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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말 여류시인 송설당을 아십니까

    “…그 당시 나는 암벽에 뿌리박고 있던 소나무였다.혼자 떠돌아다니며 한양에 살 때는 겨울철 고개 위에 외롭게 살아가는 소나무였다.시원스레 선조들의 한을 풀고 따뜻한 봄날을 되찾으니 그때 나는 임금님의 은혜를 흠뻑 받은 늙고 큰 소나무였다.” 홍경래의 난에 멸문지화를 당한 화순 최씨 사대부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한평생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살다간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1894년 고향 김천에서 상경한 송설당은 고종의 계비인 엄비와 가까워지고,때마침 엄비가 황태자 이은(훗날의 영친왕)을 낳자 입궐해 그의 보모가 됐으며,이를 발판으로 몰적(沒籍) 89년만에 마침내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송설당은 68세에 이르러 한시와 국문가사,제문 등 일생 동안 쓴 작품들을 모아 한 권의 개인 문집을 내니 그게 바로 ‘최송설당문집’이다. 한성대 한국어문학부 정후수·신경숙 교수와 같은 대학 김종순 강사가 펴낸 ‘송설당의 시와 가사’(도서출판 어진소리)는 이 ‘최송설당문집’을 완역한 것이다.최근들어 국문학계를 중심으로 송설당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 왔지만 송설당 전작이 현대어로 번역돼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조의 마지막 궁중 여류시인’ 송설당은 개화기에 신학문을 배웠거나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신여성들과는 차이가 있다.그렇다고 유교적 이념의 틀 속에만 갇혀 있던 인물도 아니다.여성의 몸으로 가문의 신원설치(伸寃雪恥)를 위해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은 당대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송설당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24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는 송설당 65주기에 즈음해 그를 조명하는 학술대회도 열린다.1만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서울 포토]1940년대 서울시청·광장

    지난달 잔디광장(사진 왼쪽)으로 새단장한 서울시청 앞의 풍경이 알고 보니 옛 모습을 되찾은 것.시청앞 광장은 고종이 22년간 거처한 덕수궁과 거리 하나를 두고 있는 데다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곳이다. 6·10항쟁,2002년 월드컵의 열기 등 우리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이 곳에서 일어났던 게 우연이 아니다. 건물은 1925년 3월에 착공해 1926년 10월30일에 낙성식이 거행됐으나 80년 가까이 원형을 유지한채 지금도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신자들이 종단 살림 특별감사

    ‘신자들이 총무원을 감사한다.’ 태고종 총무원이 신자 대표로부터 종단 운영실태에 대한 감사를 직접 받겠다고 천명하고 나서 주목된다.중앙종무기관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관례를 벗어나 종무행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구조를 마련하는 첫 시도로 불교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일 불교계와 태고종 총무원에 따르면 태고종은 이달 중순 열리는 중앙종회에 앞서 종단 산하 19개 시·도 교구에서 각각 1명씩 뽑은 신자 대표들이 회계와 종정 특별감사를 실시할 방침이다.이번 절차를 거쳐 총무원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불식시키고 종단개혁의 시발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불교계에서 종회의원이 아닌 일반 신자들이 종단 운영실태를 직접 감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특히 태고종의 신자 감사는 중앙종무기관이 입주할 한국불교전통문화전수회관 불사와 동방대학원대학의 개교를 앞둔 시점에서 신자들간의 화합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조치로 마련된 것이어서 조계종 등 다른 종단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무엇보다 흔히 불교 종단에 만연한 총무원 불신을 털고 투명한 종무행정을 실현하겠다는 총무원의 강한 의지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해 태고종 총무원은 올 하반기부터 종무행정과 관련해 책임을 다하지 않는 신자와 사찰에 대해서는 종헌·종법에 따라 엄중히 대처해 나가기로 했다.그동안 종단결속력 저해요인으로 꼽혀온 분담금 미납 또는 상습적인 체납에 대해서도 각종 기본권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강력히 취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이밖에도 태고종 총무원은 종단 재정 확충을 위해 공사찰 개념을 도입하는 한편 총무원 직영사찰을 점차 늘려 나가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중이다.현재 운영중인 인천 용궁사,완주 봉서사 등 직영사찰의 재정운용 역량도 키워 나갈 계획이다. 태고종은 조계종 다음으로 규모가 큰 종단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오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온 종단.종단 구성원의 결속력이 약하고 총무원 행정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총무원장 운산 스님은 “앞으로 사찰과 신자들의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종헌·종법을 엄격히 적용해 나가겠다.”며 “안정과 화합을 바탕으로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는 종단 풍토를 조성하고,부서별 전문행정력 강화,안정적인 재정운용 등에 맞춰 불사를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기술사합격자 524명 발표

