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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요한 日해안마을 순식간에 삼켜버린 쓰나미

    3·11 일본 대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인 미야기현 게센누마시가 불과 몇분 만에 시커먼 바닷물에 잠기는 영상이 새롭게 공개됐다. 최근 유튜브(www.youtube.com)에 올라온 5분45초짜리 동영상은 게센누마의 한 바닷가 마을이 쓰나미로 사라지는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동영상 촬영자는 중간에 “저기 사람, 사람”이라고 외치기도 하지만 빠르고 세차게 밀려드는 바닷물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한때 생선 가공공장이 늘어서 있던 이 마을은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 지금은 건물 몇 채만 남아 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방시혁 “독설도 애정 있어야 나오죠”

    방시혁 “독설도 애정 있어야 나오죠”

    “안녕하세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독설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작곡가인 방시혁(39).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위탄)에서 까칠하고 냉철한 심사평으로 ‘독설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는 요즘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지난 23일 서울 논현동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방시혁을 만났다. ●낯가리는 방시혁, ‘위탄’ 출연 이유는?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 2AM의 ‘죽어도 못 보내’, 옴므의 ‘밥만 잘 먹더라’, 비의 ‘나쁜 남자’, god의 ‘하늘색 풍선’…. 자신의 이름보다 더 유명한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방시혁은 가요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기 작곡가다. 낯가림이 심해 인터뷰는 물론 방송 노출을 꺼리던 그가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부터 물었다. “처음엔 ‘슈퍼스타K’의 짝퉁이란 얘기가 있어서 위험 부담도 있었어요. 하지만 시장 선도 업체들이 있는 상황에서 저희 회사 음악을 빨리 알리기 위해서는 사장인 제가 스스로 브랜드화되고 킬러 콘텐츠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제작자가 유명해지면 사회적인 책임도 커지겠지만, 그만큼 일관성과 충성도도 커지니까요.”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시절, 박진영 대표와 손잡고 많은 스타들을 키워냈던 그는 2005년 독립했다. 2AM, 임정희, 에이트 등이 그의 회사 소속이다. 그렇다면 ‘위탄’ 출연으로 인한 손익계산서는 어떻게 될까. “요즘 사원을 채용 중인데 제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지원자가 10배가량 늘었습니다. 저의 멘토 스타일을 본 뒤 (우리 회사) 오디션 응시자도 부쩍 늘었어요. 하지만 삶 자체가 노출되는 데 따른 불편함도 있어요. 공공장소에서도 그렇고,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글을 올릴 때도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얼마 전 SNS에 평소 절친한 사이인 가수 엄정화와 ‘우리, 결혼했어요’에 한번 출연해보고 싶다는 우스갯소리를 올렸더니 인터넷에 ‘방시혁, 공개 구애’라는 기사가 떴다며 웃었다. 그래도 소속 아티스트들의 애로 사항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수확’이란다. 그는 예전부터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했다. “제가 직접 프로듀서를 맡을 때는 녹음실에서 울면서 노래한 가수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울면서 나간 가수는 없어요.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니까. 케이윌, 에이트, 임정희 등 지금은 유명한 가수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앨범 제작을 중단한 적도 있어요. 물론 화만 낸 것은 아니고, 성악 발성을 가르치는 등의 보완책을 마련해줬죠.” 방시혁은 ‘위탄’에서의 자신의 이미지는 자사 오디션이나 소속 가수들을 볼 때의 중간쯤이라고 했다. “독설도 애정이 있어야 나오는 겁니다. 소속 가수들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요. ‘위탄’ 도전자들에게 독설을 하는 것은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이 들어서예요. 정말 가수가 되고 싶은 절박한 마음에 온 친구들인데, 단점이 보이는데, 다음 기회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독하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가끔은 자신이 봐도 정말 밉살스러울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일에 집중할 때의 모습이 TV에 그대로 나와 더욱 경직되게 보인다는 것. “전 제 말이 꼭 독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남을 비방하거나 해할 의도가 있지 않기 때문이죠. 요즘 독설 화법이 유행하는 것은 명분을 앞세우는 한국 사회에서 체면을 생각해 에둘러 말하거나 거짓을 얘기하기보다는 좀 불편하더라도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일 겁니다. 엄숙주의를 깨는 데 대한 대리만족이나 통쾌함도 작용한 것 같고요.” 방시혁은 ‘위탄’에서 노지훈과 데이비드 오를 최종 합격시켰다. 두 사람은 새달 8일부터 다른 ‘멘토 스쿨’의 최종 진출자들과 생방송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합한다. 그의 오디션 심사 기준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등을 할 가능성을 먼저 고려했죠. 제 심사 기준은 무대에서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재능입니다. 가수는 물론 가창력이 중요하지만, 무대에 서는 순간 스타성으로 표현되는 무대 장악력이 화면으로 뿜어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지금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무대를 보여줄 수 있느냐가 주된 평가 기준이죠.” ●서울대 미학과 출신… 어려서부터 빌보드 꿰고 살아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빌보드(미국 대중음악 차트)를 꿰고 살았다는 그는 아직도 박진영의 음악적 유산이 자신에게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작곡가로서 박진영의 문법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숙제”라고도 했다. “작곡가는 평생 하청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을의 정신’에 투철합니다. 일단 곡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또한 새로움의 요소가 없으면 제가 쓴 곡이 아무리 유행해도 달갑지 않아요. 작곡은 모르겠지만, 작사는 당대의 감성을 그 시대의 말로 풀어내는 남다른 문법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만족하는 편입니다.” 평소엔 TV를 잘 보지 않고, 주로 뉴스를 보면서 시류를 파악하고 사람들이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지 고민한다는 방시혁. 그는 요즘 아이들을 위한 동요 사업과 걸 그룹 ‘글램’의 데뷔(7월) 준비에 여념이 없다. 불혹을 앞둔 나이.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지혜로운 여성을 찾고 있지만, 음악보다 가정을 우선시할 자신이 없어서 당분간은 (결혼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음악을 더 오래 하기 위해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등 체력 관리에도 신경쓰고 있다는 그를 보며 ‘독설가’보다는 ‘완벽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슈스케3’ 지원자 보름새 68만명 돌파...기록 세울까

    ‘슈스케3’ 지원자 보름새 68만명 돌파...기록 세울까

    오디션 열풍의 주역인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 ‘슈퍼스타K(슈스케) 3’에는 원서 접수 시작 보름여 만인 25일 현재 68만여명이 몰려들었다. 여기, 두 명의 젊은이가 있다. 한 명은 오디션을 통해 가수의 꿈을 이뤘다. 대신, 들춰내고 싶지 않던 가족사를 해부당해야했다. 또 한 명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뮤지컬배우 오디션장으로 달려갔다. 이들의 도전은 아직 진행형이다. 가수 김보경(21). 아직은 전철을 타거나 시내를 활보해도 알아보는 이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가수다. 꽤 괜찮은 가수다. 지난해 숱한 화제를 일으켰던 ‘슈스케2’ 출신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슈퍼위크’(도전자 11명을 추려 생방송 무대에 올린 뒤 차례로 탈락시키는 무대) 직전까지 갔다. 심층면접 과정에서 어릴 적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투병, 어린 동생들을 보살핀 사연 등이 알려지면서 시청자와 심사위원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 아쉽게 ‘톱 11’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서너 곳의 기획사에서 손을 내밀었다. ‘슈스케2’ 출연자 중 가장 먼저 소속사(소니뮤직)를 만났다. 5곡이 실린 첫 미니앨범 ‘퍼스트 데이’(The First Day)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처음에는 오디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그런 건 화려한 아이돌을 꿈꾸는 애들이나 나가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지원서를 쓴 이유는 딱 한 가지.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오디션을 통해 싱어송라이터로 성공한 미국의 켈리 클락슨이 ‘슈스케2’의 3차 예선에 심사위원으로 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원서에 나와 있는 ‘노래를 하게 된 이유’, ‘가장 힘들었던 고비’ 등의 항목은 적지 않고 빈 칸으로 놔뒀다. 정작 클락슨과의 조우는 실패했다. 외려 걱정했던 일이 현실화됐다. “(부모님 이혼 등은) 다 지난 일인데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인 동생 친구들이 뒤늦게 알게 돼서 무척 힘들어했어요.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부른 것도 삼촌 친구가 운영하는 곳에서 경험 삼아 아르바이트를 한 건데 생계형 소녀가장으로 편집됐죠.” “우리 사회의 가혹한 경쟁을 단기간에 경험한 기분”이라는 김씨는 “오디션이 ‘양날의 칼’일 테지만 짧은 기간에 담금질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털어놓았다. “슈스케에서 탈락하고서야 비로소 ‘아, 그동안 막연하게 음악을 하겠다고 설쳤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만의 (음악)색깔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타 탄생’을 꿈꾸고 있을 숱한 오디션 도전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을까. “또래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의지와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심사위원이나 멘토의) 날 선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매우 중요해요. 상처를 음악으로 메워 나간다면 약이 될 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중심을 잃어버린 채 추락할 수 있습니다. 맷집이 강해져야 해요.” 뮤지컬 배우 양경원(29). 언제든 다시 ‘마찰적 실업자’(이직 직전의 실업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당당한 뮤지컬 배우다. 지난해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로 처음 무대에 섰다. 오디션에 합격해 오는 6월 ‘아가씨와 건달들’에, 9월에는 ‘조로’에 거푸 출연한다. 고교 때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할 만큼 춤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도 고민이 컸다. 눈길은 ‘이쪽’으로 쏠렸지만, 현실은 ‘저쪽’(건축설계)을 선택했다. 졸업 이후 건축 프로젝트매니지먼트(PM) 회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몸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과야 모르지만 어쨌든 ‘최선’이 있는데 ‘차선’을 택한 게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직장생활 2년차가 됐을 때부터 이중생활을 했죠.” 퇴근하면 곧장 서울뮤지컬아트센터로 달려가 연습생 생활을 한 것. 1년쯤 지났을 때 확신이 들었다. 사표를 던지고 아예 서울뮤지컬아트센터로 출퇴근했다. 외부 활동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 ‘브로드웨이 42번가’ 오디션에 도전했다. “회사 다니면서 (오디션) 준비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게 많아요. 사회생활 하면서 생긴 경제관념이나 인간관계 같은 건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사표를 내고 1년 동안은 수입이 한 푼도 없었다. 보험을 해약하고 적금을 깨서 버텼다. 오디션을 통과해도 연습이 시작돼야 비로소 수입이 생기는 게 이 바닥이다. 지금도 연수입으로 따진다면 회사 다닐 때의 절반밖에 안 된다.“6월에 작품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입이 없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요. 관공서나 기업 행사에서 갈라쇼 식으로 뮤지컬 명장면이나 노래를 3~5곡 정도 부르는 거죠.” 이런 행사는 주로 연말에 많아 비수기에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 일감을 찾아야 한다. 요즘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설치미술 작품을 전시해 놓은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퍼포먼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뮤지컬계는 어차피 최상급 스타가 되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오디션의 반복이다. 작품에 따라 5~6차에 걸친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해야 배역을 따낼 수 있다. 피 말리는 오디션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에게 방송사 오디션은 어떻게 비칠까. “대단하죠. 아마추어들인데 공개된 장(場)에 나서는 용기가 대단한 것 같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까지도 까발려지는 공간이란 걸 알면서도 나서는 것을 보면 저 사람들이 정말 절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뮤지컬을 보러 오는 관객 중에도 나보다 더 목마르고 간절한 분들이 있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하게 돼요.”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故조오련 아들 조성모 “정신 제대로 차려야죠”(인터뷰)

