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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포의 태실] (1) 김포 월곶면 조강리·고막리·고양리 3곳에 조선왕가 태실

    [김포의 태실] (1) 김포 월곶면 조강리·고막리·고양리 3곳에 조선왕가 태실

    경기 김포시에는 조선시대 왕가 태실 3개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각각 월곶면 조강리와 고막리·고양리에 세워졌다. 태봉은 태실(胎室)이 조성돼 있는 산이나 ‘태(胎)를 봉(封)한다’는 뜻을 지닌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생명의 탄생을 그 시작부터 중히 여겨 태를 소중히 여기고 신성시하는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다. 특히 조선왕실에서는 향후 아이의 성쇠를 결정할 뿐 아니라 나라의 국운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해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길지를 선정해 태를 봉안하는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이를 장태 또는 안태라 하고 태를 봉안한 산을 태봉이라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안태의궤나 안태등록·태실가봉의궤 등 많은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태실 유적과 태항아리 등 유물도 전해져 그 화려했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1929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말살하려고 태실을 고의적으로 훼손했다. 왕과 공주의 태를 고양시 서삼릉에 옮겨 태실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이후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 채 태실 일부만 문화재로 지정된 상태다. 이에 김포에 있는 태실의 유래와 관리·보존상태 등에 대해 3회에 걸쳐 살펴본다. 18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경기도편)’ 참고문헌에 따르면 김포 조강리 태봉산의 태실은 중종때 세워졌다. 평화누리길 2코스 중 가장 아름답던 길옆의 태봉은 해발 75m 정도 되는 산봉우리였다. 1544년(중종39) 중종의 다섯째 적녀이자 문정왕후의 넷째 딸이며 명종대왕의 친동생인 인순공주(1542~1545) 태를 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 죽어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태봉산 정상부는 10평 가량 좁은 대지에 태함(太函, 石函)과 태실비(胎室碑)가 남북선상에 위치했다. 당시 태실비는 동쪽을 보고 있으며, 태실비 뒤쪽에 태함이 있었다. 태실비는 연봉을 갖춘 연화형 비갓과 몸돌을 한 몸에 만들었으며, 방형 대좌를 갖췄다. 대좌 측면에는 공간을 구획하고 문양을 새긴 듯한 흔적이 있다. 태실비는 대좌 위에 시멘트로 발라 비신을 고정시켰으며 군용 철조망과 지주를 이용해 보호책을 설치했다. 태실이 있을 곳에는 반구형 석재가 일부 노출돼 있어 태실의 개석처럼 보이나 사실은 바닥에 있던 받침돌이 올라온 것이고, 개석은 오래전에 마을에서 방앗간 확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건립시기를 나타내는 뒷면도 긁힘과 자연적인 마모로 판독이 어렵다. 전면에는 ‘□□□□阿只氏胎室’, 뒷면에는 ‘???拾三年□月□□□癸時□’인데 부분적으로 판독이 어렵다. 비석크기는 비갓이 가로 62㎝, 두께 20㎝, 높이 45㎝, 비신의 높이 84㎝, 너비 41㎝, 두께 15㎝, 대좌 가로 95㎝, 두께 52㎝, 높이 42㎝이다. 태실부 함몰 지름이 250㎝, 석함 노출된 곳과 태실비와는 210㎝ 떨어져 있다. 석함 높이는 60㎝, 추정지름은 70㎝다.월곶면 고막리 212에 있는 태실은 고막리에서 문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오른쪽에 있는 해발 100m 남짓 낮은 산정상부에 있다. 산 아래에서 걸어서 1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이 산은 마을에서도 태봉산으로 부르고 있어 태실의 존재가 인근에는 알려져 있다. 태봉산 정상부는 가장 넓은 쪽도 10m를 넘지 않고 좁고 평탄한 대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태실 석함(石函) 개석 1장과 비석 대좌가 있다. 주위에는 소나무와 활엽잡목이 우거져 있고 군사시설인 교통호가 개설돼 있다. 태실비는 정상에서 마을쪽인 남쪽으로 5m 가량 지점 사면에서 발견됐다. 안타깝게도 태실은 이미 도굴당해 훼손됐고, 비석도 대좌에서 뽑혀 아래로 밀쳐 굴러내렸다. 일제강점기 때 도굴된 것을 비석만 원상태로 세웠으나 마을에 사고가 잦아지자 비석을 뽑아 지금처럼 굴렸다고 한다. 비석은 연화형 비갓을 연화형 비갓을 한 돌에 새긴 것으로 연봉은 떨어져 나갔다. 비석 면도 일부 훼손돼 비문 역시 일부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비석 전면에는 ‘王□□阿兄氏胎室’정도가 판독되며, 뒷면에는 1584년(萬曆十二年七月二十五日立)(1584년, 선조17), 萬曆十四年十二月初六日改立(1586·선조19)이라는 2행의 명문이 있어 장태한 시기와 다시 세운 시기를 명시하고 있다. 크기는 비갓 62×18×32㎝, 비신은 116×49×14㎝다. 비석 대좌는 네 면에 안상과 복련이 조각돼 있고 밑단 일부가 노출돼 있다. 대좌와 130㎝ 떨어져 있는 화강암제 개석도 기울어진 채 3분의2가량 지표에 노출돼 있다. 개석 둘레에 22×22㎝ 크기로 자라 머리 형태의 돌출부를 만들었는데 다른 쪽이 땅에 묻혀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다. 네 귀퉁이에 이런 돌출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지름은 102㎝다. 세 번째 태실은 월곶면 고양리 산27-1 마을에서 ‘태봉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대곶면과 경계지점이다. 산은 다른 태실처럼 다른 산과 독립돼 있으나 주위 산에 둘러싸인 가파른 산세다. 정상부에는 큰 구덩이만 남아있는데 이곳이 태실이 있던 자리다. 구덩이는 310~340㎝ 크기이고 깊이는 80㎝다. 구덩이 북쪽은 배수구를 내듯 둑을 터놓았다. 태봉산 태실의 태실비는 제자리를 벗어나 대곶면과 월곶면 경계를 이루는 길옆에 묻혀 있었으나 지금은 콘크리트포장에 완전히 덮여 확인이 어렵다. 옛 조사기록에 의하면 비문은 전혀 남아있지 않고 연꽃형 비갓의 연봉도 부러지고 없다. 비갓과 몸돌을 한 돌로 만들었는데 비석 뿌리가 길쭉하게 남아 있어 비대좌가 없이 땅에 묻어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비갓이 너비 60㎝, 높이 32㎝이고 비신은 너비 53㎝, 높이 80㎝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윤석열 “화성 8차 사건 범인 윤씨 아니면 재심 청구”

    윤석열 “화성 8차 사건 범인 윤씨 아니면 재심 청구”

