이유는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에서 찾을 수 있다. 유길준은 ‘개화의 등급’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을 ‘허명의 개화’를 주장하는 자들로 비판하면서 ‘실상개화’를 제시한다. 그는 허명개화를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남이 잘된 모습을 보면 부러워서 혹은 두려워서 덮어놓고 시행하자고 주장하여 비용은 많이 들이면서 실용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아무런 분별 없이 외국의 것이라면 다 좋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외국을 칭찬하는 나머지 자기 나라를 업신여기는 폐단까지 있는데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개화의 죄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개화하는 데 있어서 폐해는 지나친 것이 모자란 자보다 더욱 심하다고 말하면서 “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속에 주견도 없는 개화의 병신”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둘 사이의 정치적 차이도 존재했다. 유길준은 민영익과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그를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데려가 미국에 유학까지 시켜 준 사람 또한 민영익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민영익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길준 자신이 갑신정변 후 미국에서 보낸 편지 안에서도 그는 “그들이 군왕에게 충성하고 국가에 진실할 때에는 내 친구들이었으나 그들은 역적이고 나라에 큰 해를 끼쳤기 때문에 이제는 나의 큰 원수”라고 써서 보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유길준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1894년 박영효가 다시 등장했을 때 그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길준이 박영효 세력을 ‘개화의 병신’으로 비판한 부분은 1889년에는 없던 내용으로 6년 뒤인 1895년 출간 당시에 새로 써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유길준은 박영효가 개혁을 주도하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개혁관료들의 결집이 절실하던 시절에 치열하게 대립함으로써 결국 모두 몰락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파란만장 宮의 역사 현대적 언어로 되새기다

    파란만장 宮의 역사 현대적 언어로 되새기다

    하지훈 작가는 덕홍전 안에다 울룩불룩 재밌는 모양의 의자들을 대거 설치해뒀다. 크롬으로 마무리를 해서 표면은 번쩍번쩍한다. 주변 사물들이 모두 반사되는데 울룩불룩하다 보니 주변 사물들이 모두 다 변형됐다. 물어 보니 의자란다. 에이 저게 무슨 의자야 싶은데 실제 앉아 보면 기댈 구석이 많아서 그런지 생각 이상으로 편안하다. 작가는 덕홍전이라는 공간에 주목했다. 덕홍전의 원래 이름은 경효전. 이 공간은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셔놨던 곳이다. 한 나라의 지어미가 죽어 머문 곳이니 엄숙하고 신성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1912년 이 공간을 외부인 접견 장소로 바꿨다.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시끄러운 공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당연히 내부도 화려하게 바뀌었다. 이 묘한 불편함을 작가가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변을 왜곡하지만 아름답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쉬려니 금세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만 같다. 뒤틀린 역사 위에 앉아 쉬는 탓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2월 2일까지 덕수궁 전각 곳곳에 현대미술작품들을 배치해놓는 ‘덕수궁 프로젝트’를 연다.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등 덕수궁의 6개 전각과 후원에다 서도호, 하지훈, 이수경, 김영석, 정서영, 성기완, 류재하, 최승훈·박선민 등 12팀의 작가가 작품들을 설치했다. 서울 도심 궁궐을 두고 늘 싸우는 것 중의 하나가 보존이냐 활용이냐이다. 보존 쪽에서는 금이야 옥이야 건물이 어찌 될까봐 벌벌 떨고, 활용 쪽에서는 목조 건물은 사람 손길과 발길이 닿아야 좋다고 주장한다. 그러던 와중에 고관대작들끼리 소중한 문화재를 끼고 파티를 벌였네 어쩌네 하는 고발 뉴스가 번쩍 뜬다. 이번 전시는 “그렇다면, 이렇게 활용해보면 어떨까요?”라고 묻는 전시인 셈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 공간이 품은 역사성을 작가들이 어떻게 현대적 언어로 풀어내느냐이다. 가령 함녕전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고종이 황제 자리를 빼앗긴 뒤 승하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 공간을 맡은 서도호 작가는 ‘집의 작가’답게 깨끗하게 청소하고 도배를 새로 하는 등 고스란히 고종의 체온을 되살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고종이 잘 때마다 항상 보료 3채를 깔았다는 사실에 맞춰 보료도 제작했다. 말년을 맞은 고종의 숨결을 고스란히 되새기게 한다. 석어당에는 이수경 작가가 LED 조명으로 눈물 조각을 설치해뒀다. 말 그대로 물방울 다이아몬드 모양의 거대한 눈물 한 방울인데 요모조모 보다보면 환생을 약속하는 연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묘한 느낌을 준다. 석어당은 임진왜란으로 피란 다녀야 했던 선조가 머물다 숨진 곳이고, 순종이 아내를 잃은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의 반대편에는 김영석 작가가 덕혜 옹주의 한 시절을 고스란히 복원해뒀다.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수집해 온 것들로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정신병을 얻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던 옹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최승훈·박선민 팀은 덕수궁 마당 한켠에서 ‘결정(結晶) vs 결정(決定)’이란 작품을 선보인다. 원래 덕수궁은 지금보다 3배나 컸으나 차츰 줄어들었다는 점에 착안했다. 한순간 응고했던 결정이 그 당시 그런 상태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힘 앞에 차츰차츰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크리스털 블록을 펼치고 쌓고 허무는 구조를 통해 선보인다. 설치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각종 아카이브 자료 등 50여 점은 10월 28일까지 덕수궁미술관 내에서 따로 전시된다. 덕수궁 입장료는 1000원. 덕수궁미술관 입장료는 2000원. 초중고생은 무료. (02)2188-60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1910년 9월 8일 밤, 시문(詩文)으로 인근에 조금 알려진 한 시골 선비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 평생의 마지막 시가 될 글을 써 내려갔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 시 넉 수를 다 쓴 그는 다시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후 소주에 아편을 타 마시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지조 굽히라는 세상에 날 세운 ‘황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천품(天品)을 타고 났으나, 재주와 뜻을 펼치기에는 출생시대, 출생지, 가문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벼슬을 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어렵고, 설령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고위직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된 시대가 이미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이 없었겠는가마는 세상은 그에게 꿈을 접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현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은 나이 30이 넘어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였다. 1888년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말로만 듣던 과거(科擧) 부정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세도가 자제들이 글 써주는 사람과 글씨 써주는 사람을 다 따로 고용하여 대리시험을 치는 관행은 더 이상 비난거리도 아니었다. 돈과 연줄 없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이는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절망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마음이 통하는 명사(名士)들을 사귀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 위안으로 삼고 낙향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얼마 전에 구례로 집을 옮겼던 그는,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상, 선비에게 지조를 기르라고 당부하는 대신 지조를 굽히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었다. 대원군도, 왕후와 그 친척들도,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라는 옛 어부의 말대로 처신했다. 그의 귀에는 전기나 기차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들이 세상을 맑게 바꿔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애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를 버렸던 나라이자 그가 경멸하고 증오했던 더러운 자들이 지배한 나라였지만, 그는 이 뒤에 그를 기다릴 세상은 더 더러운 세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식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에 앞장서는 세상에서, 그런 자들이 계속 위세를 부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구는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지시성인불시충(只是成仁不是忠)”(일찍이 나라를 위한 공이 없었으니, 내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이었다. ●日·러·美 연줄 없던 이완용 처세로 부귀 누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에겐 남은 생애를 부귀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완용은 황현보다 3년 늦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었으나 가문은 황현 집안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의 일생도 황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1세 때,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먼 친척 아저씨인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양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서형(庶兄)인 이윤용(李允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82년, 당시 이조판서이던 양부 덕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규장각 대교, 홍문관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886년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육영공원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였다. 때는 갑신정변 2년 뒤였고, 조야(朝野)에 개화파에 대한 적개심이 넘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모험일 수도 있는 육영공원 입학을 ‘선택’했다. 양부가 비록 고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왕의 뜻이 있는 곳,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의 출세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덕에, 그는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공사 대리로 두 차례나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국내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1890년 귀국 후 관계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모친상을 당했다. 일본군을 배경으로 수립된 개화파 내각은 그에게 입각(入閣)을 제의했으나, 그는 모친상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지만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실각했다. 친일 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그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정치적 도박에 가담했다.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내면서 한때 독립협회 회장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애초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넘어 내심으로 ‘군민동치’(君民同治)와 ‘입헌정체’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그는 독립협회를 떠났다. 러시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국왕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한국을 자기 세력권 안에 넣으려 했다. 미국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교육, 군사, 경제 각 부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의 침탈에 반발했으며, 러시아 공사는 그를 증오했다. 고종은 그를 전라도관찰사로 좌천시켜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자리조차 오래 지킬 수 없었다.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그를 핑계로 낙향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이완용은 또 한 차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본도, 러시아도 그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배경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일본 편이었고,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미국의 선택을 따랐다. 주지하듯이, 을사늑약 이후의 그는 ‘친일 매국노’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한일병합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연줄·기회 강조 現사회, 제2이완용 키우나 대형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몇 권 집어들어 훑어 보았다.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다들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따위를 가르치는 책은 없다.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다들 이완용을 본받으려 드는 시대다. 물론 1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가, 모두에게 계속 안전할 수 있을까? 전우용(역사학자)
  • 고종석 ‘화학적 거세’ 청구키로