    한국산업인력공단은 30일 제72회 기술사 자격시험 합격자 524명을 최종 확정,발표했다. 용접기술사 등 73개 종목의 시험에서 최고령 합격자는 도로 및 공항 기술사에 합격한 서원규(59)씨,최연소 합격자는 대기관리기술사의 장상용(28)씨가 각각 차지했다.지하자원개발 종목의 신학균(42)씨는 최고 득점으로 합격했다.건축시공 등 11개 종목에서 여성기술사 16명도 배출됐다. ■제72회 기술사 합격자 명단 ▲가스 : 신태섭 심영천 이영희 이충환 김동욱(5명) ▲건설기계 : 박재철 김진석 조연호 우종현 이종필 이종남 정필영 정용채 박요창(9명) ▲건설안전 : 이진유 안무영 김호주 박대성 김한용 이상용 신용보(7명) ▲건축구조 : 유진우 박준형 김남준 안병용 오용균 김영태 이준표 이홍재 김록배 송준석(10명) ▲건축기계설비 : 유형달 이대선 김영일 강호석 정제윤 이종원 이상협 윤정태강현남 선종철 조병철 박익수 김승현 이오석 남승우 이광수 김호진(17명) ▲건축시공 : 이인섭 임용만 구익본 정병준 이인재 김진섭 이희령 오병한 김진웅 김선희 김영하 이환경 최진엽 김한채 김정식 조규수 조규증 박승진 이상우 김경희 김종팔 김동섭 김은옥 박경식 박동환 최도영 김배원 김종각 임옥섭 서종원 류한국 고재석 윤동원 이훈구 소정운 이운희 김종식 오용주 허민행 정성기 김영선 양영범 박흥석 신현일 김종오 이윤정 김재명 최두연 김성택 김주영 지재욱 김형기 이규홍 정을용 이동우 권상균 이승훈 이혁진 박병근 강선기 김성훈 김인균 김용석 강종학 백만수 이송희 이양우 이성길 박병배 성혁기 한성문 황준석 김형실 신남선 오인근 안승범 김추성 박호관 이선공 남점태(80명) ▲건축전기설비 : 최팔규 홍달식 이태우 박정현 양홍석 황모아 최광진 심종석노재필 문경선 박정규 설광식 민대식(13명) ▲건축품질시험 : 이종산 황인성 송훈(3명) ▲고분자제품 : 남기준 김수완 이종철(3명) ▲공업계측제어 : 조경수 조원익(2명) ▲공조냉동기계 : 김동찬 김재철 오준석 원재명 김인범 이대선 이성락 김찬 왕성인 이준식 김영래 문대희 정진웅 조문국 임우영 안영순 한재화 김석영 오형식 김종철 정락연 조호훈 이종배 이형진 김종윤 황건주 윤정수 민왕기 이오석 하경용 오광헌 김용수 이상훈 임태연 강동인 김민석 송선용(37명) ▲교통 : 김태병 박상준 함재현 황호근 김상섭 김영일 이기영 강원갑 이수형 최훈(10명) ▲금속가공 : 박수근 박준욱(2명) ▲금속재료 : 이기영 이원희 박수복 김경재 장성록 양정승(6명) ▲기계공정설계 : 이선호(1명) ▲기계안전 : 남주현 문형수 유창우 김형섭 이선현(5명) ▲기계제작 : 황순찬 박용호(2명) ▲농어업토목 : 전건영 김재천 유흥재 심좌근 엄대호 김석동 강신길(7명) ▲대기관리 : 서성석 양영환 장상용(3명) ▲도로및공항 : 최인구 최현욱 김용전 김홍흠 심규서 이경태 윤현섭 서원규 임대성 배종규 김은철 고종업 이종철 이광호 이선규 한병용 김석출 신현술 최현병(19명) ▲도시계획 : 정명화 김민성 이칠성 박홍철 조욱현 장훈재 장성환 장철원 노혜진(9명) ▲발송배전 : 김경훈 배장호 최형철 이석원 조승우 강민표 이현기 정종효 박상영 이선우(10명) ▲방사 : 오상균(1명) ▲방적 : 이환기(1명) ▲비파괴검사 : 남기문 김창수(2명) ▲산림 : 장진수 강성표 김성근 조용만 김종호 권영록 이은철 정종부 이준 임재은 양성학(11명) ▲산업기계 : 이웅근 장인섭 김용래(3명) ▲산업위생관리 : 임무혁(1명) ▲상하수도 : 최명원 박종일 이기철 전건 김봉주 최성운 서재도 김봉재 김희수김범석(10명) ▲선박건조 : 정호영 강수경(2명) ▲선박기계 : 최재호 김종직(2명) ▲세라믹 : 김남규(1명) ▲소방 : 강정봉 김재성 이태영 박은미 김성훈 정진호 정석환 이향노 홍성주 김학중(10명) ▲소음진동 : 최영걸 강선준(2명) ▲수산양식 : 곽용구 추연동(2명) ▲수산제조 : 이영재(1명) ▲수자원개발 : 윤연중 송기능 장중석 김선기(4명) ▲수질관리 : 황남균 고대현 김향란 김상훈(4명) ▲식품 : 윤상기 김광훈 김홍식 김종희 이인숙 함준상 이선민 박상재 이정숙(9명) ▲어로 : 최석진 옥종석(2명) ▲염색가공 : 정대호 금창중(2명) ▲용접 : 최명기 성희준 박성봉 신호상 허남학(5명) ▲유체기계 : 심성훈 이찬욱 엄진석 김태호 김대호 김일복 김진훈 김대근 고득윤 김시환(10명) ▲의류 : 이일균 (1명) ▲전기안전 : 박영식 박정현 김형석 김용식(4명) ▲전기응용 : 변재영(1명) ▲전자계산조직응용 : 서희명 이재승 박정훈 안수연(4명) ▲정보관리 : 박인경 강용석 최재득 고종오 권두택 마경근 김병진 윤성호 김용희 김기열 양진섭 임중섭 장송봉(13명) ▲정보통신 : 조규백 유경탁 박동성 전영근 임대식 오규태 김향식 권병철 김석임홍진 이정천 정성수 반재홍 홍성표 오석환 장재영 엄기복 박균득(18명) ▲조경 : 임수정 이병욱 김홍철 홍정순 이은영(5명) ▲종자 : 이승복 이택수 이관용 강현중 황보인식 김지성 이종남(7명) ▲지적 : 조봉연 김정심 오부환 이호범 박춘재 곽인선(6명) ▲지질및지반 : 김기준 곽정하 박노춘 김태연 정연오 김기주(6명) ▲지하자원개발 : 신학균(1명) ▲차량 : 장경욱 이태우(2명) ▲철도 : 성호기 강면구 배헌규 김민수 정상현(5명) ▲철도신호 : 정상국 박면규 김순구(3명) ▲철야금 : 정재언 김봉호 우동정 김호성 김찬수(5명) ▲축산 : 심상석 노영운 하승호(3명) ▲측량및지형공간정보 : 최태원 황원순 남경석 김일동 최성규 이철희(6명) ▲토목구조 : 윤인석 유영 조희수 정승대 이재중 곽도헌 이호용 김영훈 박원빈우동인 김재금 최대헌 하상용 정현열 정해용(15명) ▲토목시공 : 하상길 김한철 김영혁 노종빈 김길영 정현철 문인호 조남철 김한모 이종산 박상욱 김경준 박은철 송병덕 이승한 박주천 김병철 김영갑 김덕균 정광주 정문환 조석희 박철운 신일형 김봉용 서차원 김상현 강성해 안재혜 김대범 장평지 (31명) ▲토목품질시험 : 이상민 곽명섭 박훈남(3명) ▲토질및기초 : 최해동 정철화 조국환 전형준 최재영 이동희 권오욱 이관호 김준완 김학균 정필섭 박정환 선석윤 최규대 김경민 최병욱 이재열 김주용 신민식 (19명) ▲폐기물처리 : 손영록 김정근 박갑철(3명) ▲포장 : 하옥자 천동영 성행기 김성수 김평수 김종경(6명) ▲표면처리 : 이준균(1명) ▲항만및해안 : 신관용 오세호 박필수(3명) ▲해양 : 김도연 심문보(2명) ▲핵연료 : 박인식 윤준구 임근효 박정민(4명) ▲화공안전 :류정현 강미진 (2명) ˝
  • [삼성하우젠 K-리그 2004] FC서울 7경기 ‘무패행진’

    FC서울이 연고지 이전 후 홈 첫승을 올리며 시즌 무패행진을 이어갔다.포항은 3연승으로 선두 굳히기에 들어갔다. 서울은 2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K-리그 경기에서 히카르도의 결승골에 힘입어 수원을 1-0으로 물리치고 2연승했다.7경기 무패행진을 이어간 서울은 3승4무(13점)로 4위에서 단숨에 2위로 도약했다.특히 올해 안양에서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서울은 홈 경기에서 2무 뒤 첫승을 거둬 두 배의 기쁨을 맛봤다.2연패에 빠진 수원은 2승2무3패(승점 8)로 중위권에 머물렀다. 서울은 대전에서 유니폼을 갈아입은 김은중을 최전방에 내세워 골사냥에 나섰고,수원은 고종수를 플레이메이커로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 출장시켜 승부수를 띄웠다. 승리의 여신은 서울의 손을 들었다.김은중과 히카르도는 일자수비를 펼친 수원의 수비라인을 날카로운 종패스 한방으로 자주 허물어뜨리면서 공격의 물꼬를 텄다.전반 15분 김은중이 상대 문전에서 밀집 수비수 사이로 날카롭게 전진 패스한 공을 히카르도가 정확하게 왼발로 차 그물을 흔들었다. 수원으로서는 아쉬운 경기.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선 고종수는 차범근 감독의 기대대로 날카로운 패스,정확한 센터링 등으로 녹슬지 않은 실력을 뽐내며 공격을 주도했지만 끝내 만회골은 터뜨리지 못했다. 포항은 울산과의 원정경기에서 후반 45분 터진 황진성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승리,6승1패(18점)로 선두를 질주했다.홈에서 일격을 당한 울산은 2위에서 4위로 내려앉았다.성남은 대구를 3-2로 물리치고 탈꼴찌에 성공했다.대구의 노나또와 전남의 모따는 각각 한 골씩을 추가하면서 6골로 득점 공동 선두를 지켰다. 박준석기자 pjs@˝
  • 儒林(9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돌계단을 올라 외삼문으로 다가갔다.솟을대문 옆에는 심곡서원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심곡서원 이곳은 중종 때의 문신 정암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서 효종 원년(1650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그해에 비로소 사액을 받았다.현종14년(1673년) 강당이 중건되었다.고종 대원군의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조광조는 연산군 때의 폭정을 개혁하기 위해서 중종에 의해서 등용된 인물로 향약 보급운동,반정공신위훈(反正功臣僞勳) 삭제,현량과 실시 등 각종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훈구대신들이었던 남곤,심정 등의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이 사화로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선조 때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고,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았다.심곡서원은 사당과 강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서원이지만 건물은 상당히 짜임새 있다.” 외삼문 천장 밑에는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나는 그 현판이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효종이 내린 편액인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러나 아니었다. 임금이 내린 편액이라면 그곳에는 분명히 사액(賜額)이란 글귀가 명기되어 있기 마련이었다.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글귀가 적혀 있지 않았다. 외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일년에 두 번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대제를 올릴 때만 열어 놓으며,사람들은 다만 서쪽에 있는 협문을 통해야만 서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이었다. 나는 서협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자 이곳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인 강당이 나타났다.강당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日照堂” 한눈에 조광조의 절명시 중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거짓 없는 이 내 충정 환하게 비추리라(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에서 한 자씩 빌려와 지은 당호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의 형태는 덤벙주초라 불리는 주춧돌 위에 원통주를 세운 초익공집으로 합각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었다.각 칸마다 판자로 된 문비(門扉)가 달려 있었는데,건물 안에서부터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반쯤 열린 창호문을 통해 안을 살펴보니 어두운 실내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책을 펴놓고 무엇인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그 소리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도 두 대의 승용차가 이미 주차되어 있었고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강당문 앞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아 강당 안에서 무슨 모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원의 옛 건물을 단순히 유적으로만 보존하지 않고 인근에 사는 사람들끼리 이곳에 모여서 함께 글공부를 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여졌다.건물 뒤쪽에는 사우(祠宇)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경내에서 조광조를 배향하는 제사의 중심공간인 지존한 사당을 지키는 마지막 문으로 가운데 문은 제향시 제수만이 통과할 수 있는 신문(神門)이었다.천장 밑에는 다음과 같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深谷書院 庚寅年 七月二十七日 賜額” 사액이란 글씨가 분명히 양각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 현판이 임금 효종으로부터 사액된 편액임이 분명하였다.경인년이라면 효종원년(1650년),마침내 효종은 친필로 사액하여 내림으로써 정식으로 조광조의 복원을 만천하에 공표하게 되는 것이다.실로 조광조 사후 130년만의 일인 것이다.
  • 조선, 러일 전쟁 참전 원했다

