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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배원보다 좋은 이름 없을까요”/정통부 연말까지 공모

    집배원(集配員)이란 이름이 내년부터 바뀐다. 공식명칭으로 채택된지 94년만(99년 기준)이다. 29일 정보통신부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제에 통신주권이 박탈되면서 사용해온 집배원이라는 용어를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참신한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 새 이름을 공모한다고 밝혔다. 1884년(고종 21) 탄생한 우편배달직은 을사조약 이전까지는 체전부(遞傳夫) 분전원(分傳員) 우체군(郵遞軍) 등으로다양하게 불렸다. 새 이름 공모기간은 다음달 20일부터 12월20일까지이며 접수는 우편을 통해 받는다. 당선작에는 200만원의 상금과 상패가 주어진다. 당선작과 많으면 추첨한다.
  • 고종 퇴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2)

    ◎순종 승계 강제성 통렬히 고발/황제대리조칙 반박/수차례 논설로 따져/고종 도쿄친행 거부/헤이그밀사 자결 등 호외로 대내외 알려 1907년 7월19일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태자에게 양위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는 일제와 이에 빌붙은 친일파 내각에 의해 축출당한 것이었다.창간 때부터 고종 황제와 각별한 관계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정면으로 지적하며 이의 부당함을 거세게 따졌다. 을사늑약(勒約)후 2년도 안돼 이뤄진 고종 퇴위는 고종의 헤이그(海牙) 밀사 파견과 관련이 깊다.고종은 일제의 한국 침탈 실상과 조약의 무효함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李相卨 李儁 李瑋鍾 등 3인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다.고종의 친서를 휴대한 밀사들은 6월25일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영국 등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밀사 이준은 울분 끝에 현지에서 분사(憤死)했다. 고종은 대한제국 제위에 오르면서 강한 배일주의 성향을 보여왔다.일본은 밀사 파견을 고종 퇴위의 호기로 보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대신들을 앞세워 고종을 핍박했다.7월18일 고종은 내각의 섭정추천 요청을 거부했으나 19일 황태자 대리 조칙을 내린 뒤 20일 양위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일신협약(7월24일),군대해산(8월1일)으로 이어지는 1907년 7월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대한매일은 그간 높이 쳐들어온 반일의 기치에 한 가닥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매섭게 필봉을 휘둘렀다. 7월4일 논설을 통해 “해아 평화회담에서 일본인의 잔학을 호소하려는 한국의 제의가 배척됐지만 한국인은 실망하지 말고 자주독립의 대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층 힘써야 한다”고 격려했고 7월9일에는 “한국이 자국의 명운을 국제 중재에 위탁하기에는 열강의 태도로 보아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면서 “이번에 한국 파견인이 거절된 것을 길조로 여길 수 있다”고 국민들을 위무했다. 이완용의 잦은 통감부 방문을 주시하면서도 일제의 고종 퇴위 속내를 알아채지 못했던 대한매일은 16일 일본報知신문 기사를 전재해 처음으로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이 일본 신문은 “한일협약을근저에서 짓밟은 한국 황제를 폐하든지,일본으로 불러 사죄케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이에 대한매일은 18일 ‘일본 신문의 무례를 반박한다’라는 장문의 논설로 강경하게 맞섰다. “일본 신문이 논하는 구절구절이 해괴하고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한국에 대해 일본 사회와 언론의 마음 속에는 병탄 외에는 어떤 생각도 없다”고 갈파했다.그런데 이같은 논설을 내보낸 대한매일은 같은 날 몇시간 후 “황제가 대신들의 섭정추천,동경친행 사과 요구를 거절했으며”“해아밀사 이준이 忠憤을 이기지 못해 자결,만국 사신들 앞에 뜨거운 피를 뿌렸다”는 내용의 호외를 뿌리게 된다. 만 하루가 지난 19일 낮 대한매일은 다시 호외를 냈는데 ‘황제께서 황태자에게 대리를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는 소식이었다.황제가 하룻만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이 호외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대한매일이 조칙에 바로 잇대어 “이 조칙 반포가 황제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일반의 주목거리이나 이 사건이 외인의 강핍과 대신들의 위협으로 된 것은 세상 사람이다 알 바”라고 쓴 점이다. 조금도 곁눈질하지 않고 즉각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적시한 것이다.대한매일은 20일 ‘이등후’,21일 ‘대리역사’,25일 ‘禪位’,28일 ‘선위속론’등의 논설을 잇따라 써내면서 퇴위가 외부의 강박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이 와중에서도 대한매일은 만국회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연설로 큰 갈채를 받은 밀사 이위종을 한국에 희망을 주는 청년으로 극찬했다(19일).또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독립이 흔적도 없어졌다”고 한탄하면서도 “한국인이 한국의 이익을 위해 자치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희망 또한 피력해 마지 않았다.(27일). ◎사설 ‘선위속록’/“왕실의 대리와 선위… 핍박과 위협으로…” 대한매일은 고종 퇴위에 관해 여러 차례 사설을 썼다.이 중 7월28일자 ‘선위속론’의 주요 부분을 발췌한다. 무릇 황위의 전해짐과 물려줌은 천하대사라 동서고금 역사가 이에 관해서는 한층 근엄한 필법으로 사실에 준거해 곧게 쓰는 것을 공리로 하고 있고 이것이 역사가의 정당한 의무로다. 한국 황실의 대리와 선위라는 큰 사건이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이뤄졌다.외인의 강한 핍박과 내각 제대신의 위협적인 요청에 의한 것은 일반 세상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특히 선위에 있어 내각 대신의 한층 괴이하고 해괴한 행동에 관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모든 세계 인사와 대한 신민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고 가슴에 새겨 잊지 말지어다. 선위가 논해질 무렵 아직 조칙이 내려지지 않아 실시할 수 없다고 어느 원로 대신이 지적하자 농공상대신 송병준은 이렇게 하면 어떻고 저렇게 하면 어떻단 말이냐며 벌컥 화를 내면서 그 원로를 포박하려 하니 그 사람이 황겁공포하여 신도 신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박영효가 이완용 총리를 면전에서 격렬하게 반박하자 다음날 그를 포박했으며 내관 이병정이 이총리에게 30년 동안 임금을 섬긴 대감은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와 같은 은공을 입었는데 오늘 이같은 짓이 대감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꾸짖자 그 역시 경무청으로 끌고가 가두었다더라. 이런 사실은 모두 너무 잘 드러나서 숨길 수도 없어 세계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고 붓을 든 사가가 대서특필하지 않을 수 없다.
  • 高宗 밀서사건(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0)

    ◎을사조약 강제성 낱낱이 들춰/영지게재 6개 조항 1면 논설통해 소개/일제 정정요구 거부/밀서 사진으로 전재 “고종 진의 확인” 공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발생한 ‘고종 밀서사건’은 언론을 통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대한제국의 주권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것이다.한국침탈을 강행한 일제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를 크게 손상받았고 한반도 정책에서 더욱 강경책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내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반일감정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결국 일제가 대한매일 등 민족지를 탄압하고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진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다. 고종 밀서사건은 대한제국 황실과 영국의 런던트리뷴 특파원인 더글러스 스토리 간에 극비리에 진행된 일종의 작전이었다.스토리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한 미국공사 모건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전말을 들은 뒤 고베에서 통감부 총무장관으로 새로 임명된 스루하라 일행과 함께 한국에 온 것은 1906년 초. 서울의 지인들과 두루 접촉한 끝에 고종을 만난 스토리는1906년 1월29일 고종의 밀서를 전달받는다.밀서는 모두 6개 조항으로 고종이 ▲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고 ▲조약을 일본이 반포하는 데 반대했고 ▲독립권을 한치도 타국에 양여할 수 없고 ▲이 조약의 외교권도 근거가 없으므로 내치상 한건도 인준할 수 없고 ▲통감의 주둔을 허락하지 않는 동시에 황실권도 외국인에 허가하지 않고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고종의 붉은 옥쇄가 찍힌 이 밀서는 고종의 측근들이 일본측 정탐꾼들 눈을 피해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고 나온 것이다. 스토리는 이 밀서를 대한매일 사주 裵說에게 보여준 뒤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배에 올라 2월7일 중국 지부에 도착한다.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를 찾아가 고종의 밀서사실을 알리고 밀서내용 기사를 런던트리뷴 본사로 송고했다. 다음날 트리뷴 3면 머리에 이 기사가 실렸다.“을사조약은 고종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고종은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라는 내용이었다.을사조약 체결 경위와밀서 6개항이 영문으로 함께 번역 게재됐다. 일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주영 일본대사관은 트리뷴의 보도가 전혀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나섰다.또 고종이 보호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관계로 오히려 고종이 이 조약에 동의했다고 억지를 부렸다.그러자 스토리는 2월10일자 또 다른 기사로 일본의 주장을 반박했다.일본이 한국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해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상세한 전말을 고종 측근의 말을 인용해 썼다. 이 기사는 트리뷴에 실린 뒤 로이터 통신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대한매일은 2월28일자 1면 논설 ‘保護’에 트리뷴의 기사를 소개했고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한국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고종 밀서사건은 영국·일본·중국·한국 신문에 계속 보도됐고 1907년 1월부터 한국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다.스토리는 1906년 10월부터 트리뷴에 ‘동양의 장래’란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다섯번째로 12월1일자에 문제의 밀서를 크게 실었고 대한매일은 이 밀서 사진을 1907년 1월16일자에 그대로 올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통감부가 적극 나서기 시작한다.밀서가 근거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무색해졌고 고종의 진의를 한국민들이 확실하게 알게 됐기 때문이다.통감부는 “고종이 밀서를 준 일이 없다”고 강력 부인한 뒤 대한매일에 제동을 걸었다.裵說 추방책을 영국정부와 타진하기 시작했다.먼저 “밀서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친의(親誼)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1월21일자 관보에 실었다.또 한국정부 외사국장 李建春을 시켜 “대한매일에 실린 밀서기사는 사실무근이니 이를 정정하라”는 공문을 裵說에게 보냈다. 몇몇 친일계열 신문이 관보에 실린 내용을 게재했지만 대한매일은 오히려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으로 맞섰다.1907년 1월23일자에 “이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까지 갖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 한국인들에게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 없다”는 기사를 싣고 기사정정 요구를 무시했다. ◎고종 밀서 전말/한국의 중립화 목표/미·러 협조 실현안돼/외지에 일 음모 고발 고종의 밀서사건은 국내 반일감정 악화에 따른 통감부의 여론통제 방침을 더욱 강경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다.통감부는 밀서사건 뒤 곧바로 대한매일 등 항일 민족지의 논조를 희석시키고 통감부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친일지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면 이처럼 일제를 자극한 고종의 친서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외세 강점기 이 밀서가 나오기까지 고종의 생각은 한국이 시종일관 중립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종은 일제 강점을 막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방향으로 열강의 협조를 구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세계 각국에 이를 알리기 위한 비밀문서까지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밀서사건 때까지 고종의 이같은 노력은 수차례에 걸쳐 추진됐었다.1900년 주일 한국공사 李夏榮이 처음 제기한 ‘한국의 중립화’안은 러일간에 고조된 긴장상태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그리고 4년 뒤인 1904년 1월21일 고종의 명을 받은 외부대신 李址鎔이 한국의 엄정중립을 명기한 성명을 냈다.각국 주재대표 11명이 각국 정부에 이 선언서를 알렸지만 결국 2월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됐고 이같은 중립화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고종은 열강의 힘을 본격적으로 빌리기 시작한다.1905년 2월 고종은 러시아 육군소장 데시노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다.이 밀서는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를 통해 러시아로 전달됐다.또 을사조약 직전인 그해 10월에는 헐버트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프랑스 주재 한국공사 閔泳瓚을 미국에 보내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민영찬은 12월초 현지에 도착해 미 국무장관 루트에게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미국은 무심한 입장표명을 했다. 결국 고종은 이같은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에 와있던 외국기자를 통해 만국에 알리는 방안으로 밀서를 쓰게 됐던 것이다.
  • 고종의 자금 지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9)