    고종석 ‘화학적 거세’ 청구키로

    검찰이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 고종석(23)씨에 대해 전자 위치추적 장치(전자발찌) 부착과 성충동 약물치료(화학적 거세)를 청구하기로 한 것으로 13일 확인됐다. 광주지검 형사 2부(전강진 부장검사)는 재범 위험성과 성도착증 성향 등을 고려해 화학적 거세 적용 여부 등을 판단하기 위해 사전 조사를 벌이고 있다. 검찰은 또 1차 구속기간(10일)이 14일 만료됨에 따라 구속기간을 한 차례 연장해 고씨의 범행 경위와 성향 등을 분석하기로 했다. 검찰은 경찰로부터 고씨를 송치받은 뒤 신경정신과 전문의, 범죄심리학 교수, 대검찰청 진술분석 전문가 등과 차례로 면담 조사를 했다. 고씨는 지난달 30일 오전 1시 45분쯤 나주시 영산길 집에서 잠자고 있던 A(7)양을 이불째 납치해 인근 다리 아래에서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하려 한 혐의로 구속됐다. 광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선택! 역사를 갈랐다] (26)‘개화파’ 김옥균 vs ‘그를 죽인’ 홍종우

    ●혁명가 인정받는 ‘김옥균’ vs 테러리스트 된 ‘홍종우’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역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북한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으로 변경했다. 한국에서 김옥균(金玉均·1851~1894)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봉건제 청산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전개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일본이라는 외세 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은 인정하는 편이다. 반면 이와 대비시켜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홍종우(洪鍾宇· 1850~1913)는 대다수 사람들이 갑신정변 주도 인물인 김옥균 암살범이자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다. 당연히 그 평가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갑신정변’ 3일천하… 실패한 비운의 개화파 김옥균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반역자로 처단된 고균(古筠) 김옥균. 권력과 세력을 잃고 망명지를 떠돌다가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능욕을 입은 비운의 개화파….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의 주체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군부대신 등 고위관료를 역임한 윤웅렬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가지로 꼽았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서 정권의 핵심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 회고담에서 실패 원인을 ‘민중의 무지몰각’에 돌리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후일 김옥균은 일본을 ‘이용’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용당한 것이고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봉건제도 청산을 위한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게는 관대하거나 이를 생각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와 친한 일본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 도야마(頭山滿), 고도(後藤像二郞) 등 ‘대아시아주의자’이자 한국 침략을 적극 옹호한 인물 일색이었다. 말년의 김옥균은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흥아지의견’(興亞之意見)에 기초해 이를 설명했는데, 그 골자는 ‘삼국제휴 서력방알’(三國提携 西力防?)을 통해 아시아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제창하게 된 것도 정신적 스승인 후쿠자와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흥아지의견’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서 과연 김옥균이 후쿠자와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삼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평화롭게 공존공생하자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4년 러일전쟁 직후 그동안 일본에 망명했던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모두 귀국하여 복권되고 식민지 시기 대다수는 친일의 거두로서 식민지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에게는 유신(維新)을 처음 제창한 사람이고 문명의 선각자로서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융희 4년(1910) 7월 27일에 추증되었다. 김옥균 추종 세력은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이전 활동을 과장·미화하였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와 조선 민중에 대한 무제한의 통제 명분을 김옥균이 주장한 삼화주의에서 찾았다. 김옥균의 삼화주의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숱하게 왜곡되어 갔다. ●홍종우, 실정 맞는 근대화 추구… 佛르피가로도 ‘개화인사’ 인정 경기도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86년 3월부터 프랑스행을 결심하여 1888년 나가사키와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어 1890년 12월 파리로 들어갔다. 그는 프랑스 유학 후 거의 2년 동안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홍종우는 프랑스어 번역본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기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존경과 애정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홍종우의 정체관이 그간의 시대 담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척사위정론자들과 다른 것이었으며, 민족 주체성과 민족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화 지상주의론자와도 구분되었다. 1893년 귀국을 결심한 그는 그해 12월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종의 밀명으로 도쿄에 온 이일직과 만났고, 그로부터 김옥균 암살을 제의받게 된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세계 대세와 동양 정세를 논하는 한편 그의 상하이행을 유도했고 상하이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은 결국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는 아관파천 이후부터다. 그는 국왕을 황제로, 세자를 황태자로 높이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건원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과 황제 즉위식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홍종우는 대한제국 성립 당시 비서원승으로 활약한 이래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제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대외적으로 열강의 조선 이권 침탈에 대한 절대불가론으로, 내적으로는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내 상인의 몰락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론인 보호주의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한러은행 설치 반대, 외상의 도성 개잔(開棧)과 내지행상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 및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어업 및 홍삼 사매(私買) 반대, 방곡실시, 광무연호 주조, 상권보호 등이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한 개혁론은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불평등 조계 개정, 만국공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근대적 지도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정부의 자립과 과감한 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자 그는 ‘개화당의 영수’ ‘조선독립의 혁명가’ 김옥균 암살범으로 다시 각인되었고, 근대화를 저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실상부한 개화인사였다. 프랑스 저명 신문 르피가로지도 그렇게 보고 있다. 잘 알다시피 홍종우는 프랑스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자 많은 부분 우리 실정에 맞는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그가 수구파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고 그 역시 수구적인 언급을 한 바 없다. ●편견 지우고 입체적으로 보아야 김옥균과 홍종우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같다 하더라도 양자 간에는 분명한 대립각을 갖고 있었다.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인식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서구에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선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현실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부재 상태에서 문화적 전통과 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 및 일본의 제도를 무차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나라의 발전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김옥균처럼 문명개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제국주의 이웃 강국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방식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만약 그럴 경우에는 자칫 국가를 상실할 위험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갑신정변 당시와 지금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조재곤(동국대학교 연구교수)
  • 고종석, 검찰에 송치

