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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 27년’ 벽 누가 깰까?

    ‘CEO 27년’은 철옹성인가? 강진구(姜晋求·75) 전 삼성전기 회장의 최고경영자(CEO) 최장수 재임 기록이 좀체 깨지지 않고 있다.연초만 해도이수빈(李洙彬·63) 삼성생명 회장이 강 전 회장의 27년기록을 갱신할 것으로 유력시 됐다.하지만 그도 지난 1일25년간의 CEO 활동에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강 전 회장의‘벽’을 넘지 못했다. 현재 강 전 회장의 아성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는 장성원(張性元·70) 호텔롯데 사장과 고종진(高宗鎭·65) (주)두산 부회장이 꼽힌다.각각 22년,21년째 최고경영인으로 뛰고 있다. 장 사장은 80년 롯데백화점 사장에 취임,92년 이후 호텔롯데·호텔롯데제주의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고 부회장은64년 OB맥주에 들어가 건설·음료·맥주 사장을 거친 OB의맏형격이다. 이들의 뒤를 바짝 쫓는 인물은 경력 20년째의 손길승(孫吉丞·61) SK 회장과 민경훈(閔庚勳·64) 두산건설 부회장.손 회장은 선경에 입사한 지 17년 만인 82년 유공해운 사장에 올랐다.민 부회장은 82년 오리콤 대표이사를 시작으로 두산컴퓨터·두산건설·두산정보통신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20년째 이상 장수를 누리는 대기업 CEO ‘빅4’에는 두산인사가 2명,롯데·SK가 각각 1명씩 포진하고 있다. 10년 이상 20년 미만의 CEO로는 성재갑(成在甲·64) LG석유화학회장,윤종용(尹鍾龍·58) 삼성전자 부회장,임승남(林勝男·64) 롯데건설 사장,김승정(金昇政·61) SK글로벌부회장,경창호(慶昌浩·61) 두산기업 사장이 있다. 성 회장은 LG그룹 최장수 경영인.89년 석유화학 사장에 오른 뒤 13년째 경영 전반을 관장하고 있다.윤 부회장과 임사장은 12년,김 부회장과 경 사장은 각각 11년째 사령탑을 맡고 있다. 10년 미만 경력의 CEO층은 매우 두텁다.삼성에선 이학수(李鶴洙·56) 구조조정본부 사장과 함께 이형도(李亨道·59) 전기 부회장,허태학(許泰鶴·58) 에버랜드 사장,이윤우(李潤雨·56) 반도체 총괄사장이 8년째 CEO로 활약 중이다. LG에선 허동수(許東秀·59) 칼텍스 대표이사와 구자홍(具滋洪·56) 전자 부회장,권문구 전선 부회장,민수기(閔壽基·59) 건설 부회장,강말길(姜末吉·59) 유통 사장이 각각 7∼8년차의 경력을 갖고 있다. 두산에는 김대중(金大中·54) 주류총괄 사장과 이정훈(李正勳·58) 전자부문 사장,강문창(姜文昌·59) 건설 사장등이 8∼9년째 뛰고 있다. 한국경영컨설팅연구소 김종수(金鍾秀) 이사는 “CEO의 생명력은 오너의 용인술과 무관치 않다.”면서도 “최장수 CEO 기록을 누가 깰 것인지 여부는 결국 얼마나 회사수익창출에 기여하고,자기관리를 잘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박건승기자 ksp@
  • 정겨운 ‘추억 여행’ 인터넷속으로

    며칠 있으면 설날을 맞는다.어릴 때의 명절 풍경 속에는잊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그 가운데에는 장독대,곳간,처마,마루,큰 솥뚜껑 같은 것들도 있다. 요즘엔 다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의식주 세 테마로 인터넷의 추억 풍경을 들여다 본다. (편집자 주). ■아름다운 한복문화 한자리에. ▲털고무신부터 한복까지=아버지를 기다리는 밥상 위에 다소곳이 올라 있던 보자기.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한국자수박물관'(korea.insights.co.kr/korean/pojagi/)에 가보면 소박한 인정이 느껴지는 보자기를 만날 수 있다. 보자기는 여인들의 혼수 품목 중 하나로 이불을 싸는 이불보,예단이나 혼수를 싸는 혼수보,밥상을 덮는 상보 등 헤아릴수 없이 종류가 많다.허동화 관장은 “물건을 포장할 때 복도 함께 들어 간다는 믿음이 담겨져 어느 물건보다 정성이깃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주변에 이런 보자기처럼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들은 의외로 많다.털고무신이나 장화,호빵 모자 같은 것들이다.이런 것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인터넷에는 우리가 잊고 있는 과거의 옷과 장신구들을 보여주는 기행 사이트들이 많다.‘21세기 박물관'(www.museum21.org/folk-48.htm)은 과거의 복식 문화를 사이버 갤러리 안에모아 놓았다. 그 가운데 우리 옷의 대표 격인 한복은 인기를 많이 모으고있다.그러나 전통 한복부터 실용 한복까지 관심은 높아졌지만,제대로 한복을 입는다는 것이 힘들다는 의견이 끊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전통인형작가 이승옥(36) 씨의 ‘석란전통인형'(www.ahakorea.co.kr),고종건씨의 홈페이지(myhome.edunet4u.net/~hongil/)가 안성맞춤이다.이들 사이트는 설과 같은 고유명절 속의 아름다운 의복 문화를 둘러볼 수 있는 보고나 다름없다. 하지만 전통 의복과 과거의 향수를 불러 모으는 갖가지 소지품들을 온전히 감상하기도 전에 전자상거래 상품으로 치부되는 것은 아쉽다. ■불량식품 종합세트도 팔아. ▲추억의 음식 여행=학교 난롯불에 구워 먹던 ‘쫀디기',손바닥으로 비벼 하나하나 빼먹었던 ‘아폴로'.추억의 먹거리가되살아나고 있다.코 묻은 동전으로 사먹을 수 있었던 쫄쫄이,호박꿀,맛기차콘,월드컵,씨씨 등 이른바 불량식품들도 다시 돌아왔다. 불량식품 판매 사이트 ‘쫀디기몰'(www.zondigi.com)은 이들식품을 맛있게 먹는 비법(?)을 소개하고 있다.심지어 “건강 해친다고 못 먹게 해 더 감칠맛이 났다.”는 회고담도 쏟아진다.‘엔토크'(entalk.co.kr),‘언더몰'(undermall.co.kr) 등에선 아예 20∼25종의 불량식품 종합세트까지 팔고 있다. 또 학창 시절 도시락 반찬으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것들을 소개하는 곳도 나왔다.‘오키의 잊혀져 간 것들'(myhome.naver.com/okyjjang)은 지난 30년간의 도시락 변천사를 정리했다.이 사이트에는 소시지,깍두기,멸치조림,콩조림,계란 등도시락 반찬 이야기가 구수하게 배어 있다. 한 네티즌은 “아직도 도시락 반찬통 한 귀퉁이에 담겨있던소시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며 먹거리 추억 여행에나선다.이밖에 ‘1980년대'(b612kh.dive-studio.net)는 네티즌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1980년대 먹거리에 관련된 글만 모아 뒀다. 한편 고유의 먹거리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계속돼 눈길을 끈다.특히 과거의 전통식품을찾는 동호회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대표적인 경우가 ‘청국장닷컴'(chungkookjang.com).최근패스트푸드 음식과 외식 산업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어머니의 손맛을 읊는 일은 또다른 감동을 선사해준다. ■한옥의 모든것 미학으로 승화. ▲“아랫목에서 몸 녹이세요”=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매서운 계절.아랫목 이불 밑으로 언 몸을 넣으면 발 언저리엔 밥 공기 하나가 닿는다.그 따뜻한 밥그릇에 따뜻한 사랑까지 느꼈던 시골집 아랫목은 이제 보일러와 라디에이터에밀려 사라졌다. 하지만 요사이 전통적인 주거 환경을 재조명하는 이들이 늘고 있어 아랫목도 덩달아 떴다.남대문에서 전남 송광사 미륵전까지 내로라하는 전통 건축물을 보수한 목수 신영훈(67)씨의 ‘사이버 한옥문화원'(www.hanok.org)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는 전통 한옥을 3D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여 절기마다 다른 태양 방향과 각도까지 계산한 전통 처마,한국인의평균신장과 눈 높이를 가늠해서 설계한 방과 지붕 등 한옥의 모든 것을 미학으로 격상시킨다. 한편 황토집,귀틀집 등 나무와 흙과 같이 친환경적인 전통가옥은 신용만 씨의 사이트(home.hanmir.com/~wamo/)에서,전통 사찰은 ‘아즈의 홈페이지'(azcul.zotta.net)에서 만나볼수 있다. 이들 사이트에선 마당 깊은 집과 장독대 위를 배회하던 고추 잠자리,마루,옛날 부엌과 세간들,재래식 화장실 등 아련한유년의 집 풍경들을 고루고루 선사한다. 그러나 전통 가옥에 관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옥에서 거주하는 인구는 줄고 있다.서울시(hanok.seoul.go.kr)가 벌이는 한옥 지원 사업은 잘 알려지지도 않은 데다 실적도저조한 편이다. 마지막 양반 마을인 서울시 북촌의 전통 가옥은 15년전에 비하면 그 절반인 850여동만 남았다.우리가 가슴으로 느꼈던아랫목의 온기는 정녕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고향의 아랫목은 그대로인지 귀경하는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허원 전효순 유영규 kdaily.com기자 whoami@
  • [히딩크호 긴급 점검] (1)실험은 이제 그만

