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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혈류 자가조절 규명…성인병치료 큰 공/분쉬의학상 수상 홍기환교수

    『제가 20년간 매달려온 뇌혈류 자가조절 기전에 관한 연구가 비로소 학계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대한의학회가 제정한 제4회 분쉬의학상수상자로 최근 선정된 부산대의대 홍기환교수(56·순환기계 약리학)는 『국내 의학계에 점차 기초의학을 중시하는 풍토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며 이번 수상이 실험실의 후배 의학도들에게 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64년 부산대의대를 졸업한 그는 23년째 이 대학 약리학교실에 몸담아오면서 현재 의대학장직도 맡고 있다. 홍교수는 70년대 초반 혈관근의 운동성의 기전 연구에 관심을 가진 뒤 지금까지 줄곧 뇌혈류 자가조절의 메커니즘 규명에 심혈을 쏟아왔다. 정상인의 경우에는 혈압이 내려가면 뇌혈관이 늘어나 혈류량이 늘어나게 되고 반대로 혈압이 올라가면 혈관 수축으로 혈류량이 줄어드는 뇌혈류 자가조절기전을 갖는다.그러나 지주막하출혈이나 뇌허혈,고혈압등을 앓게 되면 이러한 자가조절 기능이 깨져 버린다.관상동맥질환자 등의 뇌혈류 자가조절기전이 깨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정립된 이론은 없는 상태. 홍교수는 이처럼 뇌혈류 자동조절기전이 파괴되는 이유가 뇌신경 말단에서 「CGRP」라는 신경펩타이드물질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홍교수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현재 국제 심혈관계 약리학분야에서 혈관 운동성 조절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주요 학설로 인정받아 최근 5년동안 미국 생화학회지등 국외 전문잡지에 13차례나 게재됐다. 『앞으로 CGRP를 보다 더 자세히 규명해 뇌졸중,동맥경화등의 성인병 예방에 한 몫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그는 『제자들에게는 늘 집념과 도전의 정신을 강조한다』고 소개했다. 분쉬의학상은 고종황제의 시의를 지냈던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학술상으로 시상식은 30일 서울중앙병원 대회의실에서 있을 예정이다.
  • 화산 이씨(외언내언)

    지금은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성을 갖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질 못했다.삼국시대에는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성을 가졌으며 그것은 신분의 상징으로 통했다. 신라말∼고려초에 걸쳐 지방의 호족과 공신들이 사성,또는 창성에 의해 새로운 성씨의 시조로 등장한다.성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후기부터.노비와 천민계급을 제외하고 모두 성을 갖게 된다.천민계층까지 성을 갖게 된 것은 신분제도가 붕괴되는 임진왜란이후의 일이다. 왕조시대에는 공이 있는 사람에게 임금이 성을 하사하는 제도가 있었다.외국의 귀화인에게도 성이 주어졌다.고려 충렬왕때 원나라에서 제국공주를 수행하고 왔다가 귀화한 아라비아인 장순용은 성과 이름까지 하사받았다.그는 뒤에 장군의 지위에 올랐으며 오늘날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다. 임진왜란때 가등청정의 선봉장이었던 사야가는 「조선의 문물과 인정·풍속을 흠모한 끝에」귀화한 일본의 무장.김해김씨의 사성을 받아 김충선으로 개명한 그는 북방 여진족을 물리치고 병자호란때 큰 전공을 세워 종이품벼슬에까지 오른다.그의 후손들은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많이 살고있어 「우록김씨」라 불린다. 고려 고종13년(1226) 지금의 베트남 땅에 있던 안남왕국의 한 왕자가 왕조의 멸망으로 망명길에 올라 표류하다가 황해도 옹진땅에 와 닿는다.이 사건은 역사상 한·월관계의 첫장이 된다.리롱투옹(이용상)이란 이 왕자는 고려에 귀화했으며 몽고 침입때는 몽고군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운다.이 일로 화산군에 봉해졌고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다. 그 왕자의 32대 후손들이 뿌리를 찾아 베트남 북부 하 바크주에 살고있는 친족들을 방문,족보도 전달한다.7백여년만에 이뤄지는 안남 왕족후예들의 만남이다.
  • 서울시장:상(서울6백년만상:65)

    ◎초대 성석린이후 1천4백18명 거쳐가/판한성부사·한성부윤 등으로 명칭 10번바꿔/평균재임 5개월… 광해군때 오억령 “최장14번”/정도초기 정2품… 특별시 승격후 장관급으로 서울은 국방분야만 빼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가 집중된 「작은 정부」다. 때문에 서울시장 자리는 도읍지라는 비중에 걸맞게 기라성같은 인걸들이 거쳐갔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과 함께 도읍을 삼은 한성의 부사직은 정2품이었다.정부 수립후 특별시가 되면서는 장관급이 됐지만 예나 지금이나 직급을 초월할만큼 요직이며 영향력이 대단했다.그래서 통치자들은 항상 자신이 신임하고 촉망받는 인사들을 중용해 왔다. 내년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로 시민이 직접 뽑은 시장이 등장하면 그 위상은 한층 높아질 것임이 분명하다. 이같은 비중때문에 역대 서울시장 자리는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이나 통치자의 성향에 따라 수많은 부침과 영욕을 겪어야 했다. 서울시장의 직함은 판한성부사·한성부윤·한성판윤·한성부윤·관찰사·한성판윤·한성윤·경성부윤·서울시장·서울특별시장 등 6백년동안 10번이나 바뀌었다. 서울의 첫 시장은 정도 이듬해인 1395년 6월13일 판한성부사에 임명된 성석린이다.그후 6백년간 연임·중임을 포함,현 이원종시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1천4백19명이 명멸했다. 조선시대의 서울시장중에는 태종때의 황희를 비롯,맹사성·서거정·유자광·이언적·최명길·이완·박문수·채제공·박영효·김홍집·민영환·지석영 등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걸출한 인물들이 많다. 그러나 통치자의 미움을 사거나 모함을 받아 하루를 못넘기고 관직을 박탈당하는 수도 허다했다.특히 시대의 격변기나 민족의 수난이 있을 때는 한달새 5명이 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울시장중 최단명은 구윤옥(영조)·이돈영(헌종)·김좌근(철종)·임응준(고종)·김익용(고종)등 5명이다.아침에 임명돼 자리에 채 앉기도 전인 해질무렵에 해임된 「반나절 시장들」인 것이다. 2일에 그친 경우도 오재순(정조)등 10명이고 3일 시장도 성덕조(정조)등 11명이나 된다. 시장을 가장 많이 갈아치운 왕은 고종이다.재위 43년동안자그마치 3백87명을 임명,1년에 9명꼴로 시장을 경질했다. 조선시대에 가장 자리를 오래 지킨 시장은 오억령으로 광해군 2년(1610년)3월부터 인조 원년(1623년)7월까지 13년4개월간 재임했다. 또 효종때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대장은 효종에서 현종때에 이르기까지 18년간 7번이나 한성판윤 자리에 올라 역대 시장중 가장 많은 중임기록을 갖고 있다. 일제 36년간은 18명의 일본인이 경성부윤으로 재임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광복후 첫 서울시장은 1946년 미군정에 의해 임명된 김형민씨로 역대 시장중 최연소인 39세였다.서울특별시장으로는 49년 8월15일 관제개편과 함께 이기붕씨가 처음으로 취임했다.초창기 이기붕·윤보선·허정씨 등 거물급 정치인을 거쳐 4·19 직후에는 헌정사상 유일한 민선시장인 김상돈씨가 등장했고 5·16쿠데타와 함께 현역 육군소장 윤태일씨가 「군복 집무」를 하기도 했다. 정도 이후 서울시장을 거쳐간 1천4백18명의 평균 재임기간은 5개월이었다.
  • 정덕일씨,제주 보육원이사장 취임(조약돌)

