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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신:중/1885년 서울∼인천 전신 개통(서울 6백년만상:22)

    ◎고종이 전화로 백범사면령 내려/한통화 요금 주사봉급의 2.5%/해방 무렵엔 1만여명이 가입 『대군주폐하께서 김창수(김구)사형은 정지하랍신 친칙을 내리셨소』­국모를 살해한 일본군인을 죽인혐의로 인천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백범에게 형리는 고종황제의 특사소식을 전했다.그때가 병신년(1886년)윤팔월 스무엿새,백범의 사형집행일로 결정된 날 저녁무렵이었다. 사형수 백범에 대한 고종의 사면령인 「친칙」은 바로 장거리전화로 이루어 졌다.서울∼인천간 장거리 전화가 가설된지 사흘뒤의 일이었다. 백범은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되었던들 은명이 오기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일지에 적고 있다.이 전화가 서울∼인천간 첫 통화였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전화의 도입으로 가장먼저 혜택을 본 사람이 곧 김구선생인 것이다. 1876년 벨이 발명한 전기통신의 총아 전화기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882년으로 영선사일행으로 청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상운에 의해서다.최초의 전기통신기술자로 알려진상운이 국내에 돌아와 시험통화를 하자 이를 지켜본 고종과 중신들이 그 경이로움에 감탄했다고 전해지고있다. 그리고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중심으로 궁내부전화가 개통 되고 서울과 인천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놓이게 됨으로써 전화시대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당시 서울의 전화가입자수는 50명으로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전화기를 영어 텔리폰의 음을 한역한 「다리풍」또는「덕진풍」「전어통」「어화통」등으로 불렀으며 수구세력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위의 물을 말린다』는 노랫말을 퍼뜨려 민심을 어지럽히기도했다. 당시 전화선은 요즘의 광케이블 또는 동선과 거리가 먼 철선으로 이뤄져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전화감이 나빴으며 최초의 전화기는 송수화기가 분리돼 있고 송화기에는 신호음을 내는 손잡이와 딸딸이가 붙어있었다. 전화 한통화(5분)의 요금은 50전.당시의 주사봉급이 20원이었으니 전화 한통화요금은 봉급의 2.5%나 되어 서민들이 전화를 이용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전화윤리도 엄격해 전화를 통해서는 상대방에게 욕설을 하거나 도의에 어긋난 언쟁을 못하게했다.이에따라 전화국 공중전화기 옆에는 전화국관리가 입회,전화 내용을 엿들어 외국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전화보다 한발앞서 도입된 전기통신은 1885년 8월 서울과 인천,같은해 10월 서울과 의주를 잇는 서로전선이 개통됨으로써 청나라까지 통신이 가능하게 됐다.그러나 당시에는 한문 영문 불문전보만 취급하고 국문전보를 취급하지 않은데다 요금까지 비싸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일반인들은 전보로 접하는 소식은 불경스럽고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으며 전보는 전기바람으로 전달돼 가뭄을 몰고 온다고 생각했다. 해방무렵에는 전화가 상당히 보급돼 서울의 전화가입자는 1만여명으로 크게 늘었으나 일본인소유가 전체의 77%를 차지했다.일본인들은 전쟁에서 패한뒤 전화를 팔아먹고가는 기민함을 보였다.결국은 적산처리됨으로써 전화를 산사람들은 많은 손해를 보기도했다. 6·25사변은 미진하기 짝이없던 통신시설의 80%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수복후 서울에 남아있는 전화는 겨우 4천여대.휴전후 유엔군이 사용하던 전화를 인수해 겨우 2만여대로 증가했다. 보잘것없던 전화시설은 62년 국산자동전화기가 개발돼 서울중앙전화국에 가설됨으로써 본격적인 전화의 대중화시대를 열었다.이 때부터 자금조성을 위해 전화채권이 도입되고 전화사용료도 그동안의 정액제에서 통화량에 따라 계산하는 현재의 도수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정액제는 많이쓰나 적게쓰나 전화요금이 같아 쓸데없는 전화사용이 많아 통화적체의 주요 원인이 됐기때문이다.
  • 조선왕조실록(외언내언)

    우리나라 최대의 국역사업이 마무리되어 오늘 세종문화회관에서 완역기념학술회의가 열린다.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백72년동안의 편년체서술인 「조선왕조실록」1천7백6책이 국역되어 4백13책으로 완간되었다.색인집 34권까지 합치면 총 4백47권의 방대한 규모.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26년 걸려 완성한 대국역사업이다.국역·교열·윤문에 동원된 연인원은 2천5백명. 왕조실록은 왕이 승하하고 새 왕이 즉위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편찬작업을 수행한다.매일매일 사관들이 기록해둔 사초를 자료로 선왕대의 역사가 기술되지만 그 법도의 엄격성과 비밀성은 철저하게 보장된다.임금이라 할지라도 선왕의 실록을 결코 볼수 없게 금지되어 있었다. 궁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정사를 비롯한 온갖 보고서를 기록하는 사관의 권위는 절대적이다.숙종때 중국사신을 맞아 대화중 약간의 실수를 저지른 왕이 사관에게 사초에서 이를 삭제해줄것을 명하였다.그러나 이 사관은 끝내 왕명을 거부하다 결국 파직이 되고만다.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에 이르는 내용을 알고 피비린내나는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도 사초와 관련되어 있다. 사초를 본 사람이 내막을 모르는 연산군에게 밀고함으로써 참혹한 보복이 빚어진 것이다.재위중 쫓겨난 왕에 대해서는 「실록」대신 「일기」라고 썼다.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은 「일기」라 불린다.이번 국역에서 고종과 순종실록이 제외된 것은 일제하에 관주도로 왜곡편찬되어 사료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북한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91년 「리조실록」을 완역 출간하였다.국내에서 두 출판사간의 무단복제와 정식판권 계약시비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가장 자세한 왕대별 편년체사서이며 우리사학과 한국학연구의 귀중한 보고이기도 하다. 역사기술에 그토록 엄정하고 객관적이었던 선인들의 역사의식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 일제 관여 이유로 「왕조실록」서 누락/고·순종대 「승정원일기」번역

