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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나가사키에서 무식을 반성하다

    [서울광장] 나가사키에서 무식을 반성하다

    나가사키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라서 간 것은 아니었다. 계엄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지기 직전 이 일본 규슈의 작은 도시를 찾은 것은 가톨릭 전래의 역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포르투갈 선교사로부터 가톨릭을 받아들인 고장이다. 이렇게 동아시아에 상륙한 가톨릭이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들어오고 지금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나가사키 원폭은 우라카미(浦上)라는 동네에 투하됐다. 지도를 보니 우라카미는 글자 그대로 중심 항구인 오우라(大浦)의 윗동네여서 붙여진 이름인 듯했다. 우라카미에는 천주교가 전래된 16세기 후반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금령(禁令)이 내려지자 가톨릭 신자들은 신자가 아닌 듯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천주교는 불교 및 일본 전통신앙과 습합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신자들을 일본에서는 ‘잠복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우라카미천주당은 이런 신앙의 역사를 기념하고자 1914년 처음 지었다. 1925년에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높았다는 26m의 첨탑 두 개가 세워졌다. 첨탑 가운데 하나는 지금 성당이 있는 언덕에서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모습이다. 하늘을 향해 높게 솟은 성당의 첨탑이란 평화를 세상사람들에게 발신하는 안테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라카미천주당 첨탑이 하늘 높은 곳에서도 잘 보인다는 이유로 원폭을 실은 폭격기의 조준점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우라카미천주당에 가려면 나가사키 전차 1호선을 타고 평화공원역에서 내려야 한다. 평화공원은 굳이 찾아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만, 원폭이 떨어진 자리라는 폭심(爆心)은 성당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둘러보게 됐다. 일대는 일본 학생들의 필수 견학 코스인 듯 단체로 찾아온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넘쳐났다. 폭심에는 검은색 기둥이 하나 세워졌고, 그 아래 검은 돌에는 원폭순난자명봉안(原爆殉難者名奉安)이라 새겨 놓았으니 아마도 사망자 명부를 내부에 두었나 보다. 눈길을 끈 것은 뜻밖에 ‘폭심지 공원’에 설치된 작은 지도였다. 원폭이 떨어진 1945년 당시 나가사키 지역의 각종 산업시설을 한눈에 보여 주고 있었다. 지도를 보면 나가사키는 한마디로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핵심 공급기지였던 듯하다. 폭심은 미쓰비시중공업의 조선소, 병기제작소, 제강공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런 초대형 군수공장말고도 폭심 주변은 수많은 관련 부품 공장에 에워싸인 모습이었다. 지도는 이곳에 왜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일본은 페리 제독이 이끈 미국 함대의 위협으로 1854년 서양에 다시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 최초의 성당이라는 나가사키 오우라천주당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개항의 결과였다. 오우라천주당 뒤편 언덕에는 일본 사람들이 ‘구라바엔(園)’이라 부르는 글로버가든이 있다. 19세기 나가사키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상인 토머스 글로버의 집 주변을 공원화한 것이다. 글로버가든에서 내려다보는 나가사키 항구 주변의 풍광은 장쾌하기만 하다. 나가사키만(灣) 건너로 보이는 대형 도크는 미쓰비시중공업조선소라고 했다. 일본이 미국과 똑같은 방법으로 함선을 동원해 위협하는 방식으로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것이 1876년이다. 그런데 당시 동원된 서양식 군함 운양호는 바로 스코틀랜드에서 건조한 것을 글로버가 중개해 일본이 사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글로버가든에서도 한국 관광객의 감회는 일본인의 그것과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데지마항에선 군함도라고도 불리는 하시마로 가는 유람선도 볼 수 있었다. 나가사키는 이렇듯 우리 역사와 얽히고설켜 있다.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이 고장이 각광받는 성지순례 코스로 떠오른 것은 오래전이다. 나아가 일본의 어떤 도시든 먹거리, 즐길거리, 아름다운 풍경에 그치지 않는 한국인 전용 관광 가이드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불행한 한일 관계를 다룬 뉴스가 없었던 날은 평생 하루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실상은 아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나가사키에서 깨달았다. 서동철 논설위원
  • 고통 직시한 한강의 문장… 스톡홀름 물들였다

    고통 직시한 한강의 문장… 스톡홀름 물들였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스웨덴 스톡홀름의 쓸쓸한 겨울밤이 한강의 소설로 채워졌다. 8일(현지시간) 스톡홀름 시청 맞은편에 설치된 ‘돔 아데톤’ 바로 옆에서는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낭독하는 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다. 추운 날씨에 이슬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모여든 70여명의 사람들이 문학의 흥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한강의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의 일부가 각각 한국어와 스웨덴어로 낭독됐다. 한강에 앞서 이탈리아의 그라치아 델레다,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 등 각국을 대표하는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 일부가 그들의 모국어와 함께 스웨덴어로도 읽혔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눈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소설이다. 한강도 이 소설을 쓰기 전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을 꿨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날 한국어로 읽힌 부분은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한국어판 309쪽이다. “밀도가 얼마나 낮은 눈인지, 내가 앉는 대로 끝없이 깊게 꺼져 내렸다. 격벽 같은 눈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이 문장이 낭독되는 동안 현장에는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마냥 흩날리고 있었다. 낭독자는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교민 신미성씨였다. 신씨는 행사 뒤 한강의 문학을 향한 스웨덴 현지의 관심과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부터 한강의 작품은 번역될 때마다 서평이 실렸고 스웨덴 평론가 중에서는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예견한 이도 있었다”면서 “현재 시립도서관에는 한강의 책을 빌리려는 대기 인원이 1000명도 넘는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서는 비교적 젊은데다 여성 작가가 수상했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워하고 있다”면서 “한국 작가 가운데 박상영, 김영하 등의 소설도 스웨덴에서 인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같은 문장을 배우 안나 시세가 스웨덴어로 낭독했다. 스웨덴어판 ‘작별하지 않는다’ 속 문장은 그 나름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어로 읽었을 때 느껴진 호흡과 운율이 그리 손상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날 한강은 자신의 책을 출간한 국내외 출판사 관계자 10여명과 함께 프랑스 식당에서 비공개 오찬을 가졌다. ‘채식주의자’가 대표작인 한강의 메뉴 선택은 야채수프와 비건용 스테이크 등 ‘채식’이었다. 저녁에는 검은색 긴 원피스를 입고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벨상 콘서트에 참석해 구스타브 16세 국왕, 실비아 왕비 등과 함께 오페라 살로메의 아리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등을 감상했다. 스톡홀름 콘서트홀은 10일 노벨 주간의 절정인 시상식과 만찬이 개최되는 곳이다.
  • 지휘관들 ‘소극적 항명’ 고백… ‘부당명령’ 명확한 법적 기준 필요