    ◎거물정객 등 화환 즐비… 배경 과시 ○…슬롯머신업계의 대부 정덕진씨의 동생 덕일씨가 지난 16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대정국민학교 교정에서 이기택민주당대표등 거물급 정객들의 축하화환이 즐비한 가운데 인근의 천사보육원이사장에 취임. 취임식에는 강보성 전농림수산부장관과 양승부 민주당제주시지구당위원장,박서봉 태고종총무원장등이 참석했고 이어 열린 주민위안잔치에는 남궁원 영화인협회이사장,탤런트 김상순·선우용녀,개그맨 이상해·김학래·김한국,가수 조영남·서수남·하청일·김세레나·김국환등 유명연예인들이 대거참석해 정씨의 막강한 배경을 과시. 한편 정이사장은 2천여만원을 들여 지난 8월16∼19일 천사보육원원생 52명등을 서울로 초청,미8군 영내등을 관광시켰는데 정씨가 이 보육원 이사장직을 맡게 된 것은 전임이사장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 양화나루/나루터:중(서울 6백년만상:63)

    ◎한강 첫 관문… 삼남 물산 집산지/김포·강화 길목 군사요충지… 「제진」 주둔/천주교신자 8천명 처형당한 “순교성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양화진은 지금의 양화대교북단과 당산철교북단 사이의 절두산 아래에 있었다. 당시 도성을 빠져나온 사람들을 김포·강화로 이어주던 양화진은 나루터 바로 위쪽의 잠두봉과 강 건너편의 선유봉,또 이 봉우리를 돌아나가는 한강의 돛단배 모습이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그 경치가 빼어났다.『기내의 경치로는 한강에서 제일인데 누대가 높이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뜬 모양 같으며 물산이 번성하여 옷의 옷깃과 같이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동국여지승람」은 양화진을 묘사한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은 양화나루를 찾아 시문을 남겼다.문인 강희맹의 「양화답설」과 진경산수화의 거목 겸제 정선의 양화진그림이 그러하다. 양화나루는 서강나루·마포나루·노들나루등과 마찬가지로 뱃길을 이용,삼남에서 올라오는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다.특히 한강하류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이에따라 양화나루에는 나라에 바쳐지는 세곡이라든가 여러가지 물자를 보관하는 광흥창과 조선조 3등급에 해당하는 병영인 「제진」이 있었다. 양화나루가 한강의 하류에 있던 관계로 이 일대에서는 고래가 잡히기도 했다.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머리 뒤에 코가 있고 길이가 한길이나 되는 이름모를 하얀 생선이 잡혀 구경거리가 됐다」고 기록한다.여기에서 하얀 생선은 돌고래로 추정된다.실제로 1922년에는 6척가량 되는 고래가 한강에서 잡혀 이를 한강인도교변에 묻어주어 이곳을 고래무덤이라고 불렀다. 평화롭기만 하던 양화나루는 대원군이 집권하면서부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원군은 고종 3년(1866) 봄 양이로 물들여진 산하를 서학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면서 8천명이 넘는 천주교신자를 당시 잠두봉에서 처형했다.잠두봉이라는 이름은 봉우리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다는 것에서 유래됐다.잠두봉은 이후 천주교신자들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고 해서 절두산으로고쳐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절두산에 들어선 절두산기념관은 1966년 병인순교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순례성당과 성인 27위의 유해를 모신 지하묘가 있다.지난 84년5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방문 첫날 이곳을 찾았을 정도로 한국천주교의 순교성지로 서울의 명소가 됐다.또 연산군 때는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이 부관참시를 당했고 고종때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상해로 건너간 뒤 살해된 풍운아 김옥균의 시신이 도착한 곳도 양화진이다. 특히 중국은 김옥균의 시신을 송환할 때 조정에 김의 시신에 더 이상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했으나 조정은 이를 묵살하고 대역부도옥균이라는 커다란 깃발을 내걸고 김옥균을 이곳에다 효수했다. 임오군란 뒤 청과 일본 상인들이 이곳에 가게를 벌이고 장사를 해 외국인들이 붐비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이던 양화나루.지금 이곳은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지날 정도로 서울의 관문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 암행어사 판결문 발견/고종시대 박정양작성 추정

