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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고종 총무원장에 편백운 스님

    태고종 총무원장에 편백운 스님

    한국불교 태고종 제26대 총무원장에 편백운(67·속명 편경환) 스님이 당선됐다. 태고종은 13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에서 총무원장 선거를 치러 편백운 스님을 임기 4년의 차기 원장으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143명의 선거인단 중 139명이 참여한 간접선거에서 편백운 스님은 59표를 얻었다. 임기는 9월 23일 시작된다. 편백운 스님은 1963년 수덕사에서 수계했으며 1985년 태고종 동방불교대학을 졸업했다. 태고종 총무원 부원장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현재 강원도 석왕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덕수궁 중명전 재개관… 생생하게 재현된 을사늑약 체결 현장

    덕수궁 중명전 재개관… 생생하게 재현된 을사늑약 체결 현장

    2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덕수궁 중명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인물 조각상으로 꾸며진 을사늑약 체결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지난해 8월부터 11개월간 진행한 덕수궁 중명전 내부시설 보수와 조경 정비 작업을 마친 뒤 지난 1일 재개관했다.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체결한 을사늑약의 현장인 덕수궁 중명전의 내부 전시 공간은 4개로 나뉘며 각각 덕수궁과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대한제국의 특사들을 주제로 한다. 덕수궁 중명전은 본래 황실 서적과 보물을 보관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1904년 덕수궁에 큰불이 나면서 고종이 머무는 편전이 됐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사용됐고 1960년대부터 40년간은 민간이 소유하는 등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정부가 2005년 매입해 복원 공사를 거쳐 2010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이며, 월요일엔 휴관한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넥센, 강우 콜드 승…김성민 행운의 완투승

    넥센, 강우 콜드 승…김성민 행운의 완투승

    넥센 히어로즈가 kt 위즈를 상대로 6회 초 강우 콜드 승리를 거뒀다. 김성민(23·넥센 히어로즈)은 KBO 리그 72번째로 데뷔 첫 승을 완투승으로 기록한 투수가 됐다.넥센은 2일 수원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kt 위즈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김성민의 호투와 타선의 도움으로 5대 1 승리를 만들었다. 0-1로 끌려가던 넥센은 3회 초 2사 후에만 4득점을 올렸다. 1사 1, 2루에서 타석에 등장한 김하성은 유격수 땅볼을 치며 병살타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넥센은 비디오 판독 신청을 했고, 1루는 세이프로 정정됐다. 넥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김민성이 2사 1, 3루에서 우익수 앞 동점 1루타를 날렸다. 이어 윤석민은 역전 2타점 2루타, 고종욱은 1타점 1루타를 쳐 4-1로 역전했다. 이어 4회 초에는 2사 1루에서 김하성의 좌익수 앞 1루타와 김민성의 2루타로 5-1을 만들었다. kt 타선을 맞아 5이닝 동안 1실점만을 허용하며 호투하던 김성민은 5-1로 앞선 6회 말 선두타자 심우준에게 기습번트 내야 안타를 내줬다. 그러나 곧바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해 강우 콜드로 경기가 끝났다. 행운이 따른 김성민은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이날 승리한 넥센은 39승 37패 1무로 단독 4위를 지켰다. 경기 후 김성민은 “꿈에 그리던 첫 승을 따내 매우 기쁘다”며 “오늘 컨디션이 좋아 무조건 경기에 나가고 싶었는데, 경기 전부터 형들이 농담을 많이 건네서 심적으로 많이 도움됐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가슴 먹먹했던 조선인들의 ‘치욕의 자리’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가슴 먹먹했던 조선인들의 ‘치욕의 자리’

    집결지인 남산골 한옥마을에 도착하니 일행 30여명이 벌써 와 있었다. 해설을 맡은 노주석 원장님의 “서울 살면서 한옥마을에 처음 온 분이 있다면 반성해야 한다”는 말씀에 뜨끔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옥마을에 발을 들였으니 말이다.경쾌했던 출발과는 달리 여정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권력의 말초신경 역할을 했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건물을 지나 일본이 식민통치를 위해 세운 통감부 터에 도착했다. 경술국치 이후 106년 만인 2016년 8월 29일에 조성된 ‘위안부 기억의 터’에는 네 개의 구조물이 전시돼 있다. 가운데엔 통감부 터였음을 알리는 푯돌과 을사늑약에 날인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기둥석이 거꾸로 세워져 있고 양옆엔 위안부 할머니 247명의 성함과 증언들이 새겨진 ‘대지의 눈’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4개 국어로 새겨진 ‘세상의 배꼽’이 설치되어 있다. 가슴이 먹먹했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도착했을 때 만화캐릭터의 구조물 속에서 1921년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김익상 의사의 의거 터라는 표석과 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터라는 표석을 보았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남산원 자리는 일제강점기 노기신사 자리였다.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서 있는 남산 중턱엔 조선신궁이 있었고 신사와 신궁을 포함한 이 일대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됐던 자리라니, 110년 전 이곳은 조선인들에게는 치욕의 자리요, 일본인들에게는 능욕의 자리였던 셈이다. ‘한양공원’이라고 한자로 쓰인 비석 앞에 다다랐다. 한양공원은 1910년 일본 거류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됐다. 당시 한양도성이 1000만 평이었는데 공원 규모가 30만 평이었다 하니 어마어마한 규모다. 허수아비 황제였던 고종은 공원 개장을 축하하며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보냈다. 고종이 한양공원이라는 글을 꾹꾹 눌러쓰는 심정을 상상해 봤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통감에게 폭탄을 던진 김익상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그랬듯이 말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고종 황제가 ‘한양공원’이란 글자를 쓰던 바로 그 시간이다. 고종의 필적을 가슴에 새겨 오늘의 기억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아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고종이 쓴 ‘한양공원비’… 불행했던 남산을 품었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고종이 쓴 ‘한양공원비’… 불행했던 남산을 품었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한양공원비는 서울 중구 소파로 57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에서 100여m 올라간 지점에 무심히 서 있다. 차를 타고 남산을 드라이브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다. 한양공원비의 내력을 설명하는 표석이나 안내문은 없다. 비석보호용으로 보이는 사각 돌기둥 3개가 꼽혀 있다.한양공원은 기억이나 사건 목록에 없는 이름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1908년 남산 기슭 30만평을 무상임대받아 조성한 위락시설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10년 공원 입구에 표지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비석의 정체는 표지석이었다. 표지석 앞에 또 표지석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혼자 서 있는 상황이 이해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85년 불과 19가구 89명에 불과하던 국내 일본인 수가 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1986가구 7677명으로 불었다. 열도에서 건너온 일본인 가족용 놀이터였다. 앞면에 새겨진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네 글자는 고종의 친필글씨이다. 1910년이면 끈 떨어진 권력이지만 황제의 글씨를 함부로 길거리에 세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친필을 내렸을까. 남산땅을 야금야금 잠식한 채 곳곳에 신사와 공원을 세우는 것을 보다 못한 고종이 이곳이 조선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지명이 들어간 비석을 하사한 게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비석은 왜 이곳에 있을까. 한양공원은 공원 구실을 못했다. 일제는 공짜로 얻은 땅에 13만평 규모의 조선신궁을 짓기로 하면서 무성하던 소나무를 송두리째 뽑았다. 해방 이후 행방이 묘연하던 비석은 2002년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철조망 안쪽 풀숲에서 발견됐다. 비석 뒷면은 곰보딱지처럼 무참하게 정으로 쪼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비석 뒷면을 놓고 말이 많았다. 비석을 세우는 데 돈을 댄 친일 부역자의 명단이라는 설이 난무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 건립 1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사진집인 ‘은뢰’에 실린 비문 뒷면 사진을 통해 문구 대부분이 해독됐다. 전체 내용은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에 불과했다. 한양공원비는 홀로 남산의 불행했던 과거를 품고 비바람 앞에 서 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 ‘을사늑약의 현장’ 덕수궁 중명전 7월부터 재개관

