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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실터 강화서 찾았다/서울대연구팀,1만8천평규모 유적 발견

    ◎17∼18세기 건립… 외침대비,행궁으로 축조/병인양요때 소실된 전각 등 왕실소재 확인 폐허속에 방치돼온 조선왕조의 행궁(행궁·임금의 별궁)등 왕실터가 최근 서울대 규장각 연구팀에 의해 확인됐다. 서울대 규장각(관장 한영우 국사학과교수)연구팀은 지난15일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일대를 답사하고 이지역에서 1만8천여평 규모의 조선시대 왕실터를 확인했다.규장각팀이 확인한 유적은 조선왕조가 잦은 왜란·호란으로 유사시 왕실로 사용하고 국가 주요기밀문서및 자료를 보관할 목적으로 17∼18세기에 걸쳐 건립했던 행궁과 외규장각(외규장각)등 궁전건물터 등으로 돼있다. 규장각팀의 이같은 왕실터 확인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돼온 외규장각등 왕실의 소재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냈을 뿐 아니라 당국의 무관심속에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수확으로 평가됐다. 이지역은 조선조 고종3년인 1866년 병인양요때 건물 내부의 주요 도서가 프랑스 수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건물들이 불에 탄뒤 페허로 방치돼있다가 1977년정부의 강화도 전적지 성역화 사업때 극히 일부인 2천7백여평만이 「고려궁지」로 복원돼 사적133호로 지정됐다. 그당시 당국은 조선시대의 자료는 고려하지 않은데다 구체적 사료없이 구전에 의존하여 고려의 대몽항전을 기념하는 「고려궁지」를 건립하는 바람에 정작 조선왕조의 왕실과 전각들은 「고려궁지」의 울타리밖으로 밀려난 채 방치돼왔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당시 이곳 지방관아건물 2채만이 복원돼있다. 규장각팀이 이번에 발견한 지역에는 조선왕조가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돌계단과 주춧돌,「왕자샘」으로 알려진 우물터가 잡초속에 파묻혀 있고 돌계단 바로 위에는 일제때 민족정기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기술학교건물이 모선교회의 간판을 내걸고 서있다. 한교수는 『강화도는 선사시대이래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서 각 시대의 유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조선시대에는 특히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로서 왕실차원에서 대역사를 벌여 왕궁과 전각을 짓는 등 제2의 수도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점에 주목했다.그러면서 『그당시 강화도수령이 거주하던 전각은 고려궁지내에 복원돼 있는데 정작 왕실터가 내버려져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규장각측은 가까운 시일내 이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등 유적지 조사에 착수키로 했다. 강화도 문화원의 향토사연구위원인 홍재현씨(78)는 『현재의 고려궁지와 그 주변땅에는 왕실과 전각등 10여채의 건물이 조선왕조에 의해 건립됐으나 병인양요때 모두 불타버렸다』면서 『구체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일대 조선왕실터의 조사나 복원작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이에대해 『77년 성역화사업때 고려궁지터에 초점을 맞춰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했다』면서 『현재의 고려궁지터 주변에 조선왕실터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만큼 학술적 검토를 거쳐 사적지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 “한­일 합방조약 무효”/북,대일수교회담때 새 근거 제시할 듯

    ◎일지 보도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은 5·6일 이틀동안 북경에서 열릴 일·북한국교정상화회담에서 보상문제와 관련,「1910년 한일합방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독매)신문이 31일 일본외무성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부당성을 지적해온 북한은 제2차 한일협약 원본에 당시 대한제국의 박재순외무대신과 일본의 임권조 주한공사의 날인은 있으나 통치자였던 고종황제의 서명이 없기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 종말론교회 폐쇄 속출/휴거불발 후유증… 목사 축출·신도수 격감

    서울경찰청은 30일 「10·28휴거」이후 종말론을 주장해온 서울시내 11개 교회 가운데 마포구 동교동 160 들림중앙교회(대표 고종영·51)가 문을 닫았고 성동구 옥수2동 477 지구촌선교회(담임목사 임원순·51)가 폐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강남구 논현동 158 논현교회(목사 이성구·54)등 2개 교회에서는 해당교회 목사들이 휴거불발에 따른 책임을 지고 목사직에서 물러날 뜻을 비쳤다. 경찰은 나머지 교회에서도 신도수가 급격히 줄어드는가 하면 교회 폐쇄를 검토하는 등 휴거불발에 따른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 오늘 의거 83주년… 한·중·일 3국 입체취재

