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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의 기원·발달사(백제를 다시본다:15)

    ◎마한 아닌 부여계어 유래/지명어미 「홀」은 마한의 「비리」와 판이/3∼5세기 한계어 함께 사용… 일에 전파/태율 천도이후 한계의 단일언어사회로 정착 백제는 마한이 망한 터전에 세워진 나라로 인식하여 왔다.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창례홀」에서 건국하였다.그리고 꽤 오랜 기간을 마한과 공존하다가 거의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편견은 백제어를 마한어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그러나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현재 서울 안의 어느 한 지역이었을 백제 시조 온조의 도읍지는 「위례홀」이었다.여기서 강조되는 핵심은 지명어미 「­홀」이다.이「­홀」은 온조의 형인 비류가 건국한 현재의 인천,즉 「미추홀」의 「­홀」과 더불어 부여계어의 특징을 극명하게 나타내 준다.그렇지만 마한의 지명어미 「­비리」(>부리)와는 이질적인 어소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분포 중부지역 국한 사학자들은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한 시기는 제13대 근초고왕(AD 346∼375년)때로 본다.이 학설에 따르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에 가까운 오랫동안을 공존하여 온 셈이다.그렇다면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종래의 주장은 속단이었음을 시인치 않을수 없게 된다.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을 부여계어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뒷바침하는 다른 증거자료가 또 있다.앞에서 제시한 「위례홀」에 인근한 지명 「미추홀」이 「매소홀」로도 적혀있는 바,이는 「매」가 「매홀­수성(현재의 수원)」의 대응기록을 통하여 「물」의 뜻임을 알수 있다.더욱이 중부지역의 남단인 현재의 청주의 옛이름이 「살매­청천」으로 적혀있어 「매」가 「천」의 의미로도 쓰였음을 확인하게 된다.이처럼 「매」의 분포 역시 중부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마한지역(충남 전라)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백제어에 대한 지식은 백제말기의 언어중심권인공주·부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이와 같은 말기적인 현상의 편견때문에 보다 이른 시기의 백제어는 일관된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다.우리들을 이와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 사람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다.삼국사기 권34∼36(지리 1∼3)의 지명에 의하여 그려진 삼국의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장수왕 63년(AD 475년) 이후의 고구려 최전성기를 기준한 것이다.그 이전과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따라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무시한 중요 사건들을 가능한 한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고대 삼국의 전기 내지 중기시대의 한반도 중부지역은 결코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다.이 때의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 혹은 국내성이었으며,그 남쪽 경계는 압록강 이남의 살수 혹은 대동강이었다.따라서 장수왕이 장악하기 이전까지 고구려는 중부지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삼국사기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 전·중기의 판도를 그려보면 중부지역은 오히려백제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삼국사기 보완 필요 지도로 표시해 본 「삼국 각축과 언어권」을 참고하면 적어도 A지역에 살던 기층민의 언어는 고구려보다는 백제와 더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B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는 거의 무관하였던 것이며,A지역은 77년 동안의 고구려 점령기 이후에는 신라의 북진으로 a,b와 같이 두 지역으로 분리된다.따라서 a지역만이 정확히 1백84년간 고구려의 점령치하에 있었을 뿐 b지역은 겨우 77년간 고구려의 소유였고 오히려 보다 긴 1백7년간은 신라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고구려의 남침으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언어는 백제의 전기중기어인 것이라 하겠다. 