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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만명 학살’ 아르헨 독재자 비델라 종신형 받고 복역 중 초라한 죽음

    3만명의 반체제 세력을 살해한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의 원흉이자 군사 독재자인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17일(현지시간) 사망했다. 87세. 비델라는 인권탄압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인근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고령으로 숨졌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비델라는 군 총사령관이던 1976년 3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1974~1976년) 대통령을 몰아낸 뒤 의회·법원·정당 등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는 아르헨티나 지식인은 물론 평범한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여 물과 전기로 고문하고 산 사람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려 살해하는 등 각종 악행을 일삼았다.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3만여명이 살해당했으며, 사망자 대부분은 600여곳의 비밀수용소에서 처형된 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델라는 남미 지역 군사정권들이 자행한 정치적 탄압 활동인 ‘콘도르 작전’에도 참여했다. 이 작전은 1975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6개국 군사정권의 첩보기관이 자행했다. 이들은 좌익 게릴라 세력 척결을 주장하며 사회운동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납치, 고문, 살해 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10만여명이 사망하고 40만여명이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델라는 군부 독재 말기 ‘사면법’이라는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고 정권을 이양했으나 1986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5년 만에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2003년 집권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이 이를 취소하고 처벌에 나섰고, 2007년 아르헨티나 사법부가 그의 사면을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다시 재판을 받았다. 결국 2010년 12월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법원은 비델라에게 납치·구금·살인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종신형을 선고했다. 지난해에는 좌파 정치범들의 아이들을 빼내 군인 가족에게 불법 입양시킨 ‘유아 절도’ 혐의로 50년형을 선고 받았다. 한편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비델라 독재 정권의 더러운 전쟁 당시 진보적인 해방신학운동에 관여한 사제들이 군부에 체포되는 과정에 소극적으로 임해 “군사 정권을 방조했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10·27 법난’ 명예회복·피해보상 이번엔 제대로 될까

    ‘10·27 법난’ 명예회복·피해보상 이번엔 제대로 될까

    ‘10·27 법난 명예회복, 피해보상 제대로 될까.’ 지난 22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수정 의결된 ‘10·27 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보는 불교계의 시각은 한마디로 ‘기대반 걱정반’이다. 일단 법난 특별법의 기한과 법난 위원회의 활동기간이 연장된 데 안도하지만 실질적인 명예회복과 보상에선 미흡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국회 국방위가 수정 의결한 개정안의 골자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법난 특별법과 그에 따른 법난명예회복심의위원회(법난위원회)의 활동기한을 오는 6월 30일에서 2016년 6월 30일로 3년 연장하고 ▲법난위 위원장(조계종 총무부장) 산하에 사무처를 신설하며 ▲기존 시행령에 명시됐던 10·27 법난 역사기념관 건립 및 운영사업을 법안에 규정토록 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법난과 관련해 불교계가 집중적으로 요구해 왔던 것들. 국회는 불교신자 의원 모임인 정각회를 중심으로 불교계의 요구를 수용한 법률 개정안을 준비해온 끝에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 대표발의했고, 최근 국방위에서 이를 수정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개정안은 오는 29∼30일 본회의에서 최종 확정될 전망이다. 불교계는 일단 오는 6월 말 특별법 기한 만료로 흐지부지될 뻔한 법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활동을 지속할 토대가 마련된 데 안도하고 있다. 그동안 법난위에 지원단 형식으로 파견된 현역 군인을 포함한 국방부 관계자들과 법난위의 불편한 관계 해소도 반기는 눈치다. 법난위 산하에 사무처를 신설해 별정직 공무원 신분인 사무처장을 위원장이 임명토록 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법난 역사기념관 건립 및 운영사업을 법안에 규정키로 한 데 주목한다. 불교계는 법난 진상규명과 역사 교훈 차원에서 역사기념관 건립을 강력히 주장해 와 최근 정부로부터 ‘시설보조사업’에서 ‘민간보조사업’으로 전환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법난 기념관의 소유 주체가 국방부에서 불교계로 이전된 셈이다.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교계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동안 불교계가 한목소리로 요구해온 법난의 피해자 범위 확대와 구체적인 보상방안이 빠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정 의결된 개정안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피해자 범위를 ‘법난으로 인해 사망 또는 상이를 입은 자’로 규정했다. 불교계는 피해자 범위를 ‘강제로 연행·수사·구금 등 국가 공권력에 피해를 입은 자’와 ‘강압에 의해 조계종에서 부여한 직위에서 해직된 자’ ‘법난 당시 조계종 승적을 가진 자’로 확대할 것을 요구해 왔다. 조계종은 지난 2011년 12월, 법난이 발생한 1980년 12월 31일 이전 조계종 소속 스님 9796명에 대해 일괄적으로 피해자 신고 및 명예회복 신청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에 피해자 범위 확대 부분이 빠져 이들 스님의 피해보상이 어렵게 됐다는 관측이 많다. 특히 법난 관련 소관부처를 이관하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불교계는 그동안 “가해자가 어떻게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에 적극적일 수 있느냐”며 법난 소관부처를 국방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변경할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이와 관련, 조계종 총무원 관계자는 “법난과 관련해 불교계는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의 근거가 되는 특별법 시한 연장에 우선 관심을 가진 게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개정안 심사 과정에서 국방부와 문화부 간 협의를 통해 소관부처를 정리하도록 한 만큼 추이를 지켜본 뒤 법률 재개정 등 실효성 있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용어 클릭] ■10·27 법난 1980년 신군부의 핵심세력인 합동수사본부에서 불교 정화를 명분으로 조계종 스님과 불교 관련자 1929명을 강제연행, 수사·고문하고 군·경 합동병력 3만여명을 투입해 사찰·암자 5731곳을 일제 수색한 사건으로 불교계에선 한국불교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여기고 있다.
  • 윤여철 현대차 전 부회장 복귀…노조 주말특근거부 등 맡을 듯

    지난해 1월 울산공장 노조원 분신 사망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문으로 물러났던 윤여철 현대차 전 부회장이 전격 복귀한다. 정규직 노조의 주말 특근 거부와 사내하청 노조의 8500여명 전원 정규직화 요구 등 사면초가에 빠진 현대차를 구할지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24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윤 전 현대차 부회장이 이달 중으로 노무담당 부회장으로 회사로 복귀한다. 윤 부회장은 현재 출근 중이다. 현대차는 노조가 주말 특근을 7주 연속 거부하면서 4만 8000여대 규모의 생산차질을 빚고 있다. 또 사내하도급 인력 전원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는 사내하도급 노조도 이날부터 부분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히든카드’로 윤 전 부회장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부고] 원색 드레스의 대가, 美 디자이너 릴리 퓰리처

    ‘기자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을 만든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의 손자며느리인 미국의 디자이너 릴리 퓰리처가 7일(현지시간) 플로리다 팜비치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CNN과 AP통신 등 미 언론들이 보도했다. 81세. 1952년 퓰리처의 손자인 피트 퓰리처와 결혼한 그는 옷에 쏟은 오렌지 주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패션계에 입문했다. 오렌지 농장주의 유복한 주부였던 퓰리처는 1959년 취미로 집 앞에 주스 가게를 열었다. 옷에 과일 자국이 묻는 것을 발견한 퓰리처는 재봉사에게 주스가 묻어도 티 나지 않는 화려한 문양의 ‘유니폼’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독특한 디자인의 유니폼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퓰리처는 주스 대신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릴리 퓰리처’는 열대 동식물 무늬의 원색풍 드레스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1960년대 미국의 명품 패션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기숙학교 동창이자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가 퓰리처의 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이 미 라이프 잡지에 실리면서 옷은 전국적으로 유명세가 따랐다. 1993년 패션계에서 공식 은퇴한 퓰리처는 최근까지도 회사 고문으로 계속 일해 왔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식료품집 딸에서 11년 최장수 총리로…‘영국병’ 고친 여걸

