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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오롯이 담았습니다”

    “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오롯이 담았습니다”

    “지성의 열풍 지대 속에서 꿈과 땀으로 일궜던 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아낄 게 뭐가 있겠어요. 나 역시 사라지면 수목원 나무 밑에 묻힐 텐데….”오는 20일 경기 포천의 산비탈 66만여㎡(약 20만평) 규모의 수목원 내 ‘나남 책박물관’을 개관하는 조상호(67) 나남출판사 회장의 말이다. 2008년부터 “마누라 빼고 가진 것 다 팔았다”며 희귀 야생종 히어리부터 토종 금강송, 밤나무와 잣나무 등 4만여 그루를 심으며 농부로 살아 온 그가 지난 4년 동안 수목원 안에 지어 온 책박물관이다.연면적 1721㎡에 지상 3층으로 작은 호숫가에 세워진 책박물관은 38년 동안 “책장수”(조 회장 표현)로 살아온 그의 삶이 오롯이 담긴 공간이다. 1층 북카페를 거쳐 2층으로 오르면 그가 열과 성을 다해 펴낸 3500여종의 나남 책부터 ‘사상의 저수지’라고 불렀던 나남신서 등 인문사회과학서들이 소장돼 있다. 조 회장이 미(美)의 극치로 여겨 평생 사모해 온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 실물 복제품도 전시돼 있다. 현재 아카이브 테마 공간으로 준비 중인 3층에는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쓴 ‘나의 광복군 시절’ 한국·중국·일본어 장정과 소장본,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김동익 전 정무장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오생근 서울대 명예교수 등 국내 내로라하는 지성인 10명이 소장한 책 1만여권을 서재 형식으로 꾸며 공개할 예정이다. 고종 황제의 비밀특사였던 호머 헐버트 박사가 쓴 ‘대한제국 멸망사’(영어 원제 The Passing of Korea) 원서 등 조 회장이 소장해 온 여러 고서들도 전시된다. 조 회장은 “40년 가까이 책을 만들고 팔아 왔더니 어느새 삶이 책이고, 그 책을 있게 한 나무가 돼버리더라”며 “수목원에 파묻혀 나무만 심다가 책박물관까지 세우니 이제 숨어 살기는 날 샜다”고 허허롭게 웃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추억의 노면전차, 노원구에서 다시 달린다

    추억의 노면전차, 노원구에서 다시 달린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을미사변 이후 당시 청계천에 있던 부인 명성왕후의 묘인 홍릉에 자주 행차했다고 한다. 미국인 콜브란은 고종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전차 노선 설립을 건의했고, 고종과 함께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약 60여년간 서울 시민의 발이 됐다.서울 노원구가 화랑대역(경춘선)에 조성 중인 철도공원에 전시·운영할 노면전차(트램)를 체코와 일본에서 들여온다고 18일 밝혔다. 현재 경춘선 화랑대역은 옛 간이역의 형태를 보존한 채 문을 닫은 상태다. 서울시와 노원구는 이곳을 포함해 6.3㎞ 구간에 걸친 경춘선숲길(광운대역∼화랑대역∼서울시계) 조성 사업을 진행 중이다. 구는 현재 일본 나가사키 전기궤도 회사가 운행 중인 노면전차 1대를 도입하기 위해 절차를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김성환 노원구청장이 일본을 방문해 다무라 아키히코 국토교통성 관광청 장관을 면담하기도 했다. 탑승 인원은 76명 정도다. 실제 내년 상반기부터 운행한다는 목표다. 체코의 노면전차는 이미 구매계약을 끝냈다. 구는 올해 2월 체코 대중교통박물관(DPP)을 방문한 바 있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 때 전차 개통식부터 1968년 운행 종료 시까지 사용했던 유럽형 노면전차와 비슷하다. 앞으로 철도 공원 내에서 운행은 하지 않고 관람 목적으로만 쓰인다. 김 구청장은 “화랑대역 철도공원 조성을 통해 노원이 서울의 대표적인 철도 관광명소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대륙사관, 반도사관

    [이덕일의 역사의 창] 대륙사관, 반도사관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성재 이시영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라는 점이다. 백암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고, 석주 이상룡은 임시정부가 1925년 정치체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꾼 뒤 초대 총리인 국무령을 지냈고, 성재 이시영은 초대 법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이들에 단재 신채호를 더하면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역사학자’라는 점이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 등을 저술했고, 석주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의 국사 교재를 썼다. 성재 이시영은 중국학자 황염배(黃炎培?1878∼1965)가 ‘조선’(朝鮮)을 저술하면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이 연구한 자료로 한국을 비하하자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로 이를 논박했다. 황염배가 중국이 제2의 조선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조선’을 저술했지만 왜곡된 내용이 많자 역사서를 저술해 이를 반박한 것이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네 분의 독립운동가가 역사학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에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내면의 논리가 한국사에 대한 이해와 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감시만어’에는 무원 김교헌의 저서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김교헌은 고종 때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박은식·이상룡·이시영·신채호·김교헌의 공통점이 또 있는데 모두 대륙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반도사관의 틀에 맞춰 한국사를 왜곡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일관되게 대륙사를 주창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고대사에 대해 저술했는데, 한결같이 현재의 한국 사학계 주류에서 잊혔거나 지워졌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이들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고대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한국 고대사에 집착했던 것이 현재의 침략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한국 고대사는 곧 현대사이자 독립운동사”라는 확신 속에서 고대사를 연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중요 쟁점의 하나가 고대 한(漢)나라의 식민지라는 한사군의 위치였다. 조선총독부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철저한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이를 반박했다. 조선총독부는 ‘대동강 유역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조선반도사’)라고 주장했다. 즉 기자조선 자리에 위만조선이 있었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는 것인데, 아직도 한국 고대사학계 다수는 이 설을 추종한다. 반면 백암 박은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지은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에서 “영평부(永平府)는 기자조선의 경계”라고 서술했다.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蘆龍)현 지역인 청나라 영평부가 기자조선 자리라는 것이다. 청나라의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역대 지리지를 참고해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영평부’ 조에서 “영평부 북쪽 40리에 조선성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라고 했다. 낙랑군 조선현이 영평부 경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1911년 백암 박은식이 “영평부는 기씨 조선의 경계”라고 말한 것이 정확하다는 뜻이다. 낙랑군 조선현은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에 있었다. 사실이 이런데도 아직도 반도사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국 고대사학계 일부가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우기니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한 것이다. 낙랑군이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에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계속 쏟아지는 반면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이 대륙사관을 주창한 것은 중국 고대 사료에 대한 객관적 해석의 결과다. 중국은 국가 주석까지 나설 정도로 역사 강역 문제를 국시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국가의 존속 문제로 확대될지 모른다. 역사를 빼앗긴 민족이 훗날 강토까지 빼앗긴 것은 역사에서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늦봄의 밤 정동길 걸으면 100년 전 비밀의 문 활짝