    ◎안중근의사/“동양평화 지켰다” 중국인이 더 추앙/이등 저격 하얼빈시선 해마다 확술대회/기념비 곧 건립… 여순감옥엔 유품 보존 우리는 해마다 10월이 저물어가면 의사 안중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19 09년 10월26일 하얼빈역두에 터뜨린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더 이상 침략책동자로 세워두지 않은 의거의 그날이 돌아오기 때문이다.일제는 그를 테러리스트로 매도,끝내는 교수대에 세웠다.그러나 안의사는 지금 영원한 휴머니스트이자 또 평화론자로 추앙받고 있다. 1909년 10월26일 상오 10시가 막 지나는 시각.모두 6발의 총성이 중국 흑용강성 하얼빈시 하얼빈역두에 울려 퍼졌다.의장대 사열을 끝내고 귀빈열차를 향해 몸을 돌리던 일본의 침략원흉 이등박문을 향한 안중근의사의 육혈포가 불을 뿜는 소리였다.그날의 총성이 사라진지 83돌을 맞은 하얼빈역은 신역사를 짓는 건설현장의 굉음과 종종걸음치며 플랫폼을 오가는 중국인들의 말소리만이 어울려 요란할 뿐이다. 이등박문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 1번 플랫폼앞 현장에는 뜰이 조성돼 대형플라스틱에 담긴 화분이 몇개 놓여 있었다.피격지점에서 10m쯤 떨어진 러시아군 사열대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었던 안의사의 저격장소는 이곳에 새로 지어진 1등 대합실건물에 편입돼버렸다.이등이 쓰러진 곳은 몇년전만해도 피살지점을 표시하는 둥근 녹쇠판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등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의사가 5개월에 걸친 수감생활끝에 1910년 3월26일 상오10시15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여순형무소.당시 악명 높았던 이「인간지옥」은 요령성 대연시 서쪽 40㎞지점에 「여순일아감옥구지」라는 현판아래 지난88년부터 중국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안의사가 복역한 지하감방은 간수사무실부속창고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감동 복도벽에는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이라고 쓴 액자속에 안의사의 수감당시 사진과 함께 남아있다.이밖에 유화초상화·족자·유시「장부가」가 담긴 액자등이 걸렸다. 안의사에게 교수형이 행해졌던 교형실은 감옥 동북쪽 구석에 감춰진채 15평남짓의 좁은 공간으로 남아있다.교수대는 2층으로 꾸며져 있고 시체처리통까지도 보존됐다. 현재 6만명의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하얼빈시에는 2개의 안중근연구회가 있다.안의사추모사업은 지난89년 의거80주년을 맞아 한·중·일의 학자들이 하얼빈역에서 추모회를 가진 이래 학술대회를 잇따라 열어 왔다.또 안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대형오페라가 공연되는등 추모붐이 대단했다.최근에는 새로 발굴된 자료를 모은 안중근사료집발간을 준비중이며 안의사기념비를 피격현장에 세우기위해 중국정부와 교섭도 벌이고 있다.당초 하얼빈역 광장에 안의사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었지만 일본과의 불편한 입장을 고려한 중국측의 소극적 태도로 한걸음 물러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얼빈시내 동북열사박물관에 전시된 중국근대사소개부문에도 안의사의 영정과 기념자료등을 손문다음으로 다루는등 안의사에 대한 중국현지의 평가와 연구열기는 그 어느때보다 높다. ◎국내/국내연구 활기­일선 “평화주의자” 새 시각/학계 동향/대중수교 계기 새 자료발굴 기대 우리나라에서의 안중근연구는 올해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새로운 계기를 맞고있다.그 이유는 중국이 「역사의 현장」인데다 그동안 우리측에 공개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접근도 가능해졌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에따라 그동안 한정된 자료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국내 학계의 상황도 크게 개선되어가고 있다.또 안의사의 의병활동기지였던 러시아측의 연구성과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여서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림성 조선연구소가 국내에서의 안중근연구를 희망해오는가 하면 러시아사회과학원 동방연구소에서도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우리나라에 와서 발표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또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최석우신부)에서는 안의사가 천주교신자였다는 점을 고려,프랑스측이 소장해오던 자료를 입수,연구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원장은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로 안중근연구에 숨통이 트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때일수록 연구자들은 일과성이 아닌 체계적 연구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새로 입수된 자료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되지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해석이 나올 경우 안의사연구에 자칫 흠집을 남길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올해는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다.안중근의사에 대한 저술은 물론 연구결과를 집약한 논문 역시 나오지 않았다.기존의 학술자료로는 「한국독립운동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안에 수록된 공판기록문서와 주한일본공사관 기록등이 정리돼 있다.또 논문은 신용하교수(서울대)의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등이 꼽힌다.저술은 주로 전기류인데 안의사 의거 이후에 쓴 박은식의 「안중근전」이 있고 해방후에는 「의사 안중근」(만수사보존회·1964년)과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 숭모회·1970년)등이 나왔다. 그리고 안의사를 기리는 단체는 사단법인 안중근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안중근의사장학회등이 있을 뿐이다. ◎일본/올 전기 등 2권 출간… 사당건립도 안중근에 대한 가해자쪽인 일본에서 안의사 평가는 「암살자」와 「휴머니스트」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시각으로 나타났다.테러리스트 시각을 가진쪽은 안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정권담당자들이다.그리고 휴머니스트로 보는쪽은 안의사의 재판에 참여한 판사와 검찰관,여순감옥의 형리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 일본의 지식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다.안의사를 휴머니스트로 보는 시각도 두 갈래로 나뉜다.그 하나가 중천팔양교수(축파대)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이끌려지는데,여순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이 『한일관계의 원전으로 오늘날 더욱 빛나는 혜안이었다』고 극찬한다.동아시아의 제국이 우방과의 신의를 축으로 한 동맹관계를 수립,러시아에 대응방위를 해야한다는 안의사의 주장은 오늘날 일본에 좋은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형무소장과 변호사는 물론이려니와 검찰관·재판관들이 서 있다. 재판과 수형생활등의 과정에서 안의사의 높은 지적수준과 고결한 인품이 자신들을 매료시켰다고 회고한다.오늘날 남아있는 안의사의 유묵은 그들에 의해 고이 간직되어 온 것이 많을 정도다.또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안중근연구회가 조직되어 일본안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현재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와카야나키의 대림사에 세워지고 있는 안의사의 기념사당도 그러한 경우다. 「테러리스트아닌 독립운동가」라는 시각에 따라 「안중근 무죄론」까지 제기되어 주목을 끌었다.특히 올들어 최근 일본에서는 안중근관계 저술이 2권이나 새로 출간됐다. 그 하나가 중야태낭교수(아세아대교수·국제관계학)의 「안중근」(아기화방간행).한국관계의 원상이라는 부제로 간행된 이 저술은 이토를 저격한 안의사를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생애와 사상/의병투쟁땐 일군포로 석방/「동양평화론」 저술한 선각자 안중근의사는 1879년9월9일 황해도 해주 한 향반의 집에서 태어났다.그리고 나서 31살을 일기로 1910년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까지의 삶은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 생애에서 안의사가 평화론자였다는 사실은 여러군데서 찾아진다.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고종 양위와 함께 군대가 해산됐을 때 독립전쟁을 주장하면서 의병활동에 뛰어든다.그는 의병전투기간에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석방,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그러나 이 사실은 오히려 의병활동을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이라는 국제공법에 근거,포로를 인도적으로 처리한 사례로 평가 되고있다. 안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힌 뒤 쓴 미완성원고 「동양평화론」은 그의 이같은 사상적 배경을 구체화한 것이다.「독립한 청국 한국 일본이 일심 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게 된다」는 논리를 편다.그래서 개화의 역으로 진보,구주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할 때 동양평화가 실현되고 또 유지된다고 주창했다. 이토는 침략의 원흉이고 동양평화에도 역행했다는 것이 안의사의 주장이다.그의 자서전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등의 15개조의 죄목」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결론적으로 안의사는 자신의 행동을 『한국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토를 공격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 해군 「해양입체작전시대」 개막/「이천함」 진수 의미와 성능

    ◎적 주요기지 무력화­해상로 안전확보 전기/북 잠함 속도의 2배… 30명 두달간 작전 가능 우리 기술진에 의해 건조된 국산 잠수함 「이천함」이 12일 진수됨으로써 우리 해군은 해상·항공작전 뿐만아니라 수중작전까지 수행할수 있는 명실공히 대양해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천함은 지난 89년 11월 대우조선이 독일 기술진과 함께 건조에 착수 3년 11개월만에 진수시킨 것으로 앞으로 2년동안 시험운전과 무장,레이더등을 장착 오는 94년초에 해군에 인도될 계획이다. 이 잠수함은 1천2백t급으로 수중최대속도는 30노트로 북한의 잠수함 속도보다 거의 2배이며 무장은 어뢰·기뢰등을 장착한채 30명이상의 승무원이 타고 약2개월간 단독작전이 가능하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잠수함은 3종류로 소련제 「위스키」급 4척,중국제 「도미오」급 4척,북한이 자체 건조한 17척등 모두 25척으로 추산되고 있다. 해군은 북한의 잠수함 함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그동안 해상초계기도입과 함께 국산잠수함의 건조를 추진해왔다. 김철우해군참모총장은 『국산잠수함의 건조로 우리해군은 대잠수함 작전은 물론 북한의 수상함공격,조기경보제공,적 주요기지무력화및 봉쇄,주요해역방어와 수중활동을 통해 해상 교통로를 보호하는등 항공,수상,수중 전 작전공간을 모두 커버할 수 있는 입체작전능력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잠수함이름을 「이천함」이라고 명명한 것은 고려고종 43년인 1256년 몽고와의 전쟁당시 다섯번째 고려를 침공해온 몽고군을 아산근해에서 격파한 이천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것이다.
  •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