    지휘관들 ‘소극적 항명’ 고백… ‘부당명령’ 명확한 법적 기준 필요

    12·3 비상계엄 사태에 연루된 계엄군 지휘관들이 잇따라 상관의 부당한 지시가 있었고 ‘항명’을 했다고 고백하면서 군의 명령 체계와 항명 판단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군 조직에서 부당한 명령에 거부할 수 있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으로, 앞으로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이들 지휘관과 계엄군에 동원된 병력에 대한 법적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일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과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에 이어 9일에는 707특수임무단의 김현태 단장까지 당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국회의사당에서 정치인을 끌어내라는 등의 위법한 지시를 했다고 입을 모았다. 곽 전 사령관은 “항명인 줄 알고 임무 수행을 부대에 지시하지 않았다”며 총기를 두고 가도록 했다고 했고, 이 전 사령관도 “위험한 상황이라 장갑차 등은 투입하지 않았다”며 뒤늦게 해명했다. 김 전 장관과 같은 ‘충암파’로 계엄을 사전에 기획하고 주도했다고 지목받고 있는 여인형 방첩사령관도 이날 오후 입장문을 통해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부대원들에 대해서는 군 명령계통의 특수성을 감안해 저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주기 바란다”고 했다. 지휘관들의 뒤늦은 양심 고백을 순수하게만 볼 순 없지만, 이들의 주장이 위법·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군의 태생적 성격을 보여 준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군 역시 부당한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해석한다. 명확한 법 조항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24조에 명시된 ‘군인은 직무와 관계가 없거나 법규 및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반하는 사항 또는 자신의 권한 밖의 사항에 관해 명령을 발하여선 안 된다’는 조항에 따라 ‘권한 밖의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법 25조에서 ‘직무상 명령’에 대한 복종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도 “군인이라도 위법한 명령에 대해선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장에 출동한 지휘관 또는 부대원들이 그 같은 판단을 정확히 내리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석주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특히 ‘친위 쿠데타’의 경우 정당한 명령인 것처럼 전달되고 이미 유사한 임무로 훈련도 돼 있기 때문에 곧바로 위법한 지시라고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며 “계엄군 대부분 대테러작전 임무를 수행하고 작전지역도 대도시라 국회로 출동하면서도 통상적인 임무 수행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고 짚었다. 예비역 중령인 정경운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전문연구위원도 “예를 들어 ‘길가는 민간인을 총으로 쏘라’고 하면 명확하게 위법인 명령인데 어떤 상황에서 위법인지, 부당한 명령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에서도 보다 명확한 판단 근거를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군인복무기본법에 따라 5년마다 내는 ‘군인복무기본정책서’에 이전에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 관련 정책이 담겨 있다가 현 정부 들어 삭제되기도 했다. 과거 대법원은 12·12사태 당시 전두환 계엄사령관과 함께 반란 행위를 모의한 일선 부대 지휘관들의 내란 혐의를 인정하며 “(피고인들이) 지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위법한 명령임을 알았고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공간적 환경이 충분히 있었다”고 지적했다.
  • “150명 출석 차단, 안되면 끌어내라”… 봉쇄 지시받은 707

    “150명 출석 차단, 안되면 끌어내라”… 봉쇄 지시받은 707

    707특임단장 “대원들, 김용현에 이용당한 피해자… 헬기 1대에 8명분 실탄 챙겨갔다”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병력을 국회에 투입했던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707특수임무단의 김현태 단장(대령)이 9일 “부대원들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이용당한 가장 안타까운 피해자”라고 호소했다. 김 단장은 김 전 장관이 계엄 해제 정족수인 국회의원 150명 소집을 막으려 했다는 것과 실탄이 준비됐었다는 사실도 증언했다. 김 단장은 이날 오전 8시 30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원이 기밀에 해당하는 그는 이름과 얼굴을 가리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섰다. 앞서 지난 6일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이 상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양심 고백을 한 바 있다. 707특임단은 국회의사당과 의원회관 등 건물 봉쇄 지시를 받았고 김 단장은 티맵을 켜고 국회 구조를 파악해 임무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당시 곽 전 사령관은 30차례 정도 김 단장에게 전화해 상황을 점검하고 지시를 내렸다. 김 단장은 “1~2분 간격으로 계속 이야기했다. ‘국회의원들이 150명이 모이면 안 되니 막을 수 있겠나. 안 되면 끌어내는 게 가능하냐’ 물었고 ‘진입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령관은 장관 지시를 그대로 지시했다. 현장 상황을 보고받은 사령관은 ‘무리하지 말고 국민과 부대원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겨라’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또 “처음부터 ‘북한’이라는 말은 전혀 없었다. 빨리 가서 국회를 봉쇄하고 확보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계엄군이 당시 상황을 대북작전으로 알았다는 의혹을 반박한 것이다. 그는 헬기 1대에 탑승하는 8명의 실탄을 통합 보관했으며 분량은 개인별로 5.56㎜ 10발, 9㎜ 10발이었다고 전했다. 김 단장은 “계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계엄 상황에서 국회 활동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을 잘 몰랐다”며 “모르는 것 또한 제 책임이라 생각하고 부대원들을 내란죄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빠뜨린 것을 사죄드린다”고 털어놨다. 기자회견 도중 부하들을 언급할 적마다 눈물을 삼킨 그는 “짊어져야 할 벌이 있다면 제가 받고 그게 끝나면 전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도 뒤늦게 이날 입장문을 내고 해명에 나섰다. 여 전 사령관은 “방첩사 부대 출동이 새벽 1시가 넘었고 국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근처까지 갔다가 복귀했다”며 계엄령을 미리 알았다는 의혹을 반박했다. 그러면서 “방첩사는 계엄령 선포 후 그 사실을 알았다. 그 이후 조치들이 매우 신중하고 최소한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수사를 통해서 곧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다만 당시 윤 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은 계엄 당시 북파공작원 부대원(HID) 20명가량이 여야 대표 등을 겨냥한 체포조로 투입되기 위해 대기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전시에 북한 혹은 적국에 들어가 요인들을 납치하고 암살하는 전문 특수부대”라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이 북한 쓰레기 풍선 살포와 관련해 ‘원점 타격’ 검토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합동참모본부는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다. 국회 국방위원회는 10일 비상계엄 관련자들을 불러 현안 질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 ‘계엄 전문 군무원’ 채용 공고한 軍…“이번 사태와 무관한 채용”

    ‘계엄 전문 군무원’ 채용 공고한 軍…“이번 사태와 무관한 채용”

    올해 상반기와 하반기 육군 일반군무원 경력공개 채용공고에 계엄 업무를 담당하는 군무원을 뽑는 공고가 떴던 것으로 확인됐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유일한 계엄 관련 채용이라는 점, 계엄 업무를 군인이 아닌 군무원이 담당한다는 점, 최근 계엄 사태가 실제 벌어졌다는 점 등이 맞물려 이슈가 되고 있다. 육군은 지난 4월 11일과 10월 31일 두 차례에 걸쳐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일반 군무원 채용 공고를 냈다. 여러 부대가 군무원 채용 계획을 알린 가운데 2군단은 작전처 통합방위작전과 계엄업무담당 군무원(6급)을 뽑는다고 알렸다. 직무 내용은 전시 계엄계획 발전, 계엄 관련예규 및 법규 발전, 계엄 5대 기능 안정도 평가 관리라고 적시했다. 준위 이상 전역(예정)자로서 준위 이상 계급에서 관련 분야 2년 이상 근무경력자, 6급(상당) 이상 군(공)무원 퇴직(예정)자로서 6급(상당) 이상 계급에서 관련 분야 2년 이상 근무경력자, 군사학 등 관련 분야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 관련 분야 6년 이상 근무경력자 등을 자격 요건으로 걸었다. 계엄 관련 업무 담당이 군인이 아닌 군무원이라는 점에서 군무원들 사이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다. 특수한 신분이긴 하지만 군무원은 엄연히 민간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역 장교·부사관 수급이 원활하지 않고 군무원 역시 군인들의 행정 업무를 종종 맡는다는 점에서 가능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9일 “지난해 2군단에서 소요를 제기해 국방부에서 승인했고 올해 신편된 직책이라 채용하는 것“이라며 “강원도 화천~춘천 일대에서 계엄업무를 담당하는 군무원을 채용한 것으로 이번 계엄과는 상관없다”고 설명했다. 평상시라면 별문제 없이 지나갔을 공고지만 지난 3일 과거의 역사로만 남아있던 계엄이 현실로 되면서 덩달아 관심을 받았다. 계엄 사태의 여파가 일파만파 나라를 뒤흔드는 가운데 지휘관들은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양심 고백하기도 했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과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사령관은 지난 6일 김병주·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계엄령 선포 이후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두 사람은 병력이 실탄을 휴대하지 못하게 하고 맨몸으로 가라고 지시하는 등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내린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책임은 내가 지겠다. 부하들에게 책임이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도 이날 입장문을 내고 “부대 출동은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국회나 선관위 근처까지 가다가 복귀했다”면서 “이것은 방첩사가 계엄령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가 사령관으로서 행한 행동에 대해 엄중히 책임지겠다”면서 “제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부대원들에 대해서는 군 명령계통의 특수성을 감안해 저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주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 “김용현에 이용당했다”…눈물 삼킨 707 특임단장 “부대원들 용서해달라 벌은 제가 받겠다”