    식료품집 딸에서 11년 최장수 총리로…‘영국병’ 고친 여걸

    8일(현지시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마거릿 대처(87) 전 영국 총리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보수당을 이끌며 ‘철의 여인’으로 불린 영국의 대표적인 지도자다. 대처 전 총리는 1925년 영국 중서부 랭커셔주 그랜섬에서 보수적인 감리교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식료품점을 운영했던 아버지 앨프리드 로버츠는 학력은 짧았으나 성실히 일해 사업을 번창시켰으며, 대처가 두 살 때 시의원에 당선된 이래 그랜섬의 시장 자리까지 올랐다. 대처 전 총리가 여성이라는 단점을 극복하고 장관을 거쳐 총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이러한 성실함과 책임감 덕분이었다. 대처 전 총리는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 칼리지에서 법학과 화학을 공부했다. 1950년 여성 후보로 최초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11살 연상의 기업인인 남편 데니스 대처를 만나 쌍둥이 남매를 낳은 뒤 금전적인 도움에 힘입어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1959년 보수당 소속으로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됐을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1961~1964년 연금·국민보험부 차관을 지냈고 교육 장관을 거쳐 1969년에 과학장관까지 역임했다. 1975년에는 보수당 대표인 히스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여성 야당 당수가 됐다. 이후 1987년 총선거 때까지 세 차례 연임에 성공하며 영국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대처 전 총리는 총리 취임사에서 “문제는 사회주의적 병폐”라면서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11년 재임 기간에 전후 복지 자본주의 모델인 ‘케인스주의’와 결별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여 당시 영국 내 만연했던 나태함을 버리고 ‘영국병’으로 불리던 고질적인 문제를 치유해 영국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동시대 정치적·역사적 친구로 ‘레이거 노믹스’라는 용어를 남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시장자유주의의 효시로 불린다. 취임 당시 장기 불황에 빠진 영국 경제를 강인한 지도력으로 회생시켰으며 과감한 민영화와 교육·의료 부분에 대한 복지 지출 삭감을 통해 1980년대 초 치솟던 인플레도 잡았다. 특히 경쟁력이 떨어진 공기업은 과감히 민영화하고 대대적인 탄광 노조의 파업을 강경 진압하면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통치철학을 가리켜 ‘대처리즘’이라는 단어도 생겨날 정도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한편으로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반공주의와 함께 ‘강한 영국’을 표방했다. 19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당시 영국 사회는 전쟁 찬반론으로 양분됐으나 “타국의 무력 침공은 영국의 주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명예와 주권을 위해서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 해군 기동부대를 파견해 두 달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외교적으로는 레이건과 함께 옛 소련에 대해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며 강력히 대응해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반면 1983년에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미국 크루즈 미사일을 배치하고, 1986년에는 리비아 폭격을 위해 미군 전투기의 영국 공군기지 사용을 허가하면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원수로부터 ‘피의 보복’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대처의 외교 노선에 대해 ‘미국의 푸들’이라는 조소도 있었다. 하지만 1990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10%에 육박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한계를 드러냈고, 새로 출범한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당의 반발에 부딪혀 1990년 11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미국 윌리엄메리대 총장과 필립 모리스 고문 등을 지냈다. 2002년 가벼운 뇌졸중을 겪은 이후 기력이 쇠약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 데니스 경은 2003년에 사망했다. 건강이 나빠진 이후로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뇌졸중으로 끝내 숨을 거뒀다.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에 각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버락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대처 전 총리의 서거로 전세계는 위대한 자유의 투사를 잃었고 미국은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대처는 대단한 총리였다. 그녀는 뚜렷한 의견을 가진 훌륭한 여성이었다. 지난 수십년간 그녀를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녀가 대중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8) 한국 스포츠외교 산증인(하) 김운용 前 IOC 부위원장

    [명사가 걸어온 길] (8) 한국 스포츠외교 산증인(하) 김운용 前 IOC 부위원장

    인생의 큰 변화는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외교관을 꿈꾸던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군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 첫 터닝 포인트였다면,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지내면서 태권도와 인연을 맺은 것이 두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김 전 부위원장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체력은 국력이라고 했지만 체육회 1년 예산은 문교부에서 나온 1억원이 전부였다. 돈이 없는 경기단체의 장에 정치적 실력자를 배정하다피시 했다. 사격은 박종규(대통령 경호실장), 복싱은 김택수(국회의원), 축구는 장덕진(농수산부 장관) 하는 식이었다. 나는 정치적으로 들어간 건 아닌데 좌우간 (경호실 차장으로) 힘이 있을 때니까 호주머니 털어서 (선수들을) 여관에 합숙시키곤 했다”고 돌아봤다. 태권도와 어떤 접점도 없었던 그가 이런 행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비전 때문이었다. ‘체력은 국력’이란 강령 아래에선 국위 선양할 것이 태권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에만 사범이 10명 있을 정도로 해외에 사범들이 많았지만 국내에는 중앙 도장도 없고 세계연맹도 없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1971년 1월 대한태권도협회장으로 취임할 때만 해도 협회에 체계라곤 없었다. 30개 파로 나뉘어 제각각 단증을 발급하는가 하면 사범 교육 제도도 전무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어수선하던 태권도계에 국기화, 세계화, 국위 선양의 기수, 호국의 기수란 네 가지 비전을 제시하고 기틀을 잡아 나갔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70년대를 관통한 불도저식 개발은 태권도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협회장 취임 일성으로 중앙 도장인 국기원 건립을 내세운 그는 막강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인다. 청와대 경호실 차장이란 직함이 그 추진력에 연료를 제공했을 터. “호주머니 털고 친구에게 용돈 뜯어다가 지었다. 땅은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빌렸는데 그것도 옥신각신했고. 돈이 없으니까 여기저기서 기부도 받았다. 이병철 삼성 회장 300만원, 정인영 현대건설 부사장 200만원 등등…. 청와대 경호관 월급이 2만원일 땐데, 그때 그 돈이면 굉장한 거다. 철근은 인천제철에서, 지붕은 벽산에서 슬레이트를 갖다 놨다. 동창들 찾아가서 (사정해서) 지었다. 시멘트 한 포가 270원, 철근 1t이 2만원 할 때다.” 72년 중동 오일쇼크가 덮쳤지만 국기원은 그해 11월 3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취임한 지 1년 10개월 만의 일이다. 다음 목표인 세계화를 위해 73년 5월 국기원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린다. 대회 직후 국기원에 20개국 대표가 모여 세계태권도연맹이 만들어진다. 이로써 태권도의 국내 보급을 맡은 대한태권도협회, 세계 각국에 태권도를 전파하고 외국 협회를 관리하는 세계태권도연맹, 태권도란 무도의 본산으로서 두 단체를 지휘하는 국기원이란 지금의 체계가 비로소 갖춰졌다. 태권도의 기반을 닦은 주인공이기에 지난 2월 태권도의 올림픽 핵심 종목 잔류 결정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법했다. 그는 “스위스 로잔 집행위원회 전에 (주변에) 전화로 물어보니 ‘레슬링은 총회에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태권도는 그런 염려가 하나도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태권도가 (1994년 파리 IOC 총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들어갔을 때 찬성 85표, 반대 0표로 들어갔지 않았나. 최근에는 찬성표만큼 반대표가 나온다고 그러는데 그래도 (그때의 힘이) 아직은 남아 있다. 현재 IOC 부위원장인 세르 미앙 능(싱가포르), 토마스 바흐(독일), 크레이그 리디(영국)와 존 코츠(호주) 집행위원은 그때 모두 태권도를 도와준 사람들이다. 그런데 레슬링은 힘이 하나도 없다. 겉으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이런 일은) 힘을 갖고 하는 것”이라고 은근히 자신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태권도가 계속 살아남으려면 복싱에서 헤드기어를 따온 것, 펜싱을 보고 전자호구를 도입한 것처럼 앞으로도 끊임없는 개혁을 해야 한다. 마케팅과 국제적 감각이 아직은 부족하다.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가 세계태권도연맹을 도와줘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태권도에서 외연을 넓힌 그는 74년 2월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으로 취임, 스포츠 외교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는 영화 제목을 본뜬 ‘동방불패’(東方不敗)란 말을 들을 정도로 굵직굵직한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한편 국제 스포츠 무대의 요직을 차지한다. 83년 암으로 사망한 김택수 IOC 위원에 이어 2년 뒤 박종규씨마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뜨자 그는 86년 10월 17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91차 IOC 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된다. 일주일 뒤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그는 88년 IOC 집행위원, 92년 IOC 부위원장으로 뽑혔고 97년 무주·전주 유니버시아드, 99년 용평 동계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를 유치하느라 숨 가쁘게 세계를 누볐다. 그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 이어 2000년 시드니 대회를 통해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진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것으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이것을 최고의 업적으로 손꼽는다. 시드니 대회에서는 남북 동시 입장이라는 정치적 이벤트까지 성사시키며 99년에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스캔들(개최지 선정을 둘러싸고 IOC 위원 매수와 금전 살포가 있었음이 밝혀져 위원들이 대거 제명되고 개혁안이 통과)로 인한 타격을 만회하는 노련미를 발휘한다. 그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 상당히 떨어져 나간 이 스캔들 때문에 김 전 부위원장이 30년 동안 쌓아 온 명성과 입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2001년 IOC 위원장에 도전했다가 자크 로게 현 위원장에게 밀려 쓴잔을 마시고, 이듬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 실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회 조직위원회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 구설에 올랐다. 여기에 더해 2003년 프라하 IOC 총회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일은 조금씩 그의 쇠락을 부채질한다. 결정타는 2003년 12월에 시작된 검찰 수사였다. 그는 세계태권도연맹 등의 공금 38억원을 2000년쯤부터 빼돌렸고 각종 청탁과 함께 8억여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2004년 6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추징금 7억 8800여만원이 선고된 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원심 확정 판결을 받았다. 구치소에서 그는 “정치적 누명을 쓴 것”이라며 IOC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구명 노력을 했지만 IOC는 2005년 2월 그를 제명하는 권고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해 7월 총회에서 제명될 움직임이 보이자 그는 두 달 전에 부위원장직을 자진 사퇴한다. 6월 30일 가석방으로 풀려난 그는 지금도 자신을 몰락시킨 검찰 수사를 “평창 유치 실패의 책임을 돌리기 위한 정치세력의 보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IOC 위원들 얼굴만 보면 ‘태권도’, 또 보면 ‘평창’, 이러고 다녔다. 체육회장을 하면서 ‘한국이 스포츠 강국이 되려면 동계올림픽도 유치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한국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쇼트트랙밖에 없었다. 평창(을 위한) 테스트로 시작한 게 99년 용평 동계아시안게임이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밴쿠버와 평창의 시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김진선 당시 강원도지사나 따라온 국회의원들은 나만 믿고 되는 줄 알았는데 (실패하니) 내용도 모르고 내가 부위원장 (재선)하려고 (유치에) 방해를 놓았다고 했다. 나는 평생 태권도, 올림픽 하면서 한국 체육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사람인데 방해를 놓았다고 하니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정치세력 힘이라는 게 사람을 잡더라.” 세간의 시선과 그의 입장에는 이렇게나 큰 간극이 있다. 정치권에 대한 커다란 피해 의식을 감추지 못했다. “평창이 2007년 과테말라 총회에서 세 번째로 도전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지철씨와 변양균씨를 시켜 (현장에) 오지는 말고 팩스와 전화로 도와달라고, 그러면 사면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사면을) 안 해 주고 나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특별사면) 했다. 정치하는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다.” 한국 스포츠와 함께 격동의 40여년을 보낸 뒤 그는 활동하던 단체들의 고문직을 맡으며 2선으로 물러난다. 최근에는 집필과 특강에 전념하고 있다. 1년에 절반은 집을 떠나 세계를 떠돌던 현역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노 전 대통령에게 감사하다”고 농을 던졌다. “이제는 명예회복도 많이 되고 (사람들이) 업적도 많이 알게 되고…. 편하다. 일본과 한국의 여러 대학에 특강도 나가고 가만히 있어도 석좌교수 해 달라는 데(명지대·조선대)도 있다.” 소년 시절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그는 좋아하는 피아노 덮개도 다시 열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시절 독주도 많이 했는데…. 쇼팽을 가장 좋아한다. 집사람도 (이화여대) 피아노과를 나왔고 우리 딸(차녀 혜정씨)도 피아노를 전공했다.” 겉으로 보면 세계 무대를 향한 열정의 파랑(波浪)은 잦아든 듯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IOC 무대와 한국 스포츠 외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스포츠 외교 전문가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나간 뒤 스포츠 외교를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해야 한다며 체육인재육성재단(2007년 설립)이라는 게 생겼던데 그게 잘 되겠나? 인재가 저절로 키워지나? 현장에서 커야지. 인품도 있어야 하고 교양도 있어야 한다. 상대방 문화도 알고 우리 문화와의 차이를 초월해 마음을 끌고 와야 하는 게 스포츠 외교다. 나는 누가 키웠나? 태권도 세계화를 위해 뛰고 IOC에서 올림픽 치르면서 사람 사귀면서 커진 거지 누가 돈 대줘서 키운 게 아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우리 존재 사라지는 날 고대… 정의구현 필요없는 세상 오길”