    ◎증조부 김응우를 셔먼호격침 영웅화/“불배 뛰우는 화공술창발적 발기”/당시 평양감사의 장계와 큰 차이/실제로는 묘지기… 진두지휘 가능성 의문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제1장은 「비운이 드리운 나라」이다.그 요지는 이러한 나라에 「혁명적가정」이 단 하나만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자기라는 것이다.회고하는 기간은 그 부친이 사망한 1926년까지,즉 그의 나이 15세까지로 되어 있다. ○“애국혁명가 시조” 이 가정에는 김일성 뿐만 아니라 대대로 수많은 애국자·혁명가들이 배출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우선 그의 족보부터 소개하면 전주 김씨인 13대 조상 김계상이 평양으로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그의 조부까지는 3대독자로 내려오다가 그후 자손들이 번창하였는데 애국자·혁명가의 시조로서 증조부 김응우가 등장하였다.김응우는 병인양요에서 미국의 무장상선 「셔먼」호를 격침한 영웅이라는 것이다. 셔먼호는 1866년 음력 7월초순 교역을 요구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도중에서 한인 2명을 죽이고 중군 이현익을 납치하였기때문에 평양군민이 들고 일어나 평양성 밖의 한와정에서 화공을 맞아 침몰하였다.선원은 전부 죽었고 한인도 열몇명 희생되었다. 미제」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을 심고 있는 북한에서는 이 사건은 구미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민중이 반대한 일련의 싸움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다.그들은 미제국주의와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세상에 드문 전투경험을 자기 나라 역사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을 지도한 지도자가 다름 아닌 김일성의 증조라는 것이다.북한이 발간한 최대의 역사서적인 조선전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민대중의 앞장에서 미국해적선 셔먼호를 소멸하기 위한 창발적인 전법을 발기하시고 몸소 투쟁의 앞장에 서신 분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선생님이시었다」 「김응우선생님께서는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심한 대동강흐름의 특성과 과거 우리 선조들이 외적을 무찌르기 위한 싸움에서 이룩한 풍부한 군사경험,적아간의 무장장비의 차이,그리고 멸적의 기세드높은 인민대중의 불타는 애국심 등을 타산하시고 불배를 띄워보내는 「화공전술」로써 적을 소멸할데 대한 창발적 발기를 하시었다」 ○불멸의 업적 선전 「7월24일 적들의 발악적인 총포사격이 진행되는 속에서 낮 12시경 결사대원들의 화공전이 전개되었다.김응우선생님의 지휘밑에 결사대원들은 여러척의 작은 배들을 한데 묶어가지고 거기에 나무단을 가득 싣고 유황까지 뿌려 불을 지른 다음 상류로부터 셔먼호쪽으로 띄워 보냈다.뒤에서는 평양감영 군인들이 화승총과 활로 맹렬한 엄호사격을 하였다」 「미해적선 셔먼호를 소멸하기 위한 투쟁에서 김응우선생님은 실로 우리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업적을 쌓아올리시었으며 선생님을 선두로 하여 결사전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무비의 영웅성과 애국적 헌신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사건을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당시 셔먼호를 불태우는데 평양의 군민이 일치하여 싸운 것은 사실이므로 김응우도 그 속에 끼어들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의 고종실록 제1책,병인3년 7월27일의 조목에는 당시셔먼호사건의 최고책임자였던 평안감사 박계수의 장계가 실려있다.그 해당부문은 다음과 같다. (1)평양부소박이양선,익사창광,굉포방총,살해아인,기소제승지책,막선어화공,일재방화,연소피선…평양부에 정박하고 있는 이양선은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총과 포로 우리 사람을 살해하였습니다.승리를 얻는 방책으로는 화공보다 나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배를 연소시켰습니다. 이 보고에 의하면 화공전술은 김응우가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건의한 것이 아니라 박규수가 화공을 결단한 것으로 되어있다. (2)겸중군철산부사백락연,평양서윤신태정,친창총포,심력구한,필경초멸,가귀전공…겸중군철산부사 백락연과 평양서윤 신태정은 몸소 포연탄우속에 뛰어 들어 심력을 다하여 드디어 적을 소멸하였습니다.그들에게 전적인 공적을 돌려야 옳을 것입니다. 당시의 군대는 상당히 부패하고 있었지만 셔먼호사건에 있어서는 군대는 백락연이 지휘하여 맹렬하게 싸웠다.또 평양성의 백성들도 신태정이 지휘하여 용기 백배하여 싸운 것을 알 수 있다.실제로 이 공적으로 박규수 백락연 신태정 3명은 대원군으로부터 가자의 명예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반각도의 여울에 얹혀 좌초하고 있었던 셔먼호에 대한 화공은 박규수가 백락연과 신태정에게 명령하였다. ○큰칼 찰 자격없어 이 2명은 군민의 선두에 서서 싸움을 지휘하였다.「김응우가 화공을 제안하고 그가 지휘한」싸움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경대라는 평양성 서쪽 교외의 일개 농민이었던 김응우가 만약 이 화공에 참전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작은 배에 나무단을 실어 나르거나 이양선을 향하여 돌팔매질을 할 정도의 역할 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민이었던 그에게는 화승총도 활도 화살도 없었고 큰칼을 찰 자격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었다.그런데 조선전사는 「지휘권」을 일개 산당집 묘지기가 가지고 있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① 이상 「조선전사 13」,1980년간,76면. ② 같은책,77면. ③ 같은책,79면.
  • 가정집에 강도 2억원대 털어

    3일 상오2시30분쯤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64 고종석씨(60·회사원) 집에 30대남자 3명이 2층 베란다의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가 아래층에서 잠자던 고씨부부에게 흉기를 대고 『소리치면 죽인다』고 위협,넥타이로 손을 묶은뒤 장롱속에 있던 1억원짜리 당좌수표와 다이아반지등 2억여원어치의 금품을 털어 달아났다. 경찰은 근처 불량배들의 소행으로 보고 이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다.
  • 노 대통령 방중 북경교포들의 소감/좌담

