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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 퀴즈’ 김민석 PD “유느님에 사람 냄새 더하니 그제야 반응 오네요”

    ‘유 퀴즈’ 김민석 PD “유느님에 사람 냄새 더하니 그제야 반응 오네요”

    4월 시즌2 재개 뒤 입소문 시청률 3% 퀴즈 개수 줄이고 시민들 이야기 담아 긴 호흡으로 새 시도하는 유재석 큰 힘 리얼리티 위해 설정·장소협찬 안 받아 “단골집처럼 프로그램 오래 남았으면…”“시청자 반응을 열심히 모니터링하는 편인데 요즘 (인기를) 체감해요. 예전에는 방송 당일에 반짝 느꼈다면 지금은 다음 방송 때까지 반응이 올라오더라고요(웃음).” 최근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NM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난 김민석(33) PD는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지난해 8월부터 방송한 그의 첫 tvN 연출작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대전 골목골목을 누빈 최신 회차에서야 시청률 3%를 처음 넘겼다. ‘국민 MC’ 유재석의 첫 tvN 출연작으로도 높은 관심을 모았지만 시청률은 그간 지지부진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겨울 공백기를 거쳐 지난 4월 시즌2로 재개한 뒤 ‘사람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는 평을 얻으며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 시즌1 때는 퀴즈에 참여하는 시민이 다섯 문제를 풀어야 상금 1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 회 수십 문제가 나왔고 퀴즈만 풀다 방송이 끝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김 PD는 “시즌1이 끝날 때쯤 어느 정도 쌓인 프로그램 인지도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이야기를 엮어 낼 수 있겠다 생각했다. 퀴즈는 한 문제로 심플하게 가면서 시민들의 이야기를 좀더 몰입해서 듣기로 했다”며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설명했다. 시즌1의 아쉬운 시청률에도 시즌2를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던 데는 퀴즈를 끌고 가는 유재석과 조세호가 힘이 됐다. 김 PD는 “재석이형은 당장의 시청률만 놓고 프로그램을 할지 말지 판단하는 분이 아니더라. 그동안 궤적을 보면 계속 새로운 것을 긴 호흡으로 한다”며 “저는 시청률이 떨어지면 시무룩해지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출연자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고 말했다.‘유재석이라는 하나의 장르’. 김 PD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이렇게 표현했다. 유재석이 오랜 기간 방송을 통해 쌓아 온 이미지, 시민들과 함께하는 순간마다 즐거워하던 모습들을 기반으로 탄생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유재석은 매회 다른 동네를 배경으로 조세호와 함께 ‘사람 여행’을 하면서 시민들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간다. KBS ‘1박 2일’ 조연출 시절 시골 할머니들과 밭일하던 에피소드를 좋아했고, ‘다큐 3일’을 즐겨 보는 김 PD의 취향도 프로그램에 반영됐다. 연예인들이 주가 되는 여러 예능과의 차이점은 무얼까. 그는 “그분들의 인생, 속이야기가 한 번의 방송으로 전해진다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며 “시민 출연자들이 방송을 보실 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편집하게 된다”고 말했다. 시민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전제로 하는 만큼 인위적인 설정은 최대한 배제한다. ‘우연함의 리얼리티’를 위해 장소 협찬도 일절 받지 않는다. 김 PD는 그러면서도 “‘자기님’(퀴즈 참여 출연자)들한테 더 좋은 걸 드릴 수 있다”는 이유로 “경품 협찬은 얼마든 환영한다”고 웃었다. ‘해피투게더’, ‘1박 2일’ 등 장수 예능에 몸담았던 김 PD는 오래 지속되는 프로그램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한다. “자주 가던 단골집이 어느 날 없어지면 허전한 것처럼,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대상의 힘과 가치를 지나고 나서 느꼈다”는 그는 “연출자가 바뀌더라도 ‘유 퀴즈 온 더 블럭’이 단골집처럼 오래오래 남아 시청자들께 위안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태극기는 보수도 아니고, 엄마부대 주옥순도 아니다

    태극기는 보수도 아니고, 엄마부대 주옥순도 아니다

    “태극기 부대를 이해해야 하나요? 이해도 안 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거리에 쏟아져나온 ‘태극기 부대’의 존재. ‘반문재인’, ‘빨갱이’, ‘반공’, ‘박근혜 석방’을 주장하는데….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일부 과격한 행동과 발언이 언론에 비치면서 젊은이들에게 태극기 부대는 마치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듯 하다. 왜 이들은 왜 극단적인 발언을 수정하지 않는 걸까. 왜 이들은 늘 화가 나 있는 걸까. 사회 주류가 태극기 부대를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그들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문제는 어르신들의 순수한 ‘애국심’, ‘외로움’을 이용하고 있는 어떤 세력일지도 모른다고.NA>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반문재인’과 ‘빨갱이 타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는 태극기 부대. 망가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이 세상이. 꼭 이 나라가 오물 속에 내가 들어앉은 심정이라. 그래서 이렇게 나온 거에요 우리는. 저도 자식이 하나 있는데 태극기 집회라 하면 눈이 쓱 돌아가요. 지금 내 자식도. 젊은 사람들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거여요.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NA> 젊은이들은 태극기 부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시민 1> 자기주장들만 길거리에서 저러고 그러고 있는 게 다른 사람한테 민폐가 되지 않을까…. 시민 2> 자기 스스로 세뇌를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자기 암시인지 몰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게 다 맞다 옳다고 여기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곽동수 시사평론가> 상대 이야기를 듣고 그럴만하다 공감하는 대신에 그래도 그렇지 얘가 나에게 맞먹었어. 본인 주장을 지르는 데만 익숙하셔서 그게 저는 ‘강압’이라는 단어가 되는 거라 보고요. 지금 그래서 태극기 부대가 나와있는 건 선과 악 구도로 보는 거죠. 우리가 옳고 우리가 경제 성장을 시켰고 그 기반에 너희가 자랐는데 왜 그 모든 것을 부정하려 드느냐. NA> 파독 광부로 청춘을 보낸 태극기 부대 어르신을 만나 박정희 대통령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파독광부 출신 태극기 집회 참가자 이재영 씨> 이 조국이 어떻게 왜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가 내가 조금 격해. 고생도 무지무지했어. (고생 많으셨죠) 광부 8000명, 간호원 12000명 가서 광부 한 100명 죽었다고. 그 죽는 것도 보고 광부 그때 일하다 올라와서 1964년. 내가 갔더니 육영수 여사, 뤼브케 대통령 광산을 간 거야 가서 일하다 말고 잠깐만 올라와 보래 땅속에서 올라오는 거야 올라와서 우리 대통령님. 서로 막 붙잡고 울고 그때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 말씀하시다가 몇 번 울고 그 옆에 육영수 여사님 도대체 눈물이 나가지고 왜? 자기 자식들이란 말이야 자식들이 와서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사지에 와서 시커멓게 해서 올라오니까….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 군사정권이었고 독재정권이었지만 이들을 어쨌든 그 박정희 정권과 함께 해서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이뤘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가족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됐을 때도 마치 우리 세대에 대한 어떤 평가 절하, 비하 이렇게 받아들였고요. 아마 이제 그 부분은 당연히 우리가 동일시라고 하는 심리 기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박근혜를 탄핵하고 박정희를 욕하는 것은 우리 산업화 세대인 우리 세대를 욕하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또 많이 화가 나셨을 거 같아요. 곽동수 시사평론가> 저희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성장을 일군 세대로 내가 거기에 기여했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을 통째로 도둑맞는 느낌이 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재영 씨> (손자들에게) 조금 얘기하려고 하면 지 엄마 아빠가 막 가로막는 거야 그리고 할머니는 왜 쟤들한테 그런 고통을 주느냐고 왜 그런 어려운 얘기 옛날 얘기하느냐고.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 지금처럼 뭔가 본인이 배신감을 느꼈고 이 사회나 가족들에 대해서 또 본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소외감 같은 것들이 느껴졌겠죠. NA> 어르신은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해준 박근혜 정권에 큰 감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재영 씨> 공개적으로 받은 거에요 전부 다 우리 광부 간호원들 박근혜 대통령이 되면서 연락이 왔더라고 나한테. NA> 하지만 태극기 부대를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합니다. 시민2> 이해가 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시민3> 말이 안 통할 것 같고 자기 할 만만 계속 하시는 그럴 거라 생각이 드는데 (만약에 저분들이 대화를 해보고 싶다. 젊은 사람들한테 이러면 대화를 할 용의가 있어요? 해보고 싶어요?) 아니요. 곽동수 시사평론가> 태극기 부대가 열심히 외치지만 그 사이에 보면 외로운 어르신들이 축제 한마당으로 나와 있는 경우가 더 많아요. 어머님들은 나오실 때 떡 사오고 케이크에 사탕에 나눠가면서 그냥 그 세대도 외롭단 말이에요…. 이재영 씨> 놀러다니기도 하지 (놀러다니시기도 하세요? 등산도 하시고요?) 일주일에 한 번 두 번은 (집회 나오시는 분들이랑 같이?) 처음에 나오지 않았지 그놈들이 근데 요새는 내가 여기 와서 너무 열정적이고 그러니까 내가 지네 뒷바라지도 좀 해주고 하니까 친구들이 이제 살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 (집회 끝나고 약주도 하고 하세요?) 그렇지 집회 끝나고. 곽동수 시사평론가> 그 어르신들의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노는 세력이 있어요. 그게 작전 세력이 아니라. 저는 정치 세력이 잘못 써서 그렇다고 보고요. 그들이 좋아서, 무식해서 쫓아가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 얘길 들어주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 사회적 약자인 노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더 가지고 또 노인에 대한 뉴스를 늘리는 것도 그분들을 위한 배려나 양보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곽동수 시사평론가> 대한민국이 뭐니뭐니해도 외국단어로 설명 안 되는 ‘정’이라는 게 있는 나라거든요. 싸우더라도 죽이지 않을 거고 태극기 어르신들 욕한다고는 하지만 백색 테러가 일어나지 않아요. 서로 양보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젊은이들은) 어르신들 체면 좀 살려 드리면서, (어르신들은) 젊은 애들한테 “미안하다 우리가 이런 세상 만들어서”라고 하는 어른들이 많아지면 그렇게 되면 더 나아질 거예요. NA> 태극기 부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김형우 기자 hwkim@seoul.co.kr
  • 김송 SNS테러, 시험관 아기 시술 고충까지 털어놨는데..왜?