    ◎묘지소유권 분쟁 재판내용 암행어사가 지방을 비밀리에 돌며 지방관청의 행정업무를 감시한 것 이외에 재판업무까지 관장한 사실을 보여주는 조선조 고종황제 당시 암행어사의 판결문이 국내에서 처음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법원 법원사편찬실이 5일 공개한 이 판결문은 요즘의 묘지소유권 분쟁에 해당하는 산송(산송)을 해결해 주면서 작성한 것으로 김제선 변호사(69·고시8회)가 70년 안동지청장으로 있을때 한 표구점에서 입수,보관해오다법원에 기증한 것이다. 가로 60㎝,세로 90㎝ 한지에 쓰여진 이 판결문에는 오른편 위에 정자로 된 소지(소장 등 개인이 관에 제출하는 문서)가,왼쪽 아래단에는 초서체로 된 판결내용이 각각 적혀있다. 판결문에는 또 암행어사 직위표시로 관인 대신 마패가 3군데 찍혀있고 소장내용중에는 시백호내(∼있사오니)등 이두체가 일부 사용돼 눈길을 끌고 있다. 법원사편찬실 심상철판사는 『이 판결문의 작성연대가 갑술년 7월28일이고 이두체가 다소섞인 점,문서보존 상태 등으로 미뤄 고종조때인 1874년에 작성된것으로 보인다』면서 『당시 경남좌도 암행어사였던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4)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 무악재/고개:하(서울 6백년 만상:61)

    ◎길마재·모래재·추모현으로도 불려/서울 서쪽관문… 이활의 난땐 관·반군격전지/중구사신 맞던 영은문자리에 「독립문」 우뚝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을 잇는 무악재는 왼편에 안산,오른쪽에 인왕산을 끼고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고개다. 지금은 여러차례에 걸친 확장공사로 고갯길이 35m로 넓혀지고 높이도 훨씬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서울 서쪽 관문의 좁은 길목이었다.명나라 사신 동월은 『천길 이어진 그 기세가 어찌 천군만 누를 수 있으랴.서쪽을 바라보니 좁은 길이 있는데 말 한필 겨우 지나 갈 수 있다』고 당시의 고개를 묘사하고 있다. 서울 시민들에게는 무악재 또는 홍제동고개로 더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길마재·추모현·모래재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길마재는 고개 왼편에 있는 안산의 한자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산의 형상이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또 모래재는 고개가 흙이 아닌 모래로 덮여 있어서이고 추모현은 영조가 명릉(숙종릉)의 역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 고개에서 능을 바라보며 추모했다고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무악이라는 명칭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위해 지금 경복궁·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과 인왕산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면서 안산을 무악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류설에는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을 한 부예암(북한산 인수봉)이 밖으로 뛰쳐 나온 형상이므로 이를 어미산 즉 모악』이라고 한데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재의 이름이 다양한 만큼이나 이 고개엔 조선왕조의 참담했던 수많은 역사들이 그대로 숨쉬고 있다. 인조 2년(1624)이괄의 난때는 관군과 반군이 맞선 격전지였다. 당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하는데 앞장섰던 이괄은 중신들의 견제로 말미암아 평안병사로 쫓겨가 분을 삭인다.조정에서는 역모의 조짐이 있다고 해서 이괄의 아들을 볼모로 불러들였으며 이괄이 이에 반발,인조 2년 정예병력 1만2천여명을 이끌고 서울에 난입한 변란이 바로 이괄의 난이다.백성들이 인왕산과 남산 성벽을 따라 빼곡히 들어서 구경을 하는 가운데무악재에 진을 친 금남 정충신등이 이괄이 이끄는 반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전승지이면서 내환의 역사현장이기도 했다. 이 고개는 또 초입에 버티고 있던 모화관과 영은문이 말해주듯 중국사신들이 거드름을 피우고 드나들고 조선처녀들이 진상이라는 이름으로 울고 넘던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이 묶던 모화관은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독립문 바로 앞에 서있는 영은문을 떠 받치고 있던 두개의 커다란 석주는 오늘날까지 역사의 잔영으로 남아있다. 고종 32년(1895)민족의 수치였던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건립되면서 무악재는 민족의 희망이 숨쉬는 고개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고개 밑으로 지하철 3호선이 통과하고 출퇴근길이면 서울의 보통고개들처럼 차량행렬이 홍수를 이루지만 재를 넘어 이어진 국도1호선은 통일로로 내달린다. 조상들이 중국의 5백년 속박에서 벗어나던날 이곳에 독립문을 세웠듯이 민족의 소망을 담은 통일문이 이 고갯마루를 시작으로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 정자:하(서울 6백년 만상:58)

    ◎창덕궁 후원엔 아직도 15개 정자 그대로/부용정·관람정 등 다양한 형태로 보존/부암동 석파정,대원군 별장으로 유명 정자의 보고인 창덕궁 후원에는 지금도 관람정·애련정·승재정·능허정·청심정등 무려 15개의 정자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자리잡고 있다.방형·육각형·다각형·부채 모양의 다양한 정자는 연못,그리고 누각등을 배경으로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전체면적이 약 9만여평에 이르는 창덕궁 후원은 북악에서 내려뻗은 완만한 언덕과 여기저기에 맑은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어 연못과 정자를 꾸미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태종때 창건됐다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창덕궁에 이처럼 많은 정자가 지어진 것은 후원의 대규모 조성공사가 벌어진 광해군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원 중심에 있는 연못인 부용지 남쪽에는 사방에 창살문까지 꾸며진 부용정이 마치 물위에 뜬 형상으로 있고 북쪽에는 연회장으로 유명한 주합루가 자리잡고 있다.또 한반도 모양의 연못 반도지 동쪽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부채꼴형 정자인 관람정이,남쪽에는 육모지붕의 존덕정이,연못 반대편 언덕위엔 마치 절간같은 승재정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임금들이 산책을 하는 도중 들러 정사로 복잡해진 심신을 식히거나 대소신료와 외부 손님을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기에 정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였다.또한 조정 중신들이 한가한 시간을 틈내 독서를 하거나 강론을 펴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등박문등 일본의 대신들을 접견하고 향응을 제공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세검정으로 가는 길목인 부암동동사무소에 인접한 종로구 부암동 316의1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이 있었다.석파정은 본래 철종때의 권신인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대원군이 이 별장을 빼앗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철종이 승하한 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등극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원군은 그동안 수모를 주었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골몰했으며 특히 그 권문의 한 사람인 김흥근을 미워했다.대원군은 주변 숲이 울창하고 계곡의 물이 맑아 그야말로 별천지인 석파정을 김흥근으로부터 빼앗기로 하고 꾀를 냈다. 일단 자신의 부인 병요양을 핑계로 임시로 석파정을 빌려쓰던 대원군은 어느날 『대궐에만 갇혀 계시니 좀 갑갑하시겠냐』며 고종을 석파정으로 초청했다.고종이 도착한뒤 저녁 무렵이 되자 대원군은 대전 내시를 통해 상감께서 오늘밤 이곳에서 유숙하기로 했다는 담화문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국왕이 한번 유숙한 곳은 민간인의 소유를 금하는 국법을 이용해 김흥근으로 하여금 석파정을 포기케 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사연을 지닌 석파정은 대원군 사후에도 계속 왕실에 세습돼 오다 일제때는 총독부 소유로 변했으며 6·25 직후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터를 잡기도 했다. 지금 석파정에서 세검정쪽으로 2백m 내려간 홍지동 125에는 옛날 석파정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온,「대원군별장」으로 불리는 사랑채 하나가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석파정은 서울시 지정문화재 26호로,대원군별장은 23호로 지정돼 개인들이 관리하고 있다.
  • 문:중(서울 6백년 만상:54)