    ◎창간부터 각별한 후원… 항일 필봉 독려/배설에 특허장 하사 등 감시속 유일하게 지원/통감부 보고서 등 기록/자금지급 사실 뒷받침/이토 ‘궁금령’으로 훼방/돈끊겨 힘겨운 싸움 대한제국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 창간 때부터 裵說 등 그 주역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은밀한 후원을 통해 독려,신문 논조가 지속적으로 강한 항일 색채를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일제 강점기 거센 언론탄압 속에서 유독 대한매일이 황실 지원을 받았음은 당시 그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고종은 발간 지원의 방편으로 배설에게 특허장을 써주기도 했으며,일제가 이같은 지원을 막고자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황실이 창간 때부터 대한매일을 지원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토마스 코웬은 배설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려고 입국했을 때 동행한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동료기자였다.그와 배설이 함께 해임된 뒤 두 사람은 영자신문을 공동창간하려고 했다. 코웬이 대한매일 창간 며칠 전인 1904년 7월10일 일본 저팬타임스 사장인 즈모에게 보낸 편지는 고종의 지원의사를 보여주는 자료다.“코리아타임스라는 신문을 창간해달라는 중요한 주문을 받고 있다.이 신문은 한국 궁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고,반일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대한매일 창간 후인 그해 10월3일 주한 영국공사 조단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 신문이 孫澤이라는 독일 여인을 통해서 황제의 지원금을 쓰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쇄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인쇄소에서 신문을 찍고,불과 200여호를 발행한 뒤 휴간한 사정을 보면 창간부터 1905년 초까지는 고종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배설이 외부 도움 없이 신문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특히 1905년 8월1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각각 4면으로 별도 발행했는데,이같은 확장과 인쇄시설 마련이 고종에게서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1905년 10월11일 주한 일본군 헌병대가 한국 주둔군 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白時鏞이 고종과 배설 사이에 중개를 주선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백시용은 당시 예식원의 회계과장으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또 1907년 1월18일 경무고문 마루야마가 통감대리인 하세가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대한매일이 한국 황실로부터 매월 500원을 지급받고 있다”고 액수까지 밝혔다. 1907년 8월27일 통감부의 경무 와타나베가 마루야마에게 보낸,궁내부 전무과 기사 沈雨澤에 대한 심문조서는 고종의 보조금지급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작년 손탁은 폐하에게 ‘대한매일은 유독 한국 및 황실에게 이익되는 것을 기재해 왔으나 유지곤란으로 이번에 일본에 매도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폐하의 일고를 바란다’고 주상했다.폐하는 출판을 계속할 것을 희망하여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출하고 또 매월 1,000원 정도를 하사해왔다.” 대한매일 한글판이 재창간된 것은 이해 음력 4월이므로 고종은 대한매일 한글판 창간에 특별자금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 신문발간에 편의를제공받도록 고종이 배설에게 특허장을 준 것이 1906년 2월10일자였으므로 고종이 재정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준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는 어려웠다.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7월2일 고종을 만나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특별병력이 궁중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요했고 7월6일자로 궁금령을 공포했다.당시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이 고종에게서 내밀하게 고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토가 고종을 고립시켜 두려는 속셈이었다.특히 반일적인 배설이 고종과 내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궁금령 공포와 엄격한 출입통제로 고종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년 후 고종이 퇴위하고는 재량껏 쓸 수 있는 내탕금도 제한됐고,일본측 감시도 철저해졌다.이때부터 지원이 끊겨 대한매일은 더욱 힘겨운 싸움에 나서야 했다. ◎황실과 대한매일신보/극도보안속 재정지원 타언론 비해 자금난 덜해/헤이그·을사조약생생한 보도/강경한 항일노조 유지 큰 힘 고종 황제의 경제적 지원은 대한매일이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당시 대부분의 민족지들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 탓에 경영난에 허덕였고 논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대한매일은 황실 지원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재정 곤란을 덜 겪었다. 대한매일의 굽히지 않는 필봉의 원천은 물론 배설이라는 영국 발행인에게 있다.그가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직접적인 탄압을 비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대한매일도 어려운 경영상태에 빠져 대중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사태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황실의 지원이 큰 힘이 됐음을 부인키 어렵다.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 있었다.당시 일제가 정부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볼 때 황실의 지원은 사적으로,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한매일의 고종 관련기사는 항상 강경하고 직접적인 상황을 여과없이 부각하는 생생한 것들이다.1905년 을사늑약(勒約)체결과이에 대한 고종의 완강한 거부를 공개한 1905년 11월18일자의 ‘칙어엄정(勅語嚴正)’,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린 고종 친서를 전문게재하고 이와 관련해 쓴 1907년 1월23·24일자 논설,그해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 등 끝이 없다. 이는 고종의 대한매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른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칙어엄정’만 하더라도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일반에게 알린 최초 보도였다.또 고종친서사건과 헤이그밀사사건은 각각 고종의 입지를 좁히고 결국 폐위로 연결된 직접적 사건이었다.초기부터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일제 입장에선 양쪽 관계를 더 이상 유지케 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 통감부와 대결(다시 태어난 ‘대한매일’:8)

    ◎침탈·탄압에 맞대응/매국노·침략자 규탄/신문지법 등 공포 맞서 논설 통해 간담 서늘케/민족혼 고취·항일 주도 1906년 1월31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가 발족되면서 국내 언론은 이전과는 판이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각국 공·영사관의 철수를 강행,열강의 모든 권익을 빼앗은 통감부는 매국내각을 구성한 뒤 본격적인 한국침탈에 걸림돌이 되는 언론에 대한 탄압에 돌입했다.1906년 4월부터 통감부령 제10호로 언론활동의 통제조항을 둔 보안규칙 시행에 들어간 것을 필두로 1907년 7월24일 李完用 내각으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토록 해 본격적인 항일 민족지 죽이기에 들어간 것이다.대한매일신보도 1908년 4월 개정된 이 신문지법에 따라 결국 철퇴를 맞고 말았다. 이 시기 통감부는 대한매일에 대해 유달리 집중적인 압력을 가해왔다.대한매일이 을사조약 이후 항일의 필치를 높여간 만큼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한매일은 ‘영국인 사주’(裵說)덕에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아 날카로운필봉을 어김없이 휘둘렀고 매국자들을 예외없이 고발했다.그러나 결국 신문지법을 대동한 일제의 탄압에 한껏 타오르던 항일 민족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의 보안규칙 시행이나 1907년의 신문지법은 처음엔 국내에서 발행되는 민간신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통감부는 사사건건 물고늘어지는 명의의 대한매일을 그냥 놓아둘 수 없었다.따라서 1908년 4월29일 신문지법을 개정,대한매일의 기세를 꺾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신문지법은 일본의 통감정책에 저해되는 일체의 언론에 대해 발행정지권을 비롯해 벌금형과 체형,신문 인쇄기기 몰수 등 강력한 처벌조항을 담았다.더욱이 1907년 7월24일 신문지법을 발포한지 닷새만에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고 31일 한국군대까지 해산된 것을 보면 대한매일을 비롯한 항일 민족지에 대한 통감부의 탄압이 얼마나 치밀한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이 법은 1910년 한일합병이 강행된 뒤에도 계속 발효됐고 해방후 1952년까지 존속한 식민지 악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논봉을 들고 나선 것은 역시 대한매일이었다.정부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마당에 숱한 애국지사들은 자유로운 필치를 유지하는 대한매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통감부와 관련한 일련의 논설들은 이같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통감부 설치 직후인 1906년 2월9일자 1면 논설 ‘통감(統監)’과 3월9일자 1면 논설 ‘이등후(伊藤侯)’는 통감부 설치의 불법성을 비난한 대표적인 예다.“일본이 이웃나라 안에 자기나라 대표를 파견해 권력을 장악함은 옳지 못한 일”(統監),“한국의 내정은 일인이 지휘하고 외무는 동경에서 관할하니 한국의 독립이란 어디 있느냐”(伊藤侯). 또 8월15일자 논설 ‘한국과 일본’에선 “이등박문은 현존 한국의 노예같은 정부 대신을 지휘해 모든 일을 자기가 집행함이 한국을 일본에 정복된 국민의 지위에 떨어뜨리는 제반 악계를 꾸몄다”고 폭로했다.1907년 1월16일자에는 “을사5조약을 승인하지 않으며 열국의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칙서를 발표해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친일정부가 발행하는 관보 게재를 중단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법령공포와 정부시책 홍보가 내용인 관보는 한일합병 때까지 발간된 대부분의 신문들이 중요 내용을 전재할만큼 큰 뉴스원이었고 신문보급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그러나 일본이 득세하면서 자주성과 독립성을 잃게 됐고 관보기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익어갔다.대한매일은 마침내 1908년 3월6일자 1면 논설 ‘관보정게(官報停揭)’에서 “관보의 내용이 과연 한국사람의 관보인가”라고 쓰고 이날부터 관보란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거듭되는 배일 논조에 격분한 통감부는 마침내 裵說 타도를 결의하고 나섰고 대한매일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에 강하게 맞선 裵說과 논진(論陣)이 추방 혹은 구속되면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신문사들의 수난/주요 재원 신문대금 체납 ‘눈덩이’… 경영난/社告로 납부 독촉… 日帝 탄압에 곡필 보도도 통감부의 언론탄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내 언론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된다. 사전검열에 따른 기사삭제,반포금지 및 정간이횡행하자 자연 독자들의 신뢰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따라서 당시의 신문,특히 민족지들은 광고수입이 적은데다 주요 재원인 신문대금의 체납이 많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논조를 펴지 못하는 지경에 빠졌다. 실제로 내부 경무국이 펴낸 ‘고문경찰소지’(1910년 간)에 따르면 통감정치 첫해인 1906년 한 해만 하더라도 황성신문은 7건,만세보는 6건,제국신문은 13건이나 기사를 삭제당했다.또 1909년 ‘경찰사무개요’와 ‘조선통감부 시정연감’은 발매반포금지 및 압수처분의 경우 1908년 64건,1909년은 137건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한매일만 하더라도 1909년 한 해 동안 발매반포금지 14건에 모두 1만6,314부를 압수당했다. 이같은 탄압이 전개되자 신문 운영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민족지들은 대중적인 호소에 적극 나섰다.사고와 잡보를 통해 독지가의 성원과 신문대금 납부를 촉구하기에 이른 것인데 그 사정이 매우 급박했음을 알 수 있다. 황성신문은 “신문대금을 빨리 지불하는 사람은 문명인이라”는 이례적인 사고를 냈고 어떤 대신이 체납금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기사로 보도하기까지 했다.사설에서도 “독자가 신문대금을 지불치 않으므로 신문을 발행 못한다”고 쓰고 있다. 대한매일도 사고에 “본사가 이전하겠는데 수리 정돈에 경비가 매우 모자라니 대금을 송치해주기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심지어는 “각 지점에서 본사 대금 체납이 많은데 평양지점은 미납급이 300여원에 달했으니 본사경비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겠는가”라며 재촉하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한 잡보에는 “재정난으로 휴간한 제국신문의 복간을 위해 각 부인회에서 보조금을 모집하기로 했다”는 글까지 올린 것을 보면 당시 언론이 얼마만큼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 황성신문과 동지적 관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7)