    한국 축구가 월드컵의 해를 맞아 첫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실망스런 플레이로 일관해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오히려 퇴보한 인상마저 풍긴 한국 축구가 월드컵 16강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게 전문가를 포함한 축구팬들의 열화 같은 주문이다.거스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고도 여전히 희망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는 대표팀의 문제점과개선방안을 시리즈를 통해 점검한다. ■이기면 “전력” 지면 “전략”. 북중미골드컵대회 기간중 현지에서 만난 외국 기자들은 “한국 축구는 도무지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말을 푸념처럼 하곤 했다.포메이션이 이리저리 바뀌는데다 대표팀에 워낙 많은 선수들이 들락거리다 보니 도무지 윤곽을 잡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또 어떤 기자는 “히딩크 축구는 극단적인 공격축구다.따라서 실점의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그러므로 수비라인에 대해 확실하고 자신감 있는 틀을 갖추는게 급선무다.”라는 말로 대표팀의 조속한 기본틀 확정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런 와중에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히딩크 감독의 현실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는 실정이다.월드컵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1년 넘게 선수와 팀전술에 대한 테스트만 반복하고 있는데 따른 우려 섞인반응들이다. 이같은 목소리는 유럽형(미국 캐나다)과 중남미형(코스타리카 멕시코)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진 팀들이 출전한 가운데 히딩크 축구의 1년을 결산해 볼 수 있었던 골드컵대회를 계기로 강도를 높여가는 추세다. 비난의 초점은 ‘그동안 과연 무엇을 이뤄놓았는가.’에 맞춰져 있다.그만큼 골드컵대회에서 보여준 히딩크 축구는 과거 토종감독 시절 드러났던 병폐를 집합적으로 보여줬다. 한국 축구가 지난 1년간 얼마나 요란스레 실험을 거듭했는지는 과거 기록을 보면 명쾌하게 드러난다. 우선 포메이션의 변화부터가 혼란스러울 정도다.히딩크 감독은 부임초 출전한 홍콩칼스버그컵대회에서 대표팀에 ‘4-4-2 토털사커’의 옷을 입혔다.4백 일자수비에 스트라이커와처진 스트라이커를 둔 투톱 공격 시스템이 요체였다.그러나뒤이은 두바이대회에서는 4-4-2(모로코전)와 3-5-2(아랍에미리트연합전)를 혼용했고 이후 다시 4-4-2를 실험하다가 지난해 말부터는 3-4-3에 의한 원톱체제를 도입했다.그러더니 골드컵에서는 전방의 포워드 3명을 역삼각형으로 돌려놓으며중앙의 한명을 게임메이커를 삼는 3-4-1-2를 주로 채택하며또한번 새로운 실험을 했다. 지난 1년간 대표팀을 드나든 선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도문제다.이는 대표팀에 발탁된 미드필더만 이천수 유상철 윤정환 박지성 최성용 고종수 안효연 이을용 현영민 이영표 서동원 박성배 서정원 최태욱 등등 20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그리고 실험은 지금도 거듭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인 조영증씨는 “기술이좋은 선수들로 팀을 짠 뒤 포지션별 전문화를 꾀하는게 필요하다.체력이 문제가 된다면 교체 멤버를 활용하거나 체력 좋은 선수들로 그들을 뒷받침하도록 하면 된다.”며 가능성이모호한 선수들로 대한 테스트를 그만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해옥기자 hop@
  • 골드컵 이모저모