    늦봄의 밤 정동길 걸으면 100년 전 비밀의 문 활짝

    美대사관저 영빈관 일반에 공개…역대 최다 35개 시설 개방 예정5월 마지막 주말은 서울 정동 구석구석을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밤늦도록 걸어보면 어떨까. 중구는 오는 26~27일 정동 일대에서 역사문화 테마축제인 ‘정동야행’을 개최한다고 16일 밝혔다. 26일은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27일은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열린다. 올해는 덕수궁, 정동극장, 주한미국대사관저, 시립미술관 등 역대 최다인 35개 시설이 개방된다. 개막식은 첫날 저녁 7시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다. 평소 개방하지 않는 시설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국대사관저는 27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옛 미국공사관이었던 영빈관 건물을 일반에 공개한다. 성공회성가수녀원도 전날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정원을 오픈한다. 정동야행 홈페이지에서 사전신청을 받아 80명을 무작위 추첨할 예정이다. 캐나다대사관은 건국 150주년을 맞아 대사관 1층에서 오로라 영상작품을 선보인다.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승하 때까지 머무른 덕수궁 석조전은 이틀간 오후 6, 7시에 4회 추가 개방한다. 역시 정동야행 홈페이지에서 신청해야 한다. 정동길에서는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던 손탁호텔을 3D로 구현한 포토존, 경성방송국 부스·우정국 재현 등 체험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밀랍인형 전문박물관인 그레뱅 뮤지엄, NH아트홀 등 정동야행에 참여하는 문화시설은 입장료를 할인한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탐방 프로그램 ‘다 같이 돌자 정동 한바퀴’는 축제 기간 중 총 16회로 확대운영한다. 정동극장~덕수궁 중명전~구 러시아공사관~이화박물관~정동제일교회~배재학당역사박물관~시립미술관을 둘러보는 코스다. 인근 음식점 54곳·호텔 41곳에서 음식값 20%, 숙박비 50%까지 할인도 받을 수 있다. 개방시설을 방문해 7개 이상 스탬프를 찍거나, ‘중구 스토리 여행’ 애플리케이션 해설을 듣고 7개 이상 도장을 얻으면 된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정동야행은 지난 4회 동안 47만명이 다녀가는 등 대한민국 대표 야간축제로 자리잡았다”며 “근대 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는 정동에서 봄 밤의 정취와 추억을 담아 가시라”고 권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김정숙 여사, 취임식 끝나자마자 달려간 곳은?

    김정숙 여사, 취임식 끝나자마자 달려간 곳은?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10일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모교인 숙명여고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16일 중앙일보에 따르면 김 여사는 10일 취임식이 끝난 후 서울 도곡동에 위치한 숙명여고를 찾아갔다. 김 여사는 1970년 숙명여중에 입학해 73년 숙명여고(62기)에 진학한 이른바 ‘6년 숙명인’이다. 이날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동문 기대표들이 만나는 날이었고, 김 여사는 62기 기 대표로서 이 자리에 참석했다.취임식 옷차림으로 회의장에 들어선 김 여사를 동문들은 박수로 맞았다. 동문들은 “그 옛날에 왕비가 세운 우리 학교에서 111년 만에 첫 영부인이 나왔다”고 했다. 숙명여고는 1906년 5월 22일 고종의 계비 순헌황귀비가 세운 여성 사학이다. 김 여사의 은사인 명신여학원 이정자 이사장은 김 여사의 손을 잡곤 “내가 학교를 이렇게 오랫동안 지키고 있었던 것이 오늘을 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동문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우리 선생님이 눈물 흘리신 걸 오늘 처음 봤다”고 했다. 김 여사는 “제가 여성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이곳에서 6년 동안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셨다. 정말 감사하다”며 허리 굽혀 인사했다. 김 여사의 2년 손위 언니 김명숙(작고)도 숙명여고 출신이다. 대선 기간 중에도 김 여사는 숙명여고 동문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문 대통령의 취약 지역으로 꼽히던 서울 강남 등지에서 동문들이 기수별로 삼삼오오 모임을 갖고 물밑 지원을 벌였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때 총리에 지명됐던 장상 전 총리서리와 김 여사의 중·고교 친구인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모두 숙명여고 출신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명예기자가 간다] 실학자 지석영의 상소… 1600명 최정예 ‘글로벌 특허청’ 시작이었다

    [명예기자가 간다] 실학자 지석영의 상소… 1600명 최정예 ‘글로벌 특허청’ 시작이었다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불혹’(不惑·40세). 특허청이 올해로 불혹의 나이인 개청 40년을 맞았다. 1977년 개청 당시만 해도 2만 5000여건에 불과했던 산업재산권 출원규모가 지난해 46만여건으로 증가하며 세계 4위를 기록했다. 이는 직원 네 명 중 한 명이 박사학위 소지자로 우수 심사인력으로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1977년 특허국을 청으로 승격시켜 우리나라의 특허제도가 1882년 실학자인 지석영 선생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석영 선생은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산업발전을 위해 특허권과 저작권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이후 일본이 1908년 한국특허령 칙령을 공포 시행하면서 특허제도가 처음 실시됐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일본 특허제도가 운영됐다. 1945년 해방 후 미 군정 시절에는 특허원이 창설돼 미국 특허제도가 도입됐다. 1948년 정부조직법이 제정돼 특허원의 특허행정은 상공부 특허국으로, 저작권은 공보처로 이관됐다. 1970년대 산업재산권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특허출원과 심판청구가 급증했다. 전문화, 국제화된 특허행정에 대응하기 위해 1977년 3월 특허국을 특허청으로 확대, 승격했다. 이후 1979년 세계지식재산기구 설립 협약, 1980년 파리협약, 1984년 특허협력조약, 2003년 상표법 조약 등 국제조약에 가입하며 특허행정의 세계화를 본격 추진하게 된다. 특허청은 1998년 정부대전청사로 입주하며 제2의 부흥기를 맞는다. 1999년 세계 최초로 인터넷 기반의 전자출원시스템인 특허넷을 개통했다. 전국 어디서나 온라인에서 출원과 등록, 열람서비스가 가능해졌고 선진 특허행정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맞았다. 2006년 정부 부처 중 유일하게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돼 조직운영에 자율성을 확보했다. 개청당시 5억원이던 예산은 올해 5500억원에 달한다.특허청은 세계 지식재산 5대 강국으로 미국·유럽·일본 등 지식재산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지난해 지재권 출원은 개청 당시보다 18배 증가한 46만여건으로 집계됐다. 출원규모로는 중국·미국·일본에 이어 4위다. 미국 내 특허출원도 일본에 이어 2번째로 많다. 인구 100만명당 특허출원 건수는 세계 1위다. 특허심사처리기간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1990년대 39개월이던 심사 처리기간이 평균 10개월로 단축됐다. 특허넷 시스템이 아랍에미리트와 아프리카 등 해외에 수출되는 등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 직원 4명중 1명이 박사학위 고급 인력들 미·일·유럽이 주도하던 국제 지식재산권 체제가 한·중이 포함된 5자 간 체제(IP5)로 전환하며 명실상부한 지재권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개청 당시 277명에 불과했던 인력이 현재 1600여명으로 5배 이상 증가하는 등 성장했다. 전체 직원 중 72%가 5급 이상이고 박사 학위자가 435명으로 중앙행정기관 중 고학력을 자랑한다. 우수한 인력 확보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조성수 명예기자(특허청 대변인실 주무관)
  • [그때의 사회면] 노면 전차