    “우리 존재 사라지는 날 고대… 정의구현 필요없는 세상 오길”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정의로워져서 특별히 정의 구현을 위해 누군가 나설 필요가 없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지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지난 1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7년 만에 새 대표를 선출했다. 서울대교구 소속 나승구(50) 신부다. 2006년부터 대표를 맡아온 전종훈(57) 신부는 삼보일배·오체투지 순례와 같은 고된 활동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져 물러났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유신독재 때인 1974년 결성돼 민주화의 굽이굽이에서 뚜렷하고 의미있는 이정표를 남겨왔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의 진상을 폭로해 거대한 민주화 함성의 용광로인 ‘6월 항쟁’에 불을 댕긴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나 신부를 20일 그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성당에서 만났다. 1991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지도신부, 서울 신월동성당 주임신부 등을 지냈다. “사제 서품을 받은 그해 봄 강경대와 김귀정이 시위현장에서 경찰 폭력진압에 사망했어요. 이후 ‘분신정국’이라 불렸던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계속됐지요. 이후 효순이·미선이, 부안 핵폐기장, 새만금 등 너무 많아 열거할 수도 없는 불합리한 일들이 이어졌고, 저는 가급적 현장에 그들과 같이 있으려고 했어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나 어렵다, 나 정말 힘들고 지쳤다고 말하는 건데, 그들 곁에 내가 있어 힘이 돼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것이 바로 제가 알고 있는 하느님 복음의 실천이기도 했고요.” 그는 정의구현사제단 탄생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유신독재를 언급하며 “공공성의 견지에서 보면 지금이 유신독재 때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다”고 했다. “과거 군사독재가 있던 자리를 이제는 재벌과 독점자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윤 창출에 혈안이 된 자본의 놀음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상처받고 고통당하고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진보’와 ‘보수’로 갈라놓고 보는 이분법이 사회 통합을 해치는 주범이라고 말했다. “어느 쪽을 보수냐 진보냐로 나누는 것은 주로 정치권의 행태입니다. 자신을 정통 보수라거나 정통 진보라고 명확히 갈라서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사안별로 그때그때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판단을 하는 것이죠. ‘종북’이니 ‘꼴보수’니 하는 말들을 없애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대통합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는 “미사 때 강론을 하면서 용산참사나 강정마을 등을 언급하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중간에 나가버리시는 어르신들도 계시다”면서 “그분들의 생각도 존중하고 그분들의 얘기를 끝까지 잘 들어드리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김태균 기자 windsea@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하)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하) 함세웅