    故조오련 아들 조성모 “정신 제대로 차려야죠”(인터뷰)

    스타부모 밑에 태어난 이들을 두고 축복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불행하다는 사람도 있다. ‘아시아의 물개’ 故조오련의 아들 조성모(27)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박태환 등장 전까지 간판급 수영선수였던 조성모에게 아버지의 명성과 후광은 뛰어넘을 수 없었기에 늘 힘겨운 것이었다. 2년 전 큰 나무와 같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스러졌다. 그 충격으로 자살을 떠올릴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급격히 체중이 불어난 조성모는 세상에서 꼭꼭 숨어버렸다. 지난해 잠시 SBS ‘스타킹’에 출연해 30kg넘게 체중감량을 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또 찾아왔다.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한 지 8개월. 만나는 사람이라곤 친구 몇 명과 친형, 정신과 주치의, 트레이너 숀리가 전부였다. 세상에 나서는 게 여전히 두려웠지만 최근 조성모는 용기를 냈다. 대우증권 CF ‘대한해협’ 편에 출연한 것. “목숨처럼 수영을 아낀 아버지를 기억 속에만 남길 순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움직였다. ◆ “대답 없는 이름, 아버지”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냐고요? 돈 없는 아버지요, 하지만 존경하는 분이요.” 조성모는 담담하게 이렇게 아버지를 떠올렸다. CF에 나오는 영상처럼 “정신 지대로 차리라!” 고 호통 치던 조오련은 호랑이 수영코치였고,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해 사비를 쏟아 부어 빚더미에 오른 무모한 열정을 가진 가장이었다. “CF에 출연하면서 아버지의 성함을 3번 팔았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다 말썽을 일으켰을 때 처음 아버지 성함을 댔고, ‘스타킹’에 출연할 때가 2번째였죠. 수영선수로 활동할 때는 ‘조오련 아들’이란 말을 듣는 게 제일 힘들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의 그늘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알게 됩니다.” 조성모는 2004년 아시아신기록을 갈아치우며 부산아시안게임 1500m 은메달을 딴 ‘에이스 국가대표’였다. 하지만 좋은 기록도, 값진 은메달도 ‘수영영웅’ 조오련의 아들로서는 부족한 것이었다. 무거운 부담감과 만성적인 허리디스크로 고통받던 조성모는 결국 박태환 등 쟁쟁한 후배에 자리를 양보하고 태릉선수촌을 나와야 했다. ◆ “대한해협, 아버지 아닌 나의 꿈” 한차례 뜨겁게 타올랐다 꺼져버린 양초처럼, 무성했던 잎들을 떨어뜨려버린 앙상한 나무처럼 전성기가 지나간 조성모에게 현실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고 막막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가끔 아버지 꿈을 꾼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아버지 생전에 왜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해드렸는지…” 회한으로 고개를 숙였던 조성모는 꿈에 대해서는 힘줘 말했다. “사실 대한해협을 건너겠다는 건 즉흥적인 생각이었어요. 수영을 그만둘 때 수영복 절대 안 입겠다고 맹세했거든요. 근데 ‘스타킹’ 오디션 도중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죠. 하지만 생전 아버지를 떠올리면 분명 제 꿈을 칭찬해 주실 거예요.” 조성모의 꿈은 아름답지만 이루기 쉽지 않은 것이다. 스폰서십을 구하고, 시스템을 구축해 대한해협을 건너는 일은 해남 바다소년이었던 조오련이 자라서 아시안게임 2연속 2연패를 한 기적보다 더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조성모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일이라서 저도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대한해협을 건너는 건 제 꿈이 됐어요. 선수시절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수영을 했지만, 이젠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해 꿈을 꾸고 노력할 겁니다. 지켜봐주세요.”   글=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http://twitter.com/newsluv)  사진·동영상=서울신문 나우뉴스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영화계 장학사업 선도 원로배우 신영균