    “김용현에 이용당했다”…눈물 삼킨 707 특임단장 “부대원들 용서해달라 벌은 제가 받겠다”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 병력을 국회에 투입했던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707특수임무단의 김현태 단장(대령)이 9일 “부대원들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이용당한 가장 안타까운 피해자”라고 호소했다. 김 단장은 김 전 장관이 계엄 해제 정족수인 국회의원 150명 소집을 막으려했다는 것과 실탄이 준비됐었다는 사실도 증언했다. 김 단장은 이날 오전 8시 30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원이 기밀에 해당하는 그는 이름과 얼굴을 가리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섰다. 군 관계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근무지 이탈까지 불사한 자리였다. 앞서 지난 6일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이 상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양심 고백을 한 바 있다.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가 열리면 가서 증언하려고 했던 그는 국방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기자회견을 결심하고 입장문을 적어 내려갔다. 새벽까지 다듬은 입장문에는 “부대원들이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면서 “부대원들은 죄가 없다. 국민 여러분 꼭 부대원들을 용서해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그는 반복해서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이며 잘못임을 언급했다. 707특임단은 국회의사당과 의원회관 등 건물 봉쇄 지시를 받았고 김 단장은 티맵을 켜고 국회 구조를 파악해 임무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당시 곽 전 사령관은 30차례 정도 김 단장에게 전화해 상황을 점검하고 지시를 내렸다. 김 단장은 “1~2분 간격으로 계속 이야기했다. ‘국회의원들이 150명이 모이면 안 되니 막을 수 있겠나, 안 되면 끌어내는 게 가능하냐’ 물었고 ‘진입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령관은 장관 지시를 그대로 지시했다. 현장 상황을 보고받은 사령관은 ‘무리하지 말고 국민과 부대원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겨라’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또 “처음부터 ‘북한’이라는 말은 전혀 없었다. 빨리 가서 국회를 봉쇄하고 확보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계엄군 부대원들이 당시 상황을 대북작전으로 알았다는 의혹을 반박한 것이다. 그는 헬기 1대에 탑승하는 8명의 실탄을 통합 보관했으며 분량은 개인별로 5.56㎜ 10발, 9㎜ 10발이었다고 전했다. 별도로 나무 상자에 공포탄과 연습용 수류탄도 실었다고 했다. 부대가 갖춰야 하는 기본 장비가 혹시라도 쓰이는 일 없게 통합 보관해 관리했다는 게 김 단장의 설명이다. 김 단장은 “계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계엄 상황에서 국회 활동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을 잘 몰랐다”며 “모르는 것 또한 제 책임이라 생각하고 부대원들을 내란죄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빠뜨린 것을 사죄드린다”고 털어놨다. ‘계엄 해제 결의안이 조금 늦었으면 국회의원을 끌어냈겠느냐’는 질문에는 “불가능하다.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실탄을 쓰는 것밖에 없는데 상상도 하지 않았고 지시했더라도 따를 부대원은 아무도 없다”고 답했다. 그는 김 전 장관 때문에 기자회견을 열었음을 분명히 했다. 김 단장은 “김 전 장관이 처음에는 본인이 다 책임진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령관께서 부대원들을 구하고자 고백한 것을 보고 같은 심정으로, 사령관께서 못 막는다면 저라도 막아보자는 심정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을 향해 “많이 원망스럽다”고 말한 그는 “사과 같은 거 받고 싶지도 않고 오직 부대원들을 지키고 싶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 도중 김 단장은 부하들을 언급할 적마다 여러 차례 눈물을 삼켰다. 그는 “짊어져야 할 벌이 있다면 제가 받고 그게 끝나면 전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대원들이 처벌받지 않고 자신이 온전하게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날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의 오물 쓰레기 풍선 살포와 관련해 김 전 장관이 원점 타격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다. 또한 지난달 28일 북한의 풍선 살포 상황 당시 김 전 장관이 전투통제실에 방문하지 않았다며 “작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자제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회 국방위원회는 10일 비상계엄 관련자들을 불러 현안 질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 김성령, 남편과 별거 고백 “10년 넘어…子 어디 사는지 몰라”

    김성령, 남편과 별거 고백 “10년 넘어…子 어디 사는지 몰라”

    배우 김성령이 남편과 따로 살고 있는 근황을 전했다. 지난 7일 유튜브 채널 ‘A급 장영란’에는 ‘동안+초미녀 김성령! 처음 밝히는 미모 유지 비결 (절친토크,만두빚기)’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이날 장영란과 만난 김성령은 5kg이 쪘다고 토로했다. 그는 “운동량이 솔직히 얘기하면 옛날보다 조금 줄었고 밤마다 술을 또 한 잔을 그렇게 한다”라고이유를 밝혔다. 장영란은 “언니 술 안 좋아하잖아”라고 깜짝 놀랐고, 김성령은 “집에서 먹는 거 좋아한다. 혼자서”라고 답했다. 이에 제작진은 “왜 혼자세요. 기러기세요?”라고 의아해했고, 김성령은 “기러기다. 남편은 부산에 있고 나는 서울에 있고”라고 말했다. 이어 “아들들은”이라는 질문에 김성령은 “아들은 어딘가에 살고 있고”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장영란은 “같이 살잖아. 언니?”라고 당황했고, 김성령은 “같이 사는데 어디 사는지 모르겠어”라고 솔직하게 밝혔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는 그는 “아이들이 몇살이냐?”는 질문에 “스물넷, 스물”이라고 했다. 장영란은 “어머나 다 컸다”고 말했고, 김성령은 “다 컸다”며 “‘너는 도대체 어디서 자니?’ 물어보면 ‘친구네’ 한다. ‘누구친구?’, ‘있어’ 끝. 못 물어봐. ‘그러니?’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장영란은 “엄마로서는 이렇게 산다. 아들 둘이라”라고 공감했고, 제작진은 “엄청나게 잘생겼을 것같다”고 말했다. 장영란은 “저는 봤잖아. 너무 잘생겼다”고 감탄했다. 김성령은 “어제 우리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이 모처럼 집에 있었다. 그랬는데 밤 11시가 넘어서 ‘오래간만에 같이 치킨 어때?’ 이러더라. 나는 A급 장영란 출연도 해야되고 살도 빼야하는데 밤 11시에 치킨을 같이 먹자는 거다. 근데 엄마 마음이 이러는 거다. 걔랑 같이 치킨을 뜯을 기회가 잘 없으니까 잠깐 망설이다가 ‘오케이 콜. 시켜’ 그래서 둘이 앉아서 먹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영란은 “11시에 뜯고 온 거냐. 근데 하나도 안 부었다”며 “그래도 아들과의 애정과 정은 느끼지 않았느냐. 그게 더 중요하다”고 전했다. 김성령은 “우리 아들은 그걸 모를 거다. 엄마가 이렇게…”라고 솔직하게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 “오디션장서 재떨이 맞을 뻔”…박하선, 충격 ‘갑질’ 폭로

