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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윤수의 오버헤드킥] K리그 5만 관중의 이면

    지난 8일 K-리그에서 의미 있는 신기록이 세워졌다.5만 5397명.FC서울과 수원의 경기는 프로축구의 중흥을 바라는 수많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아름다운 기록으로 남게 됐다. 이날 관중은 지난 1998년과 2002년 월드컵 직후 일시적으로 몰려들었던 ‘구름관중’과는 성질이 달랐다. 당시 관중은 축구 자체보다는 고종수와 이동국 안정환 김남일 등 월드컵 스타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월드컵의 기억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관중석도 텅텅 비기 시작했다.2006독일월드컵 때는 16강 탈락에다 이렇다 할 신예도 없어 ‘반짝 특수’도 기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날 5만 5000여명이 입장했다. 그저 일시적인 바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 관중의 숫자는 서울과 수원이라는 수도권의 ‘라이벌전’이 이뤄낸 것이다. 프로 스포츠는 지역 연고를 바탕으로 전개된다.1960년대 산업화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으로 이주했다.‘탈향’ 과정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 또한 상당히 많다. 바로 이 젊은 세대들이 국내외의 축구 문화를 다양하게 접하고 아버지 세대의 ‘고향 의식’과는 달리 자신들의 새로운 ‘지역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세대다. 이들에게 수원이나 서울 같은 도시는 뭔가 낯설고 기이한 곳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이 조건 속에서 프로축구의 새로운 지역성 모색이 가능하다. 또 5만 5000여 관중은 월드컵이나 국가대항전, 혹은 한·일 평가전 등의 ‘민족적 의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K-리그 라이벌전’이라는 프로축구의 원리 그 자체가 만들어낸 관중이다. 당일 예매표 2만 100장에 시즌 회원권 1만 5000명을 포함하면 관중의 60% 이상인 3만 5000여명이 축구 관람으로 주말 계획을 잡은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두루 생각할 때 앞으로 선수들과 구단이 어떤 자세로 그라운드에 나설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사실 어떤 점에서 5만 5000여명은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한 경기장엔 5만명이 넘게 모였지만 전국 6개 구장에서 벌어진 다른 경기들의 총 입장 관중은 4만 3000여명에 불과했다. 특히 축구 도시 울산에서 치러진 울산과 성남이라는 빅카드도 고작 5000여명밖에 들지 않았다. 각 구단이 어떤 ‘지역 조건과 문화’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지역의 세대 구성과 특성은 무엇인가, 각 팀이 어떻게 경기마다 독특한 흥행 요소를 창출해 팬들에게 찾아갈 것인가 하는 소중한 과제를 5만 5000이라는 숫자는 부여하고 있다.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 소나무 재선충 서울마저 뚫렸다

    소나무 재선충 서울마저 뚫렸다

    소나무류 재선충병이 끝내 서울까지 확산됐다. 조선 문정왕후 묘가 있는 ‘태릉’과 고종 및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 있는 ‘홍유릉’ 등 문화재보호구역에서도 재선충병이 발생해 비상이 걸렸다. 서울의 대표적인 소나무 군락지 남산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울시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달 23일 광릉지역 잣나무에서 발견된 재선충병은 국내 미기록 재선충으로 확인됐다. 산림청은 11일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서울시 노원구 태릉의 소나무 1그루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의 소나무(5그루), 잣나무(1그루)에서 재선충병 감염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태릉은 산림면적이 150㏊로 소나무와 잣나무 등 침엽수가 3만 4793그루에 달한다. 홍유릉은 114㏊의 산림 중 침엽수가 3만 1552그루다. 감염목은 흉고 둘레 29∼30㎝의 80∼90년생 나무들로 수형이 우수하다. 문제는 방제방법이다. 재선충병이 새로 발생한 지역은 확산 저지를 위해 주변 소나무와 잣나무를 모두 잘라내지만 문화재보호구역은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문화재청은 태릉과 홍유릉의 고사목 107그루를 매개충이 우화(羽化·날개가 달려 성충이 되는 것)하는 4월 말 이전에 모두 제거하기로 했다. 아울러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소나무류에 대한 예방주사를 놓을 계획이다. 서울시도 이날 태릉을 관할하는 노원구와 중랑구에 긴급 공문을 보내고 발견지역을 입산통제구역 및 소나무 반출·입 금지구역으로 지정, 고시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서울 김경두기자 skpark@seoul.co.kr
  • [한국 전기역사 120년] (상)어제와 오늘

    [한국 전기역사 120년] (상)어제와 오늘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지 올해로 꼭 120년이 됐다.1887년 3월 초 저녁 경복궁 내 건천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다. 개화의 바람을 타고 온 문명의 빛은 그 후 국가경제발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시련을 딛고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역사와 과제, 전망 등을 살펴본다. 전기에 대한 고종 황제의 사랑은 각별했다. 고종의 지대한 관심은 1898년 1월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는 황실에서 출자한 국영기업 형태로 운영됐다. 오늘날 한국전력의 모태가 됐다. 경복궁에서의 시등(始燈)이 조그마한 자가발전설비로 이뤄진 것이라면 한성전기 설립은 본격적인 전력사업의 시작을 의미한다. 초기의 전력사업은 전차사업으로 나타났다.1899년 5월4일은 전차가 동대문과 흥화문(옛 서울고 자리) 구간을 시험운행한 역사적인 날이다. 한성전기는 이어 전등사업에도 관심을 돌렸다. 최초의 민간전등은 1900년 4월10일 종로네거리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 가로등에서 켜졌다. 이날을 기념해 지난 1966년부터 해마다 4월10일을 ‘전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전력사업은 해방 후 큰 위기를 맞았다. 발전설비의 약 90%가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다.6·25전쟁을 거치면서 전력난은 더 심각했다. 공장을 돌리기조차 어려웠다. 민간 가정에서 전깃불은 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 남한에는 조선전업 등 전력 3사가 있었으나 만성적인 적자운영으로 전력난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1961년 7월 한전이 창립됐다. 한전은 1964년 4월 역사적인 ‘무제한 송전’을 실시했다. 해방 후 되풀이됐던 전력난이 해소됐다. 한전은 1965년 12월부터 농어촌전화(電化)사업에 매진,1979년 98%의 전기보급률을 달성했다. 부잣집의 전유물이던 전기가 거의 모든 일반 가정으로까지 보급된 것이다. ‘국내용’이던 전력사업은 1990년대부터 세계 무대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한전은 1995년 2월 필리핀 말라야 화력발전소 성능복구 사업을 따냈다. 이듬해에는 필리핀 일리한 복합화력발전소 건설·운영사업 수주에도 성공했다. 전력수출시대를 연 해외사업은 순항 중이다. 중국, 레바논, 미얀마, 리비아, 캄보디아, 우크라이나 등에 진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다. 남과 북의 전기도 하나로 이었다. 한전은 2004년 12월 북한과 개성공단 전력공급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2005년 3월 개성공단에 전기를 공급했다.1948년 5월 전력교류가 단절된 지 57년 만에 분단의 벽을 넘는 쾌거였다. ●세계 수준으로 성장한 전력산업 이 땅에 전등이 밝혀진 이후 120년간 우리나라의 전력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경제성장의 버팀목이었던 한전은 세계가 인정하는 전력회사로 성장했다. 글로벌 종합에너지 그룹으로 비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한전의 전기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당 정전(停電)시간은 2006년 18.8분. 타이완(30분), 미국(122분), 프랑스(51분)보다 휠씬 짧다. 규정전압 유지율은 99.9%, 주파수 유지율은 99.7%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전은 지난해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파이낸셜 타임스가 꼽은 500대 기업, 포브스지 2000대 기업에 모두 선정됐다. 미국 에너지 분야 전문기관인 플래트(Platts)는 한전을 전력산업 부문 세계 6위, 아시아·태평양 최고의 전력회사로 선정했다. 이원걸 한전 사장은 “‘글로벌 한전’이 될 수 있도록 첨단 전력기술 개발과 해외전력 시장 진출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전기 역사 120년 발자취 -1887:경복궁 내 건천궁에서 시등(始燈)-1899:대중교통의 혁명, 첫 전차시대 개막 -1964:전력 무제한 송전, 한강의 기적 -1978:제3의 불, 원자력발전시대 개막 -1979:농어촌전화(電化)사업 완료 -1995:전력도 수출역군, 필리핀 말라야 발전소 운영 -2005:남과 북의 전기 하나로 잇다. 개성공단 전력공급 개시 자료:한국전력공사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15)가객 박효관의 활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15)가객 박효관의 활약