    ‘을사늑약의 현장’ 덕수궁 중명전 7월부터 재개관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체결한 을사늑약의 현장인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 새 단장을 마치고 오는 7월 1일부터 관람객을 맞이한다.문화재청은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지난해 8월부터 진행한 중명전의 내부시설 보수와 조경 정비를 마치고 다음달 1일 재개관한다고 28일 밝혔다. 덕수궁 관리소(소장 오성환)는 “입체적인 전시물과 전시 기법을 통해 국민 누구나 을사늑약과 중명전의 역사적 의미를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정비됐다“면서 ”중명전 전시관 재개관을 통해 이곳이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이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실은 △제1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실 을사늑약의 현장 △제3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등 모두 4개 실로 구성됐다. 전시실은 다양한 시각자료를 활용해 을사늑약 체결 과정과 고종의 국권 회복 노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관람자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한 모형과 정동의 변화상을 살피고, 고증을 통해 제작한 대한제국 시기 의복을 입은 인물 조각상을 보며 을사늑약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 중명전 건물은 20세기 초 평면도를 바탕으로 복원됐다. 지반을 낮춰 계단을 추가로 설치하고, 고종의 침전인 만희당(晩喜堂)이 있던 건물 뒤편을 정비했다. 새롭게 바뀐 중명전은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번 재개관을 계기로 중명전이 대한제국의 역사를 마주하는 성찰의 공간이자 아픔의 역사를 극복해 낸 희망의 공간으로 각인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기억의 주름으로 켜켜이 접힌 우리 이야기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기억의 주름으로 켜켜이 접힌 우리 이야기들

    세종대왕과 이순신, 광화문을 만나러 세종문화회관 계단으로 향했다. 한국의 옛 건축양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한 건축물 아래 40걸음의 폭과 32칸의 세종문화회관 계단이 6월의 아침 햇살로 단장하고 환하게 맞아 주었다. 계단 옆에는 30도 가까운 날씨에도 정지용 시인 동상이 시 ‘별’을 읽으며 무심히 앉아 있었다.해설사 이기훈씨는 “오늘 11개의 서울미래유산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 세종문화회관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문화1번지를 자임할 만큼 문화예술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해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는 해설자의 목소리를 따라 투어 신청자들은 ‘우리’가 돼 경험을 공유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이름만 들어도 자랑스러운 마음이 우러나는 이순신 동상을 마주했는데, 문제점(칼의 위치와 종류, 갑옷 모양, 표준 영정과 다른 얼굴, 누워 있는 전고)을 들으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걷다 보니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만들어 준 세종대왕 동상이 높다랗게 앉아 있었다. 황토현, 풍수지리, 육조거리, 광화문 빌딩 이야기들, 특히 조선 초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으로 세워진 광화문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았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지만 고종 때 재건되고 일제강점기에 옮겨지는 등 수난을 겪은 후에야 2010년 제 모습을 찾았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8층 황토마루라 불리는 옥상공원에 올랐다. 그늘에 앉아 더위도 식히고 멀리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오는 백악산 아래 청와대와 경복궁을 감상하고, 인왕산을 바라보며 요즘 드라마로 방영되는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이야기도 들었다. 종로구청과 피맛골을 지나 염상섭을 만나고 생명의 말씀사 건물 벽에서 서울미래유산 표식을 확인했다. 학창 시절 먼 나라에서 건너온 예쁜 색깔의 크리스마스카드를 사러 들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은 현재 체험하고 있는 전부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인상적이었던 것만을 기억한다. 오늘 우리 것인 광화문 이야기는 켜켜이 쌓여 기억의 주름으로 곱게 접혀졌다. 우리였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돌아가 기억의 주름을 펼쳐 서울미래유산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에게 들려주리라. 현재의 여기에서 미래의 그곳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공통된 기억을 만들며 미래의 그들과도 ‘우리’가 될 것이다. 이소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연구팀장
  • [역사속 공무원] 팔만대장경이 강화에서 왔다고요?

    [역사속 공무원] 팔만대장경이 강화에서 왔다고요?

    지난 10일 해인사에서는 6·25전쟁 당시 팔만대장경을 지키고자 폭격 명령을 거부한 김영환(1920~1954·당시 대령) 제10전투비행단장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김 장군은 1951년 8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중 ‘무장공비가 주둔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으며, 1954년 F51기를 몰던 중 실종됐다.가치를 산정할 수 없어 보험조차 가입하지 못하는 이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제32호로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16년 동안 연인원 125만명을 동원하여 제작한 인류 공동의 유산이다. 800년이 넘도록 단 한 장의 훼손이나 손실 없이 보존되고 있는 지금의 대장경판은 1232년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당시 고려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연인원 125만 명을 동원하여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 의지를 담아 한 자 한 자 새겨낸 것이다. 목판 수가 총 8만 1350장이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데, 목판 한 장의 평균 무게가 3.5㎏이므로 전체 무게 285t에 달한다. 이는 조선시대 우마차에 실으면 약 400대, 요즘의 5t 트럭에 실으면 57대 분량이다. 그런데 왜 조선 태조는 큰 위험과 비용을 무릅쓰고, 대장경판을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겼을까. 최근 주목을 받은 연구 중에는 외침을 피하기 위해 옮겼다는 주장과 조선의 정통성을 알리기 위한 기획성 행사였다는 주장이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각했는데, 실제로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해 선원사를 비롯한 두 곳의 사찰과 민가를 약탈했으며, 이때 무려 300여명의 승려와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운(移運)경로는 강화도 또는 서울 용산을 출발해 만리포, 진도 울돌목, 완도, 거제도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지금의 경북 고령군 개진면 개포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인사 대적광전 외벽에는 ‘대장경 이운벽화’가 있는데, 개포에서 해인사로 이운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긴 했지만, 강화도가 남해안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위험했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렇게 위험했다면 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를 강화도에 두었겠느냐는 것. 팔만대장경의 이동은 조선 조정이 기획한 이벤트란 주장도 있다. 집권 7년차를 맞아 자신감을 얻은 태조가 자신이 불교 신자임을 확실히 하고, 조선이 고려 불교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나라임을 보여 주기 위해 이 같은 대형 행사를 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는 태조가 불교 신자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 많다. 1392년 12월 4일 조선왕조실록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의 종교를 두고 신하와 논쟁을 벌인 내용이다. 임금이 첨서중추원사(종2품) 정총에게 대장경 발간 인사말을 쓰라고 명하자 정총이 직격탄을 날렸다. “전하께서 어찌 불사에 정성을 쏟으십니까. 청하옵건대, 이제는 믿지 마시옵소서” “이색은 유학의 종사(宗師,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스승)인데도 불교를 믿는다. 만약 믿을 것이 못 된다면 이색 같은 학자가 믿겠느냐” “이색이 학식이 높은 학자임에도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색이 불교를 믿어 너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마라” 이날의 논쟁은 임금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억지로 끝났는데, 이후로도 많은 신하와 격론을 벌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팔만대장경은 천하제일의 길지를 찾았다. 그동안 해인사에 있었던 7차례의 대형 화재, 여러 번의 전쟁, 일본에 넘겨주려 했던 임금까지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단 한 장의 손실이나 훼손 없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을 보면 그렇다. 최중기 명예기자(국가기록원 홍보팀장)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순교자 넋 닮은 진산성당… 조촐해서 더 아름다운 공간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순교자 넋 닮은 진산성당… 조촐해서 더 아름다운 공간