    검찰이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 고종석(23)의 신병을 넘겨받아 영상녹화 조사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광주지검 형사2부(부장 전강진)는 이날 경찰로부터 고종석을 인계받아 고종석의 자백이 객관적인 상황과 일치하는지, 정확한 범행 경위, 여죄 유무 등 전반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검찰은 또 범죄심리 전문가, 의료인의 도움을 얻어 성도착증 여부 등을 판단할 방침이다. 광주교도소는 고종석의 불안정한 심리상태 등을 감안해 다른 수용자와 함께 지내도록 할 방침이다. 이 교도소에는 2010년 서울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초등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김수철도 무기수로 복역하고 있다. 한편 경찰이 고종석을 송치하는 과정에서 취재진을 따돌리기 위해 뒷문을 이용해 몰래 빼내 과잉보호라는 질타를 받고 있다. 광주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나주성폭행 이후] 제2고종석 거리 누비는데…경찰들 ‘대낮 술판’

    잇따른 성폭행 범죄 등으로 경찰이 방범 비상령을 선포한 가운데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관들이 체육대회에 참석해 대낮에 술판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4일 서울경찰청 등에 따르면 서울청 소속 기동단 2개 중대 소속 전·의경 600여명과 경찰관 100여명이 참석한 체육대회가 이날 서울 목동 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복 차림의 일부 경찰관들이 준비해 온 막걸리와 맥주 등을 나눠 마셨다. 오후 축구경기를 재개했지만 관람석 곳곳에서 벌어진 술자리는 체육대회가 끝날 무렵인 오후 늦게까지 계속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청 관계자는 “전·의경 휴무일에 맞춰 평일 체육대회를 열었고 비번인 직원들만 술을 마셨다.”고 해명했다. 한편 전남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이명호 나주경찰서장이 용의자 추적이 한창일 때 축구를 한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이 서장은 지난달 30일 오후 6시 30분쯤 나주 송월동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지역 시민단체와 경찰관들의 친선 운동경기에 참여해 10분 가량 축구를 했다. 하지만 이 서장이 축구를 할 당시 사건 피해자 A양은 수술을 앞뒀으며, 경찰은 용의자 고종석(23)을 추적하고 있었다. 이 서장은 “피치 못해 방문해 잠깐 경기에 뛰었지만 곧바로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수사에는 차질이 없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아동 성범죄 무방비 도시] ③ 실천 없는 대책

    [아동 성범죄 무방비 도시] ③ 실천 없는 대책

    지난달 30일 A(7)양을 처음 본 전남 나주병원 외과의사는 깜짝 놀랐다. 분명 복막염이라고 들었는데 아이는 한눈에 봐도 그게 아니었다. 왼쪽 뺨엔 물린 자국이 있었고, 등과 목에 붉게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하혈도 많이 한 상태였다. 의사는 전남대병원으로 옮기자고 권유했지만, 딸이 당한 범죄에 놀라 있던 부모는 불안해서 움직일 수 없다고 버텼다. 어른들 간에 고성이 오가는 사이 A양은 진통제도 없이 고통에 떨었다. 아동 성폭력 전문기관인 전남해바라기센터에서 나온 상담원은 불안에 떨고 있는 A양과 가족을 보호할 노하우가 부족했다. 정신적 충격을 입은 피해 아동에 대한 초기 대응 차원에서 소아정신과 의사를 불러야 했다는 지적에도, 어머니를 왜 진정시키지 않았느냐는 질타에도 상담원은 아무렇지 않게 “왜요?”라고만 했다. 4년 전 조두순 사건 때 ‘나영이’(가명·당시 8세)를 치료했던 신의진(소아정신과 전문의) 새누리당 의원이 전한 나주 성폭행 피해 아동의 초기 치료상황이다. 국내 대표적인 아동성폭력 전문센터조차 이럴진대 다른 곳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해바라기센터는 2008년 경기 안양 초등생 살인 사건이 터진 뒤 80억원을 들여 기존 3곳에서 전국 15곳(해바라기여성·아동센터 포함)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겉만 번지르르했지 알맹이는 빈약했다. 신 의원은 “정부에서 전문성을 갖추지 않고 보여 주기식으로 만들다 보니 서비스 수준이 하향평준화됐고 결국 이런 사태가 왔다.”고 지적했다. 잔혹한 범죄로 여론이 들끓을 때마다 정부는 발빠르게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해바라기센터의 사례가 말해 주듯 실천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의 종합대책보다는 정치권과 여론에 떠밀려 전시형으로 일관해 온 탓이다. ‘나주 고종석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경찰은 지난 3일 성폭력·강력범죄 종합대책을 내놨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경찰청을 기습 방문했기 때문에 이뤄진 조치라는 시각이 많다. 새달 3일까지 전국 경찰관서에 성폭력 예방전담조직을 신설하고, 우범자 전담관리 인력 793명도 충원하는 게 골자다. 아동포르노대책팀, 성폭력수사 특별팀도 새로 만들 방침이다. 그러나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근무 강도만 높였을 뿐 인력 증원이나 예산배정 등 근본적인 조치가 없다는 것이다. 경찰이 자율방범대·아동안전지킴이·학교보안관 등 협조 가능한 단체들과 합동 순찰에 나서는 것이나 지하철역·아파트 등 자체 방범시스템을 둔 곳과 비상연락망을 구축하기로 한 것도 현장 인력이 부족한 데서 나온 고육책이라는 지적이 많다. 올 들어서 이미 학교폭력전담팀, 주폭(酒暴·음주폭력)전담팀이 생긴 마당에 성폭력 전담팀까지 만든다는 계획에 일선 경찰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다. 한 일선 형사는 “추가적인 인력·예산 지원 없이 내놓은 ‘묻지마 대응책’ 때문에 다른 부분에서 치안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야 정치권의 책임도 크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성폭력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경찰관직무집행법 등 민생치안 강화를 위해 필수적인 개정 법률안들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전자발찌 부착자의 신상을 경찰과 보호관찰소가 긴밀히 공유해 우범자를 철저히 관리하겠다는 계획도 국회 때문에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있다. 김정은·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나주성폭행 이후] “성폭행범 고종석, 美선 최고 종신형 선고”