    [그때의 사회면] 노면 전차

    논란 속에 대전 지하철 2호선을 트램(노면 전차)으로 운행한다는 계획이 확정됐다. 2025년 완공 목표인데 전차가 사라진 지 57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셈이다. 대전의 트램은 무가선으로 별도의 전기 공급선 없이 대용량 전지를 충전하여 운행하는 방식이다. 서울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에 최초로 전차 선로가 부설되어 역사적인 개통식이 열린 것은 1899년 5월 17일이었다. 그러나 전차는 평균 시속이 7㎞밖에 안 됐고 자동차 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968년 11월 29일에 운행을 중단했다. 전차의 이런 문제는 지금도 풀리지 않아 트램 운행을 반대하는 대전 시민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친환경적이고 타고 내리기가 쉬워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는 전차가 주요한 교통수단이다. 구한말에 전차가 들어온 계기는 명성황후와 관련이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뒤 고종 황제는 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지금은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을 자주 찾았다. 이를 본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행차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며 고종을 설득했다. ‘전기철도’, ‘전기거’, ‘전거’라고도 불리던 서울의 전차는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운행된 첨단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막상 전차가 개통되자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전차의 모양새가 상여를 닮았다며 불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탑골공원 앞에서 5살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숨지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전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193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전차 노선은 점차 확장되었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왕십리·노량진·마포행과 을지로 순환선, 종로~돈암동선, 효자동~원효로선이 완성되었다. 6·25 후 이화동∼중앙청, 아현동~신촌 구간을 운행했다. 교통량이 급증하자 1957년 무렵부터 전차 운행 중단론이 나왔다. 전차는 도로를 점유하는 만큼 수송 효율성이 따라가지 못해서다. 1955년에 서울의 자동차 수는 4359대였는데 1965년에는 1만 6624대로 불어났다. 전차 퇴출에 속도를 낸 사람은 1966년 4월 부산시장에서 서울시장으로 영전한 육군 소장 출신 김현옥이었다. 교통난을 덜어 줄 대안은 땅속의 전차, 즉 지하철이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식이 열렸다. 서울 지하철은 1863년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된 지 111년 만이었다. 서울은 출발은 늦었지만 4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속도로 지하철을 건설해 왔다. 현재 서울의 지하철 연장은 세계 도시 중 세 번째다. 사진은 전차 운행을 중단하기 직전인 1968년 9월 서울 서대문 사거리의 전찻길 위를 자동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 손성진 논설실장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황룡사·분황사 돌며 남긴 ‘유금오록’…古都의 자취 ‘오롯이’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황룡사·분황사 돌며 남긴 ‘유금오록’…古都의 자취 ‘오롯이’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라 하면 ‘금오신화’(鰲新話)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문학사는 이 작품을 본격적인 소설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금오산은 경주 남산을 이루는 봉우리의 하나다. 황금자라가 서라벌에 깊숙이 들어와 편히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지금 발굴조사가 한창인 월성에서 바라보면 옛사람들이 남산을 왜 남산이라고 불렀는지 무릎을 치게 된다. 서라벌의 정남쪽을 안정감 있게 두르고 있는 남산이 없었다면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의 포근함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짐작처럼 ‘금오신화’는 남산에서 씌어졌다. 물론 김시습이 7년 동안 머물렀다는 용장사의 금오산실(鰲山室)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매월당의 체취를 느끼고자 두 시간 남짓한 산행을 마다않는 탐방객이 꼬리를 문다. 매월당은 용장사에 머무는 동안 ‘금오신화’ 말고도 ‘유금오록’(遊鰲錄)을 남겼다. 경주 일대의 고적을 돌아본 감회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기행시집(紀行詩集)이다. 김시습이 태어난 곳은 성균관 부근이라고 하니 오늘날의 서울 명륜동이다. 그럼에도 매월당은 그다지 연고가 깊지 않은 경주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 매월당은 경주를 두고 ‘산수와 절이 아름답고 고도(故都)의 풍속이 온화하여 다른 고을과는 다른 데가 있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읊었다. 매월당은 강릉 김씨로 시조는 김주원이다. 김주원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선덕왕을 잇기에 모자람이 없는 왕위 계승자였으나 원성왕에 밀려 강릉으로 물러났다는 인물이다. ‘유금오록’에는 뿌리를 더듬는 ‘계림’과 ‘김씨릉’은 물론 북천 건너 김주원의 집터를 찾아 감회에 젖는 시도 보인다. ‘원성왕과 김주원이 서로 왕위를 양보할 때/장맛비로 북천의 물이 끝없이 넘쳐흘렀네/백이숙제와 태백만 어찌 아름다운 소문을 독점하랴/천년 전부터 강릉에는 오랜 사당이 있었네’ 김주원이 원성왕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역사를 일종의 반어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강릉 또한 깊은 인연을 가진 고장이다. 어머니의 고향이자 강릉 김씨의 터전이었다. 경포대에는 2007년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이 세워졌다.●‘유금오록’ 경주 관광에 좋은 가이드북 경주 여행이라면 흔히 시내에서 월성과 황룡사 터, 국립경주박물관을 돌아보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그런데 체제 너머의 방외인(方外人)으로 살다 간 매월당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유금오록’은 좋은 ‘관광 가이드북’이 될 수 있다. ‘유금오록’을 살펴보면 매월당의 경주 고적 탐방은 매우 폭이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용장사와 선방사, 흥륜사, 황룡사, 영묘사, 백률사, 분황사, 불국사, 천왕사 등 옛 절터가 망라돼 있다. 황룡사를 두고 ‘동인(銅人)이 우뚝 서서 언덕을 향해 선 것은/흥망을 그전부터 말하려 하지 않음이라’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김시습이 찾았을 때만 해도 큰법당의 본존불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듯싶다. 지금 폐허가 된 황룡사의 큰법당 터에는 삼존불 대좌의 기단석만 남아 있다. 황룡사와 이웃한 분황사는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적이 있어 김시습이 더욱 사랑한 절이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지금 3층까지만 남아 있어 조화롭지 못한 모습이다. 하지만 ‘돌탑은 그야말로 드높기도 해/쳐다보기는 해도 올라가기는 어렵다/층층이 봄풀이 자라났고/켜마다 이끼 꽃이 피어 있네’라는 시구절을 보면 매월당이 찾았을 무렵에는 창건 당시 옛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분황사에서는 모전석탑 바로 곁의 비석 대좌를 눈여겨봐야 한다. 위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홈이 패어 있고, 그 아래 ‘이것은 화쟁국사 비석의 받침’(此和靜國師之碑趺)이라고 새긴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 있다. 원효에게 화쟁이라는 시호를 내린 고려 숙종이 세운 추모비다. 비문의 일부는 탁본으로 전하며, 1976년 분황사 경내에서 발견된 화쟁비의 손바닥만 한 조각은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매월당은 이 비석을 보고 ‘무쟁비’(無諍碑)라는 시를 남겼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신라의 이승(異僧) 원욱(元旭)씨가 머리 깎고 저자에서 도(道)를 행한 것을…’으로 시작한다. 욱(旭)자와 효(曉)자는 ‘마침내 환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원욱씨란 바로 원효대사다. 이렇듯 화쟁국사 비석은 원효와 매월당, 추사의 흔적이 한데 어우러진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절 없어져 버려진 성덕대왕신종 목격도 분황사 터에서 황룡사 터를 다시 가로질러 동해남부선 철길을 건너면 국립경주박물관이다. 봉덕사종, 흔히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마당에 있다. 매월당은 들판에 나뒹구는 신종을 바라보면서 ‘절은 없어져 자갈에 묻히니/이 물건도 초목에 버려졌구나/주나라 석고(石鼓)와 다르지 않아/아이들이 두드리고 소는 뿔을 비비네’라고 한탄했다. 신라시대 이후 기능을 잃은 신종은 1460년 영묘사로 옮겼지만 북천의 범람으로 다시 벌판에 놓이는 신세가 됐다. 매월당이 딱한 모습을 목격한 것도 이때다. 흥륜사는 진흥왕 5년(544) 완공된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이차돈이 신라에 불법(佛法)을 전하고자 순교의 길을 가면서도 지으려 했던 절이다. 김시습이 흥륜사 터를 찾았을 때는 신라시대의 위용은 당연히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각의 남은 터는 마을로 변했구나’라는 시구처럼 절집은 모두 허물어져 지금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돌구유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매월당 이후 흥륜사 터로 알려진 곳은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영묘사 터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면 최근 경주공업고등학교 마당에서 ‘흥’(興) 자가 새겨진 수키와 조각이 출토됐다. 두 절의 위치는 고고학적 증거에 따라 정리되고 있는 분위기다.●최근 흥륜사 터 발굴조사 결과 ‘주목’ 매월당 당시 사천왕사도 폐허였다.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가 주석한 절이다. 최초의 쌍탑식 가람으로 2기의 목탑 기단부의 면석을 녹유소조상으로 장식해 건축사와 미술사에 중요한 기준을 제공하기도 했다. 문무왕 19년(679)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군사를 퇴치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매월당은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변방이 편안할지는 잘 모르겠다’고 불교가 비현실 세계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했다. 경주에는 ‘유금오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김시습의 흔적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토함산 너머 기림사의 매월당 영당(影堂)이다. 당초 현종 11년(1670) 용장사에 오산사(鰲山祠)라는 이름으로 세웠던 영당이 고종 5년(1863) 훼철되자 경주 유림이 고종 15년(1873) 기림사에 다시 세웠다. 기림사는 원효대사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오랫동안 머물며 설법을 베푼 사찰이 기원정사(祇園精舍)다. 또 기원정사가 있는 숲을 기림(祇林)이라고 한다. ‘경주에는 불국사 말고 기림사도 있다’는 말의 의미를 한번 느껴 보는 것도 좋겠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울시의회 이혜경의원 석호정 387주년 기념식 참석

