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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굵직한 행사 몰린 7월...北中 ‘밀월’에 경고음 커진다

    굵직한 행사 몰린 7월...北中 ‘밀월’에 경고음 커진다

    북중 우호조약 60주년 앞두고 외무성 글“두 나라 인민의 운명은 뗄 수 없는 관계”美와 대화 배제하는 ‘통중배미’ 수순 밟나7월 4일 독립기념일 등 주요 기념일 주시저강도 이상 도발 시, 美 강경선회 가능성다음달 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시작으로 굵직한 행사가 연이어 열리면서 북중 ‘밀월’ 관계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북한이 중국과의 밀착을 가속화하는 것은 이 구도를 활용하는 것이 유용한 대미 협상 카드가 될 것이란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지나치게 중국으로 기울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북미 양자 간 조기 대화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시킨다는 우리 정부의 구상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북한 외무성은 다음달 11일 북중우호조약 체결 60주년을 보름 앞둔 26일,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중국과의 특수한 친선 관계를 과시했다. 외무성은 “조중(북중)친선·협조 관계는 김정은 동지와 시진핑 동지에 의해 앞으로 더욱 공고·발전될 것”이라며 “복잡다단한 국제 정세 속에서도 단결하고 협력하고 지지 성원하는 조중친선의 역사적 전통은 보다 줄기차게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북중우호조약 체결 60주년을 거론하며 “세월은 흐르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조중 두 나라 인민의 운명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조약은 1961년 7월 김일성 주석(당시 내각 수상)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체결한 조약으로 한 국가가 군사적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한 국가도 전쟁에 자동 개입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북한은 최근 미국의 대화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는 담화를 연달아 내면서도 우방국인 중국과의 소통은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지난달 27일 리용남 주중 북한 대사와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만나는가 하면, 리 대사와 리진쥔 북한주재 중국대사가 동시에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북중 우호 분위기가 앞으로 더 고조될 것”이라면서 “중국과 먼저 대화하고 미국과 대화는 그 다음에 하는 ‘선중후미’(先中後美) 전략에서 중국과 협력하고 미국과 대화는 배제하는 ‘통중배미’(通中排美)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다음달 4일 미국 독립기념일, 8일 김일성 주석 사망일, 23일 도쿄올림픽 개막(예정), 27일 정전협정 체결 기념일도 주목해야 할 변수다. 기념일을 중시하는 북한이 어떤 행보를 취하는지는 향후 국면을 예측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북한은 미국 독립기념일 전후로 미사일을 쏜 적이 몇 차례 있다. 지난해에는 순항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2017년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됐을 때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저강도 이상의 도발을 하면 미국은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는 쪽으로 태세 전환에 나설 수 있다. 도쿄올림픽을 남북·북미 간 대화의 기회로 삼고자 한 우리 정부의 구상도 북한의 불참으로 실현이 어렵게 된 가운데 미국마저 북한에 ‘강경’ 대응으로 선회하면 8월 한미 연합훈련 축소·중단 카드도 힘을 잃게 된다. 임기 말 대화 계기를 제대로 만들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대선 국면에 들어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셈이다. 다만 7~8월 북미 양측이 상황 관리를 통해 고비를 넘긴다면 9월에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 30주년, 남북대화 50주년 등 또 다른 빅이벤트를 계기로 마지막 대화 재개를 시도해볼 수 있다.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지난 25일 제주포럼 참석 후 기자들과 만나 “우리 정부가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제안한다고 해도 북한에서 화답을 안 하면 말짱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서 남북간 교착 상태를 풀려면 남북 정상이 비공개라도 만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끔찍한 기억, 망가진 몸뚱이…복지원 나와서 노숙인 됐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끔찍한 기억, 망가진 몸뚱이…복지원 나와서 노숙인 됐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5> 1983~1987, 형제원 강제수용된 연생모씨 진술서‘낡은 옷 입었다’며 경찰이 형제원 보내모진 구타와 벌레 섞인 밥, 밤이면 성폭행 위협버스비 1만원 받고 퇴소 후, 서울역 노숙자 됐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달 2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망가진 제 인생, 누가 보상하나요” 홀로 쓸 수 없던 탄원서 “피고 대한민국은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피눈물을 배상하라!” 지난달 20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기자회견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앞. 구호를 외치던 한 남성이 구석으로 가 주저 앉아 눈물을 훔쳤다. 열다섯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수용된 연생모(53)씨다. 청소년기를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연씨는 구타와 성폭력, 굶주림에 시달렸다. 어느 날엔 벌레가 섞인 밥을 먹었고 어느 날엔 밥알 한 웅큼으로 허기를 달랬다. 열아홉, 연씨는 단돈 만원을 받고 형제복지원에서 퇴소했다. 시설 안에서의 인권유린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형제복지원이 폐쇄되자 쫓기듯 나오게 된 것이다.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지만 새 삶을 살기엔 이미 몸도 마음도 상처가 깊었다. 연씨는 서울역과 영등포역에서 노숙인 생활을 오래했다. 연씨의 사례는 특별하지 않다.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는 “부산역 앞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길거리 서명을 받았을 때 역 앞에 머무는 노숙인들로부터 ‘나도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4년 간의 형제복지원 생활로 인한 트라우마는 수십 년간 계속됐다. 쉰이 넘은 연씨는 지금도 불을 끄고는 잠에 들지 못한다. 시설에서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이 가빠진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면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는 지옥을 겪었다. 결국 그의 진술서는 다른 피해자들의 도움으로 쓰여졌다. 아래는 연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연생모 진술내용: 판사님께 호소 드립니다. 저는 1983년 8월 어느 날, 부산에 놀러 갔다가 낡은 옷을 입고 돌아 다닌다는 이유로 경찰관에게 잡혀서 형제복지원 차량에 집어 던져졌습니다. 그 길로 형제복지원에 입소했습니다. 입소일부터 퇴소하는 날까지 매일 모진 구타와 고문과 같은 기합을 견뎌야 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아동소대에서 한 달 동안 밥 먹고 선착순을 시켜서 물과 한 웅큼씩 손에 움켜진 밥알들로 버티기도 했습니다. (선착순대로 소대에 들어오는 순서 10등 안에 들면 안 맞고, 11등부터는 몽둥이 찜질에 몇시간 동안 고문 같은 기합을 당해야 하는 것) 각종 벌레들이 뒤섞인 음식들도 살기위해 먹어야 했고 밤에는 조장들의 성노리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서울행 버스비라고 지급된 1만원을 받아서 퇴소할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퇴소 이후에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주변에서 오랜기간 길에서 노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사회단체의 주선으로 서울 신림동(원룸)에 입주하여 살고있으나, 어린시절 온몸을 구타당해 나타나는 골병들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심각한 허리통증(디스크)이 저를 괴롭히고 있고, 밤에 불을 끄고는 잠을 못자고 수시로 과거의 기억이 생각나면서 숨이 막히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트라우마 증상으로 인하여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습니다. 배운것도 없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뚱이로 인하여 직장도 다닐 수 없는 상태라서 너무나 빈곤하게 살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차단당한 제 인생을 국민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을 통하여 배상받기 위해 소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곡히 호소합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연생모 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미얀마 가사도우미에 말도 못할 고문과 학대 싱가포르 여성에 30년형

    미얀마 가사도우미에 말도 못할 고문과 학대 싱가포르 여성에 30년형

    미얀마인 가사도우미를 장기간 고문하고 폭행하면서 굶주리게 하다 사망에 이르게 한 잔인무도한 싱가포르 여성에게 징역 30년형이 선고됐다.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고등법원의 시 키 운 판사는 22일(현지시간)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가이야티리(41)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피고의 끔찍한 행동이 얼마나 잔인한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며 중형을 선고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이어 “피해자는 죽기 전 오랫동안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면서 “이 사건은 최악의 과실치사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다만 시 판사는 피고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다른 자녀가 아픈 문제 등으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무시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가이야티리는 지난 2월 결심공판에서 과실치사 등 28개 혐의를 모두 인정해 종신형 선고도 가능했는데 30년형을 언도받는 데 그쳤다. 항소할지 여부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가이야티리와 경찰관 남편은 2015년 5월 당시 23세로 첫 해외 일자리를 구하던 미얀마 여성 피앙 응아이 돈을 자녀들을 돌보는 가사도우미로 채용했다. 그러나 가이야티리는 이후 거의 매일 피앙에게 폭력을 가했다. 결국 피앙은 일한 지 일년이 조금 지난 2016년 7월 가이야티리와 그녀 어머니에게 몇시간에 걸쳐 폭행을 당한 끝에 숨졌다. 장기간의 가혹행위는 당시 가이야티리 부부가 집안에 설치한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가이야티리는 피앙을 감시하는 차원에서 문을 열어놓고 용변을 보게 하고 샤워도 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옷을 다리던 뜨거운 다리미로 피부를 지지기도 했다. 깡마른 피앙을 인형처럼 벽에다 확 뿌리치기도 했다. 피앙은 밤에만 다섯 시간을 겨우 잘 수 있었던 데다 식사도 극히 소량만, 냉장고의 차가운 음식과 물에 젖은 빵조각을 제공받아 사망 당시 몸무게가 24㎏에 불과했다. 처음 가이야티리의 집에 들어갔을 때는 49㎏여서 14개월 만에 3분의 1 이상이 빠졌다. 가이야티리의 남편은 경찰 간부 직에서 물러난 뒤, 장모와 함께 여러 건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끔찍한 사건은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등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 출신의 가사도우미가 25만명가량 진출해 있는 싱가포르 사회에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비슷한 가사도우미 학대 사건이 여러 건 언론에 보도됐다. 2017년 한 부부가 필리핀 출신 가정부를 굶긴 혐의로 수감됐고, 2019년에도 다른 미얀마 출신 도우미를 학대한 혐의로 부부가 감옥에 갔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매맞고 굶주려 숨진 20대 가사도우미…싱가포르 주부 악행 충격