    ●지난 멕시코전 때 퇴장당해 코스타리카전에서 벤치에 앉지 못한 히딩크 감독은 31일 관중석에서 워키토키로 작전지시를 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하프타임 때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지시를 내리는 한편 경기 후 기자회견에도 참석했다. ●보라 밀루티노비치 중국대표팀 감독이 한국과 코스타리카의 경기를 관전했다.혼자 본부석 3층 귀빈석에서 경기를지켜본 밀루티노비치 감독은 캠코더로 경기 장면을 촬영하며 월드컵 C조에서 맞설 코스타리카의 전력을 분석했다. 밀루티노비치 감독은 “한국은 잘 훈련돼 있고 체력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좋은 팀”이라며 “특히 아시아를 벗어나이런 대회에 출전,다양한 팀을 경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90이탈리아월드컵 때 자신이 감독을 맡아 16강진출을 이끈 코스타리카에 대해 “월드컵 예선을 1위로 통과한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논평했다. ●“대표팀 베스트11 확정을”. 코스타리카전을 지켜본 국내 전문가들은 ‘히딩크호’의거듭되는 부진에 우려를 나타내면서 ‘베스트11’의 조기확정과 조직력 보강이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프로축구 수원의 김호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기술보다힘좋고 빠른 유럽스타일 선수를 선호하다 보니 경기가 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한국은 고종수 같은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정종덕 SBS 해설위원은 “가장 이해할수 없는 부분은 훈련방식과 선수기용이다. 조직력을 보강해야 할 시점에 체력훈련에 주력한 것과 판단력·정확성이 떨어진 차두리를 스트라이커로 계속 쓰고측면에 둬야 할 이영표를 미드필더로 고집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고 평했다. 프로축구 전북의 조윤환 감독은 “베스트11을 빨리 선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풀어야할 ‘이형택 의혹’/ “”처조카외 로열패밀리 더 있다””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에 대해 31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지만 금품수수와 윗선 개입 등 보물 인양을 둘러싼 의혹을 완전히 밝히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어떤 혐의 받았나=이 전 전무의 첫째 혐의는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수용 해군참모총장 등에게 보물 인양사업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그 대가로 지분 15%를 받았다고 특검팀은 밝혔다.국익을 위해서였다는 이 전 전무의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지분을 받은 것으로 볼 때 개인적 이득이 목적이었음이 분명하다는 판단이다.이 부분에 대해 이 전 전무의 변호인측은 특검팀의 수사 범위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이의신청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두번째는 지난 97년 강원도 철원의 임야 2만 8000평을 G&G그룹 회장 이용호씨에게 팔고 위성복 조흥은행장에게 조흥캐피탈을 인수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다.이 전 전무는 98년 6500만원에 이 땅을 샀지만 문서를 위조,2억 6500만원에 산 것처럼 이용호씨를 속인 뒤 2억 8000만원에 판 것으로 밝혀졌다.이용호씨가 속아서 이 땅을 샀더라도 거래가잘 안되는 땅을 사준 만큼 알선수재 혐의가 성립되는 것으로 특검팀은 판단했다. ▲풀어야 할 의혹들=지금까지는 이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 전 전무와 청와대·국정원·해군 등 국가기관을 연결시켜준 인물로 부각돼 왔다.하지만 여전히 또다른 고위층 인사가개입됐을 것이라는 의혹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대통령의 친인척을 일컫는 이른바 ‘로열 패밀리’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이용호씨는 한창 사업 확장에나섰던 99년부터 2000년 7월 사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또다른 처조카인 이영작 한양대 석좌교수에게도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교수를 통해 사업에 도움을 받으려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이에 대해 특검팀관계자는 “필요하면 조사한다.”며 수사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씨는 모 방송사 PD 이모씨를 통해 김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에게 접근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전 전무의 금융권 로비 의혹에도 규명해야 할 부분이 있다.지난해 이용호씨가 쌍용화재 인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이 전 전무와 위 행장이 개입했는 지 밝혀야 한다.이씨가 신승환씨를 통해 쌍용화재의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의 이모 부행장을 접촉한 사실이 밝혀진 만큼 위 행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장택동기자 taecks@ ■역대 대통령 친인척비리-반복되는 '후진국 게이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이용호 게이트’에 개입된 것처럼 역대정권의 거대 의혹 사건의 배후에는 늘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있었다.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가 가장 기승을 부렸을 때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집권 시기다.1982년 이철희·장영자씨부부의 1000억원대의 어음사기 사건에는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광업진흥공사 이규광씨가 배후라는 설이 나돌았다.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씨는 명성·한보그룹과 유착됐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이규동·규광씨의 조카인 이순자 여사는 사실상 비리의 몸통으로 지목됐었다.검찰의 수사에서도 이여사가 새세대심장재단 등을통해 정치자금을 모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이 여사의 동생 창석씨는 탈세 등 혐의로 구속됐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에는 처남 김복동씨,동서 금진호씨와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인 박철언씨 등이 등장했다.김씨와 금씨는 각각 군과 경제계의 실력자였다.특히 박씨는 ‘황태자’로 불리며 실세로 군림했다.박씨는 슬롯머신 사건당시 정덕진씨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금씨는 노 대통령의정치자금 세탁을 도와준 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삼 정권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95년 김 대통령의 사촌처남 손성훈씨가 뇌물을 받은 혐의로,93년 고종사촌 매제인안경선씨가 인·허가권과 관련,업자로부터 돈을 받아 구속됐다. 이런 사례들은 권력형 비리는 아니었지만 김영삼 정권은 대통령의 아들인 현철씨가 한보그룹 사건에 연루돼 탈세 혐의로 구속돼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운현궁·남산 한옥마을서 월드컵때 전통문화 공연

    월드컵 기간동안 운현궁과 삼청각 등에서 특별 전통 문화공연이 펼쳐진다. 서울시는 월드컵기간인 오는 5월29일부터 6월30일까지 남산골한옥마을·운현궁·삼청각 등에서 전통문화프로그램을 특별공연한다고 28일 밝혔다.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는 씨름·그네 등 민속경기와 창포축제 등 전통풍습을 재연하는 서울단오축제를 열기로 했다. 또 태껸체조 및 사물놀이 시연,도자기와 봉산탈 만들기를비롯한 전통공예 체험행사 등도 마련했다. 운현궁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모습을 재현하고 가야금병창·부채춤 등 궁중무 공연을 통해 우리 궁중문화의 독창성을 선뵌다. 이동구기자
  • [김성호기자가 본 종교 만화경] 꿩 구워먹은 NYT