    ◎일제 강점기 민족 이끈 ‘두바퀴’/친일비판·을사조약 반대 등 배일 역설/애국계몽·국채보상운동도 함께 주도/1910년 폐간때까지 항일의 구심점역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흔히 을사조약이란 비극적 상황의 대명사로 통하는 황성신문의 논설이다.그러나 정작 ‘시일야방성대곡’에 얽힌 비참한 사연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국민의 반일 감정을 자극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은 일제 강점기 험한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간 민족의 양바퀴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발간된 당시 신문들은 각각 뚜렷한 색채를 갖고 나름대로 목소리를 냈다고 할 수 있다.대한매일과 황성신문,그리고 제국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국민신보 대한신문 경향신문 등이 그 대표적 매체들이다.신문 성격만큼이나 을사조약과 일제 침탈을 둘러싼 논조에선 극명하게 대립했다.또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도 현격한 논조 차이를 보였다.그러나 이 가운데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반일 논조를 확연하게드러낸 양대 산맥이었으며 공동운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1905년 11월3일 유신회와 진보회가 합동한 친일 단체 일진회가 발표한 이른바 ‘일진회선언서’에 대한 공박에서부터 같은 논조를 벌인 두 신문은 을사조약에 대한 무효화 투쟁에선 그야말로 하나가 됐다.조약 체결의 속사정과 강점 과정을 앞다투어 파헤쳐 격변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읽어냈다고 평가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을사조약을 앞둔 시점에서 일진회 준동에 대한 공동보조는 그 시초랄 수 있다.일진회가 일본 침략 행동을 찬동·지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여론을 공격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자 두 신문은 이를 통렬히 반박하는 논설을 일제히 실었다.당시 정부에서도 선언서에 현혹되지 말 것을 훈령으로 고시할 정도였으나 일제의 득세에 따라 국민신보 대한신문 등 친일지들이 나타나고 언론도 완전한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을사조약에 반대한 황성신문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대한매일이 유독 황성신문의 논조를 적극 지지했다.그해 11월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 나간 뒤 張志淵 사장이 붙잡혀가고 정간 조치가 내려졌을 때였다.대한매일은 ‘황성의무’란 논설을 통해 저간 사정을 통렬히 비난하고 황성신문을 적극 찬양하고 나서 일반인에게 진실을 알렸다.조약 체결의 속사정을 파헤친 황성신문의 ‘신조약청체전말’을 호외로 발간해 세세하게 다시 싣고 무효화선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제국신문이 을사조약에 대해 ‘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는 글을 싣고 대한일보가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경거망동’으로 비난한 것을 보면 당시 대한매일의 강경한 논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의병운동에 대한 관점에선 다소 차이를 보인 게 사실이다.대한매일이 강한 논조를 편 데 비해 황성신문을 비롯한 나머지 신문들은 민중의 혁명적 변혁과 대중투쟁을 간과한 것으로 학계는 평가한다.대한매일이 지방소식란에 매일 의병투쟁 소식을 실은 데 비해 타지들은 ‘무익한 폭거’‘부질없는 행동’으로 돌렸다.황성신문조차도 1906년 5월20일자 논설 ‘의병들의 소요는 마땅히 빨리 진압돼야 한다’는 논설을 실을 정도였다.그나마 황성신문은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민간인 학대까지 찬성하지는 않았다. 애국계몽운동과 경제사정에 관해서는 두 신문이 한 길을 택했다.특히 교육발전과 일제의 경제적 침투에 반대하는 자주적 산업건설 대목에선 철저하게 같은 논조를 폈다.황성신문이 먼저 1906년 2월13일자 논설 ‘경고동포’에서 지식 보급,대중계몽의 의의와 그 절박함을 지적했다.대한매일도 이어 8월3일자 논설 ‘한국의 실업’에서 실업국민(實業國民)이 되기 위해 △자국 비용품은 자국에서 공급할 것과 △국산품 수출자가 될 것을 역설한 것은 그 대표적 예다.이같은 계몽운동은 두 신문이 국채보상운동의 최일선에 나서는 것으로 연결된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 두 신문은 1910년 폐간될 때까지 나라의 운명과 사회흐름을 예리하게 감지해 운동력을 키운 시대의 견인차인 것이다. ◎당시 親日紙 행각/을사조약이후 제국신문 등 변절 일제옹호 앞장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이 을사조약 무효화선언 등 항일투쟁의 기치를 올린 것과는 달리 친일 신문들은이같은 민족지들에 결사코 반대하며 일제를 옹호하고 나서 대조를 보인다. 일본인 경영의 국문지인 대한일보는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게재를 경거망동이라고 비난한 대표적 신문.張志淵이 구속에서 풀려나고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황성기자패론’과 ‘여장지연군’이란 제목의 글로 오히려 장지연의 논조가 그릇되며 고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제국신문의 경우 자주독립을 주장한 민족지 성격이 강했으면서도 이때는 논조의 일관성을 잃은 것으로 비쳐진다.이 신문은 1904년 2월 강압적으로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대해 “시정개정의 충고권이란 결국 침략의 제일보”라고 비판했다.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태도를 바꿔 11월22∼23일 이틀에 걸쳐 ‘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는 글을 실었다.황성신문 정간사태에 대해서도 “과격한 논조로 나가면 탄압을 받아 신문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논조를 폈다. 1906년 1월 친일파의 영수 宋秉畯 李容九 등이 일진회 기관지로 발행한 국민신보는 처음부터 열렬한 친일로 나섰다.1906년 9월2일자 2면에 게재한 ‘궁문파엄’(宮門把嚴)이란 글은 단적인 예다.이 글은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을 힘써 수행해야 한다.혹시 협잡배가 각종 수단을 부려 군주의 총명을 막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대궐을 지키는 일본군에게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신료의 침입을 막아 고종황제의 뜻이 외부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경계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민족지의 하나인 천도교계의 만세보는 경영난으로 친일 진영에 넘어가 대한신문으로 탈바꿈한 다음엔 입장을 바꾸었다.이 신문은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한 李完用이 인수해 李人稙에게 발행을 맡긴 것으로 친일 내각의 옹호와 그 선전에 적극 나섰다.
  • 을사조약 반대운동(다시 태어난 ‘대한매일’:6)

    ◎“신뢰못할 늑약” 무효화 투쟁 앞장/“고종 불윤에 이토 강압” 등 부당성 지적/한규설·민영환 자결­분노함성 대서특필/격렬한 항일논설 민족구국정신 일깨워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매일신보는 발빠르게 반대 투쟁에 나선다.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가 잇따르고 대신의 자결사태까지 발생하는 상황에서 국내 언론들은 조약의 침략성을 일제히 규탄하고 나섰다.이 가운데 대한매일의 반대투쟁은 그 어느 매체보다도 빠르고 강경한 논조로 일관했다. 조약 체결 당시 고종과 韓圭卨 참정대신을 비롯한 각료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군사력을 앞세운채 강압,마침내 일방적으로 이 조약체결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에 맞선 대한매일의 논조는 조약의 부당성 지적과 무효화에 초점을 맞추고 일관된 투쟁양상을 보였다.후에 통감부는 결국 이같은 반일논조를 잠재우기 위해 고종 퇴위와 대한매일 사주인 배설 추방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만다. 대한매일의 투쟁은 조약 무효선언으로 시작됐다.조약 체결 다음날인 18일자 2면 잡보란에 속보형식으로 내보낸 ‘칙어엄정’(勅語嚴正)이 그 시초다.“한국 황제께서는 한국독립을 중념(重念)하시와 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신즉 伊藤(이등박문) 대사가 재삼 강청하되 강경하신 칙어로 불윤(不允)하셨다더라.” 일본이 강제로 만들고 체결을 강행한 을사조약에 대한 고종의 반대의사가 확고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사다. 이와함께 조약 체결 당일 각의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사도 같은 날 잡보란에 실려있다.‘칙어엄정’ 아래 ‘대사관 각의’와 ‘殉國意決’ 제하의 글이 그것이다.‘대사관 각의’ 기사는 “어제 오전 11시에 참정대신 이하 각부 대신들이 이등 대사관으로 모여 중대사건을 각의하였다더라”라고 쓰고 있다. 또 ‘순국의결’에선 “참정대신 韓圭卨씨와 外大 朴齊純씨와 農大 權重顯씨가 이 중대한 요구건에 대하야 죽음으로 맹세코 굴복하지 않기로 상부통곡(相扶痛哭)하고 韓참정은 영결(永訣)까지 하였다니 삼대신의 순국하는 충의에 감읍하지 않은 자가 없다더라”라고 게재돼 있다.한규설은 내각 조직 당사자로 조약 체결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각료들에게 개별적으로 찬부를 물을 때 끝까지 반대,파면됐다. 다음날도 무효화 논조는 계속됐다.19일자 2면 상단 잡보란에 또다시 ‘신조약성립’(新條約成立)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냉정한 필치로 조약이 체결된 경위를 자세히 보도했다.기사 마지막에 “황제폐하의 성의(聖意)는 이 조약을 결사코 불허하시기로 확정하신 거일진대 각 대신의 황겁으로 성의를 공동하여 차경(此境)에 이르렀는데 韓皇폐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종사생령(宗社生靈)을 위해 상천(上天)에 기도하셨다더라”라는 글을 붙였다. 21일에는 전국 십삼도의 유약소(儒約所)에서 상소한 전문을 소개하고는 거리풍경을 싣는 것도 잊지 않았다.‘회조위소’(回眺爲笑) 제하의 글이 그것이다.“어떤 이가 주현을 지나다가 춤추는 사람이 있어 그 이유를 물은즉 신조약설을 듣고 실성해 밤새도록 통곡하더니 황상폐하와 참정 한규설씨는 처음부터 거절반대하셨다기로 기쁨을 이기지 못해 춤을 춘다 하매 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춤을 추었다더라”고 적고 있다. 12월 1일자에서는 시종무관장 閔泳煥이 신조약에 통분해 순국한 소식을 2면 머리기사로 크게 다루면서 이와 관련한 ‘늑약무효’(勒約=강제로 맺은 조약)란 격렬한 논설기사를 실었다.이 글은 결론으로 “한일신조약은 신뢰가 없고 효과가 없음을 단언하건대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세상사람들의 공론이니 이렇게 적어 후일의 증거로 삼고자 하노라”고 못박았으니 당시 대한매일의 논조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대한매일은 일제와 일본군의 강압을 일절 무시하고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진을 펴서 당시 흥분과 격분에 찬 겨레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했던 것이다.을사조약 무효화 투쟁으로 시작된 대한매일의 반일운동과 극일논조는 1910년 문을 닫을 때까지 숱한 압박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은채 더해만 갔던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논조/시종일관된 ‘배일’/황성신문 정간 등 주저없이 보도/‘이날에 또 목놓아…’ 명논설문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부터 각종 기사를 통해 조약 무효화투쟁에 나선 대한매일은 애국지사들의 순국 사실과 진전상황 등을 끊임없이 실어 항일의 선봉에 나섰다. 특히 을사조약의 체결과정에 있어서 일제의 억압과 진행과정 보도에 있어선 당시 다른 언론보도에 비해 훨씬 빠른 것이었다.황성신문의 정간과 사장 구금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다룬 11월27일자 ‘황성의무’(皇城義務)와 같은날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이란 표제로 발행한 호외,그리고 다음날 28일 게재한 논설 ‘시일에 우(又)방성대곡’(이날에 또 다시 목놓아 크게 우노라)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대표적인 글들이다. 을사보호조약과 관련해 황성신문과 논조를 같이했던 대한매일은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비롯된 황성신문의 정간과 張志淵 구속에 눈감지 않았다.‘황성의무’는 대한매일과 함께 진보적 대표신문이었던 황성신문의 논조를 극구 칭찬한 글로 눈길을 끈다. ‘시일에 우 방성대곡’은 “한일신조약을 체결한 날에 한국경성내외의 일반 신사인민이 모두 방성대곡하였고 민조 두 충신이 순국한 날에남녀노유가 일제 곡하여 친척과 같이 슬퍼하였고 오호라 대한동포여 금일 슬픈 지경 진실로 가련하고 애석하오…”라고 적고 있다.
  • 을사조약 전야 항일 구심체(다시 태어난 ‘대한매일’:5)

    ◎日 야욕에 ‘항거필봉’ 민족울분 대변/“일인 내정간섭 한국 독립은 어디 있느냐”/고종위협 이토 히로부미에 연일 직격탄/일진회만행 등 대서특필 배일정신 고취 1905년 11월은 한민족에게 잔인한 달이었다.그 달 17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돼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됨으로써 외교권,넓게는 실질적인 국권을 일제에게 빼앗겼다. 이를 앞두고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책임지고 한국에 가 조약을 맺어 장차 한국을 일본에 편입토록 하겠다”고 국민에게 공언했다.이땅에서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을 공공연히 지지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집회를 열어 민심을 들끓게 했다. 따라서 1905년 11월 들어 17일자까지(조약체결 사실은 18일에야 알려졌다) 대한매일신보의 지면은 이토와 일진회에 대한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아울러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만행,곳곳의 의병활동,백성의 피폐한 생활상에 관한 보도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토는 11월9일 특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들어왔다.이날 대한매일은 2면에 단신 두 토막으로 짧게 보도한다.‘이토 후작이 8일 오후 부산항에 도착하니 경부선 통과 지역의 군수들은 경계에 나와 영접하라는 내부(내무부)의 지시’와,‘경청(경찰청)에서 이토의 입경 때 기병대 5명을 동원해 선도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토가 10일 고종황제를 알현해 1차 위협을 가한 사실이 전해지자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선다. 다음날 1면 톱으로 실은 ‘이등후(=이토 후작)’라는 논설에서 대한매일은 “한국의 내정은 일본인이 지휘하고 외무는 동경(도쿄)에서 관할하니 한국의 독립은 어디 있느냐”고 공박했다.이와 함께 대한 13도(道) 유생 대표 金東弼 등이 이토에게 보내는 장서(長書)를 3면에 싣는다. 이토에 대한 공격은 ▲유생 대표들이 보낸 장서에 대해 이토의 해명을 촉구하는 논설(14일자 1면 톱) ▲어린 학생(幼學·유학)인 盧瑛鉉의 상소문(15일자 2면) ▲이토의 무리한 조약체결 요구를 비판한 논설(17일자 1면 톱)로 이어진다. 이같은 대한매일의 붓끝이 어찌나 날카로웠던지 이토는 훗날 “한국에서 신문이 가진 권력은 비상한 것이라내 말 백마디보다 신문의 글 한줄이 한인을 감동시키는 힘이 더욱 크다”고 술회한다.덧붙여 “그 중에도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제반 악정(惡政)을 반대하여 선동함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탄한다. 일진회에 대한 공세도 뒤지지 않았다.일진회는,尹始炳의 유신회(維新會)와 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가 결합해 그 전해 8월20일 출범한 대표적인 친일단체이다.일진회는 “한일 양국의 관계를 옛체제로 회복하려는 것은 거의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라고 책망함이니…순전히 친구나라(일본)가 지도하는 대로 문명에 나아가고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가하다”는 내용의 일진회 선언서를 11월13일 발표한다. 그러자 대한매일은 일진회를 규탄하는 민족의지를 전하는 데도 앞장섰다.이 가운데 17일자 2면의 한 기사는 당시 일진회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일진회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저께 각 소학교 학도 300여명이 모여 그 대표를 일진회에 보내 소위 선언서의 취지를 물었다.일진회측은 대표학생들을 일일이 협실(夾室=좁은 방)로 유인,때리고 협박했다.지사인(指使人=배후인물)을 불러내라며 억지로 진술서를 받았다…”는 내용이다.이 기사에 대한매일의 입장이 덧붙지는 않았지만 국민의 공분을 대변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11월 초 대한매일의 배일(排日)논조는 여느때처럼 활활 타올랐다.그러나 조약이 강제 체결됐음이 알려진 18일부터 대한매일은 민족지의 대표로서 더욱 강력하게 대일전선에 앞장선다. ◎대한매일신보 문체 특징/이야기·사설체로 일제·친일파 조롱/부패한 사회지도층 질타/‘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백미 대한매일은 일제나 친일파를 풍자·조롱하는 사설체(辭說體)·이야기체의 기사를 자주 실었다. 그 많은 사설·이야기체 기사 가운데 대표작의 하나가,1905년 11월17일부터 12월13일까지 20회 연재한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이다. 한글로만 쓴 이 이야기체 기사는 “일전에 어떠한 소경 하나가 막대를 뚜덕거리고 어느 망건가게 앞으로 지나가는데/그곳에서 망건 일하는 앉은뱅이가 그 소경을 불러 가로되 ‘여보게 그동안 어찌하여 오래 만나지 못하였나’/소경이 대답하기를 ‘자연 그렇게 되었네마는 그동안 술이나 잘 먹었나’/”로 시작된다. 소경과 앉은뱅이는 이어 술도 제대로 못먹을 정도로 곤궁해진 세월을 한탄한다. 그들은 “신화(새로 발행한 돈) 한푼 얻어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요,구화(옛 돈)조차 구경할 수 없으니 어느 겨를에 술을 먹을 수 있으며 먹은들 취할 수 있겠는가”고 주고받는다. 그들의 푸념에는 당연히 시대상황에 대한 불만·우려가 담겨 있다.망건 만드는 앉은뱅이가 수입이 준 까닭은 “머리 깎는 사람 많아서(단발령)제가끔 망건을 팔아먹으려 들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잘 차려 입은 채 뒷짐이나 지고 재상 집으로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양반 또는 벼슬아치)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궁금하다”며 그들을 협잡배로 몰아붙인다.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은 그 시대 민중의 정서와 사고를 대변한다.세상살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나라는 일제에게 넘어갈 판인데,부패한 사회 지도층은 제멋에 취해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른다.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도 가슴 뜨끔해지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 기생 송설이와 이용교(秘錄 南柯夢:28)