    [나주성폭행 이후] “성폭행범 고종석, 美선 최고 종신형 선고”

    “미국에서는 12세 이하 아동 성범죄에 대해 징역 25년에서 종신형까지 선고합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방검찰청 박향헌(49·여) 검사는 ‘나주 고종석 사건’이 만약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범인 고종석(23)에게 최소 25년, 경우에 따라서는 종신형까지도 선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 검사는 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를 방문해 기자 간담회를 갖고 최근 잇따라 발생한 성범죄에 대해 언급하며 강력한 처벌과 신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 19년간 검사 생활을 하면서 아동·청소년 성범죄 사건을 주로 다뤄온 전문가다. 박 검사는 “미국에선 아동 성범죄의 경우 납치, 상해가 동반되면 초범이라도 25년에서 종신형까지 선고된다.”면서 “삼진아웃법을 도입해 성범죄를 세 번 이상 저질러도 25년~종신형 양형이 적용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형을 마친 성범죄자는 출소 후에도 평생 자신의 주거지나 직업 등을 경찰에 등록해야 한다.”면서 “보호관찰은 물론이고 전자발찌도 착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성범죄로 형량이 정해지면 무조건 형기의 85% 이상을 채워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박 검사는 “미국은 성폭행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직접 물질적·정신적 피해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효과적인 예방책은 제보인데 미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성범죄라 하더라도 경찰에게 알려 어떻게든 조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범행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후 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박 검사는 “성폭행 사건은 가해자의 잘못된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면서 “피해자가 성폭행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대응하지 못하면 더 큰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인기기자 ikik@seoul.co.kr
  • [아동 성범죄 무방비 도시] (2)‘포르노 천국’ 대한민국

    [아동 성범죄 무방비 도시] (2)‘포르노 천국’ 대한민국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형사님도 포르노 보면 더 자극적인 것 원하잖아요.” 2007년 12월 경기 안양에서 초교생인 여아 2명을 성폭행·살해한 범인 정성현(43)은 검거 뒤 범행을 실토하며 이렇게 말했다. 압수한 그의 컴퓨터 속 ‘로리 사진’(소아애호증을 뜻하는 로리타 콤플렉스에서 따온 말로 추정됨) 폴더에는 미성년 나체 사진 441개와 포르노 780여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정성현이 내뱉은 인면수심의 발언 뒤에는 포르노에 중독돼 뒤틀린 성범죄자들의 비뚤어진 심리가 깔려 있다. 이웅혁 경찰대 교수는 “아동·청소년 성범죄자 3명 중 1명은 범행 직전 아동 음란물을 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주 여아 성폭행 사건의 범인 고종석(23)이 “평소 어린이가 등장하는 일본 포르노물을 즐겨 봤다.”고 진술하면서 아동 음란물이 성범죄를 부추기는 촉매제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최근 국내 주요 웹하드 사이트 10개를 조사한 결과 1분마다 한 건 이상 음란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인터넷 다운로드의 35%가 음란물이며 학계에서는 한 해 국내에서 내려받는 아동 포르노가 400만편이 넘는다는 추정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등 정보기술(IT) 기기의 진화로 포르노물은 청소년들의 손바닥 위까지 올라왔다. 전문가들은 포르노물에 중독 수준으로 빠져들면 왜곡된 성관념과 범죄관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외국 연구 결과 음란물을 많이 시청한 집단은 ‘아이나 여성은 성폭행당하기를 원한다’거나 ‘성폭행의 책임은 피해 여성에게 더 많다’는 등의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음란물 몇 편 본다고 당장 성범죄 의지가 생기지는 않지만 포르노를 지속적으로 시청하면 잠재적 성범죄자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범죄욕이 발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성범죄자 중 소아애호증 등 성도착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라면서 “성인 여성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남성이 아동 포르노를 보면서 성적 호기심을 키워 아동 성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970년대 30여명의 미국 여성을 연쇄 성폭행·살해했던 살인마 테드 번디는 범행 수법 대부분을 가학적 포르노에서 배웠다며 “성폭행과 연쇄살인을 막을 최상의 대안은 포르노 규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제는 성장기의 아동·청소년들이 포르노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점이다. 여성가족부가 올해 발표한 ‘청소년 유해환경 접촉 종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초·중·고교생들은 대부분 ‘성인용 매체를 쉽게 볼 수 있다.’고 생각(5점 만점에 3.87점)하고 있었다. 고교생 백모(17·서울 사당동)군은 “일대일 파일 공유 사이트에 검색어만 입력하면 포르노 수백 편이 뜬다. 요즘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쉽게 볼 수 있다.”면서 “‘야동’(야한 동영상)을 어디서 내려받느냐고 묻는 어른도 있다.”고 전했다. 김봉한 청주대 교수(컴퓨터정보공학) 등이 최근 고교생 15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사이버 음란물 접촉 경험이 있는 학생이 성범죄를 저지른 비율(25.4%)이 그렇지 않은 학생(5.4%)보다 4배 이상 높았다. 특히 고종석처럼 폭력성 강한 게임에 빠지면 충동적 욕구를 억누르지 못해 내면의 폭력성을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2010년에는 미 명문대를 중퇴한 20대 청년이 “게임 중 집 밖으로 나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행인을 묻지마 살해하는 사건이 서울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유대근·이범수기자 dynamic@seoul.co.kr
  • 나주 초등생, 급성 스트레스 반응