    ◎“천안문 태극기에 벅찬 감동”/당국의 「극진한 예우」 확인… 가슴뿌듯/중국인들 “한국말 배우고 싶다” 관심/이젠 남북화해 차례… 조선족 동포들이 중매역할 할것 노태우대통령의 중국방문은 그것이 우리 국가원수로서는 역사상 처음이라는 뜻 말고도 훨씬 많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그리고 중국에 살고 있는 2백만명이 넘는 우리동포들에게는 더욱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노대통령의 방중을 지켜본 현지 동포들의 소감과 바람을 좌담으로 엮어본다. ●참석자 최응구(북경대교수,북경대조선문화연구소장 국제고려학회 회장) 김 철(중국작가협회상무이사,「민족문학」총편집) 서영섭(중앙민족대학어학교수북경조선언어학회이사장) 박천균(중앙인민방송 민족부부주임) 김형직(중앙인민방송 기자) 이경춘(중앙방송예술단가수북경아리랑악단가수) 좌담장소=북경국제호텔 일 시=9월28일 ▲김철=노대통령이 오신날 저녁 우리가족은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릅니다.며칠전부터 잔뜩 기대하고 노대통령이 중국지도자들과 담화를 나누는 당당한 모습을 기다렸는데 비행기에서 내려 악수하는 모습만 간단히 보여주고 지나갔으니 얼마나 서운했겠어요.조그만 나라라해서 얕잡아보는건가,북한 때문인가등 여러가지를 생각하다가 공식행사가 다음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못미더워서 다음날 아침 천안문광장으로 나가봤었습니다. ▲서영섭=첫날 TV를 보고 실망한 것은 우리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중국에 사는 동포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하지만 다음날부터 의장대 사열,중국지도자들과 당당하게 담화를 나누시는 모습이 방영되자 마음이 놓였지요. ▲김철=천안문광장에 내걸린 태극기를 보니까 뭐라 말할수 없는 느낌이 들더군요.해방때까지만해도 이곳 중국땅에는 『동해물과…』하는 국가와 태극기가 있었지요.또 어릴때이긴 했지만 독립군이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생생한데 40여년만에 아시아 동방의 한복판이라 할수 있는 천안문광장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하는걸 느꼈어요.그래서 사진도 많이 찍어뒀습니다. ▲김형직=노대통령의 중국방문과 태극기의 등장은 역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습니다.제가 알기로는 1897년 10월12일 당시 고종황제가 아관파천직후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한 이래 95년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국가원수가 되니까요. ▲김철=그래서 나는 환영식이 열리는 시간에 직접 천안문에 나가봤어요.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나해서요.예포소리를 듣고는 또 놀랐습니다.21발이어야 할텐데 나는 11발만 들은것 같거든요.그래서 옆에 있는 중국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그들은 분명히 21발을 들었다고 해서 또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기 나온 중국인들이 무슨 얘길 나누는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여봤어요.한 여자경찰은 남자경비원들에게 『노대통령이 잘생겼다』『미남인데』를 연발하더군요.그 옆에는 시골에서 구경나온 듯한 사람들이 『한국은 아시아의 4용이야』 『대단해요』라며 얘기를 주고 받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경춘=요즘은 택시를 타다보면 기사들이 한국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걸 느끼게 됩니다.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조선족이란 걸 알게 되면 남쪽과 북쪽의사는 형편을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고 특히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턴 『왜 한국과 빨리 수교를 않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아왔어요.이제 수교가 되고 노대통령께서 역사적인 중국방문까지 실현하셨으니 「왜 수교않느냐」는 추궁(?)을 안받게 됐습니다. ▲최응구=이제 수교도 됐고 노대통령도 오셨으니 한국측에 부탁하고 싶은 얘기도 나눠봅시다.나는 양국 당국자들이 정치·경제·외교에만 신경을 쏟지말고 동양문화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최근의 국제정세는 서구·북미 등의 지역연합이 강화되고 있는데 그 배경은 지연이나 경제문제보다는 문화적 전통이 중요하다고 봅니다.서구는 유럽문화,북미는 또 나름대로 그들의 전통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으니 중국·한국·일본등 동양문화권도 단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한국인들이 여유를 갖고 살길 바랍니다.매스컴에서는 일본만 보면 무조건 내리치기만 하는데 이것도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 봅니다.그렇게 과거에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서 그들을앞서야 하지 않겠어요. 중국은 한국과 수교하면서도 북한을 잘 관리해가고 있습니다.하지만 한국은 대만을 버려야만 했는데 물론 여러 여건들을 얘기할 수 있지만 이런 점은 중국으로부터 배울만도 합니다. ▲서영섭=남북한 기자들도 이젠 반성을 해야합니다.왜그런지 남쪽에서 온 기자들은 우리를 통해 북의 허물을 캐내려 하고 북에서 온 사람들 역시 우리를 통해 남쪽의 약점을 잡아내려 하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기자뿐 아니라 학자들도 그런 경향이 있어요.이젠 제발 남북이 진심으로 화합해야 합니다. ▲김형직=남북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남북을 화해시켜야 하지 않겠어요.남북을 화해시키는 중매자 역할은 이제 우리 중국거주 조선족 동포들이 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과거에는 중국이 북측하고만 관계를 가졌으나 이제 남북한 양측과 수교를 맺은 이상 우리는 정부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중간자 입장에서 남북화해에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김철=중국인들이 평소 한국이나 일본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여기서 소개해 드리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은 똑똑합니다.너무 똑똑해요.그래서 모두가 대통령 같습니다.하지만 응집력이 없다는 흠을 발견할 수 있어요.장작으로 장작을 묶을 수 없는 법입니다.반드시 부드러운 버들가지가 있어야 묶을 수 있어요.네말은 들을게 없고 내말만 들어야 한다는 식은 곤란하지 않겠어요. 반면 일본인들은 자기들을 평가할때 『우리는 바보 9명에 똑똑한 사람 1명꼴로 살아간다.그래서 우리는 시키는대로 하고 그래서 모든게 잘 돼가는 것같다』고 말합니다.한국은 그 반대로 똑똑한 사람 9명에 바보 1명이 끼어있는 상황이니 소리가 요란스럽다고 한국인들을 평가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김형직=중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일본보다는 한국을 더 좋아합니다.그 이유는 일본의 경우 중국을 침략한 적이 있고 중국이 옛날에 한국을 침략한 적은 있으나 한국이 중국을 침략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그런 역사적 이유로 한국을 더 좋아합니다만 옥의 티로 생각하는게 있다면 한국인들이 너무 약삭빠르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박천균=경제적 측면에서도 중국은 한국을 더 선호합니다.일본은 중국에 비해 너무 발전돼 있어서 기술이나 경영방식 등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이 많은데 한국은 바로 우리 앞에서 나아가고 있으니 가장 적합한 합작파트너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것 같아요. ▲김철=하지만 한국인들을 대면해본 중국인들은 「우레소리는 큰데 왜 빗방울은 없느냐」고 반문합니다.기업인들이 중국을 찾아오면 반드시 거대한 투자계획을 거론은 하지만 실제 성사된게 없어서 하는 얘깁니다.연변에서는 한국인들이 백두산에 입으로만 지은 호텔이 2천개나 된다고 합니다.오는 사람마다 호텔을 짓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돌아간 뒤에는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돼버리기 때문이지요. ▲서영섭=어쨌든 두나라 수교이후 한국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가진 중국청년들이 부쩍 늘어난 것을 알 수 있어요.한글을 배우겠다고 졸라대는 전화를 최근들어 수없이 받고 있는데 이들은 1주일에 그저 1시간씩이라도 좋으니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그들은 한국에 사무소를 내고 장사를 시작할 생각이라고 해요. ▲김철=개혁개방정책으로 문호가 개방된 중국대륙은 큰 고기덩어리와 같습니다.일본도 미국도 영국도 다들 와서 고기를 먹고 그 덕분에 중국도 좀 먹자는 것입니다.우리 조선족 입장에서는 기왕이면 한국이 좀 더 많이 챙겨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 6월에 흰색꽃… 가로수로 사랑받아/칠엽수(나무이야기:17)