    “오디션장서 재떨이 맞을 뻔”…박하선, 충격 ‘갑질’ 폭로

    배우 박하선이 과거 오디션장에서 경험한 ‘갑질’에 대해 고백했다. 9일 오후 8시 10분 방송되는 MBC에브리원 ‘히든아이’에서는 일상생활 속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범죄에 대해 다룬다. 이날 방송되는 ‘히든아이’에서는 택배와 관련한 실화가 소개된다. 집 앞에 배달된 택배를 자연스럽게 들고 가는 헬멧 쓴 택배 기사의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포착된다. 출연진은 이 CCTV에 숨겨진 ‘반전’에 출연진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또 대중교통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사건·사고에 대해서도 다룬다.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를 훔치는 남성, 버스에서 몸을 날리는 남성 등 대중교통 ‘빌런’도 등장한다.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한 사건도 이어진다. 회식 자리에서 인턴을 폭행한 상사는 “스킨십일 뿐”이라는 황당한 변명을 내놓는다. 이에 이종격투기 선수 겸 방송인인 김동현은 “링에서 3분만 스킨십해주고 싶다”며 분노를 터트린다. 박하선은 오디션장에서 재떨이로 맞을 뻔한 충격적인 ‘갑질’ 사건을 떠올리며 “잘 지내시죠?”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장성규 “방귀 뀌었다가” 역대급 대변 실수…서장훈 반응이

    장성규 “방귀 뀌었다가” 역대급 대변 실수…서장훈 반응이

    방송인 장성규가 침대에서 대변 실수를 했던 경험을 고백했다. 8일 방송된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이용대와 만난 장성규는 “아내는 형을 어디까지 이해해 주냐”는 질문에 “한 번 놀랐던 일이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성규는 “연인 사이에 방귀 트는 게 어렵잖아. 그래도 남자는 보통 빨리 트지. 나는 일찍 방귀를 터서 그런 거에 대한 쑥스러움이 없었어. 그래서 언제든 최고의 방귀를 뀌고 싶었어. 아내 반응이 귀엽거든. 방귀 뀌면 웃으면서 짓는 표정이 있는데, 그게 좋아서 일부러 더 크게 뀌기도 했어”라며 아내를 웃겨주는 자신의 방식을 전했다. 이어 그는 “30대 중반에 대장내시경을 한 번 받았거든. 검사받고 죽을 먹은 뒤에 ‘이제 위가 괜찮겠지’ 하고 밤에 야식을 먹었어. 먹다가 큰 방귀가 하나 올 것 같더라고. 그래서 아내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분위기가 조용해지고, 아내가 잘 들을 수 있겠다 싶은 타이밍에 크게 방귀를 뀌었지. 그런데 소리가 이상했어”라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용대가 “설마...”라고 놀라자, 장성규는 “그 순간 이건 방귀가 아니란 느낌이 확 들었어. 냄새도 보통이 아니었지. 이불을 젖히고 보니까 약간 갈색으로 변해 있더라고”라고 말해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스튜디오에서 이를 듣던 서장훈은 “쉽게 말해 침대에 똥을 싼 거네?”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장성규는 “내가 얼마나 민망했겠어. 사실 마흔 살이 돼서 똥을 싸는 일이 쉽지 않잖아. 그런데 아내가 ‘오늘 대장내시경 처음 해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라며 물티슈를 가져와 이불을 닦아줬어. 그때 정말 감동했지”라고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에 서장훈은 “장성규 결혼 잘했네”라며 아내의 배려심을 칭찬했다.
  • [데스크 시각] 비상계엄이 이리 쉬운 것인가

    [데스크 시각] 비상계엄이 이리 쉬운 것인가

    12·3 비상계엄령 선포에 대해 ‘야당에 경고만 하려던 것이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해명은 실로 충격적이다. 국민적 분노를 돌리기 위한 ‘남 탓’ 변명이자 권력 남용을 스스로 인정하는 고백처럼 들린다. 국민 일상과 경제활동, 문화, 외교·안보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비상계엄을 이처럼 한없이 가볍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실드를 치지만 이에 동조하는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의 전언이 대통령 본심에 가까울 것 같다. 그는 윤 대통령이 “싹 다 잡아들여 정리하라”고 직접 지시했고, 방첩사령부로부터 구체적인 체포 대상 명단도 받았다고 전했다. 총 6호로 구성된 계엄포고령에서 알 수 있듯 얼마나 달달한 독재의 유혹인가. 한동훈·이재명 여야 대표를 비롯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일거에 처단할 수 있고, 비판의 목소리를 전하는 언론과 시위대에 재갈을 물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 때도, 나라가 부도나는 외환위기 때도, 야당과 언론이 날마다 대통령을 상대로 비아냥댈 때도, 대규모 ‘광우병 시위’가 주말마다 이어질 때도, 전국에서 수백만명이 “대통령은 하야하라”고 외칠 때도 제6공화국의 어느 대통령도 유혹에 넘어가 비상계엄을 선포하지 않았다. 힘으로 누르는 독재의 길보다 대화와 타협, 양보라는 민주주의의 길을 걸었다. 민심을 거스른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2020년대 비상계엄을 선포한 나라만 봐도 그렇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갱단의 소요 사태로 정국이 혼란한 에콰도르, 반란이 터진 필리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 나라들과 우리 사회가 닮은 점이 하나라도 있나. 세계가 엄지척하던 K콘텐츠의 나라에서 한순간에 ‘기괴하고 이상한 나라’가 됐다. 윤석열 정부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 온 국격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은 앞다퉈 한국을 여행 주의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군홧발에 짓밟힌 여의도에 가지 말라’고 콕 집어 경고하기도 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우리 국민이 지난 수십년간 가꿔 온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내란급 위험 국가로 만든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45년 만에 소환된 계엄 사태는 많은 것을 바꿔 놓을 거다. 꺼져 가던 탄핵 촛불집회는 들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이 진행된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주변엔 100만 인파(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 10만명)가 몰렸다. 앞으로 주말마다 대규모 탄핵 집회와 맞불 시위로 전국이 들끓을 것이다. 연말 국회는 대통령 탄핵소추안과 김건희여사특검법을 둘러싼 여야 간 충돌로 올스톱됐다. 야당은 ‘될 때까지’ 매주 윤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했고, 여당은 탄핵만큼은 안 된다며 맞섰다. 각종 민생법안과 기업지원법안이 표류하고 있으며 내년 예산안 심의도 제대로 이뤄질지 불투명하다. 사상 초유의 ‘준예산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대통령의 ‘2분 사과’나 법적 권한 없는 ‘책임총리제’로 피해 갈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대혼란을 수습하는 데 대통령과 여당 의원들에게 기댈 게 없다면 법에 따른 빠른 수사도 하나의 방법이다. 여당 대표와 국무위원마저 이번 비상계엄에 대해 ‘반헌법적’이라고 한 만큼 유죄 증거는 차고 넘친다. 검경에 모두 맡길 게 아니라 계엄 사태를 공정 수사할 수 있는 상설특검법도 서둘러 통과시켜야 한다.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면 정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내년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글로벌 무역 환경은 적대적으로 급변하는데, 우리 기업들만 정부 도움 없이 나 홀로 전장에 나가야 해서다. 증시 격언에 ‘손절은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다. 김경두 산업부장
  • 한강 노벨상 연설문 ‘빛과 실’…“내 모든 질문은 사랑”

    한강 노벨상 연설문 ‘빛과 실’…“내 모든 질문은 사랑”