    ‘공산에 우는 접동 너는 어이 우짓는다. 너도 나와 같이 무슨 이별 하였느냐. 아무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한양 인왕산 필운대의 마지막 주인은 문화관광부에서 지난 2002년 8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가객(歌客) 박효관(朴孝寬·1800∼1880?)이다. 호는 운애(雲崖)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이 일대에서 몇십년 풍류를 즐기다 세상을 떠난 뒤 그가 활동하던 운애산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운애산방은 배화학당이 들어섰던 자리이다. ●대원군이 후원한 당대 가객 박효관의 인적사항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가 과연 중인 출신인지도 확실치 않다. 유봉학 교수가 ‘공사기고(公私記攷)’를 소개한 글에 의하면, 박영원 대감의 겸인으로 일했던 서리 이윤선이 1863년에 재종매를 혼인시키면서 박효관을 동원했는데 수군(守軍)이라는 직함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그가 오군영(五軍營)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악원의 악공들은 노비 출신이지만, 오군영의 세악수(細樂手)들은 노비가 아니다. 오랫동안 연주를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했고, 최소한의 한문도 쓸 수 있어야 했다. 그가 가곡(歌曲)의 정통성에 대해 자부심이 높았던 것을 보면, 최소한 중간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군영 세악수들은 18세기 이래 민간의 가곡 연행(연회연)에 점점 더 깊이 개입해, 군인 봉급에 의존하지 않고 민간 잔치에 불려나가 연주하고 받는 돈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장악원 악공들은 고유업무가 있기 때문에, 두가지 일을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만기요람’을 찾아보면 오군영에 배속된 군사들의 급료미는 매삭 9두이고, 세악수는 6두로 되어 있다. 국가에서는 낮은 보수를 주는 대신, 군악 연주 외에 민간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 듯하다. 용호영의 군악대와 이패두가 거지들의 풍류잔치에 억지로 불려나갔다가 행하(출연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이야기를 4회에서 소개했다. 구포동인(안민영)은 춤을 추고 운애옹(박효관)은 소리한다. 벽강은 고금(鼓琴)하고 천흥손은 피리한다. 정약대·박용근 해금 적(笛) 소리에 화기융농하더라. 박효관의 연행에 참여한 기악연주자들은 대부분 오군영 세악수였다. 신경숙 교수가 ‘고취수군안(鼓吹手軍案)’ 등을 분석해 세악수 명단을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금옥총부’ 92번 시조에 활동모습이 담긴 천흥손·정약대·박용근 등은 오군영 소속의 세악수임이 밝혀졌다. 군안(軍案)에는 세악수의 인적사항에 부(父)를 밝혔는데, 친아버지뿐만 아니라 보호자나 스승 역할을 하는 사람 이름도 썼다. 피리를 전공했던 용호영의 군악수 천흥손이 대금 이귀성·윤의성, 피리 김득완의 부(父)로 올라 있었다. 정형의 세악편성에서 세피리는 두명이 필요했으니, 천흥손은 하나의 악반을 주도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포동인은 대원군이 안민영에게 내린 호인데, 여든이 된 스승은 노래하고 환갑이 지난 제자는 춤을 추었으며, 후배들은 반주했다. 안민영이 사십년 배웠다고 했으니, 제자의 제자들까지 박효관을 찾아 모인 셈이다. 인왕산하 필운대는 운애선생 은거지라. 풍류재사와 야유 사내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날마다 풍악이요 때마다 술이로다.(‘금옥총부’ 165번) ●운애산방서 승평계와 노인계 주도 그가 필운대에 풍류방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기자, 대원군이 그에게 운애(雲崖)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안민영은 그를 운애선생이라 불렀으며, 풍류재사와 야유 사내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박선생’이라 불렀다. 위항시인들이 시사(詩社)를 형성한 것 같이, 풍류 예인들은 계( )를 만들어 모였다. 안민영은 ‘금옥총부’ 서문에서 그 모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때 우대(友臺)에 아무개 아무개 같은 여러 노인들이 있었는데, 모두 당시에 이름 있는 호걸지사들이라, 계를 맺어 노인계(老人 )라 하였다. 또 호화부귀자와 유일풍소인(遺逸風騷人)들이 있어 계를 맺고는 승평계(昇平 )라 했는데, 오직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게 일이었으니 선생이 바로 그 맹주(盟主)였다.” 안민영은 ‘금옥총부’ 68번에서 “우대의 노인들이 필운대와 삼청동 사이에서 계를 맺었다.”고 분명한 장소까지 밝혔다. 유일풍소인은 세상사를 잊고 시와 노래를 벗삼은 사람이다. 벼슬한 관원은 유일(遺逸)이 될 수 없고, 풍류를 모르면 풍소인(風騷人)이 될 수 없다. 경제적인 여유를 지닌 중간층이 풍류를 즐겼던 모임이 바로 승평계이고, 평생 연주를 즐겼던 원로 음악인들의 모임이 바로 노인계이다. 성무경 선생은 “박효관의 운애산방은 19세기 중후반 가곡 예술의 마지막 보루”라고 표현했다. 가곡은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세련된 성악장르로 거듭나기 위해 치열한 자기연마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스승 박효관과 제자 안민영이 ‘가곡원류’로 편찬하였다. ●안민영과 편찬한 ‘가곡원류’ 음악에 여러 갈래가 있지만, 박효관과 안민영의 관심은 가곡에 있었다. 문학작품인 시조를 노래하는 방식은 시조창(時調唱)과 가곡창(歌曲唱)이 있다. 시조창은 대개 장고 반주 하나로 부를 수 있고, 장고마저 없으면 무릎 장단만으로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가곡창은 거문고·가야금·피리·대금·해금·장고 등으로 편성되는 관현반주를 갖춰야 하는 전문가 수준의 음악이다. 오랫동안 연습해야 하고, 연창자와 반주자가 호흡도 맞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객을 전문적인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가객을 키우려면 우선 가곡의 텍스트를 모은 가보(歌譜)가 정리되고, 스승이 있어야 하며, 가곡을 즐길 줄 아는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박효관과 안민영은 사십년 넘게 사제지간이었으며, 대원군같이 막강한 후원자를 만나 가곡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10년 섭정을 마치고 2선으로 물러서자 이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언젠가는 천박한 후원자들에 의해 가곡이 잡스러워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전통음악 가곡 보전 박효관이 1876년 안민영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면서 덧붙인 발문에 그 사연이 실렸다. “근래 세속의 녹록한 모리배들이 날마다 서로 어울려 더럽고 천한 습속에 동화되고, 한가로운 틈을 타 즐기는 자는 뿌리없이 잡된 노래로 농짓거리와 해괴한 장난질을 해대는데, 귀한 자고 천한 자고 다투어 행하를 던져 준다.(줄임) 내가 정음(正音)이 없어져 가는 것을 보며 저절로 탄식이 나와, 노래들을 대략 뽑아서 가보(歌譜) 한권을 만들었다.” 그는 이론으로만 정음(正音) 정가(正歌)의식을 밝힌 것이 아니라, 창작으로도 실천했다. 안민영은 사설시조도 많이 지었는데, 박효관이 ‘가곡원류’에 자신의 작품으로 평시조 15수만 실은 것은 정음지향적 시가관과 관련이 있다. 님 그린 상사몽(相思夢)이 실솔(·귀뚜라미)의 넋이 되어 추야장 깊은 밤에 님의 방에 들었다가날 잊고 깊이 든 잠을 깨워볼까 하노라. 사설시조는 듣기 좋아도 외우기는 힘든데, 훌륭한 평시조는 저절로 외워진다. 박효관의 시조는 당시에 널리 외워졌다. 위 시조는 고교 교과서에 실려 지금도 널리 외워지고 있다. 님 그리다 죽으면 귀뚜라미라도 되어 기나긴 가을 밤 님의 방에 들어가 못다 한 사랑노래를 부르겠다고 구구절절이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그의 시조는 양반 사대부의 시조에 비해 직설적이다. 고종의 등극과 장수를 노래한 송축류, 효와 충의 윤리가 무너지는 세태에 대한 경계, 애정과 풍류, 인생무상, 별리의 슬픔 등으로 주제가 다양하다. 삼대 가집으로는 ‘청구영언’과 ‘해동가요’ ‘가곡원류’를 든다. 가곡원류는 다른 가집들과 달리, 구절의 고저와 장단의 점수를 매화점으로 하나하나 기록해 실제로 부르기 쉽도록 했다. 남창 665수, 여창 191수, 합계 856수를 실었는데, 곡조에 따라 30항목으로 나눠 편찬하였다. 몇 곡조는 존쟈즌한닙, 듕허리드는쟈즌한닙 등의 우리말로 곡조를 풀어써, 가객들이 찾아보기도 편했다. 그랬기에 가장 후대에 나왔으면서도 10여종의 이본이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신문학과 신음악이 들어오면서 이 책은 전통음악의 총결산 보고서가 되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Let’s Go] 전국의 고택명소