    매맞고 굶주려 숨진 20대 가사도우미…싱가포르 주부 악행 충격

    미얀마인 가사 도우미를 1년 넘게 때리고 고문하고 굶기다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싱가포르 주부가 감옥에서 30년을 보내게 됐다. 22일 스트레이츠타임스 등에 따르면 싱가포르 고등법원 시 키 운 판사는 이날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가이야티리 무루가얀(41)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피고의 끔찍한 행동의 잔인성을 말로는 묘사할 수 없다”고 징역 3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을 ‘최악의 과실치사 사건’으로 규정했다. 무루가얀과 경찰관 남편은 2015년 5월 당시 23세이던 미얀마인 피앙 응아이 돈을 베이비시터 겸 가사도우미로 고용했다. 그러나 무루가얀은 피앙에게 거의 매일같이 폭력을 휘둘렀다. 급기야 피앙은 고용된 지 14개월 만인 2016년 7월 무루가얀에게 장시간에 걸쳐 집중적인 폭행을 당하다 사망하고 말았다. 무루가얀은 피앙을 감시하기 위해 문을 열어놓고 용변을 보고 샤워를 하게 했으며 밤에 5시간만 잠을 자도록 했다. 식사도 극히 소량만 제공해 피앙의 사망 당시 몸무게는 처음 고용됐을 때보다 15㎏ 이상 줄어든 24㎏에 불과했다. 무루가얀의 잔혹 행위는 집안에 설치된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사건은 대부분 동남아의 가난한 국가에서 온 가사 도우미가 25만명에 이르는 싱가포르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검찰은 무루가얀에게 과실치사 등 28가지 혐의를 적용,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그가 자녀의 병환 등으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던 점을 무시할 순 없다며 구형보다 형량을 낮췄다. 김태균 선임기자 windsea@seoul.co.kr
  • [이종수의 헌법 너머] 과거의 거울에 비춰 본 형사사법의 현재/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종수의 헌법 너머] 과거의 거울에 비춰 본 형사사법의 현재/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얼마 전에 1751년 조선조 영조 때에 벌어졌던 안음현 살인사건을 다룬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안음현은 지금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죽은 이들은 외근 중이던 기찰군관과 수행원인데, 이들이 도적떼에게 살해당했다며 변고를 처음 알려 온 동료 기찰군관들이 범인인 것으로 추후 판명이 났다. 특히 흥미를 끈 대목은 “네 죄는 네가 알렷다”며 그저 자백을 다그치는 ‘원님 재판’이 아니라 당시에 이미 현장검증 및 부검 등에서 나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형사사법제도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검시 과정에서 망자의 시신을 만지는 오작인과 더불어 전문가인 여러 참검인들이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확한 검시를 위한 원칙과 표준이 실무책자를 통해 마련돼 있었다. 살인이 의심되는 사건에서는 초검에 이어 복검까지 최소한 두 번의 부검을 거치도록 하고, 중형이 예상되는 범죄인의 신문에는 관리 두 명이 함께 진행하는 ‘동추’(同推)가 적용됐다. 사형이 집행될 범죄의 경우에는 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세 번의 심리(三覆)를 거쳐 국왕의 명령으로만 사형이 가능했다고 한다. 나름 전문성과 객관성이 담보되는 형사사법제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범인들 중에 한 명이 신문 도중에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것은 아쉽게도 옥에 티로 남는다. 책을 덮고 나서는 오래전 유학 시절에 접했던 중세 유럽의 사법제도가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에는 서로 다투다가 또는 고의 아니게 타인을 죽인 경우 유책의 범인이 피해자의 가족과 합의해야만 했는데, 즉 당사자들 사이에서 사법(私法)상의 속죄 계약이 체결됐다. 이 계약을 통해 금전적 배상은 물론이고 억울한 망자를 기리려고 사망한 장소나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마을 초입 등 유족들이 원하는 곳에 돌로 만든 이른바 ‘속죄의 십자가’를 세워 두는 일이 14세기 초반부터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범죄피해자보호법이나 민사소송을 통해 피해자나 유가족을 배려하는 오늘날의 제도와도 흡사한데, 원상회복이나 남겨진 유가족의 생계 보호 관점에서는 오히려 더 나은 측면도 있다. ‘살인십자가’로도 불리는 이 돌십자가가 오늘날 유럽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독일에만도 4000여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듯 마을 단위에서 당사자끼리의 사법상 계약을 통해 자치적으로 해결해 오던 형사사법제도가 중앙집권적인 국가 시스템이 공고하게 자리잡고 난 이후로는 사라지게 된다. 특히 1530년 이후로 개신교계의 지역에서는 이 같은 속죄의 십자가가 더이상 세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의 자력 구제와 복수 그리고 마을 단위의 자치적인 해결을 금지하고 수사와 기소 및 재판 등 사법 권한을 국가가 독점한 연후에 예전보다 더 나아졌는지가 한편 의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 이후로 엄중한 처벌과 함께 모진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하는 형사사법이 횡행했기 때문이다. 범인에게 늘 나긋한 목소리로 어리숙하게만 보이다가 극의 말미에 꼼짝 못할 증거를 들이대고서 끝을 맺는 ‘형사 콜롬보’ 시리즈는 그저 영화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허구일 뿐이다. 오래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이 뒤늦게 밝혀졌는데, 이로 인해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20년을 옥살이한 분이 있는가 하면, 경찰이 사망한 어린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하고서도 은폐했던 사실 또한 함께 드러나면서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택적 정의 실현으로 비난되는 ‘정치사법’과 함께 심지어는 ‘사법살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숱한 권력형 오심(誤審)들이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로 번복됐다. 또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계급사법’도 줄곧 논란이 됐다. 유죄를 확정한 판결문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진즉부터 전직 대통령과 어느 대기업 총수에 대한 사면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민주법치국가의 기본 전제가 애당초 허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불거져 있는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서도 ‘밥그릇 싸움’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회의론이 팽배한 데에는 이렇듯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러한 가운데 사법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가 OECD 국가들 중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뼈를 깎는 반성과 환골탈태라는 말도 그저 식상하기만 하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 6·19 흑인 독립기념일… “인종정의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

    6·19 흑인 독립기념일… “인종정의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

    올해 노예해방 기념일 연방 공휴일로美 전역서 흑인 역사 전시회 등 축제“첫 흑인 여성 부통령 등 달라졌지만경찰·사법 개혁 등 남은 과제들 많아”“텍사스주에서 마지막 노예가 해방된 ‘준틴스데이’(Juneteenth Day·6월 19일)가 156년 만에 연방 공휴일이 된 것을 자축하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왔습니다. 미국이 이제야 변화의 시작점에 섰습니다.”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광장에서 만난 흑인 할림 프랫(45)은 “조지 플로이드를 무릎으로 눌러 사망케 한 데릭 쇼빈은 유죄를 받았지만 ‘흑인은 범죄자’라는 경찰의 편견은 여전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올해부터 ‘흑인의 독립기념일’로 불리는 준틴스데이를 12번째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미 전역에서 각종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현지에서 만난 흑인들은 지난해 5월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생긴 적지 않은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경찰 개혁, 사법 개혁 등 남은 과제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날 국립 아프리칸 아메리칸 역사문화박물관 앞에서 만난 흑인 캔디스(17)는 “박물관 관람 예약이 마감돼 못 들어가 아쉽다”면서도 “하지만 그만큼 많은 흑인들이 권리를 투쟁하려 거리에 섰고 공부를 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이 커진 증거”라고 말했다. 위스콘신주 라신에서 온 키샤 피비(31)는 “내가 사는 곳은 커노샤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커노샤는 지난해 자신의 세 아이 앞에서 경찰의 총격을 맞은 제이컵 블레이크 사건으로 큰 시위가 있었던 곳”이라며 “경찰들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커노샤 흑인 시위 때 자경단을 자처하며 총기를 발사해 흑인 2명을 사망케 한 백인 카일 리튼하우스에 대해 “옷이나 기념품을 판매하는 등 드러내 놓고 그를 돕자는 백인들이 여전히 많다”고도 했다. 10대인 리튼하우스는 지난해 11월 거액의 보석금(200만 달러·약 22억원)을 내고 풀려난 상태다.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해 이날 흑인 대량학살이 있었던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재선 유세를 잡았다가 역풍으로 연기했던 것과 비교할 때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버지니아주에 사는 흑인 피치스(39)는 “아쉬운 점이 있어도 분명 인종 정의는 앞으로 나아갔고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날 미 전역에서는 흑인 역사 전시회, 음악회, 퍼레이드 등이 열렸다. 연방공휴일 제정을 위해 수십 년간 이날마다 시민들과 ‘2.5마일 걷기’를 해 온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여성운동가 오팔 리(94)는 같은 행사에 참석해 “하얀 것도 검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미국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바이든은 전날 포고문에서 “미 국민에게 남북전쟁의 종식과 흑인들의 해방을 인정하고 축하하며 우리의 건국 이상과 공동 번영을 여전히 훼손하는 체계적 인종주의를 근절하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것은 1863년이지만, 남부연합 소속인 텍사스주는 연방과 맞서며 1865년 6월 19일에야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이후 이날은 ‘6월’(June)과 ‘19일’(Nineteenth)을 합쳐 준틴스데이로 불려 왔다. 이듬해 6월 19일 텍사스주에서 기념행사가 열린 뒤 미 전역의 축제로 발전했고, 1980년 텍사스주가 처음 공휴일로 지정한 뒤 47개주 및 워싱턴DC가 대열에 동참했다. 그간 연방공휴일 지정 논의는 공무원의 유급휴가 증가로 인한 인건비 부담 등을 우려해 지지부진했지만, 지난해 흑인 시위를 계기로 급진전됐다. 이번 연방 공휴일 지정은 1983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데이’ 후 38년 만이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이스라엘 “이란 대통령 당선인은 ‘테헤란의 도살자‘” 강경 보수로 회귀