    8살 때 쓴 시 속의 첫 질문은 ‘사랑’이토록 폭력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그 모순 더 깊은 곳에도 ‘사랑’ 있어역사 속 학살의 기록 샅샅이 살펴광주라는 시공간, 보통명사·현재형언어의 실로 연결된 모든 분께 감사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째서 폭력과 아름다움이 같은 세계에 공존하는가. 역설로 지탱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실존은 결국 고통뿐인가. 좀처럼 해명되지 않는 모순의 해답은 어릴 적 썼던 시에 있었다.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일. 한강(54)의 문학은 전부 이것이었다. 7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자 강연에서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은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낭독했다. 강연에는 한림원 관계자 및 현지 교민, 국내 출판사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연설문 낭독 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첼로 모음곡 5번 C단조’가 연주됐다. 낮고 두터운 첼로의 비장한 선율이 한강이 문학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고통과도 맞물리는 듯했다. 한강은 작품세계 전반을 회고하는 동시에 유년에 썼던 시를 공개하며 자신의 문학을 이루고 있는 내밀한 사건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찬찬히 톺았다.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한 연설은 내면의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하더니 이윽고 그 밑에 깔린 인간의 존재에 관한 보편적인 물음으로 이어졌다. 가냘픈 발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세계의 모순과 고통을 꿰뚫으려는 문학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사랑이란 무얼까?//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한강은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가 낡은 구두 상자에서 이 시를 찾았다고 밝히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시가 적힌 연월은 1979년 4월. 한강이 여덟 살 아이였을 때다. 한강의 첫 번째 질문은 ‘사랑’이었다. 한강은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됐으며 1998년에는 첫 장편 ‘검은 사슴’을 상재했다. 시에서 단편으로, 단편에서 장편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그의 질문은 다소 뒤틀린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분명히 ‘사랑’으로 시작했던 그의 연설문은 이내 고통과 폭력의 문제에 직면한다. 그의 연설문에서 ‘고통’은 열두 번, ‘폭력’은 열 번이나 등장한다. 문학은 질문하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한강 문학의 원동력이었다.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 소설 ‘채식주의자’는 결국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를 묻는 ‘바람이 분다, 가라’로 이어진다. 이는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탐구하고 있는 소설 ‘희랍어 시간’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한강의 쓰기는 덜컥 멈춘다.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었다.” 질문과 소설이 멈춘 그곳에서 한강은 역사로 눈을 돌렸다. 한강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긴 역사를 두고 자행된 학살의 기록을 샅샅이 살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십 대 시절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에 적었던 두 문장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의 구성이 달라져야 함을 느낀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채식주의자’와 함께 한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년이 온다’는 이렇게 탄생한다. 1979년 계엄령과 신군부의 쿠데타 이후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복원하는 ‘소년이 온다’는 2024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한강은 제주 4·3 사건을 재현한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다음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 기간 두 가지 질문이 또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다. 폭력과 아름다움은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기에 한강은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투쟁이 글쓰기를 해 온 동력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강은 새롭게 확신하고 있다. 이 모순의 더 깊은 곳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의 문학을 가능케 했던 것은 단 하나의 질문, ‘사랑은 어디에 있고 또 무엇인가’였다고. 그리하여 문학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자 서로를 연결하는 ‘실’이다. 한강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돼 주었고, 연결돼 줄 모든 분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돌아가다…한강 노벨상 연설문 ‘빛과 실’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돌아가다…한강 노벨상 연설문 ‘빛과 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째서 폭력과 아름다움이 같은 세계에 공존하는가. 역설로 지탱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실존은 결국 고통뿐인가. 좀처럼 해명되지 않는 모순의 해답은 어릴 적 썼던 시에 있었다.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일. 한강(54)의 문학은 전부 이것이었다. 7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자 강연에서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은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낭독했다. 이날 강연에는 스웨덴 한림원 관계자 및 스웨덴 현지 교민, 국내 출판사 관계자를 비롯해 200여명이 참석했다. 연설문 낭독 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첼로 모음곡 5번 C단조’ 연주가 진행됐다. 낮고 두터운 첼로의 비장한 선율이 한강이 문학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고통과도 맞물리는 듯했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스웨덴어와 영어로 한강의 작품을 낭독하는 행사도 진행됐다. 한강은 작품세계 전반을 회고하는 동시에 유년에 썼던 시를 공개하며 자신의 문학을 이루고 있는 내밀한 사건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찬찬히 톺았다.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한 연설은 내면의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하더니 이윽고 그 밑에 깔린 인간의 존재에 관한 보편적인 물음으로 이어졌다. 시적이고 유려한 문체에 담긴 연설문을 한강은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가냘픈 발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세계의 모순과 고통을 꿰뚫으려는 문학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사랑은 어디에 있으며 또 무엇인가“사랑이란 어디 있을까?//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사랑이란 무얼까?//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한강은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가 낡은 구두 상자에서 이 시를 찾았다고 밝히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시가 적힌 연월은 1979년 4월. 한강이 여덟 살 아이였을 때다. 한강의 첫 번째 질문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또 무엇인가. 한강은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됐으며 1998년에는 첫 장편 ‘검은 사슴’을 상재했다. 시에서 단편으로, 단편에서 장편으로 이어지는 장르적 여정에서 그의 질문은 다소 뒤틀린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분명히 ‘사랑’으로 시작했던 그의 연설문은 이내 고통과 폭력의 문제에 직면한다. 그의 연설문에서 ‘고통’은 열두 번, ‘폭력’은 열 번이나 등장한다. 문학은 질문하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한강의 문학이 계속 쓰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 소설 ‘채식주의자’는 결국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를 묻는 ‘바람이 분다, 가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탐구하고 있는 소설 ‘희랍어 시간’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강의 쓰기는 덜컥 멈춘다.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었다.” 소설이 멈춘 곳에서 역사로 눈을 돌리다 질문과 소설이 멈춘 그곳에서 한강은 역사로 눈을 돌렸다. 그의 고향이기도 한 광주에서 있었던 폭력의 실상을 들추기로 한 것이다. 한강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긴 역사를 두고 자행된 학살의 기록을 샅샅이 살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십 대 시절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에 적었던 두 문장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의 구성이 달라져야 함을 느낀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앞서 ‘채식주의자’와 함께 한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년이 온다’는 이렇게 탄생한다. 1979년 계엄령과 신군부의 쿠데타 이후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복원하는 ‘소년이 온다’는 2024년 겨울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모순보다 깊은 사랑…문학은 빛이요 실이다한강은 제주 4·3 사건을 재현한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다음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 3년간 한강에게는 두 가지 질문이 또 머릿속에 맴돌았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다. 폭력과 아름다움은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기에 한강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투쟁이 글쓰기를 해온 동력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강은 새롭게 확신하고 있다. 이 모순의 더 깊은 곳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의 문학을 가능케 했던 것은 단 하나의 질문, ‘사랑은 어디에 있고 또 무엇인가’였다고. 그리하여 문학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자 서로를 연결하는 ‘실’이다. 한강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돼 주었고, 연결돼 줄 모든 분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계엄 지휘관들 “의원 끌어내면 위법… 항명 알았지만 안 따랐다”

    계엄 지휘관들 “의원 끌어내면 위법… 항명 알았지만 안 따랐다”