    김송 SNS테러, 시험관 아기 시술 고충까지 털어놨는데..왜?

    강원래 아내인 김송이 SNS테러 소식을 전했다. 김송은 6일 자신의 SNS에 “어제 두 명의 여자들에게 인스타(인스타그램) 테러 받고 잠을 못 잤네요”라고 시작하는 글을 올렸다. 이어 “난 성격이 까탈스럽지도 않고 참 털털한데. 아…고집 쎄고 욕도 잘하지…그런데 한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편의 아내이기에 참았습니다”며 “이유가 있어서 욕먹는다면 받겠지만 어제의 경우는 일방적으로 당해서 참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차단했고요”라고 덧붙였다. 김송은 “공격 글이 오면 또 참아야겠지요? 비공개로 해야 되나…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라고 속상해했다. 게시물을 본 네티즌들은 악플 테러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힘내세요”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한편 김송은 최근 한 방송에 남편 강원래, 아들과 함께 출연해 “제가 43살에 아들을 낳았다. ‘안 낳았으면 어떡했나’는 생각이 든다”며 아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강원래도 “시험관 아기를 시도하며 아내 김송도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아들 선이 태어난 후 온 우주가 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행복한 마음을 고백했다. 김송은 “2003년 10월 12일에 결혼식을 올렸고, 병원에서 임신 성공 소식을 결혼 10주년인 2013년 10월 12일에 들었다”며 “여자에게 굉장히 복잡하고 힘든 시술이다. 여덟 번 만에 임신에 성공하게 됐다”고 시험관 아기 시술의 고충을 털어놔 눈길을 끌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웰컴2라이프’ 정지훈, 변호사→검사로 반전 활약 예고 “이번엔 막는다”

    ‘웰컴2라이프’ 정지훈, 변호사→검사로 반전 활약 예고 “이번엔 막는다”

    5일 최고 시청률 8.2%(닐슨 수도권 가구)를 찍으며 월화드라마 1위에 오른 ‘웰컴2라이프’가 숨가쁜 전개를 이어간다. ‘웰컴2라이프’ 정지훈은 오늘(6일) 밤 평행 세계에서의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한다. 현실 세계에서 비극을 맞았던 ‘서영주 살인사건’의 수사 방향을 바꾸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검사 정지훈의 활약이 예고돼 기대감을 높인다. 첫 방송부터 숨가쁘게 이어진 쾌속 전개로 월화 돌풍을 시작한 MBC 월화드라마 ‘웰컴2라이프’(연출 김근홍, 극본 유희경, 제작 김종학프로덕션)가 오늘(6일) 밤 3-4회 방송을 앞둔 가운데, 3-4회 예고 영상(https://tv.naver.com/v/9398021)이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1-2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꾸라지를 돕던 악질 변호사 이재상(정지훈 분)은 서영주(이다현 분) 납치 살인사건으로 인해 스스로의 삶을 각성했다. 이에 그는 “나 이재썅이야. 희대의 썅변. 당신 제대로 발라 줄게”라며 서영주 납치사건의 살인 교사범인 신정혜(서이숙 분)를 압박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이재상은 고의적 교통사고에 의해 평행 세계로 빨려 들어갔고, 현실 세계에서 악연이었던 라시온(임지연 분)과 부부 관계가 돼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으로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했다. 이 가운데 공개된 예고 영상 속에는 평행 세계 속 이재상의 모습이 담겨있어 눈길을 끈다. 방 안에 있는 라시온과 딸 이보나(이수아 분)의 단란한 사진을 확인하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 이거 꿈꾸고 있는 거야”라며 상황을 믿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혼란스러움이 느껴진다. 특히 이재상은 실종납치범죄 특별수사본부로 들어서 이목을 집중시킨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무슨 검사야”라는 그의 말로 하여금 평행 세계에서는 변호사가 아닌 ‘검사’임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 “서영주 씨가 살아 있다고요?”라는 이재상의 말로 하여금 현실 세계에서 후회했던 상황을 리셋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예상케 한다. 이에 이재상은 “이게 내 죄책감이 만든 꿈이라면 이번엔 반드시 막고야 말겠어”라는 단단한 의지와 함께 신정혜를 소환하고 서영주 납치사건의 수사에 착수한 데 이어, 동일한 장소에서 드럼통을 열기 직전의 상황이 포착돼 긴장감을 자아낸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맞은 라시온의 모습과 일발의 총격에 이어, 한줄기 눈물을 흘리는 이재상의 모습이 궁금증을 높인다. 뿐만 아니라 말미 “전원 집합시키세요”라며 강인한 표정을 띤 이재상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과연 그가 평행 세계에서 후회가 아닌 다른 결말을 수 있을지, 긴장감 넘치는 상황들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을 치솟게 한다. 한편, ‘웰컴2라이프’는 예열 없는 월화드라마 시청률 1위로 첫방부터 강렬한 파워를 과시했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 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5일 첫 방송된 ‘웰컴2라이프’는 수도권 시청률 7.0%, 전국 시청률 6.3%(2회 기준)를 기록하며 경쟁드라마들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월화극 시청률 1위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중요 광고 지표인 2049 역시 2.3%에 달하는 눈에 띄는 성적을 기록했다. 이렇듯 ‘웰컴2라이프’는 빠른 전개와 정지훈의 열연, 임지연의 연기 변신 등 첫방부터 호평을 얻으며 월화드라마 시장에 최대 강자로 단숨에 등극했다. 지난 1-2회의 최고의 1분은 이재상의 교통사고 장면으로, 최고 시청률 8.2%를 기록했다. 본 장면은 자신의 이득만 취하던 악질 변호사 이재상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바로잡으려던 순간 신정혜의 사주로 고의적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 이는 이재상이 평행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된 계기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렬한 충격을 선사하며 극의 전개를 더욱 쫄깃하게 만들었다. MBC 월화드라마 ‘웰컴2라이프’는 자신의 이득만 쫓던 악질 변호사가 사고로 평행 세계에 빨려 들어가 강직한 검사로 개과천선해 펼치는 로맨틱 코미디 수사물. 오늘(6일) 밤 8시 55분에 3-4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軍성폭력 고발편지, 가해자 거쳐 제게 돌아왔어요”

    “軍성폭력 고발편지, 가해자 거쳐 제게 돌아왔어요”

    피해자 10명 중 9명 “선임·간부가 가해” 고발 후 불이익 우려에 1명만 상부 보고 고발용 편지·비상전화 역할 전혀 못 해 “위계 의존 가학행위, 주변 신고 의무화”“저 있을 때는 비상전화(고발용 전화)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고발)하면 남은 군 생활을 병풍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 알았기 때문이죠.” “마음의 편지라고 하죠, ‘A병장이 저를 괴롭혔습니다’라고 고발한 편지가 가해자 본인을 거쳐 저에게 돌아오더라고요.” 군 복무 중 성폭력 피해를 당한 장병들이 피해 이후 부대의 보호나 관리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4일 한양대 상담심리대학원 서동광씨의 석사학위 논문 ‘군대 내 성폭력 피해 병사들의 경험에 관한 질적 연구’(2019)에 따르면 상명하복 문화의 군대 조직 속에서 장병들은 성폭력 범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해당 논문에는 전역 후 5년 이내의 23∼29세 군 성폭력 피해자 10명의 생생한 피해 증언이 담겼다. 심층 인터뷰를 한 피해자 10명 중 9명은 가해자가 선임 혹은 간부였다고 털어놨다. 또한 피해자 중 단 1명만 피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고발 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고, 오히려 부대 내에 알려져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음의 편지나 비상전화 등 부대 내 익명 고발 제도는 이용자가 거의 없거나 이용을 해도 2차 피해가 발생하는 등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용기 내 피해 사실을 조직에 보고해도 적절한 조치는 없었다. 피해자 A씨는 “고발 이후에도 가해자와 계속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근무하는 등 적절한 보호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피해자 다수는 “용기를 내 고발하는 경우가 생겨도 부대에서 가해자 편을 드는 등 피해자 보호에 소홀했다”고 전했다. 연구자 서씨는 “군대 내 성폭력은 나이·지위·계급 등 권력의 위계에 의존한 가학행위”라며 “친밀감·장난으로 미화하는 가해자 중심 논리는 군 위계의 엄격함 속에 더욱 뿌리 깊게 박힌다”고 분석했다. 그는 군대 내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이를 포착한 주변인들이 의무 신고하도록 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여성 만화가로 사는 법” 웹툰작가 3인 토크쇼 예정

    웹툰여성작가 3명이 토크쇼를 벌인다. 웹툰 전문 정보 플랫폼 웹툰인사이트는 오는 10일 서울 혜화역 공공그라운드에서 토크쇼 “일하는 여성입니다. 직업은 만화가고요”를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오후 3시 30분 열리는 토크쇼에는 3만부 이상 판매고를 기록하며 14쇄를 기록했고 대만·일본 등에 수출된 ‘썅년의 미학’ 민서영 작가가 차석한다. 또 소셜미디어에서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예롱쓰의 낙서만화’를 연재 중인 예롱 작가와 지난해 KBS 드라마로도 제작돼 많은 인기를 얻은 ‘당신의 하우스헬퍼’ 승정연 작가가 함께한다. 모더레이터로는 다년간 웹툰 리뷰 팟캐스트 ‘웹투니스타’를 운영해온 ‘앙팡’이 참여해 “직업으로서의 만화가”, “여성 만화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토크쇼는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 ‘공공그라운드’ 지하 1층 ‘공공스테이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토크쇼는 유료로 진행되며 웹툰인사이트 강의 신청 페이지나 온오프믹스 신청 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자세한 문의 사항은 이메일(rarcissus@ariseobject.com)로 확인이 가능하다. 해당 토크쇼를 기획한 이재민 웹툰평론가는 “웹툰작가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여성 웹툰작가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적은 게 사실”이라며, “이번 토크쇼를 통해 ‘꿈’으로서의 웹툰작가가 아니라 현실의 ‘직업’으로서의 웹툰작가, 무엇보다 여성의 삶을 통해 바라본 웹툰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웹툰인사이트에서는 작가들에게 질문을 남긴 독자들 중 2명에게 초대권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7일까지 진행한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동영상] 폭염 푹푹 찌는데 북극권에서, 쿠알라룸푸르에서 얼음 목욕