    ◎보통 잎 7장… 열매는 약재·염료로 이용/마로니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칠엽수는 불어인 마로니에로 더 알려져 있다.소엽이 5∼7개이나 보통 7개가 많아 칠엽수라 한다.전 세계에 13종류가 있는데 북온대및 남미지방에 분포한다.특히 유럽 및 북미지역에 가로수·공원수 등으로 많이 심어져 있다.특히 파리의 샹젤리제를 비롯한 주요 도로의 마로니에는 파리의 명물로 사랑 받는다.우리나라에 자라고 있는 대부분의 칠엽수는 동양계로서 일본에서 들어왔으나 덕수궁 뒷문 안에 있는것은 서양칠엽수로서 19 12년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바친것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다음으로 큰 것이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교정의 마로니에와 수원의 서울대 농생대 교문밖 북쪽에 가로수로 서있는 나무로 일본에서 들어와 심어졌다.일본산 칠엽수는 낙엽교목으로 수고가 30m,흉고직경이 60㎝에 달하며 주로 경기도 이남의 토심이 깊은 비옥한 땅에 심고있다.어려서는 음수이지만 자라면서 양수가 된다.뿌리는 직근성이므로 이식이 어렵다.생장이 빠르고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도시에 많이 심으나 대기오염에 약하고 잎이 커서 강풍의 피해를 받기쉽다.꽃은 잡성화로서 6월에 원추화서에 분홍색을 띤 백색의 아름다운 꽃이 촘촘히 핀다.열매는 황갈색의 견과로서 10월에 익는다.과피가 두텁고 익으면 3개로 갈라지며 종자는 적갈색으로 밤모양과 비슷하다.수피는 약용으로 쓰이며 5∼8%의 타닌을 함유,유피용 또는 염색염료용으로 쓰인다.10월에 익는 밤과 같이 생긴 열매는 전분과 단백질을 많이 함유해 타닌을 제거한 후 식용이 가능하나 최근 독성이 있음이 알려졌다. 꽃은 화서의 길이가 15∼25㎝나 되어 개화기에 매우 아름다울뿐 아니라 꿀샘이 깊어 좋은 밀원자원이 된다.수형이 크고 아름다움 까닭에 공공건물의 광장·공원·주택단지의 공한지에 줄을 맞추어 심은 가로수 및 녹음수는 삼복더위에 뙤약볕을 가려주는 그늘과 서늘함을 주어 삶의 질을 높일뿐 아니라 냉방을 위한 에너지 절약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셈이다.또한 목재는 무늬가 불규칙한 임면의 주름무늬에 파도무늬가 생겨 악기와 공예용기 도구재와 가구재로 호평받고 있다.열매에는 사포닌의 에스신·플라보놀의 켈세틴·켄페롤 등과 같은 성분이 함유돼 치질·자궁출혈 등의 치료제에 쓰이며 동맥경화증·혈전성 정맥염·외상에 의한 종장 등의 약재원료가 된다.
  • 근대 첫 동전 조조기 “건재”/1886년 독서 도입…조폐공에 보관

    ◎당오전등 제작하다 1904년 폐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동전을 찍어 냈던 공작기계 압사기가 일제에 의해 폐기된지 88년만에 그 존재가치가 확인됐다. 국립공업기술원연구팀이 충남 대덕의 한국조폐공사박물관에서 확인한 이 압사기는 오늘의 조폐공사역할을 맡았던 구한말 전원국이 당오전을 만들어 냈던 공작기계로 밝혀졌다.공업기술원연구팀은당시 주한일본공사관「전원국조사보고서」(1899∼1904)와 1914년에 나온 「근세조선 화폐및 전원국의 연혁」등의 문헌을 통해 이 압사기가 1886년(고종 23년)독일에서 도입됐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이 기계는 고종의 외교고문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1883년 7월5일 우리나라 최초의 조폐기관으로 창설된 전원국의 총변으로 임명되면서 이땅에 들어 오게 됐다.압사기는 동전에 문양을 찍거나 동전제조의 중간공정인 둥근소전을 동판으로부터 찍어 내는데 사용되었다.당시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정밀공작기계라는 것이다. 이 기계는 도입된후 18년동안 화폐주조임무를 맡아 오다 1904년 당시재정고문 메가타(목하전종태낭)의 의견과 일제강압에 의해 전원국이 폐지되는바람에 기능을 잃었다.그 이후의 화폐주조 업무는 일본 오사카조폐국으로 위탁되는 비운을 겪었다.이 기계는 그동안 한말의 도지부(현재의 재무부)에 인계됐다가 관립공업전습소를 거쳐 국립공업기술원의 전신인 농상공부(상공부)중앙시험소등을 전전해 온것으로 알려졌다. 올 4월부터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채 현재의 조폐공사 뒷뜰에 방치돼 있었다.
  • 이화장 양각 장검 발견/길이 80㎝… 구한말 황실 의전용 추정

    구한말 임금들이 의전용으로 찼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검이 강원도 춘천에서 발견됐다. 이 장검은 길이 80㎝,폭은 칼 윗부분이 1.9㎝,칼끝은 1.1㎝로 손잡이에는 대한제국 당시 황실에서 사용하던 배꽃무늬(이화장)가 금으로 도금돼 10개가 양각돼 있다. 소장자인 이인섭씨(46·춘천시 후평2동)는 이 장검을 20여년전 춘천 근교의 고물상에서 우연히 구입했다면서 『그동안 육군사관학교 무기박물관과 창덕궁이 「이왕실 유물 관리실」등에 알아봤으나 고종과 순종이 의전용으로 찼던 칼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밖에 여러 전문가들에게 문의해 『이화장이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이고 칼의 모양새가 전통적인 국내검이어서 황실에서 사용하던 것이 틀림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한편 강원대 박물관장 박민일씨(55)는 『구한말 임금이 사용하던 물품에는 배꽃무늬를 반드시 새겨넣어 황실 사용품임을 알렸다』면서 『이 장검을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당시 고종이나 순종임금이 찼던 것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3대 독립운동가문 첫 공인

    ◎4대 임주수씨,광복절에 선친 건국훈장 수상 확정/을사조약후 무장항일운동 주도/1대/부친도와 독립의군부결성 기여/2대/전북지역 군자금모금·운반담당/3대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증손자가 국가로 부터 서훈을 받게 돼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 탄생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무장독립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자 자결한 돈헌(돈헌)임병찬선생의 손자 임수명선생(지난 77년 80세로 사망)이 오는 15일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게 됨으로써 3대에 걸친 이 집안의 조국독립 의지가 함께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1대 임병찬선생은 62년 독립장을,2대 임응철선생(지난 31년 60세로 사망)은 90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었다.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조국광복을 위해 대를 이어 몸바친 3대가 모두 「공식」인정을 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임병찬선생은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선생과 함께 향리인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의 한일합방후에는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시·도 대표 3백29명으로 독립의군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5월 체포돼 전남 여수군 거문도에 감금당한 뒤 끝내 나라 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2년후 목숨을 끊었다. 구한말 홍문관 학사와 승정원 비서승등을 역임한 2대 임응철선생은 부친을 도와 독립의군부 결성및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협등과 함께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했고 그해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게 된 3대 임수명선생도 이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할아버지 임병찬선생이 거문도에 감금돼 있는 동안 뒷바라지를 한 데 이어 아버지 임응철선생을 따라 조선독립대동단에 들어가서는 전북지단 이사를 맡아 김흥순등 수십명을 가입시켰으며 이들로 부터 걷은 군자금을 서울 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1·2대가 쉽게 공적을 인정받은데 비해 임수명선생의 「독립유공」은 그동안 공인받지 못했다. 그의 활동이 워낙 비밀스러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4대째인 임주수씨(68·경기도 수원시 고등동 롯데아파트 1동208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내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전북향토문화연구회와 그 지역 역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자료를 입수해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됐다. 그 자신 독립운동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막일을 하며 어렵게 성장한 임주수씨는 현재도 월세 20만원짜리 20평형 아파트에서 부인 이지순씨(64)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위해 헌신해온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사실과,선대가 남긴 훈장을 자랑으로 여기며 깨끗이 살아왔다』면서 『다만 광복절을 단지 공휴일로만 생각하고 왜색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드는 듯한 젊은 세대들을 보면 선조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일선생

