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고종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유승민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종교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농업인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둔기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542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1862년 화마 입은 대승사, 부석사 무량수전 목각탱 모셔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1862년 화마 입은 대승사, 부석사 무량수전 목각탱 모셔오다

    ‘죽령 동쪽 100리에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 갑자기 4면이 한 장(丈)이나 되는 돌이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떨어졌다. 그 돌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가 새겨졌는데,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행차하여 절하고는 바위 곁에 사찰을 창건하도록 했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했는데, 법화경을 외는 비구 망명(亡名)을 주지로 삼아 바위를 깨끗이 쓸고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산 이름은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승려가 죽어 장사 지냈는데 무덤 위에 연꽃이 피어났다’●대승사 곁에는 총지암·윤필암 등 유명 암자 즐비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굴불산(掘佛山)·만불산(萬佛山)’에 나오는 이야기다. 망명(亡名)은 글자 그대로 이름이 잊혀져 알 수 없게 된 승려다. 한 장(丈)이란 한 자(尺)의 열배에 이르는 단위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인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서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을 둔다. 사방여래가 새겨진 바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주변 고을 사람들을 극락정토로 한데 이끌고 가겠다는 부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사불산과 대승사는 경상북도 문경시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이 서남쪽으로 뻗어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에 사불산이 있고 그 기슭에 대승사가 있다. 해발 913m에 이르는 사불산의 오늘날 공식 명칭은 공덕산(功德山)이다. 역덕산이든, 공덕산이든, 사불산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근 중생에게 두루 미치게 하겠다는 속뜻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사불산 일대는 하나의 불국토(佛國土)다. 공덕산 동쪽 기슭 예천 땅에는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이 전하는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머문 적이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은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했고, 건국 이후 용문사를 중건했다고 한다. 사불산 서쪽의 해발 1103.2m 운달산 아래는 김룡사(金龍寺)가 있다. 대승사 창건 이듬해인 588년(진평왕 10) 운달조사가 세웠다는 설화가 전한다. 사불산은 그 자체로 부처의 땅이다. 대승사 바로 곁에는 새로 지은 총지암(總持庵)을 비롯해 문수암(文殊庵), 관음암(觀音庵), 보현암(普賢庵)이 있다. 윤필암(潤筆庵)과 묘적암(妙寂庵)은 대승사만큼이나 유명세를 떨치는 산내 암자다. 대승사에 가려면 문경시청이 있는 옛 점촌에서 자동차로 30~40분은 달려가야 한다. 오늘날의 대승사는 전각이 빽빽하게 들어선 대찰(大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린 이후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100년 남짓에 걸쳐 중건한 절집은 6·25전쟁에도 무사했건만, 1956년 대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됐다고 한다. ●1956년 화재… 전각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재건 앞서 고려시대에도 화를 입었다. 진정국사 천책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에는 ‘갑진년 8월 두 세 명의 도반과 지팡이와 짚신을 챙기고 사불암을 배례하고 대승사를 찾았다. 옛 건물과 회랑에는 오직 한 사람의 늙은 승려가 한 사람의 사미를 데리고 거처하고 있었다.…노승은 ‘내가 이 절에 머리 깎고 들어온 지 이미 60년 남짓인데 그동안 끊임없이 불법을 지닌 고승이 교법을 널리 펴 왔지만 근래 오랑캐 말발굽이 침범해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갑진년은 1244년(고종 31)이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례 이어진 몽골의 침입을 가리킨 것이다. ●총지암 석탑 복원땐 삼국시대 창건설 밝혀질 수도 지금 대승사에서 볼 수 있는 전각은 대부분 1960년대 이후 다시 지은 것들이다. 대웅전과 그 앞에 세워진 만세루도 그렇다. 절집은 새것이어도 고찰(古刹)의 흔적은 넘쳐난다. 대웅전 앞에 놓인 한 쌍의 노주석(柱石)이 또한 그렇다. 광명대(光明臺)라고도 불리는 노주석은 야간 법회가 있을 때 주위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노주석 기둥에는 1729년(영조 5) 세웠음을 알리는 명문(銘文)이 있다.대웅전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더욱 특별하다. 후불탱을 그림 대신 조각으로 만들어 모신 것이다. 목각탱(木刻幀)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10개의 나무편을 조합해 아미타정토세계를 표현했다.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조선 후기 집중적으로 조성됐는데 남아 있는 것은 6점뿐이다. 예천 용문사와 상주 남장사 보광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서울 경국사, 남원 실상사 약수암 것이 그렇다. 이 목각설법상이 당초에는 영주 부석사의 큰법당인 무량수전에 모셔졌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862년(철종 13) 대화재를 당한 대승사는 새로운 큰법당을 짓고 폐찰 상태로 방치되던 부석사에서 이 목각탱을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후 법등(法燈)이 다시 이어진 부석사에서 강력하게 반환을 요구했다. 결국 대승사는 목각탱을 돌려주지 않는 대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의 수리비용을 대기로 합의한다.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은 고려시대 절집이다. 당시 두 절 사이에 오간 문서 4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합의서에 해당하는 것이 완의(完議)다. 이 문서들은 1973년 목각아미타설법상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목각설법상이 국보로 승격됨에 따라 지금은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대승사 동쪽 언덕의 총지암 마당에는 석탑의 부재들이 여러 무더기 쌓여 있다. 상당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도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듯하다.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대승사가 삼국시대 창건설이 전하는 사찰의 이미지를 되찾는 데 적지 않은 몫을 할 수 있을 듯하다.●윤필암에 사면석불 배례할 수 있게 사불전 세워 사면석불은 대승사 뒤편으로 보이는 공덕산 줄기의 정상부에 있다. 하지만 대승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면석불을 만나려면 산 너머 윤필암으로 가야 한다. 대승사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윤필암과 묘적암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사면석불을 가까이에서 대하고 싶다면 윤필암에서도 20~30분쯤 산을 올라야 한다. 오랜 세월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조각은 희미하다. 윤필암에는 산에 오르지 않고도 사면석불에 배례할 수 있도록 사불전(四佛殿)이 세워졌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처럼 사면석불 쪽을 향해 커다랗게 창을 낸 전각이다. ●마애불 옆 전설 속 미륵암은 흔적 없이 사라져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오르는 중간에는 높이 6.1m의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양촌 권근(1352~1409)은 ‘사불산 미륵암 중창기’에 마애불과 함께 미륵암의 존재를 언급해 놓았다. 마애불 곁의 신라시대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작은 절이 미륵암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 암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dcsuh@seoul.co.kr
  • 대치명인학원 독학재수관 천안캠퍼스, ‘2019 재수반’ 수강생 모집

    대치명인학원 독학재수관 천안캠퍼스, ‘2019 재수반’ 수강생 모집

    명인학원 독학재수관 천안캠퍼스는 2019학년도 대입에 재도전하는 수험생을 대상으로 재수반 수강생을 모집한다고 22일 밝혔다. 재수선행반 개강은 2018년 1월2일, 재수정규반 개강은 2018년 2월19일이며 수강생은 선착순 마감될 예정이다. ‘2018 재수반’은 입시 전문 컨설턴트와 1:1 진학 지도를 통해 수험생의 수시 및 정시 목표 대학과 학과에 합격하기 위한 연간 학습 로드맵과 시기별 과목별 학습 전략을 개인별로 맞춤 설계한다. 이를 위해 개인별 학습 수준과 학습 성향을 분석, 단과 현장강의 또는 인강을 토대로 개인 맞춤표준시간표를 설정하고, 설정된 학습플랜에 따른 학습 목표를 매일 지속적으로 점검, 관리한다. 개인별로 취약한 과목은 재수생을 위한 단과 수업을 개설해 수업 후 즉시 개인별 클리닉을 통해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했다. 단과 수업은 대치동 강사의 수준높은 강의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재수반 학생들은 천안재수학원 명인학원 강의를 할인된 금액으로 수강할 수 있다. 명인학원 학원사업부 고종식 본부장은 “명인학원 재수반은 그동안 천안지역 학생들이 갈망했던 국어 김봉소 모의고사를 비롯한, 대치동의 모의고사 컨텐츠 시스템를 도입하여 실전 감각을 익히도록 한 것과 성적이 저조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1:1 멘토링 시스템이 학생들의 성적 향상의 비결”이라고 귀뜸했다. 이어 “1:1 멘토링 시스템은 수학이 부진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식 지도를 함으로써 대폭적인 성적 향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멘토가 국,영,수 주요 과목에 대해 멘티에게 개별적으로 학습 스케줄 관리, 학습 점검과 질의 응답, 공부법 상담 등을 함께해줘 수험생활 전반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학습관리 프로그램인 매월 사설 및 평가원 모의고사, 매일 영단어 TEST와 영어듣기, 뇌새김(Reminding)노트 정리를 통해 배운 것을 점검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며 “공부하다 모르는 것은 명인학원 소속의 국, 수, 영 과목별 강사에게 질의응답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김영이 자수 개인전 “바늘 한 땀·한 선에 하나 된 마음”

    김영이 자수 개인전 “바늘 한 땀·한 선에 하나 된 마음”