    우리 나이로 일흔둘. 오랜 삶의 길을 걸어온 함세웅 신부지만 지난 일보다 지금의 일에 대해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숨 고를 틈조차 없이 활동하는 이유다. 함 신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핍박받는 이들이 널려 있다는 증거다. 그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사망 사건(1987년)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정치 민주화를 이끈 지 올해로 26년이 됐지만, 경제민주화, 남북 화해·통일,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그가 나서야 할 일들은 수북이 쌓여 있다. 이 때문에 노(老) 신부의 마음은 바빠 보였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함 신부를 다시 만나 민주화 이후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이어 갔다. 민주화 이후 함 신부와 사제단에 전국민적 시선이 다시 쏠린 건 2007년 10월 김용철(55)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 민주화의 물꼬가 터진 지 꼬박 20년째 되던 해다. 삼성그룹 구조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 변호사가 “내 이름의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원이 관리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며 시작된 사건은 17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한국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10월 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경제정의민주화 운동을 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사제단의 고문인 함 신부도 회견 자리를 지켰다. 그는 김 변호사를 처음 만난 그해 10월 18일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김 변호사가 가까운 친구 등과 저를 찾아왔어요. 그는 자신이 삼성 탓에 당했던 고통을 쏟아냈어요. 예컨대 삼성에서 나온 뒤 검사 출신 선배와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는데 삼성이 압력을 가한 까닭에 사건을 못 맡고 있다는 등의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비자금 조성 등 삼성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털어놨어요. 얘기를 다 듣고는 저와 동료 사제들이 김 변호사를 나무랐어요. ‘삼성에서 간부를 지낸 당신도 결국 공범자인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왜 왔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요. 삼성을 위해 일하면서 잘못한 일은 인정하지만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 책임자가 저지른 범죄가 워낙 크니까 자기고백을 통해 삼성의 범죄도 고발하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모두 알아채고 정화시켰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어요. 김 변호사는 당시 삼성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가 물었죠. ‘김 변호사, 당신 감옥 갈 각오 돼 있소?’라고요. 그랬더니 ‘돼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럼 같이 하자’고 했죠.” 이후 사제단은 김 변호사를 보호하며 삼성의 비자금 조성과 사회 전방위로 진행된 불법 로비의 수법, 검찰·언론계·관계와의 유착 의혹 등 파괴력 있는 폭로를 이어 갔다. 함 신부와 사제단은 이 사건이 단순히 거대 재벌의 비리를 폭로하는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경제민주화의 신호탄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우군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검찰과 언론은 물론 믿었던 노무현 정부까지도 사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삼성 돈의 힘이 컸어요. 부끄럽게도 노무현 정부는 삼성에 이미 예속돼 있었어요. 노 대통령은 물론 그 아래 참모진도 몇 명 빼고는 모두 삼성 편에 서 있었습니다. 어렵게 특검까지 끌고 갔지만 특별검사가 삼성에 종속된 사람이었어요. 특검은 의혹 대부분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일부 조세포탈 및 배임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기소했어요. 결국 우리가 폭로한 삼성의 불법 행위는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나고 삼성 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에 대해서 이건희 회장의 배임 혐의를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리는 등 법의 심판이 일부 있었지만 이마저도 넉달 만에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 줬습니다. 삼성이 우리 사회 전반을 다 돈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체감했어요. 그때가 기업민주화와 경제민주화를 할 절호의 시기였는데…. 몇몇 기자들이 비아냥대며 ‘신부님이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오히려 찾아준 셈이에요. 이건희씨에게 감사받아야 해요’라고도 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계나 법조계, 언론계와 달리 자본권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천주교단은 사제단에 큰 힘이 돼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함 신부의 설명은 달랐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자 가운데 삼성에 다니는 간부들이 많고 대기업으로부터 사회복지 후원금을 많이 받으니까 기업의 불법성을 고발하지 못해요. 어찌 보면 교회는 기업이 흘리는 떡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사는 거죠.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이었을 당시 김 변호사를 도왔던 전종훈(57) 신부에게 안식년을 명분으로 3년이나 성당을 맡기지 않았어요. 권한을 남용한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죠. 신부들이 삼성비리 폭로에 앞장서니까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함 신부와 사제단은 정계 등의 인사들로부터 ‘왜 삼성 같은 기업을 몰아세우느냐’는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함 신부는 “우리도 국제적 기업인 삼성이 잘되길 바랐다. 다만 건강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한 것이다. 불의한 오너 일가가 적은 자본으로 기업을 사유화하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 결과는 사제단의 애초 계획과는 엇나갔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열병같은 진실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나는 말한다. ‘사제단이 있다’고…”라고 적을 만큼 함 신부와 동료 사제들에 게 깊은 경의와 신뢰를 표했다. 함 신부가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공식 은퇴한 뒤 가장 공을 들이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근태 기념 치유 센터’ 건립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인권의학연구소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사업인데 고문 등 잘못된 공권력 탓에 정신적 상흔을 껴안고 사는 이들을 위한 치유 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이다. 함 신부와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의 노력 속에 건립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고문 피해자이자 ‘민주화의 대부’인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이름을 내걸었다. 함 신부가 고문 피해자 문제에 다시 관심을 가진 것도 김 전 의원 때문이다. “1970~1980년대에는 정부기관으로부터 고문당한 분들 이야기를 듣고 마음 아파 밤잠을 설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수십년을 들으니까 저도 고문 피해의 무서움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김 전 의원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김 전 의원과는 1980년대 만나 30년을 가깝게 지냈거든요. 우리들은 그에게 ‘민주화 선봉가로 앞장서라, 더 뛰어라’, ‘왜 그렇게 행동에 신중하냐’라고 채근하고 등을 떠밀었어요. 그런데 2011년 12월 30일 김 전 의원이 돌아가신 뒤 그가 서울 남영동의 경찰 대공분실에서 전기 고문 등을 받아 평생 후유증을 앓은 사실이 재조명됐잖아요. 그제서야 ‘아, 우리가 김 전 의원이 고문당한 사실을 잊고 지냈구나. 사선을 넘나든 분께 위로와 치유를 주기보다는 너무 가혹하고 모진 주문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문을 견뎌 냈던 김 전 의원같은 분들 덕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열매를 맛보고 있잖아요.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이 김 전 의원 같은 분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공권력 피해자와 그 자녀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센터 건립을 위해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또 지난 1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함 신부는 진보정치 진영의 원로다. 지난해 18대 대선 때도 재야원로회의에 참석해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 측에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그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대통합을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대(大)자가 들어가면 항상 거짓이 있어요. 통합은 진실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해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구원론을 통합원리와 해체원리로 설명하거든요. 통합원리는 사랑, 용서, 자비, 은혜, 상생 같은 것이고 해체원리는 회개, 갈등, 뉘우침, 고발 같은 것이에요. 둘 다 예수님의 가르침이지요. 큰 집을 지으려면 잘못 지어진 집을 허물고 땅을 파야 해요. 이것이 해체 기능이에요. 그런데 아무런 기초작업 없이 큰 집만 짓겠다는 것은 거짓이죠. 다시 말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된 과거를 뉘우치고 청산해야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구호는 구호일 뿐 정치가 될 수는 없어요.” 함 신부는 야권에도 애정 어린, 그러나 따끔한 질책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열린우리당 의원의 절반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과 똑갚습니다’라고요. 성향과 관계없이 정치꾼인 거예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야권 내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정신 못 차리는 것이 가슴 아프죠. 정치인 본연의 소명대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야당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정권교체는 저절로 이뤄지겠죠. 한 시민으로서 저도 야당 의원들을 달래고 채찍질하며 끌어가야겠죠.” 함 신부에게 “세간의 평가처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진보, 보수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모순된 답변인 듯 들려 재차 물었다. “보수와 진보를 지금처럼 나누는 언론의 인식이 잘못됐어요. 원래 보수라는 단어는 뜻이 좋아요. 한자로 ‘보전하고 지킨다’는 것이니까요. 즉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 가치를 지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돼 있어요. 결국 참된 진리를 지키고 보전하면 진보주의자가 되는 거죠. 언론이 말하는 보수는 수구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반민족 행위를 칭송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수겠어요.” 사회 약자의 편에 서서 한평생을 산 함 신부에게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행복해질 수 있는 비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선 ‘어려움아, 놀자’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요즘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근엄하고 초월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고 인간과 함께 뛰어 노시는 하느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신으로 인식하거든요. 두 번째로는 우리보다 어렵고 억울한 사람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이 사회에 주신 메시지는 아마 ‘그래, 나 억울한 사형수다. 네가 힘들고 억울해도 나보다 억울하냐. 난 죽었잖아. 넌 그래도 살아 있잖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청년들 가운데 피자를 10분 빨리 배달하려다 사고로 숨진 이도 있고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용광로에 빠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잖아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젊은 기자는 “종교·사회의 원로에게 살아가면서 힘이 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함 신부의 답이 돌아왔다. “원로? 나 원로 아녜요. 아직 청춘이지(웃음).”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저자와의 차 한잔] 장편 정치역사 소설 ‘1987’낸 하창수