    [김문이 만난사람] 영화계 장학사업 선도 원로배우 신영균

    노래 하나 감상해본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의 ‘빨간 마후라’다. 얼핏 짧고 단순한 노래 같지만 대한민국 공군 출신들에게는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추억의 되새김질을 하게 하는 노래다. 또한 40~5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는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다가오는 노래이기도 하다. 1964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빨간 마후라’는 공군 전투기가 하늘을 나는 장면과 시원한 활주로, 빨간 머플러가 컬러 필름으로 표현돼 관객을 압도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에서만 25만 관객을 기록했다. 특히 이 영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됐으며 주연으로 나온 신영균(83)씨는 당시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한류 스타가 누구냐고 했을 때 영화계에선 신씨를 거론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런 추억을 담은 ‘빨간 마후라’는 대구 달성군 유가면 양리에 위치한 고 유치곤 장군의 호국기념관에 노래비로 세워져 이곳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원로 영화배우 신씨가 2010년 10월 출연한 재산으로 출범한 재단법인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이 현판식과 함께 영화인 자녀 19명에게 2011년도 상반기 장학증서와 장학금을 전달했다. ●영화인 자녀 19명에게 첫 장학금 전달 영화인 총연합회 회원단체와 영화인회의 등 8개 영화 관련 단체로부터 추천받은 영화인 자녀 이동규(서원대 유아교육학과 1학년), 임원룡(서울대 경영학부 4학년)군 등 대학생 10명과 홍민호(경복고 3학년), 정원(동두천외국어고 1학년)군 등 고교생 9명에게 총 4000여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이들 장학생 중에는 영화배우 허기호(허장강씨의 장남)씨의 아들 허진우(안양대학교 공연예술학과 1학년)군도 포함됐다. 이 자리에서 신씨는 명보시네마테크 운영, 신영균연기예술상 제정과 함께 영화 인재 발굴 사업으로 청소년 영화제 ‘필름 게이트’와 방학 시즌 어린이 영화 체험 교실인 ‘꿈나무 필름 아트 캠프’ 등을 추진할 계획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올 연말에는 제1회 신영균영화연기대상 수상자가 처음으로 나올 예정이다. 이처럼 ‘빨간 마후라’와 ‘5인의 해병’ 등으로 일찍부터 원조 한류스타의 명성을 얻은 신씨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50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는 등 국내 영화 발전을 위해 새로운 열정과 의욕을 보이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명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신씨를 만났다. 때마침 김두호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도 함께 있어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인터뷰가 진행됐다. 검은색 양복에다 빨간 넥타이 차림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40대로 보인다.”고 인사를 하자 “에구 뭘, 마음이 젊어서 그런가.”라며 파안대소했다. 그래서 건강 얘기부터 먼저 나왔다. “운동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가끔 골프 라운딩도 하고 헬스클럽에는 일주일에 두어번 정도 나가지요. 나이 먹어서는 근육 운동을 자주 해야 돼요. 골격이 튼튼해지니까.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합니다.” ●294편 영화 거의 다 기억… 팔순의 나이 무색 신씨는 웃음이 호탕하다. 생각을 젊게 하고 행동 또한 그러하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기억력 또한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로 데뷔한 이후 1978년 ‘화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출연한 294편의 영화를 거의 줄줄 꿰고 있었다. ‘빨간 마후라’에 출연한 동료 배우 최무룡씨를 비롯해 ‘5인의 해병’에 등장하는 황해·곽규석·박노식씨 등에 대한 추억도 또렷하게 떠올린다. 이들 중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아 우리나라 영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회가 특별하다. 신씨는 알다시피 지난해 10월 자신의 사재 대부분을 털어 장학사업에 쓰겠다고 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 후 후회는 한번도 없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장학사업)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인들의 작업 환경이 아직도 열악합니다. 특히 그들 중에는 재능 있는 자녀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격려와 보탬이 된다면 그것처럼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대를 잇는 훌륭한 연기자들을 잠시 떠올린다. 1955년 ‘피아골’로 데뷔한 고 이예춘씨의 아들 이덕화와 손녀 이지현, 고 김승호씨의 아들 김희라와 손자 김기주, 오발탄의 명배우 고 김진규씨의 아들 김성준, 고 황해씨의 아들 전영록, 고 독고성씨의 아들 독고영재와 손자 독고준, 고 박노식씨의 아들 박준규 등. ●치과의사 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꿈 간직 신씨 자신도 가난과 배고픔을 몸소 겪었기에 연기에 자질이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청춘극단’에서 2년 동안 연기를 하다가 생활의 비참함을 벗어나고자 좀 더 안정적인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해군 대위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58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으나 도저히 끼를 못 버려 2년 뒤 황순원 원작 ‘과부’로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 연극을 했는데 생활이 영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직업적으로 전망이 좋다는 치과의사가 되고자 했지요. 하지만 연기에 대한 꿈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데뷔작 ‘과부’에서 처음 주연으로 발탁될 당시를 회고한 그는 “배역도 좋고 작품도 좋았는데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며 “많이 고민했지만 순전히 연기에 대한 욕심 하나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이후 신씨는 다양한 스타일의 캐릭터를 소화하면서 스타의 길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빨간 마후라’ ‘5인의 해병’ 같은 군사물은 물론이고 ‘연산군’에서는 폭군,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는 멜로물의 주인공,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는 종교인으로 등장하며 타고난 끼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18년 동안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니 그의 열정과 끼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다면 한참 인기 가도를 달릴 때 왜 배우를 그만두게 됐을까. “당시 군사정권이었죠. 검열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권총을 쏘는 장면도 ‘왜 이 각도에서 총을 쏴야 하느냐’ 등의 이유로 가위질을 많이 당했지요.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매력도 없어지고 편수도 줄고, 관객 또한 마찬가지로 흥미를 잃게 됩니다.” ●군사정권시절 검열 심해 배우 생활 그만둬 배우를 그만둔 이후에는 제주도에서 영화박물관 건립에 열정을 쏟는다. 그가 제주도와 인연이 된 것은 영화 ‘마적’(신상옥 감독)이었다. 이 영화는 1967년 제주도에서 촬영됐는데 당시 신씨는 드넓은 초원에서 영화박물관을 생각하게 됐다. 결국 오랜 노력 끝에 1999년 제주 남원읍에 ‘신영영화박물관’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신씨가 부자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부를 일궜을까. “제 인생의 특징을 말한다면 실패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또 무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인격적으로는 겸손하자고 늘 생각했어요.” 신씨는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1960년대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지었다. 영화는 많으나 극장이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에서 발동이 걸렸던 것.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했다.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던 1977년 8월 명보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이문웅 감독),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감독), ‘미워도 다시 한번’(변장호 감독) 등의 한국 영화가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그가 지난해 기부 대상을 ‘명보극장’으로 정한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극장 소유는 영화인들의 꿈이었고 이제는 그 꿈을 후배들에게 돌려주려는 생각에서였다. 무엇이든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 언젠가 꿈이 이뤄진다는 철학도 포함됐다. 신씨는 지금도 꿈을 꾼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에 출연해 멋진 연기로 영화배우로서 마무리를 잘하고 싶단다. 이를 위한 구상이 현재 기획 단계에 있다고 귀띔했다. 그의 취미는 나무 심기다. 신영영화박물관 옆에 많은 나무들을 심었단다. 서른두살에 영화 나무를 처음 심은 이후 지금도 꾸준히 나무를 심고 있다고 했다. 팔순 나이에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에서 또 한번 영원히 자라는 나무를 심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신영균은 치과의사 → 배우 → 국회의원… ‘빨간 마후라’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1928년 황해도 평산의 산 속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교육열에 의해 일찍 서울로 월남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우연히 교회 연극을 통해 연기를 접한 뒤 줄곧 배우를 꿈꿨다. 한성고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청춘극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극단 배우로 생계 유지가 힘들자 다시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치의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해 활동했고 졸업 후 치과의사로 일하다 1960년 32살의 나이에 영화 ‘과부’로 데뷔했다. 이어 1961년 ‘마부’로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출연작 중 단연 압권은 ‘빨간 마후라’(1964)이다. 이 영화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원조 한류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 영화에 대한 사전 검열이 심해지면서 영화계가 침체됐고 1978년 ‘화조’를 끝으로 배우 활동을 접었다. 이후 명보극장을 중심으로 영화사업에 뛰어들었고 15, 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9년 제주도에 영화박물관을 지었으며 지난해에는 사재 500억원을 선뜻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 18일에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현판식을 가지면서 장학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요 대표작으로는 열녀문(1963), 쌀(1963), 달기(1964), 시장(1966), 천하장사 임꺽정(1968), 대원군(1968), 미워도 다시 한번(1968) 등이 있으며 18년 동안 모두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한前총리 비서실장에 3억원 돌려달라 했다”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김우진)의 심리로 열린 검증 기일에서 한만호(50·수감 중) 전 한신건영 대표의 교도소·구치소 내 접견 녹음 시디(CD)가 공개됐다. 시디에는 한씨와 면회 온 그의 어머니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67) 전 국무총리와 함께 기소된 비서실장 김모(51)씨에게 3억원을 돌려 달라고 대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음은 한씨의 주요 녹음 내용이다. ●2009년 5월 18일 한만호=(비서실장 김모씨에게) 나한테 오라고 그래요. 닦달을 해야 돼. 뭔가 조치를 취해야 돼요. 어머니=그래도 옛날에 같이 서로 도움 주고 산 시대가 있지 않았냐고 말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대. 상의해서 연락 주겠다고. 한만호=내가 중대한 결단을 내리려고요. 계속 소식 없으면. ●6월 13일 한만호=내가 편지 (비서실장 김모씨에게) 띄웠어요. 내가 3억원을 요구했어요. 3억원. ●6월 30일 한만호=내가 3억원을 요구했잖아요. 3억원이 적은 돈은 아니잖아요. 내가 반(半)공갈성으로 (편지를) 넣었기 때문에 어떤 대답이 오긴 올 거예요. 하여튼 그것은 지켜볼 거예요. 한명숙 서울시장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당선)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11월 27일 한만호=(비서실장) 김모씨 연락 없죠? 어머니=일단 (비서실장) 김모씨하고 총리 그런 개같은 X들 만나서 얘기 확고하게 해, 아주. 뒤돌아볼 것도 없어. 왜 한달에 1000만원씩 주고서 우리가 고통을 당해.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4)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4)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봄이라 하기에는 지독하게도 잔인한 날들이다. 여전히 봄다운 봄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계절을 기다리는 설렘 가운데, 봄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한 건 없지 싶다. 혹독한 추위 속에 이어지는 잔인한 세상살이 탓에 더 그렇다. 모두가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한껏 펼치고 환한 봄 햇살 아래를 오래 걷고 싶은 시절이다. 동백꽃은 추위가 혹독할수록 더 붉게 피어난다. 겨울 꽃으로 알려졌지만, 남쪽의 몇 곳을 제외한 대개의 지역에서 동백꽃을 보려면 아무래도 봄이 돼야 한다.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가장 북쪽 지역인 고창 선운사의 경우, 4월 들어서야 피어날 정도다. ●기묘사화 때 낙향한 선비들이 심은 나무 동백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성마르게 달려간 곳은 전남 나주 왕곡면 송죽리 금사정이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겨우 조롱조롱 맺힌 꽃봉오리는 여전히 단단한 겨울 침묵에 쌓인 채다. 나무 주위로 떨어진 열매 껍질 조각과 씨앗만 수북하다. 금사정 동백나무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건, 나무를 심은 사람들의 삶에 서리서리 맺힌 붉은 한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0년 전인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바람이 세상을 휩쓸던 때의 일이다. 급진 개혁을 주창하던 풍운아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의 길로 떠난 뒤, 그를 따르던 선비들에게도 죽음의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들 가운데 이곳 나주 출신의 선비들이 있었다. 승지를 지낸 임붕(林鵬), 직장 벼슬을 지낸 나일손(逸孫), 생원 정문손(鄭文孫) 등 11명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좌절하게 된 그들은 피바람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금강 11인계를 조직한 그들은 짬짬이 세상 이치를 짚어 보며 훗날을 기약했다. 정자를 지은 건 그들이 낙향하고 10년쯤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정자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선비들의 토론장으로 쓰였다. 정자를 다 지은 그들은 금강결사의 뜻을 따 ‘금사정’(錦社亭)이라 이름 붙이고 정자 앞에 나무를 심었다. 그들이 골라낸 나무는 동백나무였다. 세상이 변한다 하더라도 사철 내내 푸른 동백나무의 잎처럼 뜻을 잃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또 좌절한 그들의 핏빛 한이 언젠가는 동백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담았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11명의 선비들은 채 꿈을 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한 그루의 동백나무는 금사정 앞에 듬직하게 서서 옛 선비들의 이루지 못한 뜻을 지켜 왔다. ●독립한 동백나무로는 최초의 천연기념물 나무 줄기 안에 배어있는 선비들의 뜻을 새겨보는 중에 고요한 마을 길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 왔다. 자동차 2대가 교차할 수 없는 비좁은 마을 길, 금사정 앞에 세운 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주 지역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의 기자였다. “작년에는 이맘 때에 활짝 피었는데, 올해는 아직 이르네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꽃 피어나기를 기다려서 찾아 왔죠. 정말 멋지더라고요. 올해도 이 나무 사진을 신문 지면에 소개할까 하고 왔는데, 허탕이네요. 다시 와야죠.” 금사정 동백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15호로 지정된 건 2009년 12월이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나무이건만 독립 노거수로서 동백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이 나무가 처음이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던 선비들의 한을 국가가 보상해 주었다는 기쁨이라도 있었던 걸까.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이태 전의 겨울을 지내고 금사정 동백나무는 이듬해 햇살 따스하던 봄날, 여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고 한다. 동백꽃은 화려한 붉은 빛으로 피어났을 때도 좋지만, 그 못지않게 낙화할 때의 멋도 좋다. 전혀 시들지 않은 붉은 꽃봉오리가 노란 꽃술을 그대로 담은 채 후드득 떨어지는 순간의 놀람은 숨이 멎을 듯하다. 한창 ‘세시봉’으로 주가를 올리는 가수 송창식도 그래서 동백 꽃을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그 꽃’이라고 노래했다. 지금 숱하게 매달린 꽃봉오리들이 모두 꽃을 피우고 후드득 낙화를 마쳤을 때의 장관이 눈앞에 선하다. “나무 좋지! 저 정자를 지키는 사람이 살림채를 짓고 살면서 잘 지켜오다가 집도 허물고 지키던 사람도 떠났지. 금강계에서 관리하는 거야. 계원이 한 열댓 명 될 걸. 그 중에 우리 마을에 사는 계원은 한 명밖에 없어. 원래는 모두 여기 살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다 다른 데로 나갔어.” 꽃샘바람 사이로 살짝 비친 따스한 오후 햇살을 찾아 느린 걸음으로 해바라기 나온 정휴환(83) 노인의 이야기다. 옛 선비들처럼 개혁 정치를 이루기 위한 결사 조직은 아니지만, 여전히 옛 사람들처럼 금강계는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금사정도 여전히 금강계에서 관리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나서, 정자 지킴이가 떠나고 그가 살던 살림채도 허물었다고 한다. ●오래도록 변함없이 이 땅을 지켜갈 나무 정 노인의 이야기에 수시로 들고나는 마을 살림살이의 변화가 성가시다는 듯한 아쉬움이 묻어있다. 나무는 변한 게 없는데, 그를 둘러싼 세상은 쉬지 않고 변했다. 옛사람은 나가고 새사람이 들어온다. 따라서 살림살이도 변했다. 마을 붙박이로 살아온 노인에게 변화는 성가실 뿐이다. 쉼 없이 변하는 사람살이 속에서도 금사정 동백나무는 개혁의 뜻을 잃지 않기로 맹세했던 옛 선비들의 핏빛 다짐을 잊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피처럼 붉은 꽃을 끊임없이 피워낼 것이다. 사람의 마을에서 사람들은 들고남을 거듭하며 숱한 변화를 일구겠지만, 나무는 오로지 제게 주어진 빛깔과 향기에 맞춤한 모습으로 직수굿이 살아남을 것이다. 안팎으로 잔인하게만 흘러가는 이 계절, 세월 흘러도 이 땅을 아름답게 지켜줄 한 그루의 동백나무가 그래서 더 소중하다. 글 사진 나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길 전남 나주 왕곡면 송죽리 130. 서해안고속국도 무안나들목으로 나와 광주, 나주 방면으로 3.5㎞ 가면 학교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국도 23호선을 타고 11㎞ 가면 후동사거리에 이른다. 신포리 지석묘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8㎞ 쯤 더 간 뒤, 박포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1㎞ 가면 나오는 마을이 송죽리다. 마을 안으로 난 좁은 길로 250m 쯤 가면 마을 끝에 금사정이 나온다. 나무는 금사정 안에 있다.
  • [천안함 1년] (중) 생존자 첫 전역 전준영씨 사연