    [동영상] 폭염 푹푹 찌는데 북극권에서, 쿠알라룸푸르에서 얼음 목욕

    찌질한 정치인들이 사케를 마셨네, 청주를 마셨네 입씨름을 하는 것에 열 받으셨다고요. 4일 아침 11시가 다가오는데 서울 성동구 수은주는 섭씨 32도로 푹푹 찌고 있습니다. 시원한 동영상 하나 구경하시죠? ‘아시아 얼음사나이’를 자처하는 말레이시아 남성 앨런 통입니다. 그는 적도 근처에 살아 자연에서 얼음 목욕을 할 기회가 없답니다. 해서 북극에 가까운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북해가 빤히 보이는 산에 올라 그곳 얼음 호수에서 동영상을 촬영했습니다. 요가와 명상을 즐기는 모습도 보이네요. 그는 쿠알라룸푸르에 돌아와서도 얼음 목욕을 즐깁니다. 버킷 안에 얼음을 무려 110㎏ 부어 놓고 1분쯤 명상에 잠기다 입수하는 것입니다. 30초쯤 고비를 넘기면 몸이 완전히 이완되며 이른바 ‘내추럴 하이’가 찾아온다네요.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를 오르다 동사하는 이들이 남긴다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 스치는 것도 같습니다. 20분쯤 그러고 난 뒤 나와 온몸에 힘을 넣어 기함을 불어넣네요. 모두 힘내십시다. 물론 아무리 덥다고 함부로 따라할 일은 아닙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악플의 밤’ 송경아, 악플러 기죽이는 자존감 “내 몸매 봤니?”

    ‘악플의 밤’ 송경아, 악플러 기죽이는 자존감 “내 몸매 봤니?”

    ‘악플의 밤’ 송경아-자이언트 핑크가 악플까지 기 죽이는 걸크러시 매력을 제대로 폭발시켰다. JTBC2 ‘악플의 밤’(연출 이나라)은 스타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악플과 직접 대면해보고, 이에 대해 솔직한 속내를 밝히는 ‘악플 셀프 낭송 토크쇼’. 지난 2일(금) 방송된 7회에서는 ‘세계적인 톱모델’ 송경아와 ‘언프리티 랩스타 3’ 우승에 빛나는 자이언트 핑크가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두 사람은 자신들을 향해 장대비처럼 거침없이 쏟아지는 악플에도 초당당한 걸크러시 자태를 뽐내며 지금껏 본 적 없는 자이언트한 포용력과 당당한 자존감을 뽐냈다. 특히 외모 악플에 대한 두 사람의 솔직한 생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송경아는 “톱모델 자랑 좀 그만해라”, “신이 내린 몸매가 아니라 신이 내린 젓가락”, “포즈가 너무 과하다. 90년대 올드한 한국형 포즈”라는 악플을 향해 “인정 못한다. 제가 자랑질 하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대응하는가 하면, “마른 건 맞는데 네가 봤니 내 몸매? 나와 봐. 까보자”라는 쿨한 대처와 함께 웃음꽃을 만개해 4MC를 배꼽 잡게 만들었다. 자이언트 핑크 또한 “성형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좋다. 어쨌든 예쁘다는 뜻 아니냐”며 초긍정 마인드를 드러낸 가운데 래퍼 스윙스와 도플갱어처럼 닮았다는 남매설에 “살 빼기 전인데 광대와 브이라인까지 닮았다”는 TMI(너무 과한 정보, Too Much Information)를 전해 모두의 웃음을 유발했다. 이 날은 특히 빠르게 변하는 모델계 몸매 트렌드에 대한 설리-송경아-자이언트 핑크의 ‘러브마이셀프’가 눈길을 끌었다. 과거 종잇장처럼 말랐던 몸매가 각광받았다면, 현재는 66사이즈 모델이나 키 160cm 모델 등 각자의 개성을 중요시하게 된 것. 이에 설리는 “그런 게 너무 좋다. 예전에는 작은 옷 사이즈에 내 몸을 맞춰야 해서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고 운을 뗀 뒤 “항상 스타일리스트 언니가 옷을 가져오면 예쁜 옷을 입기 위해 내 몸은 언제나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며 녹록하지 않았던 몸매 관리 스트레스를 털어놨다. 365일 다이어트였던 자신의 삶을 언급하며 옷에 몸을 맞추는 것이 아닌 몸에 옷을 맞춰야 한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자는 마인드와 함께 트렌드가 아닌 각자의 개성 존중을 어필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송경아는 “악플에 신경쓰지 않으며 살려고 노력한다. 내가 행복하면 되니까 좋아하는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자이언트 핑크는 “오히려 속 시원하다. (악플이) 어떨 때는 칭찬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처럼 두 사람은 초지일관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이들이 왜 모덜계와 힙합계에서 ‘자이언트’로 불리게 됐는지를 엿보게 했다. 이에 각종 SNS 및 온라인에는 “자이언트 핑크 말투도, 얼굴도 매력있더라”, “송경아 왜 세계적인 탑인 줄 알겠더라”, “송경아랑 자이언트 핑크 성격도 좋고 말도 재밌게 잘하던데. 악플중에 오늘이 젤 재밌더라고요. 시간 순삭”, “송경아! 자이언트핑크! 모두 응원합니다”, “옷에 몸을 맞추는 게 아니고 몸에 옷을 맞춘다는 거. 저 말 인터넷에서 보고 인상 깊었어. 너무 당연한 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 등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내가 읽어 내가 날려 버리는 악플 낭송쇼 JTBC2 ‘악플의 밤’은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송소희 ‘도시어부’ 깜짝등장, “마침 근처에 스케줄” 여전한 미모

    송소희 ‘도시어부’ 깜짝등장, “마침 근처에 스케줄” 여전한 미모

    송소희가 ‘도시어부’에 깜짝 등장했다. 1일 방송된 채널A 예능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이하 도시어부)에서는 100회 특집 농어 참돔 대전이 펼쳐진 가운데 국악 여신 송소희가 게스트로 출연, 이경규를 흐뭇하게 했다. 이날 제작비를 털어 준비한 특별한 저녁 만찬에서는 초특급 참치해체쇼가 열렸다. 참치해체쇼가 한참 진행되던 중 송소희가 깜짝 등장, 모두를 놀라게 했다. 특히 이경규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경규는 “내가 첫회부터 얘기했다. 제발 송소희 좀 불러달라 얘기했는데도 안 오더라고”라고 말했다. 이어 김새론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하기도. 이에 송소희는 “마침 근처에 스케줄이 하나 있었다”고 출연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경규는 또 “먹을 복이 있다”, 이덕화는 “때마침 잘왔다”며 송소희를 반겼고, 송소희는 “참치를 좋아하는데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워낙 고가라”고 털어놨다. 송소희는 옆에 있는 김새론과도 인사를 나눴다. 송소희는 “김새론보다 한참 언니다. 내가 4살이나 언니다”고 말했고, 이경규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나대지 말란 얘기다”고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자아냈다. 이후 송소희는 민요 ‘군밤타령’을 부르며 ‘도시어부’의 만선을 기원해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또한 송소희는 “선생님 모두 건강하세요. 만수무강하시고요”라고 덕담을 건네 이경규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이에 이경규는 “참치 한 마리 더 잡아보자. 100회가 녹아내리네”라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아울러 제작진에게 송소희의 섭외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 = 채널A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일로 만난 사이’ 이효리, 유재석에 “키스 해봤어?”

    ‘일로 만난 사이’ 이효리, 유재석에 “키스 해봤어?”

    노동힐링 프로젝트 tvN ‘일로 만난 사이’가 첫 방송에 앞서 출연자들의 케미가 돋보이는 영상을 공개했다. 오는 24일 오후 10시40분 처음 방송되는 ‘일로 만난 사이’ 첫 회에서는 유재석과 ‘일로 만난’ 동료, 이효리 이상순 부부의 모습이 공개된다. 과거 ‘예능 남매’로 환상적인 케미를 보여준 유재석과 이효리의 만남으로 방송 전부터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유재석과 이효리가 서로를 처음 본 때를 회상하며 본심을 드러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분을 처음 본 게 20년이 지났다”고 입을 뗀 유재석은 “일할 때 그 분이 어떤 스타일이냐고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이라고 말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어 일손을 도우러 간 곳에서 나눈 대화인 듯, “오빠, 키스 해 봤어 최근에?”라고 묻는 이효리의 목소리에 넋을 놓고 듣다가 허탈한 미소를 터트리는 유재석의 모습이 폭소를 안긴다.이효리 역시 유재석에 대해 여과 없는 본심을 드러냈다. “핑클 초창기 때 만났으니까, 20년 전? 그냥 일적으로 정말 찰떡궁합이었다”고 회상하는 이효리의 얼굴 위로 “개인적으론 안 친한?”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유재석의 얼굴이 겹쳐진다. 특히 이효리는 “일 외에는 연락해본 적 없어요.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라고 덧붙여 진정 ‘일로 만난 사이’의 쿨한 매력을 뿜어낸다. 반면 사랑꾼으로 알려진 이효리 이상순 부부의 대화에서는 ‘일로 만난 사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속마음이 터져나와 훈훈함을 전한다. “소개팅으로 만났을 때는 잘 안됐는데”라는 이효리의 말에 이상순은 “슈퍼스타였으니까, 딱 그런 감정밖에는 없었는데”라며 회상하다, 이내 “상냥하고 친절한 (효리)”, “다정하고 포근한 (상순)”이라며 애정표현을 주고받아 부러움을 산다. ‘효리네 민박’ 시리즈를 연출한 정효민 PD가 tvN에서 처음 선보이는 예능 ‘일로 만난 사이’는 유재석이 매회 스타 게스트와 함께 ‘끈적이지 않게, 쿨하게, 일로 만난 사이끼리’ 일손이 부족한 곳을 찾아가 땀흘려 일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7월 이효리 이상순 부부가 첫 동료로 합류해 촬영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유재석과 이들의 케미가 재미를 더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편, tvN ‘일로 만난 사이’는 오는 24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10시40분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연주 끝나자마자 박수? 딱 걸렸네요 ‘클·알·못’

    연주 끝나자마자 박수? 딱 걸렸네요 ‘클·알·못’