    전남 나주 성폭행 피해 초등생 A(7)양은 직장 근육층과 주위 괄약근층 파열로 인공항문 시술과 주요 부분 봉합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는 장내 가스가 배출되지 않아 물만 섭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양은 또 극심한 정신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남대병원은 3일 브리핑을 통해 “A양은 현재 불안 등 급성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1차 수술 후 장내 가스가 배출되지 않아 음식물 대신 영양 주사를 투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진은 이어 “재수술은 아직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1차 수술을 받은 상처 부위에 감염 증세가 나타날 경우 재수술을 시행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감염 여부는 대체적으로 1차 수술 후 1~2주 정도 관찰 후 판단할 수 있다고 의료진은 전했다. 의료진은 “A양이 조만간 유동식을 섭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현재 외부로 노출된 인공항문 제거와 복원 수술은 3~6개월 이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료진은 또 “A양이 입원 후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나 향후 경과에 따라 증상의 변화가 있을 수 있고, 2차적인 정신적 피해에 노출될 위험성이 큰 만큼 소아정신과 치료를 병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A양의 입원 기간은 재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2주 정도 걸릴 것으로 병원 측은 내다봤다. 한편 나주 경찰서는 이미 구속된 범인 고종석(23)에 대한 수사자료와 신병을 5일 중 검찰에 넘기기로 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나주 ‘제2의 조두순 사건’] 고종석 ‘죄목 7개’ 무기징역 가능성

    집에서 곤히 자던 초등학생을 이불째 싸안고 가 다리 밑에서 성폭행한 고종석(23)에 대한 실형 선고가 당연시되는 가운데 양형 정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광주지법 민사 19단독 장찬수 당직판사는 2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 총 7개 법령 위반 혐의로 고씨에 대해 경찰이 신청한 구속 영장을 신속히 발부했다.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강간 등 살인, 강간 등 상해까지 3개의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은 물론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강간), 야간 주거 침입 절도, 미성년자 약취, 주거 침입 등 4개 법령이 포함됐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7조에는 ‘13세 미만의 여자를 강간한 사람은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다. 법조계에서는 죄목이 7개나 돼 무기징역이나 45년 징역형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현행 형법에는 유기징역 또는 유기금고에 대해 형을 가중할 때에는 최대 50년까지로 한다고 돼 있다. 감형될 여지는 거의 없다. 7살인 피해자를 성폭행했고 대장 파열 등 상해를 입혔다. 피해자를 비 오는 다리 밑에 내버려 두고 태연하게 찜질방에서 잠을 잔 점도 극악하다. 고종석은 당시 술은 마셨지만 심신 미약 상태는 아니었다. 성범죄자에 대해 엄벌을 촉구하는 사회 분위기와 뜨거운 국민적 관심도 양형을 무겁게 하는 요인이다. 법원은 2008년 나영이(당시 8·가명)를 성폭행해 영구장애를 입힌 조두순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해 ‘솜방망이 처벌’이란 비판에 시달렸다. 이후 아동·장애인 대상 성범죄 양형이 세 차례 상향 조절됐다. 유대근·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나주 ‘제2의 조두순 사건’] 엉뚱한 사람을 성폭행범으로 보도

    [나주 ‘제2의 조두순 사건’] 엉뚱한 사람을 성폭행범으로 보도

    조선일보가 전남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사건과 무관한 사람의 사진을 성폭행 피의자의 사진이라며 신문 1면에 실었다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이에 대해 과열된 특종 경쟁이 빚은 참사라는 지적과 함께 확인되지 않은 사진을 실은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다. 2일 신문업계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한 남성의 사진을 ‘범인 고종석의 얼굴’이라며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않은 채 지난 1일자 1면에 게재했다. 기사가 나간 뒤 한 누리꾼이 ‘친구의 사진이 잘못 도용됐다.’며 항의하는 글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렸다. 조선일보는 그제야 확인 작업에 들어가 이날 밤 자사의 인터넷 사이트 조선닷컴에서 해당 사진을 삭제했고 ‘바로잡습니다’란 글을 통해 사과했다. 조선일보 측은 “고종석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 주민 등 10여명으로부터 (사진 속 인물이) ‘고종석이 맞다’는 증언을 확보했다.”면서 “그 이후에 서울 지역에 배달된 일부 최종판에 게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조선일보의 사과에도 후폭풍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일보 등 이른바 ‘메이저’ 신문들이 반인륜적 흉악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겠다고 밝힌 뒤 터진 사고여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번 오보 사태의 피해자는 개그맨 지망생인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에서도 누리꾼들의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트위터(@histopian)를 통해 “이것은 오보가 아니라 허위 사실 날조에 의한 인격 살인”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jooseok roh(**@dannyroh)는 “경찰은 흉악범 사진을 언론에 제공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나주 성폭행범, 눈뜨자마자 한다는 말이…

    나주 성폭행범, 눈뜨자마자 한다는 말이…

    전남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의 범인 고종석(23)이 구속 수감됐다.  광주지법 민사 19단독 장찬수 당직판사는 2일 고종석에게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 혐의 외에도 살인 혐의 등 7개 혐의를 적용해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영장을 발부받은 뒤 곧바로 수감했다. 성폭력범은 살해 의도가 있을 경우 살인 혐의가 적용된다. 재판부는 “범죄 사실이 충분히 소명됐고 사안의 중대성, 고종석의 범행 후 행적 등을 종합하면 도망갈 우려도 있다.”며 구속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오후 3시부터 30분간 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오후 4시쯤 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고종석에게 살인 혐의,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강간 등 살인·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강간 등 상해) 위반, 아동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강간) 위반, 야간 주거침입 절도,미성년자 약취, 주거침입 등 7개 혐의를 적용했다. 고종석은 법정에 들어가기 전 심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종석은 지난달 30일 오전 1시 30분쯤 나주시 한 상가형 주택에서 잠을 자는 A(7·초등교 1년)양을 이불째 납치해 300m가량 떨어진 영산대교 밑에서 성폭행한 뒤 목졸라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고종석은 성폭행 직후 A양의 집에서 100m가량 떨어진 슈퍼마켓에 침입해 현금 20만원과 담배 3보루를 훔친 혐의도 받고 있다.  한편 지난 1일 현장 검증을 마친 고종석은 2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경찰에게 일정을 묻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광주 서부경찰서에 따르면 고종석은 전날 오후 10시 잠들어 이날 오전 7시에 잠에서 깼다. 그는 경찰관에게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요?”라고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석은 별다른 기척 없이 잠을 자던 전날과 달리 현장 검증을 마쳐서인지 자주 뒤척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고종석이 오전 8시쯤 두부국, 숙주나물, 김치, 콩을 반찬으로 한 식사를 마쳤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아동 성범죄 무방비 도시] ① 어쩌다 이 지경까지…