    [Let’s Go] 전국의 고택명소

    컴퓨터는 물론 TV도 없다. 푹신한 침대에 익숙해진 허리는 아프다고 아우성이다. 고택체험에는 이처럼 약간의 불편함이 따른다. 하지만 하루쯤 양반 집 사랑채에서 잠을 청하고, 장닭의 울음소리에 단잠을 깰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불편은 감내할 수 있지 않을까. 고택체험을 할 수 있는 전국의 명소를 소개한다. 하회마을과 퇴계 종택 등 조선시대 생활양식과 문화를 잘 보여주는 고택들이 즐비한 안동지역은 표로 정리했다. ●만산고택 조선 말기의 문신 강용이 고종 15년에 지은 건물. 작가들의 문화 탐방이나 건축 전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고택체험을 원하는 방문객에게는 칠류헌과 서실을 개방하고 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1박(5인 기준)에 칠류헌 10만원, 서실 5만원. 종가댁 아침상 5000원.(054)672-3206. ●송소고택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있는 99칸짜리 한옥.1880년 송소 심호택이 지었다. 안채, 사랑채 등 건물마다 마당이 딸려 있고, 내부를 반쯤 가려주는 헛담이 설치되어 있다. 주왕산국립공원, 주산지와 절골계곡, 달기약수탕 등 관광명소들이 자동차로 5∼30분 거리에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승합차가 청송시외버스터미널로 마중나간다.1박(2인 기준) 4만∼9만원선. 별당독채는 18만원. 식사 5000원. 취사는 불가.www.songso.co.kr,(054)873-0234. ●개실마을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이 400년 가까이 대를 이어 살아오는 곳. 주요 볼거리로는 점필재 종택과 지역 유림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도연재 등이 있다. 떡메치기, 엿만들기 등 전통체험도 가능하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1박 3만원.www.gaesil.net,(011)810-5936. ●윤증고택 구조가 간결하면서 견실해 신선한 맛을 풍기는 조선 후기 한옥. 후손들이 고택에 그대로 살고 있어 깨끗하게 보존됐다. 담장과 행랑채 대문이 없는 독특한 모습. 사랑채는 전체를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1박에 6~8만원. 직접 담근 된장, 간장, 고추장 등도 판매하고 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041)735-1215, www.yunjeung.com ■ 그 밖의 가볼만한 고택 ●한개마을 낙동강 지류인 백천과 영취산 자락에 자리잡은 성산 이씨 집성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던 이석문(李碩文)이 평생을 은거한 북비고택과 TV 등의 촬영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한주종택 등 100여 채의 고택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총 3300여m에 달하는 마을 돌담길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054)930-6063. ●주실마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일월산 자락에 자리잡은 한양 조씨 집성촌.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80년 가까이 양력설을 쇠고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워낙 심심산골에 자리잡고 있어 ‘육지속의 섬’이라고도 불리는 문향(文鄕)이다. 시인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학초정 등이 주요 볼거리.5월18∼20일까지 ‘지훈 예술제’가 열린다.(054)680-6067. ●운조루 섬진강과 지리산의 따뜻한 품이 느껴지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자리잡고 있다.‘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구름 위로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의 이름만큼 아름답다. 사랑채 내부의 마루 공간, 거기에 이어지는 누마루, 중간에 기둥을 생략한 과감한 구조의 사랑방 등은 건축주의 집에 대한 자존심이 엿보인다.1776년 건축됐다. 구례군청 문화관광과 (061)780-2224. ●선교장 천상의 향기를 담은 맑디맑은 곳. 건물 10동에 총 120여 칸의 규모를 자랑한다. 국가지정 문화재로 선정된 최초의 민간주택이기도 하다. 건평만도 300평이 넘고, 잘 가꾸어진 정원과 연못, 정자까지 갖춰 한국을 대표하는 장원으로 손색이 없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033)640-4543. ●닭실마을 ‘닭이 알을 품은 모양(金鷄抱卵)’을 하고 있어 이름지어졌다. 조선중기의 문신 충재 권벌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전통 마을. 한과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총재고택과 청암정 등이 둘러볼 만한 곳. 부석사와 청량사 등 봉화·영주 일대 문화유산 답사를 겸할 수 있다. 닭실마을 부녀회 (054)673-9541. ●양진당 풍양 조씨(氏)의 선조 조정(趙靖)이 1626년 지은 가옥. 집 전체가 땅 위에 떠서 2층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상식(高床式·기둥 아래에 주춧돌을 놓은 방식) 고택이다. 땅 기운이 습해 건물 전체를 들어올린 발상에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99칸짜리 저택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작아졌지만, 조선 중기 건축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054)537-6063. ●외암리 민속마을 입구에서부터 5㎞에 걸쳐 마을 전체를 돌아나가는 돌담길의 우아하고 소박한 곡선과 그 사이를 잇는 나무들이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낸다. 다른 민속마을들이 어설픈 관광지로 변해가는 것에 비해 한국의 전통적인 마을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눈여겨보아야 할 곳은 영암군수댁과 예안 이씨(氏) 종가인 이참판댁. 충남 아산시 송악면.(041)544-8290. ●김동수 가옥 창하산(蒼霞山)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동진강(東津江)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터에 세운 가옥. 나지막한 건물과 군더더기 없는 마당,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건축 자재로 쓴 행랑 등 보기 드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보수, 개조되지 않아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1784년 건립.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정읍시청 문화관광과 (063)535-5141∼7. ■ ‘신비의 왕국 대가야’ 고령 ●‘현의 노래´ 가야금 12줄의 비밀 역사는 분명 승자의 기록이다. 하지만 대가야처럼 500년 가까운 역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경우는 흔치 않다. 남아 있는 기록도 대부분 전성기는 생략된 채 왕국의 쇠락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미스터리가 많은 것이 오히려 대가야의 왕도(王都) 고령 여행의 장점이 된다. 여행객들이 마음껏 역사적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가야의 역사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가야금을 만든 우륵. 그는 왜 하필 가야금을 12줄로 만들었을까? 이런 의문을 속시원하게 풀어줄 기록은 역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 낀 당시 상황에서 대가야 주변 12국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할 필요를 느낀 가실왕(몇대 왕인지조차 불분명하다)이 우륵에게 주변국들을 상징하는 12줄의 가야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하나의 의문점. 우륵은 왜 자신을 총애한 가실왕을 버리고 신라로 갔을까? ‘귀화설’‘망명설’‘밀사설’ 등 논란이 분분하지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충북 충주시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며 통한의 세월을 보낼 바에야 차라리 조국의 명운과 함께 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이 또한 여행자의 상상에 맞겨질 부분. ●20m~50m 이름모를 봉분 200여기만 가실왕 이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던 562년. 저 유명한 ‘신라장군 이사부’는 화랑 김사다함과 기병 5000명을 선봉으로 세우고 대가야를 침노했다. 신라의 급습을 예상치 못했던 대가야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스러져 갔고, 대가야의 성지 가야산은 이들의 피로 물들여졌다. 망국을 예감한 대가야의 도설지왕이 신라에 항복하면서 ‘철의 제국’ 대가야는 어느 왕의 묘인지도 모르는 지름 20∼50m의 거대한 봉분 200여기만을 남긴 채 허망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대가야 군사들의 철검은 고령땅 아래서 그렇게 1500년 가까이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9일까지 대가야 체험축제 그리고 오늘. 역사속으로 홀연히 사라진 왕국은 볼품없는 시골도시를 살리는 관광자원으로 되살아났다. 고령 여행의 첫걸음은 지산리 고분군에서 시작된다. 거리는 5㎞남짓. 최초로 순장풍습이 확인된 44호 고분 등 주산 능선을 따라 형성된 고분군을 둘러보는데 2시간쯤 걸린다. 대가야 박물관과 왕릉전시관을 둘러본 다음 고분군 산책에 나서는 게 좋다. 고분의 주인과 순장자들에 대한 궁금증이 산책길에 즐거움을 더해 주기 때문. 1977년 44호 고분 발굴 이후 총 7기의 고분이 발굴됐다. 가장 큰 47호 고분만이 ‘금림왕릉’이라 구전될 뿐, 나머지 고분들은 번호로만 존재한다. 4월6∼9일까지 고령읍내 일대에선 ‘2007 대가야 체험축제’가 열린다. 철과 관련된 각종 체험행사와 함께 역사공부를 하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여행수첩 ▶가는 길 자동차:서울→경부고속도로→88고속도로→고창 나들목, 또는 중부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88고속도로→고창 나들목. 시외버스: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에서 고령행 버스. 하루 5회.4시간30분 소요. 기차:동대구역→서부정류장(지하철 1호선 성당못역)→고령행 버스 ▶문의 대가야 체험축제위원회 fest.daegaya.net (054)950-6424 고령군청 문화체육과 (054)950-6111∼2 배재대 관광이벤트연구소 (042)520-5790
  • [스포츠 돋보기]7000만원이 250억 이길 수 있나?

    |도쿄 최병규특파원| 우리나라에 피겨스케이팅이 첫선을 보인 건 1894년 겨울로 전해진다. 당시 조선 주재 외국인들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은 경복궁 향원정에서 ‘얼음 위를 나는 기술’을 선보였다. 이후 ‘빙족회(氷足會)’라는 이름의 피겨팀이 등장했다. 한국피겨는 100년을 웃도는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김연아가 지난 24일 일본 도쿄에서 처음 참가한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피겨 사상 첫 메달을 따냈다. 그동안 한국의 성적은 2001년 박빛나가 세운 23위가 최고였다. 김연아는 분명 한국피겨의 역사를 또 새로 썼다. 그러나 씁쓸하다. 메달 뒤에 숨겨진 우리 피겨의 현실 때문이다. 이 대회 ‘톱5’ 가운데 3명이 순위를 쓸어담은 일본과 한국의 토양은 분명 다르다. 도쿄체육관 밖에서 표를 구하려는 피켓을 든 수십명의 일본팬 모습은 분명 충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속이 쓰렸던 건 ‘김연아팀’의 ‘악전고투’였다. 혹자는 이번의 쾌거를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린 것”이라고도 말한다.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에게 쏟아붓는 돈은 스폰서 및 공식·비공식을 합쳐 연간 25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김연아가 대한빙상경기연맹에서 공식적으로 받는 지원금은 연간 7000만원이 전부다. 한 차례의 광고 출연으로 번 돈은 거의 바닥이 났다. 아사다가 대형버스를 대절해 혼자 타고 다닌 반면 김연아는 어렵게 마련한 6인승 승합차에 단출한 팀원들과 구겨지듯 끼어서 다녔다. 지난해 우리 체육계는 김연아를 위한 ‘2010밴쿠버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그러나 실제 효과는 아직 느낄 수 없다. 단 1명뿐인 연맹의 피겨 실무자가 이번 대회는 물론 그동안 단 한 차례도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5일 이시카와현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가 고층건물에서도 현기증을 느낄 만큼 도쿄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입상자들의 ‘갈라쇼’가 펼쳐진 도쿄체육관은 되레 인파로 넘쳐났다. cbk91065@seoul.co.kr
  • [Seoul In] 14일 부동산투자 특강