백제어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설명할수 있도록 독특하게 형성 발달하였다.백제전기어는 고이왕때(AD 260년)까지의 언어를 가리킨다.아직 부족국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언어 또한 이전 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따라서 전기 백제어의 특징은 하나의 부족국가에 의하여 부여계어가사용된 단일 언어사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이 시기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겨 준 언어재는 관직명 인명 지명 등 수십의 어휘 뿐이다. 백제중기어는 고이왕 28년(AD 261년)부터 개로왕 20년(AD 474년)까지의 언어를 말한다.이 시기는 이른바 부족국가의 체제가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춘 연맹체로 변모한 만큼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믿게 한다.더구나 비류왕 초년(AD 324년)에 「위례」에서 광주(광주)로 천도한 사실과 마한을 멸하여 흡수한 근초고왕때(AD 346∼375년)의 사건은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를 증언한다. 이 시기의 언어적 특징은 부여계와 한계의 복수언어사회였다는 점에 있다.이 시기는 우리에게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에 분포하였던 1백20여에 달하는 지명 어휘들을 넘겨주었다.특히 왕에 대한 호칭으로 「어라하」와 「건길지」를 사용하였던 점을 복수언어의 한 예증으로 들수 있다.이것들은 중국의 사서인 「주서 이역전 백제」에 소개된 백제어인데 그 기록에 따르면 「어라하」는 지배층이 부르던 호칭이고,「건길지」는 피지배층이 부르던 호칭이었음을 알게 한다. ○중기때 크게 변화 이 시기는 또 오늘날과는 다른 수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기본 수사 중에서 「밀(밀=삼)」,「우츠(우차=오)」,「나는(난은=칠)」,「덕(덕=십)」등이 지명어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 수사체계는 고대 일본어에 수출되어 「mi(삼)」「itsu(오)」「nana(칠)」「towo(십)」 등으로 쓰였음이 확인된다. 백제후기어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초년(AD 475년)부터 멸망하던 해(AD 660년)까지의 언어를 말한다.백제어사 7세기에서 이시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이 시기는 삼국사기의 1백40여 지명을 비롯하여 인명 관직명 등의 언어자료를 국내외의 고문헌에 남겨 두고 있어 백제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우리가 오늘날 확보한 백제어 단어의 대부분은 이 후기 백제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지명의 변천/한강유역 고유지명 거의 백제어/고구려가 점령후 한어화… 복수지명 사용 전해지는 삼국시대의 지명은 한 지역이 여러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이미 당시에 수차례에 걸쳐 지명의 개혁작업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명은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뒤 신라 경덕왕(재위 AD 742∼764년)때 상당수가 중국식 2자명으로 바뀌었다.그러나 경덕왕의 개정작업이 우리의 고유지명을 처음으로 한어화한 것은 아니다.그같은 작업은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사벌국이 법흥왕 11년에 상주로,다시 경덕왕 때 상주로 개정된 것도 한 예이다. 지명을 바꾸는 것은 지역을 행정적으로 개편하거나 정비하기 위해 필요했다.또 정복지역이라면 행정적인 필요성 이외에 고유정서를 말살하기 위해서도 요긴했을 것이다.경덕왕이 삼국통일을 성취한뒤 약 1세기만에 지명을 한어로 통일한 것처럼 그 이전 고구려도 장수왕의 남진으로 중부지역을 차지했을 당시 지명개혁을 단행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복수지명은 고구려가 점령했던 지역의 경우 백제나 신라에 비해 훨씬 많다.그러나 압록강 이북 지역의 지명은 거의 하나만이 전해진다.그 지역은 고구려의 본거지로 새로운 이름을 지을 필요성이 그만큼 덜 했던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역으로 고구려가 점령지역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지명개혁을 단행했음을 보여준다.실제로 고구려의 지명이 복수로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어느 하나가 한역되어 있다.고구려 시대에 이미 고유 지명이 한역되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따라서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고구려지명은 정복사업이 활발했던 장수왕 당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한강유역의 지명 가운데 고유지명은 대개가 백제의 전기지명이라는 것이다.