    곽·이, TV 보고 계엄령 포고 인지“무기 사용 금지…맨손 투입 지시”실탄 논란엔 “우발상황 대비 탄통”“부하에 책임 안 돌아갔으면” 울먹 지난 3일 비상계엄 당시 군을 지휘했던 사령관들이 6일 계엄령에 대해 위법성을 느꼈다고 잇달아 양심 고백을 하면서 ‘계엄의 밤’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상황을 점검하는 등 실질적으로 계엄군을 통제한 정황이 드러난 가운데 곳곳에서 오히려 군이 ‘수위 조절’을 하며 항명했던 장면들이 알려진 것이다. 곽종근 육군특수전사령관(중장)과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중장)은 이날 김병주·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특전사 예하 부대인 제1공수특전여단·제3공수특전여단·제707특수임무단과 수방사가 현장에 투입돼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을 통제했다. 두 사람은 대통령의 담화 발표가 있기 10~20분 전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았고 TV를 통해 계엄령 포고를 알았다고 밝혔다. 병력 투입 지시에 따라 곽 사령관은 시설 위치를 고려해 가까운 예하 부대에 임무를 부여했고, 이 사령관은 수방사 병력을 국회로 출동시켰다. 한밤중에 발생한 상황이라 출동이 늦어졌고 부대가 국회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현장 상황을 보고받은 두 사람은 이상함을 느끼고 군인들이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곽 사령관은 병사들이 실탄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 사령관은 아예 무기 없이 움직이도록 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 출동한 병력이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도됐는데 곽 사령관은 우발 상황을 대비해 들고 간 탄통이었다고 해명했다. 해당 사항은 계엄군사령관을 맡았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에게도 보고됐다. 박 총장은 곽 사령관에게 실탄을 쓰지 않도록 지시했고 “총기 휴대를 안 하고 맨몸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하는 이 사령관에게는 “오케이 굿”이라고 답했다. 국회로 출동한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에 진입하는 모습도 포착됐는데 이는 현장에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곽 사령관의 지시에 따른 조치임이 밝혀졌다. 곽 사령관은 “강제로 들어가려면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다른 통로를 찾다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명령을 비롯해 계엄군과 관련한 대다수 지시는 김 전 장관이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 역시 직접 전화해 계엄군 상황을 점검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윤 대통령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707특수임무단이 어디쯤 이동하고 있는지, 국회 상황이 어떤지 직접 전화로 확인했다. 곽 사령관은 “국회의원을 끌어내면 위법이고 임무를 수행한 인원들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항명이 될 줄은 알았지만 임무를 지키지 않았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 사령관 역시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며 항명 사실을 토로했다. 지난 4일 새벽 1시 1분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결의하자 곽 사령관은 1시 9분에 철수를 지시했다. 그는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며 “설사 그런 지시가 있더라도 거부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부하들은 제 지시로 들어갔다. 책임은 제가 질 테니 부하들에게 책임이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울먹였다. 이 사령관 역시 “불법적이고 적절치 않은 건 절대 응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제가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부하들을 안 좋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 비상의총·2차 계엄설·尹-韓 빈손 회동… 탄핵정국, 긴박했던 하루

    비상의총·2차 계엄설·尹-韓 빈손 회동… 탄핵정국, 긴박했던 하루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6일 국회는 종일 긴박하게 돌아갔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비상계엄 당시 윤 대통령의 주요 정치인 체포 지시 등 관련 의혹을 제기한 게 발단이 됐다. 한 대표가 탄핵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윤 대통령의 조속한 직무집행 정지를 언급하면서 기류가 바뀌었고 이때부터 여야 모두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동훈, 긴급최고위서 의혹 제기이재명, 韓 입장변화 후 특별성명한 대표는 8시 20분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했지만 9시 25분쯤에야 굳은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사전 회의에서 당 지도부 사이에 격론이 펼쳐지며 회의 시작 시간이 1시간가량이나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 대표가 발언하는 동안 추경호 원내대표는 침묵을 지켰다. 오전 9시 40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내란 사태 관련 특별 성명’에서 한 대표 발언에 대해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이라고 환영하며 여야 대표 회동을 제안했다. 국민의힘 비공개 최고위가 종료된 오전 10시쯤 친한(친한동훈)계 6선 조경태 의원이 기자들과 만나 여당 의원으로는 처음으로 탄핵 찬성 입장을 밝혔다. 오전 11시에는 긴급 의원총회를 시작했다. 의원들이 제2회의장에 모여 있는 동안 여인형 방첩사령관이 “대통령으로부터 체포나 구금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와 여당 내부에서도 사실 관련 입장 차가 더 갈렸다. 윤상현 의원은 한 대표와 중진들의 회동 이후 기자들과 만나 “세상에 (한 대표) 혼자 정보를 가지고 혼자 이야기해 당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어디 있나. 이에 대한 질타가 있었다”고 전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당대표실에서 나와 윤 대통령에게 ‘퇴진 계획’을 밝히라며 그러지 않으면 탄핵안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오전 11시 42분쯤 곽종근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국회 국방위 소속 박선원∙김병주 민주당 의원과 만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국회의원을 국회 본청 본회의장에서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곽 사령관은 ‘2차 계엄 가능성’이 제기되는 데 대해 “설사 그와 같은 지시가 하달돼도 거부하겠다”며 국민을 안심시키고자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오전 11시 46분 입장을 내고 계엄군이 선관위 청사를 점거한 것과 관련해 “명백한 위헌·위법 행위”라며 법적 조치를 촉구했다. 한 대표는 오전 11시 50분쯤 의총장으로 향하지 않고 급하게 국회 밖을 나섰다. 이후 한 대표가 윤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한남동 대통령실 관저에서 오후 1시쯤 대통령을 만났고 2시쯤 면담이 종료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尹 국회 방문 소식에 野 항의 집결우원식 “尹 방문 유보를” 긴급담화오후 시간에는 관련 제보·증언이 쏟아지면서 정치권의 긴장감이 더 고조됐다. 국방부는 야당 등에서 2차 계엄 가능성을 제기하자 긴급 브리핑을 열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인 김선호 차관은 오후 1시 30분쯤 만약 2차 계엄 요구가 있어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윤 대통령과의 면담을 마친 한 대표는 오후 2시 15분 국회로 복귀했다. 이후 오후 3시 국민의힘 의원들이 모여 있는 의원총회장에서 한 대표는 면담에 대해 “대통령 직무집행 정지 필요 입장을 뒤집을 만한 말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윤 대통령이 국회를 찾아 여당 의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야당 의원들과 보좌진들은 윤 대통령의 국회 진입을 막기 위해 본관 로텐더홀 계단에 집결했다. 그들은 “내란 수괴 체포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어 ‘윤 대통령의 국회 방문 계획이 없다’는 대통령실 공지가 나왔다. 또 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에도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담화도) 없다”고 확인했다. 그사이 우원식 국회의장은 오후 3시 20분쯤 의장접견실에서 진행한 긴급 담화에서 윤 대통령에게 “국회 방문을 유보해 달라”고 했다. 우 의장은 국회 잔디광장 및 국회 운동장에 헬기 착륙 방지 목적으로 대형버스를 배치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오후 4시 43분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야 3당 의원들은 계엄군이 중앙선관위를 침입할 당시 폐쇄회로(CC)TV를 공개했다. 이들은 “계엄군의 선관위 장악 목적은 선관위의 전산 서버였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부정선거 음모에 따라 비상계엄이 기획됐다고 주장했다. 오후 3시부터 열린 국방위 ‘비상계엄 사태’ 현안질의에선 야당 의원들이 김 전 장관 등 연루 군인들의 체포 및 구속수사를 촉구했다. 野 “계엄군, 선관위 명부 서버 촬영”국방위서 김용현 등 구속수사 촉구국민의힘은 이날 8시간에 걸친 끝장 의원총회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해 오후 9시부터 다시 논의에 돌입했다. 의총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오후 9시가 넘어서는 추 원내대표와 박정하 국민의힘 당대표 비서실장 등이 용산을 찾아 대통령실 참모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민주당은 오후 7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와 오후 8시 의원총회를 각각 열어 탄핵 추진 계획을 점검하고 7일 본회의 개의 시간을 오후 5시쯤으로 2시간 앞당겨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대표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라이브 방송을 직접 진행하며 국회 앞에서 탄핵 촉구 집회 중인 시민들과 만난 뒤 국회로 복귀했다.
  • “항명 알고도 지시 안 따랐다”…계엄군 지휘관들 양심고백(영상)