    서초구(구청장 박성중) 14일 오후 2시 서초구민회관 대강당에서 부동산 전문가들을 특별 초빙해 ‘올바른 부동산 투자전략’에 대한 강의를 한다. 고종완 리-멤버스 대표의 ‘부동산시장 전망 및 신투자 전략’, 박준호 명지대 교수의 ‘토지투자 및 개발’, 조성근 반포세무서장의 ‘세금 바로 알기’, 최종수 서초구 부동산정보과장의 ‘중개업자의 준수사항 및 행정처분 사례’ 등으로 꾸몄다. 부동산정보과 570-6041.
  • 최고 목판 인쇄물 다라니경 제작연대 논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인정받고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제작연대 논란에 휩싸였다. 익명을 요구한 문화재위원은 지난 8일 1024년 씌어진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重修記)’를 근거로 8세기 초반~중반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제작됐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주장을 폈다. 중수기에 “두루마리로 된 무구정광다라니경과 또 다른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넣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 과정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110여장의 종이뭉치도 발견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묵서지편(墨書紙片)’으로 불리던 이 종이뭉치를 40년동안에 걸쳐 보존처리하고 최근 판독해 ▲중수기와 ▲보협인다라니경 ▲1038년 불국사서석타중수형지기 ▲보시명공중승소명기 등을 확인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내부검토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중수기의 일부내용을 외부로 유출해 연대를 무려 3세기나 끌어내리는 ‘자살골’을 자초한 중앙박물관은 “고려 제작설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김성구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9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는 측천무후자(字)가 빈번히 발견된다.”면서 “개인적으로는 통일신라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측천무후자란 당나라 고종의 황후 측천무후의 집권기(690∼704)에 만들어진 기존의 한자와는 다른 508자의 글자로 당대에만 사용됐다. 하지만 유물관리부 실무자인 김상태 학예연구관은 “석가탑이 고려시대에 중수됐다는 사실 말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통일신라시대 것인지, 고려시대 것인지 추측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는 없다.”면서 “몇년이 걸릴지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판독 결과가 나오면 종합적인 조사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뮤지컬 ‘명성황후’ 관객 100만 돌파

    뮤지컬 ‘명성황후’ 관객 100만 돌파

    12년째 공연중인 한국 창작뮤지컬 ‘명성황후’가 1일 100만명째 관객을 맞았다. 전용극장도 없이 전국과 해외를 떠돌며 이룬 역사적 기록이다. 과연 ‘명성황후’가 가진 어떤 매력이 관객들을 끌어들였을까. 정조대왕을 다룬 역사뮤지컬로 명성황후와 관객동원 대결을 벌이게 될 ‘화성에서 꿈꾸다’의 연출자 이윤택씨는 “드라마의 힘”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명성황후’는 이문열씨가 원작자로 이야기가 있는 뮤지컬이기 때문에 10년이 넘게 버텼다.”고 말했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희곡 ‘여우사냥’을 연극 ‘날보러와요’로 쓴 김광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가 각색한 것이 뮤지컬 ‘명성황후’다. ‘명성황후’의 연출가인 윤호진 에이콤 대표는 “무당 수태굿과 무과시험 장면을 추가해 극적 재미를 보완하는 등 공연 때마다 내용과 볼거리를 고쳐왔다.”고 설명했다. 10여년전 처음 공연을 본 관객들은 “초연때는 고종의 비중이 낮았는데, 현재는 고종의 고뇌가 부각돼서 좋았다.”거나 “예전이 오페라 같았다면 지금은 뮤지컬에 근접한 느낌” 등의 관람평을 공연 홈페이지에 남기며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명성황후’는 한국인들에게는 아픈 역사의식을 건드려 뭉클함을 심어주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한국미를 느낄 수 있는 필수 관람 공연으로 자리잡았다.‘명성황후’ 공연장에서는 항상 외국인 관객을 만날 수 있고, 해외 유명 뮤지컬 배우나 제작자들도 한국에 오면 꼭 관람한다. 영화계에서 관객 100만명은 흔한 숫자지만, 하루 1∼2회 공연에 제대로 된 공연장을 빌리기도 힘든 뮤지컬에서 100만 관객은 값진 숫자다. 비언어극 ‘난타’가 2002년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고, 뮤지컬 ‘지하철1호선’이 13년째 공연중이다.‘명성황후’는 한국 공연계의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712년동안 출연했던 배우만도 1000명이 넘어 조승우, 홍경인, 윤석화, 김영호 등의 스타가 ‘명성황후’를 거쳐갔다. 제작사인 에이콤은 이날 특별히 100만명째 관객을 선정하지는 않았다. 일 100만 돌파 기념잔치를 열어 외제차 등 경품을 관객에게 증정하고, 떡과 음료를 돌릴 예정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모든 종단에 불교중앙박물관 개방”

    “모든 종단에 불교중앙박물관 개방”

    “조계종에 국한하지 않고 태고종, 천태종을 비롯한 모든 종단에 문을 열어 이름 그대로 불교계의 중심 박물관이 될 것입니다.”오는 26일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1∼3층에서 개관하는 불교중앙박물관의 실무 총책임자인 탁연(59) 조계종 문화부장.360평 규모의 전시실이며 수장고·보존처리실 공사와 개관전에 모실 국보·보물급 성보 정리 등 막바지 작업을 총지휘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종단별 성보 전시하는 열린 공간” “비록 조계종이 세우긴 했지만 한국불교 1번지에 자리잡은 맏형격 성보박물관인 만큼 모든 종단의 성보를 소개하고 관리. 전시하는 열린 불교박물관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불교중앙박물관은 정대 총무원장 재임시절인 지난 2002년부터 시작돼 2005년 입적한 법장 스님과 지금의 지관 스님까지 5년간 3대에 걸친 총무원장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해와 역경 끝에 이룬 결실. 탁연 스님은 문화부장 소임을 맡은 2003년 3월부터 박물관 일을 진행, 이듬해 6월 잠시 떠났다가 2005년 5월부터 다시 문화부장에 취임해 개관을 성사시킨 주역이다. ●“불교문화재, 전체 문화재의 75% 차지” “불교 문화재는 국보·보물 등 지정 문화재의 42.5%, 비지정문화재까지 포함하면 전체 문화재의 75%를 차지할 만큼 한국 문화재의 절대적인 부분입니다. 단순히 문화재를 보여주는 전시 공간이 아니라 각 사찰 성보박물관의 유물을 지속 관리하고 위탁 보존까지 책임져야 할 막중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소장 유물이 700여점에 그쳐 한국불교 맏형격 박물관 위상에 걸맞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상시 소장유물의 규모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전국의 각 사찰 소장 유물이며 개인 소장품까지 위탁 전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무엇보다 전체 불교 유물을 관리하면서 한국불교를 보여주는 역할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탁연 스님은 지난 2002년 발족한 사찰문화재 발굴조사단을 이끌며 각 사찰 문화재 일제조사를 벌여와 매년 보고서를 내고 있다. 소장 유물뿐 아니라 도난 문화재도 일일이 점검하는 만큼 도난 문화재 관리와 환수 노력도 당연히 중앙박물관의 기능에 포함된다는 설명이다. ●운영예산 확보 어려워 걱정 탁연 스님은 이런 박물관 위상과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개관 후를 벌써부터 걱정한다. 이미 확보한 학예사 5명과 보존처리 전문가를 포함한 관리 직원 등의 인건비와 운영비 부족 때문이다. 국고보조금을 감안하더라도 전체 운영 예산 확보가 쉽지 않으리란 전망이다. 박물관장 자리도 그중 하나다. 현재 조계종 종령은 문화부장이 박물관장을 겸직토록 하고 있으나 박물관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별정직 관장을 별도로 두어야 한다는 게 탁연 스님의 생각이다.“아무래도 개관하고서도 당분간은 제가 관장직을 맡아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위상에 걸맞은 박물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선 엄연히 유능한 관장이 있어야 합니다. 사찰 성보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스님들 중 한 분이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100주년 서울대병원 뿌리 논란

    100주년 서울대병원 뿌리 논란

    서울대병원이 1907년 설립된 대한의원 창립 100주년기념사업을 추진중인 가운데 일왕이 임명한 일본인 대한의원 창설위원장의 사진이 담긴 개원식 기념엽서가 처음으로 발견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만들었다는 서울대병원측의 기존 주장을 뒤집는 중요한 자료다. 연세대 의사학과 여인석 교수가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에서 찾아 28일 공개한 이 엽서는 1908년 10월25일 대한의원 개원식을 기념해 발행됐다. 엽서에는 대한의원 창설위원장이었던 사토 스스무(佐藤進)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는 우리나라를 침략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메이지 일왕이 임명한 인물이다. 옆서 밑부분에는 한문 전서체로 “대한의원 개원식기념”이라고 써 있다. 여 교수에 따르면 당시 창설위원회 위원은 전원 일본인이었고 초대 원장은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지용이었다. 조선총독부가 펴낸 ‘총독부통계연보’를 보면 1908년에서 1910년 사이에 경기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18.9%가 대한의원을 이용한 반면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0.5%만 이 기관을 이용했다. 또 일본 군의총감이 설립 실무를 맡았으며 대한의원이란 이름 자체도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다고 한다. 여 교수는 “서울대병원은 공식적으로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통적으로 병원을 만드는 것은 백성에 시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왕이 주도하는 것”이라면서 “만일 서울대병원 주장대로라면 고종황제가 엽서에 나와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즉, 사토 설립위원장을 돋보이게 하는 엽서는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아니라 통감부, 나아가 일본이 주도해서 설립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게 여 교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대한의원을 부정하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자산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재조명하고 성찰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서울대병원 홈페이지에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주도해서 설립한 것으로 설명한 것에 대해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아닌 통감부가 주도해서 설립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홈페이지 내용은 수정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한편 서울대병원은 13억원을 들여 오는 15일 대한의원100주년기념식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사업에 대해 학계와 관련 시민단체들에서 반대가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대한의원 설립은 대한제국 황실의 위상을 낮추면서 통감부의 권위는 높이려는 이토 통감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면서 “100주년 기념사업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K-리그] K리그 별들의 귀환 “우리가 돌풍의 핵”