  • “신생당 요직독점” 「2중구조」 우려(호소카와 새일본:5)

    ◎연정 초대재각의 성격/“직권 경험”명분 사실상 정국주도 할듯/각당 당수들 모두 입각… 정권안정 추구 『역사에 남는 청신하고 안정감있는 내각』.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신임총리가 구상한 새 내각구성의 청사진이었다. 호소카와총리는 각료에 민간인 2명 등용을 포함,여성각료를 3명이나 임명하는 등 과거와 달리 참신한 내각구성을 위해 노력했다.그는 또 각당의 당수를 모두 입각시킴으로써 책임있는 정책운영을 통한 정권의 안정을 추구했다.그러나 각당의 의석수에 따른 각료배분으로 과거 자민당의 파벌안배 패턴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호소카와내각은 더욱이 각당의 정책차이로 실제 정권운영에는 많은 불협화음이 예상되며 정국은 사실상 신생당에 의해 주도될 것으로 보인다.신생당은 외상 대장상 통산상 농수산상 방위청장관등 주요 포스트를 독점했다. 관방장관으로 임명된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신당사키가케 대표는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의 불안을 배려,정권운영의 경험이 있는 신생당에서 주요 각료가 임명됐다』고 말했다.그러나 신생당의 이같은 주요 권력독점은 총리는 호소카와이지만 정국운영은 사실상 신생당의 막후 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대표간사가 도하는 이른바 「권력의 2중구조」의 우려를 낳고 있다.호소카와총리는 이같은 권력의 2중구조에 대한 비판을 의식,오자와를 대장상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오자와가 이를 거부했다. 자민당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신생당이 새 내각의 중심이 된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민당정책의 계속성을 의미하며 정권이 교체됐지만 일본의 기본정책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외상에 임명된 하타 쓰토무 신생당당수도 취임기자회견에서 외교정책의 계속성을 강조했다.그러나 그는 전후처리문제에 대해서는 자민당정권과는 달리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그는 『일본은 (아시아침략에 대해) 솔직히 사실을 인정,반성과 사죄를 해야 한다』고 말해 총괄적인 전후처리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하타외상은 또 한국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한국과의 긴밀한 협조관계를 강조했다.그의 이같은 발언은 일본이과거문제의 해결을 통해 앞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정책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음을 예고하는 것이다.일본의 이같은 움직임은 한국에도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대일외교접근을 필요로 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 출범한 호소카와내각의 최대 과제는 정치개혁이다.호소카와총리는 정치개혁상을 신설하고 야마하나 사다오(산화정부)사회당위원장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등 정치개혁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연립정권은 최대의 구심력인 정치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소카와내각은 그밖의 외교·방위정책,자위대의 유엔평화유지활동 참가 등과 관련,각당의 고유정책이 달라 외교·안보 등 국가기본정책에 대한 결단이 필요할 경우 하머니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는 불안을 안고 있다.하타외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임이라는 점도 또다른 불안요인이라 할 수 있다.호소카와총리는 이같은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지도력과 조정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불안과 기대속에 새로운 일본을 지향하는 「호소카와호」는 출범하고 있다.
  • 정권장악 앞두고 이견 덮어두기/7당 대외정책 합의 안팎

    ◎일­한·미조약 준수등 기존정책 유지/「자위대합헌성」등 언젠간 갈등 전망 새 출범을 앞둔 일본의 연립정부가 현 집권 자민당정권의 주요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일본의 외교·방위정책은 당분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당의 기본정책 차이로 중요 대외정책 등의 정치적 결정과정에서는 적잖은 마찰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또한 일본의 뉴 리더들이 대개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인물들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보다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외교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연립정부를 구성할 비자민7당은 지난 29일 열린 당수회담에서 『헌법의 이념과 정신을 존중하고 외교·방위정책은 지금까지의 정부정책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정책합의각서를 발표했다. 정책합의는 ▲일·한기본조약을 준수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에 협력한다 ▲일·미안보조약을 계승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공헌한다 ▲과거 전쟁에 대해 반성한다는 등의 내용도 명기하고 있어 「전쟁책임」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엿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연립정부구성의 전제조건이었던 정책합의 이면에는 상당 부분 각당의 정책차이가 그대로 상존하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비자민세력은 정권교체라는 「큰뜻」을 전면에 내세우며 구체적인 정책대립은 일단 덮어두고 큰 테두리의 정책합의를 도출해냈다는 얘기다. 최대의 초점이었던 방위정책과 관련,신생당과 공명당 등은 당초 「자위대의 합헌」은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자위대가 헌법에 어긋난다고 강조해온 사회당은 난색을 표명했다.그래서 합의는 사회당의 이같은 입장을 고려,『자위대에 대해서는 종래의 정부정책을 계승한다』는 쪽으로 이뤄졌다.그러나 최종적으로 발표된 정책합의에는 「자위대」라는 말이 빠지고 그대신 「외교·방위정책」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됐다.바로 정책마찰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일단 뒤로 미뤄놓고 정권교체의 대의명분에 무게를 실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정책합의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방위·외교,헌법,원자력정책 등을 둘러싼 사회당과 다른 당과의 차이였다.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예상밖으로 정책협의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이는 협의과정에서 사회당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사회당 역시 연립정부의 정책과 자당의 고유정책은 다를 수 있다며 유연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정책차이라는 문제점이 그대로 잠복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의 국정운영과정에서는 적지 않은 의견충돌이 예상된다는 게 관측통들의 얘기다.