    충남 금산군은 커다란 분지로 봐도 좋을 것이다. 동쪽으로는 태백산에서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버티고 있다. 서쪽은 마이산에서 대둔산, 계룡산을 건너 부소산에서 마무리되는 금남정맥이 가로막고 있다. 대간이나 정맥이 아니더라도 사방팔방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에 포위돼 있다. 진산면은 금산군의 서쪽 끝이다.금산과 진산은 백제시대 이후 전라도이기도, 충청도이기도 했다. 고종 32년(1895) 8도(道)의 지방행정구역을 23부(府)로 개편할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가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전라북도에 들어갔다. 하지만 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는 줄곧 전라도 땅이었다. 진산군은 1914년 금산군에 병합됐고, 금산군은 1963년 충청남도에 편입됐다. 진산이라는 땅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아무래도 진산사건 때문일 것이다. 역사책은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과 권상연이라는 선비가 천주교 교리에 따라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라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최초의 가톨릭 순교자가 된 두 사람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복자(福者)의 반열에 올랐다. 이렇듯 전라도 천주교의 발상지와도 같은 고장이니 ‘충청도 진산’은 조금 낯설다. 진산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대둔산이 진산면과 전북 완주군 운주면, 충남 논산시 벌곡면에 걸쳐 있다. 진산은 해발 878m의 대둔산 동쪽 기슭에 아늑하게 파묻혀 있는 청정지역이다. 게다가 농사지을 땅은 제법 넓어 보이니 얼핏 봐도 살기 좋은 고을이다.지금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흔적을 찾으려면 진산성지성당으로 가야 한다. 조촐함의 극치여서 더욱 아름다운 진산성당은 프랑스인 파르트네 신부가 1927년 지었다고 한다. 지방리 공소 시절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종탑의 모습이 지금과는 조금 다르다. 1983년 종탑을 개조하면서 다른 성당들처럼 제단과 마주 보는 정면에 출입문을 새로 냈다고 한다. 처음 지을 당시 성당에는 남동쪽에 남성용 출입문, 북서쪽에 여성용 출입문이 있었을 뿐이다. 쓰이지는 않지만 두 개의 출입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성당은 한식 목구조의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가운데 신랑(身廊)의 좌우로 나무 기둥을 세워 측랑(側廊)을 상징하도록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럽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 양식인 3랑(廊) 구조의 바실리카를 소박하게나마 재현한 것이다. 정면에서 보아 제단 오른쪽에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순교자를 기리는 교회답다. 진산성당은 최근 국가가 지정하는 등록문화재가 됐다.성당 앞 작은 잔디밭에는 두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두 사람을 기린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친척들은 처형된 지 9일 만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무덤은 아직 찾지 못했다. 정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이처럼 지극히 흉악하고 패륜한 일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들어 보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극률(極律)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인심을 맑게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양적(兩賊)은 여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대시(不待時)로 참형에 처하고 5일 동안 효수함으로써 하여금 강상(綱常)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과 사학은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부대시’란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사형은 추분까지 기다려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중죄인은 예외였다. ‘강상’은 유교의 기본 덕목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한다. 형조에서 이렇게 진언하자 정조는 “전라도 진산군은 5년을 기한으로 현으로 강등하여 쉰세 개 고을의 제일 끝에 두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수령이 그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감히 관청에 있어서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먼저 적발했다는 것을 가지고 용서할 수는 없다.…해당 군수는 먼저 파직하고 이어 잡아다가 법에 따라 무겁게 처벌토록 하라”고 했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죄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는 해도 진산으로 옮겨와 제대로 무덤을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덤뿐 아니라 두 순교자가 살던 집이 어디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사건 이후 두 사람의 집이 헐린 것은 물론 집터는 연못이 됐다고 한다. 집터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두 사람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진산성당의 중요성은 커진다. 윤지충의 6대조는 고산 윤선도이고, 증조부는 ‘자화상’으로 알려진 화가 공재 윤두서다. 윤지충에게 가톨릭 교리를 알려 준 사람은 다산 정약용 형제라고 한다. 다산에게 고산은 외가 쪽으로 6대조가 된다. 그러니 윤지충과 다산도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이다. 권상연은 윤지충보다 여덟 살이 많은 외사촌이다. 모두 천주교로 얽힌 집안이다.한국 천주교회는 이승훈이 정조 8년(1784)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최초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직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양반가의 젊은이 사이에 천주학이 유행처럼 번지는 분위기에 걱정스러운 시선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제 파견을 요청하러 베이징에 갔던 훗날의 순교자 윤유일이 뜻밖의 소식을 전한 뒤 상황은 달라졌다. “천주교 신자는 조상에 대한 전통적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베이징교구장 구베아의 명령을 들고 온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양자택일을 강요받았고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렸다. 윤지충에게 신앙을 전했던 정약전과 정약용도 교회를 떠났다. 전통적 유교 윤리에 포용적이던 예수회 신부들의 저서로 천주교를 배운 초기 신자들이 ‘제사는 이단’이라는 파리외방선교회가 중국 교회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 혼돈에 빠진 것으로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은 보는 듯하다. 이런 역사적 환경에서 진산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전주감영의 남문 밖 형장 터에는 1914년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진산에서 배티고개를 넘어 전주로 가는 길은 그대로 두 사람이 관군에 붙잡혀 압송된 루트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여행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둔산을 비롯한 주변의 풍광은 덤이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145m를 날아 과녁에 꽂혔다, 국궁의 이 운치

    145m를 날아 과녁에 꽂혔다, 국궁의 이 운치

    두 발을 편하게 벌린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는 듯 활을 들어 올린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활을 잡은 앞손을 힘껏 밀고 시위를 잡은 뒷손으로 화살을 쥐고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는 듯 끌어당긴다. 두 팔이 파르르 떨린다. ‘툭’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인왕산 치맛자락 허공을 갈랐다. 145m 바깥에 세운 과녁 옆으로 초록 불빛이 켜졌다. 명중이다.●서울 시내 조망 황학정엔 30~90대 궁사 북적 16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황학정에선 궁사들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인왕산 아래 사직공원 단군성전 오른쪽에 자리했다. 1899년 고종황제의 어명을 받들어 지었으니 우리나라 스포츠의 첫걸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활쏘기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본래 경희궁 회상전 북측에 세웠던 활터에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경희궁 회상전이 훼손된 후 현재 장소로 옮겨졌다. 황학정 정자에 앉아 산등성이와 서울 시내가 어우러진 장관에 취해 있으면 활쏘기 시간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린다. 30대부터 90대까지 허리춤에 노란 띠를 두른 궁수들이 일렬로 자리를 잡는다. 과녁은 반대편 언덕에 있다 보니 산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화살을 보는 것도 운치를 자아낸다. 4년 넘게 활쏘기를 했다는 한 60대 회원은 “활 쏘는 이들은 다들 건강해 90세를 넘긴 회원도 있다”면서 “예로부터 국궁을 건강에 최고로 쳤다”고 자랑했다. 또 “활을 쏘려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꼿꼿해야 하니 몸이 반듯해진다”면서 “뒤로는 인왕산, 앞에는 서울 시내의 멋진 경치를 두고 활을 쏘면 정신 수양도 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7월부터 활터를 다닌 다른 회원은 “혼자서도 가능한 운동이라 좋다”면서 “테니스처럼 게임 상대와 장소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키면 홀로 한 시간이든 하루 종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양궁은 검지와 중지로 시위에 화살 걸어 당겨 종로에 황학정이 있다면 중구에는 조선시대 민간인이 사용하던 활터인 석호정을 빼놓을 수 없다. 남산 중턱에서 물결 치는 소나무숲 위로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신비롭게 느껴진다. 석호정은 남산공원길과 맞닿아 있어 지나가는 시민들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6년 전 국궁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윤복남(50)씨는 “서민들에겐 다가서기 어려웠던 국궁이 이젠 일반 성인과 아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거듭났다”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국궁의 재미를 알렸으면 좋겠다”고 귀띔했다. 활의 역사는 수렵생활을 하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활은 사냥감과 직접 싸우지 않더라도 먼 거리에서 제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옛 활쏘기는 전투기술인 동시에 선비들의 교양필수과목이었다. 이 땅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바로 활을 잘 쏜다는 기록이다. 수천년 역사를 함께한 전통 활, 국궁은 지금도 시민들의 생활체육으로 남아 있다. 서울에 8곳을 비롯해 전국 380여곳 국궁장에서 3만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대부분의 국궁장은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활을 쏘기 위해 145m 거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궁과 양궁은 무엇보다 쏘는 방식에서 다르다. 국궁은 표적을 볼 때 비대칭이다. 양궁은 한가운데 화살을 날리지만, 국궁은 치우치게 돼 있어서 오조준을 해야 한다. 자기가 편한 표적 보는 기준을 찾아 안정적으로 화살을 보내야 한다. 화살을 잡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국궁은 엄지와 검지로 화살을 움켜쥐는 반면, 양궁은 검지와 중지로 활시위에 걸친다. 이 때문에 양궁은 깍지를 검지에 끼지만, 국궁은 엄지에 깍지를 낀다. 사극에서 흔히 보는 활쏘기 방식은 사실 국적 불명인 셈이다. 뜻밖에도 국궁장엔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직장인 권상오(27)씨는 “놀이공원 국궁 체험장에서 활쏘기를 해봤다”며 “금방 익숙해져서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고 말했다. 대학 때 교양 수업으로 처음 국궁을 만났다는 정변교(26)씨는 “수업 뒤 계속하고 싶어서 활을 샀는데 집 근처에는 활터가 없어 아쉬웠다”며 “나중에 생활체육으로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석호정엔 習射無言 표지석… 정신수양에 좋아 석호정 이름도 활쏘기와 맞닿아 있다. 중국 한나라 문제(文帝) 때 어느 장군이 사냥터에서 큰 호랑이를 보고 활을 쏴 적중시켰다. 가까이서 보니 바위였다. 의문이 들어 다시 활을 쐈으나 이번엔 화살이 튕겨 나왔다. 장군은 매사에 신경을 써서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석호정 마당엔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손님을 반긴다. 회원들은 “활쏘기 하나에도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아울러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모든 게 판가름 나듯이, 자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과녁을 맞히기도 힘들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씨줄날줄] 노면전차 요주의/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노면전차 요주의/황성기 논설위원

