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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때 훼손된 왕실 제례 공간 ‘덕수궁 흥덕전’ 복원된다

    일제 때 훼손된 왕실 제례 공간 ‘덕수궁 흥덕전’ 복원된다

    대한제국기 마지막 왕실의 제례 의식이 이뤄졌던 덕수궁 흥덕전이 복원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11월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는 흥덕전은 1900년경 건립됐다가 고종이 승하한 1919년 겨울 가장 먼저 훼철된 곳이다. 권역 일대는 이후 창덕궁 행각 공사에 쓰이기도 했다. 짧은 기간 존재했지만 마지막 왕실의 제례 의식이 이뤄졌던 공간으로서 상징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흥덕전 권역은 정부가 2011년 미국과 토지를 교환하면서 선원전, 흥복전 권역과 함께 확보했다. 흥덕전은 당초 덕수궁 동쪽에 있던 선원전의 화재로 소실된 어진(임금의 화상이나 사진)을 복원하기 위해 각 지역의 어진을 이안하고 모사하는 이안청의 역할을 수행했다. 1904년에는 효정왕후(헌종 계비)와 순명효황후(순종비), 그리고 1911년 순헌황귀비(고종 후궁, 영친왕 친모)의 승하 때는 빈전(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모시던 전각)으로 사용됐다.궁능유적본부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와 각종 사진과 문헌기록 등을 토대로 흥덕전과 전각 앞의 복도각, 이를 둘러싼 행각(궁궐·사찰 등의 정당 앞이나 좌우로 지은 줄행랑)과 삼문(대궐·관청 등의 앞에 있는 세 개의 문),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어재실(임금이 능이나 묘에 나들이할 때 잠시 머물던 집) 등 각종 건물의 배치 특성과 형태를 파악했다. 당시 사진에서 보이는 흥덕전 앞 오른쪽 나무가 지금도 있는 회화나무인 것도 확인하는 성과도 있었다. 이번 흥덕전 권역 복원은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설계가 이뤄졌고, 올해 문화재수리기술위원회의 심의가 완료됨에 따라 복원공사를 시작하게 됐다. 궁능유적본부는 2027년까지 흥덕전 권역의 복원을 마치면 대한제국기 왕실 제례의식을 재현하고, 국장과 관련한 전시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그 역사성을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 판소리·탈춤·땅재주… 한국 최초 극장에선 ‘봄날 연희’가 펼쳐졌다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판소리·탈춤·땅재주… 한국 최초 극장에선 ‘봄날 연희’가 펼쳐졌다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1902년 고종이 세운 극장 ‘협률사’전국서 명창·가무 여성 모여들어이인직 신연극 ‘은세계’ 등 공연1908년 ‘원각사’로 개명해 재개관 지금은 새문안교회 화단 표석에그때의 영광·오욕 덩그러니 남아산간벽지 분교에 부부 교사로 부임하는 젊은 부모를 따라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오지로 이주한 어린 남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심심함이었다. 전교생 63명이 전부인 분교는 산꼭대기에 있었고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바다에 면한 골짜기의 마을로 줄지어 내려갔다. 교사 관사는 학교 옆 산꼭대기에 있었다. 남매는 아이들이 떠난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기나긴 오후를 보냈다. 남매의 부모인 교사들은 자식들이 문화적으로 소외돼 우물 안 개구리로 자라는 것을 두려워했다. 극장도, 미술관도, 서점이나 학원조차 없는 오지에서 그 모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책, 그중에서도 다양한 내용을 고루 담은 어린이 잡지가 부모가 제공할 수 있는 도시 문화의 대체물이었다.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그리고 만화 잡지 ‘보물섬’까지. 다양한 소재와 신기한 이야기가 글과 그림에 담뿍 담겨 있던 이 잡지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소년소녀들의 문화를 선도한 매체였다. 남매는 겉표지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잡지를 읽으며 걸신스럽게 바깥세상을 엿봤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잡지에서 기사와 동화 따위의 글을 주로 읽은 누나는 자라나 문학을 업으로 삼았고, 잡지에서 긴 글은 훌훌 뛰어넘고 만화를 탐독하던 동생은 자라나 영화를 전공하게 됐다는 것이다. “뭐 하냐? 충무로 가서 회 무침에 한잔하자!” 누가 불러도 고분고분 나오지 않는 동생이 웬일로 단번에 알겠다고 한다. 종로에 들렀다 충무로에 갈 거니 충무로에서 만나자 했는데 종로로 바로 온단다.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 방향으로 가는 길에 서울시 공유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온 동생과 만났다. 새문안교회 앞에 있다는 한국 최초의 극장 ‘원각사 터’ 표석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협률사는 원뿔형 지붕에 2층 건물 횡단보도 앞에 서니 맞은편 낯선 건물이 눈을 쏜다. 그게 새문안교회라고 한다. 내 기억 속에 있던 새문안교회와 전혀 다른 모습에 어리떨떨하다. 인터넷 정보를 찾아보니 ‘새 성전’은 2015년 기공해 2019년 준공했다고 한다. 1887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14명의 조선인 신자와 함께 설립된 새문안교회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 벽돌 예배당을 지은 뒤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내 기억 속에 있는 모더니즘 양식의 예배당도 꽤 괜찮았는데, 건축 설계를 맡은 KOMA(건축사 이은석)의 고민도 비슷했는지 교회 안에 기존의 새문안교회에 사용됐던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 한옥 창문 등을 이용해 ‘역사를 위한 기억 공간’을 조성했다고 한다. 타고난 불신자인 나는 차마 교회 안에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겉껍데기만 보고 왔는데, 나중에 내용을 찾아보니 새문안교회 자체가 탐방해 볼 만한 하나의 역사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리바리하는 사이 눈 밝은 동생이 새문안교회 앞 보도 화단에 있는 표석을 찾았다.‘협률사·원각사 터: 1902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연희회사 협률사와 1908년 설립된 원각사의 공연장이 있던 곳이다. 1908년 이인직의 신연극 ‘은세계’가 공연됐으며, 1909년에 창극 ‘춘향전’ 등이 공연됐다.’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에서 발행하는 ‘KoCACA 웹진’의 기사에 의하면 협률사는 고종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극장이자 실내 공연장인데, 관영 연회장으로 사용됐던 곳을 1908년 민간인이 불하받아 재개관하면서 이름을 원각사로 바꿨다고 한다. 협률사에는 가무를 하는 여성과 전국에서 모여든 170명의 명창이 소속돼 경륜과 기량에 따라 국록을 받았다. ‘봄날에 펼쳐지는 즐거운 연희’라는 뜻의 ‘소춘대유희’를 상설 공연했는데 판소리와 탈춤, 무동놀이, 땅재주, 궁중무용 등의 전통 연희 다섯 마당으로 펼쳐졌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그게 정설이었다. 한데 근대 공연 공간에 대한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최초’를 다투는 또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인천일보’에 의하면 인천 지역 문화예술계에서는 지속적으로 1895년 개관한 인천 경동의 협률사(協律舍)를 한국 최초의 극장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이는 그간 한국 최초의 공연장으로 정의되고 있는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1902년의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이인직이 종로 새문안교회 터에 창설했던 1908년의 원각사보다 13년이나 먼저 개관했다는 것이다(서울의 협률사와 인천의 협률사는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름). 인천 협률사는 1921년 ‘애관’(愛館)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도 5관 860석의 ‘애관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100년이 넘은 극장이라니! 그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설렌다. 조만간 애관극장에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표석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교회가 너무 높고 큰 데다 앞길도 넓어서인지 작은 표석만으로는 당시의 정경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한국문화재재단에 소장된 사진을 통해 옛적 협률사의 모습을 엿보면 원뿔형 지붕에 2층 건물이라 제법 규모 있는 공연장 같다. 이 무대에 이인직의 소설 ‘은세계’를 원작으로 한 신연극이 올랐다.●이인직, 생계형 친일파 아닌 ‘확신범’ ‘옥남이가 손을 높이 들어 “대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국민 동포 만세, 만세, 만세!” 그렇게 만세를 부르는데 의병이라 하는 봉두돌빈의 여러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저놈이 선유사의 심부름으로 내려온 놈인가 보다. 저놈을 잡아가자” 하더니 풍우같이 달려들어서 옥남의 남매를 잡아가는데, 본평 부인은 극락전 부처님 앞에 엎드려서 옥남의 남매를 살게 하여 줍시사, 하는 소리뿐이라.’ 1908년 11월 ‘동문사’에서 출간된 소설 ‘은세계’는 상하권 가운데 상권만이 남아 있는데, 상권의 마지막 대목이 저리 끝난다. 원각사에서 공연된 대본 역시 남아 있지 않으니 어떤 결말이 준비돼 있었는지 예상할 도리도 없다. 하지만 상권의 내러티브상 결말의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은세계’에서 타락한 조선 관리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뒤 착한 미국인 덕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옥남의 남매를 잡아가는 작자들은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함부로 총질하며 재물을 뺏는 무뢰배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바로 일본에 의한 고종의 퇴위에 맞서 일어난 정미의병들이다. 이인직은 ‘혈의 누’ 등 최초의 신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완용의 비서 출신인 공식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지금은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나는 제도 교육과정에서 이인직의 두 얼굴을 배우지 못했다. 이인직은 생계형 친일파도 아니고 일본의 신종교인 천리교를 신앙으로 가질 정도로 뼛속 깊은 확신범이었다. ‘은세계’에도 미개한 조선에 대한 절망과 혐오,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에 대한 동경이 절절하다. 이인직에게 소설은 자기해방의 도구가 아니라 프로파간다였다. 그러하기에 소설보다 더 선동성이 강한 연극으로 만들어 이 자리 원각사에서 공연하며 만방에 주의·주장을 퍼뜨렸다. 한편으로 야릇한 것은 이인직이 품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혐오는 곧 자기혐오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친일파들은 신념을 넘어 종교로 영혼까지 개조해도 영원히 식민지 출신의 2등 국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인직은 1916년 초겨울 신경병으로 총독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던 중 사망했다. 신경병은 신경계통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질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신경증, 정신병을 비롯해 뇌중풍, 신경통, 척수염 따위를 광범하게 포함한다. 친일의 대가로 얻은 부와 권력도 자글자글 끓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치유하지 못했던 게다. 지난날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표석 주변을 서성이는 마음이 스산하다. 그때의 영광과 오욕, 그리고 욕망과 허무가 그저 검은 돌 하나로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 누군가 엉두덜대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짧고, 예술도 짧다.((하)에 계속) 소설가
  • 해녀와 예술이 하나되는 마을브랜드 공연 떴다