    “항명 알고도 지시 안 따랐다”…계엄군 지휘관들 양심고백(영상)

    지난 3일 비상계엄 당시 병력을 투입했던 사령관들이 6일 계엄령에 대해 위법성을 느꼈다고 잇달아 양심 고백을 하면서 ‘계엄의 밤’의 진실도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상황을 점검하는 등 실질적으로 계엄군을 통제한 정황이 드러난 가운데 곳곳에서 오히려 군이 ‘수위 조절’을 하며 항명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곽종근 육군특수전사령관(중장)과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중장)은 이날 김병주·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특전사 예하 부대인 제1공수특전여단·제3공수특전여단·제707특수임무단과 수방사가 현장에 투입돼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을 통제했다. 두 사람은 대통령의 담화 발표가 있기 10~20분 전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았고 TV를 통해 계엄령 포고를 알았다고 밝혔다. 병력 투입 지시에 따라 곽 사령관은 시설 위치를 고려해 가까운 예하 부대에 임무를 부여했고, 이 사령관은 수방사 병력을 국회로 출동시켰다. 한밤중에 발생한 상황이라 출동이 늦어졌고 부대가 국회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 상황을 보고받은 두 사람은 이상함을 느끼고 군인들이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곽 사령관은 병사들이 실탄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 사령관은 아예 무기 없이 움직이도록 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 출동한 병력이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도됐는데 곽 사령관은 우발 상황을 대비해 들고 간 탄통이었다고 해명했다. 부대가 움직일 때 기본으로 실려야 하는 장비들인데 사격을 위해 준비된 것으로 오해를 받았다. 곽 사령관은 저격수 또한 없었다고 했다. 해당 사항은 계엄군사령관을 맡았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에게도 보고됐다. 박 총장은 곽 사령관에게 실탄을 쓰지 않도록 지시했고 “총기 휴대를 안 하고 맨몸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하는 이 사령관에게는 “오케이 굿”이라고 답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군인 중 누구도 실제로 무기를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국회로 출동한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에 진입하는 모습도 포착됐는데 이는 현장에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곽 사령관의 지시에 따른 조치임이 밝혀졌다. 곽 사령관은 “강제로 들어가려면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다른 통로를 찾다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면으로 무리하게 들어가면 충돌이 불가피해 우회로를 찾느라 창문을 깨게 됐다.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명령을 비롯해 계엄군과 관련한 대다수 지시는 김 전 장관이 여러 차례 전화로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 역시 직접 전화해 계엄군 상황을 점검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윤 대통령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707특수임무단이 어디쯤 이동하고 있는지, 국회 상황이 어떤지 직접 전화로 확인했다. 곽 사령관은 “국회의원을 끌어내면 위법이고 임무를 수행한 인원들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항명이 될 줄은 알았지만 임무를 지키지 않았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군인들이 멈춘 게 의문스러웠는데 사령관 지시였다. 이제 이해가 된다”고 거들었다. 이 사령관 역시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며 항명 사실을 토로했다. 지난 4일 새벽 1시 1분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결의하자 곽 사령관은 1시 9분에 철수를 지시했다. 다시 집결한 군인들은 부대로 이동했고 새벽 4시 22분쯤 전원 복귀를 마쳤다. 차량을 이용했던 수방사는 다시 그대로 차로 이동하면 문제가 될 것 같아 특전사 부대와 함께 움직여 기다렸다가 복귀했다. 곽 사령관은 “지금 돌이켜보면 지시를 거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면서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설사 그런 지시가 있더라도 거부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부하들은 제 지시로 들어갔다. 책임은 제가 질 테니 부하들에게 책임이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울먹였다. 이 사령관 역시 “불법적이고 적절치 않은 건 절대 응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제가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부하들을 안 좋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미안하고 한편으로 가장 군인답게 행동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울시민의 안전을 지키고 전우들을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덧붙였다.
  • 특수전사령관 “국회의원 끌어내라는 장관 지시…항명이지만 시키지 않았다”

    특수전사령관 “국회의원 끌어내라는 장관 지시…항명이지만 시키지 않았다”

    “정당하지 않아 ‘실탄 지급 말라’ 해”“비상계엄이란 상황 언론 통해 인지” 곽종근 육군 특수전사령관(육사 47기)이 6일 지난 3일 밤 비상계엄 당시 상황과 관련,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국회의사당 인원들을 밖으로 빼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곽 사령관은 이날 특전사령부를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김병주·박선원 의원과 만나 ‘국회의사당에 진입했을 당시 상부에서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하면서 “제가 판단했을 때 국회의원을 끌어내는 것은 명백히 위법 사항이고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항명이 될 줄 알았지만, 그 임무를 시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곽 사령관과 두 의원의 만남은 ‘내란계엄 핵심 특전사령관, 양심고백’이란 제목으로 김 의원의 유튜브 채널를 통해 생중계됐다. 비상계엄 선포 당시 특전사는 국회 통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경계, 김어준씨의 ‘뉴스공장’ 경계 임무를 받았다고 곽 사령관은 밝혔다. 곽 사령관은 “당일 비상계엄이 언론에 보도되기 20여분 전쯤 (김용현) 장관 지시를 받아서 상황이 있을 것 정도로만 인식했다”며 “비상계엄이란 상황은 언론 보도를 보고 최초 인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 출동 명령 자체를 거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돌이켜 보면 당시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당시 판단은 군인 입장에서 수명(명령을 따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에게 공포탄과 테이저건(전기충격기) 사용을 요청했다고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와전된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곽 사령관은 “현장 707특임단에게 공포탄이든 뭐든 사격하지 말라고 지시해놓고 있는데, (특전사) 법무실장이 와서 ‘그건 계엄사령관 지침을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해서 사령관에게 전화했다”고 말했다. 이어 “계엄사령관이 ‘(공포탄 등을) 쓰면 안 된다’라고 정확하게 말했고, 내가 최초 판단했던 ‘사용하지 말라’고 했던 지시 사항과 일치해서 그 지침을 그대로 이행했다”고 덧붙였다. 곽 사령관은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 측면을 강조했다. 그는 부대 출동 시 내린 지침을 묻는 말에는 “출동했을 때 정당하지 않은 모습들이 있어서 우선적으로 절대 개인 인원들에게 실탄을 주지 말라고 했다”고 답했다. 국회 투입 당시 “저격수를 운용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곽 사령관은 또 707특임단이 국회로 출동하는 도중에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어디쯤 이동 중이냐’고 물어본 적이 한 번 있었다고 밝혔다. 곽 사령관은 “국민께 죄송하다. 작전 투입됐던 특전대원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도 했다. 곽 사령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전격 선포한 비상계엄을 현장에서 직접 실행에 옮긴 인물 중 한 명으로, 소속 부대에서 계엄군 병력을 동원한 역할을 맡았다.
  • “노화 속도 늦추면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

