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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봇에 푹 빠진 마니아들 “늦은 밤까지 원 없이 공부해요”

    로봇에 푹 빠진 마니아들 “늦은 밤까지 원 없이 공부해요”

    서울로봇고 동아리실 가보니 설계·디자인 등 산업현장서 응용 가능대학 기계·컴퓨터공학과 실습실 방불신상열 교장, “‘4차산업미래신기술교육원’ 만들어야” “이 창문은 스마트폰으로 열고 닫을 수 있어요. 침입하려 하면 센서가 감지해 신호도 알려 주고요.”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서울로봇고의 동아리실 분위기는 대학 기계공학과나 컴퓨터공학과 실습실을 방불케 했다. 이 학교 전공 동아리 중 한 곳인 ‘M&A’ 소속 학생들은 동아리실을 돌아보던 신상열 교장과 기자에게 ‘스마트 윈도’를 설명했다. 학생들이 공개된 도면을 토대로 기계장치를 설계하고 이를 3D 프린터로 출력해 모형 창문과 연계한 것이다. 최근 각광받는 사물인터넷(IoT) 제품으로 볼 수 있다.실습실은 컴퓨터와 3D프린터, 분해 흔적이 있는 세탁기 등으로 가득했다. 이 동아리 회장인 2학년 최예선양은 “기숙사에 공용 세탁실이 있는데 빨래가 끝났는지 확인하러 자주 가봐야 해 불편했다”면서 “학교에서 구해 준 세탁기를 분해해 남은 세탁 시간을 핸드폰으로 확인하는 장치를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김형만 기술부장교사는 “우리 학생들의 전공 과목 이해도는 전문대 1~2학년 수준이고, 실기 능력은 더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서울로봇고는 서울의 대표 마이스터고 중 한 곳이다. 서울시장과 교육부 장관, 서울교육감 등이 미래 교육을 강조하고 싶을 때 곧잘 들르는 장소다. 이 학교의 올해 2월 졸업생 취업률은 96%로 서울 고교 중 가장 높았다. 취업 질도 괜찮은 편이다. 삼성전자에 11명 입사한 것을 비롯해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등 공기업에도 여럿 들어갔다. 강남공고였던 이 학교는 2013년 로봇 분야 인재를 키우는 마이스터고가 됐는데 현재 모두 4개 학과(첨단로봇설계과·제어과·시스템과·정보통신과)에 465명이 재학 중이다. 예전 실업계고에서 기계 작동 등 단순 기능 위주로 배웠던 것과 달리 실제 산업용 로봇을 설계·디자인해 시제품을 만들고 작동하는 전 과정을 배우고 응용한다.신 교장은 높은 취업률 등 학교 성과에 대해 “중학교 때부터 로봇에 미쳤던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원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밤 10시가 되면 학생들에게 실습실에서 나가도록 하는데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이 학교 신입생의 중학교 때 평균 내신성적은 상위 30~40% 수준이다. 하지만 고교 입학 뒤 보여 주는 학습 능력은 중학교 교과 성적표에 드러난 수준 이상이다. 마이스터고는 산업 현장에서 당장 일할 인력을 키울 목적의 학교인 만큼 산업계 목소리를 바로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 기업이 요구하는 수업을 강화하고, 교사들도 방학 기간 등을 활용해 새로운 분야를 꾸준히 재교육받는다. 신 교장은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분야가 있다면 일반고보다 마이스터고 진학을 생각해볼 만하다”면서 “학습 동기 부여가 된 학생은 정말 무섭다”고 말했다. 신 교장은 “제대로 된 미래 직업·진로 교육을 하려면 좀 더 체계화된 체험 교육 공간이 필요하다”면서 “전국 시도교육청마다 ‘4차산업미래신기술교육원’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간병에 내 마음도 병들어… 지친 나부터 안아 주세요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간병에 내 마음도 병들어… 지친 나부터 안아 주세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시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갔어요. 아버님이 위독하시다고요. 그때부터 12년 간병 생활이 시작됐어요. 집안일 하랴, 간병하랴 힘들고 정신없는데 시어머니가 ‘너는 노는 사람 아니냐’ 이러더라고요. 그 말이 그렇게 아프고 억울할 수가 없었어요.” “친정 오빠가 엄마 모시고 하루만 병원에 다녀와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거절했어요. 그날 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못 했어요. 나중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 좀 알아 줬으면 했다’는 오빠 말을 듣고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 오더라고요.”PTC ●가족간병인 자기돌봄 지난달 4일 서울 종로구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 진행된 ‘가족간병인을 위한 강력한 자기돌봄 프로그램’ PTC(Powerful Tools for Caregivers) 5주차 강의에서 참가자들은 간병 과정에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을 쏟아냈다. 이성희 클래스 리더 겸 마스터 트레이너가 “우리가 간병 중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질문을 던지자 참가자들은 ‘나(자신)’ ‘돈’ ‘일’ ‘관계’ ‘시간’ ‘웃음’ ‘여유’ ‘기대감’ ‘희망’ ‘성격’ ‘목적’ 등을 잃어버렸다고 답했다. 가족간병인들은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환자를 직접 돌보니 못하거나 환자에게 잘해 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두 달간 가족간병인을 위한 PTC 프로그램과 치매 환자 가족들을 위한 자조모임(환자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도움을 주고받으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모임)에 직접 참석해 가족간병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간병 현장에서 가족들이 느끼는 크고 작은 애로 사항을 구체적으로 듣고, 가족들의 간병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7월부터 매주 토요일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 PTC 프로그램에는 당뇨, 치매, 암, 뇌경색, 노환 등으로 가족을 돌보고 있거나 과거에 돌본 경험이 있는 가족간병인 17명이 참가했다. 그동안에는 주로 환자에게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PTC는 환자를 돌보는 가족간병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상 ●스트레스 해소법 찾기 PTC에서는 매주 자기 자신을 위한 실행계획을 세우고 이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진다. 참가자들은 거창한 계획이나 숙제처럼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예쁜 잔에 차 마시기, 걷기, 명상, 책 읽기, 영화 보기 등 온전히 간병인 자신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연습을 한다. 또 자신의 스트레스를 파악하고 해소하는 법, 환자나 가족 간의 대화법, 간병인으로서 자신의 장점 찾기, 가족회의 등에 대해 배우고 토론한다. 당뇨와 고혈압,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간병 중인 장연숙(47)씨는 “점점 아이가 돼 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지치기도 하고, 약을 줄이거나 병원에 갈 때, 또는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형제간의 갈등도 심해지곤 했다”면서 “그럴 때 PTC에 참가해 환자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간병 상황에서 적절한 대화법을 배우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과 소통하면서 나를 다시 일으켜 줄 여러 가지 팁도 얻게 됐다”고 말했다.자조 ●치매가족 자기돌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는 이경숙(61)씨는 자조모임을 통해 우울증을 극복했다. 이씨의 시어머니는 1년 전부터 치매의 전조 증상으로 찾아온 우울증이 극심해졌다. “죽고 싶다”는 말과 함께 눈물로 하루를 지새우기 일쑤였다. 식사까지 거부해 체중이 급격히 감소했다.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횟수도 늘어 갔다. 우울증은 35년째 시어머니를 모신 이씨에게도 전염됐다. 이씨는 “당분간 시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라는 의사 조언에 따라 어머니를 데이케어센터에 보내기 시작했다”면서 “저 역시 8개월 전부터 자조모임에 참석하면서 우울증도 벗어나고 활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국치매협회에서 운영하는 서울 성북미르사랑데이케어센터 자조모임에선 간병을 담당하는 환자 가족들이 서로 교류하며 꽃꽂이를 통한 심리치료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차마 남들에게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털어놓고 서로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 치유로 나아간다. 한 보호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남편 몰래 정신과 약을 복용한 지 3개월이 됐다”고 털어놨다.눈물 ●남성 간병인들도 위로받아 또 다른 보호자는 “치매에 걸린 남편이 얼마 전부터 자신과 자식들을 알아보지 못하기 시작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자조모임에서 유일한 남성 참가자인 장기탁(82)씨는 “여기서 다른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위안이 많이 된다. 간병의 어려움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남성분들도 이런 모임을 통해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참석자들은 간병인의 마음이 편해지니 환자의 상태도 호전됐다고 입을 모았다. 8년째 치매 남편을 돌보는 이경자(74)씨도 “예전에는 남편이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반항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런 행동이 현저히 줄어 안정감이 있다”면서 “2년간 이 모임에 참여하며 내가 안정을 찾고 행복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완순(57) 치매길벗잡이 강사는 “다른 환자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치매 노인의 경우 보호자가 어떻게 옆에서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증상을 늦출 수 있다. 그만큼 보호자들의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하다”면서 “우리나라도 해외처럼 자조모임 등 환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 탐사기획부 유영규 부장, 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
  •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간병하다 건강 해치고 생활고… 숨 좀 돌릴 여유 있었으면,제발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간병하다 건강 해치고 생활고… 숨 좀 돌릴 여유 있었으면,제발