    프로축구 K-리그의 인기가 식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2005년 K-리그는 ‘천재’ 박주영의 출현으로 사상 최다 관중(287만 3351명)을 기록했다. 하지만 경기수가 늘었던 지난해에는 245만 5484명으로 떨어졌다. 위기 의식이 반영됐는지 14개 팀은 저마다 화끈한 공격 축구를 천명하고 나섰다. 리그 운영 방식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별들의 복귀가 유난히 많아 르네상스가 오는 것 아니냐며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다.25년째를 맞은 K-리그는 새달 3일 지난해 정규리그챔피언 성남과 FA컵 우승팀 전남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9개월 동안 254경기를 치르는 대장정에 돌입한다. ‘돌아온 별,K-리그 르네상스 이끈다.’ 2007년 K-리그의 화두는 ‘반지의 제왕’ 안정환(31·삼성)과 ‘앙팡 테리블’ 고종수(29·대전)의 귀환이다. 안정환과 고종수는 1990년대 말 이동국(28·미들즈브러)과 함께 K-리그 중흥의 기폭제가 된 대형 스타였다. 특히 이들 세 명이 함께 뛴 1998∼2000년 3년 동안 국내 축구 열기는 유례없이 뜨거웠다.1996년 데뷔한 고종수는 98년 최우수선수(MVP)가 됐고, 이동국은 98년 신인왕, 이동국과 함께 프로에 데뷔한 안정환은 99년 MVP였다. 이동국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로 떠났지만 이와 동시에 안정환과 고종수가 돌아와 K-리그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한·일월드컵에 이어 독일월드컵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솜씨를 뽐낸 안정환은 그러나, 독일 분데스리가 2부리그로 떨어진 뒤스부르크를 떠나 빅리그 잔류를 모색하다 6개월 이상 무적 상태가 됐다. 실전 감각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제외되는 수모도 맛봤다. 지난달 수원 유니폼을 입으며 7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다. 사실 일본 프로축구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 시절을 제외하면 안정환의 해외 진출은 그다지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5개 팀을 전전하며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소속팀 훈련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안정환의 화려한 부활이 기대되는 이유다. 차범근 수원 감독은 “안정환 영입으로 공격진이 강해져 미드필더와 수비진이 더 안정적으로 가동될 수 있게 됐다.”면서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안정환이 멋지게 부활해야 한다.”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천재로 각광받다가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에서 탈락한 뒤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진출했으나 적응에 실패, 내리막을 걸었던 고종수의 귀환은 더욱 극적이다.2005년 전남에서 방출되며 지난해엔 무적 상태로 그라운드를 밟아보지도 못했다. 이제 대전에 입단한 뒤 올해가 축구 인생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체중을 줄이며 훈련에 매진했다. 오른쪽 무릎 십자 인대 부위에 이상징후가 있어 따로 재활 훈련을 했지만 정밀 검사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명났다. 최윤겸 대전 감독은 “패싱이나 킥, 드리블 능력은 예전 그대로”라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체력과 자신감 회복”이라고 했다. 고종수의 복귀전은 새달 11일 울산과 치르는 홈 개막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남편죽인 17세 신부(新婦)와 시동생

    남편죽인 17세 신부(新婦)와 시동생

    너무도 끔찍한 사건이 충남(忠南) 금산(錦山)군의 어떤 외딴집에서 일어났다. 17살짜리 형수와 19살짜리 시동생이 28살의 친형을 죽여놓고 그 시체옆에서 또 한번 불륜의 정을 통했다. 형수아가씨는 결혼1개월도 못되어 시동생과 패륜에 빠지고 넉달만에 남편을 공모살인 한 뒤 보따리를 싸들고 줄행랑을 쳤다가 드디어는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가난한 신혼에 짜증내자 그때마다 시동생이 위로 형수 김정임여인(가명·17)은 전북 정읍(井邑)에서 태어나 어릴때 어머니를 여의고 서모밑에서 자랐다. 3년전부터 전주, 광주 등지에서 식모살이를 해오다가 서모도 세상을 떠나자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지난 1월20일쯤 서외삼촌 되는 전복남씨(가명·38·충남 금산군)집에 들른 것이 사연의 실마리였다. 전씨는 2월초순 같은 마을에 사는 박윤직씨(가명·28)와 생질녀 김여인과의 혼담을 진행시켜 『두 집이 가난하니 서로 결혼시켜 알뜰히 살도록 해주자』고 지난 2월24일 약혼식, 이틀 뒤인 26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신랑 박씨는 입이 딱 벌어지게 좋아했다. 젊은 신부에 마음이 온통 쏠려 3만원의 이잣돈과 장리쌀 2가마를 누이인 박정숙 여인(가명·32)을 통해 얻어다가 동네사람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 축복을 보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살림에 신혼여행을 갈 수 없는 이들 부부는 신랑집인 이 마을 맨끝 산마루집 흙담 2간의 아랫방에 신방을 차리고 첫날밤을 즐겼다. 『내 비록 국민학교 조차도 못다니고 가난하지만 몸뚱이 하나는 튼튼해. 젊은 몸뚱이니까 밥은 안 굶겨. 당신만은 꼭 행복하게 해줄께…』 귀엣말로 속삭이는 남편에게 김여인은 『한번 재미있게 살아보더라고 잉! 이몸도 식모살이 하다가 시집온게 참 재밌구만!』하고 신아나서 좋아했다. 그런데 17살짜리 마누라는 싫증을 너무 빨리 느꼈다. 이유는 남편이 촌스럽다는 것. 재산이라고는 겨우 인삼밭 3간(약50평) 밖에 없고 남의 땅을 소작하고 있는 박씨의 가정에 대해 도시에서 잘 사는 집 식모살이라도 해 본 김여인은 촌스럽게 생긴 남편 박씨와의 시집살림에 며칠이 안가 싫증을 느꼈다. TV도 없고 전화도 없다. 설멋이나마 눈에 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 10일이 지날 무렵부터는 남편에게 『촌사람 같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게 됐다. 이 때마다 친시동생인 박성직군(가명·19)이 17살짜리 형수를 위로하며 싸움을 말리곤 했다. 패륜은 우연히 시작되고 현장들키자 살해를 공모 결혼한지 만1개월에서 하루가 모자라는 지난 3월25일 아침에도 사소한 일로 김여인과 박씨는 언쟁을 한 뒤 박씨는 집을 나가 마을로 갔고, 홀로 있는 시어머니 홍여인(51)과 13살 된 시누이는 인삼밭에 가고없는 낮 4시쯤. 이날따라 봄 기운은 고사하고 매섭게 추운 날씨였는데 시어머니와 남편 박씨를 비롯한 5식구중 3식구가 집을 나가고 나니 남은 것은 형수인 김여인과 시동생인 박군 둘이만-. 형이 결혼한 뒤부터 박군은 거의 매일 저녁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간 흙담집 얄팍한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형내외의 야릇한 숨소리가 흘러 나올때마다 박군은 못견디게 몸부림쳤었다. 이 날 낮에도 아랫목 이불속에서 간 밤의 야릇한 숨소리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형수인 김여인이 부엌일을 끝내고 박군이 누워있는 이불속으로 몸을 녹이려 파고든 것이 불륜의 시초. 박군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형수인 김여인을 부둥켜안았고, 김여인도 그만 순식간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남편에게 불만이 있는데다 시동생 박군이 항상 자기 편에서 두둔을 해주곤 했기에 호감이 가던중 연령으로도 10여살 위인 남편보다 홀가분한 시동생의 품에 손쉽게 파고들고 말았다. 이들의 불륜은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식구들이 일하러 가거나 마을을 간 틈을 타 벼락같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남의 눈을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인삼밭이 띄엄띄엄 있는 뒷산으로까지 장소를 옮겨 가면서 육체의 향락을 즐겼다. 그러던 지난 6월5일 새벽 4시쯤. 논물을 보러 남편이 집을 나간 사이 시동생과 함께 어울리고 있다가 그만 돌아온 남편에게 2개월10일간이나 비밀리에 지속해 온 부정의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 이 날부터 가정불화는 더욱 심해졌고, 겨우 빚까지 얻어 맞아들인 아내를 쫓아버리자니 가난한 살림에 새로 장가를 갈 수도 없는 박씨는 부인과 함께 딴 집으로 이사를 나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이사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부정이 남편에게 탄로난 김여인은 그날부터 남편을 죽일 결심을 하고 그 방법을 곰곰 생각하게 됐으며, 시동생인 박군과도 의논이 됐다. 박군을 시켜 금산장날인 6월12일 읍내 모농약점에서 15원을 주고 극약 한알을 샀다. 나흘뒤인 15일 남의 집 모내기를 하고 막걸리 두어잔을 먹고 울적해진 박씨는 같은 마을에 있는 누이 박정숙여인 집을 찾아가 『내일 방을 얻어 이사를 갈테니 독 2개와 잔그릇 몇개만 장만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16일 상오 0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지 약 30분뒤 아내 김여인이 갖다주는 극약이 든 냉수를 아무 의심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날밤 시어머니 홍여인은 13살된 시누이와 인삼밭을 지키러 나가고 없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박씨를 동생인 박군이 준비했던 막대기로 이마를 내리쳤다. 머리가 깨진 박씨는 약물중독에 겹쳐 그 자리에 쓰러져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채 숨지고 말았다. 죽여놓고 자연사를 위장 장례 치르고 도망쳤으나 박윤직씨를 죽이는데 성공한 이들은 자연사를 가장하기 위해 숨진 박씨를 마당으로 굴러뜨려 얼굴에 상처를 입게 하고 다시 방으로 끌어들여 잔인한 살인연극을 끝냈다. 박군은 이 날 새벽4시30분쯤 동이 트자 같은 마을에 살고있는 누이집으로 달려가 『형이 소변보러 간다고 밖에 나가다가 넘어져 죽었다』고 태연히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여인이 허겁지겁 뛰어 갔으나 이미 빳빳이 굳은 시체. 일단 자연사로 넘겨 날이 밝자 약 5백m 떨어진 마을뒤 밭에다 시체를 매장해버렸다. 이것으로 일단 사건은 끝났으나 매장을 한 다음날인 17일낮 11시쯤 김여인과 박군은 『남편과 형이 죽은 집에서는 살기 싫다』는 구실로 옷가지를 싸들고 중매를 선 전씨집에 들러 『집을 나간다』고 전한 뒤 자취를 감추자 약간의 의심을 품었던 전씨는 박윤직씨의 사인에 부쩍 의심이 짙어졌다. 박씨 어머니 홍여인으로부터 이와같은 사실을 들은 박씨의 6촌형 박모씨는 홍여인과 함께 경찰의 문을 두드려 박씨의 사인이 이상하다고 신고, 금산 경찰은 연고지를 토대로 수사에 착수하여 김연인과 박군을 긴급수배했다. 박군과 김여인은 금산읍 모하숙에서 이틀동안 단꿈(?)을 즐기다가 돈이 떨어지자 금산군 군북면에 있는 박의 고종사촌 형인 황모씨(45)집에 숨어 있다가 잡혔다. 이들은 경찰앞에서 박씨가 숨지고 난 다음 시체옆에서 『성교를 했다』고 진술하고 『약간 겁은 났지만 마음놓고 즐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금산=김앙섭(金昴燮) 기자> [선데이서울 70년 7월 2일호 제3권 27호 통권 제 92호]
  •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구국의 혼’ 기리자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구국의 혼’ 기리자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07년 7월14일 오후7시(현지시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 특사 자격으로 참석한 이준(당시 48세)은 일본의 방해책동과 열국의 무관심에 분개,‘할복’이라는 방법으로 저항했다. 이준 열사의 순국은 대외적으로는 대한 사람들의 독립의지를 강렬하게 심어줬고, 대내적으로도 독립정신과 투쟁정신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준 열사 순국 100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사업이 펼쳐진다.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이재오·장영달 의원 등)는 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출범식을 갖고 활동을 시작한다. 현재까지 학술토론회 등 모두 10여개의 기념사업이 확정됐다. 우선 남북 공동으로 이준 열사와 이상설·이위종 지사 등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학술토론회를 6·15나 8·15 남북 공동행사때 열기로 했다. 또 남쪽과 북쪽이 각각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를 발간한다. 이준 열사의 만국평화정신 및 애국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이준 만국평화포럼’이 만들어지고, 서울시와 공동으로 기념관도 건립키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상트 상테르부르크를 거쳐 헤이그까지 열사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체험여행’도 계획돼 있다. 추진위는 출범선언문에서 “국내외 정세가 역동하는 혼돈의 시대에 이준의 정신이 민족의 좌표가 되고, 이준의 혼이 후대들에게 이어진다면 우리나라는 열사가 말하는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면서 “구국의 혼을 지닌 애국적 시민운동가 이준을 기려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밝혔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경제현장 읽기] 경제지표로 본 참여정부 4년 허와실