    “바늘 한 땀이 느낌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어요. 한 땀이 모여 한 선이 되고 그게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학이 되는 거잖아요. 땀수를 고르게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전체적인 조화가 이뤄지면 좋고요.”전광석화처럼 바뀌는 세상에 40여년을 전통 자수에, 그것도 오롯이 한 스승 밑에서 배워 온 김영이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전수교육 조교가 개인전 ‘일침일선일심’(一針一線一心)을 오는 23~30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전시장 ‘올’에서 연다. 지난해 봄 세상을 떠난 한상수 자수장의 문하에 1976년 들어가 바늘귀 꿰는 법부터 배웠지만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음전한 종갓집 맏며느리 같은 김 선생은 20일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스승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 ‘내년쯤에는 네 전시회를 해도 좋겠구나’라고 말씀하셨다”며 “스승에게 누가 될까 봐 못했던 일에 용기를 내게 됐다”고 나직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2003년 전승공예대전 국무총리상 수상작인 수월관음도 등 70여점과 고 한상수 자수장의 작품과 김 선생의 문하생 작품까지 모두 100여점이 전시된다. 수월관음도는 관세음보살의 온몸을 덮은 너울과 그 안에 내비치는 화려한 무늬가 너무도 정교해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안긴다. 고종이 재중원 원장에게 하사한 ‘정재무가화분도 자수 병풍’의 정교함도 못지않다. 서울 운현궁의 ‘백수백복도 자수 병풍’을 재현한 작품에서도 조선 시대 화려했던 궁수(宮繡)의 아름다움과 고아한 기품을 만끽할 수 있다. 전시회 제목은 한 선생의 친딸인 김영란 한상수자수박물관 부관장이 ‘일침일선’까지 생각한 것에 김영이 선생이 ‘일심’을 더한 것이다. 인터뷰 내내 친언니 이상의 우애를 보인 김영이 선생은 “심란하거나 마음의 가닥을 잡지 못할 때 자수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기쁘고 하나 된 느낌일 때 가장 잘 놓을 수 있다”며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하나 돼 혼으로 승화되는 무아지경”이 훌륭한 자수의 첩경이라고 설명했다. 대다수 무형문화재처럼 일정 기량을 갖춘 제자를 키워내기가 쉽지 않다. 김영이 선생은 “우리가 한창 배울 때는 수틀 밑에서 노루잠을 자고 일어나 밥 먹는 시간만 빼고 기법을 익혔다”며 “10년 이상 백화점의 문화아카데미에서 가르쳤지만 취미나 태교의 방편으로만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반듯한 제자 내놓기가 어렵다”고 안타까워했다. 스승은 늘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되뇌셔서 자신도 어느덧 문하생들에게 똑같은 말을 들려주고 있다며 베시시 웃었다. 제주 출신인 한상수 선생은 부산 피란 시절 조종호 선생에게 자수를 배워 60년대 일본의 주문자제작상표(OEM)로 큰 돈을 벌어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화랑을 경영할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 자수를 따라 했다. 해서 한상수 선생은 우리 궁중에서 해오던 자수 유물을 찾아 전통 기법을 익혔다. 김영이 선생은 “17살 때 언니와 함께 스승을 뵙고 바로 문하에 들어갔다. 곧바로 저를 마음에 들어하셔서 유물을 찾으러 가면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고 말했다. 친딸 김영란은 이론을, 수양딸이나 다름없는 김영이는 실기를 익히라고 일찌감치 길을 내주셨다. 김영이 선생은 오래 전 정말 마음에 드는 제자가 있어 설득하려 했지만 생활을 감당할 지원을 해줄 수 없어 놓쳤다며 헛헛해 했다. 그래도 취미로 자수를 배우는 이들을 위한 초급 코스와 중급 과정 등 커리큘럼을 제대로 갖춰 노력하고 있다. 근래에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거나 건축학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이도 자수의 매력에 빠져 조감도를 자수로 제작하는 일까지 있다고 했다. 김영이 선생은 “뜨개질이나 퀼트 같은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할 수도 있지만 자수는 수틀을 갖고 앉은 자리에서 진득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면서 “일주일에 딱 한 번, 문화아카데미가 있는 금요일에만 외출해 바깥일을 하고 다른 날은 종일 자수에 매달린다”고 소개했다. 자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종합예술이다. 도안이나 배색, 자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흔히 여자가 하는 손재주란 식으로 깎아내리는데 전통 자수는 예술적 감각과 창의력이 반드시 필요한 예술”이라며 “스승도 예술적 품격이 굉장히 필요한 분야라고 늘 말씀하셨고 전통 자수를 국가 브랜드로 키우고 싶다고 하셨다”고 들려줬다. 김영란 부관장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13년 동안 운영하던 한상수자수박물관을 잠시 문 닫고 내년 상반기 경기도에서 새로 문을 열 계획이다. 수장고에 어머니가 남긴 작품 1000여점을 보관하고 있어 다시 햇볕을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사진이 아니라 자수입니다” 김영이 선생 개인전 23일부터

    “사진이 아니라 자수입니다” 김영이 선생 개인전 23일부터

    관세음보살의 전신을 뒤덮은 투명한 너울과 그 안에 내비치는 화려한 무늬가 너무도 정교해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다. 고종 임금이 재중원 원장에게 하사한 ‘정재무가화분도 자수 병풍’의 정교한 아름다움도 못지 않다. 서울 운현궁의 ‘백수백복도 자수 병풍’을 재현한 작품도 조선 시대 화려했던 궁수(宮繡)의 아름다움과 정연하고 고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전통 자수 예술가 김영이 선생이 모두 한땀 한땀 수를 놓은 작품이다. 그의 개인전 ‘일침일선일심(針一線一心)’이 23일부터 30일까지 서울 강남구 삼성동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전시장 ‘올’에서 열린다. 김영이 선생의 작품 70여점과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인 스승 한상수 선생의 작품과 문하생들의 작품 등 모두 100여점을 볼 수 있다. 김영이 선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인 고 한상수 선생의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돼 전통 자수의 맥을 잇고 있다. 김영이는 1976년부터 한상수 자수장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했다. 1979년 지방기능경기대회 은메달, 1985년 제10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1986년 제11회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1988년 제13회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2003년 제28회 전승공예대전 국무총리상, 2008~2009년 동남아문화사업 동반자 강습, 2009년 한국-베트남 문화교류 무형문화재 공예전, 2010년 작품전 등 다양한 수상과 경력을 쌓고 있다. 자수는 여러 색깔의 실을 바늘에 꿰어 바탕천에 무늬를 수놓아 표현하는 조형 예술로 기록으로는 기원이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전시에서 김영이 조교는 실 한 올을 모아 이루는 자수 조형의 세계를 전통 기법으로 재연하면서 동시에 숙련된 기량과 창의적인 해석을 통해 섬유예술만의 독특한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국립무형유산원, 한상수자수박물관의 후원으로 열리는 개인전 개막에 앞서 22일 오후 3시 같은 장소에서 조그만 축하연이 열린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서울플러스 기고] 무술년의 역사적 의미와 전망/류동학 혜명학술원장