    지방자치단체들이 트램(노면전차) 도입에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다. 서울, 대전, 수원이 ‘트램 1호 도시’가 되려고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고, 부산, 대구, 경기 화성·성남·부천·시흥까지 합치면 총 15곳에서 트램 건설을 추진 중이다.트램은 1881년 독일 베를린에 처음 등장한 이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유럽의 전통적인 건물과 어울려 도시를 장식하는 현대적 오브제로 사랑받는 트램이다. 일본에서는 1885년 고도(古都) 교토에 데뷔했다. 한반도에는 고종 때인 1899년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평양에도 노면전차가 운행됐으나 채산이 맞지 않아 1968년 남한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트램은 건설·운영비가 지하철·경전철에 비해 덜 들어 지자체들이 군침을 흘린다. 그러나 의정부 경전철의 3676억원 파산 전철을 밟지 않을 보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일본을 보자. 전국 19개 트램 가운데 흑자를 내는 곳은 히로시마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법인 공영교통사업협회의 2006년 자료에 따르면 주행 1㎞당 비용은 버스가 433엔으로 가장 싼 반면, 노면전차는 845엔으로 두 배 가깝다. 변전소 등 설비비가 많이 드는 점, 짧은 역간 거리에서 차량이 달리고 서는 일이 잦아 전력 소비가 많은 점, 속도가 느려 승무원의 시간당 생산성이 낮은 점, 전차의 대당 가격이 비싼 점 등이 꼽힌다. 해마다 승객은 줄어들어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다. 노면전차의 발상지 독일에선 50개를 넘는 도시에서 트램이 맹활약 중이다. 운임 수입으로 경비를 충당한다는 개념에서 보자면 대부분 적자다. 그러나 ‘교통은 시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것으로, 채산성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라는 공공성의 개념이 확립돼 있다. 인프라 정비는 연방이나 주에서 부담하고, 운임 수입으로 모자라는 운영비는 해당 지자체가 보전해 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에서 트램을 선도하고 있는 대전시는 32.4㎞의 트램 구간 중 일부를 2021년 개통한다는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5723억원 건설비 중 60%를 국비, 나머지를 시비로 충당하는데, 연간 운영비는 218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한다. 트램은 도심에 주요 기능을 집중시키는 콤팩트시티에 적합한 교통수단이다. 트램 선진국 독일이나 일본의 사례를 충분히 연구하고, 세금을 트램에 쏟아부어도 좋다는 시민의 동의를 얻지 않는 한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대전 사례를 지켜본 뒤 다른 도시가 따라가는 것도 늦지 않을 터이지만 당장 실적이 급한 자치단체장들이 그럴지는 의문이다.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잠룡들의 땅… 600년 권력의 용광로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잠룡들의 땅… 600년 권력의 용광로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회 ‘서울사방 서촌, 사람을 품다’ 편이 지난 3일 서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투어 참가자 30여명은 이날 10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를 출발, 통의동 백송터-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겸재 정선 생가터-청와대 무궁화동산-우당기념관-벽수산장터-노천명 가옥-윤동주 하숙집-수성동 계곡-이상의 집-통인시장-이상범 가옥-배화여대 캠벨기념관-필운대 등 순으로 2시간 30분에 걸쳐 서촌의 골목 골목을 누볐다. 이번 코스 중 서울미래유산은 청와대 무궁화동산, 우당 이회영선생기념관, 노천명 가옥, 이상의 집, 통인시장, 캠벨기념관 등 모두 6곳이다.초여름의 햇살이 따가운지 서울미래유산 로고가 찍힌 빨간색 스카프를 머리에 뒤집어쓴 참가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햇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이나 손목, 가방에 스카프를 맵시 있게 장식하며 멋을 냈다. 해설자 한세화 서울도시문화지도사의 구수한 입담에 탄성을 내뱉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코스는 길고 시간은 짧다 보니, 한 해설자는 지름길을 찾아 꼬불꼬불한 서촌 골목길을 내질렀고, 일행은 선두에 따라붙느라 잰걸음을 놓아야 했다. 부부, 친구, 자매 등 젊은층이 주를 이뤘고, 일본인 여성도 동행해 ‘장안의 핫플레이스’ 서촌의 인기를 실감 나게 했다.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은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며, 거주는 건축함으로써 장소에 새겨진다”고 갈파했다. 사람이 사는 장소와 집이 그 사람을 존재케 한다는 뜻이다. 거주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집에 대한 관념이 이전처럼 그리 절대적이진 않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서촌의 형성사를 알면 애정도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서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을 좀 아는 사람은 ‘북촌보다 서촌’이라는 주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작위적인 북촌에 비해 격은 좀 떨어지지만 서촌의 편안함에 점수를 더 얹는 식이다. 서촌에는 서울말을 사용하는 중류사회의 서울토박이들이 많이 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해봐도 화려한 삼청동, 가회동보다 소박한 옥인동, 통인동에서 오히려 ‘한국을 더 많이 느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골목마다 만갈래 사연과 곡절 숨어 서촌의 이 같은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투어 참가자들에게 물어보니 북촌은 사대부와 벼슬아치 같은 지배층이 살았고, 남촌에는 퇴락한 선비들이 산 반면, 인왕산 아래 서촌에는 궁이나 관청일을 보는 아전(衙前)계층이나 고관대작의 일을 봐주는 겸인(?人)같은 중인 이하 서민층이 산 동네로 알고 있었다. 서울 걷기 열풍이 불면서 해설자들이 알려준 판에 박힌 답변이기도 하다. ‘오래 묵은 도시’서울의 정체성을 단숨에 설명하기 쉽지 않고, 뾰족한 답도 없는 게 사실이다. 서울의 역사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의 가치는 거대한 랜드마크가 주는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 안에 녹아있는 이야기에 있다고 한다. 도시가 안고 있는 기억이 도시의 주인인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서촌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거대한 실타래’ 같다. 골목골목마다 천 갈래 만 갈래의 사연과 곡절이 숨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모습 바뀌어 인왕산 기슭 서촌에 대대로 서울의 서민층이 살았을 것이라고 알았다면 그것은 오해다. 조선 초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최고 권력의 핵심 배후지였다. 북촌보다 한 수 위였다. 지금 서촌은 해방 후 한국전쟁의 부산물이다. 월남한 피란민과 일거리와 학교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지방민이 무작정 정착한 결과 반세기 만에 오늘의 모습으로 변했다. 서촌의 또 다른 지명인 웃대(상촌·上村)는 경복궁 서쪽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백운동과 청풍계의 물줄기가 수성동천, 옥류천과 합류하는 위쪽을 말한다. 경복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역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족 이외엔 거주가 불가했다. 태종의 셋째 아들 세종대왕의 잠저가 통인동(옛 준수방)에 있었다는 얘기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태종의 집도 그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방원과 왕위를 다툰 배다른 동생 무안대군 방번의 옛집도 자수궁터(옥인동 군인아파트)였다. 퇴위한 정종은 사직단 근처 인덕궁에서 머물렀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수성동 계곡에 있었고, 효령대군이 비운에 간 조카의 집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버린 뒤 세도가와 중인층이 야금야금 틈입했다. 서촌은 광해군의 잊혀진 영토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왕기가 있다’며 경덕궁(경희궁), 인경궁(사직동과 내자동 일대), 자수궁 등 인왕산 아래 3곳에 3개의 왕궁을 짓느라 민가 수천채를 허물고 공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인조반정의 원인을 제공했다. 누각동, 누상동, 누하동이라는 지명은 이때 지은 궁궐의 누각에서 비롯됐다. 답사단이 처음 찾아간 통의동 백송터는 영조가 태어난 창의궁이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재위 52년간 무려 247번 이곳을 참배, 바느질 무수리였던 어머니 숙빈 최씨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영조의 부마집에 입양돼 창의궁에서 자란 추사 김정희는 서촌에 흘러들어온 서당 훈장 천수경이 결성한 문학동인 송석원 시사(詩社)와 인연을 맺어 ‘송석원’이라는 바위각자를 썼다. 인왕산이 백악산과 이어지는 기슭인 지금의 청운동과 효자동, 궁정동은 장동 김씨의 옛 터이다. 안동 김씨 서울파인 장동 김씨가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누린 세도정치의 산실이다. 답사단은 경복고등학교 교정 안에 있는 겸재 정선의 옛 집터와 그 집터에 세워진 자화상 ‘독서여가도’ 동판비를 둘러보고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사치를 누렸다. 300여년전 겸재가 인왕산을 바라보던 바로 그 앵글이다. 한 지도사는 인쇄해 온 한성부 지도와 인왕제색도를 일행에게 나눠줘 이해를 도왔다. 장동 김씨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장동팔경첩도, 인왕제색도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다음 코스 궁정동 무궁화동산은 장동 김씨의 영화를 있게 한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집터이다. 척화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가 새겨진 시비와 궁정동 안가, 효자동에 살았던 시인 박목월의 연애담으로 귀가 즐거웠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 터에 세워진 국립 농학교와 맹학교를 지나 우당 이회영기념관을 만났다. 인왕산의 또 다른 이름 필운대의 주인 백사 이항복의 직계 11대손이다. 전 재산을 팔아 간도로 독립운동을 떠난 우당과 육형제를 기리는 기념관이 서촌 신교동에 자리잡은 것은 사필귀정이다.서촌 분위기를 깨는 유리건물 GS남촌리더십센터 고갯길을 내려가면 옥인동47번지 옛 벽수산장이 나타난다. 한때 이 땅의 주인이 서촌의 주인인 시절이 있었다. 장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고종 대의 외척 여흥 민씨에 이어 순종 대의 외척 해평 윤씨 등 조선 말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의 권력 각축장이었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하려던 무학대사를 물리친 정도전의 후예들이 지향한 신권(臣權)정치의 무대였다. 왕의 산, 인왕산을 차지한 신하들이 왕권을 윽박질러 당파정치, 외척정치, 세도정치를 일삼는 바람에 사화(士禍)와 반정(反正)이 되풀이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조선 권력의 배후지, 매국노가 삼켜 인왕산 기슭에서 사직단 북쪽을 일컫는 서촌은 조선초기부터 권력의 배후지이자 왕족의 세거지로 금역이었다. 장차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잠룡들의 사저이자 왕위에서 배척당한 왕족의 도피처였다. 성종 이후 사대부 세력이 조금씩 틈입해오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전소되면서 법궁이 창덕궁으로 옮겨가자 통제가 풀렸다. 장동 김씨, 남양 홍씨, 기계 유씨를 비롯한 경화사족들이 청풍계와 백운동, 옥류천을 중심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들의 뒤를 따라 천수경을 위시한 중인들이 필운대와 인왕산동을 오가며 송석원시사를 열었다. 이들이 이룬 중인문화가 서촌의 한 축을 형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친일 매국노들의 독무대였다. 옥인동의 절반인 2만평이 윤덕영의 차지였고, 이완용도 옥인동 19번지 4000평을 매집해 못지않은 저택을 지었다. 둘 다 팔지 못할 것(나라)을 팔아서 갖지 못할 것(서촌)을 차지하고 아방궁을 지었다. 옥인동 윗동네는 윤덕영, 아랫동네는 이완용이 나눠 지배했다. 중인문화가 꽃피었던 옥류동 계곡 전체가 개인 사유지가 됐다. 지금의 서촌은 해방 후, 한국전쟁 이후 두 집의 필지를 분할한 수많은 작은 집들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다. 송석원의 역사는 곧 서촌의 역사요, 서울의 역사이자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3대 세도정치를 편 장동 김씨에게서 명성황후를 등에 업은 여흥 민씨에게 넘어갔다가, 순종효황후의 큰아버지 해평 윤씨 윤덕영이 벽수산장을 지어 소유했다. 한국전쟁 시기 서울을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청사로 사용됐고, 미군과 유엔청사로 차례로 쓰였다. 프랑스풍 조선 최대의 건물, 벽수산장은 1966년 화재로 불탔고, 1973년 철거됐다. 유일한 증거가 박노수미술관이다. 청전 이상범의 제자 박노수는 집과 작품, 소장품 1000여 점을 종로구청에 기증했다. 진정한 서촌사람이다. 노주석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현장 행정] 노원에 서울시 첫 철도공원…120년 철도 역사가 깃든다