    ◎동대문/보물1호… 겨울엔 최고9㎜ 기울어/태조때 창건… 침수지대로 공사 어려움/“나라 큰일때면 움직인다” 「동대문」 별명 보물1호인 동대문은 예부터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마다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바로 선다는 「동대문」얘기가 전해진다.난정이 극심했던 광해군 말년에는 북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었고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기운 방향이 북서쪽이 아닌 남동쪽이었다 한다.민비를 시해하려 했던 임오군란에서 평복차림으로 변장한 민비는 동대문을 통해 충북 장호원으로 피신,목숨을 보존했는데 이 피신한 방향은 공교롭게도 동대문이 기울어 가리킨 남동쪽이었다. 지난 83년부터 86년까지 동대문의 기울기를 관측한 당시 한양대 정밀기계학과 한응교교수의 조사결과에서도 동대문의 기울기는 입증된다.해마다 10월부터 남동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해 이듬해 2∼3월까지 최대 9㎜까지 기울어진다는 것이다.당시의 남동쪽 방향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릴 잠실종합운동장이 위치,호사가들은 동대문의 풍수를 합리화했다. ○1453년 증죽 이태조가천도이후 백성을 보호하기위해 쌓은 40리의 도성 가운데 정동에 있던 동대문의 원이름은 흥인지문이다.4대문과 4소문의 현판이 모두 3자로 지어진 것과 같이 동대문을 흥인문이라 하지않고 지자 하나를 더 써 넣은 것은 이곳 일대의 지대가 남·서·북쪽에 비해 낮아 가라앉은 땅기운을 돋우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동대문 일대는 침수지대여서 1396년 성을 쌓을때는 물론이고 1453년 증축할때도 도성안의 모든 물이 모여 청계천을 통해 빠지도록 한 수구와 가까이 있어 공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수비형 관문 특성 1869년 고종 6년에 다시 지어져 1957년에 완전 보수됐으며 돌로 된 월단(아치)등 기초부분은 1453년 단종때의 것으로 5백년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동대문은 다른 3대문과는 달리 문밖으로 옹성을 돌려 기묘하게 설계된 수비형 관문이다.임란때 중로를 따라 서울로 치밀어 오던 왜장 소서행장 휘하의 무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채 선조25년(1592년)5월2일 동대문을 통해 맨처음 입성했다.그러나 이때 앞장선 왜병이 선뜻 성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성밖에서 한참동안 머뭇거리었다고 전해지는 것도 아마 문앞이 옹성으로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동대문부근의 낮은 지형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라고 판단한 무인 출신의 태조가 부족한 자연조건을 보완하기위해 옹성을 쌓게한 것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수학여행 코스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대문은 인근에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시장이 위치해 시골에서 서울로 수학여행 온 중·고생들의 필수코스로 잡힐만큼 서울을 대표하는 유적물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동대문운동장은 지금 규모면에서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이 열렸던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 밀려 났지만 관중동원면에서는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조건때문에 여전히 주경기장을 능가하고 있다. 동대문 옆으로는 지금 종로5가에서 동대문을 거쳐 신설동에 이르는 1호선과 동대문운동장에서 동대문을 거쳐 혜화동을 잇는 4호선 전동차가 불과 8.8m와 14m의 간격을 두고 하루에도 수십차례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아직은 전동차로 인한피해가 눈으로 확인되지 않고있다.그러나 질주하는 전동차의 진동으로 보물1호가 혹시나 훼손되지나 않을까 모든 사람들은 걱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 자동차 7백만대 돌파/6.3명당 1대꼴 보유

    ◎하루 3천대 증가… 자가용 65.1% 우리나라의 자동차 보유대수가 7백만대를 돌파했다. 교통부는 24일 지난해 9월28일 자동차 숫자가 6백만대를 돌파한지 11개월만에 하루 3천대꼴로 1백만대가 증가,7백만1천대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인구및 가구당 자동차 보유 비율은 지난해의 7.3명당 1대와 1가구당 0.55대에서 6.3명당 1대와 1가구당 0.63대로 늘어났다. 용도별로는 자가용 차량이 전체의 93.5%인 6백54만7천대이며 이 가운데는 자가용 승용차가 65.1%(지난해 39%)인 4백56만대를 차지하고 있어 자가용 승용차가 크게 늘었다. 또 차종별로는 승용차 4백81만9천대(68.8%),버스 57만3천대(8.2%),화물차 1백58만대(22.6%),특수차량 2만9천대(0.4%)의 비율이다. 지역별로는 ▲서울 1백87만7천대 ▲경기 1백20만3천대 ▲경남 59만4천대 ▲부산 51만3천대 ▲경북 42만9천대 ▲대구 41만6천대 ▲인천 34만3천대 등이며 제주도는 9만대로 가장 적다. 교통부는 『1903년 고종황제가 일본에서 포드 승용차를 들여온 이래 85년5월7일 1백만대를 기록할 때까지는 82년이 걸렸으나 그 이후 불과 9년만에 7백만대를 넘어섰으며 6년뒤인 2천년도에는 1천3백만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동거 여인·딸 토막살해/40대 전승려 구속