    지난해 7월 해인사 청동 대불(大佛) 조성계획을 둘러싸고조계종단 내 반대·지지파간 ‘치고받기’가 한창일 무렵미국 뉴욕타임즈(NYT)가 조계종을 발칵 뒤집어놓았다.‘평화로운 기념물로 인해 한국 스님들은 전쟁중’이라는 제하의 도쿄특파원 기사는 세계최대의 대불 조성계획을 상세히전하면서 한국 불교계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판국이던 조계종은 ‘거대 동상건립은종교를 위장한 축재욕의 발현’‘세력싸움을 벌이는 폭력세계의 활동에 익숙한 한국 승려들’ 운운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즉각 기사정정과 반론문 게재를 요구했다.그러나 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뉴욕타임즈는 이렇다할 반응없이 ‘꿩구워먹은 자리’다. 대불 건립의 내홍도 가라앉았고 거듭된 종단분규 수습도마무리 단계인 지금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하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NYT의 한국불교 폭력성 지적은 불교계를 겨냥한 단발의 필화사건으로 돌릴 수도있다. 그러나 종단싸움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항상심으로사암을 찾는 일반신도들의 구겨진 자존심은 무엇으로 보상할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기사내용이 부분적으로 왜곡,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하지만 거듭된 절집의 파행적인 싸움은 NYT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주목됐던 것이다.비난의 빌미를 충분히제공했음을 부인키 어렵다.더구나 불가에서 ‘승단분열’은불탑파괴, 불경소각,삼보정재절도,불법비방과 함께 5역죄에속하지 않는가. 태고종 종찰인 전남 순천 선암사에는 고려시대 천태종을창종한 대각국사 의천의 가사가 보존돼 있다.신라시대부터극한대립을 보였던 교·선종을 통합해 천태종을 세우고 승단의 화합을 일관되게 주장했던 의천이다.비구·대처 싸움의 결과로 조계종에서 분할된 태고종 사찰에 의천의 가사가전해짐은 아이러니다. 아니, 승단 분열을 경계하는 무언의법어로 보면 어떨까. 총무원장 자리를 둘러싸고 폭력사태를 빚는 등 1년이 넘도록 엎치락뒤치락하던 태고종이 마침내 화합의 결단을 내렸다.극한대립을 보였던 보수 진보 양측이 ‘종단화합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내,분규 징계를 원천무효화하고 양측의 탕평인사도 감행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원망으로써 원망을 갚으면 끝내 원망은 쉬지 않는다.인내를 행할 때 원망은 쉬나니 이럴 때 화합은 이루어진다.”는 법구경은 불가에서 자주 읽혀지는 구절이다.태고종의 대승 화합이 꿩구워먹은 자리만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을 게아니라 ‘꿩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계기가됐으면…. 김성호기자kimus@
  • 클릭 2002월드컵/ 주전경쟁 치열 미드필드

    *** 공수 만능맨을 찾아라. 한국축구대표팀의 미드필드는 가장 이합집산이 심한 포지션이다. 그만큼 주전경쟁이 치열한 자리다.문제의 핵은 마땅한 플레이 메이커가 없다는 점이다.이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동안 4-4-2 토털사커를 고집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히딩크는 게임 메이커로 고종수 이천수 유상철 윤정환 박지성 최성용에 안정환까지 두루 기용해보았으나 확실한 카드를 찾는데 실패했다.미드필드 전체로도 지난해 1월 홍콩칼스버그컵대회에서 지난해말 미국과의 평가전에 이르기까지 A매치에 투입된 선수는 20명에 가깝다. 초기에는 고종수 유상철 이영표 서동원 서정원 박지성 박성배 등이 주로 자리를 메웠고 이후 송종국 설기현 안정환 하석주 안효연 최성용 이천수 등이 계보를 잇더니 최근에는 박지성의 컴백과 함께 김남일 이을용 등이 자리를 굳혀가는 양상이다.상비군 50명 가운데 동원 가능한 미드필더자원은 모두 써보았다는 얘기다. 그러다 최근 미국전에서는 왼쪽에 이을용,오른쪽에 송종국을 배치하고 박지성과 김남일을 중앙에 종으로배치하는 색다른 대형을 선보였다.4명을 횡으로 배치한 이전과 달리 다이아몬드형으로 대형을 바꾸어 가운데 전방의 박지성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공격과 게임 메이커 역할을 맡도록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이들은 강인한 체력과 근성,조직력을 바탕으로 미드필드를 장악하면서 상대를 효과적으로 압박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월드컵 본선에 나설 미드필드 선발 4자리는 주인을 가늠하기 어렵다.그나마 왼쪽의 이을용이지난 9월 나이지리아전 이후 굳건히 자리를 지켜 선발 등용이 유력해 보인다.김남일 역시 이을용 못지 않게 붙박이로 나서며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시절 ‘좌영표-우진섭’으로 불렸을정도로 부동의 왼쪽 날개를 맡았던 이영표를 비롯,나머지2자리는 유력한 선발 후보를 단언하기 어렵다.이영표는 히딩크호 출범 초기 중앙 미드필더로 굳어지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김남일과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중이다.미국전에서 큰 활약을 한 박지성도 윤정환을 게임 메이커로 불러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잠재해 있어 선발을 장담할 수 없다. 오른쪽 자리는 미드필드 가운데서도 가장 자주 주인이 바뀌어 장기간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송종국 김태영 최성용이 번갈아 나선데다 때론 이천수 최태욱이 자리를 맡기도 했다.지금은 송종국이 새 주인으로 서서히 각광받고 있는 정도다. 박해옥기자 hop@
  • 신년 법어

    ◆태고종 안덕암 종정 “모두 어우러져 사는 자비심 있어야”. 불교 태고종 안덕암 종정은 26일 신년법어를 통해 “우리는 이제 남을 생각하고 위하는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모두가 함께 어울려 사는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운산 총무원장도 신년 메시지에서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보살정신을 발휘·구현해 사회와 대중에 누적돼온 이해관계를 원만히 조절하고 원융사상을 통해 모든 갈등과분열을 불식,화합하자”고 강조했다. ◆조계종 혜암 종정 “대립·투쟁에 헤매는자 탐욕버리길”. 조계종 혜암 종정은 26일 신년법어를 통해 “착한 사람,악한 사람,가난한 이,외로운 이 모두가 본래로 부처님이니 서로 공경하고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고 말했다.혜암 종정은 “대립과 투쟁에 헤매는 어리석은이들이여,허망한 탐욕을 허공 밖에 버리고 청정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영원히 광명세계에 살라”고 덧붙였다. 김성호기자 kimus@
  • [대한광장] ‘레임덕 현상’의 교훈