    “밥은 꼭 갈아서 먹여야 하는데 자칫 기도로 넘어갈까 봐 늘 불안해요. 대변은 천천히 배를 밀어서 빼줘야 하고요. 요즘은 애 아빠가 갈비뼈를 다쳐 일을 하기 힘듭니다. 가장이 일을 못 하면 모든 게 멈춥니다.”(중증장애인 자녀를 돌보는 52세 여성) “뇌졸중 환자는 24시간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매달 병원비와 사설간병비로 수백만원씩 지급하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지원을 받는) 요양보호사를 쓰려 해도 간병하기 힘든 환자라며 아예 돌보려 하질 않아요.”(뇌졸중 부친을 간병하는 40세 여성)서울신문은 지난 7~8월 가족간병인 32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9월 4일자 7면>를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객관식 설문만 진행하면 이들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A4 용지 16장 분량의 글이 모였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족간병인의 목소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담기 위해 ‘한국어 글분석 프로그램’(K-LIWC)을 이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사람이 쓴 글에서 형태소(의미가 있는 언어의 최소 단위)로 단어를 뽑아낸 뒤, 어떤 감정이나 생각 등이 자주 언급됐는지 분석하는 도구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1만 5000여개의 단어를 언어학적 분석에 따라 72개의 함축적 의미가 담긴 단어로 보여 준다. 학계에서 신뢰도가 높은 방식으로 서종한,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가 분석에 도움을 줬다. 가족간병인이 적은 글은 총 7729개의 단어로 구성됐다. 일상생활(자기영역)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건 ‘직장·일’(169회), ‘학교’(155회)였다. 가족간병으로 직장이나 학업 등 사회활동에 제한을 받는다고 호소한 사람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여가활동’(134회)에 대한 언급도 높았다. 끝 모를 사막 속에 갇힌 듯한 간병 터널에서 오아시스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휴식’뿐이다. “몇 분이라도 저만의 자유시간을 느끼고 싶어요.” “저도 쉴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발 숨을 돌릴 여유를 좀 주세요.” 보통 사람에겐 너무 소박해 보이지만 가족간병인은 이런 생각조차 사치다. ‘몸 상태와 증상’(127회), ‘돈·재정적 이슈’(111회)와 관련한 단어도 많이 나왔다. 간병을 하다 본인 건강까지 해치고,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다고 호소한 것이다. 서 교수는 “가족간병인이 종일 간병에만 매달리다 보니 휴식이나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결국 생활비나 간병비 등 경제적 지원을 호소하게 된다”고 분석했다.서울신문은 설문 응답자 외에도 현재 아픈 가족을 간병 중인 30여명을 직접 만나 목소리를 들었다. 경기 일산에 사는 임순달(57·여)씨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86)를 6년째 돌보고 있다. ‘잘’ 모시고 싶어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땄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증세가 심하지 않아 오전 3~4시간 정도 홀로 지낼 수 있다. 이 시간 임씨는 옆 동네 치매 노부부 집으로 가 ‘제2의’ 간병(방문요양서비스)을 한다. 시어머니까지 임씨 혼자 3명의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이다. 임씨는 이들 노부부도 성심껏 간병해 가족 못지않게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런 임씨도 정부가 가족간병을 ‘그림자 노동’(대가를 받지 않고 당연히 하는 것으로 포장된 노동) 취급하는 것엔 분통을 터뜨린다. 임씨처럼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사람을 가족요양보호사라고 한다. 돌보는 이가 가족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요양보호사가 방문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급여를 지급한다.하지만 임씨가 급여를 청구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1시간, 시급 1만 5000원 남짓이다. 게다가 한 달에 20일(20시간)까지만 청구할 수 있다. 임씨는 “오후에는 종일 시어머니를 모셔 실제 간병 시간은 10시간이 넘는다”면서 “1시간만 인정해 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했다. 이어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면 시어머니를 타인 요양보호사에게 맡기고, 나는 다른 가정으로 방문요양서비스를 나가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 임씨가 다른 치매 환자를 돌보면 시간제한 없이 시간당 1만원가량 받을 수 있다. 장상훈(50·가명)씨는 8년 전부터 만성 폐질환인 어머니(71)를 여동생(40)과 함께 모시고 있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어머니는 스스로 거동이 불가능하다. 어머니 집을 고쳐 2층짜리 주택으로 만들고 모두 합가했다. 자신 가족은 1층, 어머니와 여동생은 2층에서 생활한다. 여동생은 미혼이다. 낮에는 직장을 그만둔 여동생이 간병하고, 저녁에는 일을 마치고 퇴근한 장씨가 돌본다. “사실 환자의 육체적 병에 대한 지원 제도는 어느 정도 마련돼 있어요. 하지만 ‘마음’도 돌볼 필요가 있다는 건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었는데 정말 예민해졌어요. 예를 들면 실내 온도가 정확히 25도, 습도는 45%가 유지되지 않으면 신경질을 부려요. 몸이 아프니 마음도 병든 거죠. 그게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해요. 환자 정신건강에 대한 치료와 지원이 필요합니다.” 김미지(51·여)씨는 벌써 10년째 파킨슨병을 앓는 남편(57)을 돌본다. 파킨슨병은 노인성 질환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모시고 있던 시어머니한테마저 치매가 왔다. 두 사람을 동시에 간병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요양시설로 모셨다. 김씨는 남편이 아프고 나서도 2년가량 회사를 더 다녔지만 결국 그만뒀다. 남편이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면서 낮에도 곁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논술 과외를 하면서 버텼지만, 줄어만 가는 통장 잔고에 한숨만 늘었다. 남편의 우울감이 커지고 생활도 어려워지면서 한창 청소년기에 있던 아이들과의 충돌도 잦아졌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이상해졌다고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어려웠어요. 애들이 있어 참았지만 이렇게 사느니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죠.” 암흑같은 터널에서 다행히 한 줄기 빛이 비쳤다. 파킨슨병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남편 증세가 호전된 것이다. 남편은 기적적으로 회복해 직장을 구했다. “가장인 남편이 쓰러졌을 때는 정말 막막했어요. 아직 젊다는 이유만으로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죠. 특히나 저희 집처럼 부모가 아픈 경우에는 아이들 먹는 것을 비롯해 교육을 책임져 줄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족간병인들은 아무리 작은 도움이라도 정말 크게 느낍니다.” 탐사기획부 tamsa@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9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9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9회>소녀는 이날부터 거동이 불편한 황제(고종)를 위해 궁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거처도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건물터)에서 미국 대사관저로 옮겼다. 나와 베델이 그랬듯 영사 부인도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다. 부인은 낯선 조선 땅에서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소녀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부인은 초상화를 그리는 기간 동안 그녀에게 대사관저에 머물것을 권했다. 주변 사람들은 부인이 소녀를 독점하려는 듯한 모습을 시샘하기도 했다. 소녀로서는 부인의 배려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고마웠다. 우선 그녀가 공사 가족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미국 정부가 그녀를 ‘믿음직한 인물’로 인증해주는 효과를 냈다. 그녀가 왜 서울에 왔는지 무슨 목적을 위해 왔는지를 의심하는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나 그의 부하들의 시선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 대사관저는 사실상 조선 황제가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건물(경운궁 석조전으로 추정)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원할 경우 수시로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일본인들에게 ‘1급 요주의 인물’로 찍힌 베델과 가급적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베델이 자신의 집처럼 이용하는 애스터하우스 호텔은 일제의 주된 감시 대상이었다. 그곳에 계속 머무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 것은 없었다.그럼에도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소녀가 호텔에 그대로 남았으면 했다. 내가 그녀와 함께 만든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물론 있었고 말고...그럼 있었지...하지만...휴...러브 스토리 같은 건 아니야...지금 이 글에는 그런 이야기를 쓸 여유가 없어. 그녀는 호텔 방에서 이사 준비를 하며 나와 단 둘이 있었다. “빌리” 그녀가 나를 불렀다. “앞으로 우리는 며칠간 떨어져서 위험한 게임을 해야 해요. 당분간 나는 베델을 볼 수 없고 베델 역시 나를 볼 수 없죠. 당신이 저 교활하고 못된 하기와라의 ‘착한 사람’ 명단에 올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민영환 대감이 당신과 베델에게 은밀히 메시지를 전달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확신을 주려고 힘주어 말했다. “당신의 위대한 계획에 걸림돌이 되느니 나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쪽을 택할게요.” ”오...안돼요. 내 친구!“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위험한 게임의 파도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멜로 드라마에서처럼 “당신에게도 마차가 올 거에요’ 따위의 사탕발림 따위 말은 하지 않을게요. 당신의 때가 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당신을 비출 거에요. 그때까지 당분간은 절대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말고 참아 주세요.” 그녀는 트렁크 안쪽 주머니에서 전신 메시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수신처는 상하이에 있는 그녀의 집이었다. 거기에는 “초상화 성공. 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아빠한테 보내려는 건 아니에요.”그녀가 말했다. “이 계획의 배후에 있는 그분께 보내는 거죠. 그날 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그분께 정확히 전달돼야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서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내용이죠. 그렇죠?” 그녀는 자신의 성공 소식을 아빠에게 전하려는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민 대감에게 전갈이 오자마자 내가 지금 전달한 내용을 꼭 전보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여기 서울은 하기와라의 감시가 심하니까 번거롭더라도 제물포(인천)로 가 주세요. 민 대감의 연락을 받는대로 최대한 빨리 상하이로 보야 해요.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까요.”“그 다음 계획을 말해 줄 수 있나요?” 내가 물었다. “상하이에 있는 그 분이 이 메시지를 받으면 즉시 이 내용을 옌타이(산둥성 소재)로 다시 보낼 거에요. 제물포에서 약 14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죠. 그러면 그곳에 있던 소형 쾌속 증기선이 재빨리 출발해 24시간 안에 서울의 궁에서 15㎞가량 떨어진 곳 강가(마포 양화진으로 추정)에 정박할 거예요. 그 배에 황제와 저 이렇게 두 명이 타게 되고요...” 그녀는 나를 천천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두 명이 더 탑승합니다...황제를 해하려는 처단자(하기와라 슈이치)와 알고 지내는 것조차 끔찍해하는 두 명의 악동(베델과 빌리)이죠.” 10회로 이어집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쇼미더머니777’ 마미손 정체는 매드클라운? “엮지 말라 불쾌”

    ‘쇼미더머니777’ 마미손 정체는 매드클라운? “엮지 말라 불쾌”

    ‘쇼미더머니 777’에 분홍색 복면을 쓴 래퍼 마미손이 이목을 집중 시킨 가운데 그의 정체를 두고 래퍼 매드클라운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매드클라운은 이에 불쾌감을 표했다. 지난 7일 방송된 ‘쇼미더머니 777’ 첫 방송에서는 140명의 래퍼들의 평가전이 진행된 가운데 방송 후반 분홍색 복면을 쓴 마미손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마미손은 복면으로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려 했지만 동료 래퍼들은 그의 존재를 이미 알아차린 듯 웃어보였다. 방송 이후 다수 네티즌은 마미손의 목소리와 행동 등을 근거로 그의 정체가 매드클라운일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이에 매드클라운은 방송 직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아니라고요 아니라고”라는 글을 올리며 부인했다. 이어 마미손의 방송 캡처 사진과 함께 “기믹(속임수)이 과하시네. 다분히 상업적이네요. 엮지말아주세요. 불쾌하거든요 #아니라고”라고 재차 부인했다. 한편 매드클라운은 ‘쇼미더머니2’에 경연자로 참가한 바 있으며 시즌5에서는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나플라, ‘쇼미더머니777’ 차원 다른 수준..프로듀서들 ‘영입 전쟁’

    나플라, ‘쇼미더머니777’ 차원 다른 수준..프로듀서들 ‘영입 전쟁’