    러·일 전쟁 당시 조선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료가 발견됐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소장 안병한)가 러·일 전쟁 100주년을 맞아 펴낸 ‘러·일 전쟁과 한반도’(편역 심헌용)는 당시 민중들이 한인 의용군을 조직해 친러 항일투쟁에 가담해 구국활동에 나섰음을 보여준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고종이 국권을 도모하기 위해 전시중립국을 선언하고 밀서를 통해 ‘자발적’ 대러 협력을 요청하자,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등을 중심으로 의용군이 편성됐다.일본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맺는 등 침략을 노골화하는데 대해 세력균형을 위해 러시아와 연합작전을 펴려 했던 것이다.군 규모는 6개 대대 6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국난의 위기 속에서 우리 민중들이 수동적인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주체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러시아의 소극적인 자세로 한인 의용군들이 눈에 띌 만한 활동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러시아의 사료만을 인용하다보니 당시의 구체적인 활동을 파악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한반도에서 전개된 인천해전의 발발 배경과 전투과정,러·일 양군의 한반도 진군과 군사활동 등 현장 보고서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특히 그동안 미공개 상태로 보관만 되어 있던 인천해전 현장 스케치와 현장 유물(인천시립박물관 소장)도 소개해 당시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복원했다. 그동안 러시아의 여러 문서보관소에서 수집 보관해온 자료들을 모아 번역,편찬한 이 책은 1차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20세기 초 우리가 처했던 역사적 사실과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재현함으로써 21세기를 맞아 세력 재편의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라는 지혜를 찾아 볼 수 있다. 황진선기자 jshwang@˝
  • 儒林(9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돌계단을 올라 외삼문으로 다가갔다.솟을대문 옆에는 심곡서원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심곡서원 이곳은 중종 때의 문신 정암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서 효종 원년(1650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그해에 비로소 사액을 받았다.현종14년(1673년) 강당이 중건되었다.고종 대원군의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조광조는 연산군 때의 폭정을 개혁하기 위해서 중종에 의해서 등용된 인물로 향약 보급운동,반정공신위훈(反正功臣僞勳) 삭제,현량과 실시 등 각종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훈구대신들이었던 남곤,심정 등의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이 사화로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선조 때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고,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았다.심곡서원은 사당과 강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서원이지만 건물은 상당히 짜임새 있다.” 외삼문 천장 밑에는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나는 그 현판이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효종이 내린 편액인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러나 아니었다. 임금이 내린 편액이라면 그곳에는 분명히 사액(賜額)이란 글귀가 명기되어 있기 마련이었다.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글귀가 적혀 있지 않았다. 외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일년에 두 번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대제를 올릴 때만 열어 놓으며,사람들은 다만 서쪽에 있는 협문을 통해야만 서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이었다. 나는 서협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자 이곳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인 강당이 나타났다.강당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日照堂” 한눈에 조광조의 절명시 중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거짓 없는 이 내 충정 환하게 비추리라(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에서 한 자씩 빌려와 지은 당호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의 형태는 덤벙주초라 불리는 주춧돌 위에 원통주를 세운 초익공집으로 합각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었다.각 칸마다 판자로 된 문비(門扉)가 달려 있었는데,건물 안에서부터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반쯤 열린 창호문을 통해 안을 살펴보니 어두운 실내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책을 펴놓고 무엇인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그 소리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도 두 대의 승용차가 이미 주차되어 있었고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강당문 앞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아 강당 안에서 무슨 모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원의 옛 건물을 단순히 유적으로만 보존하지 않고 인근에 사는 사람들끼리 이곳에 모여서 함께 글공부를 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여졌다.건물 뒤쪽에는 사우(祠宇)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경내에서 조광조를 배향하는 제사의 중심공간인 지존한 사당을 지키는 마지막 문으로 가운데 문은 제향시 제수만이 통과할 수 있는 신문(神門)이었다.천장 밑에는 다음과 같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深谷書院 庚寅年 七月二十七日 賜額” 사액이란 글씨가 분명히 양각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 현판이 임금 효종으로부터 사액된 편액임이 분명하였다.경인년이라면 효종원년(1650년),마침내 효종은 친필로 사액하여 내림으로써 정식으로 조광조의 복원을 만천하에 공표하게 되는 것이다.실로 조광조 사후 130년만의 일인 것이다.˝
  • [삼성하우젠 K-리그 2004] 전북 4연승 ‘제동’

    울산이 ‘형제팀’ 전북을 꺾고 리그 2위로 뛰어 올랐다.반면 전북과 수원의 연승 행진에는 제동이 걸렸다. 프로축구 울산은 16일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전북과의 원정경기에서 정경호와 시미치가 연속골을 터뜨리며 2-1로 승리했다.이로써 승점 12(3승3무1패)를 확보한 울산은 전북(승점11)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전북은 6경기 만에 첫 패배를 당해 4연승에 실패했다. 울산은 전북의 남궁도에게 동점골을 얻어 맞아 1-1로 팽팽하던 후반 32분,도도의 땅볼 패스를 받은 크로아티아 특급 시미치가 왼발로 강슛,승부에 쐐기를 박았다.남궁도는 5월 들어 3경기 연속 득점포를 가동하며 토종 선수로는 유일하게 득점 공동 5위(3골)까지 도약했으나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아시아축구연맹(AFC)챔피언스리그 주빌로 이와타전(12일)까지 포함하면 4경기 연속골.수원도 이날 안방에서 부산을 맞아 3연승을 노렸으나 상대의 역습에 수비진이 무너지면서 1-2로 무릎을 꿇었다.수원은 전반 11분 쿠키에게 선제골을 내줬지만 ‘브라질 특급’ 마르셀의 헤딩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이후 고종수와 김동현을 연속 투입하며 역전을 노렸으나 후반 24분 오히려 가우초에게 헤딩골을 허용했다.수원이 18개의 슛을 날려 1골을 얻은 반면 부산은 단 4개의 슈팅에서 2골을 뽑아내 대조를 이뤘다. 전남은 김영광이 광주에게 2골을 내주며 올림픽호 ‘거미손’의 체면을 구겼지만 모따가 후반 인저리 타임에 동점골을 쏘아올리며 팀을 패배에서 구해냈다.한편 전날 열린 경기에서는 포항이 대구를 2-1로 누르고 선두를 지켰다.또 FC 서울은 인천을 3-1로 꺾었으며,조광래 서울 감독은 K-리그 사상 7번째로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홍지민기자 icarus@˝
  • 16일 개원법회 백련사 지연스님