    경찰이 경기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56)를 피의자로 입건하면서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진범으로 기소돼 처벌을 받았던 윤모(52)씨가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윤석열 검찰총장이 윤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검찰이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17일 밝혔다.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진안리에서 당시 13세 소녀가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 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앞서 윤씨는 이 사건의 진범으로 기소돼 20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2010년 1급 모범수로 석방이 됐다. 그런데 이춘재가 8차 사건도 본인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윤씨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윤석열 총장은 이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개정에 따라) 곧 없어지겠지만 수사력이 있는 수원지검 특수부(특별수사부)에 사건(화성 사건)을 맡겨 재조사를 시키려고 했다”면서 “수원지검에서 올라온 보고를 보니, 윤씨가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과 돈독한 신뢰 관계가 있어 경찰에서 먼저 조사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경찰의 재수사를)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화성 사건은 경기남부경찰청 수사본부에서 재수사를 하고 있다. 윤석열 총장은 “경찰 조사가 어느 정도 되면 검찰이 자료를 받아서 보완 조사를 할 것”이라면서 “윤씨가 범인이 아닌 게 확실하다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상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사람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과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의 법정대리인,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심신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그 배우자·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 그리고 검사다. 검찰의 재심은 재심 공판에서 검사가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현재 윤씨는 박준영 변호사를 통해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는 지난 15일 경기남부경찰청을 찾아 사건 관련 기록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윤씨는 지난 1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8차 사건 발생 당시 경찰한테 끌려가 고문을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윤씨는 “지금 꿈이 있다면 제 진실을 밝히고 제 명예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에베레스트 첫 등정 기념 한라산 고상돈로 걷기대회 열린다

    에베레스트 첫 등정 기념 한라산 고상돈로 걷기대회 열린다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산악인 고상돈을 기리는 ‘2019 한라산 고상돈로 전국 걷기대회’가 11월 3일 제주에서 열린다. 대회는 한라산 어승생수원지 인근 삼거리를 출발해 고상돈의 영혼이 깃든 한라산 1100고지 고상돈공원까지 8848m 코스에서 열린다.8848m는 에베레스트 정상의 높이다. 고상돈의 아내 이희수씨 등 가족들이 함께해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한국인 첫 등정 의미와 우리나라 산악계에 끼친 영향 등 설명해준다. 또 1977년 고상돈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섰던 김영도 대한산악연맹 고문 등 ‘77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 대원들도 함께할 예정이다. 김영도 고문은 당시 원정대장이다. 행사 당일 고상돈공원에서는 알펜트리오 등 다양한 공연도 마련됐다. 1948년 제주에서 태어난 고상돈은 1977년 9월15일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면서 우리나라를 세계 8번째 등정국가로 세계에 알렸다.대한산악협회는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매년 9월15일 산악인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1979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정복한 고상돈은 하산 도중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은 그의 유품을 제주도에 기증했으며, 현재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2010년 2월에는 한라산 어승생 삼거리부터 서귀포시 옛 탐라대 사거리까지 약 18km 구간이 한라산 고상돈로 명예도로로 지정됐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길섶에서] 세상 생각/손성진 논설고문

    기자랍시며 현학적인 낱말 몇 개로 잘난 척하는 짓이 부끄러운 줄은 안다. 정작 깊은 덕망과 식견을 가진 이들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음지에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업덕을 쌓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 돈쭝도 안 되는 얄팍한 지식으로 학자인 척, 최고인 척하며 설치는 사람들은 보기에도 꼴사납다. 시절이 하수상해질수록 은둔한 재목들은 현실과 담을 쌓고 꼭꼭 숨어버리니 얼치기들이 더욱 날뛴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고, 또 나서도록 이끌고 밀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문제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 선비들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는 데 몰두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그랬긴 하다. 정치나 사회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국의 중심을 잡아줄 원로들은 어디에 있는지, 괜히 남 탓하며 문득 원망을 느낄 때가 있다. 독재 정치가 이승만도 가인 김병로 선생 같은 인물을 중용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비뚤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가인과 같은 시대의 표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도덕과 윤리의 붕괴만은 막을 수 있었다고 굳게 믿는다. 좌든 우든, 옳은 소리라고는 할 줄 모르는 위정자들을 볼 때 이 시대가 수십, 수백 년 전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삭일 수 없다. sonsj@seoul.co.kr
  • “줄리아니는 수류탄”… 볼턴, 우크라 의혹 ‘핵폭탄’ 되나

    줄리아니 “원자폭탄” 하원소환에 불응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촉발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탄핵 조사가 한창인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인 루돌프 줄리아니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진흙탕 싸움에 나섰다. 피오나 힐 전 백악관 고문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스캔들 관련 비공개 청문회에서 7월 줄리아니의 측근들이 우크라이나 관리들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의 수사에 대해 논의했다고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볼턴 당시 보좌관은 이를 반대하며 “줄리아니는 모든 사람을 날릴 수류탄”이라면서 줄리아니의 우크라이나 수사 압력을 ‘마약 거래’라고 비난했다고 힐 전 고문은 덧붙였다. 볼턴 전 보좌관의 수류탄 발언이 나오자 줄리아니가 반격에 나섰다. 줄리아니는 15일 “그(볼턴 전 보좌관)가 누군가를 수류탄으로 부른다는 게 역설적”이라면서 “존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원자폭탄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줄리아니는 또 “하원의 탄핵 조사는 불법”이라며 소환에 불응했고 “하원이 너무 광범위하며 합법적 선을 넘는 자료를 요구한다”며 자료 제출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줄리아니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묘사는 맞는 말일 수 있다”면서 “볼턴 전 보좌관이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해 증언할 경우 파장이 클 수 있다”고 전했다. 볼턴 전 보좌관은 탄핵 조사와 관련해 어떤 소환장도 받지 않았지만 만약 의회 증언이 이뤄질 경우 그의 말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뒤흔드는 ‘핵폭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더힐은 “탄핵 조사를 주도하는 민주당이 볼턴 전 보좌관을 ‘스타 증인’, 즉 탄핵 조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민주당은 탄핵 조사를 위한 공식적인 찬반 투표는 실시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이날 의회에서 기자들에게 “(탄핵 조사를 위한 찬반) 투표가 필요조건이 아니며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백악관은 하원에서 진행하는 탄핵 조사가 공식 투표를 거치지 않았다는 절차적인 문제점을 들어 협조를 거부하고 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정부 주관행사 더욱 의미” 참석자들 눈시울… 부산·창원 시민 “민주정신 계승되길”

    “정부 주관행사 더욱 의미” 참석자들 눈시울… 부산·창원 시민 “민주정신 계승되길”

    기념재단 “피해자들 보상 등 대책을”부산과 경남 창원 시민들은 10·16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40주년 기념식이 정부 주관 행사로 열리면서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4대 민주항쟁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반겼다. 이날 창원 경남대 대운동장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당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진행되는 동안 참석자들은 국가기념 행사 감회에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도 보였다. 행사장에 입장하지 못한 시민·학생들은 행사장 외곽에서 기념식을 지켜보기도 했다. 부마민주항쟁 유일한 사망자로 공식 인정된 고 유치준씨 아들 성국(59)씨는 “40년간 고통스러웠을 아버님 영혼에 국가의 공식 사과를 전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시민 이춘기(55)씨는 “유신독재에 항거한 대규모 시민민주항쟁으로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새벽을 열게 한 위대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식이 첫 정부 행사로 열려 더욱 의미가 있다”고 환영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 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한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는 “앞으로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관련 피해자 상처 회복 및 치유, 보상 등의 대책이 빨리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종기 부산 민주공원 관장도 “올해 연말로 부마항쟁 특례법이 끝나는데 아직 조사와 발굴을 비롯해 피해자 보상 관련 등 여러 과제가 남아 있어 시효 연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현재 민주화 운동 보상법에는 구금 일수가 30일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당시 부마항쟁 피해자들은 대부분 10·26 사태로 15일 정도에 풀려나 보상법에서 제외된다”며 “구금일수를 15일 이하로 줄이는 등 법 적용 완화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시민들은 항쟁이 일어난 지역에서조차도 부마민주항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정부 주관 기념행사 개최를 계기로 국민들에게 부마민주항쟁이 기억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은진 경남대 명예교수는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것은 부마민주항쟁이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서, 현 시점에서 파편화되고 이기화된 사회적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창원시민 이종영(57)씨는 “늦었지만 국가기념일 지정을 계기로 부마민주항쟁 역사와 참뜻을 알리는 활동이 활발히 이어져 부마항쟁 정신과 가치가 계승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빈폴 브랜드 리뉴얼… ‘정구호 효과’ 통할까