    클래식은 유난히 편견이 많은 문화 영역이다. ‘지루하고 어렵다’ 혹은 ‘일부 계층의 고급 문화’, 심지어 ‘허세와 허영의 문화’라는 시각도 있다. 최근 몇 년간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조성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등 스타 연주자의 등장으로 클래식 공연 관객은 지속적으로 늘었지만, 클래식은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고 어려워 소수층 문화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런 편견을 깨고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유튜브·페이스북·팟캐스트로 뛰어든 ‘클래식 크리에이터 3인방’을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26일 만났다. -짤막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나웅준(나) “트럼펫을 연주하고 클래식 콘서트 가이드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 선정 ‘2019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 퇴근길 클래식 수업’을 쓴 나웅준입니다. 하하하~ 팟캐스트 ‘지루한 클래식’과 ‘클래식 사용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수민(이) “그림 그리는 바이올리니스트, 유튜브 채널 ‘클언니’를 운영하고 있는 이수민입니다. 클래식을 잘 모르지만 즐기고픈 사람들의 모임의 리더도 맡고 있습니다.” 안두현(안) “본업은 교향악단 지휘자이고요, 페이스북 ‘클래식에 미치다’ 페이지를 운영하고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2년 정도 진행한 안두현입니다.” -어떻게, 왜 온오프 방송을 시작했는지요. 나 “기존 방송이나 매체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들을 하고 싶었어요. 클래식계의 문제점도 얘기하고 싶었고…. 연주자도 잘 모르는 곡은 지루하고 어려운 게 사실인데, 그걸 어떻게든 쉽고 재미있는 것으로 포장하려는 분위기더라고요. 그래서 반대로 ‘지루한 클래식’을 새롭게 풀어 보자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이 “처음에는 저를 홍보할 목적으로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아직 얼마 안 됐지만 2030 여성층에서 주로 보시더라고요. 3분 내외 짧은 영상에 제 일상을 담아서,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을 쉽게 전달하고 있죠.” 안 “페이스북은 같이 오케스트라 했던 친구들과 음악 정보 공유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구독자가 확 늘더라고요. 그래서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관심을 갖고 좋아하게 될까를 생각하면서 키워 왔습니다.” -사실 클래식이 어려운 건, 다소 경직된 공연 에티켓 때문 아닌가요. 이 “그렇죠. 청중의 태도가 연주회에 영향을 많이 주기 때문에 사실 필요한 부분이에요. 연주하면서 객석이 다 보이거든요. 휴대전화를 본다거나 산만한 행동을 한다거나 하면 연주에 집중하기 어려워요. 복장은, 너무 캐주얼하지 않은 정도만 갖춰도 돼요.” 나 “연주회장에 가면 ‘안다 박수’와 ‘눈치 박수’가 있어요. 보통 긴 교향곡이 끝나는 지점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 있게 박수를 치면, 다른 관객들이 따라서 박수를 치거든요. 그런데 너무 확신에 차서 연주가 끝나자마자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치는 것도 좋지는 않아요. 연주가 끝나도 몇 초간의 침묵은 연주의 연장선이거든요. 지휘자와 연주자가 인사할 때 박수 치는 게 가장 좋습니다.” -클래식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요. 나 “클래식은 단순히 쉽다, 어렵다 단정 지을 게 아닌 그냥 음악인거죠. 대중가요에 익순한 사람들도 인디밴드 음악을 처음 들으면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몇백년 전 유럽에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음악인데,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안 변하잖아요. 그냥 다양한 음악 중 하나로 느끼시면 좋겠어요.” 안 “일부러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클래식은 영화나 광고를 통해 알게 모르게 많이 퍼져 있거든요. 쉽고 귀에 익숙한 음악부터 듣다 보면 더 이해하게 되고 더 깊게 들게 될 겁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온실 야간 산책 4분 만에 매진…“식물원을 ‘핫플’로”

    온실 야간 산책 4분 만에 매진…“식물원을 ‘핫플’로”

    330만 방문·SNS 해시태그 7만건 넘겨 희귀식물 개벚지나무 2년간 뒤져 찾기도 미중 협력… 식물 8000여종으로 늘릴 것“부처님이 득도하셨다는 인도 보리수 앞에 서면 어머니들이 합장을 하며 좋아하세요. 가정에서 고무나무를 키우는 분들은 500년 된 8m 높이의 거대한 벵갈고무나무를 보면서 ‘이게 그 나무가 맞느냐’며 화들짝 놀라시고요. 시각장애인 분들은 카람볼라, 망고 등 열매 모형을 만지고 냄새를 맡게 도와 드리면 보지 못하셔도 감탄하곤 하시죠. 이색적인 식물과 교감하며 즐거워하고 치유받는 시민들을 보며 365일 볼거리가 풍성한 식물원으로 키워 내야겠다 다짐합니다.” 국내 첫 ‘공원 속 식물원’(50만 4000㎡)으로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둥지를 튼 서울식물원이 지난해 10월 이후 현재까지 330만명의 발길을 끌어 모으며 새 명소로 뜨고 있다.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임시 개방 기간에 256만 5000여명이, 지난 5월 정식 개원 이후 지난 28일까지는 80만 7000여명이 다녀갔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서울식물원)도 7만건을 넘겼다. 여름 특별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온실 야간 산책’(8월 7~10일)은 지난 24일 예약 사이트를 연 지 4분 만에 2000명 분의 예약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1월부터 서울식물원 탄생을 이끈 이원영(60) 서울식물원장은 “개원 이후 당초 예상보다 10배 가까운 인파가 몰릴 정도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 우리도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워싱턴, 런던, 파리, 도쿄, 베이징 등 세계 10대 도시 가운데 유일하게 식물원이 없던 서울에 생긴 첫 대규모 식물원”이라면서 “유려한 경관, 안전하고 편리하고 관람 동선뿐 아니라 다양하고 특색 있는 식물을 시민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멸종위기 식물, 희귀식물 등 일반에서 찾기 어려운 식물은 식물원 조성 중에도 끊임없이 수소문해 구해왔다. 함경남북도, 강원도 백두대산 등에 자생하는 개벚지나무는 지난 2년간 국내 농장을 다 뒤져 어렵게 찾은 결실이다. 그 결과 날개하늘나리, 섬시호, 전주물꼬리풀 등 국내 멸종위기 식물 14종과 국제적 멸종 위기 식물 42종을 식물원 안에 품을 수 있었다. 서울식물원은 진화를 거듭해나갈 예정이다. 이 원장은 “미국 뉴욕식물원, 중국 상하이 천산식물원 등 국내외 기관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현재 3100여종의 식물을 10년 안에 8000여종으로 대폭 늘릴 예정이다. 또 2028년쯤 서남물재생센터의 물재생시설 지하화로 상부가 공원으로 바뀌면 이를 식물원과 연결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1983년 도봉구청 주임(7급)으로 시작해 35년간 녹지 분야 공무원으로 일해 온 이 원장은 서울숲공원관리소장(2009~2011), 서울시 조경과장(2013~2017)을 거쳤다. 그는 30년 넘게 녹지 분야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마지막으로 이 귀한 공간에 다 써보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는 “그간 식물원, 수목원은 산간벽지에 집중돼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는데 도심에서 다채로운 식물을 보며 ‘외국 여행 온 것 같다’고 기뻐하는 어르신, 식물과 더불어 뛰어노는 어린이들을 보면 ‘이 분야에 몸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소박한 풀꽃처럼 웃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국제대회 우승해도 정부는 냉담합니다… 청중 호응은 뜨겁죠”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국제대회 우승해도 정부는 냉담합니다… 청중 호응은 뜨겁죠”