  • 부시,레임덕 극소화 안간힘/대통령직 이양 두달 앞두고

    ◎2백70억불의 도시지원세법안 거부/EC에 보복관세 등 “누수막기” 조치/퇴임후 모교 예일대총장 취임설 나돌아 앞으로 75일뒤에 부시 미국대통령은 백악관 밖에 있게 된다.42대 대통령선거에서의 패배로 부시는 지난 4년동안 누려왔던 세계 초강대국 대통령의 영욕을 내년 1월20일 정오를 기해 차기 대통령 당선자인 클린턴에게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부시대통령은 우선 2개월남짓 남은 레임 덕 기간동안 고유정책을 일관되게 추진,집권 말기의 권력누수현상을 최대한 줄여야하는 부담을 안게됐다.이와함께 클린턴 차기정부의 원만한 출범에도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 부시대통령은 대통령 선거당일인 지난 3일 밤(현지시간)텍사스주에서 패배를 시인한뒤 4일 워싱턴으로 돌아오는도중 공군1호기안에서 2백70억달러의 도시지원세금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걸프전의 승리와 경기침체로 점철된 그의 4년 임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지난 5일 유럽산 포도주와 농산물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레임 덕현상을 극소화하려는 부시행정부의 강한 의지가 담겨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또 지난 4일 텍사스주를 떠나 백악관에 도착한뒤 『일을 멋지게 끝마치자는 말밖엔 달리 생각할 일이 없다』면서 『지난 4년은 생산적이었다』고 말해 클린턴이 취임할 때까지 정권이양작업에 적극 협조할 뜻임을 비췄다. 그러면 퇴임뒤 부시대통령의 행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직으로서는 역사상 9번째로 백악관을 도전자에게 내준 그는 지난 4일 워싱턴에서 지지자들에게 『우리는 정말 이 나라를 위해 공헌했으며 아마 역사도 그렇게 기록해줄 것』이라고 말해 재임기간동안 평가받지 못한 치적을 아쉬워하는 여운을 남겼다. 부시대통령은 5일 부인 바버라여사와 함께 캠프 데이비드산장으로 가 재선실패의 충격을 달래고 있다. 이같은 와중에서 부시대통령이 퇴임한뒤 모교인 예일대 총장직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대학가에 나돌고 있다.예일 데일리뉴스 편집간부들은 6일 최소한 두명의 예일대 출신 인사들이 지난 48년 이 대학을 졸업한 부시대통령을 차기 총장으로 추천했다고 밝혔다. 이에대해 마스 매츠크 예일대 대변인은 『지금으로 봐서는 단지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으나 『예일대 출신인 그를 차기 총장후보로 추천하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이상한 일』이라고 말해 결과가 주목된다. 미국 역사상 선거에 지고난뒤의 대통령의 모습은 각양각색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존 애덤스대통령은 1800년 선거에서 친구인 토머스 제퍼슨에게 패배한뒤 『네가 나를 쫓아냈다』고 분노하면서 남은 임기동안 판사등 공직자들을 무더기로 임명해 나라살림을 축냈다고 기록되고 있다.지미 카터전대통령은 지난 80년 선거에서 패배한뒤 『4년전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서서 괜찮다는 말을 못하겠다』고 심중을 털어놓았었다.