    ◎텅빈 국고 채우려 황실선 매관매작/탐관오리 들끓어/당시 전국 군수·도지사 3분의 2가 돈으로 벼슬/‘개혁’ 빌미 과거제 폐지 실업자도 날로 늘기만/이름난 한 ‘백수’ 이용교 돈 많은 과부기생에 접근/돈 꾸러미 슬쩍 던져준뒤 일부러 애간장 태우는데…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해가 1897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의 일이었다.왕국이 제국이 됐으니 이름으로 본다면,발전이다.마치 국민소득 1만달러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같은 기분이었으나 속된 말로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국고는 텅 비어 마치 IMF사태와 같았다. 도무지 세원(稅源)이 없어 황실에서는 벼슬을 팔아 국고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다.이른바 매관매작(賣官賣爵)이란 악습이 생겨난 것이다.어떤 뜻에서 이 악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하겠다. 무술년(戊戌年 1898년)과 기해년(己亥年 1899년) 사이에 국가재정이 아주 어려워 매관매작으로 날을 지샜다.그때 전국의 수령(守令=군수) 방백(方伯=도지사)중 3분의 2가 벼슬을 돈으로 산 관리들이었다.그래서 경향(京鄕)의 돈있는 재산가들은 거의 벼슬자리를 사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무턱대고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요령이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헛돈만 쓰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매관매작이 대한제국 초년에 심했던 것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갑자기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린 때문이기도 했다.아무 후속조처도 없이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리자 요즘처럼 실직자가 늘어나고 사정으로 자리가 많이 비었으나 탐관오리만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이런 때는 머리는 좋을 지 모르지만 자질은 형편없는 사람이 요직을 차지하게 마련이다.여기 기생 송설(松雪)이와 기둥서방 이용교(李容敎)의 이야기를 들어보면,구한말 탐관오리의 실상을 역력히 들여다볼 수 있다. 하루는 박상우(朴相雨)가 와서 기생 송설(松雪)이는 “영감님의 고향사람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그렇습니다.그러나 본시 송설이는 전북 고부(古阜) 여자였는데,아홉 살때 그 어미를 따라 우리 고향(김천)으로 온 여자입니다.너무 가난해 남의집 셋방살이를 하며 품팔이와 절구질로 어렵게 살았고 심지어 어미가 딸 송설이를 관기(官妓)로 팔았습니다.그때 송설의 나이 열여덟이었으니 뭇 사내가 탐을 냈을 것이 아닙니까.아전 백가(白家)놈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송설이를 하루밤을 데리고 자보더니 그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지 공금을 유용하면서까지 송설이를 속량(粟良=관기에서 해방해줌)해주었습니다” 송설이 이렇게 해서 관기 신세를 면하게 되었고,그 뒤 김천시장에서 술집을 차려 이름을 고부댁이라 했다고 하며 배문옥(裵文玉)이라는 그곳 재산가의 첩이 돼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송설이는 김천시장에서 술파는 영업을 하다가 백모라는 아전 놈과 헤어지고 배문옥이라는 자의 첩이 되어 수천금의 돈을 벌었는데,배문옥과도 재산문제로 다투다가 헤어지고 말았지요.그러나 불과 10년 사이 부동산이 1만여금에 이르러 김천에서는 그녀를 탐내는 사내가 많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엉뚱하게 이용교(李容敎)라는 상주(尙州)사람이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용교는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한때 오위장(五衛將)으로 날렸으나 개혁바람에 직을 잃고 실업자가 되었다.이곳저곳 배회하다 김천에 당도했는데,돈많은 과부 송설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작전을 개시했다.돈 좋아하는 여자는 돈으로 유혹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형님에게서 300냥을 꾸었다.그리고 그 돈을 송설이에게 맡겼다. 정랑(正郞=六曹의 正五品) 이홍교(李弘敎)는 이용교의 친형이었다. 이홍교 역시 개혁에 밀려난 빈털털이라 서울에서 놀고 먹는 무업자(無業者=실업자) 신세였다.그러나 다행히 전판서 김선근(金善根)과 친하게 지냈다.김선근은 구정권때 송경유수(松京留守,개성시장)로 부임해 떼돈을 벌었다.그가 이홍교에게 묻기를 “자네 고향 경북 상주에는 땅값이 싸지 않겠나”고 했다. 이홍교는 “경기지방보다야 싸지요.매두락(斗落)에 상답(上畓)이 1백여금이고,중답(中畓)이 80금,하답(下畓)이 50금 정도밖에 안됩니다”고 하였다. 김선근이 다시 묻기를 “가령 1두락에 1백금을 주고 상답을 사면 도지(賭地=소작료)는 얼마나 받는가”하기에 대답하기를 “대두(大斗)로 열한말(斗) 가량 됩니다”고 하였다.김선근이 또 묻기를 “장마와 가뭄이 든 해에도 도지를 받을 수가 있을까” 하면서 “내가 상주에 몇천마지기 사 우리집 식량으로 삼을 터이니 자네가 거간꾼이 되어 좋은 땅을 물색해주게” 이렇게 해서 이홍교는 김선근의 부탁을 받고 김천·개녕(開寧) 등지에 땅을 사서 매년 도지를 받아 서울로 보내고 있었다.이 사실을 알고 동생 이용교가 형을 찾아갔다. “형님,급히 쓸일이 생겨 돈이 필요하니 3백금만 꾸어주시오.곧 갚으리다” 하였다. 형은 동생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3백금을 꾸어주었다. 이용교는 이 돈을 송설이에게 보냈다.불시에 3백금을 횡재한 송설이는 이용교가 자기집을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석달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이용교는 그때 금산군수(金山=김천)인 민영집(閔泳集)과 사귀면서 군청에만 자주 드나들뿐 송설이의 집을 일부러 외면하였다. 그러기를 3개월,어느날 길에서 두사람이 만났다.송설이는 반색하며 “영감님 왜 우리집에 오시지 않습니까.오늘은 저와 함께 우리집으로 가십시다”하면서손을 잡아 끌었다.그러나 이용교는 시치미를 떼고 말하기를 “요즘 관청일이 바빠 몸을 뺄수가 없네그려.당장 지금이라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오늘은 못가겠네” 몸이 단 송설이는 이용교의 손을 잡은 채 “그렇지만 잠깐이면 됩니다.가십시다”하고 억지로 잡아 끌었다.이용교가 마지 못한척 끌리어 송설이 집에 갔는데, 송설이는 돈 한푼 없는 이용교를 상좌에 모시고 주안상을 내놓았다. 원래 김천 과하주(過夏酒)라면 전국에서도 이름이 나있는 향주(香酒)였다.거기다 해산물에 산나물이 나와 진수성찬이었다.한잔 한잔 들다 5,6배에 이르러 이용교는 크게 취했다. 그러나 이용교는 고맙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쯤에서 취하면 연극이 들통날까 두려워 벌떡 일어난 것이다.송설이는 그것도 모르고 한사코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걸려든 것이었다. 송설이는 아래 위 의복과 갓을 벗겨 옷장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 다음 저녁상을 내왔다.이용교가 눈을 들고 보니,식전방장(食前方丈=고배로 고여 놓은 음식)이었다.그러나 벌써 술에 취해 다 먹지 못하고 상을 물리치면서 이용교는 또다시 집에 간다고 일어섰다.그러나 송설이는 이용교의 의관을 내주지 않고 한사코 만류했다.이용교는 세부득해 유숙하는 척 했다. 이용교앞에 다시 과하주가 나오고 그는 어느 덧 취하여 골아 떨어졌다. 이것이 무슨 세상인가.드디어 안아다가 요 위에 누인 뒤 솜이불을 덮더니 송설이 알몸이 돼 이불속으로 들어왔다.누가 남자만 여자를 좋아한다 했던가.여자도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이용교는 술에 취하여 몽롱한 가운데 정신이 없다가 점점 깨어보니 곱고 따스한 여자의 살이 닿지 않는가. 이용교는 송설인줄 알면서도 시침을 떼고 “이 집이 뉘 집이며 오늘밤이 무슨 밤인가” 하면서 일어나 앉으려 하였다. 송설이가 말하기를 “영감님께서는 무산양대(巫山陽坮=운우의 정)를 모르십니까.아침에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돼 조석으로 양대로 내려간다는 구절을 모르십니까.비록 연꽃과 같은 젊은 기생 보다야 못합니다마는…” 하면서 다음 말을 잊지 못하였다.
  • ‘高宗 지원’이 통설/창간비용 어디서…

    ◎독일 여인 손택통해 가끔 내탕금 내려보내/궁내부 기사 심우택 “배설에 5,000원” 증언 대한매일의 역사에서 가장 베일에 싸인 부분이,배설이 창간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가 하는 점이다.배설 자신은 자기자본만으로 신문사를 차렸다고 주장한 반면 학계에는 고종이 지원했으리라는 추정이 통설처럼 돼 있다.또 일부에서는 러시아가 자금을 댔으리라는 의문도 제기한다. 먼저 배설에게 그만한 자금력이 있었는지를 살펴본다.‘배설공의 약전’은 ‘십오세된 소년으로… 일본에 이르니… 참는 마음과 검소한 도(道)로 부친의 업을 도와 거부의 집을 이루니… 자기 수중에도 육칠만환의 자본이 있었더라’고 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 교수(한국외대)에 따르면 배설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그는 전재산을 투자해 1901년 고베에서 깔개의 일종인 러그 생산공장을 차렸으나 일본인 조합의 반발로 문을 닫았다.따라서 그에게 신문 창간에 필요한 넉넉한 자금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종이대한매일을 지원한 사실은 법정증언 등 여러 형태로 기록에 남아 있다.고종은 궁중을 출입하던 독일여인 孫澤(Sontag)을 통해 민족지에 가끔 내탕금을 보냈다.손탁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진 뒤로는 궁내부 기사 沈雨澤 등을 통로로 이용했다.심우택은 1907년 통감부의 신문을 받으면서 ‘그해 4월 2,000원,6월에는 3,000원을 배설에게 전해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렇다고 창간 당시에도 고종이 적극 지원했다는 증거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자금설’은 대한매일이 처음부터 강하게 배일(排日)논조를 보이자 일본이 경쟁국인 러시아를 의심해서 주장한 것일뿐 근거는 별로 없다. 배설은 적은 자본으로 남의 인쇄시설을 빌려 창간했다가 8개월 만에 휴간하게 된다.다섯달 뒤 복간할 때는 고종의 지원금을 정기적으로 받아 운영한다.배설이 초기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문을 계속 발행한 것은 한국인들의 열광적 지지가 뒷받침했기 때문이라고 정진석 교수는 분석했다.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新구국운동 중심돼라/鄭晋錫 한국外大 교수·언론사(특별기고)