    빈폴 브랜드 리뉴얼… ‘정구호 효과’ 통할까

    “글로벌 ‘헤리티지’ 브랜드로 재탄생” 레트로 감성 매장 콘셉트·디자인 접목“‘정구호 효과’는 빈폴에서도 통할까?”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대표 캐주얼 브랜드 ‘빈폴’이 탄생 30주년을 맞아 내년 봄·여름 시즌부터 로고와 디자인, 매장 콘셉트 등을 모두 바꾸는 대대적인 브랜드 리뉴얼을 단행한다. 이를 위해 최근 스타 디자이너 정구호를 컨설팅 고문으로 영입한 빈폴이 노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벗고 새 고객층을 공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정 고문은 15일 인천 서구 일진전기공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젊은 세대와의 단절을 해소하고, 글로벌 브랜드로 빈폴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리뉴얼을 기획했다”면서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바탕으로 빈폴을 ‘헤리티지’ 브랜드로 재탄생시킬 것”이라고 말했다.제일모직이 1989년 첫선을 보인 빈폴은 한때 미국 브랜드 폴로랄프로렌과 함께 프리미엄 캐주얼을 대표하며 폭넓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브랜드 노후화로 고객층이 고착화되면서 변화가 필요했다. 이에 정 고문은 지난 3월 6년 만에 ‘친정’에 복귀해 빈폴 리뉴얼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구호’ 브랜드를 만들어 성공시킨 그는 2003년부터 제일모직에서 여성복을 이끌다 2013년 퇴사했다. 2015~16년엔 휠라코리아에서 브랜드 리뉴얼을 책임지며 휠라의 부활을 이끌었다. 정 고문은 우선 밀레니얼 세대가 열광하는 레트로 감성을 매장 콘셉트와 디자인에 녹였다. 이날 공장에 전시된 리뉴얼 매장은 옛날 오디오와 기계 등 1960~7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물건들로 꾸며져 있었다. “브랜드가 더 오래돼 보일 수 있다”는 지적에 그는 “요즘 2030은 빈티지 매장에서 각 브랜드별 오래된 피케셔츠를 구입해 입을 정도로 레트로에 열광한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한글 로고도 선보였다. 정 고문은 “백화점 입점 브랜드 가운데 한글로 브랜드 간판을 단 매장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한국을 대표하는 헤리티지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한국의 정서, 문화, 자긍심 등을 세련되게 담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제품 가격을 다른 라인보다 10~20% 낮춰 2030을 겨냥한 스트리트 패션 라인 ‘890311’도 공개됐다. 빈폴은 리뉴얼된 상품을 바탕으로 2023년까지 북미와 유럽까지 사업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동리대상 수상자 결정 놓고 엇갈린 의견

    전북 고창군과 (사)동리문화사업회(이사장 이만우)에서 매년 시상하는 동리대상 수상자 결정을 놓고 엇갈린 의견이 나오고 있다. 15일 고창군과 동리문화사업회에 따르면 판소리 진흥에 업적을 남긴 창자, 고수, 연구자 또는 판소리 진흥에 기여한 자 가운데 1명을 선정해 매년 동리대상을 수여하고 있다. 동리대상은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선생의 문화예술사적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제정했다. 동리대상은 시상금이 1500만원으로 우리나라 판소리 부문 최고 권위의 상이다. 올해는 29회 동리대상 수상자로 김영자(여.68) 명창이 선정됐다. 오는 11월 6일 고창 동리국악당에서 성대한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다. 그러나 김영자 명창의 남편 김일구(79) 명창이 십여년 전 이미 동리대상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계에서는 ‘부부간에 같은 상을 받는 것은 나눠먹기나 마찬가지’라는 부정적 입장과 ‘부부라 할지라도 수상 조건에 맞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긍정적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동리대상 수상후보자로 김영자 명창 1명만 신청한 점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는 분위기다. 동리문화사업회가 수상후보자를 공개모집할 때 전국지에 공고하지 않고 지역신문에 공고문을 게재했기 때문에 후보자가 적었다는 지적이다. 앞서 동리문화사업회가 2017년 조통달 판소리 전공자를 수상자로 결정한 이후 젊은 시절 구속수감됐던 전력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대해 이만우 동리문화사업회 이사장은 “동리대상 수상후보자는 통상 3~4명이 신청하는데 1명인 경우는 올해가 처음이고 부부 수상자가 나온 것도 처음”이라며 “심사위원회에서 이같은 사안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또 “수상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점을 들추다 보면 대부분 흠결이 없는 경우가 드물다”면서 “1996년과 2016년에는 모녀가 각각 동리대상을 받아 대를 이은 경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부부 수상 역시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동리문화사업회는 지난 14일 심사위원회에서 부부수상이나 김 명창의 개인적인 생활에 대해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수상자를 결정했다. 한편, 동리문화사업회는 ▲신재효 선생 정신에 어긋나거나 기타 각종 비위, 부조리 및 도덕성에 흠결이 있는 자 ▲부조리 및 도덕성에 흠결이 있는 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행위 등으로 물의를 일으켜 동리대상이 합당치 않다고 판단되는 자를 수상 제외자로 한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화성 8차 범인으로 지목됐던 윤모씨 “명예 되찾고 싶다”

    화성 8차 범인으로 지목됐던 윤모씨 “명예 되찾고 싶다”