    ◎민족문화추진회,올해 15집까지 간행/완간된 「실록」 미진한 부분 보완/근대사 연구에 필수… 2002년까지 완역 「조선왕조실록」국역사업을 사실상 마무리 할 고종·순종대의 「승정원일기」가 번역된다. 민족문화추진회(회장 이원순)는 「조선왕조실록」이 완간됨에 따라 「승정원일기」국역에 들어가 올해안에 15집까지 간행키로 했다.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원년)3월부터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의 출납과 제반 행정사무,의례적 사항등을 매일 꼼꼼히 담은 기록이다.모두 3천2백45권에 이르는 이 방대한 분량의 「승정원일기」가운데 고종과 순종 부분 2백20권만을 추려 먼저 번역키로 한 것은 국역된 「조선왕조실록」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지난 1968년 조선왕조 태조 원년(1392년)에서 부터 철종 말년(1863년)까지 4백71년동안의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하는 작업에 들어가 26년만인 지난해 말 완간했다.그러나 모두 4백13책에 이르는 번역본에는 고종과 순종 부분이 빠져있다.조선왕조를 말살한 일제의 식민지 관료가 주도해 위작임이 분명한 「고종태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은 사료로 가치를 인정할수 없기 때문이다. 실록은 국왕이 죽고 새 국왕이 즉위하면 즉시 실록청을 설치해 죽은 국왕 재위기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기본적인 관찬사서이다.실록편찬의 가장 중요한 근거자료는 사관의 사초였다.사관은 그들이 듣고 본 그대로를 적어야 했다.또 사관의 사초에 대해서는 시비를 가릴수 없었고 수정을 가하지도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실록은 한마디로 공정성과 정확성이 생명이었다.그러나 이른바 고·순종실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순종실록은 1926년 순종이 죽자 다음해 4월 조선왕조의 궁내부를 축소·격하시킨 이왕직 산하에 준비실이 설치된뒤 1930년 4월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1934년6월에 끝났다.편찬의 총책임자인 편찬위원장은 물론 33명의 편찬위원가운데 11명이 일본인이었다.여기에 조선총독부 경시를 편찬보조위원으로 모든부서에 참여시켜 한국인들을 감시케 했다고 한다.이처럼 역사서술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처음부터 기대할수 없는 형편이니 「조선왕조실록」국역작업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만큼 개항 이후 다소 소략해지기는 했으나 광범위한 국가적 공사와 의례를 담은 「승정원일기」는 왕조실록 못지않은 귀중한 기본사료로 한국 근대사의 혼란기인 고·순종 시대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는 고종·순종 시대의 「승정원일기」를 일단 오는 2002년까지 완역한다는 목표를 세웠다.올해 국역해 간행할 「승정원일기」는 고종 원년1월부터 3년3월까지를 담게 된다.
  • 교통수단:중(서울 6백년 만상:19)

    ◎차 1903년 왕실용 첫 도입/택시 1912년 운행 시작… 급속 확산/6·25직후 「시발」 등장… 국산차시대 개막 『오줌 찔끔 진고개,방구 뿡뿡 자동차』­1920년대 초기 서울의 개구쟁이들이 부르며 놀던 동요의 한 구절이다. 당시 자동차는 종로나 육조(중앙청)거리등 큰길만 달렸다.그 속도가 어찌 느린지 골목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이 자동차 뒤에서 뿜는 「가솔린」냄새를 맡고자 달음박질해 따라갈 정도였다.한시간에 한대 구경하면 그날은 「운수좋은 날」이었다. 운전사들은 양복을 입고 모자는 「헌팅 캡」을 꼭 뒤로 돌려썼다.운전사는 선망받는 엘리트 직업이요,신식직업이었다.특히 왕족의 차를 몰 경우엔 가문의 영광으로 삼기까지 했다.관용차운전사는 금테가 요란한 고등관제복을 입고 으스댔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3년으로 어림된다.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도입시기와 배경등이 명확치 않지만 왕실전용으로 이용하기위해 영국과 프랑스에서 1대씩 들여온 것이 효시라는 설이 유력하다.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망국의 한과 울분에 잠긴 의친왕,순종비의 부친 윤택영등에게도 차례로 승용차를 제공했다.고종과 순종이 전용차 타기를 거부했다는 기록에서 엿볼수 있듯 우리의 자동차문화는 제국주의자들의 유화정책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귀족과 작위를 받은 일부 고관들의 전용물이던 자동차는 1914년부터 돈많은 갑부들도 탔다.광산부자 박기효·최창학과 친일재벌 한상용,대지주 배석환·김종성등이 그들이다. 일본인 곤도(근등삼천삼)와 한국인 이봉래가 1912년 포드차 2대를 도입,1시간에 5원씩 받고 영업을 개시한 것이 택시업의 시작이다.당시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2∼3명밖에 없어 운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운전사 양성소」를 개설했고 미국과 자동차수입특약도 맺었다. 1926년부터 택시업이 수지를 맞추면서 서울 곳곳에 수십개의 택시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했다.한강 인도교가 준공된 이듬해인 1918년의 서울의 자동차의 수는 2백12대였다.1926년에 1천5백87대,1931년에는 4천3백31대로 크게 늘어났다.지난 2월말 기준 자동차 등록대수는 1백77만5천1백41대.6명당 1대꼴로 생활화됐다. 그 당시 요금은 시내에서는 어디를 가든 80전이었다.한참뒤에 1원으로 올랐다.택시는 전화로 불러서 탔다.시내 요리집에서 나온 건달들이 음벽정 또는 천향원별장등 「2차」로 가면서 주로 이용했다.기생들은 택시운전사를 좋아해 은근히 「데이트」를 즐기는 일이 잦았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우리의 손에 의해 그 유명한 시발자동차가 서울에 첫 등장했다.국산차의 효시이기도 한 시발자동차는 첫 출고때 8만여환 하던 것이 60년대에는 대당 3백만환을 웃돌 정도로 값이 치솟았다. 62년5월 개조차가 아닌 산뜻한 모양의 세단형 자동차가 일본에서 수입된데 이어 그해 8월에는 부평에 자동차공장이 준공되면서 조립생산차인 「새나라」가 장안을 누볐다.그 다음해인 63년11월 신진자동차는 소형세단 「신성호」3백대를 만드는 한편 일본 도요타와 손을 잡고 코로나를 생산했다.이어 크라운·코티나·포드20M·피아트등이 속속 선보여 마침내 마이카시대의 막을 올렸다. 대중교통수단인 버스가 서울에 굴러다닌 것은 전차의 등장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경성부가 1928년 처음으로 「부영버스」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부영버스의 운행노선은 관청이 있는 곳이거나 일본인 거주지역에 집중됐다.전차노선과 겹치는 경우가 많아 전차와 버스간의 손님 유치경쟁은 치열했다.이무렵 여차장이라는 신종직업이 생겨났다.그녀들은 맵시있는 유니폼으로 요즘 TV탤런트에 못지않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65년부터는 대형급행및 좌석버스 운행이 개시됐으며 2년 뒤인 67년엔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시영버스 50대가 첫선을 보이기도 했다. 「승객이냐,짐짝이냐」「입석된 좌석,완행된 급행」등 당시 유행어처럼 버스는 당초 제도상의 취지와는 달리 파행적으로 운행돼 급행버스 제도는 폐지되고 말았다.
  • 설/자녀에 촌수·칭호를 가르칩시다