    이스라엘 “이란 대통령 당선인은 ‘테헤란의 도살자‘” 강경 보수로 회귀

    이스라엘은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간) 실시된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강경 보수 성향의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61)가 핵무기 개발에 전념할 것이라며 경계했다. 야이르 라피드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19일 트위터에 “‘테헤란의 도살자’로 알려진 이란의 새 대통령은 이란인 수천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그는 이란 정권의 핵 야욕과 글로벌 테러에 전념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오는 8월 초 취임하는 라이시 당선인이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명을 받아 반체제 인사 숙청을 이끌었던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그는 테헤란 근처 감옥들에 수감돼 있던 5000명 가량의 죄수들에 극비 사형 판결을 언도한 “죽음 위원회” 4명의 판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들이 묻힌 공동묘지는 당국이 철저히 체계적으로 은폐했다. 그는 또 2009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인 ‘녹색 운동’을 유혈 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당시 체포된 시위 가담자 가운데 일부는 국가 전복·간첩 혐의로 처형됐다. 1960년 이슬람 시아파 성지이며 이맘 레자의 영묘가 있는 마슈하드 인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그는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중부 도시 콤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콤은 이란의 유서 깊은 종교도시다. 라이시는 현재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70년대 팔레비 왕정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검찰 총장 등 요직을 거치며 2019년 삼부 요인 중 하나인 사법부 수장이 돼 대선 출마 직전까지 역임했다. 최고지도자가 사망하거나 유고 시 후임을 결정하는 권한이 있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부의장이기도 하다. 이란 정가에서는 그를 유력한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는다. 서방은 이란의 사형 제도를 지지하며 반체제 인사 숙청에 앞장선 라이시를 잔혹한 인물로 묘사한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이란인권센터는 그에 대해 “국가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제거하는 체제의 주축”이라고 비판했다. 중동 전문매체 알모니터는 그가 1980년대 후반 수천명의 반체제 인사 숙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는 2019년 “청소년 시절 저지른 범죄에 대한 사형 집행, 죄수 상대 고문 등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조치“를 했다는 이유로 라이시를 제재 대상에 올렸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AP 통신은 라이시에 대해 인권 활동가와 그들의 가족을 구금하고 이를 서방 국가와 협상 카드로 이용한 것을 감독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017년 대선에 출마한 라이시는 현직 하산 로하니 대통령과 대결해 38% 득표에 그쳐 패한 바 있다. 라이시는 이번 선거 운동 과정에서 “빈곤과 부패, 굴욕과 차별”을 뿌리 뽑겠다고 천명했다. 리오 하이앗 이스라엘 외무부 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18일 이란 대선 투표율 48.8%와 관련,“절반도 못 미치는 이란 유권자들이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대통령을 선출했다”며 “라이시 선출을 통해 진실로 사악한 이란의 의도가 명확해졌다”고 주장했다. 성명은 이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즉시 그리고 영원히 중단돼야 한다.또 이란의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도 해체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대선을 관리한 이란 내무부는 라이시가 1792만 6345표(약 61.9%)를 얻어, 경쟁 상대인 개혁파 압돌나세르 헴마티(242만 7201표·약 8.4%) 후보를 크게 앞섰다고 밝혔다. 혁명수비대 출신 모센 레자에이 후보는 341만 2712표(약 11.8%)로 3위를 차지했다. 전체 유권자 5931만 307명 중 2893만 3004명이 선거에 참여해 최종 투표율은 48.8%로 집계됐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치러진 대선 투표율 중 가장 낮다. 2017년 대선 투표율은 70%에 이르렀다. 투표율이 저조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영향에다 일부 보이콧 열풍이 겹쳐서다. 당선 확정 후 라이시는 취재진에게 “현 정부의 경험을 활용해 국가의 문제들을 푸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특히 민생 문제를 챙기겠다”고 말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내무부 발표 직후 라이시를 찾아 회담하고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개혁파 후보 헴마티는 이날 인스타그램에 “제13대 대선에서 라이시 후보가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 당신(라이시)의 정부가 명예로운 이란인의 생계와 행복을 증진하기를 바란다”다고 썼다. 레자에이 후보도 이날 성명을 내고 라이시의 당선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어제 승리의 위대한 승자는 이란 국민이다. 이란 국민은 적의 용병 역할을 하는 미디어의 프로파간다에 직면해 봉기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 아랍에미리트(UAE) 총리 겸 두바이 군주 등도 라이시의 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WHO “바이러스 확산이 백신 배분보다 빨라…백신 110억 회분 필요”

    WHO “바이러스 확산이 백신 배분보다 빨라…백신 110억 회분 필요”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14일(현지시간) “바이러스 확산이 백신 배분보다 빠르다”면서 백신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테워드로스 사무총장은 이날 화상 언론브리핑에서 “G7이 코백스를 통해 백신 8억7000만 회분을 기부하겠다고 한 발표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는 “WHO에 보고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는 7주 연속 줄고 있고 이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주간 기준으로 가장 오랫동안 감소한 것”이라면서도 여전히 백신 접종률이 낮은 많은 국가에서는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바이러스 확산이 백신 배분보다 빠르다. 매일 1만명 넘게 숨지고 있다”며 “G7의 기부 발표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는 더 많이, 더 빨리 배분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최근 델타 변이(인도발 변이)의 빠른 확산, 세계적으로 백신 공급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등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델타 변이는 이미 전 세계 74개국에 퍼진 상황이다. 스콧 고틀리브 전 미국 식품의약국(FDA) 국장은 전날 델타 변이 감염자가 2주마다 2배로 늘고 있으며 전체 확진자의 10%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또 테워드로스 총장은 G7이 내년 정상회의 때 모이기 전까지 전 세계 인구 70% 이상이 백신을 접종하길 바란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백신 110억 회분이 필요하다. G7과 주요 20개국(G20)은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브루스 에일워드 WHO 선임 고문은 “아프리카가 가장 취약하고 의료 서비스가 충분하지 못한 지역”이라며 G7이 약속한 백신을 이 지역에 우선으로 제공할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G7 정상들은 전날 영국 콘월 카비스 베이에서 회담한 뒤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종식을 위해 향후 12개월 이내에 백신 10억회분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국가별 백신 기부 규모나 구체적인 일정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왜곡된 교과서·영화… 봉오동전투서 사라진 영웅 최진동·최운산

    왜곡된 교과서·영화… 봉오동전투서 사라진 영웅 최진동·최운산

    “아니, 어찌 이러오? 봉오동 독립전쟁도 청산리전투도 우리 아버지 최운산이 창설한 부대가 치른 전쟁이고, 총사령관은 큰아버지 최진동이지 않소? 어찌 한국에서는 봉오동 전쟁 총사령관은 홍범도라고 하고 청산리 전투 사령관은 김좌진이라고 하오?” 중국에 살던 최운산의 첫째 딸 청옥은 199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TV를 보고 이렇게 흥분했다고 한다. 역사가 왜곡되거나 폄하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독립운동사도 사료 불충분에 정치적인 이유가 더해져 그런 일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봉오동 전투는 진실과 괴리된 측면이 많다. 홍범도만 영웅이 된 데는 정치적 배경도 있고 잘못된 교과서의 탓도 크다. 극적 효과를 추구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왜곡의 정점을 찍었다.●독립운동사 사료 불충분·정치적 이유로 왜곡 청옥의 말처럼 봉오동 전투는 사령관 최진동과 동생인 참모장 최운산이 지휘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이끈 전투였다. 김좌진과 홍범도는 각각 제1연대장, 제2연대장이었다. 교과서는 홍범도가 사령관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가르쳤다. 국민의 뇌리에 두 사람만 화석처럼 굳어져 남아 있는 이유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와 김좌진의 활약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만을 영웅화하면서 최진동·최운산은 사라져 버렸다. 굳어진 인식은 바뀌기 어렵지만 그래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후손이 있는 경우는 다르다. 최운산의 맏아들 최봉우는 광복 후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의 딸 최성주씨가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파묻힌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최씨는 지난해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이라는 책을 펴내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최씨를 만나 독립운동에 바친 비운의 가족사를 들었다. 최진동 형제의 아버지 최우삼은 함북 온성이 고향으로 1860년에 태어났고 1880년 무렵 만주 옌볜 도태(道台)로 봉직했다. 도태는 조선 말기에 옌볜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최우삼은 일가를 이끌고 봉오동으로 이주, 한인 마을을 건설했다.최진동은 중국인 부호 밑에서 일해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만주 군벌 장쩌림 부대에 있었던 최운산은 장쩌림의 목숨을 구해 주는 등의 각별한 인연으로 봉오동 일대에 부산 면적의 6배나 되는 땅을 갖고 있었다. 또 국수 공장, 콩기름 공장, 양조장, 성냥 공장, 비누 공장을 운영했다. 대규모 목장도 소유해 러시아 군대에 곡물과 소를 수출하는 등 간도 제일의 거부(巨富)였다. ●홍범도 영웅 묘사한 영화 봉오동전투 ‘정점’ 형제는 1912년 비적들로부터 동포들을 지킬 목적으로 독립군의 모태가 되는 100여명 규모의 자경단을 만들었다. 또 봉오동 사관학교와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독립군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15년에는 연병장과 막사를 만들고 두께가 1m가 넘는 토성을 건설해 독립군 기지를 구축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 되자 최진동 형제는 670명 규모의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해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통합 논의가 일어 1920년 대한군무도독부를 비롯한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 부대는 조직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로 거듭났다. 최진동이 부장(府長·사령관), 둘째 최운산이 참모장, 셋째 최치흥이 참모가 됐다. 막대한 재력을 가진 최운산은 각 부대에 주둔지를 제공하고 식량과 피복을 지급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해주까지 진출했던 체코군의 무기를 사들였다. 독립군들은 신형 무기로 체계화된 군사훈련을 받았다. 독립군들은 1920년 초부터 봉오동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인 5월까지 두만강을 건너 일제의 관서를 수십 차례 공격했다. 일제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최진동 형제는 보름 전 전투 준비를 완료하고 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한 달 전부터 주민들도 이주시켰다.대한북로독군부는 참호를 파고 의무부대도 후방에 배치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했다. 1920년 6월 7일 새벽부터 일본군은 봉오동을 습격했지만 그들의 패배는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157명의 사망자와 3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주했다.총사령관 최진동 등 지휘부는 최고봉인 봉초봉에 자리잡고 전투를 지휘했다. 전체 작전은 사령관 최진동과 참모들이 세웠다.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는 작전을 준비할 위치도 아니었고 시간도 없었다. 홍범도도 격렬히 싸웠지만 어이없는 결정을 내렸다. 갑자기 그가 이끌던 2중대를 퇴각시킨 것이다. 이 바람에 자리를 사수하던 신민단 대원들이 수적 열세로 전사하고 말았다. 일종의 전술일 수 있지만 최진동은 항명이라며 홍범도를 엄벌하려 했고 동생 운산이 말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당시 독립군은 영화에서처럼 찢어진 군복을 입고 굶주린 게릴라가 아니라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했으며 사격술이 뛰어난 정예군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은 “적(독립군)은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00~800m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라고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썼다. 거기에는 최운산의 부인인 김성녀와 봉오동 주민들의 헌신이 있었다. 김성녀는 수천 독립군의 식사를 제공하고 군복을 제조한 병참 책임자였다. 재봉틀 8대로 군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군복 모자에는 태극 견장이 달려 있었고 매화형 금장이 박힌 견장을 단 예복이 있을 정도였다. 최운산은 1930년대에도 무장 세력을 유지하며 우수리강 전투, 대황구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을 이끌며 독립 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까지 대황구삼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했다. 1937년에는 보천보 전투의 배후로 지목돼 투옥됐다. 광복 직전까지 6번이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다. 매번 극심한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다고 한다. 최운산은 광복을 한 달 열흘 앞둔 1945년 7월 5일 평양으로 갔던 길에 고문 후유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최진동은 일제와 싸우는 동안 부인과 맏아들, 맏며느리를 잃는 아픔을 겪다가 1941년 일제의 압박과 감시 속에서 병마로 사망했다. 최진동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공훈에 비해 등급이 낮다. 최운산은 1977년에야 서훈(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으로 서훈이 올려졌지만 역시 너무 낮다. 홍범도는 2등급인 대통령장, 김좌진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왜 이렇게 최진동 형제는 낮은 서훈을, 그것도 늦게 받고 공적이 파묻혔을까. 최운산의 손녀 최씨는 이렇게 말했다. “1961년 보훈 업무 담당 직원이 최운산에게 서훈을 주는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자 격분한 아버지(최봉우)가 주먹을 날렸답니다. 그 바람에 서훈도 취소됐다고 합니다.” ●부인 김성녀, 군복 제조 병참 책임자 활동 또 최운산의 부인 김성녀는 정부에 낸 진정서에서 이렇게 썼다. “독립운동 당시 하급 지휘관 및 졸병으로 생존한 독립인사가 자신의 공적을 과대 선전하기 위하여 허무맹랑한 사실과 왜곡되고 과장된 조작 사실로 인하여 오점을 남겼으며 일생을 독립운동과 조국 광복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총투입하여 투쟁하였으나 공적이 뒤바뀌어져 있기에 독립운동을 하시고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이때가 1969년이다. 하급 지휘관이란 철기 이범석을 지칭한다. 이승만과의 친분으로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은 ‘우둥불’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자신을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과장하고 최진동 형제의 공적을 깔아뭉갰다. 이범석은 당시 20세의 군사학교 교관이었다. 최씨에 따르면 최진동의 자녀가 역사를 소설처럼 써서 왜곡했다며 출판을 말리고 이범석과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최씨는 “얼굴을 보면 최운산의 서훈을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 엄마(최운산의 며느리)가 당고모(최진동의 딸)와 세 번 찾아갔는데 만나 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최진동 형제의 공적이 매장된 배후에는 이범석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진동의 후손들은 중국과 미국에 살고 있다. 일부는 한국으로 들어와 어렵게 살고 있다. 최운산의 자녀들도 만주와 북한으로 흩어졌고 최운산의 부인과 아들 최봉우만 남한으로 내려왔다. 최봉우는 1984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만주에 있던 누나, 동생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최운산의 딸 계순과 아들 호석은 한중 수교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거부였던 최진동 형제가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빈털터리가 되었는데도 중국에 남았던 후손들은 지주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쓰고 핍박을 받으며 힘든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처럼.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화신백화점 신축 광고와 박흥식/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화신백화점 신축 광고와 박흥식/손성진 논설고문