    해녀와 예술이 하나되는 마을브랜드 공연 떴다

    해녀와 예술이 하나되는 마을브랜드 공연이 만들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해녀문화를 마을의 고유 브랜드로 육성하는 해녀문화예술 지역특성화 사업을 조천읍 북촌리, 한림읍 협재리, 애월읍 고내리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26일 밝혔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이번 사업은 어촌계와 예술단체의 협업을 통해 마을의 이야기가 담긴 공연을 제작·발표하는 축제형 공연 육성사업으로 올해 3개 어촌계와 3개 공연단체가 함께 추진하고 있다. 북촌어촌계와 놀이패 한라산은 지난 8월과 9월 북촌포구 일원에서 북촌 해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뒷개 할망 춤추다’를 2회에 걸쳐 선보였다. 7명의 해녀와 예술가들이 수개월간 연습한 노래와 공연을 선보여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지난해보다 공연의 질이 한껏 높아졌다는 평을 받았다. ‘뒷개할망 춤추자’는 북촌해녀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면서, 북촌어촌계와 시민들과 함께 제작한 일종의 지역 친화적 참여형 공연을 표방했다. 특히 ‘뒷개할망 춤추자’에는 손으로 드는 작은 곰새기(돌고래) 모형을 비롯해 더 큰 대형 모형도 제작했다. 바다에서 운명을 달리한 외로운 넋·혼이라는 ‘수중고혼(水中孤魂)’을 돌고래를 통해 보여줘 호응을 얻었다. 협재어촌계는 올해 처음 선정된 어촌계로 극단 이어도와 함께 지난 9월 협재 해녀만의 이야기인 독도 출향해녀를 소재로 한 ‘협재리 트위스트’를 공연했다. 독도 출항기와 협재리 해녀의 삶을 영상, 체험, 공연 등으로 풀어냈다. 2차 공연은 오는 29일 오후 3시 협재리 마을회관 잔디마당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고내어촌계와 사우스카니발의 ‘까파치기’는 고내리 해녀의 삶을 음악으로 풀어낸 공연으로 지난 9월에 이어 오는 30일 오후 6시 고내포구에서 열린다. 고종석 도 해양수산국장은 “해녀문화예술 지역특성화 지원사업을 통해 도내 어촌계마다 지닌 독특한 이야기를 다양한 예술 장르로 풀어내 마을 브랜드로 키우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모든 것 공정하게’ 군자 정신 일깨운 호남인맥 중심지[이동구의 서원 산책]