    우리 정치에 정권말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이 말에해당하는 영어는 ‘레임 덕(lame duck)’인데, 글자 그대로 ‘절름발이 오리’지만 정치적으로는 ‘낙선의원’을지칭하던 것이 의미가 확대되어 ‘정권말기’에 대한 비유법으로 애용되고 있다. 정권말기를 뒤뚱거리는 절름발이 오리에 비유한 것이니그 현상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우리 정치상황에서 정권말기라는 말이 거리낌없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정권말기라는 말의 존재 자체가 반갑다.이승만정권 시절에는 정권말기가 없었다.한국전쟁의 난리통에대통령 직선제로 전환한 이 대통령이 다시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종신대통령제를 쟁취했으니 당연한 일이다.박정희정권도 그 전철을 답습했다.3선개헌으로 비극의 씨앗을뿌린 박정권은 3선고지에 오르자마자 유신체제를 선포하고종신 대통령으로 갔다.그 이후 전개된 두 정권의 비극에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결국 이승만 정권의 말기는 4월혁명이 알려주었고,박 정권의 말기는 중앙정보부장김재규가 알려주었다.그러니 파국 없이 정기적으로 정권말기를 대면하는 지금의 상황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이상한 점도 있다.정권말기가 다른 나라들처럼 자연스럽지가 않고 매우 어수선하고 불안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정권의 권위가 급전직하의 폭포처럼 추락하고사회적 조절기제가 작동을 중단한 가운데 집단이기주의가‘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양상을 보인다.뒤뚱거리는절름발이 오리가 아니라 앉은뱅이 오리인 ‘크리플 덕(cripple duck)’에 가까운 수준이다.국민의 저항과 최루탄으로 얼룩졌던 군사독재정권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김영삼,김대중정부의 말기현상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를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을 정통성의 보완과 해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민주화 과정에서 등장한 민간민주정부는정통성과 통제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일부 구시대의권력기구에 의존하게 된다.그러니 정권 초기에 형성된 정통성은 구시대적 요소와 결합된 의제된 정통성이다.따라서정권 초기의 국민적 열망이 사라지고 집권세력의 통제력이 약화되면 구시대적 요소들이 정권과 결별하면서 의제된정통성은 해체된다.그것도 일순간에 급격하게 해체된다. 민간정권의 도덕성 실추 역시 중요하게 작용한다.한국적상황에서 정권말기 현상의 파격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김영삼 정권은 구시대 정치집단인 민정당의 모태 안에서태어나 구시대 권력기구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했다.정권초기에는 구시대 권력기구로 구시대를 타파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치개혁’이 가능했지만 정권의 힘이 약화되고 아들 문제와 측근 문제가 연이어 터지면서 통제력을 상실했다.김대중 정부는 정당간 정권교체에 성공했지만소수파 정부의 한계 때문에 취임 후 구시대적 요소들과타협했다.구세력인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70년대식 정통성 기제인 새마을운동을 수리해서 사용했다.그러나결국 자민련은 이탈했고 구시대의 기제들은 정권 보위에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두 정권이 공통적으로 실패한 것은 또한 언론과 관료문제이다.두 정권 모두 언론과 협력하고자 했으나 마지막 순간언론의집중적인 비판에 함몰했다.정부개혁의 일환으로관료집단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개혁되지 못한 관료사회를 개혁의 주체라고 말한 김대중 정부의 오류가 검찰 등 관료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관료들은 권력교체기를 틈타 다음 권력을 더듬으면서 국민 위에군림하던 구시대적 관행으로 회귀하고 있으며,복지부동하며 개혁에 추종하던 관료들이 노골적으로 개혁의 성과를폄하하면서 개혁을 부정하고 있다. 집권세력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의제된 정통성에 안주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구시대적 요소와 결별하고 자기만의 고유한 정통성 기반을 구축한 상태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오래된 것은 아름답지만 낡은 것은 구린내가 난다.새 정권의 말기가 아름답기위해서는 낡은 것과 과감하게 결별해야 한다. 정대화 상지대교수
  • 구암서원 2003년까지 복원

    조선시대 사액서원인 구암서원이 130년만에 서울시 강동구암사동 산 10에 복원된다. 강동구는 구암서원을 역사문화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해 새해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에 나서 2003년 완공할 예정이다. 구암서원의 복원은 ‘새서울 우리 한강사업’의 하나인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복원계획에 의해 진행되는 것으로 시비 등 37억3,500만원이 투입된다. 구는 3,920㎡의 터에 사당·강당·재실·내삼문·외삼문·홍살문 등을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로 건립할 계획이다. 17세기 중엽 건립된 구암서원은 고종8년(1871)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다. 최용규기자 ykchoi@
  • 로웰 ‘내 기억속의 조선‘

    118년전 미국인이 본 한국의 모습은 어땠을까? 예담이 펴낸 ‘내 기억속의 조선,조선 사람들’은 1883년 한국에 왔던 퍼시벌 로웰(1855∼1916)의 기행문을 조경철 박사(전 경희대 부총장)가 발굴,번역한 책이다.1885년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한 차례 출간됐던 것으로 예리하면서도 애정어린 관찰자의 눈으로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지리 등 각종 풍속을 담았다. 미국 보스턴 명문 로웰 가(家) 출신인 퍼시벌 로웰은 주일 외교대표를 겸해 일본에 체류하던 때인 1883년 8월 한미수교조약이 성립됨에 따라 처음으로 미국에 파견되는 조선의 수교사절단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임무를 마친일행을 다시 미국에서 일본까지 인도한 후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아 귀국하는 사절단과 함께 우리나라에 온 것이 1883년 12월이었다. ‘내 기억속의…’은 저자가 이 여행길에서 부닥친,이제막 세상에 문을 연 낯설고 신기한 조선의 인상기를 솔직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는 고종황제부터 조선인 수학자 친구까지 여러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당시 직접 찍은고종황제어진을 비롯한 조선 말기의 풍물사진은 과거 선조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또 다른 볼거리이다. 처음 대한 서울에 관해 “완벽하게 어릴적 꿈을 상기시켜 주는 동화같은 모습이었으며 조선인들의 느리고 우아한움직임은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적고 있으며 옷고름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면에서 경탄을 금치 못할 의복기술”로 표현하는 등 생활 곳곳의 묘사는 사소해보이던 것조차 특별한 가치를 띠게 만든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당시의 생활상이나 역사적 사실이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지만 당시의 제도와 생황양식을 완벽할 만큼 충실하게 전해 사료의 가치도 있다.1만2,000원. 김성호기자 kimus@
  • [김성호기자가 본 종교 만화경] 교주님, 우리 교주님…