    [현장 행정] 노원에 서울시 첫 철도공원…120년 철도 역사가 깃든다

    “서울 철도역사 120년에 걸맞은 곳으로 탄생시키겠습니다.” 14일 서울 노원구 공릉2동의 옛 화랑대 역사. 김성환 노원구청장이 지금은 폐선이 된 경춘선 구간의 화랑대역 부지를 둘러보며 철도공원 조성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곳곳에는 1950년대 만들어진 열차들이 예스러운 느낌을 풍기며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근로자들도 무더위 속에 역 플랫폼 공사에 집중했다. 과거 간이역임을 알려주는 녹슨 표지판 등의 흔적들도 눈에 띄었다. 김 구청장은 “서울에서 최초로 노면전차(트램)가 운행한 게 1899년인데 120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면서 “서울에도 철도역사를 알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노원구가 ‘서울 철도역사 120년’을 담기 위해 추진 중인 철도공원 조성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구는 서울시와 함께 약 100억원을 들여 공릉동 일대 부지 4만 462㎡를 개발 중이다. 내년 상반기 개장이 목표다. 주요 시설로는 화랑대 역사에 만들어질 ‘경춘선 역사관’을 비롯해 ‘실물 열차 전시관’, ‘철도박물관’, ‘모노레일 바이크 체험 공간’ 등이 있다. 노원구 관계자는 “역사를 보고 배우는 동시에 주민들이 재밌게 느낄 만한 펀(fun)한 요소를 넣으려고 했다. 화랑대역에서 철도공원까지 약 700m 구간에 노면전차를 운행할 계획을 세운 것도 그 하나”라고 설명했다. 철도공원 조성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1월 김 구청장이 일본을 방문해 나가사키 전기궤도 회사와 노면전차 도입을 논의한 끝에 오는 8월 관련 절차가 마무리된다. 화랑대역에서 공원까지 운행하는 이 전차를 통해 주민들은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체코에서도 실물 전시관에 배치할 노면전차 한대를 들여온다. 이미 구매계약을 끝냈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 때 전차 개통식부터 1968년 운행 종료 시까지 사용했던 유럽형 노면전차와 형태가 비슷하다. 지난 18일에는 어린이대공원 후문에 있던 1950년대 열차 두 대도 가져와 이미 배치를 마쳤다. 단순히 옛 간이역에 불과했던 화랑대역이 철도공원으로 변신하게 된 건 김 구청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기에 가능했다. 화랑대역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재로 지정됐고, 구는 2015년 외부 리모델링 공사를 완료한 바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았다. 김 구청장은 “화랑대역과 공원을 노면전차로 연결하고 철도공원을 만드는 게 더 의미 있다고 봤다”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김 구청장은 “문을 여는 내년 6, 7월까지 하나씩 알맹이가 채워지다 보면 멋진 철도공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고종손녀 이해원 옹주, 땅소유권 관련 소송 패소