    김지연 지휘자, 아코디언 오케스트라 현실 말하다“국제대회 우승 이후 많이 바빠졌느냐고요? 아코디언에 대한 중앙 정부나 지자체의 인식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요. 오히려 우리 공연을 한번이라도 봤던 시민들의 인식이 확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런 분들의 성원 때문에 누적된 적자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3월 러시아에서 열린 ‘국제 아코디언 콩쿠르’에서 오케스트라 부문에서 1위로 입상한 김지연 상임 지휘자의 말이 다소 뜻밖입니다. 그가 이끌던 ‘김지연 아코디언 팝스 오케스트라’는 국제대회 우승 이후 연주 일정이 빡빡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아코디언 오케스트라 연습실로 찾아 갔습니다. 연습실에 들어서자 김지연 지휘자가 커피를 내리려 물을 끓였습니다. 그 동안 기자는 실내를 한 번 둘러 보았습니다. 보면대와 의자가 한쪽 구석에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아코디언이 들어 있는 작은 가방들도 나란히 있었습니다. 한쪽 벽에는 그동안 했던 공연포스터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단원 30명이 한꺼번에 앉아 연습하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였습니다. 연습실에서 아코디언 오케스트라의 현실을 살짝 엿본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 단원 수급이죠국내 대학에는 아코디언 전공 없어아코디언 만의 오케스트라 구성돼”김 지휘자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일까요? 이를 첫 질문으로 물어봤더니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단원 수급이 가장 힘듭니다. 단원이 개인 사정으로 쉰다든지 외국에 나가면 갑자기 공백이 생깁니다. 그러면 30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데 빈자리를 채울 단원을 어디에서 데려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 단원 대다수는 제가 아코디언을 가르쳐 키운 사람들이거든요. 국내 대학에서 아코디언 전공이라도 있으면 조금 활성화됐을 텐데요.” 김 지휘자의 목소리는 담담합니다. 오케스트라를 생각하면 피아노·바이올린·오보에 등 여러 관악기와 현악기가 어우러진 합주가 연상됩니다. 그런데 아코디언 하나의 악기만으로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런 궁금증에 대해 김 지휘자는 “아코디언은 바이올린·바순·클라리넷·색소폰 등 여러 종류의 악기 소리를 낼 수 있기에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능합니다”고 설명합니다. “아코디언 한 악기에서 여러 악기 소리뿐만 아니라 저음·중음·고음·중저음 소리까지 낼 수 있어요. 그것도 전기를 사용한 합성 소리가 아니라 풍부하고 애절한 자연의 소리를 냅니다.” 이 오케스트라 실력이야 음악 선진국 유럽에서 최우수상을 줬으니 입증이 된 셈입니다. 김 지휘자는 아코디언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는 해마다 어머님 기일에는 산소에 가서 추모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마다 제가 아코디언을 매고 가서 연주해 드립니다. 10년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피아노 전공자라면 어떻게 들고 갈 수 있었겠어요? 아코디언이니까 아무 곳이나 들고 가 연주할 수 있고, 바이올린이나 색소폰과는 달리 반주도 되거든요.” “아코디언 매력은 아무 곳이나 연주 가능‘허그’ 연주...연주자 가슴의 울림이 소리로양손 따로따로 사용... 치매 예방에 도움”그렇지만 아코디언의 진짜 매력은 다른 데 있다고 합니다. “아코디언은 인간의 몸에 가장 가까이에서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가슴으로 안고 하는 악기잖아요. 보통 ‘허그’라고 하는데, 사랑이나 관심이 없으면 허그할 수 없잖아요. 연주자의 가슴에서 나는 울림이 아코디언 소리로 표현됩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있었으나 젊은 시절 사정상 하지 못했던 이들이 퇴직 이후 많이 배우러 온다고 살짝 귀띔합니다. 노후를 대비해서 좋은 악기라고 자랑합니다. 아코디언은 왼손과 오른손을 전혀 다르게 사용하는 악기이다 보니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추켜세웁니다. “한번은 한 노신사가 아코디언을 배우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연세를 여쭈니 94세라고 하더라고요. 깜짝 놀라 ‘왜, 배우시려 하느냐’고 하니 이분이 ‘미국 의학지를 보는데 아코디언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세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도 모르는,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분들도 와서 배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 지휘자는 “아코디언은 절대로 쉽게 배울 수 있는 악기는 아닙니다”고 단언합니다. 아코디언은 옛날 할아버지들이 시골 장터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엔 “손풍금”이라고 하였지요. 고단한 삶은 지친 동네 어르신들이 딴청을 피우시는 듯 하면서도 애절한 아코디언 멜로디에 귀 기울이셨죠. 그리곤 유흥가 뒷골목에서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할아버지 다수는 타고난 귀와 손 감각으로 아코디언을 익혔지만, 음표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지요. 가만 보니 젊은 아코디언 연주자는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 지휘자는 어떻게 아코디언을 배웠을까요? “20년 전쯤입니다. 그때 제가 30대 후반이었는데 교회의 한 지인이 ‘아코디언 선생님이 너무 부족하니 한번 배워서 아코디언 선생님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제가 아코디언과 비슷한 오르간을 배운 상태였습니다. 제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도 처음 한 5년 정도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들이나 하는 악기를 왜 배우느냐’는 말을 들을까 봐 쑥스러웠던 겁니다. 이게 당시 아코디언에 대한 제 인식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시부야음악원에 유학, 아코디언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왔답니다. “할아버지들 길거리서 연주하는 악기 치부30대 시절, 아코디언 연주한다 말도 못해고급 무대 서면 당당할 것에 클래식도 연주아코디언 인식 개선 위해 오케스트라 창단”그의 설명이 계속됩니다. “어느 날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악기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아코디언은 하면 할수록 어려우면서 매력이 있는 거예요. 이 멀쩡하고 매력적인 악기를 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할까 생각하다 고급화시켜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쑥스럽다는 것 자체가 제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길거리가 아닌 고급진 무대에 올라가면 빛날 것이라는 생각에 클래식을 연주하고, 결국 오케스트라 창단까지 이어졌습니다.” “2015년 11월에 창단했습니다. 창단하면서 무료 공연을 절대로 하지 말고 퀄리티를 유지하려고 유료공연을 하자고 다짐하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창단 기념 공연으로 디너쇼 공연을 했는데 표가 매진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지인들을 모두 격려차 와 주신 덕분이었지요. 그때 저녁 식사 값이 5만 5000원이었는데 티켓을 7만원에 팔았습니다. 홍보와 조명 등등의 비용을 제하니 적자가 났습니다. 첫 공연부터 마이너스 행진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코디언 오케스트라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 보니 관객 동원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중앙 정부와 공연장을 보유한 지방자치단체에도 지원이나 초청공연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지휘봉을 내던지고싶을 만큼 냉담했습니다. 나중에 선정된 단체들을 보니 다 국가와 이런저런 연관이 있더라고요. 각설이나 품바타령, 탈북 연주자도 지원하던데…. 지금은 사기업에 후원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이름있는 부자 단체뿐만 아니라 가난한 우리도 도와달라고 읍소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유료 공연이기는 하지만 해당 자치단체의 장애인이나 차상위계층 불우이웃에 대해서는 우리가 표를 사는 형식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아코디언 인지도 올릴 공연 지원받고자중앙정부, 지자체 모두 외면하고 냉대해‘가난한 우리 도와주세요’ 기업에 노크 中청충 호응 뜨거워...공연 계속하는 원동력”계속되는 적자를 버텨낼 장사(壯士)가 있을까요. “적자 공연인데 관객마저 외면하면 힘이 빠져서 못할 텐데, 관객들이 자꾸 성원합니다. 공연장 열기는 놀라울만큼 뜨겁습니다. 작년 11월 서울에서 공연할 때 멀리 제주도와 목포에서도 왔습니다. 그리곤 다음 공연은 언제 어디에서 하느냐고 묻습니다. 2016년 4월 공연을 마치고 로비에서 청중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신사가 제게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이렇게 좋은 공연을 우리 순천시민이 외면해서 오지 않고 덩그렇게 비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시면 제가 직접 홍보해서 객석을 다 채우도록 하겠습니다’고 말씀했어요. 이런 분들의 성원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콘서트이니깐요.” 적자는 김 지휘자가 호주머니를 털어서 메우고 있다 합니다. 김 지휘자는 앞으로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이랍니다. 남성라면 70세까지 지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성이어서 앞으로 한 5년 정도 더 무대에서 지휘봉을 잡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달린다는 겁니다. “친구들이 제 공연을 보고선 ‘넌 지휘를 하는 게 아니라 춤을 춘다’고 합니다. 신이 나서 몰입하다 보면 제가 그렇게 되나 봐요. 하이힐을 신고 2시간30분 동안 지휘하면 녹초가 됩니다. 우리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지휘하다 그 가사와 저 자신, 공연이 끝나는 느낌이 오버랩되면서 그냥 넘기지 못하고 그만 울컥한답니다. “너무 울어서 관객들에게 실례가 될까 봐 이젠 황성옛터를 레퍼토리에서 빼버렸습니다.” 가장 큰 꿈은 아코디언의 인지도가 높아져 후임 지휘자에게 잘 넘겨주는 것입니다. “제 소원은 모든 단원에게 출연료를 지급하고, 저도 받고 싶습니다. 물론 개런티를 받는 단원도 몇 명 있습니다만 이분들은 어쩔 수 없이 음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제 주머니를 털어서 드리다 보니 아주 넉넉하게 드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단원 대다수가 스스로 좋아서 개런티 없이 연주하거든요. 이 악기 무게가 12~13kg입니다. 150분 동안 꼼짝 않고 공연하기가 버거워서 그만하시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제가 계속 나오시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죠.” 9월로 예정된 대전공연도 티켓판매가 걱정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클래식 음악계가 요즘 좋지 못합니다. 경기도 좋지 않은데 인지도가 낮아서… 그러나 청중들은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하이힐 신고 150분 지휘하면 체력 고갈친구들, 무대에서 지휘 대신 춤춘다 놀려단원에 개런티 지급이 소원...나도 받고파수익 없으면 오케스트라 유지될지 고민”이렇게 말하는 순간 한 여성이 김 지휘자에게 눈인사하며 들어와 작은 옆방으로 갔습니다. “모 대학교 교수인데, 정년이 2~3년 남았다고 합니다. 정년 후를 대비해서 아코디언을 배우러 오고 있습니다.” 잠시 뒤 아코디언 소리가 문밖으로 살금살금 흘러나왔습니다. 국내에서 하나뿐인 아코디언 오케스트라의 명운이 우리의 음악 현실을 말하는듯합니다. “요즘엔 아코디언 인지도가 좋아져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온 젊은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 개런티를 받게 되면 젊은 연주자가 받아서 이 오케스트라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수익이 나지 않으면 저처럼 사명감만 가지고 아코디언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가라고 할 수가 있나요.” 김 지휘자가 자신에게 푸념같이 말한 되물음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동안에도 귓가에 맴돕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클래식 연주자도 모르는 곡은 지루하고 졸려…‘안다 박수’도 민폐”

    “클래식 연주자도 모르는 곡은 지루하고 졸려…‘안다 박수’도 민폐”