    [천안함 1년] (중) 생존자 첫 전역 전준영씨 사연

    그와의 전화 통화는 쉽지 않았다. 때로는 문자메시지로, 때로는 늦은 밤 짧은 통화로 간간이 안부만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찍기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직도 천안함이라는 상처에서, 세간의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 천안함 생존자 58명 가운데 처음으로 의무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5월 전역한 전준영(24)씨다. 어렵게 연결된 전화 속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았다. 방황→학업 포기→자살 충동→사랑→희망…. 그렇게 아픔을 극복해 가고 있단다.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동일본 지진 피해자들에게 힘내라는 메시지도 전했다. “저는 국민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힘이 나고 고마웠거든요. 우리들처럼 힘냈으면…”이라고 위로의 말을 보냈다. 곧 새신랑이 된다는 기쁜 소식도 전했다. “(제가) 기자회견 하는 거 보고 제 미니홈피를 통해 한 여성분이 연락을 해 왔어요. 그 뒤 그녀를 만나 위로받으면서 가까워졌죠. 양가 부모님들이 4월에 만날 예정인데 그때 결혼 날짜를 잡을 겁니다.” 극한의 고통을 준 천안함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천생 배필을 만나게 해 줬다. 가장이 된다는 책임감과 가족이 생긴다는 기쁨에 자연스럽게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 갔다. “이제 가족이 생겨서 그런지 예전처럼 우울하고 그런 건 많이 없어졌죠. (사건 당시) 그때랑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어요. 가장이 돼 가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병원 갈 시간도 없고, 가족 때문인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된 거 같아요.” 전역한 뒤 심해진 우울증으로 ‘그냥 같이 전사했으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왜 살아서 고통을 받아야 하나.’라며 방황했던 마음도, 자살 충동도 옆에서 힘이 되어 준 연인 덕에 이겨 냈다. 그는 “밥 먹다가 군대랑 연관된 음식을 먹으면 그렇게 눈물이 났어요. 특히 부침개를 보면 더 슬펐습니다. 동기가 부침개 부치면 따로 불러서 입에 넣어 주고 했던 추억이 떠올라서….”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동기는 이상희, 이재민, 이용상, 이상민 하사 등이다. 그는 해상병 542기 동기들 중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방황도 많이 했다. 휴학 뒤 체대 편입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녔지만 두려움, 불안, 죄책감 등 어지러운 마음이 발목을 잡았다. 며칠을 공부하다 흐트러지고, 며칠을 마음먹었다 포기하는 나날이 반복됐다. 의욕이 없었고 무기력했다. 지난해 7월의 일이었다. 결국 한달 만에 편입 공부를 접었다. 학교에 다시 돌아갔지만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만에 또 휴학계를 냈다. 우울증도 심해졌다. 자살하려고 했던 일도 두세번이나 됐다. 그때 여자 친구가 ‘구세주’가 됐다. 힘겹게 술로 하루하루를 잊으며 보냈던 당시, 그녀는 메신저로 연락하며 힘을 주었고, 만나서는 따뜻한 말로 용기를 줬다. 결국 그는 사랑을 통해 희망을 찾았다. 3개월 전 태어나 처음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택배 기사로 일하며 아침 7시부터 꼬박 12시간을 뛰어다닌다. “결혼해야 하니까요. 휴학하고 그냥 남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마음을 잡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를 사칭해 유가족을 괴롭히는 이도 있었다. “전역 후 5, 6월일 거예요. 누가 천안함 카페 가입해서 저인 척하고 유가족들한테 귀찮게 전화하고 그랬다더라고요. 경찰에 전화했는데 잡혔다고만 하고 그 뒤의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한두달 지나서 잡혔다는데 크게 처벌하진 못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바람을 물었다. “좋은 가장이 되고 싶어요.” 고통의 나날 1년, 이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백민경·최두희기자 white@seoul.co.kr
  • 먹빛 소나무 하얀 달빛 머금다