    ‘모든 것 공정하게’ 군자 정신 일깨운 호남인맥 중심지[이동구의 서원 산책]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위치한 필암서원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학문과 정신 세계를 추앙, 계승하기 위해 세워졌다. 필암은 김인후의 태생지인 전라 장성부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입구의 붓바위에서 비롯됐다. 그의 사후 30년이 지난 1590년(선조 23년)에 제자와 문중이 뜻을 모아 서원을 건립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으로 소실되고 현재의 서원은 1672년(현종 13년) 3월에 이건됐다. 앞서 1662년(현종 3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정철·양자징 등이 대표적 후학 김인후는 호남 지역 주자성리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크게 발전시킨 인물이다. 36세 때 인종이 숨지자 벼슬을 버리고 장성으로 돌아와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펼쳐 성리학의 체계를 성립했다. 평생 동안 주자성리학에 충실한 학자로 ‘대학’(大學)을 천 번 넘게 읽었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대학을 버리고서는 도에 이를 수 없으며 이를 읽지 않고 다른 경서를 보고자 하는 것은 마치 터를 닦지 않고 먼저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설파했다. 도동서원에 추숭된 김굉필이 소학을 중시한 것과 대비된다. 그의 사상은 이기론(理氣論)에서 이(理)의 우의성을 인정하면서 율곡 이이의 학설이 정립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학문적 성과로 문묘에 종향된 동국 18현 가운데 유일한 호남 유학자가 됐다. 그의 문묘 종향을 결정한 정조(20년, 1796년)와 송시열 등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다 갖춘 사람은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라고 평가했다. 정조는 한 술 더 떠 “동방의 주자(朱子)”라 칭하기도 했다. 김인후의 학문과 도학정신 등 학통을 이은 후학들은 조선후기 붕당정치에서 대체로 서인과 노론의 입장을 취했다. 김인후의 사위로 함께 추향되고 있는 양자징을 비롯해 변성온, 기효간과 가사문학으로 널리 알려진 정철, 소쇄원의 주인이었던 양산보 등이 대표적인 후학들이다. 이들은 영조 이후 노론 주도의 탕평 정국에서 호남 지역의 학문적인 주도권을 강화해 나갔는데, 필암서원이 그 중심 거점이었다. 특히 김인후의 문묘 종향은 필암서원이 호남의 여론 진원지이자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고종 8년)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남 유일의 서원으로 남게 된 배경 또한 필암서원의 확고한 위치와 역사성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서원 방문객 박영철(예문관 전무)씨는 “옛부터 장성, 창평, 광주 등지에서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 건 필암서원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라고 자부심을 표시했다.●서원의 실질적인 중심 우동사 조선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전당후묘(前堂後廟),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원칙하에 건물들이 배치된다. 필암서원은 들판이 펼쳐진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이런 지형적 특성을 살리지는 못했다. 서원의 정문이자 누각인 확연루(廓然樓)는 군자의 학문은 모든 것을 공정하게 대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김인후의 폭넓은 학문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은 청렴결백한 절개를 지켜 벼슬길을 끊은 선생의 깨끗한 절개를 표상한다. 강회를 비롯해 서원의 모든 행사가 열리는 핵심공간이다. 특이하게도 다른 서원과 달리 서원 입구 쪽 확연루를 향하지 않고 반대편 김인후와 양자징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인 우동사(祐東祠)를 바라보고 있다. 유생들이 기거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도 북쪽의 우동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추향인물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예를 표하도록 한 건물 배치로 사당 우동사가 의례적인 서원의 중심이 아니라 실질적인 존엄한 장소임을 깨닫도록 한 것이다.●존경과 신뢰의 증표 묵죽도 인종은 스승인 하서 김인후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생전에 묵죽도, 주자대전, 배 3개를 선물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인종이 전한 3개의 배는 현재 나주배로 널리 퍼졌다는 설로 남아 있다. 묵죽도와 주자대전은 필암서원 우동사 앞에 세워진 경장각(敬藏閣)과 장서각(藏書閣), 장판각(藏板閣)에서 보관해 왔다. 임금이 하사한 내사본을 비롯해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고문서 ‘필암서원 문적일괄’(14책 64매)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기탁 중인 ‘김인후 관련 문서’가 필암서원의 대표적인 고문서로 꼽힌다. 인종 임금이 하사한 ‘묵죽도’(墨竹圖)는 경장각에 보관돼 있었다. 묵죽도는 인종이 세자 시절인 1543년 김인후에게 선물한 것으로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았다. 그림에는 우뚝 선 거친 바위 뒤에 네 그루의 대나무가 서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김인후가 왕의 명에 따라 쓴 시가 담겨 있다. ‘뿌리 가지 마디 잎사귀 모두 정미해/ 돌을 벗 삼은 뜻 그 속에 가득하네/ 이제야 알겠네 성스러운 솜씨가 조화를 짝해/ 하늘 땅이 한 덩이로 어김없이 뭉쳤네(根枝節葉盡精微 石友精神在範圍 始覺聖神모造化 一團天地不能違)’ 그림 속 바위가 대나무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준다는 내용으로 왕과 신하의 관계인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증표로 평가되고 있다. 정조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한 뒤 필암서원에 경장각을 세우게 하고 편액을 내렸다. 현재 필암서원의 관리,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성수 도유사는 취재진에게 인쇄본 묵죽도를 펼쳐 놓고 그림의 유래와 의미 등을 20분 넘게 설명했다. 김인후의 13세 손인 그가 필암서원과 선조에 대해 얼마나 깊은 자긍심과 존경심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선비문화 세계화 필암서원 역시 후학들과 배향자 후손들의 주도로 서원 설립의 취지를 면면히 이어 왔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국 유림들이 고산앙지(高山仰止)의 뜻을 모아 산앙계를 결성해 서원의 운영 및 향사에 크게 보탬이 됐다. 2001년 8월에는 전국 각지의 유림 250여명이 모여 필암서원을 성학 수련의 도량으로 영구 보존, 발전시킨다는 결의를 선포하면서 산앙회가 재창립됐다. 이들은 서원과 함께 학술강연회, 서책 발간, 청소년 장학사업 등 각종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9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자치단체와 문화재청 등의 지원도 활발해지고 있다. 장성군의 경우 2021년부터 3년간 1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필암서원 선비문화 세계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원에 머물며 선비문화와 역사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서원스테이를 추진하고 유물전시관을 종합기록관으로 확장해 전남의 서원 기록을 보존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요리 교실과 전통공예 등 지역의 관광명소와 축제 등을 연계한 프로그램 개발에 나서고 있다. 특히 김 도유사는 “황룡강에서 펼쳐지고 있는 자치단체의 꽃 축제와 연계한 서원문화 축제를 검토 중”이라면서 “소나무길과 은행나무 쉼터 등을 조성해 축제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서원에 들러 선비문화를 체험하고 선조들의 정신 세계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할 예정”이라고 했다.
  • 루벤스·벨라스케스 작품부터 조선 갑옷·투구까지… 600년 왕가의 보물 상자를 열다

    루벤스·벨라스케스 작품부터 조선 갑옷·투구까지… 600년 왕가의 보물 상자를 열다

    예술을 사랑한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예술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수없이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으며, 오스트리아 이외 지역에서 왕가의 혈통이 끊기는 상황에서도 예술품을 수도 빈으로 보낼 정도로 예술에 진심이었다. 약 600년간 유럽 역사의 중심에 있던 그들이 남긴 유산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가 한국에 마련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빈미술사박물관과 함께 25일부터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특별전을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빈미술사박물관에 남긴 유산 중 96점의 미술품이 전시됐다. 대부분이 한국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작품 보험료만 수억원에 달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예술이 곧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순탄하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이들이 수집한 작품은 빈미술사박물관의 유산으로 남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5부로 구성된 전시는 유럽 어느 박물관을 방문한 듯한 인상을 준다. 클래식으로 유명한 도시답게 전시관에 음악도 함께 흐른다. 루돌프 2세의 궁정악장이었던 필리프 드 몽테의 미사곡이라든지 빈을 대표하는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음악도 들을 수 있다. 전시 중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초상화가 걸린 공간은 긴 공간에 큰 그림 몇 개가 걸린 구조로 돼 있는데, 이는 그가 사랑한 쇤브룬 궁전에서 영감을 얻어 꾸며졌다. 전시 1부에서는 프라하에 수도를 두고 예술품을 수집했던 16세기 루돌프 2세 황제 시대를 다룬다. 공예를 사랑했던 그는 다양한 공예품을 모았고, 이는 현재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기초가 됐다. 2부는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을 소개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서쪽 지역인 티롤의 암브라스성에 전용 건물을 지었고 진열장 설계와 전시품 배치도 직접 했을 정도로 열정이 남달랐다. 16세기 유럽에 전해진 야자열매로 제작한 공예품도 볼 수 있는데, 전 세계에 남은 6개 중 빈미술사박물관에 3개가 있고 이번에 2개가 한국에 왔다.3부는 빈미술사박물관의 회화로 채워져 관람의 절정을 이룬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나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는 이번 전시에서 꼭 봐야 하는 대작으로 꼽힌다. 4부에서는 대중에게 박물관이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를, 5부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를 조명한다. 전시 끝에는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기념으로 고종이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의 갑옷과 투구가 있어 양국 수교의 의미를 되새긴다. 전시를 준비한 양승미 학예연구사는 “세계사 속에서 배웠던 유럽 왕가가 아닌, 예술 수집가로서의 면모를 통해 합스부르크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면서 “왕이 바뀌어도 열심히 수집품을 모은 역사를 통해 예술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독도의 날 기념 플래시몹

    독도의 날 기념 플래시몹

    대구시민 122명이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독도 주권을 선포한 지 122주년을 기념해 25일 오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플래시몹(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주어진 행동을 하고 흩어지는 일) 행사를 펼치고 있다. 대구 연합뉴스
  • [포토多이슈]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포토多이슈]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포토多이슈] 사진으로 다양한 이슈를 짚어보는 멀티미디어부 연재물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대표 소장품전을 개최했다.합스부르크 왕가는 13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이후 15~20세기 초까지 600여년 간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영토를 다스리는 황제로 군림한 가문이며 유럽의 정세에 가장 영향력 있던 명문가 중 하나이다.이번 전시에서는 15~20세기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르네상스, 바로크미술 시기 대표 소장품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회화, 공예, 갑옷, 태피스트리 등 96점의 전시품이 소개됩니다. 피터르 파울 루벤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틴토레토, 베로네세, 안토니 반 다이크, 얀 스테인 등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서양미술 거장들의 명화도 직접 만나볼 수 있다.특히 1892년 수교 당시 고종이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했던 조선의 갑옷과 투구도 이번 전시에 선보이고 있다. 수교 130주년 기념의 의미도 되새기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한 여수사람들’ 전시회 열려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한 여수사람들’ 전시회 열려