    고종손녀 이해원 옹주, 땅소유권 관련 소송 패소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녀와 증손자들이 과거에 소유한 땅의 소유권과 관련한 소송에서 패했다.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12부(부장 이원신)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후손 4명이 건설교통부·노동부 등 옛 정부부처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지역 주택조합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고종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둘째 딸 이해원(98) 옹주,이 옹주의 아들 이진휴·진왕,진홍 씨가 원고로 참여한 이 재판에서 문제가 된 땅은 연희동 안산 일대 임야 1만179㎡(3079평)다.서대문구청 북쪽의 안산벚꽃길 일대 2516㎡(761평),신연중학교 남쪽 6673㎡(2018평) 등 개별공시지가로 따지면 30억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땅이다. 이 옹주는 생존한 대한제국 황실 후손 중 최고령이다. 충청도 갑부 아들 이승규씨와 결혼했으나 이씨가 한국전쟁 때 강제 납북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의친왕은 일제의 혼혈정책에 따른 일본인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국내에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감금되기도 했다.의친왕은 1955년 서울에서 숨졌다. 원고들은 이 옹주 남편 이승규씨 소유였던 이 땅이 1948년 9월 23일 당시 전직 고위 법조인으로 알려진 김모씨 명의로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졌는데 이는 위조된 매매계약서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해당 토지는 1995년 이번 사건 피고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서울시는 이후 1999∼2000년 이 땅을 ‘공공용지 협의 취득’ 명목으로 이전받았고 피고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원고들은 “피고들이 보상금을 받은 것은 원고들의 소유권을 침해해 법률상 원인 없이 이득을 얻은 것”이라며 “피고들은 각 원고에게 부당이득금 15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총 60억원가량을 청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해당 토지는 이승규씨 소유였다가 1943년 9월 14일 이씨가 사망하면서 장남 진휴씨가 상속받았는데 1948년 4월 23일 진행된 매매계약에 따라 1948년 9월 23일 김모씨 명의의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졌다”고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이어 “이 등기를 토대로 해 이번 사건 피고들 명의로의 소유권 이전 등기가 1995년에 있었고 1999∼2000년 서울특별시 명의의 소유권 이전 등기가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이번 사건 토지 소유권이 서울시로 이전될 당시 해당 토지가 원고들 소유였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원고들의 피고들에 대한 청구는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이 옹주 등은 과거에도 “양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경기도 하남시 땅 1만2700㎡(3천841평)가 부당하게 정부 소유로 넘어갔다”며 땅을 돌려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다가 2012년 패소한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섬 위 관음의 권능,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중생을 보듬다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섬 위 관음의 권능,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중생을 보듬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은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에게 부처를 대신해 대(大)자비심을 베푸는 존재다. 관세음보살, 혹은 관자재보살이라도고 한다. 불교경전인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세존이시여. 관음보살은 어떤 인연으로 관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까.” “만약 무량한 백 천 만억 중생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을 때 관음보살에 대해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른다면, 관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관(觀)하여 모두 해탈시키기 때문이니라.”●중요 관음성지 바닷가 섬이나 산에 자리 관음보살은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중생이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존재다. 옛날 할머니들이 뭔가 답답한 일이 생겼을 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되뇌인 것도 관음이 가진 이런 권능 때문이다. 당연히 관음의 신통력은 개인의 고통을 해소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불교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관음에 의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또 다른 불교경전인 화엄경의 입법계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기서 남으로 가면 보타락가(補陀洛迦)산이 있고, 거기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관자재니라. 그에게 보살이 어떻게 보살의 행을 배우며 도를 닦느냐고 물으라.” 그다음 보타락가산의 정경을 묘사했는데 ‘바다 위에 산이 있고 갖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매우 깨끗한 곳에 꽃과 과일나무가 가득 차고 샘과 연못, 시냇물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관음보살이 ‘남쪽 바닷가의 아름다운 산이나 섬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은 여기서 비롯됐다. 보타락가는 산스크리트어의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이다. 흔히 낙가산이나 낙산이라고 줄여 부른다.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양양 낙산사와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을 꼽는데, 여수 향일암을 합쳐 4대 성지라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중요한 관음성지들이 모두 바닷가의 산이나 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강화~석모 ‘연륙교’ 빠르면 이달 내 개통 오늘 찾아가는 보문사는 이름부터가 관음성지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담긴 끝 간 데 모를 관음보살의 권능이 이 땅의 모든 중생에 미치기를 소망하며 발원한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관음도량인 보문사가 낙가산에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는 섬 안의 섬이다. 김포반도와 강화도를 잇는 연륙교가 놓인 것은 벌써 오래전이지만, 보문사에 가려면 아직은 배를 타야 한다.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연륙교 공사는 지금 마무리 단계다. 빠르면 이달 안에 개통될 것이라는 뉴스도 있었다. 주민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지만, 역설적으로 탐방객이 ‘배 타는 재미’까지 맛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강화 외포리 포구에서 카페리에 오르면 석모도까지는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배에 오르기 전 새우과자 한 봉지쯤 준비하면 입맛을 다시며 몰려드는 갈매기들에게 미안하지 않게 된다.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는 다시 8㎞ 남짓 차를 달려야 한다. 자주 있지는 않은 듯하지만 버스도 오간다. 주차장에 내리면 ‘낙가산 보문사’라는 편액이 달린 일주문이 보인다. 보문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전등사본말사지’에 ‘신라 선덕여왕 4년(635) 금강산에서 옮겨온 회정대사가 세웠다’는 대목이 보인다. 하지만 ‘유점사본말사지’의 보덕굴조에는 ‘회정선사가 고려 의종 10년(1156) 고구려 보덕화상이 창건한 금강산 보덕굴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학계에서는 두 회정을 같은 인물로 보고 고려시대 창건설에 무게를 두기도 한다.●대장경 3질 봉안 기록… 관음도량의 중심지 ‘전등사본말사지’에는 ‘신라 진덕여왕 3년(649) 마을사람들이 보문사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부처와 나한 등 22구의 돌조각을 그물로 걷어올려 절의 석굴에 모셨다’는 설화도 실어놓았다. 그 석굴이 절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석실(石室)이다. 천연동굴에 3개의 문을 만들고 석가모니와 나한을 모셨으니 일종의 나한전(漢殿)이다. 하지만 모셔진 불상의 연대는 그리 오래지 않은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석굴 좌우로는 극락보전과 용왕전, 삼성각, 범종각, 선방 등이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 최근 지은 것들이다. 관음도량으로 보문사의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것은 절 뒤편 바위 절벽에 새겨진 관음보살좌상이다. 높이 9.2m, 폭 3.3m의 당당한 관음보살이 절 앞에 드넓게 펼쳐진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관음보살은 지붕처럼 앞으로 내민 눈썹바위 아래 좌정하고 있다. 부처님이 새길 자리를 준비해 놓은 것이 아닐까 싶게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다. 불교신자라면 그만큼 관음보살의 영험이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1928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화재적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갈 것이다. 관음도량으로 보문사의 역사적 의의가 극대화된 것은 고려시대다. 고려는 고종 19년(1232) 몽골에 대항하고자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강화는 원종 11년(1270) 환도하기까지 38년 동안 피란 수도 역할을 했다. 강화경(江華京) 시대다 이른바 강도고려(江都高麗)가 부처의 가피를 입어 몽골군의 살육과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고 선원사에 보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나라 간섭기의 문인 민지가 지은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1304년 고려에 왔던 원나라 승려 철산(鐵山)이 강화 보문사에 봉안한 대장경 3질 가운데 1질을 중국 강서행성(江西行省) 대앙산(大仰山)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의 침략을 막아달라는 대장경의 안타까운 유전(流轉)이기도 하다. ●가는길목에 ‘고려 대찰’ 선원사터도 볼만 보문사(普門社)라는 표현도 눈길을 끈다. 고려시대에는 사(寺)보다 격이 낮은 도량을 사(社)라 불렀던 듯하다. 하지만 두 표현을 뒤섞어 쓴 사례도 적지 않다. 어쨌든 보문사가 팔만대장경을, 그것도 여러 질 봉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절의 위상이 크게 높았음을 의미한다. 고려를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국가적 관음도량’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고려 말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최씨 정권의 문객 이수는 칠언시 ‘보문사’에서 ‘장엄한 전각들은 천세계를 다 삼키고 높이 솟은 누대는 허공에 달려 있네’라고 읊었다. 당시의 보문사가 한적한 섬의 작은 암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에는 이수를 비롯한 최씨 정권 인사들이 정기적으로 보문사를 찾아 재를 올렸음을 짐작게 하는 내용도 있다. 팔만대장경의 비장처였던 보문사를 찾는 길에는 강화읍에서 멀지 않은 선원사 터도 들르면 좋을 것이다. 강화로 도읍을 옮긴 뒤 최우가 창건한 선원사는 당대에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양대 사찰로 손꼽히던 대찰(大刹)이었다. 오백불상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데스크 시각] ‘광화문 시대’에 생각해 본 ‘9궤 도로’/문소영 사회2부장