    [경제현장 읽기] 경제지표로 본 참여정부 4년 허와실

    참여정부는 늘 이렇게 말한다.“경제지표를 봐라. 수출은 두자릿수 증가했고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은 2∼3%대를 유지하고 있다. 역대 어느 정권이 이같은 성과를 냈는가.”특히 김대중 정권이 물려준 ‘카드대란’과 ‘경기침체’,‘유가상승’ 등 대내외 여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잠재 수준의 성장궤도를 이뤘다고 주장한다. 복지와 균형발전에도 괄목한 진전을 이뤘다고 자평한다. 실제 맞는 부분도 있다. 주가는 4년간 150% 가까이 올랐고 국가신용등급도 무디스만 제외하곤 외환위기 이전으로 회복됐다. 수출은 연평균 두자릿수로 증가했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는 2002년 2.53%에서 2005년 2.99%로 선진국과 엇비슷해졌다. 미국의 랜드연구소는 우리나라를 과학선진국 그룹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참여정부의 공으로 보기에는 무리다. ●수출·내수 연결안돼 체감경기 악화 25일 재정경제부 등 관련부처에 따르면 수출은 참여정부 4년간 연평균 19%씩 증가했다. 그러나 2003년부터 미국 등 세계 경기가 회복되고 반도체 분야 등 일부 기업의 기술개발에 힘입은 것이다. 참여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유지, 기업들의 발목을 잡다가 지난해 말에야 기업환경개선 종합대책 등을 내놓았다. 수출 증가를 내수로 이어지게 하지도 못했다. 정부는 2001∼2002년 가계부채의 후유증으로 돌렸다. 종합주가지수의 경우 코스피는 592.25에서 1469.88로 급등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김대중 정권의 주가도 19.35% 오르는 데 그쳤다. 이종우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경기회복세와 저금리 기조로 시중에 돈이 풀리면서 이들 자금이 주식과 주택시장에 몰려 자산가치 상승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집값 폭등시킨 잇단 부동산대책 부동산 시장에선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국민은행 주택가격 동향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아파트 값은 31.8% 상승했다.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값 상승률은 52.3%에 이른다.03년 2월 서울에서 아파트 4억원짜리 1채를 갖고 있었다면 지난달 말 6억원이 됐다는 뜻이다. 실물 쪽보다 높은 부동산 투기 수익률을 잡지 못해 10여차례의 부동산 대책이 실패를 거듭했다. 무엇보다 저금리 기조로 유동성이 풍부한데도 각종 개발정책을 남발, 막대한 보상금이 풀리게 한 것은 통화정책의 실패로 볼 수밖에 없다. 정부도 뒤늦게 시인했다. 부동산 컨설팅업체인 RE멤버스의 고종완 대표는 “참여정부가 국토균형발전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개발안을 내놓으면서 땅값 상승을 부추겼고 보상금 과다지급이란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상반기에 보상금으로 풀린 돈만 10조원이다. 정부는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전환한 시점의 선진국 평균 실질성장률은 일본 3.6%, 미국 3%, 영국 2.1% 등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참여 정부는 2만달러에 진입하지도 않았는데 연평균 4.2% 성장했다고 했다.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장은 지난 연말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제 1의 경제대국인 미국이 3.5% 성장하는데 이머징 마켓인 한국이 4% 성장하는 것은 부족하다.”면서 “중국이나 인도보다 못하겠지만 우리보다 선진국인 싱가포르나 아일랜드에 뒤지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일자리창출·양극화 해소 미흡 정부도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등에 따른 요소투입 생산성 저하로 기초체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2030’ 등의 비전을 내놓았지만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실업률 3%는 일자리가 없어 구직활동을 포기하는 ‘청년 백수’가 늘었고 물가 안정은 환율절상(인하) 등의 효과가 컸다. 참여정부는 초기부터 양극화 해소와 소득재분배를 강조했다. 그 결과 사회복지예산은 19.9%에서 26.7%로 늘었다. 하지만 재정경제부는 양극화 개선이 미흡, 소득 5분위 배율은 7.23%에서 7.64%로 악화됐고 지니계수도 나빠졌다고 평가했다. 다만 조세·이전 지출에 따른 지니계수 개선율은 03년 2.7%에서 지난해 4%로 나아졌다. 나라 빚은 크게 늘었다. 물론 외환시장 안정과 금융구조조정 지원에 썼지만 국가채무가 4년 사이 114.4조원이나 증가한 것은 속도가 너무 빠르다.GDP 대비 국가채무의 비율은 2002년 말 19.5%에서 지난해 말 33.4%로 급증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소리수집 50년’ 참소리 박물관 손성목 관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소리수집 50년’ 참소리 박물관 손성목 관장