    ‘쇼미더머니777’ 나플라가 강력한 우승 후보에 올랐다. 7일 방송된 Mnet ‘쇼미더머니777’에서는 140인의 래퍼 중 절반 이상이 탈락하는 ‘래퍼 평가전’이 펼쳐졌다. 이날 ‘쇼미더머니777’를 이끌어 갈 프로듀서 군단이 소개됐다. 스윙스&기리보이 팀, 딥플로우&넉살 팀, 팔로알토&코드 쿤스트 팀, 더 콰이엇&창모 팀이었고, 프로듀서들은 “참가자들 수준이 역대 최고, 제일 신선한 시즌”이라고 입을 모았다. 선발전을 뚫고 올라온 140인의 래퍼들이 첫 번째 관문 ‘래퍼 평가전’에 도전했다. 60초로 진행되는 랩 심사였고, 프로듀서 팀 모두 FAIL 버튼을 누르면 탈락, 한 팀이라도 PASS를 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이번 시즌에는 합격한 래퍼들의 랩을 금액으로 평가하는 방식이 새롭게 도입되었다. 총 2억 원의 상금을 각 프로듀서 팀에게 5000만 원씩 지급됐고, 프로듀서 팀들은 합격한 래퍼들에게 최소 10만 원부터 최고 500만 원까지 지급할 수 있다. ‘래퍼 평가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된 래퍼는 나플라였다. 나플라는 등장만으로도 모두를 집중시켰다. 기리보이는 “나플라를 진짜 좋아한다”고 팬심을 드러냈고, 딥플로우는 “나플라는 쇼미더머니 최고의 래퍼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나플라는 덤덤하게 무대에 섰다. 이후 팔로알토는 “나플라가 ‘쇼미더머니’에 나온다는 걸 모두 다 알 텐데 이 무대에 출연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이에 나플라는 “돈 벌려고요”라고 답했다. 이후 나플라는 이번 시즌 우승 후보로 자신이 거론되는 것에 대해서는 “네. (우승 후보는) 저와 키드밀리인 것 같다”고 말하고 자신감도 내비쳤다. 나플라는 루크 화이트(Luke White)의 ‘riot’를 샘플링으로 한 랩을 선사했다. 나플라는 특유의 쏘아붙이는 랩 스킬로 시선을 끌었다. 무대를 스윙스와 기리보이는 나플라의 이름을 외치며 놀라운 반응을 보였고 넉살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우승 감”이라고 극찬했다. 코드 쿤스트도 “경이로웠다”고 말했고 팔로알토는 “지렸다”고 감탄했다. 나플라는 프로듀서 팀에게 ALL-PASS를 받았고 그를 자신의 팀으로 데려오기 위한 프로듀서 팀들의 영입 전쟁은 치열했다. 스윙스는 “헬스클럽 평생회원권을 주겠다”고 말했고, 더 콰이엇은 “나플라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것 같다. ‘쇼미더머니’ 일곱 번째 시즌 동안 이 정도의 랩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전 국민이 TV로 진짜 높은 수준의 랩을 듣게 되는 순간인 거 같다”고 극찬했다. 이후 나플라는 1830만 원의 파이트머니를 받아 1위에 등극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수곤 교수 “5개월 전 상도유치원 붕괴위험 경고···구청, 국토부 뭐했나”

    이수곤 교수 “5개월 전 상도유치원 붕괴위험 경고···구청, 국토부 뭐했나”

    공사장의 흙막 붕괴로 인근 서울 상도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건물이 20도가량 기울어 붕괴 위험에 처한 가운데 이미 지난 3월 현장점검에서 붕괴 위험성을 지적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미 5개월 전에 붕괴 위험의 경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수곤 서울시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는 7일 오전 YTN ‘김호성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지난 3월 상도유치원의 의뢰를 받아 현장점검을 진행했다. 당시 (현장을 찾았을 때) 50%가량 터파기 공사가 진행됐는데, 지질을 보니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어 “(공사) 설계를 하기 전에 지질조사를 하는데 (당시) 철저히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며 또 “(사고 발생) 지역은 편마암 지대로 붕괴에 취약하다. 지질에 맞는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데 제대로 되지 않아 (자문의견서를 통해)이 부분 보강을 지적했다.”고 말했다. 그는 금천구 가산동 붕괴 사고도 같은 현상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이 교수는 “세월호가 바다에 있는 것만 아니다. 사회안전 시스템이 여전히 부재하다.”며 “사건이 발생했다고 사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안전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가 보기에는 구청이나 시청이나 국토부 이런 사람들이 문제 있다. 지금 이게 사람 문제가 아니고요. 시스템이 없습니다. 이걸 주민들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게 시정이 안 되고 궁극적으로 붕괴까지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앞서 6일 오후 11시 22분 서울 동작구의 한 공동주택 공사현장에서 지반이 침하해 인근 상도초등학교 내 유치원 건물이 기우는 사고가 발생했다. 최초 측정 당시 5~10도가량 기울어진 유치원 건물은 7일 오전 15~20도까지 더 기운 상태다.사고 당시 한 밤중이어서 공사장과 유치원 인근에는 사람이 없어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당국과 동작구청은 주민 31명을 상도4동 주민센터로 긴급대피시켰다. 정수형 한국시설안전공단 평가본부장은 7일 사고 현장 인근에 마련된 재난현장 통합지원본부에서 브리핑을 열고 “기울어진 건물 기둥이 다 파괴된 상태”라며 “건물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상도유치원은 이날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다만 유치원과 70m 정도 떨어진 상도초등학교는 정상 수업한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불온(不·on)한 회의] 송도 불법주차·병역특혜 논란, 비상식·불공정에 대한 분노인가

    [불온(不·on)한 회의] 송도 불법주차·병역특혜 논란, 비상식·불공정에 대한 분노인가

    처음엔 이 주의 키워드를 ‘분노’로 봤습니다. ‘송도 불법주차’ 사건이나 ‘병역특례’ 논란이 불공정, 비상식에 대한 분노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회의가 이어지니 분노 표출의 현상과 원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인식의 흐름과 변화도 함께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야 하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내놓기 어렵습니다. 이번 ‘불온(不on)한 회의’에서는 우리가 왜 이렇게 와글거렸는지는 가늠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부장: 50대 여성이 자신의 차에 불법주차 스티커를 붙인 데 화가 나서 지하주차장 진입로를 고의로 막은 사건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는데. 달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죠. 아파트 입주민들의 얘기를 들어봤는데, 그분들은 오히려 차분했어요. 문제의 차주가 누구인지는 입주자 대표단 몇 명만 알고 있었고, 대부분 “그 사람 신원은 지켜주자”, “불편을 겪긴 했지만 경찰 조사가 들어갔으니 거기서 해결할 문제다”, “차주가 차를 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물론 차주에게 사과도 요구했죠. 비상식적인 사건을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은 상식선에서 움직였고요. 그런데 오히려 네티즌들이 더 분노해서 찾아가고, 차주의 신상을 털고…. 인터넷에서 논란이 너무 증폭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호: 그게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자신이 만난 사람에 대한 인상은 그 사람의 단면이잖아요. 어떤 사건이 터지면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던 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단면을 털어놔요. “내가 아는 이 사람은 이렇더라”는 식으로. 그런 단면이 인터넷의 어느 공간에 모여 하나의 형태를 만드는 거죠. 사건 가해자에 대해서는 대부분 그 형태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비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단지성의 덫에 걸리는 거죠. 우리가 집단지성을 발휘해서 정의를 바로 세웠다는 믿음. 사건 당자사들의 당시 사정 따위는 관심이 없어요. 달란: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해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는 사안은 기사화할 가치가 있죠. 정보 차원에서요. 하지만 가끔 논란이 커질 때가 있어요. 진호: ‘굳이 사람들이 알아야 할 일인가’라는 고민, 기자들은 결국 ‘알면 재밌을 만한 일’에 많이 흔들리죠. 부장: 그러면 송도 불법주차 사건은 알려야 했던 일이었을까. 달란: 분명 화제성은 컸지만, 논쟁의 흐름이 ‘김 여사’(운전을 못하는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사화에 대한 고민은 여전합니다. 지금 여성 회원이 많은 인터넷 카페에서는 ‘만일 차주가 남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분노했겠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거든요. 진호: 확실히 맞는 지적이에요. 물론 차주가 남자였어도 이 사건은 화제가 됐겠지만 남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신상이 노출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최근에 인천 자유공원에서 차량 난동을 부린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 보고 ‘미쳤다’고 생각해도 ‘저 놈 누구야? 한 번 파헤쳐 볼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죠. 세진: 이 사건을 사람들이 어떻게 소비하는지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나’에 초점을 맞춰 봤어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 진입로를 막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다는 건, 분명 잘못이죠. 사건이 며칠 동안 계속된 뒤에야 사과문을 내놨고요. 저렇게 행동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부장: 보통은 ‘분노조절장애’로 판단하지만, 상식 밖의 행동을 한 사람을 다 그렇게 보면 진단과 해결의 여지가 없어지겠지. 진호: ‘사적 응징’으로 보기도 합니다. ‘자신이 당한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죠.부장: 또 다른 분노는 ‘병역특례’에서도 드러났는데. 진호: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 대표팀이 4강까지만 진출했는데도 선수들이 모두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때도 불공정하다는 지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들끓지는 않았죠.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이젠 많은 사람들이 랭킹의 수준을 나름 가늠하고 있는 것이죠. 평소 40~50위를 하던 팀이 당시 월드컵 4강에 진출했으니까, 이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고요.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은 야구든 축구든 상대팀 전적에 비해서는 우리가 월등한 편인데도 아슬아슬하게 금메달을 딴 터라 논란이 크죠. 게다가 이번에는 스포츠냐 대중문화냐의 문제로 번졌잖아요.달란: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은 ‘손흥민은 왜 면제돼요’가 아니라 ‘방탄소년단(BTS)는 왜 면제가 안 돼요’라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대중문화 안에서도 병역특례 적용이 옳은지 여부에 대해 갈릴 거라고 봐요. 미국 음악차트인 빌보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차트 1위’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죠. 여론이 병역특례 제도에 불만이 많아서 개선해야 한다고 하면, 여론이 바뀔 때마다 이걸 손볼 것이냐라는 문제도 생기죠. 진호: BTS의 병역 면제를 반대하는 쪽은 “과연 BTS 성과가 국가를 대표하는 일이냐”, “상업적인 성공에 더 가깝지 않느냐”는 의견을 보입니다. 이 의문에 손흥민 선수를 대입하면 “그렇다면 손 선수는 국가를 위해 활약했나”, “프로 무대에서의 성공을 위해 뛴 것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한 겁니다. 경근: 가끔 우리가 스포츠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 북한과 비슷한 부분이 보입니다. 우린 분단국가이지만 실제 전투는 거의 하지 않죠. 그래서 스포츠에 등치시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일본, 미국한테는 져도 남한은 꼭 잡아야 해요. 이런 점을 정신교육시키기도 하죠. 하도 한국과 대항전을 지상최대의 과제로 보니까, “지는 선수들은 아오지 탄광에 보낸다”는 소문도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안 보내거든요.(웃음) 특정국가의 경기를 대하는 자세는, 남북이 다르지 않은 거죠. 진호: 스포츠에 대한 개념이 ‘국가 위상’에서 ‘개인의 자아실현’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병역특례의 논의 대상도 더 확대된 것이 아닐까요. 세계 강국을 꺾었다는 자부심도 뿌듯한 일이지만, 한창 잘나갈 때 활동을 접고 군대에 가야 하는 현실적인 안타까움. 달란: 요즘 그런 얘기 나오고 있잖아요. 마일리지를 쌓아서 일정 수준이 되면 병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로 바꾸자고. 그런데 그것도 문제가 되는 게, 정말 국위선양을 할 만큼 특출하지 않은데 선수 생활을 오래해서 마일리지를 쌓고 군대를 안 가는 것이 과연 맞을까요? 지금 우리나라는 ‘예술과 체육 분야에서 국위선양에 현저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병역을 면제해 주니까. 그리고 또 생각해 봐야 할 게, 올림픽 양궁 1등과 월드컵 8강 진출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마일리지 가중치를 부여할 때 종목별 특성도 고려해야 하고. 병역문제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진호: 젊은이들의 재능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병역특례 제도가 일정 부분 필요하죠. 시대가 변하면서 중요한 요소들도 바뀌게 마련이죠. 그에 따른 새로운 특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요즘은 대중문화의 파급력도 국위 선양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건데, 그 영향력을 너무 제로로 보는 건 아닌가 싶어요. 세진: 사실 병역특례 논란이 기본적으로 징병제여서 발생하잖아요. 지원병제로 바꾸면 논란이 안 생기지 않을까요. 분단 현실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방의 의무를 병역으로만 수행할 필요는 없잖아요. 병역 외에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이를테면 대체복무도 그중 하나인 거죠. 예술인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병역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달란: 지원병제는 궁극적으로 나갈 방향인 건 확실해 보여요. 진호: 하지만 분단 현실이 바뀌어야 되는 것이니까. 종전선언 후에 남북이 서로 군축을 하기로 약속하고, 그것이 실제로 심도 있게 진행되면 지원병제로 바뀔 수 있겠죠. 병역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게 우리의 현실인 거죠. 달란: 만약 연말에 종전선언이 되면…. 마침 남북 정상회담이 18~20일로 잡혔어요. 종전선언 논의를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요.(웃음) 정리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포토 다큐] 600년 별빛 따라… 궁으로 숨어든 밤