    ◎민족紙 ‘대한매일’ 재탄생에 부쳐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던 한말 구국의 필봉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던 민족언론의 본산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영국인 사장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과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모였던 이 신문은 민족진영의 마지막 보루였다.일본 헌병사령부는 러일전쟁 후 민족언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으나 대한매일에는 검열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비통한 소식을 들은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검열을 받지 않고 황성신문에 게재한 다음에 밤새 통음(痛飮)하며 목놓아 울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고 신문은 정간당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대한매일은 바로 문제가 된 황성신문의 논설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진상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헤이그에 갔던 이준 열사가 이국 땅에서 한을 품고 분사한 소식과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고종의 비극,구한국 군대의 해산 등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했던 신문이 대한매일이었다.용기 있는 기사,피끓는 논설,시간을 다투어 발행한 호외 등을 보고 국민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직필정론’의 표본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한매일이었다.통감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대한매일의 직필정론이 의병들을 더욱 격동케 한 것은 사실이었다.오죽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의 기사 한줄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겠는가.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던 것도 대한매일이었다.전국의 성금이 대한매일로 쏟아져 들어왔다.나라의 빚을 갚자는 뜨거운 정성을 담아 유생과 상류 지도층에서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탁했다. 대한매일은 국한문판,한글판,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3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일이었다.일본은 대한매일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지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공보비서이자 영어신문 편집자인 즈모토(頭本元貞)를 불러다가 서울프레스를 직접 발행해 보았으나 대한매일을 당할 재간은 없었다.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협박하고 회유하면서 신문의 배포를 방해하는 수법도 써 보았다.그러나 국민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발행되는 신문의 붓을 꺾을 수는 없었다.수년간에 걸친 일본의 끈질긴 요구와 공작으로 마침내 배설은 3주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상해까지 가서 복역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통감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신문의 편집과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였다.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일제의 강점 후에는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과 대한매일에 근무했던 애국지사들을 또다시 투옥하는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빛나는 전통 계승을 대한매일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태풍권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만회할 수 없었다.나라가 망하니 민족언론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최대의 민족지였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한일합방 후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대한매일은 다시 살아났다.새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여! 민족언론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위기에 처한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라.신 구국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라.
  • 고종의 강제 퇴위(秘錄 南柯夢:26)

    ◎“천리 거역땐 변고”… 이완용 잇단 傳位협박/이토 사주업고 매국노들 음모 미리 눈치챈 정환덕 황제께 비밀리에 봉서/일본군,함녕전 포위하고 기관총까지 설치 위협/사면초가 고종 마침내 조칙/‘섭정’으로 일격당한 일제 강제 양위식으로 퇴위시켜 그러나 이토 미간에도 풍진이… 이토 히로부미는 역시 교활한 여우였다.‘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그는 차제에 숙원사업으로 남아있던 고종의 양위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1907년 7월3일 먼저 고종황제에게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였으니 차라리 당당하게 선전포고 하시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고 위협하고 3일뒤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헤이그 밀사는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행위이니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 선전(宣戰)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협박했다.그리고나서 “당신 책임하에 고종을 양위시키시요”라고 명령했다.정환덕은 이 음모를 미리 알고 고종에게 은밀히 알려 드렸다. 하루는 강창희씨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근간에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증응 임선준 이재선 등이 한적한 곳에 모여서 비밀리에 의논하는 것을 엿들었더니 바로 전위변혁(傳位變革=황제를 바꾸는 일)음모였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극히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그러니 대감이 먼저 황제께 아뢰어 이 일을 미리 아시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가 조석지간에 망하게 되었습니다.황제에게도 참화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나 이를 어떻게 하실지 걱정만 됩니다”고 하였다.그렇지만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 마당에 이것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돼 드디어 글을 써 봉함하고 서상궁으로 하여금 비밀리에 상감께 드리도록 했다. 주상께서는 봉서를 보신 뒤 긴 한숨을 내쉬며 서상궁을 불러 은밀히 하교 하시기를 “이 일을 어찌 조처하면 되겠는가.정환덕에게 속히 대답하라고 일러라”하시었다. 이에 나는 상서하기를 선위(禪位)하시는 문제는 주상폐하의 확고한 용단으로 결정하실 일이며 또 이 문제는 폐하의 집안일이신지라 소신이 간여할 일이 아닙니다.다만 금년 정미(丁未)년은 폐하의 역수(歷數,즉 운수)가 끝나는 해이온데 만일에 이를 거역하신다면 성상의 수명에 불리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위하신다면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우니 이런 난감한 일은 폐하께서 직접 조처하실 일이지 신이 감히 입을 열 처지가 못됩니다.참으로 황공하여 다시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선전포고란 헛소리요,공갈이었다.고종이 이 말에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이완용과 송병준이 무엄하게도 대궐의 문턱을 넘어 들어와서 “양위하셔야 합니다”고 아뢰자 호통을 치며 이를 물리쳤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 대신들은 함녕전의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서 전위(傳位)문제를 주달하였다.“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이미 44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동궁 전하(융희를 일컬음)의 성년(聖年)도 벌써 40이 가까웠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상폐하께서는 동궁전하께 선위하심이 천리(天理)를 따르고 중의(衆議)를 저바리지 않으시는 것으로 압니다.감히 말씀드립니다”고 하였다.이에 황제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경들은 모두 여러대에 걸쳐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받은 신자(臣子)들이다.만일 전위의 의논이 있었다면 상소를 올려도 되고 간쟁(諫爭)을 하여도 가하거늘 어찌 무두무미(無頭無尾:밑도 끝도 없이)졸지에 여러사람이 궁궐에 들어와 전위를 강권하는가.이게 무슨 도리인가.비록 경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전위문제는 짐이 먼저 알아서 할 일이다.그러나 아직 짐의 정신과 기력이 쇠하지 않았고 동궁의 나이 40이 가깝다고는 하나 몸이 약하고 견식이 아직 미흡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결행하지 못한 것이다.물러가 짐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가하다.절대로 강제로 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셨다.이에 이완용 등은 감히 다시 권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며칠 뒤 저들은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함녕전 대청에 들어와서 엎드려 말씀드리기를 “폐하께서 끝내 천리를 거역하시면 밖에서 부터 혹시 불칙한 변이 있을지 모릅니다”하였다. 이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밖에서부터 불칙한 변이 있다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하셨다.여러 사람이 소리내 주달하기를 “폐하의 운명이 이미 다 되고 하늘의 운수도 동궁에게 돌아갔으니 전하께서는 속히 전위하시어 천지신명에 따르고 옥체를 보존하는 것이 가하실 것으로 아옵니다.또 세계 열강들의 공론도 속히 전위하시는 것이 좋다고 하오니 폐하께서 빨리 용단을 내리시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고 하였다. 그들은 ‘세계공론’이라는 있지도 않은 허튼 말을 하고 있었다.이토는 이때 일본정부로부터 “저 놈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을 받고 있다고 공언하였다.다시말해 고종의 목을 베어 가져가겠다는 폭언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토는 일본군을 동원,덕수궁 대한문을 밀고 들어가서 함녕전을 포위한 뒤 기관 총 4문을 설치하고 고종황제를 위협했다.또 남산에도 포대를 설치,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문자 그대로 전쟁상태였다.이같은 상태에서 고종황제는 마침내 조칙을 내리니 바로 1907년 7월19일 오전 3시였다. 짐이 대통을 이은 뒤 생민은 도탄에 빠지고 사직은 위태로워 망할지 모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환란과 재난이 없는 해가 없었던 것은 치안유지에 실패한 탓이었으며 짐이 부덕한 탓으로 그 화가 2천만 국민들에게 미쳤다.지금 뉘우친들 무엇하겠는가.세부득하여 동궁에게 전위한다.천지신명과 종묘사직에 성심으로 이를 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조칙은 양위조칙이 아니었다.나라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섭정(攝政)조칙이었다.놀란 것은 이토였다.또 한번 고종황제에게 얻어 맞은 것이다.그는 황급히 본국으로 전보를 쳐 일왕이 고종의 양위를 축하한다는 전보를 치게했고 이튿날 오후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거행하였다.그뒤 고종과 순종은 덕수궁과 창덕궁으로 격리돼 떨어져 살게 되었다. 대체로 태상황(고종)께서 신황제(순종)와 식탁을 같이 하고 침실을 함께 하신지 34년이다.그런데 하루 아침에 서로 떨어져 사시게 되었으니 부자간의 정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토의 하수인으로 공을 세운 이완용은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인사행정을 자행하였으니 그 여독은 오늘에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다. 신황제가 즉위한 뒤 개각을 단행했으나사실은 모두 저들이 멋대로 조각한 것이었다.총리대신에 이완용,내부대신에 송병준,탁지부대신에 고영희,군부대신에 이병무,궁내부대신에 이재선,외무대신에 조중응 그밖의 경무사(警務使)와 13도 장관,360주의 군수들까지 모두가 저들의 친족들과 인아(사돈),그리고 사돈의 사돈까지 줄줄이 차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고종 황제에게 이겼다고는 볼 수 없다.정환덕이 이토의 관상을 보았는데 그의 양미간에 풍진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몇해전 이토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했을 때 잠시 돈덕전(敦德殿)에서 보았는데 겉으로는 영웅같이 보였으나 가슴속에 끝없는 흉계를 갖고 있었고 양미간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진(風塵)이 드러나 있었다.
  • 박영효의 귀거래(秘錄 南柯夢:25)

    ◎고종 “日本있는 박영효 불러들여라”/갑오경장으로 쫓겨났다가 하루 아침에 ‘구국재상’ 귀국/장안 환영물결 가시기도전에 며칠만에 日로 줄행랑/3년뒤엔 친일파되어…/‘헤이그’에 허찔린 이토 분통속에 잠 못이루다 이완용 내각 음모세우고/대책 고심하던 황제는 “꿩대신 닭격… 그래도 매국노보다 역적이 낫겠다” 헤이그 특사사건이 터지자 서울 남산아래 있던 통감부에서 야단이 났다.을사오조약을 늑약(勒約)하고 스스로 통감자리에 앉아 청주잔을 기울이던 이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여간첩 배정자(裵貞子)와 양아버지라 하면서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하던 이토는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 대책을 구상하는데 급급하였다. 고종황제에게 또다시 급소를 찔린 것이니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고종은 본시 을사오조약을 무효로 봤기 때문에 외교권은 아직 황제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을사오조약을 강제체결한 이토로서는 헤이그사건 하나로 자신의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가는 판이었다.명치유신의 원로로서 후배에게 무안할 뿐 아니라 일왕 명치에게는 더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역습의 호기로 이용하기로 했다.이토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민 것이다.일단계 조치가 박제순(朴齊純) 내각을 해산하고 말 잘듣는,이완용(李完用)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하는 일이었다.박제순보다 이완용이 훨씬 더 적극적인 매국노였기 때문에 그를 시켜 고종의 양위를 강박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음모였다. 그러나 고종 황제 역시 호락호락 넘어갈 분이 아니었다.이토의 음모를 예상하고 이것을 미연에 막을 인물이 누구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금능위 박영효의 이름이 떠올랐다.박영효(朴泳孝)는 철종의 부마(사위)였으나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심취,1884년 갑신정변,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했던 친일 개화당의 거두였다. 그는 갑신정변후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한 뒤 12년동안 돌아오지 못한 유랑객이었다.그러나 1907년 5월 어느날 박영효의 부하 신철희(申哲熙)가 정환덕에게 접근,복권운동을 벌였다.요즈음 같으면 각종 정치범이 미국으로 도주하지만 그때는일본으로 도주하여 기회를 노렸다.그런 인물이 일본에는 우굴우굴했다.박영효 역시 그런 기회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신철희는 문경사람이다.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때 아문주사(衙門主事)로 있다가 박영효의 덕분에 문경군수로 임명받았던 사람이다.그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이제 우리 한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으나 각부 대신들은 작록만 탐내고 자리를 지키는데만 연연합니다.이럴 때 일본에 망명해있는 금능위(錦陵尉)박영효와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바라건대 대감께서 황상께 아뢰 그를 소환해 귀국토록 하시고 내각을 다시 조직해 국가증흥을 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고 했다.이에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황상께 아뢰니 “금능위에게 빨리 전보를 쳐 귀국토록 하라”는 분부가 계셨다 오죽했으면 고종황제가 박영효같은 인물에게 매달리게 되었을까.재위 44년만에 아무도 믿을 놈이 없게 됐기 때문이다.충신은 죽고 측근에 친일 매국노만 득실거리니 박영효는 꿩 대신 닭격이었다. 황상께서 직접 전화를 거시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듯이 났는데 박영효에게서 온 전화였다.부르심을 받은 박영효는 급히 행장을 정돈한 뒤 윤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부두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그를 환영했는데 이튿날 아침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서울역 대합실에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안부를 물은 뒤 박영효를 앞뒤에서 가려주듯 동행하여 회퇴루(回退樓)에 들어갔다.이때가 밤12시였다.날이 밝기를 기다려 조반을 든 뒤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승후방(承候房)에서 대령하였다 박영효는 과거에 두차례나 역모를 꾸민 인물이다.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해 갑신오역(甲申五逆)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망명하였고 10년 뒤 돌아와서 다시 갑오경장(1894년)에 가담,역모에 몰려 두번째로 일본에 망명했다.그후 12년만인 1907년에 귀국하였으니 감개무량하였을 것이다.부산에 도착하자 그는 땅에 엎드려 고종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고종으로서는 비록 박영효가 과거에 역적이라 하더라도 이완용같은 매국노와 다르다는 사실을 믿고 그를 궁내부 대신으로 맞아들였으니 황실을 보호하는데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따라서 고종황제와 박영효는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상감부자분께서 아침 수라진지를 드시고 난 뒤 박영효를 부르니 오전 11시경이었다.문안인사가 끝난 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해를 해외에서 풍상을 겪었으니 고생이 많았을 터인데 어떻게 감내 하였소”라고 물으셨다.이에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은총이 융성하시어 이와같이 다시 해를 우러러보게 되오니 참으로 황송하여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릅니다”고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근년이래로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데 우선 경이 내각을 조직해 정치가 잘되고 백성이 화평하게 되면 나라의 위세가 만회될 것이니 이것이 일본의 ‘유신정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하시었다.박영효가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황상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음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는 특별히 비취옥술잔(翡翠玉圈) 남색전포(藍色戰袍) 도홍띠(桃紅帶) 오사모(烏紗帽) 분홍조복(粉紅朝服)등을 각각 한벌씩 하사해 입게 하시므로 그 경황이 찬란하였다 역적 박영효가 하루아침에 구국의 재상으로 돌변한 것도 그렇거니와 장안 사람들이 그가 대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지화자를 부른 것도 괴이한 일이었다. 박영효가 마침내 황제에게 사은숙배하고 물러 나와 장안 대로상을 걸어가는데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갈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모두들 말하기를 “오늘에서야 한관(漢官=옛 관료)의 위의(威儀)가 되살아났다”고 격찬하였다.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산두박첨지(山頭朴僉知)’라는 희극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늦어도 한참 늦었다.그런데도 1907년 6월30일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박영효 환영대회가 열렸다.장소는 북서(北署) 농상소(農桑所)였는데 왕년의 개화당 동지들이 부부동반하여 모여들었다.환영회장 유성준,위원 정운복이 축사를 낭독하고 연회에 들어가려 할때 돌연 총성이 울렸다. 알고 보니 정재홍(鄭在洪)이라는 분이 권총자살을 시도한 것인데,원래 이토가 모임에 나타나면 그 권총으로 사살하려 했던 것이다.박영효가 이날 환영회에 병을 핑계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토도 나타날 리가 없었다.정재홍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때 혼미한 가운데 유언하기를 “나는 평생 품었던 우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그러나 대감(박영효)은 더욱 분발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국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그는 또 유서를 남기고 노래를 지었다.“살아서 욕되니 죽어서 영화를 보자”(生辱死榮)는 제목의 노래였다.그러나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를 막지 못하고 궁내부 대신이 된지 며칠만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고 3년 뒤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한국근대사에는 이렇게 지조없는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지금도 그 후배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며칠을 지나지 않아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하면서 박영효는 제주도 유람길에 올랐으나 실은 일본으로 망명하는 것이었다.그러니 개각(改閣) 따위의 얘기는 풀이 우거진 울타리가에 버려두고 도망을 갈 것이다.옛말에 “운이 가면 영웅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運去英雄不自由)는 말이 있으니 개탄한들 무얼 하겠는가.
  • 음악극 ‘천명’ 국립극장 25돌 기념공연