    “여수 거문도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지 않았다면 고종의 울릉도 개척령도 없었을 것입니다. 울릉도 개척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실질적인 지배가 시작됐다는 점에서 여수 거문도 어민들의 울릉도 개척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갑니다.” 조선 후기 전남 여수에서 경상북도 동해까지 천리 뱃길을 오가며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해 울릉도 개척의 토대를 구축한 여수 거문도 사람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독도의 날을 기념해 25일부터 29일까지 여수 남초등학교에서는 열리는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한 여수사람들 전시회는 조선 후기 전라도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개척사를 알 수 있는 여수 사람들의 활동 내용과 사료와 사진 등 100여점을 선보인다. 울릉도와 독도에 개척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여수 거문도 사람들의 개척 노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초 왜구 침입 등에 따른 공도 정책으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인근 해안에 일본 어민들의 불법 조업과 이에 따른 분쟁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경상좌수영소속 안용복은 1693년, 숙종 19년 울릉도 해상에서 어업을 하다 일본 어민들에게 끌려가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해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서계를 받아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1696년 조선 조정은 일본 막부와 영유권 논의를 벌여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는 결정을 했지만 이후에도 실질적인 관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섬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공도 상황이 계속되면서 여수 거문도 주민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무대로 다양한 어업과 선박 건조 등 개척 활동을 했고 일본 어민들과 어업 분쟁도 이어졌다. 결국 거문도 어민들과 왜구의 어업 분쟁과 극심한 왜구 약탈은 조선 조정의 실태조사와 울릉도 개척을 이끌어냈다. 실제 울릉도검찰일기에 따르면 1882년 극심한 왜구 약탈에 감찰사 이규원을 보내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울릉도와 독도에 154명의 조선인이 어업 등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15명이 거문도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고종은 실태조사를 보고 받고 울릉도 개척령을 내려 1883년 강원도와 경상도, 전라도 16호 54명을 울릉도로 이주시키고 초대 도감으로 거문도 사람인 오성일을 임명했다. 고종의 울릉도 개척령 전에는 울릉도 독도가 거문도 사람들이 어업과 선박 건조 등을 하던 삶의 터전이었던 셈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한 여수사람들’ 전시회 관계자는 “안용복의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땅 인정을 요구하는 항의 방문과 고종의 울릉도 개척령 모두 어업 분쟁에서 시작됐고 울릉도와 독도의 어업 주체 세력은 여수 거문도 주민들이었다.”며 “전라도 사람들이 목숨을 건 항해를 통해 이룬 울릉도와 독도 개척사에 대한 홍보와 학술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과거 공부보다 ‘위기지학’ 실천…최익현·임병찬 ‘항일의병’ 결의[이동구의 서원 산책]

    과거 공부보다 ‘위기지학’ 실천…최익현·임병찬 ‘항일의병’ 결의[이동구의 서원 산책]