    “출가니,속세를 떠났느니 하는 표현은 절대 안 맞습니다.진정한 대화상대를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박현태(71)전 KBS사장은 지난 해 10월 고희 나이에 승려가 됐다.법명이 ‘지연(志淵)스님’이다.그는 내일(16일) 법당을 지어 개원법회를 연다.정식 사찰주지가 되는 것이다.장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백련사.경춘가도의 마석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그는 출가전 일간지 편집국장과 11대 국회의원,문화공보부 차관,수원대 법정대학장,동명정보대 총장 등을 지냈다.지난해 출가할 때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사찰주지’로 화제가 되고 있다. 몇번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부처님 오신날’ 이후에 푸짐하게 만나자고 했다.그러다보니 30분 넘게 통화가 이루어졌다.지연스님은 “(법당)완공 날짜를 맞추다 보니 정신없이 지내왔지.공사감독도 해야 하고,뭐 법당 하나 짓는데 일이 많아.”라고 했다.그는 또 “그날(16일) 손님 초대 안하려고 했는데 소식 들은 (같이 스님된)동기생 20명이 처들어온데.어떻게 막아.”라며 웃었다. 그는 스님이 된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흥미롭게 여길지 모르지만 결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또한 언론에 그렇게 내비치는 것은 더욱 곤혹스럽다고 했다.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파란곡절도 없고,좋은 부모 밑에서 평범하게 지내온 사람인데 돈도 명예도 버렸다는 얘기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또 사회에 있으면 어떻고,절간에 있으면 어떠냐고 했다.사회적 관심사가 아닌 그저 사생활로 봐달라고 당부했다.단지 부처님 공부를 위해 학교 기숙사에 잠시 있을 뿐이라고 부연했다. “언론에 종사할 때 열심히 했지.그것도 익명의 불특정 다수를 위해서 말야.누가 효험을 봤는지 어떻게 알아? 기사 조금만 잘못 나가면 트집이나 잡았어.얼마나 서운하겠나.그래서 대학으로 갔지.처음엔 열심히 강의준비도 했어.근데 말야,학생들이 잘 이해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지.언제까지나 이 노릇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바로 승려가 된 이유다.그는 아무리 산골짜기에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항상 진정한 대화상대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법명에 얽힌 일화를 흥미롭게 들려주었다.그는 나이 70에 머리를 깎게 되니 자신보다 나이가 약간 아래인 사람한테 머리를 깎게 됐다.그러면서 ‘현봉’이라는 법명을 임시로 받았다.나중에 이 사실을 안 태고종 총무원에서 문제를 삼았다.원래 스님이 될 때 머리 깎아주는 사람을 은사로 모시기 때문에 최소한 나이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면서 법명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그는 총무원에 가서 “그럼 머리를 도로 키울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돌아가신 위패스님이라도 은사로 모셔 법명을 새로 받자는 총무원측 제의가 있었다.고민하던 그는 문득 중학교때 은사였던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이 생각났다.그때 ‘연민’에서 ‘연’자를 불하받아 지은 아호 ‘지연(志淵)’을 생각해냈던 것.결국 총무원에서도 부드럽고 좋은 법명이라며 등록을 허락했다. 백련꽃을 좋아해서 ‘백련사’라고 이름 지었다는 그는 독지가의 도움과 사재를 털어 절간을 짓게 됐다.이제 ‘초보승려’와 ‘사찰주지’의 길을 동시에 걷게 됐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자동차의 날] 현대차 박황호사장 은탑산업훈장

    한국자동차공업협회(KAMA)는 12일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인 고건 국무총리,이희범 산자부 장관,강동석 건교부 장관,김동진 KAMA 회장 등 정부 및 업계 주요 관계자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자동차의 날 기념식 행사를 개최했다. 자동차의 날은 1903년 고종황제의 어차(御車)를 도입한 이후 100주년을 맞은 2003년 자동차산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이고 이 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됐다. 자동차 수출누계 1000만대를 돌파한 날(1999년 5월12일)을 자동차의 날로 정했으며 올해 첫 기념식을 갖게 됐다. 기념식에서는 현대차 박황호 사장이 은탑산업훈장,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이 동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산업훈장 5명,산업포장 3명,대통령 표창 4명,국무총리 표창 4명,산업자원부 장관 표창 20명 등 총 36명이 정부 포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식전행사로 열린 코리아오토포럼에서는 세계 차 메이커들의 최대 각축장인 중국 시장에서의 성공전략이 화두로 떠올랐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박홍재 선임연구원은 ‘중국의 신자동차정책 방향과 선진자동차업체의 진출전략’이라는 제목의 주제 발표에서 “중국의 신자동차정책은 외국업체의 현지 수입차 판매 억제,핵심부품 수입규제 강화 등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돼 국산차업계도 이에 맞는 대응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락기자˝
  • 儒林(9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심곡서원(深谷書院). 심곡서원은 조광조와 그의 시신을 이곳까지 운구하였던 양팽손을 제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 선조 38년(1605년) 서원을 세우고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데에서 비롯된다. 선조는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조광조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는데,‘문정공(文正公)’이라 하였다.이는 ‘도덕이 있고 학식이 넓으며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는 뜻으로 선조의 이러한 배려에도 재력이 부족하여 서원이 세워지지 못하다가 시호를 받은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서원을 세울 수 있었는데,서원의 이름을 ‘심곡(深谷)’이라 하였던 것은 원래 이곳이 조광조의 선영이 있었던 ‘심곡리’란 곳으로 조광조가 19세 되던 해 아버지 조원강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를 하면서 이곳에 초당과 연못을 만들어 놓고 학문에 정진하던 유서가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서원이 세워졌어도 임금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지는 못하였다.임금으로부터 서원에 이름을 지어 그것이 새겨진 편액(扁額)을 받지 못하면 서원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데,그 후 인조 9년(1631년),유문서(柳文瑞) 등이 상소하여 사액해 줄 것을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심곡’이란 사액을 받은 것은 효종 원년인 1650년이었다.서원이 세워진 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것을 보면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사후 130년이 흘러가도 부정적인 평가를 완전히 씻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그 후 200년이 지난 고종 2년(1865년),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서원철폐령이 내려 전국의 서원 417개 중 27개소만 살아남을 때 조광조를 배향하고 있는 심곡서원이 존치(存置)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서원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겨울 능주에 있는 ‘적려유허비’를 답사함으로써 시작된 조광조의 추적은 조광조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묘소와 심곡서원을 찾아감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조광조가 죽은 지 500년. 지금까지의 추적은 조광조의 생애와 살아있을 때의 그의 정치적 행적이었다면 심곡서원과 그의 무덤을 찾아감으로써 사후 500년이 흘러가는 동안 조광조가 역사에서 어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가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하기 위함인 것이다. 특히 숙종(肅宗)은 조광조를 매우 깊이 존경하여 ‘정암집’을 읽고 나서 ‘독정암집유감(讀靜菴集有感)’이란 어제(御製)를 내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었는데,지금 선생의 글을 읽어 보니 더욱 더 도덕이 밝았음을 알겠도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공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랐고,시골의 노파들도 존경하였다네. 부수적으로 예(藝)에 노닐며 굳센 필세(筆勢) 또한 아름답도다. (每思臨死言 涕淚自交 今讀先生書 益知道德晟 朝紳咸仰成 野亦尊敬 餘事游於藝 佳哉筆勢勁)” 조광조에 대한 숙종대왕의 어제는 지금도 심곡서원 강당에 현판으로 내걸려 있다 한다. 차는 어느덧 신도시에서도 외곽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들을 싼값에 살 수 있는 아웃렛들이 갑자기 나타났다.지금까지 비교적 한적하였던 도로는 먼 곳에서 싼값에 고급 상품들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고 온 차량들의 행렬로 시장거리처럼 붐비고 있었다.˝
  • 儒林(9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심곡서원(深谷書院). 심곡서원은 조광조와 그의 시신을 이곳까지 운구하였던 양팽손을 제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 선조 38년(1605년) 서원을 세우고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데에서 비롯된다. 선조는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조광조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는데,‘문정공(文正公)’이라 하였다.이는 ‘도덕이 있고 학식이 넓으며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는 뜻으로 선조의 이러한 배려에도 재력이 부족하여 서원이 세워지지 못하다가 시호를 받은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서원을 세울 수 있었는데,서원의 이름을 ‘심곡(深谷)’이라 하였던 것은 원래 이곳이 조광조의 선영이 있었던 ‘심곡리’란 곳으로 조광조가 19세 되던 해 아버지 조원강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를 하면서 이곳에 초당과 연못을 만들어 놓고 학문에 정진하던 유서가 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서원이 세워졌어도 임금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지는 못하였다.임금으로부터 서원에 이름을 지어 그것이 새겨진 편액(扁額)을 받지 못하면 서원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데,그 후 인조 9년(1631년),유문서(柳文瑞) 등이 상소하여 사액해 줄 것을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심곡’이란 사액을 받은 것은 효종 원년인 1650년이었다.서원이 세워진 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것을 보면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사후 130년이 흘러가도 부정적인 평가를 완전히 씻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그 후 200년이 지난 고종 2년(1865년),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서원철폐령이 내려 전국의 서원 417개 중 27개소만 살아남을 때 조광조를 배향하고 있는 심곡서원이 존치(存置)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서원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겨울 능주에 있는 ‘적려유허비’를 답사함으로써 시작된 조광조의 추적은 조광조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묘소와 심곡서원을 찾아감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조광조가 죽은 지 500년. 지금까지의 추적은 조광조의 생애와 살아있을 때의 그의 정치적 행적이었다면 심곡서원과 그의 무덤을 찾아감으로써 사후 500년이 흘러가는 동안 조광조가 역사에서 어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가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하기 위함인 것이다. 특히 숙종(肅宗)은 조광조를 매우 깊이 존경하여 ‘정암집’을 읽고 나서 ‘독정암집유감(讀靜菴集有感)’이란 어제(御製)를 내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었는데,지금 선생의 글을 읽어 보니 더욱 더 도덕이 밝았음을 알겠도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공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랐고,시골의 노파들도 존경하였다네. 부수적으로 예(藝)에 노닐며 굳센 필세(筆勢) 또한 아름답도다. (每思臨死言 涕淚自交 今讀先生書 益知道德晟 朝紳咸仰成 野亦尊敬 餘事游於藝 佳哉筆勢勁)” 조광조에 대한 숙종대왕의 어제는 지금도 심곡서원 강당에 현판으로 내걸려 있다 한다. 차는 어느덧 신도시에서도 외곽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들을 싼값에 살 수 있는 아웃렛들이 갑자기 나타났다.지금까지 비교적 한적하였던 도로는 먼 곳에서 싼값에 고급 상품들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고 온 차량들의 행렬로 시장거리처럼 붐비고 있었다.
  • 前 KBS사장 박현태 주지 16일 백련사 개원법회