    [아동 성범죄 무방비 도시] ① 어쩌다 이 지경까지…

    “어린 여자와 성행위를 하고 싶었다.” 지난 1일 이명호 전남 나주경찰서장은 나주 A(7·초등 1년)양 납치·성폭행 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 브리핑을 통해 범인 고종석(23)의 범행 동기를 이렇게 규정했다. 평소 아동이 나오는 일본 포르노물을 보면서 어린 여자와 성행위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특히 술에 취하면 이런 충동을 더 강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결국 고종석의 범행은 모텔을 전전하며 인터넷을 통해 일본 야동을 탐닉한 결과였다. 범죄심리학자인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아동이 등장하는 포르노물을 보면서 오랫동안 성적 환상을 길러 온 것”이라며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서 포르노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현실에서 실행하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초범이라고 볼 수 없는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고 분석했다. 전 세계 인터넷 사이트에 수록된 콘텐츠의 40% 가까이가 포르노물이라는 한 보안업체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세 번 클릭하면 적어도 한 번은 포르노물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아동 포르노물의 인터넷 공개를 금지하는 것도 그 폐해의 심각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현행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아동이나 청소년이 나오는 음란물을 제작하거나 수출입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배포하거나 전시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단순히 소지하는 자도 2000만원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인이 아동 포르노물을 소지해 처벌받은 일은 거의 없을 만큼 법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영국 인터넷감시기구인 IWF가 2009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아동 포르노물이 가장 많은 나라 ‘톱 5’에 한국을 올린 것은 수치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의 허술한 대책도 서둘러 보완해야 한다. 사건이 터지면 반짝 며칠 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주변에 성범죄자가 거주하는지를 알아보는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성범죄자를 찾기도 쉽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나영이 아빠 송모(58)씨는 “누가 이런 사이트에 접근하겠느냐.”며 “성범죄자가 주변에 있으면 가정이나 교육기관에 우편으로 고지한다고 했는데 단 한 번도 우편물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아동 대상 성범죄가 줄어들기는커녕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만 12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건수는 조두순 사건이 있었던 해인 2008년 1207건에서 2009년 1007건, 2010년 1179건, 2011년 1054건, 2012년 6월 현재 411건으로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아동 성폭행범에 대해 형량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종신형에까지 처하는 미국 등 외국과 달리 우리는 솜방망이 처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2008년 기준으로 강간 피의자 8832명 중 재범자는 4427명으로 재범률이 50%를 넘는다는 사실은 성범죄자 관리의 허점을 그대로 노출한 대목이다. ‘신(新)한국병’을 치유하기 위해선 법과 제도의 정비가 다는 아니다. 목원대 도중만 교수는 “이번 사건은 범인과 A양 어머니의 삶의 태도, A양을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간 행인 등 사회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냈다.”며 “사람을 사람답게 길러내는 교육에 대한 가치관의 재정립 등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는 1896년 4월 15일 을미사변 관련 히로시마 재판소 결정서와 함께 흥선대원군에게 한 통의 문서를 보냈다. 그레이트하우스는 “올해 1월 20일에 일본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결정서를 작성했는데, 그 결정서 내용 중 전하의 행동이 많이 언급되었다.”며 “전하와 관련된 내용을 해명하실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아직도 이 문제가 세간에 걱정거리로 남아 있다 하니 참기 어려운 일이며 한스럽기 그지없다. 작년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여론이 제멋대로인데 나의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잠잠히 있을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해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오랫동안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1820~1899)과 명성황후(1851~1895)의 대립구도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1895년 10월 8일(양력) 새벽 1시. 전 군부고문 오카모토는 마포에서 일본 영사관보 호리구치 등을 대동하고 숨가쁘게 달려 흥선대원군의 저택에 도착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그의 아들 이재면과 손자 이준용은 낯설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했다. 오카모토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의관을 갖추고 일본이 의도한 것처럼 경복궁으로 순순히 향했다. 하지만 오카모토의 기록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은 그날 새벽 1시에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지체했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외교관을 포함한 외국인 대부분은 을미사변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첨예한 대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을미사변 주도와 관련되어 당대 주한 외교관 및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판단이 상호 엇갈렸다. 동일한 자료조차도 흥선대원군의 주도설과 관련되어 모순된 기록의 사례가 많았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프랑스 주교 뮈텔, 주한 미국공사대리 알렌, 주한 영국총영사 힐리어,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은 흥선대원군이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인의 경복궁 침입,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으로의 출발 지체, 일본공사관의 문서위조 등 흥선대원군을 배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분리되면서 정치현안에 개입하지도 못했다. 흥선대원군을 배후로 내세운 세력에 대한 혐의가 자연스럽게 일본공사관으로 옮겨졌다. ●명성황후, 고종의 충실한 조언자 명성황후 민씨는 1866년 왕비로 선택되어 운현궁에서 가례(嘉禮)를 치렀다. 명성왕후에게는 4남 1녀가 있었지만 1874년에 태어난 왕세자(순종)만이 생존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조언자와 후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종은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며 명성황후의 판단력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명성황후는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명성황후의 행록(行錄)에는 “임오군란 당시 왕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했다.”고 기록돼 있다. 갑신정변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명성황후는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했으며 “이 무리들을 죽이면 자연히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고종은 “왕비가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를 보호하였는데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가지 않았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결단력 및 정치적 결집력을 높이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연결된 임오군란 등 혁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녀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 후 잠시 상실한 권력을 다시 회복하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치밀한 을미사변 조작 기존 일본에서는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을미사변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기피했다. 일본에서는 주로 사실 정황에 대해서 을미사변과 관련된 인물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등의 기록을 참고했다. 그런데 이들은 사건 당일에 관한 행적을 매우 소략하게 기록했다. 또한 이들의 기록은 철저하게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구도로 부각시켰다. 최근 소설가 쓰노다 후사코는 을미사변 관련 일본 외무대신 무쓰의 의혹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명성황후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여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의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일본의 사상가 고야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정부의 책임에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사건 초기 주한 일본공사관은 여론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 대원군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대원군을 음모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책임자로 희생시킨다면 을미사변에 관련된 자국의 중요인물을 보호할 수 있고,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이미 미우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을미사변 이후 수습방안 중 사건의 책임자로 대원군을 설정했다. 그래서 스기무라는 대원군이 자발적으로 4개조의 밀약까지 동의한 것으로 기술했다. ●명성황후를 향한 죽음의 그림자 사건이 발생한 10월 7일 밤 궁궐에서는 민영준이 궁중에 등용된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잔칫날 명성황후는 자신의 측근인 민영준의 기용, 훈련대의 해산 등으로 주도권이 다시 왕실로 집중되는 것에 대해 만족했다. 그날 밤 그녀는 궁녀들과 함께 궁궐 후원으로 달구경을 나갔다. 대궐 내부에는 정변을 예측하는 여러 징후가 있었다. 1895년 9월 초 백작 이노우에는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왕족이나 혹 다른 조선 사람이 역모를 꾀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에서 군사의 힘으로 왕실을 보호하여 국가의 평안함을 보전한다.”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특히 명성황후는 정변이 발생하면 오히려 대궐이 안전하다는 농상공부협판 정병하의 주장을 믿었다. 왕실의 신뢰를 받아 재정을 도맡았던 정병하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옴은 성체를 보호코자 함인 줄로 아옵나니, 의심하실 바가 없사온즉, 피하여 나가시지 마옵소서.”라며 명성황후의 피신을 막았다. 대궐에서 성대한 잔치가 끝나자 새벽녘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곤령전의 전각문 북쪽의 작은 난간(干)”을 산책했다. 그런데 고종과 왕비는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대궐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속히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그날 왕비는 궁궐 내에서 침입자에 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가 궁궐 밖으로 도피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왕비는 침입자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대원군의 선택과 침묵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 당일 왜 경복궁으로 향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첫째, 1880년대부터 대립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1894년 9월에도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삼국간섭 이후 정국을 주도한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흥선대원군은 1895년 4월 ‘이준용 역모사건’ 당시 특별법원의 심리 기간 중 강력하게 항의했고, 5월 이준용이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당하자 교동도까지 방문하려고 시도했다. 이렇듯 흥선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기무라는 이러한 손자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애착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스기무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만약 흥선대원군이 4개조 약속 초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준용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고 흥선대원군을 위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날 흥선대원군은 일본 자객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손자 이준용을 위협하자 일정한 타협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과의 결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이미지에 커다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을미사변 당일 오카모토가 새벽 1시에 찾아왔지만 흥선대원군은 새벽 3시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고심했고, 그 후 침묵을 선택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타인의 잘못으로 생의 불행을 겪게 되었더라도 적어도 침묵할 줄 알아야만 한다. 대원군은 최소한 불행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나주 성폭행범 “신고할까봐 죽이려 했다” 진술