    [포토 다큐] 600년 별빛 따라… 궁으로 숨어든 밤

    고궁이 새로운 ‘문화허브’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와 예술을 결합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옛 궁궐 안에서 펼쳐진다.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경복궁 별빛야행’은 한낮의 번잡함을 벗어난 고궁에서 품격 있는 왕실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힐링 프로그램’이다.은은한 별빛이 짙게 드리워진 경복궁. 손마다 청사초롱을 쥔 관람객들이 한껏 들뜬 기분으로 고궁 나들이에 나섰다. 조선 시대 궁중 의상을 차려입은 상궁이 옛 말투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흥례문(興禮門)의 중문이 열리고 동편 회랑(回廊)을 지나 별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가니 왕세자가 글을 읽던 비현각(丕顯閣)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일으킬 만큼 배우들이 당시 세자가 대신들과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었다.본격적인 투어를 하기 전 들른 곳은 궁궐의 부엌인 소주방(燒廚房)이다. “주상 전하께서 여러분에게 특별히 진찬연을 베풀라 하셨지요”라며 수라간 상궁이 맞았고 ‘도슭(도시락의 옛말) 수라상’이 차려진 방으로 안내했다. 도시락이라 하여 요깃거리일 줄로만 알았는데 임금이 즐기던 12첩 반상이었다. 궁중 나인의 수발 속에 즐기는 만찬은 정갈하면서도 담백했다. 더불어 마당에서 열리는 퓨전국악 공연은 먹는 내내 입맛을 돋워 주었다.식사 후 시작된 본격적인 고궁 산책은 이제껏 야간엔 공개하지 않았던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交泰殿)으로 이어졌다. 금남(禁男)의 구역이었던 궁녀들의 생활 공간을 엿보는 흔치 않은 기회다. 전각에 들어가기 전에 보여 주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사랑을 샌드 아트로 그려낸 영상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윽고 둘러본 각각의 방은 단아한 고가구와 소박한 꽃들이 아 기자기한 모습으로 조화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문양의 창호(窓戶)에서 퍼져 나오는 불빛이 은은하다. 내부 관람이 처음으로 허용된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은 경복궁 내전의 침전(寢殿)으로서 우리 한옥의 건축미가 돋보였다.후원을 거쳐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니 별빛야행의 백미인 경회루(慶會樓)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못을 앞에 두고 조명과 어우러진 누각은 고요함 속에 고고한 멋을 발하고 있었다. 사라져 버린 왕조의 순간들이 물위로 아른거리는 듯하다. 낮에는 볼 수 없던 고궁의 비경을 카메라에 담는 관람객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별빛 아래 펼쳐진 왕실 조경의 진수에 모두가 흠뻑 취한 듯했다. 별빛야행에 참가하려고 휴가를 냈다는 회사원 민경배씨는 “낭만적인 감흥을 많이 받았고 특히 늦은 밤에 구경해 보니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신발을 벗고 2층 누각에 오르니 힘 있게 술대로 내려치는 거문고 소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인왕산과 경복궁의 전각들은 물론 도심 속 빌딩의 야경까지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내려다보는 풍경이 사뭇 색다르다.행사의 마무리는 근정전(勤政殿)에서 진행됐다. 조명으로 꾸민 밤의 근정전은 고즈넉하면서도 화려했다. 2단의 월대(越臺) 위로 세워진 경복궁 정전(正殿)의 자태가 당당하다. 월대를 둘러싼 난간 기둥마다에는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과 십이지상 등이 배치돼 있다. 관람객들은 이곳저곳 놓칠 수 없는 장면을 둘러보기에 바쁘다. 학원 강사인 서지숙씨는 “조명 불빛 아래 화려함이 더해진 단청이 환상적”이라며 탄성을 터뜨렸다.조선 최고의 건축과 정원을 배경으로 운치를 더하는 ‘시간 여행’을 다녀온 초가을 밤. 600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궁은 우리 곁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글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윤두준 “갑작스러운 입대, 막막해서 많이 울었다” 입대 전 심경 고백

    윤두준 “갑작스러운 입대, 막막해서 많이 울었다” 입대 전 심경 고백

    군입대한 윤두준의 자필 편지가 공개됐다. 5일 하이라이트 측은 공식 SNS를 통해 “윤두준 훈련병이 라이트 여러분들께 보내는 첫 번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라이트 여러분들의 건강과 행복이 늘 최우선인 윤두준 훈련병에게 시시때때로 여러분들의 안녕과 행복을 전해주세요”라는 글과 함께 윤두준의 자필 편지를 공개했다. 윤두준은 “보내주신 인터넷 편지 한 통도 안 빼놓고 한 자 한 자 읽고 있습니다. 멤버들 소식도 덕분에 잘 듣고 있고 멤버들에게도 제 안부 꼭 전해주세요. 오면 각오 많이 하고 오라고”라며 인사를 건넸다. 윤두준은 이어 “각오를 정말 많이 하고 굳게 마음을 먹고 주변에서 아무리 용기를 북돋워 주더라고 너무 힘들더라고요. 모든게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지요”라며 입대 전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지금도 가끔 현자타임이 오긴하지만 이제 적응 다 한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너무 보고싶습니다”라며 밝은 인사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한편, 윤두준은 지난달 24일 강원도 화천 제27보병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5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뒤 자대에 배치돼 성실하게 국방의 의무를 이행할 예정이다. 다음은 윤두준 자필편지 전문. To. 라이트 잘 지내요? 건강하신가요? 환절기라 걱정이 많이 되네요. 아! 먼저 고맙다는 말 꼭 전해드리고 싶어요. 보내주신 인터넷 편지 한 통도 안 빼놓고 한 자 한 자 읽고 있습니다. 손 편지도요! 밖에 여러가지 소식 전해주시는 모습 보면서 고맙기도 하고 죄송한 마음도 많이 들어서 요 며칠 마음이 참 불편했지만요. 멤버들 소식도 덕분에 잘 듣고 있고 멤버들 한테도 제 안부 꼭 전해주세요. 오면 각오 많이 하고 오라고. 많이 걱정하셨더라구요. 쉬지도 못하고 바로 입대하는게 너무 불쌍하다며. 네. 제가 생각해도 불쌍하더라구요. 하지만 저 때문에 많이 난처해진 주변 사람들 얼굴 봐서라도 웃고 있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각오를 정말 많이하고 굳게 마음을 먹고 주변에서 아무리 용기를 북돋워 주더라도 너무 힘들더라구요. 모든게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지요.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앞이 너무 막막해서 나홀로 아무도 모르게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현자타임이 오긴 하지만 이제 적응 다 한거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 보고싶습니다. 제대로 인사도 못한 것이 언제까지 마음이 불편하고 죄송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잘 버텨주어 남은 멤버들까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다시 만나는 날엔 대성통곡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무쪼록 다들 몸 건강하시고 자대 배치받고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감기조심. 사진=트위터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김 빠진 맥주로 전자렌지 청소하는 방법

    김 빠진 맥주로 전자렌지 청소하는 방법

    ‘당신의 하우스헬퍼’ 하석진이 전자렌지 청소법을 공개했다. 최근 KBS2 드라마 ‘당신의 하우스헬퍼’ 측은 “당신을 위한 꿀Tip-전자렌지 청소법”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하석진이 맥주를 이용한 전자렌지 청소법을 선보이는 모습이 담겼다. 하석진은 “먹다 남아서 김이 빠진 맥주 그동안 버리셨다고요? 전 이걸로 전자렌지를 청소해볼까 하는데요”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그릇의 절반 정도 맥주를 붓고 전자렌지에 넣은 뒤 3분 돌려준다. 전자렌지 내부는 수증기로 가득차게 된다. 이 때 전자렌지 문을 열지 말고 안에 있는 때가 잘 녹을 수 있도록 3분을 더 기다린다. 기다릴 때는 안전을 위해 전원 코드를 뽑아준다. 그리고는 깨끗한 행주로 내부를 꼼꼼히 잘 닦아주면 전자렌지 청소가 끝난다. 사진=네이버TV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여기는 남미] “38년 만에 여자됐다”…콜롬비아 첫 트랜스젠더 교사