    ◎독립군 양성… 청산리전투 대승 이끌어/31세에 만주로 망명… 한인자녀들 가르쳐/항일투쟁단체 규합,대한군정서 총재로/「김좌진전투부대」의 최고지도자… 흑하사변으로 동지 잃자 자결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포 서일선생이 선정됐다.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서일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청산리전투의 실질적 주도자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교육자·종교인·언론이기도한 선생은 1921년 소위 흑하사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자결로 민족에 사죄했다.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백포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선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서일선생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교단에서 백묵가루를 마시던 약골의 선비 서일을 무장독립운동가로 변신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는 41세의 짧은 생애 강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그 마지막 10년동안 흘린 피와 땀과 사자후가 희미하게 역사에 남아 있다. 혁명가 서일선생에 대한 흔치않은 증언과 색깔 바랜 기록들이 아쉽긴 하지만 그의 이름은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고향과 가족을 등진채 산악과 벌판에서 풍손로숙한 이름 모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저승에서도 서일선생을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1881년(고종18년)2월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호는 백포. ○월북 경원서 출생 처음 이름은 기학이라 했지만 나중에 일로 바꿨다(대종교·보훈처 기록).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와 기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에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등에는 사립학교 설립이 급증했다.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망명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31세때(1911년)선생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해하며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만주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승점이 설립한 대종교계통의 명동학교(왕청 덕원리소재)에서 물밀듯 이주해오는 한인자녀들을 가르치며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이 명동학교를 서일선생이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듬해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한다.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된다.선생이 단순한 무장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만강을 넘어 망명해오는 열혈청년들이 줄을 이을 때 서일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과 규합,중광단을 조직했다.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대종교에 귀의 그는 대종교 입교후 포교에도 나서 3년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만의 교우를 얻어 「도력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서일선생은 교우들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교우에게는 군량 조달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한배검에 귀의케한 탓으로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5천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음이 틀림없다.이 사이 선생은 「오대종지강연」「도해」「신화강의」「진이도설」「삼문일답」「회삼경」등 경전도 저술했다. 당시 선생은 중광단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와함께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신국보」등 신문을 발간,『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이듬해 1919년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10월까지 선생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대한군정부→북로군정서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정규병력 1천5백여명을 청산리전투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겁을 먹고 주목했는데,그들은 「북간도지방의 항일단체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제정규군 3천3백여명이 사살 당하는 청산리전투를 짐승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일군 3천명 사살 『…군정서는 서대파구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그들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총재는 서일,부총재 현천묵,사령관 김좌진,부사령관 김성,참모장 나중소등이다.…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 동원소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산리전투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영 밀산으로 이동한다.여기에서 북로군정서(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등 10개 부대는 전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선생이 총재로 추대되었다.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일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소위 「흑하사변」이라는 참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여기에 토비들의 습격까지 겹쳤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대종교의 폐기법으로 자결순국했다.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차리라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역사적 평가/독립운동가·교육가로 큰 발자취/신재홍 국사편편찬위 부장 백포 서일선생은 그가 민족운동사에서 차지 하고 있는 위상에 비하여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일찍이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몸소 이를 실천한 교육자이며 또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한 대종교의 간부일뿐아니라 만주에서 일제와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군 지도자였다. 그의 학력은 함북 경성군에 위치한 성일학교 사범과를 나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민족혼을 살리는 길은 교육에 있음을 인식하여 향리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북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 명동 동일 학성 동신 동화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 양성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강인한 민족혼의 배양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이를 위하여는 국조단군을 숭상하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깨우치는데 있다 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 하였다.대종교의 포교가 바로 민주운동이요 독립운동임을 믿어 교리연구과 포교에도 힘써 많은 저술을 남긴 민족종교의 지도자였다. 선생의 활동에서 특기할 것은 무엇보다 무장항일운동에 있었다.선생은 일제를 우리 국토에서 구축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로지 일제와의 혈전에 있다하여 무장항일운동 단체인 중광단 대한정의단을 조직,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여러 무장단체를규합하여 북로군정서를 설립하였다.이 단체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대종교 신자가 중심이 된 단체로서 재만 독립군중 최강의 부대였다.따라서 1920년 이 부대가 이룩한 청산리전투의 위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인식하여야 한다.이것은 선생이 배양한 투철한 민족혼과 강인한 항일의식이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민족교육가이며 민족종교가로서 또한 무장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선생이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수가 있다.
  • 하와이서 대규모 「한국축제」/미 하와이대주최 오는 7일까지

    ◎전시회·공연 통해 한국문물 소개 하와이땅에 다양한 한국문물을 소개하는 대규모 「한국축제」행사가 미하와이대학 주최로 열리고 있다. 하와이대 부설 한국학연구소 창설 20주년을 계기로 열린 이번 축제는 한국의 각종 문화공연,학술·강연회 등을 망라하는 행사로서 8월7일까지 계속된다.이번 한국축제는 시조낭송회,사물놀이 공연,판소리 및 가야금공연,전시회 등 각종 문화행사와 일반강연및 학술대회,그리고 영화제 등으로 짜여졌다. 이미 문화공연및 일반강연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한국학 학술대회가 진행중이며 전시회와 「꿈」(배창호 감독),「장군의 아들」(임권택 감독)등 5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될 영화제를 남겨놓고 있다. 이 행사는 이먼 2세대와 격심한 갈등을 겪은바 있는 하와이 이민사회에 우리의 윤택한 문화와 전통을 뿌리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특히 내년 1월13일 하와이 이민 90주년을 앞두고 이 행사가 갖는 의미는 더욱 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의 하와이 첫 이민은 1903년에 이루어졌다.1903∼1905년 사이에 대략 7천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이주했는데 이민자의 대부분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일본인 노무자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이같은 이민은 구한말 일본의 야욕을 견제하려 미국과의 강력한 정치적 유대를 원했던 고종황제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이민자 대부분은 농장에 적응치 못하고 도시로 나와 야채상·목공소·세탁소·양복점 등 소규모 상업에 종사했다.이후 결혼 문제때문에 1910∼1924년에 걸쳐 한국인의 이민이 다시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말 이민법 개정으로 본격적인 이민이 이루어졌다.이들 한국이민들은 비교적 착실히 하와이에서 기반을 잡아나갔으나 2세와의 갈등으로 문제를 겪기도 했다.
  • 태고종 사찰재산 종단귀속싸고 진통