    영암 구림, 나주 금정, 정읍의 원촌은 호남의 3대 양택지로 꼽힌다. 그중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리에 자리잡은 서원이 무성서원이다. 호남정맥(노령산맥)을 바라보며 특이하게도 마을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서원들이 대개 백성이 살고 있는 마을을 벗어나 한적하고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를 잡아 유생들로 하여금 학문과 유식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도록 했던 것과 사뭇 다르다. 서원의 제향 인물 등 무성서원만의 내력에서 그 원인을 엿볼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마을 안에 위치하지만 단출한 멋 무성서원은 여느 서원과 달리 단출하다. 서원의 출입문이자 누각인 현가루(絃歌樓)와 강학기능의 명륜당(明倫堂), 제향자의 신위가 모셔진 태산사(泰山祠)가 전부다.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조차 없고 서원담장 밖에 강수재(講修齋)라는 작은 건물 한 채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건축물로만 이루어져 파격적이다 못해 고즈넉한 분위기가 서원을 압도한다. 건물 수를 늘리는 건축행위를 자제함으로써 검소하고 청빈으로 대변되는 선비 정신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현가루의 좌우에는 서원과 이 지역에 공적을 남긴 이들을 칭송하는 비석과 비각이 줄지어 있다. 안성렬(64) 무성서원 별유사는 “서원이 위압적이거나 요란스럽지 않고 단순해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 정도로 평안하다”면서 “마을 안에 위치한 데다 편안한 분위기로 사람 중심의 서원이라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호남의 수원… 세계문화유산 등재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해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 김관(金灌) 등 7위를 제향하고 있다. 우리나라 유학사상 최초의 도통(道通)으로 추앙받는 최치원은 통일신라 정강왕 때 태산(지금의 태인) 군수로 부임해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상춘곡의 저자 정극인은 이곳에서 고현동 향약을 창시했고, 신잠은 태인현감으로 부임해 4개의 학당을 세우는 등 모두가 이 일대의 학문 발전과 선정을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무성서원이 마을 한가운데에 입지하면서도 품격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을 선정으로 다스렸던 관리를 향사하고 주민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지역문화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 평가되고 있다. 숙종 22년인 1696년에는 무성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나 현판의 저자는 지금껏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무성서원은 전라우도의 수원(首院)으로 필암서원, 포충사와 함께 훼철을 면해 호남의 대표 서원으로 남았다. 서원에 아로새겨진 ‘사림수선’(士林首善)이란 문구가 무성서원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무성서원은 호남지역의 성리학에 깊이를 더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됐다.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의병(丙午倡義)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곳도 바로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의 강회(講會)와 유림 동원력, 대표성을 기반으로 가능했던 의거로, 이 서원의 정신사적 위상을 가늠케 한다. 취재에 동행한 신시섭 한국의서원통합관리 본부장은 “담백하고 강직한 선비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는 곳으로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도 큰 이견이 없었다”고 했다. ●춘추향사, 황토가 뿌려진 신도 무성서원의 춘추향사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거행된다. 향사 이틀 전에 서원에 모여 집사를 정하는 분방의식을 행한다. 향사에 필요한 제물을 현가루부터 사당까지 중앙의 문을 통과해 운반하는데 이 길을 신도(神道)라고 한다. 다른 서원과 달리 이 신도 양쪽으로 드문드문 황토를 깔아 놓는다. 황토를 깐 안쪽이 신도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제물에 부정한 일과 악귀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자가 찾은 날은 추계향사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서원 마당에는 뿌려진 황토가 여전히 제 빛을 잃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향사 때에 제수 목록에 소금(형염·刑鹽)이 포함된 것도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행이라고 한다.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게 향을 올리고 예를 갖추는 것은 ‘봉심’(奉審)이라고 한다. 무성서원에 봉심한 사람들의 방명록인 무성서원 심원록(尋院錄)에는 1858년부터 1879년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의 봉심객 이름과 사는 곳, 방문 날짜등이 소상히 자필로 기록돼 있다.●학문 강의로 도를 밝히는 강습례 서원은 설립 초기부터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공부의 일차 목표로 삼았다. 관학이 과거 공부에 얽매여 있는 것을 비판하며 오직 학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장소로 서원이 설립된 것이다. 무성서원 또한 원규에서 이 같은 원칙을 고수했다. “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학설이 아니면 서원 안에서 읽을 수 없다. 역사책은 반입을 허락하되 만약 과거 공부를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하도록 한다”고 명문화했다. 무성서원에서 발간된 ‘무성서원지’에는 강습례(講習禮)라는 독특한 성격의 강회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강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참석자들의 위치, 몸가짐을 비롯해 유생들의 앉고 서는 위치까지 그림에 담았다. 1873년(고종 10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강습례는 ‘학문 강의로 도를 밝히는’ 서원의 본질적인 기능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서원철폐령 이후 서원에 대한 재정 지원 등이 끊기면서 강습례는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는 향음주례(鄕飮酒禮)로 대체되기도 했다. 유학자들은 향음주례를 통해서도 화목한 사회가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훼손된 경관 회복은 숙원 무성서원에서는 요즘도 정가수업(향음주례 때 사용됐던 시조 등 선비들의 음악)을 비롯해 붓글씨 수업과 인문학 강의 등이 열리고 있다. 이 지역 유림과 향토 학자들, 그리고 성리학 등 한학에 관심이 많은 주민 30여명이 매주 1차례 이상 모여 토론과 강의를 이어 간다. 선비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가족단위 방문객과 학생 및 청소년들의 방문도 이어진다. 무성서원은 자치단체와 함께 서원 인근에 현대식 수련원 건설을 추진 중이다. 물론 지역민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는 문화재청의 재정 지원으로 서원주변 경관정비 사업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자치단체로부터는 춘추 향사비 등 각종 행사비도 지원받고 있으나 충분하지는 않다. 더욱이 내년부터는 일부 재정 지원이 끊길 위기에 있어 걱정이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입구가 좁고 시야가 막혀 있는 게 아쉽다. 게다가 서원 앞에는 민가 2~3채가 자리하고 있어 탁 트인 경관 확보가 어렵다. 서원의 누각인 현가루의 진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안 별유사는 “서원이 머물면서 선현의 학덕을 체험하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본연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꾸준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 12만명이 사진 찍어 ‘장애인용 도보 내비’ 만들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다수의 참여자가 제공한 빅데이터를 활용해 접근성과 장애물 등 실질적인 보행환경 정보를 제공하도록 만든 도보내비게이션 ‘시시각각(視視各各) 프로젝트’가 정부혁신 분야 최우수상을 받았다. 적극행정 분야 최우수상은 ‘건설기계 특고 종사자에 대한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개선한 대전고용노동청 보령지청에게 돌아갔다. 고용노동부는 13일 시시각각 프로젝트를 비롯해 25점의 정부혁신 및 적극행정 우수사례로 선정된 직원과 기관을 포상하고 간담회를 열었다. 장애인고용공단의 ‘시시각각 프로젝트, 사진 한 장이 모여 장애인의 눈이 되어요!’는 12만명이 참여해 수집한 빅데이터를 활용해 ‘도보내비게이션’을 개선한 아이디어다. 시시각각 프로젝트는 ‘각각의 눈을 모아 장애인의 눈(視)이 돼 준다’는 의미로 민간·공공·정부·지자체 등 51개 기관, 12만명이 참여해 건물의 출입 경로나 편의시설을 촬영해 전용 앱에 올리는 방식이다. 대전고용노동청 보령지청의 ‘건설기계 특고종사자에 대한 안전보건관리체계’는 전국 지방고용노동관서에서 처음 구축한 특고종사자에 대한 ‘안전보건관리 4단계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지역 내 건설기계 종사자의 사망 사고를 줄이는 동시에 건설현장 안전을 선제적으로 확보한 모범 사례로 평가됐다.
  • 익숙한 또는 낯선 근현대사로 열띤 광장… 다시 내일로 뜨겁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익숙한 또는 낯선 근현대사로 열띤 광장… 다시 내일로 뜨겁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도보해설관광 광화문광장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세종대로로 접어들면 광장의 축제 대신 일상이 펼쳐진다. 광화문광장부터 남대문을 향해 뻗은 길은 광화문광장 개장과 더불어 ‘사람숲길’이라는 새물내 나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사람의 숲 사이로 난 길을 지나며 가수 로이킴의 노래 ‘북두칠성’의 가사 한 구절을 떠올린다. ‘주변에 심어진/ 수많은 나무들을 바라봐/ 아무도 알아 주진 않지만/ 우뚝 서 있잖아’ 노래의 화자는 찻집에 앉아서 길을 걷는 사람들을 내다본다. 창유리 저편으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은 활기차고 근심 없어 보인다. 그래서 혼자만 더 외롭고 슬퍼질 때 위로가 되는 것은 누가 알아 주든 말든 우뚝한 나무들이다. ‘도시 인문학’(노은주·임형남 지음)에서는 도시를 ‘인류가 만들어 낸 수많은 발명품 중에서도 인간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자 ‘멈출 줄 모르고 달려온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정의한다. 사람들은 욕망을 실현할 무대로 도시를 발명했지만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그 무대에서 배척되는 운명까지 감당해야 한다. 사람숲길을 따라 1914년 설치된 서울의 도로원표와, 일제강점기의 사실상 마지막 의거로 일컬어지는 ‘부민관 폭탄 의거 사건’의 현장인 서울시의회를 지난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경복궁에서 봤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월대’ 복원 작업이 한창인데, 도보해설관광 광화문광장 코스의 반환점이 바로 덕수궁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있는 시청 광장이다. 때마침 지역 농산물 축제가 한창이라 마른 고추의 매콤한 향이 코를 쏘는 시청 광장을 지나 청계천으로 향한다. 교보빌딩 앞 고종 즉위 40년을 맞아 세운 칭경기념비 앞에서 손 선생이 마지막 해설에 열심이신데, 엄마에게 치도곤을 먹고 도보관광을 하는 내내 죽상을 하고 있던 사춘기 아이들은 이제 긴장이 풀렸는지 까르륵 까르륵 장난질하며 웃어 댄다. 2000년 전 한성백제와 600년 전 조선의 아이들도 꼭 저랬을 것이다. 도시는 살아 있고, 아이들은 웃고, 시간은 무심히 잘도 흐른다. 도보해설관광 광화문광장 코스의 마지막 기점은 서울정부청사 맞은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이다. 2012년 개관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를 기록한 최초의 국립 근현대사박물관인데, 외벽을 초대형 미디어 캔버스 삼아 상영하는 ‘광화벽화’ 입체 영상이 광화문광장의 일부인 명물이 됐다. 그런데, 몰랐다. 벽을 물들인 현란한 영상에나 눈을 홀렸지 옥상정원에 숨어 있는 보석을 까마득히 알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8층에서 내리는 순간 눈앞에는 백악산을 뒷배로 삼은 경북궁과 청와대의 전경이 펼쳐진다. 모두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보너스처럼 발밑으로 발굴 중인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 ‘의정부’터 현장이 내려다보인다. 등잔 밑이 어둡고 이웃집이 먼 이치가 이러하다. 역사 도시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스스로 증명하는 풍광이 광화문광장 건너편에 있다. 풍경 자체가 너무도 장쾌하고 진진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이나 좋고 낮밤에 각각이 좋을 수밖에 없다. 뜨고도 못 보는 당달봉사들에게 숨은 보석을 꺼내 보여 준 손 선생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2시간 30분이 넘게 길바닥을 헤매며 해설을 하고 받는 사례비가 최저임금 정도라지만 이렇게 빛나는 비밀을 나누는 즐거움에 문화해설사 일을 놓지 못한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의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 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 졸업식에서 했다는 축사를 읽었을 때의 뭉클함이 이토록 도저한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상기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정원에서 바라보는 경복궁과 청와대는 한낱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고층 빌딩들과 광화문광장은 욕망과 염오의 분출장이 아니다. 공간은, 그리고 시간은 무해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뿐이다. 사람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스스로 나무처럼 우뚝해야 하고, 시간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뿐인 하루하루의 삶을 온전히 살아 낼 도리밖에 없으리라. 도보해설관광이 끝나고 팀이 해산한 뒤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내려왔다. 함께 걷느라 놓친 것을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사헌부 유구 전시 공간 근처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내용을 설명한 안내판을 읽고 저게 우물이고 이게 배수로라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부모들도 눈에 띈다. 광화문광장 공사 중 전체 면적의 40%에서 조선시대 유구가 나왔으니 우리가 육조거리의 ‘깊은 표면’ 위에서 살아왔던 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한 안내판에서 움쑥한 시간의 깊이를 느끼기 쉽지 않다. 다리쉼도 할 겸 유구가 건너다보이는 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들이 갖고 노는 풍선 같은 상상 주머니를 띄워 본다. 사헌부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사법 기관 중 하나로 관료의 기강을 잡는 감찰기관이었기에 사헌부를 ‘조선의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사헌부가 탄핵한 관리는 의금부에서 국문을 했기에 의금부 옥졸들이 새로 임명된 관리들을 보고 “오늘은 비록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내일이면 반드시 나한테 꼼짝 못 하게 될걸!” 하고 비웃었다는 ‘썰’도 있다. 사헌부는 사간원과 더불어 언론 기관의 역할을 했기에 높은 학문과 뛰어난 식견, 깨끗한 행실로 모범이 되는 사람만 임명된다는 이른바 청직(淸職)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여러 부처 가운데서도 사헌부는 엄격한 상하 관계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아침이면 아랫사람이 윗사람보다 먼저 출근해서 기다려야 하고, 아랫사람은 문 앞까지 나와 상관을 맞아야 했다고 한다. 반면 사간원은 진지하기는 하지만 앉거나 비스듬히 기대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토론을 했고, 왕에게 간언하는 특별 직책이었기에 평시에 별일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술을 먹는 부서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에도 ‘꿀보직’이 있고 ‘월급 루팡’(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을 가리키는 은어)이 있고 ‘직장 내 갑질’ 비슷한 것도 있었다. 돌무더기와 흙더미가 전부가 아니라, 그때도 지금처럼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사랑과 미움과 욕심에 꺼둘리며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들을 복원할 수 있어야 비로소 ‘깊은 표면’의 질감이 느껴진다. 다만, 한순간이라도. 한참을 헤맸지만 결국 확인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공사 전 중앙형 광화문광장 바닥에 있었던 기로소 표석과 임진왜란 때 성난 백성들에게 불탄 장예원 표석 등은 전에 있던 자리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옮겼는지 다시 만들 계획인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다시 한번 방문해 찾아봐야겠다. 그사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오래되고도 새로운 도시 서울의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최인훈 장편소설 ‘광장’의 구절을 곱씹는다. 나무처럼 우뚝한 개인들이 숲을 이루고도 자유로운 광장, 새롭게 쓰일 광화문광장의 역사를 기대하며 발길을 돌린다. 소설가■서울도보해설관광 광화문광장 코스: 광화문광장~세종문화회관~세종대로~사람숲길~도로원표~서울시의회~덕수궁 대한문 앞~시청광장~청계광장~칭경기념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망대
  • 격변기의 ‘황제 고종’… 유물·기록으로 되돌아보다