    [서울플러스 기고] 무술년의 역사적 의미와 전망/류동학 혜명학술원장

    붉은 닭의 해였던 정유년은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되어 조기 대선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기념비적인 한해로 기록되었다. 2018년 무술(戊戌)은 1번째 갑오로 시작하여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 계묘 순으로 3순(旬)의 육십갑자 중 35번째다. ‘무’는 황이므로 ‘노란 개의 해’이다. 즉 ‘황견의 해’이다. 역사적으로 1598년 무술년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해 조선에 주둔하던 왜군 전군 철수령이 내려 일본으로 가던 왜군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전투 중에 순국한 해이자, 조일7년 전쟁이 종식된 해이기도 하다. 1658년 무술년은 청나라 순치제 재위 15년으로 조선 효종이 북벌운동에 매진하던 때로 청의 요청으로 신류(申瀏)장군이 이끄는 260명이 러시아를 정벌하는 제2차 나선정벌이 있던 해였다. 또한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잉글랜드 공화국을 성립시켰던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한 해다. 1898년 무술년은 1863년부터 조선을 좌지우지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서거했다. 또한 청나라의 서태후가 광서제를 유폐하고 섭정을 실시하면서 캉유웨이가 주도한 무술변법이 좌절된 해이다. 조선에서는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 개최와 관민공동회 개최 및 헌의 6조 결의가 있던 기념비적인 해였으나, 결국 극우파의 공격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었다. 1958년 무술년의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기타 1명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군소정당들은 몰락하고 양당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018년의 무술년 간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목·화·토·금·수로 이루어진 오행 가운데 중심은 토(土)이다. 토의 원천적인 진리는 역의 기원인 복희씨가 발견했다는 하도(河圖)의 중앙에 포진한 5토(土)와 10토(土)이다. 여기서 5토(土)는 사물의 구심체가 되어 구심력을 나타내고 있다. 5토(土)는 우주와 같은 광대무변한 하늘의 기상을 담은 무토(戊土)라는 천간으로 표현한다. 무토(戊土)는 주로 중심을 지탱하는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사물의 조절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흡수력이 강한 구심체의 역할을 충실하게 맡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무(戊)년이 들어가는 해에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국운이 상승해 구심체의 현상을 보여왔다. 예컨대 기원전 2333년 무진년에 단군조선이 개국했다. 668년 무진년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698년 무술년 발해 건국, 918년 무인년 고려 건국과 1948년 무자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이 이어졌다. 1988년 무진(戊辰)년에는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다. 2018년 무술년엔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 이와 같이 무토는 중심을 모으는 작용을 하는 해였다. 이러한 무토(戊土)는 태양을 항성으로 하는 태양계에서 태양의 행성인 지구와 토성으로 볼 수 있다. 지구(地球, Earth)라는 용어가 바로 무토를 나타낸 것이다. 무토의 하늘의 기상(氣象)으로는 저기압, 구름, 안개, 무지개, 우박, 천둥, 번개, 장마, 노을 등이다. 무토(戊土)는 양(陽)의 토로 하늘의 기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하늘의 기상을 담고 있는 무토가 땅의 기운인 지기(地氣)를 만나면 물을 관리하는 진토(辰土)와 불을 보관하는 술토(戌土)로 변한다. 개띠인 술토(戌土)는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뱀띠, 닭띠, 소띠에게는 행운의 방향이 서북방이다. 또한 뱀띠, 닭띠, 소띠에게는 귀인이 나타나는 행운의 한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음력 1월생, 음력 2월생, 음력 5월생은 이동이나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좋다. 단, 음력 3월생은 집안문제나 주거이동 및 부서이동의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내년 무술년의 개띠는 범띠와 말띠와는 인오술 삼합(三合)이라 부른다. 즉 범띠나 말띠는 직장이나 조상 관련 일에 좋게 작용하는 해이다. 또한 토끼띠와는 묘술합으로 부부의 친화력과 같이 좋으므로 토끼띠는 좋은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개띠는 용띠와는 서로 충돌하는 상충(相沖)이라 용띠는 직업적인 문제나 집안 문제로 인하여 불협화음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양띠와 소띠는 개띠해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삼형살이라 갈등구조나 형법적인 문제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진술축미는 각 계절의 환절기 즉 음력 3월(진, 용), 음력 6월(미, 양), 음력 9월(술, 개) 음력 12월(축, 소)생에 해당하고, 띠로는 용(진),개(술), 소(축), 양(미)을 상징한다. 이러한 진술축미는 명리학에서 괴강살, 백호살, 화개살 등 다양한 신살을 만들었다. 개띠는 화개살이다. 화개살이란 화려함이 덮인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하나의 기운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운이 끝나며 암장(暗藏)된다는 자연순환의 법칙을 적용해 한 계절의 순환주기가 끝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무술년에는 1987년의 헌법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헌법을 개정하여 21세기 대한민국의 지침서가 되어야 한다. 강력한 지방분권형 국가를 지향하여 중앙과 지방이 더불어 잘 사는 대한민국으로 재편해야 할 시점이다. 화개가 드는 해(용·개·소·양띠)에는 소비경제가 위축되고, 경제가 정체기로 어려워지는 공통적 현상이 작용해 왔다. 그 대표적 예가 지난 1997년 정축년 소띠해의 IMF 외환위기와 2003년 계미년 양띠해의 카드대란, 2009년 기축년(소띠)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성장률 0.7%를 기록했다. 2012년 경제 성장률 2.3%를 기록했다 따라서 무술년은 경제위기에 대비해 내실을 다지고 실속있게 생활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개띠이다. 현지 시각으로 1946년 6월 14일(한국시각 15일로 뉴욕보다 14시간 빠름)에 미국 뉴욕주 뉴욕 퀸스에서 태어난 그의 사주는 병술년 갑오월 경신일에 태어났다. 그는 모험심이 강하고 도전적인 인물이다. 피아가 명확한 기질이지만, 무술년은 가치관의 변화가 많이 동반된다. 8월과 9월에는 트럼프에게는 동반자적인 관계에 금이 가는 어려움이 동반된다. 중국의 황제급 주석인 시진핑은 1953년 6월 15일생(계사년 무오월 정유일 임인시생)이다. 그는 48세 이후 권력을 향하여 진격하는 운세로 특히 2016년 이후 70대 후반까지 천운이 도와 더욱더 날개를 달게 되어 웅비한다. 관심 영역을 글로벌적으로 확대하여 무술년은 새로운 역동성을 보인다. 다만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 비판세력과 충돌하고 입방아에 오르는 조직의 불협화음을 야기한다. 6월경에 파열음이 정점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진년 계축월 을해일 병자시생으로 무술년은 기존의 가치관의 많은 변화가 동반된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한해로 여름 지방선거에서는 본인의 의사가 관철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만 가을과 겨울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한편 야당의 홍준표 대표는 보수세력을 응집시키고자 하지만 상황이 쉽게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해서 6월과 7월에 상당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으로 내 몰릴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 당의 안철수 대표는 1월에 상당한 번뇌와 고민 끝에 2월부터 자기 가치실현으로 동료들과의 파열음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5월의 파열음을 극복하면 6월에는 소기의 성과를 낼 것이다. 바른 정당의 유승민 대표는 1958년 1월 7일(정유년 계축월 갑신일)에 태어났다. 유 대표는 내년에는 자기 영역을 확대하는 기세로 상당한 약진을 할 가능성이 높다. 단 5월은 본인의 의사와 상대방의 의사가 충돌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은 내년 4월에 측근으로 인하여 배신감과 아픔을 경험할 기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한해이다. 2018년 무술년은 지방분권형 국가로의 헌법개정이 이루어져 대한민국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동반되고 2019년 기해년의 역동적인 출발을 기약하는 한해로 미래를 준비하고 대한민국의 다양한 세력의 응집을 기약해 본다. 인문명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전 안동정보대학 공무원양성과 초빙교수 저서 : 대통령의 천기누설, 대통령의 운명
  • “폐하께선 욕심이 습관이 돼”…조선 선비의 ‘돌직구 사직서’

    “폐하께선 욕심이 습관이 돼”…조선 선비의 ‘돌직구 사직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상상을 한 번쯤 해 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사직서엔 절대 진실은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당신(상사) 때문에 퇴사를 결심했다거나 이 월급으로는 숨만 쉬고 살아야 한다거나 이런 진짜 이유 말이다. 그래서 쓰는 표현은 대개 ‘일신상의 사유’라는 한 줄이다.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다른 양상이다. 우리가 알 만한 역사 속 선비들 중 목숨을 걸고 최고 통치자인 임금에게 보란듯이 ‘돌직구 사직서’를 쓰고 떠난 이가 적지 않다. 신간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눌민)엔 정치철학자 김준태가 조선 선비들의 사직 상소를 풀어 엮은 주옥같은 사직서 28편이 담겨 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이 인조에게 올린 한성판윤(현 서울특별시장) 사직서는 그야말로 절절하다. “신하가 나랏일을 도모하면서 먼 앞일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혼자의 신념대로만 과감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에 이르렀다면, 그 처리한 일은 비록 바르더라도 그 죄를 면할 수는 없사옵니다. 주화라는 두 글자가 신의 평생 허물이 될 것이나, 신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오명을 감당한 그의 절실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조선 후기 의병장으로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이 고종에게 쓴 ‘의정부 찬정’ 사직서는 그 의기가 날카롭고 높다. 최익현은 국가 위기의 근본 원인이 고종이라고 봤다. “폐하께서는 욕심이 습관이 되셨다”, “큰 그림 그리는 일엔 어둡다”, “아첨을 좋아하고, 정직을 꺼리며, 안일함에 빠져 노력할 줄 모른다” 등 표현 하나하나가 비수가 돼 왕의 가슴에 꽂히지 않았을까. 이 밖에 임금을 정치적 고아라고 칭하고, 대비를 과부라고 서슴지 않고 쓴 조식의 대쪽 같은 사직서, 선비상을 오롯이 보여 준 조광조의 사직서 등 벼슬을 탐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내놓은 직언들이 세월이 흘러도 빛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아우디 공식딜러 태안모터스, 연말 사회공헌 활동 펼쳐

    아우디 공식딜러 태안모터스, 연말 사회공헌 활동 펼쳐

    아우디 공식딜러 태안모터스가 지난 12월 6일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서 열린 ‘2017 범죄예방 한마음대회 및 모범청소년 장학결연식’에서 탈북민 및 다문화 가정 청소년이 참가하는 동·하계 캠프비용을 전달하고 모범청소년을 대상으로 선물을 증정하였다. 서울 남부지방검찰청이 주최하고 법무부 법사랑위원 서울남부지역연합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최종원 서울남부 지검장을 비롯해 관계 인사 180여명이 참석했으며, 청소년 30명과 대학생 10명에게 장학금이 수여되었다. 특히 태안모터스는 2017년 프로야구 시즌 동안 고척스카이돔에서 일정 구역 내 홈런 기록 시 100만원이 적립되는 ‘태안 홈런존’을 운영하여, 넥센 히어로즈 타자 4명(허정협, 고종욱, 초이스, 주효상)이 각각 홈런 1구씩을 기록해 400만원을 적립하였다. 이에 태안모터스 기부금 100만원을 더해 총 500만원을 금번 동·하계 캠프비용 지원을 위해 전달하였다. 2013년 모범청소년 장학금 전달을 시작으로 태안모터스는 매 년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지속해왔다. 이후 영락보린원 아이들을 위한 후원활동을 전개했고 이와 더불어 사회적 취약계층인 출소자와 그 가족 및 재소자를 지원하는 ‘사랑의 저금통’을 모금하였으며, 세월호 피해자를 위한 성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한편 태안모터스는 수도권 7개 전시장, 7개의 서비스센터, 1개의 인증중고차 전시장을 운영 중이며 2018년 2월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남산전시장과 9월 송도 전시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대한제국 애국가와 日기미가요, 아버지가 같네