    전회에서 신흥만몽박람회 축하 전면광고를 실은 ‘선일지물’을 말하면서 빠뜨린 것이 있다. 선일지물 창업주 박흥식이다. 그 광고의 하단을 보면 ‘사장 박흥식’이라고 적혀 있다. 박흥식은 1903년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는데 아버지는 도참사(道參事) 등을 역임한 유지였고, 형 박창식은 항일 투쟁을 하다 투옥당해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박흥식은 일찍부터 사업에 소질을 보였다. 평남 진남포공립상공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6세 때부터 남포에서 쌀 장사를 시작했다. 또 인쇄소와 명함 가게를 운영했지만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경성으로 올라온 박흥식은 1926년 을지로 2가에 선일지물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스웨덴과 캐나다에서 일본 제품보다 싸게 종이를 들여와 박리다매로 전국 인쇄소 수백 곳과 거래하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큰 신문사에도 용지를 댔다. 종이 판매로 큰돈을 번 박흥식은 1930년 12월 경성상공협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나이 겨우 27세 때였다. 박흥식은 1931년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어 화신백화점을 창업했다. 화신백화점의 전신인 ‘화신상회’는 신태화가 옛 화신백화점이 있던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서 운영하던 귀금속상이었다. 신태화는 은 투자를 하다 은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박흥식에게 세공사가 60명이나 되는 사업체를 넘겨주었다(2021년 1월 4일자 ‘근대광고 엿보기’). 이듬해 박흥식은 화신상회 옆에 들어선 동아백화점의 매출이 부진하자 경영권을 사들인 뒤 연결 육교를 놓고 통합 운영했다. 그러나 1935년 1월 27일 목조 4층 건물이던 화신백화점에 큰불이 나 서관(옛 화신상회)과 동관(옛 동아백화점)이 전소됐다. 총독이 진화를 지휘하고 매일신보가 호외를 발행할 만큼 큰 불이었다. 1971년의 대연각 화재에 견줄 만한 불을 구경하느라 구경꾼 수천 명이 몰렸고 이를 정리하느라 기마경찰까지 출동할 정도였다. 보험에 들어 있어 화재로 큰 손해를 보지 않은 박흥식은 곧바로 재건축에 착수해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의 새 화신백화점을 1937년 11월 완공, 문을 열었다. 경성 최고층 건물이었던 새 화신은 국내 최초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등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광고에는 부지 면적이 3248평으로 나와 있다. 지하에는 식료품점 등이, 1층에는 상품권매장·양품잡화점·화장품점 등이, 2층에는 포목점·귀금속점 등이, 3층에는 부인아동품점·완구점·예식장 등이, 4층에는 양복점·문방구·책방·이발소 등이, 5층에는 악기점기점·식당 등이, 6층에는 가구점·전기기구점 등이, 옥상에는 온실과 갤러리 등이 있다고 돼 있다. 요즘 백화점과 큰 차이가 없다. sonsj@seoul.co.kr
  •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3>고문당해 ‘도둑질’ 거짓자백하자 강제 수용…‘부랑아’ 낙인 계속됐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3>고문당해 ‘도둑질’ 거짓자백하자 강제 수용…‘부랑아’ 낙인 계속됐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달 2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 해운대서 놀던 꼬마 잡아간 경찰, 허위자백 받아내 형제원으로박상현(47·가명)씨는 37년 전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놀고 있던 그를 붙잡아 간 경찰들은 “배달하다 돈을 훔쳐 도망나온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매질과 물고문을 당한 박씨는 결국 강압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고, 이튿날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박씨는 19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3년 동안 아동소대와 청소년소대에 머물렀다. 흙벽돌을 만들고 흙마대를 나르는 작업에 강제로 동원됐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기합을 받았다. 소대 안에서 폭력은 일상이었고 밤마다 소대장에게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 13살 때 형제복지원을 나온 박씨는 시설을 전전했다. 부산소년의집에서 서울소년의집으로, 다시 부산소년의집으로 옮겨다니며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시설은 형제복지원보다는 나았지만, 구타는 여전했다. 박씨는 스무살이 되어서야 수소문 끝에 가족을 찾았다.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가족들의 시선조차 곱지 않았다. 한때 취업을 하기도, 직업군인이 된 적도 했지만 그의 유년기를 알게 된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결국 박씨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일용직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부산을 떠나 연고가 없는 한 도시에 자리잡은 그는 지금도 제 과거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봐 하루하루가 두렵다. 아래는 박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박상현 진술 내용: 1. 형제복지원 입소경위와 피해사실 1984년 4월 10일 오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놀고 있었는데 사복 입은 형사 2명이 저를 잡더니 다짜고짜 집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어디서 배달하다가 도망 나온 거냐?” “뭐 훔치고 도망 다니는 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했지만, 바로 해운대파출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훔친 적 없다”고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제가 행색이 초라해서인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중국집에서 배달하다가 돈 훔쳐서 도망 나온 거냐?”고 묻길래 “절대 아니다”라고 했지만, 제 말은 듣지도 않고 바른 대로 말하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게 하더니 수건 같은 것을 허벅지에 올리고 경찰봉으로 허벅지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하니 수갑을 뒤로 채우고 경찰봉을 무릎 뒤로 끼우더니 책상 양쪽에 걸고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의 물을 얼굴에 붓는 고문을 했습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형사들이 말하는 대로 배달도 했고, 주인의 시계와 돈을 훔쳐서 도망 나온 것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대답을 들은 후에야 풀어주면서 유치장은 아니고 의자 구석에 수갑을 채운 채로 자라고 했습니다. 너무 아프고 졸려서 잠을 청했습니다. 한참을 자다가 깨워서 일어나니 “내일이면 집에 갈수 있다. 저 차를 타고 가면 저 아저씨들이 내일 집에 보내 준다”는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차를 탔습니다. 흙벽돌 만들고 흙마대 나르고, 매일 구타에 성폭행까지 당해 한참을 달려 내린 곳이 형제복지원이었습니다. 새벽에서야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 마자 몽둥이로 때리면서 어느 건물로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줄을 세워놓고 옷을 다 벗게 했습니다. 소방호스로 찬물을 한참을 뿌리고 이상한 하얀 가루를 머리부터 뿌리고 체육복 같은 것을 입히더니 자게 했습니다. 물론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기에 도망갈 엄두도 못 냈습니다. 단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밤을 지새웠을 뿐입니다. 잠깐 잠을 자고 나니 새벽에 기상을 시켰고 밥을 선착순으로 먹게 했습니다. 그후에 아동소대인 24소대에 배치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24소대에는 저보다 어린애들도 있었고 저보다 나이 많은 조장들도 있었습니다.그날부터는 매일이 지옥 같은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하루라도 안 맞은 날은 정말이지 행복해 할 정도였습니다. 매일매일 맞았고, 형편 없는 식사조차 항상 선착순이였습니다. 밤에는 소대장이라는 사람한테 성폭행도 당했었습니다. 저녁 점호가 끝나면 어김없이 철창문과 철문이 이중으로 잠겼으며, 그 철문이 잠기고 나면 또다른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소대원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소대장이 따로 불러 성폭행을 했습니다. 거부할 경우에는 조장들이 따로 불러 폭행과 얼차려를 했습니다. 조장들한테는 기본적으로 매일 몽둥이로 맞고 ‘얼차려’는 일상이였습니다. 낮에는 학교를 다녔지만 수업이 끝나면 작업장에 불려나가서 흙벽돌을 만드는 데 동원됐습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역시 얼차려를 받거나 맞아야 했습니다. 할당량을 채웠다고 하면 기껏 앙꼬(앙금) 없는 빵 한 조각과 콩물이 전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회 뒤쪽에 공사를 할 때도 흙마대를 지고 날라야 했으며, 시에서나 어디서든 손님이라도 오게 되면 평소엔 나오지도 않은 보여주기식의 음식이 조금 나왔습니다. (손님이 온다고) 나눠줬던 옷들도 다시 수거해 반납을 하게 했습니다. 운동장 스탠드 밑에는 소를 가져다놓고 보여주기식으로 도축도 하는 그런 실정이였습니다. 먹는 것은 항상 부실했고, 썩은 냄새 진동하는 정어리 젓갈은 항상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3년 가량 형제복지원에서 지낸 생활은 정말이지 뼛속 깊이 상처가 되어 지금, 아니 이후로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진 후 소년의집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형제복지원 안에서 개금분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부산)소년의집으로 이동한 후 면담을 했고,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서울소년의집으로 다시 이동했습니다. 소년의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생들은 부산소년의집으로 다시 옮겨 왔습니다. 부산에서 소년의집 안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수녀님과 신부님의 도움으로 학업은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 곳 역시 보호시설이었기 때문에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구타당한 사실을 알리면 또다시 보복을 당했기 때문에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의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형제복지원보다는 나아졌지만 역시나 구타와 괴롭힘은 있었으며, 저의 어린 시절은 제가 원하지 않는 단체 생활과 폭력과 폭언, 구타와 괴롭힘의 생활이 항상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형제복지원 출신’ 낙인에 가족도 직장동료도 떠났다 2. 형제복지원과 소년의집 퇴원 후의 생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소년의집에서 호적을 만들어주셔서 취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다니던 초등학교와 포항 북부 경찰서 등을 찾아 가출 신고를 한 흔적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찾아서 가게 됐고, 거기서 어머님의 친구 분 소식을 접하고 제가 어머님을 찾으러 왔다는 것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어머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을 만나고 나니 제 이름과 생일 모든 것이 제 기억과는 달랐고 집을 찾았기에 소년의집에서 만들어주신 호적과 제 본래 호적이 2개가 되어 호적 정정 신청을 해 소년의집 호적은 말소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오랜 단절이 있었고 제가 지낸 곳이 형제복지원과 소년의집이라는 걸 알게 된 가족과 친지들은 저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거의 부정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그 후에 가족들과의 거리는 여전했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제가 형제복지원과 소년의집에서 자란 것을 알게 돼 대인관계를 형성하기가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직장도 그만두게 됐고,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면서 저는 도피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도피처로 군대를 선택했고 직업군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직업군인 생활조차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편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내온 어린 시절을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선입견을 가지고 저를 피하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를 결심하게 되었고, 제대 후에도 직장생활은 제게 사치였습니다. 저의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의 날선 시선과 선입견 속에 지내는 게 너무 힘들다보니 직장생활도 힘들었고 저는 택배일과 퀵 서비스 같은 일용직 일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만난 지 27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왕래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 역시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은 힘들어 퀵서비스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저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자연히 대인기피증도 생기고 어린 시절의 그 고통과 아직도 마주하고 있습니다. 생활고는 당연한 것이며, 주위에 아는 지인조차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어린 시절의 제가 겪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적은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지난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저희는 지금까지 버티고 버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의 지난 고통과 아픔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이 억울하고 슬펐던 지난 날들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 치유가 될 수 있도록 저희의 마음을 헤아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 [여기는 중국] 아파트 단지내 ‘독 소시지’ 놓아 애완견 7마리 죽인 남자