    격변기의 ‘황제 고종’… 유물·기록으로 되돌아보다

    열강 침략기 현실 인식·대응부터국권 회복·저항 노력 증거 보여줘1897년 10월 11일 고종은 500여년간 이어 온 조선의 새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다. 다음날엔 중국 사신들의 숙소였던 남별궁터에 마련한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가 됐음을 만방에 선포한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음에도 열강들 사이에서 자주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엇갈린다. 하지만 대개 고종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역사가들에 의한 해석과 해설을 학습했을 뿐 실제 고종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경우는 드물다. 대한제국 125주년을 맞은 12일 덕수궁에서 개막한 ‘황제 고종’ 특별전은 고종을 다룬 첫 전시로 유물과 기록을 통해 고종과 그의 시대를 관람객이 직접 돌아보게 한다. 6개 전시실에 걸쳐 고종의 사진과 기념우표, 칙령(임금이 내린 명령) 문서 등 120여점을 만날 수 있다. 프롤로그를 지나 1전시실에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이어지던 18세기의 국제 정세 속 고종의 현실 인식을 보여 준다. 흥선대원군이 닫았던 문을 열면서 전례 없던 열강의 시대가 빠르게 도래했고, 고종 역시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1전시실의 국새나 2전시실의 황룡포는 열강의 위협 속에서도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를 보여 준다.전시관 내부 곳곳에 적힌 역사적 사건은 당시가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느끼게 한다. 숙고할 틈 없이 선택을 강요받는 환경 속에 남은 유물과 기록은 고종의 고군분투를 보여 준다. 3전시실에서는 서구 문명과 전통의 가치를 모두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종의 복합적 면모를, 4전시실에선 사실상 국권을 뺏긴 상황을 되돌리기 위한 저항을, 5전시실은 강제 퇴위 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고종과 그의 죽음이 낳은 반향을 전한다. 박상규 학예연구사는 “나라가 망했으니 책임은 오로지 고종에게 있다는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고종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유물과 기록으로 바라보자는 의미로 꾸몄다”면서 “전시관 입구 개요 패널에 ‘정직한 만남’이란 글귀를 집어넣은 것도 그런 뜻”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마지막엔 고종의 젊은 시절과 만년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사이에 거울이 배치됐다. 작품명은 ‘자화상’이다. 관람객들은 두 사진 사이를 관통한 역사의 흐름 속에 자신을 놓고 다시금 시대를 돌아보게 된다. 박 학예사는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거울”이라고 설명했다. 휴궁일인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는 11월 20일까지 볼 수 있다.
  • 고종은 ‘망국의 군주’이기만 할까… 다시 보는 ‘황제 고종’

    고종은 ‘망국의 군주’이기만 할까… 다시 보는 ‘황제 고종’

    1897년 10월 11일 고종은 500여년간 이어 온 조선의 새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다. 다음날엔 중국 사신들의 숙소였던 남별궁터에 마련한 환구단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제사를 올린 후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가 됐음을 만방에 선포한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음에도 열강들 사이에서 자주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엇갈린다. 하지만 대개 고종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역사가들에 의한 해석과 해설을 학습했을 뿐 실제 고종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경우는 드물다. 대한제국 125주년을 맞은 12일 덕수궁에서 개막한 ‘황제 고종’ 특별전은 유물과 기록을 통해 고종과 그의 시대를 관람객이 직접 돌아보게 한다. 격변의 시기를 겪어야 했던 고종을 다룬 첫 전시다. 고종을 다각도로 짚어 보기 위한 특별전인 만큼 다양한 기획이 6개 전시실에 준비됐다. 고종의 사진과 기념우표, 국새, 칙령(임금이 내린 명령) 문서 등 120여점을 만날 수 있다.프롤로그에선 고종에 대한 영상과 고종이 교류했던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1전시실 ‘쇄국을 넘은 개화군주’에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이어지던 18세기의 국제 정세 속에 고종의 현실 인식을 보여 준다. 흥선대원군이 닫았던 문이 열리면서 전례 없던 열강의 시대가 빠르게 도래했고, 고종 역시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1882년 만든 것으로 알려진 보물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는 고종이 공식 문서에 자주독립국을 지향하는 ‘국새’로 쓰고자 만든 것이다. 2전시실 ‘조선의 왕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에 전시된 황룡포와 함께 열강의 위협 속에서도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를 보여 준다. 전시관 내부 곳곳에 적힌 역사적 사건은 당시가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느끼게 한다. 숙고할 틈 없이 선택을 강요받는 환경 속에 남은 유물과 기록은 고종의 고군분투를 보여 준다. 3전시실 ‘자주독립의 근대국가를 꿈꾼 황제’에서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부강한 국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한편 전통의 가치와 군주상도 포기하지 않는 고종의 복합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4전시실 ‘국권의 침탈과 저항’에서는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상황을 되돌리기 위한 저항을, 5전시실 ‘퇴위와 저항, 기억 속의 황제’에서는 강제 퇴위 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고종과 그의 죽음이 낳은 반향을 전한다.박상규 학예연구사는 “나라가 망했으니 책임은 오로지 고종에게 있다는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고종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유물과 기록으로 바라보자는 의미로 꾸몄다”면서 “전시관 입구 개요 패널에 ‘정직한 만남’이란 글귀를 집어넣은 것도 그런 뜻”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마지막엔 고종의 젊은 시절과 만년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사이에 거울이 배치됐다. 작품명은 ‘자화상’이다. 관람객들은 두 사진 사이를 관통한 역사의 흐름 속에 자신을 놓고 다시금 시대를 돌아보게 된다. 박 학예사는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거울”이라고 설명했다. 휴궁일인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는 11월 20일까지 볼 수 있다.
  • “조선, 일본군에 망한 것 아냐” 파문… 유승민 “사퇴하라” 정진석 “친일 프레임”