    클래식은 유난히 편견이 많은 문화 영역이다. ‘지루하고 어렵다’ 혹은 ‘일부 계층의 고급 문화’, 심지어 ‘허세와 허영의 문화’라는 시각도 있다. 최근 몇년 간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조성진, 비올리니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등 스타 연주자의 등장으로 클래식 공연 관객은 지속적으로 늘었지만, 클래식은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고 어려운 소수층 문화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런 편견을 깨고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유튜브·페이스북·팟캐스트로 뛰어든 ‘클래식 크리에이터 3인방’을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26일 만났다.-짤막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나웅준 “트럼펫을 연주하고 클래식 콘서트 가이드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 선정 ‘2019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퇴근길 클래식 수업’을 쓴 나웅준입니다. 하하하~ 팟캐스트 ‘지루한 클래식’과 ‘클래식 사용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수민 “그림 그리는 바이올리니스트, 유튜브 채널 ‘클언니’를 운영하고 있는 이수민입니다. 클래식을 잘 모르지만 즐기고픈 사람들의 모임의 리더도 맡고 있습니다.” 안두현 “본업은 교향악단 지휘자이고요, 페이스북 ‘클래식에 미치다’ 페이지를 운영하고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2년 정도 진행한 안두현입니다. -언제, 어떻게 클래식을 접하게 됐나요. 나웅준 “중학교 때 학교 서클 중에 관악부가 있었어요. 그냥 그때 음악이 좋더라고요. 트럼펫은 음악 교과서에 있는 악기 사진 중에 그냥 트럼펫 사진이 제 눈에 확 띄었어요. 그렇게 트럼펫 연주에 빠지면서 클래식 음악을 시작했죠. 집에선 음악을 반대하셨었고, 특히 당시 트럼펫은 ‘밤무대’ 이미지가 강해 싫어하셨죠.” 이수민 “저는 반대로 집안 영향이 컸어요. 어머니가 피아노를 전공하셨었는데 ‘딸이면 바이올린이다’ 이렇게 마치 모태신앙처럼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안두현 “저는 음악하는 일반적인 친구들과 다르게 인문계 고교를 다니다가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본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대한 책에 빠지면서 지휘자의 꿈을 키웠어요. 한국에서는 오케스트라 지휘에 대해 배우기 어려워 모스크바로 유학 가서 배우고 왔습니다.” -어떻게, 왜 온오프 방송을 시작했는지. 나웅준 “기존 방송이나 매체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들을 하고 싶었어요. 클래식계의 문제점도 얘기하고 싶었고…. 연주자도 잘 모르는 곡은 지루하고 어려운 게 사실인데, 그걸 어떻게든 쉽고 재미있는 것으로 포장하려는 분위기더라고요. 그래서 반대로 ‘지루한 클래식’을 새롭게 풀어보자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이수민 “처음에는 저를 홍보할 목적으로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아직 얼마 안 됐지만 2030 여성층에서 주로 보시더라고요. 3분 내외 짧은 영상에 제 일상을 담아서,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을 쉽게 전달하고 있죠.” 안두현 “페이스북은 같이 오케스트라 했던 친구들과 음악 정보 공유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구독자가 확 늘더라고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하면 더 관심을 갖고 좋아하게 될까를 생각하면서 키워왔습니다.” -사실 클래식이 어려운 건, 다소 경직된 공연 에티켓 때문 아닌가요. 이수민 “그렇죠. 청중의 태도가 연주회에 영향을 많이 주기 때문에 사실 필요한 부분이에요. 연주하면서 객석 다 보이거든요. 핸드폰을 본다거나 산만한 행동을 한다거나 하면 연주에 집중하기 어려워요. 복장은, 너무 캐주얼하지 않은 정도만 갖춰도 돼요.” 나웅준 “연주회장 가면 ‘안다 박수’와 ‘눈치 박수’가 있어요. 보통 긴 교향곡이 끝나는 지점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있게 박수를 치면, 다른 관객들이 따라서 박수를 치거든요. 그런데 너무 확신에 차서 연주가 끝나자마자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치는 것도 좋지는 않아요. 연주가 끝나도 몇 초간의 침묵도 연주의 연장선이거든요. 지휘자와 연주자가 인사할 때 박수 치는 게 가장 좋습니다.” -클래식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요. 나웅준 “클래식은 단순히 쉽다, 어렵다 단정 지을 게 아닌 그냥 음악인 거죠. 대중가요에 익순한 사람들도 인디밴드 음악 처음 들으면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몇백년 전 유럽에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음악인데,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안 변하잖아요. 그냥 다양한 음악 중 하나로 느끼시면 좋겠어요.” 안두현 “일부러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클래식은 영화나 광고를 통해 알게 모르게 많이 퍼져있거든요. 쉽고 귀에 익숙한 음악부터 듣다보면 더 이해하게 되고 더 깊게 들게 될 겁니다.” -셋이 함께 준비 중인 공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수민 “‘청소년을 위한 클래식 사용법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8월 24일 예술의전당에서 하는데 재치있고 개성 넘치는 악장에 이야기가 곁들여진 공연이에요. 굉장히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이 될 거예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꼰대님들, 할 말 있어요’… 티저광고 첫 번째 편

    ‘꼰대님들, 할 말 있어요’… 티저광고 첫 번째 편

    지난 5일, 한 신문에 궁금증을 유발하는 광고가 실렸고 이후 여러 매체에 같은 광고가 등장했다. 어느 한 기업이 진행하고 있는 티저 광고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이다. ‘꼰대에게 말하다’라는 헤드라인의 이 광고는 ‘힘내라고요? 다 잘될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라는 어투로 시작해 ‘잠깐만 기다리세요, 꼰대님들께 할 말 있으니까’라는 다소 날 선 카피가 쓰여있다. ‘함께 속으로 쌓아놓고 있던 말이나 세상에 소리쳐 하고 싶은 얘기를 자유롭게 적어주면 신문광고에 실어준다’는 글귀와 함께 웹사이트(www.youngspeak.co.kr) 주소도 광고 하단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아이디·이메일을 입력 후 10대에서 30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사이트에는 ‘나이는 XX로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분노에 찬 외침에서부터 ‘당신처럼 될까 봐 두렵다’는 자조 섞인 글까지 젊은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좀 뛸 줄 아는 그녀…소시 말고, 배우 윤아도 괜찮네

    좀 뛸 줄 아는 그녀…소시 말고, 배우 윤아도 괜찮네

    조정석과 ‘재난 탈출 액션’ 연기 호평 “가수 활동 때 와이어 공연 경험 도움 전력 질주 많아 ‘컷’ 동시에 주저앉아”“소녀시대(소시) 활동을 하면서 공연장에서 짧게라도 와이어를 타 봤던 것들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온전히 제 힘으로 전력을 다해 달리는 신들이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는 ‘컷’ 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주저앉아 버렸죠.” 지난 17일 영화 ‘엑시트’의 언론시사회에서는 주연 임윤아(29)에 대한 상찬이 쏟아졌다. ‘엑시트’는 청년 백수 용남(조정석)과 연회장 직원으로 취업한 대학 산악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가 용남의 어머니(고두심)의 칠순 잔치에서 만나 도심 전체에 퍼진 유독가스를 피해 모든 체력과 스킬을 동원해 고군분투하는 스토리다. 시종일관 달리고, 오르는 좌충우돌 ‘재난 탈출 액션’에서 조정석의 열연은 누구나 예측 가능했지만, 윤아에 대해서는 ‘판단 보류’였다. 그런데 그 긴 팔다리로 휙휙 날아다니며 시시각각 적확한 상황 판단을 내리는 한편 입꼬리가 휘어지도록 짠내 나게 우는 모습에, ‘배우 윤아’도 괜찮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아에게 ‘효리네민박’ 속 막힌 변기도 척척 뚫던 직원 윤아가 생각난다고 서두를 띄우자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으니 배역에 끌려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호응했다. “그래도 의주가 훨씬 저보다 더 용감하고 체력도 강하고…. 저는 생각만 하는 걸 의주는 직접 실행하죠. 닮고 싶은 부분이 많은 의주예요.” 영화 속 윤아는 잘도 달린다. 함께 달리던 조정석이 “너 100m 몇 초냐”고 묻는 게 대사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학창 시절, 계주 대표까지는 못해도 대표 후보 정도는 할 실력이었단다. “촬영 두세 달 전쯤부터 정석 오빠랑 연습장에 가서 김자비 선수한테 클라이밍 훈련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액션 스쿨에도 가서 건물 오르는 신 등은 미리미리 연습을 했어요.” 용남이 코를 납작하게 하는 과거 클라이밍 회상 신에도 직접 참여했다. 대역을 쓰기도 했지만 윤아 뒤태가 더 많이 나오는 이유다. 윤아는 ‘엑시트’를 포함해 여름 극장가에서 주목받는 한국영화 4편(‘나랏말싸미’·‘사자’·‘봉오동전투’)의 주연 중 홍일점이다. 심지어 영화로서는 첫 주연작. 부담이 클 법하다. “고생했던 스태프들 생각하면 더 잘됐으면 좋겠다”는 그는 “차트나 순위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라며 ‘13년차 스타’의 평정심을 내보였다. “작품을 고를 때나 곡 작업을 할 때 오로지 그 일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뭐가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는 그는 이젠 배우로서 차근차근 성장하는 모습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숨 막힌 검열의 시대가 낳은 ‘별들의 고향’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숨 막힌 검열의 시대가 낳은 ‘별들의 고향’