    서울시의회 이혜경의원 석호정 387주년 기념식 참석

    서울시의회 이혜경 의원(중구2, 새누리당)이 지난 5월 5일 열린 석호정 창정(創 亭)387주년 및 제600회 삭회 기념식에 참석, 석호정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서울 남산 자락에 위치한 석호정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간 사정으로, 조 때(서기 1630년 경) 창정되었다고 전해진다. 창정 이후 몇 차례 이전을 거치다 1897년(고종 23년) 어영청의 분원인 남소영터 십팔기옛터(현재 남산 장충자락)에 자리했다. 석호정은 6.25 전쟁 시 소실됐다가 1970년 현재 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지난 2015년 서울시가 석호정 시설 개선 사업을 진행하고 안전울타리· 펜스설치, 건물도색, 주변 환경 정비 등을 실시한 바 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이번 행사에는 기념식과 함께 제600회 삭회를 기념하여 석호정과 살곶이정, 황학정의 궁도인들을 비롯하여 대학부와 건강활쏘기 참여자들이 함께하는 친목궁도대회가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나뉘어 개최됐다. 대회 1등상에는 쌀 30kg, 2등상 쌀 20kg, 3등상에 쌀 10kg가 주어졌으며, 참가자 전원에게 석호정 삭회 600회를 기념하는 기념품이 증정됐다. 이혜경 의원은 “석호정은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배울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자 우리 전통 활쏘기의 유산이 살아있는 곳”이라고 의의를 설명하고, “석호정이 국궁이라는 우리나라 전통 활쏘기 문화를 계승하고 중구의 명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길 기원한다”고 축사를 마무리했다. 이번 기념식에는 이혜경 서울시의원 외에도 김희동 서울시 궁도협회 회장, 조종성 전 대한궁도협회 회장, 최강선 민주당 부대변인, 박형상 전 중구청장, 이장세 살곶이정 사두 등 내외 인사가 참석해서 자리를 빛냈다. 한편 현재 개방정으로 운영되는 석호정에는 하루 평균 50~70명의 시민들이 찾아 우리 전통 활쏘기인 국궁을 체험하고 있다. 석호정에서는 8주짜리 정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서울시 누리집(yeyak.seoul.go.kr)에서 예약을 받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복궁 향원정 2년간 보수 공사

    경복궁 향원정 2년간 보수 공사

    낡고 기울어진 경복궁 향원정(보물 제1761호)이 2년간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향원정의 안전을 진단한 결과, 토사 유실로 지반이 약해지고 목재 접합부가 느슨해져 2019년 말까지 해체·보수하기로 했다고 2일 밝혔다. 경복궁 향원지에 놓인 취향교도 원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될 예정이다. 취향교는 고종 재위 시절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향원정 북쪽에 세워진 다리였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파괴된 이후 1953년 관람 편의를 위해 향원정 남쪽인 현재 자리에 건립됐다. 오는 15일부터 공사가 시작되면 향원지에 가설 울타리가 설치돼 향원정의 유려한 풍광은 2년간 볼 수 없게 된다. 공사 진행 과정은 일반에 공개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역사속 공무원] 600년 전에도 구조 골든타임 전쟁

    [역사속 공무원] 600년 전에도 구조 골든타임 전쟁

    조선 건국때 119인 무비사 운영 소방로에 집·울타리 만들어 골치 실화로 자기 집 불내면 곤장 40대최근 전통시장 화재가 잇따르고 있다. 또 화재에 취약한 오래된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는 주차된 차 때문에 소방도로가 제 기능을 못해 인명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안타까운 일이 되풀이된다. 그런데 소방도로 무단 점거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일이었다. 세종 8년인 1426년 설치된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서로 알려졌으나 실은 금화도감보다 34년 앞선 태조 원년인 1392년 무비사(武備司)가 최초다. 병조에 무비사를 둬 개화(改火), 금화(禁火), 부신(符信·중요 문서의 전달), 순작(巡綽·순찰) 등의 업무를 맡게 했으며 전서 2인, 의랑 2인, 정랑 2인, 좌랑 2인으로 구성해 화재를 예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무비사의 임무에 대한 기록이 있다. ‘태종실록’ 9권 1405년 3월 1일자는 예조가 육조의 직무 분담을 보고한 내용이다. 병조에는 무선사, 승여사, 무비사를 두는데, 무비사는 무예의 훈련, 지도의 고열(考閱), 성보(城堡), 봉화, 출정, 고첩(告捷·승전을 알림) 등을 맡으며 정랑 1명, 좌랑 1명으로 구성한다. 주요 임무가 화재 진압과 예방에서 훈련과 보급·통신 등으로 전환됐으며, 책임자도 정3품에서 정5품으로 격하된 것이다. 화재의 예방과 진압을 소방(消防)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 32년인 1895년이다. 신설된 경무청 총무국이 수재, 화재, 소방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도록 하면서 소방이란 말이 사용됐다. 이전에는 ‘금화’나 ‘멸화’로 표기했다. 최초의 소방서인 무비사는 유명무실해졌지만, 화재 예방의 중요성과 불을 낸 사람에 대한 처벌규정은 오히려 강화됐다. ‘태종실록’ 13권 1407년 4월 20일자는 소방도로에 관한 보고다. 큰길 이외의 여리(閭里·여염집)의 길도 본래는 평평하고 곧아서 차량의 출입이 편리했는데, 무식한 사람들이 자기 주거를 넓히려고 도로까지 침범해 울타리를 치거나 집을 지었고 심지어는 길을 막아 화재가 두려우니 도로를 다시 넓혀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600여년 전에도 요즘처럼 소방도로 무단 점용이나 불법 주차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기록에는 없지만 조정이 한성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소방도로 개설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20여년이 지난 세종실록 40권 1428년 4월 24일자에는 소방도로 개설에 관한 내용이 있다. 찬성(贊成·종1품) 권진이 “금화도감이 도로 개통을 위해 인가를 많이 헐고 있다”고 보고하자 임금이 “헐지 못하게 하라. 태종 때도 도로를 내는 것이 좋겠다 하여 개설하려 했으나 관리들이 이숙번을 두려워하여 그의 집 앞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도로를 낸 적이 있다. 이번 도로 개설도 반드시 민원인이 있을 것이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명했다. 한성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소방도로를 개설하긴 했지만, 당시 실세 중의 한 사람이던 이숙번의 집이 편입되는 것을 피하고자 다른 방향으로 도로를 내는 바람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처벌규정도 명문화됐다. ‘태종실록’ 34권 1417년 11월 10일 첫 번째 기사는 실화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보고한 것이다. 이날 호조가 실화와 방화 구분 없이 자기 집을 태운 자는 볼기 40대, 남의 집을 태운 자는 볼기 50대, 종묘나 궁궐을 연소시킨 자는 사형, 능 경내에서 실화한 자는 장 80대와 도(徒·노동형) 2년, 임목을 태운 자는 장 100대와 1000리 밖 유배에 처해야 한다고 보고하자 임금이 그대로 정했다. 이 밖에도 화재 대상이나 피해 규모에 따라 처벌 내용을 세분화하고 있는데, 실수로 자기 집을 태운 것도 억울한데 볼기까지 40대를 맞아야 했으니 중형인 셈이다. 최중기 명예기자(국가기록원 홍보팀장)
  • [열린세상] 동북아 정치의 지각변동, 주도적으로 대응해야/신봉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