  • 법개정안 마련 실무책임자 황의창 특허청조사과장(인터뷰)

    ◎영업비밀 연말부터 법으로 보호/고객명부·실험자료등 기업고유정보는 모두 대상/도용해서 만든 상품 폐기처분 의무화/“관리규정마련등 스스로 보호 노력을” 코카콜라의 맛을 내는 비결이 타사에 알려지면 코카콜라회사는 경쟁기업들의 추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콜라 제조방법처럼 특허로는 보호받지 못하지만 기업의 생존비법인 영업비밀·실험자료·사업계획·고객명부·광고전략등 생산경영전반에서 경제적가치가 인정되는 정보인 영업비밀이 올해안으로 법으로 보호받게 된다.「영업비밀 보호」를 규정한 「부정경쟁방지법개정안」이 지난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시행일자를 검토중인 특허청 실무책임자 황의창조사과장을 찾았다. 황과장은 지난해 영업비밀입법위원회 위원으로 일했고 최근엔 국내최초로 영업비밀에 대한 해설과 기업의 대응전략을 다룬 「영업비밀」(육법사)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영업비밀이란 개념은 아직 기업관리자들에게 조차 낯선듯 합니다.이러한 기업의 숙지도를 고려할때 영업비밀보호를 규정한 부정경쟁방지법개정안의 시행은 올해말쯤이 적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개정안은 시행일자를 92년안으로 못박고 있다) 그간 영업비밀은 민법상 채무불이행(계약위반),형법상 절도나 배임 또는 주거침입죄등으로 처벌돼 왔기때문에 이에대한 효과적 보호·관리가 이뤄지지 못했다. 시행을 앞둔 영업비밀보호제도가 기존의 보호수단과 가장 크게 다른점은 침해행위에 대해 금지를 청구할 수 있게 된점.『영업비밀의 침해를 근절시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바로 이 「영업비밀 침해행위에 대한 금지청구권」입니다.이 결정이 받아들여지면 침해자는 그 영업비밀을 이용해 만든 상품과 생산시설을 폐기해야 합니다』이밖에도 개정법에 따라 3년이하의 징역과 3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보호제도의 시행으로 영업비밀에 대한 권리보호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황과장은 지적한다.『「상당한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되는 생산·판매방법 또는 기타 경영활동에 유용한 기술상·경영상 정보」를 영업비밀이라고 규정합니다.기업이 그 비밀의 유지·존속에 어느정도의 노력을 들일때만 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한 노력의 증거가 발견되지 못했을 때에는 경쟁기업에 영업비밀을 도용당했더라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소송이 발생했을때 영업비밀보유자는 침해자의 침해행위에 대한 증거를 들 수 있어야 합니다』황과장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침해보호를 위한 개별기업들의 노력이 영업비밀침해 방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고려됨을 알수 있다.『기업들이 개정된 부정경쟁방지법에 의해 영업비밀권리를 보호받기위해선 반드시 신입사원 채용계약때 영업비밀과 관련한 비밀준수 의무 부과계약을 맺어야 합니다.또 영업비밀에 대한 분류,관리장소및 수칙,책임자등을 명기한 영업비밀관리규정도 필요합니다』 그는 『특허만으로 기업의 기술개발성과나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시대가 되면서 영업비밀보호제도와 같은 신지적재산권의 의미가 더욱 중시 되고 있으며 외국기업들은 로열티로 「푼돈」을 벌던 기술장사를 지양하고 합작회사나 컨소시엄설립등을 통해 제3국의 기업을 영원히 공유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이 제도가 기술투자에 비교적 소홀한 국내기업의 기술투자를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는 이들이 많다.그 역시 『그동안 영업비밀을 빼내기 위해 기업간 부정하게 스카우트하는 일이 급증,적잖은 문제를 일으킨바 있었다』며 『새로운 제도가 산업경쟁력강화에 활용될 수 있도록 새로운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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