    “노화 속도 늦추면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

    갓생·욜로보다 중요한 건 자기돌봄건강히 살면 남보다 33% 노화 지연“전통 한식만으로 건강해질 수 있다” “지금 속도로 나이 들면 한국인은 죽기 전 10년 동안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살지 못해요. 노화 속도를 늦추는 건 생의 마지막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인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 국내에 ‘가속 노화’의 위험성을 처음 알린 정희원(40)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5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서울신문 광화문라운지 강연에서 “갓생이나 욜로보다 중요한 건 자기 돌봄”이라며 “자기 돌봄을 삶의 지향점으로 두고 건강하게 살면 남들보다 33% 천천히 늙을 수 있다”고 밝혔다. 가속 노화란 생활 습관으로 인해 실제 나이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더 드는 현상을 말한다. 정 교수는 한국이 ‘가속 노화’에 취약한 나라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속 성장을 강요받아 어떤 분야에서든 ‘우상향’을 원한다”며 “적당한 스트레스는 최고의 생산성을 내지만 너무 많은 스트레스는 몸을 갉아 먹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화를 부추기는 생활 습관을 지닌 사람은 전두엽 기능이 떨어지고 편도체가 과활성화돼 충동 조절 능력을 잃는다”며 “맵고 짜며 단 음식을 더 원하게 되고 수면의 질도 악화해 의사 결정 능력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했다. 그는 “선출직은 저속 노화 생활 습관을 지닌 사람들만 뽑을 수 있도록 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천천히 늙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 교수는 절식과 운동, 충분한 수면, 절주 등을 통해 노화 속도를 낮추라고 제안한다. 그는 “전통적인 한식은 저속 노화에 도움이 되는 지중해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흰쌀밥을 콩 섞인 잡곡밥으로, 과자를 견과류로 바꾸기만 해도 좋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튀김이나 단순당, 정제물, 초가공식품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짧은 시간에 강한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쇼트폼이나 인터넷 도박의 위험성도 경고했다. 반대로 책 읽기나 외국어 공부, 산책 등 비교적 덜 자극적인 활동이 장기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스마트폰, 소셜미디어(SNS) 같은 소극적 인지 활동은 반대급부로 그만큼의 스트레스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각박한 현실에서 평정심을 찾기는 쉽지 않다. 건강한 식단을 지키기로 유명한 정 교수도 “이번 주 당직을 서느라 36시간 연속 근무를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컵라면을 뜯고 있더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액상 과당보다는 제로 음료가 낫고 그보다는 물이 낫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산책을 하거나 짧게 운동해 보라”고 조언했다.
  • 아이브 안유진 “男선배 가수, 데뷔하고 나서 인사나 잘하라고 해” 폭로

    아이브 안유진 “男선배 가수, 데뷔하고 나서 인사나 잘하라고 해” 폭로

    가수 케이윌이 그룹 아이브 안유진을 만나 선후배의 우정을 다졌다. 케이윌은 지난 4일 유튜브 채널 ‘형수는 케이윌’을 통해 ‘형수의 사생활’ 새로운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이날 케이윌은 다음 브이로그 촬영에 앞서 제작진의 호출을 받았다. 유튜버가 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다소 부족한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제작진은 케이윌이 촬영해 온 LA 여행기 영상을 보며 “분명 볼 게 많은데 볼 게 없다”라며 솔직한 피드백을 이어갔다. 이에 케이윌은 제작진이 설명하는 주의할 점을 필기까지 하며 초보 유튜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가운데 자신의 영상을 보던 케이윌은 어설픈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진짜 나 막 찍었구나”라고 인정하면서도 “어쨌든 이건 다 편집할 거라는 생각으로 그냥 계속 찍은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제작진의 정확한 지적에 바로 수긍해 시선을 끌었다. 이후 케이윌은 피드백을 수용한 뒤 스타쉽 식구인 아이브가 오픈한 푸드트럭 구경에 나섰다. 케이윌은 배운 대로 아이브를 카메라에 담는가 하면, 멤버 안유진과 이야기를 나눴다. 안유진은 연습생 시절 케이윌이 “데뷔하고 나서 인사나 잘하도록”이라고 말한 것을 언급했다. 이에 그는 “그렇게는 안 했을 텐데”라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안유진은 곧 여전히 케이윌의 팬이라고 고백했고, 케이윌과 선후배의 우정을 다졌다.
  • “대통령 등 선출직, 건강 유지 계약서 써야”…‘저속노화’ 교수 일침

    “대통령 등 선출직, 건강 유지 계약서 써야”…‘저속노화’ 교수 일침

    “지금 속도로 나이 들면 한국인은 죽기 전 10년 동안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살지 못해요. 노화 속도를 늦추는 건 생의 마지막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인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 국내에 ‘가속 노화’의 위험성을 처음 알린 정희원(40)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5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서울신문 광화문라운지 강연에서 “갓생이나 욜로보다 중요한 건 자기 돌봄”이라며 “자기 돌봄을 삶의 지향점으로 두고 건강하게 살면 남들보다 33% 천천히 늙을 수 있다”고 밝혔다. 가속 노화란 생활 습관으로 인해 실제 나이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더 드는 현상을 말한다. 정 교수는 한국이 ‘가속 노화’에 취약한 나라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속 성장을 강요받아 어떤 분야에서든 ‘우상향’을 원한다”며 “적당한 스트레스는 최고의 생산성을 내지만 너무 많은 스트레스는 몸을 갉아 먹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화를 부추기는 생활 습관을 지닌 사람은 전두엽 기능이 떨어지고 편도체가 과활성화돼 충동 조절 능력을 잃는다”며 “맵고 짜며 단 음식을 더 원하게 되고 수면의 질도 악화해 의사 결정 능력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 같은) 선출직은 저속 노화 생활 습관을 지닌 사람들만 뽑을 수 있도록 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천천히 늙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 교수는 절식과 운동, 충분한 수면, 절주 등을 통해 노화 속도를 낮추라고 제안한다. 그는 “전통적인 한식은 저속 노화에 도움이 되는 지중해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흰쌀밥을 콩 섞인 잡곡밥으로, 과자를 견과류로 바꾸기만 해도 좋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튀김이나 단순당, 정제물, 초가공식품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짧은 시간에 강한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쇼트폼이나 인터넷 도박의 위험성도 경고했다. 반대로 책 읽기나 외국어 공부, 산책 등 비교적 덜 자극적인 활동이 장기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스마트폰, 소셜미디어(SNS) 같은 소극적 인지 활동은 반대급부로 그만큼의 스트레스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각박한 현실에서 평정심을 찾기는 쉽지 않다. 건강한 식단을 지키기로 유명한 정 교수도 “이번 주 당직을 서느라 36시간 연속 근무를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컵라면을 뜯고 있더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액상 과당보다는 제로 음료가 낫고 그보다는 물이 낫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산책을 하거나 짧게 운동해 보라”고 조언했다.
  • “고정 수입 위해 투잡했다”…채림, 이혼 후 경제 불안 고백

    “고정 수입 위해 투잡했다”…채림, 이혼 후 경제 불안 고백

    배우 채림이 이혼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지난 3일 방송된 SBS플러스·E채널 예능 프로그램 ‘솔로라서’에는 배우 명세빈이 강원도 양양으로 여행을 떠난 모습이 펼쳐졌다. 채림은 명세빈이 이혼 후 생활고를 겪었다고 하자 “우리 방송 쪽 일이 오픈 마인드로 일을 하지 않을까 싶지만 현실은 굉장히 보수적”이라며 공감했다. 그는 “제가 생각할 때 할리우드 배우들은 괜찮은데 왜 우리나라에선 이래야 하나 싶은데 그건 나만 생각하는 것 같더라”라며 “보는 사람의 시선이 중요한 직업이니까”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이어 “저는 너무 어려서부터 일을 하지 않았나. 일을 하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서 생활했는데 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돈으로 생활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활을 계속해야 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이 아이 때문에 겁이 나더라”라며 “‘벌면 되지’라는 생각이었는데 고정 수입의 필요성을 느껴서 다른 일을 했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황정음은 크게 공감하며 “며칠 전 당근(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모자 팔았다”고 말했다. 신동엽이 “직접 나갔냐”고 묻자 황정음은 “직접 나갔다. 만원 깎아드렸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채림은 “저도 힘든 시간을 보내오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이건 나한테 주어진 기회다. 내가 깊어질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편 채림은 2003년 가수 이승환과 결혼했다가 2006년 이혼했다. 이후 중국 CCTV 드라마 ‘이씨가문’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춘 가오쯔치와 2014년 결혼해 2017년 아들을 얻었다. 결혼 6년 만인 2020년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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