    ◎사체 암장… 수억 재산 노린듯 서울 종암경찰서는 24일 재산을 노려 동거하던 여인과 그 딸을 잇따라 살해하고 사체를 토막내 야산에 암매장한 성낙주씨(43·무직·성북구 월곡1동 71)를 살인및 사체 유기혐의로 긴급구속했다. ▷1차범행◁ 한때 스님이었다가 승적을 박탈당하고서도 계속 승려행세를 해온 성씨는 지난 13일 하오8시쯤 자신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있는 서울 성북구 월곡1동 90 황금장여관 주인 전옥수씨(49)의 딸 이향정양(14·J여중 3년)이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집을 나가달라』고 말한데 앙심을 품고 다음날 상오 5시쯤 이 여관에서 5백m정도 떨어진 월곡1동 71의18 전씨집 작은방에서 잠자던 이양을 목졸라 살해했다. 성씨는 이양의 사체를 목욕탕으로 옮겨 주방용 칼로 수십차례 토막내 검정 비닐봉지에 넣고 다시 종이상자 2개에 나눠 넣은 뒤 자신의 이복동생인 성모씨(28)에게 『고사를 지내고 남은 돼지머리를 버리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오 1시쯤 동생 소유의 승합차를 이용해 경기도 가평군 북한강휴게소 인근 야산에암매장했다. ▷2차범행◁ 성씨는 이어 전씨마저 살해하기 위해 지난 19일 하오 서울 종로구 종로5가 모 의료기 상회에서 수술용 칼을 구입,21일 상오 3시쯤 여관내실에서 전씨가 『가진 것도 없고 사내구실도 하지 못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사느냐』며 폭언하자 상오 8시쯤 이 여관 107호실에서 잠자고 있던 전씨를 목졸라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목욕탕에서 사체를 토막냈다. 성씨는 전씨의 사체를 비닐봉지에 넣고 라면상자 3개에 다시 나눠 싼뒤 여관내실앞 계단밑에 숨겨뒀다 다음날인 22일 상오 9시쯤 평소 알고지내던 김모씨(50·무직·강동구 천호동)에게 전화로 『급히 차를 사용할 일이 있으니 차를 가지고 와달라』고 연락,이날 상오 11시쯤 김씨가 몰고온 렌트카를 이용해 강원도 원주군 문막면 동화2리 도로공사장 현장부근에 암매장했다. ▷경찰수사◁ 경찰은 이양이 뚜렷한 동기없이 갑자기 행방불명된데다 전씨도 좀처럼 여관을 비우지 않는데도 갑자기 여관을 비운 것을 수상히 여긴 전씨의 친구 전영자씨(50·여)의 신고로 22일 하오 8시쯤 여관에 있던 성씨를 연행한뒤 24일 상오 2시쯤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 경찰은 범인이 미성년인 전씨의 딸까지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 4∼5억원정도 되는 전씨의 재산을 가로채기위해 의도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24일 사체가 암매장된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원주군 2곳에 형사대를 보내 사체를 발굴했다. 경찰은 또 이번사건이 범인 성씨의 단독범행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도 김씨등 2명을 상대로 조사하고 있다. ▷범인주변◁ 범인 성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76년 7월 태고종에 입적,승려생활을 했으나 일정한 거처는 없었으며 한때 서울 도봉구 미아4동에서 철학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 남대문/문:상(서울600년만상:53)

    ◎“국보1호” 원형보존된 서울의 상징/정고1년뒤 창건… 세종때 대대적 개축공사/일재 1907년 양쪽 성벽 헐고 도로개설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서울시내 건물중 가장 오래된 서울의 대표적 상징물이다.도성 4대문 가운데 가장 큰 남대문은 그러나 1907년 도시계획에 밀려 양쪽 성벽이 헐리고 길을 내는 바람에 접근로가 끊긴채 남대문로 한복판에 고립돼 점점 그 상징성을 잃어가고 있다. 정도 1년뒤인 1395년 태조가 창건한 남대문의 문루는 3년만에 완성됐다.그후 세종 29년(1447)8월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시작,전라도 완주 지역의 인부 6천8백명과 목수,석수,대장,조각사등이 동원돼 이듬해 5월 마무리했으며 성종 10년(1479)과 고종때 증수됐다. 6·25동란으로 상동(상동)일부가 파괴되는 시련을 겪었으며 지난 56년과 62년 두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였다. 이에앞서 남대문은 1907년 10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조선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경인·경부·경의선 철도의 완공으로 서울역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는 교통량이 늘어나자 남대문과 주변의 성곽을 철거해 도로를 낼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특히 1907년 10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의 서울방문을 앞두고 『전차와 우마차의 통행으로 비좁은 남대문을 통해 황태자를 영접할수 없다』며 우선 남대문 서측 성곽을 헐고 도로를 새로 낼 계획을 강력 추진했다.당시 일본은 일본인 내무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성벽처리위원회를 발족까지 했으나 빗발치는 우리 조정대신들과 국민들의 반대로 주춤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듬해 10월 남대문에 이어진 성곽을 부수고 석축을 쌓은뒤 길을 내고 성곽의 돌은 인천항을 축조하는데 사용하는 횡포를 저질렀다.남대문 보호석축도 지면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우리의 전통석축양식과는 달리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나타내는 일본식으로 축성돼 『일본식 건축물이 국보1호를 둘러싸고 있다』는 비판이 지금도 일고 있다. 남대문은 일본군과 한국군이 합방이후 처음으로 격렬한 전투가 치러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1907년 8월 일본의 군대해산으로 나라의 운명이 완전히 기울어지자 울분을 참지못한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성환이 『국가가 망해도 왜놈 한놈을 죽이지 못했으니 내가 군대해산을 명할수 없다』며 권총으로 자결했다.이 소식을 들은 우리군인들이 무기·탄약을 탈취해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일본군들은 남대문 벽위에 기관총 2문을 설치해 우리를 공격했던 곳이다.또 석축에는 아직도 6·25전쟁의 탄흔이 남아있어 민족의 뼈아픈 한을 후세에 전해주고있다. 남대문의 「숭례문」현판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관악산이 화산이므로 도성안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다른 문들과는 달리 종서로 쓰여진 것으로 전해진다.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예」자는 불에 해당되고 「불」은 남쪽을 표시하는 것으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위해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 놓아 불을 일으키면 맞불을 놓은 격이 되어 불길을 잡을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현판 글씨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글씨로 보는이가 많으나 태종때의 명필이던 공조참판 암헌 신색이 썼다고도 하고 중종때 공조판서를 지낸 죽당 유진동이 썼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 80여년만에 건국훈장 추서 민효식의병장