    ◎「나」를 기준·부모는 1촌·형제는 2촌간/형제 아들은 조카·자매의 자녀는 생질 온가족이 함께 모이게 되는 설날.친척이지만 떨어져 살다보니 난생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또 결혼을 통해 새롭게 가족이 된 사람과 첫 대면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핵가족제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이 가족이 모인 명절날 당황하게 되는 것이 자녀들에게 촌수와 가족칭호를 설명해야될때.성균관 전례연구위원회 간사로 있는 한명희씨로부터 가족의 촌수및 칭호를 알아본다.(호칭은 그사람을 직접 소리내어 부르는 말이고 칭호는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가리켜 이를때 쓰는 말이다). 몇촌 몇촌하고 따지는 것은 방계,즉 형제항렬과 숙질 항렬에서 따지는 것이다.즉 친족 외종 내종 이종간에 그 멀고 가까운 정도를 알 수 있는 것.부자지간은 1촌,할아버지와 손자사이는 2촌,형제지간도 2촌이다.그러나 직계에서는 촌수를 따지지 않는 것이 원칙.4·5촌은 종,6·7촌은 재종,8·9촌은 삼종이라 한다.또「자기」를 기준으로 친가,외가,처가로 나누는데 처가는 아내의 촌수로 따지고 칭호도 그 앞에다「처」자만 붙이면 된다. 「자기」를 기준으로 아버지는 1촌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형제(각 2촌)와는 1더하기 2가돼 3촌지간이 된다.형제의 자녀는 조카라 칭하고 3촌간이 되며 자매의 자녀는 생질이라 칭한다.역시 3촌지간이다. 내종사촌은 고모의 아들이나 딸등 고종 사촌을 일컫는말.아버지의 고종사촌은 내종숙이라 하고 그 자녀는 「진내재종형제(6촌)」가 된다.또 당은 사촌형제나 5촌숙질관계를 일컫는 말로 종형제(4촌)」의 자녀를 「당질(5촌)」이라 하고 종자매의 자녀는 종생질(5촌)이라 부른다. 「외숙부모(3촌)」와 이모의 자녀는 4촌간으로 외종형제자매,이종형제자매가 된다.또 그들의 자녀는 각각 외종질,이종질로 칭하고 5촌지간이다.
  • 다리:상/구릉·계곡따라 80여개 산재(서울 6백년 만상:10)