    ‘친구’‘신라의 달밤’‘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조직폭력배(조폭) 영화들이 연속 대박이다.‘달마야 놀자’ 관객 대열엔 한국 불교 장자(長子)종단인 조계종 정대 총무원장도 동참했다.몇년 전만 해도 ‘신성한 종교 모독’ 운운에 상영 자체가 막혔을 법한데….하여튼 세상은많이 변했다. 조폭 영화를 볼 때마다 조폭들의 세계가 (일부이긴 하지만) 종교집단과 닮았다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물론 양자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는 천양지차다.그러나 적어도 외견상의 양태만 볼 때 ‘세간과 출세간의 불이(不二)’가 빈말이 아니게 다가온다. 조폭의 정점이 ‘두목’이라면 종교집단의 그것은 ‘교주’일 것이다.조폭이나 종교집단이나 리더가 흔들릴 때 추종자들은 우왕좌왕하기 마련.두목 유고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조폭의 유혈싸움이나 종교계의 대표 자리를 둘러싼내분은 이를 잘 말해준다. 대순진리회와 불교 태고종의 종무원장·총무원장을 둘러싼 분종 사태에서 불거진 폭력 충돌은 요즘 조폭영화 속장면 그대로였다.(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전해진 조계종싸움은 이제 그만 거론하자.) 절대적인 추종에서만 나올 수 있는 광적 집단 움직임을보자.조폭들의 명령 체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만행을 부른다.종말론이나 구원에의 맹신이 몰고 오는 집단가출이며 집단자살과 궤를 같이한다. 조폭과 종교집단의 집단성은 그러나 지향점에서 차이가난다.핏줄보다도 더 진한 유대를 의미한다지만 배신에 대한 시뻘건 보복이 더 강하게 어려있는 조폭들의 ‘一心’과,그림자같고 구름같은 수행의 동무인 스님들의 ‘도반’(道伴) 간의 차이랄까.한 쪽이 이권과 헤게모니 장악에 치중한다면 다른 쪽은 지고의 공동 선을 추구한다. 그런 차원에서 종교집단이 지향점을 상실할 때 일반의 단체나 모임보다 더 큰 사회적 지탄과 맞닥뜨리게 된다.특히 교주가 신뢰를 상실하거나 일탈 행동을 보일 때 그 집단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최근 신흥 종교 천존회의 교주가 불법대출과 신도헌금 횡령 혐의로 실형을 확정 선고받았다.천존회는 문화관광부로부터 한국 종교사상 유례없는 ‘종교법인 취소’라는 극약처방을 받았다. 종교가 실정법에 좌우되는 건 썩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하더라도 종교를 빙자한 사기행각은 이미 종교 차원을 떠난 것이다. 신자들과 상관 없이,천존회 교주는 스스로를 두목 쯤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교주님 교주님,우리 교주님…. 김성호기자 kimus@
  • 태고종 총무원장에 운산스님

    한국불교 태고종 중앙종회는 27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제83회 정기 중앙종회를 열어 혜초(慧草)총무원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신임 총무원장에 총무원 부원장인 운산(雲山·속명 李奎範·59) 스님을 종회의원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신임 운산 총무원장은 충남 청양 출생으로 1960년 대전대승원에서 이용봉 화상을 은사로 수계한 뒤 총무원 총무부장,법인 행정원장,사무총장,재단법인 이사장,불교사 사장,중앙종회부의장,재일본 태고종 총본산 금강사 주지겸종무원장,총무원 부원장 등 종단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김성호기자
  • 청와대내 ‘七宮’ 33년만에 공개

    청와대 경비구역 안에 있어 출입이 금지됐던 칠궁(七宮)이 33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지난 68년 1월21일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문을 닫았던 칠궁을 건물 보수 및 단청 도색 등을 거쳐 오는 24일부터 일반인 관람을 허용한다고 21일 밝혔다. 칠궁은 조선시대 임금이나 세자를 낳았지만 후궁 신분인관계로 종묘에 위패를 모시지 못한 일곱 분의 사당(廟·宮)을 한 데 모은 곳.숙종의 후궁으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최무수리)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과 역시 숙종의후궁으로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장희빈)의 대빈궁(大嬪宮) 등을 한 곳에 옮겨 육궁(六宮)으로 부르다 1929년 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엄귀비)의덕안궁(德安宮)까지 합쳐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의 시초인 영조의 육상궁 건립시 발견한 우물 ‘냉천(冷泉)’이 있는데 옆 정자 ‘냉천정’의 현판은 영조의친필이라는 설도 있다.동남쪽에는 제사를 지내던 재실도있다. 단체 관람은 24일부터 1,7월을 제외한 달의 매주 화∼토요일에 가능하나 개인 관람은 내년4월부터 시작된다.또개인 관람은 4,5,9,10월 매주 금·토요일에 한한다.문의 (02)730-5800. 이종수기자vielee@
  • 구한말 외교명소 ‘손탁호텔’ 전경 첫 공개