    [저자와의 차 한잔] 장편 정치역사 소설 ‘1987’낸 하창수

    1987년은 실로 많은 사건이 발생한 해이다. 1월 14일, 서울대 학생인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질식해 세상을 떠났다. 6월 10일, 수많은 사람이 서울 도심을 행진했다. 연세대 학생인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맸다. 이어 6·29 선언이 나왔다. 8월 29일, 국내 한 종교집단에서 32명이 집단으로 자살한 변사체가 발견됐다. 8월 31일, 정당 대표들이 모여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자는데 합의했다. 10월 12일,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6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여객기가 미얀마 근해인 안다만 상공에서 공중 폭파돼 탑승객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12월 26일,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또….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시간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고 분탕질을 치고 욕설을 뱉을 수는 있지만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예전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또 전혀 새로운 일들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1987년은 그 멈추지 않는 시간의 한때였고, 그 이전의 미래였고, 그 이후의 과거였습니다.” 장편 소설 ‘1987’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저자 하창수(53)씨의 10번째 장편 소설로 원고지 3000매라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속에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1987년을 중심으로 이전 10년과 이후 10년을 주축으로 하면서 3대에 걸친 가족사와 현대사를 다룬 정치역사 소설이다. 이러한 시공간적 배경을 바탕에 깔면서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라는 물음표를 들고 ‘나는 누구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간다는 것이 이 소설의 중심 축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표면적 주제는 적론(敵論)이다. ‘도대체 적은 누구란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소설적 답변이 647페이지를 관통한다.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다’는 작중 인물의 고통스러운 외침은 처절하다. 이 작품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6·29 선언, 3당 합당 등을 먼 배경으로 삼아 정치적 공기를 깔고 시작된다. 하지만, 작가는 암시만 줄 뿐 시대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주요 사건에 연루돼 있지만, 소설은 철저히 개인사를 통해 시대를 바라본다.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은 소설가 윤완, 테러리스트 선우활 등 2명이다. 윤완은 소설가의 감각으로 선우활의 개인사에 대해 강렬한 작가적 흥미를 느낀다. 그가 주목한 것은 권력층이 정치적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운용하는 조직이다. 여기에는 정보기관 등 권력자들이 관여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조직과 대척점에 있는 반정부 조직이 운영하는 비밀 테러단체의 존재다. 폭력적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한 채 각계각층에 잠복해 있다. 이 두 개의 조직은 상생의 관계에 놓여 있다. 적이자 동지이다. 이런 것들을 지켜본 윤완은 소설로 쓰려 하지만 시대가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 정치의 흑막과 미스터리한 상황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만들어내면서 추리적 긴장감으로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였습니다. 3당합당의 막전막후에 대해 다시 알게 되면서 충격에 빠졌습니다. 문민정부가 과연 민(民)이 세운 정부인지. 군부독재의 연장선상인지 궁금해서 공부를 하다 보니 결국 1980년대, 70년대, 60년대, 한국전쟁,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더군요. 아버지의 아버지 시대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펜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완성하기까지 13년 걸렸네요.” 책 속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인간의 세계는 비밀로 지탱된다. 비밀을 영원히 깊디깊은 암흑 속에 가두려는 자와 어떻게든 그것을 까발리려 공개하려는 자 사이의 긴장, 이 정치적 관계가 결국 인간 사회를 유지하게 하였다고 하면 억측일까.’ 이 소설이 주는 궁극적인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국인의 정체성 찾기”라고 대답한다. 저자는 1987년 계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당선작 ‘청산유감’으로 등단했다. 1991년 작가의 군대체험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조선시대 이단 화가들의 장대한 파노라마를 그린 ‘그들의 나라’, 정신병적 기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함정’ 등 25년 동안 10편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미국, 탈레반과 테러 공모”…아프간 대통령 ‘면전’ 비난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취임 후 처음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 중인 상황에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미국을 강하게 비난해 양국 간 불협화음이 고조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카르자이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간) TV중계 연설을 통해 전날 발생한 탈레반의 자살폭탄테러가 “미군이 2014년까지 아프간에서 철수하면 탈레반 세력이 늘어날 것이라고 겁주기 위한 것”이라면서 미군이 아프간 주둔을 정당화하기 위해 탈레반과 공모했다고 주장했다. 탈레반은 전날 카불 국방부 건물과 동부 코스트 지역에서 두 차례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해 민간인을 포함해 19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탈레반 측은 미국에 자신들의 타격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테러를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이 같은 미국 비난 발언으로 헤이글 국방장관의 체면이 구겨졌다. 최근 미군의 아프간 철수 계획을 두고 양국 간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이 인기 없는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이날 카불에서 헤이글 장관과 공동기자회견을 열 예정이었으나 이 역시 보안상의 우려를 이유로 취소됐다. 헤이글 장관은 이날 오후 카르자이 대통령과 비공개 회담을 갖고 양국 간의 오랜 우의관계를 새롭게 했다며 긴급 진화에 나섰다. 헤이글 장관은 회담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탈레반과 협력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해명했다. 이런 가운데 11일 수도 카불 인근 와르다크주의 미국-아프간 합동군 기지에서 내부자 공격으로 인해 미군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고 미 국방부가 밝혔다. 아프간 보안군도 최소한 3명 사망했다. 이 지역은 최근 카르자이 대통령이 미군 특수부대가 민간인을 고문하고 살해했다며 철수를 명령한 곳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차베스 시신 방부처리… 군박물관에 영구 안치

    암 투병 끝에 지난 5일(현지시간) 숨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시신이 현지 박물관에 영구적으로 보존, 전시될 예정이다. 8일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남미 등 정상 33명을 포함, 55개국 사절단이 참석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은 7일 “우리 ‘사령관 대통령’의 육신은 호찌민이나 레닌, 마오쩌둥처럼 방부 처리돼 군박물관에 안치될 것이며, 모든 국민이 영원히 그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마두로 임시 대통령은 또 차베스 시신은 크리스털관 속에 영구 전시될 것이며, 장례식 후 군박물관으로 옮기기 전 현재 빈소인 군사학교에서 일주일 더 공개해 더 많은 사람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지난 6일 오후부터 군사학교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한 추모객이 2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수도 카라카스의 대통령궁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군박물관은 차베스가 1992년 2월 4일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병영으로, 이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8일 오전 11시(한국시간 9일 0시 30분) 시작된 장례식에는 이미 카라카스에 도착한 남미 정상들을 비롯해 미국·중국·유럽 등에서 파견한 조문사절단이 참석했다. 앞서 베네수엘라 외교부는 장례식에 전 세계 55개국에서 사절단을 보낸다고 알려왔다면서, 이 가운데 브라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니카라과, 우루과이, 에콰도르, 페루, 쿠바 등 33개국에서 국가 정상이 참석한다고 밝혔다. 특히 핵개발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인권 문제로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도 참석하기로 해 이번 장례식은 남미 좌파 및 반미 수장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될 전망이라고 언론들은 전했다. 미국에서는 그레고리 믹스(민주당) 하원의원, 윌리엄 델라헌트 전 하원의원이 대표로 참석했고, 중국은 장관급인 장핑(張平)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파견했다. 한국에서는 대표단을 별도로 파견하지 않고, 주베네수엘라 한국대사가 참석했다고 관계자가 전했다. 한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전 대통령은 7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차베스 사망 이후 베네수엘라가 많은 도전과제들을 맞이할 것이라면서 “이를 극복하려면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는 체계적이고 투명한 정치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차베스 지지자들을 향해 “민주적 제도를 건설하고 강화하는 것이 투명한 정치시스템 구축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정치 참여 확대와 야당과의 대화, 노동계·시민사회의 적극적 역할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고문 기술자’ 이근안 마지막 언론 인터뷰

    ‘고문 기술자’ 이근안 마지막 언론 인터뷰

    “그 시절로 돌아가지도 못하지만 돌아간다면 절대 고문 안 합니다. 나로 인해 손가락질받은 가족들과 내 손을 거쳐 간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공연한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뿐이에요. 아무 보람도 없는데….” 평생을 달고 다닌 ‘고문기술자’라는 꼬리표. 거동이 불편한 이근안(75)씨가 6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날을 돌이키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죄지은 자’로서의 참회와 그동안 말 못한 심경들을 털어놨다. 이씨는 이번이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여생을 은둔하며 기도하고 참회하며 살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맨 처음 대공 수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6·25 당시 인민군들에게 온 가족이 살해당할 뻔했다. 당시 형이 육군 장교여서 가족이 처형자 명단 1순위에 올라 있었다. 다행히 도망쳐 목숨은 부지했지만 당시 기억이 남아 간첩 잡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군사정권 시절 여러 간첩들을 검거하면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 영광은 모래성과 같은 것이었다. 도망자 신세가 된 이후 가난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가정이 엉망이 됐다. 봉사활동을 하며 덕망을 쌓던 아내는 동네 청소부로 전락했고 큰아들은 살기가 어려운지 거의 연락이 안 된다. 둘째 아들은 심장마비로 죽은 지 올해로 꼭 10년째다. 막내도 고생만 하다 재작년 교통사고로 죽었고 며느리는 손자들을 데리고 나가 버렸다. 지금은 월 20만원짜리 쪽방에 살고 있다. 난 지난해 6월 쓰러졌다가 간신히 일어났지만 콩팥과 심장에 혹이 다섯 개라 손도 못 대고 죽기만 기다리고 있다. →지난달 30일이 김근태 전 의원의 1주기였다. -아직도 김 전 의원을 처음 만났을 때와 신문 과정 등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장례식에 가고 싶었지만 교회 지인들이 ‘가 봤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라며 다들 말렸다. 그래서 빈소에는 가지 못하고 누나 산소가 있는 김해 은하사 뒷산에 올라 조용히 기도드리고 왔다. 그날 많이 울었다. →“이근안한테 고문당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이 아닌 것들도 많다. 그동안 일일이 바로잡을 길이 없어 속앓이만 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내게 고문당했다고 해야 사람들이 공감하고 민주화 투사로 알아주는 건지…. 대표적으로 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은 내가 고문 안 했다. 이 전 장관은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왔는데 당시 난 검거만 했고 신문은 김모 선배가 했다.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다는 얘기들도 있는데. -잘못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다. 간첩을 소탕하며 공적을 쌓고 국가에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다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에 ‘씹다 버린 껌’이 되니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들었다. 나라를 위해서만 일했는데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런 취급을 받나 싶어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경 공부를 하며 그런 마음들을 내려놓았고 내 죄를 깨닫게 됐다. 내가 고문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죄인이라 생각한다. 일일이 찾아가 사죄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교인으로서 참회, 회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사과라는 의미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몰라주더라. →얼마 전 책을 출간했는데. -인생을 마감하는 청산서로 썼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죄인임을 자복하는 심경으로 있는 실상 그대로를 양심껏 담았다. 돈을 벌려고 한 것도, 용서받기 위해 쓴 것도 아니다. →출간 후 반응은. -인터넷은 보지 않는다. 지인들을 통해 사람들이 ‘반성이 없다’, ‘뻔뻔하다’ 등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는 얘길 들었다. 그런 뜻으로 출간한 게 아닌데 뭘 해도 오해를 받으니 답답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얼마나 거북스러운 꼬리표인가. 입에 담기도 싫었지만 내 처지와 후세의 평가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제목도 그렇게 붙였다.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둔하겠다는 까닭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다 가고 싶다. 또 나도 사람인지라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컸다. 공직에서 손 놓은 지 수십년이 지났고 여러 가지로 죗값을 치르며 달라졌지만 여전히 믿어 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한때는 내게도 새 삶의 기회를 줘야 하지 않느냐는 울컥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기도원에서 조용히 지난날을 회개하며 살다 가고 싶다. 언론 인터뷰도 이번을 끝으로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말에 가장 상처를 받았나. -고문할 때 마치 돼지 잡듯 아무 느낌도 감정도 없었다고 하는데 나도 사람이다. 그저 그때는 상부의 명령을 목숨처럼 알았다. 고문이 애국이라 말한 것이 아닌데 그 점도 왜곡됐다. 국가에 충성을 바쳤던 수사관으로서의 전반적인 활동들을 애국인 줄 알았다고 말한 것이었는데 앞뒤가 잘려 왜곡이 됐더라. 고문한 것을 애국이라 생각할 리가 있겠나. 시대가 만든 죄인이라 해도 지금은 내 업보가 크다고 느낀다. →앞으로 소망이 있다면. -소망이랄 것도 없다. 죄지은 자가 뭘 더 바라겠나. 다만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한 아내가 하루라도 건강히 살다 가길 바랄 뿐이다. 아내가 74세인데 골병이 들어 오래 못 산다. 얼마 전 사고로 요추가 함몰됐는데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집에만 누워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눈물을 훔쳤다. 이씨는 1970년 경찰에 입문, 1980년대에 경기 경찰에서 대공·방첩 전문 수사관을 맡았다. 국가안보 기여 등으로 많은 표창과 훈장을 받았으나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을 고문해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다. 김근태 전 의원을 고문한 사실이 밝혀지며 수배자가 돼 도피하다 1999년 검찰에 자수, 7년형을 살았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청년 탈정치화, 기득권이 원하는 것…비판의식 사라지면 한국 발전 없어”