    [여기는 중국] 아파트 단지내 ‘독 소시지’ 놓아 애완견 7마리 죽인 남자

    중국 저장성(浙江) 항저우(杭州)에서 한 남성이 고의로 독이 든 간식을 아파트 단지 내에 두는 방식으로 7마리의 애완견을 죽인 혐의로 붙잡혔다. 항저우시 샤오산구 아파트 밀집 구역에 거주하는 30대 남성이 놓은 소시지를 먹은 애완견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죽은 사건이다. 이번 사건은 지난 4월 16일부터 최근까지 애완견들이 유사한 증상으로 죽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애완동물업체 사장 차 모 씨의 제보로 외부에 알려졌다. 차 씨는 지난 4월 16일 이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강아지 한 마리가 급사한 이후 추가로 총 6마리의 애완견이 죽는 비슷한 사건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죽기 직전 차 씨의 애완동물업체를 찾았던 이 애완견은 주인과 함께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토를 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곧바로 차 씨의 업체로 옮겨졌지만 곧 몸을 떨다가 숨을 거뒀다. 진단 결과 독성 물질에 중독돼 있었다. 이와 같이 아파트 단지 내에서 총 7마리의 애완견이 비슷한 증상을 보인 후 사망하자 일부 주민들은 길가에 관련 사실을 안내하는 경고문을 설치했다. 차 씨는 “아파트 밀집 구역이라서 놀이터, 산책로 등에는 매일 여러 견주들과 반려견들이 산책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서 “그런데 최근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면서 견주들 사이에 공포감이 확산됐다”고 증언했다.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또 다른 중년 여성 샤오 씨도 최근 자신의 반려견이 길거리에 있는 소시지를 주워 먹은 직후 죽었다고 진술했다. 샤오 씨는 “평소처럼 점심 식사 후 4시쯤 반려견과 산책 중이었다”면서 “목줄을 하고 있어서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반려견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분홍색 소시지 조각을 먹은 직후 온 몸이 뻣뻣하게 굳고 경련을 일으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고 했다. 이 같은 진술을 모아 애완견동물업체 사장 차 씨는 관할 공안에 사건 수사를 의뢰,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아파트 단지 곳곳에 CCTV를 설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지난달 27일 오후 11시 경, 30대 남성이 아파트 단지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 곳곳에 소시지 조각을 뿌리는 장면이 CCTV에 포착됐다. 주민들의 확인 결과, 바닥에 뿌려진 것은 분홍색 소시지 조각으로 조각 안쪽에는 독약으로 짐작되는 노란색 알약이 박혀 있었다. 이 영상을 토대로 수사에 나선 관할 공안국은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사건 혐의자 30대 왕 모 씨를 체포했다. 왕 씨는 공안에 붙잡힌 직후 사건에 대해 자백하면서 “아파트 안에 너무 많은 개들이 살고 있어서 이 같은 일을 벌였다”고 진술했다. 왕 씨는 “매일 아내와 아이가 아파트 놀이터와 산책로를 다니는 동안 무분별하게 뛰어다니는 개들에게 놀라서 다치는 사고까지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서 “목줄도 안하고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어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 단지 내에는 총 60~70마리의 애완견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상당수 견주들은 애완견 산책 중 목줄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목줄 착용 시에도 줄을 느슨하게 잡으면서 산책로를 걷는 이웃 주민들의 불편 사례가 접수된 바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독극물을 넣은 소시지를 거리에 뿌려 다수의 애완견을 죽게 한 왕 씨에 대해 관할 공안국은 형사 구류, 여죄 여부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데스크 시각]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억하는 방법/강국진 정책뉴스부 차장

    [데스크 시각]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억하는 방법/강국진 정책뉴스부 차장

    지인한테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1980년대 초 학생운동 지도부였고, 지금은 지역에서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그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고통 속에서도 오로지 “동지들이 피신할 시간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고 했다. 담담하게 말하는 속에서도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많은 이들이 남영동 대공분실이 인적 드문 숲속이나 외진 곳에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지하철 남영역에서 보면 휘황찬란한 조명을 뽐내는 러브호텔에 둘러싸인 칙칙한 벽돌 건물이 보인다. 누군가 얘기해 주기 전에는 이 건물이 한때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16년 전인 2005년 8월 남영동 대공분실 르포를 쓴 적이 있다. 대공분실 취재기로는 처음이어서 지금도 무척 기억에 남는다. 이 건물은 여러모로 독특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던 곳이 509호 조사실이었는데, 5층에는 모두 16개 조사실이 있다. 얼핏 보면 18개이지만 사실 2개는 비밀계단으로 이어진다. 나선형 계단과 계속 나타나는 출입문 때문에 조사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몇 층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은 공포와 고립감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겠다는 목표를 위해 창문 크기나 출입문 위치까지도 세심하게 배치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제34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과 함께 민주인권기념관 착공식이 열렸다. 이곳을 시민에게 되돌려주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데 싫어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원형이 훼손되는 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테니스장이 있던 곳에 기념관을 세우니 원형 훼손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테니스장 역시 보존해야 할 원형이다. 사람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게 직업인 이들은 7층 무도장과 야외 테니스장에서 체력을 단련하고 여유를 즐겼다. 테니스장은 국가폭력을 위한 유기적인 일부였다. 민주인권기념관은 기억을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정작 민주인권기념관을 기억하는 방식 때문에 더 불편해졌다. 기념관 홈페이지에는 “2005년 8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인권교육센터’ 활용계획 경찰청에 제안”이라고 돼 있다. 마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시종일관 열심히 노력한 성과라도 되는 듯 강조하는 것 같다. 이건 남영동 대공분실을 국민에게 되돌리자는 운동을 기획하고 노력했던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인권연대와 대한성공회 주축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국민에게’ 캠페인을 시작했던 게 2005년 6월이었다. 당시 경찰청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경찰회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캠페인 취지를 전해 듣고는 무척 신속하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7월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인권기념관으로 바꾼다며 공동기자회견도 했고, 10월에는 대공분실 앞마당에서 인권경찰 비전 선포식까지 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당초 계획이 표류하는 동안 기념사업회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2018년 경찰청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념사업회로 이관했다. 앞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건 기념사업회 몫이다. 사업회를 둘러싼 각종 난맥상에 더해 새로운 관변단체로 빠르게 변신하는 모습에 질려 관심을 아예 끊어 버린 처지에 이제 와서 이러니 저리니 참견할 생각은 없다. 그저 한 가지는 꼭 얘기하고 싶다. 민주인권기념관이 기념해야 할 대상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아니라. betulo@seoul.co.kr
  • 文 “남영동 대공분실에 민주 기둥 우뚝…국가폭력 못 들어설 것”

    文 “남영동 대공분실에 민주 기둥 우뚝…국가폭력 못 들어설 것”