    경찰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이춘재(56)를 비록 공소시효는 완성돼 처벌은 불가능하지만 이 사건 피의자로 입건했다. 이춘재는 최근 경찰 조사에서 화성 살인사건 10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강간미수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앞서 윤모(52)씨는 1988년 9월 발생한 화성 ‘8차 사건’의 진범으로 기소돼 20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2010년 1급 모범수로 석방이 됐다. 그런데 이춘재가 8차 사건도 본인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윤씨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진안리에서 당시 13세 소녀가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 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윤씨는 “지금 꿈이 있다면 제 진실을 밝히고 제 명예를 찾고 싶다”면서 재심을 청구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밝혔다. 윤씨는 1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음성 변조 인터뷰에서 8차 사건 발생 당시 경찰한테 끌려가 고문을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윤씨는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형사들이 와서 조사할 게 있다고 했다. (형사들이) 별 일 아니라고, 금방 보내준다고 해서 (산에 있는 별장으로) 끌고 가더니 (형사한테서) ‘네가 8차 범인이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면서 “저는 그 당시 (범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했다. 그런데 거짓말 탐지기로 조사한 그분이 그 당시에 뭐가 안 맞는다고, (윤씨를 경찰서에) 데려가 조사하라고,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잠을 안 재우고 쪼그려뛰기를 3일 정도 했다. (나중에) 쪼그려뛰기가 안 되니까 일어났다 앉았다 그걸 시키더라. 그걸 못해서 누가 발로 걷어찼는데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다”면서 “가슴하고 엉덩이 쪽을 많이 맞았다”고 말했다. 윤씨는 또 경찰 조사 과정에서도 “누구 형사한테 그 당시 조사받을 때 ‘너 하나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형사 한 명이 (당시) 저한테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중략) 조서에 이렇게 이렇게 (진술)하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리고 몇 대 맞고 나니까 정신이 없더라고요. 정신이 멍하고,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감을 모르겠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그러고 나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새벽이 되니까 내가 자백했다고 기자들이 막 몰려오더라고요.” 앞서 사회자는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이 이춘재다. 윤씨는 억울한 누명을 쓴 거다’라고 지금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윤씨는 수감 생활 내내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해 왔다”면서 “이춘재는 자기가 8차 사건의 진범이라고 주장을 하고 나선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8차 사건을 돌아봐야 하고, 그리고 (윤씨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진상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서”라고 밝힌 뒤에 인터뷰를 계속 이어갔다. 윤씨는 1심 재판에서 혐의를 인정한 이유에 대해 “구치소를 갔을 때 (제가) 사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형이라는 소리 듣고 겁 안 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거기(구치소)에 있던 동료가 시인하고 감형받으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또 당시 국선 변호인이 있었지만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고 했다. 윤씨는 “(주변에서) 민선 변호인을 고용하라고 하는데 돈도 없고, 우리 친척들도 그만한 돈이 없었다”고 말했다. 20년을 감옥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버텼는지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윤씨는 “제가 여기서 나가서 살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제 누명을 벗고 싶다고 기도했다”고 답했다. “지금 꿈이 있다면 제 진실을 밝히고 제 명예를 찾고 싶습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그분을 상면하니 저런 분이 어찌 왜놈의 군인과 맞서 선두 지휘를 하시며 혈전을 하셨나 할 정도로 외모가 잘생기셨고 그 풍채가 관후 유덕하시며 인자한 풍기가 주위 사람에게 호감을 주실 뿐 아니라 인정이 철철 넘쳐 흐른다. 그분이 무기형을 받고 마포로 수감된 후 왜놈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나 불허하므로 단식투쟁을 선포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처음 15일간은 물도 한 잔 안 먹었다. 소장이 병동에다 수감하고 왜놈 간수에게 감시를 하게 하고 조선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매일 변기를 검사하였다. 물 한 모금도 안 먹었으니 소변인들 나올 리가 없었다.” 독립운동가 이규창(이회영의 아들)은 회고록에서 서울 마포형무소(경성감옥)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한 오동진 선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계의 3대 맹장으로 평가받는 오동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건국훈장 다섯 가지 가운데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30명인데 오동진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에 필적할 만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변변한 연구 논문 한 편 없다. 옥중에서 선생은 일제에 저항해 여러 번 단식투쟁을 했다. 마포형무소에서 한 단식 기간은 무려 48일로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악랄한 일본인 형무소장도 그런 선생에게는 예를 갖추고 인사를 했으며 ‘가미사마’(神)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에서 태어난 선생은 생후 반년 만에 생모를 잃고 후모(後母) 백씨의 손에 자랐다. 어릴 때부터 온후하고 정의감이 남다르게 강했던 선생은 기쁨과 슬픔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19세에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선생은 고향에 일신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가르쳤다.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3월 18일 중국 관전현 안자구(安子溝)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평생 온몸을 내던진 선생의 무장독립투쟁이 시작됐다. 선생은 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는 한편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듬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에 이탁을 파견해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는데 선생은 총영장(總營長)이 됐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에서 장총 240여정과 탄약을 입수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마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상원의원 일행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총영은 결사대원을 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어 미 의원단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파괴 공작을 펴 이목을 끌기로 했다. 안경신 일행은 안주경찰서의 일제 경찰과 친일 조선인 경찰을 사살했으며 평양의 경찰서 신축 건물을 폭파했다. 신의주 철도호텔에 폭탄을 투척했고 선천경찰서도 파괴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느라 혈안이 됐다.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의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단체 통합 제안으로 발족한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이 돼 독립군을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4년에는 대한통의부 와해 후 새로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출범했는데 선생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을 겸임했다. 선생이 이끌던 무장 독립군은 국내에 침투해 일제와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압록강 일대 삭주, 벽동, 후창, 초산, 무산 등의 경찰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독립군 결사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일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따르면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만 4149명을 지휘해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고, 일제 관리 149명과 밀정 765명을 살상했다.그러나 무장 항쟁을 이끌던 선생은 밀정의 덫에 걸려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독립군 부하들의 양식 조달을 위해 지린에 농업공사를 만들었는데 운영난으로 그와 부하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이를 본 옛 동지 김종원이 선생에게 “삼성(三成) 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을 믿은 선생은 1927년 12월 16일 창춘 시내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일제가 파 놓은 함정이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변신한 김에게 유인당한 선생은 잠복해 있던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취조에 자신이 지휘한 무장 투쟁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고문을 당하면서도 부하들의 이름은 발설하지 않았다. 선생의 활동만큼 일제가 붙인 죄목은 방대했고 수사·재판 기록은 쌓아두었을 때 높이가 5m가 넘어 3·1운동 이후의 만주 독립운동사와 같았다. 선생은 광인(狂人) 행세를 하고 1929년 11월부터 33일이나 단식을 하는 등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다. 또 “한번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 개인의 집안일을 돌보고 걱정하고 그리워할 수는 없다”며 아내는 물론 어떤 면회도 거절했다. 부인과 아들은 옥 밖에서 통곡을 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1928년 4월에는 부하 2명이 선생을 구하려고 경찰서로 잠입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재판이 열린 신의주 지방법원 법정에는 선생의 모습을 보려는 방청객들이 쇄도했다. 선생은 그들 앞에서 큰 소리로 “독립만세”라고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또 “하느님의 명령”이라면서 재판을 거부했다. 선생의 광적인 행동은 일부러 미친 척함으로써 일제와 일인(日人)의 재판에 저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인 의사는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였다. 하지만 선생은 정신을 차려서는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기에 징역살이를 하며 또한 설혹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너희 일본놈의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32년 3월 9일 선생은 구형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 선고도 무기징역이었다. 선생은 상고를 포기했으며 장기수를 수감하던 마포형무소로 이감됐다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던 공주형무소로 다시 옮겨졌다. 한 달이 넘는 단식도 이겨냈던 선생은 17년이 넘는 세월의 모진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광복을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은 그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55세였다. 선생을 체포하고 옥사하게 한 김덕기는 노덕술, 하판락과 함께 조선인 3대 악질 형사였다. 김은 16년 동안 일제 경찰로 일했고 평북경찰부 고등형사과장 자리에 올라 수많은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가 검거해 송치한 독립군이 1000명이 넘었고 그중 20%가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광복 후 김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자로서는 처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반민특위 해체로 감형된 뒤 6·25전쟁 중에 횡사한 것으로 전해진다.오동진이 숨을 거둔 땅 충남 공주의 공산성 주차장 한쪽에 선생의 추모비가 덩그렇게 서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는 순국선열 중 유해를 찾지 못한 130분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데 선생의 위패도 있다. 선생의 묘소가 없는 것은 아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다.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한 선생의 유해가 왜 북한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나이에 만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부인의 행적도 알 길이 없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서울서 만나는 회재 이언적의 보물

    서울서 만나는 회재 이언적의 보물

    14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회재 이언적, 독락당의 보물 서울 나들이’ 특별전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시대 전기 문신인 이언적이 만든 경주 독락당이 대를 이어 가며 약 500년 동안 지킨 고문헌들이다. 연합뉴스
  • “피해자 집 현장검증 때 처음 가 봤다… 담장 못 넘자 경찰 각본대로 시늉만”