    ◎영제­옥천­금천교 궁중위험 갖춘 “조형예술”/세종때 건립 수표교는 치수의 지혜 엿보여 다리는 떨어진 두곳을 잇는 매개체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단순히 지나는 곳만이 아닌 「만남」의 중심이요 무대인 것이다. 그해 신수가 좋아진다고 믿으며 정월 대보름달 아래서 청춘남녀들이 즐긴 다리밟기와 불가에서 절을 지을 때 속세와 불국토,즉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믿고 다리를 함께 놓은 것에서 다리의 이같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다리는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강이나 개천 또는 언덕과 산을 쉽고 편하게 건너거나 넘기 위해 놓여진 것이다.오늘날 토목학자들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 가운데에 가장 길고 큰 것이 다리이기에 다리를 「토목구조물의 꽃」이라 일컫는다.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서울은 한복판에 청계천이 흐르는등 구릉과 계곡이 많아 다리 역시 많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서울에 얼마나 많은 수의 다리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선조 고종때를 전후해 작성된「한경식략동국여지승람」 「수전지도」 「서울지도」등에 따르면 서울에 산재해 있던 다리는 성안 76개,성밖 10개등 대략 86개로 알려지고 있다.경복궁의 영제교를 비롯,창경궁의 옥천교,창덕궁 금천교등 궁궐안 다리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다리들은 정전에 이르는 외당앞에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위에 건설된 것이어서 단순한 다리기능외에 다양한 조형미를 연출한 예술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제교는 다리바닥의 가운데가 높은 어도이고 좌우는 낮은 삼도로 이뤄져 신분에 맞게 다니도록 했다.폭이 10.2m로 어가의 행렬이 지나는데 꼭 맞고 난간과 멍엣돌에는 재앙을 막고 왕조를 지키기 위해 귀면이나 석수를 조각했다. 영제교는 새 왕조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경복궁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원래 근정전앞 총독부청사 뒤쪽에 있었으나 일제가 총독부건물을 지으면서 헐렸다 지난 74년 복원됐다. 궁중다리 가운데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옥천교 역시 삼도로 되어 있으며 중앙의 벽면에 삼각형 모양의 귀면을 조각해 벽사시설을 했다.창덕궁 금천교는 1411년에 공조판서 박자청이 감독한 현존하는 궁안의 돌다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난간 밖으로 내민 멍엣돌에 용두상이 조각돼 있다. 그러나 시정의 일반시민들의 귀에 가장 익은 다리이름은 아마도 수표교일 것이다. 수표동 43번지와 관수동 152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이 다리는 1420년 세종때 건설될 당시의 이름은 마전교였다.그러다 세종 23년에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리 돌기둥에 「경진지평」넉자를 새겨 수표석을 세워 수량을 측정하면서 수표교로 불리게 됐다.청계천복개에 따라 철거된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안에,수표는 홍릉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졌다 현재는 여주 영릉에 보존돼 있다.이 다리는 교각이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네모와 육모기둥의 석재를 2단으로 세워 우리 조상들의 이수·치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서울의 다리로 살곶이다리를 빼놓을 수 없다.한자말로는 전곳교인 이 다리는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남쪽에 위치한 돌다리로 살곶이앞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폭 5.95m,길이 75.75m로 조선시대에 세운 교량으로는 가장 긴 살곶이다리는 세종 21년(1439년)에 가교공사를 시작했으나 진척이 지지부진하다 착공 60여년만인 성종 14년(1483년)에야 승려들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완성했다.기록에는 『스님이 살곶이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과 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라 어명하였다』고 전한다.대원군때 경복궁을 지으면서 모자라는 석재를 보충하기 위해 살곶이다리의 석재 절반을 갖다 쓴데다 1920년 장마에 떠내려가 폐교상태였다 지난 77년 서울시가 복원했다. 이름없는 수많은 다리와 달리 한강에 다리가 생겨나고 서울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한강교량의 건설이 서울의 발전과 맥을 같이하게 되면서 다리는 통행로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다.
  • 임병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완의 의병조직 독립의군부 이끌어/12년 고종밀서 받고 대규모 전쟁준비/착수 2년만에 일경에 발각… 수포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돈헌 임병찬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되믿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장세력인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추진하다 일제에 붙잡혀 유배중 숨진 애국선열이다. 선생은 44세때인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선비로서 지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제 불량배들에게 시해되는 치욕스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66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의병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선생은 1851년 2월 전북 옥구군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세살때에 천자문을 읽을 만큼 총명을 타고난 선생은 15세때 전주부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관직에 나섰으며 38세때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다. 다음해 낙안군수에 임명됐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기로 하고 곧 관직을 청산,귀향해 회문산 북쪽 종성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일제를 물리칠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집안의 남녀종복을 풀어주는등 가산을 정리한 선생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기 1년전인 1904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으나 정부 대신들이 『시기가 이르다』고 만류하자 거사를 일단 중단하기도 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고는 즉시 의기투합,서로 사제의 의를 맺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포천에 살고 있던 면암은 같은해 정월무렵 영호남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 것을 도모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문인들이 『호남의 한 선비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자 선생을 믿아왔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따라 그해 6월4일 의병 80여명을 모아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높게 들고 일어났다. 이 의병들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날로 태인지방을 휩쓸어 군기와 군량을 확보한데 이어 정읍·순창을 차례로 격파,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다. 거사 5일만인 6월8일에는 순창에서 마주친왜군을 단숨에 물리쳐 곡성을 점령하는등 기염을 토했으며 의병수도 9백여명으로 처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면암과 선생은 6월12일 전주와 남원 진위대군사가 반격작전에 돌입하자 동포간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조직한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전주진위대는 해산과정의 의병들을 공격,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했으며 선생과 면암등 13명이 전주진위대를 거쳐 일본군사령부에 잡혀가 7월9일 대마도 위수영에 감금됐다. 그뒤 면암이 옥중단식으로 순국하자 선생은 1907년 첫 유배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불매동맹·국채보상운동등을 전개하다가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됐다.선생이 순무대장으로 지명된 것은 1906년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례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려보냈으나 황제는 다시 밀소를 내려보내 그를 신임했다. 선생은 1914년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주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립의군부의 이같은 계획은 그해 5월 일경에게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일경이 6월3일 총사령인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키자 선생은 자결을 결심하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12일 금고 1년을 선고받은뒤 거문도에 다시 유배됐다.선생은 2년뒤인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 남산/민족의 기상 충정의 표상(서울 6백년 만가:1)

    서울이 나라의 으뜸도읍으로 정해진지 6백년.태조 이성계가 당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서울은 무수한 변화속에서도 수도의 위치를 의연히 지켜왔고 이제 세계속의 큰 도시로 새로 태어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6백년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시리즈로 소개,수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해 본다. ◎옛이름 목멱산… 태조읍후 개명/고종때 공원지정… 일반인 휴식처로/“제모습 되찾기” 올해부터 본격착수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를 틀고 우리민족의 영욕을 묵묵히 지켜보아온 남산. 세월에 따라 그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남산만큼 우리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도 없을 것이다.왕권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충직하고 현명한 백성들에게 믿음직한 충정의 표상이었으며 민족수난기에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할 국가 이상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이 품어안고있는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르름은 우리기상의 본보기 이기도 했다. 서울사람치고 남산을 보지않고 하루를 지나는 사람은 없으며 서울을 찾는 사람중에 남산을먼저 보지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해발 2백65m의 남산은 야트막하고 봉우리도 둥그스름한데다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해 온국민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왔다. 정상에서 동서로 2.7㎞,남북으로 2.1㎞ 뻗어 오늘의 행정구역으로는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성동구 왕십리쪽으로 꼬리를 내리고 있다.면적은 1백2만9천3백여㎡. 조선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갓 작고 평범한 구릉에 지나지 않았던 남산이 처음 역사의 무대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부터다.이때까지만 해도 인경산으로 불리다 서울 남쪽 끄트머리에 있다하여 남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산의 본래명은 목멱산으로 목멱이란 옛말「마뫼」의 한자음 표기이다.「마뫼」는 남쪽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1910년 고종황제는 남산을 백성들의 공원으로 정해 일반에 공개,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친필로 한양공원이란 석비를 써 하사했다. 이 석비는 지금도 구통일원 자리에 남아있다. 그러나 남산은 한강 이남의 개발과함께 서울이 남쪽으로 넓어지면서 남쪽 끄트머리에서 어느틈엔가 한복판으로 옮겨 앉았다. 일찍이 한양의 남쪽 방패로 시인묵객의 풍류와 일반인의 휴식처로 사랑받아오던 남산은 근세에 들면서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인이 지금의 예장터일대에 거류하면서 부터다.일제는 현 안기부자리에 통감부를,수방사 자리에는 헌병사령부를 설치했는가 하면 1926년에는 정상에 모셔졌던 우리민족의 표상이던 국사당을 폐쇄하고 수천그루의 벚꽃을 심는등 민족정신의 혼을 말살하는 상징물로 남산을 이용했다. 안타깝게도 남산훼손은 광복후 우리손에 의해서도 계속됐다.지난 57년부터 3공때인 75년까지 36차례의 공원용지해제로 중앙방송국·남산방송소·외국인 임대주택단지·타워호텔등 갖가지 대형 건축물들이 산허리를 깍아내고 들어앉았다. 다행히 시는 올해 정도 6백년을 맞아 남산복원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키로해 웅장하지는 않으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옛모습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외인아파트는 내년에 헐리며 산의 경관을 헤쳐온 정상의 서울타워와 숭의학원등도 늦어도 2000천년까지는 모두 철거된다.철거작업이 이미 끝난 수방사자리엔 남산골이 조성돼 옛정기를 확인할 수 있는 한옥등이 들어서게 된다. 외세의 침탈속에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상처받았던 남산이 제모습을 되찾으면 서울의 고풍스런 운치는 한결 돋보일 것이다.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대장경 전산화(외언내언)