    [데스크 시각] ‘광화문 시대’에 생각해 본 ‘9궤 도로’/문소영 사회2부장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한 세종대로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산물도 아닌데 왜 이리 넓을까? 서울 광화문광장의 가로폭이 이리 넓은 이유는 조선왕조의 시조 이성계 덕분이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1394년 경복궁을 지으면서 광화문 앞의 도로를 그리 넓게 조성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최근에 펴낸 ‘조선이 가지 않은 길’ 79쪽에 이렇게 써 놓았다. “이성계가 경복궁을 정궁으로 지을 때 광화문 앞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도시 구조를 의식해 9궤(軌) 도로를 만들었다. 9궤 도로란 천자가 타는 9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고려 수도 개경은 황제국의 수도로 건설된 황도(皇都)였기 때문이다.” 김 소장의 이 글을 읽으면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 아니었나? 황제국이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문은 그다음 문장에서 풀린다. “태종 이방원은 그가 머문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7궤 도로를 만들었다. 이는 제후가 타는 7대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다. 태평로와 돈화문로의 도로폭의 차이는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고려의 장군으로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는 수도를 조성할 때 아직 ‘고려 백성’인 조선의 백성에게 조선이 고려보다 못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9궤 도로로 보이고 싶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반면 다섯째 아들로 형제들을 죽이는 ‘왕자의 난’ 등을 거쳐 왕에 오른 이방원은 명나라가 ‘정도전을 내놓아라’라고 하자 주저 없이 내놓을 만큼 명의 눈치를 보았다. 또 7궤 도로를 닦아 ‘제후국 조선’을 확실하게 약속했다. 그 뒤의 전개는 다들 아는 바와 같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황제의 나라가 아닌 제후국의 길을 갔고, 병자호란 등으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청나라 이후에는 나라의 위상이 형편없어졌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황제국을 칭한 나라는 고려 외에도 고구려와 발해가 있었다. 황제국을 칭하던 시절에는 대체로 부국강병을 했다. 사실 고려의 9궤 도로는 고구려를 본뜬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 역시 9궤 도로를 놓았다. 9궤 도로이거나 7궤 도로이거나 도로는 도로일 뿐 뭐가 그리 중하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국의 건물과 도시는 강한 상징성을 부여한다. 중국 황제들은 제후국에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과시용 황궁을 지어 제후국 사신들의 기를 죽였다. 이런 상징성은 용의 발톱을 황제를 상징할 때는 5개, 제후를 상징할 때는 3개 하는 식에도 적용된다. 조선은 제후국인 만큼 ‘황제는 하늘이 점지한 신성한 피로 귀족이나 백성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치르는 제천행사도 하지 않았다. 고구려나 부여에서 제천행사는 당연했다. 고려는 ‘친명정책’을 펴던 1385년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천자(天子)만 한다며 제천의례를 폐지했다. 그 제천행사를 500여년 뒤에 고종이 복원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황제가 돼 원구단을 조성하고 제천행사를 했다. 그러나 황제 등극이나 제천행사가 무의미한 시절이었다. 그 원구단을 1913년 일제가 철도호텔을 지어 훼손했다. 사드 배치로 한국은 G2인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곤란을 겪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며 갈등을 대충 봉합하며 피해 갈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은 하면서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갈등을 조절해 나갈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시원하게 뚫린 세종대로를 보면서 ‘9궤 도로’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좋겠다. symun@seoul.co.kr
  • [프로야구] 브리검 첫승… 넥센의 ‘지키는 야구’

    [프로야구] 브리검 첫승… 넥센의 ‘지키는 야구’

    넥센이 제이크 브리검의 호투를 앞세워 공동 4위로 올라섰다.넥센은 30일 잠실에서 열린 KBO리그 LG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를 챙겼다. 개막 3연전에서 LG에 싹쓸이 패배를 당했던 넥센은 올 시즌 두 번째 맞대결에서 첫 경기를 가져오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이로써 넥센은 25승(1무24패)째를 기록하며 LG(25승 24패)와 함께 공동 4위가 됐다. 잠실 5연승 기록도 이어 가게 됐다. 반면 LG의 주장 류제국은 선발투수로 등판해 7.1이닝 동안 5피안타(1홈런) 4탈삼진 3실점으로 무난한 투구를 펼쳤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최근 침체기를 겪고 있는 LG는 이날 패배로 6연패 수렁에 빠졌다.션 오설리반의 대체 선수로 넥센 유니폼을 입은 브리검은 이날 선발로 나서 안정적인 투구를 선보이며 세 번째 등판 만에 첫 승을 챙겼다. 그는 7이닝을 4피안타 5탈삼진 1자책점으로 막으며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 95구를 던졌으며 직구 최고 구속은 149㎞까지 나왔다. 직구(59개)를 주무기로 사용하면서 슬라이더(25개)와 커브(11개)를 섞어 LG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무실점 행진을 펼치다가 6회 들어 안타 3개에 1실점으로 잠시 흔들렸지만 병살타를 유도해 내며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평균자책점은 2.45에서 2.00으로 낮아졌다. 넥센의 타자들도 제 몫을 다했다. 2회초 김민성이 희생플라이로 선취점을 냈고, 4회에는 서건창이 비거리 105m짜리 솔로포를 터트렸다. 8회에는 ‘바람의 손자’ 이정후가 5경기 연속 2루타를 만들어 냈고, 이어 고종욱이 3루타로 1타점을 추가했다. 경기 후 브리검은 “재미있는 시합이었다. 전체적으로 배터리 호흡이 좋았고 야수들도 멋진 수비를 보여 줬다”며 “앞선 두 경기에서는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 두 경기로 적응 단계를 거쳤다”고 소감을 밝혔다. 장정석 넥센 감독도 “한 주의 시작이 좋다. 브리검이 호투를 해 지키는 야구가 가능했다”고 치켜세웠다. 수원에서는 SK가 시즌 16호 홈런을 터트린 최정의 활약을 앞세워 kt를 8-3으로 눌렀다. 대전에서는 한화가 이태양의 쾌투에 힘입어 두산을 5-2로 일축했고, 대구에서는 롯데가 삼성을 1-0으로 제압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역사속 공무원] 담배 1태면 감찰자리도 샀다