    “피해자 집 현장검증 때 처음 가 봤다… 담장 못 넘자 경찰 각본대로 시늉만”

    이춘재(56)가 모방범죄로 분류된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고 진술하면서 이 사건으로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모(52)씨가 거듭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윤씨는 14일 충북 청주에서 서울신문 등을 만나 “고문 없이 5시간 만에 자백했다는 당시 수사 경찰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며 “너 하나쯤 죽이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고, 범행을 부인하면 사형을 당할 수 있다고 겁을 줘 허위 자백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30년 전 악몽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윤씨는 “1989년 7월 집에서 가족, 회사 동료들과 저녁을 먹는데 형사 5~6명이 찾아왔다”며 “잠깐 조사할 게 있다며 나를 데려간 뒤 3일 동안 재우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이어 “검거되기 전 최모 형사가 찾아와 체모를 뽑아 줬는데, 체모를 잃어버렸다고 해 5번 정도 더 뽑아 줬다”며 “이후 체모가 현장에서 나왔다며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사건현장은 현장검증 때 처음 가 봤다”고 주장했다. 윤씨는 “현장검증은 경찰이 써 준 대로 했던 것 같다”며 “소아마비로 불편한 내 다리를 이끌고 1m 70㎝ 정도의 담을 훌쩍 넘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윤씨는 현장검증 때 경찰이 땅에 쌓아 준 벽돌을 밟고 담을 넘어가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읽어 보지도 못하고 지장을 찍었다. 윤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국선변호사가 붙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 변호사 얼굴 본 게 1, 2심 모두 선고공판 법정이 유일했다. 윤씨는 “교도관 등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뒤집을 증거가 없어 재심이 힘들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종교의 힘으로 버텼다”며 “언론과 국민들이 도와줘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윤씨는 1999년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사건과 2000년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무죄로 이끈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 도움을 받아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윤씨는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의 한 주택에서 잠자던 박모(당시 13세)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이듬해 7월 검거됐다.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복역하다 감형을 받아 2009년 8월 가석방됐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2@seoul.co.kr
  • ‘우크라 의혹’에 기름 붓는 바이든 아들

    ‘우크라 의혹’에 기름 붓는 바이든 아들

    트럼프 “더 많은 나라에서 사기” 또 맹공 탄핵조사 속도… 국방장관 이례적 협조미국 민주당 유력 대선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아들이 중국 관련 기업의 이사직을 반납하기로 했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그가 더 많은 나라에서 사기를 친 것 같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바이든 전 부통령의 아들에 대한 의혹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바이든 전 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은 13일(현지시간) 대변인을 통해 오는 31일 중국 BHR파트너스 이사직을 반납하고, 아버지인 바이든 전 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모든 해외 사업을 접겠다고 밝혔다. 바이든 전 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성명서 발표와 관련해) 아들과 미리 얘기한 바 없다. 아들은 전혀 잘못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헌터의 ‘결단’은 자신의 의혹으로 하락세로 접어든 아버지 바이든 전 부통령의 지지율 회복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또 15일 열릴 민주당 대선주자 4차 TV토론회에서 자신의 의혹이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에 대한 선제 대응으로도 풀이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BHR 이사 사임만으로 헌터에게 제기된 모든 의혹이 해소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헌터는 BHR 무급 이사직을 내려놓겠다고 했지만 정작 회사 주식을 처분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또 가장 문제가 된 ‘우크라이나 의혹’에 대한 해명도 없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트위터로 공격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헌터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완전히 사라졌다”면서 “그는 더 많은 나라에 들어가 사기를 친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한편 미 하원은 15일 2주간의 휴회를 마치고 개원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조사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하원은 개원에 앞서 14일 피오나 힐 백악관 전 고문에 이어 오는 17일 고든 선덜랜드 유럽연합(EU) 주재 미대사를 차례로 비공개 회의에 출석시켜 진술을 청취하기로 했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도 트럼프 정부 인사로는 이례적으로 탄핵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의혹을 정보기관에 고발한 내부고발자의 의회 출석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신분 누설 우려와 고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입증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시안사변(西安事變)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시안사변(西安事變)

    70년 전인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이하 중공)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모택동(毛澤東)이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을 선포함으로써 중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후 중국은 복잡한 역사를 거쳤으며 중국공산당의 지도 밑에 경제적으로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되어가고 있다. 중공의 당사(黨史) 연구자들도, 중국근현대사 연구자들도 중국혁명 승리의 뿌리는 중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1936년 12월에 발생한 ‘시안사변’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번에는 중공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기념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과 경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했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의 대표 2명이 참여한 1921년 7월 1일 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창건되었다. 유럽혁명의 실패 후 소련과 코민테른은 민족 및 식민지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중국, 조선 등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에 대항하는 동양민족 공산당들에게 사회주의혁명 대신 민족해방운동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내전을 겪어 큰 피해를 입은 소비에트 러시아는 열강에 의한 국제적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의 국민혁명을 통해서 통일을 목적으로 했던 국민당의 당총리인 손문(孫文)과 관계를 맺었다. 만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가입을 허가하면 군사·정치적 지원을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손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바로 제1차 국공합작이다.소련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은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중국의 무장통일을 위해 북벌(北伐)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손문은 1925년에 죽었다. 그 후계자인 장개석(蔣介石)은 극우파로 공산당원들을 숙청해야 할 내부의 적으로 보았다. 때문에 1927년 4월 상해를 점령한 장개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국민혁명군과 함께 중국통일을 위해 싸웠던 노동자들로 구성된 소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잔인한 숙청을 단행했다.결국 국민당의 배신을 당한 중공은 국민당에 대해 혁명적 공세를 결정하고 남창폭동(南昌暴動) 등을 일으키면서 공산당 무력조직인 홍군(紅軍)을 창설하였다. 그 후 중공은 혁명근거지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하고 국민당과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한 일본의 중국침략에도 불구하고 안내양외(安內攘外)정책을 선포한 장개석은 대일저항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공에 대한 토벌을 고수했다. 1933~34년 독일 군사고문의 지도를 받은 장개석의 군대는 코민테른 군사고문의 잘못된 전략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혁명근거지를 없애는 데에 성공했으며, 중공은 모택동을 따라 장정(長征)을 실시하고 심각한 병력피해를 입으면서 중국 북부에 있는 연안(延安)이라는 지역으로 도피했다. 연안에 도달한 중공은 항일전쟁을 계속 호소하면서 1936년에 그 정권의 명칭을 중화소비에트인민공화국으로 변경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명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이때 국민당 내부에 일제의 위협을 무시하고 중공 소멸에만 집중하던 장개석의 정책을 반대하고 중공을 동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결국 연안 지역에서 중공 토벌이 맡긴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일제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내전의 무의미함을 깨달아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면서 정전했으며 장개석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중공과 손잡고 대일전쟁의 준비에 나선 장학량은 대화를 통해서 내전보다 항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장개석에게 몇 개월 동안 설명하고자 했으나 장개석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라고 지시하였다. 1936년말, 장개석은 공격을 강행하기 위해 시안에 도착했다. 장학량과 양호성이 장개석을 다시한번 설득해봤으나 장개석은 즉시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의 군대를 남부로 보내고 대신 중앙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장과 양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12월 12일 오전 5시, 장학량 친위대가 장개석을 체포하려고 그가 머물렀던 별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을 입고 맨발인 채 별장에서 나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오전 9시에 잡혔다. 반란군 사령부에 호송 후 장학량은 8개의 조건을 내세우고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했으나 장개석은 압박 하에서 아무 타협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은 힘으로라도 장개석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학량과 양호성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같은 날 저녁, 장학량은 중공 중앙위원회에게 전보를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중공은 긴급회의를 열어 장개석 문제의 해결 방법을 논의했다. 이 회의의 기록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그 회의에 참석했던 장국도(張國燾) 중공중앙위원의 회의록에 따르면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중공중앙 책임자들 중에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장개석을 살려주면 향후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다(養癰遺患)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공개 재판을 통해 그 반공분자를 죽일 것을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그를 비밀리에 구금하고 인질로 삼아 남경으로 하여금 항일을 강요할 것을 주장했다.”하지만 중공 중앙위원회는 행동하기 전에 우선 교섭을 위해 주은래(周恩來)를 시안에 파견하고 코민테른의 의견을 확인하고 결정하기로 했고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냈다. 소련과 코민테른에게 이 소식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인식했던 소련의 지도부는 장개석을 죽이고 통일전선을 결성하지 못하면 아시아 전체가 일제의 지배에 들어가고 식민지 민족 해방은커녕 소련 자체가 독일과 일본의 양면침략을 당해 패망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개석이 죽으면 국민당이 분열되고 대도시에서의 지지기반이 비교적으로 약한 중국공산당이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소식을 받은 후 즉시 소련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에 시안사변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장학량의 봉기’라는 기사를 발표할 것을 지시했고 12월 16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장 디미트로프가 중공에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재미있게도, 중공 당사(黨史) 교재에는 12월16일자 디미트로프의 전보는 암호에 문제가 있어 해독하지 못해서 재전송을 요구했다고 실려있다. 하지만 그 후 모스크바로부터 연락이 없어서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운명적인 19일자의 결정을 모스크바의 지시에 의거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양규송(楊奎松) 등 중국 연구자들에 의해 중국문서보관소에서 시안사변을 비난하는 소련 신문기사의 내용이 17일에 중공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19일자의 결정은 소련의 영향을 받고 내려진 것으로 확인된다.이와 동시에, 중국에서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장개석 구금의 소식을 받은 국민혁명군 장군 하응흠(何應欽)은 12월 16일 자신을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시안 부근에 대해 폭격을 실시했다. 이 폭격의 인명피해는 수백명에 달했다. 하지만 직접 시안에 가서 장학량과 만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은 토벌 작전을 중지하도록 장개석을 설득했다. 긴장이 고조되어가는 상황에서 양측은 회담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 중앙위원회는 12월 19일 확대회의에서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결정했고 장개석과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지지했다. 흥미롭게도, 장학량과 양호성과의 대화를 거부하던 장개석은 소련이 창설한 황포(??)군관학교 총수 시절에 그 부하이었던 주은래와 대화를 시작했다. 결국 장개석은 중공이 그 정부와 홍군을 해산하고 국민혁명군에 들어가면 내전을 중지하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겠다고 약속했고 12월 26일에 석방된 후 비행기를 타고 남경(南京)으로 향했다. 약 반년 후인 1937년 7월 7일, 일본이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전면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하지만 이때 내전이 이미 중지되었고 제2차 국공합작이 형성되어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유격대 전술에 능숙한 중공과 정규군을 가진 국민당은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일본 침략에 맞설 수 있었다. 중국은 1945년 9월 2일에 승전국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과정에서 국민당과 중공 간의 모순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해 내전이 재발하였고, 그 결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글 사진: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이해영의 쿠이 보노] 한흥수와 박영인