    6·10 항쟁에 “미래세대 계승할 고귀한 자산”“많은 희생 위에 민주주의 결코 잊어선 안돼”대공분실서 87년 박종철 열사 물고문 사망“독립·호국·민주 유공자들께 예우 다할 것”문재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 34주년을 맞은 10일 민주인권기념관 착공과 관련해 “남영동 대공분실에 민주·인권의 기둥을 우뚝 세워 다시는 국가폭력이 이 나라에 들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의 정신은 미래세대로 계승돼야 할 고귀한 자산”이라면서 “많은 분들의 희생 위에서 민주주의를 누리게 됐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꽃들 진 자리 맺힌 민주주의 열매”“참으로 가슴 아리다” 문 대통령은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졌던 옛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자리에 민주인권기념관이 들어선다고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문 대통령은 34년 전 6월의 광장에서 함께한 시민들을 떠올린 뒤 “젊고 푸른 꽃들이 진 자리에 맺힌 민주주의의 열매가 참으로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면서 “전국 곳곳에서 하나가 돼 외친 함성은 민주주의를 열었고, 이제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을 넘어 경제·생활 속에서 더욱 크게 자라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실천하고 계신 국민들께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또 지난해 처음으로 민주주의 유공자를 발굴해 훈포장을 전수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정기 포상으로 확대했다고 소개하고 “독립·호국·민주 유공자들께 예우를 다하고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겠다”고 말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엄마가 ‘조카 물고문 살해‘ 범행도구 나뭇가지 직접 사서 전달…검찰,친모도 불구속 기소

    엄마가 ‘조카 물고문 살해‘ 범행도구 나뭇가지 직접 사서 전달…검찰,친모도 불구속 기소

    10살짜리 조카에게 귀신이 들렸다며 폭행하고 강제로 욕조 물에 집어넣어 사망케 한 이른바 ‘조카 물고문 살인’ 사건 피해아동의 엄마가 자신의 언니이자 사건 주범인 이모에게 범행도구를 직접 사서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수원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김원호 부장검사)는 9일 아동복지법 위반(아동학대 방조 및 유기·방임) 혐의로 친모 A(31)씨를 불구속기소 했다. A씨는 지난 1월 25일 오후 3시 40분쯤 언니 B(34·무속인)씨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딸 C(10)양의 양쪽 눈에 멍이 든 사진을 전송받고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어 C양의 사망 전날인 2월 7일 오후 7시 40분쯤 B씨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애가 귀신에게 빙의가 됐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려면 복숭아 나뭇가지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듣고 복숭아 나뭇가지 한 묶음을 사 전달한 혐의도 받는다. 당시 A씨는 B씨로부터 빙의와 관련한 유튜브 영상 링크도 전달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3시간여 전화 통화 과정에서 B씨로부터 “파리채로 아이를 때렸다”는 등의 말을 들었지만, 오히려 C양과 전화를 바꿔 “이모 손을 닿으면 안 고쳐지는 것이 없다”고 다독인 것으로 파악됐다. A씨가 이런 말을 할 때 C양의 건강은 이미 크게 악화한 상태였다. 지난 8일 B씨 부부의 3차 공판 과정에서 공개된 범행 동영상을 보면,전화 통화 하루 뒤이자 사망 당일인 지난 2월 8일 오전 9시 30분쯤 C양은 왼팔을 아예 들지 못했고,오전 11시 2분에는 거실에서 몇 걸음을 떼지 못한 채 반려견집 울타리 쪽으로 넘어졌다. 이는 복숭아 나뭇가지 등을 이용한 폭행이 1월 말부터 계속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C양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C양은 이후 욕실로 끌려가 물고문 행위를 당한 끝에 숨졌다. A씨는 자신의 혐의에 관해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검찰은 B씨의 진술과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통해 A씨의 범행을 특정,이날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A씨 사건을 B씨 부부의 재판에 병합 신청할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비닐봉지에 들어가! 개똥 삼켜!” 조카 물고문 부부, 영상도 찍었다

    “비닐봉지에 들어가! 개똥 삼켜!” 조카 물고문 부부, 영상도 찍었다

    10살짜리 조카에게 귀신이 들렸다며 폭행하고 물고문을 해 숨지게 한 이모 부부가 사망 직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조카를 욕실에서 개의 똥을 억지로 먹게 하는 등 끔찍한 학대 동영상이 공개됐다. 8일 수원지법 형사15부(조휴옥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사건의 3차 공판에서 수사검사인 박상용 검사는 이모 A(34·무속인)씨와 이모부 B(33·국악인)씨가 조카 C(10)양을 학대하면서 직접 찍은 동영상 13건을 공개했다. 검찰은 지난 1월 16일부터 사망 당일인 2월 8일까지 A씨 부부의 공소사실 중 대표적인 것을 추려 법정에서 공개하면서 혐의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심리를 진행했다. 동영상 중에는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 개의 대변을 먹으라고 지시하는 등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학대 행위가 담겨 있었다. 이를 본 방청객들은 울음과 탄식을 자아냈다. 검찰이 공개한 첫 번째 동영상은 지난 1월 16일 오후 4시쯤 촬영된 것으로, 어깨와 허벅지 부분에 새파랗게 멍이 든 C양이 알몸상태로 욕실 바닥에서 빨래하는 모습이 담겼다. 사망 당일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이미 C양의 건강은 크게 악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C양은 2월 8일 오전 9시 30분 양손을 드는 벌을 서는 과정에서 왼팔을 아예 들지 못했다. A씨 부부는 이후 C양을 욕실로 끌고 가 발을 빨랫줄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머리를 물이 담긴 욕조에 여러 차례 강제로 넣었다가 빼는 등 물고문을 연상시키는 학대 행위로 C양을 숨지게 했다. 한편, 다섯 살의 딸에게 1년여 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이지 않는 등 학대한 친모와 외할머니가 검찰에 넘겨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강원경찰청 여성청소년범죄수사대 등에 따르면 최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외할머니 A씨를 구속하고, 친모 B씨를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두 사람은 지난 1년여 간 딸이자 손녀인 C(5)양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이지 않아 심각한 영양실조에 이르게 하고, 윽박지르거나 때리는 등 학대한 혐의를 받고 있다. 수원 신동원·춘천 조한종 기자 asadal@seoul.co.kr
  • 10살 조카 물고문 살해 이모부부, 개똥 먹게 한 학대 동영상 법정서 공개

    10살 조카 물고문 살해 이모부부, 개똥 먹게 한 학대 동영상 법정서 공개

    10살짜리 조카에게 귀신이 들렸다며 폭행하고 물고문을 해 숨지게 한 이모 부부가 사망 직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피해자를 욕실로 끌고 가 개의 똥을 억지로 먹게 하는 등 끔찍한 학대 동영상이 8일 공개됐다. 수원지법 형사15부(조휴옥 부장판사) 심리로 8일 열린 이 사건 3차 공판에서 수사검사인 박상용 검사는 이모 A(34·무속인)씨와 이모부 B(33·국악인)씨가 조카 C(10) 양을 학대하면서 직접 찍은 동영상 13건을 공개했다. 검찰은 1월16일부터 사망당일인 2월8일까지의 A씨 부부의 공소사실 중 대표적인 것을 추려 법정에서 재생하면서 혐의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심리를 진행했다. 동영상 중에는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 개의 대변을 먹으라고 지시하는 등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정서적·신체적 학대 행위가 담겨 있었다. 이를 본 방청객들은 울음과 탄식을 자아냈다. 검찰이 공개한 첫 번째 동영상은 1월 16일 오후 4시쯤 촬영된 것으로, 어깨와 허벅지 부분에 새파랗게 멍이 든 C양이 알몸상태로 욕실 바닥에서 빨래하는 모습이 담겼다. 검찰은 이 같은 행위가 정서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A씨 부부는 이튿날인 17일과 20일 불이 꺼진 거실에서 역시 알몸상태의 C양에게 양손을 들고 벌을 서도록 했다. 특히 1월 20일 오후 1시 26분쯤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A씨가 C양을 대형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게 한 뒤 그 안에 있던 개의 대변을 먹도록 강요한다. 1월 24일 동영상 속 알몸상태의 C양은 걷기가 불편한 것처럼 뒤뚱거리고,욕실 안 비닐봉지를 정리하면서 허리를 숙이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하루 뒤 촬영한 사진의 C양은 두 눈을 아예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어 있다. 검찰은 A씨 부부가 C양에게 폭력을 가한 결과로 보이나 인과관계가 드러나지 않아 공소사실에는 포함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사망 직전인 2월 7일 오전 6시 10분쯤 C양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드는 벌을 받던 중 왼팔을 들지 못했다. 검찰은 늑골이 부러진 C양이 팔을 제대로 들지 못해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아 드는 식으로 버텨낸 것이라고 말했다. A씨 부부는 C양에게 “팔 똑바로 들어”라고 소리치고,이후에는 국민체조를 시키기도 했다. 사망 당일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이미 C양의 건강은 크게 악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C양은 2월 8일 오전 9시 30분 양손을 드는 벌을 서는 과정에서 왼팔을 아예 들지 못했다. 이어 오전 11시에는 A씨가 “이모부 쪽으로 와 봐”라고 말하자 C양이 힘겹게 방향을 트는 장면이 나왔다. 2분 뒤에는 C양이 거실에서 몇 걸음을 떼지 못하고 반려견집 울타리 쪽으로 넘어지는 모습도 포착됐다. A씨 부부는 이후 C양을 욕실로 끌고가 발을 빨랫줄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머리를 물이 담긴 욕조에 여러 차례 강제로 넣었다가 빼는 등 물고문을 연상시키는 학대 행위로 C양을 숨지게 했다. A씨 부부는 C양을 학대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에 걸쳐 동영상과 사진으로 촬영했다. 검찰과 경찰은 이를 확실한 증거로 삼아 이들을 수사했다. A씨는 촬영 이유에 대해 “친모에게 보여주려고 했다”고 진술했으나,실제로 친모에게 전달한 동영상은 거의 없고,사진만 일부 전송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 사건 감정인은 ‘동영상 마지막 부분의 C양은 거의 죽을 만큼 구타를 당한 상황에서 물고문 행위를 몇 차례 당한 뒤 사망하는데,이런 점에 미뤄보면 병원에 갔더라도 소생 가능성이 낮았을 것’이라고 소견을 냈다”고 말했다. 일부 방청객들은 공판이 끝난 뒤 피고인들을 향해 “사형시켜라”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다음 재판은 내달 8일 열릴 예정이다. 숨진 C양과 함께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친부는 A씨와 B씨를 엄벌에 처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한 상태이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개 대변 먹으라” 조카 물고문 살인 이모부부, 엽기 학대영상 공개