    대한제국 애국가와 日기미가요, 아버지가 같네

    프란츠 에케르트/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지음/문신원 옮김/연암서가/440쪽/2만 5000원퀴즈 하나.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國歌)는? 애국가라는 답이 많을 것이다. 맞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윤치호 또는 안창호 추정의 가사에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그리고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같은 가사를 붙여 불리우던 속칭 독립군 애국가에 앞선 애국가가 따로 있다. 바로 대한제국 애국가다.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聖壽無疆) 하사/ 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같이 쌓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사/ 오천만세(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하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서.’ 대한제국 우국지사로 유명한 민영환이 가사를 썼다. 장엄한 선율을 빚어낸 사람은 독일 출신 지휘자 프란츠 폰 에케르트(1852~1916)다. 1901년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반도를 찾아 조선군악대에 서양 음악을 가르친 인물이다. 당시 고종은 백성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대한제국이 자주 국가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국가를 만들도록 했다. 이 노래는 1901년 9월 7일 고종의 50회 생일에 초연됐으며, 이듬해 8월 대한제국 애국가로 공식 지정됐다. 백성들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그러나, 1910년 한·일 합병으로 금지곡이 됐다. 일제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요했다. 그런데 한반도에 오기에 앞서 일본 정부 초청으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에케르트가 기미가요 작곡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잊혀졌던 대한제국 애국가는 최근 들어 재조명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에 묻힌 에케르트의 생애와 활동을 조명한 책이다.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나섰다가 51년을 한국에서 보낸 에케르트의 장녀 아말리에의 회고록도 곁들여졌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성리학의 성지 ’ 꿈꾼 송시열 은거처… 선계가 따로 없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성리학의 성지 ’ 꿈꾼 송시열 은거처… 선계가 따로 없네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계곡은 선계(仙界)가 아닌가 싶을 만큼 아름답다. 일대는 국립공원이자 국가 지정 자연문화유산인 명승이다. 더불어 조선 중기 사상계를 이끈 우암 송시열(1637~1689)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 유산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우암이 이끈 조선성리학의 이념을 다양한 방법으로 형상화해 놓은 일종의 거대한 상징물이라고 해도 좋겠다.화양동의 우암 유적이라면 만동묘(萬東廟)와 흥선대원군의 일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만동묘는 우암의 뜻에 따라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낸 명나라의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을 제사 지내고자 제자 권상하가 1704년(숙종 30) 지은 사당이다. 다양하게 각색되어 전해지는 일화 가운데 하나는 대원군이 부축을 받으며 만동묘 계단을 오르다 묘지기 발길에 차여 나동그라졌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권력기반이 확고해지자 만동묘의 제사를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복수했고, 우암을 제향하는 화양서원을 포함해 650개 남짓하던 서원을 대부분 훼철하고 47개 사액 서원만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긍정적 기능을 발휘하던 서원이 지연·학연·당파의 거점으로 떠오르면서 병폐가 커진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조선 후기 권력을 독점한 서인(西人)의 정치적 성지(聖地)였다. 묘지기조차 파락호(破落戶) 시절의 대원군쯤이 눈에 보일 리 있었겠느냐고 만동묘 일화는 되묻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화양동을 찾아 만동묘에 오르다 보면 ‘그렇게 나동그라진 대원군이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만동묘 계단은 비정상적인 만큼 가파르고, 발을 딛는 바닥도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나 엉거주춤한 게걸음으로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풍수지리적 설계라는 주장도 있지만, 참배자에게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고자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 조금 더 그럴듯하다.계단은 가파른 데다 매우 높다. 이런 데서 발길에 차여 굴러떨어진다면 최소한 중상을 입는 것이 불가피하고 고령자나 약골이라면 초상을 치르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니 대원군 일화는 실제 그랬다기보다 위험한 계단에서 국왕의 종친(宗親)에게 묘지기가 발길질을 서슴없이 해댔다는 이야기를 세상이 믿을 만큼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우회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화양분소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내리면 화양천을 따라 화양구곡(華陽九曲)이 시작된다. 우암 유적은 1㎞ 남짓 걸어 올라가면 나타난다.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한데 모여 있다. 1870년 철폐된 만동묘는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 1874년 유림의 상소에 따라 부활했다. 하지만 일제는 1908년 조선통감의 명령으로 만동묘를 철폐한 데 이어 1942년에는 건물을 헐어 괴산경찰서 청천면주재소를 짓는 자재로 썼다.묘정비(廟庭碑)를 비롯한 석물(石物)만 남았던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최근 상당 부분을 복원했다. 그런데 만동묘정비에 다가서면 새겨 놓은 글자들을 모두 정으로 쪼아낸 흔적을 볼 수 있다. 일제가 훼손한 흔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양구곡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1130~1200)의 무이구곡(無夷九曲)을 본받은 것이다. 조선은 주희, 곧 주자의 성리학을 이념 기반으로 창건한 나라다. 주희는 한때 복건성(福建省) 무이곡(武夷曲)에 은거하면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진력했다. 더불어 무이산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붙이고는 흔히 무이구곡가(無夷九曲歌)라고 불리는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다.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주 양동마을에 지은 독락당(獨樂堂)과 사산오대(四山五臺)도 주희를 모범으로 삼았다. 퇴계 이황(1501~1570)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남겼는데, 이 또한 주희가 ‘무이정사잡영 병서’(武夷精舍雜詠 幷序)에 12편의 시를 남긴 것과 관계가 있다. 제자들은 ‘도산십이곡’을 ‘도산구곡’(陶山九曲)으로 정리해 무이구곡에 비견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1536~1584) 역시 황해도 해주 석담에 은거할 때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변 자연을 고산구곡(高山九曲)이라 했다. 화양구곡 역시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다. 우암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차지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끊어진 주자의 학문적 정통성을 조선에서 이어 간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삼전도의 치욕’ 이후 청나라를 친다는 북벌론(北伐論)을 주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꿈이 멀어지자 중원을 회복하지 못하는 남송을 안타까워하며 무이곡에 은거한 주희의 심정으로 화양동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화양동계곡을 두고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금강(金剛) 이남의 제일산수(第一山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우암에 앞서 퇴계도 이곳을 찾았다가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홉 달을 머물렀다. 퇴계는 선유구곡(仙遊九曲)이라 했는데, 우암의 화양구곡과는 명칭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 그래서인지 화양구곡을 확정한 사람은 우암이 아닐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화양동의 연혁을 기록한 ‘화양지’(華陽志)는 화양동이 ‘청주 청천현 동쪽 20리 낙양천(洛陽川) 중에 있다’고 적었다. 우암이 1666년(현종 7)부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1688년(현종 14)까지 23년 동안 한 해에 몇 달 동안은 화양동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화양동이나 낙양천이라는 이름도 우암식 존주대의(尊周大義)의 분위기가 짙다. 화산(華山) 남쪽의 화양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쳐서 무공을 세우고 해산했다는 고사(故事)가 있고, 낙양은 한·위·수·당의 수도였다.화양서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화양천 건너에 작은 집이 눈에 띈다. 우암이 무이정사를 본받아 지은 암서재(巖棲齋)다. 우암은 ‘시냇가 바위 벼랑 열려 있어/ 그 사이에 집을 지었네/ 조용히 앉아 경전을 가르침을 찾아/ 분촌(分寸)이라도 따르려 애쓰네’라는 시를 남겼다. 암서재의 분위기를 잘 묘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화양구곡의 제6곡인 첨성대 주변 바위에는 갖가지 각자(刻字)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이 각각 썼다는 ‘비례부동’(非禮不動)과 ‘옥조빙호’(玉藻氷壺), 선조와 숙종의 어필(御筆)인 ‘만절필동’(萬折必東)과 ‘화양서원’(華陽書院)이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엿보이는 필자(筆者) 선정이다.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비례부동과 ‘옥(玉)처럼 맑고 투명한 마음’을 가리키는 옥조빙호는 성리학의 가르침이다. 만절필동은 ‘강물이 일만 번을 굽이쳐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충신의 절개를 꺾을 수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라고 한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만동묘라는 이름도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강물이 결국은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는 인식부터가 철저히 중화주의적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묻지마 베팅’ 가상화폐株 상한가… 한탕주의·사행성 조장 우려