    [열린세상] 동북아 정치의 지각변동, 주도적으로 대응해야/신봉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중국 매체 중 해외 언론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국제뉴스 전문 신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자매지다. 영향력이 대단하다. 매일 200만부를 발행한다. 특히 허를 찌르는 사설로 유명하다. 사설은 총편집 후시진(胡錫進)의 손을 거쳐 나온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대만 심지어는 북한을 수시로 놀라게 했다. 때로는 중국 외교부도 항의 전화를 한다. 필자가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는데 자신이 환구시보를 키웠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너무 튀면 모회사인 인민일보에서 뭐라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환구시보가 벌어서 인민일보를 먹여 살리는데 뭐라고 하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는 중국도 언론 환경이 많이 변해서 중국 공산당이나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만 아니면 쓰는 데 거의 제약이 없다고 했다. 그의 강점은 사회주의 언론에 오래 길든 중국 언론계에서 남다른 이야기와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그는 몇 년 전 방한 때 필자의 집을 찾아와 주택의 평당 가격을 세세히 물어보며 베이징, 도쿄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경제, 사회문제 등에 대한 칼럼도 쓰는데 그의 칼럼집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른다. 환구시보는 지난 22일자 사설에서 미국이 북한 핵시설에 대한 외과적 공격을 할 경우 전면전이 아니라면 중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기존의 통념을 깨는 것이다. 북?중 간에는 1961년 체결돼 계속 연장돼 온 상호원조조약이 있다. 이 조약은 북한이 무력 침공을 당하면 중국이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게 돼 있다. 다음날 사설에서는 북한이 스스로 중국의 안전을 지켜 주는 초병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오해라고 했다. 오히려 북한의 핵 개발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중국의 핵심 국가 이익을 해치고 있다고 논평했다. 중국은 북한을 더는 완충지대나 전략적 자산으로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보다 며칠 전인 8일에는 상하이의 화둥사범대학 션즈화(沈志華) 교수의 강연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소개됐다. 한국전쟁 연구로 유명한 학자다. 그는 동북아 정치 지형에 근본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북한 중 누가 중국의 적이고 동지인가? 그는 핵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북한을 중국의 잠재적 적으로 지목했다. 북?중 혈맹의 역사는 이미 과거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주류 의견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간의 통설이었던 북?중 혈맹관계나 북한 완충지대론 등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도 지지 않고 험한 말들을 중국에 뱉어 내고 있다. 21일 게재된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논평은 “주변국이 우리의 의지를 오판하고 경제 제재에 매달린다면 파국적 결과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주변국은 중국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보자. 구한말 조선은 변화에 대응할 전략도 힘도 없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국왕 고종은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주권 회복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후 조선은 일본에 병합됐다. 물론 지금의 한국은 1세기 전의 조선이 아니다. 한국의 국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사드 배치 문제, 북핵 문제 등을 두고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각축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누가 적이고 동지인가? 오직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주도한다는 확고한 비전과 이를 실천할 전략이 필요한 때다.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이 다시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위기가 정점에 달하면 기회가 오는 법이다. 북핵 문제의 협상 국면이 나타날 수도 있다. 강력한 제재와 함께 당근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단절된 남북 관계에 주도적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도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북핵 문제를 해결해 평화통일을 이루는 역사적 과업은 한국의 창의적이고 주도적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 현판으로 보는 ‘덕수궁’의 역사