    지난해 10월 태고종 총림인 전남 순천시 선암사에서 지연(志淵)이란 법명(法名)으로 출가한 박현태(朴鉉兌)전 KBS 사장이 주지가 돼 중생제도에 나선다.태고종에 따르면 지연 스님은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 내 백련사(白蓮寺)건립을 마치고 오는 16일 오전 10시 개원법회를 연다. 낙성행사에서는 법당에 부처님을 옮겨 모시는 이운(移運)식도 열린다.지연스님은 조촐한 봉행을 위해 외부 인사들을 초청하지 않았다.지연스님은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11대 국회의원,문화공보부 차관,수원대 법정대학장,동명정보대 총장 등을 지냈다. 김성호기자 kimus@˝
  • [K-리그 2004] 1승 ‘車·車·車’

    ‘이다지도 기쁠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투지로 똘똘 뭉친 수원 선수들이 마수걸이 승리에 목이 말랐던 차범근 감독에게 단비를 뿌렸다.또 울산은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하며 단독 선두로 뛰어올랐다. 수원은 5일 홈에서 벌어진 프로축구 K-리그 경기에서 브라질 특급 나드손(22)의 결승골에 힘입어 ‘도깨비팀’ 대구 FC의 돌풍을 1-0으로 잠재우며 올시즌 4경기 만에 첫 승을 신고했다.수원은 이로써 승점 5(1승2무1패)를 확보,중위권 탈출의 발판을 마련했다.차 감독은 지난 1994년 11월5일 버펄로(현 전북)전 승리 이후 9년 6개월 만에 K-리그 승전고를 울린 셈. 두 팀의 경기는 전반에만 23개의 반칙,3개의 경고가 나올 정도로 미드필드에서부터 불꽃을 튀겼다.수원이 승기를 잡은 것은 전반 12분.미드필더 김진우(29)가 문전으로 감아올린 왼발 프리킥을 서정원(35)이 헤딩으로 떨궈 줬고 나드손이 오른발로 강슛,대구의 골망을 흔들었다.시즌 2호. 이후 스피드를 앞세워 대구를 압도하기 시작한 수원은 후반에 조재진(23) 김동현(20) 고종수(26)를 연속 투입하며 쉴새없이 골문을 두드렸으나 추가골 사냥에는 실패했다. ‘거미손’ 이운재(31)는 전반 36분 박경환(28)의 결정적인 슛을 쳐낸데 이어 노나또(25) 노상래(34)를 앞세운 대구의 역습으로부터 골문을 틀어막아 귀중한 1승을 지켜냈다.플레잉코치 서정원은 성남전에 이어 오른쪽 날개로 선발출장,2경기 연속 도움을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대구는 득점 1위(4골) 훼이종(26)이 부상으로 결장한 것이 아쉬웠다. 한편 올림픽대표팀의 ‘최 브라더스’가 각자 소속팀으로 돌아가 맞선 문학경기에서는 지난 시즌 득점 2위(27골)인 도도(30)가 후반에 2골을 쓸어담은 울산이 홈팀 인천에 3-2로 승리를 거뒀다.승점 9(2승3무)를 기록한 울산은 이날 경기가 없었던 포항을 골득실에서 1점 앞서 1위로 도약했고,도도는 득점 공동선두에 합류했다. ‘리틀 마라도나’ 최성국(21)은 전반 37분 날카로운 오른발 코너킥으로 유경렬(26)의 선제 헤딩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인천의 최태욱(23)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대전 경기에서는 홈팀 대전이 전반에만 2골을 작렬한 지아고(24)의 맹활약으로 부산을 2-0으로 꺾고 2무2패 끝에 1승을 올리며 전남과 득점없이 비긴 부천을 끌어내리고 꼴찌 탈출에 성공했다. 김도훈(34)이 깊은 침묵에 빠진 지난해 챔피언 성남은 전북에 0-2로 패배,11위(1승1무3패)로 추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5)내 마음의 등잔불빛(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5)내 마음의 등잔불빛(下)