    1970년대는 한국영화가 침체와 불황의 긴 터널로 진입하는 시기였다. 1971년 202편의 제작편수를 유지했던 한국영화는 1972년 122편으로 급감했고, 이후 한국영화는 텔레비전과 대작 외국영화 사이에 끼어 호스티스 멜로와 무협 액션 같은 저예산 장르로 연명하게 된다. 1970년대가 극심한 암흑의 시대였다고 해서 청년들의 에너지와 희망마저 꺾을 수는 없었고, 영화계는 이를 포착해 작은 위안들을 발신했다. 서구영화의 뉴웨이브 정신과 교감하는 청년 감독들이 새로운 감수성과 신선한 영상감각을 앞세운 영화들로 젊은 관객들과 만났다. 그 포문은 이장호가 열었다. 그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은 46만 관객이라는 초유의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산업적 활로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청년영화’라는 새로운 방향까지 제시했다.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이 그 뒤를 이었고, 이들을 포함한 젊은 감독들은 청년영화집단 ‘영상시대’를 결성해 한국의 뉴시네마운동을 선포한다. 이번 연재는 1970년대 한국영화가 쇠퇴하게 된 배경 그리고 ‘별들의 고향’이라는 기념비적인 데뷔작을 선보인 이장호 감독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국책영화 만들어 외화 쿼터 따낼 방법에 골몰 1972년 10월 유신정권이 들어섰고 영화계 역시 더욱 경직되어 갔다. 그리고 1973년 2월 유신 체제를 반영한 영화법 4차 개정이 있었다. 영화 제작을 하려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제작업과 수입업이 다시 통합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1973년 시점 20개였던 제작사는 12개로 줄었고, 허가받은 12개사에 제작권을 부여해 연간 제작편수를 130편으로 묶었다. 50편 내외였던 외국영화 수입권도 12개 제작사만 나눠 가졌다. 국산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받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자들은 좋은 영화를 만들기보다 저예산으로 빨리 만들 수 있으면서 관객들의 호기심과 볼거리를 채울 수 있는 영화들로 눈을 돌렸다. 특히 대중적 신파 감성에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하는 호스티스 영화, 깡패, 스파이, 무협 등으로 분화한 액션영화가 유행했던 이유다. 물론 외화 쿼터를 더 따낼 방법 역시 존재했다. 정부가 제시하는 ‘국책영화’, ‘우수영화’ 같은 기준에 부합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성웅 이순신’(이규웅, 1971)을 위시로 박정희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획된 ‘성웅사업’ 영화들, 문학을 영상으로 옮긴 ‘무녀도’(최하원, 1972) 같은 문예영화들, ‘진짜진짜 잊지 마’(문여송, 1976)로 시작한 ‘진짜진짜’ 시리즈, ‘고교얄개’(석래명, 1976)가 대표하는 ‘얄개’ 시리즈 등 하이틴영화들이 그 대상이 됐다. ●깡패·스파이·호스티스 영화 붐으로 이어져 4차 영화법 개정으로 설립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 역시 국책영화 제작을 주도했다. 국가가 직접 나서 ‘증언’(임권택, 1973) 등의 전쟁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같은 새마을영화를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영화들이 실질적인 국책 전파에 기능했는지는 의문이다. 1960년대부터 이어온 국가 주도의 영화 정책은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것이었고, 1970년대는 그 폐해가 더 커져 갔다. 흑백이긴 했지만 텔레비전 보급률이 급증하면서, 반대로 전국의 영화관수와 관객수는 급격히 줄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외화 한편을 수입하기 위해 졸속으로 제작된 영화들과 상업성이 없어 며칠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마는 우수영화들에 흥미를 잃어 갔다. 이러한 침체 일로의 영화계에 일순간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바로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이었다. 1945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장호는 영화 검열관이었던 부친 덕에 어릴 때부터 영화와 가깝게 지냈다. 아버지가 일하던 검열실에 따라가 채플린 영화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을 보기도 했고, 집에서는 아버지가 가져온 필름을 만지고 놀았다. 그의 영화적 원경험이었던 셈이다. 학창 시절 문학에 탐닉했던 그는 홍익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친은 방황하던 그를 ‘신필림’으로 데려간다. 애초 배우를 희망했지만 신상옥 감독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는 신상옥 감독의 ‘무숙자’(1968)를 비롯해 신필림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도에 연출부를 그만두기도 했고, 극단 일도 하면서 자신만의 일을 모색하는 쪽이었다.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197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을 치열한 노력 끝에 확보한 것이다. 사실 소설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역시 감독 데뷔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덜컥 판권을 내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장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최인호의 집에 던져놓고 오는 막무가내식 고집을 부리며 결국 승낙을 받아낸다. 하지만 이후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도제 시스템이 확고하던 시절, 신필림에서 연출권을 확보하기 힘들 것을 직감한 그는 도망치듯 떠나 하길종 감독이 소개한 화천공사로 옮긴다. 연출부 제2 조수 출신의 영화청년이 일순간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여하튼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데뷔작 ‘별들의 고향’이 46만 관객을 동원하는 역대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이장호는 일약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물론 이 기록은 ‘1000만 영화’ 시대인 지금으로 치면 대단치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영화 개봉이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인파로 세 달 내내 이 영화만 상영했던 결과인 것이다. 개봉관은 바로 을지로 4가의 국도극장이었다. 이후 그는 ‘어제 내린 비’(1975)로 흥행을 이었고, 1975년 8월 동료 감독 하길종, 김호선, 홍파, 이원세 그리고 영화평론가 변인식과 함께 ‘영상시대’를 결성한다. 1975년도 한국영화 흥행 1위부터 3위까지 작품이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36만),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5만), 이장호의 ‘어제 내린 비’(14만)가 랭크된 것에서 영상시대 동인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작품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으로 이장호의 1970년대 연출 활동은 갑자기 끝나버렸다. 1976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활동 정지를 당한 것이다. 촉망받는 젊은 감독에서 순식간에 낭인으로 전락했던 4년간, 그는 말 그대로 각성의 시기를 보낸다. 특히 염무웅의 평론집 ‘민중 시대의 문학’은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정권 종식으로 감독 자격을 회복한 그는 그간의 고민을 담아 연출한 ‘바람불어 좋은 날’(1980)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바보선언’(1983), ‘과부춤’(1983)의 흥행 실패로 위기감을 느꼈지만, 보란 듯이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을 히트시키며 뛰어난 상업적 감각을 입증하기도 했다. ●김홍준, ‘바람불어 좋은 날’ 보고 ‘감독의 길’로 이장호는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영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인력들이 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배창호, 장선우, 김동원 등은 그의 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했고, 신승수, 정지영, 장길수 등은 ‘영상시대’가 개최한 오디션을 통해 영화계로 진입한 바 있다. 또 김홍준, 강우석, 임상수 같은 감독들이 처음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바로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고 나서라는 것도 잘 알려진 얘기다. 그는 1980년대 한국의 ‘뉴웨이브’ 영화, 더 나아가 현대 한국영화의 기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장호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자. 김홍준 교수가 기록한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작가, 2013)에서, 이장호 감독이 직접 ‘별들의 고향’의 기록적인 흥행에 관해 언급한 대목이다. “관객이 10만명 들었을 때 이 소설의 인기를 진짜 실감했어요. ‘어떻게 이 소설이 인기가 있어서 관객을 이렇게 끌어왔나.’ 10만을 넘어서 20만 되는 동안엔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면 ‘이장희 영화음악도 참 효과를 탔구나.’ 사람들이 음악 얘기를 많이 하니까. 근데 30만이 드니까 그제야 비로소 내 잃어버렸던 자존감 ‘영화도 잘 만들어서 그런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디어 싹트기 시작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30만이 넘어서 40만이 드니까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슬퍼져요, 뭔가 배신당한 느낌. 이 영화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구나, 혼자 달려가는 말 같구나, 주인 없는 말처럼 달려가는구나.”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기성 감독 누군가가 영화화를 맡았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별들의 고향’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당시 충무로의 수많은 선배 감독들이 판권을 탐내고 있는 상황에서, ‘초짜 감독’ 이장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그의 타고난 직관력과 돌파력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잡는 신상옥 감독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게다가 제2 조감독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구영화를 섭렵했던 영화 청년으로서의 세월이 그의 연출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사실 ‘별들의 고향’은 이전의 한국영화처럼 이야기를 촘촘하게 설명하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광나루에서 한 첫 촬영부터 즉흥적으로 연출하며 장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촬영해 놓은 필름을 돌려본 편집실에서 비로소 구성을 시작했다는 이장호의 증언처럼, 그는 편집 감각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참신함으로 바꿔놓았다. 영화는 플래시백 구조의 리듬도 균일하지 않고 차라리 복잡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지만, 이는 도리어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주고 영화 속으로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이장희 음악도 큰 몫… “아마추어리즘의 승리”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도 큰 몫을 했다. 이전의 한국영화들은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녹음실에 오케스트라를 불러 잠깐 맞춰본 뒤 일사천리로 즉흥적인 음악을 녹음하는 식이었다. 이장호는 고교 후배인 가수 이장희에게 음악을 맡겼고, 아예 레코드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무려 40여일을 투자했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혹은 잘 몰라서, 신선하게 음악을 배치한 것이 주효했다. 이장희가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르는 장면들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이장호가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규정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이라는 흥행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새로운 세대들이 그들의 느낌대로 과감히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197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별들의 고향’은 이후 두 가지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선취한 도시 속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김호선, 1977)로 이어지며 흥행과 비평을 두루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 순수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과정을 관음증적 볼거리로 전시하는 것에만 주력하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유행을 낳았다. 한편 새로운 감수성과 영상 감각은 ‘청년영화’의 선명한 줄기를 만들어냈다. 다음 연재를 통해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과 영상시대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한라산 사라오름 산정호수서 무단수영 3명 과태료 10만원 부과

    한라산 사라오름 산정호수에서 수영을 해 논란이 된 탐방객에게 과태료가 부과됐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는 제보 사진과 영상 등을 토대로 산정호수에서 수영한 오름동호회 회원 등 탐방객 3명을 찾아내 과태료 각 10만원씩을 부과했다고 29일 밝혔다. 자연공원법 28조(출입금지 위반)에 따라 한라산국립공원 일정한 지역을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탐방객들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다. 위반하면 최대 5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지난 21일 오전 10시25분쯤 사라오름 산정호수에서 탐방객이 수영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태풍 ‘다나스’가 한라산에 1000㎜에 달하는 비를 뿌려 산정호수에 빗물이 가득차 있었다.신고를 받은 국립공원관리소 관계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탐방객이 사라진 뒤였다. 국립공원측은 인근 폐쇄회로(CC)TV와 오름동호회 홈페이지 등을 검색,이날 사라오름을 등반한 한 동호회에서 무단 수영을 한 3명을 찾아냈다. 사라오름(1324m)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안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83호다.면적 5000㎡ 분화구에 물이 고여 생성된 사라오름 산정호수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 ‘작은 백록담’이라 불리며 한라산 탐방객들이 즐겨찾는다. 국립공원측은 산정호수 주변에 출입금지를 안내하는 현수막을 설치하고 자치경찰과 함께 사라오름 불법 출입 단속을 강화할 예정이다. 올해 한라산국립공원 자연공원법 위반 적발건수는 총 129건으로 흡연이 98건, 출입금지 20건, 야영 및 취사 등 기타 3건, 폭행 1건 등이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사진설명 한라산 사라오름 산정호수에서 무단 수영을 하다 적발된 탐방객에게 1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독자 제보)
  • 국가 폭력에 의한 ‘간첩죄’… 58년 만에 무죄 판결 “기쁘지만 억울”