    현판으로 보는 ‘덕수궁’의 역사

    현판으로 덕수궁에 깃든 조선 말 비운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가 열린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24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Ⅱ에서 여는 ‘현판으로 보는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황궁이던 경운궁(현 덕수궁)의 여러 문과 전각에 내걸렸던 현판 13점을 한눈에 둘러보며 나라의 운명과 함께 부침을 겪었던 궁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고종은 198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운궁을 황궁으로 썼다. 하지만 그 기간은 10년에 불과했다. 1904년 대화재,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1908년 순종의 창덕궁 이어(移御·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 등으로 덕수궁으로 명칭과 지위가 바뀌고 많은 전각이 헐리거나 축소됐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덕수궁 정문 현판이 현재 대한문(大漢門)으로 1906년 바뀌기 전에 걸렸던 길이 3m짜리 대안문(大安門) 현판, 고종이 종묘 등 외부로 출궁할 때 드나들었던 포덕문(布德門) 현판, 대한제국 초기 즉조당이 중화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경운궁 정전으로 쓰였을 때 걸렸던 중화전(中和殿) 현판 등을 볼 수 있다. (02)3701-7500.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백제 불교 중심서 ‘천자의 땅’으로… 내포 1500년史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백제 불교 중심서 ‘천자의 땅’으로… 내포 1500년史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인도 동북부 비하르주의 보드가야로 가려면 13㎞ 남짓 떨어진 거점도시 가야를 경유하기 마련이다. 가야에는 정각(正覺) 이후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한 브라마주니 언덕이 있으니 보드가야에 버금가는 성지(聖地)다. 주변에는 팔리어(語)로 가야시사라는 산이 있어 부처 당시 초대형 사원이 지어졌다. 꼭대기가 코끼리 머리를 닮았다고 중국에서는 가야시사를 상두산(象頭山)으로 의역(意譯)하기도 한다. 코끼리는 석가모니 부처를 상징한다.가야산(伽倻山)이라면 경남 합천의 해인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충남 내포(內浦)의 가야산 역시 합천의 가야산을 뛰어넘는 한국 불교 역사의 중심지였다. 합천 가야산 정상은 해발 1430m 상왕봉(象王峯)이다. 내포 가야산 줄기 북쪽에도 해발 310m의 상왕산(象王山)이 있다. 조선시대 사찰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왕산 개심사는 가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합천 가야산과 내포 가야산의 작명 원리는 다르지 않다. 인도의 가야와 보드가야, 가야시사는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설법이 이루어진 곳이다. 인도에서 실크로드, 중국을 거쳐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도 같은 상징성을 가진 성지를 갖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내포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주변의 10개 남짓한 살기 좋은 고을을 가리킨다. 삽교천을 따라 바닷길이 깊숙하게 내륙으로 들어왔다는 지형적 특징이 고유명사가 됐다. 가야산 서쪽 서산시 운산면에는 개심사와 함께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서산 마애불과 백제 사찰 보원사의 옛터가 있다. 가야산 동쪽 예산군 덕산면에도 백제 거찰(巨刹)로 알려진 가야사가 있었다. 이름으로만 보면 가야사는 과거 보원사를 뛰어넘어 내포 가야산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을 수도 있다. 가야사 옛터에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길지(吉地)’라는 지관의 말에 헌종 10년(1844)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무덤을 옮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는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에 오른 이후 퍼진 말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황제가 불과 2대에 그치고 나라가 망했으니 흥선대원군이 ‘2대천자지지’를 제대로 해석했어야 했다는 씁쓸한 우스개도 있다. 어쨌든 남연군 무덤에 서면 풍수지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과연 명당이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무덤을 썼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대원군은 훗날 아들 명복이 보위에 오르자 건너편 산기슭에 새 절을 짓고 부처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지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퍼졌다. 하지만 가야사는 이미 폐사(廢寺) 상태였던 듯하다. 다만 남아 있던 석탑과 석등 같은 석물의 일부 훼손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한말의 개화파 문인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도 ‘남연군묘를 가야사의 빈터에 썼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대원군은 단순히 불교에 호의를 가진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 후원한 인물이었다. 집권 이전에도 영종도 용궁사를 원찰로 삼은 것은 물론 쇠퇴한 흥천사, 화계사, 보광사를 중창했다. 대원군은 ‘불교를 즐겨 좇았다’거나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우리라’는 글귀가 새겨진 인장을 즐겨 썼다고 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친(親)불교적 인사가 유서 깊은 대찰(大刹)에 불을 지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대원군이 불교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보덕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구니 수도도량이어서 일반인 출입을 막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개방한다. 보덕사는 한마디로 남연군 무덤의 원찰이다. 대원군이 아버지의 극락왕생과 후손의 발복(發福)을 빌고자 지은 절이다. 이름처럼 자식을 왕으로 만들어 준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부수적이었을 것이다. 큰법당은 무덤의 원찰이니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큰법당 앞에 바짝 붙여 지은 디귿자 모양의 대방(大房)은 충청도에서는 이례적이다. 폐쇄적인 구조의 대방은 내부에 다양한 용도의 공간을 두고 있다. 왕실 여인들의 출입을 전제로 한 공간이다. 대방은 서울 근교의 왕실 무덤을 수호하는 사찰에 주로 지어졌다. 보덕사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껏 지었다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비구니 사찰답게 아주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어 절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절의 들머리에는 가야사 터에서 가지고 왔다는 화사석(火舍石)으로 다시 세운 석등이 있다. 가야사는 백제시대 겸익이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유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2012년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 시대 기와가 쏟아져 나왔다. 머리 부분이 없는 소조 불상도 10점 남짓 출토됐다. 고려와 조선 시대 건물 유구도 찾아냈다고 한다. 가야사 역사의 본격 재구성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는 절의 흔적뿐 아니라 남연군묘의 제각(祭閣)이었던 명덕사(明德祠)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었다.특히 ‘가량갑’(加良岬)이라고 새겨진 통일신라 시대 기와가 눈길을 끌었다. ‘가량’과 ‘가야’(伽倻)는 과거에는 같은 발음이었던 듯하다. 가야국과 관련된 역사 기록에서도 ‘가량’과 ‘가야’를 혼용한 사례가 보인다. 가야사라는 이름은 ‘고려사’에 처음 나온다. 창건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사이 어느 시점에 가야사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가야사와 ‘가야갑사’(加倻岬祠)의 기록이 함께 보인다. 그런데 발굴조사에서는 일정한 두께로 깎은 돌로 조성한 유구가 확인됐다. 절의 시설로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삼국시대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명산(名山)에 제사 지내던 흔적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계룡산 산신에 제사 지내던 중악단(中岳壇) 역시 사찰인 신원사 곁에 두었다. 잘 알려진 대로 남연군 무덤은 대원군에게 통상을 요구하고자 오페르트가 저지른 도굴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1868년 행담도에 1000t급 차이나호를 정박시킨 뒤 작은 배로 삽교천을 거슬러 구만포에 상륙한다. 일당은 덕산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뒤 가야산으로 향했지만 남연군이 안장돼 있는 무덤의 회곽은 단단하기만 했고, 결국 간조 시간에 쫓겨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다. 국사 교과서에도 서술돼 있으니 역사적 의미는 각자 새기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연군 무덤을 방문한 길이라면 오페르트 일행이 상륙한 예산 고덕면의 구만포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삽교호 방조제에 물길이 가로막혀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삽교천 중류의 구만포는 내포의 중심 포구의 하나였다. 남연군 무덤에서는 자동차로도 20분 이상이 걸린다. 이 길을 걸어서 오갔을 오페르트 일당은 매우 조급했을 것이다. 구만포는 지금 한때 포구였다는 사실조차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황량하다. 그래도 내포의 역사를 더듬기에 구만포만 한 곳이 없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역사속 공무원] 가짜뉴스에 두 번 죽은 정발 장군

    [역사속 공무원] 가짜뉴스에 두 번 죽은 정발 장군

    활약상 65년 만에 재조명돼 부활 5월 대선을 앞두고 가짜뉴스 논란으로 더욱 정국이 시끄럽다. 조선왕조실록도 임진왜란에서 처음으로 전사한 지휘관 정발에 대한 기록을 65년 만에 정정했다.1592년 5월 23일(양력 환산)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영도)에서 사냥을 마치고 군사들과 회포를 풀던 중 적선을 발견하고 서둘러 돌아와 주민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임전 태세를 갖췄으나 왜적의 조총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첫 전투를 지휘한 장수이자, 첫 희생자인 정발의 공적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종전 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면서부터다. 그때까지 정발은 ‘적함과 세견선도 구분하지 못한 실패한 장수’로 기록되었다. 왜 이처럼 상반된 평가를 받았을까. 선조 12년인 1579년 29세의 나이로 무과에 합격한 정발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기록된 것은 10년이 흐른 뒤다. 비변사에서 무인을 성적이나 서열에 관계없이 등용하는 ‘불차채용’(不次採用)으로 정발이 추천되었다는 내용이다. 정발은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사살해 국경수비 모범사례로 꼽힐 만큼 훌륭한 장수이기도 했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3일(음력)에는 정발이 사냥을 하다가 (적함을)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먼저 성에 올랐다. 정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효종 8년인 1657년 ‘선조수정실록’에서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다. 적선은 구멍을 뚫어 모두 가라앉히고 군사와 백성은 성곽을 지키게 했다. 이튿날 새벽 적이 성을 백 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높은 곳에 올라가 대포를 비 오듯 쏘았다. 정발이 서문을 지키면서 한참이나 대항하여 싸웠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적이 많았다. 그러나 정발은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는 기록으로 재평가받는다. 실록은 ‘승정원일기’, 사초, 공공기록물, 가장사초 등을 기초로 실록청에서 편찬하는데, 임진왜란 초기 임금이 서둘러 몽진하는 과정에서 이들 기록의 대부분이 소실돼 사관들이 보관했던 가장사초나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해 작성하다보니 내용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편찬 초기부터 실록청이 북인 중심으로 꾸려져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이수광, 임숙영 등이 실록 수정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인조 19년인 1641년이 되어서야 대제학 이식의 상소를 받아들여 수정 편찬이 시작되었다. 정발이 이미 판서에 추증되었으나 이를 모르고 상소를 올렸다가 꾸중을 듣는 해프닝도 있었다. 동래부사 조세환이 정발 추증 상소를 올렸다. 숙종으로부터 검토를 지시받은 김수항은 “이미 병조판서를 추증하였으나 변방의 백성들이 어리석고 소홀히 하여 잃어버린 것”이라고 아뢴 뒤 “그렇지만 특별히 시호를 내려 기록하여 두도록 하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숙종 9년에는 정발의 후손을 거두어 등용하자는 건의도 있었다. 숙종 12년인 1686년 충장(忠壯)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 이후 조정에서는 정발의 예우에 관한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후손의 등용에 관한 기록은 고종 5년에 가서야 등장한다. 고종은 권율의 종손 최조와 정발의 종손 학순이 무과에 급제하자 “매우 기특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권최조는 선전관에, 정학순은 사복시 내승에 임명하라”고 했다. 최중기 명예기자(국가기록원 홍보팀장)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영웅 대신 역적으로… 조선의 치욕 짊어진 ‘용기 있는 文人’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영웅 대신 역적으로… 조선의 치욕 짊어진 ‘용기 있는 文人’