    “청년 탈정치화, 기득권이 원하는 것…비판의식 사라지면 한국 발전 없어”

    영화 ‘남영동 1985’를 연출한 정지영(67) 감독이 사회참여 작품을 외면하는 젊은 층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정 감독은 2일 연세대 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서 이하나 연구교수와 주고받은 공개편지를 통해 “‘남영동 1985’는 다분히 사회참여적인 작품이며 일정한 정치성을 띠고 있다”고 규정한 뒤 “어느 대학 수업에서 한 학생이 이 영화에 대해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영화라고 비판했고 많은 학생이 이에 공감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들의 탈정치화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줄기차게 교육해 온 반사회적·비사회참여적 성향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사라지면 창의력이 쇠퇴하는데 이는 대한민국이 정체된다는 뜻과 같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면서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이익이냐, 아니냐’를 놓고 선택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남영동 1985’를 보며 아픔을 함께하자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라고 반문했다. 정 감독은 이어 “영화감독은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되 새로운 자극을 줘야 환영받는다”면서 “그 새로운 자극에는 사회참여적 요구도 포함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영동 1985’는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간 고문을 받았던 과정을 그린 영화로 김 의원 사망 1주기를 한 달여 앞둔 지난해 11월 22일 전국 300여 개 상영관에서 개봉됐다. 그러나 보름여 만에 신작들에 밀려 상영관이 80여개로 급속하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5개 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교수와 정 감독은 지난해 9월부터 국학연구원 홈페이지를 통해 ‘문화예술과 공공성’을 주제로 공개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이번 편지는 대중문화 콘텐츠의 공공성에 대한 정 감독의 두 번째 답변이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美서 급발진 소송’ 토요타車, 11억弗 배상 합의

    일본 토요타 자동차가 미국에서 급발진 우려로 리콜된 차량의 소유자들이 낸 집단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11억 달러(약 1조 1780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고 26일(현지시간) 밝혔다. 미국에서 자동차 결함과 관련한 소송의 합의금으로는 역대 최대 액수가 될 전망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소송을 담당하는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이 28일 양측의 합의를 승인하면 토요타는 매트 결함 등 급발진이 우려되는 문제들로 인해 리콜된 차량의 전·현 소유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차량에 특별 안전 시스템을 설치하게 된다. 이번 소송은 미국에서 토요타 자동차 급발진 사례가 광범위하게 신고된 2010년 제기됐다. 2009년 8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토요타 렉서스 차량이 시속 190㎞로 폭주, 차에 타고 있던 일가족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토요타 자동차에 대한 급발진 사례가 다수 접수됐다. 토요타는 지난 2년간 미국에서 800만여대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1200만대가 넘는 차량을 리콜하고, 미 교통부로부터 약 5000만 달러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를 계기로 토요타의 ‘안전신화’ 명성은 붕괴됐으며 리콜사태에 대한 늑장 대응으로 고객들의 신뢰 역시 크게 잃었다. 이번 합의 결정과 관련해 크리스토퍼 레널드 토요타 미국 법인 법률 고문은 “그간 여러 차례 진행된 평가 결과 토요타의 전자제어장치가 안전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면서도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회사, 직원, 고객들을 위한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편 토요타 자동차는 올해 970만대를 판매해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충격 여파로 제너럴모터스(GM)에 빼앗겼던 세계 1위 자동차 업체의 위상을 1년 만에 되찾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27일 보도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美 상원, 對러 ‘인권법’ 통과… 新 냉전시대 열리나