    먹빛 소나무 하얀 달빛 머금다

    “어느 미술관에서 이런 작품은 안 된다고 그러대요. 목탄이 묻어나 운반, 보관이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직접 문질러 보라고 그랬죠. 묻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그걸 확인하고서야 (작품을) 구입하더군요. 이게 소문이 나면서 다른 곳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뜨끔했다. 목탄 하나로만 그렸다기에 가루가 날리지 않을까 궁금했다. 게다가 작품에 바짝 붙어서 보면 목탄이 뭉텅이째 캔버스에 들러붙은 게 아니다. 목탄 가루 하나하나가 물고기 비늘처럼 삐죽삐죽 돋아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축하인사차 방문한 지인들이 작가를 지하 전시장에 붙들고 있을 동안, 잽싸게 1층 전시장으로 올라가 슬쩍 문질러 봤던 터였다. 그러고는 시치미 뚝 떼고 있는데 작가가 이런 말을 하니 양심상 ‘자수’할 수밖에. ●소나무 말고 소나무가 빨아들인 달빛 보세요 “하하. 안 그래도 만져 보시는 분들 많아요. 그냥 칠만 해서는 모두 뭉개져 버려요. 한겹 입히고 코팅하고, 다시 한겹 입히고 코팅하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제가 2년의 실험 끝에 얻어낸 비법이에요. 그래도 제발 눈으로만 봐 주세요.”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는 이재삼(51) 작가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영업기밀”이라며 말을 닫았다. “물론 언젠가 때가 되면 공개할 겁니다. 후학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니까요.” 그는 가로 세로 5m가 넘는 대작을 그리는 작가다. 그런데 그리는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란다. 전에 그린 대나무 시리즈가 대나무보다 그 속의 바람소리를 표현했듯, 이번에 내놓은 소나무 시리즈에서도 소나무 대신 소나무가 흠뻑 빨아들이고 있는 달빛을 봐 달라고 주문한다. ●9시 출근 5시 퇴근 ‘9 to 5’ 원칙 고수 작업 스타일도 재미있다. 경기 과천의 큰 농협 창고를 빌려 일하는데 ‘9 to 5’(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 원칙을 고수한다. 고뇌하는 예술가는 날밤도 새우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던가. “밤에 쓴 연애편지를 낮에 보면 찢어 버리게 되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서 아예 공무원처럼 살아 보자고 한 거죠. 덕분에 오해도 받았어요. 과천에 오기 전에 3년 반 동안 장흥 예술인 마을에 있었는데, 5시면 퇴근해 버리니 별로 어울리질 못했죠. 나중에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요.” ‘달빛 작가’인데 정작 달빛하곤 무관한 셈이다. ●“지금의 동양화는 먹공예품 아닌가요” 이 작가는 원래 서양화를 전공했다. 젊은 시절에는 최첨단 설치미술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동양적 느낌의 작업을 하게 됐을까. “서른일곱쯤에 사춘기를 앓았어요. 한국 사람인데 왜 이런걸 하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서양화에서도 목탄은 간단한 드로잉 재료예요. 그걸 본격적인 회화도구로 바꿔 보기로 결심한 겁니다.” ‘아슬아슬한’ 말도 나온다. “모든 예술에는 시대의 감성이 얹혀야죠. 지금 동양화? 먹공예품 아니던가요. 서양화요? 작품 자체보다 브리핑(설명)이 중요한 시대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지 말고 동, 서양화 구분 없이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면서도 지금 시대의 감성을 얹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소나무는 친숙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이다. 주변에 벌레나 잡초가 있을 법도 한데 그림 속엔 달빛에 창백하게 빛나는 소나무뿐이다. 그것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크기로. 이 압도적인 크기를 찾기 위해 전국의 유명하다는 소나무는 다 찾아다녔단다. 안 그래도 큰데, 작가의 시점(視點)이 올려다보는 것인지라, 소나무는 한층 더 위압적이다. 달빛 풍경화나 소나무 정물화라기보다 옛 그림의 벽사(辟邪·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같은 느낌도 든다.  전시 제목은 ‘달빛을 받다’.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달빛 녹취록’이었다. “말이 좀 어려운 것 같아 일부러 안 썼다.”는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달빛이 두꺼운 소나무 속살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으니까.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 (02)725-102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이시영 “얼굴 부상 걱정보다 복싱열정 더 컸어요”

    이시영 “얼굴 부상 걱정보다 복싱열정 더 컸어요”

    “얼굴 다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보다 복싱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각종 권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돌주먹’이라는 별명을 새롭게 얻고 있는 여배우 이시영(29)은 갑자기 쏟아지는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얼마 전 제7회 전국여자신인아마추어 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해 다시 한번 화제를 모은 그녀를 21일 서울 종로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복서와 배우, 도전인생 복사판 대회 우승 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이시영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첫 주연을 맡은 영화 ‘위험한 상견례’ 개봉(31일)이 코앞인데 복싱에 너무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것을 신경쓰는 눈치였다. “제 본업은 배우예요. 운동은 좋아서 열심히 한 건데 사적인 부분이 너무 부풀려지는 것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너무 칭찬만 해 주시니까 걱정도 되고요. 솔직히 복싱을 한 기간에 비해 잘한다는 것이지, 수준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잘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복싱만 하는 분들이 보시면 언짢아하실 수도 있을것 같아요.” 1년 전부터 대회에 출전해 왔는데 유독 이번에 큰 관심이 쏟아지는 것이 의아하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시영. 그녀의 도전이 색다른 것은 얼굴이 생명과도 같은 여배우가 부상이 다반사인 복싱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는 영화 촬영 때문에 당초 대회 출전이 불투명했지만, 대회 일정에 맞춰 매일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복싱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였다. “알려진 대로 복싱을 시작한 것은 드라마에서 맡은 배역 때문이었어요. 처음엔 너무 힘들고 하기 싫어서 일주일에 세번이나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연습에 빠졌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기가 발동하더라고요. 힘든 운동이라 더 도전 의욕을 자극한 것 같기도 해요.” 정작 열심히 연습한 그 드라마는 ‘엎어졌지만’(무산), 복싱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단다. 힘든 만큼 운동의 재미가 느껴지면서 점점 복싱이 좋아지게 됐다는 것. 소속사도 일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그녀의 복싱 도전을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여배우인데 어떻게 얼굴 다치는 것이 걱정이 안 됐겠어요. 하지만 그 마음보다 복싱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링에 설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지만, 복싱을 하게 되면서 얻은 것이 많아요. 건강해지고, 체중 감량에도 도움이 됐고요. 배우들은 일이 없을 때 집에만 있게 되는데, 정신적·육체적으로 활력소가 된 것 같아요.” 이시영은 권투선수로는 체력도 그리 강한 편이 아닌 데다 먹으면 잘 찌는 체질이라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악조건을 이기고 ‘챔프’가 된 과정은 그녀의 배우 인생과도 닮아 있다. 이시영은 26살 때인 2008년 드라마 ‘도시괴담 데자뷰 시즌3-신드롬’을 통해 데뷔하기까지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연기 오디션 낙방만 수백번 “5년 동안 기획사는 수십번, 광고나 에이전시 오디션은 수백번을 봤어요. 낙방의 연속이었죠. ‘넌 안 된다. 왜 연기하려고 하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나중엔 학교에 출석하듯이 오디션을 봤어요. 그러다 보니 이 일이 더 하고 싶어졌고, 스물다섯쯤 되니까 조급증이 사라지더군요.”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 영상을 CD에 담아 기획사 문을 두드리던 그녀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2009)에서 주인공 잔디(구혜선)를 질투해 위험에 빠뜨리는 악역을 맡게 된 것. 적잖은 안티 세력을 몰고 다녔지만 이듬해 출세작 격인 ‘부자의 탄생’ 배역을 따내는 발판이 됐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통통 튀고 망가지는 부태희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안티팬이 있든 없든 작은 역할이라도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어요. 정말 연기가 하고 싶었거든요. 지금도 안티팬들은 신경쓰지 않는 편이지만, 요즘엔 좋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도 많아 감사해요. 앞으로 배우로서 연기를 더 열심히 해야죠.” 이시영의 손톱은 다른 여배우와 달리 짧게 다듬어져 있었다. 복싱 때문이기도 하고 단정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복싱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단다. 로봇 건담 수집광이기도 하다. 평소엔 겁 많고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편이라는 이시영. 배우로서나 복서로서나 근성은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장기하와 얼굴들’서 독립선언 ‘미미시스터즈’

    ‘장기하와 얼굴들’서 독립선언 ‘미미시스터즈’