    전기가 없었던 예전,예전이라 해봐야 기껏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의 8할 정도는 가난한 생활을 했고 방안의 어둠을 밝히는 데 등잔불을 켰었다.불을 밝히는 기름은 주로 식물성이었는데, 가장 널리 사용된 들기름을 시작으로 아주까리기름,산초기름 등 우리나라 산하에서 자라는 나무 열매들을 볶아서 기름을 얻었다. 기름을 담아 보관하는 기름병이 발달하고,심지를 넣어 불을 켜는 그릇은 접시 또는 작은 잔 형태였다.가난한 집에서는 아주 드물지만 쇠고기국을 끓이게 되면 등잔기름으로 쓸 굳기름을 걷어내느라 각별한 조심을 했고,기름 한 숟갈이라도 얻어가기 위해서 아낙들은 부산을 떨기도 했었다. ●호형 도자기등잔 처음엔 궁궐서 사용 그러다가 1876년(고종13)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석유가 들어오게 되었는데,석유를 등잔 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호형(壺刑,아가리가 좁고 복부가 나온 항아리 형태)으로 만든 도자기 등잔이었다.석유의 인화성 때문에 등잔 뚜껑 위로 심지를 뽑아 올려 사용하도록 만들었다.초기에는 주로 궁궐에서 쓰여지다가 점차 양반집,중인들에게로 보급되어 일반 서민들이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였다. 석유와 호형 도자등잔은 우리나라 조명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새벽이었고,이같은 신문물의 위력을 돋보이게 한 것은 1885년 영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들어서서 생산된 성냥과 조화였다. 호형 등잔은 일제 때 일본의 고미술 수집상인들에 의해 대부분 일본으로 빠져나갔다.그 대신 일본 상인들은 그들의 대표적인 가마인 아리다가마(有田窯)에서 대량 생산한 저질의 등잔 서너개와 우리것 한 개를 맞바꾸는 속임수를 썼다.제대로 굽혀지고 모양도 괜찮은 도자등잔 대부분은 일본인 소장가들의 소유가 되고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흔히 민속품 전시장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도자등잔 열 개 중 아홉은 일본인들이 우리를 속일 때 썼던 물건들이다.등잔 하나도 제대로 지니지 못한 민족이니 무슨 민족사며 정통성을 제대로 지니고 있을지 새삼 두렵고 아프다. 한국등잔박물관 김동휘 관장이 등잔에 쏟고 있는 열정은 세월에 걸리지 않고 섣부른 지식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하고 뿌리 깊은 또 하나의 등잔처럼 느껴졌다. ●90%가 日이 빼돌린 명품 대신 받은 저질 문:이곳에 들어서면서 보니까 이곳 박물관 명칭을 적은 글자가 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韓國의 등잔 博物館’이라 되어 있더군요.왜 ‘등잔’이란 말만 한글로 적으셨는지요. 金:유식한 사람은 등잔을 燈盞이라 씁니다.또 어떤 유식한 이는 old lamp라고도 합니다.제가 박물관을 세운 뒤 이름 짓는 문제를 여러분들께 자문을 구했지요.고등기(古燈器),옛불빛 그릇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권하더군요.저는 옛 선인들의 생활문화가 지녔던 지혜를 현대사회는 물론 미래 세대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서 더 좋은 이름을 생각했습니다.그때 한 외국인이 쓴 글을 읽게 되었지요.아,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DEUNG-JAN’이라 적혀있더군요.등잔은 등잔이라 부르고 적어야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는데,일제 때 일본인들 앞에서 머리 숙이지 않기 위해 의학 공부를 했고,새 생명이 태어나는 일과 어머니의 고결함을 생각하면서 의사 일을 했습니다.중국인,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볼 때 ‘등잔’이 지닌 우리 것을 느끼도록 해줘야겠다는 뜻도 조금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문:이렇게 귀한 것들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세우게 된 데는 남다른 애정과 노력이 필연적이었겠지요.그 동안의 과정을 좀 들려주시지요. 金:조상들의 얼이 묻어 있는 민속자료들을 관심 깊게 지켜보아 왔는데,1971년 당시 국립박물관 학예실장이시던 최순우 선생께서 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제가 수집하고 있는 등잔을 보시고는 한국 최초·최고의 등잔사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용기가 생기더군요.수원에서 등잔만 가지고 첫 전시회를 열었는데 우리나라 등잔전시회의 효시가 된 셈이었지요.그 후 국립박물관과 공동으로 열거나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가져왔습니다. 그걸 보러 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저는 거듭 놀라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요.정신없이 살다보니 잃어버리게 된 자신들의 역사이자 자기의 한 부분이기도 한 등잔 앞에 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가 봅니다.돈으로 치자면 몇 푼도 안되는 등잔이지만,인간에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더 많은 소중한 추억과 역사와 자존심,순수성,영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등잔 앞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가 봅니다.제가 등잔을 볼 때마다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되듯이 말이지요. 문:등잔전시회를 하면서 그 외에 특별하게 깨달으신 것도 많으실텐데요. 金:전시회를 열면 관람객들의 편리를 위해 밝은 전기 조명을 하게 됩니다.전기 불빛은 등잔을 상하게 합니다.또한 많은 관람객들의 시선도 등잔을 상하게 합니다.전시회를 마치고 박물관으로 돌아오면 일정 기간 등잔들을 지하층 어둠 속에다 모셔둡니다.정양(靜養) 즉,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 피로나 병을 용향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만 합니다.그런 다음 다시 꺼내어 보면 등잔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문:등잔에겐 어둠이라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金:이곳 박물관의 시설이 비교적 어두운 이유도 그렇습니다.등잔불빛이 지닌 상징성을 한번 생각해보세요.등잔불빛은 전깃불처럼 공격적이지 않아요.전깃불에서는 어둠이라는 상대에게 항복받으려는 적극적 공격성과 아주 없애버리겠다는 섬뜩함도 느껴지거든요.그러나 등잔불빛은 어둠과 공존 상생합니다.어둠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필요한 절대조건입니다.또한 어둠과 밝음의 중간도 필요하지요.먼동이 터올 때의 그 절묘한 빛과 어둠의 상생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는 은은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적당한 어둠이 필요하지요.신록의 숲속에서 맛볼 수 있는 자연의 그늘,여름날 시냇가에 어리는 오후 산그늘,저녁의 기운이 짙어질 때 고향가는 산 언덕에서 바라본 그 기막힌 어둠과 빛의 조화,이런 것들이 모두 등잔불빛에서 맛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등잔불은,어느 시인도 말했지만 별이 되고 별빛이 되기도 합니다.지치고 목마른 나그네의 먼 여정에서 등잔불빛은 구원이자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거든요. ●해마다 5월5일에는 어린이들 초청 문:박물관을 경영하시면서 느끼신 아름다움,감동적인 일을 소개해주세요. 金:해마다 어린이날이면 어린이들을 초청합니다.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아이들을 앉혀 놓고 전깃불을 끄고 등잔불을 켜는데,등잔불 구경을 하는 프로그램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전깃불 아래서는 그렇게도 떠들어댑니다.그러다가 전깃불을 끄고 등잔불 하나만 켜놓지요.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등잔불을 보면서 아이들은 신기할 만큼 고요해집니다.어쩌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의 그 자연의 고요와 생명의 빛을 기억해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저는 그때 느낍니다. 지금 세상의 전깃불은 너무 밝다고.등잔은 반드시 제 그림자를 안고서 빛을 냅니다.그러나 전깃불은 제 그림자를 없애버리지요.등잔은 존재의 상생관계를 가르치지만 전깃불은 제 자신밖에 모르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그리고 어른들은 전깃불을 끄고 등잔을 켜두면 떠들면서 고함도 칩니다. 문:관장님의 삶은 분명 또 하나의 등잔이 되어 있습니다.경영의 어려움이 크실텐데,우리들이 등잔의 고향인 이곳을 자주 와서 잃어가는 어둠의 미학을 더 늦기 전에 배워야만 관장님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거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5)내 마음의 등잔불빛(下)

    전기가 없었던 예전,예전이라 해봐야 기껏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의 8할 정도는 가난한 생활을 했고 방안의 어둠을 밝히는 데 등잔불을 켰었다.불을 밝히는 기름은 주로 식물성이었는데, 가장 널리 사용된 들기름을 시작으로 아주까리기름,산초기름 등 우리나라 산하에서 자라는 나무 열매들을 볶아서 기름을 얻었다. 기름을 담아 보관하는 기름병이 발달하고,심지를 넣어 불을 켜는 그릇은 접시 또는 작은 잔 형태였다.가난한 집에서는 아주 드물지만 쇠고기국을 끓이게 되면 등잔기름으로 쓸 굳기름을 걷어내느라 각별한 조심을 했고,기름 한 숟갈이라도 얻어가기 위해서 아낙들은 부산을 떨기도 했었다. ●호형 도자기등잔 처음엔 궁궐서 사용 그러다가 1876년(고종13)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석유가 들어오게 되었는데,석유를 등잔 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호형(壺刑,아가리가 좁고 복부가 나온 항아리 형태)으로 만든 도자기 등잔이었다.석유의 인화성 때문에 등잔 뚜껑 위로 심지를 뽑아 올려 사용하도록 만들었다.초기에는 주로 궁궐에서 쓰여지다가 점차 양반집,중인들에게로 보급되어 일반 서민들이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였다. 석유와 호형 도자등잔은 우리나라 조명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새벽이었고,이같은 신문물의 위력을 돋보이게 한 것은 1885년 영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들어서서 생산된 성냥과 조화였다. 호형 등잔은 일제 때 일본의 고미술 수집상인들에 의해 대부분 일본으로 빠져나갔다.그 대신 일본 상인들은 그들의 대표적인 가마인 아리다가마(有田窯)에서 대량 생산한 저질의 등잔 서너개와 우리것 한 개를 맞바꾸는 속임수를 썼다.제대로 굽혀지고 모양도 괜찮은 도자등잔 대부분은 일본인 소장가들의 소유가 되고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흔히 민속품 전시장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도자등잔 열 개 중 아홉은 일본인들이 우리를 속일 때 썼던 물건들이다.등잔 하나도 제대로 지니지 못한 민족이니 무슨 민족사며 정통성을 제대로 지니고 있을지 새삼 두렵고 아프다. 한국등잔박물관 김동휘 관장이 등잔에 쏟고 있는 열정은 세월에 걸리지 않고 섣부른 지식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하고 뿌리 깊은 또 하나의 등잔처럼 느껴졌다. ●90%가 日이 빼돌린 명품 대신 받은 저질 문:이곳에 들어서면서 보니까 이곳 박물관 명칭을 적은 글자가 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韓國의 등잔 博物館’이라 되어 있더군요.왜 ‘등잔’이란 말만 한글로 적으셨는지요. 金:유식한 사람은 등잔을 燈盞이라 씁니다.또 어떤 유식한 이는 old lamp라고도 합니다.제가 박물관을 세운 뒤 이름 짓는 문제를 여러분들께 자문을 구했지요.고등기(古燈器),옛불빛 그릇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권하더군요.저는 옛 선인들의 생활문화가 지녔던 지혜를 현대사회는 물론 미래 세대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서 더 좋은 이름을 생각했습니다.그때 한 외국인이 쓴 글을 읽게 되었지요.아,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DEUNG-JAN’이라 적혀있더군요.등잔은 등잔이라 부르고 적어야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는데,일제 때 일본인들 앞에서 머리 숙이지 않기 위해 의학 공부를 했고,새 생명이 태어나는 일과 어머니의 고결함을 생각하면서 의사 일을 했습니다.중국인,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볼 때 ‘등잔’이 지닌 우리 것을 느끼도록 해줘야겠다는 뜻도 조금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문:이렇게 귀한 것들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세우게 된 데는 남다른 애정과 노력이 필연적이었겠지요.그 동안의 과정을 좀 들려주시지요. 金:조상들의 얼이 묻어 있는 민속자료들을 관심 깊게 지켜보아 왔는데,1971년 당시 국립박물관 학예실장이시던 최순우 선생께서 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제가 수집하고 있는 등잔을 보시고는 한국 최초·최고의 등잔사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용기가 생기더군요.수원에서 등잔만 가지고 첫 전시회를 열었는데 우리나라 등잔전시회의 효시가 된 셈이었지요.그 후 국립박물관과 공동으로 열거나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가져왔습니다. 그걸 보러 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저는 거듭 놀라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요.정신없이 살다보니 잃어버리게 된 자신들의 역사이자 자기의 한 부분이기도 한 등잔 앞에 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가 봅니다.돈으로 치자면 몇 푼도 안되는 등잔이지만,인간에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더 많은 소중한 추억과 역사와 자존심,순수성,영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등잔 앞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가 봅니다.제가 등잔을 볼 때마다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되듯이 말이지요. 문:등잔전시회를 하면서 그 외에 특별하게 깨달으신 것도 많으실텐데요. 金:전시회를 열면 관람객들의 편리를 위해 밝은 전기 조명을 하게 됩니다.전기 불빛은 등잔을 상하게 합니다.또한 많은 관람객들의 시선도 등잔을 상하게 합니다.전시회를 마치고 박물관으로 돌아오면 일정 기간 등잔들을 지하층 어둠 속에다 모셔둡니다.정양(靜養) 즉,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 피로나 병을 용향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만 합니다.그런 다음 다시 꺼내어 보면 등잔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문:등잔에겐 어둠이라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金:이곳 박물관의 시설이 비교적 어두운 이유도 그렇습니다.등잔불빛이 지닌 상징성을 한번 생각해보세요.등잔불빛은 전깃불처럼 공격적이지 않아요.전깃불에서는 어둠이라는 상대에게 항복받으려는 적극적 공격성과 아주 없애버리겠다는 섬뜩함도 느껴지거든요.그러나 등잔불빛은 어둠과 공존 상생합니다.어둠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필요한 절대조건입니다.또한 어둠과 밝음의 중간도 필요하지요.먼동이 터올 때의 그 절묘한 빛과 어둠의 상생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는 은은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적당한 어둠이 필요하지요.신록의 숲속에서 맛볼 수 있는 자연의 그늘,여름날 시냇가에 어리는 오후 산그늘,저녁의 기운이 짙어질 때 고향가는 산 언덕에서 바라본 그 기막힌 어둠과 빛의 조화,이런 것들이 모두 등잔불빛에서 맛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등잔불은,어느 시인도 말했지만 별이 되고 별빛이 되기도 합니다.지치고 목마른 나그네의 먼 여정에서 등잔불빛은 구원이자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거든요. ●해마다 5월5일에는 어린이들 초청 문:박물관을 경영하시면서 느끼신 아름다움,감동적인 일을 소개해주세요. 金:해마다 어린이날이면 어린이들을 초청합니다.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아이들을 앉혀 놓고 전깃불을 끄고 등잔불을 켜는데,등잔불 구경을 하는 프로그램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전깃불 아래서는 그렇게도 떠들어댑니다.그러다가 전깃불을 끄고 등잔불 하나만 켜놓지요.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등잔불을 보면서 아이들은 신기할 만큼 고요해집니다.어쩌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의 그 자연의 고요와 생명의 빛을 기억해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저는 그때 느낍니다. 지금 세상의 전깃불은 너무 밝다고.등잔은 반드시 제 그림자를 안고서 빛을 냅니다.그러나 전깃불은 제 그림자를 없애버리지요.등잔은 존재의 상생관계를 가르치지만 전깃불은 제 자신밖에 모르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그리고 어른들은 전깃불을 끄고 등잔을 켜두면 떠들면서 고함도 칩니다. 문:관장님의 삶은 분명 또 하나의 등잔이 되어 있습니다.경영의 어려움이 크실텐데,우리들이 등잔의 고향인 이곳을 자주 와서 잃어가는 어둠의 미학을 더 늦기 전에 배워야만 관장님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거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삼성하우젠 K-리그 2004] 車 “속타네”