    [여기는 남미] “38년 만에 여자됐다”…콜롬비아 첫 트랜스젠더 교사

    남미 콜롬비아에서 사상 처음으로 초등학교 교사가 된 트랜스젠더가 뒤늦게 언론에 소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콜롬비아 칼리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솔립시 나비아 플라타(48)가 화제의 주인공. 지금은 이렇게 여성 이름을 갖고 살고 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는 카를로스 아르만도라는 남성 이름을 가진 남자교사였다. 플라타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성적 정체성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38년 만에 (여자가 되는) 꿈을 이루게 돼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사연을 알고 보면 플라타의 행복은 과언이 아니다. 플라타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알게 된 건 10살 때였다. 어느 날 동네 친구들과 놀면서 '원더우먼' 복장을 하면서 "난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날 그는 아버지로부터 흠씬 매를 맞았다. 사내아이가 여자 역할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호되게 매를 맞은 그는 여자가 되겠다는 꿈을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했다. 어른들이 "장래 희망이 뭐니?"라고 물으면 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답하면서도 그는 속으론 "그건 직업일 뿐이고요, 진짜 꿈은 여자가 되는 것이에요"라고 답하곤 했다. 진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꾹 누르면서 산 그의 인생은 겉으론 순탄했다. 19살 때 초등학교 교사가 됐고, 사촌의 소개로 만난 여자와 가정을 이뤄 자녀도 셋을 두었다. 그렇게 억지로 남자로 살던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 된 건 아버지의 죽음이다. 200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는 "이젠 여자가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 33살 때였다. 때마침 학교에서 가정폭력에 대한 자유토론이 열렸다. 가정 문제에 대해 동료, 학부모 등과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그는 여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까진 꼬박 15년이 걸렸다. 가족의 동의를 얻고, 동료들에게도 양해를 얻어야 했다. 트랜스젠더가 된 후에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선 교육부의 허락도 받아야 했다. 플라타는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성적 정체성을 알리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럴 때마다 플라타는 "나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이면 학생들에게도 본이 될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힘을 내곤 했다. 2017년 플라타는 꿈에 그리던 여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올해엔 트랜스젠더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탄생한 1호 트랜스젠더 교사다. 그런 그에게 학교에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초등학교의 교장은 "플라타는 직업에 인생을 던진, 책임감 있는 여교사이자 위대한 여성"이라면서 "여자가 된 후 처음엔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젠 모두 그를 훌륭한 여교사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사진=엘파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붕대 투혼으로 생애 첫 금메달’ 레슬링 조효철 “아픈 줄도 몰랐다”

    ‘붕대 투혼으로 생애 첫 금메달’ 레슬링 조효철 “아픈 줄도 몰랐다”

    지난 2018 아시안게임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97kg급 8강 경기에서 조효철(32) 선수는 상대 선수와 부딪혀 눈 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지난달 22일(현지시간) 열린 결승전까지 ‘붕대 투혼’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생애 첫 금메달이었다.조효철 선수는 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레슬링 하다 보면 머리 싸움이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8강 당시) 그 머리 싸움하는 도중에 상대랑 머리를 부딪혀가지고 눈 위가 좀 찢어졌는데, 이제 붕대를 감고 아픈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경기를 임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어렵게 금메달을 획득한 소감을 물은 사회자의 질문에 조효철 선수는 “처음에는 얼떨떨했거든요, 처음 금메달 딴 거라서. 그런데 좀 지나고 나다 보니까 그게 표현 못 할 정도로 너무 좋더라고요”라고 밝혔다. 당시 조효철 선수는 올해로 3살 된 딸을 가슴에 안고 단상에 올라 딸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그때 너무 좋았어요. 행복하고, 진짜 말로 이게 표현 못 할 정도로 너무 좋았어요”라고 심경을 전했다. 결승에서 중국의 디 샤오를 꺾고 우승하자 조효철 선수의 어머니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 조효철 선수는 “그동안 (어머니가) 많이 고생하셨죠. 시합할 때마다 시합장에 항상 따라다니셨거든요. 그럴 때마다 결승전에서 아쉽게 지고 이러면 많이 속상해하시고, 그러시다가 이제 마지막에 이렇게 좋은 성적이 나니까 그때 눈물이 터지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에게 “그동안 뒷바라지한다고 고생 많이 하셨고요. 효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다음 목표를 물은 질문에 조효철 선수는 “(오는) 10월달에 세계 선수권이 있는데, 부상 없이 마무리 잘해서 올해 최고의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올림픽 대회 출전 계획을 물은 질문에는 “다음은 이제 후배들한테 양보해야죠”라고 답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체력왕’ 김진야 “마지막 경기, 솔직히 힘들었다”…체력 비결도 공개

    ‘체력왕’ 김진야 “마지막 경기, 솔직히 힘들었다”…체력 비결도 공개

    지난 2018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종목에서 조별리그부터 결승전까지 7경기를 모두 뛰었던 ‘체력왕’ 김진야(20) 선수. 7경기 모두 선발로 출전해 그라운드를 쉴 새 없이 누비며 700분 가까이 뛰었다. 한국 남자축구 대표팀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출전 시간이다. 키 174cm, 몸무게 66kg의 다소 왜소한 체격에서 어떻게 이런 체력이 나올 수 있었을까. 최용수 SBS 축구 해설위원도 중계 중에 “나중에 경기 끝나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아주 대단합니다”라면서 김진야 선수의 ‘강철 체력’을 극찬했다.김진야 선수가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그 비결을 공개했다. 김진야 선수는 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좋은 거 많이 해주셔서 좋은 게 (몸) 안에 많이 축적돼 있지 않나.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면서, 어렸을 때부터 ‘장어’와 ‘낙지’를 포함해 보양식을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 금메달을 딴 소감을 묻는 질문에는 “저희가 금메달을 걸고 국위선양을 하게 됐는데, 이게 팬들의 응원이 아니었다면 저희들의 힘으로는 뭔가 하지 못했을 것이고, 팬들이 많이 응원해 주셔가지고 저희가 이렇게 좋은 결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어요”라고 밝혔다. 대표팀 전체 선수 통틀어서 혼자 7경기를 다 출전하느라 힘들지 않았는지를 물은 사회자의 질문에 김진야 선수는 “저희 감독님도 힘들었을 테고 저희 코칭 스태프, 저희 지원 스태프까지. 그리고 저희 나머지 선수들도 누구 하나 안 힘든 선수 없었고 저만 힘들다고 해서 그걸 티내버리면 저희 팀이 다운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주변 감독님과 코치님과 지원 스태프와 선수들을 보고 힘을 많이 냈던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마지막(일본과의 결승전)에 2대1 상황으로 이기고 있을 때는 진짜 시간이 엄청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이 승리로 끝났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제 마음대로 이렇게 안 흘러가지고 좀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진야 선수는 손흥민 선수를 보고 신기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진짜 처음 봤을 때는 많이 신기했고, ‘이런 선수랑 축구를 하는구나’ 이렇게 하면서 저희가 더 정신 차리게 되고 더욱더 목표가 확실해졌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현재 김진야 선수가 속한 프로구단 인천유나이티드FC의 K리그 순위는 최하위(12위)다.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K리그로 복귀하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김진야 선수는 “팀이 좀 많이 어려운 만큼 제가 빨리 가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고, 저희 선수들이 단합을 해서 빨리 팀 성적을 올려야 되는 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라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의열단장 김원봉은 고국이 해방되자 이역에서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귀국했다. 김원봉은 피 묻은 박차정의 속적삼을 친정 식구들에게 전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뒷산에 유골을 묻었다. 13년이란 짧은 세월이었지만 중국 땅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중국서 만난 김원봉과 13년간 항일독립운동 제대리에서 내려 농가를 지나 야산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띄엄띄엄 무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묘지였다는데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100m쯤 올라가니 박차정의 묘소가 나타났다. 마른 솔잎이 봉분을 뒤덮는 바람에 풀이 자라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묘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란 비문만이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묘소에서 멀리 너른 들녘이 보이고 밀양강이 굽이쳐 흐른다. 밀양강 바로 북쪽, 해천 옆에 남편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 그 위쪽 부북면 신작로에는 해방 후 귀국해 고향을 방문한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었다.‘빨갱이’로 낙인찍힌 김원봉의 배우자란 딱지는 박차정의 공훈을 인정받는 데도 오랫동안 장애물이 됐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의 생가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옆 동네 안쪽에 있다. 지금은 옛날 모습대로 깔끔하게 복원돼 드문드문한 관람객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 반 아무개 농부의 집에 우국 청년 10명이 모였다. 밤샘 토론 끝에 김원봉을 의백(義伯·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됐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칠가살’(七可殺)로 규정, 처단의 목표로 삼았다. 단원들은 거사에 서로 가겠다고 싸울 정도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첫 거사 모의는 그만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발각돼 윤세주 등 6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의 밀양경찰서장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기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잇단 의거를 감행했다. 헝가리인 마자알의 고성능 폭탄 제조법 전수와 의열단 정신을 명문화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화물선 석탄창고 속에서 열이틀을 지낸 끝에 일본에 도착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원들의 잇단 항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에게는 김구 선생보다 많은 100만원(현재 가치 약 320억원)이란 막대한 현상금이 붙었다. 김원봉은 잠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고 같이 사진을 찍고 나서는 원판을 회수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일경을 따돌렸다. 신출귀몰이었다. ●신출귀몰 약산,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 더 붙어 5~6년 동안 수백건의 투쟁을 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의열단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약산은 군관학교에 다니던 조선 학생들을 가입시키면서 의열단 재건에 나섰다.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천궁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의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옛 기억이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18세 때 모교(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교지에 발표한 시 ‘개구리 소리’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박차정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된 집안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바로 ‘근우회 사건’이다. 두 번의 구금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몸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박차정을 중국으로 부른 사람은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였다. 박차정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3~4월쯤이었다.●독립투쟁·문학 공통관심… 사랑으로 발전 박차정은 등단을 권유받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원봉도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 독립투쟁과 문학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관심사는 사랑으로 승화됐다. 두 사람은 1931년 3월 결혼했다. 김원봉은 난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제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투사들을 양성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박차정은 교관으로 힘을 보탰다.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통합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박차정은 그 산하에 난징조선부녀회를 만들어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독려했다. 약산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 10일 항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산은 의용대장이 됐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했고 총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장시성 쿤륜관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베이지방으로 북상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화베이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임정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군무부장 취임 직후인 1944년 5월 27일 부상의 후유증이 깊어져 아내 박차정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광복을 맞아 근 30년 만에 귀국했으나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인사 김원봉에게 반대파의 백색테러와 암살 위협이 지속됐다. 미군정에 체포됐을 때 고문을 하고 수모를 준 경찰이 친일 앞잡이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풀려난 뒤 너무나 분해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월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과 노동상이란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약산 생가터엔 의열기념관… 서훈은 거부 당해 밀양 내이동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흐르는 해천변에는 항일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박제혁, 최수봉, 강우규 의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면서 “의열단에 최초로 참여한 사람은 알려진 대로 13명이 아니라 10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약산 집안의 9남2녀 중 4형제는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다. 막내 김학봉(86)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다. 김원봉에 대한 유족과 밀양시민들의 서훈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통하는 길·공존하는 삶… 사람 품은 도시, 근대 문화를 낳다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통하는 길·공존하는 삶… 사람 품은 도시, 근대 문화를 낳다