    유난히 흰 피부에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입술, 1960~70년대 유행했던 복고풍 원피스, 망사 장갑 등으로 무장한 무표정의 2인조 여성 그룹 ‘미미시스터즈’에는 ‘큰 미미‘와 ‘작은 미미’가 있다. 전체 관람가 수준으로 설명하면 크고 작고의 기준은 키와 몸무게, 19세 이상 관람가로 이야기하면 가슴이 더 크고 작고의 차이란다. 진짜 이름은영원히 공표하지 않을 작정이다. 콘셉트 자체가 ‘지상 최고로 도도한 신비주의’다. 평소에는 일반 직장을 다니며 친구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20~30대 여성이지만 미미시스터즈라는 옷을 입고 대중 앞에 서는 순간, 그녀들은 세상 누구보다 도도해진다. 미미시스터즈에게 ‘말’이란 불필요한 장신구다. 손짓, 몸짓 하나로 소통하는 게 즐겁다. 미미시스터즈는 3년 전 ‘장기하와 얼굴들’ 곁에서 코러스와 안무를 담당하며 대중들에게 처음 얼굴을 알렸다. 그런데 돌연 장기하와 ‘협의 이혼’을 선언했다. 장기하에게서 독립, 1집 앨범 ‘미안하지만…이건 전설이 될거야’를 낸 것. 이혼사유? “미미시스터즈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서”란다. 지난 17일 서울 서교동 붕가붕가레코드 사무실에서 미미시스터즈를 만나 봤다. “프로 음악인은 아니지만, 음악이 굉장히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냉면집 탐방, 자전거 여행 등을 통해 만난 뮤지션 ‘서울전자음악단’, ‘로다운 30’, ‘크라잉넛’ 등을 유혹했죠(웃음). 흔쾌히 이번 앨범 작업에 함께해 주셨어요.” (큰 미미) “올 여름에 장기하 앨범이 나올 예정인데 미미시스터즈 데뷔앨범과 비교해 들어보시면 왜 서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됐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음악 색깔이 많이 다르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시간 나면 함께 술도 마시는 좋은 친구예요. 그런데 회사에서 협의 이혼이란 말 쓰지 말라고 했는데…(웃음)”(작은 미미) 미미시스터즈의 데뷔 앨범에는 ‘록의 대부’ 신중현(73)이 작곡하고 ‘바니걸스’가 부른 ‘우주여행(16분 34초)’, 김창완(57)이 프로듀서로 나서 가수 인희의 ‘폭탄소녀’를 리메이크한 ‘다이너마이트 소녀’ 등 8곡의 곡이 실려 있다. 큰 미미는 “디지털 음원이 하루 먼저 공개되고 나서 ‘초 일반인 같다’는 평이 많았어요. 오히려 기분이 좋더라고요. 미미시스터즈는 아마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으면 바로 탈락했을 거예요. 평가 기준이 테크니컬하잖아요. 저희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작은 미미는 “저희가 음반을 내고 가수 활동을 하게 된 이유”라고 거들었다. 3년 전부터 미미시스터즈로 활동하고 있는 큰 미미와 작은 미미는 사실 10년 전 12월 31일 처음 만났다.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있는 작은 막창집에 각자 손님으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어요. 테이블이 3개가 전부일 정도로 작고 허름한 가게였죠.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모두 친구가 됐지요.” 그때 큰 미미와 작은 미미도 처음 만나 ‘베프’(베스트 프렌드)가 됐다며 큰 미미가 호탕하게 웃었다. “솔직히 취향은 좀 달랐어요. 하지만 말이 통하는 데다 동갑이라 금방 친해졌죠. 매일 통화하고 집에서 떡볶이를 해먹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기타 코드 3개를 배운 뒤 ‘감수광’이란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됐어요. 너무 기쁜 마음에 새벽 2시에 기타를 멘 채 택시를 타고 큰 미미네 집으로 달려가 들려줬습니다.”(작은 미미) 미미시스터즈라는 이름은 이들이 평소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에서 비롯됐다. 두 사람의 닉네임에는 공통으로 ‘미’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이를 보고 한 친구가 무심코 “그냥 미미시스터즈 해라.”라고 말한 것이 굳어졌다. 그 이름을 지어준 친구는 장기하와의 인연도 만들어줬다. 작은 미미는 “원래 그 친구를 통해 기하를 만나게 됐어요. 근데 너무 만남이 극적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예전에 인터뷰할 때는 저희가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데 장기하가 그 모습을 보고 삼고초려를 해 두 여인을 모셔왔다고 둘러대기도 했어요.”라고 고백(?)하며 깔깔깔 웃었다. 앙 다문 입술로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종전 ‘신비주의’ 콘셉트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신비주의에 얽힌 웃지 못할 일화도 많다.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 보니 몇 년 전 인터넷에 미미시스터즈의 민낯이라며 사진이 돌았어요. 문제는 저희 사진이 아니었다는 거죠.”(작은 미미) “사실 네티즌 수사대의 능력만 놓고 보면 저희 신상을 밝히는 데 하루도 안 걸릴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미미시스터즈의 신상을 모르는 게 더 재미있다며 (수사하지 않고) 그냥 지켜주세요.”(큰 미미) 대선배 인순이에게 혼난 일화도 유명하다. 2009년 7월 가수 이문세가 진행하는 한 라디오방송에 함께 출연한 인순이가 도통 말을 안 하는 미미시스터즈에게 “인사성이 없다.”며 불쾌감을 표시한 것. 후에 오해가 풀려 ‘화해 인증 샷’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미미시스터즈는 데뷔앨범 배송 서비스에 직접 나섰다. “1집 CD와 떡, 직접 준비한 오미자차 등을 들고 서울 강남의 사무실 직장인, 목동의 세 살배기 아기, 경기 안산의 슈퍼마켓 사장님을 만나러 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죠?” 일상 속의 그녀들에게서는 도도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씨줄날줄] 수요집회/주병철 논설위원

    친구 한 사람이 카토에게 말했다. ‘카토, 자네는 말을 하지 않으니 그게 흠이야.’ 카토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생활에 흠이 잡히지 않으면 그만이지,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는 때가 오면 나도 말하겠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침묵에 관한 얘기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은 ‘침묵을 지키고 바보가 아닌가 생각게 하는 것이 입을 열고 사실을 드러내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침묵예찬론자에 가까운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나는 단 한 사람의 심복(心腹)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밤의 고요다. 왜냐하면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했다. 침묵은 장소나 사람 등에 따라 뉘앙스나 의미가 다르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지난 1월 애리조나 총기난사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연설을 하다 감정에 북받쳐 51초 동안 말을 잃은 것을 가리킨 ‘위대한 침묵’이 있는가 하면, 책임 있는 자세를 외면하는 ‘뻔뻔한 침묵’의 소유자도 있다. 큰소리치지 않아도 세상이 알아주는 ‘감동의 침묵’ ‘뜨거운 침묵’ ‘절제의 침묵’도 있다. 법조계에서는 침묵을 정당한 권리로 인정받는다. 이른바 묵비권(默秘權)이다. 피고인이나 피의자가 수사기관의 조사나 공판의 심문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사에서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여러 형태의 고문이 행해졌다.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에는 고문의 방법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각국마다 묵비권을 보장하면서 고문이 사라졌다. 말 없이 집단의 의사를 강하게 표시하는 게 침묵집회다. 말로 하는 언어적 요소와 몸으로 하는 비언어적 요소도 아닌 표정의 침묵이라고나 할까. 침묵집회는 다른 항의수단보다 비장하고 무섭다. 마스크를 쓴 침묵집회나 시위가 이목을 끄는 마력은 대단하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어 오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제는 집회 때마다 항의의 표시로 손에 들었던 노란색 나비모양의 손 팻말을 내려놓고 동일본 대지진으로 희생된 일본인을 추모하는 침묵집회를 가졌다고 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도 있지 않던가. 입을 다문 채 ‘모두 힘내세요!’라는 팻말을 치켜든 할머니들의 침묵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일본과 일본인들은 얼마나 깊이 헤아릴까.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동 주앙처럼 진짜 바람기있어 보인대요”

    “동 주앙처럼 진짜 바람기있어 보인대요”

    2007년 유괴 살인사건을 소재로 두명의 남자 ‘나’와 ‘그’가 벌이는 2인 심리극, 뮤지컬 ‘쓰릴 미’ 초연에는 4명의 주연 배우가 있었다. 류정한, 김무열, 최재웅, 이율. 뮤지컬 스타들 속에 끼어 있는 낯선 이름, 이율. 그렇게 데뷔 무대를 화려하게 꾸미더니 이후 뮤지컬 ‘김종욱 찾기’, ‘퀴즈쇼’, 연극 ‘나쁜 자석’ 등 쉬지 않고 굵직한 작품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키워 왔다. 올 봄, 그가 ‘옴므 파탈’(나쁜 남자)로 변신했다. 32년 만에 서울 명동에서 부활한 연극 ‘동 주앙’에서 희대의 바람둥이이자 시대의 반항아인 주인공 동 주앙 역을 맡은 것. 185㎝의 큰 키에 깊은 눈매, 분위기 있는 목소리를 지닌 이율(27)을 지난 16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주변에서 진짜 동 주앙스럽다고 말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바람기 있어 보인다나요.” 농담 끝에 활짝 웃는 이율은 이내 정색하고 “동 주앙은 가식 없고 순수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잘 놀다가도 새 장난감이 생기면 바로 그거에 꽂혀 집중하잖아요. 죄의식 없이 여러 여자를 만나는 동 주앙도 그런 아이 같은 면이 있어요.” 그는 시종일관 무대에서 원로배우 권성덕(동 주앙 아버지), 중견배우 정규수(동 주앙의 시종)와 ‘합’을 겨룬다. 하지만 전혀 밀리지 않는다. 이율은 “‘동 주앙’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한 느낌”이라면서 “무대가 예전보다 조금 편안해졌다.”라고 털어놓았다. 사실상 극을 혼자서 이끌어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그는 무대에서 관객과 꽤 많은 시간 호흡한다. 그에게 꽃을 받고 싶거나 퇴짜놓는 짜릿함을 느끼고 싶다면 객석의 맨 앞자리를 고수할 필요가 있다. “공연 때마다 앞자리 관객들에게 꽃을 건네는데 어떤 분은 매우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분은 부끄러워하며 안 받기도 해요.” “관객의 반응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져 기대 반 걱정 반”이라는 그는 “어차피 복불복”이라며 또 한번 환하게 웃었다. 배우를 꿈꾼 것은 고등학교(계원예고) 때. 영화배우 황정민, 조승우 등이 학교 선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했는데 너무 재밌더라구요. 그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데뷔 이후 아찔했던 순간도 많았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 때는 가사를 잊어버린 적도 있어요. 연습기간이 3주밖에 안 되다 보니 역시 실수가 생기더라고요. 슬픈 노래를 여주인공과 함께 불러야 하는데 가사가 기억이 안 나 ‘랄랄라’로 일관했죠. 다시는 그러지 말자 다짐했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극 ‘나쁜 자석’을 할 때 대사를 또 한 번 크게 날렸죠. 동화 한편을 읽어줘야 하는데 첫머리와 끝머리만 읽고 중간 부분은 통째로….” 그런데 신기하게 그런 와중에도 관객들의 작은 대화가 다 들린단다. “이걸 어쩌지, 하는 마음보다 관객들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볼까, 이게 더 궁금해 객석의 반응을 살피게 돼요.” 다소 뻔뻔한 모습이 동 주앙과 닮았다고 하자 “그렇다.”며 바로 인정한다. 영화에도 도전한다. 안성기, 김명민과 함께 영화 ‘페이스 메이커’에 캐스팅된 것. “마라토너 옆에서 함께 달리며 페이스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페이스 메이커인데 영화는 그 페이스 메이커에 관한 이야기예요. 영화는 처음이라 솔직히 긴장됩니다.” 마라토너 중 한명으로 나오는 그는 김명민과 함께 마라토너 이봉주 트레이너에게서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다. 쉬는 날에는 서울 종합운동장 등에서 맹연습한다고. “뒷골목 양아치부터 고급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귀족남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한석규 같은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에요.”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 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 때부터 겪은 쓰디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다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그의 노래가 듣는 이에게 위안이 된다는 이유로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 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솔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 만에 10만 관객을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 볼 예정이어서 또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동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먼저 이번 공연의 의미와 공연을 앞둔 소감을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하는 ‘솔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 때 2~3곡 정도 불러 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 나, 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도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는 가사에 영어발음을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 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으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고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 노래 발표회에도 솔로로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 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방망이를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 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 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을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중 고 3때 한 스카우트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 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공감을 통해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라는 이름은 세살 때 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 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며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달프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바비 킴은 누구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음악과 운동을 병행한다. 음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트럼펫을 배웠고 노래도 했다. 학교 발표회 때마다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야구와 미식 축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특히 야구는 포수와 1번 타자를 맡았는데 고교 때는 학교 대표로 출전해 3할대의 타율을 자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클럽 바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고 래퍼로 활동했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음반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1994년 앨범 ‘닥터 레게’로 데뷔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후 터보, 젝스키스 등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 나갔다. 1999년 룰라 이상민의 14인 프로젝트 그룹 브로스의 멤버, 2000년에는 무브먼트 크루의 멤버, 다음 해 부가 킹즈를 조직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혔다. 그러던 중 2004년 8월에 발표한 새 앨범 ‘고래의 꿈’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독특한 창법이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의 ‘나몰라 패밀리’를 통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지난해 세 번째 정규 앨범 ‘하트 앤드 솔(Heart & Soul)’을 발표했으며 ‘쩐의 전쟁’ ‘하얀 거탑’ 등 드라마 OST에도 참여했다. 2009년부터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서울변호사회 후원받아 법대 첫 합격한 11학번 주원씨