    차붐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차범근 감독이 현대 시절 이후 9년 만에 수원의 사령탑으로 프로축구 K-리그에 복귀했으나 지난 한 달 동안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2무1패(승점2)로 13개 구단 가운데 11위다. 사실 경기 내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차 감독은 시즌 개막전 빠른 템포의 공격축구를 선언했고,지난 3경기에서도 공격수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펼쳐 스피드 축구가 어느정도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문제는 수비.모두 5골을 내줬지만 이 가운데 자책골과 페널티골이 각각 2골.안줘도 될 점수를 상대방에게 헌납하면서 승리의 기회마저 날려 버렸다. 전북과의 시즌 첫 경기.전반 24분 곽희주가 자책골을 내주면서 상대편의 기세를 올려줬고,후반 나드손의 동점골로 가까스로 패배를 면했다. 포항과의 두번째 경기에서는 김대의의 크로스를 ‘올림픽호’ 황태자 조재진이 오른발 슛,기선을 제압했지만 박주성의 핸들링 반칙으로 동점골을 내준 것이 빌미가 돼 1-2로 역전패했다. 무승부로 끝난 24일 성남전은 더욱 안타깝다.전반 15분 마르셀이 선제골을 뽑으며 기분좋게 출발했지만 20분 뒤 조병국이 어이없는 헤딩 자책골을 범했고,서정원의 반칙으로 역전 페널티킥을 허용했다.후반 들어 김대의가 동점골을 뽑아내며 다행히 연패의 수렁에 빠지지는 않았다. 차 감독은 당시 “골을 넣기도 바쁜데 우리 편 골문으로 공을 넣으니 이길 수가 있겠느냐.”고 푸념했다. 수원의 다음 상대는 최근 상승세를 타는 박종환 감독의 대구FC.성남에서 이적한 김대의가 최근 발목 부상을 입어 걱정이지만 17개월 만에 국내 리그에 복귀한 ‘풍운아’ 고종수가 성남전에서 교체출장,전성기 못지 않은 날카로운 패스를 선보여 위안이 된다.차 감독은 “수비의 핵인 김영선 조성환 등이 부상에서 회복하면 수비전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전했다. 다음달 5일 안방에서 차 감독의 갈증이 해갈될지 자못 궁금하다. 홍지민기자 icarus@˝
  • [술따라 맛따라] 藥담아 樂담아