    ‘묻지마 베팅’ 가상화폐株 상한가… 한탕주의·사행성 조장 우려

    일부 거래소 먹통현상에 급락하기도 금감원 “불법 행위 여부 모니터링 중” 법무부 TF 발족… 고강도 규제 예고 대표적인 가상화폐 비트코인 가격이 폭등하면서 주식시장에서도 가상화폐 관련주가 잇따라 이상 급등 현상을 보이고 있다. 가상화폐 광풍이 과거 불법 도박 게임 ‘바다이야기’처럼 사회 전반에 사행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상화폐 규제로 방향키를 잡은 정부가 신속하게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이다.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코스닥 시장을 중심으로 가상화폐 관련주로 분류된 종목들이 돌아가며 상한가를 기록했다. 신용평가와 채권추심 업체인 SCI평가정보는 지난달 28일 가상화폐 거래소 ‘에스코인’을 개설한다고 밝힌 뒤 열흘 만에 주가가 최대 6배(1090원→6790원)나 뛰었다. 지난 4일까지 5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고, 5일 투자경고종목으로 지정된 탓에 하루 거래가 정지됐다. 그러나 거래가 재개된 6일 다시 상한가를 쳤다.광학기기 전문업체인 디지탈옵틱, 폐기물 처리업체인 한일진공, 화학제품 제조업체 케이피엠테크도 최근 컨소시엄 형태로 가상화폐 거래소 사업에 진출한다고 밝히면서 주가가 급등했다. 지난달 28일 1115원이었던 디지탈옵틱 주가는 지난 7일 2배 상승한 2290원까지 치솟았다. 한일진공은 같은 기간 2500원대에서 4700원, 케이페엠테크는 1400원대에서 2300원대까지 올랐다. 컴퓨터 제조사 주연테크는 자회사를 통해 가상화폐 채굴사업을 계획한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지난 7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강전 금융감독원 특별조사국장은 “가상화폐 관련주 주가 급등과 관련해 불법적인 행위가 있는지 모너터링 중”이라며 “가상화폐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데다 관련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만큼 ‘묻지마 투자’는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상화폐 관련주들은 8일 일부 거래소에서 먹통 현상이 발생하자 급락하는 등 요동쳤다. 가상화폐 거품 논란은 전 세계적인 이슈지만, 한국이 유독 과열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은 어린이까지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들었다”고 비꼬았다. 국내 가상화폐 직접 투자자는 2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거래소만 100여개에 달한다. 하루 거래량은 코스피·코스닥과 맞먹는 규모인 수조원어치다. 수요가 과도하게 몰리면서 국내 가상화폐 가격은 외국보다 10~20%가량 비싸게 거래된다. 국내 최대거래소 빗썸에서 이날 비트코인 가격은 한때 2400만원을 넘어섰다. 지난달 26일 처음으로 1000만원을 넘어선지 2주도 채 되지 않아 2배 넘게 오른 것이다. 일부 거래소는 서버가 먹통이 돼 손실을 입은 투자자들이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해킹과 사기 범죄도 잇따라 적발되는 등 부작용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법무부는 ‘가상통화 대책 태스크포스’를 발족하는 등 범정부 차원에서 규제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부처 내에서도 제각각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열린 공청회에서 “누구나 시장에 나올 수 있는 현행 가상화폐 거래소 신고제 대신 인가제를 도입하면 자칫 정부가 규제에 나선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가상화폐 실체를 인정하면서 거래소의 안정성과 건전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도입해야 된다“고 말했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대한제국 마지막 세손빈 지난달 하와이서 별세

    대한제국 마지막 세손빈 지난달 하와이서 별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1931∼2005)씨의 전 부인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94)가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이구씨의 삼종질(9촌 조카)인 이남주 전 성심여대 음악과 교수는 6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줄리아 리가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줄리아 리가 생전에 한국에 묻히길 바랐는데, 입양한 딸이 화장한 뒤 유해를 태평양 바다에 뿌렸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구씨는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의 유일한 생육이었다.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는 1958년 미국 뉴욕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사무실에서 이구씨와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63년 한국에 들어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줄리아 리는 엄격한 궁궐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파란 눈의 외국인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여긴 종친회는 후사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혼을 종용했다. 결국 부부는 1982년 이혼한 뒤 이씨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줄리아 리는 한국에서 ‘줄리아 숍’이라는 의상실을 운영하며 홀로 지내다 1995년 하와이에 정착했다. 연합뉴스
  • [인사]

    ■산업통상자원부 ◇국장급 승진△자유무역협정정책관 김정일△자유무역협정교섭관 김기준◇과장급 전보△통상협력총괄과장 양병내△에너지자원정책과장 박재영 ■환경부 ◇부이사관 승진△홍정섭 강복규 최동호 이창흠◇과장급 전보△기획조정실 규제개혁법무담당관 장성현△환경보건정책관실 화학안전과장 이장원△자연보전국 야생조류 AI 대응 상황반 팀장 정경화△운영지원과장 김지연△대기환경정책관실 대기관리과장 신건일△상하수도정책관실 토양지하수과장 홍경진 ■다우키움그룹 ◇승진 <다우기술>△전무 황보순 하태홍△상무보 이용훈△이사대우 이홍수 고종민<다우데이타>△전무 김동준△이사 안광일△이사대우 김성범 이석재<다우인큐브>△이사대우 이선윤<한국정보인증>△상무보 김재중△이사대우 조태묵<미래테크놀로지>△상무보 지승용△이사 권순철△이사대우 전기형<키다리이엔티>△상무보 김형조<게티이미지코리아>△이사대우 정혁남<키움에셋플래너>△이사대우 임춘<키움증권>△상무 박희정△이사 전옥희 김재호 정병선△이사대우 장승식 오성욱<키움인베스트먼트>△이사 김대현 고강녕<키움투자자산운용>△전무 김기현△이사 김후열 이용진△이사대우 김상미<키움예스저축은행>△이사 조준범 ■JW그룹 ◇승진 <jw홀딩스>△수석상무 나숙희(JW경영기획실장)△이사대우 이권재(교육팀장)<jw중외제약>△수석상무 김진숙(헬스케어사업본부장)△상무 왕정운(병원2사업부장) 탁경국(생산부장)△이사대우 이경택(남부의원지점장) 최성필(IP팀장)<jw신약>△이사대우 조광형(중부사업부장)<jw생명과학>△상무 양길춘(생산2부장)△이사대우 송귀응(경영기획팀장) 인승진(CMC팀장)<c&c신약연구소>△상무 박찬희(탐색연구센터장)<jw케미타운>△이사대우 신상선(연구소장)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삼각주 내부에 쌓은 ‘평지성’…외적 물리친 민초의 기개 서려 있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삼각주 내부에 쌓은 ‘평지성’…외적 물리친 민초의 기개 서려 있네

    홍주읍성(洪州邑城)의 입지는 볼수록 절묘하다. 성(城)이란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도록 대비하는 시설이다. 그런데 홍주읍성은 벌판이라고 해도 좋을 개활지에 지어진 평지성(平地城)이다. 그럼에도 주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했다.읍성 곁으로는 남쪽의 홍성천과 북쪽의 월계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두 하천은 동쪽에서 합류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일종의 삼각주 내부에 읍성을 앉혔다. 동·남·북쪽은 하천이 자연 해자(垓子) 역할을 한다. 홍주읍성에 별도의 해자를 파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홍주읍성의 서쪽은 해발 40m 남짓한 언덕에 역시 방어벽 역할을 맡겼다. 홍주성역사공원이 조성된 언덕 주변은 옛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발굴조사로 읍성 남문의 흔적을 찾았는데, 2013년 복원하면서 홍화문(洪化門)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홍주(洪州)는 내포(內浦)의 중심도시 홍성(洪城)의 옛 이름이다. 고려시대 이름은 운주(運州)였다. 태조 원년인 918년 ‘고려사’에는 ‘웅주, 운주 등 10개 님짓한 주현이 배반하여 견훤의 후백제에 귀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세종실록’에는 ‘백제 때의 칭호(稱號)는 알 수 없다. 김씨(金氏)의 지지(地志)에도 실리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의 지지’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말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개국하고 17년이 지난 934년에야 이 지역을 되찾는다. 친(親)궁예 노선을 걷던 운주 호족이 30곳 남짓한 주변 성(城)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한 것이다. 고려 태조의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 바로 운주 출신이다. 충남 서부 지역 일대를 세력권으로 두었던 운주 호족의 딸로 봐야 할 것이다. 운주 호족의 거점이었을 토성(土城)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미롭다. 읍성 서문 주변 발굴조사에서 9세기 후반 이후 쌓은 토성이 50m가량 확인된 것이다. 홍주읍성의 진산(鎭山)이라고 할 수 있는 백월산 기슭에서는 대규모 고려시대 초기의 건물터도 드러났다. 도시 범위가 시간이 흐르면서 넓어진 결과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외적이 침입하면 바닷가나 들판을 비우고 산성으로 올라가 안전을 도모하는 청야책(淸野策)을 썼다. 그러니 평지성보다는 산성이 중요했다. 하지만 해안과 평야지대의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산으로 갈 수는 없게 됐다. 조선 세종시대가 되자 적극적인 방어전략으로 군사제도를 정비하면서 평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가까운 지역부터 산성 대신 읍성을 쌓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렇게 조선은 세종부터 문종 시대에 걸쳐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만 14개의 읍성을 새로 쌓거나 크게 보강했다. 당진, 면천, 서산, 태안, 덕산, 홍주, 대흥, 결성, 보령, 남포, 홍산, 비인, 서천, 한산 읍성이 그것이다. 홍주읍성을 고쳐 쌓는 공사는 1451년(문종 1년) 마무리됐다고 한다. ‘문종실록’은 공사가 끝난 뒤 홍주읍성의 둘레가 4856척(尺)에 높이가 11척, 여장(女墻)은 608개라고 했다. 여장은 적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동시에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에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보강 이전 홍주읍성의 둘레가 533보(步) 2척이라고 했다. 1보는 3척이니 1601척에 해당한다.세종시대 축성이나 건축에 쓰던 영조척(營造尺)은 1척이 31.22㎝였다. 그러니 문종시대 홍주읍성 길이는 대략 1516m, 이전 성벽은 500m 남짓이었다. 읍성을 3배 남짓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를 거친 결과 한때는 성벽 길이가 1772m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810m 정도다. 지금 홍주읍성 주변은 사통팔달 도로가 뚫려있다. 하지만 과거 장항선 철도 홍성역에 내려 홍성읍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읍성의 흔적은 조양문(朝陽門)이었다. 조양문은 읍성의 동문이지만, 당당한 모습처럼 사실상 홍성의 관문으로 여전히 인상지워져 있다. 반면 언덕 위의 남문은 수성전(守城戰)을 지휘하는 망루(望樓)의 개념이 짙다. 홍성군은 최근 조양문 서쪽의 옛 홍주관아와 읍성 남문 주변을 홍주성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홍주성역사관도 새로 지었다. 지금 전국적으로 조선시대 읍성을 복원하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홍성처럼 옛 읍성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고을은 많지 않다. 굳이 주변 관광지를 묶지 않더라도 홍주읍성만을 둘러보는 여행 일정을 잡는다 해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이렇게 장담하는 것은 다른 지역과 달리 옛 관아(官衙)가 상당 부분 남아 있고, 분위기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홍주성역사공원이 접어들면 홍성군청과 홍성군 의회가 나타난다. 그 앞에는 홍주관아의 외삼문(外三門)이었던 홍주아문(洪州衙門)이 보인다. 군청의 정문은 바로 옆에 별도로 냈지만, 지금도 여전히 군청의 상징적인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홍주아문만 살펴보고 바로 돌아서면 안 된다. 아문으로 들어서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를 지나 군청사 사이로 가면 뒤편에 격식 있게 지은 조선시대 건물이 나타난다. 1870년(고종 7) 중건한 홍주목의 동헌(東軒) 안회당(安懷堂)이다. 안회당 뒤뜰에는 여하정(余何亭)이 있다. 1896년(고종 33)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작은 정자 주변에 파놓은 연못, 그리고 이런 물가 풍경에 격조를 더하는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인상적이다. 홍성의 근세사는 항일운동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성은 청산리대첩을 이끈 백야 김좌진 장군과 3·1운동 당시 민족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만해 한용운 선생의 고향이다. 홍성에는 생가와 기념관을 비롯해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 적지 않으니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홍주성전투도 기억해야 한다. 홍주의병은 단발령 공포 직후인 1896년과 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6년 두 차례 거병(擧兵)했다. 특히 1906년 민종직이 충청도 서부지역에서 규합한 1000명 남짓한 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82명의 전사자를 내며 물러서야 했다. 조양문에는 당시 포격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홍성천과 월계천이 합류하는 홍성읍 대교리에는 당시 산화한 의병의 유골을 모신 홍주의사총(塚)과 홍주의병기념탑이 있다. 홍주읍성 남문이 바라보이는 홍주성역사공원 언덕에는 병오항일기념비도 세워졌다. 1906년 병오년(丙午年)과 홍주성전투를 기리는 비석이다.기념비 밑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이른바 애도지비(哀悼之碑)다. 홍주성전투 당시 의병에 사살된 일본군을 추도하는 비석이다. 국권을 빼앗겨 일본에 강제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관군도 사망자를 냈다. 글을 지은 사람은 개화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김윤식, 글씨를 쓴 사람은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이라고 한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이 언덕에는 신사(神社)도 있었다. 홍성이라는 땅이름은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한 1904년 이웃한 결성과 합치면서 한 글자씩을 따와 지었다. 충남을 대표하는 두 도시인 홍주와 공주가 모두 일본어 발음으로는 ‘고슈’이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홍주가 가진 항일의 상징성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였다는 시각도 많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고종수, 대전 감독 공식 취임…“일단 클래식 승격이 제일 큰 목표”