    ◎황해도일대서 돌격대장으로 맹활약/“의병궐기” 고종 밀지 전해듣고 거병/6백만명 이끌고 일제 토벌군과 혈전 『뒤늦게 나마 4대 80여년만에 고조할아버지의 항일 의병활동을 발굴,명예를 살리게 돼 후손으로서 감개무량합니다』 15일 제49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는 민효식의병장(1854∼1910)을 대신해 훈장을 친수받는 민의병장의 4대손 민형원덕성여대교수(43·서울 도봉구 방학동 신동아아파트)는 『아버지의 평생소원을 풀어드려 효도를 하게 됐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민교수는 그러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 10여년동안 유학을 하느라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던중 92년 7월 아버지 경남씨가 중풍으로 자리에 누으면서 『효자,식자 할아버지의 독립운동활약상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는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국회도서관등을 돌아다니며 사료를 모은 끝에 이번에 국가보훈처에 민효식의병장의 서훈을 신청한 것. 민의병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우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의병항쟁사」는 『경의선 철도 서쪽의 장연·송화·은율 등지에서 민효식부대가 새로이 기반을 다지게 됐다』고 적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는 수십여곳에서 민의병장의 활동상을 밝히고 있다.또 국립도서관에 보존중인 일제의 조선폭도토벌지에도 『황해도 지역에 있는 괴수 민효식을 토벌하기 위해 토벌대를 보낸 결과 약간의 손상은 주었으나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했다』고 본국에 보고한 기록이 적혀 있다. 민의병장은 이런 기록에 근거,한말 일제의 강점에 대항해 일어난 제1차 을미의병 전쟁당시 크게 활약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말 마지막 진사인 민영태의 장남인 민의병장은 39세 때인 1895년까지는 고향인 황해도 벽성군 일대에서 명망높은 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명성황후시해·단발령·군대해산 등의 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구한말 군부대신 신기선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궐기토록 하라』는 고종의 밀지를 전하자 본격적으로 거병하게 됐다. 민의병장은 이 과정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초병의 역할을 맡았다. 민의병장은 이후 1908년 황해도 일대에서 많게는 수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토벌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 마침내 혈전 끝에 전사했다. 황해도 지편찬위원회가 펴낸 황해도지에 따르면 민의병장은 의병지휘 돌격대장으로 6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1910년 해주·옹진·송화로 일군을 도륙하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민교수의 아버지 경남씨는 병석에 누워 민의병장에 대한 서훈소식을 듣고는 눈시울을 적셨다. 민교수는 『고조할아버지는 순국후 시신마저 찾지 못해 평소 사용하던 물건을 선영에 모셨다고 들었다』면서 민의병장의 유일한 유품인 초상화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 우정 박물관/단장 마치고 재개관/UPU서울총회 계기 전시물 늘려

    ◎고종 친필칙명등 희귀사료 선보여 서울중앙우체국 내에 있는 우정박물관이 규모와 전시물을 대폭 늘려 재개관된다. 체신부는 13일 상오10시 우정박물관에서 중수개관 기념식을 갖고 체신에 관련한 각종 전시물을 일반에 공개한다.지난 85년 10월 처음 개관된 우정박물관은 그동안 전시장이나 전시물이 빈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는데 22일부터 열리는 제21차 만국우편연합(UPU)서울총회와 한국방문의해를 계기로 전시내용을 대폭 보강,이번에 재개관하게 된 것이다. 우정박물관 4층에는 근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체신역사와 한국우정의 발자취가 대형 컬러사진으로 재현되고 집배원복장·우체통 등 체신업무와 관련된 각종 사진자료·실물 등 사료가 각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전시된다.특히 전시사료 중에는 고종황제의 친필서명이 들어있는 진품 칙명이나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등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은 사료들도 있다. 5층에는 「우표로 보는 한국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를 비롯한 각종 우표와 엽서,각국의 특이한 우표 등 우표에 관한 모든것이 전시된다.또 우표의 제조공정을 사진과 실물 등으로 전시해 관람자가 제조공정을 한눈에 알수 있도록 했다.
  • 광복절 49돌/민족 자존심 살리기 행사 풍성

    ◎문체부,「국악의 해」·「동학농민운동 1백돌」 사업과 연계 추진/창극 「윤봉길·안중근의사가」 공연/국립국악원,수원에서 국악의 밤/서울 팝스 오케스트라,청소년 음악축제 정부는 10일 광복절 49주년을 맞아 우리민족의 자존과 긍지를 살리고 국민적 화합과 공동체문화 진작을 위한 다양한 경축문화 행사를 갖기로 했다. 올해는 광복 50주년을 1년 앞두고 있는 뜻깊은 해로서 구 조선총독부건물 해체 및 국립박물관신축을 추진하는 등 민족문화의 발전 토대 마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어느 해보다 의미있는 해이다. 문화체육부는 특히 올해 광복절 경축문화 행사를 「국악의 해」와 「동학농민운동1백주년」사업과 연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적 축제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마련,전국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행사는 오는 13일 하오 6시에 국립극장 야외무대에서 꾸며지는 국립창극단 단원 명창 김영자씨의 창극 「윤봉길 의사가」와 「안중근 의사가」공연과 한국전통 택견연구회장인 이용복씨의 전통무예택견 한마당. 이 자리에는 카자흐공화국 알마아타 국립조선극장 가무단소속 조균화씨의 우리가요 열창도 있다. 이보다 앞서 12일 수원연무대 특설무대에서는 국립국악원과 수원문화원이 주최하는 국악의 밤 행사가 펼쳐진다. 이날 공연에는 명창 김일구씨의 판소리 한대목과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강강술래 부채춤 등이 공연되며 사물놀이와 경기민요연창 등도 있을 예정이다. 15일부터 10월30일까지 독립기념관 전시실에서는 동학농민운동1백주년 특별기획전이 열린다.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된 이번 전시회에는 동학군의 사발통문 고종과 초토사 홍계원의 문답기록,조석헌이 쓴 북접일기와 최덕기가 쓴 동학일기 등이 전시된다. 또 오는 20일 하오 5시 덕수궁 특설무대에서는 서울 팝스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경축 청소년 음악축제가 열리며 이날 하오 7시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당에서는 한국페스티발 앙상블이 주관하는 「재즈와 국악의 만남」「재즈와 클래식의 만남」등의 야외 무대가 펼쳐진다.하성호씨가 지휘하는 서울 팝스오케스트라의 청소년 음악축제에는 채주병씨의 거문고와 김청만씨의 장구연주가 펼쳐지고 소프라노 박미혜씨와 가수 최성수씨가 나와 우리 가곡과 가요를 부른다. 또 국악의 해를 맞아 지방국악 활성화로 민족음악에 대한 범국민적인 공감대 형성을 위해 제주문예회관과 춘천 종합문화 예술회관에서 제주민요와 강원민요 열창이 펼쳐진다.
  • 「황실은 살아 있다」 발간/안천 서울교대교수(저자와의 대화)