    [이해영의 쿠이 보노] 한흥수와 박영인

    일제 식민지시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고통의 그것이었음은 굳이 길게 말할 필요는 없다. 해서 그 통증이란 것이 아직도 우리 삶과 앎 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 있음도 당연하다 하겠다. 일본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시기, 2차 대전이라는 세계체제 차원의 대충돌 속에서 유럽 특히 중동유럽의 극소수 ‘코리안’들이 아차 하면 목숨 줄 놓을 판에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류학자 혹은 고고학자 한흥수(1909~?)는 개성생으로 일본의 상지대학을 거쳐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수학했다. 스위스 프라이부르크대에서 박사학위를, 그 뒤 2차 대전 직후 빈대학에서 하빌리타치온 즉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되어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내가 알기에 한흥수는 독일어권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한 최초의 코리안이다. 전시에 체코 프라하에 거주하면서 빈대학 민족학박물관에 근무했다. 인류학자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흥수 연구에 따르면 그는 미주 코리안 좌파와도 연결되어 활동했다. 그들 중 핵심이 미군정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추방된 뒤 입북해 박헌영의 비서로 활동했던 엘리스 현(玄)이었다. 한흥수는 1948년 북측의 해외인재 유치작업의 일환으로 김일성의 친서를 받고 입북해 내각수상 직속의 이른바 ‘물보’(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한흥수는 한국전 말기 남로당계열과 함께 숙청되어 흔적도 없이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나치독일의 제국안전본부(RSHA) 제6부는 해외첩보부를 말한다. 이 해외첩보부의 C4국은 극동국을 말하는데 여기 국장이 페터 바이라우흐다. 이자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되는데 이와 관련해 연합국 측의 심문기록이 남아 있다. 그 뒤 바이라우흐 등의 진술에 근거, 미육군 유럽사령부 정보부가 1949년 ‘전시독일의 첩보활동보고서’라는 비밀문서를 펴냈다. 그런데 이 보고서 코리아편을 보면 한흥수는 ‘첩보원’(intelligence agent)이라고 표기되고 위 극동국이 그를 “온건 자치론자로 간주”했으며 도나트 교수와 밀접히 접촉했다고 되어 있다. 극동국이 운영한 기관 중의 하나가 동아시아연구소인데 여기 소장이 도나트였다. 또 4인으로 구성된 코리안 ‘스터디 그룹’이 있었는데 그룹의 장이 한흥수였다. 한마디로 한흥수는 나치 해외첩보부 정보원이었다는 말이다. 박영인(1908~2007)은 울산생으로 알려지기로 도쿄제대 출신의 ‘일본’ 무용가다. 일본명은 구니마사미(邦正美), 나라의 바른 아름다움, 그런 말이다. 일본정부장학금으로 당시 베를린대에 유학, 나치독일의 선전성이 설립한 당시 세계유일의 국립무용학교에서도 수학했다. 전시에는 독일군을 위한 종군위문단의 일원으로 유럽 각지에서 공연했다. 그는 당시 국내 언론에도 음악에서 안익태 못지않게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소개되었던 인물이다. 이후 미국에서도 활동하였고 일본 현대무용에서 빠질 수 없는 일본에 귀화한 코리안이다. 그런데 전시 터키 이스탄불의 미전략첩보국(OSS)이 생산한 1944년 4월 18일자 ‘일본의 터키 내 첩보 및 프로파간다 활동’이란 보고서가 있다. 뜬금없이 터키가 등장하는 이유는 전시 일본은 중립국에서 대연합국 첩보활동을 전개했는데,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처음엔 포르투갈의 리스본, 다음은 터키 이스탄불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웨덴 스톡홀름이 그 전방기지였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다양한 일본 첩보원의 명단을 밝히고 있다. 그중 “에지리, 동맹통신 베를린 지국장. 그는 흥미로운 타입의 첩보원인 구니를 특수첩보원(special agent)으로 운용하고 있다. 그는 일본 무용가로서 언제나 자신의 직업으로 위장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유럽 각국의 수도에 나타난다. 그는 그들이 데리고 있는 첩보원 가운데 가장 영리한 자 중 하나다. 그가 곧 여기로 온다.” 전시 일본의 국영통신사였던 동맹통신사의 베를린지국장 에지리 스스무(江尻進)는 동시에 박영인의 대학동문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신문협회전무이사, 일본저작권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전시유럽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한흥수와 박영인. 일인은 나치독일의, 다른 일인은 군국일본의 스파이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뛰어난 지식인들인 이들의 소명을 현재로선 들을 수 없다. 고문서를 뒤지다가 툭 튀어나오는 옛날 지식인의 깨알 같은 행적에 학문하는 즐거움보다 나라 없는 민족의 씁쓸함이 앞설 따름이다.
  • [그때의 사회면] ‘선데이서울’의 추억/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선데이서울’의 추억/손성진 논설고문