    고종수, 대전 감독 공식 취임…“일단 클래식 승격이 제일 큰 목표”

    ‘앙팡 테리블’ 고종수(39)가 프로축구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공식 취임했다.고종수 감독은 “선수와 코치로서의 경험을 선수들에게 빠르게 입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 감독은 1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대전의 11대 감독으로 취임한 뒤 기자들을 만나 이와 같은 각오를 밝혔다. 고 감독은 “일단 클래식 승격이 제일 큰 목표”라면서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대전의 축구붐을 보고 느꼈는데, 많은 분이 다시 경기장을 찾고 그분들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팀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고 감독은 이번에 대전에 오면서 앞서 취임한 김호 대전 시티즌 대표와 세 번째로 재회했다. 금호고 시절 김호 감독의 눈에 들어 수원 삼성에 입단한 고종수는 이후 대전에서 다시 한 번 선수와 감독으로서 김호 감독을 만난 데 이어 이번엔 대표와 감독으로 함께하게 됐다. 고 감독은 “김 대표님과는 처음 프로에 올 때도 함께 했는데 감독 데뷔 자리도 같이하게 돼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처음 감독 제안을 받고 좀 고민을 했는데 김호 대표님께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락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선수로서 고종수는 굴곡이 많았다.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내 선수 시절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로 불리며 대표팀에도 일찌감치 발탁됐으나 부상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 탈락의 아픔을 겪는 등 이후 오랜 슬럼프를 겪었다. 이날 고 감독은 “선수로서 그렇게 유명한 선수로 기억에 남진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뒤 “어려운 대표선수도 해보고 밑에까지 추락하는 선수도 돼 본 경험으로 선수들에게 어려운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 등을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내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가 철없던 탓에 그냥 사라지는 선수가 됐다”며 “그러나 다른 분들에게 비해 일찍 감독이 된 지금은 그때보다는 많이 성숙했기 때문에 철없는 행동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전은 지난 시즌 6승 11무 19패로 챌린지 최하위에 머물렀다. 이날 선수들과 상견례 후 팀 파악에 들어가는 고 감독은 “선수들을 강압적으로 지도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선수들에게 훈련할 때부터 ‘승리하는 DNA’를 심어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최대한 빠르게 컨디션을 끌어올려 시즌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하프타임] 고종수, K리그 챌린지 대전 사령탑에

    [하프타임] 고종수, K리그 챌린지 대전 사령탑에

    고종수(39)가 프로축구 K리그 챌린지(2부 리그) 대전 시티즌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대전은 24일 고 감독 선임을 발표하며 “지역 축구계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여러 후보군을 두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선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대전 대표이사로 선임된 김호 대표와는 수원과 대전에서 감독과 선수로 인연을 맺었는데 이제 대표와 감독으로 재회하게 됐다.
  • ‘앙팡테리블’ 고종수, 대전 감독 내정…스승 김호 대표이사와 재회

    ‘앙팡테리블’ 고종수, 대전 감독 내정…스승 김호 대표이사와 재회

    ‘앙팡테리블’ 고종수(39)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가 대전 시티즌 감독에 내정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24일 스포츠조선은 축구계에 정통한 관계자가 “고종수 수원 코치가 대전 감독으로 내정됐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고종수 코치는 수원 구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린 것으로 전해졌다. 고종수 코치는 현재 브라질에 있어서 귀국하는데로 대전과 협상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고종수 코치가 대전 사령탑에 오르면 스승인 김호 대전 대표이사와 재회하게 된다. 고종수 코치와 김호 대표이사는 각별한 사제지간으로 잘 알려져있다. 김호 대표이사는 1996년 수원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해 고종수를 발탁,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양성했다. 이후 수원을 떠났던 김호 대표이사는 2007년 대전 감독으로 부임했고, 자신이 아끼는 제자 고종수를 데려왔다. 김호 대표이사와 고종수 코치는 당시 대전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김호 대표이사는 지난 1일 대전에 다시 돌아왔다. 당초 용인축구센터에서 함께한 신갈고의 이기범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길 계획이었지만, 여러 문제들이 밝혀지며 반대여론이 커졌다. 이에 수원 시절 함께 했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새 인물을 물색했고 고종수 코치를 최종 낙점했다고 스포츠조선을 밝혔다. 고종수 코치는 K리그는 물론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최고 스타 중 한 명이다. K리그에서는 수원, 전남, 대전에서 171경기를 뛰면서 37골-34도움을 기록했다. K리그 우승 2회, 아시아클럽챔피언십(아시아챔피언스리그 전신) 우승 2회, FA컵 우승 1회, 아디다스컵 우승 3회 등으로 수 많은 우승컵도 들어올렸다. 특히 고종수 코치의 왼발 킥은 K리그 역대 최고로 꼽힌다. 국가대표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활약하는 등 A매치 38경기에 출전했다. 2011년부터 지도자의 길을 걸어 매탄고, 수원 트레이너를 거쳐 올 시즌에는 수원 코치를 맡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서걱서걱 발밑 풍경…저벅저벅 숲길 절경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서걱서걱 발밑 풍경…저벅저벅 숲길 절경