    ◎부산교구 66개사찰,집단탈종 선언/“개인재산 교묘히 수탈” 반발 확산/총무원,“교구 전면개편” 강경대응 한국불교태고종이 사찰재산 귀속문제와 관련,탈종사태까지 빚는등 큰 진통을 겪고 있다. 이는 태고종 부산교구 소속 66개 사찰이 최근 종단의 사찰재산 귀속움직임에 반발해 집단으로 탈종을 결의함으로써 비롯된 것인데 종단차원에서 이에대해 간경대응할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다보사·해안사·서운담등 부산교구 사찰들은 불교계 주간전문지인 법보신문 20일자에 「한국불교태고종 부산교구 종도일동의 탈종공고」라는 제하의 전면광고를 통해 『종단이 개인소속사찰을 재단에 귀속시키려는 의도를 표면화하고 있어 개인재산권 보호차원에서 6월20일 탈종계를 총무원에 제출하고 탈종했다』고 밝혔다. 이들 사찰의 탈종은 지난 90년 12월 태고종이 기존의 사단법인 중앙회를 해체하는 대신 이듬해 1월 태고종 유지재단을 설립한 후 지방사찰의 정면적인 반대를 맞은 첫 케이스인 셈인데 이번 탈종사태는 다른 지역으로까지 번질 분위기여서태고종의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6개 부산지역 사찰은 탈종교고문에서 『태고종 소속사찰은 총무원의 금전적 보조가 아니라 승려개인이나 창건주의 재산과 노력으로 건립됐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종단관리화에 둘 수 없다』면서 종단은 재단을 설립해 개인재산을 교묘히 수탈하려 하고 있지만 재단관리대상으로 하고자 하더라도 재단법인에 출연한 사찰에 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지난 6월초 임시총회에 상정한 재단법인 정관 개정안은 재단법인에 이전등기하지 않더라도 개인소유 사찰이 자동적으로 재단법인 관리대상에 속하도록 한 것으로 이에 반대하는 종도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탈종한다』고 밝혔다. 현재 전국의 태고종소속사찰은 2천5백여개로 이 가운데 부산에만 약1백30개가 운영중인데 이들 사찰의 탈종으로 부산교구는 절반가량의 사찰을 상실하게 됐다. 한편 태고종 총무원측은 이같은 움직임을 총무원 불만세력의 주동으로 야기된 것으로 인식,이들 사찰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은 채 빠른 시일내에 부산교구를 전면 개편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사태의 심각성이 더욱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 외언내언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를 신문·방송이 일제히 소개한다.이것 저것 나열하는 가운데 그가 김일성 주석의 「5촌조카」라는 말도 하나같이 빠뜨리지 않는다.◆5촌 조카라면 그가 김주석의 종행간(4촌 형제)의 아들이라는 말.다시 말하면 김주석의 할아버지와 김부총리의 증조부는 같은 사람이다.친족 호칭법은 지방에 따라 혹은 집안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5촌조카라면 보통 종질 또는 당질이라고 한다.그러니까 김주석은 김부총리의 종숙(당숙)이 되는 셈.이러한 호칭법에 익은 사람이 있다면 「5촌 조카」라는 말에 다소 생소함을 느꼈을 법도 하다.◆그런데 처음 알려진 「5촌 조카」와는 달리 『사실은 외6촌 매제』라는 보도가 잇따른다.그 관계는 「5촌 조카」에 비하자면 「남」이나 다름 없이 멀다.나의 어머니와 4촌되는 남자 형제의 딸이 나보다 나이 적을 때 외6촌 누이동생이 되니 그 남편이 외6촌 매제.김주석이나 김부총리의 경우는 성이 같아 그렇지,외6촌 매제라면 「5촌조카」와는 달리 성부터 달라지는 관계다.◆내 외6촌매제는 누구인가 생각해 보게도한다.아예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쉽게 떠오르지도 않는다.하기야 재종제·재종질 같은 당내지친도 얼굴을 모른 채 지내는 경우가 적지않은 것이 현대의 우리들 삶.「하나만낳기」는 친족 호칭을 잃어가게도 만들고 있다.오빠·누나가 없고 보면 이윽고 숙부·고모를 모르는 경우로 이어질 것이다.이모도 모른다.외종사촌에 고종사촌도 없고 또 모르게 되어간다.◆「매제」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여자 형제 남편의 호칭만 두고도 혼선이 인다.자형·매형·인형·매부·매제.지역 따라 집안 따라 달리 쓰이고 매부의 경우는 모호해진다.호칭 때문에 더러 시비도 이는 것이 현실.그 표준화도 있어야겠다.
  • “김영호씨 맡긴돈 10억 반환못한다”/홍콩거주 김씨 사촌

    【홍콩=최두삼특파원】 정보사부지 사기사건으로 구속된 전합참군사연구실 자료과장 김영호씨가 밀반출한 10억원을 보관중인 김씨의 홍콩거주 고종사촌동생 김호웅씨(51)는 11일 『내가 보관중인 돈은 법원의 판결이 나거나 형 영호씨의 자필로 된 인도확인서를 휴대한 소송대리인이 오지 않는 한 내놓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씨는 『형이 건네준 것은 자기앞수표,양도성예금증서 외에 잔고가 1억1천만원인 정명우씨명의의 가계금전신탁통장 등이다』라고 밝히고 『그러나 자기앞수표4억4천만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건이 보도된 뒤 형이 남겨놓고간 가방에서 나중에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 공사장 목수서 건설회장으로 “비상”/「연결고리」 김인수는 누구

    ◎부인에도 행적 안알리는 “베일속의 인물”/김영호 도피하자 자료폐기… 치밀함 보여 정보사부지를 둘러싼 거액사기사건에서 전 합참군사연구실 자료과장 김영호씨와 성무건설 회장 정건중씨등을 연결해준 대가로 25억원을 챙긴뒤 잠적한 김인수씨(40)는 어떤 인물일까.김씨는 지난 3월30일부터 이번 사건이 드러나기 직전까지 「명화건설」이란 회사의 회장으로 행세해온 것으로 밝혀져 이번 사건에서의 김씨역할과 비중 등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국민학교만 졸업한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 지난 78년 인천으로 이사,목수일 등을 하며 공사판을 전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그러나 지난해 12월중순 공사판 주변에서 어깨너머로 알게된 부동산시세 등에 대한 정보를 활용,토지브로커 등과 사귀면서 일대 변신을 꾀한 것처럼 보인다.수배중인 토지브로커 임환종씨(52)를 통해 김영호씨를 소개받으면서 이번 사기극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검찰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 1월과 3월 이번사건에서 챙긴돈으로 남산의 서울타워 1층에 사무실을 얻어 광고대행업체인 「피손하빌라」와 명화건설을 잇달아 설립한 뒤 골프잡지사를 경영하던 한창섭씨(38·여)를 사장,수배중인 임씨를 부사장으로 거느리면서 거물급 행세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업체가 입주한 서울타워는 체신공제조합이 운영하는 5층 건물로 정보통신 방송시설이 모여있는 1급보안시설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 회사에 성무건설회장 정건중씨의 형인 정명우씨와 부인 원유순씨가 여러번 드나들었던 것으로 출입자대장에 기재돼 김씨가 이번 사건에서도 핵심자들간의 연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수사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1천8백만원짜리 전세집에 살면서 전세금 5백만원을 겨우 올려줄 정도였던 김씨는 지난 4월 『월4억원의 수입을 올린다』는 소문속에 최고급 자동차인 그랜저를 굴리며 졸부행세를 해왔다.그러나 부인조차 무슨일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베일속에 행동을 해왔다. 김씨는 김영호씨가 홍콩으로 달아난 직후인 지난달 20일 명화건설의 자료를 모두 폐기하고종적을 감췄다.
  • 김영호씨 출국때 10억 빼돌렸다/검찰 밝혀내