    ◎우리가락에 실은 녹두장군 생애/동학혁명 전개과정 전봉준 인간적 모습에 초점/무거운 주제 음악으로 이해도와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띄고 있다.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단계에서 철학과 종교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국립중앙극장이 장충동 개관 25주년을 기념해 특별공연으로 마련중인 음악극 ‘천명(天命)’은 역사적 무게가 느껴지는,후자에 속하는 공연이다.동학혁명을 주도한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애를 토속적인 우리 가락에 실어 소개할 이번 작품은 요즘 유행하는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시간때우기용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의미있는 무대다. 김용옥 원작에,박범훈 작곡,손진책 연출로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지난 94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작품을 이번에 다시 손질해 무대에 올린다.작품의 소재는 물론이고 판소리 등 우리 음악적 요소가 진하게 배어있는 무대로 출연인물만도 국립극단과 창극단,무용단,합창단,국악관현악단 등 국립극장 전속단체가 총출연하는 대규모 공연으로 300여명에 이른다. 반봉건,반외세의 기치아래 구질서를 타파하고 밀려드는 외세에 맞서 근대 사회를 이룩하려는 사회변혁운동으로,우리 현대사의 원류가 되는 동학혁명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이를 주도한 녹두장군의 삶이란 다소 버겁고 무거운 주제를 음악에 실어 좀더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꾸몄다. 전봉준을 주제로 하되 동혁,복례란 평범한 농민부부를 내세워 당시 서민들에게 전봉준과 동학사상이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설득력있게 그려낸다.전봉준은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왕기석이,해월 최시형은 김종엽,동혁부부는 주호종·안숙선이 나서고 원로 연극배우 장민호 백성희도 고종과 촌로로 무대에 오른다. 연출가 손진책은 “그동안 전봉준을 다룬 공연물은 많았지만 일부분을 부각시키는데 그쳤다”면서 이번 작품은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면서도 전봉준 개인의 영웅담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또 역사적인 사실 전달과 함께 음악적 완성도로 더 큰 감동을 안겨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봉준의 압송장면으로 시작되는 ‘천명’은 농민군의 봉기와 청·일군의 가세,농민군의 제2차 봉기로 이어져 일본군의 우세한 신무기에 밀려 궤멸당하고 마는 공주성 우금치 전투장면에서 하이라이트를 이룬다.그리고 전봉준의 처형장면으로 막을 내린다.1895년 그의 나이 42세였다. 100여년전 전봉준과 농민군이 보여준 역사적 의미는 기록으로만 끝나지 않고 경제적 위기를 맞아 허둥거리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으로 다가설 것이다.10월10∼13일 국립극장 대극장.평일 오후7시30분,토·일 오후 4시.(02)274­1151
  • 헤이그 특사 파견(秘錄 南柯夢:24)

    ◎“이준 열사 피뿌리며 救國자결” 소문/4,000년 역사­500년 조선 당당히 알리지만 열강들은 쳐다보기만/약소국 울분 누르며 ‘오냐 이한목숨 죽어…’/일제,施政改善 핑계로 덕수궁 관리들 모두 쫓아내고/고종은 ‘행여 國運 도움될까’ 누각동 移居 준비하는데… 고종은 을사오조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국왕이 날인하지도 수결(手決)도 하지 않은 조약을 어찌 유효라고 할 수 있는가.더욱이 저들이 국새를 훔쳐 찍었으니 절대 국가간 조약이라 할 수 없었다.그것은 협박이요 강압에 의한 국권 탈취였다.그래서 고종의 분노는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재위 43년 동안에 외우내환의 대다수가 일제침략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황상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짐이 보위에 오른지 40여년이지만 본시 박덕한 사람이라서 왕위에 올랐으나 한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10년만에 병자왜란(1876년 강화조약)이 있었고 그 뒤 6년만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역대 성조(聖朝)에 없었던 일이다. 그후 2년만에 일본 유학생들이 갑신정변(1844)을 일으켜 몰래 창덕궁에 들어와 충신과 양민을 살해해 한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그 뿐인가.1892년 임진년과 이듬해 계사(癸巳)년에는 동학당 무리들이 또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조선 전국이 공포에 쌓여 바람소리 학울음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뒤 갑오년(1894)에는 갑신년에 망명했던 개화당들이 외국인을 데리고 와서 귀국한 뒤 무수한 변란을 일으켰다.이어 을미년(1895)에는 왜적이 중궁(中宮=명성황후)을 시해하였다.병신년(1896)에는 의병이 일어나 민심을 요동시켰으니 무슨 이런 세월이 있었겠는가.그 뒤 무술년(1898)에 독립협회가 난리를 일으키고 갑진(1904)년에는 러일전쟁,1905년 을사5조약이 성립되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7개월만인 1906년 6월 어느날 한 통의 외교문서가 고종에게 전달되었다.이것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보내온 초청장이었다.화란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데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이 얼마나반가운 소식인가. 니콜라이황제가 고종황제의 뜻을 알아서 보낸 것이었을까.고종은 즉시 극비리에 외교사절을 임명하였다.이상설(李相卨)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조직해 위임장을 써 이준에게 전달했다. 어느날 밤 고종황제는 이준에게 직접 돈2만원을 하사하시었다.물론 덕수궁 함녕전 동반침(東半寢)에서 있었던 일이다.이준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한뒤 물러나 곧바로 인천항으로 향하였다.인천에서 화륜선을 탄 이준은 주야로 달려서 목적지인 해아(海牙=헤이그)에 도착하였다.해아에서는 각국 대표들이 엄숙하게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준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의관과 문화는 우리와 달랐고 그 위의(威儀)는 산과 바다와 같았으니 마치 신왕(神王) 신제(神帝)가 노는 것 같아서 이것이 하늘인가 땅인가 했다.모두가 후한 봉급을 받고 고관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은빛 훈장을 달고 어깨와 팔뚝에는 금줄로 누볐다.또 얼굴에는 금테안경을 쓰고 한결같이 남만격설(야만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을 하니마치 까마귀떼가 모인 것과 같았다. 이런 곳에 멀리 조선의 일개 백면서생이 참가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도 아니요,받아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이준의 사람됨이 8척이나 되는 키에 위엄이 당당하여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그래서 각국 대표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중략).이때 이준이 4천년 역사와 조선왕조 5백년의 내력을 한가지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진술하였다.그러나 가부간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모사는 사람이 하고 성사는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는 것인가. 본래 서양사람들은 성질이 느리고 의심해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 평생 하는 짓거리가 바위아래 노불(老佛)같고 구멍속의 긴 뱀과도 같으니 무슨 의리로 남의 나라를 구해 주겠는가.이에 이준은 한번 죽어 국가에 보답하는 것(一死報國)이 낫다고 생각,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찔러 각국의 대표들의 의관에 뜨거운 피를 뿌리고 죽었다.이날 해가 빛을 잃고 푸른 하늘이 캄캄했다. 서양사람들은 비록 의리를 알지 못하였으나 입에서 입으로 이 소식이 전해져 이준의 충렬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위대하고 장하도다.이상은 내가 이준과 가까운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이준열사가 헤이그에서 울분끝에 순국한 것은 1907년 7월14일의 일이었다.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우유부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준열사의 죽음으로 온 국민이 항일독립의지을 굳게 다졌다. 한편 일제는 남산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앉아 시정개선(施政改善)이란 명분을 걸고 덕수궁의 고종에게 수발을 들었던 모든 궁중 관리들을 밖으로 쫓아냈다.정환덕도 쫓겨나 고종과는 서신으로 통신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사령부가 명령하기를 덕수궁안에 기거하는 모든 시종들은 궁밖으로 나가라고 하여 나도 대궐을 물러나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서상궁을 통해 극비리에 봉서(封書)를 보내셨으니 나는 3일이 멀다고 봉서를 받아 보았다. 폐하께서 정환덕에게 분부하시기를 “지난 10년동안 궁 안의 대소사를 너와 더불어 상의해왔는데 조물주가 시기하여 너를 만나 보지 못하게 하는 구나.저들이 차마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니 우린들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서상궁으로 하여금 통신하게 할 것이니 경은 시골로 내려가지 말고 서울에서 대기토록 하라”고 하시었다. 정환덕이 그래서 서대문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국인 왕대유(王大有)가 찾아와서 고종의 이거(移居)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닌가. 청국인 왕대유는 본시 풍수지리에 밝기로 유명하였다.하루는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고종황제께서 지금 어거(御居)하고 계신 덕수궁 함녕전 터를 보면 북악산이 조금 멀어 정기가 미치지 못하고 남산은 너무 가까이 압박하고 있으니 이런 형상으로 인하여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정년(丁年 1907)에 수(數)가 다하고 경년(庚年 1910)에 국토를 잃게 되고 무년(戊年 1918)에 식록(食祿)이 없어질 것입니다.그러니 지금 당장 경복궁으로 폐하의 어거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그렇지 못하면 화변(禍變)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술년 7월 이화(李花)가 떨어진다느니 방부과인구혹다화(方夫戈人口或多禾=國移라는 뜻)라는 말이 떠돌고 있어 불안한 판이라 주상에게 이 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국고가 탕진되어 창졸간에 경복궁을 수리해 이거할 수가 없다.그러니 차차 형편을 보고 시행하기로 하자”고 하시었다. 이 말에 이거를 결심하였던가.하루는 고종이 정환덕에게 은거할 집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상감께서 봉서하시었는데 꼼꼼하게 풀칠한 봉투를 뜯어보니 내용은 이러했다.“지금 시국이 막다른 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만일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도 잠시 피신할까 생각하고 있다.길성(吉星)이 비추는 곳에 몇 칸의 집을 구입해 준비하여 두라”하시었다.그래서 명을 받들어 팔문생사방(八門生死方)에 따라 누각동(樓角洞) 가장 한적한 곳에 50여칸의 집을 사서 미리 준비했다. 고종이 몰래 집을 지금의 적선동 근처 누상동에 은신처를 구해두었다는 사실은 필자도 금시초문이다.물론 이 50칸 집이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통감부가 자리잡았던 남산이 일제 침략을 의미하였다는 사실,그리고 북한산이 침략을 막아주는 큰 기둥이었던 사실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 9월16일자 ‘南柯夢’23회 글 앞부분에 “1905년 1월17일 을사오조약”이라 한 것은 “1905년 11월17일 을사오조약”의 오기(誤記)로 바로 잡습니다.
  • 을사조약 國恥(秘錄 南柯夢:23)