    푸른 잎들이 붉은 치마로 갈아입는 듯하더니 어느새 낙엽이 돼 떨어집니다. 단풍은 지고 난 뒤에도 아름답지요. 바닥에 낙엽으로 굴러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단풍 명소는 곧 낙엽 명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전남 순천의 굴목이재 숲길을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드시던 역기처럼, 길 양 끝에 대가람 선암사와 송광사를 매달고 있는 길입니다. 늦가을에 제격인 곳이지요. 산길 걷다 낙엽 주워 돌팍에 얹고, 책갈피에 꽂아도 봅니다. 꼭 소녀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만추의 서정은 거친 사내도 유순하게 만들지요.사실 낙엽 쌓인 길은 위험하다. 평지라면 날아갈 듯 걷겠지만, 비탈진 산길에서는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삽겹살처럼 두툼하게 쌓인 낙엽은 숫제 얼음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낙엽이 주는 운치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 조심, 또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대가람’ 선암사와 송광사의 명성만으로도… 굴목이재 숲길은 대가람인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이다. ‘천년불심길’이라 불리기도 한다. 송광사는 조계산 서쪽, 선암사는 동쪽에 터를 잡았다. 둘 다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건 같지만 종파는 다르다. 송광사는 조계종, 선암사는 태고종에 속한다. 절집의 풍모도 마찬가지. 선암사가 수수하고 소박하다면 송광사는 우아하고 세련됐다. 어느 모로 보나 확연히 구분되는 두 개의 옥구슬(雙璧)이다. 조계산에 굴목이재는 두 개다. 선암사에 가까운 고갯마루는 선암굴목이재, 송광사 쪽 고갯마루는 송광굴목이재로 부른다. 사실 굴목이재 숲길에서 ‘절경’이라 부를 만한 곳은 딱히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즐겨 찾는 건 양 끝에 두 명찰을 매달고 있어서다. 조계산 일대가 명승(65호)으로 지정된 것 역시 두 절집의 명성이 견고하게 지지해 준 덕분일 터다. 초겨울이면 굴목이재 숲길 위로 낙엽이 쌓인다. 서걱대는 소리 들으며 우수에 젖은 발걸음을 옮기는 맛이 각별하다. 꽃도, 단풍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에 굴목이재를 찾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굴목이재 숲길의 들머리는 선암사다. 송광사에서 오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선암사를 들머리 삼는다. 전체 거리는 6.8㎞ 정도. 코가 바닥에 닿을 정도의 된비알은 없다. 설렁설렁 걸어도 4시간이면 족하다. 한데 실제로는 6시간 가까이 걸린다. 선암사와 송광사가 발걸음을 붙잡기 때문이다. 두 절집을 꼼꼼하게 살피겠다면 아마 하루를 꼬박 써도 모자라지 싶다. 선암사 주차장에서 부도밭과 전통야생차체험관을 지나면 곧 승선교(보물 제400호)다. 계곡 위에 날아갈 듯 걸려 있다. 그 위는 강선루다. 사실상 선암사의 일주문 노릇을 하는 누각이다. 굴목이재 숲길은 강선루를 지나 삼인당 연못에서 왼쪽으로 나 있다. ‘대승암’이나 ‘편백나무숲’ 이정표를 따르는 게 알기 쉽다. 300m 정도 숲길을 걸으면 길이 다시 갈라진다. 오른쪽 부도탑 쪽으로 난 길은 작은굴목이재 가는 길, 왼쪽은 큰굴목이재 가는 길이다. 여기서 큰굴목이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작은굴목이재 쪽으로 가도 송광사에 닿지만 에둘러 가는 길이라 훨씬 멀다. 대승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생태체험야외학습장이다. 여기에 편백숲이 조성돼 있다. 60~70년 묵은 편백나무들이 수직세상을 펼쳐놓고 있다. 낙엽활엽수가 대부분인 조계산에서 퍽 이채로운 모습이다. 숲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피톤치드를 맘껏 들이켜도 좋겠다. 오르막 중턱에서 호랑이턱걸이바위를 만난다. 안내판은 “옛날 호랑이가 이 바위에 턱을 괴고 있다가 선하고 악한 사람을 구분해 해코지했다”고 적고 있다. 숯가마 터도 눈에 띈다. 두 절집에서 함께 숯을 구웠다는 곳이다. 숯가마 터를 지나면 길이 제법 가팔라진다. 하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다. 장딴지가 뻐근해질 때면 어느새 큰굴목이재 정상이다. ●편백숲·숯가마터… 심심하지 않은 ‘레드카펫’ 산행의 경계는 보리밥집이다. 차를 선암사에 두고 왔다면 여기서 원점 회귀해야 한다. 보리밥집은 이 ‘구역’의 명소다. 반드시 ‘발도장’을 찍어야 하는 곳처럼 여겨진다. 한데 큰굴목이재에서 400m는 족히 걸어 내려와야 한다는 게 문제다. 선암굴목이재에서 가장 난코스라는 ‘깔딱고개’와 얼추 비슷한 거리다. 산행 중에 만나는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아따, 잠깐이랑께. 아마 5분이면 갈 거씨요”라는 대답을 듣게 마련이다. 한데 이는 ‘함정’이다. 빛의 속도로 달려가지 않는 한 5분 안에 닿는 건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되짚어 오를 때다. 가장 벅찬 구간을 다시 올라야 한다. 차를 선암사에 두지 않았다면 차라리 송광사까지 완주하는 게 낫다. 거리는 송광사 쪽이 다소 멀지만 걷기는 훨씬 수월하다. 보리밥집에서 1㎞ 정도 가면 송광굴목이재다. 고갯길은 그리 벅차지 않다. 송광굴목이재에서 송광사까지는 2.5㎞ 정도. 이 길도 만추의 서정을 만끽하기 좋다. 저 유명한 천자암 쌍향수(천연기념물 88호)를 보려면 송광굴목이재에서 3㎞ 가까이 더 걸어야 한다. 산행시간도 확 늘어난다. 천자암 초입까지는 차로 오를 수 있다. 이를 감안해 시간을 안배하는 게 좋을 듯하다. 쌍향수는 살아낸 시간이 800년 정도다. 두 그루의 향나무가 바짝 붙어 있다. 실타래처럼 휘감아 도는 나무줄기가 장관이다. 선암사 인근에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첫손 꼽힌다. 조선시대로 순간이동할 수 있는 곳. 마을을 감아 도는 성벽 위에 올라 보면 옛 풍경이 훨씬 도드라진다. 올망졸망한 초가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다. 돌담길은 조붓하고 대나무와 싸리로 엮은 사립문이 정겹다. 텃밭엔 강아지 한 마리가 볕 아래 졸고, 잎을 떨군 감나무 가지엔 붉은 홍시가 까치밥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집집마다 지붕 이엉을 새로 얹느라 분주한 모양새다. 그 덕에 거무튀튀했던 지붕이 누런 금빛으로 환골탈태했다. 아마 조선의 초겨울 풍경이 딱 이랬을 게다.●놓치면 아깝다, 낙안읍성·오공치의 소박한 멋 낙안읍성 뒤편은 오공치다. 낙안과 승주를 잇는 고개다. 오공치는 지네 모양의 고개라는 뜻이다. 이름의 연원은 알 길이 없지만 이리저리 굽고 휜 모양새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현지인들은 오금재라고 부른다. 고갯마루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예서 보는 낙안과 보성 벌교의 들녘 풍경이 빼어나다. 주변의 산자락들이 원형으로 너른 뜰을 감싸 안고 있다. 산자락 골골마다엔 옅은 안개가 걸렸다. 강원 양구에 빗대 ‘순천의 펀치볼’이라 부를 만한 장면이다. 낙안읍성 끝자락에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이 있다. 1970년대 잡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한 고 한창기 선생의 소장 민속품 6500여점을 전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수수하고 정겨운 우리의 옛 자취들을 만나볼 수 있다. 글 사진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 가는 길: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가장 간명하다. 22번 국도를 따라 승주까지 간 뒤 서평삼거리에서 857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곧장 가면 선암사다. 선암사에서 낙안읍성민속마을(749-3347)까지는 약 20㎞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이다. 올해 수능생은 24일~12월 17일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오가는 버스는 없다. 승주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택시는 두 절집 앞에 비교적 많은 편이다. 다만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얼추 4만원 가까이 든다. → 맛집:굴목이재의 명소는 보리밥집이다. 보리밥 먹겠다고 산행하는 현지인들도 제법 있다. 실제 꽁보리밥은 아니고 잡곡밥에 가깝다. 가장 오래된 집은 문을 닫았다. 그 집에서 장사하던 이들이 장소를 옮겨 보리밥집을 이어가고 있다. 쉽게 말해 ‘원조’인 셈이다. 현재는 두 집이 경쟁하고 있다. 큰굴목이재에서 내려서면 문 닫은 보리밥집을 경계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맛집도 두 길 끝에 매달려 있다. 어느 집이 낫다고는 차마 말하기 어렵다. 손님 숫자도 엇비슷한 편이다. 다만 현지인들은 옛 맛에 익숙해선지 옛 보리밥집을 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낙안읍성에서 10분 정도만 가면 보성 벌교다. 꼬막정식을 내는 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깨진 비석으로 남은 장충단, 유린당한 선열의 혼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깨진 비석으로 남은 장충단, 유린당한 선열의 혼