    “반바지를 입거나,슬리퍼를 신고 오는 사람에겐 술이 다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합니다.술에 깃든 정성,임금이나 정승,판서들이 마시던 술의 품격이 훼손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민속마을에 사는 이득선(62)씨는 정말 요즘 시대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지식한 사람이다.술 한독 만드는데 남들 같으면 수십독 담그는 것 이상의 품을 들이고,돈을 갖고 사러와도 사람을 가려 술을 판다.우리 것,특히 그가 빚는 연엽주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착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씨는 부인 최황규(61)씨와 함께 연엽주를 빚는다.충남 무형문화재 11호인 연엽주의 제조 기능 보유자로는 최씨가 등록돼 있지만 술 빚기 작업은 부부 공동의 몫이다.이들은 연엽주를 ‘술을 빚는 게 아니라 약을 달이는 마음으로 만든다.’고 했다. “구한말 대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자 고종황제께선 잡곡밥과 서너가지 반찬으로 수라를 드셨다고 합니다.대신들은 임금의 기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특별한 약주를 수소문했는데,바로 충남 아산의 예안 이씨 집안의 연엽주가 채택됐다고 해요.” 이후 연엽주는 임금과 정승,판서들이 궁중에서 마시는 대표적 술이 됐다고 한다.연엽주(蓮葉酒)는 이름 그대로 쌀과 누룩에 연(蓮)의 잎을 넣어 빚는 술이다.이른 봄이나 늦은 가을 등 연 잎을 구하기 어려우면 연근으로 대체한다.연잎이나 연근은 열이 많거나 과로가 심할 때,출혈과 어혈을 없애는 기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연엽주엔 연잎 말고도 녹두,옥수수,이팥,엿기름,대추,감초,솔잎,독고마리 등이 들어간다.녹두는 여러가지 초독(草毒)을 중화시키고,이팥은 위벽을 튼튼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연엽주는 술을 빚은 후 1주일 정도면 술이 완성된다.보름에서 100일까지 발효와 숙성기간을 거치는 다른 약주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씨는 “쌀의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밑술과 덧술 과정 없이 한번만 빚어 맛을 낸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술을 빚기 전 누룩에 쏟는 이씨의 정성은 대단하다.공장 누룩도 써 보았으나 제맛이 안나 일일이 통밀을 빻아 디뎌 누룩을 띄운다.약쑥을 깔고 그 위에 누룩을 놓고,다시 약쑥을 깔고 누룩을 놓는 방식으로 서너층을 쌓아 띄운다.날씨에 따라 한달에서 두달 정도 걸리는데,그동안 대여섯번 누룩을 뒤집어 말려준다.누룩이 잘 뜨면 부수어 다시 말린 뒤 솥에 넣어 살짝 데쳐서 또 말린다. 술을 빚을 때도 일진 등을 보아 가장 좋은 날을 택하고,술독은 그 해의 운세와 지세 등을 보아 방향을 정해 묻는다.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에 현대적 생산설비가 끼어들 틈이 없다.민속주 생산자중엔 거의 유일하게 순수한 전통방식의 술빚기를 고집하고 있는 것.한달에 서너말 들이 한 독 담그는 정도다. 이씨는 “술이 반쯤 팔려야 비로소 다시 술을 담근다.”며 “그나마 여름엔 술이 쉽게 쉬어버려 거의 담그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암리민속마을 중심에 자리잡은 이득선씨의 집은 ‘참판댁’으로 불린다.이씨의 4대조가 이조참판을 지낼 때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집이다. 선비의 꼿꼿함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씨는 197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를 그대로 실천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당시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조교를 하던 그는 서울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고향에 내려와 매일 같이 3년간 집과 묘소를 오가며 상례를 지켰다. 그는 “묘막을 짓고 3년간 기거하지도 못했는데 매스컴이 지나치게 부각시켜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연엽주엔 이처럼 첨단의 시대에도 한국 전통의 예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씨의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연엽주 가격은 도자기병에 든 선물용(800㎖)이 1만 7000원,1.5ℓ짜리 페트병에 담은 것은 2만원이다.선물용은 직접 방문해야 살 수 있고,페트병에 든 것은 택배로도 보내준다.(041-543-3967). 글 아산 임창용기자 sdragon@ ●따라 빚으세요 재료:찹쌀,멥쌀,누룩,연근(또는 연잎),독고마리,녹두,이팥,엿기름,옥수수. (1) 찹쌀과 멥쌀을 반반씩 섞어 찬물에 10시간 정도 담가둔다. (2) 쌀을 건져 물기가 빠지면 시루에 고두밥을 짓는다.이때 시루 바닥에 솔잎을 깐다. (3) 고두밥을 돗자리에 펴서 차게 식힌다. (4) 누룩을 콩알 크기로 부순다. (5) 고두밥에 밥 양의 절반 정도의 누룩과 연잎,독고마리,녹두,이팥,엿기름,옥수수 소량을 섞어 물과 함께 고루 비빈다. (6) 술덧을 술독에 담고 맨 위에 연잎을 얹어 뚜껑을 덮는다. (7) 20도 정도 되는 실내에서 1주일 정도 발효시킨다. (8) 술이 익으면 용수를 박아 술을 떠내거나 술덧을 보자기에 싸 술을 짜낸다.14도 정도의 연엽주가 완성된다,˝
  • [산악문학인 안재홍의 산오르記] 강화 고려산

    주 5일 근무 시대를 맞아 산을 찾는 인구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이에따라 서울신문 주말 매거진 ‘We’에선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의 산을 찾아가는 산행 페이지 ‘안재홍의 산오르記’를 신설했습니다.필자 안재홍(52)씨는 산학문학가로,주말마다 산을 찾는 등산 애호가입니다. 고려산(高麗山·436m) 정상 부근에 진달래가 한창이다.강화도 읍내에서도 바라보이는 상봉에서 낙조봉까지 온통 진달래로 붉게 물들어 있다.참꽃으로도 불리는 진달래는 전국 어느 산에나 흔한 것이기는 하다.허나,고려산 진달래는 유난히 붉다. 마니산 그늘에 가려 숨겨져 있던 고려산이 진가를 발하고 있다.지난해부터 ‘진달래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상봉에 군 시설물이 있어 정상에는 오를 수 없으나 상봉에서 낙조봉까지 동서로 늘어진 산줄기 어디나 진달래가 흐드러져 있다.상봉 아래 북사면과 낙조봉 북서사면 부근의 진달래는 압권이다.간간이 잡목을 잘라내어 조망이 뛰어나고,시원스럽게 펼쳐지는 강화도 일원의 풍경이 일품이다.저수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농경지 풍경과 그 뒤로 보이는 석모도와 강줄기 같은 바다에 반사되는 햇빛이 눈부시다.산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는 진달래 밭과 함께 이름 그대로 낙조봉(落照峰)의 조망은 고려산에서 으뜸이다.고려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진달래 명산이라고 하는 화왕산·영취산·무학산·비슬산 등과 겨뤄도 결코 뒤지지 않는 진달래 명산이다. 고려산의 원래 이름은 오련산(五蓮山)이다.고구려 장수왕 4년(416년)에 고려산을 답사하던 인도의 천축조사가 이 산 상봉 오련지(五蓮池,5개의 연못)에 오색 연화가 핀 것을 보고 오색(白·黑·赤·黃·靑) 연화를 불심으로 날려보내,연화가 낙하한 곳에 가람을 세웠으니,백련사·흑련사(묵련사)·적련사(적석사)·황련사·청련사라 이름하였다. 백·흑·적·황색 연화가 떨어진 곳에는 가람을 지었으나 청색 연화는 조사가 원하던 곳이 아닌 곳에 떨어졌으므로 원하던 곳에 ‘원통암’을 세우고,청색 연화가 떨어진 곳에 청련사를 지었다.그리고 산 이름도 오련산이라 하였다.현재 고려산에는 백련사·청련사·적석사와 원통암 등 세 개의 사찰과 한 개의 암자가 있다. 고려산의 사찰 중에 청련사의 분위기가 뛰어나다.남향에 자리한 사찰은 전등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그윽하고 멋스러운 풍광을 자랑한다.강화는 고려왕조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을 강화로 옮겨 개경(開京,지금의 개성)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1932∼1207,고종 19∼원종 11) 동안 임시 수도였던 곳이다.이 때 ‘고려산’이란 이름을 얻어 지금까지 고려(高麗)와 이름과 한자도 같이 불리고 쓰인다. 고려산 산중에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우물이 있다.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4세기 이전에 축조된 정상의 큰 연못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으로 사용되었고,작은 연못 네 개는 연개소문이 군사 훈련 때 말에게 물 먹이던 곳이다.이 산 북쪽에서 태어난 연개소문이 치마대(馳馬臺)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오련지(五蓮池)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한다.지금도 세 개의 연못과 한 개의 샘이 이 산에 있다고 한다.지난해에 큰 연못이 있던 오련지를 상봉 아래 복원하여 진달래축제에 맞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백련사에서 상봉으로 오르는 길 옆에 있다. 고려산 산중의 사찰은 모두 차들이 올라갈 수 있게 도로가 나 있다.정상의 군 시설물이 이용하는 길이 따로 나 있고,백련사 오름 길은 진달래축제에 맞춰 확장·포장을 했다.세 개의 사찰로 오르는 길은 고려산 등산의 들머리 역할을 하고 있다.시멘트 포장길을 걷는 고통만 없다면,야트막한 산이면서 진달래가 산상의 화원을 이루고 오르면 조망이 뛰어난 고려산을 이 봄에 한 번 오를 일이다.가족과 함께,연인과 함께! ●볼거리·먹거리 고려산의 사찰 순례와 등산만으로도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강화도는 유적의 고장이다.고려와 조선조의 유적들이 섬 전체에 산재해 있다.강화대교를 건너면 왼쪽에 만나게 되는 강화역사관을 보고 광성보·덕진진·초지진·마니산을 보는 게 일일 관광코스다.또 하나는 고려궁지·강화산성 북문·오읍약수터·강화지석묘·보문사·전등사를 도는 코스가 있다. 등산코스는 고려산 외에 마니산,봉천산,혈구산 그리고 석모도의 해명산이 있다.강화읍내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우리옥의 백반이 먹을 만하다.백반 4000원.단체산행한 이들이 종종 이용한다.대로변에 공영주차장이 있다.강화도 특산물인 순무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또 포구 주변의 횟집에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가는길 강화읍에서 신점·외포리 방향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40분 간격으로 있다.부근리 삼거리에서 하차한 후 백련사 도로를 따라 오르면 된다.강화에서 고촌2리(적석사 들머리)행 버스를 이용하여 청련사 입구 하차,적석사는 고촌2리 하차.하루 7회.강화 개인택시 전화 (032)934-7898. 강화로닷컴 http://www.ganghwaro.com/goryeos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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