    지난달 합천 해인사에서 조계종 성철종정이 입적했을때 불자들간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었다.『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8만대장경 경판이 6백년만의 첫 서울 나들이를 했기때문』이라고.물론 우연의 일치겠지만 성철스님이 열반하기 바로 전날 8만1천2백58장에 달하는 대장경 경판중 3장이 서울에서 열릴 「책문화 특별전」에 전시되기 위해 해인사를 떠났던 것이다. 8만대장경의 탄생부터가 불력의 염원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려 현종때의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장경이 모두 몽고의 병화에 불타버린뒤 세번째로 고종24년(1237년)에 착수해 15년만에 완성된 것이 오늘의 8만대장경.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국가적 원력이 담겨져 있었다. 제작당시 여러나라의 불경을 집대성,그 규모의 방대함에 있어 세계최대·유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8만대장경판은 우리나라 목판인쇄의 최고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한자 한자에 쏟은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5천2백여만자중에 단 한 글자의 오자가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종교적으로는 신앙의대상이고 문화적으로는 귀중한 인쇄문화재인 8만대장경이 20세기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에 수록된다고 한다.해인사 대장경연구소에서 착수한 전산화작업은 키 보드입력과 영상입력의 두가지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시기에 따라 영상입력된 경판과 실제 경판을 비교함으로써 원판의 훼손여부를 찾아낼수 있다. 가장 큰 이점은 컴퓨터를 통한 경전의 확대·보급이다.대장경의 전산화는 「경전의 공개」를 의미한다.한역대장경입력은 이미 중국·대만·일본·미국에서도 시작했다고 한다.20세기 첨단과학과 불교의 만남은 아직은 생소하게 여겨진다.그러나 새로운 「전자시대의 대장경」편찬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97년까지는 대장경판 전산화 입력이 완료될 것이라고 한다. 경판 보존관리에도 크게 도움이 될것 같다.
  • 유아용 보약·영양제 개발… 유치원 공급(북한 이모저모)

    ◎“일손부족” 농촌·탄광지역 이주 권장 ○고종실록 중요성 강종 ○…북한은 최근 한국내 출판저작권 분쟁으로 화제를 모은바 있는 「리조실록」과 관련,이 실록의 끝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고종실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눈길. 평양에서 발행되는 대중잡지 천리마는 최근호에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기고한 글을 통해 『리조실록에서 고종실록을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근 반세기가 공백으로 남게되며 고종실록 없는 리조실록은 완성본으로서의 가치를 지닐수 없다』고 주장. 이 잡지는 리조실록이 완역된 상황에서 각 실록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활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그러나 고종실록은 「실록」으로 편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왕조의 기록으로 취급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요인은 객관성을 중시해 다음 왕대에 가서야 실록을 편찬하는 관례가 있었으나 고종은 1907년 퇴임후에도 상당기간 생존했고 순종시기도 3년에 불과했으며 1910년 일제식민 통치의 시작으로 실록편찬의 여건이 마련되지못했던데 있었던 것으로 이 잡지는 분석. ○청심환·영심환 등 많아 ○…북한은 최근 「청심환」·「영심환」·「어린이 영양고」등 유아용 보약과 영양제 생산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북한방송이 최근 보도. 개성시 판문제약공장에서 새로 만든 「어린이 영양고」는 송화가루를 주원료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발육촉진·세포기능증진은 물론 피로회복과 기력증진에 효과가 있는 영양제인데 최근 실험과정을 끝내고 대량생산에 들어가 각지의 탁아소와 유치원에 공급되고 있다고 북한방송은 소개. 이와함께 개성시 고려의약생산관리국에서도 유아용 「청심환」과 「영신환」을 비롯한 각종 보약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북한방송은 덧붙였다. ○“공산주의적 미풍” 선전 ○…북한에서도 수도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 인구집중과 농업·광업 부문의 일손부족이 사회문제로 부상해 평양시민들의 중소도시나 농촌,탄광 지역으로의 이주를 「공산주의적 미풍」이라면서 이를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관련,중앙방송은 최근 평양 2·8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산주의미풍 선구자대회」개막행사에서 당비서 계응태가 보고를 통해 『오늘날 세계인민들이 모두 수도의 시민이 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 있다』고 다른 나라의 실정을 지적하면서 『평양의 경우 시내의 노동계급과 중앙기관및 시급기관 종사자들이 혁명적 수도 평양을 떠나 수령과 지도자의 영광과 고장과 일터로 나서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
  • 서울신문 전신 대한매일신보 “옛사옥 신문박물관 활용을”