    한결 선선해진 서울 광화문의 한밤, 하수도 정비 공사 소리가 늘 같은 고요를 비집는다. 노숙자가 모로 누운 화강석 벤치, 한 칸 건너 형광색 조끼를 입은 인부들이 어둠 속에 잡담을 뿌린다. 어제는 가로등을 정비하더니, 맞은편에는 물청소차가 천천히 지난다. 폭염도 폭우도 갔나 보구나. 내일이 밝으면 또 몇 군데 크고 작은 시위가 있을 것이고, 이 가을에도 광화문 모서리에서 몇 구절 시구가 태어날 테지. 이 익숙한 도시의 밤 풍경은 150년 전 프랑스 제2제정 시대(1852~1870년) 파리에서 시작되었다.나폴레옹 3세의 독재 치하에서 오늘날 파리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당시 파리 시장(정확하게는 센(Seine) 구의 수장)을 맡았던 외젠 오스만의 과감한 개조 사업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 소개에는 언제나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못 치게 하려고 대로를 뚫은 독재의 조력자, 빈민가를 순식간에 철거하고 집세를 급등시킨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평가가 덧붙는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오스만이 잘못했다고 배웠어요.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철거민을 만들고 부자들 좋도록 재개발을 했으니까. 그런데 요즘 돌이켜 보니까 당시에 오스만이라는 사람이 그나마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오스만이 처음은 아니고, 나폴레옹 때부터 그런 구상을 했다고 해요. 파리를 유럽의 수도로 만들자. 나폴레옹 3세도 좋은 도시가 되려면 어떻게 돼야 하는가를 나름대로 연구했어요. 독재를 하면서 시위 진압하기 편하게 하려고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거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좋은 도시가 되게 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그러나 여전히 찜찜하다. 독재자가 독재적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 도시일 수 있는가? 좋은 도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도시라면, 우선 통해야 돼.” 음, 스승의 가르침은 이렇게 간단한 것인가? 발자크와 위고의 소설에 등장하는 파리의 골목이라고 하면, 종로의 피맛골 같은 대로의 뒷골목을 상상하곤 하지만, 사실 1850년까지 파리라는 도시의 거의 모든 길은 평균 폭이 1~2m에 지나지 않았다. 4층 넘는 건물이 빽빽한 인구 백만의 도시에, 곧은 길이라고는 없이 구불구불하고 막다른 데다가 가장 넓은 도로라고 해 보았자 폭이 5m도 되지 않았으니 파리에는 오로지 골목밖에 없었다. 마차나 수레가 드나들지 못했다. 당시 한 보고서에 따르면 5㎡짜리 옥탑방 한 칸에 23명의 어른과 어린이가 바글바글 살면서 그 생활 오물과 폐수를 그냥 길 앞에 내다버렸으니, 하루 종일 해도 바람도 들지 않는 좁은 골목 환경이란, 사람들이 하수구 속에 사는 꼴이었다. 콜레라가 창궐한 것은 그 하수가 그대로 상수에 섞여들고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했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성난 민중들이 집앞 바닥 포장돌을 파내서 쌓으면 바로 기마대를 막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혁명기에 고안되었다는 바리케이드의 정체였다.파리를 개조해야 한다는 제안은 18세기부터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전제 군주도 손댈 생각 없었던 도심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 황제였다. 콩코르드 광장부터 루브르를 지나는 리볼리 가를 닦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유년기를 유럽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보냈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영국 런던에 머물면서 그 도시 경관에 크게 감동했다. 그가 1848년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데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향수에 더해 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공약에 힘입은 바 컸다. 파리는 프랑스의 심장이고 위대한 도시라고 열을 올리며 불로뉴 숲을 런던 하이드 파크를 능가하는 공공 공원으로 조성하고 삼촌이 못 마친 리볼리 가의 연장 공사에 착수했지만 사업이 더뎠다. 임기 내에 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형편이 되자 재선이 불투명해졌고 불안감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종신을 선언한 나폴레옹 3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임 파리 시장을 찾는 것이었고, 그때 배짱과 열정에 충만한 오스만을 만났다. 1853년 취임 첫 주인 오스만에게 파리 지도를 펼쳐 보이며 “통하게, 통합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 보라고 명했다.“오스만이 처음에 한 일이 동서하고 남북으로 대로를 십자(그랑 크로아제)로 내요. 이렇게 하면 도시가 고르게 발전되죠. 그다음에 동서남북 네 길 끝에 역을 연결하고 도시를 순환하는 대로를 내요. 모든 게 연결되도록 만든 거지.” 6년 만에 1단계 사업이 완료되자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환영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에게 어째서 같은 건축가와 계속 작업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던 사업이 갑자기 순조로워졌는지 오스만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자신만만하게 ‘시장이 다른 사람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대로는 정말 독재자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뚫은 것일까? 나폴레옹3세 치하 파리에서 진압할 만한 봉기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파리 코뮌은 정작 실각 후다). 오스만은 훗날 보수적 의회에서 예산을 따낼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이라고 변명한 바 있다. 실로 오스만은 치밀했다. 폭 20m가 넘는 대로는 시위꾼 노동자들이 우글거리는 불량 주택만 없앤 것이 아니었다. 교통 정체와 오물과 매연도 사라졌다. 거기에 인도가 생겼고, 빛과 바람과 가로수가 도로를 채웠다.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대로의 지하, 보이지 않는 데 있었다. “첫 번째, 위생이다. 그래서 파리의 하수도 계획이 선 거예요. 굉장히 잘한 거죠.”파리 인구 전체에 배분될 분량을 계산해 상수원을 끌어왔다. 새로 판 거대한 하수도는 가스등과 다음 세기에 지하철이 지날 관이기도 했다. 시에서 받은 제복을 입은 인부들이 매일같이 하수에 모인 빗물로 도로를 청소하고 수만 그루의 가로수를 다듬고 가스등을 켜고 끄는 도시 풍경이 처음 탄생했다. “두 번째, 도시에 빈 데가 많아야 된다.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공원도 숲도 만들었죠. 관통하고 호흡하게 만든 거예요. 오페라 극장이며 에펠탑도 서는 건 그다음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파리가 탄생했습니다.” 오스만은 공원 울타리, 벤치, 신문 가판대, 공중 화장실, 광고판 같은 도시의 공공시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계하고 도시 전체에 고루 일관되게 적용했다. 그것은 상하수도처럼 시민 모두가 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것은 가로변에 철거한 다음 새로 지은 건축물들이었다. 같은 길에 면한 건물들은 서로 주인이 달라도 모두 하나로 이어져 보이도록 짓게 했다. 실내에서야 아무리 개성적으로 호화판으로 살든, 대로변 외관에 건축주의 부를 뽐내는 조각품이나 맥락을 끊는 디자인은 엄격히 금했다. 외벽 마감은 인근에 흔한 석재로 통일하고, 같은 형태의 테라스 난간을 설치하게 했다. 모든 건물은 최소한 10년에 한 번씩 일제히 보수하고 청소해야 했다. 사소한 데까지 꼼꼼하고 일관된 규제 속에 지어져 ‘오스만 건축’이라고 불리게 된 이 건물들은 하나하나 튀지는 않지만 방문객을 파리의 장대한 원근법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광용 유물이 아니라 삶의 풍경이다. 대로변 건물의 2~3층은 가족이 많은 부유층의 아파트고, 5층이나 6층에는 독신자나 노동자, 학생들이 살았다. 도시 전체가 상가이자 동시에 주택가고, 빈부가 한 지붕 밑에 공존했다.파리 도심에는 고층 아파트가 없지만 인구 밀도는 1㎢당 2만명이 넘어 서울보다 훨씬 높다. 근대의 수도, 파리 시민들은 추리닝 차림으로 자가용을 끌고 외곽의 대형 쇼핑몰을 가는 대신에 차려입고 1층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은 가게들을 산책하며 쇼핑하고, 길이 끝나는 데서 저녁의 오페라를 즐긴다. 위정자의 영광을 향한 길이 아니었다. 오스만은 파리의 오래된 역사적 건축들이 돋보이는 각도로 새 길을 냈고, 도시의 구마다 고르게 크고 작은 녹지 공원과 광장을 조성했다. 이 대대적 사업을 순식간에 시행하기 위해서 권력을 등에 없고 법을 개정하고, 자본가의 도움을 빌어 투자 회사를 설립했으며 수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했다.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세금 많이 걷으니까, 결국 오스만은 그래서 실각하죠. 자동차 시대를 예견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던한 도시 계획인 거고, 유럽의 근대 도시가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미국 시카고, 워싱턴, 바르셀로나, 빈…, 그런 대도시가 다 파리를 따르거든요. 그 기틀이 뭔지 자세히 봐야 할 거예요. 여러 사람을 괴롭혔지만 결과적으로 도시를 문화적으로 굉장히 성숙하게 만들었어요. 사람들이 불도저 김현옥 시장을 오스만하고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들은 한 세기 전에 오스만이 해 온 것을 비판도 하지만 새로 연구하고 근사하게 이어받아서 라데팡스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정도전이 만들어 놓은 서울이 확장될 때 우리는 무엇을 놓친 건가….” 르코르뷔지에를 위시한 모더니스트들이 비난을 퍼부은 오스만의 파리 개조가 왜 모던한 도시의 출발인가. 데이비드 하비는 모더니즘의 본질을 획일적 전통에 대한 ‘창조적 단절’이라고 말한다. 황현산 선생이 평생 연구했듯, 누구나 뻔히 공감할 완결된 서정성을 과감하게 뚫는 아이러니가 프랑스 상징주의의 모던한 시 정신이고, 그 정신이 제2제정기의 파리에서 태동했다. 1960년대 쿠데타 이후 반세기, 서울이 낳은 시와 도로를, 서울이 남긴 역사와 어둠을 지운 야경을 떠올려 본다. 격자 대로를 가도 가도, 600년 전 북악과 광화문에 맞먹을 비스타를 마주칠 일이라고는 없는 강남과 여의도에서 터전을 닦은 중산층은 이제 그들이 세운 도시를 깨끗이 철거하고 역사를 지우는 데 바쁘다. 폭염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재개발과 폭등과 재생이 터져 겨루는 서울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기획 수류산방 조성룡 건축가·도시건축 대표 심세중 수류산방 편집장
  • [황제 납치 프로젝트5] 고종 만나러 덕수궁에 들어간 소녀