    ◎열사 잇단 자결 애태운 고종 “살아서 나를 돕는 것이 충성”/“乙巳年 망국” 예언 적중/日 남산에 대포설치 위협/고종,끝내 조약날인 거부/맨 먼저 민영환 ‘자결순국’ 조병세·송병선 등 뒤따라/의병들 방방곡곡서 궐기 그들이 있었기에 광복이… 1905년 1월17일 덕수궁에서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일본군이 남산에 대포를 설치해놓고 위협하는 가운데 체결된 이 조약에 고종은 끝내 국새찍기를 거절했다. 따라서 이 조약은 지금도 원천적으로 무효인 셈이다.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찍이 나는 광무 6년 임인년(任寅年 1902)에 말씀 올리기를 광무 9년 을사년(乙巳年 1905) 11월 갑자일이 주역(周易)으로 따져 건괘(乾卦)의 초구(初九) 효(爻)가 발동하는 날이라 반드시 한시대가 끝난다고 예언했는데 염려했던대로 망국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정의 수구파 원로대신들은 모두 두문사객(杜門謝客)하였고 시정의 상민(商民)도 또한 철시해 가게문을 닫았다. 을사오조약을 강요한 원흉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이 자는 스스로 한국의통감(統監)이 돼 고종을 농간했는데 뻔뻔하고 교활한 언행은 지금도 한국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때 이토가 돈덕전(敦德殿)에 와서 상감께 아뢰기를 “동양 3국이 연합해 동맹국가가 되어야 서양의 돌연한 기습을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구구하게 설명했으며 또한 말하기를 “한일 두 나라가 더욱 사이좋게 지내 소의 두뿔이 적을 막듯 형세를 이루어야 합니다. 시기하시거나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토는 또 고종황제에게 “일본은 이미 영국과 동맹을 맺어 서로 가까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서양의 다른 나라들이 일본을 얕잡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차제에 폐하께서는 한번 일본을 유람하시기 바랍니다. 관광할 것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상감께서는 “나 또한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가히 선진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이 아름답고 화려하다고 듣고 있어 한번 가보기를 소원한지 오랬습니다. 그러나 귀국의 명치황제가 유신한지 40년이 됐으나 아직 한번도 서양을 유람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는 “옳은 말씀입니다” 하면서 대한제국 각료들에게 “광무황제는 총명하시고 영특하신데 좌우에서 보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총명을 가리고 있습니다. 손바닥도 한 쪽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지금도 일본의 정치지도자,특히 이토의 후예들인 자민당그룹은 공공연히 아시아의 공생 운운하며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데 모름지기 우리는 여기에 속아서는 않될 것이다. 고종황제가 속지 않고 일본관광을 거절한 것을 보면 그리 호락호락 이토에게 속을 사람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있다. 동양삼국 평화 운운한 이토는 바로 그가 죽음을 당한 뒤 우리 안중근의사에게 진정한 의미의 동양삼국 평화론이 무엇인지 저승에서 듣게 된다. 아무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수많은 우국충신들이 목숨을 끓었다. 맨 먼저 민충정공이 순국하였는데 그의 선혈이 대나무로 되살아났다. 전 의정대신 민영환(閔泳煥)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을 보고 자기 목숨을 끊었으니 5백년 조국의 종사가 왜놈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단도로 자신의 몸을 찔러 죽었는데 피가 마루틈으로 흘러 들어가 한 그루의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일본인과 서양인들이 문상차 들러보고 살펴보아도 과연 자생한 대나무이지 사람이 조작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마다 차탄(嗟歎)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민영환의 처는 재취한 분인데 나이 30이 못된 여인이었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을 따라 자결했다. 이때 또한 조병세(趙秉世)가 독약을 먹고 죽었으며 송병선도 따랐다. 병정 하사(下士) 김봉학(金鳳學),용인의 전참판 모씨도 따라 죽었다. 용인의 전 참판 모씨란 홍영식의 형인 홍만식(洪萬植)이었다. 동생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나라에 큰 죄를 지은 것을 자책하여 늘 미사신(未死臣)이라 자처하던 홍만식이 끝내 자결한 것이다. 송병선에 대해서는 정환덕이 직접 입대를 주선한 일이 있어 자초지종을 따로 소상하게 쓰고 있다. 송산장(宋山丈:山林=송병선)이 경기도 가평에서 상경하였는데 그의 문인 정석채(鄭奭采)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송산장이 상경해 황제를 알현하고 싶어 하시는데 어떤 절차로 입대(入對)할 수 있을까요?” 하고 상의하였다. 그래서 즉시 입궐하여 상감께 말씀드렸더니 상감께서는 “이같이 창황한 때 절차를 따질 여유가 있겠는가. 그러니 사례(私禮)로 들어와보는 것도 가하다”고 하시었다. 이에 송병선이 입궐하여 상감을 뵈었으나 퇴궐한 뒤 가만히 생각하니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있는 이 때에 차라리 한번 죽어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문인 제자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한 뒤 자결하였다. 선생의 뜻은 바다같이 넓고 산과 같이 높다 하겠다. 상감 부자께서 이 비보를 들으시고 가슴 아파하며 감탄하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심상훈의 경우는 좀 달랐다. 자결 직전 고종의 부르심을 받고 마음을 고쳐 먹었기 때문이다. 이때 전판서 심상훈(沈相熏)도 역시 칼을 빼 목을 찌르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감의 부르심을 받게 돼 입궐했다.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어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살아서 국가에 보답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셔서 죽기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심상훈은 이듬해 을사오적 암살사건에 연루돼 경무청에 구금됐다. 살아서 애국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고 충신들이 목숨을 끊으니 고종으로서는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은 정환덕에게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가 함녕전뒤 섬돌복도인 북쪽 반침(半寢) 위에 시립(侍立)하고 있었는데 상감께서는 근심을 잊으시기 위하여 자수(自手)로 난로의 재를 닦아내고 계셨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시고 말씀하기를 “네가 늘 을사년 11월 갑자일이 어떠하다 하더니 말대로 되었구나. 운명은 모면하기 어려운 것인가. 민영환이 절의로 죽은 뒤에 원로대신들까지 차례로 따라 죽으니 마음이 괴롭구나”라고 하시었다. 이에 엎드려 아뢰기를 “이런 때를 당해 한 사람도 절사(節死)하는 사람이 없다면 도리어 상감께서 수치스러운 일이신데 어찌하여 괴롭다고 하십니까”라고 위로말씀을 드렸다.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이야 그렇다하겠으나 나의 심신이 편안하지 않고 심정을 정돈하기가 어렵구나. 속담에도 ‘충신은 나라가 망할 때 많이 나오고 공신은 나라가 흥할 때 많이 나온다’(忠臣多出其國亡 功臣多出其國興)고 했는데,어찌하여 충신만 많이 나오는가. 이것도 운명인가” 하시었다. 엎드려 말씀드리기를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충신이 되기는 쉬우나 공신이 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로 말하면 살아도 국가에 유익하지 않고 죽어서도 공로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죽어 한번이라도 보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고 하였다. 을사조약은 사실상의 망국이었다. 그래서 많은 순국열사가 목숨을 끊었다. 고종이 이들 충신에게 감사하였으나 그보다 더 감사해야 할 신하는 의병들이었다. 무기를 들고 일제에 항거했던 의병이야말로 바로 공신(功臣)이었고 이들이 있었기에 8·15광복과 건국이 있었던 것이다.
  • 잊혀진 황제의 ‘印鑑’/전각장 민홍규씨 대한제국국새 복원

    ◎일제에 넘어갔다 맥아더 통해 환수/6·24때 또 분실… 54년 3과만 되찾아/망실 조선조 20과 연재 추가제작 옥새전각장 민홍규씨(43)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복원 제작한 구한말 대한제국의 옥새(玉璽) 5과를 최근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했다. 1897년 고종이 황제위에 오른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제고지보’(制誥之寶),그리고 2개의 ‘칙명지보’와 ‘내각지인’(內閣之印), ‘내각총리대신장’(內閣總理大臣章) 등 모두 8과의 옥새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 옥새는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면서 함께 빼앗아갔는데 해방후 맥아더원수를 통해 반환받았다. 당시 총무처는 49년 1월13일 서울에서 되찾은 이 옥새를 구한말의 조약문서들과 함께 특별전시,일반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6.25전란중 다시 잃어버렸다가 54년 6월 ‘대원수보’ ‘제고지보’ ‘칙명지보’등 3과만 다시 찾았을 뿐 나머지는 지금까지 행방을 모르고 있다. 이번에 민씨가 복원한 옥새는 ‘대한국새’ ‘황제지보’ ‘내각지인’ ‘내각총리대신장’ ‘칙명지보’등이다. 조선의 ‘어보의궤’인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를 기본으로 해 전통옥새 제작방법에 따른 것이다. 민씨는 현재 경기도 이천 설성면 장천4리에 전통옥새 제작방법에 따라 손수 대왕가마를 설치하고 작업중인데 이번에 복원한 옥새외에도 금년말까지 망실된 조선시대의 옥새 20과를 더 제작,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한편 민씨는 지난해 11월 경기도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옥새제작용 대왕가마를 손수 설치하고 옥새를 만들 때 행하는 제의식을 시연한 바 있다.
  • 간신 가득한 궁궐(秘錄 南柯夢:22)