    ◎서울행촌동 2층 건물 “보존” 한목소리 서울 종로구 사직터널에서 인왕산쪽으로 1백여m쯤 오르다 보면 붉은 벽돌로 된 자그마한 2층건물이 눈길을 끈다.한일합방 전까지 일제의 조선침략에 붓을 들고 항거하던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건물이다.행정주소는 종로구 행촌동 1의18. 하얀색 화강암 기단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근대식 건물로 지하1층 지상2층 연건평 1백88평규모다. 최근들어 이 건물을 국가가 되찾아 사적지로 지정,우리나라 언론사에 길이 남을 대한매일신보를 기리고 우리 언론의 발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신문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의견들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즉 지난 1883년 관보로 발행된 한성순보 이래 1세기 이상 지속된 우리 언론의 발자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 한곳도 없으며,더욱이 일제 강제수탈과정에서 유일하게 일제만행을 검열없이 보도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적 업적을 기릴 수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란 점에서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잘 알려졌듯이 지난 1904년 창간돼 1910년까지 지령 1천6백60여호를 내고 강제폐간될 때까지 유일하게 일제만행을 지적하던 국내 유일의 「국난의 증인」이다.다른 신문들이 일제탄압과 검열로 악랄한 일제수탈을 그대로 보도할 수 없던 시기에도 신보는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이 소유자로 내세워져 있었기에 이를 적나라하게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고종의 은밀한 후원으로 세워져 양기탁씨가 주필로 있으면서 이준열사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 사건을 세계인에 알리고 국론을 모았던 이 신문은 박은식·신채호선생등이 공들여 만든 걸작품이었던 것이다. 이 건물은 그러한 역사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신문사 건물이란 점에서도 신문박물관을 반드시 이곳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다행스럽게도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신문박물관 설립취지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추진에는 그리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이곳 주민 김모씨(45)도 『무심코 이곳에와 살고 있으나 이곳이 우리 역사측면에서 무척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우리가 이전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원우현교수(고려대 신문방송학)도 『신문이 역사를 기록하는 공공기구임에도 우리언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장소가 한 곳도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면서 『이런 맥락에서 신문박물관 설립취지는 아주바람직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고 말했다. 더욱이 내년은 서울 정도 6백주년이 되는 해이며 시가 덕수궁에서 시작해 구러시아 대사관터·옛 서대문이 있었던 자리인 지금의 서울시 교육청자리·인왕산 서울성벽등을 잇는 역사탐방 코스를 개발하고 있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곳은 역사교육장소로 아주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바로 이웃에는 행주대첩의 장본인 권률장군의 생가와 조선조 청백리인 백사 이항복의 집터도 남아 있어 청소년은 물론 시민들의 산 역사교육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시도 이같은 주장을 수용,문화재전문위원들에게 사적지 지정안을 이미 상정해둔 상태이며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할 경우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절충작업을 펴나갈 계획이다.국유재산인 이 건물에는 20여가구 50여명이 주민세만 내며 살고있다.
  • “쌀 빗장 풀지말라”/불교계 가세/3개종단,설법운동 펴기로

    ◎주말 사회·농민단체 시위 잇따라 쌀시장개방 반대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4일 서울과 지방에서는 시위가 잇따랐다. 조계종과 태고종·진각종등 3개 불교종단산하 20개 불교단체는 4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쌀수입개방 저지 범불교도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 불교도들과 함께 쌀수입개방 반대운동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비상대책위는 이날부터 15일까지를 「범불교도 우리쌀지키기 기간」으로 선포하고 이 기간중 전국 사찰법회의 기도와 설법에 쌀수입개방 반대내용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노력키로 했다. 또 쌀수입개방반대 리본달기와 청와대및 미대사관에 항의전보및 카드보내기등 범불교도 실천지침을 마련하고 「우리쌀지키기 범국민대회」가 열리는 7일 하오2시를 기해 전국사찰의 일제타종과 불교도 소유차량의 경적울리기를 실시키로 했다. 3일 결성된 「쌀수입 개방저지 범국민 비상대책위」는 이날 서울 종로5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쌀시장 개방문제에 대해 정부가 여론을 모아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촉구했다. 김성훈비상대책위원장(중앙대 산업경제과교수)은 회견에서 『일본및 유럽 각국과 미국측 사이에 협상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임을 감안하면 정부가 쌀시장개방을 협상하는데 있어 많은 변화가능성이 남아있다』면서 『김영삼대통령은 정부일각과 일부 언론의 쌀시장개방 대세론및 불가피론에 단호히 대처해야한다』고 말했다. 농협중앙회 소속조합원 6백여명은 이날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본사 뒤뜰에서 「쌀수입개방 결사반대 결의대회」를 갖고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쌀시장개방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 30여명은 이날 서울 종로구 세종로 미대사관앞에서 미국의 쌀시장 개방압력에 항의하는 기습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한편 농민회총연맹 전북도연맹과 농어민후계자 전북도연합회 소속 농민 4백여명은 4일 상오 농기계를 앞세우고 각 시·군청과 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볏단을 쌓아놓고 시위를 벌였으며 농기계 2백여대(농민회 주장)를 반납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는 이날 충남대에서 쌀시장 개방 저지운동에 동참하는 성명서를 내고 전국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민주당 울산중구지구당(위원장 송철호)과 재야단체 회원 및 학생 1백여명은 이날 하오 울산시 중구 성남동 주리원백화점앞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쌀개방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우리쌀지키기 대책회의 경기지역본부」는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쌀개방 움직임과 관련,내각 및 민자당지도부 총사퇴 등을 요구하고 앞으로 경기도내 선거에서 민자당 국회의원의 불신임 및 낙선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강원도 평창군 농민 15명은 상오11시30분쯤 차량 11대에 「쌀개방 결사반대」등의 구호가 적힌 전단을 붙이고 용평면∼도암면 20㎞ 구간을 영동고속도로와 국도 6호선을 따라 돌며 5시간 남짓 시위를 벌였다. 경북대생 30여명은 이날 상오 대구시청앞 주차장으로 몰려가 5일 하오5시까지 시한부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경북 안동농민회 회원 20여명도 이날 안동시 삼산동 농민회사무실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상오11시20분쯤 충북 중원군 주덕면 사락리 음동마을에서는 이종상씨(40)가 쌀개방에 대한 항의로 논에서 베어낸 볏단을 태우다 논두렁 20여m까지 불이 번지기도 했다.
  • 농촌출신 총리의 쌀 고민/이목희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행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황인성국무총리가 2일 낮 기자들과 만나 쌀문제와 관련한 최근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하루도 농촌과 농민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농수산부장관직에 있을 때는 농민을 위하는 심정에 사표를 가슴에 품고 청와대에 들어가 직언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토로였다. 불가피하게 쌀시장이 개방되고 농촌이 피해를 입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표정이었다. 「쌀사수 정부대표단」이 제네바로 떠난 날,때마침 잔뜩 찌푸린 날씨보다 더 무거운 정부 수뇌부의 심정을 황총리는 대변하는 듯 했다. 구한말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던 고종황제의 심정에 비유할수 있을까. 황총리는 『UR협상이 강대국의 논리로만 타결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말했다. 제네바에 파견된 대표단이 가져간 쌀관련 훈령도 「개방불가사수」 말고는 다른 수정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황총리는 『1백60개 GATT회원국이 모두 각기 사정이 있었지만 쌀문제가 걸려있는 것은 이제 대한민국 뿐』이라면서 『그토록 완강했던 일본도 결국 꺾였다』고 했다.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정말 쌀시장을 사수하고픈게 정부의 생각이다.믿어달라』고 거듭 강조하면서도 결과는 다른 쪽으로 가고 있다는 현실이 그를 괴롭게하는 것 같았다. 황총리의 이러한 태도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여지는 있다. 가장 개연성 있는 현상을 미리 털어놓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편이 옳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총리는 정부로 하여금 더욱 솔직해지는 것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특정 정당이나 단체가 쌀문제를 정치등 다른 목적에 이용해서는 안된다.농민들에게 국제상황과 우리가 처한 위치를 정확히 설명해야지 그들을 자극·선동해서야 국가 전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황총리의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지금은 구한말처럼 국권이 찬탈된 절대절명의 시기는 아니다.자신의 이해를 조금씩만 초월한다면 여야나 농민·도시민을떠나 어려운 고비를 돌파하는 지혜가 모아질수 있다.쌀개방이라는 「총대」를 특정인이나 정파에 지우고 돌을 던지려 기다리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 일 대북적대 계속땐 수교회담 거부 방침/북 외교부 밝혀