    ◎“대한제국 황실/“일제때 독립투쟁 본거지”/“의왕이 손병희에 민중궐기 촉구/3·1운동은 고종독살에 대한 민중의 분노로 발발” 「대한제국의 황실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았다.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황실은 독립투쟁의 본거지였다」 서울교대 안천교수(정치학·47)가 잊혀진 역사,대한제국 황실의 독립투쟁사를 발굴해 「황실은 살아있다」(전2권·인간사랑간)란 책을 출간했다.이 책은 나온지 10여일만에 초판 6천부가 매진돼 재판에 들어가는등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 이유를 안교수는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조선왕조(대한제국)에 대한 향수와 그 후예에 대한 궁금증이 아직도 국민 정서속에 짙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몇해전 발표한 글에서「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는데 그 글을 보고 고종황제의 손자인 가수 이석씨가 찾아왔다』면서 『그분에게서 황실의 독립투쟁 얘기를 듣고 그 발자취를 추적하게 됐다』고 밝혔다.「노래하는 황손」으로 알려진 이석씨는 고종의 둘째아들인 의왕(흔히 일본식 명칭인「의친왕」으로 알려졌음)의 아들로「비둘기집」등 여러 히트곡을 갖고 있다. 안교수는 이후 이석씨와 함께 4년여동안 전국을 돌며 황실과 연계된 유적지와,관련인물들을 찾았다.안교수가 주요 증언자로서 책머리에 소개한 인물은 48명에 불과하지만 이 기간동안 실제 만나본 인물은 수백명에 달한다는게 그의 얘기이다. 안교수가 발굴한 새로운「황실의 역사」는 엄청나다.그가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실의 인물들은 일제에 국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썼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를 되찾기 위해 적극 나섰다는 것. 안교수는 대표적인 예로 3·1운동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새 해석을 내렸다.그는『지금 학계에서는 3·1운동을 독립운동,또는 민중해방운동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된 것에 대한 백성의 분노 표현이자 대한제국을 회복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고종이 독살된 직후 의왕이 이 사실을 손병희에게 알려 백성의 궐기를 촉구한 것이 3·1운동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고종이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유동렬장군을 만주로 보내 군대양성을 지시했다 ▲일제 말년 의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공이 강원도 금화지역에 비밀군사기지를 마련했다는등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황실의 독립운동 비사를 증언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정치학자로서 황실의 역사를 추적한 이유를 『우리사회에 입헌군주제가 알맞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대학 강단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면서「구미의 정치제도가 우리 몸에 맞는 옷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 대안으로서 입헌군주제를 추구하게 됐다는 것.또 영국·일본·스페인·태국의 예로 보더라도「왕이 사회의 구심점으로서 기능하는 제도가 우리 현실에 훨씬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안교수는 황실을 복원해 입헌군주제를 되찾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 아니라는 이유로『첫째 황실은 독립투쟁에 앞장선 만큼 도덕적으로 자격이 충분하며,둘째 남아있는 고종의 후손들이 그 역활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해방후 10년간 「경찰 사찰문서」 발견/서울대교수,하버드대서

    ◎좌익·중간파 정당 5천여명 계보 총정리/홍명희 등 월북자 1백90명 명단도 수록 경찰이 45년 해방이후 10년간 남북한의 주요좌익과 중간파정당 및 사회단체의 이념과 계보,각 정파지도자의 정치성향과 조직원들의 명단등을 상세히 분석,정치사찰에 사용한 미공개자료가 국내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서울대 교육연구소 「한국교육사고」 김기석교수(교육학)는 29일 『미국 하버드대부설 옌칭도서관에서 서울특별시경찰국이 45년부터 55년8월까지 10년간에 걸쳐 조선노동당·민주주의민족전선·민족자유연맹·사회당·독립노농당·자유사회당 등 91개에 이르는 좌익·중간파·제3세력 정당 및 사회단체의 정치이념과 계보·행동강령·조직원명단 등을 수록한 극비문서 「사찰요람(사찰요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해방후 좌파 및 중간파의 활동을 기록한 각 정파의 기관지와 문서 등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으나 이처럼 상세하게 정치격동기의 각 정파를 종합분석·평가한 경찰 내부문서가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총2백8쪽 분량의 필사본으로 휴전협정 2년후인 55년8월15일 「서울특별시경찰국 사찰과」가 작성한 「사찰요람」은 「총론」 「중간계 사회정당단체」 「기타 각파 정당사회단체」 「제3세력 정당사회단체」 「좌익계 정당사회단체」등 5개 장으로 구분,각 정파의 사상적 배경과 성립역사·활동개요·간부동향·조직원 및 월북자명단 등을 일목요연하게 수록하고 있다. 특히 이 문서는 91개 좌익 및 중간노선 지도자와 조직원 5천여명의 명단과 계보 및 해방전후의 정치상황을 체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경찰이 사찰대상으로 삼은 정당 및 사회단체는 좌익세력으로는 조선노동당을 비롯,남조선노동당·인민공화당·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농민동맹등 58개,중간파로는 민족자유연맹·한국독립당·민중동맹·사회민주당등 26개,제3세력으로는 독립노농당등 7개다. 이 문서는 또 조선노동당의 김일성이 48년 남한 단독정부수립이후에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등을 통해 자유사회당·한독당 등 남한내 중간파들을 조종,친북행동을 하도록 사주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이 문서는 중간파 간부로 활동하다 6·25동란을 전후해 월북한 홍명희(전북한부수상)·조소앙 등 1백90명의 명단도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북한에 조선인민공화국이 들어서기에 앞서 48년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선출된 김일성·김두봉·허헌등 5백66명의 대의원명단도 수록돼 있다. 김교수는 『이 문서는 해방전후 남북한에서 활약한 좌파 및 중간파 정당 및 사회단체의 활동상황을 낱낱이 수록·분석하고 있어 해방전후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며 『다음달초 이미 공개한 을사보호조약 관련 「고종황제친서」등과 함께 3권짜리 「한국교육사고자료총서」로 출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덕수궁/궁궐:9(서울 6백년만상:46)