    예전부터 알고 있던 서울 장충단은 공원이었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야구장에서는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장충체육관에서는 배구 경기나 마당극이 열렸다. 그런데 이번 서울미래유산투어를 통해 장충단의 다른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장충체육관 앞에서 신라호텔 영빈관이 높이 올려다보이는 계단을 올라갔다. 박문사터라고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터였다. 계단 위에서 경복궁 쪽으로 내려다보니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 안까지 훤하게 보였을 것 같다.한양 성곽길을 따라 자유센터 쪽으로 올라갔다. 발에 밟히는 노란 은행잎과 붉은 단풍잎들이 예뻤다. 아쉽게도 한양 성곽은 자유센터 쪽으로 내려가면서 끊겨 버렸다. 건축가 김수근이 자유센터 건물을 지으면서 성곽의 돌을 가져다 축대로 썼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남산의 성곽과도 연결되면 좋았을 텐데 사람들의 이기심 앞에서는 그 오랜 역사도 소용이 없었나 보다. 자유센터 건물을 관통해 걸었다. 권위를 나타내는 건물이라는 최서향 해설사의 설명처럼 하늘을 향해 펼쳐진 날개가 웅장해 보였다. 원래는 회색빛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었는데 밝은 색깔의 페인트를 칠해 버려서 예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국립극장으로 건너갔다. 가을 남산을 배경으로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 건물은 노출 콘크리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립극장을 지나 석호정에 오르니 사람들이 말없이 활을 쏘고 있었다. 실제 활 쏘는 장면을 보니 과녁이 엄청나게 멀리 있었다. 남산에 이런 장소가 있는 줄 처음 알게 되었다. 장충리틀야구장은 아이들이 야구를 할 만한 장소가 없던 시절에는 정말 유용한 장소였을 것 같다.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수표교 아래를 통과해 장충단비 앞으로 갔다. 쓸쓸히 서 있었다. 제사를 지내던 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시멘트 조각도 떨어져 나가 있었다. 고종과 순종의 마음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지금 우리에게서도 무시당하는 것만 같았다. 전혜경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공원으로 전락한 성지 장충단비가 애처롭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공원으로 전락한 성지 장충단비가 애처롭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4차 ‘남산과 장충동-근대역사기억장소’ 편이 지난 18일 서울 중구 장충동 남산 일대에서 진행됐다. 평소 자주 가는 곳이지만 언제,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의미와 감흥이 다른 법이다.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 바로 다음날 대한제국의 현충원 장충단을 찾은 게 공교롭다. 이곳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 측 주역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이 세워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남산 단풍이 최후의 절정을 이루던 날, 베테랑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해설을 맡았다.우리의 삶이 장소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려 주는 학문을 인문지리학이라고 한다. 이 중 문화지리학은 장소의 정체성 확보에 중점을 둔다. ‘문화·장소·흔적, 문화지리로 세상 읽기’라는 책에서 영국의 존 앤더슨은 흔적이란 인간의 문화적 삶이 장소에 남은 것이며, 장소야말로 문화지리학의 초점이라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장충단이라는 장소는 어떤 흔적과 문화적 삶을 우리에게 남겼을까. 장충단이 주는 첫인상은 제단(祭壇)보다는 공원이다. 시민들이 남산공원 일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장소의 곡절과 인위적인 훼절이 초래한 결과이다. 본래 남산은 공원이 아니었다. 서울 풍수는 궁궐을 위시한 모든 가옥이 백악을 등지고 남산을 향해 남향으로 짓는 게 핵심이다. 남산은 도성민이 고개만 들면 보이는 앞산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진을 친 왜장대를 중심으로 1885년부터 남산 기슭에 집결한 일본인들이 남산을 등지고 백악을 향해 북향하면서 남산은 공원 신세가 됐다. 1897년 왜성대공원에 이어 1910년 한양공원이 들어섰다. 재경성일본거류민단 위락용으로 장충단공원과 남산공원을 조성했다. 1940년 경성시가지 계획에 따라 모두 140개의 공원을 고시하면서 덕수궁, 창경궁과 함께 장충단 역시 공원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극악한 민족정기 말살 정책이다. 이때 41만 8000㎡였던 장충단공원은 1955년 70만㎡로 확장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큰 근린공원이었다. 30년 만인 1984년 30만㎡로 절반 이상 쪼그라들면서 남산자연공원에 귀속됐다. 장충체육관, 영빈관(신라호텔 영빈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타워호텔, 국립극장, 재향군인회관(동국대 예술대), 중앙공무원교육원(동국대 농대)등 온갖 시설들이 갖은 명분으로 공원 부지를 해제하고 들어선 탓이다. 장충단공원은 만신창이가 됐다. 사실상 이름도 잃어버렸다.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지막지한 파괴의 현장이다.대한제국 국립현충원 장충단의 존재감은 파묻혔다. 주위를 둘러싼 엄청난 높이와 규모의 각종 동상과 기념비, 공공건물과 호텔에 파묻혀 왜소한 비석 하나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항일의 성지라는 장소의 역사성을 바꾸기 위해 가해진 극단의 변형 때문이다. 1932년 박문사 조성이 결정타였다. 신라호텔과 영빈관은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최고 공로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춘무산 박문사가 있던 장소이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고, 이토를 신격화하는 신사이다. 정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가져왔고, 난간엔 광화문에서 가져온 석재를 쌓았다. 왕의 어진을 모신 경복궁 선원전은 승려 주거용 고리(庫裡)로 사용했다. 환구단 돌북을 안치했던 석고전을 가져다가 종루로 둔갑시켰다. 대한제국의 상징물을 동원해 이토를 장식한 것이다. 1913년 1월 23일자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늦겨울의 장충단’이라는 기사와 장충단 사진이 실려 있다. 3층 기단에 14칸짜리 품위 있는 건물이다. 봄·가을에 제향과 군악 연주, 조총 발사 등 장엄한 예식이 1910년 폐사되기 전까지 거행됐다. 을미사변을 비롯,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숨진 군인들을 위로하는 현충의식이었다. ‘나라를 위한 일에서 죽은 자에 대해 반드시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는 게….’ 고종실록에 실린 장충단 건립 목적이다. 또 1901년에 발간한 ‘장충단영건하기책’에는 장충단 축조기록과 의례절차가 전해진다. 장충단 단사는 공원 내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자리에 있었다. 황제가 이름을 짓고, 황태자(순종)가 글을 쓰고, 충정공 민영환이 비문을 지었다. 비운의 장충단비는 신라호텔 뒤에 버려져 나뒹굴다가 1969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장충동이라는 지명이 남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강점기 장충동 일대 신흥 주택단지는 이토의 이름을 따 박문대라고 불렸다. 1970년 시인 김지하는 저항시 ‘오적’에서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동빙고동, 성북동, 수유동, 장충동, 약수동…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고 당대의 도적들을 야유했다. 강남시대가 열리기 전 한때의 만담이다. 잊혔던 장충단제는 1988년 부활했다. 서울 중구는 을미사변일인 1895년 8월 20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매년 10월 8일 장충단비 앞에서 제향을 지낸다. 또 최근에는 장충단비~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이준 열사 동상~이한응 열사 기념비~최현배 선생 기념비~유관순 열사 동상~3·1 독립운동 기념탑 등을 돌아보는 답사프로그램 ‘호국의 길’도 만들었다. 하루바삐 장충단사를 복원해야 한다. 마음을 모으면 장소의 역사성은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멋과 맛 ■일시: 11월 25일 오전 10시 종각역 4번 출구(보신각 앞) ■신청(무료) : 서울시 서울미래유산 (futureheritage.seoul.go)
  • [노주석의 서울살이] 덕수궁 돌담길의 진실

    [노주석의 서울살이] 덕수궁 돌담길의 진실

    “대한문 앞에서 덕수궁 돌담을 끼고 정동 골목을 쑤욱 들어가노라면 … 경성지방법원 앞까지 와서, 본래 같으면 이화학당 앞을 지나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을 것을 … 그 둘은 기약지 않고 좀더 은근한 방송국 넘어가는 길을 택하려 들었다.” 1930년대 경성에서 제일 잘나가는 모던보이 구보 박태원이 단짝 이상을 모델로 쓴 단편소설 ‘애욕’에서 읊은 덕수궁 돌담길 풍경이다. 소설 속 경성지방법원이 대법원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 이화학당이 이화여고, 경성방송국이 덕수초등학교로 변했을 뿐 으슥한 길을 찾는 연애 풍속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 왔다. …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은 흔히 사랑을 속삭이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 오늘날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이었던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1954년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자유부인’에도 돌담길이 등장한다. 영성문은 신문로에서 덕수초등학교를 거쳐 미국대사관저까지 이어지는 고갯길이었다. 덕수궁(경운궁)의 북쪽 대문이고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이 있어서 사람들은 경운궁을 ‘영성문 대궐’이라고 불렀다. 선원전은 옛 경기여고 터, 덕수초등학교, 구세군중앙회관에 걸쳐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어쩌다가 사랑길의 대명사가 됐을까. 멀게는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가 남긴 불멸의 러브스토리가 기원이다. 이성계는 금기를 깨고 경복궁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곳에 애처의 무덤을 만들었다.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가 능침 자리다. 태종 이방원은 계모의 능을 파헤쳐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기고, 석물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광통교 바닥에 깔았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사라지지 않고 정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600년 묵은 원조 사랑길이다. 개화기 서양 문물의 첫 정착지였던 정동에 자유연애의 유전자가 이어진 것도 자연스럽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을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남녀칠세부동석의 엄혹한 윤리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두 학교 청춘들의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의 사연이 덕수궁 길에 깃든 것이다. 이별을 강조하는 속설은 다소 근거가 부족하다. 본래 독일영사관이 있던 자리에 경성재판소가 들어선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실제 그 시절 이혼 재판정이 돌담길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힘들다. 시대를 앞서가는 청춘들의 연애를 시샘하는 사회적 우려와 질투가 만들어 낸 아포리즘이 아닐까. 최근 서울시민이 뽑은 ‘가장 잘생긴 서울’ 1위에 덕수궁 돌담길이 올랐다. 누구나 이 길을 좋아한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길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돌담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길에 얽힌 스토리보다 궁 안팎을 넘나드는 절묘한 동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돌담길 주변은 모두 옛 경운궁 구중궁궐이었다. 고종의 집무실이자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담 밖에 나와 있는 이유도 덕수궁을 관통하는 남북 간 도로가 궁을 쪼갰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은 1921년에 놓인 이 신작로의 부산물이다. 정비석이 말한 덕수궁 돌담길, 영성문 고갯길의 선원전이 복원된다고 한다. 영국대사관 소유 미완성 돌담길 70m도 뚫릴 날이 머지않았다. 다만 덕수궁 돌담길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국 대한제국이 남겨 준 값비싼 선물이란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나라 잃은 대가로 누리는 아픈 길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