    ‘십년감수’라고 했다.1903년 어느 날이다. 당시 미국 공사로 일하던 선교사 앨런이 고종황제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를 처음 보여 주었다. 말과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라고 설명했지만 고종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시험해볼 참으로 고종은 박춘재 경기명창을 불러들였다. 영문도 모르는 박춘재는 황제와 신하들 앞에서 ‘적벽가’의 한 대목을 불렀다. 잠시 후 축음기에서 ‘적벽가’가 그대로 재생되어 흘러나왔다. 너무 놀란 박춘재는 그만 얼떨결에 바지에 잠시 실례(?)를 하고 말았다. 이를 본 고종은 박춘재에게 “너의 명이 10년은 감해졌겠구나!” 하며 크게 웃었다. 이때부터 ‘십년감수’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있지만 아무튼 이 무렵 서양의 축음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면서 ‘귀신소리’ 등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소리와 시간을 저장하는 에디슨의 축음기는 새로운 문명을 열었으며 음악은 인류의 영원한 동반자가 됐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소리의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을까. 그 답을 찾아 지난 15일 강원도 강릉 경포대로 떠났다. 휘영청 달이 다섯개나 뜬다는 ‘경포호’ 인근의 강릉시 저동 36번지.‘참소리 축음기 박물관·에디슨 사이언스 뮤지엄’이라는 간판이 예사롭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랜드피아노 위에 레코드판을 올려놓은 모양의 이색적인 건물이었다.2개동 3층 규모(700여평)의 이 박물관은 강릉시 송정동에서 최근 이곳으로 옮겨 새로 확장 이전했다.1992년 처음 문을 연 이 박물관은 그동안 연간 30만명이라는 관람객들을 끌어들이며 이름값을 톡톡히 해왔다. 설 명절 전날임에도 타이완 등 외국인 관광객 200여명이 관람 중이었다. 강릉에 놀러왔다가 의례적으로 들르는 곳이 아니라 일부러 찾는 박물관이라고 하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도대체 어떤 물건들이 있기에 그럴까. 우선 에디슨의 발명품 1500여점이 전시돼 있어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최초의 유성기 ‘틴호일’,1889년 제작된 ‘클라스 엠’ 등 희귀 음향기기도 세계에서 가장 많다. 뿐만 아니라 축음기 이전의 소리통 등 세계 60여개국에서 모은 각종 진귀한 소리명품들이 전시돼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는 호두나무 몸체와 시계가 부착돼 있는 높이 99인치의 음악상자 폴리폰(1850년·독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스텔라 음악상자(1830년·스위스)와 주인의 연주소리를 듣는 개로 유명한 ‘니퍼’의 베를리너 축음기(1898년) 등이 전시돼 있다.17세기에 등장한 오르곤(벨기에)도 마냥 신기하게 다가온다. 또한 에디슨이 발명한 세계 유일의 극장용 영사기,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기초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당시의 등사기 등을 보노라니 저절로 지혜와 역사의 샘으로 쏙 빠져든다. 특히 세계 유일의 아메리칸 포노그래프,1870년대 에디슨사(社)에서 인류 최초의 빛을 양산한 대나무 탄소 필라멘트 백열전구 등 대부분 ‘유일’ 아니면 ‘최초’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 관람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 에디슨의 일거수 일투족을 게재한 당시의 신문 기사를 원본 그대로 보관해 놓기도 했다. 문득 눈에 띄는 글귀가 있다.“I would like to live about 300 years,I think I have IDEAS enough to keep me busy that long.=나는 300년을 살고 싶다. 그래도 항상 바쁘게 살아갈 충분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에디슨이 1847년 2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193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1200여건의 특허를 출원한 것을 상기할 때 만약 그가 300년을 살았다면 인류문명은 더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올해가 에디슨의 탄생 160주년이 된다는 안내원의 귀띔이 있어서 그런지 이 박물관에서는 에디슨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도 가끔 이곳에 들러 에디슨의 숨결을 감상하며 “실제로 와 보니 너무 좋다.”며 에디슨 박물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쯤해서 ‘50년 소리인생’을 걸어온 손성목(62) 박물관장과 마주 앉았다. 미국만 160회정도 다녀왔고 수집하는 과정에서 도둑으로 오인받아 총을 맞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는 “박물관의 전시품을 찬찬히 둘러보려면 족히 3시간은 걸린다.”면서 “다 돌고나면 100년 전과 현재의 첨단 시스템이 빚어내는 특별한 음악감상 체험을 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손 관장이 처음 소리에 관심을 둔 것은 여섯살 때. 아버지한테 생일 선물로 포터블 축음기(컬럼비아 G24)를 받으면서였다. 당시 부친은 원산에서 백화점과 양복점을 경영할 만큼 부유했다.8세때 6·25가 나자 어린 손성목은 축음기 1대를 등에 지고 가족과 함께 월남할 정도로 애지중지 여겼다. 강원도 속초에 정착한 가족들은 운수업을 키운 부친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손 관장은 13세때부터 본격적인 축음기 수집에 나선다. 동네 전파사는 물론 여기저기 수소문을 통해 축음기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 사들였다. 고장난 축음기를 고치는 기술도 저절로 익혀졌다. 동네 잔치라도 벌어지는 날이면 축음기를 들러메고 참가해 인기를 독차지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수집한 축음기는 10여대. 군복무를 마친 직후에는 전파사를 경영하면서 수집의 폭을 더욱 넓혔다.1977년 결혼 후에는 한라건설㈜에 중견사원으로 입사,5년간 중동건설 현장에 근무했다. 이때 휴가기간 등을 이용해 유럽 전 지역을 순회하며 축음기를 구입했다. 귀국할 무렵에는 각종 축음기가 600여점으로 불어났다. 그러자 박물관 설립에 강한 애착을 갖는다. 재원 마련을 위해 회사를 그만 두고 강릉 지역에 임대 아파트 건설회사를 설립했다. 다행히 사업에 성공하자 부친에게 물려받은 재산 등을 털어 아프리카부터 유럽, 러시아 등 세계 각국을 드나들며 골동품 음향기기를 사들였다. 마침내 1992년 11월, 수집품이 2000여점에 이르자 오랜 소망인 ‘참소리 박물관’을 개관한다. “축음기 종류를 모두 수집해 세계 제1의 축음기 단일 박물관을 만들어 후세에게 물려주겠다는 집념에서 비롯됐지요. 에디슨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발명품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은 바로 참소리 박물관입니다. 이제 에디슨을 만나려면 미국이 아닌 한국으로 와야 할 겁니다.” 지금도 틈만 나면 소리를 좇아 세계 어디든 달려간다. 현재 그가 소장하는 각종 축음기만 모두 5000여점, 또한 음반 15만장, 서적 및 관련 자료가 6000여점에 이른다. 손 관장 앞에는 두개의 책상이 있다. 하나는 인류의 과학유산 수집을 위한 책상이고 다른 하나는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훌륭한 발명품을 만나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책상이다. 후자 책상 위에는 인형이나 조각, 장난감 등을 모은 ‘어린이 전시관’과 소리·빛·영상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 즉 장애인들을 위한 공간마련 계획서가 놓여져 있다. 그는 에디슨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직도 배가 고프다.300년을 살아도 수집하느라 매우 바쁠 것”이라며 활짝 웃는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5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61년 동해 북평고 졸업 ▲65년 해병대 만기제대 ▲67년 경희대 상대 졸업 ▲74년 경희대 경영대학원 수료 ▲82년 참소리방 설립(참소리박물관 전신) ▲92년 참소리 축음기 에디슨 박물관 개관 ▲2007년 2월 현재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 관장, 에디슨 사이언스 박물관 관장
  • [인사]