    ‘용담(龍潭)과 구담(龜潭) 사이에 너럭바위가 있고, 그 위에 큰 바위가 둘러 있다. 바위에는 놀러온 사람들이 새겨 놓은 이름이 매우 많다. 내가 농담 삼아 “다녀간 사람들이 다투어 이름을 파면 기암괴석이 종국에는 온전한 모습을 보전하지 못할 것 아닌가” 하니 스님들이 합장하며 “가르침을 들었으니 어찌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웃었다.’백헌 이경석(1595~1671)이 효종 2년(1651) 금강산을 여행하고 남긴 ‘풍악록’(楓嶽錄)의 한 대목이다.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쓴 바로 그 이경석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니 명승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제명(題名)을 주변에서 부추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자연의 조화를 훼손해서야 되겠느냐’는 말로 손사래를 친다. 굳이 자신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는 인생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병자호란 당시 봉림대군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8년 동안 볼모 노릇을 했던 효종은 즉위 원년(1650)부터 북벌(北伐)을 계획한다. 그런데 김자점 일당이 청나라에 밀고함에 따라 진상조사단이라 할 수 있는 사문사(査問使)가 왔다. 영의정 이경석은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의주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다. 이듬해 백헌은 ‘영원히 벼슬에 등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영불서용)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명나라 선박이 평안도 선천에 정박한 사실에 청나라에 알려진 인조 20년(1642)에도 그랬다. ‘청을 섬기는 척하면서 명과 내통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힐난이 이어졌다. 백헌은 극구 “명나라 잠상(潛商)이 몰래 정박한 것으로 조선 조정과는 무관하다”고 설득했다. 이경석은 결국 만주 봉황성에 구금됐고, 8개월이 지나서야 ‘벼슬 불가’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경석의 금강산 길은 일종의 위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토록 금강산을 꿈속에 그려보다 세속에서 헛되이 늙기만 했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돌에 새긴 글’로 훗날 잇달아 고초를 겪은 이경석이 금강산 바위에 이름을 새기지 않은 것은 잘한 일 같다. 삼전도비는 지금 서울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공원의 서쪽 호숫가에 자리잡고 있다. 잠실역사거리에서 가까우니 아는 사람은 찾아가기 편하다. 그런데 초행길에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면 골탕을 먹을 수도 있다. 비석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은 2010년이다. 하지만 기자가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은 남쪽 석촌동 주택가의 옛 삼전도어린이공원으로 안내했다. 흔히 삼전도비라 부르지만 비석에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새겨져 있다. 삼전도는 잠실의 나루터였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내려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의 의식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치욕스러운 역사의 흔적이지만 우리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우여곡절도 많았다. 조선은 고종 32년(1895) 삼전도비를 땅에 묻는다. 갑오개혁 이듬해로 청일전쟁의 와중이다.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본이 대한제국 병탄 이후 1913년 다시 땅 위에 꺼내 놓는다. 의도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을 1957년 당시 문교부가 주도해 땅에 묻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때 사적으로 지정했다. 이것을 1983년 옛 삼전도어린이공원으로 옮겼다. 2007년 붉은 페인트로 비석을 훼손한 사건으로 우리가 이 비석에 갖는 복잡한 심경의 일단이 드러났다. 병자호란과 삼전도비는 당연히 ‘조선왕조의 치욕’을 상징하지만, 당대부터 ‘이경석의 치욕’을 상징하는 양 이미지 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흥미롭다. 비변사는 당시 비문(碑文)을 지을 인물로 네 사람을 천거했는데, 인조의 간곡한 당부에 “글을 배운 것이 한스럽다”며 결단을 내린 것은 이경석이다. 그런 백헌은 두고두고 “오랑캐에 아부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산 자(者)”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경석에게 ‘비문의 저주’는 삼전도비에 그치지 않았다. 신도비 파문은 그 이상이었다. 백헌은 현종 12년(1761) 세상을 떠났지만, 서계 박세당이 신도비 비문을 쓴 것은 숙종 28년(1702)이다. 당대 명필인 이광사의 글씨로 비석이 세워진 것은 영조 30년(1754)이니 그 사이 우여곡절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이경석의 무덤은 삼전도비에서 20㎞ 남짓 떨어진 판교신도시 너머 청계산 자락에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끼고 의왕으로 넘어가는 옛길을 따라가다 보면 표지판이 나타난다. 들머리에는 두 기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왼쪽의 옛 비석에서는 글자를 찾을 수 없다. 300년이 가깝다고 하지만 비문이 조금도 남김없이 깎여 나갈 세월은 아니다. 현종실록에 실린 백헌의 졸기(卒記)는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래 관리에게 겸손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나랏일을 근심하고 공무를 받드는 마음이 늙도록 해이해지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 하찮게 평가되기도 하였다’고 했다. 사관(史官)의 평가 역시 후하다고 할 수는 없다.반면 박세당의 신도비 비문은 이경석의 넋을 위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서계는 이경석을 봉황과 군자에 비유한 반면, 삼전도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백헌을 비난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올빼미, 불선자(不善者)로 규정했다. 송시열의 문인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들은 서계가 지은 ‘사변록’을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는 이유로 흉서(凶書)로 규정했다. 다르지 않은 처지의 백헌 신도비 비문 역시 서계의 복권(復權)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경석 신도비는 건립 이후 오래지 않아 각자(刻字)가 갈려 나가고 땅에 묻힌 것 같다. 이후 오랫동안 우암을 추종하는 세력이 집권했으니 후손들도 손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검은 회색의 무자비(無字碑) 왼쪽에는 오늘날 두 기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게 된 내력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후손들이 1975년 새로운 몸돌(碑身·비신)에 비문을 새기고 흩어진 받침돌(臺石·대석)과 삿갓 모양 지붕돌(蓋石·개석)을 합쳐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1979년에는 땅에 묻혀 있던 몸돌을 파내 옛 신도비를 재건했고, 받침돌과 머릿돌도 다시 만들어 옛 신도비 오른쪽에 새로운 신도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항전의 현장인 남한산성과 치욕의 증거인 삼전도비, 삼전도비문에서 불행이 비롯된 이경석 신도비는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세 곳을 한데 묶으면 볼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훌륭한 역사기행 코스가 될 수 있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95세 언니/최광숙 논설위원