    [황제 납치 프로젝트5] 고종 만나러 덕수궁에 들어간 소녀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5회>소녀는 서울에 온 지 이틀만에 황제가 있는 덕수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티븐슨(더럼 화이트 스티븐슨)이 그녀가 왕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덕분이었다. 사실 스티븐슨 입장에서는 그녀의 미인계에 넘어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 정부를 감시하러 온 일본 고문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매우 영민했고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국제정세의 맥을 정확히 짚어냈다. 도쿄의 내각은 오랫동안 진흙탕 속에 빠진 서울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열강의 외교놀음을 파악하고자 그에게 거액을 쏟아부었다. 만약 소녀에게 워싱턴 거물이 보내온 서신이 없었다면 스티븐슨은 그녀의 미모 말고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소녀가 가져 온 소개장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워싱턴과 연이 닿은 것에 흥분해 소녀의 입궁을 도왔다. 소녀는 10월의 어느 맑은 날 아침 왕을 알현하려 궁에 도착했다. 내가 어떻게 소녀를 따라 궁에 들어갔냐고? 원래 난 조선의 황제와 신하들을 만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대한제국 세관을 맡은 ‘골든엄브렐라’(소설 속 가상의 대한제국 세관 관리조직)의 책임자였으니까. 그때 나에게는 “열려라 참깨”와 같은 마법으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편집자주: 실제 이 시기 대한제국은 회계 업무가 가능한 세관원 출신 외국인을 대거 스카우트해 업무를 맡겼습니다. 1883년 우리나라 첫 공식 세관인 인천해관은 조선인이 아닌 10여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청나라 해관을 모델로 해외 경력자들이 조선으로 들어왔고 조선인도 영어시험을 거쳐 채용됐습니다. 당시 세관은 기상관측과 검역, 항만·등대 관리, 도로 측량, 우편사업 등 정부 업무를 대거 수행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궁에서 우리를 데리러 관용 마차가 왔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소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해 본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임이에요.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해요. 엄청난 모험을 할 수 있게 돼서죠.” “무섭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며칠 전에 한 일본인이 당신 가방을 뒤지려고 호텔로 숨어들었잖아요. 그 사람은 서울의 있는 일제의 거대한 스파이 조직의 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해요. 그들이 작심하고 덤빈다면...“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바보들...일본인들은 정말 서툴러요. 이 작은 갈색피부 친구들은 솜씨가 그닥 뛰어나지 않더라고요. 프랑스나 러시아의 예의 바른 비밀 요원들은 사람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죠. 트렁크를 뒤지고도 보풀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아요. 하지만 이들은 어떤가요? 어설프게 강도를 보냈다가 결국 지난번 사달이 났어요.” 소녀는 재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황폐하고 구불구불한 거리를 지나 마침내 궁에 다다랐다. 세미라미스(아시리아의 전설상 여왕으로 고대도시 바빌론의 창건자로 전해짐) 공중정원을 연상시키는 청동 장식물(덕수궁 석조전 앞 분수로 추정)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를 상하이로 훔쳐갈 임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과 목소리, 대담무쌍한 배짱에 매혹됐다. 지금 하려는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녀의 유혹에 말려 들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반쯤 넋을 빼앗겼다. 그녀의 미인계에 나도 빠졌다. 파리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시험하려 칼을 빼든 삼총사의 달타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대신들이 자리한 법궁에서 우리는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작고 왜소했지만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듣는 전지전능한 눈과 귀를 가졌다. 그는 고종의 궁에서 가장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황제보다 더욱 환하게 웃곤 했다. 마치 이 궁의 진짜 주인은 조선 황제가 아니라 하기와라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가 날카로운 시선을 내뿜으면 왕을 비롯한 궁궐의 모든 이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가 명령만 내려면 이들은 언제고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했다. 황제(고종)는 조상신보다 하기와라의 날카로운 이빨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더 무서워했다.우리는 왕을 만나기 전 겸열자인 하기와라에게 먼저 인사하려고 대기실로 갔다. 고양이가 넘나들 것 같은 문턱이 있는 이곳은 보라색과 파란색이 고풍스럽게 대조를 이뤄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하기와라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소녀가 유혹에 가득 찬 눈길로 그에게 끼를 부렸다. ”오, 하기와라씨! 상하이 영사관에 있는 당신의 친구 미토노가 ‘서울에 가면 당신을 꼭 만나라’고 여러번 말했어요.“ 소녀의 벨벳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는 고양이의 털처럼 나른했다. “그는 당신이 덕수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고 알려줬어요. 결코 여성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는 엄격한 분이시라는 것도요. 내가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면 아주 특별한 여자가 돼야 한다고도...” “아, 그렇습니까?” 하기와라는 너무도 큰 기쁨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게 왠 횡재냐’는 반응이었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험하고 무서운 궁궐에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약한 초상화가인 저를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으실거죠?” “그럼요. 물론입죠” 하기와라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얼굴이 금세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소녀는 이자도 어렵지 않게 미인계로 낚을 수 있었다. 6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민지혁 폭로 “오디션비 내고 15초 연기? 꼭 가져가야만 했나”[전문]

    민지혁 폭로 “오디션비 내고 15초 연기? 꼭 가져가야만 했나”[전문]

    배우 민지혁이 영화계 일부의 오디션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민지혁은 지난 1일 자신의 SNS에 “안녕하세요. 배우 민지혁입니다. 이 사진으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입장의 차이로 캐스팅 디렉터나 오디션을 진행하는 분들과 다른 견해를 가질 수는 있겠으나 생각을 해봐도 이건 좀 너무한 듯합니다”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 속에는 “‘님의 침묵’ 1차 서류 합격을 축하합니다. 준비물은 자유 연기 15초, 자기소개. 오디션 비용 1만 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민지혁은 “이 문자는 제가 받은 것은 아니고요. 저와 마찬가지로 프로필 투어를 열심히 하는 배우 동생에게 받은 겁니다”라며 “요즘 영화 프로필 4~ 50개 돌려서 오디션 겨우 1~2개 보는 실정인데. 그리고 오디션을 본다고 다 작품을 하는 건 아닌 상황인데”라고 답답해했다. 1차 합격한 사람에게 참가 비용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그는 “인사만 해도 4~ 5초는 그냥 지나간다”며 15초의 짧은 연기 시간도 지적했다. 또한 같은 날 5000원으로 줄어든 참가비에 대해서는 “할인하는 건 생각을 해도 너무해서인가요? 아니면 선심 쓰시는 건가요?”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들입니다. 연기로만 1년에 300~ 400만 원도 못 버는 배우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디션을 봐야 기회라도 얻는 배우들에게 꼭 그렇게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하십니까?”라고 일갈했다. 한편 2003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로 데뷔한 민지혁은 ‘가려진 시간’, ‘신과함께-인과 연’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하 배우 민지혁의 글 전문> 안녕하세요. 배우 민지혁 입니다. 이 사진으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입장의 차이로 캐스팅 디렉터나 오디션을 진행하는 분들과 다른 견해를 가질 수는 있겠으나 생각을 해봐도. 이건 좀 너무 한듯해서 많은 분에게 공개 겸 의견을 들어보려고 올려 봅니다. 이 문자는 제가 받은 것은 아니고요. 저와 마찬가지로 프로필 투어를 열심히 하는 배우 동생에게 받은 겁니다. 요즘 영화 프로필 40~50개 돌려서 오디션 겨우 1~2개 보는 실정인데. 그리고 오디션을 본다고 다 작품을 하는 건 아닌 상황인데. 힘들게 프로필 작업해서 프린터하고 다리품 팔아서 영화사 투어하고. 그렇게 해서 추려진 글에 보이듯 1차 합격이라는 프로필 사진으로 이미지 통과한 사람에게 2차 오디션을 보려면 1만 원이라는 금액을 받아야만 하는 겁니까? 시간이 지나서 5000원으로 할인하는 건 생각을 해도 너무해서인가요? 아니면 선심 쓰시는 건가요? 저 작품 이름이 나와서 관계자분들은 우리랑 상관없는데 명예훼손이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그러면 본인들 작품 이름을 걸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벌하시라고 알려드립니다. (글 쓰고 찾아보니 영화사 자체에서 저렇게 오디션을 보는 거네요. 왜 그러셨어요?)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들… 참 말로 표현하기 그렇지만 연기로만 1년에 300~400만 원도 못 버는 배우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진행하시는 분들. 제작사라면 월급 받고 진행비 나오시잖아요~ 캐스팅 디렉터시라면. 배우 캐스팅 관련 제작사랑 계약 관련 돈 받으시고, 또 캐스팅이 되면 배우당 수수료 개념으로 돈 받으시잖아요. 오디션 보는 정도는… 그렇게 오디션 보고 싶어서 어떻게든 오디션이라도 봐야 기회라도 가지는 배우들에게 단돈 1만 원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하십니까? 그리고 자유 연기 15초? 오디션을 아시나요? 아니면 연기를 아시나요? 15초짜리 자유 연기는 도대체 뭔가요? 한 마디 대사를 보시려고? 인사만 해도 4~5초는 지나갑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오디션인가요? 묻고 싶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 잘못된 거라면 댓글 달아주세요~ 요즘 영화판의 흐름이랑 다르다면 저도 생각을 바꿔서 따라볼게요.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제이블랙 “마리는 100점 만점에 200점, 맹목적으로 사랑해”[화보]

    제이블랙 “마리는 100점 만점에 200점, 맹목적으로 사랑해”[화보]