    ◎함녕전 화재후 1906년 중건/고종,수옥헌을 거처로… 을사조약 체결도/석조전은 최초 서양식건물… 9년걸려 지어 덕수궁은 궁의 이름을 고종의 존호를 따온데서 알 수있듯이 고종과는 떼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종41년(1904년) 4월14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불이나 대한문과 대분의 전각이 불에 탔다.중신들은 고종에게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권했으나 경복궁의 민비 참변사건과 창덕궁에서 갑신정변·임오군란의 쓰라린 경험때문에 옮기기를 꺼려했다.이에 고종은 화마를 면한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건에 착공,2년뒤 완공을 보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든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들이다. 고종이 거처를 옮긴 수옥헌에서 이듬해 11월18일 이등박문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과 이완용의 매국행위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또 고종이 헤이그밀사사건을 계획했던 곳이기도 하다.결국 이 사건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왕위를 이어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길때까지 거처로 삼았다.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나 수옥헌은 정동교회를 조금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가 미대사관저와 인접한 곳에 있었다. 영국의 건축가 하딩이 설계,1900년에 공사에 착공한뒤 9년만에 완공한 석조전은 두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우리 나라 최최의 서양식 건물로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3층건물이다.임금의 거처로 쓰일 예정이었으나 완공을 못보고 국운이 기울어 빛을 보지 못했다. 석조전은 광복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후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궁중유물 전시관과 문화재관리국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덕수궁의 또하나의 현대식 유물은 석조전 앞의 청동 분수대.1937년 만들어진 이 분수대는 2차대전당시 일제에 의해 전시물자로 철거돼 콘크리트로 대체됐다가 지난 84년 복원됐다.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여느 궁궐과 마찬가지로 김천교라는 돌다리가 놓여있다.이 돌다리는 일제가 자동차 통행을 위해 흙으로 덮었두었으나 광복후 40년이 지나도록 존재자체를 모르다가 지난 86년에 비로소 복원되는 말못할 사연을 안고 있다. 일제에 의해축소되고 훼손된 덕수궁은 1960년대 들어 또한번 시련을 겪었다.태평로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을 허물어 대한문에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철책을 두른 것이다. 이때 오늘날 시민들의 만남의 광장으로 애용되고 있는 대한문과 문앞을 지키고 있는 두마리의 석수도 태평로의 도로가 넓혀진 만큼 뒤로 물러나는 설움을 받았다.이것도 모자라 서울시는 덕수궁을 시민공원으로 만든다는 발상아래 스케이트장을 만들고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다.담장도 뒤로 물러 앉은 상태로 복원됐으나 궁궐내부는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옛것과 새로운 것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덕수궁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유유자적했던 선조들의 정취를 맛볼 수 있어 좋다. 비록 옛 모습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서울의 궁궐 가운데 가장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덕수궁의 규모는 1만8천여평.크기는 작지만 각박한 현실에 쫓겨 사는 서울시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서울의 새로운 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 경복궁 점령 계획/구일군 사료 발견

    【도쿄 연합】 구일본육군(일제군)이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7월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은 사전에 세운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가 발견됐다. 일 나라여자대 나카쓰카(중총명) 명예교수는 후쿠시마(복도) 현립도서관에서 구일본군의 청일전쟁사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는 가운데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게 된 경위를 기술한 부분을 찾아내 오는 23일 경복궁 점령 1백주년을 맞아 나라여자대에서 열리는 역사연구회에 보고할 예정이다.
  • 덕수궁/월산대군사저… 임란후 궁으로/궁궐:8(서울6백년만상:45)

    ◎고종퇴위후 거주… 전기·전화 최초가설/일제 1933년 시민공원으로 개방 덕수궁은 궁궐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등 현존하는 3대궁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우선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세종대왕동상이 앉아있고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으며 매점등 편의시설이 즐비하다.점심시간대에는 인근 회사원들에게 산책 코스로 각광을 받고있는 여느 도심공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단지 대한문을 필두로 중화전 즉조당 함녕전등 몇 안되는 전각들과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우리 가락이 이곳이 궁궐이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아들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정궁이 된 배경은 임진왜란과 을미사변등 국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의 발발로 신의주까지 피란갔다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타버려 어쩔 수 없이 덕수궁에 거처를 정했다. 이때는 궁궐의 이름도 없이 그저 정릉동행궁이라 불리다 광해군이 즉위 3년만에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지어 처음으로 궁궐의 반열에 섰다.그러나 불과 7년만에 인목대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광해군이 대비를 이곳에 유폐하면서부터 경운궁은 서궁으로 격하됐다. 광해군을 이어 덕수궁 즉조당에서 즉위한 인조는 경운궁을 명례궁으로 부르다 1623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덕수궁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2백70여 성상이 흐른 광무 원년(1897)을미사변의 와중에서 러시아공관으로 파천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칩거하면서부터 궁의 이름에 고종의 존호를 사용,덕수궁이라고 불렀다. 고종이 이곳으로 옮긴뒤 두차례에 걸친 대규모 축조공사로 함녕전 보문각 선원전 중화전 관명전이 새롭게 태어나 궁의 모습이 일신됐다. 이때 덕수궁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대한문은 원래 중화전의 문인 대안문을 옮겨놓았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년뒤에 중건,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원래는 경희궁(옛 서울고자리)과 연결돼 있을 정도로 규모가 방대했으나 열강들의 각축이 벌어지면서 조금씩 떼어내 외국공관으로 사용케 해 규모가 줄어들다가 고종이 승하한뒤 빈 궁궐로 남아 있자 일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궁의 서쪽 선원전을 통과하는 도로를 뚫은뒤 1933년 시민공원으로 개방했다. 지금의 대법원과 새문안길을 잇는 이 길이 바로 60∼70년대 서울의 연인들이 낭만을 즐겼던 「덕수궁 돌담길」이다. 일제는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궁궐의 전각들을 헐고 경기여고를,그리고 도로 동쪽 제사준비소터에 덕수국민학교를 세웠다.또 동쪽 언덕을 밀어내고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국을 지어 궁궐이 반쪽으로 줄어들었다. 광무10년(1902)궁내에 발전소가 완성돼 전기가 들어오고 궁내부전화가 설치되는등 신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도 했던 덕수궁은 구한말 격동의 시기에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며 수많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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