    ■ 국무조정실 ◇고위공무원단 전보 △기획관리조정관 朴鐵坤△심사평가〃 崔乙林△사회문화〃 金錫民△정책상황실장 沈五澤■ KBS N △편성이사 강대택 ■ 현대백화점그룹 △현대H&S 사장 겸 현대푸드시스템 사장 홍성원△현대홈쇼핑 부사장 하병호△현대홈쇼핑 전무 정교선■ 핀튜브텍 △대표이사 상무 金俊永■ 근로복지공단 ◇전보 (본부 실국장)△보험징수 황원순△감사 홍일표(지사장)△서울북부 전용배△의정부 윤상희△원주 전한태△부산북부 최용환△양산 조건영△진주 정연일△대구북부 이재덕△인천북부 고영용△수원 박종배△안양 조준호△전주 위계봉△익산 한영철△여수 배병헌△서울성동 이창우△태백 이성묵△부산중부 이종주△광산 차동준(본부 팀장)△비서실 김운석△정보운영 안수복△복지계획 김영준△신용지원 김용철(지사 부장)△서울본부 장석주 전호동 김두용△서울강남 박임복 이상식△서울서부 김대수△서울남부 김봉환△서울관악 이길향△의정부 강관중△춘천 박종식△강릉 이수영△원주 양재홍△부산본부 이종철 최창호 김진현△부산동부 구경진 서태일△부산북부 김광용△창원 표용문△울산 박인현 권이수△진주 고은수 윤명수△통영 윤영근△대구북부 이성일△대구서부 김봉태△포항 정주봉△인천북부 정성기△수원 박종관△평택 권오목 장영수△안산 강재웅△성남 김영성△광주본부 오병두 백형도 양해헌 임채섭△익산 김영권△군산 이익수△목포 윤연호△여수 유재관△대전본부 주영수 이의식 전각환 최대곤△청주 이건우 임한병△충주 양승국 고종석△보령 류덕길△천안 배윤정◇교육파견△서울대 홍형기 이동형△고려대 이상호 이홍길 이명수 이성기 김형래■ 매일경제 (편집국)△편집국 부국장대우 겸 여론독자부장 신임호△유통부장 전호림△사회부장 이동주(논설위원실)△논설위원 서정희
  • [씨줄날줄] 성(姓)/육철수 논설위원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했듯, 아이는 남자나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못 낳는다. 따라서 부모의 ‘합작품’인 아이의 혈통은 부계와 모계가 공유하고, 혈통을 표시하는 성(姓)을 부모 모두에서 따오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성을 다 따르다 보면 대(代)가 이어질수록 성명이 길어지는 번거로움쯤은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편의상 부성(父姓)이나 모성(母姓)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데, 최근 몇십년 사이에 여권신장과 함께 나라마다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일본은 부성을 따랐으나 1991년부터 자녀가 부모의 성 가운데 선택하되 부·모·자녀의 성을 통일하도록 했다. 미국·영국은 부성 관습이 이어지고 있으나, 부모의 합의에 의해 모성도 가능하다. 중국은 1980년부터 부모의 성 가운데 선택이 가능하고 제3의 성도 취할 수 있게 했다. 스페인 문화권에서는 부모 모두의 성을 붙인다. 스웨덴에서는 출생 석달 안에 부모의 성 가운데 선택을 안 하면 모성을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성의 선택은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만큼이나 복잡하다. 우리나라는 내년부터 시행될 민법(제781조) 개정안에서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성을 따르되, 예외로 부부가 혼인신고시 합의하면 어머니의 성도 따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부모의 성을 합친 ‘결합성’을 쓰는 데는 지금도 제약이 없으니 내년부터는 부성·모성·결합성이 모두 허용되는 셈이다. 미혼모, 이혼, 재혼, 배우자 사망, 입양 등으로 한 가정에 여러 성이 존재하는 시대여서 성의 선택 폭을 넓힌 것은 시대적 흐름이라 하겠다. 그런데 법 조문의 ‘부성 원칙’이 남녀차별 조항이라며 이를 삭제하자는 의견이 일각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부성 원칙’이란 큰 줄기마저 없애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혈연의식이 강하고, 행정편의상 외국처럼 개인이 아닌 가족(세대)단위로 국민을 관리하는 나라다. 형제자매와 사촌, 고종·이종사촌의 성이 뒤죽박죽되면 사회 대혼란은 물론이고, 국가적 인력관리의 비효율성은 보나마나일 것이다. 관습이 크게 불합리하거나 법이 실생활에 불편하지 않으면 굳이 남녀평등의 잣대를 들이댈 일은 아니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지난주에 소개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중인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권율과 이항복의 집이 필운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은 필운산(弼雲山)이다.1537년 3월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用卿)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中宗)이 그를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을 가리키면서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은 최고의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한양 주산의 이름을 새로 짓게 된 공용경은 도성을 북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이름 지었으며, 경복궁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고 설명했다. 운룡(雲龍)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북악(백악)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알려져 있어 공용경이 지은 이름들은 별로 쓰이지 않았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살았던 집터에 ‘필운대’라는 이름으로 전할 뿐이다. 순조 때의 실학자인 유본예(柳本藝)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필운대를 이렇게 소개했다. (필운대는) 성안 인왕산 밑에 있다. 필운대 밑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집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처갓집이므로, 그는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별호를 필운(弼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는 육각현(六角峴)이 있으니, 이곳도 역시 인왕산 기슭이다. 필운대와 함께 유명하다. 종로구 필운동 9번지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필운대 바위 앞에 서면 경복궁과 백악산을 비롯한 서울의 모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찾아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이 해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 임명된 해인데, 날짜가 없다. 조상님 예전 사시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구름만 깊었구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 않아 부로(父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가객 박효관 영의정과 교류 그 옆 바위에는 가객 박효관(朴孝寬·1800∼1881무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옆에 박효관을 비롯한 일행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유원 일행과 함께 이곳에 와서 풍류를 즐기며 한시를 바위에 새기는 일을 돌봐주었던 듯하다. 위항의 가객이었던 박효관은 필운대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을 마련해 노래 부르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유원도 시조에 관심이 깊어 당시 대표적인 시조 45수를 칠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했다.20종 이상의 시조집을 조사하여 45수를 뽑아내고 한시로 번역해 감상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므로 위항의 가객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악부(樂府)에도 관심이 많아, 칠언절구 100수의 연작시로 ‘해동악부(海東樂府)’도 지었다.(박효관의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필운대에 모였던 가객들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정선과 위항시인 칠송정서 풍류 인왕산에 오래 살았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인왕산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1676년 1월3일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지금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고 부근에 있던 동네이다. 그런 인연으로 젊은 시절에는 난곡(蘭谷)이라는 호를 썼다. 청운동 일대에는 장동 김씨들이 살았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 6형제가 다방면에 이름나 6창(昌)이라고 불렸다. 정선은 그 가운데 셋째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에게 글을 배웠다. 김창흡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제자백가와 시문(詩文)·서화(書畵)에 달통한 학자였다. 정선이 7세였던 1682년에 북악산 남쪽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선이 육각현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후배 조영석이 “농은당에서 육강현을 바라보았다.”고 썼다. 육강현은 육각현을 소리나는 대로 쓴 듯하고, 농은당은 김창흡의 형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집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왼쪽에 크게 그려진 집이 바로 농은당이고, 언덕 너머 솔숲 사이의 큰 바위가 필운대, 그 너머 고개가 바로 육각현이다. 송석원시사 동인 박윤묵이 장혼의 집에 들렸다가 주인이 없어 육각현에 올라가 지은 칠언율시가 전한다. 육각현 위에 세운 칠송정(七松亭)이라는 정자가 바로 위항시인들의 모임터였다. ●중인, 대원군을 움직이다 칠송처사 정훈서의 소유였던 칠송정에는 송석원시사의 선배인 정내교(鄭來僑·1681∼1759) 때부터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를 지었다. 한동안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가 1840년대에 위항시인 지석관이 수리하여 다시 옛모습을 찾았다. 박기열·조경식·김희령 등이 칠송정과 일섭원에 모였는데, 이 무렵에는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 불렸다. 육각현 칠송정이 장안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뒤부터이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비롯한 당시의 권력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며, 수많은 중인 서리들이 그의 사조직으로 흡수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천하장안’으로 불렸던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네 사람이었다. 개화파 지식인 박제경(朴齊絅)은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그 실태를 이렇게 기록했다. 형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오도영을, 호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김완조와 김석준을, 병조에는 박봉래를, 이조에는 이계환을, 예조에는 장신영을, 의정부 팔도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윤광석을 뽑아서 맡겼다. 이들은 모두 대대로 아전 일을 보았던 집안의 후손들이어서 전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당하면 곧바로 판단하여 처리하였다. 대원군이 하나같이 그들의 말을 따랐다. 박제경은 대원군의 아전 정치를 비판적으로 기록했지만, 이 책에 평을 덧붙인 위항시인 차산(此山) 배전(裵琠)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위항시인으로 이름난 여러 명의 행정능력을 이렇게 칭찬했다. 운현궁에서 신임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민간의 기이한 재주꾼들이다. 윤광석·오도영·장신영 등은 글재주를 사랑할 만하고, 기억력도 놀랍게 총명하였다. 무리 가운데 뛰어나게 민첩하여, 사리를 훤하게 통달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도영과 장신영이 육각현 칠송정시사에 드나들며 시를 지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사업을 벌이던 대원군은 위항시인들의 시사를 격려하기 위해 칠송정을 수리해 주었다. 대원군은 박효관·안민영 등 가객들과도 친해 함께 어울리며 풍류를 즐겼는데, 박효관이 위항시인들보다 더 총애를 받자 칠송정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오횡묵(吳宖默·1834∼?)이 백운동에 집을 짓고 모임터를 옮겼다.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뒷골목이 바로 백운동 골짜기였다. (정선이 인왕산에서 그린 그림들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안정세 주택시장 움직일 ‘5대 변수’

    안정세 주택시장 움직일 ‘5대 변수’

    ‘1·11 부동산대책’과 ‘1·31 부동산대책’ 등으로 집값이 뚜렷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안정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주택담보대출 ▲부동산입법 ▲종합부동산세 회피 매물 ▲청약제도 개편안 ▲신도시 발표 등이 설 이후 주택 시장을 결정할 5대 변수로 꼽히고 있다. 은행들은 3월부터 투기지역은 물론 비투기지역까지 주택담보대출에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적용한다.7월부터는 모든 지역, 모든 주택에 대해 이 규정을 확대할 방침이다. 이처럼 대출을 계속 막으면 집값은 오르기 힘들다.RE멤버스 고종완 소장은 19일 “현금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면서 “대출이 막히면 강남권 고가 아파트부터 먼저 거래가 위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11·15대책과 올해 1·11,1·31대책에서 발표된 부동산 후속 입법이 제대로 이뤄지느냐도 중대 변수다. 올해부터 10년간 50만가구의 (정부)비축용 장기임대주택을 짓기로 한 임대주택법 개정안(1·31대책)은 이번 임시국회에서 안건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집값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민간 택지 분양가 상한제 관련 주택법이 통과되면 무주택자들이 주택 구입을 미뤄 상반기 주택 시장은 안정세를 보일 수 있다.”면서 “그러나 법안 통과에 차질이 빚어지면 잠재됐던 주택 구매 수요가 움직여 시장이 다소 불안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종부세 과세 기준일인 6월1일 전에 종부세 회피 매물이 얼마나 나올지도 관심사다. 지난해 하반기 집값이 급등함에 따라 오는 4월 새로 고시될 공시가격이 상향 조정될 예정이어서 주택 보유자의 세금 부담은 지난해보다 심해질 수밖에 없다. 다주택자들과 고가주택 소유자들이 매물을 얼마나 내놓느냐에 따라 집값은 영향을 받는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부사장은 “양도보다는 증여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종부세 회피 매물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매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최근 안정세가 깊어져 가격도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달 말 발표될 청약제도 개편안도 중대 변수로 꼽힌다. 정부는 오는 9월부터 모든 아파트에 청약 가점제를 적용할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가점제에서 불리한 수요자들이 매수에 나서 집값이 불안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밖에 상반기중 발표될 ‘분당급 신도시’도 중요하다. 김영진 내집마련정보사 사장은 “설 이후 시장이 잠잠하더라도 정부가 계획중인 강남을 대체할 수 있는 신도시가 발표되는 시점을 기점으로 매매 시장이 움직일 수 있다.”면서 “신도시에서 시작되는 집값 상승세가 강남→강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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