    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서 결혼 5년 차 부부로 달달한 매력을 보여준 댄서 부부 제이블랙과 bnt가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총 세 가지 콘셉트로 진행된 촬영에서는 모던한 화이트와 블랙 의상으로 카리스마 있는 비주얼을 자아냈다. 이어진 촬영에서는 브라운과 핑크 컬러 블록이 돋보이는 의상으로 개성 있는 무드를 연출했다. 마지막 촬영에서는 체크 슈트와 화려한 패턴의 점프 슈트에 볼드한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더해 감각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촬영이 끝나고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가식 없이 솔직한 대답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가장 먼저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방송 이후 근황에 대한 질문에 제이블랙은 “요즘엔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는 가지 못할 정도로 많이 알아봐 주셔서 너무 행복하죠. 그에 따른 다른 활동도 줄곧 이어지고 있어서 제가 진짜 원했던 것들을 이루고 있어요. 댄서가 연예인이길 바랐거든요. 그 꿈을 이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솔직한 대답을 전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땠냐는 질문에 마리는 “뮤지컬 같은 ‘댄스컬’ 공연이 있었어요. 공연 준비를 위해 여러 팀이 모였는데 거기서 만나게 됐고 눈이 맞았죠. 처음엔 살짝 내숭도 떨었어요”라고 답했고 제이블랙은 “처음에는 제가 먼저 접근을 시도했죠. 마리가 그때 당시 무릎이 안 좋아서 많이 아팠었는데 겁먹고 우는 모습을 보고 키도 크고 굉장히 강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너무 아기처럼 울어서 거기에 반전매력을 느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며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 이들에게 처음부터 존댓말 사용을 했냐고 묻자 제이블랙은 “예전에는 선후배로 만났으니까 마리는 저한테 존칭을 쓰고 저 같은 경우는 편하게 불렀어요.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제가 장난 반 애교 반 애정표현처럼 사용하던 게 습관이 돼서 지금도 그렇게 쓰고 있어요. 지금은 존댓말이 더 편해요”라고 답했다. 현재 스트릿 댄서 최정상의 위치에 있는 제이블랙은 군 제대 후 스트릿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또래 친구들이 심사위원을 볼 나이에 시작한 터라 조급함이 있었다고. 또한 “유명해질수록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지게 되니까 만족하게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더라고요. 영상에서 저를 봤을 때와 실제로 춤추는 모습을 봤을 때 혹여 차이가 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계속 따라붙기도 해요. 20대 초반 때 보다는 신체적인 트러블이 많고 아직은 춤을 출 때 어느 정도의 체력이 소진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보니 춤 문화를 더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죠”라고 덧붙였다. 춤에 관해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마리는 “어느 정도는 타고났다고 생각해요. 같은 춤을 춰도 약간은 다른, 어렸을 때부터 그런 부분을 알고 있지 않았나 싶어요”라며 솔직한 대답을 전했다. 이에 제이블랙은 “마리는 천재에요. 6살이나 어리지만, 이 나이에 명예와 재력까지 갖춘 모습을 보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감탄스럽고 부러워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춤을 추는 댄서, 안무를 창작하는 안무가 등의 활동을 하고 이들에게 두 개의 범주는 엄연히 다를 것 같다고 묻자 “단순히 댄서 겸 안무가가 아니라 안무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댄서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춤추는 것이 부족해 안무를 창작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댄서들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자극적인 동작들만 껴 맞추는 격이라 인식을 많이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며 소신있는 답변을 전하기도 했다. 파워풀한 제이블랙과 동시에 걸리시한 댄스를 선보이는 제이핑크로 활약하고 있는 제이블랙은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스러운 면이 자극적이었는지 걸리쉬 댄스라는 명칭이 붙게 되면서 이슈가 된 것 같아요. 거기에 마리가 제대로 해보라며 여장을 시켰거든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어요. 블랙은 계속 해왔던 캐릭터고 핑크는 하자마자 엄청난 화제가 됐어요. 블랙이는 그렇게 노력해도 힘들었는데 핑크는 여왕이 됐죠”라고 설명했다. 결혼 생활을 공개하는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출연 계기에 대해서 제이블랙은 “ 매일 매일 춤만 추는 게 아닌 인간적인 모습도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목소리도 들려드리고 싶고 성격도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댄서로서 사랑받는 것도 좋지만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요”라고 답했고 마리는 “두려웠던 부분도 있었지만 다양한 방면으로 리얼리티 방송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출연 결정을 하게 됐어요”라고 전했다. 리얼리티 방송 후 소감이 어땠냐고 묻자 마리는 “둘이 있을 때는 둘이니까 상관이 없는데 녹화를 하고 난 후 제 모습을 보는데 애교 부리는 부분은 정말 못 봐주겠더라고요. 그래서 카메라 있을 때는 자제 해야지 하고 많이 의식해서 하지 않은 건데 아무래도 둘이 있을 때 나오는 말투 같은 건 눈 뜨고 못 보겠더라고요. 정말 창피했어요”라며 웃음 섞인 대답을 전하기도 했다. 서로에게 점수를 주자면 각각 몇 점이냐는 질문에 제이블랙은 “마리는 당연히 100점이고 점수를 더 줘야 해요. 200점! 다시 태어나도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사랑해야 하니까 사랑하는, 맹목적인 사랑이에요”라며 애정을 과시했다. 어떤 부분에서 결혼 결심이 들었냐는 질문에 마리는 “항상 어떤 일이 있어도 휘청거리는 저와는 달리 잘 헤쳐나가고 유동적인 사고방식으로 이겨내는 법을 알더라고요.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현명하고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부분을 배우고 닮고 싶어서 결혼을 결심했죠. 어찌 보면 저와 다른 모습에 결혼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6년의 연애, 5년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서로가 결혼할 줄은 몰랐었다는 제이블랙과 마리. 이에 제이블랙은 “한 번 헤어진 적은 있었는데 제가 결혼 상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마리 생활의 패턴을 보면서 저와는 달리 약간 게을러 보였던 거죠. 그런데 만약 결혼하게 되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마리한테 헤어지자고 했죠. 그러고 나서 펑펑 울었어요. 그래서 여섯시간 만에 다시 만났죠. 저희 나름에는 너무 길었던 시간이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서로가 배려하는 법을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들의 결혼 생활을 예쁘게 봐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제이블랙은 “지금 제자들에게도 이야기 해주는 부분인데 여자의 고유한 특성이 있고 남자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특성을 이해해주라고 하고 싶어요. 남자가 갖기 힘든 관심을 가져주고, 여자 입장에서는 남자가 가진 특성을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해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서로 용납이 안 되는 서로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두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된다고 생각해요”라며 진심 어린 조언을 전하기도 했다. 파격적인 스타일에 대한 영감을 어디서 받냐는 물음에는 “저희가 하는 게 흑인들의 전유물이고 그 감성을 맞추려다 보니 흑인 헤어스타일을 하게 되더라고요. 힙합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저 또한 거기서 영감을 받죠. 예전부터 봐왔던 뮤직비디오에서 영감받기도 하고 섹시한 비주얼을 기억해뒀다 하기도 하고요. 요즘은 sns 상에 다양한 정보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스타일이 계속 생기는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앞으로 어떤 분야에 도전하고 싶냐고 묻자 제이블랙은 “저는 연기요. 막연한 꿈이지만 영화에 너무 출연해보고 싶어요. 물론 연기를 했던 사람이 아니라 섣부르게 도전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고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배워서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분야에요”라고 전했고 마리는 “모델 학생들을 오랫동안 가르쳐봤기도 했고 패션위크에서 런웨이를 보면서 좀 색다르게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었거든요. 그리고 글도 써보고 싶어요. 심심하고 울적할 때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는 에세이도 좋고.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라며 열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제자 중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마리는 “현아요. 강하고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는 아티스트 중에 한 명이에요. 프로페셔널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친구예요. 그룹 여자 아이들에 있는 전소연이라는 친구도 예뻐하는데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지만 타고난 재능이 너무 좋아서 아끼는 친구예요”라고 답했고 제이블랙은 “아이돌과 함께한 작업은 거의 없는데 얼마 전에 펜타곤 친구들이랑 작업을 한 번 했거든요. 너무 열심히 해줘서 예뻐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던 이라는 친구가 정말 잘해줘서 기억에 남아요”라고 전했다. 제2의 제이블랙과 마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냐는 물음에 마리는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노력이잖아요. 우리가 늘 진부하게 말하는 것들, 꿈과 희망 그리고 믿음 같은 것들이 정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순수하게 그런 것들을 잃지 않아야 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라고 전했고 제이블랙은 “실패해도 상관없다면 얼마든지 시작해도 된다고 봐요. 실패가 두려우면 시작하지 않는 게 맞아요. 실패할지언정 행복할 것이고 그런 정신이라면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라며 진솔한 답변을 전하기도 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김여진 “남의 불행 전시하는 대신 곁에 앉는 법 택했죠”

    김여진 “남의 불행 전시하는 대신 곁에 앉는 법 택했죠”

    감당할 수 없는 비통과 고통 앞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낼까. 완전한 용서나 애도란 가능할까.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이처럼 영원히 답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물음을 내놓고 그 답으로 가는 길을 낸다. 아이를 잃은 부모와 아이가 목숨 걸고 구한 아이. 세 사람이 겪는 감정의 굴곡을 찬찬히 따라가면서다. 영화는 이들의 불행과 죄책감을 ‘포르노’처럼 선정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대신 절제된 거리 두기와 배려의 시선을 통해 그들의 슬픔과 상실감을 조용히 쓰다듬는다. 순제작비 2억원, 손익분기점 3만명인 이 작은 영화는 그 묵직한 성취로 개봉 전부터 국내외 영화제에서 먼저 눈도장을 찍었다.지난 2월 제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됐고 지난 4월 제20회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는 신인 감독에게 주어지는 최고 작품상인 화이트멀베리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최우수장편상을 각각 받았다. 배우 김여진(46)이 ‘아이들’(2011) 이후 7년 만의 스크린 복귀를 다시 아이 잃은 엄마 역으로 하게 된 것도 영화의 그런 미덕 때문이다. “이야기의 무게에 압도될까 봐 처음엔 대본을 받고 쳐다도 안 봤어요. 그래도 대본은 보고 거절을 해야겠다 싶어 들여다보는데 마음이 출렁이더라고요. 미숙의 감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다른 사람이 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죠.”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는 미숙(김여진)과 성철(최무성)은 익사 사고로 고교생 아들 은찬을 잃었다. 슬픔을 삭이고 토해 내는 일상을 반복하던 그들은 아들이 목숨 바쳐 구한 아이 기현(성유빈)과 인연을 맺게 된다. 아들의 의사자 신청에 힘쓰던 성철은 기현의 결핍에 마음이 쓰이고, 미숙은 처음엔 거부감을 갖지만 차츰 아이를 품게 된다. 하지만 은찬의 죽음에 관한 기현의 뜻밖의 고백 이후 세 사람의 관계와 감정은 격렬하게 요동친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아이 잃은 부모의 고통은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죠. 과부, 홀아비, 고아는 있어도 아이 잃은 부모에 대한 호칭이 없는 건 그게 가장 무섭고 힘겨운 형벌이어서라고 하잖아요. 굉장히 극적으로 풀 수 있는 소재지만, 영화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캐지 않고 세 사람의 감정을 따르며 서사를 엮어 가요. 무엇을 떠올리든 영화를 보면 그 생각에 변화가 있을 거예요.”그는 촬영 전 유가족에 대한 대상화를 경계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신동석 감독에게 전했다. 유가족을 대하는 우리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내가 겪고 싶지 않은 불행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일반화가 있는 것 같아요. ‘애 잃은 부모가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저것 봐, 웃어’라면서요. 자신이 생각하는 슬픔이란 상을 그려 놓고 그 상에서 벗어나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작품에서도 힘든 일 겪은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호기심을 갖고 불행을 클로즈업해서 보여 주고요. 그렇게 남의 불행을 자극적으로 전시하는 건 안 된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렸고 그 점에 유념했죠.” 영화에서도 비통에 잠긴 부부에게 지인들은 “보상금 얼마 받았냐”고 묻고 죽음의 진실을 캐려는 부부에게 학교에서는 “아들이 피해자보다 의사자가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서둘러 사건을 봉합하려 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슬픈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슬픔이 지속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만 좀 하지’, ‘작작 좀 하지’라고 하죠.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직시하고 싶지 않은 거죠. 이 영화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잠시 곁에 앉아 있어 주는 것이면 어떨까 하고 일러 주죠. 슬픔은 위로될 수도, 작아질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거니까요.” ‘완전한 애도나 용서란 가능한가’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영화가 돌려주는 답은 감독의 말로 갈음할 수 있겠다. “사람이 그나마 윤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은 애도의 감정 덕분일지 모릅니다. 애도와 용서가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사람들이 애쓰는 것이 아예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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