    북한 외교부대변인은 16일 일본이 핵문제해결을 일·북국교정상회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등의 대북적대시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수교협상을 위한 회담에 임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관영 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북한 외교부대변인은 을사5조약 체결88주(11·17)를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최근 고종황제의 친서발견 등으로 을사조약이 불법무효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이 이를 시인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호소카와 일본총리가 이달초 한국방문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죄한 발언이 미흡하다는 점 등을 들어 『이는 현일본정부가 지금까지의 조·일회담에서 과거조약들이 당시로서는 합법적으로 체결됐으며 유효하게 실시됐다고 하던 선행자들의 부당한 주장을 허물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팔만대장경 6백년만에 서울 나들이/8일부터 「책문화특별전」 참가

    ◎불교계 무사 「외출」 이운법회 합천 해인사에 보관중인 국보 제32호 고려대장경(일병 팔만대장경)의 일부가 6백여년만에 보금자리를 벗어나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책의 해 조직위원회」는 오는 8일부터 12월17일까지 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 책문화 특별전」에 대장경 판 8판1천2백58개 가운데 대표적인 3개를 특별전시키로 했다. 전시되는 판은 ▲「대반야바라밀다경」권1 첫장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권1 첫장 ▲「화엄경주본변상)목판 권1 첫장등이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38년(125)제작이 끝나 19 30년부터 해인사 장경각에 안치돼 왔다. 「책문화 특별전」을 위해 불교의 3대 보물(삼보)중 하나인 법보를 선뜻 내준 해인사측은 조계종 서의현총무원장등 많은 스님들이 무사한 나들이를 기리는 이운법회를 갖는다.법회는 부처님에게 나들이를 고하는 「고불식」을 올린 뒤 스님들이 대장경을 꽃가마에 태워 법 당 앞을 한바퀴 도는 순서로 진행된다. 한편 「책문화 특별전」에는 대장경판을 비롯,원본 훈민정음,석보상절 권23(국보 제523호),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국보 제203호)등이 함께 전시된다.
  • 을사늑약(외언내언)

    「늑약」이라는 낯선말을 대한다.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뜻을 갖는 말이다.「늑」자에는「굴레」「새기다」라는 뜻외에도「억지로 한다」는 뜻이 있다.그래서「폭력이나 위력으로 빼앗는것」을「늑탈」이라 하고「강제로 휴직시키는것」을 이르면서「늑휴」라고도 한다.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사이에 체결된 을사조약이 강제된 것이었다면서 고종황제의 친서는「늑약」이라는 말을 쓰고있다. 그해 11월17일 일본군은 덕수궁주변을 에워싸는 한편 일본공사관과 시내요소요소를 철통같이 경계하면서 성문에는 야포·기관총까지 갖춘 부대를 배치했다.그런 공포분위기 속에서 열린 어전회의는 일단 일본측이 제안한 조약안을 거부한다는데 합의했다.그러나 일본군은 귀가하는 대신들을 붙들고 다시 회의를 열게한다.이토(이등박문)는 강압적방법으로 조약에 대한 찬성을 강요했다.그런다음 고종황제의 윤허도 없이 멋대로 옥새를 강탈하여 조인을 한다.18일 오전2시의 일이었다. 이건 조약이라기보다 힘을 앞세운 항복문서 같은 성격이었다.지금까지 사학계등에서 무효를 주장하여 오는 까닭도 거기 있었다.그사실을 극명하게 입증하여 주는 자료가 이번에 미국컬럼비아대 도서관에서 발견된 고종황제의 친서이다.이친서는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뒤 미·영·러시아등 9개나라 원수들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것으로 알려졌다.내용은 구구절절이 피맺힌 호소로 일관되어 있다.위협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회의이므로 무효라고 친서는 주장한다.『…장차 어떤나라가 짐이 이조약을 응낙운운하였다 주장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원컨대 폐하께서는 믿지도 듣지도 말고…』 이게 무효화할 때 1905년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행한 일련의 그릇된 외교조처들은 재론되어 바로잡혀야한다.분노는 새삼스럽게 치민다.그 분노는 현해탄을 오가는 오늘의 일부 일그러진「한일친선」으로도 쏠린다.일본의 모습을 바로볼줄 알아야 한다.
  • “을사조약은 무효” 고종친서 발견

    ◎“내각에 체결 위임 안해… 강압에 의해 맺어”/“국제재판소 제소” 미 등 9국에 협조 요청/서울대 김기석교수,컬럼비아대 도서관서 찾아 【뉴욕 연합】 지난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 국제법상으로 무효임을 선언한 고종황제의 친서가 90여년만에 발굴됐다. 고종은 미·영·불·독등 9개 열강국 원수들을 대상으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천명하기 위해 조약체결 다음해인 1906년 6월22일 친서를 작성,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친서전달 특사로 임명했으나 고종의 강제퇴위로 각국 원수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고종의 친서는 헐버트 특사가 소장하고 있다가 재미통일운동가 김용중씨에게 이관했으며 그의 사망후 뉴욕 컬럼비아대학 희귀본 도서관에 보관되어 오던중 하버드대학에 파견된 서울대 김기석 교수에 의해 지난 6월 우연히 발견됐다. 상반부는 한문으로,하반부는 영문으로 작성된 친서에서 고종은 비준권자인 국왕으로서 조정대신들에게 조약체결을 위임한바 없을뿐 아니라 당시 일본이 대신들을 감금한채 강제로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는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며 아무런 법적 효력을 가질수 없다고 밝혔다. 고종은 또 이 친서에서 조약의 무효를 밝히기 위해 국제재판소에 일본을 제소하겠으니 미국대통령과 러시아황제등은 재판과정에서 대한제국을 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고종은 친서임을 입증하기 위해 국내문서와는 달리 외교문서에만 쓰는 이희라는 본명을 사용하고 옥새를 압인했다. 이번에 발굴된 친서는 당시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황제 자신이 직접 을사조약이 국제법적 무효임을 선언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문서보다 가장 확실하게 을사조약이 불법,무효임을 밝혀주는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친서를 발견한 김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이면 그후에 성립된 정미조약(1907),합방조약(1010)등은 모두 무효이며 을사조약으로 강탈당한 대한제국의 정치·경제·외교적 권리가 복원돼야한다』고 말하고 『정부는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일본측의 인정과 사과및 배상과 같은 구체적 조치를 요청해야하며 예컨대 일본과 청국간에 체결된 간도협정으로빼앗긴 국토를 회복할 조치도 뒤따라야한다』고 주장했다.
  • 개화구국·사회개발운동의 선구역활/서울 YMCA 28일로 창립90돌