    “누드 사진이 판치는 요즘 세대들에겐 다소 낯선 풍경처럼 촌스러운 기억이라 말할지 모르나 그땐, 정말 그땐 ‘선데이 서울’ 하나만으로도 젊음은 보상됐었다.”(서울신문 2005년 7월 21일자) 1960년대 말은 대중 주간지 시대의 막을 올린 때였다. ‘주간중앙’, ‘선데이서울’, ‘주간조선’, ‘주간여성’, ‘주간경향’이 잇따라 창간했다. 그러나 잡지마다 지향점이 다르긴 했지만 “좁은 시장에서 독자 쟁탈을 위한 안간힘으로 저속, 퇴폐화했다”는 어느 교수의 지적처럼 나오자마자 ‘옐로 페이퍼’라는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동아일보 1968년 10월 15일자). 그런 상황에서도 주간지들은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신문 지면은 8쪽 내외에 불과했고 특별한 오락거리도 없던 시대였다.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의 브로마이드를 눈요깃감으로 실은 주간지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규제는 계속돼 도서잡지윤리위원회는 주간지의 나체 사진이 성적인 흥분을 자극한다며 게재를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치부가 드러난 중견화가의 누드화를 실어 예술과 외설을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동아일보 1970년 4월 20일자). 주간지들이 실은 관상이나 주간 운수도 미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았다. ‘선데이서울’은 그 시절 기준으로도 ‘빨간책’으로 매도할 잡지는 아니었다. 사회 이면을 파헤친 건전한 기획 기사도 많았다. 볼거리 많은 주간지들은 뭇 남성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장거리 여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선데이서울’은 창간호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6만 부가 두 시간 만에 매진됐다. ‘선데이서울’을 사려는 가판 소년들 때문에 판매소 현관문 유리가 깨지는 소동도 벌어졌다. 인기는 더욱 치솟아 1978년 신년호는 판매 부수 23만 부를 돌파했다. 황규관 시인은 ‘선데이서울’이라는 시에서 “(선데이서울은) 한때는 내 經(경)이었다”고 고백했다. 영화 ‘썬데이 서울’의 감독 박성훈은 “모든 매체가 ‘지강원 사건’을 매도할 때 ‘선데이서울’만이 그 이면을 캐고 또 다른 해석을 하였다. 이런 ‘선데이서울’은 성장기의 나로 하여금 생각하는 폭을 넓히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선데이서울’은 초창기에는 직장 단위로 선발대회를 열어 은행을 비롯한 일반 직장의 미녀를 표지모델로 썼으며 이들은 모임을 만든 적도 있다. 1988년 3월 ‘선데이서울’은 지령 1000호를 맞이했는데 그동안 표지모델로 등장한 사람이 800명이 넘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선데이서울’도 시대의 변화로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1991년 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국가기념일 지정 의미… 피해 진상 규명·보상 위해 더 노력”

    “국가기념일 지정 의미… 피해 진상 규명·보상 위해 더 노력”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10·16)로 지정됐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유신 독재에 맞서 부산과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학생들이 시작하고 시민들이 참여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이끌었지만, 전두환 정권이 이어지면서 독재의 사슬을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동아대 2학년 학생이던 당시 부마민주항쟁의 불씨를 지핀 주역 중 한 명으로 수년 전부터 꾸준히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온 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은 지난 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감격스럽지만 한편으론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 이듬해인 1980년 5월 검거돼 모진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한쪽 무릎이 불편하다는 유 구청장은 “우리가 아픈 과거를 제대로 규명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힘줘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번 국가기념일 지정이 어떤 의의를 갖나.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종식을 가져온 민중항쟁으로, 그동안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 전두환 신군부에 항거한 5·18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 집권을 끝낸 6·10민주항쟁에 비해 소외돼 그 역사적 가치에 준하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이를 딛고 공식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게 된 신호탄인 셈이다.” -오는 16일 첫 부마민주항쟁 기념일에 특별한 계획이 있나. “창원에서 열리는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나서 처음으로 정부 주관으로 진행되는 행사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당시 민주항쟁에 함께했던 동지들과도 만날 계획이다.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기에 평소에는 만나기 쉽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다 같이 모여 회포를 풀기로 했다.” -동료들과 이번 국가기념일 지정 소식을 듣고 어떤 얘기를 했나. “당시 부산대 학생이었던 신재식, 김종세, 정광민과 동아대 학생이었던 강명규, 이동관, 김백수 등과 가끔 안부를 묻는다. 지난달 17일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이 이뤄지면서 모처럼 연락을 나눴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젊은 날을 회상하며 그 시절 겪었던 아픔, 상처 등을 서로 위로했다. 남은 과제인 피해 진상규명과 적절한 피해자 보상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나가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여전히 진상규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2010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부마민주항쟁 당시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인정했지만 전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2013년 5월에 ‘부마항쟁보상법’(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고, 2014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이후 조사단이 내게도 여러번 찾아와 관련 내용을 조사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수형기록 등 관련 자료가 보존돼 있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이후 조사위에서 해당 군부대를 찾아가서 가까스로 일부 자료를 찾아냈다고 들었지만 항쟁 전 과정에 대한 재조명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앞으로의 과제는.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기간이 올해 말 종료를 앞두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 지난달에 ‘부마항쟁보상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다. 개정안은 부마민주항쟁의 정의를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을 전후해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항쟁 참여자의 폭도 넓혔다.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간을 연장하고 조사권을 강화하는 등의 내용도 담겼다. 하루빨리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이유다. 또 국가로부터 인권을 침해받고도 외려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등의 합당한 보상도 진행돼야 한다. 이 밖에도 부마민주항쟁의 위상에 걸맞은 기념관도 건립해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부마민주항쟁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바로 세워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향후 헌법 개정 시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이 다른 민주화운동들과 함께 헌법 전문에 담길 수 있도록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희생정신이 후대에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배임 혐의’ 황창규 KT 회장 밤샘 조사…혐의 대체로 부인

    ‘배임 혐의’ 황창규 KT 회장 밤샘 조사…혐의 대체로 부인

    고액을 들여 경영고문을 위촉한 뒤 각종 로비에 이용한 혐의로 고발당한 황창규 KT 회장이 경찰에 출석해 20시간 넘는 조사를 받았다. 황 회장은 혐의를 대체로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11일 오전 7시 10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 출석한 황 회장은 12일 오전 3시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배임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한 황 회장은 조사가 끝난 뒤 ‘어떤 점을 소명했느냐’, ‘의혹을 인정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경찰청을 빠져나갔다. 경찰은 황 회장을 상대로 경영 고문을 위촉한 경위와 이들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황 회장은 자신의 혐의를 대체로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황 회장은 2014년 취임 후 정치권 인사, 군인과 경찰, 고위 공무원 출신 등 14명을 경영 고문으로 위촉해 고액의 급여를 주고 각종 로비에 이들을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올해 3월 황 회장의 업무상 배임과 횡령, 뇌물 등 의혹을 수사해 달라며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한 KT 새 노조와 약탈경제반대행동은 횡 회장이 자문료 명목으로 20여억원의 회삿돈을 썼다고 주장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부산교육청, 공·사립 중등교사 428명 선발