    구한말 독일여성 손탁(Sontag·孫鐸·1845∼1925)이 건립,‘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당시 서울 정동(貞洞) 외교가의 대표적 명소였던 손탁호텔의 화려했던 전모가 처음으로 공개됐다.그동안 손탁호텔에 대해서는 건물의 정면일부 사진 정도만 전해질 뿐 구체적인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했다.손탁호텔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지학자인 이종학(李鍾學·74) 사운연구소장이 18일 본지에 단독공개한 자료에 따르면,중구 정동 32-1번지(건립당시는 정동 29번지·현 이화여고 동문 일대)에 위치한 손탁호텔은 러시아풍의 2층 양옥건물로 부지가 1,184평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이번에 이 소장이 공개한 자료는 손탁호텔의 대형 홍보용엽서에 실린 호텔 전경사진을 비롯해 토지대장, 지적도면,그리고 건립자 손탁의 사진 등으로 모두 처음 밝혀지는 것이다.건축전문가들은 한국 근대건축사의 미비된 부분을 보충해줄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국적이 독일인 손탁은 프랑스 태생으로 구한말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따라 1885년 조선에 왔다.손탁은고종이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1896년) 전후 고종을 측근에서 모신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궁궐의 일부를 하사받아 1902년 그 자리에 서양풍의 호텔을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손탁호텔로 명명했다.1905년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직후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에게 팔았으며,손탁호텔은 1910년 한일병합 후 유럽풍으로 개조돼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1918년 이화학당에 팔려여학생 기숙사로 쓰이던 손탁호텔은 4년뒤인 1922년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완전 헐리고 말았다.새 건물(‘프라이홀’)도 지난 75년 화재로 소실됐다. 김정동(목원대·건축학) 교수는 “당시 손탁호텔은 일본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로쿠메이칸(鹿明館)과 같은 급의 격조높은 호텔로 건축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나그간 관련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서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기존 한국건축사를 보완해줄귀중한 자료”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손탁호텔은 화려한 외양에 걸맞게 전체 규모 및 내부·부대시설 또한 당시로선보기 드물게 크고 고급이었다. 우선 토지대장을 보면 손탁호텔의 부지는 이제까지 알려진 184평이 아니라 이보다 1,000평이나 많은 1,184평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또 건물 역시 본관 1개동이 아니라 모두 3개동이었으며,부속건물에는 바와 당구장 등 고급 오락시설도 딸려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배재학당,독립문 등을 시공한 것으로 알려진 심의석(沈宜錫)이 시공한 이 호텔은 2층 벽돌건물로 1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다방으로 사용되었고,2층은 왕과 귀빈들의 특별 객실로 사용되었다.객실 수는 모두 25개. 한편 손탁호텔은 건립 당시에는 ‘정동 29번지’였으나,중구청 지적과에 확인한 결과 현재는 ‘정동 32-1번지’로지번이 바뀌어 있었다. 땅주인 명의도 명치45년(1912년)에손탁에서 ‘감리교회 부인(婦人)외국선교부’로 넘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정운현기자 jwh59@. ■손탁호텔 사연과 인물들.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그리고 손탁은 어떤 내력을 가진 여인인가. 목원대김정동(건축학과) 교수는 “구한말 당시 손탁호텔은 각국 외교사절들과 국내 개화파 인사들의 사교장으로서는 물론 1900년대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대표적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시내 유일의 최고급 호텔이었던 이곳에는 외국의 명사들이 종종 투숙하기도 했다.‘톰소여의 모험’으로유명한 미국작가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들렀다가 이곳에 묵었으며,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따님인 앨리스 루스벨트 양도 숙박한 적이 있다.또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앞서 1904년 3월,1905년 11월 두 차례 방한했다가 머무르기도 했다.조선 국내 인사로는 친미 개화파들의 모임인‘정동구락부’소속 민영환·서재필·윤치호·이완용 등이수시로 이곳을 찾기도 했다. 한편 손탁호텔의 건립자인 손탁은 당시 서울(한양) 정동외교가의 ‘프리마돈나’라 할 수 있었다.4개국어에 능통했던 데다 조선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5년 프랑스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인 그녀는 1885년초대 주한러시아공사로 부임한 웨베르를 따라 한국에 처음왔는데 웨베르의 처제, 혹은 처형이라는 등 신분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린다. 당시 국내정세는 친러파가 득세하던 시절이어서 그는 황궁을 자주 드나들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고종황제 내외의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됐다.‘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당시 그는 고종황제의 수라상을 차리는 등 측근에서 모셨으며,나중에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에는 웨베르의 추천으로 궁궐에서 사용하는 서양 집기 관리업무를 맡기도 했다.이같은 신임으로 1897년 고종으로부터 현 덕수궁 맞은편의 궁궐 땅 일부를 파격적인 값에 할양받은 손탁은 1902년 구옥을 헐고 그 자리에 러시아풍의 2층 벽돌건물을 짓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손탁호텔’로 이름지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 보엘(J.Boher)에게 판 뒤 호텔 주방에서 일하던 이(李)씨 성을 가진 한국 어린이를 양자로 입양,프랑스 니스로 귀국,그곳에서 죽었다.양자로 데리고 간 한국인이씨는 후에프랑스 여인과 결혼,프랑스 이씨의 시조가 됐다. 정운현기자
  • 남산, 낙엽길 사색… 떠오르는 ‘아픈 역사’

    서울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남산은 인구 1,000만이 넘는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허파로서 시민들을 위한 천혜의 휴식처이다.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도심을 기준으로 볼 때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간명하게 이름붙여진 남산.높이 해발 268m로 산이라기 보다는 그저 정겨운고향의 뒷동산같은 산.그 남산이 지금 늦가을 단풍으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있다. 서울시민들에게 더없이 귀한 휴식공간인 남산은 한꺼풀만 벗겨보면 우리 근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남산위의 저 소나무’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으며,산중턱 곳곳도 이미 옛모습을 잃었다.구한말 이후50여년에 걸친 일제통치의 상채기 때문이다.서울 속의 ‘외딴섬’ 남산의 늦가을 낙엽길을 따라 남산의 아픈 역사를 더듬어보자. 남산 정상에 서면 서울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사람들이 남산을 찾는 이유는 대개 이 때문이다.80년대 후반에 나온 한 통계에 따르면,서울을 찾는 일본인들이 첫 방문지로 지금은 헐리고 없는 구 총독부 청사를,두번째로는 남산을 꼽았다.남산은 시내관광지로도 손색이 없지만 총독부 청사와 함께 일제통치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한때 ‘남산살리기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을만큼 남산은 지난 역사속에서 극도로 훼손돼 왔다.그 가운데서도 서북쪽 중턱이 가장 심하게 훼손됐다.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후 일제는 경복궁과 서울도심을 한 눈에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의 요소,현 리라초등학교 일대에 한국통감부 청사를 세웠으며,1910년 한일병합 후에는 이 건물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했다.서울역 역사가 준공되던 1925년 현 남산식물원 일대의 소나무숲을 깔아뭉개고 일본신(神)을 모신 ‘조선신궁’을 세웠다.이때 남산 정상에 있던 조선혼의 상징인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내쫓겼다.지금 그 터에는 항일투쟁의 상징격인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과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남산 서북쪽이 일제의 통치·종교기관이 들어서면서 황폐해졌다면 반대편,즉 장충단 일대는 일제가 공원화작업을통해 민족정기를 훼손했다고 할 수 있다.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희생당한 한국인 관리들의 충혼을 기려 고종의 지시로 건립된 ‘장충단’ 일대에 일제는 벚꽃나무를 심어왜색화(倭色化)한데 이어 인근 현 신라호텔 자리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를 지어 조선의 충혼을 짓밟았다. 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은 남산 북쪽 자락 예장동·필동 일대를 왜성대(倭城臺)로 부르며 연고권을 행사했다.이곳은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남산 성벽을 넘어와 진을 쳤던 곳이며,구한말에는 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일제당시 종로거리를 기준으로 남쪽 일대에 일본인들이 대거 밀집해 살았는데 최근까지도 필동 일대에는 왜식 민가가 즐비했었다.필동의 남산골 한옥마을은 일본군 헌병사령부가 진주했던 곳이며,인근 ‘한국의 집’은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 관저 자리다.남쪽 기슭 정도를 제외하고는 3면이 일제의 ‘상흔’으로 얼룩져 있다.휴식공간으로만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 남산.그러나 이곳에는 이같은 역사를 알려주는 표지판하나 제대로 서 있지않다. 정운현기자 jwh59@. ■남산 최적의 산책코스는. 남산의 여러 등산로는 그 자체가 훌륭한 산책로다.또 남산 남쪽 중턱을 가로지르는 순환도로도 그에 버금간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산책로라면 차량이나 인파의 혼잡함에서 벗어나 사색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과연 남산에 그런 산책로가 있을까? 장충체육관 사거리에서 국립극장쪽으로 올라오다 타워호텔 맞은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남산을 넘는 길이 나온다.이 길을 곧장 가면 남산타워를 지나 남산도서관 앞에 닿는다.인도와 차도가 분리돼 있으며,마치 깊은 산속같은 분위기여서 산책로로도 손색없다.그러나 경사가 가파른데다 빈번한 차량행렬로 조깅은 어렵다. 이 길 입구에는 오른쪽으로 포장도로 하나가 나 있다.바로 이 길을 산책·조깅코스로 강력 추천할만 하다.남산의북쪽 중간허리를 안고도는 길은 3∼4km 정도.차량통행도없는 데다 경사진 곳도 거의 없어 조깅코스로도 훌륭하다. 인근 주민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 코스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호젓한 편이다. 이 코스는 무엇보다 걷는 이를 지루하지 않게 하는 마력같은 것이 있어서 좋다.한 100여 m를 가다보면 한 굽이가돌면서 또 새로운 길이 나타나 마치 사람과 길이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서울 북쪽 도심과 남산자락을 구경해가면서 입구에서 300m 정도를 가다보면 ‘석호정궁도장’이라는 활터가 나타난다.평일에도 궁사들이 활을 쏘는 이곳은 원래는 ‘딸각발이’ 남산골 선비들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다.그즈음에서 왼쪽으로 굽은 길로 접어들면 도심을 완전히 떠난 듯한착각마저 들 정도로 깊은 산속 길이 시작된다.중간에 필동으로 내려오는 오솔길이 두어 군데 있다.
  • 러서 순국 구한말 이범진선생 묘터 확인