    “조선, 일본군에 망한 것 아냐” 파문… 유승민 “사퇴하라” 정진석 “친일 프레임”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것이 아니다” 발언에 대해 유승민 전 의원이 1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덫에 놀아나는 천박한 발언”이라고 비대위원장직 사퇴를 요구했다. 유 전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게 우리 당 비대위원장의 말이 맞나”라며 이같이 적었다. 유 전 의원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왜 일어났나. 이순신, 안중근, 윤동주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라며 “우리 국민의힘은 정진석 의원과 같은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진석 비대위원장은 당장 이 망언에 대해 국민께 사과하고, 비대위원장직에서 사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덧붙였다.앞서 정 비대위원장은 이날 오전 페이스북에 “이재명의 일본군 한국 주둔설은 문재인의 ‘김정은 비핵화 약속론’에 이어 대한민국의 안보를 망치는 양대 망언이자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정 비대위원장은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적었다.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을 반대한 이 대표의 주장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정 비대위원장은 1895년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종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일,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일부터 ‘가스라 테프트 밀약’까지 언급한 뒤 “조선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며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쓰러져가는 조선왕조를 집어삼켰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 구한말의 사정은 그러했다”고 설명했다.민주당은 즉각 정 비대위원장의 발언을 비판했다. 오영환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전형적인 식민사관 언어”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했던 이완용 같은 친일 앞잡이들이 설파했던 그런 주장들을 여당 대표 입으로 듣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고 밝혔다. 정 비대위원장은 논란이 커지자 이날 오후 페이스북에 다시 글을 올려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전술핵 무기로 대한민국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또 친일 프레임 씌우겠다고 난리다. 가소로운 얘기다”라며 “조선이라는 국가공동체가 중병에 들었고, 힘이 없어 망국의 설움을 맛본 것이다. 이런 얘기했다고 나를 친일·식민사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공격한다. 논평의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한다. 기가 막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정은 왕조의 대한민국 핵 위협에 침묵하는 사람들은, 인민을 압살하고 있는 독재자의 추종자들이다”라고 강조했다.
  • 독립운동·의료헌신까지… 초심 찾아나선 교회

    독립운동·의료헌신까지… 초심 찾아나선 교회

    일제 제암리 학살사건 알린 석호필3·1운동 태극기 찍은 정동제일교회한국 근대화에 교회의 헌신 보여줘류영모 “교회 위기… 본질 찾아야”3·1운동의 들불이 전국으로 번져 가던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경기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에 15세 이상 마을 남성을 모이게 했다. 앞서 만세 시위를 강경진압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당에 사람들이 모이자 일본군은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 총을 난사했다. 남편을 찾으러 온 부인까지 포함해 23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불린다. “1980년 제암교회에 부임했을 때 역대 31대 교역자라고 했습니다. 3·1운동을 기념하는 교회의 31대 목사라는 데서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됐어요. 제암리는 ‘예수 믿다 망한 동네’라는 가슴 아픈 소문이 퍼졌는데도 맥을 이어 오고 있다는 데 고마움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에서 지난 5일부터 3일간 진행한 근대기독교문화유산답사 중에 만난 제암교회 강신범 목사에겐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졌다. 제암교회 일대는 곳곳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사건 당시 여러 선교사가 제암교회를 찾았고,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선교사가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린 것은 일제가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독립운동에 교회와 선교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제암교회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7년 서울 중구 정동에 세운 정동제일교회 강단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그 아래 좁은 공간에서 유관순과 동지들은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비밀 공간이었기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동료 선교사들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고종을 위해 직접 불침번을 서는 등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들은 자발적으로 헌신하며 한국인들과 운명을 함께했다. 근대 한국에 교회와 선교사가 공헌한 분야로 의료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7일 개관한 전북 전주시 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파송된 7인의 선교사가 의료 혜택을 전혀 못 받고 병들고 죽어 가던 한국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헌신을 기억하는 장소다.또 다른 순례지인 광주 호남신학대학교에선 대한간호협회를 창립한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를 세운 유진 벨 선교사 등이 묻혀 있다. 김병내 광주 남구청장은 “오늘날 광주정신이라고 하는 것의 모태는 선교사님들의 희생정신”이라고 말했다. 답사의 마지막 장소였던 대구에선 대구제일교회와 YMCA회관, 대구 3·1운동의 중심지였던 청라언덕 등에 뿌린 선교사들의 씨앗이 오늘날 대구 근대문화골목으로 열매 맺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곳곳에서 만난 기독교문화유산은 한국의 근대화에 교회의 헌신이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 줬다. 이런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정치권과 결탁해 이념 논쟁, 세대 분열 등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일부의 행태로 개신교 전체가 비난받는 현실이다. 이번 답사는 이를 반성하고 초심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차원에서 진행됐다. 류영모 한교총 대표회장은 “교회는 지금이 가장 위기”라며 “다시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상은 종교 없이 살아갈 수 있어도, 종교는 세상 없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초대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교회가 돌아갈 출발점을 찾는 것이기도 하다”고 부연했다.
  • 문자 넘어 예술이 되다… 한글의 변신은 무죄

    문자 넘어 예술이 되다… 한글의 변신은 무죄

    문자로서의 한글을 기억하는 한글날, 패션과 공예 등에 활용된 예술 작품으로서의 한글을 들여다본다. 한글은 오브제로 태어났고, 예술가들은 한글의 폭을 넓히기 위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576돌 한글날을 맞아 지난 7일부터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근대 한글 연구소’ 특별전을 시작했다. 한글을 디자인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예술 및 산업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조명하는 ‘한글실험프로젝트’의 네 번째 전시다. 앞서 2016년 ‘훈민정음과 한글 디자인’, 2017년 ‘소리×글자: 한글디자인’, 2019년 ‘한글디자인: 형태의 전환’처럼 한글이 소재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이번엔 박물관 소장자료를 토대로 재해석한 점이 차별화됐다. 1443년 창제된 한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발해진 것은 근대에 들어서다. 한글 연구자들은 가로쓰기, 띄어쓰기, 한글 전용 글쓰기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고 이를 문헌으로 남겼다. 이번 전시의 배경이 근대가 된 이유다. 전시를 맡은 윤지현 학예연구사는 “고종이 1894년 공문서에도 한글을 사용하도록 선포하면서 한글이 나라의 글로서 지위를 갖게 됐다”면서 “근대 시기에 한글 실험이 진행됐다는 점을 작품으로 재해석했다”고 설명했다.윤 학예사가 “한글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다른 분야를 만나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전시”라고 소개한 것처럼 시각, 제품·공예, 패션, 음악, 영상 등 다양한 장르로 뻗어 간 한글의 확장성은 거침없었다. 1부 ‘동서말글연구실’은 한국과 소통하기 위한 외국인들의 사전과 학습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 전시됐다. ‘금단의 나라 조선’(1880), ‘한영자전’(1897) 등 동서양을 이으려 했던 기록들은 한글·한문·영어를 섞은 유현선 작가의 ME뉴板(메뉴판)이 됐고, 전통 한복 구조에 트렌치코트나 재킷 등을 결합한 이청청 작가의 옷으로 탄생했다. 2부 ‘한글맵시연구실’은 한글을 어떤 모양으로 조합하고 배열할 것인지에 대한 근대 지식인들의 고민을 작품에 녹였다. 한글학자 주시경이 ‘말의 소리’(1914)에서 주장한 가로쓰기는 윤새롬 작가의 선반이 됐고, 국어 교과서인 ‘신정심상소학’(1896)에서 띄어쓰기 역할을 한 둥근 점은 김무열 작가의 독특한 공예품이 됐다.2부와 3부 사이에는 작가들의 인터뷰 영상과 실제 소품 등으로 작품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어 작품을 더 가깝게 이해하게 한다. 3부 ‘우리소리실험실’은 소리꾼의 목소리로 전해 오던 판소리가 근대 들어 소설로 출간된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을 소재로 했다. ‘심청전’의 대목을 옷에 활용한 김혜림 작가의 작품이나 각도에 따라 보이는 글자가 달라지는 김현진 작가의 작품은 한글 이야기가 어떻게 예술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마지막 4부 ‘한글출판연구실’은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대중적인 한글 인쇄물이 두터운 독자층을 만들고 대중문화를 이끌어 온 힘을 조명한다. 스튜디오 페시의 조합을 통해 완성되는 타일과 한글의 속성을 이중으로 중첩해 만든 자모타일 등 한글 출판물은 독특하고도 다양하게 변주됐다. 전시 끝에는 ‘주시경 선생 유고’(1939)와 함께 추모곡이 흘러나와 근대 한글 연구의 중심에 있던 그를 생각하게 한다. 전시는 내년 1월 29일까지.
  • 청련사서 불교음악학회 학술세미나 “불교전통문화 디딤돌 되기를”