    미국과 러시아가 ‘신냉전’에 돌입할 기세다. 미 의회가 러시아에 대한 무역 제한법을 폐지하는 대신 인권 실태를 문제 삼는 새 법안을 통과시키자 러시아 정부가 격앙된 반응을 쏟아내며 향후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다. 미 상원이 6일(현지시간) 부패와 인권 탄압에 연루된 러시아 관리들의 미국 비자 발급을 금지하고 미국 내 자산을 동결시키는 대(對)러시아 인권법, 일명 ‘마그니츠키법’을 찬성 92표 대 반대 4표의 압도적인 표 차로 통과시켰다고 AP통신 등이 7일 보도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도입을 주도한 것으로, 지난달 하원에서는 찬성 365표 대 반대 43표로 통과됐다. 이 법안은 러시아 변호사인 세르게이 마그니츠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그니츠키는 2008년부터 검사, 판사, 경찰, 세무직원 등 러시아 고위 공무원들이 연루된 2억 3000만 달러(약 2500억원) 규모의 대형 비리 사건을 파헤치다 탈세 혐의로 기소됐다. 조사를 받던 중 2009년 11월 교도소에서 숨졌다. 사인은 당초 심장마비로 알려졌지만 뒤늦게 고문사라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그의 사망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아 국제사회의 비난이 잇따랐다. 법안이 발효되면 마그니츠키의 죽음은 물론 다른 인권 침해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 공무원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미국 입국과 금융 거래가 금지된다. 법안을 주도해 온 벤저민 카딘(메릴랜드) 민주당 상원의원은 “오늘 우리는 인권 보호에 앞장서는 미국의 리더십에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즉각 트위터를 통해 “21세기에도 납치와 고문이 합법인 미국으로부터 인권에 대한 불만을 듣는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라며 “워싱턴은 여전히 ‘냉전’이 진행 중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고 맹비난했다. 콘스탄틴 돌고프 러시아 외무부 인권·민주주의 담당 특별대사는 인권법 통과를 “내정 간섭”이라고 규정한 뒤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알렉세이 푸시코프 러시아 하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은 보복 조치의 일환으로 “러시아 의원들이 인권을 침해한 미국민들에 대한 러시아 입국 금지와 자산 동결을 담은 법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인권 사수’라는 명목을 내걸었지만 이면에는 ‘실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상원은 마그니츠키법을 통과시키는 대신 옛 소련 시절인 1974년 도입된 대러 무역 제한 법안(일명 ‘잭슨 배닉 수정안’)을 폐지했다. 이 법안은 올해 러시아가 가입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는 미국 무역업계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불만이 높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러 간 무역 정상화를 위해 의회에 ‘잭슨 배닉 수정안’ 폐지와 ‘마그니츠키법’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해 왔다. 하지만 양국 간 ‘리셋 외교’(화해를 위한 관계 재설정)는 제동이 걸리게 됐다. 오린 하치(유타) 공화당 상원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이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올해 초 영국 의회도 비슷한 내용의 러시아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영국 외무부는 러시아와의 관계 경색을 우려해 도입을 반대한 바 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조국은 사할린을 버렸다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조국은 사할린을 버렸다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사할린에는 ‘이제 곧 귀국한다’, ‘조선인이 먼저 떠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1949년 7월 23일 마지막 일본인들을 태우고 간 귀국선 ‘운센마루’는 돌아오지 않았다.” 파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귀국선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열여덟 살 청년. 그는 이제 팔순의 노인이 됐다.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 영주귀국노인회의 고문 성점모(81)씨는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러시아 사할린(당시 일본령)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 1세대의 후손이었다. 2010년 12월 가까스로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왔지만 망향의 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1965년 한·일 협정에 따라 사할린 동원자의 재산권은 소멸했다.”며 보상을 거부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버티기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참다 못한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2295명은 지난 23일 “국가가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성씨는 이 자리에서 사할린 동포들의 수난사를 기록한 수기 ‘망향의 반세기, 사할린 동포의 눈물 젖은 과거’를 서울신문에 제공했다. 성씨의 아버지는 하루 12시간 넘게 도로 건설에 노동력을 착취당했지만 우편저금 등의 명목으로 빼앗긴 임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수기에는 한인들의 고통과 분노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하루 한 줌도 안 되는 콩밥과 간한 청어 한 토막으로 2년을 버텼다. 분노를 참지 못해 반항하면 아이구… 때리고 또 때리고 죽도록 얻어맞았다.”(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던 이기복) “어렸을 때 그물로 멸치를 잡던 일이 어제 같다. 그 멸치를 삶은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으면 왜 그렇게 맛이 있던지.… 한 번이라도 가봤으면 한다.”(노동에 시달리다 현지에서 사망한 울산 출신 김길용) 광복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황국신민화정책’을 통해 일왕에 충성을 강요했던 일제는 전쟁이 끝나자 사할린 동포들의 국적을 박탈한 뒤 모르쇠로 일관했다. 소련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들을 억류했다. 그들의 모국은 힘이 없었다. 동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소련 국적을 취득하거나 무국적자로 남았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배상의 길이 열리는가 했지만 사할린 문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성씨는 “그때 ‘조선이라는 것은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접고 러시아어를 배워 모스크바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국 대신 생존을 택한 이들을 새롭게 가로막은 것은 이념 갈등이었다. 북한과 소련은 한국 정부와 교류가 없었다. 사할린 동포들은 일본과 소련에서 귀향 운동을 시작했다. 경기도 출신 도만삼씨는 1977년 소련 공산당위원회 앞에 가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외쳤다. 소련은 어쩐 일인지 “귀국 준비를 하라.”고 답했다. 그러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두만강 기슭이었다. 북한 장교가 ‘환영 인사’를 건넸을 때 도씨는 충격에 휩싸여 기절했다. 성씨는 “도씨 등 조선인 40명이 북한으로 추방된 뒤 한인사회는 공포에 휩싸여 귀향에 대한 말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귀향의 꿈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가 소련 사회를 개방한 뒤에야 찾아왔다. 1990년 6월 제주도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해 한국 가수들이 찾아와 사할린에서 위문 공연을 가졌다. 성씨는 “너무 늦었지만 드디어 잃었던 모국을 찾았다.”면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눈시울을 적셨다.”고 회고했다. 1992년부터 영주귀국 사업이 시작돼 지난 3월까지 4000여명의 동포 및 배우자, 장애 자녀가 귀국했지만 망향의 한은 지워지지 않았다. “남한 노인들이 말하더군요. ‘사할린 동포들은 사할린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랏돈을 받는다’고. 나라를 잃고 설움 속에 헤맨 우리들의 고통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약 부작용으로 피부 65% 잃은 소년의 사연