    주원(여·20·가명)씨는 A대 법대 11학번이다. 주원씨의 오랜 꿈이었던 ‘법대생’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서울지방변호사회의 후원을 받은 주원씨는 ‘내게 도움을 준 변호사님처럼 법조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리는 주원씨를 싱그러운 캠퍼스에서 만났다. 지난 5년간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주원씨가 후원받은 금액은 매달 10만원. 11년동안 이어온 서울변회의 후원을 받은 학생 중 법대에 진학한 건 주원씨가 처음이다. ‘에계, 얼마 안되네’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주원씨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남들은 얼마 안된다고 생각하는 금액이지만, 그거 없었으면 저 대학 못 왔어요.” 왜일까. 주원씨네 사정을 들어 보면 금방 고개가 끄덕여진다. 주원씨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기초생활수급자였을 때는 매달 45만원씩 정부의 지원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 원룸 월세 20만원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은 25만원뿐. 그마저도 얼마 전부터는 기초생활수급자 지원을 받지 못해 늘 쪼들리며 산다. 주원씨는 “10만원으로 보충수업비도 냈고요, 참고서도 샀어요. 아 참, EBS 동영상 강의도 들었어요.” 10만원이 적다고 생각했던 게 금세 부끄러워졌다. 주원씨가 법대를 진학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후원 받은 지 1년이 지난 중3 무렵이었다. 자신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법조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학교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체제로 전환해 남아 있는 법대 중 최고 수준이라는 A대에 들어온 주원씨지만 동기들처럼 사법고시에는 관심이 없다. 이유를 물어보니 ‘빨리 돈 벌어서 등록금 갚아야죠.’라는 의젓한 답이 나온다. 등록금 전액을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로 빌린 탓이다. 그래도 사법고시 한번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묻자 ‘검찰 수사관이나 경찰이 돼서 저같이 소외된 이웃을 돕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집에서 학교까지 2시간이 넘는 거리라 피곤할 법도 한데, 주원씨는 마냥 신난다. 1학년 전공과목인 헌법특론, 법학입문, 민법총칙을 줄줄이 설명한다. 한자가 많아서 교양과목으로 한문을 신청했단다. 점심은 학생식당의 1900원짜리 백반을 늘상 이용한다면서도 주눅들지 않는다. “용돈을 엄마에게 손벌릴 수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는데, 그마저도 자리가 없다더라고요.”라며 오히려 배시시 웃는다. 주원씨는 처음에 인터뷰를 망설였다. 갓 여고를 졸업한 만큼 친구들에게 알려질까 겁도 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맘을 고쳐먹었다. “도움 받은 걸 갚을 길이 없겠더라고요. 이렇게나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저같이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 주원씨는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말했다. “저처럼 꿈이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돕고 싶어요. 돈 벌면 당장 기부할 거예요.”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日 한겨울 한파로 전력대란 비상...사망자 속출

    열악한 의료설비와 강추위 등으로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현 등 주요 피해지역 대피소에 피난해 있던 피난민 중 사망자가 잇따르고 있다고 17일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 특히 최근 날씨가 추워지면서 전력수요가 급증하며 예상하지 못한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인근 대피소에 있던 병원 환자 18명이 이송 중 또는 이송 후에 사망했다. 의료설비가 없거나 피로,추위 등이 누적된 탓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전했다. 후쿠시마 현내 후타바 병원과 노인보건시설에 수용돼 있던 환자와 입소자 128명은 14일 밤 현립 이와키고요 고교에 버스로 이송되는 도중 2명이 숨졌으며 이후 16일까지 12명이 차례로 사망했다. 이 학교 체육관에는 대형 난방기 6대가 설치돼 있었지만 모포가 부족했고 의료설비나 상주하는 의사도 없었다. 이와테현 리쿠젠다카타시에서는 16일 시립 제1중학교에 대피해있던 80대 여성이 사망했으며 미야기현 다가조시의 센엔소고병원에서도 17일 아침 고령의 입원환자 8명이 숨졌다. 일본기상청에 따르면 도호쿠(東北) 지방은 16일부터 겨울형 기압배치가 되면서 강한 한기가 밀려와 17일에는 각 지역에서 한겨울 같은 추위를 보였다. 17일 새벽 모리오카시는 영하 5.9도를 기록했으며 시오가마시 영하 4.2도, 센다이시 영하 2.7도, 소마시 영하 2.5도 등이었다. 추위는 18일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이렇게 기온이 떨어지면서 전기공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가이에다 반리 경제산업상은 이날 긴급성명을 내고 “추위 때문에 전력 수요가 급증, 오늘 저녁부터 밤에 걸쳐 대규모 정전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면서 국민과 산업계에 절전에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도쿄전력 관내의 전력공급량은 3350만㎾이지만 오전 중 최고 사용량이 3292만㎾에 달했다. 도쿄전력이 지역별 제한송전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전력여유가 빠듯해진 것은 갑자기 한파가 닥치면서 난방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도쿄전력은 전력 수요가 최고조에 달하는 저녁부터 밤 시간대에는 꼭 필요하지 않은 전열기를 끄는 등 한층 절전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도로 곳곳 푹 꺼지고 쩍 갈라져 8인승 승합차 가다 서다 반복

    센다이 총영사관은 지금 한국 교민을 실어나르는 터미널로 변했다. 오전 10시, 오후 5시가 되면 영사관 현관 앞은 가방과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든 교민들이 길게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된다. 이날 기자가 올라탄 8인승 승합차에도 한국문화원 소속 차량으로 나리타 공항을 통해 일본을 빠져나가려는 교민들이 동승했다. 오전 5시. 아직 어둠에 잠긴 시간이지만 미야기 현청 앞 버스 정류장에는 주민들의 탈출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온다던 비 대신 내리는 진눈깨비가 이들의 어깨를 더 무겁게 짓눌렀다. ●응급 지원차량 외 출입 금지 승합차는 진눈깨비가 내린 도로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오모리와 도쿄를 잇는 도호쿠 고속도로를 탔다. 지진 발생 이후 응급 지원 차량 외에는 출입을 전면 금지하고 있지만 교민 수송을 위해 외무성의 특별 허가를 받았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 심하게 덜컹거려 눈을 떴다. “죄송합니다. 지진으로 도로가 많이 망가져서 차가 덜컹거리니까 조심하세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둠 속에 지반이 침하돼 푹 꺼지고 쩍쩍 갈라진 길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멀쩡한 아스팔트 도로는 기껏해야 500m 넘어 이어지지 않았다. 가다 서고, 가다 서고…. 지난 11일 동북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망가진 곳이 한번 나올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가 출렁이면서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였다.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잡았다. 어깨와 허리, 엉덩이 근육이 딱딱하게 긴장됐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승합차는 속도를 내자니 망가진 도로의 충격이 크고, 충격을 줄이자니 속도를 낮춰야 하는 딜레마를 겪고 있었다. ●후쿠시마현 지날 땐 마스크 써 잠시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휴게소에 잠깐 내리면서 물었다. “여기가 무슨 현이죠?” “후쿠시마입니다. 왼쪽으로 원전이 있고요. 고리야마라는 큰 피해지가 여기서 가깝습니다.” 나도 모르게 서둘러 마스크를 집어 올렸다. “여기서 한참 먼 곳이에요. 그리고 눈이 내려서 사태가 많이 진정됐을 겁니다.” 대사관 관계자가 나를 안심시켰다. 고속도로에는 우리 차량 외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소방차 5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200㎞를 달렸을 때쯤 도치기 현 우쓰노미야 시 인근에서 주유를 했다. “만땅(가득) 부탁합니다. 도쿄에서는 한차당 20ℓ로 주유를 제한하고 있어요. 여기서 긴급 차량으로 주유를 하지 않으면 휘발유를 얻기 힘듭니다.” 사이타마 현으로 들어서자 도로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지자체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도로를 손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출발한 지 약 5시간이 지난 오전 10시 가와구치 IC를 빠져나오자 도쿄 아라카와 강이 나타났다. 강가의 나무들이 연두색을 띤 채 봄을 알리고 있었다. snow0@seoul.co.kr
  • 정규리그 우승주 역 KT 전창진 감독·박상오 인터뷰

