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기원·발달사(백제를 다시본다:15)
◎마한 아닌 부여계어 유래/지명어미 「홀」은 마한의 「비리」와 판이/3∼5세기 한계어 함께 사용… 일에 전파/태율 천도이후 한계의 단일언어사회로 정착
백제는 마한이 망한 터전에 세워진 나라로 인식하여 왔다.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창례홀」에서 건국하였다.그리고 꽤 오랜 기간을 마한과 공존하다가 거의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편견은 백제어를 마한어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그러나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현재 서울 안의 어느 한 지역이었을 백제 시조 온조의 도읍지는 「위례홀」이었다.여기서 강조되는 핵심은 지명어미 「홀」이다.이「홀」은 온조의 형인 비류가 건국한 현재의 인천,즉 「미추홀」의 「홀」과 더불어 부여계어의 특징을 극명하게 나타내 준다.그렇지만 마한의 지명어미 「비리」(>부리)와는 이질적인 어소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분포 중부지역 국한
사학자들은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한 시기는 제13대 근초고왕(AD 346∼375년)때로 본다.이 학설에 따르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에 가까운 오랫동안을 공존하여 온 셈이다.그렇다면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종래의 주장은 속단이었음을 시인치 않을수 없게 된다.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을 부여계어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뒷바침하는 다른 증거자료가 또 있다.앞에서 제시한 「위례홀」에 인근한 지명 「미추홀」이 「매소홀」로도 적혀있는 바,이는 「매」가 「매홀수성(현재의 수원)」의 대응기록을 통하여 「물」의 뜻임을 알수 있다.더욱이 중부지역의 남단인 현재의 청주의 옛이름이 「살매청천」으로 적혀있어 「매」가 「천」의 의미로도 쓰였음을 확인하게 된다.이처럼 「매」의 분포 역시 중부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마한지역(충남 전라)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백제어에 대한 지식은 백제말기의 언어중심권인공주·부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이와 같은 말기적인 현상의 편견때문에 보다 이른 시기의 백제어는 일관된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다.우리들을 이와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 사람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다.삼국사기 권34∼36(지리 1∼3)의 지명에 의하여 그려진 삼국의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장수왕 63년(AD 475년) 이후의 고구려 최전성기를 기준한 것이다.그 이전과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따라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무시한 중요 사건들을 가능한 한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고대 삼국의 전기 내지 중기시대의 한반도 중부지역은 결코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다.이 때의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 혹은 국내성이었으며,그 남쪽 경계는 압록강 이남의 살수 혹은 대동강이었다.따라서 장수왕이 장악하기 이전까지 고구려는 중부지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삼국사기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 전·중기의 판도를 그려보면 중부지역은 오히려백제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삼국사기 보완 필요
지도로 표시해 본 「삼국 각축과 언어권」을 참고하면 적어도 A지역에 살던 기층민의 언어는 고구려보다는 백제와 더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B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는 거의 무관하였던 것이며,A지역은 77년 동안의 고구려 점령기 이후에는 신라의 북진으로 a,b와 같이 두 지역으로 분리된다.따라서 a지역만이 정확히 1백84년간 고구려의 점령치하에 있었을 뿐 b지역은 겨우 77년간 고구려의 소유였고 오히려 보다 긴 1백7년간은 신라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고구려의 남침으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언어는 백제의 전기중기어인 것이라 하겠다.
백제어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설명할수 있도록 독특하게 형성 발달하였다.백제전기어는 고이왕때(AD 260년)까지의 언어를 가리킨다.아직 부족국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언어 또한 이전 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따라서 전기 백제어의 특징은 하나의 부족국가에 의하여 부여계어가사용된 단일 언어사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이 시기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겨 준 언어재는 관직명 인명 지명 등 수십의 어휘 뿐이다.
백제중기어는 고이왕 28년(AD 261년)부터 개로왕 20년(AD 474년)까지의 언어를 말한다.이 시기는 이른바 부족국가의 체제가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춘 연맹체로 변모한 만큼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믿게 한다.더구나 비류왕 초년(AD 324년)에 「위례」에서 광주(광주)로 천도한 사실과 마한을 멸하여 흡수한 근초고왕때(AD 346∼375년)의 사건은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를 증언한다.
이 시기의 언어적 특징은 부여계와 한계의 복수언어사회였다는 점에 있다.이 시기는 우리에게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에 분포하였던 1백20여에 달하는 지명 어휘들을 넘겨주었다.특히 왕에 대한 호칭으로 「어라하」와 「건길지」를 사용하였던 점을 복수언어의 한 예증으로 들수 있다.이것들은 중국의 사서인 「주서 이역전 백제」에 소개된 백제어인데 그 기록에 따르면 「어라하」는 지배층이 부르던 호칭이고,「건길지」는 피지배층이 부르던 호칭이었음을 알게 한다.
○중기때 크게 변화
이 시기는 또 오늘날과는 다른 수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기본 수사 중에서 「밀(밀=삼)」,「우츠(우차=오)」,「나는(난은=칠)」,「덕(덕=십)」등이 지명어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 수사체계는 고대 일본어에 수출되어 「mi(삼)」「itsu(오)」「nana(칠)」「towo(십)」 등으로 쓰였음이 확인된다.
백제후기어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초년(AD 475년)부터 멸망하던 해(AD 660년)까지의 언어를 말한다.백제어사 7세기에서 이시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이 시기는 삼국사기의 1백40여 지명을 비롯하여 인명 관직명 등의 언어자료를 국내외의 고문헌에 남겨 두고 있어 백제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우리가 오늘날 확보한 백제어 단어의 대부분은 이 후기 백제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지명의 변천/한강유역 고유지명 거의 백제어/고구려가 점령후 한어화… 복수지명 사용
전해지는 삼국시대의 지명은 한 지역이 여러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이미 당시에 수차례에 걸쳐 지명의 개혁작업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명은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뒤 신라 경덕왕(재위 AD 742∼764년)때 상당수가 중국식 2자명으로 바뀌었다.그러나 경덕왕의 개정작업이 우리의 고유지명을 처음으로 한어화한 것은 아니다.그같은 작업은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사벌국이 법흥왕 11년에 상주로,다시 경덕왕 때 상주로 개정된 것도 한 예이다.
지명을 바꾸는 것은 지역을 행정적으로 개편하거나 정비하기 위해 필요했다.또 정복지역이라면 행정적인 필요성 이외에 고유정서를 말살하기 위해서도 요긴했을 것이다.경덕왕이 삼국통일을 성취한뒤 약 1세기만에 지명을 한어로 통일한 것처럼 그 이전 고구려도 장수왕의 남진으로 중부지역을 차지했을 당시 지명개혁을 단행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복수지명은 고구려가 점령했던 지역의 경우 백제나 신라에 비해 훨씬 많다.그러나 압록강 이북 지역의 지명은 거의 하나만이 전해진다.그 지역은 고구려의 본거지로 새로운 이름을 지을 필요성이 그만큼 덜 했던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역으로 고구려가 점령지역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지명개혁을 단행했음을 보여준다.실제로 고구려의 지명이 복수로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어느 하나가 한역되어 있다.고구려 시대에 이미 고유 지명이 한역되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따라서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고구려지명은 정복사업이 활발했던 장수왕 당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한강유역의 지명 가운데 고유지명은 대개가 백제의 전기지명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