    [역사속 공무원] 담배 1태면 감찰자리도 샀다

    누워서 흡연하면 잡아서 신문 재배지 늘자 금지 상소 빗발쳐 “범법자 양산” 금연법 결국 좌초 담배는 광해 8년인 1616년 일본에서 들어왔으며, 급격히 확산돼 60여년 뒤에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본에서 재배되던 풀인데 잎이 큰 것은 7, 8촌(寸)으로 가늘게 썰어 대나무나 은으로 만든 통에 넣어 피우는데 맛은 쓰고 매우며, 가래 치료와 소화에 도움이 된다고 담배에 대해 설명했다. 또 오래 피우면 간을 상하게 하고 눈을 어둡게 한다고 했다.숙종실록 8권 1679년 7월 12일자에는 집사(執事)들에게 향소에서는 예를 갖추도록 지시했으나, 기대거나 누워 담배를 피웠다며 임금이 이들을 모두 잡아 신문하고, 보고하지 않은 감찰관도 함께 신문하도록 명령했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임금이 승지와 집사들에게 왕실 제사 때는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직접 지시한 기록이 실록 여러 곳에 있다. 담배가 부정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정조 1년인 1777년이다. 임금은 “술과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말라는 조항은 있지만,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조항은 없다. 공연히 담배를 못 피우게 해 시끄러운 일만 야기되었다. 담배는 기호품인데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고 생각이 안 나겠는가. 앞으로는 술만 금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18세기 초에는 담배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어 금지를 요청하는 상소가 잇따랐다. 영조실록 39권 1734년 11월 5일자는 장령 윤지원의 상소로 “담배의 해독은 술보다 더욱 심하니 과조(科?)를 엄격히 제정하여 시골에서는 심지 못하게 하고 점포에서는 판매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60여년 뒤에 담배의 재배면적은 더욱 늘어났다. 호남 위영사 서영보는 “고구마는 번식력이 좋아 10년이 지나지 않아 지금의 담배나 수박처럼 전국 어디서나 물과 불처럼 흔하게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1797년 정조는 사복사 제조 이병모와 농정 전반에 관해 논의하던 중 “남초를 심은 전지에 모두 곡식을 심게 하면 몇만 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하자 이병모 역시 “기름진 토지에 다 남초를 심으니 이것이 가장 애석합니다”라며 담배 재배금지 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보고했다. 담배 금지 상소가 잇따를 만큼 담배 재배면적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당연히 수요가 늘었기 때문으로 주요 뇌물수단이 될 정도로 가격이 좋았다. 숙종실록 6권 1677년 12월 4일자는 무인 서치가 담배 1태(?·말 한 마리에 실을 수 있는 양)를 이조판서의 사위에게 뇌물로 주고 감찰에 제수되었으며, 집의(執義) 안의석은 금을 주고 관직을 구했으니 삭탈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870년 12월에는 보은군수가 뇌물을 받아 처벌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고장의 수령이 담배 100근을 또 뇌물로 받아 고종이 노발대발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식량공급에 문제가 될 정도로 담배의 경지 잠식이 심각했지만, 역대 임금들이 금연령 또는 재배금지령을 미룬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순조 8년인 1808년 11월 19일 보문각에서 열린 역대군감 강론에서 임금은 “이른바 남초가 위와 담을 치료하는 데는 유효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지는 의문이다. 근래 들어서는 세속의 풍습이 이미 고질화되어 젖먹이만 면하면 긴대에 담배를 피운다. 속습이 이 지경인데 금지할 수 없겠는가?”했다. 각신 박종훈은 “몸에 이익이 없는데도 좋아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만약 이를 법으로 금지시킨다면 범법자를 양산할 것입니다”라며 금연법을 반대했다. 임금은 슬그머니 화재를 술의 폐해로 돌렸고 끝내 금연법은 제정되지 못했다. 최중기 명예기자(국가기록원 홍보팀장)
  • 세종대왕 눈병 고친 초정약수 맛보러 오세요

    세종대왕 눈병 고친 초정약수 맛보러 오세요

    충북 청주시는 ‘제11회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를 오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내수읍 초정리 초정문화공원에서 연다고 22일 밝혔다.이 축제는 세종대왕이 약수로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머물렀던 역사 등을 알리며 초정약수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됐다. 가장 큰 볼거리는 세종대왕이 한양을 떠나 초정리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어가 행렬이다. 축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지난 20일 청주 성안길에서 사전 어가 행렬이 펼쳐졌고 27일 오후 4시 30분에 고종 황제의 증손자인 이원(55)씨가 세종대왕 분장을 하고 참여하는 어가 행렬이 초정리 주변 2㎞ 구간에서 진행된다. 대학생들과 군 장병 등 200여명은 호위 무사, 신하, 궁녀, 장군, 선비 등의 의상을 입고 어가 행렬을 빛낸다. 왕비는 전국 공모를 통해 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뮤지컬 배우가 선발됐다. 축제 기간 세종대왕의 과학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휘호대회, 사생대회, 우리말경연대회 등도 마련된다. 초정약수를 이용해 만든 소머리국밥, 화채, 막국수, 전병, 콩국수와 잔치국수, 삼겹살 등을 맛볼 수 있는 먹거리장터도 운영된다. 청주 지역 4개 구 어르신들을 초청해 경로잔치도 벌인다. 초정에 와서 아이와 마을주민 등 400명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옷감 등을 하사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방문객들은 초정문화공원 내 약수시음대에서 미국의 샤스터, 영국의 나폴리나스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로 알려진 초정약수를 마셔 볼 수 있다. 초정약수로 공짜 족욕을 즐길 수도 있다. 세종대왕을 테마로 한 마당극과 뮤지컬, 축제장 속에서 세종대왕 복장을 한 사람을 찾아 사진을 찍으면 기념품을 주는 이벤트도 펼쳐진다. 600여년 전에 발견된 초정약수는 세종대왕이 2차에 걸쳐 총 117일간 머물며 눈병을 고쳤고 세조 임금이 이곳에서 약수로 피부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에 전해진다. 초정약수는 쌉싸래하면서 톡 쏘는 맛이 난다. 감미료 등을 첨가하지 않은 사이다 맛을 생각하면 된다. 유리탄산, 칼슘, 나트륨, 중탄산, 칼륨, 마그네슘, 이온이 많이 들어 있다. 자체 탄산가스가 살균 작용을 해 위생적이고 피부미용에도 좋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이주의 문화 레시피]

    [이주의 문화 레시피]

    전시●이용순 전(작품) 고미술품 속 달항아리와 가장 흡사한 색감을 내기 위해 흰색 태토와 맑은 유약은 자신이 채취한 재료만을 고집해 온 작가의 달항아리전. 24일~6월 1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 (02)733-4867. ●‘조각의 미학적 변용’전 조각으로 특화된 미술관의 올해 첫 번째 기획전. 현대조각의 변용된 조형상을 미학적으로 모색한다. 김정명, 신옥주, 이재효, 홍순모 등 4인의 작가는 저마다의 고유한 조형적 표상으로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는 작품을 선보인다. 6월 28일까지. 경기 남양주시 모란미술관. (031)594-8001~2. 대중음악 ●김광진 콘서트 ‘지혜’ ‘마법의 성’ 등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으로 사랑받아온 더 클래식의 보컬이자 작곡가 김광진이 3년 만에 신곡 ‘지혜’, ‘배다리’ 등을 발표하고 갖는 콘서트. 더 클래식의 또 다른 멤버 박용준을 비롯해 드러머 신석철, 기타리스트 이성렬, 베이시스트 김정렬 등과 함께 무대를 꾸민다. 26일 오후 8시, 27일 오후 5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삼성홀. 8만 8000원. (02)549-5520.●플랫폼 창동61 개장 1주년 기념 페스티벌(포스터) 서울 북부 지역 대중음악 공간인 도봉구 플랫폼 창동 61이 1주년을 맞아 공연, 대중음악 100대 명반 전시, 장터 등을 연다. 고고보이스, 잔나비, 칵스(26일 오후 7시), 국카스텐, 몽니, 신대철과 한상원의 프로젝트 밴드 블루스 파워 어게인(27일 오후 6시 30분). 서사무엘, 카더가든(28일 오후 5시) 등이 무대에 오른다. 무료. (02)993-0567. 뮤지컬·연극●뮤지컬 ‘밀사’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됐던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의 활약을 그렸다. 6월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2만~5만원. (02)399-1772.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 한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지난 2월 초연 당시 인기에 힘입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 ‘창조론과 진화론 중 어느 쪽이 타당한가’라는 묵직한 주제를 놓고 각 분야의 패널로 분한 배우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7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4만원. (02)744-4331. 클래식●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프랑스 3대 교향악단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이 4년 만에 갖는 내한공연이다. 지난해 정명훈의 바통을 이은 예술감독 미코 프랑크는 첫 방한. 시벨리우스와 라벨 등을 들려준다.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조지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다. 25일 오후 7시30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4만~15만원. (02)399-1114. ●말러 천상의 삶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단장인 성시연이 오랜만에 서울시향 지휘봉을 잡고 세계 음악계의 프리마돈나 임선혜와 함께 말러 교향곡 4번을 연주한다. 2006년 게오르그 솔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성시연은 보스턴 심포니, 서울시향 부지휘자를 거치며 명성을 쌓고 있다. 25, 26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만~7만원. 158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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