    구한말 외교관이자 순국지사인 이범진(李範晉·1852∼1910)선생의 묘소 위치가 최근 러시아 교포들에 의해 확인돼 그 자리에 기념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최근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측 자문위원 6명과 함께 고국을 찾은 조 바실리 이바노비치(51·모스크바 거주)고려인연합회 회장은 “최근 상트페테르부르그 시내 한 아파트단지에서 이 선생의 묘소자리를 고증을 거쳐 확인했다”며 “조만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현지에 기념표지판을 부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 선생의 묘소는 러시아 공산혁명 이후 멸실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가 지난 90년 한-러 수교 이후 한국측에서 다시 수소문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서울출신으로 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선생은‘아관파천’의 주역으로 법부대신 겸 경무사를 지냈으며 이후주미공사를 거쳐 1900년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돼 근무했다.1905년 ‘을사조약’으로 재외공사 소환요구가 있자 이에 불응,현지에서 밀사로 활동하였으며,1907년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밀사’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3년 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해 휴대한 권총으로 자결,순국했다.헤이그밀사 3인중 1인인 이위종(李瑋鍾)은 그의 아들이며,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정운현기자 jwh59@
  • 경복궁 복원계획 어떻게

    26일의 흥례문(興禮門)복원 기념낙성식과 더불어 경복궁복원사업이 새 차원으로 올라선다.흥례문 권역의 복원은 경복궁 복원의 3단계 사업으로 실행되었지만 이 권역의 복원완료는 보다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일제가 191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던 곳이고 일반 건축과 차별되는 왕궁양식을 어느 곳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90년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 및 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시작한 경복궁 복원사업은 총1,789억원을 투입하여 2009년까지 추진하는 대역사다.경복궁 복원은 단순한왕궁 복원이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 민족정기와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역사적 작업으로 받아들여져 큰 관심을 모았다. 1단계 사업은 침전 권역으로 95년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중전의 침전 교태전(交泰殿) 등 12동(794평)이 복원되었다.다음이 왕자들이 살던 동궁 권역으로 94년부터 5년 동안 자선당 등 18동(352평)과 건춘문(建春門) 등 고건물 5동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번에 낙성하는 흥례문 권역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로 96년 복권공사를 시작했다.1년 앞선 95년 11월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돼 복원의 터가 닦여진 뒤 98년 말 흥례문이 복원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남은 곳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태원전(太元殿) 권역과 광화문(光化門) 및 기타 권역으로 1,105억원이 투입된다. 경복궁 북서쪽 태원전 권역은 2003년까지 25동(469평)을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할 예정이다.이 지역에 주둔하던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은 96년 이전했다. 마지막 단계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은 2009년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광화문을 현 위치에 목조건물로 다시 짓고 방향도 원래대로 돌릴 계획이다.동남쪽으로 32개동(1,091평)의 건물을 복원하고 집옥재등 12동을 보수하고 주변을 정비한다. 경복궁 복원사업이 예정대로 끝나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대원군과 고종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는 건물이 330여 동(1만5,600여평)에 달했으나 2009년 복원사업 완료 시의 건물은 129동(6,180평)에 그쳐 40%만이 복원되는 셈이다.그러나 90년 복원사업 직전에는 단 36동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종수기자 vielee@
  • “檀君은 신화 아닌 실존인물”

    “단군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다(檀君實吾東方始祖)”〈태종실록 권23,12년 임진(1412년) 6월〉“단군은 조선의 시조이다(檀君朝鮮之始祖也)” 〈세종실록권75,18년 병진(1436년) 12월〉 흔히 단군 관련 고(古)기록이라면 ‘환단고기’‘규원사화’‘단기고사’ 등의 야사류를 연상하기 쉽다.그러나 조선왕조의 정사(正史)이자 한국사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평가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단군 관련 기록이전해오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사대·모화(慕華)사상에 젖어 중국의 눈치를 보던 조선조의 상황을 감안하면 다소 의외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 강동민)은 최근 학술총서 제2집으로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史料)’(沈伯綱 편저)를 펴냈다. 이에 따르면 위로 태조에서부터 아래로 고종·순종조에 이르기까지 각 왕조마다 거의 대부분 관련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록’은 단군을 조선의 시조로 뚜렷이 인식하고 있으며,단군조선의 건국연대를 중국의 당요(唐堯)시대와 같은 시기로 인식한 내용을 담고 있다.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실린 ‘단군고기(古記)’에서는 단군의 출생,결혼과 가정,건국과 역연(歷年),통치영역 등을 상세히 다룸으로써 단군이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실존인물임을 생생이 보여주고 있다. 또 고려때 구월산에서 삼성사(三聖祠)를 짓고 환인·환웅·단군 세 분의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조에는 평양에서도 단군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는 등 일제에 의해 단군조선이 말살되기 전인 20세기초까지 이같은 행사가 지속돼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펴낸 ‘조선사’는 단군조선을 말살하는 등 단군관련 기록을 왜곡편찬했다. 이 때문에 국정교과서에는 아직까지 단군이 신화적 인물로묘사되고 있다. 해방후 재야사학계를 중심으로 단군사 복원을 위해 다양한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식민사관에 뿌리박힌 대부분의 강단사학자들의 외면으로 학술적 공감대를 이뤄내지 못했다. 편자인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은 “우리민족·문화의 뿌리가 단군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만큼 이를 조국통일의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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