    ◎수표5억·양도성예금증서 5억2천만원/홍콩 고종사촌동생에 맡겨/출처 추궁에 김씨,“이사건과 무관” 주장 검찰은 9일 정보사부지관련 사기사건으로 구속된 전 합참군사연구실 자료과장 김영호씨(52)가 지난달 11일 홍콩으로 도피하면서 모두 10억2천만원을 지니고 나갔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김씨는 『도피자금으로 2천만원을 썼을뿐』이라는 당초의 주장과는 달리 액면가 1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 5장,1억원짜리수표 5장 등 모두 10억2천만원을 갖고 출국,이 가운데 2천만원을 미화로 바꿔 사용했으며 중국으로 가기직전 4촌동생 김모씨에게 수표와 양도성예금증서 10억원을 맡긴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드러났다. 김씨는 검거될 때 미화 1만3천달러와 홍콩달러 1천3백20달러만을 지니고 있었다. 검찰은 김씨가 빼돌린 돈의 출처에 대해 이번사건과는 별도의 자금으로 자신의 통장에 예금시켜두었던 돈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건중씨(47)일당이 김씨에게 주었던 81억여원 말고도 따로 10억원을 더 준것이 아닌가 보고 정확한 출처를 조사하는 한편 김씨에게 외국환관리법 위반혐의를 추가적용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에따라 필요한 경우 홍콩경찰을 통해 김씨가 4촌동생에게 10억여원을 맡긴 경위와 자금의 흐름등에 대한 현지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검찰은 특히 김씨가 10억여원을 갖고 해외로 도피한 사실은 단순한 도피의 성격보다는 제3국을 통한 해외이주 또는 월북혐의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월북기도사실에 대한 조사도 함께 벌이기로 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이날 은행감독원으로부터 이 사건 관련자금의 추적결과를 조사한 보고서를 넘겨받아 이날 구속된 성무건설사장 정영진씨(31)등을 상대로 자금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캐고 있다. 검찰은 성무건설 회장 정건중씨등과 김씨등을 연결시켜준 토지브로커 김인수씨와 곽수렬씨등을 조속히 검거하는 것이 이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고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는 첩경이라고 보고 특별추적반을 편성해 연고지등에 급파했다.
  • 세정지원 어떻게 하나/명백한 탈세혐의 없으면 조사면제

    ◎소득세액은 신고서류만 보고 결정/자금사정 어려운 기업엔 납기연장 중소기업에 대한 세정지원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가가치세조사◁ 부가세경정조사와 세금계산서 추적조사 등을 기업경영이 정상화 될때까지 일체 실시하지 않고 생산적 기업의 거래처에 대해서도 지원대상 업체와의 거래 사항도 조사대상에서 제외한다.과세자료가 생겼더라도 자료상등 조세범법자와의 고의적인 탈세거래 외에는 해당 과세자료만 처리하고 사업전반에 걸친 세무조사는 실시하지 않는다. ▷법인세조사◁ 명백한 세금탈루혐의 법인과 부당감면 법인을 제외한 생산적 기업에 대해서는 1년간 조사를 면제한다.현재 조사대상으로 선정된 조사미결 법인도 경영에 심한 애로를 겪고 있으면 지방국세청장의 승인만으로 조사를 면제한다. ▷소득세실지조사◁ 실지조사 대상중 생산적 기업경영자 4천1백27명은 조사를 면제하고 신고된 서류만 검토한 후 세액을 결정한다. ▷자금출처조사◁ 생산적 중소기업의 창업자금은 자생력이 회복되도록 출처조사를 일정기간 유예하고 특히 중소기업 창업을 위해 설립된 중소기업 창업투자회사(54개)와 중소기업 창업투자조합(31개)에 출자된 자금도 조사를 유예한다. 이번 조치가 물론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기술 등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제개편·법령개정 등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세제차원의 지원책이 마련되기에 앞서 우선 현행제도아래서 할수 있는 행정상의 지원을 한다는데 뜻이 있다. 비록 임시적인 조치이긴 하지만 세무조사면제와 각종 세금의 징수유예 등은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덜어주고 생산활동에만 전념토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에 대한 세정지원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가가치세조사 부가세경정조사와 세금계산서 추적조사 등을 기업경영이 정상화 될때까지 일체 실시하지 않고 생산적 기업의 거래처에 대해서도 지원대상 업체와의 거래 사항도 조사대상에서 제외한다.과세자료가 생겼더라도 자료상등 조세범법자와의 고의적인 탈세거래 외에는 해당 과세자료만 처리하고 사업전반에 걸친 세무조사는 실시하지 않는다. 법인세조사 명백한 세금탈루혐의 법인과 부당감면 법인을 제외한 생산적 기업에 대해서는 1년간 조사를 면제한다.현재 조사대상으로 선정된 조사미결 법인도 경영에 심한 애로를 겪고 있으면 지방국세청장의 승인만으로 조사를 면제한다. 소득세실지조사 실지조사 대상중 생산적 기업경영자 4천1백27명은 조사를 면제하고 신고된 서류만 검토한 후 세액을 결정한다. 자금출처조사 생산적 중소기업의 창업자금은 자생력이 회복되도록 출처조사를 일정기간 유예하고 특히 중소기업 창업을 위해 설립된 중소기업 창업투자회사(54개)와 중소기업 창업투자조합(31개)에 출자된 자금도 조사를 유예한다. ▷지원대상◁ 자금사정이 어려운 기업에 대해서는 납기연장등 세정지원을 강화한다.대상업체는 ▲판매격감·재고누적·외상매출 급증 등으로 경영여건이 어려운 기업▲관련기업의 부도 또는 휴·폐업으로 사업에 심한 손실을 입은 기업▲해당기업 또는 거래기업의 노동쟁의로 조업에 지장을 받고 있는 기업▲기타 자금난으로 부도·도산의 우려가 있는 기업등이다. 지원방법▲납기연장=신고·납부기한이 남아있는 세금에 대해 2∼6개월간 연장해준다.▲징수유예=고지후 납기가 진행중인 세금은 6∼9개월간 유예한다.▲체납처분및 공매유보=성실납세자로서 공매 등을 유예하면 사업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인정되는 기업은 1년이내에서 유보한다.▲납세담보제공 의무의 완화=은행·보증보험회사의 납세보증서등 납세담보 제공에 대해 보증인의 납세 보증서로만 담보를 허용한다.유예신청기간이 2개월 미만이고 세액이 5백만원 미만이면 납세 담보제공을 면제해준다. 신청방법납기연장등 세정지원을 받으려는 사업자는 납기연장및 유예사유 등을 관할 세무서장에게 제출해야 한다.세정지원은 올해 5월 소득세 확정신고서부터 적용된다.부가가치세 환급신청서도 생산적중소기업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수용하고 신고종료후 20일 이내에 환급한다.생산적 중소기업이 세들어 있는 건물(공장)에 대해서도 임대료를 과다하게 올린 임대업자는 세무규제를 강화하고 세무공무원의 업체방문을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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