    한 11세 소년이 엄마가 준 진통제를 먹고 알레르기를 일으켜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연이 알려졌다. 한마디로 ‘죽다 살아난’ 화제의 소년은 영국 케임브리지셔 리틀포트에 사는 캐빈 락(11). 캐빈은 지난달 26일 엄마가 준 어린이용 진통제 누로펜을 먹은 후 다음날 아침부터 귀가 부어오르고 발진이 일어나는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깜짝놀란 엄마는 급히 병원으로 아이를 데려갔으나 소년의 비극은 이제 시작이었다. 약의 부작용을 생각못한 담당 의사는 두차례나 아이의 증상을 수두로 잘못 진단해 치료했다. 결국 캐빈의 몸에는 200여개의 물집이 생겼으며 손톱과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 증상이 극히 악화돼 사망할 위기에 처했다. 캐빈의 엄마는 “아이의 몸에서 매일매일 피부가 벗겨져 나가는 고통을 생생히 지켜봤다.” 면서 “아이가 ‘죽으면 옆에서 가족을 지켜볼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며 울먹였다. 이어 “캐빈은 피부 65%를 잃었으며 의사가 세상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라고 말해 실제로 아이가 유언을 남겼었다.”고 덧붙였다. 캐빈은 생명보조장치로 연명하다 결국 약물에 의한 알레르기로 원인이 밝혀졌으며 뒤늦게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됐다. 담당의사는 “캐빈은 ‘스티븐스-존슨 증후군’(Stevens-Johnson Syndrome)으로 약 3백만명 중 1명 꼴로 발생하는 희귀 부작용을 앓았다.”고 설명했다. 최근 캐빈은 가족과 의료진의 노력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 집으로 돌아왔으며 형제들의 도움으로 걷기 연습을 하고 있다. 캐빈 엄마는 “약물 알레르기가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면서 “앞으로 제대로 된 경고문구도 해놓지 않는 제약회사를 상대로 한 학부모 단체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소금의 격동기 : 쓰러진 사람과 뜬 사람 소금이 넘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소금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그러나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소금 1석에 쌀 1석이 맞교환되던 때가 있었다. 소금을 구하기가 어렵고 비싸다 보니 소금에 울고 소금에 웃는 자들이 생겨났다. 특히 구한말은 소금 시장을 둘러싸고 극한 변동이 있었던 시기였다. 개항 이후 일본의 소금과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 밀려왔고, 일제는 우리나라 소금을 재원으로 하여 식민지 경영 자금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러한 염업사의 격동기는 온몸으로 저항하다 쓰러진 사람과 시류에 편승하여 뜬 사람을 갈라놓았다. 삶의 선택이 자유로운 만큼 역사의 평가가 냉혹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알았을까. ●이토 통감 마차 가로막은 꼿꼿한 소금장수 김두원 1907년 10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원산항에 사는 김두원씨가 일인에게 소금값을 찾으려고 여러 해를 호소하더니 일전에 경시청에 잡히어 갇혔다더라.” 소금값을 받으려는 김두원을 경시청에서 잡아 가둔 까닭은 무엇인가? 김두원은 비록 항일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일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었다. 좀처럼 변하지 않고 단단한 육각형의 결정체인 소금처럼 그는 일관되고 굽힘 없이 일제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 저항 방식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핵심 인물을 찾아서 호통을 치는 일이었다. 구속되기 불과 3개월 전인 7월 10일에도 그는 오른손에는 직소(직접 호소한다)라고 쓴 종이를, 왼손에는 편지를 들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마차 앞을 막았다. 일곱 번이나 시도를 하였지만, 한국통치를 위한 일제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와의 직접 대화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환갑을 몇 해 앞둔 노인을 이렇게 꼿꼿한 집념의 사나이로 만든 자는 일본인 사기꾼이었다. 때는 8년 전인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소금을 대규모로 매매하는 거상이었다. 함경도에도 영흥·문천과 같이 소금 생산지가 있었지만, 원산의 거상들은 경상도를 넘나들었다. 강원도와 영남 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소금 생산지는 경상도의 김해와 울산이었다. 김두원은 이곳에서 소금을 사서 원산에서 파는 방식으로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당대의 소금 시장에서는 파는 자나 사는 자 모두가 신뢰를 기반으로 하였다. 믿음이 한 번 깨진 사람은 다시 상대하지 않았으니 소금 매매는 정말 짜디 짠 상거래였던 것이다. 이런 신뢰의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는 개항 이후였다. 개항 이후로 일제의 전오염(우리나라의 자염처럼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 부산과 원산 등 개항지로 유입되었고, 일본인 상인들도 조선의 소금 시장에 직접 나섰다. 속칭 포대가리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일본인 상인들은 간수가 많은 일본의 저질 소금을 조선의 가마니에 담은 뒤에 조선 소금이라 속여 팔았다. 이런 일본인들을 믿은 것은 김두원의 큰 실수였다. 1899년 5월에도 김두원은 동해안과 낙동강을 오가면서 소금을 매입하여 한 포구에 모아두었다. 이렇게 모은 소금이 자그마치 1088석이었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약 5100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무라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 형제가 객줏집에 머문 김두원에게 다가섰다. 고기 절이는 데 소금이 급하게 필요하여 소금값을 후하게 줄 테니 자신들의 배에 소금을 싣고 울릉도까지 가자고 속였다. 보름간의 항해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자 기무라 형제는 김두원에게 소금 짐은 다음 날 하역하고 뭍에 내려 푹 쉬라고 하였다. 순진했던 김두원이 깊은 잠에 든 사이에 사기꾼 형제는 배를 띄워 유유히 동해를 건너 시무라 현으로 사라졌다. 희대의 ‘소금 먹튀’ 사건에 김두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조선의 외부대신에게 청원해 보았지만 이미 쇠멸해 가는 조선 정부는 자국민의 피해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후 김두원은 직접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기꾼들이 이미 징역을 살고 있고, 소금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 된다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분기탱천한 김두원은 1903년 일본 공사인 하야시를 직접 찾아가서 소금값을 내놓으라고 고성을 질렀다.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놀란 하야시는 그만 종로의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렇게 김두원은 일본 공사뿐만 아니라 조선 통감, 일본 총리, 중의원을 상대로 청원하고 투쟁하였지만, 일제는 소금값을 지불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휼금 얼마를 주겠다며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김두원에게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구휼금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는 경시청 총감에게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 선박이 홍주군 바윗돌에 부딪혀 파손된 것을 그 바윗돌이 조선에 있다 하여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배상금 3000원을 받아가고, 공주군에 있던 일본인이 조선의 군인과 시비하다 구타를 당하였다고 치료비로 5000원을 받아간 즉, 전례와 같이 나의 소금값도 일본 정부에서 물어내는 일이 당연하다.” 참으로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장 20여년에 걸친 배상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그가 정당히 받아야 할 소금값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소금이 물에 녹듯이’ 사라져 갔을 것으로 보인다. ●탁지부 대신 고영희, 소금세 높여 염민에 큰 고통 1907년 10월 김두원이 영문도 모른 채 경시청에 잡혀간 이유는 일본 황태자의 조선 방문 때문이었다. 일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김두원이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고 ‘소금값 배상하라.’고 외칠 것이라 여겼다. 김두원이 일제에 의하여 불법 구금된 동안, 일본 황태자를 극진히 모시고 환영행사를 주관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탁지부 대신 고영희이다. 1849년생인 고영희와 김두원은 서로 나이도 엇비슷했으나 황태자 방문 앞에서 전혀 다른, 반대편의 삶에 서 있었다. 차가운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던 김두원에게 그해 10월은 지옥과 같은 반면, 황태자 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제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授章)까지 받은 고영희에게는 천국과 같았다. 1867년 역과에 합격한 고영희는 일제의 부상으로 호기를 맞았다. 1876년 김기수 수신사 일행으로서 일본어 통역을 맡아 일본을 시찰한 이후로 그는 순탄한 등용의 길을 걸었다. 1885년 연천 현감에서 사직하면서 잠시 가시밭을 만나는 듯하였으나 1895년 주일공사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관대작의 지위를 한껏 누렸다. 특히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 관리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07년 5월에 출범된 이완용 내각에서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것도 그간 쌓아온 탁지부 스펙 때문이었다. 탁지부 대신인 고영희의 주요 임무는 일제가 식민지 재정을 수립하기 위하여 파견한 고문들을 충실히 돕는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의 소금을 가지고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1907년 9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4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친일파 4대신이 당시 한적한 어촌인 인천 주안리에 행차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행사를 주관한 자는 탁지부의 고영희와 탁지부 소속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였다. 1907년 우리나라의 인천 주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천일염 시험장이 건설되었다. 수천년간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해 왔던 조선에서 바람과 햇볕으로 결정되는 천일염업의 등장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천일염 시험장을 건설한 내막에는 ‘불편한 진실’이 깔렸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재원이었다. 일제는 자국에서 담배, 소금 등의 전매제도를 통해서 침략전쟁의 군비를 마련했고, 식민지 타이완에서도 아편, 소금 등을 전매시켜서 재원을 확보했다. 그런데 이렇게 상품을 전매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일제에 늘 위협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동아시아를 휘젓고 다니는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었다. 중국산 천일염에 대항하는 방법은 천혜의 갯벌이 깔린 조선의 서해안에서 직접 천일염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었다. 염화나트륨 함유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공업과 무기산업의 원료가 되었으므로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제에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이때 고영희와 메가타 다네타로는 서로 합심하여 주안에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장을 건설함으로써 일제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다. 또 하나, 고영희는 일제의 의도대로 충실히 소금세를 걷어줌으로써 재원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는 소금세가 궁내부에 귀속되어 왕실의 금고로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의 금고를 빼앗기 위해서 먼저 왕실의 금고에 들어가는 소금세를 국가의 금고로 들어가게 했다. 소금세를 많이 매기기 위하여 탁지부를 시켜 염세 규정도 치밀하고 까다롭게 바꾸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영희의 취임은 일제에는 희소식이었지만 소금 생산자인 염민들에게 큰 악재였다. 소금세가 갑자기 늘어나자 여기저기서 백성의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순사들이 염민들을 잡아들이자 대규모 시위가 뒤따랐고, 이내 일본 군인들의 총칼 진압이 시작되었다. 일제와 탁지부의 강압적 소금세 징수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다. ●매국노 고영희 후손, 친일재산 환수 반환소송 나서 고영희는 일제에 수많은 재원을 넘겨 준 덕에 한평생 영화를 누렸다. 탁지부 대신으로서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에 앞장선 그는 이후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매년 1600원의 연금을 받기도 했다.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일제가 준 자작 작위는 장남인 고희경에게 세습되었다. 고영희 집안이 대를 이어서 호의호식할 때 소금장수 김두원은 여전히 소금값을 받지 못하고 허망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뜬금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영희의 증손자가 국가의 친일재산 환수에 반발하여 반환소송을 냈다는 것이다. 반환 소송이라면 억울하게 1088석의 소금을 일인에게 강탈당한 김두원의 후손들이 일본 법정에 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자는 떠들고, 당당한 자는 조용하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란 말인가. 유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 이집트서 발견된 ‘외계인 미라’ 논란…정체는?

    이집트서 발견된 ‘외계인 미라’ 논란…정체는?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을 통해 확산된 ‘외계인 미라’ 사진의 정체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외신들에 따르면 이 미라는 이집트 엘 라훈에 있는 고대이집트 제12왕조 세누스레트 2세와 왕비가 잠들어 있는 주 피라미드 남쪽에 있는 한 작은 피라미드 내에서 발굴됐다. 이들은 자세한 내용과 사진은 제공했지만 익명을 요구한 이집트 유물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 “외계인처럼 보이는 미라는 약 2000년 전 사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미라의 키는 150~160cm로, 오늘날 작은 여성 정도의 몸집을 갖고 있다. 또한 이 미라가 들어 있던 금장으로 장식된 미라의 관 안에는 식별할 수 없는 여러 이상한 물체가 함께 매장돼 있었기 때문에 파라오의 고문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식통은 이 미라를 발견한 사람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고고학자 빅토르 루벡 박사라면서 현재 크로아티아의 한 도시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유물부는 수많은 권위있는 고고학자들과 논의했지만 누구도 미라의 발견을 상식 선에서 설명할 수 없었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그는 “사실은, 미라를 본 모든 전문가는 지구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면서도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피라미드에서 우주의 것이 나왔다는 것을 믿길 거부했다.”고 말했다. 위와 같은 소식은 지난달 말 해외 인터넷매체를 통해 보도되면서 확산됐고 페이스북 등을 통해서 논란이 됐다. 하지만 미스터리 전문매체인 디스클로즈 TV는 이 사진이 지난 2008년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을 통해 보도된 것과 같다고 전했다. 당시 데일리메일은 피라미드에서 왕비의 두 딸이 발굴됐다면서 이들은 쌍둥이였다고 전했다. 또한 함께 공개된 페루의 외계인 미라 사진 역시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 웹사이트에 ‘어린이 미라에 대한 실험’이란 연구 논문에 함께 공개된 사진이 페루의 외계인 미라가 시간이 지나 변하기 전의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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