    ◎합창제 등 다양한 기념행사 개최 기독교 청년·시민운동단체인 서울기독청년회(YMCA)가 28일로 창립90주년을 맞는다. 서울Y는 90주년을 맞아 28일 상오11시 서울 종로 서울Y 대강당에서 기념식을 열며 이에 앞서 27일 하오7시 연세대 1백주년 콘서트홀에서 기념합창제를 갖는 등 다양한 행사를 펼친다. 20세기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 1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축적해온 서울Y의 지나온 족적은 바로 우리나라 청년운동과 시민운동의 발자취를 말해준다.서울Y는 창립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격변의 세월을 거치면서 개화구국운동단체에서 시작해 구호봉사활동단체,시민사회운동단체,환경보호운동단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맡아왔다. 19 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전신으로 출발한 서울Y는 당시 일제의 침탈이라는 시대적 상황아래서 개화구국운동의 선봉에 서서 을사조약및 고종황제 양위 반대운동을 펼쳤다.이때 서울Y는 이상재 윤치호 안국선 김규식 이승만 등 민족지도자들의 주요 활동터전이었다.이후 서울Y는 19 18년 2·8독립선언의 배경이 되는 웅변대회를 주최하기도 하고 20∼30년대에는 일제의 착취로 피폐화된 농어촌을 일으키기 위해 농어촌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50년대에는 전시구호활동을 중점적으로 전개했으며 60∼70년대에는 급격한 산업화과정 속에서 문화운동과 사회개발운동의 선구자가 됐다.80년대에는 사회적 관심사에 적극 대응하는 시민운동단체로 활약했으며 90년대에는 그 흐름을 유지하며 환경보호운동에 역점을 두어오고 있다. 현재 서울Y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한강물 되살리기 시민운동」과 「부정부패추방 시민운동」.문민정부를 맞아 권위주의시대와는 다른 여건에 처한 서울Y는 수많은 민간단체가 난립한 가운데 서울Y로서만의 독특한 위상정립과 함께 민간운동의 새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 왜 우리에겐 「간디」가 없었나/김재설(해시계)

    요즈음 일본에는 한국인의 나쁜 점만 들추고 심지어 그들의 식민정책까지 한국에 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책이 잘 팔리는 모양이다.한국인이 그 저자가 아니라 사실은 일본사람이 썼다는 설도 있다.한국인을 제대로 교육시킨 것이 일본이고 그래서 지금 그래도 밥술이나 뜨고 사니 일본 덕 아니냐는 논지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근대교육이 시작된 것은 그들이 지배한 시절이 아니라 대한제국 때임을 분명히 해야 하겠다.지금 유서 깊은 중·고등학교는 거의 고종황제때 개교된 학교들이다.그때 우리의 정부 지도자들과 달리 재야의 지도자들은 젊은이가 깨어야 우리도 생존할 수 있음을 알고 교육운동에 헌신했다.또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이 보편화 된 시절도 그들의 통치 기간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난 뒤의 일이다.그들이 나라를 빼앗아 우리의 교육기관을 장악하고 그 소수에게나마 무슨 교육을 했나,철저한 우민교육이었다.사사건건 우리의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백안시하고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주입하는 것도 교육인가.진정한 교육은 그 반대여야 한다.극소수 조선인(그때는 이렇게 불렀으니 그대로 쓰자)에게만 주어졌던 그 기회나마 충직한 식민지 신민을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가장 절통한 것은 그 기간 우리에게 과학기술과의 접촉이 차단 되었었다는 사실이다.조선인은 의사나 변호사는 될 수 있었지만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될 기회는 거의 봉쇄 됐었다.예를 들어 1943년 첫 졸업생을 낸 소위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 응용화학과 졸업생 명단을 보자.해방될 때까지 배출된 총 23명의 졸업생 중 조선인은 단 7명.그때 인구비례로 이 땅의 유일한 종합대학이라는 이 학교만은 조선인이 압도적이어야 옳다.하기야 이 경성제국대학도 일본인이 세우고 싶어 세운 학교가 아니다.이 민족의 지도자들이 일으켰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꺾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우리 스스로 대학을 세워 거기서 정말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인재를 길렀다면 수많은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배출되고 이 땅에 공업을 일으켜 식민지에서나마 민족자본을 형성 했을 것이다.2차대전에 그들은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어냈지만 모두 육군으로 몰아갔을 뿐 해군에는 입대시키지 않았다.육군에서는 총알받이로 쓸수 있지만 해군에서는 기술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기술로부터 조선인을 철저히 차단하던 그들에게 우리는 식민지를 영위하기에 너무나 옹졸한 지배자를 본다. 우리에게는 왜 최린·이광수·최남선은 있었지만 간디가 없었는가.그들의 정부가 비교적 민주적일 때 우리에게도 도쿄 한 복판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일본인 기자들과 독립만세를 부른 지사가 있었다.그러나 군국주의자들의 집권은 우리 지사들의 국내활동을 전혀 불가능하게 했다.단순한 학술단체인 한글학회의 박멸에서 보듯,그들은 힘으로 지배하는 패도는 알았으되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는 몰랐다.간디의 위대함은 역설적으로 영국의 양도다.또 우리에게 간디가 없었음은 바로 일본의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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