    나주 성폭행범 “신고할까봐 죽이려 했다” 진술

    전남 나주에서 잠자던 초등학생을 납치해 잔혹하게 성폭행한 인면수심범 고종석(23)이 범행 직후 A(7·초등 1년)양을 살해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석은 2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영장 실질심사에서 “범행 직후 아이를 살해하기 위해 한 차례 목을 졸랐다.”며 “아이가 신고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다.”고 진술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나주경찰서에 따르면 당시 장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A양은 목이 졸리면서 곧바로 실신했고 고종석은 A양이 숨진 것으로 알고 현장에서 도망쳤다. 범행 후 11시간 만에 발견된 A양은 목이 강하게 눌린 흔적과 함께 그 압력으로 양쪽 안구의 핏줄이 터진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는 “범죄 사실이 충분히 소명됐고 사안의 중대성, 고종석의 범행 후 행적 등을 종합하면 도망갈 우려가 있다.”며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고종석에게 성폭력 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 외에도 살인 혐의 등 7개 혐의를 적용해 영장을 발부받은 뒤 수감했다. 성폭력범은 살해 의도가 있을 경우 살인 혐의가 적용된다. 이명호 나주경찰서장은 “범인이 피해자가 자신의 얼굴을 봤기 때문에 살려 두면 범행이 드러날까 봐 살해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돼 살인 혐의를 추가 적용했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휴~ 태풍 어쩌나 ‘와글’ 또… 나주 성폭행 ‘부글’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휴~ 태풍 어쩌나 ‘와글’ 또… 나주 성폭행 ‘부글’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고요하지 않았다. 천둥 치듯 몰아닥친 두 차례의 태풍은 잇따라 한반도를 강타했고 누리꾼의 관심도 온통 태풍에 쏠렸다. 인터넷은 태풍의 진로를 살피고 대비하는 주요 매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태풍 볼라벤 피해 현황이 검색어 수위를 차지했다. 재난대책본부는 지난달 28일 몰아닥친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내국인 9명이 사망하고 2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제주 해상에선 중국어선 2척이 전복됐다. 전국 176만 7000여 가구가 정전됐고 75가구 18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나주성폭행 용의자 검거는 누리꾼에게 충격을 안기며 검색어 2위에 올랐다. 지난달 31일 전남 나주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을 저지른 고종석이 순천의 한 PC방에서 검거되면서, 온라인에선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3위는 일본 외무상 카라 CD. 지난달 29일 일본의 한 매체가 K팝 마니아인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이 한국에 항의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카라의 CD를 버렸다고 보도했다. 이달 열리는 카라의 일본 프로모션에 참여하기로 했던 고이치로는 이를 번복했다고 한다. 4위는 티아라 공식 사과였다. ‘왕따설’과 화영의 탈퇴로 비난받아온 그룹 티아라가 지난달 29일 자필 메시지를 홈페이지에 발표해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 “어리석은 행동,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장문의 편지에는 화영에 대한 사과도 담겼다. 5위는 거대 기업 간 법정 다툼을 다룬 일본법원 삼성 애플. 지난달 31일 일본 법원이 삼성전자와 애플 간 특허소송에서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눈길을 끌었다. 6위는 한·일전 욱일승천기. 독도 문제로 한·일 관계가 급랭한 가운데 지난달 30일 일본에서 열린 ‘2012 20세 이하 여자 월드컵’ 한·일전에선 일부 일본 관중이 욱일승천기를 들고 나왔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치적 퍼포먼스를 금지하겠다고 밝힌 뒤 하루 만에 벌어진 사건. 7위는 김동현 징역 6년 구형이다. 지난달 29일 검찰은 ‘프로축구 승부조작’으로 퇴출당한 뒤 40대 여성을 흉기로 협박해 외제차를 훔친 혐의로 기소된 전 국가대표 선수 김동현에게 징역 6년을 구형했다. 필리핀 지진과 인천공항 추락사는 각각 8, 9위에 올랐다. 지난달 31일 밤 미국지질조사국은 필리핀 술라간시에서 동쪽으로 139㎞ 떨어진 곳에서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필리핀·인도네시아·타이완·일본·괌 등에 쓰나미 경보가 발령됐다. 또 지난 1일 술을 마신 20대 남성이 인천공항 교통센터 지붕 난간에서 떨어져 숨지면서 음주사고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10위는 기성용 데뷔전. 지난 1일 선덜랜드와의 2012~2013 시즌 프리미어리그 3라운드 경기에서 스완지 시티의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 무대를 밟았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나주 ‘제2의 조두순 사건’] 고종석, 피해자 목졸라 의식 잃자 황급히 현장 떠났다