    정규리그 우승주 역 KT 전창진 감독·박상오 인터뷰

    프로농구 KT는 특이한 팀이다. 특출한 스타 하나 없다. 높이에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2009~10 시즌 전창진(왼쪽)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만년 하위팀이었다. 전 감독 부임 직전 시즌은 아예 꼴찌였다. 이런 팀이 지난 시즌 정규리그 2위. 올 시즌엔 우승을 차지했다. 이유가 뭘까. 복합적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동력 둘을 꼽아보자. 하나는 박상오(오른쪽)다. 에이스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했다. 다음은 전 감독의 존재다. KT 농구의 처음이자 끝이다. 서울신문이 15일 수원 KT 훈련장에서 둘을 인터뷰했다. “PO·챔피언전 생각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가슴은 후련한데 생각은 따로 놀았다.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오래도록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유가 있었다. “감독은 오늘을 즐기기보다 내일을 걱정하는 직업이니까요. 앞으로 남은 일정, 플레이오프, 챔피언전을 떠올리다 보니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더라고요.” 프로농구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지난 13일 밤이었다. KT 전창진 감독. 이날 하루만은 편안할 법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 감독은 이날 밤도 홀로 농구와 껴안고 씨름하고 있었다. 만년 하위팀을 우승까지 끌어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농구에 미친 감독이 있어 가능했다. 이튿날 아침. 전 감독은 “허무하더라.”고 했다. 지난 1년,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마음이 허전하기도 하고 뭔가 잃어버린 듯도 하고…. 이거 하나 하려고 그렇게 고생했나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큰일을 이룬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의외로 담담하고 초연했다. 그래도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나 보다.”고도 했다. 전 감독은 지난 몇년 동안 하루 3~4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 그러나 우승 이튿날 밤엔 잠을 잘 잤다고 했다. 8시간 수면. 오랜만에 경험한 단잠이었다. “오랫동안 쌓였던 스트레스. 마음속의 화가 내려간 거 같아요. 온전히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그걸 느꼈네요.” 사실 올 시즌 내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시즌 초반부터 선수들이 줄줄이 다쳐 나갔다. 3라운드 중반엔 송영진-표명일-김도수가 모두 코트에 서지 못했다. 박상오도 부상을 입었다. “힘들었지요. 특히 송영진이 다쳤을 때는 이래서는 농구 못하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다 이겨냈다. 특유의 플래툰 시스템과 조직력으로 빠진 선수들의 빈틈을 메웠다. 개인보다는 팀으로서 강했다. 그 사이, 전 감독의 선수단 장악력이 빛났다. 선수 하나하나를 적재적소에 넣었다 뺐다 조절했다.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쉴 틈 없이 선수들을 몰아붙였다. 선수들은 하나같이 “감독님 때문에 농구를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것 하라고 감독이 있는 건데요 뭐. 시즌 최다승에 통합 우승까지 한 뒤에 봅시다.” 전 감독이 슬쩍 웃음을 보였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엄마 손에 우승반지를” 홀어머니 윤영심씨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내 배 속에서 나왔지.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 어머니 울음에 서른살 아들도 덩달아 콧날이 시큰했다. 그동안의 ‘불효’가 모두 씻기는 듯했다. KT 에이스 박상오 얘기다. 무던히도 속을 썩이던 아들이었다. 중앙대 2학년 때 농구부를 뛰쳐나왔다. 김주성(동부)과 송영진(KT) 사이에 박상오의 자리는 없었다. 그의 역할은 승리가 굳어졌을 때 나가 시간을 때우는 거였다.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싶었어요. 제가 좀 욱하는 성격이에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7년 동안 식당일로 아들을 뒷바라지해 온 어머니 속이 까맣게 탔다. 울며 말렸지만 아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시간을 보내다 제대하려니 막막했다. 어머니는 ‘말년 병장’ 아들을 찾아와 “다시 농구하자.”고 설득했다. 박상오는 “졸업장이나 따자는 생각”으로 못 이기는 척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더니 2005년 연세대와의 복귀전에서 29점을 몰아쳤다. 그렇게 박상오는 코트로 돌아왔다. 추일승 전 KT 감독은 “‘제2의 추승균’으로 키우겠다.”며 1라운드 5순위로 박상오를 뽑았다. 첫 번째 ‘인생 역전’이었다. 그러나 프로는 혹독했다. 2007~08 시즌 8위, 2008~09 시즌 10위. ‘패배 의식’이 가득해졌을 무렵 전창진 감독이 부임했다. 전 감독님은 “넌 내가 키운다. 다듬으면 대성할 수 있다.”고 했다. 감독 말에 뭔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한번 해 보자.” 감독 말만 믿고 죽어라 뛰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꿈에 그리던 정규리그 우승. “프로라는 큰 무대에서 정상에 섰잖아요. 대학 때처럼 들러리가 아니라 주역으로 활약해서 더 감회가 남다르죠.” 박상오는 웃었다. 우승 당일, 우승 뒤풀이를 끝내니 허무함이 몰려왔다. 간절히 원했던 걸 이룬 허무함과 얼떨떨함이 뒤섞였다. 박상오는 다시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못된 아들이라 그동안 표현도 못했지만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요. 이번에 꼭 우승 반지를 어머니께 끼워 드리고 싶어요.”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영어 등 외국어 능통 숲 해설가 주요 자연휴양림 등 13곳 배치

    산림청은 15일 외국인과 다문화 가족들을 위해 주요 자연휴양림과 도시숲 등 13곳에 외국어 전문 숲해설가를 배치한다고 밝혔다. 외국어 전문 숲해설가는 영어(10명)와 일본어(3명), 중국어(3명) 가능자로 서울 수락산과 경기 양평의 산음자연휴양림, 정부대전청사 도시숲, 경기 가평에 있는 아침고요 수목원 등에서 활동한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프로농구] 조연 20년 주인공에 미련 없어

    [프로농구] 조연 20년 주인공에 미련 없어

    이창수가 떠난다. 오는 20일 창원에서 열리는 전자랜드전이 마지막 경기다. 올해 43세. 프로농구 최고령 선수다. 농구뿐만 아니라 프로 스포츠 전 종목 통틀어 최고령이다. 길고 질기게 버텨 왔지만 떠날 때가 됐다. 지난 11일 은퇴 발표를 했다. 이제 열살씩 어린 후배들 사이에서 이 악물고 버티던 근성을, 단 1분 교체 출전이라도 죽을 힘 다해 달리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얼마 남지 않은 농구대잔치 세대 선수 하나가 또 코트에서 사라진다. 프로농구 LG 이창수가 떠난다.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지요. 운이 좋아 생각보다 오래 뛰었으니 미련은 없습니다.” 이창수는 담담했다.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14일 서울 방이동 LG 전용 훈련장에서였다. 은퇴를 결심한 특별한 이유는 따로 없다고 했다. “떠날 때가 돼서 떠나는 것일 뿐입니다. 힘이 빠져 밀리는 센터는 존재 의미가 없으니까….” 이창수는 말끝을 흐렸다. 모든 게 ‘순리’라고 했다. 젊고 힘 있던 시절은 지나 버렸다. “더 이상 팀에 남는 게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때가 왔다. 그래서 조용히, 이창수는 떠나기로 결정했다. ●“1초를 뛰더라도 최선 다하자 다짐” 사실 2년 전, 은퇴 직전까지 갔었다. 2008~09시즌이 끝난 뒤 원소속팀 모비스와 재계약에 실패했다. 당시 40세를 넘긴 시점이었다. 모비스는 이창수를 더 이상 활용가치 없는 선수로 분류했다. 그러나 협상 만료 시한 마지막 날에 LG가 영입 제의를 했다.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후 2년 동안 한 경기 한 경기를 내 인생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1초를 뛰더라도 최선을 다하자고 항상 다짐했어요.” 이창수는 지난 2년간, 자신의 말처럼 뛰었다. 우직하고도 묵묵히 골밑을 지켰다. 언제나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상대 빅맨과 부대끼고 버텨내는 게 임무였다. 주연보다는 조연이었던 농구 인생이었다. ●고1때 선수생활 시작·B형간염 등 악조건 이겨내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선수 생활하면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순간도 없고….” 이창수도 주인공이고 싶었던 적은 있었다. 화려한 스타들을 보면서 자괴감도 많이 느꼈다. 팬들 환호의 중심에 서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만약 제가 1인자였다면 지금까지 못 왔을 거 같아요. 모자란 선수였기 때문에 토종 빅맨들이 대부분 사라져 가도 실망하지 않고 버틴 것 같습니다.” 이창수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굴곡 많은 농구 선수 생활이었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농구를 시작했다. 군산고 1학년 시절, 우연히 농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이전까지 농구 선수는 꿈도 안 꿔 봤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죠.” 모든 게 뒤처졌다. 고등학교 1학년 내내 드리블과 슛 기초를 배웠다. 3학년 돼서야 공식 경기에 처음 나섰다. 선수 생활하는 동안, 기본기 좋은 선수들을 항상 부러워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가 몸에 익은 선수들을 따라가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콤플렉스였습니다.” 간염 때문에 2년 동안 선수 생활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1996년 B형 간염 진단을 받았다. 당시 코트 한 바퀴 돌기도 벅찼다. 그러나 이창수는 그런 악조건을 다 이겨냈다. 1997년 말 삼성에서 프로 데뷔했고 이후 누구보다 오래 코트를 지켰다. 이제 이창수는 20년 농구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 은퇴 뒤 꿈이 있다. “죽는 날까지 농구와 함께하고 싶어요. 지도자로서든 아니면 다른 역할로서든….” 43세 이창수에게 농구는 모든 것이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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