    국가 폭력에 의한 ‘간첩죄’… 58년 만에 무죄 판결 “기쁘지만 억울”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아버지는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 위기에까지 몰렸다가 2년간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국민학교 1학년 막내딸의 꿈은 이때부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는 것’이 됐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군사정권이 물러나도 ‘빨갱이’의 굴레는 무거웠다. 여전히 국가를 믿을 수 없었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을 품고 세상을 뜬 지 30년이 넘어서야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고 지난 5월 16일, 58년 만에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그렇게 막내딸의 힘으로 명예를 되찾은 아버지는 해방 후 서울대 법대 학장을 지내고 한글로 된 최초의 민법학서를 남긴 진승록 교수다. 지난 23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막내딸 진미경(64) 한국외대 초빙교수는 인터뷰 2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재심 준비 과정이나 앞으로의 계획은 힘주어 말했지만, 과거를 돌이킬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그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나니 아버지의 인생이 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뒤늦게 재심을 청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국민학교 1학년 어느 날 새벽에 끌려가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요. 3학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셨죠.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아버지가 잠들지 못한 채 홀로 탄식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억울하다. 원통하다’ 그러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아버지 한을 풀어 드려야겠다’고 거듭 다짐했지요.”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간첩 누명을 썼던 죽산 조봉암 선생님이 무죄 판결(2011년)을 받아서 따님이 인터뷰한 기사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따님 나이가 여든이 넘었어요. ‘저렇게 연세가 많은 분도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라는 자책감이 들었죠. 2014년 서울대 법대에서 6·25전쟁 관련 세미나를 열었는데, 아버지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거기서 아버지의 서울대 법대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서울대 법대 학장이 빨갱이라는 게 말이 되냐. 재심을 청구하라´고 적극 권유했어요. 그분들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게 됐어요.” 진승록 교수는 6·25전쟁 당시 서울대 법대 학장으로 교정을 지키다 납북됐고, 넉 달 만에 탈출해 고시위원장 등을 지냈지만 1961년 5·16 직후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항소심에서 간첩방조죄만 인정돼 징역 10년으로 감형, 1963년 가석방됐지만 1985년 80세로 작고할 때까지 누명을 벗지 못했다. 진미경 교수는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국가를 믿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도 그런 이유로 아버지 사건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가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했는데 국가가 다시 심사해서 밝혀 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국가가 진실을 밝혀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재심 과정에서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판결문 이외에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어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했던 김윤경 조사팀장이 자료를 찾는 방법을 알려줘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판결문 외에 재소자 인명부를 챙겼죠. 수사기록을 국가정보원이나 군에 요청했는데 처음에는 수사한 적 없다고 답하더라고요. 아는 국회의원을 통해 정보공개를 요청했더니 그제서야 수사는 했지만 기록이 없다고 말을 바꿨어요. 증언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강원 원주, 전남 순천, 부산 등 안 가 본 곳이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대부분 돌아가셨거나 살아 있어도 증언을 거부했어요.” 서울고법 형사2부의 재심 판결문에는 “이 사건에 대해 육군고등검찰부, 국가정보원, 국가기록원 등에 기록 송부와 보존 여부 확인을 요청한 결과 그 어디에도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았다”고 명시돼 있다. 진 교수는 아버지에게 사형을 구형한 군검사를 어렵게 만났지만, 아버지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는 나중에야 ‘진 학장의 딸이 나를 찾아올 줄 몰랐다. 상부의 지시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재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불법구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음을 인정할 수 있고,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 개연성이 있다”며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등으로 임의성 없는 진술을 한 후 임의성 없는 심리 상태가 법정에서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재심 준비 5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기분은 어땠나요. “선고 전부터 법정에 앉아서 남편이랑 계속 울었어요. ‘간첩´이란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요즘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재판장인 차문호 부장판사가 ‘너무 늦게 무죄를 드려서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무죄를 받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어요. 처음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드디어 아버지 한을 풀어드렸구나. 아버지의 법대 제자들이 축하연도 열어 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더 슬프고 억울한 느낌이 들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서 무죄 판결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아 돌아오시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억울한 삶은 되돌릴 수가 없구나´ 이런 생각만 커지네요.” 진승록 교수는 1905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고려대) 교수와 서울대 법대 학장 등을 지냈다. 1947년 ‘민법총칙’을 시작으로 민법총론, 물권법, 담보물권, 채권총론, 채권각론 등 6권의 저서를 남겼다. 1952~1955년 지낸 고시위원장은 당시 정부 서열 4위로, 진 교수는 기술고시를 도입했다. -간첩죄에 휘말린 뒤 아버지는 어떻게 지냈나요. “엄마가 먼저 집에 왔는데, 또렷이 기억나요. 언니와 함께 학교 앞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있었는데 입주 도우미 언니가 달려와서 ‘엄마가 오셨다´고 말했어요. 많이 남은 떡볶이를 그냥 내려놓고 놀라서 뛰어갔어요. 이듬해 여름에 아버지가 오셨어요. 풍채 좋던 아버지가 굉장히 수척해지셨어요. 고문 때문에 수저도 들어 올리지 못하셨어요. 벽에 금을 단계별로 그어 놓고 조금씩 올리면서 나름의 재활운동을 하셨지요.” “학자로서 활동은 전혀 못하셨어요. 한동안은 몸이 안 좋아서 그랬고, 박정희 사후 전두환 군부가 이어지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형사들이 툭하면 찾아왔어요. 잡혀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글조차 쓰지 못하셨죠. 유머가 많은 분이셨는데 성격도 변했고요. 1978년에 사면을 받고 변호사 등록을 하려고 했는데 법무부가 안 내줬어요. 변호사 등록 업무가 대한변호사협회로 이관된 1983년에야 변호사 재등록이 됐어요.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2년 후 돌아가셨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아버지 제자들은 저보고 효녀라고 하지만,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아버지 간첩 누명 때문에 198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는데 외무부에서 여권을 안 내줬어요. 아버지 제자들이 신원보증을 서서 어렵사리 유학을 떠났죠. 저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죄송하죠. 아버지가 사면받고 변호사 등록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셨을 때도 도와드리지 못했어요.” “아버지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학술 세미나도 하고요. 아버지 고향인 강릉 옥계면의 이름을 따서 기념사업을 계획 중이에요. 아버지의 민법이론과 고시위원장 당시 하신 일을 재조명할 거예요. 저는 아버지 때문에 정치학 교수가 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국가란, 정치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다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해, 국가폭력으로 인해 희생되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2] 김영애 “교동~벽란도 평화의 뱃길 여는 데 남은 삶을”

    [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2] 김영애 “교동~벽란도 평화의 뱃길 여는 데 남은 삶을”

    배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돌았다. 기념할 일 없고 부끄럽기만 한 정전협정 체결 66주년이 되는 27일 한낮,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대교 아래를 ‘평화의 배’는 지나가지도 못했다. 대교 아래 오른쪽 기슭을 통과하면 벽란도에서 건너와 짐과 사람을 부리던 부두가 나온다고 했는데 예서 멈추라고 했다. 서해 5도와 북한 황해도 해주 사이에는 중화기가 잔뜩 서로를 겨누고 있지만 이곳부터 경기도 파주 장단까지는 중립수역이다.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이곳만은 서로 무기를 배치하지 말기로 했다. 한강과 임진강, 개성부터 흘러온 예성강까지 세 강줄기가 모여 예로부터 조강(朝江)으로 불렸던 이곳은 뭍과 바다가 만나던 곳이며 문명이 꿈틀거린 곳이다. 실제로 지금의 연백과 개성 땅 모두 이남이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3년 동안 이곳에 피난와 막 산다고 해 지금도 막촌으로 불리는 대룡시장 사람들은 마실 다녀오듯 연백으로 넘어가 농작물을 돌아보고 오곤 했다. 이날 오전 11시 강화 외포리 선착장을 출발한 평화의 배는 두두둥 북을 두드리며 30분 뒤 교동면 월선포에 도착했다. 제6회 7·27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는 ‘벽란도 뱃길을 열다’를 작은 주제로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김영애(63) 사단법인 새 우리누리 평화운동 대표는 월선포 무대에서 평화문화제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오전 9시 전만 해도 비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10시쯤부터 물러나 땡볕이 됐다. 김 대표는 교동대교의 개통과 함께 요즘 부쩍 뜨고 있는 대룡시장 얘기로 입을 열었다. “5년 전 고향인 교동에 돌아왔는데 대룡시장처럼 실향민들의 애환이 담긴 공간이 죽어가고 있었어요. 열 가게만 남기고 폐업한 상태라 너무 안타까웠지요. 이곳에 산업단지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있어 이를 저지하고 어르신들 붙잡고 설득해 옛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공간으로 꾸몄더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들의 자긍심도 살리고, 교동의 역사와 중요성도 알려 남북한은 물론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으로 벽란도~교동 섬을 알리는 일을 여생의 숙명으로 삼게 됐어요.”옛 새천년민주당의 수석전문위원으로 비례대표 여성 할당제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가족계획, 정신대 문제, 성폭력, 가정폭력 등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하다 차츰 통일과 평화 등으로 시야가 넓어졌다. 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 정의평화대학원에서 갈등전환학 석사 학위를 땄다. 커리큘럼 외에 현장 체험도 요구해 제주 강정마을에서 6개월 머무르며 공부한 것을 현장에 접목하려 했다. 고향에 정착하며 민주평통 강화군협의회장 공개채용에 뽑혀 평화 일꾼으로 나서게 됐다. 해박한 지식과 경륜이 반영돼 논리 있는 언변에다 지역 일꾼들에게 서슴 없이 다가가 말을 붙이고 대룡마을 어르신들 챙기는 살뜰함에 열정까지 갖췄다. “제 DNA에는 남북한이 모두 있어요. 어릴 적부터 연백에서 피난 오신 부모에게 들은 얘기가 각인돼 있고요. 어쩌면 평화와 통일의 중요성을 미래 세대에게 들려줘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해요.” 2005년 시작한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는 2008년까지 진행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하지 않다가 지난해 다시 시작했다. 지난해와 달리 이날은 어린 참가자들이 부쩍 늘어 더 좋다고 했다. 동원하느라 힘들어겠다고 하자 김 대표는 “하나도요. 모두 자발적으로 오신 거랍니다. 해마다 대룡시장을 찾는 이들 가운데 3만명 정도에게 열심히 벽란도를, 중립수역을 알린 덕분입니다”라고 말했다. 땡볕 아래에서 강화초등학교 합주단은 벽란도를 통해 오는 손님들을 맞는 대빈창 사신 맞이로 열심히 연주를 들려줬고, 송천초등학교 학생들은 합창을 들려줬다.김 대표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역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몇분 남지 않은 실향민 어르신들은 물론이고 자제 분들도 마음의 문을 쉬 열어주지 않으세요. 섬 속의 섬이란 피해 의식이 상당해요. 강화읍 사투리와 여기 어르신들 사투리도 완전 다르거든요”라고 답했다. 그의 꿈이야 물론 벽란도 뱃길을 다시 여는 것이다. 박남춘 인천광역시장이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읽게 한 환영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난 23일 강화해안순환도로 2공구가 개통됐다. 해안철책이 걷혀지고 서해 남북평화도로인 영종~신도 구간의 예비타당성 조사가 면제되면서 남북을 잇는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확성기도 철거되고 55년 만에 여의도 면적의 84배에 이르는 서해 바다가 조업구역으로 확장됐다. 이날 오후 12시 30분 월선포 선착장을 출발한 두 번째 평화의 배는 최근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북미 비핵화 협상 전망처럼 교동대교 아래 한강하구선 어로한계선 아래를 맴돌며 세 강의 물을 합치는 제를 올리고 월선포로 돌아왔지만 사람과 사람, 물길과 뱃길을 잇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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