    [나주 ‘제2의 조두순 사건’] 고종석, 피해자 목졸라 의식 잃자 황급히 현장 떠났다

    경찰 수사 결과 고종석(23)은 아동 포르노물을 탐닉하며 범행 계획을 구체화했고 매우 지능적인 모습을 보였다. 고종석은 “술김에 그랬다.”는 당초 진술과 달리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이명호 나주경찰서장은 “고종석이 A(7·초등 1년)양의 큰언니(13·초등 6년)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으나 거실 바깥쪽에 있던 A양을 납치했다.”면서 “ A양을 성폭행한 뒤 목을 졸랐고 의식이 없자 현장을 황급히 떠난 사실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고종석은 평소 일본 음란물을 즐겨 보면서 어린 여자와 성행위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술을 마시면 이러한 충동이 더 강해졌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지난 1일 발표한 수사 결과에 따르면 PC방에서 포르노물과 게임에 심취했던 고종석은 집에서 사촌동생과 함께 술을 마신 뒤 지난달 30일 오전 1시쯤 자신의 집에서 300m가량 떨어진 PC방에 들렀다. 그는 PC방에서 A양 어머니(37)를 만나 “애들은 잘 있느냐.”고 물었다. 집에 아버지와 어린 딸들만 있다고 판단한 그는 300m가량 떨어진 A양의 상가형 주택에 들어갔다. A양의 큰언니는 거실에 있던 네 남매 중 가장 안쪽에서 잠을 자고 있었지만 그는 어두웠던 탓에 큰언니를 아버지라고 판단,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누워 있는 A양을 이불째 싸안고 납치해 가 성폭행했다. 특히 고종석은 자신의 얼굴을 본 A양이 신고할까 두려워 A양의 목을 한 차례 졸랐고 A양이 실신하자 숨진 것으로 알고 현장에서 도망쳤다. 이로 인해 11시간 만에 발견된 A양의 목에는 강하게 눌린 흔적과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고 목을 졸린 압력으로 양쪽 안구의 핏줄이 터진 것으로 밝혀졌다. 고종석은 또 도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A양의 집에서 50여m 떨어진 슈퍼마켓에서 현금 20만원과 담배 3보루를 훔쳤다. 고종석은 2일 오후 3시 광주지법에서 열린 영장 실질심사에 앞서 “피해자와 가족에게 할 말이 없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죽고 싶다. (피해자와 가족에게) 죄송하단 말밖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1일 광주 서부경찰서 진술 녹화실에서 고종석을 면담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 권일용 경감은 “고종석이 ‘나도 피해자도 둘 다 운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며 이번 사건을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등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이 없다.”고 전했다. 권 경감은 “피의자가 ‘죽고 싶다. 죄송합니다’라고 하지만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앞으로 자기에게 벌어질 일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며 “일반적인 성범죄자와 같이 피해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전남대병원에 입원한 A양은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A양은 나주의 한 병원에서 응급처치와 1차 수술을 받은 뒤 31일 오후 전남대병원에 이송돼 격리된 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병원 측은 “A양의 직장이 파열되는 등 외상이 심각해 재수술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병원 측에 따르면 현재 A양이 극도의 심리 불안 상태를 보여 안정을 되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A양 아버지(41)는 아주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던 시간에 어린것이 몹쓸 짓을 당하고 태풍 속에서 밤새 혼자 떨고 있었을 걸 생각하면 죽고만 싶다.”면서 “정말 착한 애인데 앞으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지 한숨만 나온다.”며 눈물을 흘렸다. 나주시는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후 도시 전체가 불안과 충격에 휩싸였다. 나주시청 공무원 김모(42·여)씨는 “내 고향에서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도 않고 집에 있는 애들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불안해했다. 나주시 시민단체인 풀뿌리 참여자치 최현호(47) 대표는 “지역 차원에서 피해자 가족들을 돕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 최치봉·최종필·서울 김정은기자 cbchoi@seoul.co.kr
  • 나주 성폭행범, 눈 뜨자마자 첫마디가…

    나주 성폭행범, 눈 뜨자마자 첫마디가…

     전남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의 범인 고종석(23)씨가 구속됐다.  광주지법 민사 19단독 장찬수 당직판사는 2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 혐의로 고씨에 대해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재판부는 “범죄 사실이 충분히 소명됐고 사안의 중대성, 고씨의 범행 후 행적 등을 종합하면 도망갈 우려도 있다.”며 발부 사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오후 3시부터 30분간 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오후 4시쯤 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강간 등 살인·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강간 등 상해) 위반, 아동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강간) 위반, 야간 주거침입 절도,미성년자 약취, 주거침입 등 7개 혐의를 적용했다. 고씨는 법정에 들어가기 전 심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씨는 지난달 30일 오전 1시 30분쯤 나주시 한 상가형 주택에서 잠을 자는 A(7·초등교 1년)양을 이불째 납치해 300m가량 떨어진 영산대교 밑에서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고씨는 성폭행 직후 A양의 집에서 100m가량 떨어진 슈퍼마켓에 침입해 현금 20만원과 담배 3보루를 훔친 혐의도 받고 있다.  한편 지난 1일 현장 검증을 마친 고씨는 2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경찰에게 일정을 묻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광주 서부경찰서에 따르면 고씨는 전날 오후 10시 잠들어 이날 오전 7시에 잠에서 깼다. 고씨는 경찰관에게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요?”라고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고씨는 별다른 기척 없이 잠을 자던 전날과 달리 현장 검증을 마쳐서인지 자주 뒤척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고씨가 오전 8시쯤 두부국, 숙주나물, 김치, 콩을 반찬으로 한 식사를 마쳤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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