    “개 대변 먹으라” 조카 물고문 살인 이모부부, 엽기 학대영상 공개

    10살짜리 조카를 폭행하고 강제로 욕조 물에 집어넣는 ‘물고문’을 해 숨지게 한 이모 부부가 피해자에게 개의 대변을 억지로 먹게 하는 등 끔찍하고 엽기적인 학대를 한 동영상들이 공개됐다. 수원지법 제15형사부(부장판사 조휴옥)는 8일 살인 및 아동복지법 위반(아동학대)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A씨(34·여·무속인), B씨(33·국악인)에 대한 3차 공판을 열고 심리를 속행했다. 이날 검찰은 1월 16일부터 사망당일인 2월 8일까지의 학대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대표적인 동영상들을 재생하면서 이들의 혐의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심리를 진행했다. 총 14개의 동영상이 재생됐다. 법정에서 공개된 동영상은 14개지만 법원에 증거로 제출된 동영상과 검찰 측에서 확보한 동영상은 수십개에 달한다. 동영상 중에는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 개의 대변을 먹으라고 지시하는 등 상상을 뛰어넘는 정서적·신체적 학대 학대 행위가 담긴 것도 있었다. A씨는 “입에 쏙! 입에 쏙!”이라며 “그거 왜 핥아먹어? 그거 아이스크림 아니야. 위 썩는다”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방청석에서는 울음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앞서 A씨 부부는 지난 2월8일 낮 12시35분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소재 한 아파트에서 조카인 C양의 전신을 플라스틱 재질 막대기 등으로 마구 때리고 욕조에 머리를 담그는 등 학대해 C양을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 부부의 학대는 C양이 숨지기 두 달여 전부터 약 20차례 진행된 것으로 조사됐다. A씨 부부에 대한 4차 공판은 오는 7월1일에 열릴 예정이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민주당 前부대변인 “천안함 전 함장, 자기 부하 수장시켰다” 막말 파문 [이슈픽]

    민주당 前부대변인 “천안함 전 함장, 자기 부하 수장시켰다” 막말 파문 [이슈픽]