    부산시교육청(교육감 김석준)은 공·사립 중등교사 428명을 선발하는 내용을 담은 ‘2020학년도 공·사립 중등교사 임용시험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12일 부산시교육청에 따르면 공립은 중등교사 27과목 289명과 특수중등교사 6과목 38명 등 327명이다. 사립은 29개 법인 22과목 101명이다.지난해보다 공립은 73명, 사립은 25명 늘어났다. 이번 시험에는 29개 사립학교 법인이 부산시교육청에 임용시험을 위탁했다. 시험을 위탁한 사립학교 법인 가운데 16개 법인은 ‘공·사립 동시지원 제도’에도 신청했다. 이 제도는 부산시교육청이 사립학교의 교사 채용난을 해소하고 지원자의 선택권을 넓혀주기 위해 지난 2017학년도 시험부터 도입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부산시교육청 공립학교 교사(1지망) 임용시험에 지원한 사람 중 희망자는 2지망으로 이들 사립학교 법인에도 지원할 수 있다. 인터넷 원서접수는 21일 오전 9시부터 부터 25일 오후 6시까지며 1차 시험은 오는 11월 23일 치른다. 1차 시험 합격자 발표는 12월 31일,2차 시험은 2020년 1월 21∼22일, 최종 합격자 발표는 2020년 2월 7일 이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시교육청 홈페이지(http://www.pen.go.kr/) ‘고시/공고’란의 공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이종락의 기업인맥 대해부](94) 경영진 교체 등 승부수 띄운 넥슨, 새로운 성장동력 찾아낼까

    [이종락의 기업인맥 대해부](94) 경영진 교체 등 승부수 띄운 넥슨, 새로운 성장동력 찾아낼까

    넥슨 일본 마호니·국내 이정헌 대표 체제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경영진 대폭 교체‘괴짜’ 허민 고문, ‘구원투수’로 영입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는 넥슨은 단순 명료한 수직적 지배구조를 지닌 회사다. 지난해 연매출이 2조 5296억원에 이를 정도로 회사가 커졌지만 국내 대기업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열사 간 순환출자는 없다는 뜻이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덩치를 키운 기업답게 넥슨은 NXC 아래 총 70 여개의 종속회사가 있다. 맨 위에 지주사인 NXC가 있고 그 아래에 자회사인 넥슨 일본법인, 다시 그 밑으로 손자회사인 넥슨코리아, 넥슨아메리카 등이 위치한다. 넥슨이 지난 해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인 매출은 약 1조 7939억원. 전체 매출의 약 71%에 달할 정도로 해외법인들의 역할이 컸다. 국내 온라인 게임업계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넥슨은 지난 10월 경영진을 대폭 교체했다. 오웬 마호니 넥슨 일본법인 대표와 이정헌 넥슨코리아 대표를 제외하곤 4명의 등기이사들을 새로 임명했다. 올해초부터 불거졌다가 무산된 회사 매각 등 어수선한 사내 분위기를 다잡고 제2의 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승부수인 셈이다, 오웬 마호니(53) 대표는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아시아학을 전공한 뒤 15년 이상 게임업계에 몸을 담고 있다. 온라인게임의 대명사로 불리는 EA(Electric Arts)에서 사업개발 담당 수석부사장으로 일하다가 2010년 넥슨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넥슨 일본법인 최고재무관리자(CFO)를 거쳐 지난해 3월 넥슨 대표를 맡았다. 넥슨의 국내 법인은 이정헌(40)대표가 이끌고 있다. 서울 인헌고 출신인 이 대표는 지난 2003년 넥슨코리아 게임기획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퍼블리싱QMx팀장, 네오플 조종실 실장, 넥슨코리아 피파실장과 사업총괄 부사장을 역임하는 등 사업실무부터 사업총괄 임원을 거친 사업분야 전문가다. 지난해 1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다. 게임의 지식재산권을 활용한 마케팅에 실력을 발휘했는 데 ‘피파온라인3’의 출시를 이끌어 국내 PC방시장에 안착하는 데 기여했다. 넥슨이 모바일게임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때 이를 주도했다. 박지원 전 대표가 숫자에 능하고 냉철하고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은데 비해 이 대표는 사람과 조직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평이다.강대현(38) 넥슨코리아 부사장은 대구 청구고를 나와 고려대 이과대를 중퇴했다. 기술로 예술 분야의 발전을 이루는 접점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병역 특례를 위해 여러 게임회사에 지원해 합격했는데 2004년 넥슨을 선택했다. 강 부사장은 “면접 과정에서 알고리즘의 중요성을 알고 관심있어 했고, 넥슨 게임이 다른 회사 게임보다 좀 더 대중적이고 다채롭다고 느꼈기 때문에 넥슨에 입사했다”고 밝혔다. 네오플 던파개발실장과 넥슨코리아 라이브본부장을 역임했다. 이승면(43) 재무관리본부장은 삼일회계법인에서 근무한 재무 전문가다. 넥슨코리아가 넥슨 일본법인의 상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제회계기준 도입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지난 2008년 회사를 옮겼다. 대일외고와 연세대 인문학부 출신이다. 지난 8월 넥슨코리아 등기이사에 오른 이홍우(42) NXC사업지원실장은 금정고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학과 출신인 김정주 NXC 대표의 직속 후배다. 넥슨코리아에 게임 개발자로 입사했다가 퇴사한 뒤 2006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법무법인 정평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2010년 넥슨코리아 법무팀장과 실장을 맡았다.정석모(39) 넥슨코리아 최고사업개발책임자(CBDO)는 넥슨 게임을 좋아하고 콘텐츠 사업에 관심이 많아 2007년 넥슨 일본법인에 입사했다. 스튜어드파트너스 자산운용팀장과 VIP자산운용 글로벌투자팀장을 역임한 자산운용·투자 전문가다. 김정주 대표는 지난달 허민(43) 원더홀딩스 대표를 ‘외부’ 게임개발 고문으로 영입했다. 허 대표는 넥슨에 연간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안겨주고 있는 던전앤파이터의 개발자다. 김 대표는 2008년 허 대표가 창업했던 네오플을 3800억 원에 사들이면서 연매출 규모를 3500억 원 정도로 늘려 게임업계 1위로 올라섰다. 또 2015년 7월 NXC를 통해 제3자 배정 신주를 발행받는 방식으로 위메프에 1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했다. 허 고문은 넥슨 코리아의 임원은 아니지만 게임 개발 전반에 관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허 고문은 부산 대동고와 서울대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뒤 게임회사 네오플을 차렸다. 넥슨에 회사를 매각하고 미국으로 떠나 버클리음대에서 공부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네오플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프를 만들었다. 초기에 투자자로서만 참여했으나 나중에 대표이사를 맡아 2년 동안 경영을 총괄했다. 한국 최초 독립야구단인 ‘고양원더스’를 만들어 구단주를 맡았고 현재 프로야구 키움 히어로즈 이사회 의장이다. 37세란 늦은 나이에 미국 독립야구단인 락앤드볼더스에 입단해 투수로 활동하는 등 ‘야구광’이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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