    ◎대신들 아첨만… 큰 인물 없어 끌탕/러 함대 일에 패하자 관리들 월담도주/전 비서승 추천으로 거창유생 천거/대신들 “공연한 짓 벌인다” 정에 십자포화/난국타개 기대 걸었으나 일반론만 아뢰 1894년 일제는 우리나라에 동학란이 일어난 것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는데 그때 일거에 한국을 집어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그뒤 일제는 호시탐탐 침략 야욕을 불태워 오더니 청에 이은 제2의 가상적인 러시아와 담판을 벌였다. 담판에서 일제는 먼저 한반도 분단안을 제시하였다.일제가 제시한 분단안은 38도선 안이었고 러시아가 제시한 안은 39도선안이었으니 남의 나라 국토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제국주의국가들끼리 주인 몰래 어떻게 토막낼까 흥정을 했던 셈이다. 1902년 마침내 일제는 영국과 동맹을 맺어 영국의 지원을 받아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대한제국 황실(덕수궁)에서는 그런 음모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발발에 대비도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거기에다 궁안에는 나라 생각은 티끌만치도 하지 않는 간신배들로 가득차있었다.1904년 2월6일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궁안에 있던 대신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어떤 대신은 덕수궁의 수채구멍을 통해 도망쳤다. 갑진년(1904년)에 일본과 러시아가 인천항에서 포격전을 벌여 대포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탄환이 비오듯 하니 러시아함대가 패하고 말았다.이때 궁안은 물론 장안의 사람이 모두 도망치고 구중궁궐이 텅빈 집이 되었다.의정대신 모씨는 몰래 궁중의 수채구멍으로 빠져 나갔고 그밖의 대소 입직관리(立直官吏)들은 궁성의 담을 넘어 도망쳐 나갔다.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인가.돌이켜 보면 1806년 병인양요 때 그러했고 1876년 강화도사건 때 그러했으니 1904년이라 해서 고위 관료들이 용감해졌을리 없다.심지어 1950년 6·25전쟁때도 고위관리들이 대통령을 모시고 서울시민을 버려둔채 남으로 도망쳤는데 지금이라고 해서 나라를 살리는데 앞장설 관리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1904년 대한제국의 권부였던 덕수궁에는 어떠한 관리들이 고종을 보필하고 있었을까.생각해보면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 임금을 속이고 자리를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를 당해 나(정환덕)는 엎드려 아뢰기를 “궁내참서(宮內參書) 이인순(李仁淳)은 평소 말하기를 우선일휘(羽扇一揮:부채를 한번 흔드는 모양)면 바다위에 뜬 군함도 산산조각 낸다고 했아옵고 영선사장(營繕司長) 최병주(崔炳柱)도 겨드랑에 몇 사람을 끼고 광화문을 뛰어 넘는다고 호언장담했아온즉 이같이 위급한 때에 한번 불러보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다.이에 폐하께서 두 사람을 부르셨는데 가서 보니 벌써 도망가고 없었다. 러일전쟁은 을사조약의 치욕을 가져오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가 문자 그대로 백척간두에 서있던 때다.이러한 때야말로 큰 인물이 필요했다.그러나 어디 큰 인물이 그리 흔했던가.모두가 사기꾼 뿐이었으니 임금님께 ‘이 사람이면 됩니다’ 하고 자신있게 천거할 인물이 없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이었다.하루는 영남의 유학자 면우(傘宇) 곽종석(郭鍾錫 1849∼1919)을 추천하는 사람이 찾아 왔다. 전 비서원 비서승(秘書院 秘書丞)강봉조가 찾아와 말하기를 “지금 나라일이 날로 어려워져 가는데 내각대신이란 것들은 임금님께 아첨만 하고 간사스럽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그들의 뱃속에 경륜이 있다면 오로지 재물을 탐해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 뿐이라 한 사람도 임금님께 충성하고 나라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습니다.이래서야 어찌 나라가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영감도 수수방관,황상의 눈치만 살피지 마시고 어진 인재를 추천해 은총에 보답하기 바랍니다. 원래 ‘교목세록의 신하’(喬木世綠之臣:대대로 卿宰相을 지낸 집안)와 ‘고량진미의 자손’(膏粱眞味之子孫:돈많은 사람의 자손)은 오로지 영화누리기에 급급하고 시국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재물을 탐하고 나라를 해치려 드는 탐재해국(貪財害國)하는 놈들이라서 세상을 구제할 인물이 날 수없습니다.그러니 천상 바위틈에 숨어지내는 재야인사들을 발탁해서 난국을 타개할 수 밖에 없는데 경상도 거창땅에 사는 곽종성(郭鍾錫)이란 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정환덕은 대답하기를 “오늘같은 난세에는 경천위지의 재(經天緯地之才:천지를 꾸려가는 인재)라 하더라도 역부족이라 하겠는데 시골에서 문학만 공부하는 일개 서생이 난국을 감당할수 있겠습니까.이 노인(곽재우)이 지난날 갑오경장(1894년)때 쓴 포고문을 읽어 보았는데 한낫 문구(文句:즉 글귀)일 뿐 나라에 유익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봉조가 굳이 천거하기를 요구하는지라 정환덕이 이를 못이겨 고종에게 곽종석을 천거했다. 황상께서 “누구인가” 물으시니 “곽종석입니다”고 하였다.그러자 “일본을 반대하는 사람인데 부르면 나와 일해 주겠는가” 하고 다시 물으시니 “대한의 신민으로 어찌 폐하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고 아뢰었다. 이렇게 해서 곽종석이 영남에서 올라오게 됐는데 이때 고종이 영호남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는 원칙을 새워 호남의 두 인물 기우만(奇宇萬)과 전우(田愚)를 천거하게 했다. “곽종석 한사람을 불러 등용할 것이 아니라 삼망(三望:세사람을 천거하여 하나를 고르는 것)이 옳다 하겠으니 호남에서 인망이 두터운 전우와 기우만을 적어 올려라” 하시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입을 모아 “어느 놈이 또 이러한 인물을 끌어내었는가” 하며 다들 욕하였다.심지어 황태자 순종은 정환덕에게 “너는 다시 곽종석에 대해 말하지 말라.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너를 원망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조심하고 조심하라”고 하셨다.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뒤라서 곽종석은 어명을 받들어 상경하게 되었다. 곽종석이 황공하여 서둘러 상경하였다.곽종석은 덕수궁 함녕전 동반침(東半寢)에 입대했는데 예가 끝난 뒤 황상께서 물으시기를 “경은 임진란때 의병장이었던 곽재우(郭再祐)의 몇대 손이 되는가”고 하시니 “11대 방조(傍祖)입니다”라고 대답했다.이에 황상께서 “오랫동안 경의 이름을 듣고 있으나 이제야 비로소 만나게 되니 다행이다” 하시면서 “지금 이 나라의 형세가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하여 승평의 날이 오겠는가”고 물으셨다. 이에 곽종석이 다시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신의 허명(虛名)을 잘못 들으시고 이와같이 운하(雲霞:궁궐)에 오게 하셨으니 황공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신이 오랫동안 초야에 묻혀온 몸이라 아는 것이 없사오니 어찌 나라일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까.그러나 감히 말씀드린다면 지금 나라 운명을 바야흐로 치세에서 난세로 들어서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시고 간신은 멀리 하시며(親賢遠奸) 마음을 밝게 가지시고 욕심을 삼가하시며(淸心寡慾) 위를 덜고 아랫것들에게는 이익을 더해 주시고(損上益下) 애민절용(愛民節用)하시면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엎드려 바라옵건데 지방에서는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들의 횡포를 막으시고 착한 수령방백(守令方伯)을 임명하시고 중앙에서는 내각대신으로 하여금 각기의 소임을 다하게 하시고 폐하께서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반론으로는 난국을 타개하기가 어려웠다.그러니 곽종석 기우만 전우는 물론 이밖의 어떤 거유(巨儒)가 나온다해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구하기 어려웠다 할 것이다.도국병민,나라가 좀 먹히고 국민들이 병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高宗의 부부싸움(秘錄 南柯夢:21)

    ◎“황태자 폐위” 궁중流言 나돌아/고종 “맏아들 폐위는 나라 망치는 일” 진노/“누구의 획책인가…” 嚴妃 추궁하자 졸도/30분뒤 깨어나니 노여움 풀고 부부화해/“가화만사성 경의 말들어…” 번갈아 하사품 고종과 엄비의 가정불화는 마침내 엄비의 기절로 끝나게 되었으니 궁중 사건으로는 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런 긴급 사태를 당하여 정환덕은 고종에게 “안심하십시요.30분 뒤에는 깨어나십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과연 깨어날수 있을까.이 예언이 맞지 않으면 당장 해임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30분이 지나 밤 8시가 되었다. 엄비께서 갑자기 몸을 옆으로 둘리시더니 얼굴을 벽에 대고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숨을 몰아 쉬셨다.기사회생한 것이다.상궁과 내인이 급히 뛰어 대청에 나와 고종에게 엄비가 깨어난 것을 아뢰었다.황상께서는 급히 달려가서 엄비가 깨어나신 것을 확인하셨다.너무 기뻐 좌우를 돌아보시더니 “정시종(鄭侍從=정환덕)의 추산법(追算法)은 과연 천하 제일이다”하시며 칭찬하시기를 마지 않으셨다. 어떻게 엄비의회생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그건 정환덕이 엄비의 졸도가 약으로 치료될 일이 아니라 화병으로 일시 까무라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엄비가 졸도하기 전 정환덕이 엄비에게 불려가 고종과 독대 내용을 질문받은 일이 있었다.그 뒤 소문이 고종의 귀에 들어가 다시 고종에게 불려갔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터이다. 황상께서는 경위총관(警衛總官) 이근순(李根淳), 궁내협판(宮內協判) 이봉래(李鳳來),탁지대신(度支大臣) 이용익(李容翊),평양참령(平壤參領) 길영수(吉永洙),호위대참장(護衛隊參長) 이서구(李書九) 등 요인들이 즐비해 있는 가운데 대청에 좌정하시어 나(정환덕)에게 물으시기를 “지금 엄비가 너를 불러 무슨 일을 묻던가”고 하시었다.이에 아뢰기를 “엄비께서 단지 나라 일을 걱정하시며 왕실의 운명에 대해 점치라고 하셨을 뿐 그 밖에는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고 했다.황상께서는 “알겠다”고 하시면서 자리를 뜨셨다. 그때 나는 몸을 일으켜 “한 말씀만 더 드릴 일이 있습니다”고 아뢰었다.“무슨일인가” 하시기에 “속담에도 있듯이 집안이 화평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家和萬事成)고 하였습니다.군신간에도 화목하여야 나라가 잘되는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부디 매사 평화와 관용과 원만으로 해결하시고 상벌을 분명히 하시며 허실(虛實)을 분명하게 하신다면 궁중은 물론 장안도 아무탈 없이 승평(昇平)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만일 그렇지 못하면 위험과 난리가 박두하게 될 것입니다. 본시 권좌에 오르면 그 순간부터 정신이 몽롱해져서 정사를 그르치게 마련이다.1904년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해다.그런데 국왕이 부부싸움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으니 그것은 마치 클린턴이 성추문 사건에만 신경을 쓰다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그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은 입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던 말인데 ‘남가몽’에 보면 성주목사를 심선택(沈善澤)이 이같은 말을 하고 있다.심선택은 북간도 개척을 진언한 인물이다. 편안할 때 위태함을 잊지말아야 하고 즐거울 때 우환을 잊지말아야 한다(安不忘危樂不忘憂)는 것은 고금의진리입니다.지금 나라 형편을 보건데 겉으로는 태평한 듯 하지만 속으로는 지극히 험난하여 문자 그대로 누란의 위기요,‘눈섭이 타는 위급’(燒眉之急)이라 할 것입니다.그러나 모두가 이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만신창이가 된 몸에 도화분을 발라 상처를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근본을 다스려야 낫지 말초를 다스려서야 나을 수있는 병이 아닙니다.지금이야말로 국가를 치료할 양약이 필요할 때입니다. 병든 나라를 치료하기 위한 양약이라고 했는데 이름이야 ‘개혁’이든 ‘제2의 건국’이든 상관이 없다.지금이야말로 그런 약이 필요한 때 아닌가. 아무튼 고종과 엄비의 부부싸움은 엄비의 졸도로 일단락됐는데 사실은 배후에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정환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내시가 한사람 있었는데 이름이 봉시(奉侍:내시) 강석호(姜錫浩)였다.이 사람이 불시에 정환덕을 찾아오더니 엄청난 궁중비밀을 털어놓았다.정환덕도 몰랐던 일이기에 깜짝놀랐다. 봉시 강석호가 내게 찾아와 “영감께서는경선궁 사건을 실지로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하고 물었다.이에 답하기를 “사실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안개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고 했다.강석호는 말하기를 “영감이나 저나 천안(天顔: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는 몸으로서 다같이 나라와 고락을 함께 하고 있는 처지가 아닙니까” 하며 목소리를 낮추면서 “근일에 궁중유언(宮中流言)이 돌고 있는데 민비 소생인 황태자(순종)를 폐해 대군(大君)으로 강등하고 엄비의 소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모시고 저 한다는 말이 돌고 있는데 황상폐하께서 이 소리를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셔 말씀하시기를 ‘예부터 맏아들을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운다는 것은 국가를 망치는 근본이라 했다.어느 반역분자가 이런 일을 획책하고 있는가’하시면서 엄비를 나무라셨습니다.엄비가 황공무지하여 어쩔줄 몰라 하시다가 까무라치게 된 것입니다.영감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셨습니까. 강석호는 부부싸움의 진상은 대개 그러하니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해 앞으로 우리 두사람은 대소사를 가릴 것없이서로 협력하여 나가자”고 제의해 왔다.정환덕이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라고 동의했는데 얼마 뒤 고종이 정환덕을 불러 치하하였다. 황상께서는 “짐이 경의 말에 따라서 궁중의 유언비어를 말끔히 씻어 냈더니 화기(和氣)가 되살아났다.이 어찌 가화만사성 아니겠느냐”하셨다.엎드려 아뢰기를 “이는 이 나라의 훙복이옵니다.옛말에 ‘착한 마음을 한번 품으면 길신(吉神)이 따르고 악한 마음에 흉귀(凶鬼)가 따른다’고 하였사오니 이제 이 나라는 다시 회생할 것이옵니다”고 아뢰었다. 이때 고종은 손수 금일봉(금화 200환)을 하사하며 정환덕을 치하하였다.그런데 다음날 경선궁에서 엄비가 정환덕에게 “약간 정표를 준비했으니 받아 가라”는 하명이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 물건을 그냥 받아갔다가는 큰일날 것 같았다. 그래서 10여일을 그냥 맡겨두고서 찾아가지 않았더니 엄비께서 “저번에 약간의 정표한 물건은 왜 받아가지 않느냐”고 물으셨다.대답하기를 “너무 황송해 받아가지 못했습니다”고 하였다.그리고 나서 황상께 고하기를 “경선궁에서 약간의 정표로 하사하신 물건이 있었습니다만 감히 받을 수가 없어 이처럼 말씀드립니다”고 아뢰었다. 황상께서는 “무슨 물건이든가”고 물으시기에 “엄비의 말씀이 ‘막중 존엄한 자리를 가까히 모시는 신하로서 의복이 남루해 혹시 정결하지 못하여 냄새가 날까 두려워 다소의 의복을 하사한다’하셨습니다만 아직 펴보지 못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이에 고종이 “받는 것이 옳다”고 허락하셔 마침내 선물을 받아 펴보았다. 펴보니 구름 무늬 비단으로 만든 크고 작은 예복 각 한 벌씩과 물소뿔띠와 학을 그린 흉배자 각 한 벌,수단(繡緞) 두필,왜비단 두필,순인갑사(淳仁甲紗) 한필,가는 모시 세필,분명주 두필,목양목 두필,백미 10섬,지화(紙貨) 300환.씨를 뺀 화솜 50근.안동포 두 필 그 밖에 여러 물건이 들어 있었다. 고종은 200환밖에 하사하지 않았는데 엄비는 이처럼 지화 300환 이외에도 엄청난 물품을 하사하였으니 그때도 지금처럼 경제권이 여편 쪽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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