    며칠 전 지하철에서 할머니 두 분이 똑같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자매인가 싶었는데 아니지 싶다. 마침 한 할머니가 지하철에서 내려 다른 할머니와 나란히 앉게 됐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봤더니 고종사촌 언니라고 한다. 자신은 81세이고, 그 언니는 83세. 얼굴에 주름도 별로 없고 혈색도 아주 좋다. 6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아픈 데는 없으시냐니까 간간이 허리가 좀 아프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오늘은 계모임에 다녀오는 길이란다. 서울에 사는 사촌들과 매월 한 차례 만나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5만원씩 다달이 부은 곗돈 60만원을 오늘 탔다면서 좋아하신다. 식사값은 각자 1만원씩 거둬서 낸다고 했다. 계원은 10명으로 모두 할머니다. 막내는 73세, 왕언니는 95세다. 혈연으로 맺어진 끈끈한 사이라 세대 차이도 못 느낀다고 했다. 지난달 일본 여행도 다녀왔단다. 여행 계획은 제일 큰언니가 맡는단다. 선생님 출신이라 여행지, 비행기표 등을 꼼꼼하게 챙긴다고 했다. 95세 큰언니가 계모임이 끝나고 헤어질 때 하는 말이 있다. “애들아, 우리 100세까지 건강하자.” 최광숙 논설위원
  • 바람의 손자, 태풍의 조짐이 보인다

    바람의 손자, 태풍의 조짐이 보인다

    KBO리그 개막 열흘, 야구팬들의 시선이 ‘바람의 손자’ 이정후(19·넥센 히어로즈)에게 꽂혔다. ‘바람의 아들’ ‘종범 신’ 이종범(46)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의 아들 이정후가 지난 주말 한 경기에 홈런 2개를 몰아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정후는 지난 8일 잠실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2회 2점 홈런(유희관), 9회 3점 홈런(김성배)을 때렸다. 두산 선발 투수 유희관으로부터 뽑은 홈런으로 이정후는 프로 데뷔 7경기 만에 첫 홈런을 신고했다. 이는 아버지 이종범(1993년 데뷔)보다 10경기나 빠르다. 넥센이 치른 8경기에 모두 출전한 이정후는 타율 0.286(28타수 8안타), 2홈런, 6타점, 7득점으로 벌써 외야 한 자리를 예약했다. 9일 경기를 앞두고 장정석 넥센 감독은 “처음에는 고졸 선수 중 좋은 편이라는 정도였는데, 스프링캠프를 거치며 타구 질과 힘이 좋아지는 게 보였다”며 “고종욱과 이정후를 1·2번, 서건창을 3번에 배치한 뒤부터 타선이 성공적이라 당분간 이걸 유지할 계획”이라며 이정후에게 계속 기회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야구선수가 된 2세 선수는 부담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정후는 “아빠가 이종범인 게 오히려 재미있다”고 말할 정도로 대담한 성격이 돋보인다. 이정후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지켜보는 건 야구팬의 큰 즐거움이다. 아직 KBO리그에는 아버지보다 확실하게 낫다고 말할 아들은 없지만,역사가 긴 메이저리그에는 사례가 적지 않다. ‘철인’ 칼 립켄 주니어와 명예의 전당 최고 득표율(99.32%)을 기록한 켄 그리피 주니어, 통산 762홈런으로 역대 1위인 배리 본즈 등은 아버지도 메이저리그에서 이름난 선수였다. 과거 이종범은 “이종범 아들 이정후가 아닌 이정후 아빠 이종범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힌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퍼스트레이디 스캔들/최광숙 논설위원

    [씨줄날줄] 퍼스트레이디 스캔들/최광숙 논설위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을 제2부속실로 조용히 불렀다. 김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인 박 보좌관은 말이 보좌관이지 ‘6공의 황태자’로 불린 실세였다. 김 여사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여동생 남편인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이 총선 출마를 원한다면서 박 보좌관의 의견을 물었다. 또 대선 때 활동한 여의사 3명을 거론하며 국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써보라고 했다.박 보좌관은 노 대통령에게 신영순 안양병원장을 전국구에 추천해 결국 신 원장은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금 전 장관은 민정당과 청와대 정무 파트에서 ‘대통령 친인척 배제’를 고집하는 바람에 그의 국회행은 무산됐다.(박철언의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김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내조형’으로 알려졌지만 뒤에서 국회의원 공천권을 행사할 정도로 ‘베갯속 영향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앞에 나서지 않는 처신으로 국민의 관심사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발휘했다. 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취임식 때부터 화려한 옷차림과 요란한 처신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특히 이 여사의 작은아버지 이규광씨의 처제인 장영자 사기 사건으로 정권이 흔들릴 정도로 부담을 줬다. 이씨는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당시 미안해서 별거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대통령과 달리 영부인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다.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할 수 있는 위치이기에 토머스 패터슨 하버드대 교수는 퍼스트레이디를 ‘제1의 특별조언자’라고 했다. 영부인 주변의 비리 스캔들이 종종 생기는 이유도 이 같은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부인 이희호 여사의 ‘옷로비 사건’ 연루 의혹으로 당시 60%를 상회하던 지지율이 10% 포인트 이상 떨어지기도 했다. 최근 일본 정치권이 ‘아키에 스캔들’로 들썩거린다고 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가 오사카 학교법인 모리토모 학원의 국유지 헐값 매입 의혹도 모자라 이번에는 지난해 여름 참의원 선거 기간 공무원들의 수행을 받으며 선거 지원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총리 부인의 경우 청와대 부속실 같은 별도의 보좌 조직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키에가 권력형 비리 의혹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알아서 기는’ 일본 특유의 ‘손타쿠’(忖度) 문화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키에 뒤의 아베를 의식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영부인의 스캔들은 사안의 민감성과 폭발성 때문에 정권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떡볶이 거리의 철당간/서동철 논설위원

    조선시대 청주목은 고종 32년(1895) 전국을 23개 행정구역으로 나누면서 청주군이 된다. 이듬해 다시 전국을 13도로 구획하면서 충주에 두었던 관찰부는 1908년 청주로 옮긴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에 따라 관찰부는 도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1937년 현재의 도청 자리로 옮겨 간다. 도청이 떠난 자리에 조성된 것이 중앙공원이다. 이런 연유로 중앙공원은 지금도 문화재의 보고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문과 청주목 부속 건물인 망선루,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의 청주성 탈환을 기리는 전장기적비,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촘촘히 늘어서 있다. 중앙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청주목의 동헌이었던 청영각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공원 옆 용두사 터 철당간이다. 성역(聖域)을 알리는 깃대이니 고려시대 이곳은 절이었다. 번화가를 걷다 국보급 문화재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감동이다. 주변에는 ‘철당간 떡볶이’를 비롯해 대표적 맛집이 늘어서 있다. 철당간 광장을 젊은 감성에 맞는 명소로 꾸미는 사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잘하면 멀리서도 찾아가는 명소가 될 수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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