    “최원일, 희생자 부당처우 말할 자격 없다”사회자·패널이 “ 위험한 말씀” 반박하자조상호 “아니오, 자기는 살아 남았지 않나”北, 2010년 천안함 폭침…장병 46명 희생文 대선캠프서 경찰개혁위 부위원장 지내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이 7일 북한의 폭침으로 침몰해 46명의 장병이 희생됐던 천안함의 전 함장 최원일 예비역 대령에 대해 “생때 같은 자기 부하들을 수장시켰다”고 비판했다. 조 전 부대변인은 최 전 함장이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사태 당시 북한의 폭침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 지휘관으로서 무능한 것이고 자신은 살아 남은 만큼 당연히 부하들을 수장시킨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최 전 함장은 천안함 희생자들에 대한 처우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고 말해 막말 논란에 휩싸였다. 패널 “北 폭침인데 왜 함장에 책임 묻나”조상호 “작전 중에 폭침 파악 못한 건 지휘관으로서 굉장히 무능한 것” 조 전 부대변인은 이날 오후 채널A ‘뉴스톱10’ 방송에서 천안함 희생자들에 대한 처우 얘기가 나오자 “최원일 그 분도 승진했다. 그분은 그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이에 사회자와 패널들이 “위험한 말씀”이라고 반박하자 조 전 부대변인은 “아니오, 함장이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자기는 살아 남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조 전 부대변인은 “심지어 한미연합훈련 작전 중이었는데 자기가 폭침을 당하는 줄 몰랐다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그 표현으로서 수장이란 표현을 쓴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부하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제 와서 자기들이 제대로 처우를 안 해준다(고 말한다)”면서 “본인은 처우 받을 자격이 없다. 부하들이면 몰라도”라고 강조했다.한 패널이 “수장을 누가 시켰나. 굉장히 위험하신 발언”이라면서 “북한에서 폭침해서 한 것이지 그럼 최원일 함장이 폭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최 함장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수장) 주어가 누구인가. 말의 표현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조 전 부대변인은 “작전 중에 폭침 부분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굉장히 무능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여 맞받아쳤다. 조 전 부대변인의 주장이 이어지자 사회자는 “‘수장’이란 단어는 바로 잡겠다”고 정리에 나서기도 했다. 조 전 부대변인은 지난해 5월부터 8월까지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을 지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섰던 19대 대선에서는 당시 문재인 후보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경찰행정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시 중구 법률고문과 아동복지심의위원회 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천안함 재조사 진정 논란 때 최원일“살기 싫다. 부하들 위해 참고 이겨내야”생존 장병 “靑 앞에서 죽고 싶은 심정” 앞서 최 전 함장은 지난 4월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폭발로 결론이 났던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재조사 착수 논란이 일었을 때 분노하며 항의했었다. 당시 진상규명위는 과거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에 참여한 신상철씨가 천안함 사건은 북한 소행이 아닌 다른 외부요인에 의한 충돌로 인해 좌초된 것이라며 ‘천안함 사건으로 숨진 장병들의 사망 원인에 대한 진상규명을 해달라’는 취지의 진정서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조사 개시 여부를 논의했었다. 온라인매체 서프라이즈 대표를 지낸 신씨는 2010년 천안함 사건 발생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전신)의 추천 몫으로 민·군 합동조사단에 합류했었다. 그는 신씨는 2010년 5월 정부가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천안함이 북한군 어뢰에 피격돼 침몰했다’는 공식 발표에 “정부가 침몰 원인을 조작했다”며 ‘천안함 좌초설’을 주장해왔다. 그러자 최 전 함장은 당시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진상규명위 항의 방문 사실을 전하며 “(재조사 결정은) 만우절 거짓말이겠지 했는데… 어제, 오늘 전역하고는 처음으로 살기 싫은 날이었다”면서 “그래도 부하들을 위해 참고 이겨내야 하는 현실이 이젠 힘들다. 나도 병원 좀 다니고 싶은데 세상이 시간을 안 준다”고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전우회장인 전준영씨는 당시 SNS에 “몸에 휘발유 뿌리고 청와대 앞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이후 진상규명위는 신씨의 재조사 진정을 기각 처리했다. 민군합동조사단은 이미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경계 임무 중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그해 5월 공식 발표했다.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됐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2>집 앞에서 놀던 꼬마, 누나와 납치돼 형제원으로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2>집 앞에서 놀던 꼬마, 누나와 납치돼 형제원으로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달 2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 집 앞에서 놀던 꼬마, 누나와 함께 납치돼 형지복지원으로수용번호 ‘83-1XXX’ 하태식(48·가명)씨는 형제복지원에 두 번 입소했다. 10살 때 누나와 함께 트럭을 탄 남자들에게 납치돼 형제복지원으로 처음 보내졌다. 3년간 수용생활을 하다가 1986년 여름, 경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아동소대 친구와 함께 담을 넘어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경찰 손에 이끌려 다시 형제복지원로 가게 됐다. 이듬해 형제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하씨는 아동소대, 작업소대, 악대소대를 옮겨다녔다. 기합과 매질은 일상이었지만, 도망쳤다 다시 붙잡혀 왔을 때 가해진 폭력은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섰다. 중대장에게 불려가 맞고, 소대장에게 불려가 다시 맞았다. 하씨와 같은 날 재입소한 30대 수용자는 집단 구타 끝에 목숨을 잃었다. 하씨는 퉁퉁 부은 몸으로 소대장이 동료의 시신을 옮기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유년 시절 4년 동안 형제복지원에서 겪은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은 두렵고 세상을 향한 원망은 커져만 갔다. 퇴소 후 앵벌이, 신문팔이, 봉제공장을 전전하며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다. 지금은 물류센터에서 주 50시간씩 일한다. 자신을 ‘밑바닥 삶’이라고 표현하는 하씨는 국가로부터 피해 보상을 받아 그간의 삶을 위로받고 싶다. 아래는 하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 [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하태식 진술 내용: 저는 하태식입니다. 1983년 5월 어느날 저녁 부산시 가야동 육교 아래에서 친누나와 놀고 있을 때 트럭에서 건장한 아저씨들이 다가와 “여기서 뭐하고 있냐?”고 묻기에 제가 놀라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집에 태워준다면서 강제로 차에 태웠습니다. 1.5톤 트럭 짐칸에 탔는데 냉동 탑차 같은 형태였고 밖에서 문을 잠글 수 있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저 멀리 있던 누나가 “왜 이러세요”라고 하면서 급히 저를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누나까지 차에 밀어 넣었습니다. 저는 겁에 질려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누나가 항의했지만 무지막지한 욕설을 하면서 집에 보내 줄테니까 가만 있으라면서 윽박 질렀습니다. 한 10분 흘렀을까 어느 철문 앞에 섰고 내리고 보니 형제복지원이었습니다. 83-1XXX번 제 수용번호 였습니다. 다음날 저를 데리고 간 곳은 많은 2층 건물들이 아래에서 위로 줄지어 있었는데, 그중 27소대라는 2층 건물의 1층이었습니다. 그때 누나는 23소대로 끌려갔고 제가 누나랑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27소대 소대장이 신고있던 고무신을 벗더니 그 고무신으로 “뺀돌뺀돌하게 생겼네”라고 하면서 제 뺨을 힘껏 내려쳤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그제서야 제가 지옥에 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기억에 형제원은 약 3000명의 인원이 수용되어 있었고, 총 28소대까지 있는데 1소대부터 20소대 까지는 성인소대 23소대는 유아부터 십대 초반까지의 여자 아동소대, 24소대는 십대 초반의 남자 아동소대, 25·26소대는 여자 성인소대, 그리고 27·28소대는 십대 초반부터 후반까지의 남자 아동소대였습니다. 한 소대에 약 60~70명이 있었는데 군대 체제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소대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소대장, 그 밑에 분대장, 서무가 있었고 28개 소대를 총괄하는 사람은 중대장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생활은 기합과 빠따로 시작하고 끝났습니다. 제식훈련과 군가를 배웠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 무수한 폭행에 시달렸으며 소대장 기분에 따라 아무 이유없이 폭행 당하는 일은 너무 많았습니다. 한 번은 소대장이 저를 찾았는데 약간 늦었다는 이유로 제 배를 걷어찼습니다. 저는 넘어지면서 제 얼굴이 철제 2층 침대 아래 모서리에 부딪첬는데 오른쪽 눈가 옆이 찢어져 중대장 사무실이 있는 선도부와 식당 사이에 있는 의무실에서 눈옆을 열바늘 가량 꿰맸습니다. 그 상처가 아직도 제 얼굴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욕설과 구타 당하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아도 늘 일상적인 일이었고 당연한 일인줄 알았습니다. 84년에는 형제원 자체 내에 학교가 세워졌는데 당시 저는 12살로 초등학교 4학년으로 다녔습니다. 3·4학년은 27소대, 5·6학년은 28소대 였는데 저는 1년이 지나 다음해 5학년이 되면서 28소대로 갔습니다. 개눈깔 소대장, 매일 원산폭격·한강철교·히로시마 고문 28소대 소대장은 악명이 높았습니다. 원산폭격·한강철교 등 다양한 기합이 있었는데 그중 ‘히로시마’라는 기합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2단 철제 침대에 거꾸로 물구나무 서서 발가락 끝을 철제에 걸고 두손은 바닥을 짚고 있는 것입니다. 10분~20분 기합받고 있으면 힘이 빠져 넘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소대장에게 엄청난 구타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단체기합을 받거나 낮에 기합을 받으면 한시간 정도 지나면 기합을 끝내기도 했습니다. 저녁에 1~2명이 개인기합을 받을때가 있습니다. 이때 소대장은 제게 기합을 주고 자기는 침대에서 쉬다가 잠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끝없이 기합을 받아야 했는데 너무 힘들어 견딜수 없을 때면 저는 고육책으로 제 자신의 코를 주먹으로 수없이 내려쳤습니다. 그럼 코피가 났고 제가 큰소리로 울면 그제서야 잠에서 깬 소대장이 기합을 끝냈습니다.그 소대장 이름은 전OO이었고 한쪽 눈에 가짜 눈알을 박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 사람을 ‘개눈깔’이라 불렀습니다. 욕설과 구타, 교회당 공사 같은 수많은 작업 등등 힘들고 고통스런 일들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다 진술할 수 있을지 난감합니다. 1년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날은 렉스 박사가 오는 날입니다. 형제원의 어린 원생들은 외국의 독지가들과 자매결연 같은 것을 맺었고, 저를 포함한 어린이들을 찍은 사진과 자필 편지 등을 써서 미국으로 보내면 그쪽에서 각각 양부모로 결연을 맺은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주는 것인데요. 제 기억에 렉스 박사는 그 대표였고 1년에 한번 형제원을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렉스 박사가 오는 날 아동소대 아이들은 모두 새 옷을 지급받아서 입고, 형제복지원 입구에서 렉스 박사를 환영했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새 옷은 모두 반납해야 했고, 다시금 누더기 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래도 맛난 과자를 먹을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매결연을 하면 주기적으로 편지와 카드를 손글씨, 그림으로 보내는데 86년 여름에 몇천장의 그림카드가 필요해 원내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저와 정기훈(가명), 또다른 형, 셋이 뽑혀 병동 밑에 어느 밀실에서 셋이서 카드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를 뽑은 사람은 유OO씨로 수용자가 아닌 사회인이었는데 형제복지원 교회에 유년부 선생으로 일하고 있었고 중대장과 결혼했습니다. 중대장 부인의 위치에 있기에 우리는 병동 아래에 있는 어느 실내에서 맛있는 간식도 먹고, 다른 원생들과 다르게 수백장의 그림을 그리면서 편하게 지낼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병동과 식당, 아동소대 가운데에는 작은 운동장이 하나 있는데 그 운동장 위 한쪽에 개금분교가 자리 했습니다. 그 주위로 하얀 담벼락이 둘러져 있었고 담 주위는 온통 산이 뒤덮고 있었습니다. 모든 담벼락 위엔 항상 경비가 몽둥이를 들고 촘촘히 지키고 있었는데 물론 그 경비들도 소대장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자였습니다. 개금분교 2층에 있는 교무실 위와 담벼락 위의 사이는 약 2미터 정도였는데 형제원에서 유일하게 담벼락과 가까이 있는 건물이었고 평소에 그곳은 항상 경비들이 보초를 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훈과 그림을 그리다 잠시 쉬러 나와 운동장에 앉아 있었는데 담벼락 위에 아무리 살펴봐도 경비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같은 반 친구인 김OO과 정기훈, 저 이렇게 셋이 있었는데 누군가 “저 교무실 건물타고 올라가 도망가자”고 말했습니다. 물론 장난이었고 다들 좋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정기훈이 먼저 1층 창문 창살을 타고 정말로 건물을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김OO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저도 얼떨결에 정기훈을 따라 창살을 타고 1층에서 2층, 2층에서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김OO은 겁을 먹고 아래서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교무실 옥상과 담벼락 사이는 2m 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정기훈이 먼저 뛰어넘었고, 저도 떨어지면 죽을수도 있겠다 싶어 두려웠지만 곧 뒤따랐습니다. 처음엔 장난 반 진심 반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현실이 돼버린 것이었습니다. 진짜로 마음먹고 계획을 짰으면 후환이 두려워 절대 불가능했을 그 일이 무엇에 홀린듯 실제 상황이 돼버린 것입니다. 목숨 걸고 탈출했지만…경찰은 다시 지옥으로 끌고갔다 간신히 담을 넘고서는 죽어라 달렸습니다. 앞에서 정기훈은 제 이름을 부르며 따라오라 하면서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달렸는데 눈앞에 큰 철조망이 산 전체에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철조망을 넘고나서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구나”라며 정기훈과 저는 기쁨에 들떠있을 찰나 저쪽에서 군인둘이 총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형제원 철조망 밖은 바로 군부대였습니다. 군인들에게 잡혀 사색이 된 우리는 그곳의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에게 보내졌는데 우리는 그 사람에게 절대 형제원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달라 사정했고 다행히도 그 분은 형제원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회로 나온 때가 1986년 7월 여름이었습니다. 갈 곳이 없고 막막했던 정기훈과 저는 신문팔이를 했습니다. 부산 양정4동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13~18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 10여명 함께 지내며 한국일보를 길거리와 버스 안에서 팔았습니다. 신문 배달이 아닌 판매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버스 안에서 신문을 팔면 당가나 찌라시를 돌리곤 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항상 대선소주나 진로소주를 한 병 가득 꼴깍꼴깍 마시고 버스를 탔었습니다. 열심히 하면 신문사 소장님이 양정에 있는 BBS 학교에 보내준다고 해 숙식제공을 받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 아침에 갑자기 순경 몇 명이 자고 있던 방에 들이닥처서 저희를 양정4동 파출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저와 정기훈, 그리고 2명 더 총 4명이 자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모여 산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고 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저희 4명을 조사하더니 조금 있다 승용차에 태웠습니다. “어디 갈 곳이 있다”며 저희를 태웠는데 처음엔 얘기를 안하더니 한참을 달린 후 차안에서 형제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양정에서 형제원이 있는 주례는 차로 불과 20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고 저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형제원에서 도망 나왔기에 다시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눈에 선명했던 것입니다. 저는 달리는 차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망설였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형제원에 점점 가까워 졌을 때 울며 불며 순경에게 사정했으나 소용 없었습니다. 결국 4개월 만에 다시 형제원에 잡혀 들어갔는데 정기훈과 저는 중대장 사무실에서 빠따를 수없이 맞고 또다른 곳에서 소대장들에게 죽도록 맞았습니다. 우리는 “나는 도망갔다 잡혀 왔습니다”라는 빨간 글씨가 적힌 마대자루를 입고 식당 앞에 온종일 서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면 몇백명씩 소대별로 줄서서 기다렸는데 한두시간씩 입구 앞에서 기다려야 했기에 모든 사람들이 저희를 볼 수밖에 없었고 마치 북한에서 인민재판 하는거랑 비슷했습니다. 그때 우리 말고 20살 정도 되는 형도 도망갔다 잡혀왔는데 그 형은 우리보다 훨씬 많이 맞았습니다. 1차로 중대장에게, 2차로 소대장들에게 맞았는데 그 형은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모다구리(*뭇매를 뜻하는 은어)를 당했습니다. 그 후 우리 셋은 작업소대인 14소대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작업을 나갔는지 아무도 없었고 저와 정기훈과 그 형은 거기서도 폭행을 당했습니다. 얼마 동안 14소대 안의 침대에 온몸이 부어서 누워 있었는데 잠시 후 소대장이 우리를 데리러 왔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일어났지만 옆 침대 위에 누워있던 그 형은 미동이 없었습니다. 소대장 지시에 따라 제가 흔들어 깨웠는데 자세히 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소대장과 다른 일행들이 당황하면서 그 시체를 메고 어디론가 갔습니다.그 후 저는 13소대라는 음악소대로 보내졌습니다. 그당시 제 머릿속에 머물던 생각은 ‘다시 잡혀올 때 순경 2명과 함께 타고 있던 승용차에서 차문을 열고 뛰어내렸어야 했는데…’ 얼마나 한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그 승용차는 경찰차 처럼 안에서 열어도 열리지 않고 운전석에서 뭔가 작동해야만 열린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납치, 또 한번은 파출소 순경에 의해 형제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왜 기어코 저를 형제원에 보냈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형제복지원이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저를 위해 그 지옥에 보냈던 것일까요? 10살 때부터 근 4년의 형제원 생활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는 먹고 살기 위해 앵벌이, 껌팔이, 신문팔이, 사탕공장, 봉제공장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가까스로 버텨 나갔습니다. 형제원에서 함께 지낸 수용자 중에 사회에서 만나 함께 신문 팔며 생활해온 박OO 형이 있었는데 결혼도 하고 애도 있었는데도 형제원에서의 트라우마와 생활고로 비관하다 결국 자살했습니다. 저 또한 살아만 있을뿐 다를 바 없었습니다. 배운 것 가진 것 하나없이 사회 밑바닥 삶을 살면서 항상 피해의식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늘 제 자신이 부끄러웠고 초라하다는 생각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만은 저를 부정적인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지난날 형제원에서 겪은 피해와 제 비참한 삶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부산에서 형제원 근처에 살았던 것이 잘못이었습니까? 아니면 재수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저는 아직까지는 형제원 출신 피해자 중에 사람답게 번듯하게 사는 사람을 본적 없습니다. 늘 그렇듯이 힘 있는 가해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힘 없는 피해자들은 소외된 채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당연한 것입니까? 무법천지와도 같았던 지난날 국가와 개인이 행했던 잘못을 청산하고 그 피해자들에게 배상함으로써 말끔히 해결해주는 것이 현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며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높으신 분들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물류센터에서 하루 10시간씩 주 5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 걱정에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다. 결혼이나 단란한 가정, 좋은 직장은 제게 꿈같은 일일 뿐입니다. 34년 전에 형제원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날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번에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동안 먹고 싶고 입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맘껏 해보면서 힘들고 고단하게 살아온 제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두서 없는 글 이만 맺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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