    청련사서 불교음악학회 학술세미나 “불교전통문화 디딤돌 되기를”

    조계종 불교음악원이 주최하고, 태고종 청련사가 주관하는 불교음악학회 제4회 학술세미나가 지난 8일 경기 양주시 청련사 대적광전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경제 동교범패 왕십리 청련사 범맥과 어장 상진 범음성 세계’를 주제로 개최됐다. 가장 먼저 양영진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는 ‘청련사 예수재 홑소리의 연행과 특징’을 주제로 발표했다. 두 번째로 이용식 전남대 교수가 ‘청련사 예수재와 안채비소리 연구’에 대해 발표했다. 세 번째로는 위재영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이 ‘청련사 예수시왕생칠재의 절차에 따른 기악곡 분석’을, 네 번째로는 고경희 목원대학교 교수가 ‘청련사 예수재 작법무 연구’를 발표했다. 청련사 예수제는 오랜 전통을 이어 왔음에도 역사적 근거를 찾지 못하다가 앞선 학술세미나를 통해 의례 절차가 예전의 전범을 잘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범맥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전모가 밝혀졌다. 대웅전에 봉안된 감로도의 도상(1880년 조성)에 보이는 예수재의 모습이 오늘날 행해지는 모습과 다름없음을 알게 되는 성과도 있었다. 청련사 주지 상진 스님은 “예전의 연구가 그 역사의 문을 열었다면, 오늘은 그 안으로 들어가 본연의 모습을 찾아 나서는 귀중한 연구”라며 “이를 통해 청련사 예수재의 범맥이 잘 파악되어 오래 전승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불교전통문화가 계승 발전하는 디딤돌을 놓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日교수 “한국에 대한 일본국민의 감정이 얼마나 나쁜지 한국은 전혀 몰라”

    日교수 “한국에 대한 일본국민의 감정이 얼마나 나쁜지 한국은 전혀 몰라”

    “윤석열 정부가 일·한(한일) 관계 개선 노력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언행을 반복하는 것은 역사 인식 문제가 일본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한반도 전문가로 꼽히는 기무라 간(56) 고베대 대학원 국제협력연구과 교수가 지난 4일 ‘일본 국민의 한국에 대한 (나쁜) 감정의 심각성을 한국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제목의 뉴스위크 일본판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기무라 교수는 지난달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미국 뉴욕 정상회담을 전후로 불거진 잡음과 논란, 감정섞인 대응 등 일련의 과정이 한국과 일본간 인식차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 9월 15일. 한국 대통령실이 갑자기 양국이 뉴욕에서의 정상회담에 합의했다고 밝히면서부터였다. 한국 측의 느닷없는 발표에 일본 측은 곤혹스러워졌다. 기시다 총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기무라 교수는 “분명한 것은 양국 관계 관련 정보를 다루는 한국의 대응이 미숙하다는 것”이라며 “실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측이 (한일 관계와 관련해) 일방적으로 먼저 치고 나가거나 외교적으로 자국에 유리하도록 윤색해 발표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지난 7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 후 박진 외교장관이 한국 언론에 했던 발언도 문제가 됐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박 장관이 “일본 측도 우리 정부의 노력에 성의있게 호응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일본 측은 이를 부인한 사실을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한일 관계 악화는 문재인 정부의 실책 중 하나로, 자신이 취임하면 관계 개선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일·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면 정보를 신중하게 관리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그러한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수 있는 언행을 반복하고 있다.”기무라 교수는 이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외교를 위한 외교’가 아니라 ‘내정을 위한 외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의 모순된 행동을 이해하는 첫번째 열쇠는 일련의 발언들이 대개 자국 언론을 상대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권은 낮은 지지율에 시달리고 있고 국회 다수당도 야당이 차지하고 있는 상태다. 한국 정부에 있어 입법부의 동의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외교’는 여론을 상대로 실적을 과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성과를 알리기 위해 실제보다 윤색해 공표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기무라 교수는 “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손상시켜가면서까지 그렇게 한다면 이는 ‘내정을 위한 외교’에도 마이너스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대일 관계에서 부주의한 발언이 이어지는 것은 결국 한국 정부가 한국에 대한 일본 국민의 감정이 얼마나 크게 악화돼 있으며, 징용공(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포함한 역사인식 문제를 일본 여론과 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한국 대선 후에 일본을 방문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일본의 분위기가 이렇게 나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고 전했다. “현 상황의 근저에는 역사인식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한일 양국간의 커다란 시각차가 존재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 문제(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는 (1965년) 청구권협정을 둘러싼 법률적 해석의 문제다. 따라서 일본은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일본 피고기업 패소) 후에 더욱 벌어진 해석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문제는 단순한 인식의 차이에 불과해 정치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가볍게 여기고 있다.” 기무라 교수는 “한국은 일본이 양국 관계에 대해 신중하게 나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일본을 자극하는 언행을 반복하고 있다. 외교적 교섭에 앞서 양국은 이러한 인식의 차이부터 메울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보수우파의 시각에서 한일 관계를 바라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기무라 교수는 한국에서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 고려대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한국현대사’ , ‘한국 권위주의적 체제의 성립’, ‘한반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고종·민비’ 등 저서가 있다.
  • 尹 “재향군인회, 안보 보루… 제대군인 복지 증진”

    尹 “재향군인회, 안보 보루… 제대군인 복지 증진”

    윤석열 대통령이 6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창설 제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국가안보의 최일선에서 꽃다운 젊음을 바친 제대군인의 복지와 권익 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대통령이 재향군인회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2년 50주년 기념식을 찾은 이후 20년 만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안보단체인 재향군인회는 지난 70년간 국가 안보의 보루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재향군인회는 6·25전쟁 중인 1952년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창설됐고, 제대군인을 회원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안보단체다. 윤 대통령은 축사에서 “재향군인회는 그동안 천안함 피격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규탄함으로써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해 왔다”며 “각종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적극적인 지원 활동을 전개해 왔다”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위협이 증가하고 있으며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을 추구하는 국가로 인해 세계 도처에서 자유와 인권이 위협받고 있다”며 “이런 가운데 변화와 혁신을 통해 재향군인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또 “군복무에 대해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강한 국방력과 튼튼한 국가안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며 “이 순간에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분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제대군인 지원 정책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 김성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참전친목단체장 및 주한 국방무관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축사에 앞서 향군지원 조례 제정에 기여한 고종훈 충북도회장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하는 등 모범회원 5명과 1개 단체에 정부포상을 수여했다.
  • 尹 “재향군인회, 안보 보루···제대군인 복지 증진”

    尹 “재향군인회, 안보 보루···제대군인 복지 증진”

    윤석열 대통령이 6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창설 제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국가안보의 최일선에서 꽃다운 젊음을 바친 제대군인의 복지와 권익 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대통령이 재향군인회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2년 50주년 기념식을 찾은 이후 20년 만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안보단체인 재향군인회는 지난 70년간 국가 안보의 보루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재향군인회는 6·25전쟁 중인 1952년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창설됐고, 제대군인을 회원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안보단체다. 윤 대통령은 축사에서 “재향군인회는 그동안 천안함 피격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규탄함으로써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해 왔다”며 “각종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적극적인 지원 활동을 전개해 왔다”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위협이 증가하고 있으며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을 추구하는 국가로 인해 세계 도처에서 자유와 인권이 위협받고 있다”며 “이런 가운데 변화와 혁신을 통해 재향군인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또 “군복무에 대해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강한 국방력과 튼튼한 국가안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며 “이 순간에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분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제대군인 지원 정책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 김성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참전친목단체장 및 주한 국방무관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축사에 앞서 향군지원 조례 제정에 기여한 고종훈 충북도회장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하는 등 모범회원 5명과 1개 단체에 정부포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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